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제 179회>
백제의 총사 신검은 유금필이 쳐놓은 그물안으로 들어서게 되고 해안가에 매복해있던 고려군의 화공에 어처구니 없는 참패를 한다. 반면 유금필은 죄인의 신분으로 고려의 자존심을 지키는 큰 전과를 세우고 이에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사면논의가 본격화된다. 한편, 백제의 견훤은 신검의 곡도패전소식은 모른채 예성강승리의 여세를 몰아 서쪽의 요지인 운주공략을 명하고... 왕건은 뒤늦게 최응의 병세가 위급함을 알고는 급히 그의 집을 찾지만 희대의 신동은 자주통일을 마지막 당부로 남기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씬 곡도 주변의 바다 (밤)
씬 그 해안 어느 곳
십여 척의 작은 종선들이 불이 꺼진 채 몰려 있다. 누가 봐도 하찮은 고깃배들이다. 그 배들이 늘어서 있다. 유금필이 보이고 호족들과 몇 몇 군사들이 타고 있다.
족장 장군, 저기.... 저 쪽을 보시오소서. 불빛이 휘황하옵니다. 백제의 대 함대이옵니다.
유금필 겁먹을 것 없다. 저들은 지금 호구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야. 호랑이 입 말이다.
추장 바람까지 기가 막히옵니다, 장군.
유금필 그러게 말이다. 오래 전 나주전투에서도 꼭 이런 상황이 있었지. 그때 백제의 왕이 우리에게 목숨을 잃을 뻔하였어. 그리고 여러 백제의 맹장들이 죽거나 잡혔지. 대단한 전투였다.
족장 소인들도 들어서 알고 있사옵니다.
유금필 똑같은 일이 오늘 여기서 일어날 것이다.
족장 소인들은 너무도 신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몇 백도 아니 되는 수군들과 훈련도 못 받은 어부들이 싸우는 전투이옵니다. 백제군은 삼천이 되옵니다.
유금필 흥분하지 말라. 상황을 잘 살피면서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족장 예, 장군.
추장 해안 일대는 염려치 마시오소서. 수십 리에 걸쳐서 철저히 살펴보았사옵니다. 가는 곳마다 화공을 펼칠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유금필 잘 되었다. 다 너희들의 공이다. 너희 오랑캐 부족들이 고려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싸웠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훗날 다 보상을 받을 것이야.
족장 상을 받으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옵니다. 다 우리들의 대 추장이신 장군을 위해 싸우는 것이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옵니다, 장군. 우리는 오로지 장군의 명을 따라 죽고 사는 족속들이옵니다.
유금필 허허허... 알고 있다. 자, 움직여라. 적선이 오고 있다. 어서 움직여라.
추장 움직이랍신다. 각 배들은 늘어서서 적선을 유인하라.
유금필 각 배는 불을 밝혀라. 불을 밝혀 저들 가까이 가라. 군사들은 방패를 준비하고 저들의 화살공격을 대비하라.
군사들 예, 장군.
유금필은 그렇게 먼 바다를 본다. 신검들의 불빛이 보인다. 긴장하는 유금필의 표정에서...
씬 그곳 바다
어둠 속으로 불을 밝힌 신검의 배들이 가득히 들어서고 있다. 그 중 상귀와 최필, 신덕, 종훈들이 탄 배들이 스쳐간다. 그리고 저만큼 신검의 배가 보인다.
씬 그 배
신검이 탄 배가 지나치고 있다. 주변의 섬들이 계속해 보여지며 스쳐 간다. 배들마다 휘황하게 불빛이 밝다. 바람이 거세게 불며 깃발들을 요란하게 흔들고 있다. 최승우가 우울하게 본다.
최승우 바람이옵니다. 바람이 우리 함선 쪽으로 불고 있사옵니다.
신검 이까짓 바람쯤이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최승우 물살 또한 급하옵니다. 만약에 뒤로 돌아 나가려해도 바람과 물살 때문에 물러나기도 어렵사옵니다.
애술 허허.... 파진찬 어른..? 물러나다니요? 왜요..? 우리가 뒤로 도망칠 이유가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까? 정탐선의 보고로는 해안마다 텅텅 비었다고 합니다. 무얼 걱정할 것이 있습니까?
양검 그렇습니다. 우리 좌우로 신덕, 최필, 상귀 장군들이 나가고 있습니다. 모두들 조용하지 않습니까? 이건 마치 뱃놀이를 하는 것 같습니다.
용검 대우도 까지는 참으로 싱거운 항해가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하다가) 아니... 형님..? 저기 저쪽을 보시오소서. 불빛이옵니다.
모두들 ...............?
애술 고려의 배들 같사옵니다.
신검 (한참 보다가) 맞아... 고려의 배들이야. 속력을 내게. 보아하니 작은 어선들이 아닌가?
양검 그러하옵니다. 작은 고깃배들이옵니다.
신검 하하하... 고작 저런 배들로 싸우겠다고 나온 것인가? 어디 불빛을 세어보자. 하나, 둘... 셋... 넷.... (하다가) 전부 합쳐 십여 척도 채 아니 되어 보인다. 하하하... 딱하구나. 저런 배들을 싸움배라고 끌고 나왔다는 말이냐? 서둘러라. 가까이 가보자꾸나. 서둘러라. 전 함대는 서둘러 나아가라 하라.
애술 총사께서 서둘랍신다. 전 함대는 서둘러 나아가라.
신검 저 작은 고깃배들을 그대로 박고 나아가라 하라.
애술 고깃배들을 받아버려라. 속히 나아가라.
부장들이 그 말을 받아 복창한다. 그리고 북소리가 요란하다. 바람은 폭풍처럼 더욱 더 강하게 불며 깃발을 펄럭인다. 최승우는 걱정스럽게 그 바람을 본다. 그 소란 속에서...
씬 그 바다
어둠 속 바다에서 유금필이 족장들과 함께 타고 있다. 배에는 횃불이 대낮처럼 밝다. 신검의 배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바람 소리와 북소리들이 요란하다. 바람은 해안에서 신검의 배들 쪽으로 불고 있다. 유금필이 그 바람을 보며 끄덕인다. 배들이 가까워진다. 애술이 유금필을 발견하고 소리친다.
애술 거기 쪽배에 탄 것이 누구냐? 유금필이 아니냐?
유금필 허허허.. 애술이로구나. 나를 알아보았구나. 잘 있었느냐?
애술 오냐, 절치부심하여 너를 기다린지 오래이다. 요 며칠 사이로 너희 수군은 우리가 모두 잿더미로 만들었다. 알고 있느냐?
유금필 들은 바 있느니라. 대단하였다 하더구나.
애술 히히히... 그랬지, 그랬지. 자, 오늘 여기 싸우러 나온 것이냐, 아니면 항복을 하러 나온 것이냐?
신검의 배에서는 모두들 유금필을 보고 있다.
유금필 항복이라니....? 너희들을 모두 고기밥이 되게 해주려고 나온 것이다. 이곳이 오늘 너희들의 죽을 자리가 될 것이다.
씬 그 신검의 배
신검이 보다가 껄껄껄 웃는다.
신검 큰소리는 치고 있지만 참으로 불쌍해 보이는구려, 파진찬. 저 배들 좀 보시오. 작은 쪽배가 아닙니까? 타고 있는 군사라고는 몇 명 아니 보입니다. 저런, 쯧쯧쯧... 얘들아, 무얼 하느냐? 밀어 부쳐라. 저 유금필이를 생포해야겠다.
애술 유금필이를 생포하랍신다. 유금필을 생포하라.
부장들 생포하라. 배를 속력을 내어 몰아라. 노를 저어라.
유금필 하하하... 어디 따라와 보거라. 애술아, 나를 따라와 보거라.
그러나 웃음소리와 함께 유금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애술은 애가 탄다.
애술 도망치옵니다, 태자마마. 유금필이 도망치옵니다. 잡아야 하옵니다.
최승우 뭔가 이상하옵니다, 쫓지 마시오소서. 이곳은 섬과 섬 사이의 협곡이옵니다. 쫓지 마시오소서.
신검 무엇이 그리 걱정이란 말이오? 이 바다에는 우리들 배 뿐이올시다. 쫓아라. 계속 더 나아가라. 활을 쏘아라.
애술 쫓으랍신다. 더 속력을 내거라. 활을 쏘아라. 더 속력을 내거라, 더.... 다른 배에도 알려라. 쫓으라 하라.
북소리는 계속된다. 군사들은 열심히 노를 젓는다. 화살을 비오 듯 퍼붓는다. 유금필의 배는 방패를 내세워 화살을 막는다. 멀어지기 시작한다.
씬 그 바다 상귀의 배들
상귀가 신덕, 최필, 종훈, 김총들과 더불어 신검과 유금필의 배들을 보고 있다. 유금필의 배는 쏜살같이 사라지고 있다.
신덕 유금필의 배이올시다. 도망치고 있어요.
최필 하하하.. 저것이 어디 싸우는 배라고 할 수 있겠소이까? 작은 고깃배이올시다.
김총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종훈 그렇지가 않소이다. 유인책을 쓰고 있소이다. 유인책이에요.
상귀 그렇소이다. (하늘 보며) 이 바람을 보세요. 모두 해안에서 우리 쪽으로 불고 있소이다. 강한 바람이에요. 이럴 때, 적이 화공을 쓴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소이다.
종훈 그렇소이다. 헌데 신검 태자마마께서 저렇게 바짝 쫓고 계시니...
씬 그 바다
유금필의 배가 도망치고 있다. 족장들의 배도 여기 저기 계속해 해안 쪽으로 가고 있다. 그들의 시야로 신검의 배들이 따라오는 것이 보인다.
족장 장군, 장군의 계책대로 되고 있사옵니다. 저들이 쫓아오고 있사옵니다.
유금필 하하하... 걸려들었다. 제대로 걸려들고 있다. 이제 해안 가까이 이르렀으니 신호를 올려라. 불화살을 쏘아라.
족장 예, 장군. 신호를 올리랍신다. 불화살을 쏘아라.
유금필 이제 모두들 바다에서 불에 타 죽을 것이다. 불과 바다라... 하하하... 정말 좋은 바람이다. 기가 막힌 바람이야.
그 바람 속으로 불화살이 계속해 오르고 있다.
씬 그 해안
바다 가운데서 불화살이 치솟고 있다. 유금필의 회의에 참석했던 추장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추장 비루를 끌어내라. 염초가 섞인 불덩이를 쟁겨라.
추장1 적함이 가까이 온다. 정조준하여 날려라. 쏘아라...
부장들이 영을 받아 복창한다. 쏘아라.. 소리들이 계속 되면서 드디어 비루에 실린 불덩이들이 공중에 날기 시작한다. 장관이다. 수많은 불덩이들이 날아간다.
씬 그 바다 신검의 배
신검이 금방 얼굴이 굳어진다. 불덩어리들이 날아오는 것이다. 애술도 양검 형제들도 하얗게 굳어진다.
신검 이게 무엇인가? 해안에서 불덩이가 날아오지 않는가?
양검 형님, 이야말로 바다의 매복이 아니옵니까? 해안에서 불덩이를 쏘고 있사옵니다.
용검 뒤로 물려야 하옵니다. 화공이옵니다. 화공이옵니다.
최승우도 정신이 없다. 그러나 이미 그는 알고 있었다. 불덩이가 사방으로 날아와 순식간에 번지기 시작한다.
최승우 화공이옵니다. 물살과 바람 때문에 뒤로 물러날 수도 없사옵니다. 그대로 앞으로 가시오소서. 앞으로 전속력으로 이곳을 벗어나야
하옵니다.
신검 어떻게..... 아니, 어떻게.. 해안에서 불덩어리가 날아올 수 있다는 말이오? 한둘도 아니지 않소? 온 해안이 다 불덩어리요.
최승우 매복이옵니다. 저들의 유인책에 걸렸사옵니다. 애술장군...?
애술 예, 군사..
최승우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오. 한쪽으로 불을 끄면서 전 속력으로 나아가시오. 이 바다를 벗어나야 합니다.
애술 알겠습니다. 불을 꺼라. 불을 꺼라. 돛을 올려라. 수군들은 노를 저어라.
어지럽다. 온 갑판 사방이 불뿐이다. 올려지던 돛폭에 불이 옮겨 붙는다. 불을 꺼라, 돛을 내려라, 소리들이 어지럽게 들려오고 있다. 신검은 어쩔 줄을 모른다.
양검 형님, 피하시오소서. 불길이 전 배에 옮겨 붙고 있사옵니다. 위험하옵니다. 작은 배로 피하시오소서.
신검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정탐선은 무얼 보고 왔다는 말이냐? 해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용검 (달려오며) 아니 되겠사옵니다. 배 전체에 불이 번졌사옵니다. 피하시오소서. 피하시오소서.
최승우 불을 끄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하옵니다. 피할 시간이 없사옵니다. 불을 꺼라. 군사들은 불을 꺼라.
애술 태자마마, 다른 배들도 모두 불에 휩싸여 있사옵니다. 태자마마...
애술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과도 같다. 신검의 눈에 다른 배들이 불길에 휩싸인 것들이 보여온다. 아비규환이다.
씬 그 다른 배
상귀와 제장들이 불길 속을 헤매며 소리치고 있다.
상귀 불을 꺼라. 적은 해안에 있다. 대응하지 마라. 그대로 불을 끄며 나아가라.
최필 (달려오며) 많은 함선들이 다 타고 있소이다. 이보시오, 상귀장군? 이 바람 때문에 아니 되겠소이다. 불이 꺼지기보다는 더 번지고 있어요.
김총 큰일 났소이다. 다 타고 있어요. 배들이 다 타고 있어요.
종훈이 그 와중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
종훈 처음부터 계획된 전략이었소이다. 계획된 화공이었어요.... 완전히 당했소이다. 완전히 당했어요.
신덕 믿기지가 않소이다. 고깃배 몇 척이 백제의 우리 대 선단을 유린하고 있소이다. 도대체 어떻게 고려의 수군이 저토록 많이 남아 있었다는 말입니까?
종훈 수군이 아닙니다. 유금필입니다. 유금필과 오랑캐라 하는 북방의 야인들이 함께 뭉쳐 우리를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수군이 아닙니다. 야인들이고 어부들이에요.
신덕 세상에....
그들 주변으로 불덩어리들이 계속 떨어진다. 배 곳곳이 불에 타 무너지고 있다. 군사들이 수없이 타죽고 있다. 상귀가 소리치고 있다.
상귀 이 배는 포기할 수밖에 없소이다. 다른 배로 옮겨 타시오. 모두 피하시오.
무너지는 불기둥들... 그렇게 죽어 가는 수많은 군사들의 모습에서...
씬 그 해안
작은 고깃배들은 여전히 몰려 있다. 바다는 완전히 불꽃놀이를 하듯 화염에 휩싸여 있다. 곳곳에 백제의 배들이 불에 타거나 침몰하고 있다. 유금필과 족장, 추장들이 보고 있다. 아직도 불덩어리들은 계속해 날아가고 있다.
족장 어마어마하옵니다. 이런 전투는 태어나서 생전 처음보옵니다.
추장 장군, 장군의 말씀대로 되었사옵니다. 백제의 선단들이 모두 타고 있사옵니다.
추장1 저기 보시오소서. 불이 붙은 배들이 전속력으로 바다로 도망치고 있사옵니다.
유금필 이 전투는 이미 끝이 났다. 적어도 백제의 함대가 절반은 무너졌을 것이다. 하하하... 보고 있느냐? 이것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용기와 신념으로 하는 것이다.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말이야.
족장 예, 장군. 그런 것 같사옵니다.
유금필 어떠냐...? 기가 막힌 밤이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좋은 밤이다. 아주 아름다운 밤이다. 하하하...
족장 예, 장군 어찌할깝쇼? 더 쫓으라 하오리까, 마오리까?
유금필 쫓다니...? 우리 이 배 몇 척으로 저 대 함대를 어찌 쫓는다는 말이냐? 더 쫓다가는 우리가 당한다. 그냥 보내주어라.
족장 헤헤헤... 알겠사옵니다, 장군.
유금필 끝났다. 이 해전은 우리의 완벽한 승리다. 끝났어.
씬 인서트 (그 바다 새벽)
곳곳에 화염에 쌓인 배들이 그렇게 가라앉고 있다. 죽어 가는 백제의 군사들과 불을 끄는 배들과 그리고 빠르게 바다로 도망쳐가는 배들이 어우러져 보인다. 그 아우성 소리들이 계속되어 가며 길게 디졸브된다. 그 위로 함성 소리.
씬 다시 유금필의 해안
함성소리가 진동을 하고 있다. 많은 족장 추장들과 싸웠던 어부, 백성들이 다 모여 있다. 유금필이 손을 흔들고 있다.
유금필 잘들 싸웠다. 역시 너희들은 용감하고 잘 싸웠다. 이 유금필이는 참으로 너희들에게 감사한다.
모두들 (와- 계속 함성) ......
유금필 너희들은 나를 대 추장이라 부른다. 그리고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렇다면 너희는 알아야 한다. 나는 고려의 신하이고 황제 폐하의 신하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고려에 충성한다. 너희도 그리 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모두들 예, 장군.
유금필 대 승리를 거두었으니 마땅히 잔치를 열고 너희를 크게 포상해야 할 것이나, 나는 죄인으로 이곳에 왔다. 전투가 끝났으니 다시 죄인의 신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오늘의 승리를 즐기라. 먹고 마시고 춤추며 이 승리를 기념하라.
모두들 (와- 함성) 만세... 유금필 장군, 만세... 우리 대 추장 만세.... 만세.. 만세...
들끓는다. 만세소리가 진동하고 있다. 유금필은 또 난처해진다. 그들은 손짓을 해가며 그들을 만류한다.
유금필 아아, 그만들 두지 못하겠느냐? 참으로 너희는 어쩔 수 없는 족속들이다. 그러니까 오랑캐 소리를 듣는 것이야. 만세라는 것은 만년 동안 잘 살라는 뜻이다. 황제 폐하만이 받으실 수 있는 영광이라 하지 않았느냐? 이 무식한 놈들아...
족장 장군, 우리는 무식해도 좋사옵니다. 우리는 오로지 대 추장만이 계시옵니다. 대 추장 께서도 만년동안 사셔야 하옵니다. 만세... 유금필 대 추장 만세.. 만세... (계속) 만세....
유금필 어이구, 어이구... 이 미련한 것들하고는....
당황해 하는 유금필의 그런 표정에서...
씬 신검의 배 그 갑판
신검이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다. 옷자락이 탔고 얼굴이 그을렸다. 군사들이 곳곳에 불을 끄고 있다. 배는 빠른 속도로 해안을 스쳐 지나쳐 가고 있다. 어느새 아침이 밝고 있다.
신검 이럴 수가 없다. 이럴 수가 없어. 그 많은 내 배들이 다 어디로 갔는고.......?
양검 일단 불길은 잡혔고 위험 지역은 벗어나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신검 우리 선단이 다 어디 갔는고....? (바다를 본다) 겨우 저것만이 남았다는 말이냐? 이십 척도 아니 되지 않느냐?
최승우와 애술이 다가온다. 저만큼 한 척의 부서진 배가 다가오고 있다. 상귀들의 배다. 그리고 불과 이십 여 척의 배들이 따르고 있다.
신검 이럴 수가 있는가? 이 밤 사이에 다 잃어버렸어. 다...
장수들 ..................
신검 오오, 유금필이... 도대체 유금필이가 어떤 인물이길래... 이 신검이를 이다지도 망신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유금필이가 누구이길래...?
애술 .............. (할 말이 없다)
최승우 (한숨) 역시 그 유금필이라는 장수는 칭찬할 만 하옵니다. 우리는 졌으나 인정할 것은 해야 하옵니다. 이만하기가 다행이옵니다.
신검 다행이라구요...? 이보시오, 파진찬. 지금 다행이라고 하였소이까? 우리는 고려의 수군을 전멸시켰다고 폐하께 보고했소이다. 고려의 송악에 상륙하였고 저들의 황궁을 점령했소이다. 헌데, 이게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하룻밤 사이에 다 엉망이 되어 버렸소이다. 하룻밤 사이에.....
최승우 저들의 전략이 뛰어났사옵니다. 이미 유리한 지역에서 우리를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신검 저토록 대담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십여 척의 작은 쪽배들로 오십 척이 넘는 우리 대 함대를 노리다니. 우리는 졌소이다. 절반이 넘는 군사를 잃었고 함대를 잃었어요.
최승우 고정하시오소서. 완전히 진 것은 아니옵니다. 절반의 군사와 배들이 남아 있사옵니다. 정말로 이만하기가 다행이옵니다.
신검 다행이라....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다행이라...? 이럴 수가 있는가? 지금까지 세운 그 눈부신 전과들이 다 물거품이 되었지 않소이까?
모두들 ............ (한숨)
애술 태자마마, 소장 애술의 잘못이옵니다. 죽여주시오소서. 파진찬 어른의 말을 들어야 했사옵니다. 소장이 그만 지난 날 유금필과의 감정이 격해서 이 전투를 우기다 이렇게 되었나이다. 군령으로 다스려 주시오소서, 태자마마...
신검 (한숨) 아니오. 애술 장군의 죄가 아니오. 군령을 적용하자면 오히려 총사인 나의 잘못이 더 크오. 정말 운이 따르지 않는구려. 이 신검이에게 운이 따르지 않아요. 폐하께서 돌아가면 뭐라 하실꼬...?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견훤이 등을 긁어가며 거푸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능환, 능애, 영순, 금강, 박영규들이 함께 해 있다. 장계를 보다가 내려 놓는다.
견훤 아아.. 이런 보고를 계속해 받아 보았으면 좋겠네. 지난번에는 고려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상륙 중이라는 장계가 왔었는데, 지금 이 내용은 고려의 황궁을 그야말로 쑥밭으로 만들었다지 않는가?
박영규 계속해 들어오는 승전보이옵니다. 일찍이 이처럼 호쾌한 소식들을 들어본 예가 없는 것 같사옵니다.
능환 폐하의 복이시옵니다. 폐하의 맏아드님께오서 우리 가장 큰 적국인 고려의 황궁을 점령했사옵니다. 고려의 황궁이옵니다, 폐하.
견훤 그래, 고려의 황궁일세. 고려의 황궁이야. 왕건 아우가 살고 있는 그 고려의 황궁이란 말이야. 그래서 나도 이렇게 가슴이 설레고 있다네. 내가 거기에 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내가 말이야.
능애 곧 그런 날이 오지 않겠사옵니까? 삼한을 통일하는 날 말이옵니다, 폐하.
견훤 그래, 맞아. 우리가 지금 왜 이렇게 혼신을 다하여 싸우고 있는가? 그것은 통일 때문이야. 누가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인가 하는 통일 말이야. 아니들 그런가?
모두들 그러하옵니다, 폐하.
견훤 그래, 그런 날이 올 것이야. 와야지. 내가 백마를 타고 고려의 황도와 신라의 서라벌로 들어가 만백성의 환호를 받으면서 삼한의 황제로서 추앙받는 그날이 말이야. 와야지, 암, 와야지.. (다시 장계를 들어보다가 도리질) 헌데 유감스럽게도 그 황궁에 왕건 아우가 없었다는구먼. 아쉽게 되었어. 참으로 좋은 기회였는데... 뭐, 그건 할 수 없는 일이고... (다시 계속 보다가) 이건 또 뭔가..? 이 정도면 되었지, 대우도까지는 또 왜 올라간다는 말인가?
영순 대우도라면 저 고려 북방의 끝이 아니옵니까? 평양 근처의 섬인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마는...
견훤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신검이는 꼭 잘 나가다가 끝에 가서 일을 망쳐놓는 일이 종종 있단 말이야. 대우도라...? 대우도라....? 뭔가 또 불안해지기 시작하는구먼 이거...
능환 승승장구하는 군대이옵니다. 고려의 수군이 이미 궤멸되었다는데 무엇을 더 걱정하겠사옵니까? 염려 놓으시오소서.
견훤 뭐 그렇기는 하겠지마는... 아무튼 이보게, 이찬?
능환 예, 폐하.
견훤 이제 우리 다음 목표가 무엇인가를 한번 찾아보게. 비록 고려의 수군은 없앴다 하나 전쟁의 근본은 땅에 있는 것이야. 지난번 고창 일대에서 패배하고 난 이후, 우리 백제는 전반적으로 고려에 밀려있어.
박영규 그러하옵니다. 전 전선이 고려의 기세에 눌려 상당히 남쪽으로 내려와 있사옵니다. 지금은 운주(충남 홍성) 쪽을 기점으로 하여 다시 우리 백제와 고려가 크게 마주하고 있사옵니다.
능애 운주는 길이 사통팔달 되는 그야말로 길목 중에 길목이옵니다. 고려는 이 길을 선점함으로써 신라에 이어 우리 백제를 압박하려는 것이옵니다.
견훤 운주라....? 운주라....? 허면 그리로 가야겠구먼. 이번에는 내가 가야겠어. 금강아...?
금강 예, 아바마마.
견훤 함께 가자꾸나. 신검이가 돌아오는대로 군사를 다시 정비해서 우리도 함께 운주로 가자꾸나.
금강 예, 아바마마.
견훤 모처럼 되찾은 기운이야. 이것을 잃어버리면 아니 되지. 밀어부쳐야지. 그래서 옛 전성시대로 돌아가야지. 그리고 삼한의 주인자리를 찾아야지. 암... 잘했어. 이번 전투는 그야말로 잘했어. 암...
흡족해 하는 견훤을 보며 능환들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씬 고려 황도 외경
씬 동 편전
왕건이 옥좌에 앉아 있다. 문무신료들이 모두 배석해 있다. 모두들 숙연한 가운데 그곳에서도 왕건이 장계를 읽고 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허공을 본다.
왕건 다들 들으시오. 이 장계는 유금필 장군이 곡도에서 보내온 것이오. 죄인의 몸으로 황제의 명도 채 받지 못하고 싸웠으니 그 죄를 또 물어달라고 하는구려.
모두들 ..............?
왕건 죄를 물어달라고 합니다. 허락도 없이 싸웠으니 죄를 물러달라는 것입니다. 유금필 장군은 불과 십여 척의 어선과 섬 백성들을 동원하여 적을 공략했습니다. (사이) 그리고 그 막강한 백제의 수군을 절반이나 부수고 침몰시켰소이다. 백제의 수군이 천여 명이 넘게 물귀신이 되었어요. 믿을 수 있겠소이까?
모두들 .............
왕건 믿을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올시다.
김행선 폐하, 솔직히 이 노신은 꿈을 꾸고 먼 전설을 듣는 듯 하옵니다. 어떻게... 고깃배 몇 척을 가지고 그 막강한 대 함대를 무찌를 수가 있사옵니까? 믿기지 않사옵니다.
복지겸 신 복지겸 아뢰옵니다. 본래 유금필 장군은 장수 중의 장수요, 대 장부 중의 장부였사옵니다. 일찍이 유장군은 북방에서 태어나 그곳 오랑캐들과 야인들을 복종시켰으며 저들에 의하여 대추장으로 불리운 장수이옵니다. 오늘의 승리는 결코 우연이 아니옵니다. 저들이 똘똘 뭉쳐 이루어낸 대 전과이옵니다.
박술희 그러하옵니다, 폐하. 비록 황망 중에 백제의 기습을 받아 황도가 일시 유린되고 우리 수군이 크게 낭패를 보았으나 결국은 유금필 장군이 유배의 몸으로 그 빚을 갚았나이다. 유장군을 크게 상주시고 위로하여 주시오소서.
왕건 죄인이 되어 짐의 허락도 없이 싸웠어. 그 스스로 그것이 죄인 줄 알고 청하는데 상을 주라..? 어찌들 생각하오?
홍유 페하, 신 홍유 아뢰옵니다. 아무리 죄인이라 하나 그 스스로 나라의 어려움을 알고 외적을 막았사옵니다. 어찌 벌을 내리신다 하시옵니까? 마땅히 불러 위로하시고 상금을 내리심이 가한 줄로 아옵니다.
배현경 그러하옵니다. 유금필 장군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사옵니다. 불러올리시오소서.
왕식렴 신료들의 말이 모두 이와 같사옵니다. 신은 한때 무지한 야인들이 유금필 장군을 너무도 떠받들며 결례를 하기로 이를 지적한 바 있사옵니다. 하오나 오늘 다시 유금필 장군이 나라를 위하여 어찌 충성하고 있는가를 확인하였사옵니다. 그를 용서하시고 위로하시오소서.
모두들 그리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용서하라.....? 용서하라.......?
그렇게 신료들을 보는 왕건의 표정에서...
씬 동 황후전
두 황후가 모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상궁들도 함께 해 있다.
오씨 들었는가, 아우님? 유금필 장군 소식 말일세.
유씨 예, 황후마마. 믿기지 않는 전무후무한 전공을 세웠다 들었사옵니다. 고깃배 열 척으로 저 엄청난 백제의 수군을 절반이나 부수었다 들었사옵니다.
오씨 그러길래 처음부터 우리가 뭐라고 하였는가? 그 죄도 없는 만고의 충신을 폐하께서 서둘러 죄인으로 섬으로 보내셨네.
유씨 그러게 말이옵니다.
오씨 하긴 뭐, 폐하께오서 전 병부령 최응공과 말을 맞추시고 그리 하셨다 하는 이야기도 있네마는...
유씨 신료들도 그런 눈치들을 대충 아는 것 같사옵니다마는...
오씨 그래....?
제조상궁 사실이옵니다, 황후마마. 지금 곡도에서 있었던 그 대 해전 이후로 신료들은 물론 저자에서도 오늘을 대비하여 유금필 장군이 그리로 가 있었다고들 말하고 있사옵니다.
오씨 그래......?
김상궁 예, 황후마마. 모두들 유금필 장군의 이름을 연호하며 온 저자거리가 술렁술렁하옵니다. 이로써 잠시 놀랐던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진정된 듯 하옵니다.
오씨 그래...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적군이 어떻게 이곳 황도를 유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유장군이 그 부끄러움을 감추어주었으니 다행이다. 암, 다행이고 말고.......
씬 동 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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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죄인 유금필을 용서하라....? (사이, 능청스럽게 주변을 보며) 용서하라.....? 그래도 죄인은 죄인이 아닌가? 아니 그런가? 법을 맡은 의형대령은 어찌 생각하오?
추언규 모든 죄는 그 공에 의하여 가감되는 것이 법의 형평이옵니다. 이미 신료들의 뜻이 공이 과보다 크다 하니 용서하시고 불러 올려 쓰시오소서.
왕건 정말 그래도 되겠소이까?
모두들 그리 하시오소서, 폐하.
왕건 고맙소이다. 경들이 모두 그리 청하니 그만 유배를 풀고 오라 하십시다.
모두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왕건 그러나 이 황도가 유린된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이 될 수 없소이다. 예성강과 바다를 책임졌던 장수를 삭탈관직하여 유금필 장군이 있던 곡도로 보내도록 하시오. 거기에 가서 유금필 장군처럼 나라를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라 하시오.
추언규 예, 폐하.
왕건 그리고 이번 일은 잠시 전 병부령 최응이 물러나고 병부가 공석인 상황에서 빚어졌던 일이오. 이제부터 병부는 배현경 장군이 맡도록 하오.
배현경 신이 말이옵니까? 신은 야전이 좋사옵니다마는...
왕건 겸하여 하도록 하시오. 이제 경들도 어느덧 백수가 성성한 노장들이올시다. 그간의 경험을 후학들에게 널리 가르치며 가야 할 것이오.
배현경 예, 폐하. 그리 말씀하시오면 삼가 영을 받들겠사옵니다.
왕건 그리고.... 이보시오, 내봉성령?
왕규 예, 폐하.
왕건 잠시 내봉경으로 보내어 쉬게 한 최응이는 어찌되었소? 어지간하면 얼굴이 보일 터인데 아니 보이질 않소?
최지몽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병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왕건 병이 심해져....?
최지몽 예, 폐하. 아무래도...
왕건 아무래도.....? 뭐가..?
최지몽 의원의 말로는 그리 오래 못 갈 것 같다 하옵니다.
모두들 ................. (놀란다)
왕건 그게 무슨 소리야? 최응의 나이 이제 몇이라고.. 얼마를 못가다니...?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하였다는 것이야?
최지몽 내봉경 최응공 스스로도 그리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왕건 최응이가.....? 최응이가, 그토록 위중하여졌다는 말인가? 최응이가..?
최지몽 예, 폐하.
왕건 이게 무슨 소린고...?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아니 되겠구먼. 가보아야겠어. 노신들은 짐과 함께 가 보십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최응이가 얼마를 못가다니.. 최응이가...?
씬 최응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최응이 죽어가고 있다.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서 참선하듯 생각에 잠겨 있다. 문이 열려 있고 뜰이 보여온다. 마지막 남은 낙엽들이 우수수 쏟아져 흩어지고 있다. 그 뜰 안에 집사가 대령해 있다.
집사 나으리, 탕제를 드실 시간이옵니다.
최응 탕제라.....? 그냥 놓아두어라.
집사 약을 치우라 하시옵니까?
최응 이제 아니 마셔도 되느니라.
집사 나으리...?
최응 햇볕이 아주 따사롭구나. 역시 계절은 어쩔 수가 없어. 이제 곧 눈이 내리고 혹한이 이어지는 겨울이 오겠구나.
집사 .............?
최응 유금필 장군이 곡도에서 백제군을 크게 부수었다, 하였느냐?
집사 예, 나으리. 그 일로 하여 온 황도가 술렁술렁 하옵니다.
최응 그래, 그렇게 되어야지. (사이) 햇볕이 참 좋구나. 그만 물러가거라.
집사 약을 드시오소서, 나으리.
최응 가라 하지 않느냐? 혼자 있고 싶구나. 참, 여기 먹물은 갈아 놓았겠지..?
집사 예, 나으리.
최응 (끄덕이며) 어서 가 보거라.
집사가 마지못해 대답을 하며 눈치를 보며 간다. 적막이다. 그 적막 속에 새 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꿈꾸듯 그는 먼 곳을 본다. 최승우의 소리가 에코우로 들려온다.(화면 없이)
최승우 (소리) 나야 이제 거의 백발이 되어 가는 나이이니 억울할 것이 없지만 고려의 신동은 너무 안타깝소이다. (사이) 올해... 서른 다섯이 되시던가...? (사이) 한참 때인데... 하늘이 그런 걸 보면 참으로 야속할 때가 많아요. 서른 다섯이라... 인생의 황금기인데... 가야하다니..
최응은 힘이 없는 듯 눈을 감고 미소를 짓는다.
최승우 (소리) 누군가 통일을 할 것이고 이 삼한은 결국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히 머리를 싸매고 싸워온 우리의 일은 한낮 기억에서조차 지워질 것이외다. 결국 인생무상, 제행무상이 될 것이오.
소리에 이어서 서서히 최승우의 지난 표정들이 살아났다가 대사와 함께 서서히 지워진다. (178회 중)
최승우 이 최승우가 한때는 신라의 삼최라 하여 천재로 불렸소이다. (사이) 허허허... 그러나 훗날 어디서 어떻게 이 구차한 삶이 끝났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소이다. (사이) 그것이 두렵소이다. 도적의 이름으로 남는 것 말이외다.
갑자기 최응은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허공을 본다.
최응 그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의 끝을 다 보고 있었어.
최응은 천천히 끄덕이고는 조용히 먹에 붓을 찍어 뭔가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최응 (소리) 폐하, 신 최응 마지막 목숨을 다하며 아뢰나이다. 신은 나이 열 넷에 지난 조정에 들어와 지금 서른 다섯에 가니 참으로 오랫동안 분에 넘치는 인생을 살았사옵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삶을 살았기에 보다 일찍 가는 것이 결코 서럽지 않사옵니다.
최응은 그렇게 쓰기를 계속해 나간다. 담담히 미소지으며 생각하다 쓰기를 반복한다. 그 위로 지난날의 면면들이 스쳐간다.
최응 (소리) 폐하를 만나 뵈온 것은 신으로서는 생의 영광이었고 복이었나이다. 지난날의 폐주도 그러하였고 더불어 폐하와 그리고 백제국의 견훤왕은 분명 이 격동의 시대를 주도하는 걸출한 영웅들이시옵니다. 그러나 영웅이 되기에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렵사옵니다. 폐하께서는 폐하의 길을 가셔야 하옵니다. 폐주가 제국을 지키지 못하고 간 것은 그가 영웅이 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절제를 몰랐기 때문이옵니다. 폐하께오서는 지금의 그 인내와 덕을 더욱 크게 하시오소서.
최응은 힘에 겨운듯 마지막 힘을 다 모으고 있다. 그리고 더욱 죽어가며 필사적으로 써내려간다. 그 모습에서...
씬 길 (석양)
왕건일행들이 오고 있다. 복지겸과 박술희, 김행선, 배현경, 홍유, 최지몽들이 내군들과 함께 오고 있다.
왕건 도대체 왜 이리 먼가..? 지난번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왜 이리 길이 먼 것 같은가?
최지몽 예, 폐하. 이제 다와 가옵니다.
왕건 내가 너무 몰랐어. 내가 너무 박정했어. 어찌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단 말인가? 어떻게.......
왕건들은 계속해 가고 있다. 그 초조한 모습 위로 최응의 소리는 계속되어진다.
최응 (소리-계속) 신 최응은 또 삼가 아뢰옵니다. 삼한을 통일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남의 힘을 빌리지 마시오소서. 한번 외세의 힘을 빌리면 그 빚을 갚기가 어렵고 벅차 결국은 노예로 전락될 수 있사옵니다. 삼한을 통일하시는 분은 오로지 폐하가 되실 것이옵니다.
왕건들은 그렇게 어느 골목길을 급히 돌아간다. 최응의 집 가까이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씬 최응의 집 사랑
최응이 더욱 더 힘에 겨워하며 마지막 모든 힘을 모으고 있다.
최응 (소리) 신은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오서는 지난날 폐주 궁예왕이 그랬던 것처럼 저 중원대륙의 대제국을 가슴에 품고 계시옵니다. 그 꿈을 버리지 마시오소서. 그 옛날 우리 선조 고구려가 그러했던 것처럼 저 만리장성을 넘어 드넓은 중원 모두를 폐하의 영토로 하시어 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세우시오소서. 그리하려면 사대주의를 배격하시오소서. 당나라와 오월, 그리고 글안 같은 오랑캐들에게 무릎 꿇지 마시오소서. 옛 발해의 후손들을 후히 대하시고 실패한 그들의 꿈을 되찾으시오소서. 이제 폐하의 세상이 오고 계심이 보이옵니다.
최응의 손이 멈추었다. 안간힘을 쓰던 그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미소가 점차 굳어지며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소리 문을 열어라. 황제폐하께서 납시었다. 어서 문을 열어라
최응은 미소를 짓는다. 밖의 소리는 계속 된다. 그 와중에서 최응이는 그리고 마지막 힘을 모아 다시 써 내려간다. 더듬더듬.. 이제 그 글이 흐려진다. 가득히 미소를 짓는다. 밖의 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소리 무엇 하느냐? 문을 열라고 하지 않느냐? 폐하께서 납시셨느니라.
최응 (계속) 폐하, 신 최응은 편안한 마음으로 이제 폐하의 곁을 떠나옵니다. 여타 드릴 말씀은 또 다른 곳에 일일이 다 적어 놓았사오니 살펴 헤아려주시오소서. 이제 그만...... 떠날..... 때가.... 된 것 같사옵니다. 만년제국의... 위업을.... 이루시오소서, 폐하.
최응이 돌아본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왕건의 목소리가 들린다.
왕건 (소리) 어디 있느냐? 최응이는 어디 있느냐?
최응 폐... 폐하.... 폐하.....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대업을.... 이루시오소서.
최응이는 손을 뻗치며 밖을 본다. 그의 손에서 붓이 떨어진다.
최응 폐, 폐하.... 폐하.......
최응의 모든 동작이 멈추었다. 최응이는 죽었다.
<179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