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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대본

[태조 왕건] 174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7.12.22|조회수2,842 목록 댓글 0

태조 왕건 <제 174회>

왕건은 국론분열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 자책하고는 홍유와 왕식렴에게 큰 절을 하고 신료들은 비로소 감춰진 왕건의 분노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는다.  한편, 가슴의 통증을 느낀 고려의 책사 최응은 자신의 명이 다했음을 확인하고, 같은 시각 그의 운명을 감지한 최승우 역시 자신과 백제의 운이 다하고 있음을 한탄하면서 마지막으로 삼한의 정국을 반전시킬 전략수립에 골몰한다. 드디어 견훤을 찾아간 파진찬. 수군을 이용한 고려황궁공략작전을 제시하고 총사로는 신검이를 지목하는데....

 

씬  황궁 대전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왕건이 두 사람을 미소 지으며 보고 있다. 두 사람은 그저 식은땀만 흘린다

 

왕건    옛말에 권불십년이라 했소이다. 아무리 큰 권력이나 영화도 십 년은 결코 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두 사람 예, 폐하.

왕건    나는 잘 압니다. 두 사람의 공이 얼마나 크고 또 많은 줄 압니다. 허나 권력이란 지나고 보면 참으로 무상한 것이올시다. 물론 짐은 두 사람이 권력 때문에 그리 했다고는 절대로 생각지 않습니다. 아마도 나라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더 컸기에 유장군을 탄핵하였을 것이외다. 그렇지 않습니까? 

홍유    사실이옵니다. 신 홍유도 이제 어느덧 나이가 들고 반백이옵니다. 어찌 사심이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왕건    압니다, 암요... 그러니까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자 그럼 한가지 물어보십시다. 유금필 아우의 유배를 몇 년이나 했으면 좋겠소이까? 한 이십 년 섬에 쳐밖아 둘까요?

홍유    아, 아니올습니다, 폐하... 이십 년이라니...? 그만 풀어주시오소서.

왕건    자네는 어떠한가?

왕식렴  신들의 잘못이 크옵니다. 그만 방면해 주시오소서.

왕건    그러면 내 체신이 엉망이 되지 않겠는가? 금방 유배를 보내고 또 금방 풀어주고 한다면 누가 법을 믿고 따르겠는가? 기왕에 경들도 풀어주라 하니 가감을 해서 한 이태만 그곳에서 반성하게 하세.

홍유    이태라니요...? 이년이란 너무도 가하옵니다. 그만 풀어주시오소서, 폐하

 

        왕건은 짖궂게 웃으며 그들을 살핀다. 그리고 끄덕인다.

        

왕건    그렇소이다. 다행인 것은 경들이 모두 질투나 이기심에서가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그리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행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죄라면 황제인 이 사람이 받아야했습니다. 경들의 마음을 보다 더 헤아리고 살펴서 잘 정리하고 경영하여 가는  것이 황제가 할 일이올시다. 짐이 실수를 한 것이올시다.

홍유    아니옵니다. 아니올사옵니다, 폐하...

왕식렴  그만하시오소서, 폐하. 신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왕건    그래, 그래... 아우, 그만 하세. 그러나 이 말은 하고 싶네 그려. 절대로 우리끼리 내분이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야. 아니 그렇소이까, 홍장군?

홍유    이를 말이옵니까, 폐하?

왕건    백제가 지금 많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몇 년을 얼마나 잘 되어 나갔던 나라입니까? 헌데 우리에게 계속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아들과 아버지가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신료들이 흔들리고 서로 갈라지고 결국은 그곳의 중신이라는 자가 우리 고려로 투항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백제가 결정적으로 단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오.

두 사람 ..............

왕건    내분이 있는 나라는 결코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그래서 일부러 과장되이 유금필 장군을 죄 줌으로써 다시 있을 수 있는 분란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실 다시 말하거니와 유금필 장군의 죄는 이 황제의 죄이올시다.

홍유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폐하...

왕건    홍장군, 그리고 식렴 아우...?

두 사람 예, 폐하.

왕건    (미소를 걷고 한 동안 본다) 자, 내가 금필 아우를 대신하여 두 분께 죄를 청하겠소이다. 다 용서하시구려. 그리고 이 사람의 절을 받으시구려.

 

        왕건이 일어나 절을 한다. 두 사람은 황망하여 급히 일어나 맞절을 한다.

 

홍유    왜 이러시옵니까, 폐하...? 걷우시오소서, 폐하...

왕식렴  형님 폐하, 왜 이러시옵니까? 신들이 잘못했다고 하지 않사옵니까?

홍유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신들이 잘못했사옵니다, 폐하...

왕건    자, 우리는 오늘 모든 오해를 다 풀었소이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잘해 보십시다. 그 열정을 더욱 살려서 이 나라를 위해 모두 함께 힘을 모읍시다.

두 사람 예, 폐하. 이를 말이옵니까?

왕건    고맙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그렇게 끄덕이는 왕건의 모습에서....

 

씬  동 황후전

 

        오씨와 무가 마주해 있다.

 

오씨    이보시오, 정윤...?

무      예, 어마마마.

오씨    나는 폐하의 저런 점이 참으로 좋아 보이십니다. 나라의 문제를 아주 슬기롭게 풀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      그렇사옵니다, 어마마마.

오씨    지금 왕총관과 홍장군이 함께 술을 마시며 유배를 간 유장군의 일을 논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크게 꾸짖거나 혼을 내실 수 있는 일인데도 웃음으로 풀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      한 분은 사촌 아우님이시고 또 한 분은 일등공신이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저 분들의 위치나 권력이 너무 크시다 하여 쉽게 풀어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되옵니다마는...

오씨    그렇지가 않아요. 어디 폐하께서 그렇게 약하신 분이십니까? 외유내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버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정윤도 저런 점을 명심해서 배우도록 하세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 말입니다.

무      예, 어마마마.

오씨    황제의 자리가 얼마나 큰 자리이며 무소불위의 자리입니까? 그러나 힘으로만 그 자리를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오래 전에 죽은 폐주 꼴이 납니다. 궁예왕말입니다. 그 사람도 처음에는 대단한 황제였지요. 그러나 결국은 오만과 독선 때문에 불귀의 객이 되고 제국을 잃었습니다. 정윤은 곧 황제가 될 분입니다. 그런 모든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됩니다.

무      명심하겠사옵니다, 어마마마.

오씨    신하를 다스리는 일은 제국을 운영하는 제일 첫걸음입니다. 그 많은 신료들을 어떻게 내 사람으로 만들어 나랏일에 충성하게 하는가가 바로 황제가 할 덕목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무      예, 어마마마.

 

        끄덕이는 오씨의 표정에서....

 

씬  최응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최응의 병색이 완연하다. 덜덜 떨기도 하고 오한을 참으려 애를 쓰기도 한다. 집사가 찻물을 보아온다. 그리고 보다가 말한다.

 

집사    나으리, 찻상대령이옵니다.

최응    두고 나가거라.

집사    (눈치를 보다가) 뜨거운 차를 드신다고 되실 일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저자에 나가 의원을 불러오면 어떻겠사옵니까?

최응    하루 더 지내보자꾸나.

집사    벌써 이틀 째 이러고 계시옵니다. 소인 놈이 의원을 불러오겠사옵니다.

최응    글쎄... 한 이틀이면 나을 줄 알았는데, 이번 고뿔은 심하기도 하구나. 열이 났다가 식었다가 가슴이 갑자기 답답하게 숨이 차 올랐다가 풀어졌다가.... 이런 병증은 처음 겪어보는구나... 그래, 한번 의원을 들여보거라.

집사    예, 나으리. 아, 진작 그리 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나 보옵니다.

 

        집사가 그렇게 눈치를 보며 나간다. 최응은 오한을 느끼며 차를 따른다. 손이 다시 벌벌 떨린다. 그런 손을 보다가 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가슴을 만진다. 심각하다. 뭔가 통증이 오고 있는 것이다. 뭔가가 정말 심각하다. 고개를 갸웃하는 그런 최응의 표정에서...

 

씬  백제 최승우의 집 외경 (밤)

 

최승우  (E) 허허, 이런... 

 

씬  동 집 사랑

 

        최승우가 단정히 앉아서 한참 책을 보며 뭔가를 풀어쓰다가 심각하게 놀라며 멈칫한다. 주역을 보다가 뭔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가는 붓을 든 채 다시 책장을 지난 권으로 넘겨 되풀이해 읽는다. 심각해진다. 혀를 찬다.

 

최승우  이런.... 이런... 이렇게 재미있는 운세가 있는가? 고려국 최응의 명이 다 되었구나. 이 주역의 점괘대로라면 그 명이 다 되었어. 어디 다시 보자.... (보면서) 지난번 조물성에서 만났을 때 보니 최응이는 무오년 정월생이렸다...? 허허, 이런 박명할 운이 있는가? 미처 올해를 넘기기 어렵게 되었구나. 이런, 이런...

 

        그리고 최승우는 한참을 생각한다. 그리고 끄덕인다.

 

최승우  지난번에는 내 운명과 우리 폐하의 운을 점쳐 보았는데 하도 불길하여 낙담하였더니만 여기 더한 운이 있었구나. (사이) 본래 그 나라를 경영하는 것은 황제들이지만 그 운영을 맡은 이들은 책사들이다. 백제는 내가 운영하였고 고려는 또한 최응이가 운영을 해왔다.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이 다 엇비슷하게 가는데, 그 중 최응이가 보다 한 걸음 빨리 가게되어 있구먼. 허허허... 인생사 참으로 무상이다. 그 어린 신동이 나보다 빨리 가다니, 허허 이런...

 

        최승우는 허공을 보며 그렇게 끄덕인다. 그 표정에서....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고비가 견훤에게 술를 따라주고 있다.

 

견훤    요즘 들어 승평부인과 함께 있으니 언제 전장터를 돌아다녔나 싶구려. 힘들었던 그 많은 것들이 눈녹듯 다 풀린 것 같소. 허허허....

고비    그처럼 말씀해 주시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드시오소서..

견훤    자, 부인도 한잔 드시구려.

고비    예, 폐하. 망극하옵니다.

 

        견훤이 술을 따라준다. 고비가 받는다. 술병을 놓던 견훤이 움찔하며 손이 등으로 간다. 뭔가가 자꾸 불편하다.

 

견훤    허허, 이런...

고비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견훤    등에 조그마한게 뭔가 난 모양인데... 가려워서 그러오.

고비    신첩이 보아드리오리까?

견훤    아니오, 아니오. 뭐 그리 요란을 떨 것은 아니고...  괜찮소이다. 대단한 것은 아니오. 자 드십시다. 부인?

고비    예, 폐하.

 

        두 사람 마신다. 견훤이 입맛을 다신다.

 

견훤    이 술이라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야. 시름을 잊기에도 좋고 기분을 풀 때도 그만이고... 또한 즐거울 때도 이놈이 없어서는 아니 되거든, 허허허...

고비    하오면 한 잔 더 드시오소서.

견훤    그리 하십시다. 더 따라보시구려. 허허허....

 

        견훤은 다시 등을 긁으려 한다. 허나 손이 안 미친다.

 

고비    또 가려우시옵니까?

견훤    허허허... 그러게 말이오? 술이 한 잔 들어가고 몸에 열이나니 점점 더 가려워지는 것 같구먼. 곧 괜찮을 것이오.

고비    부스럼같으면 전의를 부르시지 그러시옵니까?

견훤    허허허..  작은 부스럼가지고... 뭘 그리 소란 떨 것이 있소이까? 낫다가 곧 없어지겠지요. 그나저나 파진찬 이 사람은 도대체 어찌 된 것인가?

고비    그러고보니 요 며칠 아니 보이시는 것 같사옵니다.

견훤    허허허, 해도 바뀌고 그랬으니 쉬는 모양이지. 그래도 그렇지.. 황제가 늘 찾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소식이 없다니... 여봐라, 밖에 내관 있느냐?

내관    (E) 예, 폐하... (안으로 들어와) 불러계셨사옵니까?

견훤    오냐. 별감부에 일러서 파진찬을 좀 들라 이르라.

내관    예, 폐하.

 

        그렇게 내관이 물러가고 견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술을 마신다. 고비가 눈치를 보다가 말한다.

 

고비    폐하...?

견훤    왜 그러오?

고비    금강이도 부르면 어떠하옵니까?

견훤    금강이는 왜...?

고비    폐하께서 자주 부르시어 관심을 주시고 세상 공부를 일러주심 그 자체가 훗날 나라를 다스리는 치자의 공부가 아니겠사옵니까?

견훤    치자의 공부라....? 허허허... 그러나 공부는 일러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오. 제 스스로들 해야 하는 것이지. 지금은 전국시대요. 세상을 다스리는 공부보다는 어떻게 더 잘싸우고 더 땅을 빼았느냐, 그리고 이 삼한을 통일할 것이냐, 그것을 아는 것이 공부인 것이오.

고비    예, 폐하. 허면 그것을 일러주시오소서.

견훤    이보시오, 부인. 나는 부인의 그 마음을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금강이에게 생각이 있어도 그 아이만 불러서 다독거릴 수는 없는 일이오. 이 황실에는 눈이 너무 많아.

고비    하오나, 폐하...

견훤    두고 보십시다. 제 형제들이 많은데 그 아이만 부를 수는 없어요. 때가 되면 그때 가서 확실하게 정리를 하십시다.

고비    그 때가 언제가 될 지 참으로 신첩은 초조하고 또한 무섭사옵니다.

견훤    무섭다니...? 무엇이...?

고비    범같은 형제들이 모두 우리 금강이를 노리고 있지 않사옵니까?

견훤    또, 또, 그 소리.... 내가 이렇게 황제로 앉아 있소이다. 그리고 제 놈들은 다 같은 형제들이야. 그런 걱정은 마시구려. 그리고 이렇게 보채서 될 일이 아니오. 다 형식과 순서를 밟고 신료들과의 이해가 끝이 나는 일이오. 술이나 마십시다.

고비    예, 폐하.

견훤    곧 파진찬이 들어올 것이오. 찻상겸 해서 주안상 하나 더 보라 하시구려.

고비    예, 폐하. 신첩은 오로지 폐하만 믿사옵니다. 우리 금강이도 말이옵니다.

견훤    허허, 이런, 이런....

 

씬  다시 최승우의 집 사랑

 

        여전히 최승우가 탁상 앞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최승우  (E) 한 며칠 여러 방면으로 점괘를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고려는 활기가 승하고 우리 백제는 갈수록 역경에 접어든다고 하였다. 모든 점괘가 다 우울하고 불안하다 (사이) 이렇게 가서는 아니 된다. 침체된 이 정국을 벗어나야 한다. 이 우울한 구름들을 걷어내야 해. 밖으로는 고창전투 이후 군사들이 의욕을 잃었고 안으로는 후계구도가 어지럽게 되어서 신료들이 파당을 일삼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일신하는 방법이 없을까..? 이 모든 것을 일신하는 방법은.....?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집사의 소리가 들려온다.

 

집사    (E) 나으리, 소인이옵니다.

최승우  무슨 일이냐...?

집사    (E) 황궁에서 별감이 나왔사옵니다.

최승우  별감이....?

집사    (E) 예, 나으리. 폐하께오서 찾아 계신다 하옵니다.

 

        문을 연다. 거기 별감이 군복 차림으로 서 있고 집사가 함께 해 있다.

 

최승우  폐하께오서 찾으신다 하셨느냐?

별감    예, 파진찬 어른. 

최승우  알겠다. 의관을 정제할 것이니 먼저 앞서 가거라.

별감    예, 파진찬 어른.

 

        다시 문을 닫는다. 다시 생각하는 최승우의 표정에서....

 

최승우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다. 아주 복잡해.... 그래, 폐하는 분명 늙으셨다. 그것은 인정하지 않으실 수가 없다. 곧 칠십이 되시는 춘추이시다. 그렇다면 후계는 정해야 한다. 사실 너무 늦었지. 금강태자라....? (사이....도리질을 한다) 기백과 용기는 좋으나 아직은 아니다. 허면 신검태자라...? (사이) 하지만 그 동안은 너무 운이 박복했다. 서열과 조건은 갖추었으나 운이 너무 박하다면 이 또한 아니 될 일이고... 허허.... 나라 안의 일이 해결되지 못한다면 밖의 일은 더 어두워진다. 하지만 길이 아니 보인다. 그래.... 그렇다면 밖에서 길을 찾아보아...? 밖에서...? 

 

        그런 최승우의 표정에서 들려오는 풍악소리.

 

씬  기방

 

        악공들이 거문고를 켜고 기녀들이 술을 따른다. 신검이 기녀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취해있다. 거기 능환이 함께 해 있다.

 

신검    자, 이찬어른. 한 잔 드시지요?

능환    태자마마, 소인은 본래 술을 아니 하옵니다.

신검    거 이상한 일이란 말이야. 파진찬도 그렇고 저 고려에서 본 신동이라는 최응이도 그렇고 머리를 쓴다는 사람은 한결같이 차나 좋아하지 술을 아니 든다는 말이오.

능환    허허허... 그것은 술이 취해서 몽롱한 것보다는 늘 깨어있기를 원하기 때문이옵니다. 맑은 정신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신검    거 부러운 말씀이구려. 나는 철이 든 이후 단 하루도 맑은 머리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늘 눈치나 보면서 어떻게 하면 혼이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아버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왔지요. 지금도 그렇고 말입니다.

능환    그렇게 자조하실 것 없사옵니다. 아직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사옵니다. 우선 이 술자리부터 치우시오소서. 자칫 남들 눈에 태자마마께서 흔들리시는 것으로 보일 우려가 있사옵니다.

신검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능환    이번에는 파진찬도 적극 신검 태자마마를 돕기로 했사옵니다.

신검    물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마는.. 거 참 별난 일입니다. 늘 아버님 곁에 붙어사는 파진찬이 왜 나를 돕는 것인지....

능환    그 사람도 담백한 사람이옵니다. 태자마마께서 다음 보위를 맡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지요. 허나 폐하의 성정이 워낙 불같으시어서 못하고 있을 뿐이옵니다.

신검    (자작 따라 마시며) 이놈의 세월... 참으로 박정도 합니다. 내 나이가 벌써 사십하고도 훌쩍 넘어서 오십을 치닫고 있는데 아직까지 이 모양 이 꼴이라니....

능환    해가 바뀌었사옵니다. 세상도 그만큼 바뀔 것이옵니다. 자중하시오소서. 절대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금강 태자마마께 헛점을 드러내지 마시오소서. 절대로 말이옵니다.

신검    글쎄올습니다. 이제 나는 너무 지쳤습니다. 하루하루 가는 것이 아주 진절머리가 납니다. 이렇게 산다는 것은 진절머리가 나요.

 

씬  금강의 처소

 

        책을 앞에 펼쳐 놓고 있는 금강, 고비가 웃으면서 본다.

 

고비    여태 공부를 하고 계셨습니까, 태자?

금강    예, 어마마마.

고비    그래야지요. 이 어미도 폐하께 우리 태자 얘기를 많이 하고 오는 길입니다.

금강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하셨사옵니까?

고비    호호호.... 무슨 이야기이겠습니까? 이 다음 누가 과연 이 백제국을 다스릴 것인가 하는 이야기지요. (소근거린다) 폐하께서는 이제 우리 금강태자를 다음 후계로 정하셨음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금강    정말 그렇사옵니까?

고비    그렇고 말고요. 몇 번씩 여쭈어 보았습니다마는 단 한번도 아니라는 말씀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저 신료들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때를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그게 다 무엇입니까? 우리 태자의 다음 보위를 인정하신 것이 아닙니까?

금강    그렇다고 너무 서둘지 마시오소서. 어마마마와 소자를 탐탁히 여기지 않는 자들이 도처에 있사옵니다.

고비    알고 있습니다. 황후마마도 그러하시고 신검 태자형제들도 그렇고 이찬도 그러하고 그리고 능애 장군은 물론이고 신덕장군도 그렇고.... 모두가 우리의 적들 뿐입니다.

금강    그러니까 조심하시라는 것이옵니다.

고비    압니다. 조심해야 하고 말고요. 하지만 태자...? 태자가 보위에 오르는 날에는 저들을 절대로 용서해서는 아니 됩니다.

금강    그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고비    태자의 적들인 저들을 그냥 놓아둔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결정적 위험요인이 됩니다. 태자가 보위에 오르는 대로 모두 없애 버리세요. 아시겠습니까? 없애 버려야 합니다.

금강    어마마마....?

고비    본래 권력 싸움이란 한 쪽이 완전하게 사라져야만이 끝나는 것인줄 알고 있습니다. 이 어미 말을 명심하세요. 그렇지 않다가는 언제 저들이 내어민 칼에 살을 베일지 모릅니다. 명심하세요.

금강    ...............     

 

씬  동 대전

 

        최승우와 견훤이 주안상을 마주놓고 앉아 있다. 견훤이 등이 가려운 듯 자꾸 긁는다.

 

견훤    자네는 술을 못하니 여기서 차나 마시게. (계속 긁는다) 나는 낮부터 두어 잔 마셨네. (계속 긁는다)

최승우  헌데 어디 종기가 나셨사옵니까? 자꾸만 등에 손이 가시옵니다.

견훤    허허허... 그러게 말이야. 뭐가 나기는 났는데... 술이 몇 잔 들어가니까 더 가려워. 아무래도 의원에게 보여야겠어. 헌데 며칠동안 두문불출했다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최승우  신에게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그저 몇 가지 당면한 국내외의 일들을 곰곰이 짚어 보았사옵니다.

견훤    허허, 그럴 줄 알았지. 이 백제국의 진로를 거머쥔 자네가 아닌가? 하긴 한동안 우리 백제가 너무 가라앉았어. 뭔가 새로운 길을 찾기는 찾아야 하는데 말이야.

최승우  그래야 하옵니다. 침체된 분위기를 일신할 길을 모색해야 하옵니다.

견훤    그래. 새로운 구상이 있는가?

최승우  일단 나라 안의 일은 폐하께오서 생각이 많으시니 신이 간여할 일은 아닌 줄로 아옵니다.

견훤    뭐 나라 안의 일이라고 해야 태자들의 문제이지 별 다른 것이 있겠는가? 참으로 나도 답답하이. 맏이란 놈은 저렇게 형편이 없고 내가 앉히고 싶은 금강이는 사방에서 벌떼처럼 반대들을 하고 있고... 뭐 좀 더 때를 보아야지. 어쩌겠는가? 그래, 고려왕의 일은 뭐 좋은 묘수가 있겠는가?

최승우  예, 폐하. 신이 줄곧 생각해본 것이 하나 있사옵니다마는...

견훤    오, 있어..? 그게 무언가? 어서 말해보게.

최승우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는 저 고려에 간담이 써늘할만한 쐬기를 밖아 주는 일이옵니다.

견훤    (더욱 흥미롭다) 간담이 써늘한 쐬기라...? 그게 무엇인가?

최승우  지금 고려와 우리 백제는 주로 육상에서 보군을 앞세운 영토 전쟁을 하고 있사옵니다.

견훤    그렇지...

최승우  이럴 때에 잠자고 있는 고려의 수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히면서 고려의 황도인 송악을 불바다로 만드는 것이옵니다.

 

        견훤은 더욱 이끌려든다. 눈을 크게 뜨고 바짝 달려든다.

 

견훤    이 사람아... 지금 뭐라고 했는가? 고려의 수군을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히고.... 그리고 뭐..? 고려의 황도인 송악을 불바다로 만들어...? 불바다로....?

최승우  예.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계책이 하나 있사옵니다. 그것이라면 능히 우리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잃어버린 의욕을 되찾을 수 있사옵니다. 바다로 가는 것이옵니다. 늘 고려가 자만하고 자신있어한 저 고려의 바다를 농락하고 운이 좋다면 고려왕의 목을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견훤    (벌떡 일어선다) 고려왕의 목을....? 왕건 아우의 목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런 계책이 있었다는 말인가?

최승우  예, 폐하. 지금 고려는 신라와 본격적으로 외교를 시작한 이래 우리 백제는 안중에도 없는 듯 하옵니다. 온통 정신들이 신라에 쏠려 있어서 그야말로 통일을 한 듯 착각에 빠져 있사옵니다.

견훤    알아, 알아.. 나도 그 점이 아주 기분이 불쾌해. 신라는 이미 머리를 숙이고 굽실거리고 있고, 고려는 어깨를 펴고 오만하게 주인인 양 오가고 있고... 서라벌의 군권도 또한 다 도맡아 가져가 버렸고.. 신라는 사실 이미 고려의 속국일세.

최승우  그렇사옵니다. 고창 전투에서 우리 백제가 패한 이후, 더더욱 그러한 관계들이 심화되었사옵니다. 이럴 때에 전격적으로 별동부대를 편성하여 먼 바다를 우회하여 고려 황도인 예성강으로 기습하여 들어간다면 아마도 천하가 놀랄 일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견훤    기가 막히네. 자네의 말처럼 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기가 막힌 일이야. 고려의 황도가 불바다가 된다...? 왕건의 목을 가져올 수가 있다..?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견훤은 최승우의 손을 와락 잡는다.

 

견훤    기가 막혀... 그대로만 된다면 기가 막혀... 언제 군을 출병시킬 것인가? 총사는 누구를 보내고...? 짐이 갈까..?

최승우  허허허.... 폐하께서는 여기에 계시오소서. 그 전투는 길게 끌 것이 못되옵니다. 기습 전략이 될 것이니까 말이옵니다.

견훤    하긴 그렇겠네 그려. 허면 총사는 누가 좋겠는가?

최승우  ........ (말이 없다)

견훤    왜 말이 없는가? 누가 좋겠어? 나는 마음이 급하네.

최승우  (사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검 태자마마가 어떻겠사옵니까?

견훤    뭐...? 누구...? 신검이....?

최승우  예, 폐하.

견훤    자네 제정신인가..? 신검이를 보내라는 말인가? 신검이를...? 말도 아니되는 소리.. 말도 아니되는 소리...

최승우  폐하........?

견훤    듣기 싫네. 신검이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게. 더 하지 말아.

 

씬  신검의 처소

 

        술취한 신검이 생각에 잠겨 있다. 술상은 그대로 있는데 기녀들은 보이지 않는다. 능환이 보고 있다.

 

능환    지금 파진찬이 대전에 들어 있사옵니다. 분명히 새해 들어 국정운영에 관한 일을 논의할 것이옵니다.

신검    .........

능환    기다려 보시오소서. 뭔가 분명히 태자마마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옵니다.

신검    ........... (생각이 많다)

 

씬  박씨의 처소

 

        박씨도 초조해서 서성거리고 있다. 이상궁이 함께 해 있다.

 

박씨    이찬이 파진찬의 집을 다녀오고 또 파진찬이 두문불출하다가 지금 대전으로 들어갔다...?

이상궁  예, 마마. 그렇다 하옵니다.

박씨    지금 신검 태자는 이찬과 함께 있다고 하였느냐?

이상궁  예, 황후마마.

박씨    지난번 고창에서 결정적으로 신뢰를 잃어버렸어. 실날같은 희망이 끊겨버렸다는 말이야. 그래도... 그래도 이찬이 뭔가 끈을 찾아보려고 일을 추진하는 모양인데... 이거야 참으로 속이 타서 살수가 있는가? 대체 앞으로 어찌 되는고...?

견훤    (E) 글쎄, 신검이는 절대로 안돼....

 

씬  동 대전

 

        견훤이 화가 나서 우락부락 소리치고 있다.

 

견훤    아비를 죽이려고 했던 놈이야.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 놈은 군법을 적용하여 죄를 물을 수도 있었어. 알겠는가? 그래도 자식이라고 내 피를 받은 놈이라고 그냥 놓아둔 것이야.

최승우  폐하, 지난 일에 연연한다면 발전은 없는 법이옵니다. 잊을 것은 과감히 잊으시고 묻혀진 것은 캐내고 찾아내어서 닦아서 써야 하는 것이옵니다.

견훤    누구...? 신검이 말인가...?

최승우  예, 폐하. 더 이상 이 조정이 사분오열되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마지막으로 신이 청하겠사옵니다. 신검 태자마마께 한번 더 기회를 주시오소서. 이번에는 신이 함께 가겠사옵니다.

견훤    자네가...? 고려의 황도로 말인가?

최승우  예, 폐하.

견훤    왜...? 신검이를 위해서...? 

최승우  폐하와 지금 분란을 겪고 있는 이 조정을 위해서이옵니다. 만약에 이 예성강 공략이 허사로 돌아간다면, 그리고 신검 태자마마께서 다시 또 결정적인 실수를 드러내신다면 신은 더 이상 신검 태자마마에 대한 미련을 버리겠사옵니다.

견훤    .............?

최승우  약속드리겠사옵니다. 그런 일이 생길 경우 금강 태자를 세우시오소서. 그것도 가급적 빨리 결정하시어 분란과 화근의 끈을 자르시오소서. 신도 폐하의 뜻을 기꺼이 따르겠사옵니다. 더 이상 내분은 아니 되옵니다. 

견훤    허, 이런... 이런... (오락가락 한다) 아주 난처하고 곤란한 조건을 내거는구먼. 도저히 안 되는 놈을 가지고 파진찬이 너무 밀고 있어. 이렇게 기가 막힌 예성강 공략을 우리 금강이에게 준다면 기가 막히게 해낼 것인데....

최승우  신의 마지막 청이라 했사옵니다. 폐하, 한번만 신의 청을 들어주시오소서. 신이 함께 가겠다 하였사옵니다. 폐하... 예성강 공략은 신검 태자께서 맡아야 하옵니다. 폐하...

견훤    ............... 이 좋은 전략을 오... 이 좋은 전략을... 신검이에게 준다..? 왕건 아우의 목도 베고 고려의 황도를 불사르는 이 엄청난 기획을 신검이 놈에게 주어...? 어이구...

 

씬  고려 황궁 외경

 

        웃음소리들이 들려온다.

 

씬  동 황후전

 

        왕건과 더불어 오씨와 유씨가 함께 해 있다. 그리고 정윤 무와 유씨의 소생들인 요(정종, 9세), 소(광종, 7세)와 함께 해 있다. 그리고 다섯 살쯤의 공주(낙랑)도 보인다.

 

오씨    모처럼 폐하께서 공주와 태자들을 보심이 어떠하시옵니까?

왕건    그러게 말이오. 도무지 국사에 바빠서 황실 안을 살펴볼 틈이 없으니 그저 미안한 마음 뿐이오. 오늘은 우리 소의 생일이라고 했던가?

소      예, 아바마마.

왕건    하하하... 그래도 다행이다. 이 아비가 늘 전장에 나가 있는데 오늘 따라 궁안에 있어 너의 생일을 볼 수 있으니 기쁘구나. 아니 그렇소이까, 충주부인?

유씨    이처럼 폐하께서 손수 자리를 함께 해 주시니 망극하옵니다.

왕건    그래도 황실 안의 주인은 황후가 아닙니까? 부인들도 많고 또한 공주와 태자들도 많습니다. 하나하나 잘 살펴주시구려.

오씨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무      이번 소 아우의 생일을 기억하여 챙겨주신 분도 바로 어마마마시옵니다.

유씨    그렇사옵니다. 우리를 자애하심이 너무도 크시어 저희들은 늘 고맙고 감사하며 지내고 있사옵니다. 황후마마께오서는 참으로 덕이 넘치시고 크신 분이시옵니다.

오씨    부끄럽게 왜들 이러는가? 당연히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일세. 호호호...

왕건    자, 소야... 어서 많이 먹거라. 사내란 그리고 황실의 태자란 위엄이 있고 강건하게 커야 하는 법이다. 알겠느냐?

소      예, 아바마마.

 

        왕건이 흐뭇하게 웃는다. 모두들 웃는다. 그런 그들의 표정 위로...

 

해설    소. 고려의 제 4대의 황제가 되는 광종의 어릴 때 이름이다. 충주부인 유씨는 훗날 두 황제의 어머니가 되는데 광종의 형인 요가 혜종의 뒤를 이어 3대 황제가 되었고, 이어서 그 형의 보위를 이어받아 소가 뒤를 잇게 된다. 충주부인 유씨는 왕건의 스물 아홉 부인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다. 어려서 죽은 태를 비롯하여 정종과 광종, 그리고 문원대왕으로 추증되는 정, 유명한 고승으로 불리웠던 증통국사 등 다섯 아들과 낙랑공주, 홍방공주 등 두 딸을 두었다. 이들 중 광종은 훗날 고려제국을 반석 위에 앉히는 제 2의 창업군주로서 그 이름을 드러내는 명군이 된다.

 

        계속해 가족들이 웃고 있다.

 

왕건    자고로 사람들은 나를 보고 욕심이 많은 황제라고들 할 지 모릅니다. 자그만치 부인이 스물 아홉이요, 자식은 헬 수가 없어요.

오씨    어찌 욕심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제국을 창업하신 분이시옵니다. 마땅히 그 자손이 번창하고 널리 후사를 안심시키는 것 또한 폐하의 의무가 아니시겠사옵니까?

유씨    그러하옵니다, 폐하. 

왕건    그렇소이다. 그 외에도 또 있소이다. 지금 고려뿐만 아니라 신라와 백제 또한 곳곳이 갈라져 있어서 대부분 호족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주관하고 있소이다. 저들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써 각자의 지역을 안심시키고 화합을 이끌어내는 것 또한 이 사람의 몫이올시다. 모두가 가족이고 모두가 일가이고 모두가 함께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함이올시다.

오씨    그만 하시오소서. 잘 아옵니다, 폐하.

왕건    하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자, 소야. 이 아비말을 기억하거라. 아비는 반드시 삼한을 통일하고 이 백성들을 한 울타리 안에 살게 해 놓을 것이다. 알겠느냐?

소      예, 아바마마.

왕건    이 다음의 일은 너희들의 일이다. 제국을 천년만년 이끌어 가는 일은 너희들의 몫이다. 명심하거라. 강건해야 한다. 알겠느냐? 강건해야 한다.

소      예, 아바마마.

왕건    하하하... 대답소리가 아주 시원합니다. 자 이제 그만 대전으로 가 보아야겠소이다. 어떻게 된 것이 며칠째 병부령이 보이지 않고 있어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원....?

오씨    며칠째나 말이옵니까?

왕건    그러게 말입니다. 내관을 가보라고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곧 소식이 오겠지요. 어디가 아픈 겐가...?

 

씬  최응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의원이 진맥을 보고 있다. 옆에 최지몽과 집사가 함께 해 있다. 한참 살펴보다가 표정이 창백해지며 최응의 시선을 바라본다. 뭔가 할 말을 못하고 있다.

 

최응    이 사람아, 의원이 되어서 병자를 진맥하였으면 무슨 말이 있어야지. 왜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는가?

의원    그런 것이 아니오라...

최응    왜 그러는가? 뭐 말하기 거북한 것이라도 있는가?

의원    저... 송구하옵니다마는 이렇게 병증을 느끼신 것이 얼마나 되었사옵니까? 소생이 알기로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마는...

최응    글쎄... 아주 가끔씩 이런 증상이 오기는 왔네마는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가 없네 그려. 헌데 왜 그러는가?

최지몽  말해 보게나. 왜 그러는가?

집사    아, 말해 보시오, 의원. 

의원    참으로 말씀드리기 송구하옵니다마는 중병이시옵니다. 그것도 아주 중병 중의 중병이시옵니다.

모두들  ................?

최응    ..........(침착하게 의원을 보며 웃는다) 중병이라...?

최지몽  말해 보시게. 도대체 얼마나 위험한 중병이라는 말인가?

의원    약이 없사옵니다.

최지몽  약이 없어...?

의원    예. 늦어도 이미 한참을 늦었사옵니다. 심장과 간장, 폐장 사이에 약으로 다스릴 수 없는 악성 종기가 넓게 퍼져 있사옵니다.

최지몽  뭐라...?  악성 종기라...?

집사    그..그것이 그토록 넓게 퍼져 있다는 말인가? 어이구... 헌데 지금까지 이렇게 깜쪽같이 모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최응    허허, 집사는 너무 소란스럽구나. 조용하거라.

집사    예, 나으리... 어이구 이런... 이를 어이하옵니까, 나으리...?

최응    의원은 있는대로 말을 하여 보게. 앞으로 어찌 되겠는가?

의원    이 병은 증세를 아는 순간에 이미 대부분 늦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옵니다. 아무래도....

최응    괜찮네. 자네의 의견을 말해 보게나. 얼마나 견딜 수 있겠는가?

의원    그게 저....

최응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의원    몇 달을 더 견디시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최지몽  몇 달이라니...? 겨우 몇 달밖에 못 사신다는 말인가?

의원    소생의 생각으로는 그러하옵니다.

집사    어이구, 나으리... 이 일을 어찌하옵니까, 나으리..?

최지몽  병부령 어른, 병부령 어른... 이 자가 지금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옵니까? 이 자는 저자거리의 돌팔이옵니다. 황실의 전의를 불러 보시오소서. 폐하께 말씀드리겠사옵니다.

최응    어허, 왜들 이리 시끄러운가? 한번 태어나면 누구나 한번은 죽는 것일세. 조금 빠르고 늦고 할 뿐이야. 되었네. 의원은 수고하였네. 허나 본래 의생은 병자의 비밀을 지켜줄 의무가 있는 것일세. 내 말 뜻을 알겠는가?

의원    예, 나으리...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최응    가 보게.

의원    예, 나으리.

 

        의원이 황급히 눈치를 보며 침구를 싸들고 나간다. 두 사람이 최응을 보며 안타까워한다.

 

최지몽  폐하께 말씀드리오소서. 그리고 전의에게 한번 보이시오소서.

최응    좋지 않은 예감을 한 지는 오래 되었네. 죽고 사는 것은 의원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본인이 아는 것일세. 나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네. 차나 한잔 하려는가?

최지몽  병부령 어른...

최응    자네도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고 이 조정에 왔네 그려. 신동이란 본래 기대가 많은 법이지. 자네는 특히나 복술에 밝아. 어디 내 점을 한번 쳐보지 않겠는가?

최지몽  병부령 어른...?

최응    하기사 이미 예정된 인생인데 그까짓 점을 치면 또 무엇하겠는가? 그만 두게. 자, 차나 한잔하세. 찻물 좀 다시 들이라 하게. 아, 어서..

집사    아, 예. 나으리... 어이구 이런..

최응    아, 앉게. (찻잔을 마주 놓으며) 인생사 다 그런 것이야.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왜 그렇게 자네 얼굴이 창백한가...? 하하하... 이런...

 

        그렇게 잔잔히 웃는 최응의 표정에서.....

 

씬  광평성

 

        김행선과 왕식렴이 마주해 있다. 추언규가 함께 본다.

 

왕식렴  시중 어른... 아무래도 시중어른께서 앞을 좀 서 주셔야겠사옵니다.

김행선  무얼 말입니까?

왕식렴  폐하를 뵙고 나오면서 느낀 점이 많사옵니다. 소생이 지나친 점이 많은 것 같사옵니다. 유금필 장군을 속히 귀양에서 풀어주시라 청해주시오소서.

김행선  허허허.... 그것은 어려운 말씀이올시다.

왕식렴  무엇이 어렵다는 것이옵니까?

김행선  실은 박술희 장군이 이곳 광평성에 와서 난리를 쳤을 때 이 사람도 폐하께서 좀 심하다 싶으셨지요. 그래서 찾아 뵙고 말씀을 드렸는데...

추언규  허나 폐하께서는 완강하셨소이다. 오히려 시중어른께서 핀잔만 받으셨소이다. 그 일은 이미 끝난 것이니 더 논하지 마십시다.

왕식렴  아니 올시다. 결자해지라고 소생이 묶었으니 소생이 풀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시중 어른이 좀 앞을 서 주시오소서.

김행선  아, 글쎄... 할 수 없게 되었다니까요? 허허, 이것 참.... 차라리 병부령에게 말씀을 해 보시구려. 그래도 폐하께 늘 자주 가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니면 박술희 장군에게 가 보시던가....?

왕식렴  그곳에는 홍유 장군이 이미 가 있사옵니다.

추언규  그래요...? 홍유 장군이 말씀입니까?

김행선  그래야지... 그래야지 들.... 그렇게들 잘 풀리면 얼마나 좋소이까? 이 늙은이가 아주 안심이 됩니다 그려... 어이구...

 

씬  박술희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박술희가 아직도 화가 덜 풀린 표정으로 홍유를 보고 있다.

 

박술희  지난 일을 사과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홍유    허허허... 그렇소이다. 생각해 보니 좀 지나친 것 같아서 말씀이외다.

박술희  당연하지요. 당연히 지나쳤지요. 아, 억울한 사람이 유배를 가 있소이다. 나라에 충성한 죄로 유배를 간다는 것이 말이나 되오이까?

홍유    그러나 박장군, 유장군의 공은 비록 컸으나 많은 여타 장수들 또한 그 만한 공과 충성을 가지고 있소이다. 그것이 어느 한쪽으로 기운다는 것에 대해서 소장은 염려를 했던 것이외다. 허나 이미 폐하를 뫼시고 자리를 한 결과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소이다. 박장군이 먼저 용서하시구려.

박술희  ........  용서라...? 용서라....?

홍유    진심으로 하는 말이외다. 우리 장수들이 힘을 합쳐야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올시다. 분명히 말하건데 이 사람 또한 서로가 잘해보고자 해서 했던 일이올시다. 어찌하겠소이까? 용서를 하시겠소이까?

박술희  용서를 받으러 온 분이 아니라 마치 억지를 쓰러 오신 것 같소이다. 하하하.... 좋소이다. (손을 내민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좋은 사이들입니까? 그래야 하고 말구요. 금필이 형님도 웃으면서 곡도로 갔소이다. 아마 거기서 지금쯤 잘 쉬고 계실 겝니다. 암요, 하하하.....

홍유    고맙소이다. 이렇게 마음을 선뜻 풀어주니 고맙소이다, 박장군...

박술희  어인 말씀이오? 사실 내가 먼저 청하려 했었소이다. 뭔가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니 풀어보자고 말입니다. 하하하..... 잘 되었습니다. 우리 잘해보십시다, 홍장군.

홍유    고맙소이다, 박장군.

 

        두 사람 손을 잡는다. 그런 그들의 표정에서.....

 

씬  곡도 바닷가

 

        훈련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유금필과 족장들이 보고 있다. 수군 훈련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나주 전투시의 수군 훈련 참조)

 

유금필  훈련은 땀이다. 땀은 바로 너희들의 목숨을 대신하는 것이다. 너희들 스스로 너희들의 땅을 지키는 것은 곧바로 너희 부모와 너희 처자를 지키는 것이다. 알겠느냐?

모두들  예, 장군...

유금필  부서진 배들을 모두 수리하라. 곳곳에 망루를 세우고 모든 어부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고 생업과 군역을 병행할 것이다. 알겠느냐?

모두들  예, 장군.

족장    생업과 군역을 함께 하라 하신다. 모두 몸을 아끼지 말라.

유금필  보아하니 오랫동안 전투가 없어서 배들은 낡고 버려진 것 투성이며 수군들은 모두 군인인지 어부인지 알 도리가 없다. 이곳이 이러한데 다른 곳은 또 오죽하겠느냐? 족장과 추장들과 이곳의 호족들은 들으라.

모두들  예, 장군

유금필  나는 비록 이곳에 죄인으로 왔으나 너희들의 대 추장이다. 내가 수시로 점고할 것이다. 적을 경계하는 것은 군인의 의무이다. 전함을 수리하고 어선들도 언제나 싸울 때는 전함이 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

모두들  예, 장군.

유금필  이곳은 황도로 가는 마지막 길목이며 유사시에 적이 들어올 수도 있는 곳이다. 지금부터는 전투를 치루듯이 모든 일에 목숨을 다하여임하라. 알겠느냐?

모두들  예, 장군.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견훤이 한동안 말없이 아들 신검을 보고 있다. 그 옆에 최승우가 함께 해 있다.

 

견훤    파진찬이 너를 보고 이번 고려의 황도 예성강 공략의 선봉을 맡기라 한다. 들었느냐?

신검    예, 폐하.

견훤    내가 일찍이 많은 전투를 나가 보았으나 이번처럼 흥분되고 들뜬 전투는 없었느니라. 엄청나고도 기상천외한 전략이다. 파진찬은 이것을 너에게 주라 하는구나. 신검이 너에게 말이다.

신검    ................

최승우  ................

견훤    그러고 보면 너는 그런대로 아직 복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이 엄청난 기회를 갖게 되다니 말이다. 허나 네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신검    예, 아바마마. 이번만은 기필코 해 보이겠나이다. 믿어 주시오소서.

견훤    믿어달라...? 믿어달라...?

신검    ..........

견훤    그래, 아비 자식 간인데 믿어야겠지. 오죽하면 네가 이 아비를 죽이려고 들었겠느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말이다.

신검    아바마마.....

견훤    그래, 너에게도 충분한 기회를 주어야지. 다시 주어야지. 하지만 신검아...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이 말이다. 더는 내게 기대하지 말아라. 부족하고 못난 네 자신을 돌아다보아야 할 것이다. 아비를 원망하기 전에 말이다. 이번에 고려왕의 목을 가져와 보거라. 그리하면 내가 너에게 이 옥좌를 넘겨주마. 이 옥좌를 말이다.

신검    아바바마.....

견훤    이 옥좌를 말이다. 옥좌....!

 

                                                                <174회 끝> 





첨부파일 태조왕건174.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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