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150회>
<줄거리>
적진에서 굴욕적인 하루를 지내고 돌아온 왕건은 백제와의 약속대로 조물성에서 철군한다. 고려라는 큰 장애물이 없어진 백제는 다시금 신라로 향한다. 황도로 돌아온 왕건은 조물성 패전을 수습하고, 최응은 백제와 맺은 굴욕적인 화친이 신하의 도리를 못한 자신의 탓이라 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을 기다린다. 한 편 빠른 속도로 신라로 거침없이 진격하던 백제는 신라에서 온 밀사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씬 견훤의 군영 (밤)
곳곳에 많은 군막들이 보이고 부달과 소달들이 경계 감찰을 돌고 있다. 곳곳에 횃불들이 밝다. 어느 군막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그 앞에 신방과 내군들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경계를 서고 있다.
최응 (E) 많이 드셨사옵니까, 폐하?
씬 그 군막 안
최응이 왕건에게 묻고 있다.
왕건 그저 조금 마셨을 뿐인데 취기가 도는구먼.
최응 참으로 신이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아직도 이렇게 살아있음이 너무도 부끄럽사옵니다.
왕건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우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네. 밤을 세우다 보니 조금 힘이 드는 것 같구먼. 이제 갈 차비들을 해야지 않겠는가?
최응 날이 밝으면 가기로 되어 있사옵니다. 잠시 눈을 붙이시오소서.
유금필 그래도 당당하게 잘 해내셨사옵니다, 폐하.
신숭겸 그러하옵니다. 이 정도로 다 끝난 것이 다행이옵니다.
박술희 다행은 뭐가 다행이란 말입니까? 오늘은 어쩔 수 없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이 부끄러움을 갚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이구... 상부라니, 형님이라니...? 어떻게 백제국의 왕이 우리 형님폐하의 상부가 되고 형님이 된단 말입니까? 어이구...
왕건 이제 그런 얘기들은 그만들 하세나. 어차피 내가 형님으로 모시기로 하였네. 거기에 불만을 해서는 아니 돼. 내가 본 백제국의 왕은 역시 영웅이었네. 그 호걸스러움이 참으로 돋보였네.
배현경 폐하, 지금 우리가 어쩌다가 형편이 어려워 이렇게 되었사옵니다마는 호걸 중에 호걸은 폐하이시옵니다. 어찌 백제왕 따위가 폐하의 윗자리에 설 수가 있사옵니까?
염상 그러하옵니다. 절대로 백제의 왕은 폐하의 웅지를 당할 수 없는 인물이옵니다.
김언 맞사옵니다. 소장이 본 백제왕은 겉으로는 호방하고 담력이 커 보이지만 실속은 적고 수가 얕은 자 같아 보였사옵니다. 결코 폐하를 뛰어넘을 수 없는 인물이옵니다.
왕건 나는 형편이 궁하여 여기에 찾아왔고 지금 백제왕의 도움을 받고 있네. 인정할 것은 해야지. 백제왕은 역시 나보다 나아. 내가 형님이라 부를만한 인물이야. 그나저나 앞으로가 걱정일세. 내 사촌아우가 인질로 교환되어 있네. 과연 이 평화가 얼마나 갈 수 있겠는가?
홍유 평화라니요? 지금 잠시 전투를 멈춘 것뿐이지, 어찌 평화가 계속될 수 있겠사옵니까? 아무도 그 평화를 믿지 않을 것이옵니다.
왕건 그러나 국가간의 약속일세. 서로의 일에 간섭을 안하고 또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하였어.
유금필 그러나 삼한의 주인자리는 하나 뿐이옵니다. 처음부터 지켜질 수가 없는 조건을 가지고 만난 것이옵니다.
신숭겸 그러하옵니다. 신라는 우리의 동맹국이옵니다. 우리가 간섭하지 않을 수 없고 간섭하게 되면 즉 다시 전쟁이 되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폐하?
박술희 어거지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게 어거지였사옵니다. 백제왕이 제 마음대로 만들어 버린 조건이옵니다.
왕건 그만들 하라. 여기는 백제의 군영일세. 조금 눈을 붙이고 싶구먼 그래.
최응 장군들도 잠시 옆의 막사에 가서 쉬시지요. 아침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홍유 폐하께서는 쉬셔야 합니다. 자, 다들 나가십시다. 폐하, 잠시 쉬시오소서.
모두들 쉬시오소서, 폐하.
왕건 그럽시다. 아침에들 보십시다.
장수들이 나간다. 다 나가고 최응이 혼자 서 있다. 최응이 보다가 죄스러운 듯 고개를 떨군다.
최응 편히 주무시오소서, 폐하.
왕건 잘 쉬게. 고생하였네. (눈물 글썽이고 목 메이며) 아주 힘든 밤이었네. 오래오래 기억할 날이 될 것이야.
최응 그럴 것이옵니다.
왕건 비가 많이 오는 모양일세.
최응 예, 폐하.
왕건 그래도 언젠가 저 비는 멈추고 해는 뜰 것이야. 그렇지 않은가?
최응 그렇사옵니다, 폐하.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새벽은 오고 아침해는 뜨옵니다. 이제 곧 폐하의 아침과 폐하의 태양이 동녘하늘을 물들이며 떠오를 것이옵니다.
왕건 고맙네. 그럼 가 자게.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지.
최응 예, 폐하.
최응이 그렇게 물러간다. 빗소리는 여전하다. 왕건이 뒷짐을 지고 그 빗소리를 듣고 있다.
씬 그곳 군막 길
어둠 속에서 군막으로 장수들이 들어가고 있다. 그들 맨 뒤로 배현경과 박술희가 함께 들어가려는데, 문득 저쪽에서 인기척이 오고 있다. 보면 그들은 신덕과 애술이다. 애술이 씩 웃는다. 그리고 술병 하나를 들어 보인다.
애술 이보게, 박술희. 나 애술일세.
박술희 어쩐 일인가? 여기까지... 이 새벽에..
애술 허허허... 좋은 술이 있어서 한병 가지고 왔네. 이제 잠시 후면 돌아갈 것이 아닌가?
박술희 그렇게 되겠지.
애술 어떤가? 요 옆의 군막에 자리를 보아 두라 하였네. 딱 한병만 하세. 언제 또 우리가 이렇게 보겠는가?
박술희가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배현경을 본다.
배현경 그렇게 하시지요, 박장군. 뭐 어떻겠소이까?
신덕 우리도 한잔 어떻소이까?
배현경 좋습니다. 그리 하십시다.
신덕 자, 우리는 이리로...
그들 모두 그렇게 가면...
씬 어느 군막 안
애술이 박술희에게 술을 따르고 있다. 안주상도 푸짐해 보인다.
애술 헤헤헤.... 이봐, 박술희? 난 말일세.. 생긴건 이래도 정이 많은 놈일세. 처음 봤을 때부터 자네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지.
박술희 허허, 고맙구먼.
애술 나는 평생 싸움터만 돌아다녔기 때문에 아는 건 없지만 사내들의 의리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지. 내가 보아도 자네는 틀림없이 사내야. (마시고 주며)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
박술희 그렇겠지. 아마도 전장터가 되겠지만....
애술 그렇겠지? 헤헤... 하긴, 그렇게 밖에 더 만나겠나. 우린 서로 적이니까 말이야. 어서 마시고 한잔 주게.
박술희 (마시고 주며) 받게..
애술 헤헤헤... 자네나 나나 모든 것이 너무 똑같아. 생긴 것도 그렇고 제법 한가닥하는 싸움도 그렇고.... 그리고 패기도 있고... 아마 무식한 것도 자네나 나나 똑같을 게야.
박술희 내가 보기에 애술이 자네가 무식하지는 않아.
애술 내가...? 아니야, 나는 아는 게 없어. 그저 싸우고 사람 죽이는 것밖에는 몰라. 나보다 센 자가 있으면 무조건 존경하지. 그러니 내가 얼마나 무식한가?
박술희 아니야, 그래도 자네는 북방지강(北方之强)은 아니야.
애술 북방.... 지강은 무슨 말인가?
박술희 중용에 나오는 말인데 그저 무지하고 무식해서 용맹밖에는 모르는 자들을 일컫는 것이지. 그래도 자네는 의리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무지한 것은 아니야.
애술 자네 글도 할 줄 아는가?
박술희 어서 드세. 날이 새려면 얼마 아니 남았어.
애술 (더욱 신기해서) 글을 어디서 배웠는가? 언제 글을 배웠는가? 이야, 글도 할 줄 안다는 말이지? 이야.... 큰일났구먼. 박술희라는 못난이가 더 좋아 보이니 말일세. 히히히....
애술은 더욱 신기해하며 가까이 다가가 이리저리 박술희를 뜯어본다.
씬 또 다른 군막 안
신덕과 배현경이 함께 해 있다. 이들도 술을 마시고 있다.
신덕 배장군, 참으로 어려운 밤을 보내셨을 것이오.
배현경 그렇게 되었소이다.
신덕 일찍이 이 사람이 수많은 전장에 나가 보았지만 배장군같은 상대는 처음 만났소이다. 우리 폐하께서도 배장군을 특별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배현경 과분한 말씀...
신덕 장수가 장수를 흠모하는 것은 대장부의 정리올시다. 다음에 만난다면 한번 더 잘 싸워보십시다.
배현경 이를 말씀이겠소이까? 오늘 이 술 한잔이 그러고 보면 참으로 의미있고 따뜻합니다. 하하하....
신덕 이 사람의 정을 알아주시니 고맙소이다. 전장터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배장군은 참으로 좋은 벗이 되었을 터인데... 안타깝소이다.
배현경 이 난세에서 안타까운 일이 어디 이것 뿐이겠소이까? 나 또한 신장군을 그 동안 잊지 않고 있었소이다. 허나, 우리의 운명이 자신들의 국가와 그 주군을 위해 죽게 되어 있소이다. 오늘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 만남에 있어서 가장 좋은 마지막 기억이 될 것입니다.
신덕 그렇겠지요. 자, 드시지요? 우리들의 주군을 위해서 말이오.
배현경 그럽시다. 자..
그들 그렇게 두 사람 술잔을 든다. 교차되는 뜨거운 눈빛에서 디졸브
씬 동 아침
비는 멎었다. 장졸들이 도열한 가운데 견훤과 왕건이 나란히 오고 있다. 장수들이 여전히 그 뒤를 배종해 온다. 겉으로는 참으로 다정해 보이는 모습들이다.
견훤 간밤에 그렇게 비가 쏟아지더니만 아침에는 또 이렇게 멀쩡하네 그려. 좋은 아침일세, 아우님.
왕건 그러게 말이옵니다.
견훤 자주 시간을 갖도록 하세나.
왕건 예.
견훤 돌아가면 곧바로 송도로 돌아갈 것인가?
왕건 그래야 하겠지요.
견훤 지금에서야 이야기지만 우리의 만남을 많은 장수들이 반대하였네. 그러나 나는 아우님을 꼭 한번 보고 싶었네. (사이) 어느 장수는 이 기회에 아우님을 도모하라고 하였었지.
왕건 ............
견훤 그러나 그것은 얕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하는 말이야.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들이라면 그런 졸렬한 일은 아니 하는 법이지. 내가 아우님을 보고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과연 아우님이 이 시대에 합당한 영웅인가 하는 것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일세. 그런데 역시 아우님은 내 물음에 흡족한 대답을 주었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뿌듯하이.
왕건 그리 말씀해 주시니 듣기가 참으로 민망하옵니다.
견훤 아닐세. 좋은 상대와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잘해 보세. 우리 아주 잘해 보세.
왕건은 그러나 대답이 없이 견훤을 본다. 뭔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드디어 그들은 군영밖에 이른다. 그리고 마주선다. 왕건의 어차가 기다리고 있다. 많은 장졸들이 그들을 보고 있다. 왕건이 다시 군례를 드린다.
왕건 상부어른, 지난 밤 많은 신세를 졌사옵니다.
견훤 잘 가시게.
왕건 좋은 말씀 오래 기억하겠사옵니다.
견훤 허허허... 고맙네. (큰 소리로) 고려국의 황제께서 가신다. 예로서 환송해 드려라.
장수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허리를 숙인다. 한동안 견훤과 왕건은 그렇게 본다. 거기 왕신과 진호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다. 왕신, 그리고 진호가 서로의 주인들에게 인사를 한다.
왕신 폐하, 부디 옥체강령하시오소서.
왕건 신 아우 꼭 다시 볼 것일세. 몸 조심하게
왕신 예, 폐하.
진호 폐하, 다녀오겠사옵니다.
견훤 허허허.. 그래. 머지않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자, 그럼. 아우님. 가시게.
왕건 예. 허면...
유금필 폐하를 뫼시어라.
부장들 폐하를 뫼시어라.
왕건이 그렇게 자신의 어차로 간다. 그리고 오른다. 천천히 돌아본다. 최승우가 최응을 보며 끄덕해 보인다. 애술이 박술희를 보고 신덕이 배현경을 본다.
애술 동무, 잘 가시게. 또 보세.
박술희 잘 있게.
신덕 또 보십시다.
배현경 그렇게 될 겝니다.
유금필 폐하를 뫼시어라. 어차를 움직여라.
부장들 어차를 출발시켜라.
왕건의 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장수들이 그 어차를 호위해 간다. 견훤과 최승우가 보고 있고, 그들 뒤로 많은 장수들이 그렇게 보고 있다. 견훤이 중얼거린다.
견훤 고려의 왕은 역시 인물일세. 제왕의 기질을 타고났어. 궁핍한 지경에 있으면서도 예의가 바르고 빈틈이 없지 아니한가? 그리고 많은 이들이 호감을 갖게금 넉넉해 보여.
최승우 그렇사옵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그 깊이를 알기 어려운 사람이옵니다.
능환 저렇게 보내서는 아니 되는 것이옵니다. 이번에 목숨을 거두면 다 끝나는 것이었사옵니다, 폐하.
견훤 허허허... 이미 새는 둥지를 떠났네 그려. 허허허....
그렇게 점점 멀어져 가는 왕건일행의 모습에서...
씬 조물성 외경
씬 동 조당
돌아온 왕건이 제장회의를 열고 있다. 복지겸도 보이고 제장들이 모두 참석해 있다.
왕건 제장들은 모두 들으오.
모두들 예....
왕건 우리는 이제 곧 철군할 것이오. 비록 형평에 어긋나는 약속이기는 하나. 나는 백제와의 약속을 지킬 것이오. 저들과의 화친을 지킬 것이며 당분간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중단할 것입니다.
모두들 ..............
왕건 그리고 이번 조물성 전투는 분명한 패전이오. 또한 그 책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다 짐이 질 것이오. 아울러 백제와의 화친에 대하여 그 누구도 더는 언급하지 말도록 하오. 알겠소이까?
모두들 예, 폐하....
왕건 또한 내 사촌아우가 백제에 인질로 가 있는 이상 우리에게 와 있는 백제국의 인질도 잘 살펴줘야 할 것이오. 철군을 준비하도록 하오.
복지겸 폐하, 신 복지겸 참으로 부끄럽사옵니다. 폐하께서 굴욕적인 화친의 댓가로 받아오신 약을 마시고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사옵니다. 너무도 부끄럽사옵니다. 이 죄를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폐하?
최응 ..............(그만 눈을 감는다)
왕건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하였소이다. 그만 하시오. 유금필 장군?
유금필 예, 폐하
왕건 황도로 돌아갈 것이네. 그대가 행군을 총괄하게.
유금필 예, 폐하.
그때, 신방이 다급하게 들어서며 예를 올리고 말한다.
신방 폐하, 신 내군부장 신방이옵니다.
왕건 무슨 일인가?
신방 우리 군의 종군의원이 방금 전 극약을 마시고 스스로 숨을 거두었사옵니다.
왕건 무엇이라...?
신방 유서를 남겼사온데 괴질에 관한 약을 찾아내지 못한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서 용서를 구한다 하였사옵니다.
모두들 .................
왕건 저런, 저런.... 더 이상 시시비비를 논하지 말라 하였거늘... 왜 그렇게 무모하게 목숨들을 끊는고..? 안타까운 일이로다. 분명히 다시 한번 말하노라. 이 조물성 전투의 패전 책임은 모두가 짐에게 있는 것이니라. 그 누구도 경거망동을 해서는 아니될 것이야. 시신을 잘 수습해 주라 하라.
신방 예, 폐하.
왕건 유장군은 서두르라.
유금필 예, 폐하.
왕건 의원이 죽다니....?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씬 인서트
의원이 약을 마시고 탁자에 엎드려 죽어 있다. 그 위로 떠블되며...
씬 길
왕건과 고려군이 철군하고 있다. 그 모습들이 하나같이 힘이 없어 보인다.
씬 백제군 군영
씬 동 견훤의 임시 회의장
견훤의 주재하에 회의가 열리고 있다.
견훤 고려군이 철군을 시작했다고 들었어. 내 아우가 형의 말을 듣고 물러간 것이야. 자, 이제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말들 해보라.
신검 아바마마, 조물성 전투는 우리가 이겼사옵니다. 이긴 자에게는 그만한 노획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옵니다.
견훤 노획물이라...? 무얼 말하는 것이냐?
신검 우리는 신라로 가기 위하여 조물성에 왔사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체하였사옵니다. 신라로 가는 길을 다시 여시오소서.
공직 태자마마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잠시 지체되었던 길을 다시 여시오소서, 폐하.
최필 군의 사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사옵니다. 계속 출병하심이 가한줄로 아옵니다.
김총 영을 내리시오소서. 이미 고려는 송악으로 돌아갔사옵니다. 그야말로 얼마든지 신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폐하.
견훤 허나, 이제 막 화친을 한 터인데 금세 또 공격을 하기 시작한다면 예의가 아닐 것 같은데....
종훈 천만의 말씀이시옵니다. 서로의 인질을 교환하고 이리로 부르시어 형제의 의식을 갖추시고 또한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사옵니다. 그것은 즉 우리가 신라로 가는 것을 서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뜻하옵니다. 꺼리길 것이 없사옵니다.
능환 종훈 군사의 말이 지당하옵니다. 이 기회를 그냥 버리지 마시오소서.
견훤 파진찬의 생각은 어떠한가?
최승우 제장들의 말이 모두 옳사옵니다. 지금 신라의 길을 열지 않으면 언제 여시겠사옵니까? 폐하께서는 그만한 권리를 얻으셨사옵니다.
견훤 제장들의 의견이 모두 그러하다면 그리 함세. 하긴 고려로서는 이번에 우리의 행동에 대해 전혀 간섭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이 되네. 나는 다시 대야성으로 돌아가 있을 것이야. 태자 신검은 들으라.
신검 예, 폐하.
견훤 제장들을 이끌고 다시 신라로 가는 길목을 열도록 하라. 공직장군과 파진찬, 그리고 신덕, 김총 장군은 나와 함께 대야성에 남고 이찬과 능애 아우, 그리고 다른 장수들은 태자를 보좌하여 신라로 가는 길을 열도록 하라. 알겠는가?
모두들 예, 폐하.
능애 폐하, 이제부터 폐하의 천하가 된 것 같사옵니다. 삼한의 백성 모두가 폐하의 위대하심을 다 보았사옵니다. 이 기회에 서라벌까지 갈 것을 허락하시오소서.
견훤 허허허허.... 이보게, 능애아우. 욕심이 너무 과하구먼. 아무리 이가 빠진 호랑이라 하더라도 역시 범은 범이야. 신라를 그렇게까지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돼. 일단 출병하라. 그리고 이 기회에 대 백제국과 짐의 위용을 더욱 크게 드러내도록 하라.
모두들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씬 길
신검이를 앞세운 백제군이 노도처럼 밀려가고 있다. 태자들인 양검, 용검, 금강을 비롯한 능환과 종훈, 그리고 장수들인 애술, 최필, 상귀, 부달, 소달들이 가고 있다. 그 위용이 어마어마하다. 그렇게 카메라 앞을 지나쳐 가면... 천천히 디졸브 되면서
씬 신라 서라벌 황궁 외경
경애왕 (소리) 지금 뭐라고 하였는가?
씬 동 황궁 안
경애왕이 신료들을 모아놓고 크게 놀라고 있다.
경애왕 뭐가 어쩌고 어째? 우리 동맹국인 고려가 조물성 전투에서 패하고 물러갔다고...?
김율 그 뿐만이 아니옵니다, 폐하. 그 전투에 참가하였던 고려의 왕이 백제의 왕 견훤에게 무릎을 꿇었다 하옵니다.
경애왕 뭐라..? 무릎까지 꿇어...? 허허, 이런. 그래서요?
김율 무서운 돌림병으로 많은 군사를 잃은 고려의 왕이 백제왕에게 찾아가 화친을 청하고 백제왕을 상부로 존칭해 올렸다 하옵니다.
김응겸 그뿐만이 아니라 하옵니다. 두 나라는 서로 싸우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 서로간에 그 징표로서 인질을 교환하였다 하옵니다.
경애왕 이게 무슨 소리인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단 말인가?
유염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사옵니다, 폐하. 신은 일찍부터 고려를 너무 믿지 말라고 청하였사옵니다. 우리 신라는 삼국 중 제일 약한 나라이옵니다. 이제라도 고려를 버리고 백제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옵니다.
연식 백제에게 도움을 청하다니요? 그야말로 호랑이 입에다가 토끼를 맡기는 격이올시다. 지금 견훤의 대병이 몰려오고 있어요. 조물성을 떠나서 거창 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파발의 소식을 듣지 못하신게구려.
경애왕 잠시 어렵다 하여 몸을 함부로 해서는 아니되는 법이오. 고려도 우리 신라로 오려는 백제를 막으려다가 저리 되었소이다. 어떻게 갑자기 또 백제에게 머리를 숙인단 말이오? 그건 아니 될 말이오.
김부 도대체 화친이라니... 말도 아니 되옵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 신라만 죽는 일이옵니다. 전후사정을 다시 한번 살피시고 고려에게 불가의 뜻을 전하시오소서, 폐하.
경애왕 그리 하도록 하십시다. 나 이런, 원... 이럴 수가 있나? 어쩌다가 고려가 그렇게까지 어렵게 되었단 말인가? 이보시오, 아찬?
김율 예, 폐하.
경애왕 경이 다시 가 보오. 어서 가 보오. 백제를 절대로 믿어서는 아니 된다고 가서 전하시구려.
김율 예, 폐하.
경애왕 그리고 어서가서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시구려. 오고 있는 백제군은 막아야 합니다, 어서요.
모두들 예, 폐하.
김응겸 폐하, 이제라도 어서 백제에게 사신을 보내시오소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 신라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옵니다.
경애왕 아니오, 백제는 아니라고 하였소이다. 그만들 하시오, 제발...........
경애왕이 소리치자 김응겸이 불만의 표정으로 입술을 다문다. 유염도 마찬가지다. 그들 서로 눈빛이 교환되고 있고...
씬 대야성 외경
견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씬 동 임시 조당
견훤이 크게 웃고 있다. 거기, 후당에서 온 사신이 엎드려 있다. 그리고 견훤이 그 사신이 가져온 글을 읽으며 웃고 있는
것이다.
견훤 고맙구려.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오. 드디어 귀국에서 이 사람이 백제의 황제라는 것을 천하에 공표한다 하는 국서를 보내오셨구려.
사신 예, 폐하.
최승우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이번 후당나라에서 보내온 국서는 폐하를 명실공히 삼한의 주인으로 인정했음을 뜻하옵니다. 어디 그 뿐이옵니까? 8년전에는 오월국에서도 폐하께오서 백제국의 황제이면서 삼한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한다 하였사옵니다.
공직 당나라와 오월국에서 폐하를 인정하였다는 것은 중원대륙 모두가 폐하를 인정하였음을 뜻하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신덕 신이 생각해 보건데 삼한 중 어느 나라도 폐하와 같은 대접을 받은 예가 없사옵니다. 이미 삼한의 주도권 자체가 폐하께 와 있사옵니다. 오늘의 일을 천하에 널리 알리시오소서.
견훤 암, 암... 그래야지. 비로소 이제 짐이 어깨를 펼 수 있게 되었도다. 고려는 내 아우 나라가 되었고 신라는 이제 숨을 죽였고 나라 밖에서는 짐을 인정하였어. 백제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야. 대 백제의 시대가 말일세. 핫하하하.... 게다가 지금 우리 군대가 거창성까지 함락시켰다지?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폐하. 단숨에 20여 군현을 함락시키면서 거창성을 넘었다 하옵니다.
견훤 하하하... 낭보로다. 조물성 전투 이후 낭보만 거듭되는 구먼. 우리 시대가 오는 것이야. 백제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야. 하하하.....
견훤의 그러한 호방한 웃음에서... 자료화면들이 겹쳐들면서
해설 그렇다. 이 무렵은 견훤의 시대가 막을 열고 있었다. 조물성 전투에서 왕건을 굴복시키고 기선을 잡은 견훤은 곧바로 대야성에서 거창에 이르는 길목을 모두 활짝 열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 후당에서 백제왕에 관한 인증을 받게 된다. 당시 후당에서 내린 벼슬은 '검교태위겸 시중 판백제군사 면도통지휘병마 판치등사백제왕' 이라는 긴 이름의 벼슬이었다. 어쨌든 백제왕임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8년 전 오월국에서는 역시 견훤에게 '중대부'라는 벼슬을 준 바가 있었는데 역시 백제의 주인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신라도 후당과 외교를 맺고 있었으나 이 때에는 백제가 외교면에서는 제일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견훤의 말처럼 후백제의 시대가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왕건은 패전의 무거운 발걸음으로 황도인 송악에 이르고 있었다.
씬 송도 황궁
막 도성문을 들어서는 왕건의 일행들이다. 시중 김행선을 비롯하여 왕식렴, 왕규, 추언규, 태자 무, 그리고 왕후 오씨와 유씨들이 마중하고 있다. 그들의 영접을 받으며 왕건이 무거운 표정으로 내려서서 그들과 함께 황궁으로 향한다. 그 모습에서..
씬 동 편전
김행선과 황궁에 있던 신료들 그리고 복지겸이 함께 부복해 있다.
김행선 폐하, 그간의 일은 이 도성에서도 모두 알고 있사옵니다. 얼마나 고통이 크시었사옵니까?
왕건 모두가 짐의 불찰이었소이다. 이번 조물성 전투는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았소이다.
왕규 전쟁이란 매번 다 이길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어려운 곳에서는 돌아오시었으니 심신을 편히 하시오소서.
왕식렴 황도에 돌아온 이후 모든 제장들을 다 쉬게 하셨사옵니다. 폐하께오서도 잠시 국사를 잊으시오소서. 얼마나 심신이 고단하시겠사옵니까?
왕건 너무도 많은 목숨들이 죽었다네. 어떻게 내가 편히 쉴 수가 있겠는가? 한동안 조회를 열지 않을 것이네. 고생들을 많이 하였네. 모두들 쉬게 놓아두게나. 그리고 어지간한 일들은 시중과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시중도 그리 아십시오.
김행선 예, 폐하.
왕건 희생된 장졸들의 넋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큰스님들을 모시고 천도제를 열도록 하십시오. 이는 내군에서 주관을 하시오.
복지겸 예, 폐하. 그리하겠사옵니다.
왕건 그리고 특히나 병부령겸순군부령인 태평의 천도제를 잘 지내주시구려. 너무도 안타깝고 어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복지겸 예, 폐하.
왕건 또한 태평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어있는 그 자리는 내봉성령 최응이 맞도록 할 것이오. 가서 그리 전하고 영을 따르라 하시오. 이 또한 복장군이 직접 전해주시구려.
복지겸 예, 폐하.
왕건 그리고 내봉성령에는 내봉성경인 왕규를 올려서 맡기도록 하오.
김행선 예, 폐하. 삼가 영을 뫼셔 전하겠사옵니다.
왕건 어려움 속에서도 특히나 최응이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래도 최응이가 있었기에 조물성에서의 어려운 처지를 잘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어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시중은 이 점을 잘 살펴서 위로해 주시구려.
김행선 여부가 있사옵니까? 그리 하겠사옵니다, 폐하.
한숨을 내 쉬는 왕건의 표정에서..
씬 최응의 집 외경
씬 동 집 마당
가솔들이 닫혀있는 방안을 걱정스럽게 이리저리 보고 있다. 그리고 서로 보며 수군거린다.
머슴1 대체 어르신께서 왜 방문을 닫고 출입을 금하시는 겐가?
머슴2 오시면서부터 내내 그랬구먼. 벌써 이틀 째 식음을 전폐하고 외부출입을 끊으셨다네.
머슴1 곡기를 왜 끊으신다는 말인가?
머슴2 그걸 누가 알겠는가? 물한모금도 드시지 않으신다네. 어이구, 이게 웬 난리야...
씬 동 방안
최응이 방안에 돗자리를 깔고 머리를 풀고 단정히 앉아 있다.
최응 (소리) 폐하, 조물성에서 진작 죄를 청했어야 할 몸이옵니다. 어쩌면 신은 이미 자결한 의원보다도 더 못한 인물일지도 모르옵니다. 의원은 나름대로의 책임을 통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사온데, 신은 폐하를 적의 괴수 앞에 고개를 숙이게 한 죄를 짓고도 아직까지 살아있사옵니다. 이 어찌 금수만도 못하다 하지 않겠사옵니까? 이에 곡기를 끊고 삼가 눈을 감고자 하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씬 다시 동 집 마당
머슴1 이를 어찌해야 하나. 나라에 고해야 하지 않겠는가?
머슴2 그러게 말일세. 아주 죽기를 작정한 것이 아니신가? 아이고.....
그때, 막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머슴이 가서 열어주면 내군에서 나온 복지겸과 신방이 군사들과 함께 들어선다.
신방 어르신 계시는가?
머슴1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이틀 째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일체의 곡기를 끊으셨사옵니다.
복지겸 뭐라고....? 곡기를 끊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어서 전하여라. 폐하의 영을 받아 뫼셔왔느니라.
머슴1 직접 말씀하시오소서. 일체의 잡인을 금하라 하시어 저희는 들어갈 수가 없사옵니다.
복지겸 허허, 이런.... (큰 소리로) 안에 계시오이까? 폐하의 영을 뫼셔왔소이다. 계시오이까?
씬 동 집안
그러나 최응은 댓구를 하지 않는다. 바짝 마른 입술을 그저 다물고만 있다.
복지겸 (소리) 폐하의 영을 뫼셔왔소이다. 폐하께오서는 공을 병부령겸 순군부령에 제수하신다 하셨소이다. 어서 나와 영을 받자오시오.
그래도 최응은 댓구를 하지 않는다.
씬 동 마당
복지겸이 다시 외친다.
복지겸 다시 한번 말씀 올리오리다. 폐하께오서는 공에게 새로운 벼슬을 제수하셨소이다. 어서 영을 받자오시오.
최응 (소리) 참으로 미안하오이다. 이 최응이는 죄인이 올습니다. 죄인에게 어찌 벼슬이 가당키나 하다는 말입니까? 돌아가 참으로 깊으신 뜻을 받아 뫼시지 못함을 용서하시라 전해주십시오.
복지겸 폐하의 영을 아니 뫼실 참이시오?
씬 동 방안
최응 뫼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복장군께서는 가서 잘 전해주십시오. 신하의 마지막 도리를 막지 말아주십시오.
복지겸 (소리) 어찌 그것이 공만의 죄이겠소이까?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누구보다도 공을 걱정하셨소이다. (사이) 제발 문이나 여시구려. 최공 문을 열어주시오. (대답이 없다) 문을 열어주시오. 최공....
그래도 여전히 댓구는 없다. 복지겸이 혀를 차며 돌아선다.
복지겸 허허, 이런... 돌아가세. 폐하께 말씀을 드려야 겠네.
신방 예, 장군
그들이 다시 문을 빠져나간다. 방안의 최응은 여전히 담담히 앉아 있다. 디졸브되면
씬 황궁 마당
내군들이 오가고 있고...
씬 동 대전
오씨와 유씨가 무와 함께 앉아 있다.
오씨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사옵니까, 폐하? 돌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 들었사옵니다.
왕건 그랬습니다.
유씨 돌림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전염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일찍 돌아오시지 않고 어찌 지금까지 계셨사옵니까?
왕건 병사들이 죽어가는데 황제 혼자 도망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런 말은 아예 마시구려.
무 하마트면 아바마마께서도 위험하실 뻔 하셨사옵니다.
왕건 황제라는 자리는 그런 것이다. 그나마 내가 있었기에 그 정도로 수습이 된 것이다. 혼자만의 안위를 생각하여 황도로 돌아왔다면 함께 갔던 이만의 군사는 다 죽거나 흩어졌을 것이야. 너도 정윤으로서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늘 잊지 말도록 하라.
무 예, 아바마마.
왕건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나는 그 군사들을 살리기 위하여 참으로 잊기 어려운 수모를 자청하였다. 백제의 왕을 상부로 모셨고 형님이라 불러뫼셨다.
오씨 세상에... 사실이옵니까, 그것이..?
유씨 어떻게 그럴 수가... 헌데 조정에서는 아무도 그 것을 알지 못하옵니다.
왕건 내가 백제의 왕은 만난 것은 몇몇 장수들밖에는 모릅니다. 지금 저들이 부끄럽다 하여 그 일을 비밀에 붙이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니 그러한가, 정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사옵니다.
왕건 고려의 황제인 내가 백제의 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빈 것이다. 왜....? 군사들의 목숨을 위해서였다. 때로는 자존심보다도 더 크고 중요한 것이 있느니라. 그것을 잊지 말라. 백성들의 목숨을 소중히 하는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눈물을 삼키고 뼈를 깎으며 무엇이든 해야 하는 것이 황제의 본분이니라. 백성이 없는 황제는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두고두고 명심하라.
무 예, 아바마마..
그때, 대전내관의 소리가 들려온다.
대전내관 (소리) 폐하, 내봉성령 입시옵니다.
왕건 자, 그만들 물러가시구려.
모두들 예...
왕건 들라 하라.
그들이 일어나 나가고 왕규가 들어온다. 그리고 예를 올린다.
왕규 폐하, 부족한 신에게 내봉성령을 제수하시니 황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왕건 무슨 말을... 경은 학문이 뛰어나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오. 충분히 그럴만 하기에 직책을 맡긴 것이오. 그래, 어쩐 일이오? 가급적 중요한 일이 아니면 당분간 정무를 아니 본다 하였는데...
왕규 신라에서 사신이 와 있사옵니다.
왕건 신라에서.....?
왕규 만나보시겠사옵니까? 저들이 온 이유는 뻔하옵니다. 지금 백제군이 파도처럼 신라로 지쳐 들어가고 있다 하옵니다. 몇 일 사이에 무렵 20여 읍성이 함락되었다 하옵니다.
왕건 ..............음..... (괴롭다)
왕규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폐하?
왕건 편전으로 가 보십시다. 일단 나를 보고자 왔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소이까?
왕규 예, 폐하.
그들 그렇게 나가고....
씬 대전 복도
왕건들이 나오는데 복지겸이 막 들어서고 있다.
왕건 내군장군은 어쩐 일이시오?
복지겸 예, 폐하. 새로이 병부령에 봉해진 최응공에게 다녀오는 길이옵니다.
왕건 어째 같이 오지 않았소?
복지겸 예, 그럴 일이 있사옵니다. 들어가 아뢰려고 하옵니다마는...
왕건 그렇지 않아도 신라에서 사신이 왔다오. 같이 가십시다.
복지겸 아, 예...
그들 그렇게 가고..
씬 동 편전
김율이 예를 끝내며 서둘러 말한다.
김율 폐하, 우리 신라는 지금 매우 위급하옵니다. 백제의 군사들이 이미 거창을 넘어서서 서라벌을 향하고 있사옵니다.
왕건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소이다.
김율 우리 신라는 고려만을 믿고 있사옵니다. 하온데 조물성에서 고려와 백제가 화친을 맺었다는 것은 어이된 일이옵니까, 폐하?
왕건 할 말이 없구려. 그건 사실이오.
김율 신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이옵니다. 어찌하여 저 간교한 백제와 화친을 하신단 말씀이옵니까? 백제왕에게 상부라고 존칭해 올린 것이 사실이옵니까, 폐하?
왕건 .............
김율 사실이옵니까?
복지겸 양국의 황제분들끼리 하신 일을 그대가 추궁할 것이 못되는 줄 아오.
김율 또 하나 묻겠사옵니다. 서로가 인질을 교환하고 평화를 약속하고 우리 신라를 적으로 돌렸사옵니까?
왕건 그 점은 사실과 조금 다르오. 인질은 교환하였으나 신라를 우리 고려로서는 적으로 두는 일은 없소이다. 솔직히 말하겠소. 지금 우리 고려는 조물성에 패한 이후, 잠시 기운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외다.
김율 그건 무슨 말씀이옵니까?
왕규 지금으로서는 당장 신라를 돕기가 어렵다는 말씀이시오. 형편이 그리 되었으니 당분간은 그대들의 힘으로 그대들의 나라를 지키라는
것이오.
김율 너무하시옵니다. 지금 신라의 사정이 다급하옵니다. 일찍이 폐하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신라는 지금 고려를 향하는 쪽과 백제를 원하는 쪽으로 신료들이 나뉘어 있사옵니다. 이대로 우리 신라를 버리시면 백제를 원하는 신료들의 기세가 더욱 커질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옵니다. 통촉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참으로 미안하오... 지금으로서는 우리 형편이 너무도 어렵구려. 그렇다고 동맹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오. 조금만 참아 주시구려.
김율 폐하, 그럴 여유가 없사옵니다. 통촉하시오소서, 폐하....
왕규 이미 우리 고려의 형편을 모두 말씀드렸소이다. 그만 물러가시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물러 가시구려.
김율 폐하..... 백제와 화친을 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시오소서. 백제를 믿지 마시오소서, 폐하...
왕규 그만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소.
김율 물러는 가겠사옵니다. 하오나 다시 한번 말씀 올리옵니다. 백제를 믿지 마시오소서. 절대로 믿지 마시오소서.
김율이 그렇게 말하고 예를 표하고 나간다. 왕건이 괴로워하며 한숨을 쉰다. 복지겸과 왕규가 보다가 민망해 한다.
왕규 그만 대전으로 드시오소서, 폐하.
왕건 최응이는 왜 함께 오지 않았소이까?
복지겸 아뢰옵기 참으로 송구하오나 벌써 이틀 째 식음을 전폐하고 곡기를 끊어 죽음을 준비한다 하옵니다.
왕건 그게 무슨 소린가? 곡기를 끊고 죽음을......?
복지겸 조물성의 일을 자신의 죄라 하며 용서를 구한다 하였사옵니다.
왕건 왜 이렇게 못난 짓들을 하는가? 그게 어째서 혼자만의 죄라는 말인가? 왜들 그렇게 못난 짓을 하는 게야? 벌써 이틀 째 곡기를 끊었다고...?
복지겸 예, 폐하... 아무리 폐하의 영을 전하여도 듣지 않사옵니다.
왕건 (생각하다가) 아니 되겠구먼.. 복장군, 함께 가십시다.
복지겸 직접 납시겠사옵니까? 이미 날이 저물었사옵니다.
왕건 저만 신하의 도리를 지키면 다인 줄 아는 모양이오. 또 그렇게 바보같은 도리가 어디 있단 말이오. 최응이가 죽어서 과연 누가 좋아하겠소이까? 누가 말이오. 허허, 이런...
씬 인서트 (최응의 집 방안)
최응이 더욱더 초췌하게 변해가고 있다. 그 표정에서... 견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씬 대야성 외경 (밤)
견훤의 웃음소리가 커지고 있다.
씬 동 성안 견훤의 처소
견훤이 유쾌한 듯 웃다가 신라에서 온 밀사를 본다. 최승우도 함께 해 있다.
견훤 지금 신라에서 왔다고 하였느냐?
밀사 예, 폐하.
견훤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것이냐? 누가 너를 보냈다고?
밀사 국상이신 김응겸 어르신께서 보냈사옵니다.
견훤 왜.......? 우리 군대가 날개달린 범처럼 너희 서라벌로 가고 있으니 아마도 두려웠던 게로구나. 그런 것이냐?
최승우 사실이옵니다, 폐하. 국상 김응겸은 대신 유염과 더불어 우리 백제를 흠모하는 자들이옵니다. 신이 미리 밀지를 읽어 보았사옵니다.
견훤 어허, 그런가? 도대체 무얼 원하는 것인가, 저들이...?
최승우 폐하, 지금 저들은 고려와 우리 백제를 원하는 무리들로 각각 갈라져 국론이 분열되어 있사오니 밀지를 보니 저들은 폐하께서 서라벌에 입성하시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견훤 뭐라고....? 짐이 서라벌로....?
밀사 예, 폐하. 어차피 우리 신라는 지금의 왕통이 잘못되어 있사옵니다. 마땅히 김씨 성의 진골에서 왕통이 이어져야 함에도 전 왕에 이어 다시 박씨 성의 사람들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오시어 이를 바로 잡아 주시오소서.
견훤 (한참 보다가) 듣자하니 참으로 잘못되었구먼. 정말 잘못되었어.
밀사 이것이 다 고려를 좋아하는 잘못된 무리들이 저지른 일이옵니다. 저희가 길을 열겠사옵니다. 서라벌로 오시오소서, 폐하. 황궁의 문을 활짝 열어놓겠사옵니다.
그 말에 견훤과 최승우가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교환한다.
최승우 폐하, 바야흐로 백제의 날이 오고 있사옵니다. 서라벌의 문을 열어놓겠다고 하옵니다. 폐하를 청하고 계시옵니다.
견훤 그 말이 틀림없는가?
밀사 우리 신라의 국상이신 김응겸 어르신께서 보내신 밀서이옵니다. 어찌 장난이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최승우 저들은 지금의 현실을 다 읽은 것이옵니다. 그리고 결정한 것이옵니다. 폐하의 힘과 대 백제국의 위력을 본 것이옵니다. 허락하시오소서. 허락하시오소서, 폐하. 저들이 친 백제국의 새로운 왕정을 새우려 하옵니다. 그래서 밀사를 파견하고 밀지를 전해온 것이옵니다. 이야말로 삼한 통일의 서광이 보이는 것이옵니다. 천하가 비로소 폐하를 향해 무릎을 꿇기 시작한 것이옵니다. 폐하.....
견훤 ..............?
최승우의 열정적인 권고와 점차 상기되어가는 견훤의 그 표정에서....
<150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