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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보일까봐] 01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2.09.05|조회수849 목록 댓글 2

[눈물이 보일까봐] 01











#1. 동대문 의류 도매상가


빼곡히 들어찬 도매상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걸어오는 영은. 양 어깨에 큰 가방을 하나씩 메고 힘겹게 느릿느릿 온다.

유행과 상관없는 면바지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

언더웨어 가게 앞에 멈춰 선다. 메리야스,브래지어,잠옷 등이 걸려있다. 이것저것 만져보고 골라본다.


주인 : (안면 있는 듯) 왔어?

영은 : 안녕하세요? 주문한 거 들어왔어요?


주인, 브래지어 스무장쯤 뭉치로 꺼내준다. 영은, 생글거리며 받아서 가방에 넣는다.

걸려있는 실내복이 눈에 들어온다. 예쁜 그림이 프린팅 된 원피스형 이너웨어다.


주인 : (내려주며) 이쁘지? 싸게 나왔는데 몇 장 가져가봐.

영은 : (망설이며) 얼만데요?

주인 : 소매로는 한 장에 만오천원 받는데 만원에 가져가. 몇 장 줄까?

영은 : ...엄마한테 전화해보구요.

주인 : 엄마 취향 내가 잘 알어. 가져가. 오늘 중으루 다 팔릴거야. (짐짓) 없어 못 팔어.

영은 : (진지하다) 정말요? 정말 없어서 못 팔아요?

주인 : 오늘 새벽만 열 두장 나갔어. 지금 안 사면 없어.

영은 : 진짜요? (눈빛에 금방 걱정 어리며) 지금 안 사면 정말 없을까요?



#2. 동대문 지하철역 근처 대로변


양손에 종이 가방을 하나씩 들고, 양 어깨에 커다란 천가방을 메고 지하철 역쪽으로 힘겹게 걸어가는 영은.

갑자기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지기 시작한다.

당황하며 뛰기 시작하는 영은. 근처 노점에 화분을 주욱 늘어놓고 있던 노파 한사람 보인다.

소나기에 서둘러 다시 화분을 걷기 시작한다. 행동이 영 꿈뜨고 느리다.

영은, 저만치 가다가 멈칫멈칫 돌아본다.

이윽고 가방을 역 입구에 내려놓더니 도로 달려오는 영은. 화분을 처마 아래로 옮기기 시작한다.


영은 : 할머닌 저기 가 계세요. 제가 옮겨 놀께요.

노파 : 하이구,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영은 : 금방 다 옮겨요. 저쪽에 가 계세요.


부리나케 처마 밑으로 다 옮겨놓는다.


영은 : (으쓱하며) 그럼 많이 파세요.

노파 : 고마워 어쩌나.

영은 : 에이,고맙긴요 뭘. (목례하고 가는데)

노파 : 여봐, 아가씨,

영은 : 예? (돌아보면)


노파, 작은 들꽃 화분 한개를 건넨다.


노파 : 가져가요.

영은 : (멈칫) 주시는 거예요? 저한테요?


영은, 받으며 좋아라 힉 웃는다.


영은 : 고맙습니다!



#3. 지하철 플랫폼


화분까지 안아들고 휘청휘청 걸어오는 영은. 떠나려는 지하철에 급히 올라탄다.



#4. 영은집 근처 지하철역 입구


쏟아지는 빗줄기. 낡은 중형 승용차 본넷 앞에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는 수현. 들여다보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난감한듯 보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번호 누른다.


수현 : 실장님 접니다...차에 문제가 생겼어요...아무래두 좀 늦겠는데요?


가방을 메고 들고, 화분을 품에 안고, 근처의 지하철 역 계단을 올라오는 영은.

비 내리는 거리를 잠깐 바라본다.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빗속으로 뛰어나간다.



#5. 거리 연결


비를 피하며 뛰어오는 영은. 문득 가방을 추스리는데 갸웃한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하나 둘 셋 세어본다. 종이 가방 하나가 없다.

표정이 딱 굳는 영은. 다시 한번 가방 갯수를 확인하지만 역시 없다. 울상이 되며 온 길을 되돌아 뛰어간다.

지하철역 부근에 다다르는 순간, 비에 젖은 나머지 종이가방의 밑이 빠지면서

브래지어와 팬티들이 빗길에 투투툭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대로 가는 영은. 영은 발자취를 따라 점점이 떨어지는 속옷들.

그때, 우산을 받쳐든 손길이 속옷들을 하나씩 하나씩 집어들고 따라간다.



#6. 지하철 역사 안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지만 결국 못찾는 영은. 낙심천만의 얼굴로 기운없이 돌아선다.

터덜거리며 층계를 올라가는데 눈앞에 불쑥 나타나는 속옷뭉치들. 흙이 묻어 엉망이다.

놀라서 고개 들면 한 남자가 머쓱한 얼굴로 마주 보고 있다. 수현이다.


영은 : (얼른 받아들고 당황) ...어디서...어디서 주우셨어요?

수현 : (민망한듯) 떨어뜨리구 가시길래요.

영은 : (창피해서 시선 깔고) 고맙습니다.


재빨리 층계를 뛰어올라간다.



#7. 골목


빗속을 뛰어가는 영은. 정신없고 속상하다.

우산을 들고 뒤에서 쫓아오는 수현.


수현(E) : 잠깐만요!


부르는 소리 못 듣고 그대로 가는 영은.


수현(E) : 저기요! 잠깐만요!

영은 : (그제야 돌아보며) 예?


수현, 달려오더니 우산을 씌워준다. 영은, 얼떨떨하니 바라본다.


영은 : (우산 올려다보며 당황) ...괜찮은데요...다 왔는데요.

수현 : 그게 아니구요.


여성용 팬티 한장을 건넨다.


수현 : (얼굴 벌개져서) ...또 떨어졌어요.

영은 : (괴롭다)


황급히 받아서 찢어진 종이가방 안에 넣는다.

가방을 추스려 품에 안는 영은. 짐이 많아서 폼이 영 말이 아니다.

목례하고 돌아서는 수현.

영은, 저만치 멀어지는 수현을 지켜본다. 빗발이 굵어진다. 돌아서다가 결심한듯 다시 돌아선다.


영은(E) : 저기요!


멈칫 돌아보는 수현.

달려오는 영은. 우산 속으로 쏙 들어온다.


영은 : (방향 가리키며) 저기까지만 좀... (씩 웃고) 금방이예요!

수현 : (당황) ...



#8. 속옷가게 건물 앞


주택가 인근 이층짜리 상가 건물. 상가 일층에 속옷 가게가 세들어있다.

부근으로 걸어오는 두사람. 우산 속의 어색한 침묵.


영은 : 다 왔어요. 고맙습니다. (하늘 보고 손 쓱 내밀어본다) 어, 그새 비가 다 그쳤네요?

수현 : (손 내밀어보고) 그러네요?


수현, 우산을 접으며 비에 젖은 한쪽 어깨를 턴다.

가만히 옆모습을 훔쳐보는 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화분을 쓱 건넨다.


수현 : ?

영은 : 고마워서요... (얼굴 붉어져서) 받으세요. 고마워서 드리는 거예요.


수현, 머뭇하다가 받는다.


영은 : 무슨 꽃인지 아세요?

수현 : (본다) ...모르겠는데요.

영은 : (씩 웃고) 저두 몰라요.

수현 : (어이없어 웃는다) ...고마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화분 안고 돌아서는 수현.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영은. 왠지 아쉽다. 돌아서는 순간,

건물 안에서 나오는 인옥. 박스를 한아름 안고 나오더니 길에 내팽개친다. 빗길 위에 박스가 뒹군다. 옷 상자들이다.


인옥 : 주인 허락두 없이 누구 맘대루 이딴 짐을 잔뜩 쌓아 놔? 응?

영은 : (당황) 엄마.


뒤이어 나오는 종수. 열 받았다. 박스들을 추스린다. 분위기 험악하다.


종수 : 며칠만 좀 넣놓자구요! 며칠만!

인옥 : 영은이 니가 얘한테 창고 문 열어줬니? 응?

영은 : (움찔)


저만치 가던 수현. 소란함에 머뭇머뭇 돌아본다.


인옥 : 이 녀석 월세 안내서 지하실서 쫓겨난 거 아니, 모르니. 이런 놈 뭘 믿구 창고문을 열어줘?

종수 : (발끈) 그렇다구 남의 물건을 이 따위로 취급합니까?

인옥 : 우리두 돈 내구 쓰는 창고야. 우리꺼 다 밀쳐놓구 쌓아놓으면 어쩌겠다는 거야?

종수 : (눈 부릅뜨고 다가온다) 밀치긴 뭘 밀쳐놨다 그래요? 네?

인옥 : (얼른 외면하고 영은본다) 왜 이렇게 늦었어? 들어와, 얼른!


가게 안으로 서둘러 들어가는 인옥.

성난 얼굴로 보다가 묵묵히 박스를 치우는 종수.


영은 : (눈치 보며 조그맣게) 거봐요. 제가 빨리 치우라 그랬잖아요.


종수, 이윽고 폭발한다. 영은 멱살을 불끈 움켜쥔다.


종수 : 죽을래?

영은 : (질리는)

수현 : (버럭) 이거 봐요!


흠칫 보는 영은. 수현, 다가온다.


수현 : 그거 놓구 얘기하죠.

종수 : (이건 또 뭐냐는 눈빛)

수현 : 아가씨 들어가세요...얼른 들어가요.


잠깐 머뭇하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는 영은.


종수 : 뭐야,넌?

수현 : (두렵지만) ...

종수 : (다가오며 주먹 다짐) 너 뭔데? 뭔데 니가 참견이야,엉?

수현 : 사정은 모르겠지만, 꼭 그렇게 거칠게...


순간, 그대로 한대 갈기는 종수. 수현, 벌렁 나가 떨어지는데.


종수 : (한심한 듯 내려다 본다) ...꺼져,임마.


손 털고 사라진다.

수현, 아픈 듯 찡그리며 얼굴 쓸어내린다. 허탈하다. 빗물에 옷이 엉망이 됐다.



#9. 속옷가게 안


가게 한쪽에 기죽어 앉아있는 영은. 

인옥, 흙 묻은 속옷 뭉치를 살피며 억장이 무너진다.


인옥 : 장사 며칠이나 해야 이걸 다 뽑아? 내가 속 터져 죽어. 어떻게 이게 땅에 떨어져 이 모양이 되도록, 모를 수가 있니? 응?

영은 : ...(고개 푹 숙이고 있다)

인옥 : (휙 집어 던진다) 너 다 입어! 이거 빨아서 평생 니가 다 입어! 그러게 비오는날 동대문은 뭐하러 간다구 깝쳐?

영은 : 그러게.


차갑게 일어나 가게 뒷문으로 나가는 인옥.

가만히 밖을 살피는 영은.



#10. 가게 앞 가게


문 열고 안에서 나오는 영은.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낙심하며 다시 돌아서는데 바닥에 뭔가 반짝인다. 열쇠 서너 개 쯤 달린 키홀더다.

다가가 조심스레 줍는다.



#11. 파인 유통 본사 앞


파인유통 본사. 깔끔한 독립 건물이다.

택시에서 내리는 수현. 서둘러 안으로 들어간다. 흙 묻은 옷에 피멍이 든 입술.



#12. 동 복도


수현, 옷매무새 추스르며 들어온다.

정희, 입구에서 방명록 같은 것 정리하고 있다. 단정한 정장차림의 30대 후반.


수현 : 실장님,

정희 : 어, 왔구나? (유심히 본다) 누구랑 싸웠어?

수현 : 오다 미끄러졌어요. (얼굴 쓸며) 표 많이 나요?


다가와 살펴봐주는 정희. 안에서 박수소리 난다.


정희 : 약 발라야겠다. 우선 들어가. (눈길이 화분으로 내려간다)


수현, 화분을 슥 내민다.


정희 : 뭐야?

수현 : 선물요.


안으로 들어간다.

받아들고 어이없다는듯 웃는 정희.



#13. 동 강당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파인/ (주) 파인 유통 / 창립 10주년 기념식장.

연회 음악 흐르는 가운데, 정장 차림의 남녀들이 뷔페상 주위에 차려진 테이블에 둘러서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본사 직원들,지점장들,사업 관계자들,주주 등 5,60명 남짓.

두식, 손님들 자리로 가며 일일이 악수하고 인사한다. 세련된 양복에 올백으로 넘긴 머리. 꽤 멋을 냈다.

들어오는 수현. 두식과 눈 마주친다.


수현 : 늦었습니다.

두식 : (반가운) 이놈아, 너 기다리느라구 삼십분이나 늦게 시작했다. (테이블 한 손님에게) 제 아들 놈입니다.

수현 : (인사) 첨 뵙겠습니다. 조수현입니다.

두식 : 미국서 엠비에이를 따가지고 작년에 돌아왔어요. 그게 그렇게 어렵다 그러는데... 이놈이 해오니깐

         아주 별 거 아닌 것 같단 말입니다.

수현 : (안색 딱 굳는다)

손님 : 훌륭한 자제분 두셨습니다.

두식 : 내내 장학금 받아 다니드니, 졸업할 때두 우등으루 마쳤습니다.

         전 거, 미국 아이들 대단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두 않은 모양이예요.


수현에게 술 권하는 손님. 수현, 떨떠름한 얼굴로 잔을 받는다.

인사하고 수현과 나란히 다른 테이블로 가는 두식.


두식 : (걸으며 나직하게) 누구한테 터졌냐?

수현 : (입 가린다) 터지긴요.

두식 : (못마땅) 한심한 놈.

수현 : ...

두식 : 차 한대 새로 뽑아.

수현 : (담담히) 아직 탈만 합니다.

두식 : 뭐가 탈만해? 길바닥에서 비명횡사 하구 싶으냐? (표정 변한다) 하이구, 송의원!


다가오는 중년남자 한사람. 반가이 악수하는 두식.

심드렁히 지켜보는 수현.



#14. 속옷 가게 앞길 (밤)


가로등 불빛 아래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불 환히 켜진 가게 안으로 정리하는 영은 모습 보인다.

행인 뜸한 늦은 시간. 한쪽에 박스들을 주섬주섬 쌓고 있는 종수. 비 맞을새라 서둘러 비닐을 덮는 중이다.

속옷가게 불이 꺼진다. 우산 쓰고 나오는 영은. 힐끔힐끔 종수 쪽을 보며 셔터를 내린다.

종수, 눈길 힐끗 주더니 한쪽에 털썩 앉아 담배 꺼내문다. 좀 안됐다.

영은, 뭐라고 말 붙이려다가 관둔다. 셔터 잠그고 돌아서서 가는데.


종수(E) : 부탁 좀 하자.

영은 : (움찔 돌아보는)

종수 : 내가 요번에 한 껀 하면 이까짓 건물 통째루 산다!

         이거 뭔지 아냐? 이게 그 유명한 프라다랑 베르사체라는 거다... (피식) 하긴 니가 그런 거 들어나 봤겠냐.

영은 : ...

종수 : 딱 하루만 짐 좀 맡아주라. 낼 아침 일찍 뺄께.

영은 : ...미안해요.


돌아선다. 종수 얼굴에 자조가 어린다.

잰걸음으로 가는 영은. 저만치 가다가 점점 발걸음이 느려진다. 돌아본다.

고개 숙인 채 담배 연기만 푸욱 내뿜고 있는 종수. 비를 다 맞고 있다. 안됐다.

결심한듯 되돌아서더니 뚜벅뚜벅 온다. 셔터를 드륵 열어올린다.

멈칫 보는 종수.


영은 : ...정말 하루만이예요. 네?



#15. 영은집 외경 (밤)


오래되고 후미진 변두리 산동네의 주택가. 불 환히 켜진 다세대 옥탑집.



#16. 집 부엌 (밤)


방 두개에 작은 거실. 단촐한 살림살이.

마루에 면한 씽크대와 식탁. 그 위에 찬통이 여러 개 놓여있다. 갖가지 밑반찬을 담는 인옥.

들어오는 지은. 물을 따라 마신다.


지은 : 언니 갖다주게?

인옥 : 니 언니 꼴이 말이 아니드라. 고시원 밥이 말이 밥이지, 그게 어디 살루 가겠니.

지은 : 갖다주면 뭐해? 안 먹구 또 다 버릴걸. (들여다보며) 어휴, 집에선 나오지두 않는 반찬이네?


더덕무침 하나 들고 먹어본다.


인옥 : 간 맞니?

지은 : 좀 짜다.


인옥, 자기도 하나 먹어본다.


인옥 : (한숨) 살다살다 별꼴을 다 당해. 너 지하실에 살던 그 시커먼 녀석 알지?

지은 : 그 남자가 왜?

인옥 : 어디서 가짜 메이커 옷을 잔뜩 구해다 우리 창고에 쌓놨잖아. 우리 물건 다 헤집어 놓구...

지은 : 정말요? 어머, 미친 자식.

인옥 : 어디서 뭘하다 온 녀석인지 몰라두...무섭드라...눈을 막 치켜뜨면서 덤비는데...

지은 : 싸웠어요?

인옥 : (서글픈 웃음) ...

지은 : (뒤에서 와락 끌어안으며) 우리 엄마, 너무 속상했겠다.

인옥 : (몸을 빼며) 오늘 일진이 말이 아니다. 영은이 저건 떼오란 말두 안한 잠옷을 오만원 어치나 떼오다가

         길에서 잃어버리질 않나.

지은 : 하루 이틀이유...이해해, 엄마가.

영은(E) : 다녀왔습니다!



#17. 영은 지은방 안 (밤)


한쪽에 미니 화장대와 책상 하나. 연주회 때 찍은 지은 사진이 벽에 붙어있다.

드레스를 입고 플룻을 든 화려한 지은의 모습.

같은 연주회날, 경은,지은,엄마,영은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도 나란히 걸렸다.

들어오는 영은, 상의 벗다가 뭔가 툭 하고 떨어진다. 아까 주운 그 열쇠고리다.

열쇠고리 몸통에 동그랗게 오려진 흑백사진이 끼워져있다. 돌박이 남자아기를 안은 여인 사진이다.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은 사진 속 여자. 우람한 체구에 옷이며 표정이며 폼이며 촌티가 줄줄 난다.

들여다보며 쿡 웃는 영은. 전화기 들고 들어오는 지은.


지은 : 좀 나가줄래?


영은, 일어나 나간다.

화장대 위에 장미 바구니가 얹혀있다.


지은 : (통화) 민석이니? 나야, 지은이... (싫지 않다) 싫다는데 왜 자꾸 꽃을 보내?



#18. 동 마루 (밤)


영은, 방에서 나온다.

밑반찬 챙겨들고 부엌에서 나오는 인옥.


영은 : 어디 가세요?

인옥 : 큰언니 고시원.

영은 : (짐 받으며) 내가 갈께요,

인옥 : 됐다. (나가며) 밥이나 챙겨 먹어.

영은 : ...(배웅) 다녀오세요.



#19. 속옷 가게 앞 (밤)


빗발이 거세졌다. 가게 앞에 웅크리고 앉아 사발면 먹는 종수. 으슬으슬 춥다.

다 먹고 한쪽에 동그랗게 구부려 눕는다. 덜덜 떨린다. 일어나 가게 문을 한번 괜히 밀어본다. 셔터가 굳게 잠겼다.

망설이다 라이터를 켠다. 주머니에서 만능키를 꺼낸다. 이리저리 돌려본다.

이윽고 열린다. 재빨리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20. 가게 안 (밤)


어두운 실내로 들어오는 종수. 한쪽에 옷박스들이 쌓여있다. 흐뭇하다.

걸려있는 속옷들 괜히 툭툭 쳐본다.

한쪽 구석에 남비와 가스버너가 놓여있다. 버너를 켜는 종수. 따뜻한 불꽃 앞에 앉아 옷 말리고 손을 쬔다.



#21. 영은집 외경 (밤)


전화벨 소리.



#22. 영은집 마루 (밤)


잠옷차림으로 방에서 나와 전화받는 영은.


영은 : 여보세요? ...네, 맞는데요?......(놀라) 네? 불이...나다뇨?



#23. 속옷가게 건물 앞 (밤)


건물이 활활 불타고 있다. 소방차가 여러대 와서 진화하는 중이다.

놀라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영은. 몰려든 사람들을 붙잡는다.


영은 : 어떻게 된거예요? 왜 불이 났어요? 어떻게 된건데요? 네?


행인1, 모르겠다고 고개 흔든다.

뒤이어 뛰어오는 지은. 어이없어 바라본다.


영은 : (절규) 빨리 좀 꺼주세요! 우리 가게 다 타요! 아저씨, 빨리 좀 꺼주세요!


가게로 뛰어들려는 영은을 말리는 사람들.



#24. 시간경과


동이 훤히 터온다. 새까맣게 그을러 형체만 남은 건물 앞. 일층은 대부분 탔다.

그 앞에 넋나간듯 멍하니 서 있는 인옥.

타다 남은 속옷가지들을 허겁지겁 뒤적거리고 있는 영은.

타버린 종수의 박스들이 보인다. 타다 남은 여성용 옷가지가 비죽 보인다.

멈칫 하는 영은. 가만히 집어드는데 손이 떨린다.

건물 주인 여자, 뒤에서 다가온다.


주인 : 소방관들 말로는, 조사를 더 해봐야 알겠다 그러지만...

인옥 : (본다)

주인 : 아줌마네 가게에서 불길이 펑 하구 치솟았다 그러네...목격자가 있어요.

인옥 : 그 시간에 우리 가게에 아무두 없었어요.

주인 : 그걸 누가 알아요? 내가 그렇게 가게 안에서 음식 해먹지 말라 그랬잖아요.

인옥 : 버너에서 불이 붙었대요?

주인 : (외면) 그거 아님 뭐겠어요? 펑 소리가 났대잖아요!

인옥 : 누전 됐을 수두 있잖아요!

주인 : 누전이 왜 돼? 점검을 하루 건너 하는데...

인옥 : 버너에서 불났다구 누가 그래요? 목격자 데려와봐요.

주인 : (거칠어진다) 이 아줌마 못쓰겠네? 아줌마두 눈으루 똑똑히 봤잖아? 보면 몰라요?

         (건물 가리키며) 이게 어느집에서 난 불인지 보면 딱 몰라?

인옥 : (분해서) 데려와! 목격자 데려와봐요!

주인 : 목격자 스무명두 더 데려올 수 있으니까! 물어내요. 당장 피해 보상해!


영은에게 다가가 팔을 덥썩 나꿔채는 인옥.


인옥 : 너 가게서 라면 끓여먹었니?

영은 : 예?

인옥 : 그랬니?

영은 : (긴장한다) ...

인옥 : 버너 잘 껐어?

영은 : 네.

인옥 : (잡고 흔들며) 정말 잘껐지? 응?

영은 : 네, 정말 잘 껐어요. (글썽한다)



#25. 두식집 외경


고급 주택가의 아담한 이층 양옥.



#26. 동 식당


아침 식사하는 두식과 수현.

가정부, 상 위에 찌개를 내려놓고 개수대로 간다.


두식 : 요번달 너희 지점 매출 실적이 십이개 지점 중 십등이야. 알구는 있냐?

수현 : (태연히) 네 압니다.

두식 : 아는 놈이 아침밥이 넘어가? 미국서 공불해오면 뭘하나? 분당점은 고졸 지점장인데두 일등이다.

수현 : 아버진 국졸이신데두 업계 일등이시잖아요.

두식 : 뭐?

수현 : 제가 언제 미국서 엠비에이를 받았습니까? 여기서 대학 떨어져 미국으루 간 거잖아요?

         우등은 커녕 졸업이나 제대루 한 게 다행이구요. 왜 남들 앞에서 자꾸 거짓말을 하세요.

두식 : (가정부 앞에 망신이다) ...

수현 : (차분해지며) ...저두 나름대로 애쓰고 있습니다. 망하진 않을 겁니다.

두식 : 경영이란게 이론으루 되는게 아니야. 다 정신력이야. 내일까지 영업 전략 스무 가지랑,

         서른 살까지 달성할 니 인생 목표 스무 가지, 본사로 제출해라. 나는 니 나이 때 어땠는 줄 알아?

수현 : 아주머니, 국 좀 더 주세요. 미역국이 아주 맛있게 됐네요.

가정부 : 예... (두식 눈치 보며 국 떠준다)

두식 : 정신 똑바루 차리구 살아!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덴지 알아?

수현 : ...(묵묵히 국물 떠 먹는다)

두식 : 혜경이 담주에 들어온다면서? 오자마자 결혼식 올려. 도대체 뭐하나 제대루 하는 게 없어. 마냥 미루구, 또 미루구,

수현 : 아버진 왜 윤실장님하구 미루구 또 미루세요?

두식 : 주제 넘은 소리한다. 윤실장이랑 내가 무슨 상관이야?

수현 : 저 당분간 가게에서 지낼께요. 출퇴근하기 너무 멀어서요. (일어난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27. 승용차 안


출근하는 두식. 뒷좌석에 앉아있다.


두식 : ...(창 밖 보며 혼잣말) 망할 자식.

운전기사 : 예?

두식 : 자네 말구.


눈 지긋이 감는다.



#28. 사장실


들어오는 두식. 따라 들어오는 비서.


두식 : (자리로 가며) 무슨 일인데?

비서 : 지난 번 말씀하신 박인옥씨 인적사항 말인데요.

두식 : (얼굴빛 달라지며 멈칫) 알아냈어?

비서 : 네.

두식 : (방향 바꿔 소파로 와서 앉는다) 어디 산대? 서울 살아?

비서 : 네. (메모 내민다) 연락처 여기 있습니다.

두식 : (들여다보며 희미한 미소) 애들은 몇이나 된다 그래?

비서 : 따님만 셋이래요.

두식 : ...남편은 뭐하는 사람이래?

비서 : ...

두식 : 왜?

비서 : 이혼...하셨답니다.

두식 : (멈칫) ...언제?

비서 : 더는 알아보질 못했습니다...고향 분이세요?

두식 : ...수고했어.


인사하고 나가는 비서.

두식, 담배 하나 꺼내서 문다. 다시 우두커니 메모를 들여다본다.


두식 : ...이혼은 왜 하나...잘 살지.



#29. 인옥방 (밤)


인옥 앞에 앉아있는 경은과 지은 그리고 영은.

이부자리 깔고 벽에 기댄 채 핼쓱한 인옥.


인옥 : 가게 세 빼서 대충 피해난 거만 보상해주면 돼. 우리집 이거 월세로 돌리면 가게 하나쯤 새로 차리는 거 문제두 아냐.

         경은아, 너 아무 생각말구 공부나 열심히 해. 고시원에서 나오지두 말구, 암것두 못 들었다 치구, 공부만 하면 돼. 알았지?

경은 : 엄마.

인옥 : 잘 들어...엄마는 이런 일 생기구, 또 생기구, 백 번 생긴다 그래두 하나두 안 무서워.

         우리 경은이 그렇게 어렵다는 사법시험 일차에 척 붙구,

         우리 지은이는 또 얼마나 이쁘구 훌륭하게, 음악가의 길을 걸어가구 있니.

영은 : ...

인옥 : 어느 엄마가 이렇게 똑똑하구 이쁜 딸들을 뒀대? 나만큼 잘난 딸들 가진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빚이 억만금이면 어때? 엄마 금새 일어날 수 있어.

영은 : ...

지은 : (눈물 닦으며) 뭐한다구 내가 돈 많이 드는 음악을 시작해가지구... 미안해, 엄마.

인옥 : 미안하긴 니가 뭐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 하지. (담담하려 애쓰며 외면)

영은 : ...

지은 : (흐느끼며) 도대체 누가 불을 낸건데? 영은이 안 그랬다는데 도대체 누구야, 응?

경은 : (철썩 치며 단호하게) 그만 해. 안 그치니? 운다구 뭐가 나져?



#30. 영은집 근처 골목 (밤)


조용히 밖으로 나오는 영은. 담벼락에 기대고 주저앉는다.

곁에 있던 돌멩이를 주워 길에 마구 집어 던진다. 무릎에 얼굴 묻는다.

저만치서 지켜보는 종수. 표정이 복잡하다. 작정하고 가만히 다가온다.

인기척에 고개 드는 영은. 흠칫 놀라 일어난다.


종수 : (나직이) 물어 내라.

영은 : 네?

종수 : (노려본다) 내 전 재산 털어서 사논 물건이야. 그게 어떻게 만든 건지나 알어?

영은 : (멍한) ...

종수 : (양 팔 꽉 잡고 포위한다) 다 물어 내! 당장 안 물어내면 너두 죽구, 나두 죽는거야... 알아들어?

영은 : (질리며) ...



#31. 영은집 마루 (밤)


불꺼진 마루. 들어오는 영은. 방으로 가려다가 인옥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멈칫한다.

조금 열린 문틈으로 새나오는 인옥 목소리. 통화중이다.


인옥 : 되는대루 조금만 빌려주라.....금방 갚을께...

         (매달리듯) 얘, 내 성격 잘 알잖아...이자 확실히 쳐서 금방 갚어. 도와주라. 이번에 도와주면 평생 잊지 않을께......

         (무안) 어어, 그래?......아냐, 괜찮아. 이해해...너무 늦게 미안하다...잘있어.


전화 끊는다. 갑자기 얼굴 감싸고 흑 무너지는 인옥. 조그맣게 웅크린 인옥의 뒷모습. 소리죽여 들썩이고 있다.

영은, 마음이 무너진다.



#32. 열차 외경



#33. 열차 안


춘천행 열차 안. 창가에 앉아있는 영은.



#34. 공지천 부근 건물 외경


아담한 오층 정도의 사무용 건물. 한 층 창문에 김성호 건축 사무소라고 코팅 돼있다.



#35. 동 건물 소장실


블라인드 칸막이 너머로 바삐 일하는 사람들 모습이 보인다.

한쪽 소파에 앉아있는 영은. 초조한듯 커피잔을 만지작만지작 한다.

책상 위에는 명패와 함께, 초등학생 남자아이 둘이 어깨동무하고 웃는 사진이 놓여있다.

들어오는 아버지. 서글서글한 호인 형이다.

일어나서 인사하는 영은.


아버지 : 일찍 왔구나.

영은 : (짐짓 밝게) 그동안 잘 계셨어요?

아버지 : (마주 앉으며 찬찬히 본다) 많이 컸다...그래, 경은이 지은이 다 잘있구?

영은 : 네, 아버지.

아버지 : 엄마 가게두 잘 되구?

영은 : ...네... (어두워지다가 문득 기쁜 척) 아, 큰언니 일차 합격했어요!

아버지 : (반갑다) 그랬냐? 기특하다.

영은 : (들떠서) 이차두 당연히 합격할거예요. 큰언니 워낙 천재잖아요.

아버지 : 그렇지.

영은 : 또 궁금한 거 없으세요? 지은언니는 대학원 입학했어요.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너무 많아요...

         (훗, 웃고) 이쁘면 바람둥이가 안될 수가 없어!

아버지 : (씁쓸히 듣다가) 너는 어때? 잘 지내냐? 얼굴이 왜...안 됐다.

영은 : (얼굴 감싸며 웃는) 제가요? 아니예요! 저야 뭐 항상 건강하지요!


하는데, 갑자기 사무치는 감정...고개 숙이고 찻잔을 괜히 휘휘 젓는다.


영은 : ...뭐...가끔씩 저도...힘들 때도 있고...


전화벨 따르릉 울린다. 움찔 놀라는 영은.


아버지 : 네에...어, 그래 아빠다... (영은 눈치 힐끗) 아빠 오늘 바뻐....가오가이거? 그거는 저번에 사줬잖아?

            ...알았어, 아빠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전화하자...그래애.


물끄러미 바라보는 영은. 전화 끊고 어색하게 마주보는 부녀.


아버지 : 녀석들이 한창 요란스러울 나이라서...

영은 : (미소) 장난감 사달래요?

아버지 : (흐뭇하다) 매일 전화해서 뭐사달라 뭐사달라 조른다, 글쎄...사내녀석들인데두 애교가 아주 많아서...

영은 : (본다)

아버지 : (말해놓고보니 잘못했다) 니들 클때는 뭐, 조르는 놈이 없었는데...(헛기침)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지?

영은 : 아녜요, 얘기 다 했어요... (이윽고 결심한듯) 저어...아버지, 돈 좀 주실 수 있으세요?

아버지 : (의외다) 돈?

영은 : ...집에...돈이 좀 필요해서요.

아버지 : 무슨 일 있냐?

영은 : ...주실 수 있죠?

아버지 : 얼마나?

영은 : 한... (망설이다) 천원, (실수!) 아니 천만원요... (떨구고) 더 해주시면 좋구요.

아버지 : (본다)

영은 : (간절하게 본다)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예요. 해주세요, 아버지.



#36. 건물 앞


나란히 나오는 아버지와 영은.


아버지 : (승용차 쪽으로 가며) 터미널까지 태워다 줄께.

영은 : 바쁘신데 들어가세요. 저 여기서 버스 타구 갈께요. 금방인데요 뭐,

아버지 : (머뭇하다가 더 권하지 않고) 그럴래? 그럼 조심해 올라가거라.


굽신 인사하는 영은. 돌아서서 걷는다. 가다가 문득 돌아본다.

아버지 이미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없다.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는 영은. 다시 돌아선다.



#37. 인옥방


인옥 앞에 흰 봉투를 내려놓는 영은.


인옥 : 뭐니.

영은 : (웃는다) 열어봐, 엄마.

인옥 : 뭔데?


봉투 열어보면 수표가 수북 들었다.


인옥 : (놀라) 무슨 돈이야?

영은 : 복권 당첨됐어요!

인옥 : 복권?

영은 : 엄마, 안 믿어지지? 나두 정말 깜짝 놀랬어! 기적이야, 기적!

인옥 : (본다)

영은 : 글쎄 꿈에...돼지가 열두마리나 나오길래...

인옥 : (OL) 어디서 났니?

영은 : (본다) 복권,

인옥 : (서슬 퍼렇다) 어디서 났어?

영은 : 정말이야.

인옥 : (버럭) 바른대로 말해! 어디서 났어?

영은 : (짐짓 환히 웃는다) 복권 당첨 됐다니까? 정말이예요.

         (즉석복권 한장 꺼내며) 다섯 장 샀는데 줄줄이 번호가 붙은 거였거든?


인옥, 유심히 영은 표정을 본다. 긴장 흐른다.


인옥 : 바로 말해...누구, 만났어?

영은 : (흠칫) 누굴 만나요.

인옥 : 아버지 만났니?

영은 : 아냐, 엄마.

인옥 : 그럼 어디서 훔쳤니?


인옥, 전화기를 집어든다.


인옥 : 춘천에 전화해볼까? 정말 아니야?


영은, 사색이 된다.


인옥 : 정말 아니지? (번호 꾹꾹 누른다) 여보세요, 거기 김성호씨...


영은, 얼른 인옥의 수화기를 빼앗는다.


영은 : (와락 무너지며) 잘못했어, 엄마.

인옥 : (멍하니) 만났어?

영은 : (고개 숙인다) ...

인옥 : 미쳤어, 이 기집애. 돌았어!


인옥, 봉투 속에 든 수표를 영은 머리에 집어 던진다.


인옥 : 어떻게 그렇게 사사건건 에미 속만 썩이니? 응? (영은을 마구 친다) 내가 너 이러니까 속이 터져!

         자존심이라고는 없고, 줏대라고는 없고...어떻게 한배에서 나왔는데 언니들 반만두 못해?

         이 모자란 기집애, 멍청한 기집애! 뭐하러 나왔니? 뭐하러!

지은 : 엄마,


뛰어들어오는 지은. 영은, 그대로 두들겨 맞고 앉아있다.


인옥 : (밖으로 떠밀며) 나가! 나가 니 아버지랑 살어! 춘천 가서 살어!

영은 : ...잘못했어요.

지은 : 엄마...진정해요, 이러지마... (영은보고 나가라고 눈짓)


인옥, 지은을 부둥켜 안고 소리내서 운다. 글썽하며 바라보는 영은.



#39. 거리 (밤)


현란한 술집과 식당의 네온 간판들 보인다.

터덜터덜 걸어오는 영은. 멈춰 서서 전신주에 붙은 <아르바이트생 구함>을 들여다본다. 초췌해 보인다.

다시 걷다가 이윽고 근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간다.



#40. 부스 안 (밤)


생활정보지를 펼치고 수화기 든다. 구인란 몇 군데 줄이 그어져있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는데 동전과 함께 무심히 끌려나오는 수현의 열쇠고리. 잊고 있었다!

열쇠고리 뒷면에 희미하게 적힌 휴대폰 연락처가 보인다.

영은, 망설이다가 전화번호 꾹꾹 누른다.


영은 : (긴장) 여, 여보세요...저어...안녕하세요? ...저기요, 저는...지난번에 우산, 아침에...(뭐라 말해야할지 난감하다)

         속옷...아뇨, 화분... (확 밝아진다) 예! 맞아요! 기억나세요?



#41. 커피숖


허겁지겁 들어오는 영은. 주위를 살핀다.

한쪽에 앉아있는 수현. 손을 들어보인다. 캐쥬얼한 차림.


영은 : (마주 앉으며) 많이 기다리셨어요?


영은, 앉자마자 열쇠고리부터 주섬주섬 꺼낸다. 더운듯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영은 : 그날 바로 전화를 못 드렸어요...죄송합니다.

수현 : (뭐가 죄송한가) 죄송하긴요.


웨이터 온다.


영은 : 일이 좀 많아서요...줍기는 그날 주웠는데...진작 연락을 ...

수현 : (OL) 주문할까요?

영은 : 예? 예에...(땀 훔치며 메뉴판 한참 들여다본다) 아이스크림요.

수현 : (메뉴판 본다) 이쪽은 아이스크림 주시구, 저는 (웨이터 본다) 아이스크림요.


영은, 그제야 쿡 웃는다.



#42. 시간경과


가득 담긴 아이스크림 컵.


수현 : 그날 별 일 없었어요?

영은 : 그날요? 예에 뭐...(미안해지며) 그날 고맙습니다.

수현 : 그 사람, 또 안 괴롭혀요?

영은 : ...네.

수현 : 어머니 가게 일 돕는 모양이죠?

영은 : 네...그랬는데...(망설인다)

수현 : (본다)

영은 : (머쓱 웃는다) 무슨 일 하세요?

수현 : ...저는...(잠깐 생각) 식당에서 일해요.

영은 : 식당...(서빙하는구나 짐작) 아, 예에...

수현 : 저희 가게 한번 오시겠어요?

영은 : 혹시 거기 음식 만드는 사람은 안 구해요?

수현 : 왜요?

영은 : 저요, 이래봬두 요리학원 다녔어요. 조리사 자격증이 있거든요.

         혹시 사람 구하면... (뭐하러 이런 얘길 하나, 손 내저으며 웃는) 아니예요.


아이스크림을 떠 먹는다.

가만히 영은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현. 영은, 머쓱해진다.

수현 쪽 테이블 위에 열쇠고리가 놓여있다.


영은 : (눈으로 슬며시 열쇠고리 가리키며) 어머니세요?

수현 : (본다) 네...우리 어머니랑 저예요. 엄청 튼튼하게 생기셨죠?

영은 : ...(튼튼하지만 예의상) 아뇨...

수현 : 아니긴요. 왠만한 남자보다 힘이 더 좋으셨어요. 발 좀 봐요. 항공모함 같잖아요.


수현, 열쇠고리를 가만히 만지작거린다.


수현 : 한 장 밖에 없는 어머니 사진이거든요. 제 돌사진이기두 하구요. 잃어버리구 굉장히 상심했어요. 고마워요.

영은 : ...(조심스레) 어머니가...안 계세요?

수현 : 돌아가셨어요.

영은 : !

수현 : 평생 식당에서 허드렛 일만 하시다가, 어느날 간염으루 쓰러지셨어요.

         (씁쓸하게 사진 들여다보며) 이렇게 튼튼해 보이는데 한 달만에 돌아가시드라구요.

영은 : (안쓰러워지며) ...그렇게 빨리요?

수현 : (열쇠고리 집어넣으며 피식) 치료를 거의 못 받으셨거든요.

영은 : ...왜요?

수현 : (심상하게) 돈이 없었어요.


이 남자, 불쌍하구나... 영은, 아이스크림 수저를 놓는다.


수현 : 왜요? 더 드세요.

영은 : 다 먹었습니다.



#43. 커피숖 앞


나란히 나오는 수현과 영은.


영은 : 저, 그럼...(꾸벅 인사)

수현 : 예, 그럼.

영은 : 안녕히 가세요.

수현 : 안녕히 가세요.

영은 : (돌아서다 결심한듯) 저어, 그리구요...

수현 : 네?

영은 : (진지하게 바라본다) ...용기를 내세요.

수현 : (황당한데) 예?

영은 : 힘들어두 용기 내시구 사세요. 누구나 다 나름대로 상처를 가지고 살잖아요.

         저는..저는, 어머니 안 계신 분 마음은 잘 모르지만...(우물쭈물) 슬플 거 같애요...

         그래도, 아무튼 누구나, 생활은, 어렵고...(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수현 : (얼떨떨한)

영은 : 그러니까 힘을 내고 사세요. (얼굴 빨개지며 꾸벅) 그럼 안녕히 가세요.


돌아서서 걷는 영은. 점점 울상이 되며 빨리빨리 걷는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는 수현. 입가에 웃음이 절로 번진다.


수현 : ...잠깐만요!

영은 : 네?


다가오는 수현. 수첩과 볼펜을 꺼낸다. 메모지 한장 찢어 전화번호와 '파인' 상호명 적고.


수현 : 여기 저희 가겐데요...주방에서 일할 사람 구하구 있어요. 생각 있으면 한번 연락하세요.

영은 : (얼떨떨하게 받고) 예에...

수현 : 그럼 잘가요.


인사하고 멀어지는 수현.



#44. 시장 반찬 가게


허름한 시장 안의 반찬 가게. 손님 뜸한 시간이다.

테이블에 나물을 잔뜩 펼쳐놓고 다듬는 순금. 털털한 인상이다.

마주 앉아있는 인옥. 둘 사이에 소줏병과 잔이 놓여있다.


인옥 : (분한듯 소줏잔 들이킨다) 모자라. 머리가 모자라는 게 틀림없어.

순금 : 그만 마셔라. 술두 못 먹는 것이...

인옥 : 세상에 거짓말을 해두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을 할 수가 있니? 복권이래. 복권 당첨 됐대.

         등신 천치두 그런 천치가 어딨어?

순금 : (딱한 듯) 지 딴엔 궁리를 많이 했구만.

인옥 : 어떻게 춘천에 가서 돈을 받아와? 응? 그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애야? 어쩌면 그렇게 미욱할 수가 있니.

         언니들 발뒤꿈치만 닮아두 그 주변머리는 있겠다. 매사가 그래. 그렇게 고지식하구 단순할 수가 없어. 즈이 애비 천상이야.

순금 : 니가 그렇게 보니까 점점 더하는 거다. 다른 집은 셋째딸이면 이뻐라 이뻐라 해두 모자란다는데

         넌 왜 그러니? 무슨 악연이야? 하기야 그거 가졌을 때부터 뗄려구 별별 짓을 다했으니... (한숨)

         너 그러다 벌 받는다. 영은이 고만 미워해라.

인옥 : 미워하긴 누가 걜 미워해? 내 말은...그러니까 그 인간이 날 어떻게 봤겠어? 구걸하러 간 거잖아, 구걸!


다시 소주를 따른다. 얼른 잔 빼앗는 순금. 자기가 홀짝 마셔버린다. 소줏병 치워버린다.


인옥 : 이리 내.

순금 : 그만 마셔...(마주 앉으며) 근데, 그 인간두 참 야박하긴 야박하다. 꼴랑 오백을 주냐?

         내가 너 그 째째한 놈한테 시집가겠다 그럴 때부터 알아봤어.

         니 팔자 니가 만든 거지 누구 탓을 해? 왜 맨날 애먼 영은이한테 화풀이야?

인옥 : (침울해진다)

순금 : (생각난 듯 나직이) 아참, 인옥아, 너 두식 오빠 얘기 들었니?

인옥 : (흠칫 본다)

순금 : 그 오빠 어마어마한 부자 됐다드라. 요번에 송정리에 노인정두 큼직하게 지어서 쾌척했대.

         거참, 사람 팔자 누가 알어? 누구랑 처지가 이렇게 뒤바뀔 줄...

인옥 : (OL) 나 그만 갈께.

순금 : 왜, 벌써?

인옥 : 잘있어.


기운없이 나간다. 일어나 배웅하는 순금. 심했나 싶다.



#45. 레스토랑 파인 앞 (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패밀리 레스토랑 외관.

입구에 서서 가게 간판을 올려다보는 영은. 규모와 수준에 감탄한다.



#46. 홀 안 (밤)


들어오는 영은. 인사하는 종업원들.

20대 후반의 여자 홀매니저, 카운터 앞에 서있다. 딱딱하고 사무적인 인상이다.


영은 : (카운터로) 저어...주방 보조 구한다길래...

홀매니저 : 아, 그러세요? 이력서 가져오셨어요?

영은 : (봉투 꺼내며) 네.


종업원 중에 수현 없나 눈으로 기웃기웃 찾아본다. 멀리 주방 유리문 안으로 수현 얼굴이 얼핏 보인다.

시선이 잠깐 마주친다. 반가워 손짓하는데 금방 사라진다. 무안하다.


홀매니저 : 경력이...

영은 : 경력은 없는데요. (간절히) 열심히 하겠습니다.

홀매니저 : (곤란한듯) 일단 이력서 제출하시구요. (종업원1에게) 점장님 계셔?

종업원 : 예.

홀매니저 : 이쪽으로 오시죠. 면담하고 가세요.


매니저를 따라가는 영은. 고급스런 실내를 신기한듯 둘러본다.



#47. 점장실 (밤)


홀 매니저와 함께 들어오는 영은.


홀매니저 : 잠깐 여기 앉아계세요. 점장님 모셔올께요.

영은 : 네.


홀 매니저 나간다. 소파에 앉는 영은. 방안을 둘러본다.

간소한 실내. 책상과 소파, 책장이 놓여있다. 테이블 위에 체리가 얹힌 케잌 한 조각과 커피잔이 놓여있다.

커피잔은 비었지만 케잌은 손도 안댔다.

에어컨에서 바람이 나오고 있다. 이마의 땀을 닦으며 에어컨 쪽으로 머리를 갖다대는 영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아, 시원하다, 손으로 화락화락 부채질 한다.

이력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얌전히 펼쳐놓는다. 그런데 이력서의 학력란에 티끌이 하나 묻어있다.

얼른 손톱으로 긁는다. 안 지워진다. 고민하다 침을 발라 문지른다.

그런데 티끌을 지우긴 커녕 글씨에 침이 번져 엉망이 되고 만다. 난감한 한숨 폭 쉰다. 포기하자...

그런데 점장님은 왜 안오나, 입구를 바라본다... 케잌 위의 체리로 자꾸만 눈이 간다. 침을 꼴깍 삼킨다.



#48. 홀 안 (밤)


수현, 주방에서 나오고 있다. 다가가는 홀매니저. 뭐라뭐라 얘기 한다.



#49. 점장실 (밤)


영은, 입구를 보다가 다시 실내를 둘러보다가...다시 체리케잌을 본다. 망설인다.

재빨리 체리를 집어 입에 쏙 집어넣는다.

순간, 들어오는 수현. 영은, 놀라서 체리를 통째 삼킨다.


영은 : (일어나는데, 켁 숨막힌다) ...

수현 : (반갑다) 왔어요?

영은 : (아까 날 봤구나 싶어) 바쁘신데 뭐하러 오세요? (숨을 고르면서)

수현 : (무슨 소린가?)

영은 : (다시 앉으며) 점장님 기다리는 중이예요. 어디 멀리 가셨나 봐요?

수현 : 예? (하다가 대충 상황이 짚힌다) 어... (입구 돌아보는 척 하고) 멀리는 아닐거예요.

영은 : ...이력서 써왔거든요? 한번 보실래요?


수현, 곁에 앉으며 본다.


영은 : (번진 글씨 감추며) 아,이게...왜이렇게 번졌지? 이거 알아보실까요? 신화여고 졸업인데...

         (들어보이며) 신짜예요, 이거...알아보실까요? 다 번졌네.

수현 : 못 알아보실 거 같은데요?

영은 : 어떡하지? 찐하게 위에다 덧칠을 할까요?

수현 : 그럴까요?


영은, 얼른 펜을 꺼내 진하게 덧쓴다. 슬몃 미소 띠며 지켜보는 수현.


영은 : 됐을까요? 너무 지저분한가?

수현 : 괜찮은데요.

영은 : 점장님 까다로우세요? 경력 없으면 안 써줄까요?

수현 : 글쎄 뭐...좀 까다롭기는 해요.

영은 : 저 꼭 됐으면 좋겠는데... (창피한듯 웃고) 저희 집이 요즘 좀 어렵거든요.

수현 : (본다)

영은 : 여기서 언제부터 일하셨어요?

수현 : 작년 말부터요.

영은 : 에이, 얼마 안됐구나아. 신참이네?

수현 : (뒷머리 긁적이고 웃는다) 예. 신참이예요.


수현 눈길이 슬며시 체리가 사라진 케잌 위로 간다. 당황하는 영은. 태연한 척 한다.


영은 : (조심스레) 저기요...월급은 얼마나 받아요?

수현 : ...얼마 받고 싶은데요?

영은 : 훗, 뭐 그야...많을수록 좋죠!... (비밀스럽게) 그쪽은 얼마 받는데요?

수현 : 저요?

영은 : (속삭이듯) 네. 그쪽이요.


곤란한 듯 잠시 고민하는 수현.

영은, 못 물어볼 걸 물어봤구나 싶어 미안해진다.


영은 : 저어, 말씀 안하셔두 괜찮습...

수현 : (일어나며 OL) 잠시만 기다리세요.


나간다. 영은, 머쓱해진다.



#50. 시간경과


기다리는 영은. 시계 보며 훅, 한숨 쉰다.

이윽고 들어오는 홀매니저.


홀매니저 : (덤덤한 얼굴로) 많이 기다리셨죠?

영은 : (일어나며) 아뇨, 괜찮습니다. 안 계세요?

홀매니저 : 점장님하구 좀전에 통화했는데요. 채용하자구 그러시네요.

영은 : (이력서와 매니저 번갈아 보며) 그냥요?

홀매니저 : 우리 사정이 좀 급하거든요.

영은 : (확 밝아진다) 고맙습니다!



#51. 동 주방 (밤)


음식 만드느라 분주한 주방 풍경 스케치. 들어오는 홀매니저.


홀매니저 : (바깥 향해) 들어와요, 영은씨.


들어오는 영은. 긴장해있다.


홀매니저 : (주방장에게) 남수씨 후임으루 내일부터 같이 일할 친굽니다.

               (영은 보고) 인사하세요. 김영은씨구...이 분은 주방 책임자 박민식씨.


주방장(30대 초반), 갑작스럽다는 듯 의아하게 본다.


영은 : (절하며)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주방장 : 어디서 일하다 왔어요?

영은 : 예,저,경력은...

홀매니저 : (OL) 나중에 말씀 드릴께요. 영은씨, 내일부터 출근해서 이분께 일을 잘 배우세요.

               박선생님, 김영은씨 사수 좀 부탁합니다.

영은 : (신기한듯 둘러본다) ...


주방 식구들, 수근거리며 돌아본다.



#52. 홀 안 (밤)


홀매니저와 함께 주방에서 나오는 영은.


홀매니저 : 대우는 소정의 교육을 마친 뒤에 확정하게 되겠지만... 아마 처음엔 다른 업소랑 비슷한 수준일 거예요. 괜찮겠어요?

영은 : 네.

홀매니저 : 오늘은 그만 들어가시구요.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영은 : 네, 고맙습니다.


눈으로 수현을 찾지만 안 보인다.



#53. 레스토랑 앞길 (밤)


퇴근 시간의 붐비는 거리. 가게를 나오는 영은. 들뜬 얼굴로 걸어간다.

저만치 뒤에서 성큼 따라오는 수현.


수현(E) : 가요?

영은 : (반가워 휙 돌아본다) ...어디 계셨어요? 찾았는데!

수현 : 그랬어요?

영은 : (상기돼서) 저 됐어요! 저 합격이래요!

수현 : 정말요?

영은 : 네! 다 덕분이예요. 고맙습니다.

수현 : 뭐가요.

영은 : (들떠서) 앞으로두 잘 부탁 드릴께요. 많이 가르쳐주세요!


수현, 슬그머니 뒷춤에 감췄던 케잌상자를 내민다.


수현 : 취직 축하해요.

영은 : !

수현 : 앞으로 우리 잘지내요.



#54. 버스 안 (밤)


한산한 버스 안. 한쪽 창가에 앉아있는 영은. 케잌 꾸러미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다.



#55. 영은 지은방 (밤)


불꺼진 어둑신한 방. 들어오는 영은. 들어오자마자 케잌 상자 뚜껑부터 연다. 체리가 수북히 얹힌 케잌이 통째로 들어있다.

놀랍고 감격스럽다. 초를 꽂고 불을 붙인다. 두개의 빨갛고 파란 초가 어둠 속에 빛난다.


수현(E) : 취직 축하해요.

영은 : (수현 어조 따라한다) 취직 축하해요.


흐흥, 웃음이 나온다.


수현(E) : 앞으로 우리 잘지내요.

영은 : (또박또박 천천히) 앞으로, 우리, 잘, 지내요...잘지내요...


미소 머금은 채, 허공을 향해 나직이 읊조리는 영은. 케잌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본다.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영은 : ... 어떡하지? 그 사람 나 좋아하나 봐.


제1부 끝.























첨부파일 눈물이보일까봐-정유경.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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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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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작가지망생작장인 | 작성시간 19.03.12 감사합니다
  • 작성자수다쟁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4.07 으흐흐흐~ 순수하다, 순수해. 닭살 돋아. 으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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