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151회>
<줄거리>
최응은 조물성에서의 치욕적인 화친조건에 대한 죄책감에 식음을 전폐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는다. 순군부의 장수들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거침없이 신라로 진격해 들어가는 백제에 대해 속수무책인 현실을 개탄하며 술렁인다. 군부의 격렬한 항의로 조회가 열리고 군사를 일으키자는 상소가 빗발치지만 백제에 볼모로 가있는 사촌동생 왕신으로 인해 왕건은 선뜻 결심을 하지 못한다. 답답해하던 왕건의 의형제들은 최응을 찾아나서고 그에게서 혼미한 정국을 돌파할 기막힌 비책을 전해듣는데....
씬 송도 저자거리 (밤)
황제인 왕건 일행들이 오고 있다. 복지겸과 신방들이 보좌하고 있다. 그리고 황궁에 새로 들어온 의원도 함께 가고 있다. 그들은 큰 길을 돌아 어느 사잇길로 접어들고 있다.
복지겸 폐하, 밤이 너무 늦었사옵니다.
왕건 일이 급하니 어찌 시간을 따지겠소이까? 허허 참... 이틀이 넘고 사흘째라..? 사흘째 물한모금 마시지 않았단 말인가?
복지겸 신이 좀더 소상히 알아보았사온데, 실은 그 이전부터 이미 죽을 각오를 하였던 것 같사옵니다.
왕건 그건 또 무슨 소리오? 그 이전부터라니..?
복지겸 우리 군대가 조물성에서 철수를 시작한 그날부터 실은 모든 것을 끊었다고 하옵니다. 그러니까 벌써 칠팔일이 되어 가는 것이옵니다.
왕건 저런, 저런... 이렇게 안타까울 때가 있나. 그 미련한 사람이 어찌 모든 죄를 자기 혼자 만이라고 생각하는가? 더 큰 죄인은 바로 짐인데 말이오. 이런, 쯧쯧쯧....
복지겸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폐하? 실로 죄를 논하자면 그 전투에 참가했던 모든 장수들이 하나같이 죄를 받아야 하옵니다.
왕건 나쁜 기억일수록 빨리 잊는 것이 좋은 법이오.
복지겸 하오나, 장수들은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하나같이 그 날의 분함을 되 갚아 줄 날만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병부령 최공만이 아니옵니다. 실은 모두들 지금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으로 훗날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폐하.
왕건 (긴 한숨) 지금 생각하여도 그 조물성 전투는 참으로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았소이다. 허나, 모두 다 나쁜 일만은 아니었어요. 우리는 궁금했던 사람들을 다 만나볼 수 있었고. 저들의 사정을 다 읽었습니다.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될 것이오.
복지겸 물론 그럴 수도 있사옵니다. 허나, 부끄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사옵니다. 소신들이 이러할진데 그 만남을 추진한 최공이야 오죽하였겠사옵니까? 더욱 가슴이 아팠을 것이옵니다.
왕건 허나, 내가 저의 마음을 다 알고있거늘 왜 그렇게까지 한단 말이오.
복지겸 폐하께오서 황궁의 전의까지 데리고 오시는 줄 알면 최공도 조금은 달리 생각할 것이옵니다.
왕건 제발 마음을 돌려야 할 것인데... 허허, 참...
그들 그렇게 가고...
씬 황궁 외경
씬 동 황후전
황후 오씨와 정윤 무, 유씨가 마주해 있다.
오씨 폐하께오서 새로이 병부령에 제수된 최응공 집으로 향하셨다 하네.
유씨 저도 방금 들었사옵니다.
오씨 세상에... 보지 않아도 그 당시의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만 하이. 오죽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을 청하고 있겠는가?
유씨 그러게 말이옵니다. 평소에는 그토록 차분하고 조용하던 최공이 아니옵니까? 얼마나 독하게 마음을 먹었으면 굶어서 죽겠다고
하겠사옵니까?
오씨 폐하의 칙령도 거절을 했다고 들었네. 참으로 모질게 마음을 먹은 모양일세.
무 실은 최응공뿐만 아니라 많은 장수들이 지금 울분을 삭이며 칩거하고 있사옵니다.
유씨 칩거라니요, 정윤마마?
무 아바마마께오서 한동안 조회를 여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많은 전장터들이 우리 고려로서는 지금 할 일이 없어졌사옵니다. 백제와 싸움이 없어졌기 때문이옵니다.
오씨 싸움이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정윤?
무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어마마마. 백제는 지금 신라땅을 계속해 공략해 들어가고 있사옵니다. 우리 고려로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보고만 있사옵니다. 그러니 장수들이 얼마나 울분이 끓겠사옵니까?
오씨 그래도 나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평생을 그 전쟁이란 말만 듣고 살아왔어요. 이제는 정말 그 말만 들으면 진저리가 처집니다. 언제나 끝날꼬 그 전쟁이란 말이....
씬 유금필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유금필과 신숭겸, 박술희가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모두들 표정이 심각하다.
박술희 소제가 오면서 들었는데 폐하께오서 새로이 병부령에 제수된 최응공 집으로 향하셨다 하십니다.
신숭겸 나도 들은바가 있네. 지금 그 최응이라는 사람이 죽기를 청하고 있다더구먼. 벌써 여러 날 되었답니다, 형님.
유금필 (착잡하다) 하긴, 많은 심적 부담이 있었을 것이야. 폐하께서 백제의 견훤왕에게 치욕을 당하신 것은 다 그 사람이 주선을 한 일일세.
신숭겸 그러나 결정을 내리신 분은 폐하이십니다. 최응 그 사람만을 나무랄 수는 없지요. 어린 사람이 아니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형제들도 그러했고 여러 신료들에게도 심하게 타박을 받지 않았습니까?
박술희 뭐, 사실이 그렇게 되었지요. 일단은 그 모든 것을 그 사람 혼자서 주관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결과적 책임 말입니다.
유금필 책임까지 말할 수는 없다고 보네. 그럴 일도 아니고... 사실, 우리가 너무 몰아 부친 점도 있기는 있어. 그리고 우리 형제도 그래, 폐하의 의제들로서 무엇하나 내세울 일이 없네 그려. 그러면서 남을 탓한다는 것은 옳지가 않아. 폐하께서 최공 집으로 가신 것은 잘하신 일일세. 지금 이 조정에 최응이 같은 인물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신숭겸 그건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 더 시급한 것은 과연 우리 고려가 언제까지 이렇게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말입니다.
박술희 조회마저 당분간 쉰다하니 온 세상이 갑자기 다 멈춰버린 것 같습니다.
신숭겸 폐하께서 왜 저렇게까지 숨을 죽이고 계시는 것일까요? 조회도 당분간 열지 말아라, 싸움터에도 나가지 말아라, 신라에서는 사신이 와서 다급하게 청하고 있는데도 도와줄 수 없다?
유금필 다 그 조물성 전투 때문이야.
박술희 이대로 우리만 손발이 묶여 있다가는 언제 어떻게 백제에 당하게 될 지 아무도 모릅니다. 폐하께서는 다시 일어서셔야 합니다.
유금필 아무튼 최응 그 사람이 어서 조정으로 돌아와야 하네. 그리고 나서 무얼 결정해도 해야 할 것이야. 돌아와야지... 그 사람이 필요해. 지금 이 황도에는 그만큼 군사에 밝은 사람이 없어.
신숭겸 아무래도 우리가 폐하를 한번 찾아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금필 그래야 할 것 같네.
씬 최응의 집 근처
왕건 일행들이 다가오고 있다. 오다가 복지겸이 저만큼 가리킨다.
복지겸 저기, 저 집이옵니다, 폐하.
왕건 오, 그래요? 헌데, 저건 무언인고..?
왕건이 가리키는 그곳은 최응의 집 대문이다. 대문에 사람이 죽은 것을 알리는 조등하나가 걸려 있다.
신방 폐하, 아무래도 조등같아 보이옵니다.
왕건 조등이라니...? 아니 그럼 벌써 최응이가 죽었다는 말인가? 조등이라니..? 어서 가 봅시다. 이게 무슨 일인고..?
그들 그렇게 다가간다.
씬 동 최응의 집
왕건 일행들이 다가왔다. 신방과 내군의 군사들이 문을 두드린다.
신방 문을 열어라. 폐하께서 납시셨느니라. 문을 열어라.
그래도 안에서 댓구가 없다. 왕건이 그 조등을 이리저리 본다. 복지겸이 다시 매몰차게 말한다.
복지겸 이보게, 신부장. 폐하의 영이라고 전하게. 폐하께서 오셨다고 속히 문을 열라고 하게. 황명이라고 하게.
신방 예, 장군. 어서 문을 열어라... 황제폐하의 영이시다. 어서 문을 열지 못하고 무얼 하는가? 문을 열어라....
모두들 그렇게 소란 속에 기다리고 있고...
씬 동 집안
머슴들이 어쩔 줄을 모른다. 대문 쪽을 보다가 최응의 방 쪽을 본다. 신방의 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신방 (E) 어서 문을 열지 못하고 무얼 하는가? 폐하께서 납시셨다고 하지 않는가?
씬 동 방
최응이 핼쓱한 모습으로 밖의 소란을 듣고 있다. 신방의 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그의 입술을 말라 터지고 머리는 여전히 풀어 내렸다. 곧 쓰러지기 직전의 초췌한 모습이다. 신방의 소리는 계속되고...
씬 다시 동 집 마당
머슴1과 2가 다른 하인들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구르다가 의논한다.
머슴1 어쩌면 좋은가? 폐하께서 오셨다고 하지 않는가?
머슴2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문을 열지 말라고 하셨네.
머슴1 아무리 그래도 폐하께서 와 계신데 어찌 이러고 있겠는가? 얘들아, 어서 문을 열어라. 열어 드려라.
다른 하인들이 달려가 문을 연다. 그 문 밖에 왕건 일행이 서 있다가 머슴 1을 보고 말한다.
복지겸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여느냐? 혼들이 나고 싶은 겐가?
머슴1 송구하옵니다. 주인 어르신의 말씀이 워낙 완곡하셨는지라...
왕건 여기 걸린 이 조등은 무엇이냐?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머슴2 예, 폐하. 주인 어르신께서 이미 스스로 죽음 목숨이라 하시고 조등을 내걸라 하시어 걸어 놓았사옵니다.
왕건 들어가십시다.
복지겸 예, 폐하.
그들 마당으로 들어와 최응의 방 앞에 선다. 복지겸이 이른다.
복지겸 최공, 황제폐하께오서 납시셨소이다. 속히 나와서 맞으시오.
최응 ................(댓구 없고)
복지겸 속히 문을 열고 나오지 않고 무얼하시는 게요? 어서 문을 여시오.
그래도 댓구가 없다. 왕건은 한숨을 쉰다. 복지겸이 어쩔가 눈치로 묻는다.
씬 동 방안
최응은 참선에 든 듯 앉아 있다. 복지겸의 소리는 계속된다.
복지겸 (E) 어서 문을 여시오.
씬 다시 마당
복지겸이 거듭 몇 번을 말해도 댓구가 없자 왕건이 나선다.
왕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이보게, 최응이? 내가왔네. 황제가 왔네. 문을 열게나. (댓구 없다) 어서 문을 열게나.
그래도 댓구가 없자 왕건이 다시 말한다.
왕건 가서 문을 열어라.
복지겸 문을 열어라.
그러자 신방과 내군들이 달려가 닫혀있던 문을 활짝 연다. 거기 최응이 그렇게 홀로 앉아 있다. 왕건은 플어해친 머리와 초췌한 모습에 금방 목이 메인다. 그리고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가 최응이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그리고 예를 올린다.
최응 이미 죄를 청하여 죽은 목숨이옵니다. 여기까지 왕림하심은 옳지 않사옵니다. 어서 이 죄인의 집을 떠나주시오소서, 폐하.
왕건 이 사람 최응이, 자네가 굳이 죄인을 청한다면 나 또한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들어가 손을 잡는다) 자네가 이러면 이 나라가 어찌되겠는가? 그만 되었네. 어서 일어나게.
최응 아니옵니다. 신하의 도리를 다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허면, 내가 한 가지 물어봄세. 자네는 신하의 도리를 다해서 충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는 황제의 도리를 다 못하여 세상의 조소를 받는다면 사람들은 무어라 할 것인가?
최응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이미 신이 택한 길이옵니다.
왕건 (크게 노하며) 그래서, 최응이는 신하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죽음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얻고 나는 그 최응이로 하여 세상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야. 사람들은 좋은 신하를 잃고 혼자만 살아남은 비겁한 황제라고들 하겠지. 그렇게도 자네의 명예만 소중하던가? 그것이 황제의 위엄을 밟고 올라설 만큼 소중하던가? 과연 최응이의 것만 소중하고 황제의 것은 어떻게되든 상관이 없다 그런 말이 아닌가? 이럴 수가 있는가? 이것이 내가 본 최응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런 것인가?
최응 폐하, 신이 어찌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다만, 뫼시는 주군으로 하여금 적장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 죄, 이는 구족이 멸하고 부관참시를 당해도 부족한 대죄 중에 대죄이옵니다. 신은 그 죄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음으로서 세상에 폐하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허락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허락할 수 없다. 우리는 함께 죽어야 하는 운명이야. 그렇게 쉽게 간다면 너무도 섭섭하지. 아직 할 일이 많아. 내가 백제의 왕에게 고개를 숙였다면 언젠가 백제의 왕이 다시 나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 죽기를 원하거든 그 일이 끝나고 죽어야 할 것이야. 그게 바로 신하의 도리일 것이야. 아니 그런가? 내 말이 틀렸는가, 최응이..?
최응 (울음 터지며) 폐하.... 하오나, 지금으로서는 지난 죄가 너무도 중하옵니다. 죽음이 아니면 도무지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폐하...
왕건 자네의 마음은 알고 있네. 그러나 나는 그대가 필요한데 그대는 내가 필요 없다고 가버린다면 되겠는가? 아니 그런가, 최응이...? 나를 도와주게. 자네가 필요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해주게. 어서... 어서, 이 사람아..
최응 폐하,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어찌 그처럼 간곡하신 말씀을 더 이상 거절하겠사옵니까? 삼가 받들겠나이다. 하오나, 오늘로서 이미 최응이는 죽었사옵니다. 지금의 이 목숨은 덤이라 생각하고, 폐하를 위해 다시 한번 분골쇄신 일해보겠사옵니다. 오늘의 일을 결코 잊지 않겠사옵니다, 폐하.
왕건 고맙네..... 고맙네, 최응이 이 사람아. 의원은 무얼 하는가? 몸이 말이 아닐세. 어서 좀 살펴주게나.
의원 예, 폐하.
왕건 복장군, 오늘은 여기서 묶을 것이오. 황궁은 내일 돌아가도록 하십시다.
복지겸 예, 폐하.
왕건 황궁에 사람을 다시 보내. 따뜻한 술과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하시오. 의원은 아끼지 말고 좋은 약재를 다 챙겨 탕제를 다려 주도록 하라.
그들 예, 폐하.
왕건 지금 이 나라에 최응이 그대만한 보물이 어디 있는가? 참으로 박정한 사람일세. 황제는 어떻게 하고 자네만 가려고 하였는가? 그렇게는 아니 되지. 절대로 그렇게는 아니 되지.
웃고 있는 왕건의 모습과 최응의 그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씬 동 집 후원 혹은 사랑
최응이 말쑥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왕건이 차를 권한다. 복지겸이 함께 해 있다.
왕건 태평 군사가 죽고 나서, 나는 자네만 의지하고 있네. 앞으로는 이러지 말게. 내가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아는가?
최응 송구하옵니다.
왕건 사람이 살다보면 늘 좋은 일과 궂은 일이 함께 하는 것일세. 그 옛날 유현덕은 불우한 시절 이리저리 떠돌다가 조조의 수하에서 식객으로 있기도 했었고 또 반대로 조조 또한 천하를 호령하다가 한때는 유현덕의 수하인 관운장에게 목숨을 구걸하기도 하였네. 사는 것이 다 이와 같은 것일세.
최응 예, 폐하.
왕건 이제 내가 먼저 견훤왕에게 빚을 졌고 신세를 졌네. 그렇다면 다음에는 누구 차례이겠는가? 바로 백제왕의 차례가 아니겠는가?
복지겸 듣고 보니 정말 그러하옵니다, 폐하. 꼭 그리 될 것이옵니다.
왕건 암, 그리 되어야 하고 말구... 그러한 때를 누구보다도 최응이 자네가 잘 볼 수 있는 사람일세. (한숨) 지금 우리의 고려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 아마 한동안 이런 세월이 계속되겠지. 그러나 그 또한 우리가 감당해야할 고통일세. 참을 수밖에...
두 사람 .........
왕건 울분이 끓지만 당분간은 더 참을 수밖에....
왕건은 술을 마시면서 그렇게 긴 한숨을 털어낸다. 그 표정에서...
씬 배현경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이곳에서도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다.
배현경 폐하의 이야기를 들으셨소이까, 홍장군?
홍유 예. 신료들은 지금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폐하께서 병부령 최응공 집에 가셨다는 일 말입니다.
배현경 최응이 그 사람이야 원래 담백하고 맑은 성정이니 반드시 자신의 죄스러움을 갚으려 하였겠지요.
홍유 폐하께서 그 일로 가셨으니 만큼 뭐 잘 수습이야 되겠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이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이올시다. 우리는 조물성에서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 것 같소이다.
배현경 맞아요. 이거야 어디 손발 다 잘린 형국이 아니오이까? 어쨌든 신라는 우리 동맹국이올시다. 그 동맹국이 적의 침략을 호소하고 구해달라고 하는데도 그걸 거절했다는 것이에요.
홍유 폐하께서 백제국의 왕과 맺은 화친 약속을 지키시려고 하시는 것이겠지요.
배현경 허나, 그게 어디 지켜질 약속이오이까? 삼척동자도 웃을 일입니다. 백제는 마음대로 신라를 공격해 들어가도 좋고, 우리 고려는 그저 지켜만 보아야 하고... 뭐, 그런 거 아닙니까?
홍유 이래가지고 언제 조물성에서의 한을 갚을 수 있겠소이까? 언제까지 침묵을 지킬 것인지 정말로 답답합니다. 도무지 기약이
없지 않소이까?
배현경 우리 두 사람뿐이 아니올시다. 지금 이 황도 안에 있는 장수들은 모두들 다 같은 심정이올시다. 아무래도 폐하께 한번 그 의중을 여쭈어 봐야겠소이다.
홍유 당분간은 조회도 열지 말라 하셨다 들었소이다.
배현경 그 또한 이치에 맞지 않소이다. 참담한 패전을 하고 돌아왔으면 분기탱천하여 그 한을 갚음이 당연한 것이올시다. 시중어른께 말씀을 드려서 조회를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가 나가야 할 방도를 찾아야 하지요. 그것도 빨리 말입니다.
씬 최응의 집 외경 (아침)
왕건 (E) 이 집 정원은 참으로 소담하구먼 그래....
씬 동 집 정원
왕건이 일어나 아침 산책을 즐기고 있다. 산새 울음소리가 청명하다. 그 옆에 최응이 함께 해 있다.
왕건 주변이 작은 야산 들녘에 이어졌네 그려. 담도 없고...
최응 예, 폐하. 얼마나 시원스럽고 좋사옵니까?
왕건 대 고려 중신의 저택치고는 너무 집이 협소한 것 같네. 겨우 방이 두 칸 아닌가? 정원이라기 보다는 뒷마당일세.
최응 신에게는 이 집도 과분하옵니다. 한 몸 누일 곳 있으면 되는 것이고 잠시 머물다 가는 세상이옵니다. 집이 크고 적은 것이 무슨 상관이겠사옵니까?
왕건 허허, 그런가? 자네는 마치 남의 얘기하듯 하는 구먼 그래. 그러나 사람이 공을 세우고 부귀를 얻으려 하는 것은 본능일세. 그런 면에서 자네는 너무도 맑고 욕심이 없어.
최응 천만의 말씀이시옵니다. 폐하께오서 삼한 통일의 대업을 이루시는 것을 보고 죽고 싶사옵니다. 그보다 더 큰 욕심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왕건 하하하... 하긴 그러하이. 고맙네. (진지하게 보다가) 모처럼 자네 집에 와 하룻밤을 자고 보니 만가지 시름이 다 걷히는 것 같네 그려. 내가 있는 황궁이라는 곳도 오래 지네보니 그렇게 편한 곳이 아니더구먼. 그야말로 늘 걱정거리가 태산처럼 기다리고 있는 곳이야. 허허허.... 가끔씩 놀러 오겠네.
최응 한 나라의 주인께서 어찌 미천한 신하의 집을 자주 오신다 하시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지난밤의 일로도 신은 평생 머리를 잘라 신을 삼아 올려도 부족하옵니다. 두고두고 저희 후손들이 폐하께서 왕림하셨음을 기억할 것이옵니다. 참으로 너무도 광영이 크옵니다.
왕건 그렇지가 않아. 처음 나라를 일으켜 다스리는 것을 기업을 일으킨다고도 말하네. 기업이 무엇인가? 이야말로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일세. 자네가 훗날 두고두고 오늘을 기억한다고 하였듯이 나 또한 영원히 후대에 일러 경을 기억하라고 하겠네. 잘해 보세. 잘해 보세, 최응이...
최응 참으로 폐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으시옵니다. 어제 다시 살아난 이 목숨 오로지 폐하를 위해서만 바칠 것이옵니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왕건 고맙네.
그들 그렇게 서로를 훈훈하게 보는데 복지겸과 신방들이 들어선다.
복지겸 폐하, 황궁으로 돌아갈 차비가 다 되었사옵니다.
왕건 그렇게 하십시다. 자 그렇다면 자네는 내일 조정에 들어 짐이 내리는 첩지와 관인을 받아야 할 것이야. 그리고 자네의 소임을 한번 들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최응 그리 하겠사옵니다. 자, 어서 납시오소서, 폐하.
왕건 그렇게 함세. 가십시다, 복장군...
복지겸 예, 폐하. (큰 소리로) 폐하께서 황궁으로 돌아가신다 차비를 차려라
신방 (복창한다) 차비를 차려라.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왕건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치면서 디졸브 되면...
씬 인서트 (아침, 저자거리)
왕건 일행들이 황궁으로 돌아가고 있다. 백성들이 연도에서 보고 있다.
백성1 얼마나 자애로운 황제이신가? 신하가 제 잘못을 알고 죽음으로 대신하려는 것을 저렇게 밤새 위로하고 가신다네.
백성2 그러게 말일세. 소문에 들으니 우리 황제께서 백제의 왕에게 수모를당하셨다는구먼. 최응이라는 대신이 그 죄로 죽음을 청하였다는 것이야.
백성1 하지만 저렇게 밤새 만류하시고 돌아가시고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저런 황제를 위해서라면 누구든 목숨을 내어놓을 것일세.
왕건들 그렇게 사라져가고...
씬 황궁 외경
씬 동 황궁 광평성 회의장
배현경, 홍유, 염상, 김언, 박수문, 박수경 형제가 함께 해 있다. 시중인 김행선이 난처한 표정을 짖고 있다.
배현경 시중어른, 이럴 수가 있사옵니까? 아무런 대책이나 계획도 없이 고려라는 나라가 갑자기 방향을 잃고 내려앉고 있사옵니다.
김행선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폐하께서 당분간 조회를 피하라 하시기에 그리하고 있는 것뿐이올시다. 나라를 운영하는 일이 어찌 대책이나 계획이 없이 되겠소이까? 말씀이 좀 심하시구려.
홍유 한다하는 이 나라 장수들이 모두 집안 사랑방에 앉아 책을 읽거나 장기로 소일하고 있사옵니다. 지금이 그런 때이옵니까? 조물성에서의 패전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가를 시중은 아시옵니까?
김행선 물론 좀 듣기는 들었소이다. 허나, 모든 국사는 폐하께서 하시는 것이올시다.
염상 그러나 폐하께서 모르시는 일이 있거나 잘못 알고 계시는 것이 있다면 신하로서 마땅히 간해 올려야 하옵니다.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옵니다.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저 오만한 백제를 쳐야 하옵니다.
김언 지금 많은 장수들이 울분에 쌓여 있사옵니다. 시중어른, 폐하께 청하시어 조회를 열도록 해 주시오소서. 마땅히 그곳에서 다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을 논해야 하옵니다.
박수문 장수들 뿐만 아니라 하급 부장들과 수많은 군사들이 하나같이 의아해 하고 있사옵니다. 도대체 조물성에서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길래 지금 고려가 이렇게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죽어 있는가 하고 말이옵니다.
박수경 시중어른, 모두의 의견이 같사옵니다. 폐하를 알현하시고 군부의 뜻을 전해주시오소서.
김행선 글쎄, 나는 폐하의 영에 따라서....
배현경 이대로는 아니 되옵니다. 나라가 위기올습니다. 군사적 침략을 받는 것 만이 위기가 아니라 이렇게 무능하고 무익하게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위험한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그런 영을 내리셨다면 시중께서라도 문무신료들을 모으시오소서.
홍유 그리 하시오소서, 시중어른. 이러다가는 신라도 잃고 나라도 잃는 수가 있사옵니다.
김행선 거 말을 조심들 하시구려, 나라를 잃다니....?
홍유 그만큼 위기라는 말이옵니다, 시중어른. 나라 밖의 일이 그만큼 다급하고 화급하다는 것이옵니다. 아직도 모르시옵니까?
김행선 아, 좋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기는 알겠어요. 그렇다면 일단 그대들의 뜻을 각자 모아서 대전으로 올려 보십시다. 즉 상소를 올려들 보자 이런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조회를 청하는 것이 신료들의 본분이올시다.
배현경 처음부터 그런 이야기는 있었사옵니다. 여기 온 여러 장수들이 이미 시중 어른께 오기 전에 상소문을 올렸다 이런 말이옵니다. 이제는 시중 어른께서 나서셔야 하옵니다. 아시겠사옵니까?
김행선 아 아.. 알겠소이다. 나 이거야 원.... 정 그렇다면 일단 광평성의 이름으로 신료들을 모이도록 하겠소이다. 그렇게 하십시다. 곧 패를 띄우겠소이다. 허허, 나 이거야 원....
씬 대전 외경
씬 동 대전 안
왕건이 서서 서성거린다. 그 옆에 세 형제가 함께 해 있다.
왕건 지금 순군부의 장수들이 광평성으로 몰려가 있다고...?
유금필 예, 폐하. 그렇다 하옵니다.
왕건 무엇때문에....?
유금필 바로 여기 올라온 많은 상소의 내용 때문이옵니다. 보셨사옵니까?
왕건 다 보았네. 아우들도 올렸더구먼.
신숭겸 장수들의 불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옵니다. 한번 패전으로 지금 저희 군대가 너무도 움츠려 있다고들 말하고 있사옵니다. 당연히 군사를 재정비하고 기회를 보아 나가야 할 것이옵니다, 폐하.
왕건 .............
박술희 이제 새로 벼슬을 제수받은 최응공도 다시 조정에 출사하기로 하였다 하니 이 일을 논의에 붙이도록 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글쎄....
박술희 폐하, 모두들 까닭을 모르겠다고 하옵니다. 왜 군부에 별다른 영을 내리시지 않사옵니까?
왕건 (한참 보다가) 왜냐...? 왜냐고 물었는가...?
박술희 그러하옵니다. 모두들 답답하다 하옵니다.
왕건 국가간의 약속은 지켜져야 하네. 저들이 우리를 치는 것도 아니고 신라를 치고 있어.
신숭겸 신라는 저희 고려의 동맹국이옵니다. 이를 외면하심은 결국 신의를 잃게 되시옵니다.
왕건 조물성에서 돌아올 때 우리는 지칠 대로 지치고 피곤하였네.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 사람이란 기운이 있어야 무얼 하던 할 수 있는 것일세.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야. 해서 좀 쉬자는 것일세.
유금필 백제가 신라롤 다 먹어치운 뒤에는 이미 늦사옵니다. 오히려 왕성한 군사력으로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낼 것이옵니다.
왕건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오래 싸우다보면 결국은 지치는 것이야. 백제가 신라와 싸워 지치는 동안에, 우리는 힘써 군사력을 보강하자는 것일세.
신숭겸 허나 잘못하다가는 백성들과 군의 사기가 모두 땅에 떨어질 것이옵니다. 군사를 움직여야 하옵니다.
왕건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하였어. 자네들 말이 다 일리가 있다고 하세. 그렇게 되면 인질로 가 있는 내 아우는 어찌 되겠는가? 백제에 가 있는 내 아우 신이 말일세. 그 생각들은 해 보았는가?
비로소 세 사람은 아차 싶다. 왕건이 다시 말한다.
왕건 아무도 그 생각들은 아니하더구먼. 하기사, 생각을 못할 수도들 있겠지. 허나, 나는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밤잠을 잘 못 이루네.
신숭겸 이쪽에도 진호라는 볼모가 와 있사옵니다. 설마, 어찌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왕건 아니야, 아우들은 모른다네. 아무튼 좀 더 지켜보세. 당장 백제가 처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급할 이유가 없네. 자네들도 이 기회에 좀 충분히 쉬게나. 그럴 필요가 있어.
그들 ............. (한숨만)
씬 황궁 담길
세 형제가 돌아 나오고 있다. 한동안 말이 없더니 신숭겸이 유금필을 본다.
신숭겸 이제 뭔가 윤곽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형님.
박술희 윤곽이라니요?
신숭겸 문제의 핵심은 그 볼모에 있었습니다. 백제에 끌려가 있는 폐하의 사촌아우 왕신공 말입니다. 친 아우보다도 더 아꼈던 사람입니다.
유금필 자네 말을 들으니 그런 것도 같네 그려. 허나, 백제에서도 볼모가 와 있어. 중요하기로 따지면 서로가 피장파장이지. 참, 그 백제의 볼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신숭겸 왕식렴공의 집에 맡겨져 있사옵니다. 혹시나 무슨 해를 당할까봐 왕신공의 친형님이 되시는 왕식렴공에게 특별히 부탁하셨다 하옵니다. 아무튼 이제 최응공이 출사를 한다 하니 그 쪽과 한번 의논해 봐야겠습니다. 병부의 수장은 최응공이니까요.
유금필 그렇게 하세. 아무튼 일이 어렵게 되었네. 폐하께서 왕신공 때문에 주저하신다면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야. 허허, 참....내일 조회에서 결과를 한번 보세나.
그들 그렇게 지나쳐 가면... 디졸브
씬 대전
왕건이 한숨을 쉰다. 허공을 보는 그의 시선으로 마지막 인사를 올리던 왕신의 모습이 지나친다. 다시 도리질을 하는 왕건의 모습에서...
씬 광평성 회장
문무신료들이 모였다.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 배현경, 홍유, 김행선, 최응, 최지몽, 왕규, 추언규, 김언, 염상, 박수문, 박수경 형제, 왕식렴들이다.
김행선 자, 오늘 우리 광평성에서 여러 문무신료분들을 모시고 회의를 좀 하게 되었소이다. 폐하께서는 조회를 잠시 쉬라 하셨으나 신료들의 청이 하도 열화 같아서 이렇게 모인 것이올시다. 자 말씀들 하시구려.
배현경 이미 상소문도 올려드렸고 또 시중어른께 말씀도 드렸사옵니다. 조물성전투 이후, 급속히 사기가 저하된 군의 문제를 논하려는 것이옵니다.
홍유 새로이 순군부와 병부를 맡은 최응공은 어찌 생각하시오? 우리 장수들은 지금의 국가적인 침묵을 위기로 보고 있소이다.
최응 .....................
왕규 (눈치 보다가) 그 동안, 잠시 병중에 계셨다가 막 나오신 처지올습니다. 당장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염상 병부령이 왜 몸이 편치 않으셨는지 다 압니다. 그 아픔은 우리 모든 신료들의 아픔이올시다. 이제 그것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 이 회의이올시다.
추언규 폐하의 영은 하늘의 법이올시다. 그 영을 지키는 것은 또한 신하들의 본분입니다.
김언 여기 나온 신료분들 치고 자신들의 본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아니 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들 답답해 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추언규 폐하의 영이라 하셨습니다. 신료들이 한번 내려진 영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올시다.
홍유 그러나 폐하께오서 잘 알지 못하시고 하시는 일은 신하들이 바로 알려드려야 하는 것이오. 어떤 일이 더 이치에 합당한 것이겠소이까?
최지몽 소생이 듣자하니 모두의 말씀이 다 옳은 것 같사옵니다. 그러나 진정 답답한 것은 우리 신료들이 폐하의 의중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이옵니다.
유금필 허허, 그 참 의미 있는 말 같구려. 이 사람도 공감합니다.
최응 ...............?
왕식렴 ...............(가벼운 한숨)
염상 아무튼 모든 신료들의 의견은 싸우자는 것입니다. 이대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들 그렇소이까?
모두들 그렇소이다. 싸워야 합니다.
배현경 시중께서 우리들의 의견을 다시 한번 폐하께 전해 주셔야겠사옵니다. 우리들의 한결같은 여망을 저 백제에게 조물성에서 있었던 치욕의 댓가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이것은 국론입니다. 만약에 폐하께오서 끝까지 거절하신다면 우리 신료들이 모두 대전에 몰려가 석고대죄하며 하회를 기다리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아니들 그렇소이까?
모두들 그렇소이다.
김행선 허허, 이거 참...
배현경 일찍이 신하들이 이처럼 폐하의 영을 거역한 적이 없었습니다. 허나, 오늘의 이 일은 나라를 살리고자 하는 일입니다. 시중어른, 사흘의 말미를 드리겠사옵니다. 폐하께 주청해 주시오소서. 아니면 모두들 몰려가 자리를 깔고 석고대죄할 것이옵니다.
김행선 허허, 이거 참... 이거 참....
김행성은 계속 어쩔 줄 모르고 최응은 한숨을 쉬며 생각이 많다. 장수들은 서로의 의분에 넘쳐 주장하고 떠들고 있다. 유금필 형제들도 답답한 표정들이다. 그들의 그런 정경에서....
씬 동 대전
왕건이 올라온 기록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김행선이 눈치를 살피며 앉아 있다.
왕건 (한숨) 대전으로들 몰려오겠다...?
김행선 삼국이 자웅을 겨루고 있는 전국시대에 장수들이 싸우고자 함은 어쩌면 의무이고 당연한 요청이옵니다. 하물며 조물성에서 있었던 폐하의 그 손상되신 위엄을 갚고자 함이옵니다. 폐하, 허락하시오소서.. 저들은 싸우고 싶어하옵니다. 백제의 콧대를 꺾고 폐하와 나라의 위엄을 바로 세우려 함이옵니다.
왕건 ................ (대답이 없다)
김행선 폐하, 군사를 정비하게 하시오소서. 지금은 그 괴질과 돌림병이 도는 때도 아니고 군사들의 사기도 충천하옵니다. 백제를 치도록 명하시오소서.
왕건 ...............
김행선 폐하......?
씬 대야성 외경 (밤)
견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 온다.
씬 동 대전
견훤이 최승우와 함께 있다.
견훤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파진찬의 말이 맞아. 저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나라를 바치겠다고 하는 것이야. 이렇게 되면 큰힘 들이지 않고 신라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야. 기회치고는 그만일세.
최승우 어차피 삼국은 하나로 정리가 되어야 하옵니다. 그 동안은 고려가 신라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었사옵니다. 말이 동맹이었지 신라는 많은 부분을 고려에 의지해 왔었사옵니다.
견훤 그랬지. 암 그랬어...
최승우 하온데 지금 형편이 많이 바뀌어져 버렸사옵니다. 고려는 우리에게 패하였고 그 황제가 폐하의 아우가 되었사옵니다. 그리고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지금 조용히 그저 세상 돌아가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사옵니다.
견훤 하하하... 그렇게 되었지. 그걸 보면 왕건이라는 사람은 참으로 고지식한 면이 있어.
최승우 그러게 말이옵니다, 폐하. 지금 신라에서는 지난 번 고려가 크게 낭패를 본 것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박씨왕과 김씨진골들 사이에 내분이 깊어지고 있사옵니다. 서라벌로 가시오소서.
견훤 가서...? 신라를 아예 우리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최승우 그렇게 쉽게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견훤 허면...?
최승우 조금 여유를 두시오소서. 언제까지 고려가 다소곳이 있으리라는 법은 없사옵니다. 또한 우리가 서라벌까지 단숨에 들어가는 것도 곳곳에 장애물이 많아 말처럼 쉽지는 않사옵니다.
견훤 그렇겠지.
최승우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라벌로 들어가 천년 역사의 신라를 장악했다는 그 의미는 대단히 크고도 중요하옵니다. 그 자체가 이미 삼국통일의 기선을 확실하게 하였다는 것을 뜻하옵니다.
견훤 왜 아니겠는가? 그걸 우리가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어깨에 힘이 솟는 것 같네 그려.
최승우 고려를 견제하시면서 서라벌로 가는 안전하고도 충분한 길을 만드셔야 하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시어서 폐하께서 원하시는 왕국을 세워놓으시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그 왕국 신라가 스스로 폐하께 무릎을 꿇고 나라를 들어바치도록 해놓으시면 모든 계획은 다 끝이 나는 것이옵니다. 서라벌로 가시는 결정은 참으로 잘하신 일이옵니다.
견훤 마음이 급하구먼 그래. 언제쯤 이 일을 시작하려는가?
최승우 족히 일년은 뜸을 들이셔야 할 것이옵니다.
견훤 일년씩이나...?
최승우 천년사직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시는 일이옵니다. 일년은 결코 오랜 세월이 아니옵니다.
견훤 하긴 듣고 보니 그러하네. 그리 함세. 은밀하게 선을 계속 넣어서 신라를 뒤짚어 보도록 하세. 하긴 지금의 저 박씨왕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아. 우리 백제를 아주 우습게 안단 말이야. 혼을 내줄 필요가 있어. 암.... 이제는 고려가 아니라 백제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구말구. 추진하세. 서라벌로 가는 길을 추진하세나.
최승우 예, 폐하.
견훤 그리고 거창까지 나가 있는 우리 태자들의 군대는 그만 멈추라고 해. 더 이상 고려를 자극할 필요는 없어. 이쯤해서 잠시 쉬고 눈치를 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구먼.
최승우 바로 보셨사옵니다. 서라벌로 가는 길을 무리하게 힘으로써 다스리실 필요는 없으시옵니다. 다시 말씀드리옵니다마는 고려는 그리 오래 참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것을 경계하셔야 하옵니다.
견훤 ....... (끄덕인다)
씬 송도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왕건과 왕식렴이 마주해 있다.
왕건 그 진호라는 볼모는 잘 지내는가?
왕식렴 예, 폐하. 특별히 사람을 붙여 잘 감시하며 보살피고 있사옵니다.
왕건 (큰 한숨) 내가 그 볼모를 자네 집에 맡긴 것은 백제에 맡기고 온 신이 아우 때문일세.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자네가 잘 보살펴야 신이 아우도 온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 것이야.
왕식렴 잘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
왕건 자네들은 둘도 없는 내 혈육이고 아우들일세. 절대로 무슨 일이 있게 하지는 않을 것이야.
왕식렴 예, 폐하.
왕건 지금 신료들이 온통 시끄러운 모양일세. 상소문이 산더미같이 올라왔네. 이제 그도 부족해서 시중을 들볶아 회의를 열더니 모두들 대전으로 몰려오겠다고들 하더군. 떼를 쓰겠다는 것이야.
왕식렴 알고 있사옵니다. 하옵고.... 폐하께서 왜 지금 저토록 들끓는 신하들의 청을 들어주시지 못하는 지도 알고 있사옵니다. 신이 아우 때문이 아니겠사옵니까?
왕건 어찌하면 좋겠는가? 도무지 길이 보이지를 않네 그려.
왕식렴 신 또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그저 저희 형제를 생각해 주시는 그 깊으신 은혜를 생각하면 마음만 아프옵니다.
왕건 아닐세. 내가 참으로 식렴 아우에게 미안하이. 신이 아우를 그렇게 적진에 버리게 오게 하다니 말일세. 참으로 할 말이 없어.
왕식렴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그나마 신이 아우가 제 몫을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라를 위해 큰 다행이옵니다. 그저 성심을 편안히 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고맙네. 참으로 고맙네. 아무튼 그 백제의 인질은 잘 보살피게. 알겠는가?
왕식렴 예, 폐하. 그렇지 않아도 처음에는 불안해하더니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사옵니다.
왕건 그래야지. 잘 해 주게나. 그 자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왕식렴 예, 폐하. 수하들에게 잘 일러놓았사옵니다.
씬 인서트 (왕식렴의 집)
진호가 마당을 서성거리고 있다. 집안 가솔들이 문가에서 훔쳐보고 지나간다. 진호는 계속 한숨을 쉬며 하늘을 보고는 한다. 그 불안한 표정에서...
최응 (E) 이 밤중에 어인 일들이십니까?
씬 최응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최응과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가 마주해 있다.
유금필 병부령에게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 왔소이다.
최응 말씀하시지요.
유금필 광평성 회의에서 최공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소이다. 왜 그러셨습니까?
최응 ..............?
신숭겸 그 회의에서 내의성령 최지몽이 아주 의미있는 말을 하였소이다. 폐하의 의중을 읽을 줄 아는 신하가 없다고 말입니다.
최응 그렇게 말을 하였지요.
유금필 우리가 생각해 보니 폐하께서 지금 아무 결단도 내리지 못하시는 것은 바로 백제에 가 있는 사촌아우 왕신공 때문이올시다. 그렇지 않소이까?
최응 바로 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그 자리에서 아무 말씀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박술희 그러나 공은 이 나라에 군권을 맡은 대신이올시다. 지금의 정국을 헤쳐 나가려면 무슨 방도를 세우셔야 할 것이 아니겠소이까?
최응 물론 그 방도는 있습니다.
박술희 있어요? 방도가 있다고 했습니까, 지금?
유금필 인질들의 문제가 난관으로 앞에 놓여 있소이다. 최공은 지금 어떤 방법을 얘기하시는 것이오이까?
최응 아주 간단한 것을 자꾸 돌려서 물으시니 소생 참으로 말씀드리기 민망합니다.
유금필 간단한 것이라니요? 그것이 무엇이오이까?
최응 많은 신료분들이 지금은 군사를 일으켜야 할 때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유금필 그렇지요.
최응 그러나 폐하께서 결심을 못하고 계십니다.
유금필 그 때문에 이렇게 답답해서 온 것이 아니오이까?
최응 폐하께서 군사를 일으키시도록 하려면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모두들 ....................?
신숭겸 한 사람이 죽음이라니...? 누굴 말하는 것이오이까?
최응 왕신공입니다.
모두들 뭐라............?
최응 전장터에서는 나라를 위해 수천 수만의 목숨이 죽어갑니다. 지금은 그 사람 하나의 목숨을 받음으로써 수렁에 빠진 이 정국을 돌파할 수가 있습니다.
박술희 아니, 그 말뜻은 이해가 가오마는 백제에 가 있는 왕신공의 목숨을 누가 어찌할 수 있다는 말이오?
최응 지금 이곳에 와 있는 백제의 볼모 진호를 죽이십시오. 그렇게 되면 왕신공도 저절로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유금필 백제의 볼모를 죽여요....? 백제의 볼모를 말입니까?
최응 그렇습니다. 인정이 많으신 폐하께서는 결코 그 일이 해결되기 전에는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누군가 해결해야 합니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폐하의 아우님이신 왕신공을 과연 죽일 수 있겠습니까?
<151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