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178회>
희대의 고려황궁 공격성공에 힘입어 백제의 견훤은 모처럼 활력을 찾지만 다시금 불거져 나온 후계자 문제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점점 고통스러워지는 등쪽의 환부로 걱정은 더해만 간다. 한편, 황궁으로 돌아온 왕건은 폐허가 된 황궁앞에서 망연자실해 하며 잠시의 평화로움에 자만했던 자신의 나태함을 꾸짖는다. 이 시각 아픈 몸을 이끌고 최승우를 찾아간 최응. 희대의 두 천재는 서로의 인생이 얼마남지 않음을 감지하고 삼한통일에 관한 의미있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완벽한 승리를 통해 후계자자리를 결정지으려는 신검은 최승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금필이 유배중인 곡도로 군대를 이동시키는데...
씬 길 (낮)
왕건과 그 일행들이 달려오고 있다. 그들이 어느쯤에 이르자 무가 멀리 한 곳을 가리킨다.
무 폐하, 저기...
그들이 산등성이에서 보면 깃발을 꽂은 전령이 오고 있다. 왕건들이 먼저 멈추어서고 전령이 이윽고 달려와 예를 표한다.
왕식렴 황궁에서 온 전령이냐?
전령 예, 장군.
김행선 어찌 되었는고...? 황도의 적군은 어찌 되었는고...?
전령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도 저자 거리가 곳곳이 다 불바다가 되었사옵고 수군은 궤멸되었으며 황궁에 난군들이 들이닥쳐 곳곳이 불타고 부서졌나이다.
김행선 황궁이 불타고 부서져....?
전령 예, 시중어른.
김행선 폐하, 이를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왕건 그토록 숨을 죽이던 백제가 다시 살아나는 모양이구려. 그래도 그렇지 황궁이 적도의 발에 밟히다니...? 황궁이 밟히다니...?
무 그래서........? 아직까지 난군들이 황도에 있느냐?
전령 아니옵니다. 지금은 예성강 포구 쪽으로 물러나 진을 치고 있사옵니다.
무 진을 치고 있어...? 황도의 우리 방위군들은 다 무얼하고 있다는 말이냐?
전령 백제의 기습군은 삼천이 넘사옵고 황도의 아군은 불과 천여 명에 불과하옵니다. 주변의 다른 군대가 황도에 오기까지는 족히 이틀이 소요되어야 하옵니다.
왕건 일리 있는 말이다. 자, 전령이야 무얼 알겠느냐? 어서 가자. 완연한 백제군의 천지가 되었구나. 백제의 천지가 되었어. 가자.
다시 움직이는 왕건의 표정에서 들려오는 견훤의 웃음소리..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박영규와 능환, 금강, 능애, 영순들이 함께 해 있다. 차를 마시며 폭소를 터뜨리는 견훤.
견훤 이것 보게나. 방금 도착한 전령의 보고일세. 백제의 수군이 고려의 수군을 전멸시켰다네. 전멸이야, 전멸...
능환 이런 희소식을 듣다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옵니다, 폐하. 신검 태자마마께서 이루신 전공이옵니다.
견훤 (힐끗 보다가) 그래, 그건 분명하이. 하지만 역시 파진찬이 갔기 때문이야. 아니 그러한가?
능환 뭐, 그렇다고 할 수는 있사옵니다마는...
능애 하오나 그 모든 전선을 지휘한 총사는 신검 태자마마이셨사옵니다.
견훤 알아, 알아.. 그건 맞는 말이야.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소식인가? 수군이... 그 막강하던 고려의 수군이 한꺼번에 다 부서졌다는 것이야. 한꺼번에 말이야
견훤은 등이 가려운 듯 계속 긁는다. 모두들 이상해서 본다.
견훤 허허허... 왜들 그리 보는가? 등에 뭔가 조그마한게 나서 말일세. 꽤 가렵구먼... 아무튼 놀라운 소식이야. 고려의 수군이.... 무려 백척이 넘는 대 함대가 다 부서졌다..? 아, 이거야 참..
박영규 뿐만 아니라 우리 백제군이 고려의 황도에 상륙했다고 하지 않사옵니까?
견훤 암, 왜 아니겠는가? 지금 쑥대밭이 되고 있을 것이야. 고려의 황도가, 왕건 아우의 그 황궁이 아주 불바다가 되고 있을 것이야. 으핫하하하.... 내 일찍이 이렇게 속이 후련한 적은 없었느니... 아, 시원하다. 참으로 시원하다. 금강아..?
금강 예, 폐하.
견훤 들었느냐? 네 형 신검이가 드디어 뭔가 한번 보여주는 모양이다. 일찍이 이렇게 큰 전과는 없었다. 고려의 수군을 전멸시키는 이런 쾌거는 없었어.
금강 예, 폐하.
견훤 일찍이 내가 저 금성에서 참담한 패배를 본 것이 바로 고려의 수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수군이 궤멸되었다는구나. 그 수군이 말이다. 전령을 띄워라. 위로의 글을 보내도록 하라. 잘했다. 정말 잘했다. 암, 잘했다. 잘했어...
씬 동 황후전
박씨가 모처럼 웃고 있다.
박씨 이보게, 이상궁? 해냈다는 것이야. 우리 신검 태자가 말일세. 들었는가? 전령이 왔다는데 자네도 들었는가?
이상궁 예, 황후마마. 신검 태자마마께오서 고려의 황도에 들어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전과를 올리고 계시다 들었사옵니다.
박씨 보게나. 폐하께서 그 아드님에게 신경을 쓰시고 관심을 기울여주시니 얼마나 잘하는가? 처음부터 그렇게 신경을 좀 쓰셨으면 만사가 다 잘되었을 것이야. 그저 금강이만 아셨지. 얼마나 신검 태자를 구박하셨는가?
이상궁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지실 것이옵니다. 이미 일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사옵니까, 황후마마?
박씨 암, 그렇고 말고... 호호호.... 더군다나 이번에 잘하면 옥좌를 주시겠다고 아주 공공연히 선포를 하신 일이 아니냐? 호호호.. 이제야 피려는가 보네. 우리 신검 태자의 운세가 이제부터 피려는 모양이야. 호호호....
씬 고비전
고비가 초조해서 어쩔 줄 모르며 방안을 서성이고 있다.
고비 신검 태자가 그토록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는 말이지?
최상궁 예, 마마. 지금 그 일로 하여 중신들이 폐하께서 계신 대전에 모여 기뻐하고 있다 들었사옵니다.
고비 폐하께서는 신검 태자가 떠날 때에 공공연히 말씀을 하셨다. 이번 일을 잘하고 오면 다음 보위를 주시겠다고 말이다. (사이) 그것은 늘 신검 태자가 실패를 계속하였기 때문에 가능성이 없는 약속을 하셨던 게야. 헌데.... (사이) 이렇게 되면 어찌되는 것이냐? 어찌되는 것이야...?
씬 동 대전
견훤이 계속해 웃고 있다. 또 가려운 듯 습관처럼 긁고 있다. 신료들이 여전히 함께 해 있다.
견훤 지금 고려가 그야말로 초상집 같이 되었겠구먼. 된통 혼이 났으니 제정신들이 아닐 게야.
능환 그럴 것이옵니다, 폐하.
능애 폐하께오서는 조금 전에 신검 태자마마와 제장들에게 위로의 글을 내리신다 하셨사옵니다.
견훤 그랬지. 그랬어.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야.
능애 기왕이면 신검 태자마마께는 더욱 더 분발하고 잘 싸워 황실의 맏이로서 자긍심을 갖도록 하라는 각별한 요지의 말을 주시면 더욱 감격하실 것이옵니다.
금강 ...................?
견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능애 맏이의 본분을 다했다는 칭찬을 주시라는 것이옵니다. 폐하의 후계자로서의 본분 말이옵니다.
견훤 어흠, 흠... 도무지 무슨 말을 못하겠구먼. 이건 입만 떨어졌다 하면 어떻게 다음 자리 이야기야...? 그 이야기는 후에 하기로 하세. 지금 그런 얘기 할 때가 아니지 않는가? 이런 원... 에잉, 쯧쯧쯧.... 지금은 이 여세를 어떻게 살려서 다시금 우리가 잃어버렸던 주도권을 찾을 수 있는가 생각할 때야. 알겠는가? 그 따위 다음 보장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야.
능애 아, 예, 폐하...
견훤 이러니, 이런.. 에잉 쯧쯧쯧...
신료들 ................?
견훤 (계속 장계보며) 히히히..... 지금쯤 볼만하겠구나. 찌푸러진 왕건 아우의 얼굴이 볼만하겠어
씬 황도 저자거리
왕건 일행들이 지나쳐 가고 있다. 참담하다. 황도 저자거리 곳곳이 잿더미들이다. 아직도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고 군사들과 백성들은 폐허를 정리하느라 부산하다. 왕건은 입을 다물고 분함을 참으며 그렇게 가고 있다.
김행선 참으로 기가 막히옵니다, 폐하. 어떻게 백제의 적도들이 이곳까지 들어올 수가 있사옵니까? 신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사옵니다.
왕식렴 참으로 참담하옵니다, 폐하. 이렇게까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바가 없사옵니다.
왕건 그건 아우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세. 한순간 아차하면 금방 무너지는 것이 작금의 상황일세.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누구도 승자라 장담하기 어렵다네. 전쟁이란 그런 것이야.
왕식렴 하오나 폐하, 어떻게 백제군이 우리 황도까지 들어올 수가 있다는 말씀이옵니까?
왕건 그래도 못 알아듣는가? 작은 방심이 불러온 큰 사건일세. 그만큼 우리는 그간의 승리에 도취되어 자만심이 컸다는 이야기일세. 그리고 그 댓가를 이렇게 철저하게 지불하고 있는 것이고... 정윤은 보고 있느냐?
무 예, 폐하.
왕건 오늘의 이 사태는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다 황제의 책임이니라.
무 어찌 아바마마의 책임이라 하시옵니까? 이 일은 황도 주변을 지키는 장수들이 져야할 일이옵니다.
김행선 그렇고 말구요. 당해도 당해도 이렇게까지 당할 수가 있사옵니까? 도대체 무엇들을 했다는 말이옵니까? 어이구 이런...
왕건 물론 담당 장수들의 책임은 물을 것이오. 그러나 황제의 책임이 더 크오. 이들의 자만심과 여유를 일깨워주고 주의를 주었어야 했소이다. 진실로 황제부터 반성을 해야 신료들이 다시는 이런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잘못입니다.
그들 그렇게 얼마쯤 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일단의 장수들이 달려오고 있다. 복지겸, 박술희, 홍유, 배현경들이다. 그들이 군례를 올린다.
왕건 고생들이 많소이다. 둘러보니 참으로 참담하구려. 지금 전황은 어떻소이까?
복지겸 저희 내군이 황도 안의 일을 맡아 불타고 부서진 것들을 복구 중에 있사옵고 염상 장군의 군대가 포구 쪽으로 나아가 백제의 신검군과 마주하고 있사옵니다.
배현경 하옵고 급히 파발을 띄워 황도 밖에 나가 있는 방면군들을 급히 황도로 오게 전하였사옵니다. 내일이면 도착할 것이옵니다, 폐하.
홍유 송구하옵니다, 폐하. 너무 급격히 당한 일인지라 속수무책이었사옵니다. 강어귀와 바다를 담당했던 지휘 장수들을 불러 문책하겠사옵니다.
박술희 (울먹거리며) 참으로 부끄럽고 가슴이 미어지옵니다, 폐하. 아직까지 고려의 황도가 적군에 짓밟힌 적은 없었사옵니다. 신들에게 죄를 물어주시오소서, 폐하.
왕건 다른 장수들은 어찌되었소이까?
복지겸 염상 장군과 더불어 경계지역에 파병되었사옵니다.
왕건 가십시다. 지금 우리에게 급한 것은 서로의 잘못을 따지고 죄를 묻는 것이 아니올시다. 민심을 되살리고 자신감을 살리는 것이 더 급한 것이오. 가십시다.
복지겸 폐하를 뫼시어라.
부장들 폐하를 뫼시어라.
그들 그렇게 황궁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왕건은 가면서 계속 도리질을 한다. 보이는 곳마다 불타는 잿더미들 뿐이다.
씬 포구 근처 길
마치 산책을 나온 듯 최응과 최지몽이 말을 타고 가고 있다. 주변 풍경이 아름답다. 낙엽 무리들이 바람을 타고 밀려간다. 그리고 계속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있다. 최응이 가며 본다.
최응 이보게, 지몽이...?
최지몽 예, 어르신
최응 누군가 그런 말을 하였다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새옹지마의 뜻이 무엇인가? 즉 사람 사는 것은 별게 아니라는 것이야.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불행이 되고 그 불행은 다시 다음 날의 행복이 되는 것이야. 사실일세. 우리는 그와 같은 세월을 수도 없이 반복하여 살아왔네. 매일 새로운 것 같았지만 늘 같은 일이었지. (사이) 그것은 오로지 통일대업이 목표였어.
최지몽 그러했사옵니다.
최응 헌데..... 그 대업을 보지 못하고 가게 생겼구먼.
최지몽 힘을 내시오소서, 어르신. 더 사셔서 대업을 보셔야 하옵니다.
최응 허허허... 어렵게 되었다네. 지금 나를 청하고 있는 저 백제의 손님도 그러하고 말일세. 우리 둘은 운명이 비슷하다네. 그래서 서로 보고싶어 했던 것일세. 참으로 열심히 싸웠지만 정작 우리 두 사람은 그 엄청난 대업의 순간을 보지 못할 운명이라네. (사이) 허.... 낙엽이 아주 박정하게 다 지고 있구먼.
그렇게 낙엽이 바람 따라 무더기로 쏟아져 흩어지고 있다. 저만큼 앞에 군사들이 경계를 서며 막고 있다. 그들 가까이 가면...
씬 그곳
경계병이 막아서며 본다.
군사 여기는 경계지역이옵니다. 어디로 가시옵니까?
최지몽 내봉경 나으리시다. 일이 있어 포구로 가시고자 한다.
군사 아니되옵니다. 저곳은 적진이옵니다. 무슨 연유로 적진으로 가시고자 하옵니까?
그때, 박수경이 보다가 말을 타고 다가온다.
박수경 허허, 무슨 일이냐? (하다가 본다) 아니, 내봉경이 아니십니까? 여기는 어쩐 일이시옵니까?
최응 허허허... 나라 안의 일이 있어 적진을 좀 보고자 갑니다.
박수경 적진이라니요..? 저기 저 백제군 진영 말이옵니까?
최응 그렇소이다. 약속이 되어 있으니 길을 열어주시겠소이까?
박수경 괜찮겠사옵니까?
최응 물론입니다. 보내 주시겠습니까?
박수경 일이 있다 하시는데 어찌 길을 열지 않겠사옵니까? 물론 안전은 보장을 받으셨겠지요?
최응 그렇소이다. 염려 마시구려.
박수경 길을 열어드려라. 내봉경 최응 어른이시다. 길을 열어라.
부장 길을 열으랍신다. 길을 열어드려라.
최응 고맙소이다, 박장군.
박수경 잘 다녀 오시오소서.
최응들 그 진영으로 사라진다. 박수경이 한참 보다가 고개를 외로 꼰다.
박수경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인데 무슨 일로 저곳까지 갈꼬.....?
씬 동 포구 백제군 진영
최승우가 멀리 염상의 군영 쪽을 보고 있다. 최승우 주변으로 바다에는 여전히 백제의 전함들이 가득히 메우고 있다. 그 시야로 멀리서 최응의 일행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최승우가 미소를 짓는다. 그들은 점점 더 다가온다.
씬 그 길
최응들이 백제 부장의 안내를 받아 오고 있다. 저만큼 최승우의 모습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잠시 섰다가 가까워진다.
최승우 허허허... 어려운 청에 응해주셔서 고맙소이다. 최공....
최응 바쁘실 터인데 이 몸을 불러주시어 오히려 소생이 고맙습니다.
최승우 그 옆의 분은.......?
최응 최지몽이라고 합니다. 소생과 아주 가까운 사이지요. 그저 바람이나 쐬이자고 함께 왔습니다.
최승우 들어 가십시다. 참으로 궁금하고 뵙고 싶었소이다 그려. 허허허...
그들 그렇게 간다. 포구 주변의 모습들이 장관으로 보여온다. 수많은 함선들과 군사들과... 그러나 최응은 담담하다. 그들 그렇게 군막 사이를 지나가면...
씬 최승우의 거소
이들이 들어와 앉는다. 최승우가 차를 따른다.
최승우 아주 적조하였소이다. 자, 한잔 하시지요?
최응 예... (마신다) 얼마나 바쁘셨습니까?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겝니다.
최승우 허허허... 고생은 무슨... 다행히 몇 가지 좋은 선물을 얻어서 피곤한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최응 허허허... 그렇겠지요. 이 모두가 선생께서 마련하신 것이겠지요.
최승우 뭐 그렇기는 하오이다마는... 그래, 어떻소이까? 병부의 일도 내어 놓았다 들었습니다. 건강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 구려.
최응 그렇습니다.
최승우 저런 쯧쯧쯧.... 나야 이제 거의 백발이 되어 가는 나이이니 억울할 것이 없지만 고려의 신동은 너무 안타깝소이다.
최지몽 .................?
최승우 올해... 서른 다섯이 되시던가...?
최응 그러합니다.
최승우 한참 때인데... 하늘이 그런 걸 보면 참으로 야속할 때가 많아요. 서른 다섯이라... 인생의 황금기인데... 가야하다니...
최지몽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디를 간다 하십니까?
최승우 허허허... 이심전심이라 하였소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 보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고 있었지. 조물성 전투에서 태어난 달과 시를 안 이후로 해마다 서로의 길흉화복을 점쳐 보고는 했다오. 우연히 이번에도 살펴보다가... 알게 되었지....
최응 선생께서도 그리 많이 남은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 말에 최승우가 한참을 웃는다. 그리고 끄덕인다.
최승우 그렇소이다. 이 몸 또한 그리 오래는 안 남았소이다. 세월과 나이를 뛰어 넘어 우리는 동무라 할만 하오. 한 동무가 먼저 가는데 남아 있어봤자 큰 재미도 없을 것 같고... 아니 그렇소이까? 허허허...
최응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소생은 그 동안 선생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제갈공명의 현신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최승우 내가 할 말이오. 고려의 신동은 하늘의 신선과 같아 보였소이다. 어쩌면 이렇게 맑고 깨끗할까....? 나는 지난번 우리 백제가 고창전투에서 참담하게 패했을 때 그것이 곧바로 신동의 계책인 줄 알았소이다. 백제로서는 엄청난 타격이었어요. 결정적 패배였지.
최응 그래서 곧바로 오늘처럼 예성강을 공략하여 빚을 받으신 것입니까?
최승우 허허허... 그렇다 할 수 있지요. 허나.... 허나 말이오. 그것 다 지나가 보면 무상한 것이오. 누군가 통일을 할 것이고 이 삼한은 결국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히 머리를 싸매고 싸워온 우리의 일은 한낮 기억에서조차 지워질 것이외다. 결국 인생무상, 제행무상이 될 것이오.
최응 좋은 말씀이십니다. 인생무상, 제행무상이라... 다 덧없는 것이지요.
최승우 허허허... 그래요. 허나 그보다도 더 허망한 것이 있소이다. 그래도 이긴 자는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역사라 하지만 진 자는 그나마도 다 사라지고 변명의 여지조차 없소이다. 도적이나 화적떼의 무리로 분류되어 오명으로 남게 되지요. 이 최승우가 한때는 신라의 삼최라 하여 천재로 불렸소이다.
최응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최승우 허허허... 그러나 훗날 어디서 어떻게 이 구차한 삶이 끝났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소이다.
최응 ...............?
최승우 그것이 두렵소이다. 도적의 이름으로 남는 것 말이외다.
최응 .............?
그들의 시선이 불을 뿜는다. 왜 그럴까? 그들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본다. 그러다 다시 최응이 말한다.
최응 선생과 소생은 이미 공명심을 떠났습니다. 어느 초야에서 어떻게 묻힌들 어떠하겠습니까? 이렇게 마지막 길에 차 한잔이라도 함께 하게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최승우 고맙구려. 오늘의 만남은 참으로 의미가 있소이다. 자, 차 드십시다. 곧 모임이 있을 것 같아서... 오래 함께 있을 수가 없구려.
최응 고맙습니다. 정말 만나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그럼...
두 사람, 찻잔을 들고 서로를 본다. 그리고 훈훈하게 미소지으며 끄덕인다. 그들의 그 긴 눈빛에서... 천천히 디졸브...
씬 포구 길
최승우가 함께 걷고 있다. 핏빛 낙조가 가득하다. 무수한 낙엽이 무진장 떨어지고 있다. 어느쯤 걸어오다가 두 사람은 또 서로를 본다. 그리고 그렇게 섰다.
최승우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인 것 같구려.
최응 예... 내생에서나 보아야겠습니다.
최승우 허허허... 잘 가시구려.
최응 그럼... 잘 돌아가십시오.
최승우 모셔다 드려라.
부장 예, 파진찬 어른.
그들은 말 위에 오른다. 그들이 가기 시작한다. 최응이 다시 한번 돌아본다. 최승우가 끄덕인다. 그렇게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천천히 다시 디졸브되면서...
씬 포구 외경 (밤)
신검의 군영이 불야성으로 뒤덮혀 있다.
씬 동 어느 군막 안
신검과 제장들이 회의중이다. 최승우도 함께 해 있다.
신검 지금까지 설명하였듯이 우리 백제 수군이 고려의 수군을 궤멸시켰소이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잔여 세력이 저 대우도 쪽에 남아있다고 하오. 이대로 갈 수는 없지 않소이까?
신덕 하오나 총사? 그 대우도 가는 길에 곡도가 있사옵니다.
최필 도대체 그 곡도가 무엇이길래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오?
상귀 혹시... 곡도의 유금필이를 의식하는 것 아니오이까?
애술 유금필이...?
모두들 시선이 애술에게 쏠린다. 다시 신덕이 말한다.
신덕 그 동안은 우리가 일방적인 승리를 해왔사옵니다. 그것은 저들이 방심하고 잠자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얻은 승리이옵니다. 허나 곡도에는 유금필의 군대가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유금필이라는 장수는 여러 번 겪어 보았지만 고려가 자랑하는 맹장 중에 맹장이옵니다.
애술 이것 보시구려. 지금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는 게요? 유금필이가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이라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땅에서나 잘 싸우지 섬에 귀양을 가 있는 자가 무슨 재주로 싸울 수가 있다는 말이오?
종훈 그러나 곡도는 이곳에서 가까운 섬입니다. 동시에 대우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 쪽에는 섬과 섬이 많아서 우리 대선단이 지나기에는 적절치 못하옵니다. 차라리 이대로 귀환하는 것이 나을 것이옵니다.
김총 귀환이라니...? 기왕에 일을 시작했으면 확실하게 끝을 보는 것이 좋지 않소이까? 대우도 또한 고려의 수군 기지 중의 하나이올시다. 가서 처부숩시다.
종훈 대우도에는 함선이 몇 척 없습니다. 빈 곳이에요. 무리를 해가면서 올라갈 이유가 없소이다.
애술 가는 것이 맞소이다. 가서 싸우는 것이 맞소이다. 대우도를 치기 전에 곡도부터 치도록 해 주시오소서.
신검 허허허... 우리 애술 장군께서는 유금필 장군에게 아주 감정이 많으십니다 그려.
애술 그러하옵니다. 유금필의 유자만 들어도 자다가도 일어나옵니다. 곡도로 가게 해주시오소서. 그리해 주시오소서, 총사.
신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파진찬...?
최승우 종훈 군사의 말이 옳습니다. 대우도는 섬과 섬이 많아 전략상 우리가 불리하옵니다. 또한 유금필도 비록 귀양을 가 있다고는 하나 곡도라는 군사적 요충지에 가 있사옵니다. 함부로 볼 수는 없사옵니다.
애술 어이구 (가슴치며).. 끓는다, 끓어... 유금필이가 대체 뭐라고... 이렇게들 겁을 낸다는 말씀이오? 총사, 아니되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엄청난 전과를 올렸사옵니다. 일의 끝을 깨끗이 맺는 것을 전략의 기본이옵니다. 허락해 주시오소서. 이대로 가서는 아니 되옵니다, 총사.
양검 애술 장군의 말을 듣고 보니 충분히 일리가 있사옵니다. 그 청을 들어주시오소서. 후환을 없애고 뒤를 깨끗이 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옵니다.
용검 소제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저 청을 들어주시오소서.
상귀 소장은 수군을 지휘하는 장수로서 애술 장군의 말에 공감하옵니다. 이미 고려의 수군은 대부분 궤멸되었사옵니다. 고려 수군의 잔재들을 다 소탕하도록 허락하시오소서.
신검 파진찬...? 어떻소이까? 이 사람도 그리 생각합니다마는...
최승우 그냥 황도로 돌아가시오소서. 소생은 그렇게 권하고 싶사옵니다.
신검 아니오. 아니오... 이 기회에 유금필이라는 장수도 잡아서 저 애술장군의 한을 좀 풀어주고 남아 있다는 고려 수군의 잔재도 뿌리를 뽑아버립시다. 그렇게 하십시다.
애술 망극하옵니다, 총사. 이번에는 반드시, 반드시 유금필이를 잡아보이겠사옵니다, 총사.
그러나 최승우는 도리질을 하며 눈을 감는다. 신검은 호쾌하게 말한다.
신검 비록 파진찬은 반대를 하였으나 총사인 내가 결정하였소. 대우도를 공략할 것이오. 제장들은 이 전투에 총력을 기울여주기를 바라오. 아시겠소이까?
모두들 예, 총사.
씬 곡도
섬에서 바다를 보며 유금필과 족장들이 서 있다.
유금필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로다. 세상에... 백제의 수군이 예성강까지 들어와서 우리 배들을 모두 불사르고 황궁을 침범해...?
족장 사실이라 하옵니다, 장군. 그 일로 하여 서경에 가 계시던 황제께서 급히 돌아오시었고 아직도 백제의 군사들은 예성강 포구 쪽에 진을 치고 있다 하옵니다.
유금필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는구먼. 아니 어떻게 저들이 그많은 배들을 다 태울 수가 있다는 말인고...? 그리고 어떻게 황궁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그 많은 장수들이 있는데 어떻게....?
추장 또 한편 소문으로는 저들이 대우도까지 공략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사옵니다. 이렇게 되면 어찌되는 것이옵니까?
유금필 막아야지. 이제부터는 이쪽으로 온다면 내 소관이다.
족장 하오나 장군께서는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를 온 처지가 아니시옵니까?
유금필 나라를 위해 싸우는데 죄인이고 유배를 온 신분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글을 써 줄 터이니 황도에 장계를 띄우도록 하라. 내가 싸울 것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그대들은 남아있는 함선과 그 동안 훈련시킨 군사들을 준비하도록 해.
모두들 예, 장군.
유금필 이런.... 황도가 짓밟히다니...? 이런.... 형님폐하께서 얼마나 놀라셨을꼬...? 허, 이런..
씬 인서트 (바다)
신검의 대 군단이 가고 있다. 모함인 신검의 배에서 신검과 제장들이 먼 바다를 가리키고 있다. 북소리가 울리고 있고, 소라소리가 계속된다. 배들은 그렇게 물결을 헤치며 계속해 나아가고 있다. 끄덕이는 신검의 표정에서...
씬 고려 황궁 외경
씬 동 편전
군신 회의가 열리고 있다. 전 신료들이 모두 참석했다. 김행선, 정윤 무, 왕식렴, 추언규, 왕규, 최지몽, 홍유, 배현경, 복지겸, 박술희, 염상, 왕충, 윤신달, 박수문 형제들이다.
왕건 백제의 군사들이 짐의 황도를 어지럽히고 국정을 논하는 이곳을 짓밟고 갔다니 부끄럽고도 통탄할 일이오.
모두들 ...............
왕건 어쩌다가 이 나라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소이다. 오면서도 말을 했지만 일차적으로는 황제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얼마나 군기가 해이해졌으면 적군의 함선들이 떼거리로 오고 있는데도 별다른 검문 없이 황도로 들여보낼 수가 있다는 말이오?
김행선 폐하, 아뢴 바와 같이 오늘의 이 엄청난 사태를 그냥 넘길 수는 없사옵니다. 죄를 물으시오소서.
추언규 시중의 말씀이 지극히 옳사옵니다. 관련된 장수들이 그 수하들을 잘못 단속한 결과가 이렇게 되었사옵니다. 엄히 문책하시오소서.
왕규 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죄를 묻지 않고는 이 같은 일이 또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기 어렵사옵니다.
왕건 물론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그 사실을 규명해야겠지요. 허나 지금은 부서지고 불타고 피폐해진 모든 것들을 복구해야 할 때입니다. 수군을 먼저 재건하도록 하시오. 이 일은 왕식렴 아우가 서경총관을 겸하여 맡으라.
왕식렴 예, 폐하. 신명을 다 바치겠사옵니다.
왕건 수군은 바로 이 황제의 체면과 직결되는 것이야. 반드시 재건해야 할 것이야.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안에...
왕식렴 예, 폐하.
왕건 또한 백제의 수군이 그들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저 북쪽 대우도로 향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대책은 무엇이오?
박술희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우리 수군은 거의 다 재가되어 쓸만한 함선도 군사도 없사옵니다. 유일하게 그 길목에 있는 곡도의 유금필 장군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사옵니다.
왕건 죄인으로 가 있는 사람일세. 무슨 힘이 있어 싸울 것인가?
홍유 신이 듣기로는 유장군은 그곳에서도 나라를 생각하여 호족들과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하옵니다.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배현경 그러하옵니다. 비록 죄인이고 유배의 신분이나 유장군은 북쪽 지방의 족장과 추장들이 모두 존경하고 추앙하는 장군이옵니다. 기다려보시오소서.
왕건 그쪽 뿐만 아니라 전 전선을 다 점검하도록 하오. 이번 황궁 난입사건은 추후에 짐이 물을 것이오. 지금은 모두 단결하고 단합하여 잃어버리고 실추된 국가적 명예와 힘을 되찾을 때이올시다. 전군을 점검하시오. 그리고 전 경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도록 하오.
모두들 예, 폐하.
씬 동 궁안 마당
황후 오씨가 유씨와 더불어 궁녀와 내관들을 보고 있다. 모두들 부서지거나 타버린 전각들을 치우고 정리하기에 바쁘다.
오씨 이만하기가 다행일세. 그래도 크게 많이 손상된 곳은 없다지...?
유씨 예, 황후마마. 저들이 불을 지를 것을 대비하여 일찍부터 곳곳에 항아리와 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하옵니다.
제조상궁 다행히도 저들이 몇몇 전각만 불을 놓았을 뿐 전 황궁을 태우지 못하였사옵니다.
오씨 궁궐을 다시 일으키는데는 신분고하나 남녀노소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느니라. 제조상궁은 상궁 나인들을 단속하여 모두 궁궐을 다시 세우는데 참여하게 하라.
제조상궁 예, 황후마마.
유씨 뿐만 아닐세. 내관들 또한 공역하는 백성들과 군사들을 도와서 모두 팔을 걷고 나서야 할 것일세.
내관 예, 마마.
유씨 세상에... 지금도 모든 게 꿈만 같구나. 아니 그러하냐, 김상궁?
김상궁 예, 마마. 쇤네들도 또한 그러하옵니다.
유씨 가자, 자네들도 가서 우리 처소의 일은 우리 스스로가 다 치우고 세우도록 하세.
김상궁 예, 마마.
그렇게 가는 그녀들의 한숨 내쉬는 표정에서...
씬 바다
계속해 신검의 선단이 가고 있다. 그중 신검의 배에서 최승우와 신검, 양검, 용검, 애술이 함께 먼 바다를 보고 있다.
신검 이보시오, 파진찬..?
최승우 예, 태자마마.
신검 어떻소이까? 지금쯤 아바마마께서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시겠소이까?
양검 보나마나 크게 웃으시면서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애술 유금필이를 잡아가면 더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용검 하하하.. 그건 그럴 것이옵니다.
신검 사실 그 동안 아바마마께 너무 많은 신뢰를 잃었소이다. 이번 전투 또한 늘 나를 걱정하는 이찬이 파진찬에게 가서 도움을 청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승우 어인 말씀을......
신검 너무 운이 없었소이다. 늘 하는 일마다 잘 되다가 끝에 가서 엉망이 되고는 했소이다. 이번 전과는 내가 생각해도 그 동안 백제가 싸워왔던 전투 중 최고의 것이올시다. 고맙소이다.
최승우 어인 말씀을..... 그 보다도 태자마마...? 다시 한번 말씀올리옵니다마는 이대로 회군하심이 어떠하옵니까?
애술 회군......? 회군이라고 했습니까? 아니, 이제 바로 눈 앞이 곡도인데 유금필이를 두고 회군이라구요? 아니, 파진찬 어른...?
신검 하하하... 유금필이는 이빨 빠진 호랑이입니다. 곡도의 죄인으로서 유배를 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고려의 수군은 파진찬도 아시다시피 남아있는 것이 없소이다. 뭐가 있어야 싸울 것이 아닙니까?
최승우 ............ (한숨)
신검 하도들 염려들을 하길래 미리 정탐선과 군사들을 보내고 저들의 사정을 파악하라고 일러놓았습니다. 허나 별일 있겠습니까? 이번 전투는 아마 재미있는 장난거리가 될 것입니다.
애술 암요, 그렇게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될 것이옵니다. 코 앞이 곡도인데 절대 이대로는 갈 수 없지요. 유금필이가 있다는데 이대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암요...
그렇게 흥분하는 애술의 표정에서...
씬 어느 섬 해안 (저녁 노을)
멀리 산기슭에서 군사들이 숨어 바다 쪽을 보고 있다. 해안 가까이 신검의 정탐선들이 두어 척 다가온다.
씬 그곳
신검의 정탐선들은 해안가에서 주변을 오랫동안 이리저리 훔쳐본다. 그들의 시야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다시 서로 시선을 나누고 배를 움직여 사라진다. 그렇게 멀어지면...
씬 다시 그 섬 해안 산기슭
끄덕이는 군사들.
군사1 백제의 정탐선이야. 그대로 가버리는군 그래. 가서 알리게. 백제의 정탐선이 왔다가 그냥 갔다고....
군사2 알겠네.
옆 군사가 끄덕이며 다시 말을 타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계속 바다를 보는 군사의 시선으로 보이는 그 먼 바다로 신검의 선단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긴장하는 그 군사의 표정에서...
씬 곡도 바닷가 군영 (밤)
십여 척의 작은 고깃배들이 모여있고 수군들이 대기해 있다.
씬 동 군영 안
호족들과 족장, 추장들과 그리고 부장들과 유금필이 회의중이다. 이미 전투복을 다 갈아입고 있다. 지형도가 눈앞에 있다. 곳곳에 섬들이 그려져 있다.
유금필 자네들 족장과 추장들은 들어라.
그들 예, 장군
유금필 이미 백제의 대 군단이 대우도로 가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있다. 자그만치 오십 여 척이 넘는 대 함대다. 알고들 있겠지?
족장 알다 뿐이옵니까? 이미 인근 주변 섬의 호족들을 모두 닥달해서 어부들과 몇몇 수군들을 끌어 모아 공격준비를 끝냈사옵니다.
유금필 마침 나주에서 겪었던 전투와 마찬가지로 바람이 우리를 돕고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리적 잇점이 아주 그만이다. (지형도 보며) 보아라. 적의 함선들이 이리로 지나갈 수밖에 없어.
모두들 ......... (끄덕인다)
유금필 (지형도 가리키며) 대 선단이 한꺼번에 이 섬과 섬 사이로 오고 있어. 그리고 우리는 미리 이 양쪽 해안에 백성들과 군사들을 풀어서 화공을 준비해 놓았어. 바람은 적의 함대 쪽으로 불고 있고 말이야. 그리고 물살은 급해.
모두들 그러하옵니다, 장군.
유금필 하늘이 돕고 있음이다. 이들이 지금 이리로 오고 있어. 그물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말이야. 들어만 온다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게 되지. 그 이후로는 너희들의 몫이다. 공을 한번 세워들 보아라.
추장 예, 장군.
유금필 저들은 우리 수군을 궤멸시킨 것만을 기억하고 한없이 이곳을 깔보고 있어. 저들의 정탐선이 섬에 오르지도 않고 형식적으로 지나쳐 가버렸다는 것이 그걸 증명하지. 바로 그 자만이 오늘밤 백제군 최악의 약점이 될 것이야.
족장 그러하옵니다. 조금만 자세히 보아도 다 알 수 있는 것을 저들은 무시해 버렸사옵니다. 또한 저들은 이곳 지형과 사정도 어둡사옵니다.
추장 우리에게 배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저들의 실수 중 하나가 아니옵니까? 남아있는 우리의 작은 어선들 열 척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지를 저들은 모르옵니다.
유금필 온 섬의 백성들이 다 동원된 전투이다. 만약에 실수한다면 그 백성들이 다 죽게 될 것이야. 오늘 이 전투는 배수의 진을 친 전투이다. 잘못되면 백성들도 너희들도 그리고 나도 다 죽을 것이다. 명심들 하라.
그들 예, 장군.
족장 헤헤헤... 장군, 장군께서는 우리들의 대 추장이시옵니다. 잘못될 리가 있사옵니까? 다 잘 될 것이옵니다.
유금필 그렇다. 분명 잘 될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하나도 둘도 확인, 또 확인하는 일이다. 자... 시간이 더 없다. 너희들은 요소요소를 다시 한번 잘 살피고 단속하라. 해안의 공격이 잘 될 수 있는가, 가서 철저히 점검하도록들 하라.
그들 예, 장군.
유금필 공병들이 쓰는 비루(돌을 날리는 포차)를 옮겨 놓으라고 한 것은 어찌되었는가?
족장 이미 다 끝이 났사옵니다. 그 비루에 돌 대신 불덩이를 실어 적의 함대에 퍼부을 것이옵니다. 수십 대의 비루를 이미 해안가에 감추어 놓았사옵니다.
유금필 수고들 했다. 자, 함께 나가서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도록 하자. 저들이 곧 목표 지점으로 들어설 것이다.
모두들 예, 장군.
씬 어둠 속 해안
유금필이 족장들과 함께 공격 대형을 돌아보며 끄덕이고 있다. 해안 곳곳에 비루들이 늘어서 있고 군사들과 백성들이 어우러져 화공을 준비해 놓고 있다. 계속 지나쳐 가며 보는 유금필. 한 필의 말이 달려온다. 척후병이다.
척후병 (군례를 하며) 장군, 백제의 수군이 다가오고 있사옵니다. 이미 곡도 입구에 들어서서 이 쪽으로 접어들고 있사옵니다. 대 선단이옵니다.
유금필 때가 된 모양이구먼 그래. 자, 우리도 배에 오르자. 저들을 유인해 드려야 한다.
족장들 예, 장군.
유금필 오늘 이 밤은 엄청난 밤이 될 것이다. 저들이 우리에게 준 만큼 톡톡히 받아내게 될 것이야. 아주 엄청나고도 특별한 밤으로 기억 될 것이다.
그런 유금필의 표정에서....
<178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