태조 왕건 <제 139회>
<줄거리>
세 살배기 아들이 급사하자 수인(왕건의 셋째부인)은 법당에서 기도에 정진했다는 오씨(왕건의 둘째부인)를 의심한다. 왕건은 태자 태의 죽음 앞에서도 정윤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수인을 지켜보며 서둘러 정윤을 정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한편 백계산 옥룡사에 머물며 경보를 설득하던 견훤과 최응에게 경보는 자신의 갈 길을 일러주는데....
씬 송도 황궁 수인의 유모의 처소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왕건이 그렇게 서있고 오씨가 보고 있으며 수인이 절규하고 있다.
수인 태자, 숨을 쉬어 보시오. 태자.... 어미오... 숨을 쉬어 보시오?
왕건 ...........
오씨 ...........
전의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어쩔 줄을 모른다. 수인의 울부짖음은 계속되고 있다.
수인 제발 눈 좀 떠보시오, 태자? 여기 폐하께서 오시었소. 어미도 왔어요. 눈 좀 떠보세요? (하다가) 폐하... 우리 태자 좀 살려주시오소서. 살려주시오소서, 폐하....
왕건이 체념처럼 전의에게 묻는다.
왕건 어떻게 된 것인가? 아이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전의 폐하... 망극하옵니다. 어리신 태자마마께오서 심장을 멈추셨나이다.... 숨을 거두셨나이다. 폐하...
모두들 ............
수인 이럴 리가 없다. 우리 태가 이렇게 죽다니...? 거짓말이다. 앓기 시작한지 이틀만에 이럴 수가 있는가? 이렇게 죽을 리가 있는가 말이다. 사람 목숨이 이렇게 가벼울 리가 없다. 나는 믿지 못하겠노라. 이 일을 믿지 못하겠노라.
오씨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폐하? 어떻게 이런 일이...?
왕건 (한숨쉬며 한참을 말이 없다가) 아이가 숨을 거둔 것이 확실한가?
전의 예, 폐하....
왕건 (다가가 주검을 본다) 오오... 안타까운지고... 너무도 안타까운지고..
수인 폐하..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사옵니까? 불과 이틀만에 어떻게 사람 목숨이... 이리도 허망하게 가버릴 수가 있사옵니까? 살려주시오소서, 우리 태를 살려주시오소서.
그제서야 왕건이 죽은 아이를 포대기로 가려준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받는다. 그리고 다시 유모에게 건넨다.
왕건 아이의 시신을 잘 거두어라.
유모 예, 폐하.
수인 아니되옵니다. 우리 태가 죽을 리가 없사옵니다, 폐하. 얼마나 영민한 아이이옵니까? 우리 태자야말로 유일하게 정윤이 될 수 있는 그런 아기였나이다. 그런 태자가 죽을 리가 없사옵니다.
오씨 .....(기가 막히다)....?
왕건 .........?
수인 그럴 리가 없사옵니다. 죽을 리가 없사옵니다, 폐하. 이상하지 않사옵니까? 멀쩡하던 아이가 왜 이렇게 갑자기 죽사옵니까? 왜 말이옵니다.
오씨 .........(수인의 발악이 예사롭지 않음에 긴장한다)
왕건 어서 아이의 시신을 물리거라. 어서..
유모 예, 폐하..
수인 아니되옵니다, 아니되옵니다....
왕건 부인, 진정하시구려. 나도 가슴이 아프오. 그러나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미 어린 태자는 우리 곁을 떠난 것입니다.
수인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없사옵니다.
왕건 상궁들은 무얼 하느냐? 어서 부인을 뫼시고 가거라. 어서...
대전내관 어서 뫼셔가시오, 김상궁.
김상궁 예... 마마, 가시오소서, 마마...
수인 아니된다.. 아니된다..... 우리 태를 어디로 데려가는고...? 어디로 데려가는고..?
아이의 시신이 그렇게 거두어진다. 그리고 수인은 발버둥치면서도 상궁들에게 부축되어간다. 오씨는 그저 한숨만 쉰다.
왕건 부인도 그만 가 보시구려.
오씨 예, 폐하.. 너무도 가슴이 아프옵니다.
왕건 가 보시구려.... (대전내관에게) 대전으로 가자.
대전내관 예, 폐하.
왕건도 그렇게 천천히 그곳에서 자리를 뜬다. 오씨가 그렇게 보고 있다. 홀로 어쩔 줄을 모르며 서성거리는 그 모습에서... 디졸브
씬 대전 (밤)
왕건이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왕건 (도리질한다) 사람의 목숨이 참으로 덧없는 것이로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가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충주부인도 그렇지 그토록 갓난것을 데리고 당치도 않은 정윤에 욕심을 내었단 말인고.. 이런... 답답하구나.. 참으로 답답하구나... 황실이 왜 이렇게 되었는고... 딱한 일이다. 다들 딱한 일이야.
씬 오씨의 처소 외경
씬 동 처소 안
오씨와 박상궁이 마주해 있다. 오씨는 계속 긴 한숨을 내쉰다.
오씨 가슴이 왜 이리 답답한지 모르겠구먼... 어떻게 그 어린 생명이 그렇게 순식간에 가버릴 수 있단 말인가?
박상궁 그게 다 하늘의 벌이 아니겠사옵니까? 넘볼 것을 넘봐야지. 이제 불과 세살 밖에 아니되신 태자분을 두고 정윤을 생각하시다니...
오씨 이 사람아, 아무리 사람이 밉다 한들 그게 무슨 소린가? 자식을 잃은 어미가 아닌가?
박상궁 하오나, 너무 지나치시지 않았사옵니까? 차례를 보아도 그렇고 인륜으로 보아도 어디 마마께 대어들 처지가 아니지 않사옵니까? 하늘도 무심치 않아서 그런 꾸중을 주신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오씨 허허, 이 사람이 그래도...? 이미 다 끝난 일이야. 다시는 그런 말을 말게.
박상궁 마마, 이제는 그 누구도 태자마마께서 정윤이 되시는 것에 대하여 하자를 걸 사람은 없사옵니다. 아니 그렇사옵니까?
오씨 결과적으로 그렇기는 하네마는 나는 마음이 무거우이. 하긴 그러하였네. 법당의 스님이 그러시더구먼. 욕심이 커져서 과보를 낳는다고 말이야. 그러나 충주부인은 너무 아니되었어. 다 그렇게 이해하고들 살아야 하는 것인데... 어찌들 일이 여기까지 왔는고...? 생각해보면 너무 서둘렀던 우리에게도 잘못은 있었네.
박상궁 그것이 왜 잘못이었사옵니까? 하실 일을 응당 하신 것이옵니다. 이제는 되셨사옵니다. 누가 감히 정윤의 자리를 운운하겠사옵니까? 아니 그렇사옵니까?
오씨 글쎄... 아무튼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네 그려. 그래...
씬 수인의 처소
수인이 울다가 지쳐 쉰 목소리로 멍하니 김상궁에게 묻는다.
수인 김상궁...
김상궁 예, 마마...
수인 우리 태의 시신이 밖으로 나갔다고...?
김상궁 그리 들었사옵니다, 마마.
수인 딱도 하시지.... 하늘님도 너무 하시지... 우리 태는 정윤이 되실 태자인데, 어찌 그리 매정하게 데려가실 수가 있는고...? (눈물을 닦으며) 참으로 복도 없으시지... 어찌 그렇게 가신단 말인고...?
김상궁 너무도 참담하옵니다, 마마. 하온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수인 말해보게나.
김상궁 나주부인 마마께오서 요즘 들어 법당에서 쉬임 없이 기도 중이시라 들었사옵니다. 쇤네는 왜 갑자기 그 마마께오서 기도에 들어가셨는지 궁금하옵니다.
수인 그게 무슨 소린가?
김상궁 기도의 종류도 여러가지가 있다 들었사옵니다. 왜 그 마마께오서 기도하신지 며칠만에 우리 태자마마께오서 갑자기 이 세상을 버리실 수 있사옵니까?
수인 .......(의심).....?
김상궁 쇤네는 의심스럽사옵니다. 혹시 좋지 않은 부적이라도 쓴 것이 아닐런지요?
수인 (눈이 독하게 커진다) 그래, 그렇다고 하였었지. 나도 하긴 그 기도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네. 그럴 수도 있지. 그 형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분이야. 알아 보아야 겠구먼, 그 영문을 내가 좀 알아야겠어.
독한 수인의 그 표정에서
씬 다시 대전
일렁이는 촛불을 보며 왕건은 계속 한숨을 쉰다. 그리고 끄덕인다.
왕건 (E) (쓴 미소) 어느새 그 많은 세월들이 다 그렇게 가버렸는고...? 그래, 자식의 일은 실은 내가 먼저 서둘렀어야 했어. (한숨쉬며) 인간이 천년만년 사는 것 같지만, 불과 이태를 살고 가는 목숨도 있지 아니한가? 생각해보면 사람 사는 것은 그렇게 여유로운 것이 아니다. 하긴.... 이제 그만 정윤의 일도 정해야 하겠구나. 그래야 할 것 같애.... 태자가 어찌할지 다음의 일은 다음 사람들이 할 것이야, 지금 내가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못된다. 내가 할 일은 삼한을 통일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것 뿐이다. 지금 생각할 것은 그것 뿐이야.
그런 왕건의 표정에서
씬 백계산 옥룡사 마당
씬 동 법당
견훤 일행들이 막 절을 끝내고 있다. 기도가 끝난 것이다. 견훤이 돌아서며 경보에게 말한다.
견훤 한 이틀 기도도 잘 올렸고, 잘 쉬었습니다, 대사.
경보 흡족하셨다면 빈도는 참으로 고맙사옵니다.
견훤 어지러운 세상을 잘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대사 같은 분들이 널리 불법을 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우리 백제국의 황도로 오시구려. 짐이 크고 좋은 사찰을 세워 드리리다.
경보 말씀 올렸듯이 빈도는 이곳에서 할 일이 많사옵니다. 언제든지 큰 일이 있으시다면 소승에게 연락을 주시오소서, 폐하.
견훤 하하하... 하기는 큰스님들은 어지러운 속세보다는 늘 이런 산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아무튼 대사께서 우리 백제국의 국사가 되셨소이다. 나라를 위해 기도 많이 해주시구려.
경보 이를 말씀이옵니까?
견훤 여기 신검이는 내 맏이이고 또 여기 금강이는 막내올시다. 황실의 대를 이을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도 크게 기억해주시구려, 대사.
경보 예, 폐하. (합장하고 신검들에게 말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배우기 전에 무릇 자식은 어버이를 공경하는 효를 배워야 하는 법입니다. 그것만 알면 나라 다스리는 일은 저절로 아시게 되옵니다.
신검 ........ (흠칫하며 몸을 사린다) 예, 대사님....
최승우 좋은 법문 같사옵니다, 대사..
능환 ........ (눈치보다가) 좋은 말씀이십니다. 여기 계신 두분 태자님만큼 효성이 지극한 분도 드무시지오. 그렇다면 우리 백제는 저절로 잘될 것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대사?
경보 사실이 그렇다면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하하....
신검 .........(의미있는 말에 뭔가 다시 당황한다.)
경보 막내 태자님께서는 아주 영명해 보이시옵니다. 허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때로는 그 영명함이 지나쳐 화가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늘 살펴보며 겸손을 배우는 것은 바로 인격을 완성하는 길이지요.
금강 명심하겠사옵니다, 대사님.
경보 자... 들 내려가시지요?
견훤 그래야겠소이다. 이보게, 사위? 이제 길을 떠나야겠다. 차비를 하게.
박영규 예, 폐하..
그들 그렇게 법당을 빠져나간다. 박영규가 앞서고 견훤이 뒤를 따르고 능환과 태자들이 따라나선다. 그리고 수행원들이 그렇게 앞서 가자 최승우가 경보를 본다. 그 눈빛이 날카롭다.
최승우 대사, 한마디만 짧게 묻겠소이다. 어제 하신 말씀 말입니다. 아직도 삼한의 주인 자리에 우리 폐하께서 아니 보이십니까?
경보 ...........(미소만)
최승우 아니 보이십니까? 백제의 앞날 말이올시다. 대사의 스승께서 도선비기에 그런 말씀까지 적어놓으셨소이까?
경보 하하하... 천하의 현자라 하는 최학사이십니다. 그 물음에 답이 있을 것이라 보십니까?
최승우 .........?
경보 허나, 이것만은 알아두시구려. 사람 사는 가장 평범하고 작은 순리가 깨어져 나가기 시작하면, 결국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한꺼번에 소리내며 무너질 것이외다.
최승우 그것이 답이오이까?
경보 그렇소이다.
최승우 어렵구려. 그것이 백제의 운명이란 말이오이까?
경보 언젠가 그런 때가 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학사께서는 보실 것이외다. 허허허.... 자, 폐하께서 벌써 많이 앞서가셨습니다. 가시지요, 최학사?
그들 그렇게 서로를 강렬하게 본다. 최승우는 그렇게 다시 견훤들의 뒤를 쫓아 나간다.
씬 동 법당 마당
견훤들이 모두 출발 준비를 끝내고 있다. 견훤이 돌아보며 경보에게 인사를 건넨다.
견훤 대사, 우리 황도에서 여기까지는 너무 멉니다. 허나, 사람을 시켜서라도 자주 의견을 여쭙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시구려.
경보 이미 빈도는 폐하와 함께 할 것이라 말씀드렸사옵니다. 언제든지 일이 있으시면 신에게 말씀 하오소서.
견훤 고맙소이다. 오늘 아주 마음이 흡족합니다, 대사. 허면 다음에 또 봅시다.
경보 조심해 가시오소서.
모두들 안녕히 계시오소서, 대사님.
경보 모두들 편한히 가십시오, 나무관세음보살....
박영규 폐하를 뫼시어라, 폐하를 뫼시어라....
견훤이 말 위에 오르면서 일행들은 부산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가기 시작한다. 경보가 깊숙이 허리를 숙여 합장을 하고는 멀어지는 그들을 본다. 그리고 얼마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을 때 최응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경보가 최응을 보며 웃는다.
경보 최씨 중에 참으로 인물이 많구려. 방금 백제의 황제를 모시고 간 사람 중에도 최씨 천재가 한사람 보이더니 그대도 최씨라고 하지 않았소?
최응 과분하신 말씀이옵니다, 대사님.
경보 자, 그대도 멀리서 보았을 것이오. 그대가 본 백제국의 견훤왕은 어떠하오?
최응 과연 인물이 비범하고 도량과 그릇이 큰 사람같사옵니다. 역시 희대의 영웅이라 할 만한 사람이옵니다.
경보 잘 보셨소이다. 나도 그리 보았소이다. 그대의 주인인 고려국의 황제와 견주어 조금도 모자라고 지나침이 없으니 두 용의 싸움은 갈 수록 점입가경이 될 것 같구려.
최응 대사님께서 백제국의 황제를 아주 잘 보신것 같사옵니다.
경보 (끄덕이며) 영웅호걸을 만나는 재미는 큰 것입니다. 견훤황제는 참으로 호걸이올시다. 아주 큰 인물이에요.
해설 경보, 그는 견훤을 아주 좋게 본 것 같다. 훗날 경보는 그의 비문에 견훤을 처음 보았던 당시를 회고해 기록에 남긴다. 그는 그 기록에 이렇게 말했다. '견훤은 장군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일을 하며 큰 뜻을 가진 인물이다. 나에게 제자 되기를 간청하며 황도에 머무르기를 부탁했으나 내가 한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 옥룡사에 있기를 바라여 그 허락을 받았다' 라고... 그리고 경보가 지금까지 최승우에게 말했던 그 수수께끼같은 말의 의미는 견훤이 훗날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 고려로 갈 때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끝까지 약속대로 백제에 남아 있었고 견훤이 백제를 떠날 때에 비로소 동행하여 고려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의 그 일들을 지금 누가 알겠는가?
경보가 웃으며 다시 최응에게 말한다.
경보 자, 이제 시주께서도 돌아가셔야 하지 않겠소이까?
최응 예, 대사님. 이제 저희들도 가 보아야겠사옵니다. 가서 폐하께 뭐라고 인사를 전하면 좋겠사옵니까?
경보 나의 스승이신 도선대사님의 예언은 아마도 이루어질 것이오. 모름지기 자신의 때를 아는 사람은 스스로 낮추고 겸손할 줄도 아는 법이오. 지금 자신을 낮추는 그 예를 계속 잘 지켜나가시라 하시오. 그것이 인사외다.
최응 깊이 마음에 삭이어 잘 전해 올리겠사옵니다. 하오면 이만 물러가옵니다. 훗날 다시 뵈올지 모르겠사옵니다.
경보 글쎄올시다.
최응 글쎄라니요..? 그건 무슨 뜻이옵니까?
경보 훗날의 약속은 사람이 다 지키기 어려운 법이오. 하물며 이 난세의 먼 훗날에 우리가 만나고 아니 만나고를 어찌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겠소? 허허허........
최응 그건 그렇겠사옵니다. 허나,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사옵니까?
경보 글쎄올시다. 자, 늦었으니 그만 가 보시구려.
최응 예, 대사님... 하오면 꼭 다음에 다시 뵙겠사옵니다.
경보 먼 길이올시다. 두 분 잘 가시구려.
두사람 예, 대사님...
그들 그렇게 합장을 하고 그곳을 떠난다. 경보는 그렇게 하염없이 보고 있다가 중얼거린다.
경보 난세에 영웅이 많이 나온다더니 저 어린 천재 또한 얼마나 아까운 인물인가? 쯧쯧쯧.... 상을 보니 남은 세월이 고작 십년이구나... 안타까운지고... 하기사 하늘이 정한 명줄을 어이하겠는고...? 나무관세음보살....
그런 경보의 표정에서
씬 그 산길 어느 곳
최응과 수행원이 함께 내려오고 있다. 그러다 최응은 다시 먼 절 쪽을 돌아본다.
최응 역시 생각대로였네. 대사께서 백제땅에 계시고 백제의 황제와 함께 하신다 하였지만 역시 우리 고려를 더 생각하고 계셨네.
수행원 그렇사옵니까?
최응 암, 분명히 말하지 않으시던가, 도선대사의 예언이 맞을 것이라고... 그 하나로 모든 대답이 다 끝난 것일세. 과연 큰 스님이실세. 당나라에서 큰 도를 이루셨다는 말이 맞네 그려. 범접하기가 쉽지 않은 스님이셨네. 큰 스님이셨어.
씬 다른 길
견훤 일행이 가고 있다. 견훤은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인다. 최승우는 별 표정이 없다.
견훤 저 경보대사가 비록 도선스님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분명하게 우리 백제를 돕겠다고 하였어. 그리고 나를 돕고 말이야. 이제부터는 우리 백제국의 국사가 되었으니 인사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아니 그런가, 이찬?
능환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미 폐하께서 국사를 뫼시었고 대사께서 허락하신 일이옵니다. 마땅히 예의를 다해야 할 것이옵니다.
박영규 당연한 말씀이옵니다. 나라의 국사라 함은 그 나라의 정신적 지주를 일컫는 것이옵니다. 정성으로 공경을 다해야할 것이옵니다.
능환 하오나 폐하.. 신은 아직도 도선대사가 고려의 왕에게 했다던 그 예언이 마음에 걸리옵니다. 삼한 통일을 고려에서 한다는 그말 말이옵니다.
견훤 하하하... 그런 예언들은 다 만들어낸 말이야.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유리하도록 적지않은 거짓말들을 하고 산다네. 더군다나 삼한 통일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보다 더한 말인들 왜 못하겠는가? 내 생각에는 도선대사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보네. 다 조작이야. 아니 그런가, 파진찬?
최숭우 아, 예... 아마도 그럴 것이옵니다, 폐하.
견훤 어디 사람뿐인가? 역사의 기록들이라는 것은 더하지. 모든 게 다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야. 승자는 제 마음대로 쓸 수가 있어. 그래서 많은 것들을 부풀리고 조작을 하지. 때로는 신화도 만들고 말이야. 어디 신화뿐인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창작해서 사실처럼 버젓이 남겨놓는 것도 역시 역사야.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러나 승자가 아니면 누가 또한 그 일을 하겠사옵니까? 폐하께서는 반드시 그 승리의 자리에 서실 것이옵니다. 반드시 그리 되셔야 하옵니다.
견훤 고맙네. 그걸 위해서 지금도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자네들 같은 사람들이 있어. 못할 게 없네.
최승우 망극하옵니다, 폐하.
신검들 .......
견훤 어차피 고려와 우리 백제의 승부일세. 신라는 이미 끝이 난 것이고... 우리 두 나라 사이에 싸움이야.
씬 송도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왕건은 여전히 생각이 많다. 그 앞에 시중 김행선과 태평, 그리고 왕유가 함께해 있다.
김행선 폐하, 어리신 태자마마께오서 불연 중에 세상을 뜨셨다 들었사옵니다. 참으로 망극한 일이옵니다, 폐하.
왕유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신들이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얼마나 황망하시옵니까, 폐하?
태평 그 일로 많은 신료들이 폐하께 위로를 드리고자 하옵니다. 허락하시오소서.
왕건 사람이 살다보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네. 자식이 죽는 것이 어디 여기 황실만의 일이겠는가? 그 이야기는 그만 하세. 어쩌면 이번 일로 하여 그동안 시끄러웠던 정윤에 관한 문제를 보다 빨리 매듭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네 그려. 이보시오, 시중?
김행선 예, 폐하.
왕건 오늘 이 자리에 경들은 부른 것은 태자를 정윤으로 정하는 문제를 이 기회에 결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더 미루어 보았자 소득 없이 의견만 분분할 것이오.
왕유 참으로 옳으신 결정이시옵니다. 그리 하시오소서.
태평 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더는 미룰 일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왕건 어차피 태자는 이제 나주부인에게서 본 무가 유일하오. 이제 나이 열 살이 되어가니 정윤으로 정한다 한들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오. 아니 그렇소이까, 시중?
김행선 폐하, 지난 날 폐하의 꾸중을 들은 이후 신들은 모두 뜻을 모아 정윤에 관한 일은 폐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기로 하였사옵니다. 그리 하시오소서.
왕건 고맙소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국론이 분열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자, 왕학사?
왕유 예, 폐하.
왕건이 비단보로 싼 상자 하나를 내어준다.
왕건 이것은 자황포요. 즉, 황제의 의대이올시다.
모두들 ........
왕건 어차피 정윤이란 내 다음의 보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손수 이것을 경에게 주니 경이 가지고가 나주부인에게 전해주시구려. 이는 짐의 뜻을 확고히 한다는 것을 대외에 알리고자 함이오.
왕유 망극하옵니다, 폐하. 영을 따르겠사옵니다.
왕건 정윤의 문제는 이것으로 매듭을 짖고 더는 왈가왈부하지를 않기 바라오. 지금으로써는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고 그 자식을 국법에 따라 다음 후계로 정하는 것이오. 이의가 없을 줄로 아오.
김행선 어찌 이의가 있겠사옵니까? 곧 조당에 알려 의식을 준비하겠사옵니다.
왕건 고맙소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조정에 인사들도 혁신적으로 개혁할 필요가 있소이다. 보다 좋은 인물들을 골라 천거하오. 능력에 맞도록 신료들이 소임을 재정리해야 될 때가 온 것 같소이다. 어찌 생각하시오, 시중?
김행선 마땅하고 옳으신 말씀이시옵니다. 내봉성과 의논하여 서로의 관리들을 엄선해서 폐하께 주청해 올리겠사옵니다.
왕건 지금은 전시체제인지라 국가의 관한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오. 태평낭중은 군의 인사도 다시금 정비하고 점검해서 내게 일러주게.
태평 예, 페하. 그리하겠사옵니다.
왕건 (두루말이를 밀어준다) 국정의 개혁과 인사의 발굴에는 황제인 내가 할 말이 꽤 있소이다. 내 뜻을 여기 적어놓았으니 참고해 주기 바라오.
김행선 예, 폐하. 마땅히 살펴 올리겠사옵니다.
왕건 허면 되었소이다. 경들이 올리는 결과를 보고 나서 조회를 열게 될 것이오. 서둘러 주시오.
모두들 예, 폐하.
왕건 왕학사는 그 자황포를 여기서 나가는 대로 지금 곧 전하도록 하오. 한번 결정된 일은 빨리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 보다 좋을 것이오.
왕유 예, 폐하.
왕건 그리고 이 자황포에 관한 이야기를 태평낭중은 술희아우게도 알려주게나.
태평 예, 페하.
왕건 자, 그만 돌아들 가 보오..
모두들 예, 폐하...
그들이 몰려간다. 왕유는 조심스럽게 비단 상자를 들고 그렇게 대전을 빠져 나간다. 왕건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다가 무언가를 끄덕인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씬 황궁길
왕유가 비단 상자를 받들어 가고 있다. 그 뒤로 내관들이 따르고 있다. 마당 전각들 곳곳에서 상궁나인들이 그 모습을 보며 긴장하고 있다. 왕유는 그렇게 의식을 행하듯 받들어 가고 있다.
씬 오씨의 처소
오씨가 왕유가 오는 것을 모른 채 태자 무와 박상궁과 함께 해 있다.
오씨 이보시오, 태자.
무 예, 어마마마.
오씨 요즘도 무예 공부를 열심히 하시오?
무 예, 어마마마. 글공부는 왕학사께서 해 주시고 무예 수업은 내군의 부장인 장수장이 해주시옵니다.
오씨 열심히 하세요. 그 장부장은 오래 전부터 폐하를 뫼셔왔던 사람입니다. 게으름을 피워서는 아니됩니다.
무 예, 어마마마.
오씨 그리고 태자의 아우가 불행하게도 숨을 거두었답니다. 나중이라도 충주부인을 보면 위로를 드리세요. 사사로이는 작은 어머니가 되십니다.
무 예, 어마마마. 그리하겠사옵니다.
그러자 보고 있던 박상궁이 또 한마디를 한다.
박상궁 마마께오서는 이처럼 후덕하게 말씀을 하시옵니다마는 충주부인마마께오서는 그렇지가 않으신 것 같사옵니다.
오씨 어허... 또 무슨 소린가? 태자가 듣고 있네.
박상궁 하오나, 마마.. 그 경황 중에서도 정윤이 되실 태자가 어찌 이럴 수 있냐는 말씀을 하셨사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옵니까, 마마?
오씨 허허, 사람하고는.... 그만하게. 이제 다 지난 일이야. 지난 일... 결국 그건 다 생각해 보면 나의 부덕의 소치야. 다시는 충주부인 얘기는 입에 올리지 말게. 이제 다 끝난 일이야, 이 사람아.
박상궁 하긴 그렇사옵니다, 마마. 끝난 일이옵니다.
오씨 명실공히 내가 황실의 어른일세. 태자에 관한 문제는 폐하께 맡기세. 생각할 수록 나도 부끄러운게 많아.
그때, 발소리와 함께 허겁지겁 나인 연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연이 (E) 마마..... 쇤네이옵니다...
박상궁 연이 같사옵니다. 무슨 일인가, 들어오너라.
연이 (들어와) 마마, 기뻐하시오소서. 지금, 왕학사께서 폐하의 영을 뫼시고 이리로 오고 계시옵니다.
오씨 폐하의 영을 뫼시고 오다니? 뜬금없이 그건 무슨 소린가?
박상궁 왕학사가 무얼 뫼셔온다는 말인가?
연이 방금 전에 내관들에게 들었사온데 폐하께오서 태자마마를 정윤으로 봉하신다 하셨다 하옵니다.
오씨 무어라...?
박상궁 틀림없는가?
연이 예, 지금 왕학사가 폐하께서 내리신 자황포를 뫼시고 이리로 오고 있사옵니다.
박상궁 마마... 드디어, 드디어 폐하께오서 큰 결단을 내리셨나 보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마마... 감축드리옵니다.
오씨 세상에...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갑자기...
오씨는 충격적인 모습으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때, 내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관 (E) 마마께 아뢰옵니다.... 동궁기실 왕학사께오서 폐하께서 내리신 영을 뫼셔왔사옵니다.
오씨 ....... (기쁨과 충격)
내관 (E) 다시 아뢰옵니다. 폐하께서 내리신 영을 뫼셔왔사옵니다.
박상궁 마마, 어서 뫼시오소서. 어서요, 마마..
그제서야 오씨는 정신을 차리며 끄덕인다. 그리고는 문을 연다. 거기, 왕유가 가득히 미소띤 모습으로 왕건이 내린 비단 상자를 들고 있다.
왕유 마마, 신 왕유가 폐하의 영을 받자왔사옵니다. 받으시오소서. 폐하께서 내리신 황제의 의대시옵니다. 자황포이옵니다, 마마.
오씨 참으로 믿기지가 않습니다, 왕학사. 궁중에 슬픈 일이 있어 몸과 마음을 겸허이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때에 폐하께서 큰 결단을 내려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왕유 정윤의 자리는 폐하 다음으로 높고 귀한 자리이옵니다. 이미 그 뜻을 세우시고 자황포를 내리셨으니 어서 받으시오소서, 마마.
오씨 참으로 고맙습니다. 자, 태자.
무 예, 어마마마.
오씨 폐하께오서 내리신 것이옵니다. 어서 무릎 꿇고 받으시오소서,
무 예, 어마마마.
무가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왕유가 그 비단 상자를 전한다. 그들은 그렇게 감격적으로 모두 보고 있다. 왕유가 그것을 전하고 뒷걸음으로 물러난다.
왕유 감축드리옵니다, 태자마마.. 곧 조회에서 이에 관한 폐하의 조칙이 내리실 것이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태자마마.
오씨의 표정은 아직도 감동 그것이다. 박상궁도 그렇고.. 그런 그들의 진한 표정에서..
씬 수인의 처소
수인이 눈물을 닦고 있다. 김상궁과 함께이다.
수인 참으로 허망하네. 세상 사는 것이 너무도 허망해.
김상궁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지난 일은 빨리 잊으시고 마음을 단단히 하시오소서.
수인 자식을 앞세워 보냈는데 무엇을 단단히 하고 말 것이 있겠는가? 그나저나 그것은 알아보았는가? 나주형님께서 왜 갑자기 그토록 법당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셨다든가?
김상궁 예, 그것은 저...
수인 자네 말처럼 흉악한 부적이라도 쓴 것이 아니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멀쩡하던 어린 태자가 왜 그렇게 속절없이 가버렸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
김상궁 하오나, 소인이 주변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나주마마께서는 하시는 일마다 시원치 않고 심란하시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기도하신 것이라 하옵니다.
수인 그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말일세. 우리가 얼마나 미웠으면 그리 하셨겠는가? 아니 그런가?
김상궁 어쨌든 겉으로는 그렇다 하옵니다.
수인 그럴 리가 없어. 무언가가 있는 것이야. 아이구... 우리 태자만 살아있었다면... 나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갔네 그려..
그때, 수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전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전내관 (E) 황제폐하 납시오.... 황제폐하 납시오......
수인 폐하께서...?
그내들이 급히 일어나 예를 취하며 왕건이 들어선다. 김상궁이 복도로 나간다. 그리고 두 사람만 남는다.
왕건 앉으시구려.
수인 예, 폐하.
왕건 (그렇게 함께 앉아)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소? 부인..
수인 (다시 울며) 믿기지가 않사옵니다. 너무도 믿기지 않사옵니다.
왕건 내게도 귀한 자식이오. 나 또한 그러하다오. 생각해보면 너무도 국사에만 바빴지 제대로 아비노릇도 해주지 못하였소. 용서하시오, 부인. 부인 볼 낮이 없구려.
수인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폐하께오서 국사에 바쁘심은 신첩도 너무 잘 아옵니다. 아이의 복이 그러한 것이지 어찌 폐하의 탓이겠사옵니까?
왕건 (손을 잡으며) 그렇게 생각하십시다. 어린 아이의 복이 그만하다고 그렇게 잊으십시다, 부인.
수인 하지만, 너무도 가슴이 아프옵니다. 얼마나 영명하고 총기가 있는 아이였사옵니까, 폐하?
왕건 나도 압니다, 알아요. 허나 이제는 이 세상이 싫어 가버린 아이올시다. 그만 슬픈 일은 잊고 보다 밝은 세상을 생각하며 살며 사십시다. 그렇게 하십시다, 부인
수인 알겠사옵니다, 폐하. 신첩이 너무 심려를 끼친 것 또한 용서하오소서.
왕건 용서랄 것이 무엇이 있겠소? 그보다도 부인... 나는 그동안 우리 태자들 중에서 정윤을 정하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신료들이 의견이 갈라지고 또 다투고 심지어는 음해하는 사태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인 .........
왕건 그러나 그래도 부인의 처지를 생각해서 뒤로 미루었소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소이다. 그래서 정윤의 자리를 큰 아이인 무에게 주기로 결정하였소이다.
수인 ............(충격)
왕건 이 문제는 뒤로 미룰 수록 나라에 좋지가 않아요. 어차피 정할 일이라면 이 기회에 정해 버리고자 한 것이오.
수인 (한참 말이 없다) 하긴 그럴 것이옵니다. 우리 태가 이미 죽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옵니다.
왕건 허허, 부인... 내 그래서 위로하고자 이렇게 온 것이 아니오?
수인 나주형님께서는 우리 태가 없어지기를 얼마나 바랬겠사옵니까? 속시원하게 그 분 소원대로 되었을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정윤도 되는 것이구요.
왕건 허허... 이런... 누가 듣겠구려. 황실의 어른으로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이오?
수인 ......... 사실이 그렇지 않사옵니까?
왕건 무엇이 그리 사실이란 말이오? 부인의 슬픈 마음은 잘 아오. 그러나 근거가 없는 음해는 아니 됩니다. 아시겠소이까? 그건 절대로 아니 됩니다.
수인 (울며) 폐하....
왕건 (자상하게 토닥거린다) 정윤을 빨리 정하는 것이 부인의 마음을 오히려 위로하는 것이 될 것이오. 잊을 것은 빨리 잊으시구려. 나는 변함없이 부인을 살펴드릴 것이오. 약속하겠소이다. 나는 결코 부인을 멀리하지 않을 것이오. 부인도 잊을 것은 다 빨리 잊으시오.
수인 폐하... 폐하....
수인은 그렇게 흐느끼며 왕건의 품에 안긴다. 왕건이 토닥거린다. 계속 토닥거린다.
왕건 그렇게 하십시다, 그렇게 하십시다, 부인...
씬 박술희 집 외경 (밤)
씬 동 집 후원
박술희와 신숭겸, 유금필이 함께해 있다. 태평과 왕식렴, 왕신도 보인다.
박술희 세상에... 그예 그 일을 결정하셨단 말입니까?
태평 예, 장군. 이미 왕학사께서 폐하의 상징이신 자황포를 무 태자께 전하여 올렸습니다.
모두들 오, 이런.... 이렇게 빠르게...
태평 이번에 이 결정은 특별히 저를 보고 박장군에게 알리라 하셨사옵니다. 이는 폐하께서 의제분들을 변함없이 자애하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박술희 (훌쩍이며 운다) 어찌 모르겠소이까? 그 문제는 이 사람이 제일 앞에서 설치며 꺼낸 이야기올시다. 저로 인해 우리 의제들이 모두 불려가 혼이 났지만 그래도 폐하께서는 은연중 우리를 기억하시고 이렇게 챙겨주시옵니다. 참으로 부끄럽구려. 할 말이 없어요.
신숭겸 그렇소이다. 폐하께서 우리 아우들을 생각하시는 뜻이 그토록 깊으신데도 우리들은 그 마음을 살펴드리지 못합니다. 안타깝고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유금필 폐하께오서 어린 태자를 잃으시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는가? 헌데, 미처 위로를 드릴 사이도 없이 정윤 문제를 결정하시고 그 결과를 우리에게 먼저 주셨네. 이런 크신 은혜를 어찌 다 갚겠는가?
박술희 (울며)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그 깊으신 뜻을 모르고... 이 놈이 어리광만 부렸습니다.
왕식렴 자, 어차피 폐하께서 다 결론을 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제일 먼저 알려주셨습니다. 그만큼 저희들을 자애하신다는 것을 또 한번 일러주신 것입니다.
왕신 이럴 수록 더욱 폐하의 마음을 살펴 헤아리는 것이 저희들이 의무일 것이옵니다. 그만큼 저희들을 믿는다 하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태평 그렇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하여 폐하께서는 또한 조정을 새롭게 혁신하시려 하시옵니다. 방금, 왕공께서 얘기하신 대로 우리가 할 일을 그저 하나도 충성이고 둘도 충성입니다. 그것 말고는 얘기할 것이 더는 없을 것입니다.
박술희 왜 아니겠습니까? 압니다. 우리들은 모두 잘 압니다. 암요, 충성밖에 없지요, 암요...
씬 황궁 길
오씨가 무를 데리고 가고 있다. 상궁들이 따르고 있다. 오씨 그렇게 어느 전각을 돌아서 가고
씬 황궁 수인의 처소
수인이 모처럼 안정을 되찾았다. 김상궁이 보고 있다가 다시 위로한다.
김상궁 폐하께오서 특별히 오시어 마마를 위로하셨사옵니다. 그리고 변치 않으시겠다는 장래도 말씀하셨사옵니다.
수인 그리 하셨지.
김상궁 폐하께오서 마마를 자애하심이 남다르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옵니다, 마마.
수인 고마우신 일일세. 그래도 그나마 친히 오셔서 말씀을 주시니 한결 슬픔이 걷히는 것 같네. 하지만, 나주형님의 무를 정윤으로 정하셨다니 참으로 놀랐네. 너무 급작스런 결정이 아니신가?
김상궁 그건 그렇사옵니다.
수인 허나 어쩌겠는가? 나로서는 아무런 자격도 없네 그려. 말할 입장도 이제 아니되고 형님께서 아주 신이 한참 나셨겠구먼.. 얼마나 좋아하시겠는가?
바로 그 무렵, 소리가 들려온다.
박상궁 (E) 마마... 나주부인마마 납셨사옵니다.....
수인 뭐라고...? 형님이..?
씬 그 수인의 처소 밖
오씨가 그렇게 서 있다. 박상궁이 다시 아뢴다.
박상궁 마마.. 나주부인마마와 태자마마께서 납셨사옵니다.
그러자 처소의 문이 열리고 수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여인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본다. 잠시 어색한 긴장이 지나가고 무가 인사를 올린다.
무 마마, 무이옵니다.
수인 어서 오시오, 태자. 그렇지 않아도 소식을 들었습니다. 폐하께오서 태자에게 정윤의 자리를 정하셨다 들었습니다.
무 예, 마마.
오씨 (손을 잡으며) 이게 모두 아우님께서 걱정해주신 덕일세. 들어가세. 차한잔 주지 않겠는가?
수인 들어오시오소서.
수인은 아직도 차갑다. 그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면
씬 다시 수인의 처소
무가 수인에게 큰절을 올린다.
무 작은 어머님. 얼마나 슬프시옵니까?
수인 작은 어머님...?
무 작은 어머님께서 아드님을 잃으셨고 소자는 아우를 잃었사옵니다. 우리는 다 같은 한 아버님의 자식이옵니다.
수인 ......
무 어머님께서는 앞으로 충주부인마마를 친어머니처럼 모시라 하셨사옵니다. 소자는 그리 뫼실 것이니 허락해 주오소서.
수인 ...... 뭐, 그렇게 까지.... 말씀은 고맙소마는...
오씨 이보게, 아우님. 내가 먼저 사과함세. 위삿람으로서 점잖치 못하게 우리 무를 앞세워 정윤의 자리를 섣불리 얻으려 하였네. 그것이 자네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하였을 것이야.
수인 ......
오씨 허나, 우리가 궁중에서 서로 다투고 뜻을 모으지 못한다면 그 많은 황실의 아랫것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내가 먼저 사과를 함세. 받아주시겠는가?
수인 ....... (입술을 깨문다, 마음이 풀어지고 있다)
오씨 아우님. 우리 옛날처럼 잘 지내세. 그렇게 하세.
수인 예, 형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 또한 어찌 잘못을 말씀드리지 않겠사옵니까? (눈물을 흘리며) 너무 욕심이 컸사옵니다. 분수없이 욕심만 부렸사옵니다. 그 욕심이 너무 과하여 하늘이 벌을 주셨나 보옵니다. 그래서 우리 태를 데려간 모양이옵니다, 형님...
오씨 그게 무슨 말인가, 아우? 그건 어쩔 수 없는 병이었네. 자네 잘못이 아니야.
수인 형님....
오씨 잘 지내보세. 정말 잘 해보세, 우리..
수인 형님...
그렇게 화해하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씬 조당 외경 (낮)
씬 동 조당 안
문무신료들이 가득히 모였다.
왕건 경들은 들으시오.
모두들 예...
왕건 짐은 오늘 몇가지 당면한 우리의 현실들을 다시 정리하고자 하였소이다. 먼저, 그동안 소홀히 하였던 인재들에 관하여 새로이 보강하고 추천하라고 광평성과 내봉성, 그리고 순군부에 명하였소이다. 시중은 말해보오.
김행선 예, 폐하. 먼저, 내봉성에서 천거한 두 문신을 폐하께서 재가 하셨으므로 여기 입조하게 하였나이다. 두 분은 앞으로 서시오.
왕규,추언위 예... (앞으로 나선다)
김행선 내봉성경에 새로이 제수된 문신 왕규이옵니다.
왕규 왕규라하옵니다, 폐하. 이토록 출사를 허락하시니 백골난망이옵니다. 충성을 다하겠사옵니다, 폐하.
김행선 또한 이쪽은 그 옛날 오월국에서 큰 벼슬을 지내던 문신 추언위라 하옵니다. 이번에 창부령을 제수하셨사옵니다.
추언위 신 추언위 삼가 인사올리옵니다. 출사를 허락하셨으니 심신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이 조정에 충성하겠사옵니다.
왕건 고맙고 반갑구려. 잘들 해 주시구려.
두사람 예, 폐하.
김행선 이 두 사람 뿐 아니라 많은 관부에 새로운 관리들을 엄선하여 적소에 재배치를 하고 있사옵니다. 또한, 그동안 조정일을 보던 여러 신료들 중에서 인재들을 골라 순군부로 이동 중이오나 아직 매듭을 짓지는 못하였사옵니다. 곧 정하여 올릴 것이니 살펴헤아려 주오소서.
왕건 알겠소이다. 그리 하십시다. 다시 말하거니와 지금은 잠시 백제와 우리가 서로의 힘을 비축하며 다시 싸울 날을 보고 있는 중이올시다. 이럴 때일수록 나라의 힘을 다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원로들은 들으시오.
원로들 예, 폐하.
왕건 짐은 이번에 내 아우가 새로이 세워놓은 저 평양성을 서경이라는 이름답게 또 하나의 도읍지로서 만들려 하오. 그러자면 그곳에도 경륜이 있는 인재들이 필요하오. 원로분들은 모두 그곳으로 가서 새로운 도읍을 세우는데 힘들을 써주기 바라오. 먼저 전 시중 박지윤 공이 여러 원로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셨으면 하오.
박지윤 아, 예 폐하...
왕건 병부령 원극유 공도 그리로 가도록 하오. 광평성의 박질 공도 그리로 가오.
그들 예, 폐하.
그러나 대답하는 그들의 표정은 모두 참담한 표정들이다.
왕건 원로들이 모범을 보여야 나라가 바로 서는 법이오. 경륜이 있는 원로분들이 가서 자리를 잡아 주시면 그곳 일이 보다 쉽게 풀리리라고 봅니다. 열심히들 해주기 바라오.
그들 예, 폐하..
왕건 그리고 또 있소이다. 짐은 이번에 태자를 정윤으로 정하는 문제를 매듭짓기로 하였소이다. 내 아들 태자 무가 정윤이 될 것입니다. 신료들 중에 이의가 있는 분들은 말하시오.
김행선 지극히 마땅하신 결정이시옵니다.
모두들 마땅하신 결정이시옵니다.
왕건 좋소이다. 그렇다면 해당 관부에서는 의식을 갖추고 정윤을 책봉하는 의례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오.
모두들 예, 폐하...
왕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정신들을 차리고 다음에 다가올 백제와의 대 결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또한 제국의 미래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올시다. 서경은 서경답게 원로분들이 잘해주시고 대 백제전은 또 나름대로 우리가 확실하게 대책을 세울 것입니다. 이번에 정윤에 책봉이 끝나는 대로 원로분들도 임지로 가시고 또 새로운 관료들도 정하게 될 것입니다. 서둘러주기 바랍니다.
모두들 예, 폐하...
씬 황궁 뜰
흥겨운 궁중 아악소리가 들려온다. 정윤에 봉해지는 의식이 집전되고 있다. 문무신료들이 모두 모였다. 그 중앙에 왕건과 두 부인이 앉았고 복지겸과 내군들이 삼엄하게 열을 지어섰다. 다음의 황제가 될 정윤을 책봉하는 날인 것이다. 숱한 깃발들이 끝도없이 펄럭이고 있고 의식을 알리는 대북소리가 온 궁궐 안을 울리고 있다.
김행선 오늘은 폐하께오서 대 고려국 정윤을 책봉하시는 날이올시다. 전 대소신료들은 국법에 따라 치뤄지는 이 의식을 경건하게 임하기를 바라오.
모두들 예......
김행선 허면, 정윤께서 황제폐하께 인증을 받는 의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태자마마를 뫼시시오.
복지겸 태자마마를 뫼시어라...
도열해 있는 군사들 사이로 태자 무가 내군들에게 인도되어 온다. 무는 그렇게 신료들 앞을 한참 지나와서 황제인 왕건의 옥좌 밑 계단 아래 선다.
김행선 태자께서는 폐하께 예를 올리시오.
그러자 왕유가 나서서 태자 무의 절을 돕는다. 무는 네 번을 절한다. 그리고 다시 읍하여 선다.
왕건 태자는 들어라.
무 예. 폐하...
왕건 짐은 오늘 태자인 무 너를 정윤에 봉하였음을 만조백관에게 알리고 있노라. 무릇 정윤은 짐의 다음 보위를 잇는 것인바 곧 이 나라 황제가 될 것임을 정함받는 것이니라. 무릇 문무의 모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지금부터 백성을 다스리는 이치를 잘 배워야 할 것이니라. 오늘의 일을 명심할 지어다.
무 예, 폐하....
왕건 정윤의 옥새를 전하여 주어라.
대답소리와 함께 김행선이 내군들이 받들어온 옥새함을 건네받아 다시 무에게 전한다. 무가 두 손을 높이 올려 그것을 받아 다시 왕건에 예를 표하고 마련된 곳에 놓는다.
왕건 자, 이로써 태자 무가 정윤이 되었음을 천하에 공표하오. 경들 또한 아직 나이 어린 정윤을 잘 도와 제국의 앞날에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오.
모두들 예, 폐하.....
김행선 황제폐하 , 만세- 대 고려제국 만세-- 만만세---
함성과 만세소리들이 계속 이어진다. 그 위로
해설 정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황태자를 일컫는 것이다. 이때에 무의 나이는 아홉 살 서기로는 921년 12월의 일이었다. 정윤으로 책봉된 무는 이후, 고려 제 2대 황제가 되는 혜종 바로 그 사람이다. 고려사 절요에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찍이 무의 나이 일곱살 때에 태조는 그가 왕통을 계승할 만한 덕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어머니 오씨가 미천하여 책봉을 못하다가 오래된 상자에 자황포를 넣어서 내려 주며 그 뜻을 정하였다. 오씨가 그것을 대광 박술희에게 보이니 슬희가 알아차리고 무를 세워 정윤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오씨가 미천하다는 그 기록은 아마도 후세에 정치적인 이유로 하여 덧 씌워진 말인 듯 하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오씨의 아들 무는 정윤이 되었다. 그리고 왕건은 다음 후사를 정해 놓으면서 다시 한번 새로운 나라의 도약을 꿈꾸기 시작한다.
<140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