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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대본

[태조 왕건] 170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7.12.06|조회수3,228 목록 댓글 0

태조 왕건 <제 170회>

고려군의 기습공격으로 사면초가에 빠진 견훤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고창에서 대패한다. 간신히 포위망을 피해 도망친 견훤은 끝내 지원군을 이끌고 오지 않은 신검의 의중을 꿰뚫어보게 되고... 한편, 고창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왕건은 고창의 세 호족들의 공을 크게 치하하며 승리를 자축하고, 백제에 항복했던 여러 호족들은 다시금 고려로 귀부한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견훤은 일부러 오지 않은 신검을 꾸짖고 바야흐로 권력을 둘러싼 백제국의 분열은 시작되는데...

 

씬  낙동강변 (밤)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온 사방이 불에 타고 있다. 이미 갈대 숲은 전체가 불이 붙어 무서운 기세로 백제군을 덮치고 있다. 금강이 소리소리 지르고 있고 견훤은 최승우와 더불어 어쩔 줄을 모른다.

 

금강    서둘지 말라... 당황하지 마라... 고려군은 별거 아니다. 대오를 정리하라... 부장들은 무얼 하느냐?

부장들  대오를 정리하라.... 대오를 정리하라....

금강    총사인 내가 명하는 것이다. 후퇴하지 마라.... 물러서는 자는 참한다... 물러서지 마라... 이보시오, 매부?

박영규  예, 총사.

금강    군대를 나누어 저기 유금필 군을 막고 한쪽은 이곳 성주 김선평의 군대를 막도록 하십시다.

박영규  예, 총사. 부장들은 나를 따르라. 제 일군은 저쪽의 유금필을 막으라. 그리고 제 이군은 좌측의 김선평 군을 막으라.

부장들  예, 장군...

 

        어지럽다. 부장들이 대답하며 사라진다. 불길과 돌덩이들은 계속 날아든다. 삽시간에 전사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씬  그 한쪽

 

        유금필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과 함께 지쳐 들어오고 있다.

 

유금필  적은 오합지졸이다. 밀어 부쳐라... 밀어 부쳐라.....

 

        유금필이 낙엽처럼 군사들을 베며 지나쳐 간다. 백제군이 "유금필이다... 유금필이다.."하면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유금필들은 그렇게 밀고 가고 있고...

 

씬  다시 그 한쪽

 

        어느 강가 둔덕에서 여전히 왕건이 최응, 복지겸, 최지몽과 함께 보고 있다. 온 강변이 불에 타고 있다.

 

왕건    우리도 저곳으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최응    아직은 아니옵니다. 잠시 후에 천천히 여유를 두고 가시오소서. 이제 결과만을 기다리시면 되옵니다. 저들은 완벽하게 우리 계략에 말렸사옵니다.

왕건    대단하이... 이곳 고창의 호족들이 참으로 대단해. 성주 김선평도 그렇고 특히나 저 김행이라는 호족도 그렇고 장정필도 그렇고...

최응    그렇사옵니다. 저들의 저러한 필사적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어려운 전쟁이 되었을 것이옵니다. 이 고창 전투는 이기셨사옵니다.

왕건    글쎄...? 아직 믿기지가 않아.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아.

복지겸  유금필 장군의 군대도 적의 측면을 치고 있고 방금 전 배현경, 홍유장군의 군대가 저들의 퇴로를 끊고 후미를 치고 있다 하옵니다.

왕건    아아... 옛날에 저들도 나와 같았을 것이야. 저 공산에서 나처럼 이렇게 보고 있었을 것이야. 저들은 포위되었네. 나갈 곳이 없어. 잡아야 해. 백제왕을 꼭 이번에는 잡아야 해.... 꼭....

 

씬  그 강변 전장터

 

        견훤이 어쩔 줄을 모르며 우왕좌왕한다. 금강이 소리친다.

 

금강    아바마마, 저들의 계략에 완전히 말렸사옵니다. 이미 군사들의 태반이 갈 길을 잃고 죽어가고 있사옵니다.

견훤    그런 것 같구나. 이처럼 엄청난 범위로 매복하여 기다리는 줄은 몰랐다. 우리 첨병들은 무얼 보았다는 말이냐? 대체 무얼 보았어..?

금강    피하시오소서. 어서 피하시오소서, 아바마마... 사방이 포위되고 있사옵니다.

 

        그 한쪽에서 드디어 홍유, 배현경들이 소리치며 나타나고 있다.

 

홍유    백제왕은 목을 내어놓아라... 이미 돌아갈 길도 다 끊겼느니라... 목을 내어놓아라...

배현경  백제왕은 어디 있는냐? 어디 얼굴 좀 보자꾸나.

 

        화광이 곳곳에서 번뜩인다. 어둠 속에서 백제군의 피해는 일방적으로 순식간에 불어나고 있다.

 

견훤    저들은 홍유와 배현경이다. 전투에서 많이 보았다. 일이 점점 꼬이는구나. 허나 우리는 이만이야, 이만... 대열을 정비해서 고창성으로 밀고 가야한다. 밀고 가야해...

금강    하오나 아바마마, 대열이 정비되지 않고 있사옵니다. 이미 흩어지고 있사옵니다.

최승우  전세가 순식간에 밀려버렸사옵니다. 폐하, 군대를 물리시고 재정비해야 하옵니다. 아아... 이럴 때에 지원군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견훤    신검이 이놈... 대체 이놈은 무얼 하고 있다는 말인가? 유금필 때문에 오지 못한다고 하더니... 무얼 하고 있는 게야? 유금필이는 여기에 와 있지 않은가? 이놈들은 무얼 하고 있는 게야?

 

        그때, 박영규가 달려온다.

 

박영규  폐하, 피하시오소서. 속수무책이옵니다. 대열은 흩어졌고 군사들은 중심을 잃었사옵니다.

견훤    피하다니... 피하다니..?  군대를 다시 정비해야지. 피하다니...?

박영규  이미 퇴로가 끊겼사옵니다.

견훤    퇴로가 끊겨..?

박영규  예, 폐하. 우리가 지나온 계곡 길에는 고려군이 숨어서 보고 있었사옵니다. 그들이 길을 막아 버렸사옵니다. 어서 가시오소서, 폐하.

 

        그때, 유금필이 부장들과 함께 백제군을 쓸어버리며 가까이 오고 있다. 추풍낙엽이다. 백제의 부장들이 속수무책으로 수없이 베어지고 있다. 견훤이 입을 벌리고 보고 있다.

 

금강    피하시오소서. 유금필이옵니다.

견훤    유금필이라...? 왕건의 의형제라지..?

최승우  예, 폐하. 공산에서 죽은 신숭겸과도 의형제이옵니다. 피하시오소서, 아니 되겠사옵니다.

견훤    나는구나. 아주 훨훨 날아다녀. 어이쿠....

금강    좌측으로 길을 뚫어보겠사옵니다. 따르시오소서, 폐하. 이곳에서는 아니 되옵니다.

견훤    가자꾸나. 일단 이곳을 피하자꾸나.

금강    매부 길을 여십시다. 어서요. 이곳에 있다가는 다 타죽습니다. 어서요.

박영규  예, 총사

 

        그들 힘을 합쳐 군사들과 함께 그곳을 빠져나가고 있다.

 

씬  그 근처

 

        왕건과 최응, 복지겸, 최지몽이 천천히 오고 있다. 삼태사가 군례를 하며 막는다.

 

김행    폐하, 지리멸렬이옵니다. 일찍이 이처럼 큰 전투는 처음 겪어보옵니다. 백제군들이 속속 싸우지도 않고 무기를 던지고 있사옵니다. 보시오소서. 완전한 승리이옵니다.

장정필  이제 곧 백제왕의 목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도망칠 곳은 없사옵니다.

김선평  그러하옵니다. 이곳은 뻔하옵니다. 앞으로 가면 우리 고창성이고 좌우 삼면은 모두 막혀버렸사옵니다. 갈 곳이 없사옵니다.

왕건    허나 나도 공산에서 살아 나왔소이다. 수만 명이 어우러져 싸우는 곳이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백제왕을 놓치는 수가 있소이다.

최응    그렇습니다. 모든 길목을 막고 백제왕을 노려야 할 것입니다.

왕건    잡아야지요. 꼭 잡아야지요. 암요, 백제왕을 잡아야지요....

김선평  그렇게 될 것이옵니다. 염려를 놓으시오소사. 자, 우리는 다시 가십시다.

두 사람 예...

       

        그들이 전장터로 달려나간다. 왕건은 긴장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씬  그 강변 어느 갈대 숲

 

        멀리서 연기와 불길이 번지고 있다. 견훤과 금강, 박영규가 달려오고 있다. 이들은 정신없이 오고 있다.

 

견훤    어떻게 된 것이냐? 도대체 이리해서 어디로 가자는 것이야? 우리 군대는 다 어떻게하고...?

박영규  군대는 잊으시오소서. 다시 정비할 기회가 없사옵니다. 군사들은 다 흩어지고 있사옵니다.

견훤    모아야지. 군사들을 모아야지. 이렇게 도망만 치면 어찌하나?

금강    서두르시오소서. 고려군이 바짝 다가오고 있사옵니다.

 

        불길이 계속되고 이들은 그 시야를 빠져 나오고 있다. 함성소리와 쫓는 군사들의 소리가 다급하다. 멀리서 유금필의 소리가
 들려온다.
 

유금필  백제왕이 저쪽으로 갔다. 쫓으라... 저쪽 갈대 쪽이다....

금강    유금필이옵니다, 폐하. 저자를 만나면 이곳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서두르시오소서.

박영규  자,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시오소서, 폐하..

 

        불길이 솟고 있다. 그 불길을 뚫으며 이들은 나아가고 있다. 때때로 거센 불길이 이들을 덮쳤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이들은 그렇게 그곳을 벗어난다. 뒤이어 유금필들이 들이닥친다. 이들의 시야로는 온 사방이 불바다일 뿐 연기와 불길 속에서 제대로 구분이 안 된다.

 

유금필  샅샅이 뒤져라. 분명히 이리로 왔다. 저 일대를 샅샅이 뒤져라.

 

        군사들이 대답하며 흩어진다. 배현경, 홍유들이 달려온다. 그리고 뒤 이어 김선평과 김행, 장정필이 달려온다.

 

홍유    백제왕이 어찌되었소이까?

유금필  도망친 것 같소이다. 멀리서 보니 백제왕의 말 같은 것이 이리로 오긴 온 것 같은데... 불길과 연기 때문에 더 이상 추격이 어려웠소이다.

김선평  아쉽습니다. 여기서 잡을 수 있었는데..

김행    멀리 도망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잡힐 것입니다. 자, 추격군을 편성하여 보내도록 하십시다.

장정필  그리 하십시다. 부장들은 추격군을 편성하라. 저 강 건너나 숲 일대에 그리고 산 길목마다 샅샅이 뒤져라.

 

        부장들이 대답하며 군사들과 함께 사라진다.

 

김선평  자, 이제 우리는 한시름 놓은 것 같소이다. 저들은 고창성 근처에도 와 보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소이다.

배현경  그런 것 같소이다. 하하하..... 자, 군을 정비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백제군의 전사자가 어마어마한 것 같소이다.

김행    그렇소이다. 어림 잡아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쳤고 나머지는 항복들을 하고 있소이다. 엄청난 전과이올시다.

 

        이야기를 하며 그들은 주변을 그렇게 본다. 시체로 바다를 이루었다. 그리고 다치거나 항복한 자들이 줄줄이 곳곳으로 끌려가고 있다. 그 면면들에서...

 

씬  어느 숲길 (새벽)

 

        허우적거리며 말을 버리고 세 사람이 달려오고 있다. 온통 어둠 속이다. 어느 쯤에 이르러 그들은 숨을 돌린다. 멀리 강변 쪽이 여전히 화광이 충천하고 있다. 견훤은 기가 막히다. 수염도 반쯤 타버렸다. 관은 벗겨져 없어졌고 머리는 풀어졌다. 옷은 또한 곳곳이 타서 그야말로 거렁뱅이처럼 보인다.

 

견훤    기가 막히는구먼... 참으로 기가 막혀... 이것이 도대체 꿈인가, 생시인가? 믿기지가 않아.

박영규  이만하시기가 다행이옵니다. 일단 호구는 벗어난 것 같사옵니다.

금강    곧 추격군이 올 것이옵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하옵니다.

견훤    (한동안 말없이 강 쪽을 본다) 믿기지가 않아... 불과 몇 시각만에 우리 군이 다 궤멸되어 버렸어. 아주 초토화가 되었어.

두 사람 ................

견훤    (수염을 쓰다듬다가 뭔가 허전하다) 이런... 수염마저 다 타버렸네 그려. 허허, 이런... 이 꼴하고는..

금강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하옵니다.

견훤    그래, 가기는 가야겠지. 하지만 너무도 내 꼴이 우습게 되었다. 정말 우습게 되었어. 이제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길이 다 막혀 있지 않느냐?

박영규  많은 군사가 다닐 수 있는 길은 막혔사오나 나뭇꾼들이 다니는 소로길은 찾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견훤    (산을 보며) 곧 날이 밝을 것이야. 저 험한 산 준령을 넘자고 하는 모양인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금강    가야하옵니다. 여기서 머뭇거리다가는 큰일 나옵니다, 아바마마.

견훤    그렇겠구나.

 

        그러다 그들은 갑자기 몸을 숨긴다. 일단의 군사들이 말을 달려와 지나치며 소리치고 있다.

 

군사    저쪽을 뒤져라. 저쪽이 마을로 가는 길목들이다. 주변 길을 샅샅이 다 뒤져라.

견훤들  ................(숨죽여 엎드려 있고)

군사    폐하께서 백제왕의 목을 가져오는 자는 상을 주신다 하셨다. 벼슬과 상을 받고 싶거든 찾아라. 꼭 찾아야 한다.

군사들  예...

군사    가자. 저쪽으로 가라. 일대는 이쪽으로 가고 또 일대는 저쪽으로 가라. 숲길과 갈대밭까지 모조리 뒤져라.

 

        군사들이 풀어져 나아가고 있다. 이들 세 사람은 숨을 죽이며 군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엉금엉금 기어 그곳을 벗어나고 있다.

 

씬  그곳 강변

 

        온통 함성으로 들끓고 있다. 승리를 자축하는 소리들이다. 왕건과 삼태사가 함께 손을 잡고 치켜들며 흔들고 있다. 최응, 복지겸, 최지몽과 더불어 윤신달, 염상, 왕충들이 함께 해 있다. 

 

왕건    (손을 내리고) 고맙소이다. 오늘의 이 승리는 짐이 수많은 전투를 겪어보았지만 그중 가장 완벽한 것이었소이다. 이 모두가 공들의 도움 때문이었소이다.

세 호족 망극하옵니다, 폐하.

왕건    하늘이 우리를 도왔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대승을 거둘 수는 없소이다.

김선평  폐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인군이시옵니다. 저희들 호족들 또한 인군을 따라 목숨을 맡기고 영토를 보전함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김행    감축드리옵니다.

장정필  감축드리옵니다.

 

        그때, 유금필과 홍유, 배현경들이 다가온다. 군례를 드린다.

 

유금필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완벽한 승리이옵니다. 대략 전과를 살펴보았사온데 백제군의 전사자만 팔천 여명에다가 부상자가 사천, 도망친 군사가 사천이며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았사옵니다.

최응    폐하, 이제 백제의 왕만 잡으면 될 것 같사옵니다.

왕건    그런 것 같네. 나는 지금도 참으로 이해가 아니가. 저 백제의 태자 신검이는 대체 무얼하고 있는 것일까? 금필 아우가 이리로 왔다면 뒤를 쫓아 올 수도 있었을 텐데...

최응    아마도 그 신검 태자의 군대가 왔다면 상황은 아주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옵니다. 그 또한 폐하의 복이시옵니다.

염상    유금필 장군의 공이 그러고 보면 매우 큰 것 같사옵니다. 저들의 군대를 오지 못하게 하였을 뿐더러 다시 또 와서 저들을 크게 제압하였으니 말이옵니다.

김선평  그건 그러하옵니다. 우리들도 열심히 싸웠지마는 유장군의 공이 가장 눈이 부신 것 같소이다. 허허허...

 

        모두들 웃는데 홍유와 배현경은 찜찜하다. 왕건이 말한다.

 

왕건    자, 어찌 되었든 전체적인 전열을 정비하십시다. 그리고 백제왕을 잡을 계책을 논의하십시다.

모두들  예, 폐하.

왕건    대단했소이다. 참으로 대단했소이다.

 

        끄덕이는 왕건의 표정에서....

 

씬  그 산길 (아침)

 

        험준한 고목과 낙엽 사이로 가시덤불을 헤치며 견훤과 최승우, 금강, 박영규들이 오고 있다. 한참을 그렇게 가서 어느 쯤에 이르러 이들은 한숨을 돌린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고 잠시 안심을 하는데 견훤이 손으로 물을 떠 마신다.

 

견훤    어, 시원하다.... 참으로 정신없이 달려왔네 그려.

세 사람 예, 폐하.

박영규  그런 대로 이 산을 거의 넘었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되옵니다.

견훤    아침햇살이 참으로 눈부시구먼. 언제 그런 엄청난 전투가 있었느냐 싶게 조용해.

모두들  ................

 

        견훤은 불탄 수염과 자신의 옷 모습을 한참 만지고 뜯어보다가 갑자기 허허 웃더니 급기야는 그만 참지 못하고 계속 웃어 제친다. 세 사람은 무슨 영문인가 몰라서 그런 견훤을 한참 본다.

 

최승우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무엇이 그렇게 웃읍사옵니까?

견훤    자네들 몰골을 보니 기가 막혀서 그러네. 그리고 내 이꼴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하하...... 지난 공산 전투 때 말이야. 영락없이 왕건 아우가 내 꼴이었을 것이야.

최승우  (비로소) 하하하.... 그랬을 것이옵니다. 오죽하면 우리 백제군 군졸의 옷을 바꿔 입고 도망쳤겠사옵니까?

견훤    그러게 말이네. 그때는 왕건 아우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야. 기가 막히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말이야. 나처럼
 말이야.
최승우  분명 그랬을 것이옵니다.

견훤    그러고 보면 우리 두 사람은 참으로 명이 길어. 아니 그런가, 사위..?

박영규  그런 것 같사옵니다.

견훤    (보다가) 으핫하하하... 사위의 몰골도 그럴 듯 하네 그려. 그럴 듯 해... 금강아...?

금강    예, 폐하.

견훤    어쨌든 우리는 살아났다. 그 엄청난 불지옥을 벗어났어.

금강    그런 것 같사옵니다. 하오나 너무도 허망하옵니다.

견훤    허망할 것 없다. 전장이란 그런 곳이다. 한번 이기면 한번 지는 것이고 또, 열 번 이기다가도 그 한번 지는 것에 운명이 달려 있기도 하는 것이고...

금강    신검 형님께서 우리 전략대로만 와 주었더라도 그렇게 허망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사옵니다.

박영규  그렇사옵니다. 유금필의 군대가 강변으로 나와있는데도 신검 태자마마의 군대는 보이자가 않았사옵니다.

견훤    (생각하다가) 나도 줄곧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이보게, 파진찬..?

최승우  예, 폐하

견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신검이가 왜 오지 않았을까? 오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사이) 아니면.... 오지 않은 것일까?

박영규  (흠칫하며) 오지 않을 리야 있었겠사옵니까? 뭔가 사정이....

견훤    파진찬은 어찌 생각하느냐고 묻지 않는가?

최승우  박영규 장군의 말씀처럼.... (긴 한숨쉬며) 사정이 있었나 보옵니다.

견훤    그래..? 사정이라.. 사정이라.... 무슨 사정이었을꼬..?

 

        그러면서 견훤은 금강을 보다가 박영규를 보다가 최승우를 보며 날카롭게 말을 되씹는다.

 

견훤    무슨 사정이었을꼬...? 아비는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들이 오지 못할 사정이 무엇이었을꼬...?

 

씬  신검군 군영 외경

 

씬  동 군막 안

       

        신검이 초조해 하고 있다. 계속 뒷짐을 지고 오가며 초조를 이기지 못하며 한숨을 내쉬고 오가고 있다. 양검, 용검이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장수들이 모두 입을 닫고 있다. 

 

신덕    날이 밝은 지도 한참 되었사옵니다, 태자마마.

신검    ...............

최필    폐하께오서 계곡을 지나 낙동강변으로 들어가신 것이 확인되었사옵니다. 곧 전투의 결과가 드러날 것이옵니다.

김총    우리 아군이 패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사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앞길을 막고 있는 고려의 박술희 군이 아무 동요 없이 저러고 있을 리가 없사옵니다. 

애술    그렇다면 폐하와 금강 태자를 만나면 어찌되셨는지 궁금하옵니다.

용검    어찌되기는 무엇이 어찌된다는 말입니까? 전투에 졌으면 크게 다쳤거나 어디로 피하셨겠지요. 아니 그렇사옵니까, 형님?

종훈    태자마마, 우리는 좀 멀기는 하지만 우회를 하여 폐하께 갈 수도 있었사옵니다. 하오나 군을 움직이지 않았사옵니다.

신검    가도 뻔한 길이니 아니 간 것이 아니겠소이까?

종훈    폐하께오서 살아계신다면....

모두들  ............?

종훈    살아계신다면 분명 책임을 추궁하실 것이옵니다.

신검    나는 내 소임을 다했소이다. 앞으로 나가려고 하였고 그리하여 유금필군과 싸웠소이다. 다시 우회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길이 너무도 멀어 소득이 없겠기에 이러고 있는 것이올시다. 무얼 추궁하신다는 말씀이오?

모두들  .................?

신검    나는 겁이 나지 않소이다. 아버님께서는 잘해도 혼을 내셨고 못하면 혼을 더 내셨지요. 늘 그렇게 살아왔소이다.

애술    하지만 태자마마,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사옵니다. 군을 움직이셔야 하옵니다. 문소성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오소서.

신덕    만약을 모르는 일이니 사방으로 정탐병을 풀어 지난 밤의 전투상황을 알아보도록 하시오소서.

신검    그건 그리하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모두 문소성으로 가도록 하십시다. 제장들은 행군 준비를 해 주시구려.

모두들  예, 총사.

신검    두려워들 마시오. 어차피 모든 추궁은 내가 받는 것이올시다. 아시겠소이까? 내가 받는 것이에요.

 

        그런 신검의 표정에서...

 

씬  낙동강변

 

        간밤의 처참한 상흔들을 왕건이 멀리서 보고 있다. 그리고 도리질을 한다.

 

왕건    전사자가 팔천이라니...? 백제군이 죽은 것이 팔천이야..? 우리는 비록 이겼지만 얼마나 가엾은 죽음들인가? 과연 누가 저 억울한 죽음들을 보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안타깝네 그려.

최응    폐하의 그러한 따뜻한 성심이 바로 오늘의 폐하를 있게 하셨사옵니다. 하오나 전장이란 냉엄한 것이옵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선택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왕건    그렇기는 하네마는...

복지겸  그만 군막으로 드시오소서. 모두들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왕건    그리 하십시다.

 

        그들 그렇게 군막으로 간다.

 

씬  그 군막 안

 

        제장들이 도열해 있다. 삼태사도 있고 배현경, 홍유 등 전투에 참가한 모든 이들이 보인다. 박술희도 보인다.

 

왕건    경들은 들으오.

모두들  예, 폐하.

왕건    이겼소이다. 이 고창 전투에서 고려군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소이다. 모두들 열심히 싸웠으며 특히나 여기 계신 세 분은 이번 고창 전투의 최대의 공신들이올시다.

세 사람 망극하옵니다, 폐하.

왕건    따라서 짐은 경들에게 황제로서 최대한의 상급과 예의를 갖추려 하오. 세분 모두를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봉할 것이며 그 벼슬을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겸하게 할 것이오. 이를 황실의 기록에 올릴 것이며 경들이 자손대대로 그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에 기록할 것이오.

세 사람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왕건    또한 세분 중 김행 공은 짐이 알기로 신라 황실의 종성이라 하는데 지금부터는 신라가 아닌 고려의 황제가 주는 성을 쓰도록 하시오. 공은 특히 능병기달권(能炳幾達權)이라, 군사를 능히 잘 다루고 전략에 달통하니 내 특별히 권씨 성을 하사하는 바이오. 두고두고 가문의 영광으로 삼도록 하오.

권행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해설    삼태사(三太師). 태사란 왕의 고문, 즉 왕의 스승격을 일컫는 벼슬을 말한다. 그리고 대광이란 당시 벼슬아치 중에 최고의 품직이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한꺼번에 태사와 대광의 벼슬을 받는다. 물론 그들이 현직에 종사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예의로써 내린 벼슬인 것이다. 그리고 왕건은 이때의 승리를 자축하면서 고창을 안동부로 승격시켜 삼태사에게 그곳을 식읍으로 삼게 한다. 이때부터 세 사람은 모두 안동을 본으로 하는 성을 쓰게 된다. 훗날 조선조까지 그 권력과 영화를 다하였던 안동 김씨, 그리고 안동 권씨, 또한 안동 장씨가 바로 이들인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도 영남 지방에서 유래되어 내려오고 있는 차전놀이는 바로 이 안동의 견훤과 왕건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안동 지방의 대 전과는 왕건으로 하여금 그 동안 침체되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백제와의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왕건    다시 말하거니와 경들의 공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외다. 이점을 각별히 믿어주시구려.

세 사람 망극하옵니다, 폐하.

왕건    이제 이쪽은 안심이올시다. 우리 군은 다시 정비하여 황도로 돌아갈 것이오. 그 준비도 서둘러주시구려.

최응    예, 폐하.

왕건    아마도 백제왕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간 것 같소이다. 추격군을 보내고는 있으나 쉽지 않을 것이오. 그 점은 너무 서두르지 않도록 하오.

모두들  예, 폐하.

왕건    이제서야 두 발을 뻗고 편히 잘 수 있게 되었소이다. 이제부터는 다시 고려의 시대가 온 것이올시다. 고려의 시대가 온 것이오.

 

        왕건이 주먹을 불끈 쥔다. 모두들 '망극하옵니다'하며 허리를 숙인다. 비로소 자신감이 돌고 있는 왕건의 그 표정에서...

 

해설    그랬다. 고창 전투의 이 결과는 왕건에게 있어 그 동안 오래 울분에 끓게 하였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회복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왕건의 연속적인 패배와 더불어 백제에 머리를 숙였던 많은 호족들이 다시금 왕건에게 돌아오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영안(영천), 하곡(하양), 직명(안동 부근), 송생(청송) 등 무려 삼십 여 주변의 군현이 한꺼번에 고려에 귀순을 해버렸다. 그야말로 놀라운 파급효과였던 것이다. 

 

        해설이 이어지면서 왕건의 대군이 황도로 돌아가고 있다.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해설과 더불어 계속해 지나쳐 가면서... 지도가 수파된다.

 

해설    (계속) 또한 왕건은 이 때에 이 엄청난 전과를 즉시 신라에 보내어 알렸고 경순왕은 이를 치하하게 된다. 뿐만 아니었다. 이 전투 이후 김순식이 있었던 강릉에서부터 안동까지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읍성 110여 곳이 오랫동안 눈치를 보고 있다가 이 고창전투를 계기로 하여 무더기로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영토에 속해있던 호족들의 대대적인 이탈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른바 삼한의 질서가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씬  어느 산길

 

        견훤과 그 일행들이 계속해 산비탈 길을 타고 있다. 비탈길을 구르기도 하고 간신히 협곡을 지나며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렇게 어려운 길을 계속해 가면서 견훤은 참으로 스스로가 한심스럽다.

 

견훤    (어느쯤에 이르러) 이보게, 파진찬? 좀 쉬었다 가세.

최승우  예, 폐하.

 

        이들 모처럼 어느 바윗가에 기대어 앉는다. 흐르는 개울물에 견훤이 세안을 한다. 한참 닦다가 허허 웃으며 주변을 본다.

 

견훤    기가 막히구먼. 그래도 어김없이 계절은 오고 또 간다는 말일세. 저 오색단풍을 좀 보게. 산이 그냥 훨훨 타고 있네 그려.

모두들  ................?

최승우  신은 가끔씩 폐하의 그런 모습을 뵐 때마다 참으로 놀랍사옵니다.

견훤    뭐가 말인가?

최승우  지금처럼 다급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찾고 계시니 말이옵니다.

견훤    그런 말 말게. 여유가 아니라 내 한심스러운 꼴을 잊으려고 하는 말일세. 이것이 패전하여 도망치는 길이 아니고 그야말로 단풍놀이를 나온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두들  ................

견훤    그래, 이번에는 내가 너무 엉뚱하게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일을 크게 그르쳤네.

박영규  다 잊으시오소서, 폐하.

견훤    그래... 잊도록 하세. 허나 모든 것이 다 잊혀질 것 같지는 않아. (사이) 신검이 말일세...

모두들  ..........

견훤    내 오면서 줄곧 생각해 보았네. 그 아이는 오지 못한 것이 아닐세. 아니 온 것이야.

모두들  .............?

견훤    일부러 아니 온 것이야.

최승우  폐하....?

견훤    앞뒤를 따져보고 전후를 살펴보아도 신검이가 우리를 도우려하였다는 어떠한 근거도 보이지가 않아. 자, 어서 가도록 하세.

최승우  잊으시오소서. 뭔가 사정이 있었을 것이옵니다.

견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정말로 사정이 있어서 신검이가 그리했다면 좋겠어.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너무도 끔찍한 노릇이야.

 

        아무도 말이 없다. 견훤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앞을 선다.

 

견훤    가세. 벌써 이틀 째 낮밤을 걸었네. 오늘은 큰길로 내려가세나.

 

        그렇게 말하며 얼마쯤 가다가 그들은 선다. 막 길로 나서려는데 두 필의 말이 달려오다가 멈추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견훤들을
 본다.
 

박영규  너희들은 누구이냐? 보아하니 백제의 군복을 입었구나?

첨병    예, 장군. 소인들은 신검 태자마마께서 보내신 첨병들이옵니다.

금강    첨병.......? 허면 형님의 군대가 이 근처에 있느냐?

첨병    예, 태자마마.

금강    어디쯤에 있느냐? 너희들은 우리를 도우러 온 것이냐?

첨병    그런 것이 아니오라.... 문소성으로 후퇴를 하여 갔사온데...

박영규  그런데..? 어서 말해보거라.

첨병    이미 문소성의 호족들이 우리 백제의 인사들을 죽이고 고려에 투항해 버렸사옵니다.

최승우  무엇이라..? 허면 문소성까지도 빼았겼다는 말이냐?

첨병    빼앗긴 것이 아니라 저들이 배신하여 다시 고려로 돌아간 것이옵니다.

견훤    계속해 기가 막히는 소식들만 들리는구나. 신검이는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느냐? 

첨병    이곳에 십여 리밖에 임시 군영을 세워놓고 계시옵니다.

견훤    끙..... 가세, 파진찬. 가서 이야기 하세.

최승우  예, 폐하.

박영규  빨리 돌아가서 폐하께서 여기 계신다고 일러라. 의관을 갖추고 어마를 대령하라 이르라.

첨병    예, 장군.

 

        그들이 달려가 버린다. 견훤은 한동안 눈을 감고 화를 참는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금강과 박영규는 뒤쳐져 있다.

 

견훤    파진찬...?

최승우  예, 폐하

견훤    이래도, 자네는 이래도 신검이를 내게 천거하겠는가?

최승우  ...............

견훤    그놈은 나라를 망칠 놈이야. 애비를 죽이려고 하였어. 이번 일은 그렇게 밖에 볼 수가 없어. 놈은 일만의 군대가 있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어. 그리고 저 문소성마저도 다시 빼앗겨버렸어.

최승우  ............. (한숨만)

견훤    이래도 황도에 있는 저 늙고 멍청한 것들은 그저 신검이, 신검이만 부르짖고 있다는 말이야. (긴 한숨) 그래, 이제 뭔가를 결정할 때가 되었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결심을 굳히는 듯한 견훤의 표정에서 디졸브된다.

 

씬  신검이 있는 곳

 

        신검이 첨병을 보고 있다.

 

신검    무엇이라고..? 아버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말이냐?

첨병    예, 태자마마. 이곳에서 십여 리 밖 떨어져 있는 길가 숲속에 계시옵니다.

용검    틀림없이 살아 계시더냐? 금강이도...?

제장들  .............?

첨병    분명하옵니다. 파진찬 어른도 그리고 박영규 장군도 모두 살아 계시옵니다.

 

        아무도 말이 없이 서로를 본다.

 

종훈    우리가 문소성으로 가려 하였으나 그곳 마저 고려군에게 투항했다는 것도 아시고 계시느냐?

첨병    예, 군사. 말씀드렸사옵니다.

애술    어차피 다 아실 일이올시다. 어서 가서 폐하를 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덕    그리해야지요.

신검    살아 계신다...? 아버님께서 살아 계신다...? 하하하.... 그러시겠지. 그 분이 어떤 분이신데.... 쉽게 어찌 되시겠느냐? 양검아 용검아...?

두 형제 예, 형님

신검    앞서 가서 아버님을 뫼시어라. 또 뫼시어다가 욕도 듣고 매도 맞잣구나.

두 형제 예, 형님...

장수들  ................

신검    무엇들 하오? 폐하께서 가까이 계신다 합니다. 서둘러 가십시다.

장수들  예, 태자마마.

 

        신검은 한숨을 쉰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뭐가 그리 분할 것일까? 그는 주먹을 쥐며 어우어우... 소리를 지른다.

 

씬  길

 

        왕건의 군대가 그렇게 가고 있다.

 

왕건    지금쯤 백제의 왕이 어찌 되어 있을까? 살아난 것은 분명한데 말일세.

최응    말하지 않아도 뻔하옵니다. 그 형편이 아주 곤궁할 것이옵니다.

유금필  문소성까지 우리에게 다시 투항해 버렸으니 저들이 갈 곳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불쌍한 모습으로 백제로 돌아갈 것이옵니다.  

왕건    그렇겠지... 황도에는 소식을 띄웠소이까?

복지겸  예, 폐하. 지금쯤 전령이 도착했을 것이옵니다.

왕건    가을 하늘이 기가 막히게 맑고 높구만 그래. 그래... 이렇게 이긴 자는 여유가 있어 가을 하늘을 즐기지만 진 자는 지금쯤 울분과 괴로움으로 가슴이 찢어질 게야.

배현경  사는 이치가 모두 그런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왕건    그러하이... 이치가 그러하이... 이제서야 숭겸아우의 한을 조금 갚았네 그려. 마음이 가벼워. 모두가 금필 아우의 공일세.

유금필  망극하옵니다. 어찌 제 공 뿐이겠사옵니까? 여기 모든 장수들의 공이 한결같사옵니다.

왕건    허허. 그건 그러하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자네의 전공이 좀 더 뛰어났다는 것일세. 고마운 일이야.

유금필  망극하옵니다.

홍유들  ................?

 

        그들 그렇게 가고 있다. 흐뭇한 왕건의 표정에서 디졸브 되면...

 

씬  송악 황궁 외경

 

씬  동 황후전

 

        오씨와 유씨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김행선과 무가 함께 해 있다.

 

오씨    대승을 거두었다구요? 대승을 거두었어...?

무      예, 황후마마. 기뻐하시오소서. 대승을 거두었사옵니다.

김행선  드디어 폐하께오서 오랜 걱정의 그늘을 벗으시고 대승을 거두셨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두 상궁 감축드리옵니다, 황후마마...

유씨    참으로 감축 받을만 하시옵니다. 이것이 몇 년 만에 듣는 승전보이옵니까?

제조상궁        그러하옵니다, 마마. 참으로 온 나라가 경하하고 기뻐할 일이옵니다.

김상궁  마마, 궐안 불당에 젯상을 보아 올리오리까?

유씨    당연한 말이다. 폐하께서 승전을 하여 돌아오시는데 어찌 부처님과 천신, 산신에게 제를 아니 올릴 수가 있느냐? 준비하여라.

김상궁  예, 마마.   

오씨    이제서야 제대로 밥숫갈 좀 들겠네 그려. 폐하께서 가신 뒤로 도통 음식을 넘기지 못하였네. 이제는 안심일세. 안심이야....

유씨    예, 황후마마. 그토록 강성하던 백제군이 크게 무너졌다 하니 이 몸은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사옵니다.

오씨    그러게 말일세. 그러게 말이야.. 그 야차같던 백제군이 무너지다니... 허...

 

씬  백제 황도 외경

 

씬  동 황후전

 

        박씨가 눈을 크게 뜨고 묻고 있다.

 

박씨    그 말이 틀림없느냐? 우리 백제군이 대패하였다고...?

이상궁  그렇다 하옵니다, 황후마마...

박씨    대패를 하다니...? 다른 때보다도 더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가셨는데 패하시다니...? 말이 되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 신검 태자는 어떻게 되었다던가..?

이상궁  폐하께서 전투에 지신 것은 신검 태자마마께오서 미처 협공을 하시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옵니다.

박씨    무엇이 어쩌고 어째...? 그럼 우리 신검이 때문에 졌다는 말이냐?

이상궁  예, 마마...

박씨    어이구 이런.... 이런....

 

        어쩔 줄 모르는 박씨의 표정에서...

 

씬  동 황실 어느 전각 안

 

        능환과 능애가 영순과 함께 마주해 있다.

 

능환    전령의 말을 들었소이까? 대패하였답니다. 이만의 장졸이 모두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는 것입니다.

능애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영순    더 큰 일이 있습니다.

능애    큰 일이라니...?  그건 무슨 말씀이오?

영순    일길찬 염흔 공이 서찰을 남겨놓고 가버렸습니다.

능환    가버리다니..? 어디로 말이오?

영순    서찰에 보니 고려로 가겠다고 했사옵니다.

두 사람 뭐라...?

영순    이미 고창 전투의 실패 원인이 신검 태자마마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 황실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서찰에
 쓰여있었사옵니다.
능환    그렇다고 고려로 간다는 말인가? 우리의 적국인 고려로 가?

능애    오래 전부터 이 조정에 회의를 품어온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엄청난 실패의 원인이 신검 태자께 있다 하니 염흔 공이야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았겠소이까? 

능환    어쩌다가.... 신검 태자마마는 어쩌다가 이런 엄청난 일을.... 오호, 이 일을 어찌하는가..? 이 일을...?

 

씬  어느 들녘

 

        신검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다. 저 멀리서 견훤 일행들이 용검, 양검들과 함께 들어서고 있다. 견훤은 다소 수염도 다스리고 옷도 바꿔 입었다. 위엄을 차린 것이다. 점차 가까이 이르자 신검이 허리를 숙인다. 견훤이 그대로 선 채 신검을 한참 동안 노려본다. 장수들은 말없이 이들 부자를 보고 있다.

 

신검    어서 오시오소서, 폐하.

견훤    오냐. 그 동안 편히 쉬느라고 애 좀 썼겠구나?

신검들  .................(긴장하고)

 

        견훤이 그대로 신검 앞을 지나쳐 간다.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본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견훤    왜들 이리 긴장해 있는가? 왜들 이래..?

신검    폐하, 폐하의 본군을 도우려 했사오나 불행하게도 길이 막혀....

견훤    아, 아... 성질이 급하구나.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다.

모두들  ................

견훤    너는 오지 못한 것이 아니다. (사이) 오지 않은 것이야.

신검    폐하....

견훤    너는 오지 않았어..

 

        격노해서 손가락질하는 견훤의 증오 같은 표정에서....

 

                                                                <170회 끝>



첨부파일 태조왕건170.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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