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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그 사나이] 16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0.04.14|조회수1,217 목록 댓글 0

[포도밭 그 사나이] 16

 

 

 

 

 

 

 

 

 

 

S#1. 시골길 (낮)
 
산길을 숨차게 달려 내려가는 택기. 입술은 깨졌지만, 행복하게 웃는 택기. 택기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택  기  (속마음 소리) 이지혀이가 내를 좋아한단 말이제? 이지혀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처럼 기쁜 날은 처음이다! 이지현이 쪼금만 기다려라. 내 금방 가꾸마!
 
 
S#2. 시골집 마당 (낮)

처참하게 맞은 행색으로 달려 들어오는 택기. 지현 방으로 직행해 방문을 열어본다. 아무도 없는지 돌아서면,
 
명  구  그 누나 서울 갔는데?
택  기  뭐? 서울? 은제?
명  구  아까요.
 
놀라서 이내 달려 나가는 택기. 뒤늦게 병달과 영란이 나와서 택기를 내다본다.
 
S#3. 시골길. 달리는 트럭 (낮)
 
급히 차를 몰고 가고 있는 택기.
 
S#4. 기차역, 승강장 (낮)
 
쓸쓸하게 기차에 오르는 지현.
 
S#5. 기차 역사 앞 (낮)
 
끽~ 급하게 와서 멎는 트럭. 트럭에서 뛰어 내려 기차역으로 달려 들어가는 택기.
 
S#6. 동 기차역 승각장 (낮)
 
개찰구를 통과해 승강장으로 달려 들어오는 택기. 하지만 지현을 태운 기차는 이미 떠났고, 기차 꽁무니만 멀어져 간다. 숨찬 표정으로 안타깝게 바라보는 택기. 잠시 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다시 달려 나간다.
 
S#7. 기차길 옆 국도. 달리는 트럭 (낮)
 
택기가 급히 트럭을 몰고 간다. 트럭 차창 너머로 달리는 서울행 기차가 보이고 안타깝게 기차를 바라보며, 가고 있는 택기. 기차와 나란히 달려가는 택기의 트럭.
 
S#8.  동 기차 안 (낮)
 
슬픈 표정으로 무심히 앉아서 가고 있는 지현. 창밖으로 기차와 나란히 달려오는 택기의 트럭이 보이지만, 지현은 보지 못한다. 기차를 향해, 트럭 밖으로 노란 수건 (해바라기 연상)을 흔들면서 운전을 하는 택기. 하지만 지현은 보지 못하고.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 기차를 앞질러 죽 멀어져 가는 택기의 트럭.
 
S#9.  다음 기차역 안 개찰구 (낮)
 
숨차게 뛰어 들어온 택기. 사람들을 밀치고, 표도 안사고 개찰구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승무원  이봐요! 이봐요! (따라 가려다가 다른 승객들 표를 받는다.)
 
S#10.  다음 기차역 승강장 (낮) 
 
승강장에 정차해 있는 기차로 달려가는 택기. 기차로 뛰어 올라간다.
 
S#11.  동 기차 안 (낮)
 
숨차게 뛰어 들어온 택기. 급히 지현을 찾아 사람들을 둘러보며 다음 칸으로 향한다.
 
택  기  (찾으며 중얼중얼) 이지현. 이지혀이. 가시나. 어딨냐.
 
S#12.  동 기차, 다른 칸 (낮)
 
지현을 찾으며 가는 택기.

E. 서울행 기차가 곧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는데,

이때 지현을 발견하는 택기.
 
택  기  이지혀이 여깄네!
 
지현, 택기를 보고 놀라는데, 택기, 지현의 가방부터 챙겨들고, 이내 지현의 손목을 잡아끌고 나간다.
 
택  기  가시나. 니 빨리 나와. 가긴 어델 가? 
지  현  왜 이래요? 놔요!
 
S#13.  동 승강장 (낮)
 
기차에서 지현을 끌고 내리는 택기. 아슬아슬하게 바로 기차는 출발하는데,
 
지  현  왜 이래요? 정말?
택  기  가시나야, 가지마라! 내 니 사랑한다!
 
동시에 지현을 확 끌어안는 택기. 놀라는 지현. 두 사람 뒤로 기차가 빠르게 속력을 내서 지나가고, 기차가 지나가는 시끄러운 소리들 위로 택기의 숨찬 고백이 시작된다.
 
택  기  내 니 사랑한단 말이야! 싸가지고, 사고뭉치에다 양심에 털난 니를 내가 엄청 사랑한다꼬! 니 없인 내 하루도 몬 살 거 같다. 내 가진 거 아무것도 없는데...
 
지현을 안은 채 열정적으로 소리질러대는 택기의 목소리가 기차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기차 사라지면, 두 사람 시골 간이역의 풍경 속에 놓이면서.
 
택  기  (기차음 사라지면서 들리는) 그러니까 내하고 결혼해줘!
지  현  뭐라고요? 하나도 못 들었어요. 방금 뭐라 그랬어요?
택  기  내 니 사랑한다꼬!
 
천천히 서로의 얼굴을 보는 두 사람.
 
지  현  나도 장택기씨 사랑해요!
 
서로를 안으며 뜨겁게 키스한다. 오랫동안 키스하는 두 사람. 이윽고 키스가 끝나자 계면쩍게 얼굴을 돌리는 두 사람. 그러다 택기의 얼굴을 보게 되고 놀라는 지현.
 
지  현  아니, 얼굴이 왜 이래요? 누구하고 싸웠어요?
택  기  (얼굴 피하며) 아니. 싸우긴 누구하고 싸워. 
지  현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싸웠는데?
택  기  아니라면 아니지, 와 자꾸 캐물어?
 
얼른 지현의 손을 슥 잡고 가는 택기. 지현도 택기에게 손을 맡긴 채 어리둥절 따라간다.
 
S#14.  동 기차역 앞 (낮)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두 사람. 발갛게 상기 된 얼굴로 서로를 본다.
 
지  현  (수줍게) 우리 핸드폰 커플 요금제 할래요? 평생?
택  기  친구랑은 커플요금제 안 한다매?
지  현  우리 아직도 친구에요? 댁은 친구랑 키스해요?
택  기  아니.
 
쑥스럽게 지현의 시선을 피하는 택기. 이때 멀리서 택기가 세워 놓은 트럭에 딱지를 붙이고 있는 주차요원의 모습이 보인다.
 
택  기  (놀라서 보고 달려가며) 아니, 보소! 보소!
 
지현도 화들짝 놀라 쫓아가는데, 주차요원은 이미 차를 타고 떠난다.
 
택  기  (차에 붙은 딱지 보며, 지현에게) 니 땜에 주차딱지 끊겼다!
지  현  아니, 왜 트럭을 이런데다 세워놔요?
택  기  그럼 니가 가는데 우짜노? 달리는 기차 잡아타느라 내 죽을 뻔했구먼.
지  현  으이. 정말 내가 미쳐!
 
S#15.  달리는 트럭 안 (낮)
 
차 전면 유리창에 주차딱지는 붙어있고, 택기 싱글벙글 웃으며 운전하고 있고, 지현도 그런 택기를 보며 기분 좋다.
 
지  현  (하지만 내숭)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싱글벙글이에요? 주차딱지는 끊겨 가지고?
택  기  내가 뭐? 은제 싱글거렸다고 그래?
 
택기 무뚝뚝하게 말하지만, 여전히 싱글거린다.
 
지  현  저 봐! 또!
 
말없이 지현의 손을 끌어당겨 꽉 잡는 택기.
 
지  현  어머! 왜 이래요?
택  기  뭘 왜 이래? 우리 커플이라매? 커플은 손도 잡고 그러는 기야!
 
지현도 택기의 손을 맞잡고 히죽 웃는데...
 
지  현  (은근히 걱정되는) 근데 할아버지한테는 뭐라 그러죠?
택  기  (남자답게 큰소리) 걱정 마. 내헌테 맡기!
 
S#16.  시골집 마당 (낮)
 
지현의 가방을 끌고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택기. 그 뒤를 지현이 수줍게 따라 들어선다.
 
명  구  어? 누나다!
 
그 소리에 병달과 영란이 두 사람을 보고는 놀란다.
 
병  달  지현이 니, 기차 놓쳤나?
지  현  아니요.
영  란  뭐 놔두고 갔어?
지  현  아니요.
병  달  그럼 와 다시 왔노? 둘이 어데서 만났나?
지  현  (쑥스러워서 얼굴 못 들고) 아, 네. 저기요. 택기씨가요. (수줍게 택기를 보면)
택  기  (마치 죄라도 지은 듯 고개 더 푹 숙이고) 아, 예. (갑자기 딴소리) 이 가시나가 쌔빠지게 농사 갈켜 놨더니 그냥 도망갔다 아입니꺼. 그래. 지가 기차깐까지 가가 붙잡아 왔십니더. 영감님도 참, 서울 간다꼬 그냥 보내시믄 우짭니꺼? 그동안 농사기술 이전 비용 들어간 거 아깝다 아입니꺼?
지  현  (슥 째려보며) 뭐요? 기술이전 비용이요? 
택  기  (뜨끔하며) 아니, 뭐. (얼른 병달에게) 잘 데꼬 왔지예?
병  달  그래. 잘 데꼬 왔구마.
영  란  (속마음 소리) 포도밭 때문에 다시 왔구만...! (눈 흘기며 부엌으로 가고)
병  달  (지현에게) 우쨌거나 잘 왔다. 내 니를 그래 보내고, 으찌나 서운하고 마음이 무겁던지...
지  현  죄송해요, 할아버지...
병  달  니가 죄송할 게 뭐 있노? 내가 미안치...
택  기  (지현에게 괜히 큰소리) 뭐하노? 빨리 밥 먹고 포도밭 안갈 끼가?
지  현  알았어요...!
 
후다닥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지현. 얼른 가방을 방안에 들여놔주고는, 자기도 몰래 다시 싱글벙글 웃는 택기.
 
병  달  니 뭐가 그래 좋노?
택  기  야?
병  달  지현이가 다시 와가 좋은 기가? 
택  기  어데예? 다른... 좋은 일 있어가 웃었심더. (얼른 자리를 피한다.) 
 
택기를 보고는, 쟤가 왜 저러나? 의아한 병달. 이내 지현방을 보면서는 미소를 짓는다. (어쨌든 지현이 와서 좋은 것.)
 
S#17.  시골집 평상 (낮)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는 지현과 택기, 병달, 영란, 명구. 영란은 지현이 못마땅한데, 택기가 지현 앞으로 고기가 든 접시를 쓱 밀어준다.
 
택  기  고기도 쫌 무라!
지  현  왜 이래요? 괜찮아요... (당황해서 얼른 접시 가운데로 놓으면)
택  기  (다시 접시 지현에게) 영감님은 이가 안 좋아가, 원래 고기 잘 안 드신다. 니 많이 무.
병  달  야가, 내가 와 고길 안 묵노? 내도 고기 잘 묵는다.
명  구  나도 고기 좋아하는데?
택  기  (쑥스러워 고개 돌리고)
병  달  너그 갑자기 엄청 잘해주네? 오는 길에 뭔 일 있었나?
 
지현, 택기 동시에, 아니요? 어데요? 강하게 부정하면,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보는 병달.
 
택  기  (마치 고백할 듯이 쑥스럽게) 아, 저기, 영감님... 사실은 예... 우리가 예...
병  달  (호기심) 응...
지  현  (역시 몸 둘바를 모르며 수줍게 배배 꼬는데)
택  기  농사 파트너다 아입니꺼. 원래 잘 챙겨주고 그래 예.
지  현  (실망해서 택기에게 눈 흘기고는 고개 돌린다.)
영  란  정말 내가 봐도 두 사람 오늘 좀 이상하네? 원래 앙숙이었잖아? 같이 말도 한마디 안하고?
택  기  앙숙예? 은제예? 요전에는 제가 입에 혓바늘이 돋아가 말을 안했던 기지... 원래는 우리 말 잘합니더. 안 글나?
지  현  그럼요. 우리가 얼마나 서로 친한데요... 헤헤...
 
병달과 영란, 명구의 반응 썰렁하고, 뻘쭘해지는 두 사람.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택기.
 
택  기  뭐하노? 밥 다 묵었으면 빨리 밭에 갈 준비 안 하고?
지  현  (덩달아 일어나며) 가야죠, 포도밭...!
 
택기와 지현, 황망히 평상 주변을 빙빙 돌다가 나가면, 이상한 듯 보는 영란과 병달.
 
병  달  야들이 엉덩짝에 종기가 났나... 똥 못 싼 강아지 맨치로 와들 저러노?
영  란  (뭔가 못마땅해서) 그러게요...?
 
S#18.  포도밭 (낮)
 
포도밭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택기. 지현이 그 뒤를 따라 온다.
 
지  현  뭐요? 할아버지한테 사귄다고 다 말씀드린다더니, 농사 파트너요?
택  기  갑자기 그런 말씀 드리믄. 영감님 충격 받으신다 아이가.
지  현  충격은 무슨? 아니, 무슨 남자가 그렇게 용기가 없어요? 사람들 앞에서 딱 얘길 해야 될 거 아이에요? 나 이 사람 사랑합니다. 우리 애인 사이에요. 이렇게.
택  기  그럼 니가 하지, 와 내한테 떠 넘기?
지  현  여자가 그런 얘기를 어떻게 먼저 해요?
택  기  그런 거에 남자, 여자가 어딨어?
지  현  정말 나 사랑하긴 하는 거예요? (토라져서 쏘아보면)
택  기  내가 니를 을매나 사랑하는데?
 
이때 갑자기 지현을 잡아 끌어당기는 택기. 지현과 택기가 가까이 마주 선다. 기분 이상하다.
 
지  현  (기분 묘해지며) 왜 그래요? 갑자기?
 
택기, 말없이 지현을 안으며, 키스할 듯하다. 지현도 눈 감고 서서히 입술 가까이 다가가는데...
 
영  배  (소리) 택기야! 니 여깄나?
 
뒤에서 영배가 나타나자 화들짝 놀라는 두 사람.
 
택  기  (휙 돌아서더니, 버럭 화를 내며) 놀래라? 행님은 인기척 좀 내고 와야지. 사람을 놀래키고 그래?
영  배  (다가오며) 내가 뭐? 왜 그리 놀래? (택기 뒤의 지현보고는) 서울 츠녀, 아직 안 갔아요?
지  현  아. 네.
영  배  (아무리 둔해도 이상한 감 느끼며) 근디 둘이 뭐르 했나?
택  기  (당황해서) 어, 눈에 뭐가 들어갔다 캐서...!
 
지현의 눈을 잡고, 휘휘 부는 척 하는 택기. 지현도 호응한다.
 
지  현  아! 거기요! 거기...
영  배  어디? 눈에 뭐가 들어갔아요? (얼굴 들이대며 다가오자)
택  기  (당황해서) 아! 나왔네! 나왔어!
지  현  진짜! 아, 시원하다! 하, 시원해... (눈 감았다 떴다 쇼하며 멀리 간다.)
 
어리둥절해서 지현을 보는 영배. 와? 무신 일인데? 하며 영배를 얼렁뚱땅 데리고 가는 택기.
 
지  현  (입이 나와, 혼잣말) 아이, 씨... 둘이서 데이트도 맘대로 못하고, 이게 뭐야?
 
S#19.  지현방 (밤)
 
지현과 영란이 이불을 깔고 자려하면, 핸드폰으로 문자가 온다. 잽싸게 받는 지현. 화면에 ‘포도알!’이라고 큼직하게 떠있다.
 
택  기  (E. 은밀하게) 포도알!
지  현  포도알?
택  기  (E) 암호다. 지금 쫌 나와봐라. 저수지에 같이 가자.
 
기분 좋게 핸드폰을 닫은 지현,
 
지  현  (괜히 영란 눈치 보며) 아... 배야... 화장실 좀 가야겠네...?
 
영란, 관심 없이 딴생각하며 쳐다보는데.
 
지  현  (영란에게) 화장실 좀 갔다와도 되죠?
영  란  (별꼴이야) 갔다 와...
 
지현, 괜히 배시시 웃으며 나간다.
 
S#20.  마당 (밤)
 
지현이 나오면, 택기도 나오면서 둘이 포도알! 포도알! 암호 나직이 주고받는다. 두 사람 좋아서 히죽 웃으며 손 붙잡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가려는데, 이때 뒷꼍에서 명구를 데리고 오던 병달과 마주친다. 화들짝 놀라 얼른 떨어져 서는 지현과 택기.
 
병  달  오밤중에 어데 가노?
택  기  아, 네... 포도밭에 일이 밀리가 일하러 갑니더. 
병  달  무신 일? 포도 이제 다 따고 끝물만 남았는데, 나중에 한꺼번에 낮에 따지, 뭐 하러 밤에 나가노?
택  기  아... 예... 낼 낮에 따도 되긴 되겠네예...
지  현  아니요, 실은 제가 수박서리해보고 싶다 그랬더니, 택기씨가 수박서리 하는 거 가리켜 준다 그래서요...
병  달  우리 동네는 수박농사 하는 집 없다 아이가?
지  현  네? 그럼, 참외 서리...
병  달  참외밭 하는 집도 없는데...?
지  현  (실망해서 입 꾹 다무는데) ...
병  달  내 밤 마실 좀 다녀올라 카니까, 명구하고 집이나 잘 보고 있그라.
지  현  네...
 
병달 나가고, 심드렁하게 평상에 나란히 앉는 두 사람. 두 사람 사이에 명구가 끼어 앉는다.
 
지  현  (택기에게 탓하며) 이게 뭐예요?
택  기  내가 뭐? 맹구야, 너 너그 엄마 방에 드가서 자라.
명  구  거긴 누나 자야 되는데? 나 삼촌하고 잘래.
택  기  (난감하다) 저기... 그라모... 알았다. 삼촌하고 자자. (지현에게 나직이) 니 포도밭에 먼저 가 있어. 내 금방 아 재우고 따라 가께.
명  구  나도 포도밭에 같이 갈래.
 
떨떠름한 표정으로 동시에 명구를 보는 지현과 택기. 택기, 명구의 뒤통수를 한대 쥐어박고 싶다. 뒤통수에 들이댔던 주먹으로 얼른 명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 택기.
 
S#21.  포도밭 (밤)
 
지현이 혼자 기다리고 있으면, 택기가 포도알! 포도알! 하면서 올라오고, 지현도 얼른 포도알! 포도알! 암호 외치면서 만난다.
 
택  기  하~! 맹구 근마, 쬐끄만 게 진짜 잠 안 잘라하대... 많이 기다렸나?
지  현  아니요...
택  기  (지현 손 잡으며) 손이 차네. (손 잡아다 호호 불어주는데)
지  현  근데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택  기  (쑥스럽게) 니...? 니가 여기 처음 왔는데... (왠지 먼저 고백하면 손핸 거 같다.) 니는 내 은제부터 좋아했는데?
지  현  먼저 말해봐요.
택  기  싫어. 니가 먼저 말해.
지  현  난 언제부턴지 잘 모르겠어요.
택  기  하긴... 나도.
 
두 사람 자연스럽게 서로를 사랑스럽게 쳐다본다.
 
지  현  그냥 언제부턴가 내 마음에 들어와 있었어요. 당신이...
택  기  내도 그랬어... (지현을 안으며) 이지현이... 내한테 와줘서 정말 고맙다. 고맙다이...고마워...
지  현  나도 고마워요... 당신을 보고 있으면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기도 하고... 그래요...
택  기  내는 니한테 땅 같은 남자가 되고 싶다.
지  현  (팔 풀면서 쳐다보는) 땅 같은 남자요.?
택  기  (자연스럽게 지현의 양손 마주잡고) 응. 니 내하고 결혼해도 디자이너 되고 싶다는 꿈 절대 버리지 마라. 내는 여자가 결혼했다고 남자한테만 꽉 묶여가 사는 거는 싫드라. 내가 훌륭한 포도농사꾼이 되는 꿈을 가지고 살듯이, 니도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는 꿈을 꼭 이뤄. 내가 옆에서 힘닿는데 까지 도와주께. 
지  현  정말이요?
택  기  그래. 내가 니를 땅처럼 단단하게 받쳐줄 테니까네, 니는 내한테 뿌리 내려가, 양분도 빨아 묵고, 예쁜 꽃도 피우고, 맛난 열매도 맺고, 높게 높게 뻗어가 큰 나무가 되라꼬.
지  현  고마워요... 근데 난 택기씨한테 뭘 해주지?
택  기  아무것도 하지 마. (지현을 다시 안으며) 니는 내한테 와 준 것만으로도 내는 고맙다. 기쁘고... 행복하고... 꿈인가 생신가, 믿을 수가 없다. 내가 평생 잘 하께.
지  현  (빙긋이 웃으며 안겨 있다가, 택기 얼굴 보며) 근데 참, 택기씨 매곡리 이장 될 자신 있어요? 난 매곡리 이장댁 되고 싶은데?
택  기  꼭 이장이어야 되나? 작목반 반장은 안 될까?
지  현  안돼요. 난 이장댁이 꿈이란 말이에요. 
택  기  알았다. 내 이장 출마해보께. (갑자기 큰 고민) 근데 이장 될라문 굉장히 어려운데...?
지  현  왜요?
택  기  이장은 인객적으로 하자가 없어야 된다꼬. 행실 발라야지, 마을 어른들께 신뢰도 받아야지... 그 마을에 상징이라 인물도 본다꼬!
지  현  그럼 택기씨가 딱이네?
택  기  그런가?
 
두 사람 활짝 웃으며 서로를 쳐다본다.
 
S#22.  수진 연구실 안 (낮)
 
연구시료를 검사기계에 넣고 돌리는 수진. 창문 밖에서 택기가 창문을 두드린다.
 
수  진  (돌아보고는) 어머, 택기야?
 
택기를 향해 반갑게 걸어가는 수진.
 
S#23.  수진 연구실 복도 (낮)
 
문을 열고 나오는 수진.
 
수  진  (반갑게) 들어오지, 왜?
택  기  아니야. 교수님 뵙고 가는 길에 너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수  진  뭔데?
택  기  (좀 머뭇거리다) 나 연구소로 못 올 거 같애.
수  진  왜? 무슨 일인데?
택  기  (어렵게 말 떼며) 실은... 연구소가 좋아서 올라고 한 게 아이고... 포도밭에서 도망칠라고 했었던 긴데... 이제 도망 안 갈라고. 내 너무 못 됐제...?
수  진  택기야... 그런 이유라면 괜찮아. 나도 교수님도 다 짐작하고 있었어. 상관없어.
택  기  아니야. 저기 내. 이지현이하고 결혼하기로 했다.
수  진  (충격적인) 뭐?
택  기  미안하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도와줬는데... 니한테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군 거 용서해 줘.
수  진  (멍하니 볼 뿐)....
택  기  내가 섭섭하게 한 게 있거든, 원래 그런 놈이려니 그렇게 이해해주라. 미안하다.
수  진  (멍하니 어찌해야 좋을지) 아니야.
택  기  잘 있어라.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택기. 수진 잠시 생각하더니 황망히 악수를 한다.
 
택  기  (손잡은 채) 내는 한번 헤어진 여자하곤 친구 몬 할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 앞으로 친구로 지내자. 내는 니가 잘 살길 바래. 어떻게 사는지도 가끔씩 보고 싶고... 
수  진  (억지 미소) 그래.
택  기  간대이. 나중에 또 보자.
 
그대로 가는 택기.
 
수  진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다급히 부른다.) 택기야!
택  기  (가다가 돌아보며) 어?
수  진  (떨리는 음성) 축하해.
택  기  그래.
 
손을 들어 보이고는 다시 걸어가는 택기. 수진, 택기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서있다. 택기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면, 눈물이 고이며 혼자 미소를 짓는 수진.
 
S#24.  포도밭 일각 (낮)
 
명구의 손을 잡고 걸어 다니며 포도나무에 대해 설명하는 병달.
 
병  달  (대왕나무 가리키며) 이 나무가 여게서 젤로 오래된 할배나문기라...
명  구  알아요. 시조 할아버지 나무.
병  달  알아?
명  구  지현이 누나가 가르쳐 줬어요. 나보고 제2의 장택기랬어요.
병  달  그래? 그럼 또 뭘 배왔노?
명  구  포도잎은 하나, 둘, 셋, 네 번째 가지에서 가지치기를 해요... (생각하며) 적심!
병  달  적심 맞다! 또?
명  구  알솎기를 해야 포도가 달대요. 알솎기는요. 그러다 누나가 울었는데?
병  달  지현이가 울었어?
명  구  네. 나보고요, 나중에 제2의 이지현이 오면 잘해주라 그랬어요. 그러면서 막 울었어요.
병  달  그래? 그기 무신 말이가?
명  구  지현이 누나하고 택기 삼촌하고 사랑하나봐요. 밤에도 나 떼어놓고 둘이서만 맨날맨날 몰래 어디 가요.
병  달  (매우 놀라며) 그래?
 
놀란 병달, 무심코 고개 돌려 포도밭을 보면, 멀리, 연구소에서 돌아온 택기한테 쌀쌀맞게 구는 지현이 보인다.
 
S#25.  동 포도밭 일각 (낮)
 
지  현  아니, 왜 이제 와요? 연구소에서 수진씨하고 뭘 그렇게 할말이 많다구?
택  기  니 삐기나? 오고가고 세 시간, 10분밖에 얘기 안했어. 정말이야.
지  현  오고가고 뭐가 세 시간이에요? 두 시간이지.
택  기  (뒷춤에서 커다란 해바라기 다발로 내밀며) 자, 이거 꺾어오느라 시간 걸렸다.
지  현  어머! 너무 이쁘다. 크고.
택  기  홍이네 해바라기 기름 짤라고 심어논 거 같은데, 아무도 없길래 다 꺾어왔다.
지  현  그래요? 안 꺾어 와도 되는데?
택  기  아이다. 맨날 맨날 꺾어다 주께. 나중에 해바라기 기름 한통 사다 디리지 뭐.
지  현  와! 정말 이쁘다!
택  기  (그런 지현이 사랑스럽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은근히) 지현아, 포도알!
지  현  (괜히 쑥스럽다. 같이 둘러보다 택기 따라가며) 포도알!
 
두 사람 주변을 경계하며 슥 끌어안고 화면 밖으로 사라지면, 멀리 미소를 짓던 병달이, 얼른 명구를 데리고 살금살금 포도밭을 나가는 게 보인다.
 
S#26.  동 포도밭 인근 길가 (낮)
 
명구의 손을 잡고 내려오는 병달. 시종 입이 찢어져라 흐뭇하게 웃는데,
 
명  구  할아버지 왜 웃으세요?
병  달  좋아서 웃는다.
명  구  뭐가 그렇게 좋아요?
병  달  니는 몰라도 된다. (하면서 고개 돌리며 흐뭇하게 웃는데)
 
이때 길 옆 숲속에서 영란과 어떤 남자 (다방에서 만났던)가 소곤대는 모습이 얼핏 보인다. 문득 멈춰서는 병달. 저게 누고? 하며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들여다본다. 명구는 어리벙벙 병달에게 손 잡혀 나무 뒤로 따라가고...
 
S#27.  동 길가 숲속 (낮)
 
영란이 남자와 소리 낮춰 이야기하고 있다.
 
영  란  자꾸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오면 어떡해? 사람들 보면 어쩌려고?
남  자  명구가 보고 싶어서 그렇지. (영란 손 잡으며) 우리 그만 올라가자.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세 식구 먹고 살 수 있게 해볼게. 우리 이러다 죄받아. 멀쩡한 남의 포도밭을 어떻게 가로채니?
 
이때 영란이 인기척 소리에 뒤를 돌아보고,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병달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란다.
 
영  란  어머! 아버님!
 
그제야 나무 뒤에서 몸을 드러내는 병달. 남자도 힐끗 병달을 보았다가 황급히 얼굴 돌리는데...
 
병  달  (남자를 보려하며) 누고?
영  란  (둘러대는) 아 예. 제 친정 오빤데요. 이 근처에 볼 일이 있어 가지고. 오빠 인사드려. 우리 아버님이셔.
남  자  (곤혹스런 얼굴로) 안녕하세요. 저는.
 
이때 병달 뒤에 있던 명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병달의 손을 놓고 남자 쪽으로 반갑게 달려간다.
 
명  구  아빠! 언제 왔어? (좋아라 남자에게 안는데)
 
당황하는 영란과 남자.
 
병  달  아니? 아빠라니? 맹구야, 니 지금 뭐라 캤노? 아빠?
 
명구 당황하는데, 영란 재빨리 명구에게 눈짓한다.
 
명  구  (잠시 눈알 굴리다) 오빠요! 오빠라고 그랬어요, 오빠.
병  달  (더 의아해서) 오빠?
영  란  (재빨리 얼버무리며) 얘는? 오빠는, 엄마가 부를 때가 오빠고, 넌 삼촌이라고 불러야지, 삼촌.
명  구  맞다, 삼촌! (남자를 돌아보며) 삼촌 맞지, 아빠?
병  달  아빠?
 
인상이 구겨지는 영란과 더욱 난감해지는 남자.
 
S#28.  시골집 마당 (낮)
 
병달 마루 끝에 인상 쓰고 앉아 있고, 남자와 영란이 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이때 다정하게 해바라기 다발을 들고 들어서다, 지레 괜히 아닌 척 떨어지는 지현과 택기. 마당의 이상한 풍경에 의아해서 멈춰 서는데...
 
영  란  죄송해요, 아버님.
남  자  죽을죄를 졌습니다, 할아버님!
병  달  (격앙되어 바르르 떨리는) 그럼 맹구가 종만이 애는 확실히 아닌 게냐?
영  란  그게. (차마 말 못하면)
남  자  명구는 제 앱니다. 이 사람하고 결혼해서 낳은 제 자식입니다!
병  달  (자기도 몰래 벌떡 일어나며 버럭) 영란이 니! 니가 내헌테 무신 짓을 할라한 기고? 어이!
영  란  죄송해요, 아버님! 먹고 살길이 하도 막막해서 그만! 이 사람, 직장에서 1년 째 월급이 안 나왔어요. 그래서 저도 식당일 나가고 해봤지만. 보증금도 다 까먹고... 갈 곳이 없어서 그만. 용서해주세요.
병  달  허!

한숨 내쉬고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병달. 문을 쾅 닫아건다. 한쪽에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삐쭉거리고 있는 명구에게로 가는 지현.
 
지  현  명구야... 괜찮아... 괜찮아... (하며 영란을 힐끗 보는데)
 
참지 못하고 눈물 터뜨리고 마는 명구.
 
명  구  내가 잘못했어! 아빠라고 부르면 안 되는데... 엄마. 아빠! (남자에게 달려가 안기며 운다.)
 
쳐다보는 지현과 택기.

남  자  아니다... 어린 너한테 못난 꼴 보인 내가 나쁜 놈이지! 미안하다 명구야!
영  란  (지현에게) 미안해, 조카. 용서해줘. 내가 눈이 멀었지.
 
영란과 남자도 덩달아 울고... 세 사람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한다.
 
S#29.  병달방 안 (낮)
 
밖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힘없이 젓는 병달.
 
병  달  (혼잣말) 이기 무신 일이란 말이고. 이기!
 
S#30.  시골집 마당 (밤)
 
지현방에서 가방을 들고 나오는 영란. 지현과 택기도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본다. 굳게 닫혀있는 병달의 방문을 향해 서는 영란과 명구, 명구부.
 
영  란  (방에 대고)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버님! 안녕히 계세요.
 
하지만 병달의 방문은 요지부동이다. 이내 돌아서는 영란과 명구네. 지현과 택기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나가려는데, 이때 뒤에서 방안의 병달 목소리가 들린다.
 
병  달  (E) 게 잠깐 있어보그라.
돌아서는 영란네. 문이 열리고 병달이 나온다.
 
병  달  (괘씸하지만, 봉투 내밀며) 이거 받아라.
영  란  이게 뭐예요?
병  달  얼마 안 되지만 생활에 보태 쓰거라.
영  란  아니에요, 아버님. 제가 무슨 낯짝으로.
병  달  받으라 카이. (명구를 본다)
 
마지못해 받는 영란.
 
영  란  고맙습니다, 아버님.
병  달  (쪼그리고 앉더니, 명구의 머리 쓰다듬으며) 맹구야.
명  구  네, 할아버지.
병  달  누가 뭐라캐도 니는 내 손주다. 알것나?
명  구  네.
병  달  포도 묵고 싶으믄 은제든지 엄마한테 여 데려다 달라 캐라. 알것제?
명  구  네.
병  달  (일어나 영란에게) 정 살기 어려우면 언제든지 내려 와라. 팍팍한 도시보다는 그래도 여가 좀 안 낫겠나?
영  란  (얼굴 못 들고) 네.
병  달  잘 가그라.
 
다시 한 번 병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나가는 영란과 명구네. 명구네를 돌아보는 지현과 택기. 명구가 돌아볼 때마다 같이 아쉽게 손을 흔드는 지현. 명구네가 멀어지자, 택기와 지현, 말없이 병달의 안색만 살피는데, 멍하니 다른 곳만 보고 서있던 병달, 그대로 방으로 들어간다.
 
S#31.  병달방 안 (밤)
 
넋 놓고 앉아있는 병달. 멍하니 창밖만 내다본다. 처량한 달이 구름에 가리운다. 깊은 한숨을 무겁게 내쉬는 병달.
 
S#32.  시골집 마당 (아침)
 
평상에 아침상을 차리고 있는 지현. 택기도 같이 국을 퍼서 상 위에 놓고. 서로 병달방만 힐끔 보며 말없이 눈치만 살피는 지현과 택기. 수저를 놓고 상을 다 차리고 나자, 지현이 택기에게 가보라고 눈짓하면, 병달의 방 앞으로 가는 택기.
 
택  기  영감님. 아침 드시지예.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의아해하며 지현을 돌아보는 택기. 지현도 문 앞으로 온다.
 
지  현  할아버지 진지 드세요.
 
여전히 대답이 없자 조용히 마루로 올라가는 지현과 택기. 방문을 열어보는 택기와 지현.
등을 보인 채 돌아누워 있는 병달이 보인다.

S#33.  병달방 안 (아침)
 
방안으로 들어오는 지현과 택기.
 
병  달  (돌아보지 않은 채, 힘없이) 입맛이 없구나. 너그덜이나 묵어라.
택  기  그래도 좀 드셔야지예...
 
병달의 어깨에 손을 얹던 택기가 깜짝 놀란다.
 
택  기  (놀라 병달을 똑바로 눕히며) 아니, 영감님! 영감님!
 
병달이 이마에 흥건하게 땀을 흘리고 앓고 있다.
 
S#34.  보건소 응급실 (아침)
 
병달을 업고 뛰어 들어가는 택기. 지현도 놀란 얼굴로 쫓아온다. 황급히 침대에 병달을 눕히는 택기. 병달은 여전히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이때 급하게 들어서는 경민. 택기, 지현과 먼저 눈이 마주치고, 주춤하는 세 사람. 하지만 경민, 말없이 병달에게 오더니, 청진기를 댄다.
 
경  민  어디가 안 좋으세요?
지  현  (급히) 열이 많이 나고요. 오한이 드시나봐요. 음식을 못 넘기세요.
택  기  (애가 타는) 충격을 좀 받으신 거 같은데예. 으떻습니꺼?
 
경민 대답 없이 지시하고, 서간호사와 함께 병달을 돌아 눕히고, 이번에는 병달의 등에 청진기를 대본다.
 
S#35.  동 응급실 (낮)
 
똑 똑 떨어지는 링거액. 병달이 링거를 맞고 잠들어 있고, 병달에게 이불을 덮어주던 택기가 창문 밖을 보면, 창밖으로 멀리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지현과 경민의 모습이 보인다.
 
S#36.  보건소 뒤뜰 벤치 (낮)
 
경  민  다행히 큰 이상은 없으신 거 같애. 지금 막 잠이 드셨으니까. 좀 있다 깨어나시면 괜찮아 지실거야.
지  현  미안해, 오빠. 경황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이리로 모시고 왔네?
경  민  괜찮아. 잘 왔어. 서울 올라간다더니. 안 갔니?
지  현  어.
경  민  (택기 쪽 보며) 저 사람 때문에 안 올라간 거니?
지  현  응. 저기. 장택기씨하고 결혼하게 될 것 같아.
경  민  (믿을 수 없다는 듯) 정말?
지  현  응.
 
잠시 말이 없는 두 사람.
 
경  민  너 정말 후회 없겠니? 지금이라도 나하고 같이 서울 가자.
지  현  (말 끊으며) 오빠!
경  민  (쳐다보면)
지  현  나 오빠 정말 좋아했었어.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오빠의 향수냄새보다 저 사람의 땀 냄새가 푸근하고 좋아지기 시작했어. 왜 그렇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오빠의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야. 물론 저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됐어. 오빠한테 미안해. 하지만 후회는 없어.
경  민  (실망해서, 걱정도 되고) 그래. 정말 행복하니? 저 사람이 좋아?
지  현  응. 나 솔직히 전에는 뭐가 행복인지도 모르면서, 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남자만 찾았어. 그런데 이제는 내가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어. 
경  민  정말 사랑하는구나.
지  현  (말없이 끄덕끄덕)......
경  민  그래. (쓸쓸하게 미소 지어보이면)
 
지현도 경민을 힐끗 보고는 미소 짓는다.
 
경  민  (씁쓸하게) 행복해라.
지  현  오빠도.
경  민  (먼저 일어나며) 참, 장택기씨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주라.
지  현  뭐가?
경  민  그런 게 있어. 그냥 그렇게 전해줘.
 
혼자 씁쓸하게 웃더니 가는 경민. 지현도 일어나 그런 경민을 바라보다 돌아선다. 뭔가 편안해진 모습이다.
 
S#37.  시골집 마루 (다른 날. 낮)
 
지현과 택기가 앉아 있고, 병달이 지현이 앞으로 서류 봉투를 내민다.
 
지  현  뭐예요? 이게?
병  달  포도밭 땅문서다.
지  현  네?
병  달  (택기에게) 내일이라도 당장 지현이 앞으로 등기를 옮기 거래이.
지  현  아니에요, 할아버지. 아직 약속한 일 년도 안 됐잖아요.
병  달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캤다. 니가 받을 만하니까 주는 기야.
지  현  그래도.
병  달  그건 그렇고, 늬 두 사람은 우찌 되는 기가?
지  현  네? 
병  달  언제까지 시치미를 뗄끼가, 이 말이다.
지  현  시치미라뇨? (택기를 힐끗 보면)
병  달  내는 뭐 눈치코치도 없는 늙은인 줄만 아나? 맨날 포도밭이다 저수지다, 남들 눈 피해가 힘들게 연애질만 하지 말고, 이참에 확 결혼을 해야 할 거 아이가?
택  기  (머쓱해서 괜히) 결혼은 무신?
병  달  그럼 결혼 안 할끼가?
택  기  (얼른) 아뇨. 해야죠.
지  현  (덩달아 얼른) 네, 해야죠. 헤헤.
병  달  그럼 날을 잡아라.
지  현  (놀라) 네?
택  기  아직, 지현씨 부모님께 허락도 받아야 하고.
병  달  허락은 무신 허락? 니들이 뭐 한두 살 먹은 어린애가? 부모 허락받고 결혼하게?
 
택기와 지현 벙 찌는데,
 
병  달  (택기, 지현 앞으로 고개 들이밀며) 허락 안 하믄 결혼 안 할끼가?
택  기  아뇨. 그거는 아니죠.
병  달  그럼 지금 당장 허락을 받자. 전화 이리 내봐라.
택  기  예?
 
S#38.  서울 지현집 (낮)
 
저녁을 먹고 있는 지현 가족들. 거실의 전화기가 울리자 지현모가 받는다.
 
지현모  여보세요.
병  달  (E) 내다.
지현모  어머, 숙부님! 웬일이세요?
병  달  (E) 지현이가 결혼을 하겠단다.
지현모  어머? 그래요? 아후, 잘됐네요. 
병  달  (E) 잘됐제?
지현모  그러믄요. 우리가 닥터 김 같은 사위를 어디서 보겠어요?
병  달  (E) 닥타 김이 아니라 택기하고 말이다.
지현모  (놀라)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병  달  (E) 자세한 건 내 모리겠고, 지현하고 택기를 하루 빨리 결혼 씨켜야겠으니, 당장 내리와 봐라. (철컥 전화 끊긴다.)
지현모  (어안이 벙벙해서) 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지현부  (다가와서)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지현모  (정신 희미해지며) 어. 여보!
 
그대로 지현부의 품에 기절해 버리는 지현모.
 
지현부  여보!
지  호  엄마!
 
S#39.  시골집 마당 (밤)
 
평상에 앉아 걱정이 되는 지현과 택기.
 
택  기  (걱정이 태산) 갑자기 일이 너무 빨리 진행되는 거 아이가?
지  현  왜요? 싫어요?
택  기  아니. 영감님이 너무 몰아치신 거 같아가. 내가 서울에 올라가가 정식으로 부모님을 찾아뵙고 허락을 받는 기 도린데...
지  현  아니에요. 차라리 잘 됐죠, 뭐. 우리 둘이 끙끙 앓는 것보단.
택  기  우짜지? 어머님이 내를 별로 안 좋아 하실 낀데...
 
이때 들이닥치는 지현가족들.
 
지현모  아이고, 지현아! 아이고! (그러다 택기와 눈이 마주치자)
 
지현모, 다짜고짜 지현의 손목을 나꿔채서 끌고 가려한다.
 
지현모  너 이리 와! 당장 올라가자!
지  현  엄마, 잠깐만. 이거 놓고 내 말 좀 들어 봐.
지현모  들을 필요 없어. 일루 와.
지현부  여보. 좀 차근차근 얘길 들어보자고.
지현모  (지현부는 무시, 택기에게) 내가 분명히 알아듣게 얘기했죠? 우리 지현이 멀리해 달라고, 얘기 했어요? 안했어요?
택  기  죄송합니더.
지현모  죄송할 짓을 왜 해요? 네? 왜?
지  현  잠깐만. 엄마가 택기씨한테 무슨 말을 했어?
지현모  넌 알 거 없어. (다시 지현 끌고 가며) 당장 올라가자.
 
이때 방안에서 병달이 나온다.
병  달  와 이리 소란들이고?
지현모  아니, 숙부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한집에서 애들끼리 뭔 일이 났으면, 뜯어 말리셔야지, 결혼을 시키다니요? 우리 지현이 당장 데리고 올라가겠습니다.
지  현  엄마. 왜 이래? 나 이 사람 사랑해.
지현모  뭐? 미쳤어? 빨리 못 가?
택  기  (갑자기 지현모 앞에 무릎을 꿇더니) 어머님. 저희 서로 사랑합니다. 결혼해서 잘 살 자신도 있습니다. 허락 해주십시오.
지현모  (기가 차서) 뭐요?
지  현  (얼른 택기 옆에 나란히 무릎 꿇더니) 엄마. 나 이 사람하고 결혼하게 해 줘.
지현모  당장 못 일어나? 땡전 한 푼 없는 농촌 총각이랑 어떻게 살아? 사랑이 밥 맥여주니?
병  달  와 한 푼도 없나? 포도밭이 있는데? 내 포도밭을 지현이하고 택기한테 주기로 했다.
 
놀라는 지현 가족들.
 
지현모  (잠시 생각, 병달에게) 그래도 안돼요. 제가 우리 지현이를 이런 농촌에 시집보내서 고생 시킬라고 금이야 옥이야 키운 줄 아세요? 숙부님께서 포도밭 주신다는 건 결국 우리 지현이한테 평생 농사나 지으란 말씀밖에 더 돼요? 저희 그런 포도밭은 필요 없습니다. (다시 지현 잡아끌며) 당장 가자!
지  현  (택기 붙잡고 버티며) 싫어. 나 택기씨 사랑한단 말이야! 나 이 사람하고 죽어도 못 헤어져! 여기서 농사지을래.
택  기  저도 지현씨하고 못 헤어집니더.
지현모  뭐요?
택  기  제가 의사선생보다는 못한 거 잘 압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지현씨를 아껴줄 자신이 있습니다. 농촌에서 살면서 앞으로 따님 고생 안 시킨다는 장담은 못 디립니다. 하지만 제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위해줄 랍니다.
지  현  엄마! 허락해줘!
지현모  (주저앉아 버린다.) 아이고. 내 팔자야!
지현부  둘이 사랑한다잖아.
지현모  여보! (하면서 택기를 째려보는데)
지현부  나도 세상에 태어나서 큰 성공은 못 해봤지만, 사람 보는 눈은 있어. 택기 이 친구 괜찮아.
병  달  그래. 택기 야는 놓치기 아까운 청년이라. 세상에 이런 아는 없을 끼다. 내가 와 지현이를 농사지으라고 여까지 불렀겠노? 택기 야를 남 주기 아까버가, 우리 집안에 백년손님으로 들이고 싶어가, 농간 좀 부려본 기다. (지현모 앞에 마주 앉으며) 에미야, 니도 이 결혼 승낙하면, 나중에 내 죽은 다음에도 두고두고 내헌테 고마워 할 끼다. 지현이 시집 잘 보냈다꼬. 택기 야는 내가 보증한대이!
지현모  (약간 넘어오는 분위기, 하지만 택기를 원망스럽게 보며) 아이고.
택  기  (지현모 일으키며) 고마 일어나시지예...
 
지현과 택기, 지현모를 같이 일으키는데,
 
지현모  (택기 팔 은근히 뿌리치며) 정말 우리 지현이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어요?
택  기  예. 있심니더.
지현모  (그래도 못마땅한, 고개 저으며) 아이고.
 
이내 지현이 팔도 뿌리치고, 혼자 어기적어기적 지현 방으로 향하는 지현모.
 
지현부  (택기와 지현 사이로 들어와 눈짓하며) 걱정 말게. 저러다 제일 먼저 혼수준비한다고 설칠 사람일세.
 
하지만 지현과 택기는 아직도 걱정스럽고, 그 사이에서 혼자 빙긋이 웃는 지현부. 
 
S#40.  포도밭 원두막 (다른 날. 낮)
 
머리를 맞대고 엎드려 청첩장을 만들고 있는 지현과 택기. 청첩안내 글을 일일이 큼직큼직 한 글씨로 쓰고 있다. ‘포도밭에서 사랑을 키워온 장택기와 이지현이 결혼을 한답니다. 10년 후 매곡리 이장과 이장댁이 될 장택기와 이지현의 결혼식에 오셔서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주세요. 장소는 매곡리 포도밭.’
 
지  현  (손아귀 만지며, 불평) 어휴, 팔이야. 도대체 몇 장을 써야 되는 거야? 이거 컴퓨터로 뽑으면 간단한데.
택  기  다른 것도 아이고 갤혼을 하는데, 컴퓨터로 휙 뽑는 거는 정성이 없어 뷔잖아!
지  현  아후, 난 더 이상 못 써요. 결혼도 하기 전에 팔뚝이 먼저 부러지겠네.
택  기  갤혼은 내 혼자 하나? 어서 써. 니 개우 열다섯 장 밖에 안 썼어?
지  현  알았어요. 쓰면 되잖아요. (눈 흘기며 다시 쓴다.)
택  기  노인분들 보실 거니까, 큼직하니 써야 된다꼬? 대강대강 쓰지 말고 한자 한자 정성껏 써.
지  현  피, 자기는 글씨도 나보다 못쓰면서? 내께 훨 낫다 뭐.
 
이때 원두막 아래에서 달려 올라오는 지현모.
 
지현모  지현아, 여깄니?
지  현  엉! 나 여깄어. 엄마.
 
택기 뻘쭘하게 일어나며 지현모와 눈 마주치면, 아직도 택기가 별로 탐탁치는 않은 기색의 지현모.
 
지현모  (종이 내밀며) 저기. 혼수 뭐 할지, 좀 뽑아봤다. (시골이 못 마땅한) 가구는 서울서 다 맞춰 와야 할까부다.
택  기  아입니더. 지가 목공기술 있어예. 겨울에 농사 한가해지면, 하나씩 만들면 됩니더.
지현모  그래? (아직도 못마땅해서 버럭) 아니, 그래도 자네가 만든 거하고, 우리가 해서 보내는 거하고 같은가?
택  기  그라문. 침대나 하나 사주이소. 그거 하나문 됩니다.
지현모  그래? (지현에게 눈짓하며 옷을 살짝 잡아끌고 내려가면)
지  현  (어리둥절 따라 내려가며) 왜? 엄마?
지현모  (원두막 계단 아래에서, 사정하며) 너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보지 그러니?
지  현  뭘?
지현모  결혼 말이야.
지현부  (계단 뒤에서 나타나며) 이 사람이? 그만 좀 해. 장서방 기분 나쁘겠어.
택  기  (원두막 위에서 고개 내밀며) 아입니다. 기분 안 나쁩니더. (얼른 쏙 들어가고)
지  현  엄마! 결혼 다 허락해놓고 왜 그래?
지현모  나도 속상해서 이러지. 잊어버리다가도. 저 놈, 아니 장서방 얼굴만 보면 다시 속이 상해서.
택  기  (다시 고개 내밀며) 지한테 화 풀리실 때까지, 화 내이소.
지현모  (톡 쏘아대며) 아이, 어떻게 그러나? 사윈데? (가버린다.)
 
웃는 지현과 택기.
 
지현부  저게 저 사람 매력이라네. 평생 봐도 질리지가 않아.
 
S#41.  마을 정자나무 (다른 날. 낮)
 
마을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돌리는 지현과 택기.
 
홍이모  어머, 둘이 결혼을 한다네?
이  장  우리 마을에 경사가 났네요!
박영감  아가씨가 포도농사 지으러 왔다가 택기한테 코 꼈구먼!
택  기  어데예? 지가 코 낀겁니더!
지  현  아니, 이 사람이?
박영감  (지현에게) 그러게 포도가 익어갈 땐 포도밭에 함부로 들어가는 게 아녀.
송할멈  무신 말씀을 그렇게 한대유? 코 끼면 좋쥬, 뭐...
박영감  (송할멈에게) 워뗘? 그라문 우리도 포도밭으로 가까?
송할멈  (화들짝 놀라) 왜 이러신대유? 누가 그 짝하고 들어가고 싶대유? (가버리고)
 
박영감은 떫은 표정. 모두 웃는데,
 
영  배  (박영감 들으라는 듯) 포도밭에 아무나 같이 들어간다구 코가 껴지나요?
명  숙  (배시시 웃으며, 수줍게) 그럼요.
 
S#42.  택기방 (낮)
 
웃통을 벗은 택기가 양 팔을 벌리고 있으면, 줄자로 치수를 재는 지현.
 
택  기  그냥 한 벌 사입으믄 될낀데...
지  현  안돼요. 결혼식 땐 내가 만든 턱시도 입혀주고 싶단 말이야.
 
이내 택기의 가슴둘레를 재는 지현.

지  현  택기씨 가슴둘레가 참 넓네?
택  기  가슴이 넓다는 뜻이지. (갑자기 지현을 안는다.)
지  현  왜 이래요. 어른들 보셔.
택  기  (안은 채) 가만히 쫌 있어봐! 내 너무 행복해서 그래.
지  현  피, 어린애같이!
택  기  진짜 행복하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피식 웃고는 택기을 밀어내고 얼른 다시 치수를 재는 지현.
 
지  현  다리가 좀 짧네?
택  기  내 다리가 뭐가 짧아? 롱 다린데?
지  현  (바쁘게 적고 또 재며) 가만 좀 똑바로 있어 봐요.
 
똑바로 서서 기분이 좋은 택기.
 
S#43.  지현방 안 (밤)
 
지현 재봉틀을 밟으며 재봉질을 하고 있다. 하나하나 완성되어 가는 택기의 턱시도. 옆에 앉아 책을 읽던 택기가 기분 좋게 돌아본다. 그러다 지현의 손을 보고는 책을 덮는 택기.
 
택  기  니 디자이너 손이 다 망가졌네? 굳은살도 베기고?
지  현  디자이너 손이 어딨어요? 누군 뭐 태어날 때부터 농부 손인가?
택  기  줘봐. 핸드크림 발라줄게.
지  현  바빠 죽겠는데, 자기 손에나 듬뿍 발라요.
택  기  잠깐이면 돼. 줘봐. 니 손이 망가지면 내 맘이 쓰리다꼬. (발라주면)
지  현  (손 맡긴 채) 난 내 손이 변해가는 게 좋은데, 택기씨 손 닮아가고 좋잖아요.
 
택기를 보며 빙긋 웃는 지현. 택기, 크림 다 바른 손 아쉽게 놓으면,
 
지  현  빨리 가서 자요. 자기가 이방에 죽치고 있으니까, 엄마가 맘대로 들어오시지도 못하잖아. 
택  기  그런가? 아이, 참. 빨리 같은 방 쓰고 싶다. (괜히 일어나 서성거리면)
 
지현, 피식 웃으며 다시 재봉질 하는데, 택기, 주머니에서 통장들 꺼내 방바닥 위에 슬쩍 놓는다.
 
지  현  이게 뭐예요?
택  기  내 통장이야. 앞으로 살림 니가 맡아야 할 거 아이가?
지  현  그런데 무슨 통장이 이렇게 많아? (하나씩 열어보며) 어머, 언제 이렇게 돈을 모았어요?
택  기  내가 니하고 똑같은 줄 알아?
지  현  이 돈 다 뭐할 거예요?
택  기  써야지. 너를 위해서. 니 패션 공부하는데도 써.
지  현  정말이요?
택  기  그라고, 니 어무이한테 카드빚 350만원 있다매? 그거도 거기서 빼서 갚아드려. 빚은 청산하고 시집을 와야지.
지  현  정말이요? (벌떡 일어나 택기에게 뽀뽀 쪽 하며) 어머, 너무 이뻐!
 
S#44.  시골집 마당 (아침)
 
잔치준비로 마루며 마당이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정장차림의 지현부가 병달의 옷을 만져주고 있고, 지현모와 지호도 한복에 정장 차림으로 잔치에 쓸 떡시루 등을 옮기고 있다. 영배와 명숙이 한쪽에서 삶은 통돼지를 썰고 있고, 이장댁과 홍이모, 마리아가 전을 부치며 즐겁다. 이때 비닐에 쌓인 웨딩드레스를 들고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은영.
 
은  영  웨딩드레스 출두요!
 
사람들 일제히 은영을 돌아보고...
 
S#45.  지현방 안 (아침)
 
거울을 보며, 지현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주고 면사포를 장식하고 있는 은영.
지현은 시종 행복한데, 은영은 한숨을 폭 쉰다.
 
지  현  왜?
은  영  그렇게 좋아? 입가에 웃음이 떠날 줄을 모르네?
지  현  그럼.
은  영  너 솔직히 경민오빠 아깝지 않니? 평생 의사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살 수도 있었잖아. 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한숨을 쉬는데...
지  현  (진지하게 돌아서며) 은영아, 세상엔 말이야. 억만금을 준대도 싫은 사람이 있고, 억만금을 주고도 못 사는 사람이 있대. 장택기 그 사람은 억만금을 줘도 못 사는 사람이야.
은  영  (감동 먹고) 너, 단단히 헤까닥했구나!
지  현  그러니까 결혼하지. 너두 억만금을 주고도 못 사는 그런 남자를 만나.
은  영  알았어.
 
이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지호와 지현모.
지  호  누나! 뭐해? 빨리 나와!
지현모  그래, 늦겠다.
 
지현과 은영, 서둘러 나가려는데,
 
지현모  (문득 아쉬워서, 코믹하게) 지현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다시 생각해보지 그러니...?
지  현  엄마! (톡 쏘고 나가고) 
지현모  그래. 알았다. 얼른 가자. (따라 나가며) 우리 딸 잘 살아야 된다? 행복해야 돼?
 
모두들 바삐 우르르 나간다.
 
S#46.  동 시골집 앞 (낮)
 
턱시도와 양복 차림의 택기와 영배, 이장이 긴장이 되는 듯 모여서 서성이고 있다. 셋 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양복 윗주머니에 꽃을 꽂고 있다.
 
영  배  내가 왜 이렇게 떨리지? 결혼식 사회는 첨 보는데? 택기 너도 떨리나?
택  기  그럼. 떨리지. 결혼 첨 하는데...
이  장  나도 떨려 죽갔아! 주례사 한마디도 못할 거 같은데? 내가 결혼할 때보다 더 떨리네!
지현부  (꽃 꽂으며, 뒤에서 나타나며) 나도 떨리네요. 신부입장 어떻게 하지요?
 
이때 집 안에서 신부를 에워싸고 소란스럽게 우르르 나오는 은영, 지현모, 이장댁, 홍이모, 명숙, 마리아 등 동네 여자들. 
 
은  영  (정신없이 달려 나가며, 애드립) 부케 챙겼어? 부케?
지  현  (달려 나가며, 애드립) 택기씨! 뭐해? 빨리 와!
지현모  (달려 나가며, 지현부를 향해) 뭐해요? 이러다 늦겠어요!
 
면사포 휘날리며 지현과 여자들 우르르 달려가면, 얼른 남자들도 우르르 따라 달려간다. 뭐 떨어뜨리면 줍고, 소란스럽게 우르르 달려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 멀어지면, 그 위로 들려오는 웨딩마치 소리 들려온다. (신랑신부 퇴장할 때 축혼행진곡.)
 
S#47.  저수지 (낮)
 
축혼행진곡 낮게 들려오고, (멀리서 들려오거나, 마을 스피커로 들려오거나) 저수지를 쓸쓸하게 바라보며 모습을 드러내는 경민. 착잡하게 주머니에 손 꽂고 서성거리는데, (양복은 입었으나 결혼식에 못 간 것.) 이때 경민의 뒤로 수진이 나타난다.
 
수  진  (역시 쓸쓸하게) 결혼식에 못 가셨나 봐요?
경  민  (놀라서 돌아보고는 고개 인사하며) 네.
수  진  저두 오긴 왔는데... 못 가겠더라구요.
 
각자 씁쓸하게 미소 짓는 두 사람.
 
수  진  (말없이 저수지를 바라보더니) 멀리서 잠깐 봤는데... 두 사람 참 잘 어울리더라구요.
경  민  네.
 
다시 말없이 저수지만 바라보는 두 사람. 이내 경민이 먼저 돌아선다.
 
경  민  (씁쓸하게) 여기 더 계실 거예요?
수  진  아뇨. 그만 가야죠...
 
같이 멋쩍게 돌아서는 두 사람.
 
경  민  참, 그때 그러구 나서 병 안 나셨어요?
수  진  언제요?
경  민  돼지 잡으러 산에 갔다와서요.
수  진  아, 네. (피식 웃고는) 근데 원래 그렇게 겁이 많으세요? 밤에 산에서 되게 무서워 하시대요?
경  민  제가요?
수  진  네. 전 그렇게 겁 많은 남잔 첨 봤어요. 
경  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 원래 산 잘 타요. 준비성도 없이 이상한 랜턴 갖고 온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수  진  원래 등산은 질색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경  민  내가 언제요?
수  진  내가 그날 분명히 들었는데? 참, 전기구이 통닭은 드셨어요? 산에서 내려와서?
경  민  아뇨. 그럼 김치찌개는 드셨어요?
수  진  아니요. 그럴 정신이 없었어요.
경  민  나두요. 아, 그럼 우리 그거 먹으러 갈래요? 전기구이 통닭에다 김치찌개?
수  진  좋아요. 근데 전기구이 통닭에 김치찌개 파는 집이 있을까요?
경  민  그러게요. 그럼 닭도리탕이나 먹죠. 
 
S#48.  시골집 마당 (낮)
 
폐백상위에 암탉 한 마리가 두리번거리며 앉아 있다.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쓴 지현과 택기가 병달에게 큰 절을 올리고 있다. 상 너머로 지현과 택기에게 대추와 밤을 양 손 가득 던지는 병달. (욕심도 많다)
 
병  달  포도알처럼 아들 딸 주렁주렁 낳고 백년해로 하그라!
 
택기와 지현이 흰 천을 맞잡고 받으려다 우당쿵탕 넘어진다. 그 바람에 상위에 앉아 있던 암탉도 꼬끼오 날아오르고...암탉 잡으랴, 떨어지는 사모관대 고쳐 쓰랴, 바쁜 지현과 택기. 폐백장이 아수라장이 된다.
 
S#49.  동 시골집 마당 일각 (해질녘)
 
택기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거꾸로 매달려 있다. 신부 앞에서 신랑을 거꾸로 매달아 발바닥을 때리는 영배와 이장 등. (가운데 커다란 멍석이 깔려있고, 잔치 분위기다.)
 
택  기  (복창) 내는 도둑놈이다! 너무 집 딸을 훔친 나쁜 놈이다! 내는 이지현을 죽도록 사랑한다!
영  배  목소리가 작다! (방망이로 택기 발바닥 내리치면)
택  기  아구구구! 지현아, 나 죽는다. 
지  현  (달려가 와락 택기의 두발을 끌어안으며) 안돼요! 그만 해요! 이러다 우리 택기씨 죽겠어요!
 
왁자지껄 웃는 동네 사람들. 그제야 거꾸로 매단 택기를 내려주는 남자들. 택기는 때구르르 발을 잡고 구르고. 지현, 택기의 양말을 벗겨 발을 살펴보고, 발 주무르며 호호 불어줘도 되고. (나레이션 시작) 여기저기 돗자리에 마련된 술상에서 음식을 먹으며 흥겨운 사람들의 풍경. 병달과 송여사도 즐겁고, 지현부모와 지호도 기쁘고, 은영은 부럽다. 영배와 명숙, 범수와 희정, 이장과 이장댁, 박영감과 홍이, 홍철네 가족들. 등 동네사람들 모습 하나 둘 보여진다. 어느 덧 손을 잡고 동네사람들을 한팀씩 한팀씩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고 있는 지현과 택기. 위로 지현의 나레이션이 들린다.
 
지  현  (N) 나는 결혼은 생각해본 적도 없고, 농촌남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이 남자를 만났고, 세상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꼭 계획대로 가는 것만이 행복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순박한 마을사람들의 모습 위로)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난 해당화도 몰랐고, 엉겅퀴도 몰랐다. 이름을 몰랐을 땐 그냥 다 풀들이었다. 지금 난 이 시골이 좋다. 이제 개구리가 징그럽지 않고, 왕거미가 무섭지도 않다. 아직도 거머리와는 친해지지 못했지만, 난 문득문득 그들과 자주 마주치는 이곳이 좋다. 트렉터와 말을 하는 사람. 화가 나면 얼굴부터 뻘게지는 사람. 우악스럽게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사람. 난 이 사람이 참 좋다.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서로를 보며 웃는 지현과 택기. (F.O)
 
S#50.  어느 전원주택 안 (낮)
 
(F.I) 자막. 10년 후.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 밝아진다. 창문을 통해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고, 흔들 목마와 아이들 장난감들이 널어져 있다. 장난을 치며 종종종 뛰어다니는 아이 하나, 둘, 셋까지 화면 안에 차례로 보인다. 카메라는 아이들 시선으로 낮게 보여지고, 지현과 택기의 모습은 몸만 보인다.  
 
지  현  얘들아! 포도밭에 가자!
아 이1  (7살. 남. 게임 오락기 챙기며) 싫어. 나 만화영화 볼 거야.
지  현  아빠 힘드신데, 같이 가서 도와드려야지. 빨리 나와라. 
아 이2  (5살. 여.) 응. 포도밭에 가요!
 
아이들 셋 현관으로 달려 나가면,
 
지  현  얘들아! 같이 가야지, 같이! (뒤에 대고) 여보, 빨리 와요!
아이1   (현관에서) 이장님 빨리 오세요!
택  기  나간대이!
 
장난감이 발에 채이자 치워놓고는, 요람 속의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안고 나가는 택기.
현관에서 기다리던 지현과 함께 나간다.
 
택  기  (나가며 뒤에다 대고) 할아버지, 저희 갑니다.
지  현  다녀올게요, 할아버지!
 
거실 창밖으로 재잘거리며 나가는 가족들의 모습이 사라지면, 카메라 탁자 위를 비춘다. 쌓여있는 잡지와 펼쳐진 잡지들이 보인다. <월간 포도> 잡지표지를 장식한 택기의 웃는 얼굴이 보인다. ‘포도박사 장택기씨. 새로운 품종개발. 당도와 맛 월등히 뛰어나.’ 헤드라인 기사도 보인다. 그 옆을 보면 펼쳐진 패션잡지. ‘올해의 디자이너 이지현씨. 남편은 농부 화제.’ 모델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지현이 트로피를 들고 있다. 잡지들 지나, 피아노 위에 놓여있는 가족사진 액자가 보인다. 지현과 택기, 병달, 이이들 셋이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이다. 이때 병달의 손이 불쑥 들어와 액자를 들어낸다. 그 자리에 다른 새 액자를 올려놓는 병달의 손. 새 액자에는 택기가 안고 있는 간난 아기가 한명 더 늘어 있다.
 
병  달  (E. 더 늙은 목소리) 사진 참 잘 나왔구마!
 
S#51.  포도밭 (낮)
 
포도밭 여기저기에 허수아비 애드벌룬이 어지럽게 춤을 추고 있다. (도시에서 볼 수 있는 홍보용 풍선탑. 바람으로 춤추게 하는.) 포도밭 한쪽에서는 바구니 요람 안에서 아기가 자고 있고, 포도밭이랑 사이를 아장아장 걷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지현과 아이1이 잠자리채를 들고 까치를 쫓고 있다.
 
지  현  이 노무 까치 새끼들. 훠이! 훠이! 저리 못가!
아 이1  저기 가란 말이야!
택  기  (수레를 몰고 와 퇴비를 쏟아놓으며) 됐다. 놔둬라. 까치도 같이 먹고 살아야제. 어떻게 우리만 먹나.
지  현  그래도 포도봉지 다 뜯어 놓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택  기  (춤추는 애드벌룬 보며) 저거는 치아뿔자.
지  현  왜요? 그나마 저게 있어서 까치도 쫓고 좋은데?
택  기  니 디자이너 맞나? 미관상 자연경관만 해친다. 도시에서도 저런 거는 다 철거한다 아이가. 까치가 포도를 먹어봐야 을매나 먹겠노? 사람도 먹고, 까치도 먹고, 그란 기제... (퇴비 삽으로 뿌리면)
지  현  알았어요. 아이, 씨... 괜히 또 헛돈만 썼잖아? 기껏 머리 써서 한 건데?
택  기  니가 하는 일이 맨날 그렇지 뭐.
지  현  뭐요?
 
포도밭 위로 맑은 가을 하늘이 청명하게 높고. 그 위로 택기와 지현의 투덜대는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택  기  (E) 어허! 포도알! 포도알!
지  현  (E. 애교 있게) 포도알?
아 이1  (E) 어? 애들아! 엄마, 아빠 또 몰래 뽀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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