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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대본

[태조 왕건] 149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7.12.06|조회수2,631 목록 댓글 0

태조 왕건 <제 149회>


<줄거리>


신료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치욕스러운 화친조건을 수락하고, 애써 담담해하는 왕건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내봉성령 최응은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왕건은 몇 몇 신료들을 제외한 모든 장졸들에게 비밀로 한 채 어둠이 내리자 백제군영으로 향하는데... 한 편 백제의 책사 능환과 종훈은 이 기회에 왕건을 암살하자고 견훤에게 주청한다. 드디어 양측의 팽팽한 긴장 속에 왕건과 견훤은 마주하게 되는데...


 

 씬  조물성 외경

 

유금필  (E) 도대체 그걸 협상이라고 하고 온 것인가?

 

씬  동 조물성 안 군영

 

        제장 회의가 열리고 있다. 왕건의 주재하에 최응, 홍유, 배현경,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 김락, 윤신달, 김언, 염상, 최지몽, 왕신, 박수문, 박수경 형제, 신방들이다. 유금필이 거세게 따지고 있다.

 

유금필  우리 제장들이 그만큼 상부라 칭하는 것에 대하여 염려를 하였어. 헌데 그것을 허락하고 왔단 말이오? 이런 치욕적인 협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최응    ............ (눈을 감고 아픔을 참고) 

신숭겸  소장이 생각해도 부끄러운 합의를 하고 온 것 같소이다. 이보시오, 내봉성령, 겨우 그런 결론을 얻어내고자 적진까지 다녀왔단 말씀이오?

최응    ...........

박술희  그것은 굴욕이옵니다, 폐하. 가시지 마오소서. 우리 장졸들이 알게되면 어찌되오리까? 두고두고 역사에 남을 치욕이 될 것이옵니다.

왕건    왜들 이러는가? 내봉성령이 다녀온 것은 짐의 영에 의해서 일세. 어찌 내봉성령을 그리들 몰아 부치는가?

배현경  이 결정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옵니다. 백제의 왕에게 어찌 폐하께서 스스로 아랫사람임을 칭하신다 하옵니까? 재고하여 주시오소서.

홍유    폐하, 신 또한 그리 생각하옵니다. 차라리 싸우게 해 주시오소서.

왕건    저들이 사직을 내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나를 보고 만인이 지켜보는 데 무릎을 꿇으라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나이의 높고 낮음을 따져서 그 대우를 해 달라는 것일세. 그리고 서로를 간섭하지 말자는 것 뿐이야. 

염상    불가하옵니다, 폐하. 그것은 듣기 좋은 표현일 뿐, 내용은 그렇지가 못하옵니다. 그 자체가 이미 항복이 아니겠사옵니까?

김언    불가하옵니다, 폐하. 다시 한번 재고하여 주시오소서.

왕건    (더 역정을 내며) 지금 내군의 복지겸장군도 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소. 또한, 내봉성령도 이미 괴질이 중증에 달하고 있어. 수많은 장졸이 약을 달라며 죽어가고 있단 말이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들 중에서 약을 구할 수 있는 자 있으면 나와 보라. 의미 없이 싸우다 죽어 목숨을 잃고 나라를 잃음이 당연한 것인가? 아니면 잠깐의 부끄러움을 참고 많은 목숨과 나라를 구함이 맞는가? 그대들은 도대체 무얼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제장들  ................

왕건    이 난국을 수습하고자 어려운 곳을 다녀온 내봉성령을 위로는 못해줄 망정 어찌 이리들 핍박을 한단 말인가? 지금 저 얼굴을 보라. 내봉성령도 이틀을 더 버티지 못하게 되어 있어. 언제 어느 때에 그대들의 목숨이 또 이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싸운다고....? 지금 어느 병사가 기운이 있어 싸울 수 있단 말인가? 말해보라. 말들을 해보아.

 

        모두들 댓구를 하지 못한다. 참담한 그들의 면면이 하나씩 스쳐간다. 최응의 병증은 더욱 심각해 보인다. 그는 주저앉을 듯 후들후들 떨고 있다. 그래도 유금필은 다시 나서며 말한다.

 

유금필  신 유금필 다시 아뢰옵니다. 전장에 나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은 장수의 본분이옵니다. (통곡하며) 다시 한번 아뢰옵니다. 싸우게 하여 주시오소서. 차라리 싸우다 죽게 하여 주시오소서, 폐하.

왕신    유장군, 그만 하십시오. 폐하께서는 더욱 더 마음이 아프고 찢어지실 것이옵니다. 허나, 선택의 길이 없어 정하신 일이오이다.

박수문  (역시 울며) 폐하, 차라리 신들을 먼저 죽으라 명하시오소서. 오늘의 이 부끄러움을 어찌하옵니까, 폐하?

박수경  (울며) 망극하옵니다, 폐하.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모두들  폐하, 망극하옵니다.

 

        장내는 울음의 장으로 변한다. 고통을 참고 있는 최응의 표정이 더욱 아프고 절실해 보인다.

 

왕건    경들은 짐의 말을 잘 들으오. 세상 사는 이치는 모두 이와 같은 것이오. 한때 좋은 날이 있으면, 또 한때는 궂은 날도 있는 법이오. 어려울 때일수록 냉정해야 하는 법, 짐이 백제국의 황제를 상부라 하고 저들에게 그만한 댓가를 얻어내는 것은 바꿔 말하면 거래에 속하는 것이오. 문제는 누가 더 큰 실리를 얻는 것인가 하는 것이오. 나는 지금 명예보다 실리를 택하였소이다. 경들은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 되오.

최지몽  폐하, 폐하의 그 말씀이 실로 옳으시옵니다. 군영의 어려움은 이미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극에 달해 있사옵니다. 비록 현실이 분하고 어렵더라도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것 같사옵니다. 뜻대로 하시오소서.

유금필  폐하, 신들의 죄가 크옵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할복하게 하여 주시오소서, 폐하.

 

        유금필은 그렇게 오열한다. 모두들 침통한 그 표정 속에서 그예 최응이 중심을 잃고 흔들거린다. 최지몽이 부축한다.

 

최지몽  폐하, 내봉성령이 아무래도 병증이 심한 것 같사옵니다.

왕건    오오.. 저런. 무엇들 하는가? 내군들은 속히 내봉성령을 부축해 가서 쉬게하라.

 

        그러나 최응이 뿌리치며 자세를 바로 하다가 무릎을 꿇는다. 그도 울면서 말한다.

 

최응    폐하, 맞사옵니다. 더 이상의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페하를 적진으로 가시게 하는 이 죄를 용서하시오소서. 훗날 반드시 죄를 갚아 올리오리다. 반드시 갚아 올리오리다, 폐하. 통촉하시오소서.

왕건    그럴 일없네. 무엇들 하는가? 어서 내봉성령을 데려가라.

최응    죄인 최응 참으로 용서를 구하옵니다. 용서하오소서, 폐하. 용서하오소서, 폐하...

 

        그렇게 최응은 머리를 바닥에 찧고 있다. 그 이마에서 선혈이 흘러  내린다. 왕건이 다시 소리치자 내군들이 최응을 부축해
 나간다.
 

왕건    무슨 짓인가? 그만 두지 못할까? 내군들은 무얼 하는가? 어서 데리고 가라. 어서...

 

        끌려나가는 최응의 그 표정이 더욱 애처롭다. 가면서 돌아보는 그 최응의 표정에서... 디졸브

 

씬  동 성 장대, 혹은 어느 성 관아

 

        마당에서 아직도 즐비하게 처리되고 있는 병자들과 시신들을 보고 있는 왕건, 참담한 듯 하늘을 본다. 그 옆에 왕신이 서 있다.

 

왕건    이보게, 아우.

왕신    예, 폐하

왕건    일이 묘하게 되었네. 저쪽에서는 볼모를 교환하자고 하였어. 그것도 양쪽 모두 황제의 일가들로서 말이야.

왕신    예, 폐하.

왕건    아우가 이 전장에 나온 것을 저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아. 어찌하면 좋겠는가?

왕신    신은 형님 폐하의 그 깊으신 마음을 잘 아옵니다. 백제국에서도 황제의 일가가 온다니 신이 가는 것 또한 당연하옵니다.

왕건    마음이 아프네. 아우를 볼모를 보내다니

왕신    그쪽에서도 볼모가 오지 않사옵니까? 괘념치 마시오소서. 오히려 신이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불행중 다행이옵니다.

왕건    (한참 보다가) 이번 조물성 전투는 두고두고 잊기 어려울 것이야. 그리고 내가 신이 아우를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네. 이 형을 믿게나.

왕신    이를 말씀이옵니까? 신에 관한 염려는 마시오소서.

왕건    오늘 저녁일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게나.

왕신    예, 폐하.

왕건    이 나이가 되도록 이처럼 어려운 전쟁은 없었어. 참으로 어려워.

 

        왕건은 성안 마당에서 보여지고 있는 그 참혹한 현장들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쉰다.

 

씬  최응의 처소

 

        최응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최응은 눕지 않았다.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 오한을 이겨내려 애쓰고 있다. 최지몽이 안타깝게 보고 있다. 의원이 눈 동공과 안색을 살피다가는 도리질을 한다.

 

의원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내봉성령. 이런 고열을 이렇게 이겨내시는 분은 처음 보옵니다. 하긴, 내군의 복지겸 장군도 아직까지 그 명줄이 붙어 있사옵니다. 역시 특출한 분들은 다른 것 같습니다.

최응    오늘 저녁 폐하를 뫼시고 나가야 하오. 적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은데 잠시 통증을 멎게 할 약은 없소이까?

의원    이 괴질에서 오는 열은 어느 약으로도 감당이 아니 되옵니다. 약은 없사옵니다.

최응    그렇구려. 알았으니 그만 나가 보시구려. 그나저나 아직까지 복지겸 장군이 목숨을 보전하고 있다니 놀랍구려. 벌써 사흘이
 넘었는데...
의원    그러게 말이옵니다. 그럼...

최응    자네도 그만 나가 보게.

최지몽  정말 폐하를 뫼시고 다시 가실 것이옵니까?

최응    내가 아니 간다면 저들은 더 큰 요구를 해올 지도 몰라. 내가 가야 한다네. 제발 오늘 하루만 견딜 수 있었으면 좋겠구먼. 무서운 괴질이야. 평생 처음 앓아보는 병일세. 너무 고통스럽구먼.

 

        고통을 참는 그런 최응의 표정에서

 

씬  인서트

 

        복지겸의 처소에서 죽음과 싸우고 있는 복지겸의 절박한 모습들이 보여진다. 그를 간병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절박하게 물을 찾는 그의 모습이 지나치면

 

씬  동 성안 어느 관아

 

        유금필을 비롯한 장수들이 모두 모여 있다.

 

유금필  폐하의 결심이 이미 굳어 지셨소이다. 더 이상 막을 수가 없으니 너무도 안타깝소이다. 

배현경  그렇소이다. 이미 화살이 시위를 떠났소이다. 

신숭겸  그러나 비록 적진으로 가시더라도 이 사실은 우리만 알고 끝나야 합니다. 병사들과 백성들이 알게 되면 그 파급효과가 엄청날 것이외다.

박술희  그렇고 말구요. 우리 장수들만 아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더 이상 아무도 알아서는 아니 됩니다. 폐하의 체신과 나라의 체면이 걸린 일이에요. 모든 기록에서도 이번에 관한 일은 다 지워야 합니다. 역사의 기록에 남겨서는 아니된다는 뜻이올시다.

홍유    이 사람의 생각도 같소이다. 비록 불리하여 백제의 왕을 만나기는 하지만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올시다. 사초를 기록하는 관리는 이에 관한 충분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염상    심정적으로는 모두들 같은 생각들일 겝니다. 그러나 역사는 정직해야 합니다.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대로 또 자랑스러운 것은 자랑스러운 그대로 써야 하는 것이 역사입니다. 있는 그대로 기록에 남기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김언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뭐 그렇게 내세울 일이라고 있는 대로 다 씁니까?

김락    소장도 염장군의 말이 옳다고 봅니다. 비록 오늘의 일이 부끄럽다 할지라도 사실을 감추어서는 아니 됩니다. 진실을 그대로 후세에 전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잘못한 것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경계입니다. 그 사실을 거울로 놓고 두고두고 보며 반성하라는 것이지요. 역사의 기록은 그래서 있는 그대로가 중요한 것이올시다.

윤신달  그렇습니다. 아무리 손바닥으로 해를 가려도 그 해는 세상천지를 다 비추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통곡할 일이겠으나, 우리는 오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박수문  소장도 그리 생각합니다.

신숭겸  듣고 보니 충분히 일리가 있소이다. 진실을 감출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감춘다는 것은 떳떳치 못한 일이에요. 좋습니다. 그대로 하도록 하십시다. 그러나 지금은 군사들의 사기와 백성들의 인심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역사의 기록에는 남기되 지금 당장은 조심할 필요가 있소이다.

유금필  그렇소이다. 생과 사가 순간에 놓여있는 지금이올시다. 정의니 진실이니 하는 것은 나중 이야기올시다. 이보시오, 윤장군?

윤신달  예.

유금필  윤장군은 김락 장군과 더불어 이 조물성을 책임지고 있소이다. 지금 곧 폐하께서 떠나실 것입니다. 우리 군사들을 단속하도록 해 주시오. 폐하께서 가시는 것을 극비에 붙여 더 이상 군사들의 동요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외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말이올시다. 들 어떻소이까?

박수경  지당하십니다. 우리 장수들만 알고 일단 오늘의 일은 극비에 붙이도록 하십시다. 아주 오랫동안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소이다.

유금필  그렇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럴 필요가 있는 일이에요. 자, 지금 시각이 급합니다. 들 어떻소이까, 이의들이 있소이까?

장수들  ..........

염상    다들 대답이 없으신 걸 보면 동의하시는 것 같소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지요. 그리고 준비들 하십시다. 곧 폐하께서
 나오실 것입니다.
유금필  그럼 윤신달, 김락 장군께서는 장졸들에게 소집령을 내리시고 폐하께서 밖으로 나가시는 그 부끄러운 모습을 아무도 보지 않도록 하여 주시오.

윤신달  알겠소이다, 장군. 하긴 그것을 배려해서 백제왕과의 만남을 저녁으로 잡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둠이 내려있는 동안 모든 일이 다 끝날 것입니다.

유금필  어둠이 모든 걸 감출지라도 그 부끄러움은 영원히 감추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제장들은 그걸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오늘의 일을 되갚아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씬  왕건의 처소

 

        왕건이 지금까지의 갑옷을 벗고 황제의 의관을 차리고 있다. 황포와 관을 쓰고 옥대를 바로 한다. 신방과 내군들이 보고 있다. 왕신도 한 쪽에 서 있고... 그렇게 갈 준비가 서둘러지고 있다.

 

왕건    해가 얼마나 남았는가?

신방    한 두어 뼘 남았사옵니다. 한시각 정도 후에는 해가 질 것 같사옵니다.

왕건    (한숨) 오늘 하루가 참으로 길기만 하구먼. 준비는 다 되었다 하였는가?

신방    예, 폐하.

왕건    허면 가세.

신방    예, 폐하.

 

        왕건이 앞서 나가면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른다.

 

씬  동 조물성 안 (저녁)

 

        수많은 군사들이 성 반대편을 보고 정렬해 있다. 성루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 성루에 김락이 서 있고 성안에서 숱한 군사들을 윤신달이 움직이고 있다.

 

윤신달  오늘은 훈련이 없다. 전투도 없다. 그저 군사적인 점고를 할 것이다. 아무도 성루쪽은 돌아보지 마라. 모두 이곳을 주목하라. 이제 곧 너희들을 구할 약이 올 것이다. 그리고 지친 몸들을 쉬게 될 것이다. 모두 여기를 보라. 성루는 보지 말라. 모두 여기를 보라. 이제 너희들은 편히 될 것이다. 편히 쉬면서 괴질에서 벗어나는 약을 먹게 될 것이다. 모두 내 말을 들으라.

 

        성루에서 김락이 굳은 표정으로 그런 윤신달 쪽을 멀리서 보고 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휙 돌려 한쪽을 본다.

 

씬  그 성문 쪽

 

        김락과 부장 둘이 멀리 아무도 없는 전각들 사이로 오고 있는 왕건들을 본다. 그들이 오고 있는 그 쪽은 그야말로 개미새끼 한 마리 없다. 김락이 성루 쪽에서 군례를 드린다. 성문이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있고 그야말로 죽음 같은 정적 속을 왕건이 황제의 어차를 타고 가기 시작한다. 깃발을 앞세운 내군들과 시종하는 장수들이 앞과 뒤에서 따르고 있다. 유금필과 신숭겸, 박술희, 신방이 앞을 섰고, 그 어차 뒤로는 최응, 배현경, 홍유, 김언, 박수문, 수경 형제, 염상들이 따르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서서히 성문을 지나 멀어진다. 왕건은 이미 모든 것을 안다. 군사들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성루에서 멀리 군례를 드리고 있는 김락의 그런 모습만 보여온다. 그리고... 그렇게 가면...

 

씬  그 성밖 길 계곡 혹은 들판

 

        노을 속으로 그렇게 가고 있는 왕건 일행들, 카메라 앞을 가깝게 스쳐 가면... 그 멀어지는 뒷모습에 이르기까지 해설이
 진행된다.
 

해설    단기 3258년, 그리고 서기로는 925년인 그해 10월. 왕건은 드디어 백제국의 견훤왕과 마주하게 된다. 삼국유사와 고려사절요에는 당시의 다급한 정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건이 견훤의 군사를 만나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매우 날래어서 승부를 결단치 못하였다. 이에 왕건이 일시적으로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화친할 것을 요구하여 종제 왕신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진호를 보내서 교환하였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견훤의 군사가 날랬다는 점과, 승부를 결단할 수 없었다는 것과, 그리고 상부라고 존칭하여 올렸다는 그 사실이 왕건이 얼마나 다급하고 불리하였는가 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남긴 기록도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왕건이 견훤을 군영으로 오게 하여 이를 의논하려고 하였으나 유금필이 간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려우니 어찌 가벼이 적과 서로 가까이하겠습니까, 하므로 왕이 그만두었다'라고 씌여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하였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당시 상황과 충분한 가능성을 근거로 하였던 것이다. 

 

        해설이 이어지는 동안 어느 들판과 계곡을 지나 카메라는 백제 진영에서 나온 장수들이 왕건을 기다리고 있다가 정중하게 맞는 모습을 길게 부감으로 잡는다.

 

씬  그곳

 

        백제에서 나온 장수는 공직, 부달, 소달 그리고 최승우이다. 왕건의 마차가 가까이 이르자 그들은 일제히 군례를 올린다.

 

최승우  어서오시오소서, 폐하. 저희 대백제국 황제폐하께오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왕건    이렇게 나와주니 고맙소.

최승우  이제부터는 저희 영내이니 만큼 저희가 안내해 모시겠사옵니다.

 

        왕건이 끄덕인다. 장수들은 서로 마주보며 기싸움이다. 그 시선들이 무섭게 기를 뿜으며 오간다. 최승우가 잠시 최응을 보다가 담담히 말한다.

 

최승우  이쪽은 우리 백제국의 원로 장군이신 공직장군입니다. 장군 무얼 하십니까? 고려국의 황제를 뫼시도록 하시지요.

공직    예, 파진찬. (큰 소리로) 고려국의 황제폐하를 뫼시어라.

군사들  예, 장군.

최승우  (최응에게) 최공, 병증이 더욱 심해지셨구려.

최응    글쎄올습니다. 가시지요.

최승우  참으로 대단하오. 그 몸으로 여지껏 버티고 여기까지 올 수 있다니 말이오. 대단하오. 가십시다.

공직    서둘러라. 어서 뫼시어라.

 

        군사들이 대답하여 앞선다. 그 일행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다시 질풍처럼 벌판을 달려가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계속해 부감으로 그들을 판하며 쫓고.... 그렇게 사라진다.

 

씬  백제군 군영

 

씬  동 견훤의 군막 안

 

        견훤이 화려한 용포 차림으로 한껏 어깨에 힘을 주고 있다. 궁녀들이 혹은 내관들이 옷길을 잘 여미어 주고 있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궁녀들이 보여주는 동경을 본다. 그리고 이리저리 관을 쓴 매무새도 고치고 있다. 그 옆으로 능환과 종훈이 서 있다. 태자들도 서 있다.

 

견훤    고려의 왕이 오고 있단 말이지? 왕건 아우가 말이야.

능환    예, 폐하. 이미 척후병이 그렇게 알려왔사옵니다. 아마 지금쯤 공직장군이 파진찬과 함께 가서 모셔오고 있을 것이옵니다.

견훤    참으로 이 조물성 전투는 기분이 좋아. 처음부터 그랬어.

능환    하오나 폐하, 멀쩡한 대낮을 피하여 이 저녁에 만남의 의식을 갖는 다는 것이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사옵니다.

신검    그러하옵니다, 폐하.   

견훤    아아, 시간이 없기 때문이야. 저들은 약이 급해. 의식보다 중요한 것은 저들에게 있어서 약이야. 저들은 오늘 아침에 회의를 하였고 낮에 우리에게 통보를 하였어. 그리고 바로 온 것이 이 저녁이야.

능환    핑계일 것이옵니다. 저들은 부끄럽고 망신스러운 이 현장을 밖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옵니다.

견훤    하하하....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될 일인가, 이것이...?  기왕에 오고 있는 손님일세. 이 황제의 아우야. 더 이상, 트집을 잡지 마세.

금강    그러하옵니다, 어찌되었든 분명한 것은 고려의 왕이 아바마마께 아우의 신분으로서 예를 취하러 오고 있다는 것이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아바마마.

종훈    그러하옵니다. 분명히 감축 받으실 일이옵니다. 먼 훗날 역사가 오늘의 일을 분명히 증명할 것이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견훤    암, 나도 기쁘고 반갑네 그려. 기분이 아주 괜찮아. 백제의 황제가 고려의 황제를 아우로 삼았어. 허면, 이 삼한의 주인이 누구이겠는가? 굳이 말 안해도 백성들은 다 알 것이야. 

신검    그러하옵니다, 폐하.

종훈    하오나, 폐하. 폐하께서 마음 잡수시기에 따라서 모든 것은 한번에 끝내실 수도 있는 기회이옵니다.

견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종훈    그물 안으로 범이 들어오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오서는 그 범을 마음대로 하실 수가 있사옵니다. 그렇게 되면 삼한 통일은 여기서 끝이 날 수도 있는 것이옵니다.

견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

능환    종훈 군사의 이야기를 이해하옵니다. 지금 종훈 군사는 고려의 왕이 여기에 오는 대로 그 목숨을 거두자는 것 같사옵니다.

견훤    목숨을 거둔다고...?

신검    폐하, 좋은 계책이옵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끝낼 수도 있사옵니다.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군영으로 들어서면 그 목숨을 취하시오소서.

종훈    좋은 기회이옵니다, 폐하. 그리 하시오소서.

견훤    좋은 기회....? (굳어지며) 좋은 기회..... 이쪽으로 들어오면 목숨을 거두어라? 그걸 지금 짐에게 말이라고들 하고 있는 겐가? 천하에 어느 형이 제 아우를 죽인다던가?

능환    형편이 어려워서 마지못해 오는 것이지. 어찌 진심으로 아우가 되고 싶어 오는 것이겠사옵니까?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는 없을 것이옵니다.

신검    아바마마, 기회이옵니다. 분명 기회이옵니다.

견훤    이런, 쯧쯧쯧.... 이런 머리들과 이런 안목으로 나를 보좌해왔단 말인가? 내가 누구인가? 대 백제국의 황제야. 그리고 대장부라 일컫는 사람이야. 도대체 나를 뭘로 보는가? 서로가 약속을 하고 찾아오는 사람의 목을 베자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처럼 신의가 없는 나를 백성들이 과연 따를 것 같은가?

능환    하오나 폐하...

견훤    작은 이익을 위하여 큰 것을 버리게 되면 결국은 나라도 잃고 내 자신도 다 잃어버리는 것이야. 자고로 대장부란 떳떳해야해. 어떤 것이든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는 것이고... 이런 쯧쯧쯧.... 역시 이찬 자네는 늙었어. 형편없는 꾀만 만들어낸단 말이야.

능환    .........

견훤    그리고 너 신검이 말이야. 네가 명색이 태자들의 맏형이다. 그렇게 좁쌀처럼 작은 가슴으로 어찌 대 제국을 다스릴 수 있겠느냐 ? 도대체 너는 언제까지 인간이 제대로 되려는고..? 에잉.. 쯧쯧쯧... (아주 다정하게) 금강아....

금강    예, 아바마마.

견훤    형들의 이런 점은 본받지 말아라. 언제 어느 때이든 담담하고 큰 인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야. 알겠느냐?

금강    예, 아바마마..

신검들  ...........

 

        그때, 내관이 아뢰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관    (E) 폐하, 고려의 국왕이 방금 전 영내로 들어섰다 하옵니다.

견훤    오... 온다는구먼. 다왔다는구먼. 자, 나가들 보세.

모두들  예...

 

        견훤이 앞서고 그렇게 나간다. 능환과 신검이 서로를 본다. 그리고 다시 그 뒤를 따른다. 금강도 그렇게 따르고...

 

씬  견훤의 군영

 

        이른바 견훤의 의장병들이 늘어섰다. 이미 왕건의 기를 죽이기 위한 군세를 벌렸다. 수많은 기치창검이 펄럭이고 공격용 장비들과 중무장한 군사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대오 한 켠에 백제의 모든 장수들이 다 나와 있다. 그 가운데로 공직이 인도하는 왕건들이 들어서고 있다. 그 중간쯤 이르자 공직이 손을 들고 행렬을 멈추게 한다. 신덕과 애술이 가까이 와 군례한다.

 

신덕    이곳부터는 모두 마차와 말에서 내리시오. 폐하께서 계시는 진중이오.

배현경  그렇다면 어찌하여 대 고려국의 황제께서 오셨는데 그대같은 일개 장군이 앞을 막는단 말이요?

신덕    폐하께서는 저 뒤에 계시오. 아우의 신분으로 인사를 오시는 데에 형님 되시는 분이 어찌 문밖까지 나오신단 말이오?

유금필  아직 형제의 예를 맺지 않았는데 누가 아우고 누가 형님이란 말씀이오. 이런 결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애술    결례라니, 무엇이 결례라는 말이오? 

 

        그런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양쪽 장수들이 모두 검집에 손이간다. 애술이 박술희를 본다.

 

박술희  애술장군, 오늘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허나 원한다면 싸울 수 밖에... 왜 모두들 검집에 손이 가 있는 겐가?

최승우  아 아.. 오늘은 좋은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여 귀인들을 모셔오는 길이오. 어찌 이리 거친 말을 주고들 받으시오? 그만들 하시오.

 

        그때, 왕건이 마차에서 내려선다. 모두들 시선이 집중된다.

 

왕건    그대의 말이 옳소. 나는 어른을 만나러 온 것이오. 마땅히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함이 맞을 것이오.

유금필  폐하, 하지만...

신검    왜들 이리 소란스럽소이까?

 

        그때, 저만큼 신검과 능환이 능애를 비롯하여 용검, 금강, 김총, 최필, 진호, 훈겸, 공달, 민합들을 이끌고 가까이에 이르러 예를 올린다.

 

신검    대 백제국 황제폐하의 아우님께서 오시는 자리요. 폐하께서 정중히 뫼시라고 영을 내렸습니다. 모두 예로써 맞으시오. (그러자 모두들 긴장을 풀고 허리를 숙이면) 폐하, 소인은 대 백제국의 태자 신검이라 하옵니다. 이미 소인의 아버님을 형님으로 뫼신다 하셨으니 소인에게는 숙부님이 되시옵니다. 숙부님, 안으로 드시오소서.

왕건    ........

모두들  ..........

신검    숙부님, 어서 안으로 드시오소서.

왕건    백제국의 태자를 여기서 보게 되니 반갑구려. 자, 그럼 조카님, 앞서시게.

신검    따르시오소서.

최승우  ............ (미소)

 

        그렇게 신검이 앞서간다. 모두들 예를 취한다. 그렇게 가면...

 

씬  그곳

 

        견훤이 군막 앞에 단을 마련해 놓고 앉아 있다. 그 곳에도 수많은 장졸들과 궁인들이 기다리고 있다. 옥좌에 앉은 견훤이 저만큼 오고 있는 왕건을 본다. 그는 긴장한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다. 그리고 드디어 양쪽의 장졸들이 보는 가운데 견훤과 왕건은 그렇게 마주했다. 왕건이 걸음을 멈추고 견훤을 본다. 침묵과 긴장이 흐른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시선이 몇 차례 오고 간 뒤에 왕건이 가볍게 손을 앞으로 하여 군례를 드린다. 그리고 다시 선다. 그런데 견훤은 고개만 끄덕할 뿐 그렇게 앉아 있다. 보고 있던 능애가 벽력처럼 소리를 친다.

 

능애    고려국의 왕은 어째서 백제국의 황제폐하께 무릎을 꿇지 않으시오?

왕건    ...........?

능애    형제의 지교를 맺으러 오셨으면 아우의 예가 있을 것이오. 어서 예를 다시 올리시오.

왕건    ...........?

최응    이미 서로의 예는 끝이 났소이다. 군신 맹약이 아니라 형제의 예라 하였소이다. 지금은 전시인지라 군례로 대신하였소이다.

능환    그렇다면 왜 상부라는 말씀으로 인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오?

유금필  군례를 드려도 답례가 없으신 데 더 이상 무슨 인사를 또 드리라는 것이오?

애술    인사가 마땅치 않으시니 답례가 없으신 것이오. 다시 하시오.

신숭겸  예가 아니올시다. 두 번 인사를 하는 법은 없소이다.

견훤    ...........

최필    어서 다시 예를 올리시오. 꿇지 않고 무얼 하시오?

박술희  예는 이미 끝이 났소이다.

 

        팽팽한 긴장이 도를 더한다. 여전히 견훤과 왕건은 서로를 보고만 있다. 왕건은 서 있고 견훤은 옥좌에 앉아 있다. 왕건이 비로소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 말한다.

 

왕건    상부어른, 이 아우가 무릎을 꿇고 다시 절을 올리오리까?

견훤    ..........?

왕건    다시 절을 올리오리까, 상부어른?

 

        그 말에 유금필들은 모두 경악한다. 백제군의 장수들도 긴장한다.

 

왕건    하오면 절 받으시오소서, 상부어른.

 

        왕건이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견훤이 크게 웃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견훤    아아... 되었네, 되었어. 절이라니 이미 나를 보고 상부라 불러주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걸어 나오며) 나는 그대의 형이 되었네. 아니 그런가, 아우님?

왕건    그러하옵니다, 형님.

견훤    으핫하하하.... (가까이 와 어깨를 잡으며) 과연, 과연 대 고려국의 황제일세. 아우님, 이미 예는 다 끝이 났네. 아우님도 황제가 아니신가? 같은 황제끼리 이 정도면 충분히 예의는 되었네. 경들은 들으라.

모두들  예, 폐하

견훤    이제부터 고려국의 황제는 짐의 아우가 되었느니라. 그러나 여전히 아우님은 고려의 황제가 분명하니라. 털끝만큼의 결례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알겠는가?

모두들  예, 폐하.

견훤    자, 아우님.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저 안으로 드세.

왕건    예, 형님. 

 

        두 사람이 앞서 간다. 최승우가 다시 그 뒤에서 최응에게 권한다.

 

최승우  가십시다, 최공.

최응    예.

 

        신덕이 배현경에게 권한다.

 

신덕    배장군, 가시지요?

배현경  그러십시다.

 

        다시, 애술이 박술희를 본다. 그리고 비죽이 웃는다. 박술희는 그 시선을 퉁명스럽게 받아넘긴다. 그들 그렇게 가고...

 

씬  그곳 연회장

 

        견훤과 왕건이 함께 앉았다. 그 좌우로 백제와 고려측의 장수들이 격에 맞게 앉아있다. 견훤과 왕건의 뒤에는 각각 장수들이 시립해 있다. 왕건의 뒤에는 유금필이 그리고 견훤의 뒤에는 상귀가 각자들의 무기를 들고 서 있다. 견훤이 왕건에게 술을 따른다. 

 

견훤    이것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우리가 얼마만에 만난 것인가? 어느새 수십 년 세월이 흘렀네 그려, 아우님.

왕건    그러게 말이옵니다.

견훤    서라벌에서 우리가 처음 보았을 때, 그때가 생각나네. 아우님은 아직 소년이었고 나는 그때 서라벌의 군관이었지.

왕건    그랬사옵니다.

견훤    지금은 내 아들 금강이도 외눈박이가 되었지만 아우님에 앞서서 고려국의 왕이 되었던 그 궁예대왕 말일세. 참으로 걸물이었네.

왕건    예.

견훤    결국 나중에 미친 병이 들어서 그 지경이 되었지만 한때에 호걸이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지.

왕건    그러하옵니다.

견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어. 신라도 이제는 껍데기뿐이고 말일세.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났네마는 그 지난날 우리 아버님께서 아우님의 나라로 가셨을 때 말이야. 정말 부끄러웠지. 잘 계시는가?

왕건    예, 편히 뫼시고 있사옵니다.

견훤    참 지독한 분이시지. 내가 백제의 황제인데도 날 버리고 가셨단 말일세. 허, 참... 망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일이 컸었지. 뭐 기왕에 그 일은 그리된 일이고... 자, 한잔 하세.

왕건    예.

견훤    우리는 형제일세. 얼마든지 싸우지 않고 좋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네. 화친하고 잘 지내도록 노력하세. 형과 아우의 나라일세. 안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니 그런가, 아우님?

왕건    예, 형님. 

견훤    우리는 서로의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야.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신라가 무너지고 나면 그때 가서 의논할 것은 하고 따질 것은 따지고 또, 서로 도울 것은 도우면 될 것이 아닌가? 우리 그렇게 사세, 음?

왕건    예, 형님.

견훤    그 형님 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으이. 허허허..... 아우님, 오늘의 이런 자리가 마련되다니 참으로 꿈만 같네 그려. 잘 지네 보세. 우리 정말 잘 지네 보세.

왕건    예, 형님.

 

        두 사람, 잔을 마주하고 술을 들이킨다.

 

씬  그 일각

 

        장수들간에도 훈훈한 분위기가 돌고 있다. 애술이 껄껄껄 웃으며 말한다.

 

애술    이보시게, 박술희 장군?

박술희  말해 보게.

애술    우리 백제국에서는 말일세 (계속 킥킥 웃다가) 자네가 폐하의 누이가 되시는 대주도금 님과 정분이 났다고 아주 오래도록 소문이 자자했었네. 자네 정말로 상사병이 들었었는가?

박술희  글쎄...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난처한 질문이로군.

애술    (계속 킥킥 웃다가) 그런 얼굴로도 여자 생각은 나는가?

박술희  술이나 드세.

 

        그러나 애술이 계속 킥킥거리며 재밌다는 듯 웃는다.   

 

씬  그 일각

 

        그런 그들 옆으로는 최승우와 능환, 종훈들이 단정하게 앉아 있는 최응을 보고 있다.

 

최승우  많이 편찮아 보입니다, 최공. 자, 뭐라도 한모금 하시지요?

최응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능환    최공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이다. 그리고 여러 번 고생도 하였고... 오늘 보니 참으로 귀공자올시다.

최응    고맙습니다.

능환    오늘처럼 좋은 자리가 어디 있겠소이까? 차라도 한잔 하시오?

최응    아닙니다, 생각이 없습니다.

최승우  자, 이것 한잔 들어보시구려. 내가 특별히 햇차라 하여 최공을 위해 집에서 가져온 것이올시다. 자, 어서?

최응    고맙습니다만....

종훈    이미 웃어른들이 화해를 하고 계시는데 그대가 그러면 되겠소이까? 파진찬께서 특별히 가져오신 차인데 드시구려.

최승우  자, 차 한잔이야 어떻겠소이까? 드시지요.

최응    정 그렇다면... 차 한잔만 마시겠습니다. 

 

        최승우가 따라주면 최응이 마신다. 그런데 최응이 다 마시고 나자 이상한 듯 뚫어지게 최승우를 본다. 최승우가 빙그레 웃는다.

 

최승우  약차올시다. 마시면 기분이 아주 좋아지실 겝니다. 한잔 더 하시면 효과가 더 좋습니다.

최응    ............?

 

        그런 그들의 표정에서... 최승우가 다시 잔에 차를 따른다.

 

씬  다시 그 일각

 

        견훤은 기분이 매우 좋다. 술이 꽤 취한 듯 보인다.

 

견훤    이보게, 아우님. 더도 덜도 말고 오늘 같은 날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네 그려. 싸움도 없고 형제간에 우정도 쌓고 영원히 이렇게 웃고 살면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그걸 위해서 내가 서로 증표를 보이자는 것에 동의한 것일세. 여기 진호는 황후의 일가가 되네.

진호    진호라하옵니다.

견훤    거기 왕신이라 하였든가?

왕신    예, 폐하. 왕신이옵니다. 형님폐하의 사촌아우가 되옵니다.

왕건    잘 보살펴 주시오소서. 제가 아끼는 아우이옵니다.

견훤    아, 여부가 있겠는가?  서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의 피붙이들을 볼모로 하는 것일세. 잘 보살피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바로 오늘의 약속을 깨는 것이고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 되네. 잘 살펴줄 것일세. 물론 우리 진호도 그리 해 주리라 믿네.

왕건    약속을 지킬 것이옵니다. 믿으시오소서.

견훤    암, 암... (마시며) 오늘 늦게까지 한번 우리 형제가 마셔보세. 모처럼 화해의 장이니 양쪽의 장수들 모두 경계를 풀고 넉넉히 마시라.

모두들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폐하.

견훤    (신이 나서 일어서며) 마음껏들 마실지니라. 오늘 경들도 보았다시피 짐과 여기 아우는 형제의 연을 맺었느니라. 다시 말하면 백제와 고려가 형제가 되었다는 뜻이야. 영원히 싸우지 않고 잘 지낼 것을 약속을 하였어. 이보게, 이찬?

능환    예, 폐하

견훤    약은 어찌 되었는가? 네 아우님이 여기 오는 대로 즉시 보내라 하였는데..?

능환    이미 영을 내리신 대로하였사옵니다, 폐하.

견훤    그래, 그래... 다 함께 잘 살아야지. 잘 살아야해. 아니들 그러한가? 경들은 오늘의 이 일을 영원히 기억하고. 또한 축복하라.

모두들  (백제측만) 망극하옵니다, 폐하.

 

        애술이 나서며 일어나 큰 소리로 말한다.

 

애술    이런 경하스러운 날에 어찌 그냥 있을 수 있소이까? 우리 두 분 폐하를 위하여 만세를 불러 드립시다. 만세.... 황제폐하, 만세.... 만만세.... 만세....

 

        그러자 모두들 일어나 만세를 부른다. 장내가 떠나갈 듯 하다. 견훤은 술잔을 든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고려의 장수들은 그렇게 보고만 있을 뿐이다.

 

씬  조물성 외경 (밤)

 

씬  동 성루 혹은 그 일각

 

        김락과 윤신달이 먼 성밖을 보고 있다.

 

김락    영원히 기억할 날이올시다. 지금 폐하께서 참기 어려운 수모를 당하고 계실 것이올시다.

윤신달  그렇겠지요. 아마도 새벽이 넘어야 오실 모양입니다. 허허,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고...?

 

        그러다 그들은 한쪽을 본다. 달빛 아래로 부달과 소달이 군사들을 이끌고 오고 있다. 일단의 약통과 약재들이다. 김락이 보다가 묻는다.

 

김락    그대들은 어디서 오는 군사들인가?

부달    우리는 백제국 황제폐하의 영을 받들어 약과 약재를 가지고 오는 군사들이오.

윤신달  벌써 약을 보낸 모양입니다.

김락    그런 것 같습니다. (큰 소리로) 성문을 열어 주어라.

 

        성문이 열리고 군사들이 들어가고 있다.

 

씬  복지겸의 처소

 

        복지겸이 헐떡거리며 죽어가고 있다. 최지몽이 그 옆에 있다.

 

복지겸  폐하께서... 약을 구해 보내셨다고...?

최지몽  예, 장군. 벌써 약이 도착하였습니다. 급한 병자들은 가져온 약을 복용시키고 또 조금 덜 급한 자들은 지금 약재를 달이고 있습니다. 자, 어서 이것을 드십시오.

의원    어서 드시구려, 복장군. 어서요.

복지겸  이럴 수가 있는가? 약이라고..? 그까짓 약을 구하기 위해... 폐하께서 적진으로 가셔서... 고개를 숙이신단 말인가? 오호... 이걸 어찌 마실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폐하께서 흘리신 치욕의 눈물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이 약을 마실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나는 아니 마실 것이야.

최지몽  이미 폐하께서 그 댓가를 치르고 보내신 것입니다. 약을 치우시면 오히려 폐하의 크신 뜻을 외면하시는 것이 됩니다. 어서 드십시오.

복지겸  오호, 폐하... (울며) 폐하... 이 약을 어찌 마시오이까, 폐하...?

 

씬  송도 황궁 외경

 

씬  동 황후전

 

        오씨와 유씨가 함께 해 있다.

 

오씨    조물성의 소식이 갈수록 산인 것 같네.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는 연통이 왔네.

유씨    들었사옵니다, 황후마마.

오씨    복지겸 장군마저 쓰러지고 내봉성령 최응이도 어렵다 하네.

유씨    이를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오씨    기도를 할 수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금 무엇이겠는가? 오직 기도밖에..  그저 폐하께서 무사하시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어쩌다가.. 어쩌다가... 일이 여기까지 왔단 말인고...? 어쩌다가...

 

씬  견훤의 그 연회장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다. 장수들이 서로 웃으며 술잔을 마주하고 있다. 견훤과 왕건이 계속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고 그 한쪽에서 최응과 최승우가 마주해 있다. 최응이 지난번보다는 훨씬 가벼운 표정으로 최승우를 본다. 다른 이들은 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최응    아까 저녁에 주신 약차가 참으로 효험이 큽니다. 오한이 멎고 열이 내려가는 것을 느낍니다.

최승우  오호,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올시다.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하여 가져온 약이올시다. 혹시나 그대로 뱉어버리면 어찌할까 염려를 했소이다.  

최응    이미 두 나라의 황제분께서 화친을 하시고 약제가 우리 고려진영으로 갔습니다. 모든 이해가 끝나고 또한 정으로서 주신 것을 어찌 뱉을 수 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최승우  별 말씀을... 우리는 비록 서로 떨어져 다투지만 아마도 보이지 않는 정이 있을 것 같구려.

최응    글쎄올습니다... 허나 우리는 운명적으로 영원한 맞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최승우  하하하... 부인할 수 없는 말이 되겠지요. 헌데, 오늘 유달리 표정이 밝지가 않습니다.

최응    제가 모시는 주군을 당당하지 못한 자리에 서시게 하였습니다. 어찌 희희낙낙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이 모든 일은 역시 파진찬께서 다 마련하신 일인 것을 압니다. 언젠가 친절하게 빚을 갚아 드릴 생각입니다.

최승우  하하하... 그리 하셔야겠지요. 암요. 그것이 우리 책사들이라는 사람들의 본분이올시다. 자, 차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최응    예, 드시지요.

 

        그들 함께 찻잔을 든다. 역시 마주보는 시선에는 투지가 끓고 있다. 견훤이 크게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견훤    이보시게, 아우님. 불과 이백여 년 전에 우리 백제와 고구려는 저 신라에게 무릎을 꿇었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결국 외세를 등에 업고 이룬 통일은 이렇게 빨리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신라는 보여주었네. 이제 천하는 우리 두 사람 앞에 들어왔네. 아우님과 나, 둘 중의 하나는 천하를 차지할 것일세. 아니 그런가?

왕건    그렇게 될 것이옵니다. 아마도 형님께서 먼저 큰 자리에 서시지 않겠사옵니까?

견훤    내가 말인가? 으핫하하.... 과공이 비례라 하였네.(過恭非禮) 지나치게 겸손함은 예의가 아니란 것이야. 우리 둘일세. 둘 중의 하나가 천하의 주인 자리에 가서 앉게 되겠지. 허나,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간다면 얼마나 더 좋은 일이겠는가?

왕건    예, 형님.

견훤    아우님과 나, 우리 둘이 함께 가 보세나. 그리고 아우님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저 북벌을 이루세나. 삼한을 통일하고 북으로 북으로 달려 저 발해국과 중원의 당나라를 지나서 온 우주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일세. 그 일을 우리가 해내야 하네. (손을 잡아 흔들며) 아우님과 나, 우리가 말이야. 우리가.....!

       

        그렇게 잡은 손을 공중으로 치켜드는 견훤의 표정에서...

 

 

                                                                 (149회 끝) 



첨부파일 태조왕건149.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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