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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02 - 인연이 이어지다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5.03.03|조회수1,617 목록 댓글 0

[힐러] 02 - 인연이 이어지다

 

 

 

 

 

 

 

 

 

 

#1. 치수 까페 앞 아침.

 

까페 앞에 메뉴를 적은 작은 칠판이 세워진다. (치수가 세우는)

[모닝 세트 : 아메리카노 + 달걀 + 핫케잌 / 카페라테 + 토스트 ] 등등의 메뉴가 적혀있다.

그 뒤로 보이는 채치수 법률 사무소 간판. 그 옆에는 까페 에버그린. 간판.

 

영신나레 : 아버진 늘 말씀하셨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건 직업으로 삼고. 첫 번째로 좋아하는 건 취미로 간직하는 거야.

 

 

#2. 까페 안

 

라테아트를 하고 있다. 커피 위에 교하게 그림이 그려진다.

치수가 초집중하느라고 혀를 빼물고 만들고 있는 중.

 

영신나레 : 그래서 아버지의 본업은 형사소송 전문 변호사고, 부업은 까페 주인이다. 두 직업에 모두 애프터서비스 정신이 넘쳐나서..

               우리 집 아래층 까페는 예전부터 전과자들이 득시글거렸다.

 

 

#3. 영신의 방

 

영신이 미친 듯이 출근 준비를 하고 있다.

셔츠에 머리를 쑤셔 넣고, 가방을 챙기고, 머리를 빗고 등등의 과정을 거의 동시에 대충 해낸다.

뛰어나가다가 다시 뛰어 들어와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고 다시 뛰어나간다.

영신이 휘몰아치고 난 방. 선반? 위에는 여러 개의 사진 액자가 놓여있는데.

그 중에는 초등학생 정도인 영신이 죽은 양엄마와 치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고,

중학교 졸업식인 듯, 치수와 단 둘이 찍은 사진도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열 살의 영신이 치수와 전과자들 여럿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그 스케치 위로..

 

영신나레 : 아버지의 변호를 받은 형사범 중에는 아버지의 팬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꽤 많다. 이 팬들은 감옥에서 출소한 뒤에도

               우리 아버지를 찾아와서 밥을 얻어먹고. 직업을 구해달라며 눌러 앉고. 그리고.. 내 친구가 되어주곤 했다.

 

 

#4 회상. (영신 8세)

 

여덟 살 정도의 영신이 진지하게 뭔가를 노려보고 있다.

그 앞에는 절도범 출신의 철민이 역시 진지한 얼굴로 뭔가를 하는 중.

옆에는 팔뚝에 문신을 새긴 조폭 출신과, 얼굴에 흉터가 있는 또 한 사내가 진지하게 보는 중.

자막 영신 8세

 

영신나레 : 내 친구들은 나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학교에서는 절대 배우지 못하는 것들 말이다.

 

철민이 들어 보이는 것. 잠긴 자물쇠다. 다른 손을 들어 보이는데 그 손에는 머리핀이 들려있다.

머리핀을 자물쇠 구멍에 넣더니 조물조물 돌린다. 절컥 열리는 자물쇠.

영신,. 완전 감동해서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박수를 친다.

 

 

#5. 회상 (영신 12세)

 

열두 살 정도의 영신이 청진기를 귀에 꼽고 집중해서 듣고 있다. 의사놀이라도 하는가? 싶은데.

자막 영신 12세

청진기의 벨 쪽 부분은 금고에 대어져 있다. 영신은 지금 금고의 문을 여는 중이다.

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레 다이얼을 돌린다. 멈췄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절컥 소리를 내며 금고가 열린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전과자 아저씨들이 끄덕끄덕, 박수를 쳐준다.

 

 

#6. 회상 (영신 중학생) 까페 앞

 

지금과 같은 집인데. 까페의 간판이 그 때는 [상록수 다방] 조금 더 올드하고 촌스러운 느낌의 글씨.

옆에는 [변호사 채치수 법률상담] 간판.

중학생 교복을 입은 영신이 하교해서 오고 있다.

자막 영신 15세.

까페의 유리창을 닦고 있던 철민. 영신을 돌아보고는 환히 웃는다.

영신이 다가와서 철민이 닦던 유리창을 보다가 혀를 찬다.

철민도 다시 유리창을 본다. 어디? 영신이 한 곳을 가리켜보인다. 철민이 이게 뭐.. 해서 그 곳을 더 닦는데.

그렇게 주의를 돌려놓고, 영신이 재빨리 철민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다. 능숙한 소매치기의 솜씨.

영신이 유유히 가던 길을 간다.

문 안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전과자 아저씨들. 영신이 들어서자마자 오예.. 해서 열쇠를 받아들더니 안에서 잠가 버린다.

그제야 눈치 챈 철민이 달려가 문을 열려고 하지만 잠겼다.

안에서는 영신과 아저씨들이 승리의 춤을 춘다. 내기라도 했던 듯.

완전히 열 받은 철민.

 

 

#7. 현재 까페 안

 

아침 장사 준비를 하고 있던 철민이 돌아본다.

(현재 철민은 까페의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예전의 남루한 모습 대신에 앞치마를 깔끔하게 두른 바리스타의 모습)

이층에서 우다다다 뛰어내려오는 영신.

철민이 후다닥 옆에 있던 접시를 들고 뛰어나간다. 마악 나가려는 영신의 앞을 막아서서 토스트를 입에 넣는다.

억지로 한입을 베어 무는 영신. 양손에는 가방과 겉옷을 들고 있는 상태.

 

철민 : 한입만 더. 자.

 

영신이 한입 더 베어 물고 씹느라고 애쓰는데, 다른 한쪽으로 다가온 치수가 커피잔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무늬가 얹혀진 라테.

영신이 그걸 마시려고 고개를 들이대지만 치수가 슬쩍슬쩍 피하며

 

치수 : 어떠냐. 새로운 작품. 제목은 한여름 밤의 꿈.

 

영신이 고개를 더 들이대다가 커피를 마시는데 실패하고는 에이씨.. 목이 메어 꺽꺽대며 그냥 나간다.

치수. 잔을 철민에게 보여주며

 

치수 : 느낌이 오지. 한여름 밤의 꿈.

 

 

#8. 아침 거리 (1부 앤딩과 연결)

 

반짝이는 아침 햇살 속에. 영신이 달리고 있다. 출근 차림. 언제나처럼 등에 멘 큼직한 백팩.

옆으로 타야할 버스가 지나간다. 그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속력을 내어 달린다.

 

 

#9. 버스 내부

 

달려온 영신이 헉헉대며 겨우 올라탄다. 카드를 대고 안으로 들어선다.

버스가 막 출발하려다 다시 멈춘다.

버스에 타는 정후. 야구모를 눌러쓰고 안경을 쓴 모습. 카드를 대고 안으로 들어온다.

거기 영신이 서 있다. 더워서 손부채를 부치는데 덜컹 출발하는 버스.

으앗.. 비틀 넘어지려는 영신을 바로 그 뒤에 멈춰 섰던 정후가 한 손을 뻗어 안아 잡아준다.

영신이 간신이 중심을 잡아 바로 서자, 잡아주었던 정후의 손이 스윽 거두어진다.

영신이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정후는 이미 등을 돌리고 서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마침 저 쪽에 자리가 난다. 영신이 얼른 그 쪽으로 가서 앉는다.

그 옆으로 지나쳐 가는 정후.

영신이 그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정후는 모자 위로 후드를 올려 쓴다.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영신 다시 앞을 본다. 바로 영신의 뒷자리에 앉는 정후.

영신, 고개를 갸웃한다. 뭔가 수상하다. 그 위로..

 

영신나레 : 전직 조폭에 절도범.. 사기범.. 그 친구들에게 또 배운 게 있다면 감이다. 감.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나를 보는 눈이 있다면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도망칠 수 있다.

 

영신, 눈을 감더니 창문에 기댄다. 잠이라도 청하는 듯.

바로 그 뒤에 앉은 정후. 영신의 뒤통수를 보고 있다.

그 정후가 낀 안경. 넓적한 테. 골전도로 전달되는 통신 소리. 정후에게만 들리는 민자의 말.

 

민자소리 : 괜히 두 번 일하지 말고, 확실하게 뽑아와.

 

 

#10. 민자 아지트

 

민자가 제어기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말하는 중.

(뜨개는 아이들 용 옷, 여름이라면 여름용 뜨개실로?)

 

민자 : 저번처럼 모근도 안 붙어있는 머리카락 몇 개. 달랑 들고 오지 말고. 제일 좋은 건 피를 쪼옥 뽑아오거나,

         입을 쩌억 벌려가지고 솜방망이로 긁어오는 건데. ... 그건 아무리 너라도 무리겠지?

 

 

#11. 버스 내부

 

듣기만 하고 있는 정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머리칼이나 뽑을 생각으로 손을 올려 영신의 머리칼에 스윽 대려는데..

갑자기 영신이 창에 기댔던 머리를 바로 하더니. 가방을 뒤적거린다.

뭐지?

영신이 가방에서 구겨진 모자를 하나 꺼내더니 머리에 뒤집어쓴다. 젠장.

 

 

#12. 버스 정류장

 

버스에서 내리는 영신. 들었던 백팩을 한 쪽 어깨에 걸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전화 중.

 

영신 : 지각은 내가 왜 지각이에요. 출근이야 벌써 했죠. 어디긴 어디야. 현장이지. 아니 기자가 현장으로 출근을 해야죠.

         ..부장. 저요. 벌써 이틀째 머리도 못 감았어요. 밤샘 잠복에 피부는 누렇게 뜨고, 다크서클 늘어지고, 머리는 떡이 지고..

         그래도 어뜩해. 이런 내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놈이 거리마다 꼭 하나씩 있네. 하아.. 이 놈의 도화살. (슬쩍 뒤에 신경을 쓴다)

 

영신의 저만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정후. 정후가 낀 선글라스 색의 안경은 영신을 향하고 있다.

 

 

#13. 민자 아지트

 

중앙 모니터에 비치고 있는 영신의 모습. 정후의 안경 시선이다.

 

민자 : 쟤. 니가 따라가는 거 눈치 챈 모양인데.

정후소리 : 기집애가 눈치가 백단이야. 재수 없게. 진짜 뒷골목으로 확 끌고 가서 피 좀 뽑아갈까?

민자 : 가방.

정후소리 : 뭐?

 

 

#14. 거리

 

영신의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가는 정후.

 

민자소리 : 가방 사이즈 보니 세면도구 정도는 들었겠는데. 칫솔이나 머리빗 같은 거, 들고 오면 되겠네.

정후 : (한숨) 가방...

 

정후, 주위를 둘러본다. 행상들이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길이다. 떡볶이 순대 장사도 있고. 그 옆에 과일 장수의 좌판이 있다.

더 앞을 본다. 거기 이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는 남자. 인도 위를 위태롭게 달려오고 있다.

그 자전거의 속도와. 그 쪽을 향해 마주 가는 영신의 뒷모습. 그 둘 간의 거리. 그 옆의 과일자판.

그리고 정후의 앞 쪽 쓰레기통 옆에 떨어져 있는 빈 깡통까지 눈으로 측정해간다.

계산 끝났다. 정후가 슬렁슬렁 걸어가더니 깡통 앞에 선다. 좀 더 기다린다.

자전거가 다가온다. 영신이 걸어간다. 그들의 중간 지점 옆에 과일 자판.

정후가 순간 냅다 깡통을 찬다. 깡통이 정확하게 달려오는 자전거의 바퀴 사이로 날아 들어간다.

깡통에 걸린 자전거가 휘청이며 옆으로 엎어진다. 그 자전거와 자전거 사내가 과일 좌판을 덮치면서 과일이 길바닥에 흩뿌려진다.

바로 옆을 지나던 영신이 그 과일에 미끄러지며 넘어진다. 주위 행인들도 과일이 흩어지자 소란이 일어난다.

그 소란 속을 스윽 끼어드는 정후. 영신의 옆에 팽개쳐졌던 가방을 어느새 주워들고 간다.

영신이 간신이 몸을 일으켜 옆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들고.

과일 주인을 도와 주위에 굴러다니는 과일을 몇 개 집어 들다가 어라.. 둘러본다. 가방이 없다.

놀라 주위를 살핀다. 그러다가 발견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만치 샛길로 돌아 들어가는 정후의 뒷모습.

 

 

#15. 골목길

 

큰 길에서 꺾어져 들어온 샛길. 영신의 가방을 들고 여유 있게 걸어온 정후가 옆의 건물 후문으로 들어간다.

 

 

#16. 건물 남자 화장실

 

정후가 세면기 위에 영신의 가방을 올려놓고 연다. 안에 손을 집어넣고 하나씩 끌어내는데..

맨 처음 집혀 나온 것은 우체국 마크가 찍힌 모자. 그 다음에는 택배원 조끼.

뭐야. 이게 다. 아예 가방을 거꾸로 들어 털어본다.

자료 같은 게 프린트된 종이 뭉치. 시사 주간지. 위장용으로 쓰는 단말기. 취재수첩.

 

정후 : 빗.. 그 딴 거 없는데?

 

필통 같은 게 있어 열어 털어본다. 각종 볼펜과 학생용 카터칼 하나, 손톱깎이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정후 : 뭐야. 이 여자..

 

하는데 들리는 소리.

 

영신소리 : 야. 너. 도둑놈.

 

정후, 돌아보는 대신 거울로 뒤를 살핀다.

영신이 남자 화장실 입구에 서서 보고 있다. 달려온 듯, 숨이 차서 보며

 

영신 : 그거 내 가방 맞지? 그러니까 넌 도둑놈 맞고.

 

정후. 후우.. 귀찮게 됐다.

영신은 휴대폰을 귀에 대더니, 이미 통화중이었던 듯.

 

영신 : 찾았어요. 여기 동신 빌딩. 2층 남자 화장실이요.

 

정후, 후드를 들어 머리에 쓴다.

거울 속의 영신이 재빨리 옆의 대걸레를 주워 들더니 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17. 화장실 문 밖

 

영신, 문을 닫고 손잡이에 대걸레를 끼워 잠근다. 전화.

 

영신 : 내가 가둬놨으니까 얼른 와서 잡아 가요. 근처에 순찰 도는 경찰 없어요? 여기 동신 빌딩이라고요. 네. 이층..

 

하는데 문이 안에서부터 거세게 힘이 가해진다. 어라 해서 보는데.

다시 한번 퍼억. 문고리에 끼워놓은 대걸레 자루가 파직 부러진다.

문이 반쯤 열리는가 싶더니 안에서 나온 정후의 손이 영신을 휘어잡아 끌고 들어간다.

 

 

#18. 화장실 내부

 

비명을 지르며 잡혀 들어간 영신. 역시 비명을 지르며 정후의 정강이를 발로 찬다.

(영신은 폭력에 대해선 느끼는 공포가 정상 이상이다. 지금 공포 때문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다)

방심했던 정후가 아. 아파하며 자칫 영신을 놓칠 뻔 했다.

영신이 문 쪽으로 도망 나가려고 정후를 향해 돌아서는데.

정후가 영신을 잡더니 빙글 돌려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한다.

영신이 뒤로 잡힌 상태에서 얼핏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 뒤에 선 정후의 모습. 후드 아래 검은 선글라스.

순간. 정후가 손을 뻗어 영신의 눈을 가린다. 깜깜하다.

다음 순간. 거울이 박살나는 소리..

영신이 또 비명을 지르며 자기 눈을 가린 정후의 손을 떼 내고 저항하며 빠져나가려 하지만

정후는 간단하게 제압해서 영신을 빙글 돌려 다시 영신의 등 뒤의 자리를 차지한다.

정후가 영신의 팔을 뒤로 꺾어 잡는다. 영신이 아파서 아아.. 소리를 지른다.

정후가 뒤에서부터 영신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속삭이는 소리로.

 

정후 : 조용히.

영신 : 저기요.

정후 : 쉬잇.

영신 : (작은 소리로) 아파요.

 

정후가 꺾었던 영신의 팔을 내려준다.

영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뒷발차기로 다시 정후의 정강이를 공격한다.

슬쩍 그 발을 피한 정후. 영신의 양 손목을 하나씩 잡은 채 영신을 뒤로부터 껴안는다.

영신이 아래를 내려다본다. 자신의 손목을 수갑처럼 단단히 잡고 있는 정후의 손. 용을 써보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정후가 뒤에서 영신을 껴안은 채 한손으로 영신의 두 손목을 한꺼번에 감아쥔다.

그러더니 빈 손을 세면기 위의 카터칼로 뻗는다.

영신. 왈칵 밀려드는 공포.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러나 정후의 손은 그 칼을 치우고 그 옆의 손톱깎이를 집어 든다.

 

영신 : (울음이 섞여서) 아부지..

 

다시 뒤에서부터 영신의 귓가로 가까이 오는 정후의 얼굴.

 

정후 : 움직이면... 다칩니다.

영신 : ..에?

 

정후가 영신의 손가락을 억지로 편다.

영신이 어어어... 공포로 울음이 터져 나오는데..

정후가 영신의 손톱을 깎는다.

읭? 영신이 잠깐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숨을 멈춘 사이,

정후는 깎아낸 손톱을 집어 들어 챙기며 영신의 귓가에 한마디 더.

 

정후 : 담부터는 겁도 없이 아무나 따라가지 마요. 그러다 죽습니다.

 

영신을 껴안았던 팔이 풀린다. 그래도 공포에 굳어 덜덜 떨며 그대로 서 있다.

뒤에서부터는 아무 소리가 없다. 영신이 겁에 질린 채 조심스레 뒤를 돌아본다. 그 뒤에는 아무도 없다.

이미 정후는 나간 뒤다.

영신 다리 맥이 풀리며 주저앉는다. 온 몸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다.

가슴의 통증(CRPS에서 오는)때문에 가슴을 움켜잡고 질식 직전처럼 간신이 숨을 쉬며 자기 손을 들어 본다. 깎여져 있는 손톱.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19. 강변

 

길? 가로수?에 기대 선 정후가 지퍼락에 영신의 손톱을 잘 넣고 봉한다.

그걸 다시 봉투에 집어넣는다. 봉투의 끈끈이 테이프를 떼서 잘 붙인다.

고개를 들면 저만치서 달려오고 있는 오토바이. 가죽 점퍼를 좀 요란하게 차려입은 대용이다.

전속으로 달려와 정후의 바로 앞에 폼나게 브레이크를 걸어 정확하게 선다. (대용은 언제나 정후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대용 : (헬멧 가리개를 올리며) 형~ 오랜만.

 

정후, 대꾸 없이 봉투를 내민다.

대용이 봉투를 받아 대충 점퍼 옆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대용 : 내 베니 좀 봐봐. (오토바이를 가리키는) 뭐 좀 달라진 거 같지 않어? 돈 백 쯤 발라서 튜닝 새로 했거등.

         (엑셀을 잡아보며) 어때. 소리가 다르지.

 

정후가 대용이 겉주머니에 쑤셔 넣은 봉투를 다시 꺼내더니 대용의 잠바 안주머니에 잘 집어넣는다.

 

대용 : 형. 그래서 말인데.. 내가 우리 베니도 이렇게 새로 만져주고 그랬으니까..

 

정후가 그냥 걸어가기 시작한다.

대용이 얼른 오토바이에서 내려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대용 : 형이 사장님한테 내 말 좀 해주면 안 될까? 내가 형처럼 그렇게 중량급으로는 못해도 라이트급이면 응?

         완전 깔끔하게 해낼 수 있는데. 형도 알잖아. 이런 배달 말고 제대로 된 일거리, 주기만 해. 할 수 있어. 나.

 

정후는 완전 무시하고 자기 길만 간다.

대용, 세워놓은 오토바이하고 너무 멀어질 수가 없어서 에이씨.. 할 수 없이 돌아선다.

오토바이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춘다. 돌아보면 정후가 다시 자기에게로 오고 있다. 헤에.. 좋아하는데.

다가온 정후는 대용이 채우지 않고 늘어뜨려 놓은 헬멧의 끈을 단단히 묶어준다. 그 틈에 얼른..

 

대용 : 그냥 일 한번만 시켜보라 그래. 내가 얼마나 잘 해내는지 일단 보고.. 괜찮으면 간단한 걸루다가..

 

정후가 대용의 헬멧 가리개를 절컥 내려버린다.

가리개 뒤에서 대용이 혀엉.. 불러보지만. 정후는 다시 자기 가던 길을 간다.

 

 

#20. 지하철 코인락커 앞

 

대용이 건들거리며 다가와서 코인 락커 하나에 정후의 봉투를 집어넣고는 잠근다. 비밀번호를 설정한다.

휴대폰 문자에 그 번호를 쳐넣고 전송한다. 수신인은 [사장].

대용이 빠져나가고 락커룸 앞에서 시간이 흐른다. 사람들이 수없이 지나가고. 자기 짐을 넣거나 찾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통행이 끊겼다가 .. 다시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누군가 그 락커 앞에 선다.

그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더니 봉투를 꺼낸다. (아직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문호다)

 

 

#21. 방송국 엘리베이터 앞

 

문호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하다가 멈칫.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민재를 봤다.

슬그머니 몸을 돌려 근처의 비상구 쪽으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 앞의 민재가 이쪽을 돌아봤다. 막 비상계단으로 들어가는 문호의 옆모습.

민재 앞의 엘리베이터가 열린다.

 

 

#22. 방송국 비상계단

 

문호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막 코너를 돌려는데.

앞의 비상구 문이 열리더니 들어선 민재가 딱 앞을 막는다.

문호.. 아하하.. 웃어넘기고 싶은데.

 

민재 : 어디 갔다 오는데.

문호 : 저..어기.

민재 : 수성기업에서 전화 왔어. 너 거기 퇴직인사들 만나고 다닌다면서.

문호 : (시침 떼는) 내가?

민재 : 하지 마. 해도 소용없어. 안 내보낼 거니까.

문호 : 엄청 재밌어 이거. 너도... 아니 강부장님도 들어보시면 확 땡길 거야. 어제 인터뷰를 하나 땄는데..

민재 : 우리 방송국, 수성기업에서 받는 광고가 몇 개나 되는지 알아? 그게 돈으로 치면 얼만지 아냐고. 니 월급도 거기서 나와.

문호 : 알지.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

민재 : 요즘 방송국 힘든 거 알지? 예전하고 틀려. 광고 하나 받기 위해서..

문호 : 이상하네. 보도특집부 부장께서 광고를 왜 걱정해. 광고부에도 사람 많아. 유능한 분들 많다고.

         그 분들한테 맡겨. 월권이다. 너.

민재 : (보는)

문호 : (사정 조로) 나 이거 석달 넘게 쫓아온 거야. 시간만 주면 세 시간은 떠들 거 있어. 그림도 있고 인터뷰도 확실하고..

민재 : 인기가 그렇게 좋니?

문호 : ?

민재 : 니가 방송 한번 낼 때마다 SNS 들썩이는 거 알아.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진보 방송인. 언제나 약자의 편. 심지어 잘 생겼어.

         그렇게 팬들이 늘어나고. 박수 받고. 그러면서 너 점점 떠밀려가고 있는 거야. 인기도 중독이야. 너 지금 그래.

문호 : 인기 중독이라..

민재 : 응. 너 스스로 조절이 안 되잖아. 매일 점점 더 큰 박수 받고 싶잖아.

         그 박수 치는 사람들. 언제고 아주 별 거 아닌 작은 걸로, 너 버릴 거야. 아주 쉽게.

문호 : 버리기만 하겠냐. 짓밟고 조각조각 찢어서 묻어버리겠지. (웃는)

민재 : 김문호.

문호 : 그때까지만 할게. 버림받을 때까지만. 안 그럼 뭐 할 게 없어서 그래.

민재 : (답답해서 보는데)

문호 : 근데 너 그거 처음 보는 옷이다. 남자 생겼어? 왜 그렇게 이뻐지냐? 보고 있는 옛날 애인, 속 쓰리잖아. (하면서 진지하게 본다)

 

 

#23. 방송국 내부 복도

 

종수(문호의 후배 기자)가 프린트 종이 몇 장을 들고 급히 복도를 달려간다.

[보도1부]라는 팻말이 달린 방으로 슬라이딩하듯 커브를 돌아 들어간다.

 

 

#24. 보도국 사무실 내부

 

지저분하고 반 이상은 비어있는 방송국 보도국 사무실.

그 중 안쪽에 자리한 문호의 책상으로 달려온 종수.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는 문호에게 프린트 종이를 내주며

 

종수 : 자료실을 통째로 뒤져서 뽑아왔습니다. 근데 이거 재작년 통계인데요.

문호 : (마우스를 움직이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작년 껀.

종수 : 그게 찾을 수가 없어서..

문호 : 작년 꺼.

종수 : (단념) 예에. 다시 찾아볼께요. (돌아서려는데)

문호 : 종수야.

종수 : 예. (뭘 또요)

문호 : 부탁 좀 하자. 퇴근 하는 길에 이거.

 

하며 내 주는 것은 정후가 봉했던, 영신의 손톱이 든 바로 그 봉투다.

 

문호 : 저번에 그 연구소에 좀 갖다 주라. 거기 내 친구 알지?

종수 : 또요?

문호 : 어. 비교 샘플은 연구소에 아직 있으니까 이것만 갖다주면 돼.

종수 : (받아들었다가.. 아무래도 궁금해서) 근데 선배. 이 친자확인 하는 거요.

문호 : (다시 모니터에 집중하며) 비밀이니까 몰래 해달라고 했지.

종수 : (가까이. 목소리를 낮춰) 누굴 찾는 거에요? 혹시 선배의..

문호 : (종수를 보는) 내 뭐.

종수 : ... 아닙니다.

문호 : 사건 하나 추적하는 게 있어.

종수 : 아하. .. (솔깃) 뭔데요?

문호 : 윤곽이 좀 잡히면 껴줄게.

종수 : 오.. 약속하신 겁니다. 두말하면 뒤에서 마악 씹고 다닐 겁니다. (돌아서려다가) 근데 괜찮겠어요?

문호 : (메모를 하는지 타자를 치기 시작하며) 뭐가.

종수 : 위에 분위기 아주 안 좋대요. 선배 이번엔 시말서 정도로 끝낼 거 같지 않던데.

문호 : 통계.

종수 : 예?

문호 : 작년 꺼.

종수 : 아.. 예에..

 

종수. 김새서 돌아서 간다.

남은 문호, 타자를 멈췄다. 생각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옆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이 울린다. 화면에 뜨는 발신인. [명희누나]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문호의 얼굴에 떠오르는 따뜻한 미소.

 

 

#25. 문식의 집 부엌

 

명희가 돌아보며 웃는다.

 

명희 : 이렇게 전화까지 해서 정식 초대를 해야만 얼굴 볼 수 있는 거야?

 

문호가 들어서고 있다.

 

문호 : 에이 또 누나 과장법 나온다.

명희 : 암만 바빠도 일주일에 한번은 같이 밥 먹자아. 응? 우리 유명하고 바쁜 김기자.

문호 : 자. 이거 잔소리 방지용.

 

하며 들고 온 작은 선인장 화분을 내준다. 빨갛고 노란 꽃을 접붙여 놓은 것.

명희 좋아서 받으며

 

명희 : 비모란이다. 이쁘게 접 붙였네.

 

그제야 보이는 명희의 전신. 휠체어에 타고 있다.

그렇게 휠체어에 앉아 이리저리 끌며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희가 휠체어에 앉은 키에 맞게 낮게 만들어진 조리대. 집 전체가 명희의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문턱도 없앤)

조리대 위에 다듬던 샐러드용 야채들.

문호가 조리대 수돗물을 틀어 손을 씻으며.

 

문호 : 메뉴가 뭐야? 뭐 도와주면 돼?

명희 : (선인장을 한 쪽에 치워두며) 포르치니 버섯을 구했어. 송아지 고기도 좋은 거 받아놨고.

         와인 소스 만들어서 스테이크에 얹을 거야. 넌 거기 샐러드 야채 좀 씻어줘.

문호 : 그래.

 

문호가 스피너에 야채들을 담다가 코를 킁킁거리며 오븐 쪽을 본다.

 

문호 : 근데 이 냄새는? 치즈에 토마토에 감자가 구워지고 있는 이건..

명희 : 어이구 개코. (휠체어를 밀어 냉장고 쪽으로 가며) 그라탕 만들고 있으니까 이따 갖고 가.

         레인지에 덥혀 먹으면 한끼는 되잖아.

문호 : 누나.

명희 :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 오며) 왜.

문호 : 형 버리고 나랑 서울 가자. 내가 기가 막힌 부엌이 있는 집을 구해 놓을 거니까.. 응? 누나아..

문식소리 : 넌 그 누나 호칭부터 바꿔.

 

문식이 골프 차림을 하고 들어서고 있다.

바로 명희에게 가서 명희가 무릎에 놓고 운반하던 고기를 들어 조리대에 놔주고 익숙하게 도와주며..

 

문식 : 이십년이 되간다. 아직도 형수 소리가 안 나와?

명희 : 냅둬. 쟤가 날 형수라고 부르면 난 지를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되고. 존댓말도 해야 되잖아.

 

문호가 그거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물에 씻은 야채가 담긴 스피너를 팽팽 돌리면서.

 

 

#26. 문식 집 정원

 

현관이 열리며 운전기사가 골프채를 들고 앞서 대문 쪽으로 가고.

그 뒤에 나오는 문식과 문호.

 

문식 : 자고 갈 거냐?

문호 : 좀 있다 올라가야 돼요. 할 일 많아.

문식 : (멈추더니) 너. 거기 보도국에서 제대로 찍혀 있대매.

문호 : 내가 워낙에 유명하니까 질시하는 세력이..

문식 : 생방송 중에 원고에도 없는 말 떠들었다고. 그게 한두번이 아니라고.

문호 : 우리 국장님하고 저녁이라도 드셨나?

문식 : 사표 던져. 던지고 나한테 와. 보도국 내줄게. 알아서 니 맘대로 떠들어봐. 공중파 꼬랑지 대신에 종편 머리도 괜찮아.

문호 : (낄낄 웃는) 그럴까? 하긴 낙하산도 능력인데 말이야.

문식 : (문호의 어깨를 툭 쳐주며) 니 형수, 약 먹이고 낮잠 재워야 된다. 요즘 자꾸 꾀부리고 약을 안 먹어. 졸린 거 싫다고.

 

문호, 알았다고 경례해 보이는. 문식이 대문 쪽으로 간다.

그 뒷모습을 보는 문호,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스윽 가신다.

 

 

#27. 명희의 방

 

문호가 명희를 침대에 눕힌다. 이불도 덮어주고.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방. 문식과 같이 쓰는 게 아니라 따로 쓰는 여인스러운 명희의 방이다.

창가를 따라 크고 작은 온갖 다육식물 선인장들이 가득하다.)

 

문호 : 약도 먹이고. 침대에도 눕혔고. 자아. 다음은 뭐해드릴까.

명희 : 니 여자 친구 얘기.

문호 : (창문으로 가며) 누나. 이제 쫌..

명희 : 아직도 없어?

문호 : 단념해. 없어. 안 키워. 그런 거.

 

문호가 햇살이 들어오지 않게 커튼을 여며준다.

커다란 창문을 가리우는 하얗고 하늘거리는 커튼.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살랑이고.

돌아보았더니 명희가 작게 하품을 하며 편히 자리 잡으려 뒤척이며.

 

명희 : 재미없다.

 

문호가 다가서 베개를 잘 맞게 자리 잡아준다. 명희는 졸린 듯

 

명희 : 나 자고 난 담에 가.

문호 : 그래 (옆의 의자에 앉는다)

명희 : 요 지점이 제일 힘들어. 잠이 들락말락 하는 이 때. 잡생각들이 너무 드글대서..

문호 : 잡생각 못하게.. 웃긴 얘기 해줘?

명희 : 너 못하잖아. 웃긴 얘기.

문호 : 그럼.. 진지한 얘기 해줄까?

명희 : 해봐. (문호 쪽으로 돌아눕는다)

문호 : 음... (생각해보다가) 그 소설가 이름이 뭐더라. 중국 사람인데..

명희 : 힌트 좀만 더.

문호 : 그게.. 강철로 밀폐된 방에 사람들이 있어. 다들 잠이 들어있지. 오래지 않아 다 질식해 죽을 거야.

         근데 그 중에 하나가 잠이 깼어. 이 사람은... 자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깨워야 되나? 다 같이 나갈 방법을 찾아보자고?

명희 : 아니면 어차피 나갈 수 없는 방이니까 그냥 편히 자다 죽게 하는 게 낫지 않나. 잠을 깨봤자 괴로워질 뿐이니까.

문호 : 응. 그거..

명희 : 아.. 그게 소설이 아니고 서문 같은 거였는데.. 니은.. 니은자 들어가는데. 노...

 

문호와 명희 거의 동시에 서로를 가리키며

 

문호명희 : 노신.

문호, 아아 맞어.. 해서 웃다가 보면 명희가 물끄러미 보고 있다.

 

명희 : 근데 왜?

문호 : 응?

명희 : 왜 그 얘기가 생각났어? 문호 너, 나한테 못해주는 말 있어?

문호 : (멈칫했다가 웃는) 저기요. 세상이 다 누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거든.

 

명희 치.. 웃고 눈을 감는다. 미소 띤 얼굴이 차츰 잠에 빠져드는 듯 하다.

그 얼굴을 보고 있는 문호. 그 위로 들리는 해적방송의 시그널 뮤직.

 

 

#28. 과거 회상 (1회의 #7 트럭 운전석 연결)

 

조수석에서 잠이 들어있는 어린 문호. 잠결에 들리는 라디오 방송 소리.

 

길한소리 : 아니 근데 원래 언론이란 게 말이지. 따지라고 있는 거 아냐?

명희소리 : 그렇지. 따지고 까고 그래야 언론이지.

 

트럭이 급커브를 도는 바람에 문호가 굴러 떨어질 뻔 해서 잠이 깬다.

졸린 눈으로 옆을 보면 문식이 잔뜩 긴장해서 운전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얼핏 문호를 돌아본 문식이.

 

문식 : 벨트 언제 풀었어.

 

어린 문호는 의자 옆 구석에서 비닐 봉지를 주워든다. 그 안에서 바나나 우유를 꺼내는데, 문식이 성을 낸다.

 

문식 : 얼른 안 매?

 

문호가 벨트를 매어 보려고 하는데. 낡은 트럭의 벨트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한 손에는 우유를 들고 있어서 더 잘 안 된다.

계속 들리는 라디오 방송 소리.

 

길한소리 : 이상한 거 따지지 않고. 수상한 거 까지 않으면 그게 언론이야?

명희소리 : 언론 아니지. 개소리지.

 

둘이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낸다.

 

 

#29. 현재 명희 방

 

이제 명희는 잠에 들어있다.

문호가 침대 옆 사이드 탁자를 돌아본다. 거기 놓여진 몇 개의 액자. 그 중의 하나에는 정후의 집에 있던 바로 그 사진이 들어있다.

다섯 명의 해적방송을 하던 친구들이 함께 찍은 사진. 그 사진을 보는데.

들리는 트럭의 시끄러운 엔진음. 급커브를 도는 바퀴의 굉음..

 

 

#30. 과거 회상

 

골목길을 달리는 문식의 트럭.

운전석의 문식이 백밀러를 보며 운전 중이다. 뒤에는 경찰차가 저만치 쫓아오고 있다.

조수석에서는 문호가 바나나 우유의 겉포장을 뜯고 있다. 빨대가 없다.

이런 추격전은 전에도 해봤는지 별 긴장감이 없다.

마악 우유를 마시려는데 문식이 급커브를 돌아 차를 모는 바람에 우유가 입가와 옷에 쏟아진다.

울상이 되는 문호.

 

 

#31. 과거 선술집 뒷마당?

 

수돗가에서 명희가 문호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다.

꽃무늬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그 수건으로 옷에 묻은 우유도 닦아내준다.

문호는 아직 울음 끝이 남아있다. 흐느낌이 새어나온다.

 

명희 : 울었어?

문호 : (고개를 젓는)

명희 : 우유가 아까워서 울었구나. 형 졸라서 겨우 얻은 우윤데. 그치.

문호 : (더 세차게 고개를 젓는)

명희 : (웃더니 문호의 어깨를 잡아 얼굴을 들여다보며) 문호야.

문호 : ...

명희 : 울어도 돼. 누나 앞에선 울어도 돼. 누나가 아무도 못 보게 해줄게.

 

그 말에 그만. 문호, 비죽비죽 다시 울음이 솟구친다.

명희가 그런 문호를 품에 꼭 안아준다. 그 품에서 울음이 터지는 문호.

 

 

#32. 현재 명희의 방

 

문호가 손을 뻗어 액자 하나를 집어 든다. 다섯 명의 친구 사진 옆에 있던 액자다.

그 액자 안에 젊은 명희는 두세 살짜리 어린 소녀를 안고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다.

그 때만 해도 명희는 멀쩡하게 서있다.

문호가 문득 명희를 돌아본다. 명희는 좋지 않은 꿈이라도 꾸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

 

 

#33. 문식의 서재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문호. 여유로운 느낌으로 서가 쪽으로 간다. 책을 고르는 것처럼.. 그 중에 한 권을 꺼내서 뒤적인다.

그러면서 슬쩍 눈길만 돌려 보는 곳. 방의 한 구석에 설치되어있는 CCTV의 카메라가 보인다.

뽑았던 책을 도로 꼽고 주욱 책을 훑어 가다가 뽑아내는 책.

장정이 훌륭하게 되어있는 레마르크의 개선문 책이다. (초판본 느낌의 원서도 좋고)

펼쳐서 읽는 척 하면서 카메라를 등진다.

그리고 재빨리 책 안에 설치되어있던 초소형 몰래 카메라의 저장장치를 빼내고 새로운 것을 꼽는다.

책을 다시 꼽고 다음 책으로 이동해간다.

다시 제자리에 꼽힌 개선문 책의 겉표지 무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카메라 렌즈.

 

 

#34. 문식의 집 앞

 

문호가 차를 몰고 나오고 있다. 육중한 느낌의 지프차.

터프한 운전 솜씨로 속력을 높이며 지나쳐 간다.

 

 

#35. 길 / 차 내부

 

한적한 국도변에 세워져 있는 문호의 지프차.

운전석의 문호가 노트북에 저장장치를 연결한다. 프로그램을 작동시킨다.

몰래 카메라가 찍었던 서재 안의 모습이 비춰진다. 움직임이 있을 때 감지되는 장치인 듯.

문식이 혼자 들어오는 장면, 집무 보는 장면 같은 것은 빠른 속도로 돌린다.

(시간경과)

오비서가 들어오고 앉고 문식과 얘기를 나눈다.

문호, 속도를 정상으로 돌린다.

화면 속에서 오비서가 문식에게 말하고 있다.

 

문식 : 같이 처리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나?

오비서 : 힐러라는 놈이 일단 만나기도 쉽지가 않구요.

 

무슨 이야기인가 해서 조금 앞으로 돌린다.

오비서는 문식에서 뭔가를 내주고 있다. 멀리 풀샷으로 찍힌 것이라 자세히는 보이지 않는다.

 

오비서 : 처리했습니다. 여기 물건도 가져왔습니다.

문식 : 힐러라고 했나? 그 자는?

 

문호, 볼륨을 키운다.

 

오비서 : 일단 발목은 묶어놓았습니다만.. 어찌 할까요.

문식 : 같이 처리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나?

오비서 : 힐러라는 놈이 일단 만나기도 쉽지가 않구요. 만난다해도 처리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실력이 워낙 좋은 놈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때 울리는 전화벨.

문호, 긴장하고 있던 터라 움찔했다가 노트북의 화면을 정지시키고 휴대폰 발신인을 확인하고 받는다.

 

문호 : 어. 나야.

친구소리 : 여어 김문호. 결과 나왔다.

 

문호. 자세를 바로 한다.

 

문호 : 이렇게 전화까지 한 건.. 뭐냐.

 

 

#36. 연구소 내부 일각

 

책상 앞에 앉은 흰 가운의 문호의 친구가 앞에 놓인 결과 종이를 보며 전화 중이다.

 

친구 : 이런 건 맨 입으로 알려주는 게 아니지. 야. 이거 최소 일주일 넘게 걸리는 걸 내가 직접 연구실 가서 내 손으로 직접....

문호소리 : 말해. 뭐야.

친구 : 누군진 몰라도 축하한다. 이거 네 번짼가. 그동안 니가 보내온 샘플들. 다 아니었잖아.

 

 

#37. 길 / 차 내부

 

문호가 질끈 눈을 감는다. 착잡한 심정이다.

 

친구소리 : 99프로 넘어. 이 두 샘플 부모 자식 맞아. 둘 다 여자던데 엄마하고 딸이네.

 

문호, 잠시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가 눈을 뜬다.

 

친구소리 : 어이. 김문호. 듣고 있냐.

문호 : (어쩐지 잠긴 목소리) 어.

친구소리 : 근데 이거.. 축하해 줄 일인 거 맞지?

 

굳어있는 문호의 앞에 노트북에서는 정지된 화면의 문식이 보이고 있다.

 

 

#38. 연구소 건물 로비

 

입구로 들고 나는 사람들. 그 중에 정후가 들어서고 있다.

샐러리맨같은 신사복에 넥타이. 제약회사의 로고가 찍힌 큼직한 박스를 하나 들고 있다.

로비로 걸어 들어오며 슬쩍 살펴보는 내부. 가운데가 뻥 뚫린 로비의 위로 올려다 보이는 각층의 모습.

박스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어정어정 걸어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린다.

문이 열리고 우루루 내리는 사람들. 그들을 거슬러 우물쭈물 치이면서 엘리베이터에 탄다.

엘리베이터 CCTV에 걸리지 않게 묘하게 상자의 각도를 잡으며.

위의 그림 중에 적당한 지점에 시작되는 정후의 나레이션.

 

정후소리 : 나는 심부름꾼이다. 스무 살 때부터 해온 일이니 이제 경력 팔년 차가 되어간다.

 

 

#39. 건물 복도 화장실 앞

 

신사복 차림의 정후가 박스를 든 채 남자 화장실로 들어간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오는 정후. 청소원의 복장을 하고 청소원의 수레를 밀고 있다.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사무실 쪽으로 이동한다. 나레이션은 계속.

 

정후소리 : 실력도 꽤 좋다. 솔직히 업계 최고다. 그래서 좀 많이 비싸다. 사람을 죽이는 일만 아니면 무엇이든 받는다.

 

 

#40. 사무실 내부

 

청소수레를 밀고 들어오는 정후, 아직 몇 명의 사무원이 남아있는데. 그들의 책상 옆을 지나간다.

과장 쯤 되는 자리의 간부급 책상에서 누군가가 윗도리를 입고 가방을 챙기는데. 그 책상 위에 잠깐 놓아둔 사원증.

정후가 지나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집어 들고 간다. (사원증 : 별첨)

 

정후소리 : 도덕이나 정의 같은 건 안 따진다. 그게 내 고객을 대하는 나의 도덕이고 정의다.

 

 

#41. 건물 복도 일각

 

청소 수레를 밀고 가는 정후. 코너를 돌아간다.

잠시 후 그 코너를 돌아 나오는 정후. 이번에는 연구소 요원의 흰 가운을 위에 걸치고 있다.

목에는 아까 훔친 사원증을 걸고 있고, 학자스러운 안경(스마트 기능이 있는)까지 쓰고 있다.

 

정후소리 : 고객의 의뢰를 받아 내가 훔쳐 건네주는 물건이 어디에 쓰일 것인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42. 중앙 계단

 

정후가 중앙 로비가 보이는 계단을 돌아 빠르게 걸어 내려간다.

그러면서 슬쩍 저 아래층을 내려다본다. 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경비 차림의 사내.

정후가 중간에서 새서 다른 쪽으로 이동한다.

 

정후소리 : (계속 연결) 그러니까 내가 뭔가를 훔치거나 누군가를 도청한다고 해서

               나를 절도범이라거나 도청범이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43. 서버실 앞 복도

 

정후소리 : 말했다시피 나는 그냥 심부름꾼이다.

 

자연스레 걸어오는 정후. 거기 보이는 방의 팻말. [기자재실/ 서버실]

전자키로 잠그게 되어있는 문이 설치되어있다.

정후가 자연스럽게 양쪽의 빈 복도를 살피면서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카드키에 댄다.

문이 열리고. 정후가 문을 조금 열더니 안쪽을 살핀다.

 

 

#44. 서버실 내부

 

서버실 직원1이 문 열리는 소리에 돌아본다. 문이 열려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해서 일어나서 문 쪽으로 온다. 문을 더 열고 밖을 살핀다.

그런데 그렇게 밖을 살피느라고 보지 못한 사이, 바로 문 옆 가구 뒤에서 나와 이동하는 정후.

직원1이 이상해하며 문을 닫고 돌아서기 직전, 어느 책상 밑으로 숨어든다.

직원1이 다시 자신의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아 하던 작업을 한다.

정후가 그의 옆? 뒤쪽에서 소리 없이 움직인다.

직원1의 동태를 살피며 준비했던 USB잭(스마트폰에 연결된)을 어느 하드 뒤에 꼽는다.

 

 

#45. 민자 아지트

 

민자가 빠르게 타자를 치고 있다. 그 앞의 메인 모니터에 보여지는 복잡한 컴퓨터 언어. 주루루 타자가 쳐지고.

이어서 다운로드 그래프가 뜬다. 1%에서부터 올라간다.

 

 

#46. 서버실 내부

 

정후가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다. 민자 아지트의 모니터와 같은 다운로드 그래프가 작동하고 있다. 아직 10 %대.

정후가 후딱 문 쪽을 본다. 문이 열리며 직원2가 들어온다.

직원2가 파일을 하나 들고 이동해가는 곳이 바로 정후가 숨어있는 곳이다.

직원2가 마악 서버대 뒤로 돌아간다. 그러나 거기 있어야할 정후는 보이지 않는다.

직원2가 서버 뒤에 연결된 하드디스크들을 체크한다. (그 중에 교환할 것을 찾는 중)

그 중에 아직 직원2는 보지 못했지만 서버 기기들 사이에 숨겨져 있는 스마트폰.

아슬아슬하게 직원이 바로 그 옆에 있는 잭을 체크하고는 파일에 뭔가를 기입하며 자리를 뜬다.

그제야 보이는 서버대 위. 거기 납작 엎드려 정후가 후우.. 소리 없이 한숨을 쉰다.

// 숨겨져 있던 스마트폰을 꺼내는 정후의 손. 이제 98..99...100퍼센트. 연결되었던 잭을 뽑는다.

// 나란히 한 모니터를 보던 직원1.2가 깜짝 놀라 돌아본다. 거기 서버 중의 하나에서 요란한 비퍼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직원 둘이 놀라 그리로 달려간 사이. 정후가 유유히 문으로 빠져나간다.

 

 

#47. 건물 복도

 

경비원 둘과 가운의 사내 하나가 급히 달려간다.

그들이 달려가는 옆에 자판기에서 정후가 음료수를 하나 뽑아내다가 그들을 순진한 얼굴로 구경한다.

이제는 마치 대학원생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정후소리 : 내 휴대폰에는 딱 세 개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있다. 아줌마. 내 똘마니. 그리고 단골 치킨 집.

 

 

#48. 서버실 내부

 

그 건물, 혹은 다른 건물의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정후. 아까 뽑은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정후소리 : 가족이나 동료. 친구.. 그딴 건 주위에 안 키운다. 그런 게 왜 필요한 지... 사실은 잘 모르겠다.

 

 

#49. 정후의 아지트

 

디링. 레인지가 소리를 내고. 그 문을 열고 인스턴트 밥을 꺼내고

그 옆의 냉장고에서는 캔맥주 하나를 꺼내 소파로 가는 정후.

맨발에 삼선 슬리퍼. 후줄근한 차림에 뻗치고 떡진 머리칼.

오늘 저녁은 인스턴트 밥에 족발이 반찬이다. 족발 하나를 집어 먹으며 마악 티브이 리모콘을 들어 전원을 켜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인 아줌마.

잠시 휴대폰을 노려보다가 스피커폰으로 받는다.

 

정후 : 바른대로 말해. 내 방에 카메라 설치했지. 내가 밥만 먹을라 그러면 방해하는 게 아줌마 삶의 낙이지.

민자소리 : 그런 건 밥이라고 안하지. 배달 족발에 배달 치킨은 그냥 간식, 또는 야식이라고 하는 거지.

정후 : (방을 둘러보는) 진짜 달았네. 카메라 달았어.

민자소리 : 그 여자애가 맞나부다.

정후 : 입금 들어왔어?

민자소리 : 이 고객. 맘에 드네. 입금이 아주 칼 같아야. 그리고 이 맘에 드는 고객께서 2차 의뢰를 해왔다.

정후 : (맥주를 따고 마시려다 불안해지는) 2차 뭐.

 

하는데 옆에서 뭔가 드르럭대며 소리를 낸다. 프린터기가 저 혼자 작동이 되며 종이를 뽑아낸다.

 

민자소리 : 거기 보면 일곱 가지 항목이 있어. 그걸 하나도 빼지 말고 조사해 달래.

 

정후, 할 수 없이 일어나 프린트되어진 종이를 빼들며

 

정후 : 그래서 얼마 받기로 했는데.

민자소리 : 항목 하나당 작은 거 한 장.

 

정후, 놀랐다는 듯 휘파람을 불고. 읽어내려다가 점점 어이가 없어진다.

 

정후 : 뭐야. 이거.

 

 

#50. 치수네 까페 앞 길 / 아침

 

안경의 화면으로 보이는 장면. 길 건너 이만치에서 보이는 까페.

치수가 나와서 그날의 메뉴를 적은 간판을 세우고 들어간다.

안경 화면 한쪽에 디리릭 적혀지는 항목.

1. 가족- 관계. 각 가족의 신상. * 어린 시절 학대는 당하지 않았는가.

길 한쪽에 몸을 숨기고 선 정후가 안경을 벗는다. 평소 사용하던 안경이다.

새로운 안경집에서 새 안경을 꺼내 바꿔 낀다. 얼굴의 형태가 가려질만한 굵은 뿔테 안경이다.

정후는 늘 입던 검은 옷이 아니라 어리버리하고 보수적인 대학생 차림. 더부룩한 가발을 쓰고 있다.

새 안경을 시험해보듯 이리저리 초점을 바꿔가며 주위를 살핀다.

 

민자소리 : 그 새 안경. 성능은 똑같은데. 배터리 용량이 좀 적다. 수시로 충전하는 거 잊지 마라.

 

 

#51. 까페 내부

 

언제나처럼 아침 장사 준비를 하고 있는 철민. 치수.

(대개 커피 쪽은 변호사 일이 없을 때는 치수가 맡고, 샌드위치나 차 종류는 철민이 맡고 있다.)

정후가 들어선다.

 

철민 : 어서 오십셔. 좋은 아침입니다.

 

정후가 주춤주춤 소심한 걸음걸이로 카운터 앞에 다가선다.

 

정후 : 음... (메뉴를 한참 고른다)

민자소리 : 채영신. 현재 양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댄다. 아버지 이름은 채치수. 입양 된 것이 채영신 여덟살 때.

 

정후, 민자의 소리를 들으면서 스윽 치수 쪽을 살펴본다.

치수는 주루룩 꽂혀 있는 레코드들 중에서 신중하게 고르고 있는 중이다. (79.80년대의 가요나 팝이 주로 모아져 있다)

 

민자소리 : 채치수는 63년생. 직업은 변호사.

정후 : (찌푸린다. 변호사?)

민자소리 : 부업은 까페 사장. 변호사 사무실이 까페에 있다는데. ...이게 뭔소리야?

 

정후가 그제야 발견하는 한쪽의 변호사 간판. 그 너머가 변호사 사무실인 듯.

 

철민 : 손님?

 

돌아보면 철민이 정후의 주문을 기다리고 서 있다.

그렇게 정후를 보는 철민의 얼굴이 철컥 사진 찍히고.

 

정후 : (어눌..하게) 어.. 저기 블랙퍼스트 세트요.

철민 : 세트 중에 어느 거?

정후 : 어... 앞에 꺼. A세트.

철민 : 육천원입니다. 달걀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정후 : .. 예?

철민 : 후라이? 스크램블? 그냥 삶은 달걀?

정후 : 앞에 꺼. 후라이..요.

 

정후, 꾸물거리며 지갑을 꺼내 계산을 하는 동안.

 

민자소리 : 여기 신문 기사가 있는데. (읽는) 채치수, 그는 자신이 변호를 맡았던 이들을 출소 후에까지 책임지는 변호사로 유명하다.

               직접 주말마다 출소자들을 위한 바리스타 강의를 해서 취업을 돕기도 한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려던 정후. 다시 돌아서서 얼굴을 피한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이층에서 내려오는 영신. 바로 정후의 옆을 스쳐 지나서 철민 쪽으로 간다.

정후. 슬그머니 테이블구석 자리로 가서 앉는다.

 

민자소리 : 거기 앞치마 두른 놈, 신상 나왔다.

 

 

#52. 민자 아지트

 

민자가 보고 있는 모니터에 띄워진 철민의 얼굴. 경찰서에서 찍은 피의자 사진이다. 앞과 옆얼굴이 나란히.

 

민자 : 전과 3범. 소매치기에 빈집털이. 마지막 교도소에서 나온 게 7년 전이네. 그 후로 거기 까페에서 일하고 있고.

 

 

#53. 까페

 

정후가 법률책을 들여다보는 척하고 있다.

 

민자소리 : 그러니까 채영신이 현재 가족관계는 양아버지 뿐. 양어머니는 2000년에 사망.

 

정후가 슬그머니 영신이 쪽을 본다.

영신은 철민이 토스트를 하려고 꺼내놓은 식빵 봉지에서 하나 집어 들고 씹어 먹으면서 냉장고 쪽으로 이동.

치수는 드디어 고른 레코드를 플레이어에 거는 중.

 

영신 :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고 컵을 찾으며) 아부지. 안 그래도 나 지금 기분 꿀꿀하거든. 그놈의 사이코 도둑시키 때문에

         밤새 악몽에 빠져가지고 진짜로 자다가 디질 뻔 했거든. 아침부터 칙칙한 음악 틀기만 해봐.

치수 : 이건 칙칙이 아니고 촉촉한 건데.

 

레코드에 얹힌 바늘이 돌아가고.. 나오는 노래.

전주도 없이 다짜고짜 나오는 첫 소절이 하도 강렬해서 정후. 마시던 물을 뿜을 뻔 했다.

노래는 한대수의 [물 좀 주소]

까페 가득하게 울려 퍼지는 강한 노래소리.

정후가 어이없어 보는 앞에서 영신은 물을 따르며 음악에 맞추어 몸을 건들거리기 시작한다.

치수는 이미 음악에 젖어서 코미디언 이기동같은 스텝으로 까페 안을 이동한다.

그러더니 결국 둘이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한대수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진지한 얼굴로. 인상을 써가며.

사이사이 아카펠라 리듬도 넣으며. 간주가 나오는 부분에서 영신은 기타 치는 시늉까지 낸다.

철민은 늘 보던 장면인 듯 심드렁하니 자기 일을 하다가 정후와 시선이 마주치더니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인다. 어쩔 수 없다고.

정후, 얼이 빠진 기분이 돼서 다시 물잔을 들어 마신다. 화면 한 구석에 드르륵 타자 쳐지는 글자.

● 어린 시절 학대는 당하지 않았는가.

그 아래 적혀지는 답. ....해당 사항 없음.

그 문장이 옆으로 밀리더니 앞에 한단어가 덧붙여진다. 절대 해당사항 없음.

이제 치수 부녀는 에에에 아아.. 하는 괴성을 같이 내고 있다.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심취해서.

 

 

#54. 고급 아파트 입구 / 낮

 

영신이 걸어가고 있다. 앞의 물 좀 주소 음악이 여운처럼 계속된다.

영신도 그 음악이 아직 남은 듯, 리듬을 타고 건들거리며 걷는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주차장 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때 마주 달려오는 남자.

(정후. 조깅하러 나온 주민 복장이다.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트레이닝 복에.

머리에는 두건, 혹은 비니 같은 것을 아래로 내려 쓰고. 안경을 쓰고 있다)

그다지 빠른 속도는 아닌데. 음악이라도 고르는 듯. 손에 든 아이팟을 보며 달려오다가

묘하게 경로가 비뚤어지더니 영신과 부딪힌다.

그 바람에 영신이 메고 있던 백팩의 한쪽 어깨 끈이 벗겨져 내려간다.

 

정후 : 어. 죄송합니다.

 

하면서 백팩 끈을 다시 올려주며 정후의 다른 손이 영신의 백팩 뒷주머니?에 추적장치를 넣는다.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 붙인다)

영신이 한소리 하려고 돌아보지만 이미 정후는 뒷모습을 보이며 달려가고 있다.

영신, 에잇. 재수 없어.. 라는 느낌으로 옷을 털며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이만치. 정후가 그런 영신을 보고 있다. 디리릭. 타자 쳐지는 글자.

2. 직장. 업무 능력은? 업무 스타일은?

 

 

#55. 지하 주차장 내부

 

영신이 차들의 번호판을 살펴보고 있다.

 

영신 : (중얼중얼) 3389... 5425... 이준빈이 세웠으면 여기 어디겠는데...

 

뒤쪽의 차를 보려고 발돋움도 하고.. 기웃해서 옆차도 보고.. 그러면서 누가 볼까봐 주위도 살피고.

// 그런 영신의 모습을 이만치 기둥 뒤에서 보고 있는 정후.

 

민자소리 : 채영신. 직업은 인터넷 신문 썬데이.. 아니 썸데이 기자. 업무 능력은 어때 보이냐?

정후 : (한심해서 보며) 저 여자. 기자 맞어? 확실해?

민자소리 : 왜.

정후 : 하는 짓은 딱 자동차 좀도둑인데. 그것도 완전 초짜. CCTV고 블랙박스고 .. 아예 기본개념이 없어.

 

// 영신이 기웃거리며 지나가는 차. 내부 블랙박스의 파란 불이 반짝이고 있다.

영신 그렇게 기웃대며 이동하다가 멈칫 멈추더니 다시 돌아본다.

건너편에 세워져 있는 고급 승용차. 그 안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뒷자리에 앉은 중년남자와 젊은 여자. 그 남자가 여자의 머리통을 거칠게 쿡쿡 찌르며 뭔가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여자는 남자가 찔러대는대로 머리가 거세게 이리저리 흔들린다.

영신 다시 가던 길을 가다가 슬쩍 기둥을 돌더니 뒤쪽으로 해서 아까의 차로 접근한다.

좀 더 가까이에서 좀 더 잘 보이는 차 내부의 상황.

순간 여자가 머리통을 한 대 더 얻어맞는다. 아프라고 때리는 것 보다는 모욕감이 들게 툭툭 때리다가 느닷없이 퍽.

영신, 울컥해서 앞으로 나서려다가 멈춘다.

차 밖의 앞쪽에 있던 운전기사인 듯한 사내가 영신을 돌아본다. 신사복을 입은 깍두기 스타일.

차의 뒤쪽에 또 한명. 역시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영신 우물쭈물해서 멈추고.. 돌아서려는데.

차 문이 열리더니 여자가 나와 선다. 비틀한다.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다.

차 안의 사내(거간꾼인 황사장)가 여인(연희)에게 하는 소리가 들린다.

 

황사장 : 머리나 쫌 빗어라. 그기 머꼬.

 

연희가 무표정한, 어찌 보면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백을 뒤지더니 빗을 꺼내 빗는다.

 

황사장 : 입술도 좀 칠하고.

 

연희가 립스틱을 꺼낸다. 차 옆의 깍두기 중의 하나가 영신에게 다가오려고 한다.

영신. 기가 죽어서 돌아서다가 어엇.

저 멀리 주차된 외제차에서 내리는 남자.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이준빈이다.

 

영신 : 이준빈!

 

이준빈이 입구 쪽으로 간다. 영신이 급히 달려가는데.

이미 인식판에 키를 대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준빈. 영신이 달려왔지만 이미 문이 닫혔다.

유리문을 두들겨대지만 유리문 저 쪽에서 이준빈은 개무시. 방금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다.

영신 다급해서 옆의 인식판에서 아무 호수나 찍어대고 호출을 누른다. 벨소리.. 응답이 없다.

에잇. 취소하고 또 다른 번호를 누른다. 초조해 죽겠는데.

누군가의 손이 들어오며 키를 찍는다.

돌아보면 아까의 여자, 연희다. 여전히 초점 없는 눈. 문이 열린다.

 

영신 : 고맙습니다.

 

냉큼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층수 표시를 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다. 7층. 8층. 9층. 그리고 멈춘다.

 

영신 : 그렇지. (너무 좋아서 옆에 와 서는 연희에게) 9층 맞네. 9층에 내리는 거 봐요. 내 이럴 줄 알았어. 딱 걸렸어.

 

웃다 보면. 연희는 멍하니 자기 앞 허공만 보고 있다.

 

 

#56. 엘리베이터 내부

 

영신이 힐끗 옆을 본다. 넋을 잃은 듯한 연희. 위아래로 살펴본다.

고급으로 차려입었는데. 엄청 짧은 스커트. 높은 하이힐. 늘어뜨려 들고 있는 명품백. 금방 칠한 붉은 입술.

엘리베이터가 5층에 선다. 문이 열린다. 그러나 연희는 내릴 생각을 않는다.

영신이 연희를 돌아본다. 연희는 열린 문을 보고만 있다.

 

영신 : 안 내리세요?

 

문득 표정 없는 연희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린다.

영신, 놀라서 일단 외면해준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다시 움직인다.

 

 

#57. 9층

 

내리는 영신. 돌아보면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 연희.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은 눈. 문이 닫힌다.

영신. 고개를 젓는다. 다른 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백팩을 내려 그 안에서 택배원 조끼를 꺼냈다가.. 아니야.. 해서 다시 넣고 뒤적뒤적.

여경의 셔츠를 꺼낸다. 견장까지 달려있는 제복이다.

넥타이도 꺼내다가 문득 엘리베이터 층수 표시를 본다.

엘리베이터는 꼭대기층까지 주욱 올라가더니 멈춘다. 한참 그대로 있다.

 

 

#58. 아파트 비상계단

 

가볍게 걸어 올라가고 있는 정후. 민자와 통신 중이다.

 

정후 : 아무래도 이 여자. 직장 땡땡이 치고 남자 쫓아온 거 같아. 하는 짓이 아주 제대로 스토커야. 옆에서 보는데 아주 소름이 쫘악..

         (징징거리듯) 나 진짜 연쇄살인범보다 이런 여자가 더 무쩌워.

 

손에 들린 휴대폰 액정에는 위치 추적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는데, 한쪽에 큰 글씨로 대상과의 거리가 나타나고 있다.

12.1M.. 11.5M..

 

정후 : 고도 거리가 11미터면 5층은 아니고. 9층에 내렸구만.

민자소리 : 9층에 누가 사는지 알아봐?

정후 : 남자가 산대니까. 스토커 집착녀에 시달리는 불쌍한 남자가.

민자소리 : 어떻게 시달리는지는 봐야지.

정후 : 그거까지 봐야 되나?

민자소리 : 보기만 해선 안 되지. 찍어야지.

 

정후가 못마땅하지만 비상구 출입문으로 빠져나간다.

그 옆에 7/8이라는 층수 표시가 되어있다.

 

 

#59. 9층 복도

 

영신이 경찰복을 차려입고 903호 앞으로 다가선다. 벨을 누르고 기다린다.

안에서 들리는 인터폰 소리.

 

선정소리 : 누구세요.

영신 : (사무적인 말투로) 신사 파출소에서 나왔습니다. 아파트 내 절도 신고가 있어서 탐문 조사 중입니다.

 

대꾸가 없다.

 

영신 : 잠깐 문 좀 열어주시죠.

 

여전히 대꾸가 없다.

영신이 안에서 보고 있을 것을 대비해서 무심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어 전화하는 척 한다.

 

영신 : 박영자 순경입니다. 여기 3동 903호. 안에 사람은 있는데 협조를 안합니다. 문을 안 엽니다. 수상한데. 어떻게 할까요.

 

그제야 인터폰으로 빠르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선정소리 : 기다려요. 옷 좀 입고요.

 

 

#60. 7층 엘리베이터 앞

 

정후가 기다리고 있다. 엘리베이터는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멈추고 정후가 올라탄다.

 

 

#61. 엘리베이터 내부

 

정후가 9층을 누른다. 문이 닫히고 올라가는데.

정후 문득 한쪽을 본다. 엘리베이터 한 구석에 떨어져 있는 가방. 연희가 들고 있던 그 가방이다.

 

 

#62. 9층 엘리베이터 앞 복도

 

영신이 903호 현관에서는 보이지 않게 등을 돌린 채 재빨리 카메라를 준비하고 있다가,

앞에 엘리베이터가 소리를 내며 서자 힐끗 본다.

문이 열린다. 그 안에 조깅복 차림의 정후가 타고 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시늉을 하며 영신만 확인한다. 내릴 생각은 없다.

정후가 닫힘 버튼을 누른다. 문이 닫히려는데.

그 문을 턱 잡아 세우는 영신. 영신은 엘리베이터 구석에 떨어진 가방을 보고 있다.

 

영신 : 그 여잔 어디 있어요.

 

정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본다. 여전히 수건으로 얼굴을 반은 가린 채.

 

영신 : 그 가방 주인이요. 못 봤어요?

 

정후가 고개를 젓는다.

영신이 초조한 듯., 903호 쪽을 돌아본다. 좀 있으면 문이 열릴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쪽이 불안하다.

영신이 문을 잡았던 손을 놓는다. 열렸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힌다.

그러나 마저 닫히기 전에 영신이 다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버린다.

 

영신 : 에이 씨. (성질을 내며 닫힘 버튼을 거칠게 눌러댄다) 아무 일 없기만 해봐. 진짜.

 

영신이 떨어져 있던 가방을 나꿔 챈다. 정후가 슬쩍 뒤쪽으로 물러선다.

영신은 초조하게 층수 표시를 보고 있다.

 

 

#63. 꼭대기층 복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튀어나오는 영신. 뒤따라 나온 정후가 4호쪽으로 가는 걸 보더니 3호 쪽으로 달려가 벨을 눌러댄다.

급해서 손으로 문을 쾅쾅 두들기기도 한다. 아무 대답이 없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비상구 쪽으로 달린다.

4호 쪽에서 문을 여는 척 하고 섰던 정후가 돌아본다.

 

 

#64. 옥상

 

고층 아파트의 옥상. 바람이 분다.

뛰어나온 영신이 사방을 둘러본다. 이쪽으로 달려가 보았다가 다시 저쪽으로 달린다.

그러다 멈칫 선다. 거기 옥상 끝에 서 있는 연희의 뒷모습. 위태롭게 서 있다.

 

영신 : 이봐요. 거기 언니.

 

연희는 반응이 없이 그저 그대로 먼 곳을 보고 있다.

영신, 두어 걸음 조심스레 다가서다가 연희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바람에 놀라 선다.

 

영신 : 나하고 얘기 좀 해요. 지금 꼭 해야 되는 얘긴데.. 그게 뭐냐면... 이 가방. 이거 댁에 꺼 맞죠?

 

연희가 휘청하는 바람에. 영신이 기겁을 해서.

 

영신 : 잠깐만. 잠깐. 저기..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니까.. 나한테 얘기해봐요. 뭔 일인지. 내가 다 들어줄 거니까...

         저기요. 이봐요. 나 좀 봐요.

 

그러나 연희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서서히 몸이 앞으로 기운다.

 

영신 : (다급히 소리쳐서) 나도 거기 서봤어요. 난 일곱 살 때야. 일곱 살 때 그렇게.. 그런데 서봤다고.

 

연희가 멈췄다. 영신의 소리가 들린 듯 하다.

 

영신 : (더 열심히) 그때까지 내가 알던 사람들이 다 나를 버렸거든. 나 다섯 살 때 내 엄마 아버지란 사람. 나, 내다 버렸어요.

         쓰레기통 옆에 있었대. 다섯 살짜리가. 그러고 고아원 다섯 군데나 돌았어요. 입양 되어 갔다가 버려지고,

         또 입양되었다가 이번엔 얻어맞고.. 그래서 너무 아파서. 죽어야지.. 생각한 거야. (말을 하면서 조금씩 연희에게 다가선다)

         일곱 살짜리가.. 죽으면 이제 안 아프겠지. 그 생각뿐이었다고.

 

이만치 떨어진 구조물 뒤, 그늘 속에 정후가 몸을 숨기고 서서 안경을 옆으로 뻗어 내놓고 있다.

안경의 카메라가 영신의 모습을 찍고 있는 중이다. 영신의 소리가 아주 잘 들린다.

 

영신소리 : 일곱 살 때 기억해요? 사람들 다 잘 기억 못하더라고. 근데 난 아주 생생해. 다 기억나요.

               겨울이었고, 추웠고, 맞은 데가 무지 아팠어.. 갈비뼈가 몇 대 부러져 있었거든.

 

// 이제 영신과 연희의 거리는 많이 가까워져 있다.

영신이 조심스레 또 한 걸음 내딛으려다가 놀라 선다. 연희가 영신을 돌아 본 것이다.

 

영신 : (눈을 맞추고 간절하게) 다 기억나는데.. 근데 이제 아프진 않아요. 다 그래요. 다 지나가더라고. 좀만 버티면 다 지나가요.

 

무표정하던 연희의 얼굴이 흔들린다. 울음이 삐져 올라오며 떨리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영신 : 지나가요. 믿어 봐요. 내가.. 해봤어요.

 

연희가 온 몸을 떤다. 울음이 솟구친다.

순간 영신이 성큼 다가서며 연희를 잡아 안고 끌어낸다. 중심을 잃고 무너져 앉는다.

그래도 연희를 끌어안은 손을 놓지 않는다.

연희가 그제야 운다. 소리를 내며 서럽게 운다.

영신, 그런 연희를 끌어안고 흔들어준다. 아이 씨.. 영신도 눈물이 괴고 있다.

// 구조물 뒤에서 정후가 촬영하던 안경을 거두어 얼굴에 쓴다.

 

민자소리 : 야. 왜 꺼.

정후 : 됐잖아. 이 정도면.

민자소리 : 임마. 그래도 고객이..

 

정후 그냥 안경을 벗더니 앞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선뜻 몸을 돌려 자리를 뜬다. 기분이 안 좋다.

 

 

#65. 어두운 방

 

방송국의 빈 회의실 쯤? 길다란 테이블 한 끝에 올려져있는 문호의 노트북.

그 화면에 옥상 위의 영신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정후의 안경이 찍은 화면이라서 앵글은 고정되어있는. 영신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영신 : 나 다섯 살 때 내 엄마 아버지란 사람. 나, 내다 버렸어요. 쓰레기통 옆에 있었대. 다섯 살짜리가.

 

떨리는 손이 자판의 스페이스바를 누른다. 화면이 정지된다.

문호다. 격동되는 마음을 누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간신이 마음을 진정시켰다 싶어서 다시 화면을 작동시킨다.

영신이 또 말하고 있다.

 

영신 : 겨울이었고, 추웠고, 맞은 데가 무지 아팠어.. 갈비뼈가 몇 대 부러져 있었거든.

 

문호. 결국 노트북 뚜껑을 덮어버린다. 더 볼 수가 없다. 후우.. 가까스로 긴 숨을 쉬는데. 결국 눈물이 고인다.

빈 회의실, 조명을 켜지 않아 어두운 공간 한 쪽 끝에 혼자 앉아있는 문호.

그 광경이 모노톤으로 빠지며 과거의 한 장면으로 오버랩되는....

 

 

#66. 과거. 모노톤의 회상. 폐차장.

 

폐차들 사이에 세워져 있는 문식이 몰던 낡은 지무시 트럭.

저녁 노을빛 아래 뭔가 몽환적으로 보이던 그 때, 그 날.

옆에는 준석이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방송 도구들을 조립 내지는 수리하고 있다.

트럭의 앞에서는 문식이 자동차 번호판을 떼내고 있는 중이다.

작업을 하던 문식이 옆을 돌아본다. 거기 어린 문호가 지나가는데. 손에 든 꽃무늬 손수건을 나풀거리고 있다.

// 시간경과

문호와 키높이를 맞춰 마주앉은 문식.

 

문식 : 명희 누나가 빌려 준 거야?

문호 : (끄덕이는)

문식 : 그럼 형이 세탁해서 돌려줄게. 깨끗하게 빨아줘야지.

 

문호, 끄덕이고 손수건을 내주더니 저리로 달려간다.

// 시간경과

어린 문호가 자동차 부속품 같은 걸로 만들어진 장난감 차를 줄로 매어 끌며 붕붕... 뛰어가다 멈칫 선다.

저 앞에 보이는 문식. 문식은 세탁해서 잘 접은 꽃무늬 손수건을 들고 우두커니 선 채.

문호의 시야로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 저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문호가 옆의 낡은 차?에 기어올라 그 너머를 본다.

문식이 숨어서 보고 있는 그 너머에는 명희와 길한이 나란히 앉아있다.

명희는 무릎에 노트를 펼쳐놓고 있다. 방송 원고라도 작성하던 중인 듯.

둘은 이야기하다가 길한이 뭔가 농담을 한 듯. 명희가 노트로 길한을 때리며 웃는다.

길한이 아프다고 엄살을 피다가 명희를 확 끌어안는다. 웃으며 밀어내지만 싫지 않은 명희.

이만치에 숨어 그런 그들을 보는 문식.

어린 문호의 눈에 비친 저녁 노을 아래 그 세 사람..

 

 

#67. 지방 철도 다리 아래 / 저녁

 

저녁 노을이 가득한데 낡은 승용차 한 대가 도착한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윤동원 형사. 슬렁슬렁 걸어오는 곳.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고 몇몇 제복 사복의 경찰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이미 시신은 치워져 있는 상태고, 주변에 증거가 있는지 수색하는 중이다.

위에는 철도가 지나는 다리. 그 아래는 말라가는 시내.

그 옆 덤불쯤에 시신이 있던 곳이라고 스프레이 표시가 되어있다.

사복의 지방서 차형사가 수상한 눈길을 보내며 다가온다.

 

차형사 : 어이. 거기. 뭡니까.

 

동원, 말없이 형사수첩을 펼쳐 보이며 명함 한 장을 건네준다.

 

차형사 : (들여다보며 읽는) 사이..버범죄 대...응센터...의 형사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동원 : 그러니까 피해자는 저 위를 지나가던 기차에서 던져진 거다.. 던져질 때 죽어 있었는지. 살았었는지는 아직 모르고요.

차형사 : (더욱 경계하며) 그걸 어케 아쇼.

동원 : 보고서 읽었어요. 그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주머니에서 나온 게 있다던데요. 메모 종이요.

차형사 : (의심스럽지만) 있지요.

동원 : 볼까요?

형사 : (망설이는) 근데.. 우리 쪽에서 보고서 올린 게 두 시간도 안 될 것인데. 어떻게 알고 서울에서..

동원 : 두 시간 사십분 됐습니다. 볼까요?

 

형사. 내키지 않지만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뒤적거려 작은 비닐 지퍼백 하나를 꺼내준다.

종이 한 장이 들어있다. 비닐을 통해 읽혀지는 종이의 메모 내용. [Healer@moebius.com]

동원, 햇빛이 잘 비치게 들더니 휴대폰을 꺼내 찍으려고 한다.

형사가 얼른 손으로 막으며

 

형사 : 이거 증거물입니다. 아직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중요한..

동원 : 힐러.

형사 : ..예?

동원 : 이 메일 주인. 힐러라는 자. 내가 오년 넘게 쫓고 있어서요. 웬만하면 좀 봐주시죠.

 

형사.. 머뭇거리다 가렸던 손을 내려준다.

동원 그 메모를 찍는다.

 

 

#68. 민자 아지트

 

민자가 아지트 한쪽에 구비된 작은 싱크대에서 김밥 준비를 하고 있다.

김에 밥을 대충 얹고, 그 위에 김치 주리리 얹고. 그 옆에 반찬통에서 멸치 볶음 꺼내 얹고.

생각난 듯 참기름도 줄줄 뿌리고 대충 둘둘 만다. 그러면서 통화중. (기기판에 놓여진 마이크셋으로)

 

민자 : 고객께서 우리가 보낸 정보에 아주 만족하신 모양이다. 나머지 5번 6번 7번 다 필요 없고. 한 가지만 더 알아 달라네.

         그게 뭐냐면.. 하아.. 참. 그게.. (뜸들이는)

정후소리 : 아. 뭔데.

민자 : 좀 마이 오글거리긴 하지만. 뭐.. 고객의 뜻이니까.

 

 

#69. 치수네 까페 앞 길 / 밤

 

이만치 어둠에 서서 길 건너 저편의 까페를 보고 있던 정후.

 

정후 : 뭐?

민자소리 : 채영신의 꿈은 뭔가. 그녀의 간절하게 이루고 싶어하는 소망은 뭔가. 그걸 알아 달래.

정후 : ... 놀고 있네.

민자소리 : 난, 지랄하네.. 그랬는데.

정후 : 아줌마가 좀 뒤져봐. 여자들 지가 먹는 밥알까지 찍어서 블로그에 올리고 그러잖아. 꿈같은 거 어딘가 떠들어놨겠지.

민자소리 : 말했잖냐. 이 여자애. 어느 블로그. 어느 SNS. 어느 까페에도 가입한 게 없다고.

정후 : (짜증난다)

민자소리 : 너. 채영신이하고 소개팅이라도 해볼래? 그럼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잖아. 저기요. 꿈이 뭐에요?

               (흥얼흥얼 노래로 이어지며) 이름이 뭐에요. 전화번호 뭐에요.

 

어두운 곳에 있는 정후가 보는 저 편. 까페의 유리창으로 보이는 환한 불빛.

그 안에서 치수와 영신과. 그리고 그들의 관심을 받으며 앉아있는 연희의 모습이 보인다. 모두 아래층에 있는 셈.

정후. 주위의 건물들을 살펴본다. 침입로를 가늠하는 중이다.

 

민자소리 : 힐러야? 뭐할라고?

정후 : (후드를 둘러쓰고는 이동하기 시작한다) 일할라고. 돈 벌어야지.

 

정후가 경로를 정한 듯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옆의 건물을 타고 오른다.

마치 야마카시라도 하는 듯, 건물의 벽을 타고 이동을 하고. 지붕으로 올라.

지붕에서 지붕으로 건너뛰면서 치수네 집 쪽으로 다가간다.

마지막으로 지붕을 건너 뛰어 치수네 집 이층 창문에 안착한다. 창문은 잠겨있다.

주머니에서 꺼낸 납작한 도구를 틈새에 밀어 넣어 간단하게 연다.

 

 

#70. 영신의 방

 

창문으로 들어서는 정후. 아직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방.

정후, 핀라이트를 켜서 입에 물더니 책상으로 가서 서랍을 열어보기 시작한다.

 

민자소리 : 뭐 찾는데.

정후 : 일기장 같은 거.

민자소리 : 요즘 일기장에 일기 쓰는 애가 어딨냐.

 

정후. 아랑곳없이 책상 아래 옆의 상자.. 등을 뒤진다.

 

 

#71. 민자의 아지트

 

김밥 만 것을 썰지도 않고 그대로 들고 뜯어먹던 민자가 옆을 돌아본다.

거기 모니터에 빨간 워닝 표시가 들어오고 있다.

 

 

#72. 영신네 집 이층 복도

 

영신이 연희와 함께 계단을 올라와 걸어오며

 

영신 : 여기가 목욕탕. 일단 목욕부터 해요. 내가 갈아입을 옷 갖다 줄테니까. 화장품도 거기 있는 거 아무거나 써요.

 

이제 많이 안정되어보이는 연희가 미소를 지어보이며 목욕탕으로.

 

 

#73. 민자의 아지트

 

김밥 만 것을 썰지도 않고 그대로 들고 뜯어먹던 민자가 옆을 돌아본다.

거기 모니터에 빨간 워닝 표시가 들어오고 있다. (검색어를 입력해서 스캔이 되면 알람을 울리게 만든 프로그램)

민자가 키보드를 두들기자. 경찰 보고서가 뜬다.

(내용 보충요) 힐러,, 고성철. 이라는 단어에 붉은 밑줄이 그어져 보인다.

(검색어) 페이지를 넘기자 러브호텔 앞에 고성철과 함께 나오는 정후의 모습이 CCTV에 찍힌 모양으로 드러난다.

정후는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을 보이지 않지만, 고성철의 얼굴은 환히 드러나 있다.

 

 

#74. 영신의 방

 

정후. 뒤지다가 멈춘다. 문 밖에서 소리가 났다.

 

 

#75. 영신네 집 이층 복도

 

영신은 안쪽에 있는 자기 방으로 간다.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는다. 돌려서 연다.

 

 

#76. 영신의 방

 

들어서는 영신.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켠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영신이 침대에 올려져 있던 개어놓은 빨래 중에서 옷 두어 가지를 집어 들고 서랍장 쪽으로 가며

 

영신 : 새 빤쭈가 어디 있었는데.. (서랍장 안을 뒤지며) 어디 놨더라.. .. 여깄다.

 

비닐에 든 새 팬티 한 장을 들고 다시 방을 나간다.

문이 닫히고. 그제야 보이는 문 위쪽 천정. 정후가 책장 등을 이용해서 천정에 납작 붙어 있다가 가볍게 떨어져 내린다.

다시 책상 쪽으로 가려다가 무엇을 봤는지 멈췄다.

이제까지 불이 꺼져 있어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

민자의 소리가 들린다.

 

민자소리 : 힐러야. 너 수배범 됐다.

정후 : (계속 앞의 어떤 것을 보며) 수배범은 옛날부터 되어 있었잖여.

민자소리 : 이번에는 살인용의자래는데?

정후 : (그제야 신경 쓰여서) 왜.

민자소리 : 고성철, 그 인간이 죽었대.

정후 : 아 왜애.

민자소리 : 당분간 일 접고 잠수 타자. 거기 바로 철수해.

정후 : ...

민자소리 : 뭐해. 바로 나오라고.

정후 : 곤란한데.

민자소리 : 뭐가.

정후 : 이 여자 옆에 좀 더 있어야겠어.

민자소리 : 얘가 뭐래는 거야. 너 지금 살인용의자가 돼서..

정후 : 꿈을 알아 보래매. 그냥 꿈이 아니라 진짜 꿈을 알아보고 싶은 거잖아. 그 고객님은.

         그럼 옆에 딱 붙어있어야지. 그래야 제대로 알아보지.

 

그제까지 정후가 보고 있던 것은 영신이 벽에 붙여놓은 정후의 사진이다. (상수에게서 훔쳤던)

좀 더 줌아웃을 했더니. 그 옆에 문호의 종군기자 시절 사진이 있고.

좀 더 뺐더니 그 옆에 카메라를 들고 렌즈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영신의 사진이 있다.

거울 속의 자신을 찍은 셀프 사진인 듯. 그렇게 나란히 세 사람.

 

=THE END=

 

 

 

 

 

 

 

 

 

 

 

 

 

 

 

 

 

 

 

 

 

 

 

 

 

 

 

첨부파일 힐러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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