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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대본

[태조 왕건] 184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7.12.22|조회수3,439 목록 댓글 0

태조 왕건 <제 184회>

등창과 연이은 패전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견훤은 삼한통일의 과업을 후계로 넘기며 결국 금강이를 후계자로 선택한다. 능환과 능애, 신덕 등 조정의 신료들은 후계문제가 점점 신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하고는 모종의 회합을 갖고... 한편, 발해국의 세자 대광현은 고려에 귀부를 해오고 신라의 경순왕 역시 나라를 들어바칠 결심을 굳히는 등 바야흐로 왕건과 고려의 시대가  도래한다. 금강이로 결심을 굳힌 견훤은 신검과 신료들의 반발을 막기위한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이에 파진찬은 신검을 죽이라고 진언하는데...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황궁 뜰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겨울이다. 추운 듯 경계병들 사이로 내관과 궁녀들이 웅크리며 오가고 있다. 저만큼 대전이 보여온다. 그리고 견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견훤    (E) 살살 하거라... 살살 좀 하거라..

 

씬  동 대전

 

        새로 온 전의가 견훤의 등창을 치료하고 있다. 깊은 상처 속에서 고름을 짜내고 있는 것이다.

 

견훤    (비명) 아프구나... 살살 좀 할 수 없느냐? 너무 아프구나...

전의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 고름을 짜내고 깊이 박혀있는 근을 뽑지 못하면 상처는 더욱 더 깊어지옵니다.

견훤    알고 있다. 지난번에 운주에서 죽은 훈겸이라는 의원도 그렇게 말을 했었지.

전의    그러하옵니다.  폐하의 이 등창은 그 정도가 아주 심하옵니다.

견훤    그래, 훈겸이도 그렇게 말했어.

전의    결국은 이 근이 계속해 뿌리를 내려 뼈에 이를 것이고 그리되면 뼈가 상하여 오장육부가 다치게 되옵니다.

견훤    (자조처럼 한숨)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그렇게 말했어... 결국 이 병은 낫기가 어려운 것이고... 그리고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 말이야. 아니 그런가, 의원...?

전의    송구하옵니다. 좋은 말씀을 드릴 수 없음이 참으로 안타깝사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요양을 하시오소서. 모든 노여움이나 몸에 이롭지 않은 화기를 멀리 하시고 조용히 요양하시오소서. 그러면서 병증을 다스리셔야 하옵니다.

견훤    그러니 죽으라는 소리가 아니냐...? 인간이 되어 어떻게 노여움을 내지 않고 끓는 화기를 참으라고 하는 것이냐?

전의    달리 길이 없사옵니다, 폐하.

 

        전의는 치료를 끝내고 옷깃을 여미어 준다. 견훤이 묻는다.

 

견훤    별것 아닌 줄 알았던 작은 부스럼 하나가 이처럼 크게 되었다. 허허허... 그래, 이 종기가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것 같구나. 사람 사는 것이나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나 다 다를 바가 없다. 아주 작은 것 하나를 소홀히 하다가 결국은 목숨도 잃는 것이고 나라도 잃는 것이야. 세상 이치가 그러고 보면 아주 정확한 것이다.. 고생했다. 나가보거라.

전의    예, 폐하.

 

        전의가 뒷걸음질하여 대전을 벗어난다. 한동안 견훤은 화로의 불씨를 보며 한숨을 내쉰다. 생각이 많은 것이다. 밖에서는 운주 때처럼 바람소리가 비명처럼 울부짖고 있다.

 

견훤    (소리)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하였다... 모두들 육십도 되기 전에 세상살이를 끝내는데 나는 십 년이나 더 살았어. 헌데 이룬 것이 없어. (사이) 처음에는 천하를 구하겠다고 나선 길이었어. 그때가 스물 일곱이었던가.....?

 

        견훤이 무주로 입성하여 왕국을 세우던 그 열광 스런 모습들이 들끓는 환호성과 함께 스쳐간다. 그 열광에서....다시 그림이 바뀌며

 

견훤    (소리)그리고 나이 서른 셋에 옛 백제를 복원하고 황제에 올랐어. 그리고 이제 삼한을 통일하여 대업을 이루겠다고 한지 어언 40여 년이야. 40여 년.... (사이) 엄청난 세월이 지나가 버렸어...그 사이에 고려를 세웠던 궁예왕도 가버렸고, 신라도 이제 마지막 숨줄을 몰아쉬고 있고..... 이제는 왕건 아우와 나만이 남았어. 그래, 그러고 보면 왕건 아우도 어느덧 황제에 오른 지 이십여 년이 되어가는구먼...황제자리는 이십 년이라지만 우리는 평생을 싸웠어. 평생을.....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도록 평생을 말이야. 허허허...

 

        바람소리는 더욱 높다. 견훤은 참으로 노인처럼 화로의 불씨를 파헤친다. 그의 그런 생각 속으로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궁예의 모습과 조물성에서의 왕건의 모습과 공산전투에서의 모습과 고창전투의 모습들이 얽혀 지나친다.

 

견훤    (생각하며 웃다가) 어느새 이렇게 세월은 다 가버리고 나는 늙고 쭈그렁텡이가 되어 버렸어. 삼한 통일은 아직도 요원한데 이렇게 늙고 병이 들어버렸어....(사이) 그래, 이제 욕심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어. 어차피 이 나이와 이 몸으로는 통일은 어렵게 되었고..... 결국은 내 자식들 중 누군가가 대신 해야 하는데 ....(사이)....자식들이 누군가가....(하다가) 헌데......자식들 누가... 누가... 신검이...?

 

        견훤은 도리질을 한다. 예성강 전투 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 견훤이 신검에게 약속하던 옥좌의 이야기가 스쳐간다.

 

씬  회상 (174회 마지막 씬)

 

        부자간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견훤    그러고 보면 너는 그런 대로 아직 복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이 엄청난 기회를 갖게 되다니 말이다. 허나 네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신검    예, 아바마마. 이번만은 기필코 해 보이겠나이다. 믿어 주시오소서.

견훤    믿어달라...? 믿어달라...?

신검    ..........

견훤    그래, 아비 자식간인데 믿어야겠지. 오죽하면 네가 이 아비를 죽이려고 들었겠느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말이다.

신검    아바마마.....

견훤    그래, 너에게도 충분한 기회를 주어야지. 다시 주어야지. 하지만 신검아...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이 말이다. 더는 내게 기대하지 말아라. 부족하고 못난 네 자신을 돌아다보아야 할 것이다. 아비를 원망하기 전에 말이다. 이번에 고려왕의 목을 가져와 보거라. 그리하면 내가 너에게 이 옥좌를 넘겨주마. 이 옥좌를 말이다.

신검    아바바마.....

견훤    이 옥좌를 말이다. 옥좌....

 

씬  다시 현실

 

        견훤은 계속해 생각에 잠겨 있다. 그리고 도리질을 한다.

 

견훤    그래, 그때는 신검이도 열심히 했지. 하지만 다 파진찬 그 사람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야. 파진찬이 일부러 기회를 준 것이지. 제 힘이 아니란 말이야. (사이) 이번 운주전투에서 신검이의 본 모습이 다시 나왔어. 제 아비는 죽어 가는데 이놈은 욕심만 앞서서 죽든 살든 그놈의 옥좌 생각뿐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금강이는 그렇지 않았어.

 

        견훤은 금강을 생각한다.

 

씬  회상 (181회 부분)

 

금강    도대체 왜 일찍 만류를 해 드리지 못했다는 말이오?

훈겸    수없이 말씀을 올렸사옵니다. 하오나 폐하께오서는 소인의 입을 막으셨사옵니다. 어찌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금강    허면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시오? 이대로 여기에 몇 날 며칠을 있을 참이오? 아니면 아버님을 황도로 되돌려 모셔야 될 것이 아니오?

훈겸    물론 지금이라도 그리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옵니다, 태자마마.

금강    (안타깝다) 허, 이것 참.... 얼음이 얼기 시작했습니다. 군사들은 겨울 준비가 별로 되어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폐하께오서 환후가 중하시다는 것이 진중에 은연중 다 알려져 있습니다.

최승우  그렇습니다, 태자마마. 이번 전투는 처음부터가 무리였사옵니다.

금강    허면 돌아가시지요. 아직도 늦지는 않았습니다. 전면전을 피하고 훗날을 기약하여 다시 운주로 오면 될 것이 아닙니까?

 

씬  다시 현실

 

        견훤이 고개를 끄덕인다.

 

견훤    그래, 금강이는 역시 사려가 깊었어. 아비가 아픈 것을 먼저 생각하였고 이미 전쟁이 불리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어. 미련하게 밀어 부치는 신검이보다는 얼마나 사고가 깊고 판단이 빠른 아이인가 말이야. 어디 그뿐인가...? 그 아이는 부모가 준 것이라 하여 눈알을 삼켰어. 눈알을....

 

        144회 눈알을 삼키는 금강의 모습이 지나쳐간다. 견훤은 고개를 끄덕인다.

 

견훤    그래, 금강이야. 신검이보다는 금강이야.... 금강이야....

 

        그렇게 점점 더 깊은 생각으로 빠져드는 견훤의 깊은 표정에서....

 

씬  금강의 별궁 외경

 

        금강의 집을 지키는 군사들과 군관들이 오가고 있다.

 

씬  동 안

 

        박영규와 고비, 그리고 금강이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 모두들 표정이 긴장되어 있다.

 

고비    폐하께오서 형제들만을 부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박영규  보위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들었사옵니다마는...

금강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좀 더 들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박영규  허허.. 그리 말씀하셨사옵니까..? 기다리라.... 기다리라....?

고비    그 말씀인 즉은 신검 태자에게 아직 확실한 대답을 해줄 수 없다 그런 말씀이 아니십니까?

박영규  그런 것 같사옵니다, 마마.

고비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성강 전투 때에 폐하께오서 후일에 관하여 약조를 두셨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건이 있었습니다. 신검 태자는 그 조건을 지키지 못하였지요. 그것은 절반의 성공이었습니다. 물론 다 파진찬 그 사람이 도와준 일이었구요.

박영규  (한숨) 그렇사옵니다. 운주 전투 또한 총사로서의 책임이 있다면 있다 할 수 있는 일이옵니다. 어쨌든 패전한 전투이니까요.

금강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오래 갈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후사에 관한 일은 언제까지 그렇게 길게 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곧 무슨 말씀이 계시지 않겠습니까?

고비    어쨌든 폐하의 생각은 금강 태자십니다. 모든 형제에게 다 기다리라 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태자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아니 됩니다. 후계에 관한 일은 적극 나서야 합니다.

금강    그렇게 나설 일이 못되옵니다, 어마마마. 형님들이 계신데 제가 나서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고비    이렇게 약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내 말 잘 들으세요. 만에 하나 보위를 신검 태자에게 빼앗긴다면 태자의 목숨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잘 안되면 죽는 것이에요. 이 어미도 그렇고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보위가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 모자의 목숨이 문제입니다. 우리 목숨 말이에요.

 

        금강은 한숨을 쉰다. 박영규는 끄덕이며 생각이 많다.

 

씬  신검의 처소

 

        신검이 술을 마시고 있다. 양검, 용검 형제가 함께 해 있다. 

 

신검    아버님께서는 병이 아무래도 중하신 것 같다. 아예 전의가 대전 곁에 붙어있다 들었다.

양검    보령이 칠순이시옵니다. 등창이 꼭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사람도 노환이 들 그런 춘추시옵니다.

용검    그건 그러하옵니다, 형님. 노인네들의 병환은 당연한 것이고 또 언제 어찌될 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신검    어찌될 지도 모르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용검    노인네들의 병은 오늘과 내일을 모른다는 뜻이옵니다. 차제에 확실하게 형님의 권리를 찾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신검    허허허.... 권리라...?

양검    우리가 예성강 전투를 떠날 때에 아바마마께서는 후계를 형님께 주겠다고 약조를 하셨사옵니다. 헌데 지금은 기다리라 하시옵니다. 마음이 변하신 것이옵니다.

용검    변하셨다기 보다는 노망이라고 하실 수도 있사옵니다.

신검    허허, 거 망발이 심하구나. 노망이라니...?

용검    그렇지 않고서야 운주에서 돌아오셔서 저렇게 달라지실 수가 있사옵니까?

신검    술들이나 마시자꾸나.

양검    형님께서 속으신 것이옵니다. 아바마마께 속으신 것이옵니다.

신검    거 참... 술이나 마시자는데 그러는구나. 부모 자식간에 무얼 속이고 속일 것이 있다는 말이냐...? 기다려 보자꾸나. 한 나라를 운영하는 옥좌에 관한 문제이다. 아버님께서도 당연히 생각이 많으실 게다. 마시자꾸나... 마시자꾸나...

 

        그렇게 술잔을 드는 신검은 그러나 여유 있는 모습은 아니다.

 

씬  능환의 집 사랑

 

        능환과 영순, 신덕이 모여있다.

 

능환    폐하께오서 신검 태자마마와 그 형제분들을 부르시어 모든 것을 다음으로 미루신다 하셨다 하오이다.

신덕    들었사옵니다. 예삿일이 아니옵니다.

영순    운주 전투 자체가 우리 백제에 큰 타격을 준 전장이었사옵니다. 번번이 싸움도 못해보고 크게 패한 전투였어요. 폐하께오서 아무래도 그 패전의 책임을 신검 태자마마께 미루는 것이 아니신가 모르겠사옵니다.

능환    그럴 리가 있소이까? 그 전투가 패한 것은 실은 폐하의 그 등창 때문이 아닙니까?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신덕    (생각하다가) 생각이 바뀌신 것 같사옵니다. 다시 금강 태자마마에게 뜻이 옮겨가고 계시는 것이에요.

능환    그렇소이다. 이렇게 되면 역시 모든 것은 옛날로 돌아가 버린 꼴이 되었소이다. 신검 태자는 아니라는 것이올시다.

영순    그렇게 보여지옵니다.

신덕    그렇다면 이것은 불길한 징조가 아니옵니까? 

능환    그렇다고 봐야지요. 운주에서 패하고 돌아오신 이래 폐하께오서는 두문불출하고 계십니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계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러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금강 태자마마께 보위를 전한다고 해 버리시면 세상이 다 바뀌어 버릴 수도 있는 일이올시다.

신덕    그렇사옵니다.. 능히 그럴 수도 있는 분이시고 말이옵니다.

능환    어찌한다.....? 뭔가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한다....?    

 

        고민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씬  대전 외경

 

씬  동 대전 안 

 

        견훤이 생각이 많다. 등창이 아프고 몸을 움직이기 불편하다. 인상을 찌푸리며 화로의 불을 헤집는다. 내관이 차를 놓고 나간다.

 

견훤    얘야...

내관    예, 폐하.

견훤    아직도 바깥 날씨가 추운 모양이다. 바람도 많고 말이다.

내관    그러하옵니다, 폐하.

견훤    허면... 여기 따끈한 술이나 한잔 내어올 것이지 차가 다 무어란 말이냐?

내관    전의감에서 대전에는 일체 술을 내지 말라는 전갈이 있어...

견훤    허허.. 그 의원놈이 내 술 마시는 것조차 간섭을 하려드는 모양이로구나. 쯧쯧쯧.... 어서 가서 내어오너라.

내관    예, 폐하.

 

        그렇게 내관이 나가려 하는데 견훤이 생각하다가 다시 부른다.

 

견훤    그리고... 얘야..? 별감부에 일러 거 파진찬 좀 들라고 이르라. 운주에서 돌아온 이래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보았구나.

내관    예, 폐하. 

 

        내관이 나가고 견훤은 방안을 서성인다. 그리고 한참 생각하다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견훤    (소리) 그래... 이제 뭔가 정하기는 정해야 하는데... 만약에 금강이로 한다면.... 신검이가 어찌 나올까...? 신검이가.... 그냥 있을까...? (사이) 아니 제 놈이 그냥 있지 않으면.... 하긴, 하긴... 제 놈도 지금까지 이 자리를 보고 나의 오십이 다 되었겠다..? 하지만 아니지... 사직을 보전하는 일인데 인정으로 줄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 뭔가 결심을 하기는 해야 한다. 하기는 해야 해... (사이) 허면, 금강이로 정하면 신료들은 또 뭐라고 할까...? 신검이를 싸고도는 저 늙은 신료들 말이야. 방법을 찾기는 찾아야 하는데....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방안을 맴돌며 생각에 골몰하는 견훤의 표정에서...

 

씬  황후전

 

        황후 박씨가 이상궁과 함께 있다.

 

박씨    폐하께서 운주에서 돌아오신 이후 두문불출을 하시다가 태자 형제들을 모두 부르셨다....?

이상궁  예, 황후마마.

박씨    그리고 다들 기다리라 하셨다...? 기다리라... 무얼 말인가..?

이상궁  달리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아무래도 후계에 관한 말씀이 아니신가 생각되옵니다.

박씨    지금 신검 태자와 그 아우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고....?

이상궁  예, 마마. 황후마마께오서 태자마마분들의 동정을 알아 보라 하시어 내관을 보냈사온데 그리 전해왔사옵니다.

박씨    마시지 않고들 어찌 견디겠느냐? 황제라는 분이 어제는 이리 말씀하시고 오늘은 저리 말씀하시니... 신료들은 어찌하고 있다더냐..?

이상궁  근래에 조회가 없어 모두들 조용하다 하옵니다.

박씨    그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들을 하는 게야? 이제 한동안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폐하께서 말씀하셨다 들었다. 그렇다면 아직 미루고 있는 국내 문제들을 빨리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언제까지 이렇게들 보고 있을 참이란 말인가? 언제까지.....? 그래, 파진찬 그 사람은 어찌하고 있다고 들었느냐?

이상궁  그 사람 역시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 들었사옵니다.

박씨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한때는 우리 신검 태자를 도와서 크게 공을 세웠던 사람이 아니냐? 이제 다시 금강이 편을 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구나.

이상궁  그러게 말이옵니다. 떠도는 소문으로는 파진찬은 신검 태자마마를 그리 가까이 하지 않는다 하옵니다.

박씨    본래 그랬느니라, 그 사람이... 아무래도 아니 되겠다. 다시 내관을 보내서 우리 태자들을 이 어미가 보자고 한다 전하여라.

이상궁  예, 황후마마.

박씨    내가 직접 대전에 좀 들어가 보아야겠다. 이대로는 아니 되겠어. 무언가 일이 시작되고 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를 않아. 이러다가 무슨 꼴들을 보려고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가자.. 대전으로 가 보자꾸나.

이상궁  하오나 황후마마...

박씨    왜.....?

이상궁  아직 폐하께오서 이렇다 할 영을 내리신 것도 아니옵니다. 몸소 가시어 말씀을 꺼내신다는 것은.....

박씨    그분과 내가 낳은 아드님이실세. 당연히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정해진 자리를 도둑 맞을 수는 없는 일이야. 앞서게.

이상궁  예, 마마..

 

        황후들이 그렇게 나간다. 

 

씬  최승우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최승우가 찻잔을 앞에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긴 침묵 끝에 중얼거린다.

 

최승우  (마음의 소리) 뭔가가 오고 있다... 내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던 일들 말이다... 예상대로 운주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아마도 앞으로 폐하께서는 더 이상 전투에 나가지 못하실 것이다. 어느새 칠십이 아니신가...? 게다가 환후 마저 점점 깊어지신다. (사이) 그렇다면 다음에 하실 일은 무엇인가....? 그 일을 결정하려 하실 것이다. 금강 태자를 보위에 올리시는 일 말이다. 금강 태자라....? 폐하의 마음은 그쪽에 가 계시고 신료들의 마음은 신검 태자에게 가 있고... 이미 부자간의 갈등은 어찌 해결을 볼 도리가 없다. 허허허... 이제 이 늙은 몸뚱이를 어디에 의지해야 좋을까 모르겠구나. 천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어.... 천지가....

 

        그렇게 하늘을 보는 최승우의 표정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집사의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최승우가 귀를 기울인다.

 

별감    (소리) 문을 여시오... 문을 여시오....

집사    (소리) 어디서 오시는 뉘시오...?

별감    (소리) 궁에서 나왔소이다. 폐하의 영을 받들어 왔소이다.

 

씬  그곳 마당

 

        집사와 별감이 마주해 있다.

 

별감    폐하께오서 파진찬 어른을 뫼셔오라 하셨소이다.

집사    알겠소이다. 곧 전해 올리리다.

 

        그때, 이미 최승우가 사랑문을 열고 보고 있다.

 

최승우  폐하께서 찾고 계신다는 말이냐?

별감    그러하옵니다, 파진찬 어른.

최승우  의관을 차리고 나설 것이니 먼저 가거라.

별감    예, 파진찬 어른.

 

        최승우가 사랑문을 닫는다.

 

씬  동 사랑 안

 

        최승우는 생각이 많다. 고개를 끄덕인다.

 

최승우  오고 가는 이치가 어쩌면 이리도 분명할꼬....? 이제 최응이는 죽어버렸지만 고려는 꽃이 개화하듯 봄날을 맞고 있어... 그리고 백제의 운이 상대적으로 다해가고 있구나. 점점 낙조가 드리우고 있어. 어찌해볼 방책이 없구나. 먹이를 찾는 이리떼만 들끓고 조정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오호... 어이할꼬......?     

 

씬  신검의 처소

 

        형제들은 보이지 않고 고민에 잠긴 신검과 능애가 마주 앉아 있다. 아직 신검은 술잔이 그대로 있다.

 

능애    태자마마, 오늘 술을 꽤 드셨다구요...?

신검    예, 숙부님. 아우들과 좀 마셨습니다. 아우들은 방금 전에 돌아갔습니다. 저는 술이 좀 모자라서... 혼자 마시던 참이지요.

능애    이해가 가옵니다.

신검    뭐가 말입니까?

능애    태자마마의 지금 그 심정 말이옵니다. 아무래도 폐하의 이번 말씀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옵니다.

신검    (마시고 잔 주며) 숙부님, 한잔하시겠습니까?

능애    허허, 주시지요. (잔 받아 마시고) 헌데... 이렇게 술로써 달랠 것이 아니라 뭔가 방법을 세워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신검    방법이라니요..? 그런 것이 있다면 숙부님께서 말씀 좀 해주시지요? 공을 세워라 하시면 가서 세웠고 나가서 싸워라 하시면 싸웠고 아버님께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물론 더러 실패도 하였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능애    (속삭이듯) 그렇다고 이렇게 자조나 하면서 술잔만 기울인다는 것은 태자마마답지 못하시옵니다. 한 나라가 오고 가는 일이옵니다.

신검    그래서요. 저를 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능애    대안을 세워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이미 폐하의 뜻은 이상한 쪽으로 향하고 계시는 듯 보이옵니다. 이래서는 아니 되옵니다. 금강 태자가 몇 번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 일과 후계의 자리만은 다른 일이옵니다.

신검    좋은 묘수가 있습니까?

능애    일단 신료들을 동원하여 장계를 올리도록 해야겠사옵니다.

신검    허허.. 장계 가지고 될 일입니까? 어디 아바마마께서 그런 일에 끄떡이나 하시는 분이십니까?

능애    그래도 신료들이 모두 반대한다는 것은 알려드릴 필요가 있사옵니다. 그리고 다음 일은 또 그때 가서 처리를 해야지요.

신검    다음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능애    그러하옵니다. 이렇게 해서 아니 되면 또 다른 방법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점점 확실하고 강한 방법을 말이옵니다.

신검    확실하고 강한 방법.....?

 

씬  대전

 

        박씨와 견훤이 마주해 있다. 부부 사이에 불꽃이 인다.

 

견훤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오시었소..? 표정을 보아하니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구려.

박씨    운주에서 돌아오신 이래로 계속해 환후가 더하신다 들었사옵니다. 좀 어떠시옵니까?

견훤    견딜만 하오이다. 이게 하루 이틀 사이에 쉽게 낫는 것도 아니고... 계속 약도 쓰고 치료를 해 보아야지요.

박씨    보령이 많으신 폐하시옵니다. 매사를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견훤    허허, 고맙소이다. 헌데,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박씨    신첩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폐하께서는 아실 것이옵니다. 우리 신검이 말이옵니다. 어찌하실 요량이시옵니까?

견훤    (표정 바뀌며) 내가 좀 기다리라 하였소이다. 생각해 볼 것이 많아요.

박씨    폐하의 보령은 높으시고 환후는 점점 더해 가시옵니다. 한번 약조를 주셨으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폐하께서 하실 일인 줄로 아옵니다.

견훤    뭐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무슨 약조를 했다는 게요..? 그리고 무얼 지키라는 것이야...?

박씨    신검 태자의 나이가 오십이옵니다. 평생을 폐하께서 하라는 대로 해온 맏이가 아니옵니까? 지금이라도 신료들과 백성들 앞에 뭔가 확실한 언질을 주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견훤    무슨 언질을....? 무슨 언질......?

박씨    예성강 전투를 떠날 때에 하신 말씀 말이옵니다. 신검 태자에게 후계를 물리시겠다는 그 약조 말씀이옵니다. 잊으셨사옵니까? 아니면 노망이라도 드신 것이옵니까?  

견훤    뭐가 어쩌고 어째....?

박씨    후계를 물리신다 해 놓으시고 운주를 다녀오셔서 말씀을 바꾸셨다 들었사옵니다. 도대체 신검 태자가 어디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옵니까? 폐하께서 이리 하시오면 천하가 비웃을 것이옵니다.

견훤    닥치지 못할까.....? 내가 무엇을 바꾸었다는 것인가? 천하가 비웃는다...?

박씨    아니 그렇사옵니까? 언제까지 자식의 가슴에 못만 박으실 것이옵니까? 언제까지 말이옵니까?

견훤    닥치라 하였어.

 

씬  동 대전 밖

 

        최승우가 복도로 들어서다 말고 소리를 듣고 있다.

 

박씨    (소리) 정녕 이러시다가 후회하실 날이 오실 것이옵니다. 아시겠사옵니까?

견훤    (소리) 황후가 감히 황제를 겁박하는 것인가? 그런 것인가...?

최승우  (소리 듣다가 눈을 감는다) ...............

 

        내관이 보다가 아뢴다.

 

내관    폐하, 파진찬 입시옵니다.

 

씬  동 대전 안  

 

        두 노부부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내관의 소리가 들려온다.

 

내관    (소리) 폐하, 파진찬 입시옵니다.

견훤    내 분명히 말을 하오마는 다시는 대전 근처에 얼씬거리지 마오. 아시겠소이까, 황후...?  나도 신검이를 사랑하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였어. 그러나 이것은 인정으로 하는 일이 아니오. 그래서 기다리라 한 것이오. 생각을 해보자고 말이오. 돌아가오. 돌아가.

박씨    기억하시오소서. 폐하께서 자꾸 이리저리 말을 바꾸시고 흔들리시면 분명 후회하시옵니다. 기억하시오소서.... 물러가옵니다.

견훤    저런, 저런........

 

        박씨가 물러간다. 그리고 최승우가 들어서며 박씨에게 예를 올리고 다시 견훤에게 예를 올린다. 견훤이 아픈 듯 등으로 손이 간다.

 

견훤    어구구구.... 의원이 노기를 참으라 하였는데 그만 또 화를 내고 말았어. 허허, 통증이 아주 심하구먼 이거... 앉게.

최승우  예, 폐하.

 

        두 사람이 그렇게 앉는다.

 

씬  복도 길

 

        박씨가 걸어 나오고 있다. 이상궁이 함께 간다.

 

박씨    한심한 일이야... 후회하실 것이고 말고.... 그렇고 말고....... 온 세상천지가 다 신검 태자를 밀고 있는데 웬 고집이 저리 세시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쩌시려고......?

 

씬  동 대전 복도

 

        대전내관이 그렇게 서 있다. 소리들이 들려온다. 

 

견훤    (소리) 아무래도 후사에 관한 일은 더는 미룰 수가 없을 것 같네, 파진찬.

최승우  (소리) 그렇사옵니다. 오히려 늦었사옵니다.

 

씬  다시 동 대전

 

        견훤이 차를 따라주고 있다. 두 사람 함께 조금 마시고 견훤이 한숨을 짓는다.

 

견훤    자네도 보았겠지만 황후까지 나서서 저렇게 난리일세. 신검이를 앉히라는 게야. 하지만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알지 않는가?

최승우  폐하...

견훤    참으로 많은 기회를 신검이에게 주었어. 그러나 그 아이는 제왕의 기질이 없어. 제왕이 무엇인가..? 그만한 합당한 그릇이 있어야 하는 것이야. 사려도 깊어야 하고 국정을 이끌어갈 능력도 있어야 하고 세상을 보는 눈도 있어야 하는 것이야. 신검이가 과연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최승우  신이 그렇다고 말씀을 드려도 폐하께오서는 이미 생각을 굳히셨사옵니다.

견훤    그건 무슨 말인가..?

최승우  이미 결심이 굳어지신 폐하께 어떤 말씀을 드려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옵니다. 금강 태자로 결심을 굳히시지 않으셨사옵니까?

견훤    사실이네.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어. 나를 도와주게. 신료들이라는게 하나같이 똘똘 뭉쳐서 신검이 얘기만 하고 있으니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어.

최승우  어떻게 말이옵니까?

견훤    이 조정에 분란도 없애고 형제들간의 불화도 없애고 평화롭고 조용하게 금강이에게 옥좌를 전할 방법이 없을까...?

최승우  ..................?

견훤    왜 말이 없는가, 이 사람아...? 자네는 오래 전부터 내 심중을 다 알았던 사람이야. 좋은 묘책이 없겠는가?

최승우  방법이라고 한다면 왜 없겠사옵니까마는.....

견훤    있어.........? 허면 말해보게. 어떤 방법인가..?

최승우  아주 간단하고 분명하옵니다. 지금 이 대전 안에 도부수를 부르시오소서.

견훤    (크게 놀라며) 도부수............? 군사들 말인가...?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칼을 든 군사들을 병풍 뒤에 숨기시고 신검 태자마마와 두 형제분을 부르시오소서.

견훤    그래서......?

최승우  들어서시게 되면 불문곡직 목을 베시오소서.

견훤    목을.........? 신검이와 그 아우들의 목을 말인가....?  이 사람아...

최승우  길은 그것밖에 없사옵니다. 태자마마들의 목숨을 거두는 일은 가슴이 아프지만 나라는 구할 수 있사옵니다.

견훤    말도 아니 되는 소리... 아무리 그렇다고 애비가 되어서 자식들의 목까지 취하라는 말인가..?

최승우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그저 그런 상태로 금강 태자마마께 보위를 전하신다면 나라에 변란이 우려되옵니다. 그리되면 나라도 잃고 자제분들 또한 다 잃사옵니다.

견훤    그만 두게.... 그만 두게.

최승우  다시 말씀드리옵니다. 죽이시오소서.

견훤    .....................?

최승우  죽이시오소서.

견훤    .............?

최승우  차마 그 일을 하지 못하신다면....

견훤    못한다면...?

최승우  빠른 시일 안에 형제분들을 아주 멀리 보내시오소서. 아주 멀리 말이옵니다.

견훤    오.... (비로소 끄덕인다) 오.... 그 일이라면야.... 생각해 볼 수 있네마는...  (긴 한숨) 어쩌자고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해결하지 못했는가 모르겠네. 그러고 보면 역시 고려의 왕건 아우가 참으로 현명하이. 아주 일찌감치 그 후계를 정해놓지 않았는가 말이야. 어찌한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한다...?

 

씬  고려 황궁 외경

 

씬  동 편전

 

        왕건이 정윤 무, 김행선, 복지겸, 추언규, 왕규, 왕식렴, 유금필, 박술희, 홍유, 배현경, 왕충, 염상, 윤신달, 박수문 형제들과 황후 오씨, 유씨, 제조상궁, 김상궁, 많은 문무신료들과 함께 발해 세자 대광현을 맞고 있다. 대광현이 막 절을 끝내고 있다. 그와 함께 온 장수들이 끝도 없이 도열해 있다.

 

대광현  폐하, 신 발해국 세자 대광현 알현이옵니다.

왕건    오, 어서오라. 짐은 이미 그대가 지난해에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었노라. 잘 와 주었도다. 오늘 이렇게 많은 신료들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짐을 찾아오니 어찌 반가운 일이 아니랴.

대광현  망극하옵니다, 폐하.

왕건    발해국과 고려는 그 조상이 같고 뿌리가 같으며 한 형제이니라. 저 극악무도한 거란의 아율라보기가 형제의 나라를 무너뜨린 일을 짐은 늘 가슴 아파 했었노라. 허나 이제 안심하라. 어찌 짐이 보살펴 주지 않으랴. 경들은 들으오.

신료들  예, 폐하.

왕건    발해국은 중원 일대를 다스렸던 대국이었소이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고려의 뿌리였소이다. 우리는 지날 날을 잊지 말고 삼한을 통일하는 대로 잃어버린 발해의 영토를 되찾아야 할 것이오. 이 점을 분명히 하도록 하오.

신료들  예, 폐하.

해설    발해국의 세자 대광현.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 세운 국가이다. 이미 오래 전에 설명한 대로 발해는 23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로서 해동성국이라 불리었던 대국이었으나, 후에 들어 귀족간의 싸움이 치열해졌고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거란에 의해 서기 925년 불과 보름만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때에 세자 대광현이 무리 수만 명을 이끌고 찾아오니 발해국이 망한 지 무려 십년 만의 일이었다. 왕건은 이때 대광현에게 자신과 같은 왕씨 성을 하사하고 황실 족보에 등록하게 하였으며 그와 그를 따라온 관료들에게도 벼슬과 토지와 저택을 차등 있게 주었다. 이때의 인구는 곧 국력이었다. 대광현이 이끌고 온 수만 명의 무리는 당시의 고려에 그만큼 나라 힘을 더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왕건    더불어 경들은 들으오.

신료들  예, 폐하.

왕건    운주 전투 이래, 이제 나라는 안정되었고 한때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던 우리 수군도 다시 회복되었소이다. 또한 우리의 무역선들이 활발하게 중원일대를 왕래하며 관무역을 활성화시키고 있소이다. 경제가 있어야 나라가 사는 법입니다. 또한, 군사력이 든든해야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법입니다. 시중은 물론이고 전 신료들은 이러한 점들을 명심하도록 하오.

신료들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씬  황도 예성강

 

        왕건이 신료들과 더불어 포구 쪽을 돌아보고 있다. 뭔가 바다를 가리키며 많은 배들을 보고 있다.

 

해설    (계속) 왕건은 운주 전투 이후, 확실한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는 한편으로 백제와 싸우면서도 당나라의 등주에서 무역을 계속 하는 등 나라 살림을 살찌웠고 나라 곳곳을 순행하면서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서경과 북진을 순찰하였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큰 전투가 없는 동안 나라의 인심을 다독거리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신라를 돌보아주니 신라는 이미 그 운신의 폭이 고려에 의지하지 않고는 어렵게 되었다.

 

씬  신라 황궁 외경

 

씬  동 편전

 

        경순왕이 마의 태자와 더불어 신료들과 조회를 열고 있다.

 

경순왕  경들은 들으시오.

모두들  예...

경순왕  고려에는 발해국의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귀부하였다고 하오. 역시 이제는 고려뿐이오. 운주 전투 이후, 백제는 그 싸울 여력을 잃어버렸다고 들었소이다.

신료1   그러하옵니다, 폐하. 더군다나 백제의 왕이 병을 얻어서 실패한 전투라 들었사옵니다. 이제 고려만이 삼한의 유일한 승자가 된 것 같아 보이옵니다.

마의태자        말이 지나치시오. 유일한 승자라니요...? 적어도 우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한 통일을 이룬 국가였소이다. 누가 승자란 말씀이오..?

경순왕  어허, 태자는 어찌 그리 언성을 높이는고....? 현실이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우리가 지금 고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찌 촌각인들 버틸 수 있겠느냐? 그나마 남아있던 삼십여 읍성들 마저도 지난 운주 전투 때 다 고려로 가버렸다. 이제 우리 신라는 국가라고 할 수 없느니라. 고작 이 서라벌뿐이다. 영토라고는 서라벌 뿐이야.

마의태자        하오나 폐하, 우리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옵니다. 비록 지금 형편이 곤궁하오나 언젠가는 피지 않겠사옵니까? 스스로 나라를 비하시키는 말들을 하지 않도록 폐하께오서 엄히 단속해 주시오소서.

경순왕  태자의 말을 모르는 바 아니나, 군사도 없고 영토도 없다. 고려가 도와주지 않으면 당장 지탱할 여력도 없는데 어찌 나라라 할 수 있겠느냐? 이제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니 되느니라.

마의태자        폐하... 백제도 그렇고 고려도 그렇고 저들이 다 누구이옵니까? 폐하의 백성이었사옵니다. 성심을 굳건히 하시오소서. 그리하여 나라를 다시 세울 방도를 찾으시오소서, 폐하.

경순왕  이제 다 틀렸느니라. 그나마 백제라도 있어서 고려와 대등하게 힘을 나눈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제 백제도 저렇게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지 않느냐? 어렵게 되었다.

신료2   그러하옵니다, 폐하. 현실을 부정한다 해서 될 일이 아니옵니다. 이제는 어떻게 국가를 보전할까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남은 백성이나마 더 이상 핍박받지 않도록 할까를 생각해야 할 때인 것으로 아옵니다.

마의태자        닥치지 못할까..? 허면 어쩌자는 것인가? 고려에 항복이라도 하자는 것인가?

경순왕  태자는 조용하지 못할까..? 어찌 눈앞에 다가온 현실을 태자 혼자 모른다고만 하느냐? 이제 이 신라의 운명은 다 되었느니라. 이미 오래 전에 끝이 난 것이야.

마의태자        폐하, 통촉하시오소서. 아직 신라는 일어설 수 있사옵니다. 통촉하시오소서, 폐하... 고려와 백제가 싸우는 틈을 노려 다시 일어설 수 있사옵니다. 통촉하시오소서, 폐하...

 

        마의태자는 그렇게 절규하지만 경순왕은 도리질을 하고 있다. 그 표정에서...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견훤이 여전히 생각이 깊다. 최승우의 소리가 에코우로 들려온다.

 

최승우  (소리) 길은 그것밖에 없사옵니다. 태자마마들의 목숨을 거두는 일은 가슴이 아프지만 나라는 구할 수 있사옵니다

 

        견훤은 도리질을 한다.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최승우  (소리)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그저 그런 상태로 금강 태자마마께 보위를 전하신다면 나라에 변란이 우려되옵니다. 그리되면 나라도 잃고 자제분들 또한 다 잃사옵니다.

        (사이) 다시 말씀드리옵니다. 죽이시오소서.

견훤    .....................?

최승우  (소리) 죽이시오소서.

견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신검이는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끌 수도 없다. 죽일 수도 없고.... (사이) 그렇다면 보낸다...? 보낸다....? 형제들을 한꺼번에 다 보내면... 저들은 의심을 할 것이다. 어떻게 할까....? 허면 누구부터 보낸다...? 

 

씬  최승우의 집 사랑

 

        최승우가 생각에 잠겨 있다. 사랑문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다.

 

최승우  눈이 오는구먼. 허허허... 내년에 다시 이 눈을 볼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어려울 것이다.... (차 마시며) 이렇게 차를 마시는 여유로움 또한 어려울 것이고... 폐하께서는 결국 신검 태자를 죽이지 못하실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다 끝날 것이다. 결국은...

 

        그렇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최승우의 담담한 표정에서...

 

씬  신검의 처소

 

        신검이 홀로 서성이고 있다. 혼자 긴 한숨을 내리쉬며 방안을 그렇게 오락가락 한다.

 

신검    숙부께서는 신료들을 재촉하여 장계를 올린다 하신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움직이실 아버님이신가..? 아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또 다른 방법을 쓰자 하신다. 또 다른 방법이라...? 또 다른 방법이란 무얼까...? 피...? 그래, 예성강에서였던가..? 파진찬은 거듭 묻는 나의 질문에도 답이 없었지. 그리고 말했지. 피 냄새가 나지 않고 옥좌에 오를 수만 있다면 최상의 길이라고.... 파진찬은 이미 그때 알고 있었다. 피라...? 피라.......?

 

씬  능환의 집 사랑

 

        신료들이 모여있다. 능환과 능애, 영순, 신덕들이다.

 

능애    위기가 분명하오이다. 폐하께오서는 모종의 결심을 이미 세우신 것이오이다. 파진찬이 대전을 다녀갔다고 합니다.

능환    들었습니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뭔가 최종 의견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영순    최종의견이라니요...?

신덕    소장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잘못되는 일은 막아야 하옵니다.

능애    이 사람은 신검 태자마마께 우리 신료들이 장계를 한번 올리겠다 하였소이다. 그래도 아니 될 때면 또 다른 방법을 써보자고 했었지요.

능환    또 다른 방법이라니요...?

영순    그건 무엇이옵니까?

능애    힘이지요. 결국은 힘으로라도 잘못된 일을 막을 수 밖에요.

신덕    힘이라면.... 변란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능애    변란이 아니라 혁명이지요.

모두들  혁명..........?

능애    조치를 지켜보십시다. 폐하의 조치를 지켜보면서 다시 의논하도록 하십시다.

 

        모두들 말이 없다. 능애의 눈빛이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다.

 

씬  다시 대전

 

        여전히 견훤은 생각이 많다.

 

견훤    그래, 더 이상 머뭇거릴 수는 없다. 일을 확실하고 빨리 끝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이 일로 왈가왈부해서는 아니 된다. 금강이다. 금강이를 세워야 한다. 그래서 그 아이를 통해 통일의 대업을 보아야 한다. 금강이다. 여봐라, 밖에 게 있느냐...?

대전내관        (소리) 예, 폐하.

 

        대전내관이 들어와 읍하고 선다. 견훤이 한참 보다가 말한다.

 

견훤    별감부에 일러라. 각 조정 대소신료들에게 패를 띄우라 하라. 조회를 열 것이다. 내일 조회를 열 것이니 대소신료들은 빠짐없이 들라 하라. 또한 신검이를 비롯하여 태자들 모두를 다 들라하라. 내일이다. 알겠느냐?

대전내관        예, 폐하.

견훤    그래, 내일이다. 내일이야.....................

                                                                <184회 끝>




첨부파일 태조왕건184.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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