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157회>
<줄거리>
서라벌에 입성한 견훤은 왕궁을 약탈하고, 포석정에서 사흘째 연회를 벌이던 신라의 경애왕을 잡아 들인다. 한편, 불길한 점괘 때문에 친정을 만류하던 신료들을 뒤로 한 채 서라벌로 출발한 왕건은 김율이 보낸 전령을 만나 이미 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을 침탈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왕건의 친정을 예상했던 백제의 책사 최승우는 공산에 장수들을 보내 매복을 시키고 왕건을 기다리는데...
씬 월성 (아침)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견훤이 주변을 돌아본다. 아직도 불타고 있는 잔해들이 즐비하다. 숱한 시체들, 그리고 파괴된 건물과 망루와 그 주변 부속물들... 견훤은 눈을 들어 먼 황궁 쪽을 본다. 감회가 깊은 것이다. 제장들이 함께 해 있다.
견훤 이것이 얼마만 인가? 사십 년도 더 되었어. 내가 이곳에 왔었던 것이 말일세.
최승우 감회가 새로우실 것이옵니다.
견훤 왜 아니겠는가? 그때는 이름 없는 한낱 군관이었네.
최승우 하오나 지금은 대 백제국의 황제폐하이시고, 서라벌을 정복한 승리자이시옵니다.
견훤 승리자라...? 허허허... 과히 듣기 싫은 말은 아닐세 그려.
최승우 신도 한때는 이 신라국의 신하였고 국비를 받아 당나라에 유학했던 유생이었사옵니다.
견훤 알고 있다네. 그리고 신라가 자랑하는 천재 중에 하나였지. 그 천재가 내게 와 주었다는 것은 하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니 되는 일일세. 자네와 나는 천생연분이 있는 것 같으이.
최승우 듣자옵기 민망하옵니다, 폐하. 허허허....
견훤 서라벌이라, 서라벌이라...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이 도읍지가 어떤 곳인가? 중원의 어느 대국을 보아도 천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나라는 없네. 불과 몇백 년만에 멸망하고 일어나기를 거듭한다네. 그렇게 보면 신라는 참으로 대단한 나라였어. 그 상징이 바로 이 서라벌이 아닌가 이 말이야.
감격이다. 견훤은 뒷짐을 진 채 그렇게 먼 주변을 돌아본다. 그 위로 황궁의 그래픽과 황룡사탑 등 여러 자료화면들이 삽입된다.
해설 서라벌, 경주의 옛 이름이다. 경주라는 지금의 지명은 왕건이 신라를 병합하고 내린 이름이다. 서라벌은 시조 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되면서 만든 국호였다. 도읍지와 나라를 뜻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 나라 수도인 서울이라는 이름도 실은 이 서라벌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 서라벌이 신라라는 국호로 바뀐 것은 서기 503년, 22대 왕인 지증왕 때의 일이었다. 서라벌은 그 세월만큼 화려하고 웅장하고 또한 규모가 큰 도읍지였다. 기록에 보이는 도성 안의 가구 수요가 십칠만 팔천 구백 삼십 육 호였다고 하니 그에 비례하여 인구가 얼마나 되었을 것인가? 무려 팔십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라벌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도시 계획의 도로망을 말하는 방(坊)이 무려 천 삼백 육십이었다 하니 그 규모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서라벌이 한창 융성했을 때는 저녁이 되어도 밥 짓는 연기가 없었다고 한다. 모두가 기와집이었고 한결같이 숯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전성기의 윤택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신라의 황도 서라벌이 지금은 이렇게 견훤의 침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장구했던 천년의 역사에 처음 있는 치욕의 날이었다.
씬 다시 그곳 회의장 (야외)
부서진 장대에 제장들이 모두 모여있다. 견훤이 감상을 접고 제장들에게 말한다.
견훤 지금 우리가 서라벌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고려군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야. 파진찬 이야기 해주게.
최승우 예, 폐하. (설명한다) 폐하께오서 이 서라벌로 오신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기 때문이올시다. 그 하나는 서라벌을 정복하였음을 천하에 알려 전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동안 친고려적이었던 신라왕을 응징하고 친백제적 왕조를 세움으로써 역시 통일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올시다.
모두들 ......... (끄덕인다)
최승우 그리고 두 번째는 불경스럽게도 폐하의 아우님을 자청하였다가 다시 군사를 일으킨 고려의 왕 왕건이를 잡는 것이올시다.
애술 누구를 잡아요..? 왕, 왕건이라니..? 고려의 왕을 말입니까?
신덕 아니 어떻게 고려의 왕을 잡는다 하십니까, 파진찬 어른?
견훤 들어들 봐.
최승우 우리가 서라벌에 와 있는 것을 알면 고려의 왕은 지금쯤 크게 놀라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올시다. 기선을 빼앗겼다고 말입니다.
상귀 충분히 그럴 수 있사옵니다.
최승우 이미 고려군이 출병을 했다면 우리군은 이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소이다. 본국과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신덕 허면 고려군을 맞아 싸우면 될 것이 아니옵니까?
최승우 바로 그것이올시다. 저들이 오는 길을 살펴보았는데 고을부의 공산까지 이르는데 사흘 정도 걸립니다. 우리가 이 서라벌을 철수하는 시기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애술 그렇다면 공산에서 만난다는 것이옵니까?
최승우 그렇소이다. 극히 일부만 남겨놓고 대부분의 군대는 공산으로 들어가 적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공산은 연이은 계곡과 강을 몇 십리에 끼고 있소이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어요. 따라서 한번 우리의 매복에 걸려들면 빠져나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소이다.
견훤 .............? (기대처럼 본다)
애술 이야... 이거야말로 어디 피가 끓어서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가 없소이다. 파진찬 어른, 정말 고려의 왕이 오기는 오는 것이오이까?
최승우 허허허... 이 사람의 목을 내어놓겠다고 하였소이다.
신덕 파진찬께서 그만큼 자신 하신다니 소장 신덕도 참으로 가슴이 설레이고 기대가 되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겠사옵니까?
최승우 그렇소이다. 허나 분명히 말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더 이상 이러한 호조건은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이올시다.
견훤 자, 다들 잘 들었을 것이야. 경들은 지금 피가 끓는다고 하였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온 몸에 소름이 돋고 있어. 서라벌 옆에서 나는 다시 내 아우를 만나는 것이야. 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가? 경들이 그 기회를 잡아야 해.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 돼. 알겠는가?
모두들 예, 폐하.
최승우 일단 폐하께오서는 일천의 군사를 거느리시고 신덕 장군과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시오소서. 나머지 구천의 군사는 애술과 상귀 장군이 맡아 공산으로 가 새로운 진을 구축해야 하옵니다.
견훤 그렇게 하게. 들 들었겠지..?
모두들 예, 폐하.
견훤 자,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신덕 장군?
신덕 예, 폐하.
견훤 아니, 아니지... 이봐, 애술 장군..?
애술 예, 폐하.
견훤 애술 장군이 짐과 함께 궁궐로 들어가세. 점령군은 그에 걸맞는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어. 애술 장군이 짐과 함께 입궁하세. 신덕 장군은 너무 유해서 말이야.
신덕 ...............
애술 예, 폐하. 망극하옵니다. 영만 내리시오소서.
견훤 정복자는 전리품을 취할 권리가 있다. 신라의 문화와 학문과 그리고 연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전리품으로 취하라.
애술 예, 폐하.
최승우 (놀라서) 폐하....
견훤 왜 그러는가?
최승우 아직도 삼한의 백성들은 신라를 주목하고 있사옵니다. 이들에게 인정을 보여주셔야 하옵니다.
견훤 인정으로서 온 것이 아닐세. 나는 이곳의 왕을 죽일 것일세.
최승우 폐하......?
견훤 파진찬은 늘 순리를 앞세우는데 지금은 그 때가 아닐세. 인정이나 눈물 같은 것은 왕건 아우에게나 필요한 것이야. 이 백제의 황제 견훤이는 오로지 힘, 힘을 전제로 하고 있네. 힘만이 모든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야. 애술 장군, 알겠는가? 정복자의 권리를 행사하라.
애술 예, 폐하.
견훤 자, 많이 늦었네. 왕궁으로 가세. 신덕 장군도 공산으로 가고...
두 사람 예, 폐하.
그런 견훤의 단호한 표정에서... 디졸브되면
씬 저자거리
견훤의 대군이 기치창검을 번쩍이며 가고 있다. 어느 큰 길목에서 신덕과 상귀들은 군례를 올리며 방향을 돌린다. 견훤이 끄덕이며 애술과 최승우와 함께 계속 나아간다. 연변의 수많은 백성들이 보다가 경악하는 표정으로 도망치거나 숨거나 한다.
씬 또 다른 거리
견훤들이 돌아서 나온다. 계속 가고 있는데 왕궁으로부터 온 관리(밀사)가 달려와 말에서 내려 예를 올린다.
최승우 그대는 안면이 있구려?
관리 예, 파진찬 어른. 대신 유염공께서 보내서 왔사옵니다. 이미 궁성의 남문을 활짝 열어놓았사옵니다. 편히 뫼시라는 영을 받았사옵니다.
견훤 하하하.. 그런가? 고맙구먼. 신라의 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관리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고 있사옵니다.
견훤 연회라...? 하하하.... 아마도 그것이 마지막 연회가 되겠구먼 그래. 자 들 가세. 일단 궁성에 들어가야지.
최승우 계속 가자.
부장들 예...
견훤 (가면서) 자, 이제 곧 궁성으로 들어가겠구먼. 헌데, 내 아우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을꼬..?
최승우 아직 세작들의 보고가 없사옵니다. 곧 무슨 소식이 있을 것이옵니다.
견훤 빨리 만나보고 싶구먼. 빨리 말이야. 허허허...
그들 그렇게 가면서... 디졸브되면...
씬 송도 황궁 앞
왕건이 복지겸, 신방 그리고 여러 부장들을 이끌고 황도를 떠나고 있다. 황후들과 태자, 김행선과 왕규, 최응, 최지몽들이 배웅한다.
오씨 폐하, 부디 조심하시오소서. 서라벌까지는 먼 길이옵니다.
유씨 조심하시오소서, 폐하.
무 조심하시오소서.
왕건 염려 마시오. 한시가 급한데 많이 늦었소이다.
최응 꼭 신이 뫼시고 가고 싶사옵니다마는...
왕건 하하하... 지금은 돌림병도 없고 괴질도 없네. 그리고 뻔한 싸움이야. 계속해 전령이 오갈 것일세. 필요할 때는 부를 것일세. 자, 출병하라. 행군을 빨리할 것이다. 시간이 없다.
김행선 폐하, 승전하시오소서.
모두들 승전하시오소서.
왕건은 그렇게 군대를 이끌고 간다. 황후들이 근심어린 표정에서 왕건이 멀어진다. 최응도 최지몽도 표정이 모두 어둡다.
최응 폐하께오서 너무 서두르시네. 친히 가실 필요가 없으신데... 굳이 가시네 그려.
최지몽 그러게 말이옵니다.
최응 자네... 이번에는 왜 말이 없는가? 점괘를 놓아 보았는가?
최지몽 예. 하오나...
최응 말해보게.
최지몽 참으로 몸서리가 칠 만큼 그 결과가 좋지 않사옵니다. 대흉, 대참으로 점괘가 나왔사옵니다. 크게 흉하고 참담한 죽음들이 보이옵니다.
최응 말씀해 올렸는가?
최지몽 미처 드리지 못하였사옵니다.
최응 ........... 하긴 출병을 굳히셨는데 자네 말을 들으시겠는가?
한숨을 쉬는 최응의 표정에서...
씬 길
왕건이 대군을 몰아 나아가고 있다. 얼마쯤 가고 있을 때, 먼 길을 돌아 한필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다. 가까이 와 이르면 그는 김율이 보낸 전령이다. 말에서 내려 예를 취한다.
복지겸 너는 누구인가? 어디서 오는 자인가?
전령 소인은 신라의 아찬 김율 공께서 보내신 전령이옵니다. 백제의 왕이 서라벌을 침범하였사옵니다. 이미 고을부성이 무너지고 지금쯤 월성도 무너졌을 것이옵니다. 폐하, 도와주시오소서.
왕건 우리도 그 사정을 알았노라. 그러기에 친정을 가고 있는 것이다. 밤낮을 도와 서라벌로 가는 길이니 너는 다시 돌아가 우리가 너희를 구해줄 것임을 전하라.
전령 예, 폐하... 망극하옵니다, 망극하옵니다.
왕건 어서 가서 전하라.
전령은 크게 대답하고 다시 말에 오른다. 그리고 군례를 하는 둥 마는 둥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왕건 지금쯤 숭겸아우와 김락아우들이 소식을 받았는지 모르겠소이다.
복지겸 그렇게 되었을 것이옵니다. 벌써 만 하루가 지났사옵니다.
왕건 서둘러 가십시다. 참으로 마음이 급하구려. 허허, 이것 참...
그들 그렇게 가면...
씬 대야성 외경
씬 동 성안
제장회의가 열리고 있다. 신숭겸, 배현경, 홍유, 염상, 왕충, 윤신달과 김락, 김언, 전이갑형제, 박수문 형제들이다.
신숭겸 사태가 매우 급박하게 되었소이다. 지금쯤 폐하께오서는 서라벌로 출병을 하셨을 것입니다.
배현경 이미 영이 떨어지셨으니 지체할 까닭이 없소이다. 서라벌로 가실 분들은 빨리 가시지요.
홍유 허허, 이거 어떻게 해서 백제가 벌써 서라벌을 도모하였다는 말입니까?
염상 결국 저들은 처음부터 속셈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김락 그러나 저러나 폐하께서 오천의 대병을 이끌고 가시고 우리가 다시 오천의 지원군을 끌고 간다면 일만이올시다. 거기다가 백제군도 일만이라 한다면 무려 도합 이만이 엉켜 싸우는 전투올시다. 그야말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이 되겠소이다.
모두들 ........... (끄덕인다)
전이갑 일찍이 이렇게 대병이 마주 붙어서 결전을 한 예도 없을 것입니다.
전의갑 그러하옵니다. 그야말로 생사를 건 한판이 될 것 같습니다.
신숭겸 어쨌든 갑자기 연락을 받은 터라 조금 성급하기는 합니다마는 빨리 군사를 수습하여 떠나도록 하십시다.
김언 서라벌이 중요하기는 해도 폐하께서 직접 친정하신다는 것은 왠지 마음에 걸립니다.
김락 하하하... 조물성의 빚을 갚아야 할 것이 아니겠소이까? 백제에서도 황제가 나와 있으니 당연히 폐하께서 가셔야지요.
배현경 이것 참 유감이올시다. 그 엄청난 전쟁에 우리가 빠지다니요.
박수문 그만큼 여기 대야성과 용주성도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겠사옵니까? 좋은 소식을 기다리시오소서.
왕충 자, 빨리들 서두셔야겠습니다. 군사를 정비해서 가시자면 하루는 더 소요가 될 것 같습니다.
신숭겸 자, 그럼 모두 서두십시다.
배현경 건투를 비오이다, 신장군. 고생이 많이 되시겠소이다.
신숭겸 우리는 모두 고려의 개국공신들입니다. 폐하께서 부르시면 어디든 달려가는 충복들이 아니오이까? 지금이야 말입니다마는 내 발에는 무운을 상징하는 칠성점이 있소이다.
홍유 오.. 그렇소이까? 칠성점이라? 그래서 계속해 승승장구하고 잘 싸우셨구려. 하하하..허면 이번에도 큰 소식 한번 전해주시구려.
신숭겸 암요, 하하하... 이번에는 꼭 백제의 왕을 포로로 잡아서 데리고 오리다.
배현경 그렇게 좀 해 주시구려. 이 삼한의 전쟁이 끝나게 말이올시다. 하하하...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디졸브.
씬 서라벌 길 남문 근처
견훤의 일천 군사가 황제의 위용을 내보이며 가고 있다. 여전히 기치창검이 숲처럼 번뜩인다. 관리가 말한다.
관리 폐하, 이제 거의 다 오셨사옵니다. 저기 저쪽에 보이는 것이 황궁의 정문인 남문이옵니다.
견훤 ...... 그렇구먼.
최승우 폐하, 정말로 문이 열려있는 것 같사옵니다.
견훤 (끄덕인다) ....
그들 그렇게 다가간다. 점차 웅장한 궁궐의 남문이 카메라에 잡혀 온다. 문은 열려있고 수문장과 몇몇 군관들이 있을 뿐이다. 그 앞에 견훤이 멈춘다.
애술 폐하께서 오신다는 것을 이미 알았을 터인데 왜 아무도 나와있지 않느냐?
관리 용서하시오소서. 지금 폐하께서 이곳에 이르신 것은 신료들은 알지 못하옵니다.
애술 뭐라....? 군사가 일만이나 황도에 들어왔어. 성을 두개나 넘으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었어. 그런데도 모른다는 말인가?
관리 오죽하면 저희 재상들께서 폐하를 청해 모셨겠사옵니까? 이 나라는 이만큼 한심스럽사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최승우 자, 폐하. 입궁을 하시오소서.
견훤 그렇게 하세. 자, 애술 장군, 입궁하라. 서라벌의 오늘을 영원히 기억에 남게 하라.
애술 예, 폐하. 전군 입궁하라... 모두 그대로 궁으로 들어가라.
부장들 예, 장군.
애술 한편은 폐하를 뫼시고 나머지는 궁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다 점거하고 경계하며 장악하라. 수상한 무리들은 모두 베일 것이며 백제국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수습하라.
부장들 예, 폐하. 입궁하라.. 모두 궁으로 들어가라.
명령과 동시에 군사들이 썰물처럼 궁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견훤이 보고 있다. 그도 움직인다. 마치 벌떼처럼 궁안으로 밀려들어간다. 최승우는 안타까운 표정이다.
씬 서라벌 황궁 안
아우성이다. 끝도 없이 많은 전각들과 화려한 정자, 그리고 숱한 건물 사이들로 마치 성난 파도처럼 군사들이 밀려들고 있다. 내관들이 곳곳에서 칼에 맞아 죽고 어쩔 줄 모르던 대전의 별감들이 불문곡직 베어지고 있다. 곳곳에서 전각의 방문이 부서지고 궁녀들이 소리지르며 도망치고 있다. 도망치는 궁녀들과 죽어나가는 환관들과 그리고 군사들... 그 비명 소리들이 궐안 가득하다.
씬 동 궁안 어느 곳
곳곳에 연기와 불길이 보이고 있다. 여전히 비명소리들은 사방에서 들려온다. 마치 쫓기는 닭들처럼 환관과 궁녀들이 여기저거 도망치며 부산스럽다. 견훤이 장수들에게 에워싸여 대전 뜰 쪽으로 들고 있다. 이미 앞서간 군사들로 하여 곳곳에 시체들이 즐비하다. 최승우는 참담한 모습으로 그 궐안들을 보며 견훤을 본다.
최승우 폐하..
견훤 왜 그러는가?
최승우 우리 군사들이 너무 광폭한 것 같사옵니다.
견훤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점령군이라고 말일세. 언제 어느 전쟁에서나 승리한 군대는 그만한 권리가 있는 것일세.
최승우 하오나 폐하, 곳곳에 연기와 불길이 보이옵니다. 방화와 살상은 아니 되옵니다.
견훤 그냥 놓아두게. 거대한 고목이 주저앉는데 이만한 소동이야 당연한 것이야.
최승우 ..........
견훤 참으로 화려하기는 화려해. 대단한 궁궐이야. 이 엄청난 도읍지가 우리 백제에게 무너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이보게, 애술 장군?
애술 예, 폐하.
견훤 신라의 왕을 찾아야지. 포석정은 이곳이 아닐세. 궁궐 뒷문으로 해서 남산 쪽으로 장수들을 보내게. 그곳에 포석정이 있을 것이야.
애술 예, 폐하. 부장들은 무얼하는가? 남산 포석정으로 가라.
부장들 예, 장군.
부장들이 일제히 일단의 군사들과 함께 달려간다. 견훤은 여전히 주변을 돌아보며 감격에 벅찬 모습이다.
견훤 변한 것이 없어. 내가 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어. 역시 이 서라벌은 참으로 대단한 곳이야.
씬 포석정
여전히 아악소리가 질탕하다. 취한 경애왕과 황후가 담소하며 웃고 있다. 신료들이 함께 즐기고 있다. 무희들의 춤은 계속되고 있고 그 한켠에서 오로지 유염과 김웅겸만이 귓속말로 주고 받으며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 경애왕이 말한다.
경애왕 이보시오 들, 며칠째 마시고 놀아도 전혀 피곤한 줄을 모르겠소이다. 경들은 어떠하시오?
연식 폐하께오서 이리 즐거워하시는데 어찌 신들이라고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효렴 술맛이 좋은데다가 날씨 또한 좋사옵니다. 게다가 주변의 소식들 또한 훈훈하옵니다. 많이 드시오소서, 폐하.
영경 이제 모든 근심걱정의 끈을 놓으시오소서. 머지 않아 백제의 도적 견훤이가 폐하의 무릎 아래서 살려달라고 애원할 날이 올 것이옵니다.
경애왕 (취해서) 암, 짐도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소이다. 제가 누구였는가 말이오. 우리 황실의 근위대를 맡았던 군관이었소이다. 괘씸한 자 같으니라고... 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암..
황후 많이 취하셨사옵니다, 폐하.
경애왕 하하, 그렇구려. 하긴 좀 취했소이다. 허나. 내 분명 말하오. 견훤이 그자는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오, 암요. 괘씸한...
경애왕은 그렇게 호기를 부리며 술을 마신다.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데.. 그때, 다급하게 달려오는 무리들이 있다. 환관들이 '폐하.. 폐하' 소리치며 한꺼번에 달려온다. 모두들 본다. 유염들은 이미 알고 있다. 자연히 아악도 멈춘다.
환관 (다급하다) 폐하... 폐하... 큰일났사옵니다.
김부 무슨 소리인가? 궐 안에 무슨 일이 있는가? 왜 그리 피투성이인고..?
모두들 ............?
환관 폐하, 어서 피하시오소서. 백제의 도적들이 궁궐을 범했나이다, 폐하. 어서 피하시오소서.
경애왕 무슨 소리인고....?
황후 도적들이 오다니..? 궁궐을 범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연식 상세히 말해보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환관 말씀 드린 그대로 이옵니다. 수만명의 백제군이 고을부를 돌파하고 다시 월성에서 아찬 김율공과 그 군대를 전멸시켰으며 지금 남문을 열고 궁궐로 들어왔사옵니다.
모두들 ........... (충격)
경애왕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백제의 군대는 대야성에서 전멸을 하였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서라벌로 온다는 말이냐?
김부 폐하, 허나 환관의 말을 들어보아 궁에 난리가 난 것은 분명한 것 같사옵니다. 일단 경계를 하시고 전후 사정을 헤아리심이 맞을 것 같사옵니다.
효렴 그리 하시오소서, 폐하. 이 환관들의 말과 행색을 보니 뭔가 사정이 있는 것은 분명하옵니다.
경애왕 (그제서야 긴장) 그렇다면 김율 아찬이 죽었다는 말이냐? 김율아찬이 죽었어?
환관 예, 폐하. 어서 피하시오소서. 적도들이 지금 이리로 오고 있사옵니다. 어서 피하시오소서.
연식 (그제서야 믿는다) 폐하, 피하시오소서. 이자들은 대전 환관들이옵니다. 거짓을 아뢸 일이 없사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옵니다. 여봐라....
모두들 예...
연식 궐 안에 변이 일어난 것 같다. 모두 폐하를 뫼시어라. 악공들과 광대들은 연회를 물려라. 폐하를 뫼시어라.
환관들 폐하를 뫼시어라...
갑자기 연회장은 소란이 일어나 엉망이 된다. 경애왕과 황후가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 한다. 피투성이의 늙은 환관 하나가 관모도 없이 다시 달려와 부복한다.
환관1 폐하, 폐하...
모두들 ..............?
환관1 여기 대신들 중에 백제군과 내통한 무리들이 있사옵니다.
연식 ...........?
환관1 저들이 내통하여 백제군이 오는 모든 길목을 열었다 하옵니다.
경애왕 뭐라.....?
환관1 뿐만 아니라 폐하께 이르는 모든 소식을 차단하여 저들이 서라벌에 이를 때까지 알지 못하게 하였다 하옵니다.
경애왕 이럴 수가 있는가..? 그들이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유염들 ............
환관1 일단 이 자리를 피하시오소서. 신도 간신히 궁궐을 빠져 나와 이리로 왔사옵니다. 이미 모든 궁궐은 저들에게 장악되었사옵고 난폭한 군대들이 이리로 오고 있사옵니다. 피하시오소서. 어서 피하시오소서.
효렴 폐하를 뫼시고 가라. 어서 서둘러라. 어서...
우왕좌왕이다. 경애왕과 황후가 환관들에게 이끌려 간다. 그리고 곧 한쪽에서 말발굽 소리와 군사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들 얼굴이 흙빛이 되어 본다. 애술의 부장들이 군사들과 함께 몰려왔다.
부장 이자들을 모두 잡아 꿇려라. 왕은 어디에 있느냐? 왕은 어디에 있느냐? 왕을 찾아라.
군사들이 거칠게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연식과 효렴, 영경 그리고 수십 명의 신료들이 모두다 잡아 꿇려진다. 유염과 김웅겸에게 군사들이 거칠게 다가가자 그들은 미소를 짓는다. 이미 관리(밀사)가 부장에게 눈짓을 하고 있다.
관리 그분께서는 유염공이십니다.
부장 아, 예.. (군례를 하며) 공을 뵙거든 융숭히 모시라는 영을 받고 있었사옵니다.
모두들 ..............(아, 너였구나)
유염 고맙소이다. 백제의 황제폐하께서 입궁하셨다니 감축드리오이다.
연식 네 놈이었구나. 신라를 팔아먹은 놈이 바로 네 놈이었구나.
효렴 아무리 나라라 기울었다 하여도 제 주인을 팔아먹은 자는 없었다. 네 이놈....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유염 닥치거라. 너희 박씨가 왕이 된 이후로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 사정이 더욱 힘들어졌느니라. 나 또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박씨왕을 버린 것이다. 백제의 황제는 다시 김씨의 신라를 만들기 위하여 오신 것이니라.
영경 네 이놈 닥치지 못할까? 어디서 그런 주둥이를 놀리느냐? 이 천하의 역적놈......
그러나 그 말도 길게 가지 못한다. 이미 부장이 그의 목을 베었기 때문이다.
부장1 말하는 자들은 모두 죽여라. 더러운 입을 여는 자들은 모두 입을 찢어라.
모두들 ............
부장1 빨리 왕을 찾아라. 신라왕을 찾아라.
유염 왕은 저쪽으로 갔소이다.
부장1 저쪽을 뒤져라. 샅샅히 뒤져라.
씬 그곳
경애왕이 황후와 함께 도망쳐오고 있다. 따르는 사람도 몇 없다. 곳곳에 궁녀들이며 환곤들의 비명소리이다. 연기가 솟고 불길이 사방에 일고 있다. 그들은 급하다.
경애왕 어이할꼬..? 도대체 이 일을 어이할꼬..?
황후 폐하, 이 일을 어이하면 좋사옵니까?
환관1 일단 저쪽으로 피하시오소서. 저쪽의 전각으로 드시오소서. 곧 날이 저물 것이니 어둠을 틈타 다시 피하시면 되옵니다.
경애왕 그리하자꾸나. 이보시오, 황후. 이리 오시오.
그들은 반쯤 부서진 전각 안으로 들어간다. 환관들과 궁녀들도 다투어 그 안으로 들어간다.
씬 동 안
그들이 들어와 허둥거린다. 경애왕 부부는 서로를 잡고 어쩔 줄 모르며 구석에 숨는데 늙은 환관이 소리친다.
환관1 병풍으로 가려드려라.. 폐하를 가려드려라.
그렇게 병풍이 처진다. 늙은 환관이 그 앞에 선다. 남은 환관들도 몇 명이 그렇게 앞을 선다. 군사들의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온다.
씬 그 병풍 뒤
경애왕 부부가 그렇게 떨고 있고...
씬 동 궁궐 (몽타주)
애술이 궁궐 마당에서 지휘하고 있다. 온 궁궐이 비명... 비명 소리이다. 어느 독서당에서는 책이 불타고 있고 어느 곳간이 열리면 그곳에는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뒹군다. 궁에서 수직하던 관리들이 모두 끌려나오고 있고 각 전각들을 지키던 군사들은 불문곡직 베어지고 있다.
씬 궁궐 일각
견훤과 최승우가 대전 앞 섬돌 위에 서 있다. 그 위에서는 신라의 넓은 황궁 뜰이 잘 보인다. 곳곳이 불바다다.
최승우 더 이상의 방화는 막아야 하옵니다. 이 아까운 궁궐이 다 탈 것이옵니다.
견훤 하하하... 헌 궁궐이 타야 새 궁궐을 지을 것이 아니겠는가?
최승우 폐하...
견훤 자, 이미 궐안은 애술 장군이 장악을 하였으니 어떤가? 우리도 포석정에 가보는 것이..?
최승우 예, 폐하.
견훤 부장은 들어라.
부장들 예, 폐하.
견훤 서라벌 전체에 백제군의 진주를 알리고 신라의 재추대신들은 내일 아침까지 모두 궁으로 들도록 하라. 영을 어기는 자는 모두 참하라.
부장들 예, 폐하.
견훤 자, 우리는 포석정으로 가세. 그리 멀지 않으이...
최승우 예, 폐하.
그들 그렇게 간다.
씬 포석정 근처
대신들이 여전히 잡혀 꿇려있다. 유염과 김웅겸이 애술의 부장들과 함께 서 있다. 부장이 수하들을 꾸짖고 있다.
부장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왜 아직까지 왕을 찾아오지 못하는 것이냐? 곧 폐하께서 이리 오실 것이다. 빨리 찾아라.
군사들 예.
유염 결코 멀리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허허허... 뒷마당의 전각들을 다 뒤지면 그중 어디엔가는 있을 것입니다. 결코 숨을 곳이 많지 않습니다. 허허허....
김웅겸 그리고 장군..?
부장 예, 말씀하시지요?
김웅겸 저쪽에 계시는 저 김부공은 우리 김씨 문중의 제일 맏어른이올시다. 비록 백제에 협조하지는 못했으나 함께 무릎을 꿇려 놓음은 아니될 일이올시다.
부장 어허허, 그렇소이까? 저 김공을 일으켜 드려라.
군사들이 달려가 일으킨다.
김부 고맙소이다. 나뿐 아니라 여기 이분들 모두도....?
유염 아니 됩니다. 이 자들은 철저하게 고려의 주구들이올시다. 아니 됩니다.
김부 ..............
씬 그 포석정 주변 전각들
군사들이 계속해 왕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들 사이로 견훤왕과 최승우, 애술이 가고 있다. 그렇게 가면....
견훤 이 포석정은 그야말로 신라의 영화를 대변하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그 몰락을 상징하게 되었군.
최승우 그렇게 된 것 같사옵니다.
견훤 한심한 나라일세. 우리의 군대가 저희들 안방까지 왔는데도 술에 취해 놀고 있으니 이런 나라가 있는가? 쯧쯧쯧....
그렇게 그들이 그곳을 지나는데 한쪽에서 와 함성소리가 인다. 그리고 군사들이 어느 전각 앞에 몰리고 있다. 견훤과 최승우가 보며 그대로 지나쳐 간다.
씬 그곳
군사들이 몰려들고 있다. 반쯤 부서진 문짝이 제껴지면서 군사들이 모두 창을 겨눈다.
부장1 이곳에 왕이 숨었다 한다. 안으로 들어가 끌어내라. 들어가라.
군사들이 그렇게 몰려들어가면...
씬 그곳 전각 안
군사들이 몰려들어온다. 넓은 전각 안이다. 부장1이 둘러본다. 환관들이 병풍 앞에 서 있다. 부장1이 의미있는 미소를 짓는다.
부장1 왕은 어디에 있느냐?
환관1 여기에는 아니 계시오이다.
부장1 그래...? 얘들아, 저 병풍을 거두어 봐라.
환관1 아니 되오이다. 아니 되오이다...
그러자 부장1이 그대로 환관1을 벤다. 먼저 왔던 환관이 다시 막는다..
환관 아니 되오... 아니 되오...
그러나 그도 죽는다. 그리고 병풍이 그렇게 제쳐진다. 경애왕 부부가 떨며 보고 있다.
부장1 허허허... 그대가 신라의 왕이신가?
경애왕 무엄하다. 비키지 못할꼬..?
부장1 아직까지도 큰 소리를 칠 여력이 남아 있느냐? 참으로 불쌍하구나. 얘들아, 끌고 가라.
대답과 동시에 군사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끌고 간다. 경애왕은 소리치며 소리친다.
경애왕 놓아라.. 놓치 못할꼬..? 게 누구 없느냐? 도적들이 나를 끌고 가는구나. 얘들아, 게 누구 없느냐? 게 누구 없느냐..?
그들 그렇게 끌고 가고...
씬 동 포석정
해가 기울고 있다. 견훤이 경애왕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다. 그 앞으로 신료들이 모두 꿇려 있다. 유염, 김웅겸, 김부들이 서 있다.
견훤 공이 유염공이구려.
유염 예, 폐하.
견훤 그 동안 박씨들이 옥좌를 찬탈하여 나라와 백성을 농락한 결과가 오늘에 이른 것이오. 짐이 그대들을 구해주고자 온 것이오.
유염 예, 폐하. 참으로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견훤 이 자는 누구인가?
유염 김부 공이라 하옵니다. 진골 김씨 문중에서 가장 항렬이 높으시옵니다.
견훤 헌데도 왜 그 동안 박씨 밑에 빌붙어 살았는가?
유염 용서하시오소서. 본래 유순하시고 심약하신지라..
견훤 우리 백제를 도운 그대들이 그리 말하니 더 이상 추궁치 않을 것이오. 오호, 그예 왕이 오시는 모양이구려. 신라왕이오.
그들 한쪽으로 경애왕 부부가 끌려오고 있다. 모두들 본다.
연식 폐하... 이 어찌된 일이오이까?
효렴 폐하... 어찌 멀리 가시지 못하고 이렇게 끌려오시옵니까, 폐하?
애술 닥치지들 못할까? 닥쳐라. 신라왕을 꿇려라.
그러자 군사들이 경애왕을 꿇린다. 황후도 그 옆에 앉는다. 견훤이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견훤 반갑구먼. 그대가 신라의 왕인가?
경애왕 .............
견훤 신라의 왕인가?
경애왕 ... 예, 폐하. 살려주시오소서. 살려주시오소서, 폐하.
견훤 허허허, 이런.. 살려달라?
유염 대 백제국의 황제폐하를 잡아 꿇려 혼을 내시겠다 하시더니 그 호기가 다 어디가셨사옵니까, 폐하?
모두들 ...............
견훤 으핫하하하... 뭐라? 나를 잡아 꿇리겠다? 나를 말인가?
경애왕 아.. 아니옵니다. 그저 술이 취해서 해본 말이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견훤 보아하니 왕비가 천하일색이로구먼. 무릇 전장터에서는 시침이라는 것이 있느니라. 그간의 여독을 왕비가 좀 풀어줘야겠구나. 가히 시침을 받을만하다. 하하하......
모두들 .............
견훤 자, 나는 대군을 이끌고 지금 서라벌에 와 있느니라. 너 신라의 왕을 잡아 꿇리고 옛 죄를 묻고 있는 것이다. 자 어찌하면
좋겠느냐?
경애왕 살려 주시오소서, 폐하. 살려 주시오소서, 폐하.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소서, 폐하...
견훤 이런 자가 왕이라고 앉아 있었다는 말인가? 제 아내인 왕비를 시침들라 한다는 데도 제 목숨만 구걸하다니...? 이런 자가 참으로 신라의 왕이었다는 말인가?
경애왕 살려 주시오소서....
견훤 지금 그 마음속에는 고려의 왕이 생각이 날 것이야. 어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우리 백제를 몰아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고려군은 없어. 오로지 백제만 이곳에 있어. 백제의 황제 말이야. 곧 모든 것이 다 바뀌게 될 것이다. 이 신라가 통째로 바뀌게 될 것이야. 왕건이가 오기 전에 말이야. 그때까지 우리 함께 유희를 즐겨 보세. 천천히 얘기를 해 보세. 허허허...
씬 인서트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다. 해는 이미 서산에 숨었다.
왕건 마음이 급하네. 지금쯤 서라벌이 어찌 되었을꼬..?
복지겸 폐하, 지금 너무 서두시옵니다. 우리 장졸들은 이틀 밤낮을 조금도 쉬지못하고 가고 있사옵니다.
왕건 서라벌이 위급지경인데 어찌 여유를 둘 수가 있겠소. 어서 가십시다. 만 하루만 더 가면 고을부에 가까이 이를 수 있을 것이오. 서두십시다.
신방 서둘랍신다... 폐하께서 서둘랍신다. 행군을 독려하라...
왕건 숭겸아우도 지금쯤 상당히 근접해 오고 있을 것입니다. 제발 서라벌이 별일 없어야 할 것인데... 제발...
그들 그렇게 가고 있고...
씬 인서트
어둠 속으로 신숭겸과 김락, 김언, 전이갑 형제, 박수문 형제의 군대가 가고 있다.
김락 우리가 너무 서두는 것이 아닙니까?
신숭겸 폐하께서 낮밤을 아니 가리고 오고 계십니다. 적의 군대는 일만이 넘는다 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그래야 폐하의 군대와 만날 수 있습니다.
씬 송악 황궁 외경
씬 동 황궁 안 황후전
황후 오씨와 유씨, 그리고 제조상궁과 김상궁이 최응, 최지몽을 보고 있다. 유금필과 박술희가 함께 해 있다.
오씨 내가 소문을 들으니 폐하께서 아주 위험한 전장에 가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최응 사실이옵니다.
오씨 사실이라니요?
최응 폐하께서는 지금 서라벌로 향하고 계시옵니다. 길이 멀 뿐아니라 서둘러 가시고 계시기 때문에 걱정이 크옵니다.
유씨 그렇다면 말려야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닙니까?
유금필 신이 이곳에 와 들었사온데 형편이 그렇지 못했다 하옵니다. 신라의 사정은 다급하고 또한 그곳에 백제의 왕이 와 있는지라 친히 서둘러 가신 것으로 아옵니다.
박술희 염려 놓으시오소서, 황후마마. 폐하께오서는 일전에 있었던 조물성에서의 한을 갚으려 하시는 것이옵니다. 신들이 다시 군사를 준비하고 있사옵니다. 여의치 않을 경우 달려가겠사옵니다.
오씨 여기 두 상궁들에게 들으니 폐하께서 떠나실 때의 점괘가 많이 좋지 않다 들었습니다. 어찌된 것이오?
최지몽 그 또한 사실이옵니다. 점괘가 아주 불길하게 나온 것은 분명하옵니다. 하오나, 폐하께서는 크신 분이시옵니다. 작은 인간의 점괘가 어찌 큰 분의 앞길을 막겠사옵니까?
오씨 허, 이럴 수가 있는가? 갈수록 산일세 그려. 이래가지고 서야 불안해서 어찌 살겠는고..?
씬 길
어둠 속에 왕건의 군대는 그렇게 산길을 돌아가고 있다.
씬 공산 매복지
어둠 속에서 신덕과 상귀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신덕 내일이면 고려군이 예정대로 이곳에 도착한다고 하오이다. 과연 고려왕이 올 지 그것이 궁금한 일이올시다.
상귀 파진찬께서 주신 계책이옵니다. 실수가 있을 턱이 있겠사옵니까?
신덕 하긴...
끄덕이는 신덕의 그 표정 위로... 견훤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씬 포석정
어둠 속에 숱한 횃불이 일렁이고 있다. 경애왕 부부가 떨며 계속 꿇려 있다.
견훤 술을 따르라고 하지 않느냐? 술을 따르라고 했어. 술을..!
경애왕 예, 예.. 폐하.
견훤 어서 따르라.
경애왕이 일어나 걸어오려고 하는데 또 소리친다.
견훤 어허, 이런... 누가 일어나서 걸어오라고 하였느냐? 무릎으로 기어오너라. 무릎으로 기어와 술을 따르라.
경애왕 예, 예...
연식들 (울며) 폐하, 폐하........
경애왕이 무릎으로 기어가 떨며 술주전자를 든다. 그리고 견훤의 잔에 떨며 따른다. 그 얼굴을 보고 있던 견훤이 침을 뱉는다. 최승우가 질끈 눈을 감는다.
견훤 어떤고...? 이런 수모를 받고도 살고 싶은고..?
경애왕 예, 폐하.. 살려 주시오소서.
견훤 (반쯤 마시다가) 살려달라..? 살려달라..? 이 더러운 자 같으니라고..
그대로 견훤이 경애왕을 걷어 찬다. 경애왕이 나뒹군다. 다시 일어나며 애원한다.
경애왕 살려주시오소서, 살려주시오소서, 폐하...
견훤 안타깝게도 고려군은 아직도 멀리 있다. 그대를 살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자 술을 다시 따라라. 넘치게 따라라.
경애왕 예, 폐하..
경애왕은 다시 무릎을 꿇은 채 떨며 술을 따른다. 그리고 견훤은 그 잔을 반쯤 마시다가 상위에 쏟는다.
견훤 자, 이 술을 핥으라..
경애왕 (울며) 폐하,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견훤 어서 핥으라... 어서.....
<157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