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165회>
호족들의 배신으로 삼년산성에서 무참히 패배한 왕건은 유금필 일행을 만나 구사일생하고, 또 한번의 패배로 인한 부끄러움과 노여움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한편, 견훤은 전투결과를 전해들은 후 신검을 질책하고 금강만을 편애하는데... 황궁으로 돌아온 왕건은 호족들의 배신에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배신한 호족들의 가솔을 끌어내어 옛 패주인 궁예가 그랬듯이 문무 신료들이 보는 앞에서 잔혹한 처형을 명하는데....
씬 길가 숲속 그 길
지난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왕건 부자는 의관이 엉망이다. 머리에 썼던 관도 없고 옷은 곳곳이 찟겨져 있다. 최지몽도 모습은 다를바가 없다. 유금필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여전히 그렇게 왕건을 보고 있다.
왕건 부끄럽네, 아우.. (눈물 글썽이며) 또 이런 꼴을 보였네 그려. 이런 꼴을 보였어.
유금필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살아계신 것 하나만으로도 신은 하늘에 감사하옵니다
왕건 아닐세.. 살아있는 것이 이처럼 부끄러운 적은 없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공산에서도 그러했고 오늘 이곳 삼년산성에 와서 또 이런 꼴을 보였네 그려.
유금필 모두가 호족들 때문이옵니다. 우리가 저들을 너무 믿고 있었사옵니다.
왕건 그런 것 같으이..
무 그 호족들은 그냥 놔둘 수가 없사옵니다. 폐하의 은혜를 저버리고 적군에 투항을 해버리다니요...?
왕건 물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것이야. 이렇게 참담하게 당하다니... 너무도 어이가 없구나.
최지몽 폐하, 일단 이곳을 어서 벗어나셔야 하옵니다. 이곳은 아직도 적중이옵니다.
유금필 내의성령의 말이 맞사옵니다. 이곳은 적중이옵니다. 일단 의관을 정제하시고 속히 이곳을 벗어나셔야 하옵니다.
무 그렇사옵니다, 폐하. 백제군이 가까이 있사옵니다.
왕건 허면 서둘러 가도록 하세.
윤신달 예, 폐하. 하오면 어디로 가시겠사옵니까?
유금필 성은 불안하오. 좌우삼면이 모두가 백제군이오. 이미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성이 되었소이다. 지금 남은 군사로 백제군을 맞을 형편이 못되오이다.
윤신달 그렇다면 성을 버려 두고 충주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특히나 그쪽에는 박술희 장군이 있사옵니다.
왕건 그렇게 하세. 불안한 성에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네 그려. 충주로 가세. 그리로 가서 상주 쪽의 현황을 살펴보세나.
윤신달 예, 폐하. 부장들은 군을 정비하라. 충주로 갈 것이다. 성을 버리고 충주로 간다. 군을 정비하라.
부장들이 윤신달의 명을 받아 복창한다. 군대는 삽시간에 대오를 갖추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전히 유금필은 민망한 듯 왕건을 본다. 왕건은 하늘을 보며 한숨만 쉬고 있다. 군졸들이 빈 말을 끌고와 대령한다.
유금필 폐하, 오르시오소서. 가시다가 의관을 준비하는 대로 올려드리겠사옵니다.
왕건 그렇게 하십시다.
왕건과 무, 최지몽들이 말에 오른다. 유금필이 다시 명을 내린다.
유금필 자, 행군을 계속하라. 방향을 충주로 틀어라.
윤신달 행군을 계속하라. 계속하라...
부장들이 계속 또 받아서 복창한다. 이들 그렇게 가기 시작한다. 한참을 가다가 유금필이 위로한다.
유금필 폐하, 그만 상심을 털어버리시오소서. 이번 전투는 운이 없으셨다 생각하시오소서. 용안이 너무 어두워 보이시옵니다.
왕건 생각할 수록 어이가 없어서 그러하이. 내가 끌고간 군사들은 모두 죽었네. 얼굴을 들 수가 없어... 다 내 잘못이었네.
유금필 전투라는 것이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다음을 생각하시오소서.
왕건 글쎄... 다음이라..? 다음이라...?
왕건은 그렇게 힘없이 중얼거린다. 그는 완전히 의욕을 잃었다. 그런 왕건을 유금필이 안쓰러운 듯 본다. 그렇게 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씬 산 속 신검의 진영
신검이 장수들과 함께 먼 산야를 보고 있다. 그곳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한 필의 말이 급히 달려와 멈추어 선다. 그리고 신검에게 군례를 올린다.
신검 너는 성 쪽으로 나갔던 첨병이 아니냐?
첨병 예, 총사.
신검 유금필 군이 온다기에 군을 정비하고 있는 중인데 한나절이 지나도 소식이 없구나. 성 쪽은 대체 어떻게 되었느냐?
첨병 고려군은 모두 물러갔사옵니다, 총사.
신검 뭐라..? 물러가..? 고려군이 모두 가버렸다는 말이냐?
첨병 예, 총사. 충주 방면으로 향하는 길목 쪽으로 모두 떠나가 버렸사옵니다. 분명히 확인했사옵니다, 총사.
종훈 태자마마, 저들은 이미 절반이 넘는 군사가 태자마마께 궤멸당했사옵니다. 그리고 주변의 호족들이 모두 우리 백제에 투항을 했사옵니다. 삼년산성을 고집하고 있을 형편이 못되옵니다. 그러니까 가버린 것이옵니다.
신덕 그러하옵니다. 저들의 목적은 본래 삼년산성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상주로 가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어렵게 되어 버린 것이옵니다. 이번 전투는 결과적으로 태자마마께서 승리하신 전투이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양검 그러하옵니다, 형님. 형님께서 이기신 전투이옵니다.
용검 그러하옵니다. 고려왕은 못 잡았지만 분명히 형님께서 이기셨사옵니다.
신검 시끄럽다. 너희들이 뭐 할 말이 있다고 중얼거리느냐? 이것은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닌 그런 전투이니라. 우리가 고려왕의 군사를 궤멸시킨 것은 이긴 것이지만 성을 빼앗긴 것은 또한 진 것이 아니냐? 헌데 무엇이 이겼다는 것이야?
애술 송구하옵니다, 총사. 신이 경망하여 성을 잃었사옵니다. 벌하여 주오소서.
신검 벌을 내릴 것까지야 무엇이 있겠소? 유금필이란 장수가 애술 장군 같은 맹장을 겁박하였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오. 어쨌든 성을 비우고 물러갔으니 좋게 생각하십시다. 그나저나 이것 참 왜 이리 운이 없을꼬..? 다 잡은 고려왕을 놓치다니... 이럴 바에야 차라리 상주로 갔더라면 얼마나 생색이 났을 것인가? 그 넓은 지역을 다 금강이가 피한방울 안 흘리고 점령하지 않았소이까? 어이구.. 그냥 상주로 갈 것을...
안타까워하는 신검의 그 표정위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씬 상주 어느 산성 외경
씬 동 성안
금강이 전령이 가지고 온 장계를 보며 웃는다. 박영규, 상귀, 부달, 소달들이 영문을 몰라 의아하게 보고 있다.
금강 (장계 접으며) 삼년군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있었다 하오이다. 헌데, 신검 형님께서 다 잡은 고려왕을 또 놓쳤다고 하오이다. 이거야말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올시다. 아니 그렇습니까, 매부?
박영규 그래도 한 나라의 제왕이 아니옵니까? 그렇게 쉽게야 잡을 수 있겠사옵니까? 오로지 고려왕을 목적으로 하여 신검 태자께서 절치부심 가셨는데 그것 참 아니 되었사옵니다.
금강 성도 빼앗겼다가 고려군이 물러가는 바람에 간신히 되찾았다고 합니다. 하하하.... 양검, 용검 형님들이 신검 형님에게 크게 꾸중을 들은 모양입니다. 전령을 우리에게 보내면서 황도에도 띄웠다 하니 지금쯤 폐하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시겠습니다.
상귀 그럴 것이옵니다, 태자마마. 어찌 되었든 이번 상주방면 전투에서는 태자마마의 공이 제일 높게 되셨사옵니다. 수많은 고려의 호족들이 투항을 하였고 성을 내어놓았사옵니다.
부달 어디 그것뿐이옵니까? 고려의 맹장이라는 박술희도 손 한번 쓰지 못하고 돌아갔사옵니다.
소달 그뿐이옵니까? 비록 신검 태자마마께서 고려왕을 놓쳤다고 하지만 그 군사들을 전멸시켰다는 것은 엄청난 전공이옵니다.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금강 그럴 것이오. 분명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하하... 아버님의 말씀이 옳으신 것 같습니다. 백제의 날이 계속되는 것이올시다. 통일대업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에요. 암요...
씬 전주 황도 외경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씬 동 대전
박씨와 고비가 앉아 있다. 최승우와 능환, 능애, 염흔, 영순들이 보고 있다. 견훤은 계속 장계를 보며 박장대소한다.
견훤 이것 보게, 이것 보아... 이거 아주 내 아우 고려왕이 불쌍하게 되었네 그려. 신검이에게 쫓겨서 간신히 목을 싸쥐고 도망쳤다는 것이야. 신검이에게 말이야.
박씨 참으로 신첩은 오랜만에 폐하께오서 신검이 칭찬하는 것을 들어보옵니다.
견훤 칭찬할 것은 해야지. 아, 기분이 참으로 좋도다. 고려왕을 다 잡았다가 놓쳤다는구먼. 얼마나 혼쭐이 났을꼬... 이야말로 영락없는 공산전투의 재판이 아닌가 말이야.
최승우 그런 것 같사옵니다, 폐하.
능환 이야말로 신검 태자마마의 뛰어난 전투력이 유감없이 드러난 쾌거이옵니다, 폐하.
능애 참으로 그러하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하옵니까? 고려왕을 그처럼 참담하게 망신을 주다니 말이옵니다.
그러자 갑자기 웃고있던 견훤이 표정이 굳어지며 그들을 한번씩 둘러본다. 분위기가 갑자기 묘해진다.
박씨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견훤 물론 신검이가 잘 했지. 헌데 말이야, 기왕이면 목적한 바를 이루었어야지. 처음의 목적이 고려의 왕을 잡는데 있었어. 그래서 상주로 가라고 했는데도 그곳에는 금강이를 보내놓고 자신은 삼년군으로 갔단 말이야. 왜냐? 금강이보다도 더 큰공을 세우려 했던 것이지.
박씨 폐하...?
견훤 들어보시구려. 내 말이 맞는가 아니 맞는가 말이야. 큰 공명을 세우려고 자신이 가야할 상주는 제쳐놓고 삼년산성으로 갔어. 헌데 삼년산성 마저도 빼았겼다가 고려군들이 스스로 물러가는 바람에 간신히 되찾았다는 것이야. 헌데 뭐가 그렇게 쾌거이고 대단하였다는 말인가? 뭐가 말이야? 뭐가 그렇게 대단한 전투력이 유감없이 드러나, 드러나기는...? 아마도 금강이 같았으면 분명히 잡았을 것이야. 고려왕을 틀림없이 잡았을 것이라고...
박씨 폐하, 듣자하니 참으로 너무하시옵니다. 이렇게 자식을 편애하시니 그 자식들이 똑바로 설 수가 있겠사옵니까? 고려왕이 이끌고 온 군대를 다 전멸시켰다고 하옵니다. 그만한 전과라면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무슨 큰 죄를 지어서 그 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그렇게 싫어하시옵니까?
견훤 이야기가 그렇다는 것이오. 이야기가... 이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 과장되게 신검이를 칭찬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말이오.
박씨 이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가시방석 같아 못있겠사옵니다. 네, 그렇게 하시오소서. 늘 금강이만 칭찬하고 그렇게 지내시오소서.
박씨는 그렇게 휭하니 일어나 나가버린다. 모두 눈치만 본다.
견훤 하여간에 저 황후의 성질하고는... 그저 무조건 신검이만 싸고 도는구만. 무조건 말이야. 에잉 쯧쯧쯧... 허나, 사실이 그런 것을 어찌하는가? 금강이 말이야. 그 어린것이 피를 흘리지 않고 상주 일대를 거의 장악했다는 것이야. 싸우지 않고 말이야. 이러니 내가 어찌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니 그렇소, 승주부인?
고비 과찬이시옵니다. 황후마마계시는 데는 제발 그런 말씀을 삼가해주시오소서. 듣잡기 민망하옵니다.
견훤 허허허... 민망할 것 없소이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해야지. 암.. 아무튼 이번 전투는 그런대로 성과가 좋았어. 이보게, 파진찬?
최승우 예, 폐하
견훤 왕건아우가 이번에 혼쭐이 또 났네 그려. 그리고 우리는 상주 일대를 상당부분 장악했어. 태자들만 맡겨 놓을 것이 아니라 다음에는 우리가 나가세 그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근래의 조짐을 보니 고려는 그 운이 다한 것 같아. 다음에는 우리가 나가서 확실하게 뿌리를 뽑아보세 그려.
최승우 허허허.. 예, 폐하.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견훤 아, 즐겁도다. 왕건아우의 생각만 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단 말이야. 하하하하.....
씬 어느 길
천둥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먹구름이 지나쳐 간다. 왕건 일행의 회군길이 계속되고 있다. 우울하게 유금필이 하늘을 본다.
유금필 비가 오려는 것 같사옵니다, 폐하. 길을 좀 서둘려야겠사옵니다.
왕건 그런 것 같구먼.
천둥소리는 계속되고 이들 얼마쯤 가는데, 또 한쪽 길에서 급히 말을 몰아오는 전령들이 보인다. 가까이 이르러 군례를 한다.
전령 폐하, 박술희 장군께서 보낸 전령이옵니다. 장군께서 곧 도착하실 것이니 알려드리라 하였사옵니다.
유금필 박술희 장군이 이리로 오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지금 상주에 있지 않다는 것인가?
전령 예, 장군. 상주 일대의 많은 읍성들이 백제 쪽으로 붙어 길목이 막혔사옵니다. 해서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이옵니다.
윤신달 뭐라..? 길이 막혀..? 그곳에서도 호족들이 배신을 하였다는 것인가?
전령 예, 장군.
왕건은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는다. 그들 뒤로 저만큼 박술희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 그렇게 서로 가까워진다.
씬 그곳
박술희가 왕충, 염상과 더불어 왕건과 가까이 이른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박술희 폐하, 신 박술희이옵니다. 전령을 통하여 폐하께오서 겪으신 고초를 들었사옵니다. 얼마나 힘이 드셨사옵니까?
왕건 힘이 들다니..? 그저 오로지 부끄러울 뿐일세.
박술희 신 또한 부끄럽게도 상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폐하를 뵈러 길을 돌렸사옵니다. 그쪽에도 호족들이 일제히 배신을 하여 길을 뚫고 들어갈 염두를 내지 못하였사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왕건 용서라니..? 그것은 내가 할 말이야. 자네들은 군사들이나 제대로 보존하였네. 허나 나는 데리고 간 군사를 모두 잃었어.
염상 폐하, 들었사옵니다. 한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고 들었사옵니다.
왕건 사정이 아닐세. 이 모든 것은 나의 부덕의 소치야. 나 하나의 판단이 흐리고 잘못된 결과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일세.
왕충 고정하시오소서, 폐하. 한번 실패는 병가지상사라 하였사옵니다.
왕건 한번이 아닐세.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 조물성에서 한번 공산에서 한번 그리고 이 삼년군에서 또 한번.. (비감하다) 내 판단이 잘못되어서 수많은 장졸들을 잃었어. 태평군사를 잃고 내 아우 신숭겸을 잃고 김락, 김언, 전이갑 장군들을 모두 잃었어. 헌데... (격해지며) 헌데.. 이 삼년군에 와서 또 다시 머리를 싸매고 도망치는 내 꼴이라니..? 이래가지고 언제 아우들의 원수를 갚는다는 말인가? 이래가지고 언제... 도대체 이래가지고 언제.....!
말하다가 왕건은 울컥 피를 토하며 비틀거린다. 천둥소리는 여전하고 비가 쏟아져 내린다. 장수들이 우 달려온다.
유금필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무 아바마마...
박술희 폐하...
이 모든 소리들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왕건은 그렇게 입가에 피를 흘리며 앞을 보다가 스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보고있던 부장들이 얼른 부액하여 받아 내린다.
유금필 폐하, 정신차리시오소서. 폐하.. 부장들은 무얼하느냐? 어가를 대령하라. 말이 아니니라. 어가를 찾아 뫼시어라. 그리고 종군 의원은 어딜 갔느냐? 의원을 찾아라. 폐하를 뫼시어라.
아수라장이다. 왕건은 그렇게 한쪽으로 부장들에 의해 모셔져 간다. 정윤 무와 장수들의 표정이 착잡하다. 박술희와 유금필이 그렇게 서로를 본다. 비는 그렇게 쏟아지고 있다. 디졸브...
씬 길
급조된 어가에 왕건이 모셔져 가고 있다. 비바람 속에 무수한 낙엽이 눈처럼 휘날려 떨어지고 있다. 아무도 말이 없고 왕건 일행은 그렇게 카메라 앞을 길게 지나쳐 가고 있다.
해설 단기 3261년, 서기로는 928년인 그해. 그러니까 왕건이 황제에 오른지 십일 년째가 되는 그 해에 왕건은 생애 세 번째의 큰 패배를 맛보게 된다. 지난 해 공산 전투에 이어 만 일년만에 그 공산 전투의 한을 갚으려다가 또 다시 백제군의 공격을 받고 처참한 도주를 계속했던 것이다. 이때에 탕정군 쪽으로 가 있던 유금필의 구원이 없었더라면 왕건은 그야말로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뻔하였다. 왕건은 그 길로 청주를 거쳐 충주로 해서 수도인 개경으로 그렇게 쓸쓸히 회군하여 돌아갔다.
씬 송악 황궁 외경 (밤)
비가 계속 쏟아지고 있다. 천둥소리가 계속된다.
씬 동 황후전
황후 오씨와 유씨, 두 상궁이 함께 해 있다.
오씨 폐하께서 돌아오신지 이틀이나 되었는데 아직까지 자리에 누워 계시는 모양일세.
유씨 어쩌면 좋사옵니까? 가서 뵈려해도 일체 출입을 금하라는 영이 계셨다 들었사옵니다.
오씨 그러게 말일세. 피를 토하셨다 들었네. 얼마나 한이 크셨으면 그리 되셨겠는가?
유씨 공산전투와 똑같은 일이 삼년군에서도 있었다 하옵니다. 그러니 얼마나 상심이 크셨겠사옵니까?
오씨 한두 번도 아니고 요 몇 년을 계속해 불운하게 보내셨네. 안타깝네 그려. 이보게, 제조상궁?
제조상궁 예, 황후마마.
오씨 편전에는 아직도 신료들이 가지 않고 있다지?
제조상궁 예, 그리 들었사옵니다, 마마.
유씨 황후마마, 폐하께서 환후가 어떠하신지 우리 김상궁을 보내 알아보면 어떻겠사옵니까?
오씨 그리 하시게.
유씨 김상궁, 대전에 가서 주변 내관들에게 좀 물어오게나. 대체 환후가 어떠하신지 말일세.
김상궁 예, 마마.
김상궁이 그렇게 나간다. 두 여인은 한숨을 쉬며 서로를 본다. 빗소리는 계속해 들린다.
씬 동 대전
왕건이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스스로에게 밀려드는 화를 삭히려 애를 쓴다. 한숨을 계속 쉰다. 지난 공산 때의 일이 서서히 살아 오른다. 신숭겸의 소리가 에코우로 들려온다.
신숭겸 (소리) 형님 폐하....
왕건 ..............?
흠칫하며 신숭겸이 옆에 있는 듯 돌아본다. 그리고 한숨을 쉰다. 그의 그런 표정에서...
씬 짧은 회상 (160회 마지막 씬)
아직 투구를 쓰지 않은 왕건이 군졸복 차림으로 놀라 벌떡 일어선다. 제장들이 와 그렇게 선다.
왕건 (너무도 놀라) 뭐가 어떻게 된 일인가? 숭겸 아우는 그게 무슨 일인가? 왜 이 형의 갑옷을 입었는고..? 전이갑 장군은 왜 복장군의 갑옷을 입었는가?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신숭겸이 눈물을 흘린다.
신숭겸 형님폐하, 오늘의 이 곤경을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신들이 꾸민 일이옵니다. 무사히 가시오소서.
왕건 무슨 소리인가?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김락 폐하, 부디 이곳을 빠져나가시어 사직을 보전하시오소서.
전이갑 신들을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부디 이곳을 무사히 나가시오소서.
전의갑 사직을 보전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나를 속였구먼. 모두들 나를 속였어. 이제 보니 아우가 나를 위장하여 적진으로 가는 사이에 이 형보고 도망가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닌가?
신숭겸 용서하시오소서, 형님폐하. 형님폐하를 위해 목숨을 다 할 수 있게되어 이런 기쁨과 영광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데, 부디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형님폐하.
김락들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폐하.
왕건 (절규하며) 이럴 수는 없다. 내 목숨 하나 살자고 아우와 제장들을 다 죽이다니... 이럴 수는 없다. 나는 아니 갈 것이야. 나는 아니 갈 것이야...
신숭겸 무엇들 하시오? 어서 폐하를 뫼시시오.
복지겸 폐하, 용서하시오소서.
그러자 그렇게 복지겸과 박수문들이 왕건을 잡는다.
왕건 놓아라. 이것들 놓아라... 나는 아니 간다. 나는 아니간다....
신숭겸 형님폐하, 가셔야하옵니다. 형님폐하의 어깨에는 대 고려제국의 명운이 달려있사옵니다. 신들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시오소서. 부디 강건하시고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왕건 아니 되네... 아니 돼...
그러나 이미 신숭겸들은 일어나 예를 올린다. 그리고 그곳을 빠져 나간다. 왕건은 계속 몸부림친다.
왕건 아니된다.. 아니 돼... 아니 돼..... 숭겸아우... 아니 된다...!
신숭겸 무사히 가시오소서, 형님폐하.
왕건 숭겸아우....!
왕건이 손을 뻗어 절규한다. 카메라는 그 모습에서 슬로우모션으로 잡아들면서 판하여 마지막 웃으며 군막문을 나서는 신숭겸의 웃는 모습을 잡는다... 그 모습에서 스톱모션에서 현실로 바뀌어 든다.
씬 그 현실
왕건이 한숨을 쉰다. 그리고 천천히 도리질을 한다
왕건 모두들 나를 보고 사직을 지키고 대업을 이루라 하였어. 그리고 나 대신 그렇게들 죽어갔어. 나 대신.... 허나 이게 무어란 말인가? 계속해서 참담하게 무너져가는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 꼴이......?
그때, 내관의 소리가 들려온다.
내관 (소리) 폐하, 전의가 탕재를 대령했사옵니다.
왕건 ................
내관 (소리) 폐하.... 전의가 대령했사옵니다.
왕건 들여라...
그러자 내관과 함께 전의가 탕재를 받들고 들어온다. 그리고 전의가 눈치를 보며 탕재를 올려다 준다.
왕건 이것이 무엇인가?
의원 말씀 올린 바와 같이 탕재이옵니다.
왕건 내가 뭐라 하였느냐? 약재 따위는 올리지 말라 했는데 왜 이리 자꾸 들고와 성가시게 하느냐?
의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이 진맥을 살펴 보았사온데 폐하께서 는 옥체에 화기가 너무 승하시옵니다. 계속해 두시면 큰 병으로 바뀌오니 약을 쓰시어 다스리셔야 하옵니다.
왕건 치워라. 그리고 다시 이르거니와 이후로는 절대로 약재를 가져오지 말아라. 알겠느냐?
의원 아니 되옵니다. 꼭 드셔야 하옵니다. 너무 많은 화기가 오장육부에 가득 미쳤사옵니다. 중화를 맞으시기 전에 다스리셔야 하옵니다, 폐하.
왕건 (약사발을 내던진다) 치우라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 내 속은 약을 먹어서 나을 속이 아니다. 물러가거라. 모두 물러가.
의원 (놀라서) 예, 폐하...
내관과 의원들이 물러간다. 빗소리는 여전하다. 촛불이 가물거린다. 왕건은 긴 장탄식을 계속한다.
왕건 차라리 속이 타서 재가되어 죽었으면 좋겠구나. 지금쯤 구천에 가 있는 아우와 장수들이 나를 얼마나 비웃고 있을꼬..? 이 못난 나를.... (갑자기 또 분함이 치밀어 오른다) 도저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번의 패배는 그 호족들 탓이다. 저들의 배신은 용서할 수 없어. 다 그놈들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야. 그놈들 때문에... 여봐라. 밖에 게 있느냐?
내관 (소리) 예, 폐하. (내관이 들어와) 불러계셨사옵니까?
왕건 오냐, 즉시 의형대 관리들과 내군에 짐의 영을 전하라. 지난번 오어곡성에서 백제군에게 투항한 장수들의 가족들을 모두 저자거리로 끌어내라 하라. 그 이외에 상주 근방에서 우리 고려국의 녹을 먹고 있다가 백제로 붙은 집안의 가솔들도 모두 끌어내어 저자거리에서 참하라 하라.
내관 예, 폐하.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왕건 아니, 아니다. 도성에 있는 장졸들과 문무신료들을 모두 들라 하라. 짐이 특별히 사열할 것이다. 또한 궐안의 황후들도 다 그 자리에 나오라 하라. 그 앞에서 백제에 붙은 저 간악한 배신자들의 가족들을 참할 것이다. 알겠느냐? 짐의 뜻을 바로 전하라. 이틀 후에 시행할 것이다.
내관 예, 폐하.
왕건 괘씸한... 괘씸한....
씬 내군 관아 외경
씬 동 관아 안
시중 김행선과 더불어 복지겸, 최응, 왕규, 추언규들이다. 이들이 모두 무거운 표정으로 모여있다.
김행선 폐하께서 돌아오신 이후, 상심이 아주 크신 것 같습니다. 의원의 말을 들으니 올리는 탕재마다 모두 쏟아버리신다 하오이다.
왕규 그만큼 상심과 노기가 크신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추언규 허나,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두문불출하고 화만 삭이신다면 아니 되실 일이지요. 하실 일이 많소이다. 우리 신료들이 모두 가서 위로를 드림이 마땅할 것이외다.
복지겸 폐하께서 위로를 받으시고자 저리 하시겠습니까? 거듭되는 패전에 마음이 아파 저리하실 것이오이다.
김행선 (끄덕이며) 맞는 말씀이오. 얼마나 속이 타고 아프시겠습니까? 공산 전투에서 돌아오시어 불과 일년만에 또 다시 참담한 실패를 겪으셨소이다.
복지겸 그러게 말입니다. 참으로 요 몇 해는 불운의 연속이십니다. 일선의 호족들이 그렇게 배신할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병부령?
최응 예... (한숨) 사실 그것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빨리 감지하지 못한 결과가 그리된 것이지요. 폐하께오서 공산전투의 한만 생각하시고 좀 더 주변을 살피시지 못하셨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때, 내군 부장 하나가 예를 올리며 들어와 뭔가 복지겸에게 속삭인다.
복지겸 뭐라고...? 황도의 군사들을 사열하신다?
모두들 ...............?
부장 예, 장군. 뿐만 아니라 문무신료들을 모두 모이라 영을 내리셨사옵니다. 하옵고 황후마마와 내명부의 어른들도 그곳에 모두 참여한다 하옵니다.
복지겸 그래..? 그래서..?
부장 그 자리에서 이번에 백제 쪽에 투항한 호족과 장수들의 가족을 모조리 불러내어 참하라 영을 내리셨사옵니다.
김행선 무엇이라....? 병사들을 사열하는 자리에서 투항한 호족들의 가족을 참하신다?
추언규 아니 이런 세상에... 폐하께서 어찌 그런..
왕규 얼마나 노기가 크시면 그런 영을 다 내리시겠습니까마는... 폐하의 어지신 성정으로서는 참으로 뜻밖이옵니다, 시중어른...
김행선 그러게 말이오. 속히 상하신다 하여도 그렇지..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다가 목을 베신다니...?
최응 ...............
복지겸 비록 호족들이 백제에 투항하였다고 하여도 그 가족들을 끌어내어 사열장에서 참한다는 것은 결코 민심을 얻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올시다. 가서 만류를 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렇소이까, 병부령?
최응 ..................
복지겸 이보시오, 병부령?
최응 이것은 폐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신료들이 만류할 일이 못되는 것인 줄로 압니다.
김행선 그건 또 무슨 말이시오?
최응 장수들을 외지에 내 보내고 그 가족들을 도성에 두게 하는 것은 저들이 배신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헌데 저들은 제 목숨만 살려고 투항을 해 버렸습니다. 겁만 주기보다는 정말로 배신할 때는 어찌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지요. 폐하의 뜻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김행선 그래도 그렇지... 허허, 이것 참... 항복한 장수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가족들이 무슨 죄가 있을꼬...? 이런 딱한 일이 있나? 어지신 폐하께서 참으로 뜻밖이시오. 이런...
씬 다시 동 대전
왕건이 주먹을 쥐고 있다. 바람소리가 높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노기로 떨고 있다. 내관의 소리가 들려온다.
내관 (소리) 폐하, 대전내관이옵니다. 내군부장이 폐하의 영을 전하고 돌아왔사옵니다.
왕건 들라하라.
내군부장이 들어와 예를 표하고 선다.
왕건 짐의 영을 전하였느냐?
부장 예, 폐하. 내군 장군과 병부령에게 이를 전하였사옵니다. 이틀 후에 군사들의 사열이 있을 것이며 그 사열장에서 배신자들의 가족을 처형할 것이라 전하였사옵니다.
왕건 분명 이틀 후라 하였느냐?
부장 예, 폐하.
왕건 허면 죄인들을 속히 다 잡아 드려야 할 것이 아니냐? 그래야 이틀 후에 형을 집행할 수 있을 것이야.
부장 예, 폐하. 이미 의형대의 관리들이 도성에 있는 죄인들을 모두 수색하고 압송중인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왕건 그래... 그래야지. 배신의 결과가 어찌되는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지. 알아야하고 말고.. 알아야지.... 알아야지..
그렇게 끓고 있는 왕건의 독한 표정에서..
씬 저자거리 (낮)
많은 남녀노소, 투항한 호족들의 가족들이 끌려오고 있다. 백성들이 연변에서 보며 혀를 차고 있다.
씬 배현경의 집 외경
씬 동 집안
배현경, 홍유, 유금필, 박술희가 모여있다. 평복차림이다.
배현경 폐하께오서 내일 중으로 도성의 장졸들을 사열하신다 하오이다. 우리 장수들도 거기에 참여하라는 영을 받았어요.
홍유 그곳에서 죄인들을 참한다 들었습니다.
박술희 그리 하셔야지요. 그놈들의 배신 때문에 우리 군사가 수도 없이 죽었습니다. 마땅히 본보기로 처형을 해야 합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형님?
유금필 ..............(생각이 많다)
박술희 아,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유금필 내가 생각하기에는 폐하께서 너무 노여움이 크신 것 같네. 그 처자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배현경 그건 이 사람도 그렇다고 생각이 듭니다마는...
홍유 하지만 연약한 아녀자나 노인들이올시다. 그자들을 저자거리에서 목을 벤다면 오히려 민심이 사나워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폐하께서 참으로 어지신 군주로서 잘 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존경심에 부담이 갈 수도 있어요.
박술희 그러나 법은 법이올습니다. 아무때나 다 좋기만 하다면 어떻게 나라를 운영한다는 말입니까? 처자를 도읍지에 두고 전장터에 나가는 것은 서로간의 약속이올시다. 그 약속이 깨졌다면 이 쪽에서도 마땅히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지요. 아, 그렇구 말구요.
유금필 글쎄....
박술희 글쎄라니..? 왜 이렇게 뜨뜻 미지근한 말씀만 하십니까? 폐하께서 왜 서둘러 전투에 나가셨습니까? 공산 전투에서 잃어버린 장졸들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깝게는 우리의 의형제인 숭겸 형님의 한을 갚으러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호족놈들이 배신을 했어요. 어떻게 그냥 둘 수가 있습니까? 죽여야지요. 가족이고 뭐고 다 끌어다 죽여야지요.
모두들 ............ (답답한 표정들이다)
씬 황궁 앞 뜰 (사열장)
무수한 군기들이 끝도 없이 펄럭이며 늘어서 있다. 그리고 문무신료들과 황후들이 모두 모여있다. 특히나 끝없이 도열한 장졸들의 표정은 모두 굳어있다. 김행선을 비롯하여 최응, 최지몽, 왕규, 추언규, 유금필, 박술희, 배현경, 홍유, 복지겸, 염상, 윤신달, 왕충, 박수문 형제, 정윤 무들이다. 왕건이 마련된 옥좌에 앉아 있다. 왕건은 아주 냉철한 모습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왕건 장졸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 죄인들은 어찌 아니 보이느냐?
복지겸 폐하께오서 죄인들을 들라 하신다.
부장 죄인들을 들여라.
항장들의 가솔들이 끌려오고 있다. 무려 이십 여 명이 넘는다. 여인들과 늙은이들 그리고 어린것들도 있다. 모두 앞에 꿇려진다. 왕건이 한참 보다가 말한다.
왕건 경들은 모두 들으오.
모두들 예....
왕건 짐은 오늘 이 자리에서 장졸들을 사열하면서 동시에 죄인을 처형하는 것은 잘못된 장수들의 간악한 이기심을 바로잡아주고자 함이오. (사이) 혹자는 말할 것이오. 이 가여운 여인들과 늙은이들, 그리고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말이오.
모두들 ................
왕건 그러나 어찌하리. 이들을 죽이는 것은 짐이 아니오. 바로 자신들의 목숨만 살기에 급급하여 도망치고 항복한 저 호족과 장수들인 것이오. 이를 놓아두면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나라를 보존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가, 아니 그런가?
모두들 폐하의 말씀이 지당하시옵니다.
왕건 일벌백계라함은 하나의 벌로서 백가지 잘못을 경계한다는 뜻이 올시다. 오늘의 일이 바로 그에 해당될 것이오. 경들은 삼가 짐의 뜻을 알고 몸과 마음을 겸손히 하기 바라오.
모두들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왕건 의형대의 관리들은 무얼 하느냐? 법을 시행하라.
복지겸 폐하께서 법을 시행하랍신다.
그러자 형리들이 칼을 빼어들고 형장에 끌려온 죄인들의 앞으로 나서고 있다. 모두들 긴장하여 보고 있다. 최응은 여전히 담담하다. 김행선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고 황후들도 보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갑자기 왕건이 큰 소리로 다시 말한다.
왕건 누가 칼을 쓰라 하였느냐? 나라를 배신한 역적들의 가족들이다. 철퇴를 쓰도록 하라.
그러자 모두들 웅성거린다. 황후들도 어쩔 줄 모르며 왕건을 본다.
왕건 칼을 쓰는 것은 그나마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해 주는 처형법이다. 역적들에게는 아니 된다. 철퇴를 써라.
신료들 .................
박술희 무얼 하느냐? 철퇴를 쓰랍신다.
그러자 칼을 든 형리들이 물러가고 철퇴를 든 형리들이 나선다. 김행선이 중얼거린다.
김행선 (떨며) 이거야말로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그런 것 같소이다. 그 옛날의 폐주도 철퇴를 잘 썼는데....
추언규 그러게 말이옵니다. 저런...
왕건 시행하라. 어서 시행하라..
복지겸 형리들은 무얼 하는가? 폐하께서 속히 시행하랍신다.
그러자 형리들이 다가간다. 그리고 내려치기 시작한다. 살육의 현장이다. 하나, 하나씩 그렇게 남녀노소들이 비명소리와 함께 죽어나간다. 황후들은 눈을 감고 있고 신료들은 굳은 듯 보고 있다. 그러다 그 중 어린 아이 하나가 설 맞았다. 살려달라고 울며 도망치려 한다.
아이 살려주시오소서, 살려주시오소서....
형리가 왕건 쪽을 본다.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박술희가 소리친다.
박술희 죄인들이다. 무얼 망설이느냐? 어서 처라.
아이 살려주시오소서. 살려.....
미처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아이는 다시 철퇴를 맞아 죽는다. 왕건은 냉철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보고 있다. 이십 여 명의 죄인들이 그렇게 다 죽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모두들 그렇게 왕건의 눈치만 보고 있다.
왕건 처형이 끝났으면 모두 끌어내어 까마귀밥이 되게 하라.
복지겸 죄인들을 모두 끌어내라.
대답과 함께 시신들이 모두 밖으로 끌려나간다. 또 그 모습을 한동안 보고 있다. 그 위로..
해설 늘 온유하기만 했던 왕건의 분노. 왕건에 관한 많은 기록 중에 그가 이처럼 혹독하게 법을 시행했다는 이야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후백제가 고려의 오어곡성을 공취해 고려군 일천 명을 죽이면서 장군 양지와 명식 등 6인이 항복하였다. 왕건이 그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구정에 모아놓고 그 처자들을 조리돌리며 모조리 저자에서 사형시켰다' 라고 되어 있다. 몇 년을 계속 패하면서 왕건이 얼마나 와신상담 몸부림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잘 드러낸 대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설이 끝나고 시체들이 모두 치워지면서 왕건이 일어선다.
왕건 경들은 모두 들으라.
모두들 예...
왕건 그 옛날 짐은 폐주 궁예가 수없이 사람을 죽일 때마다 그를 속으로 나무라고 원망한 적이 있었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도다. 그 군주를 악하게 하거나 선하게 하는 것은 모두 신료들이 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짐은 이번에 배웠노라. 경들은 절대로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라. 오로지 나라만을 생각하라. 목숨을 다하여 나라를 생각하라. 알겠는가?
모두들 예, 폐하..
왕건 명심하라. 그대들의 제국과 그대들의 가족과 그대들 자신을 위하여 하는 통일대업이니라. 한시도 한눈을 팔지 말아라. 잘못된 결과는 오로지 죽음뿐이니라. 죽음 뿐이야. 이 점을 명심하라. 황제가 오늘 경고하는 바이니라.
그렇게 서서 신료들을 보는 왕건의 단호한 표정에서...
<165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