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사랑] 10
S# 1 여관 (새벽)
작은 창으로 파르스름한 여명이 밝아오고, 민수 혼자 자고 있다.
한쪽에 가지런히 개켜져 있는 민수의 옷가지.
잠시 후 연주가 편의점 비닐봉투를 들고 들어온다.
봉투에서 새 양말과 음료수를 꺼내 놓는 연주.
연주 물끄러미 잠든 민수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나간다.
S# 2 여관 골목 (섀벽)
혼자 여관문을 열고 나오는 연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걸어나간다.
바쁘게 일나가는 새벽의 사람들이 보인다.
S# 3 옥탑방 (새벽)
밤을 샌 듯, 혼자 뒤척거리다 일어나 앉는 정애.
걱정스러운 표정. 고민의 정도가 심각하다.
안되겠는지 일어나 연주 핸드백을 뒤져 수첩을 꺼낸다.
수첩을 펼치려는데 수첩 속에서 뚝 떨어지는 의료보험카드와 병원 진료카드.
정애 진료카드를 본다.
얼른 수첩을 뒤적여 소영의 전화번호를 적는 정애.
S# 4 국밥집 (새벽)
노무자들 틈에서 국밥을 먹고있는 연주.
S# 5 여관방 (아침)
민수 깨어나서 둘러보면 연주가 없다. 처음엔 착잡한 마음으로 일어나는 것.
가지런히 개져있는 옷들을 보더니, 혹시나 해서 욕실을 노크하고 열어보는 민수.
다시 돌아와 시계를 보면서, 공장 갔구나 하는 심정.
그때서야 연주가 사다놓은 음료수와 새 양말을 발견한다.
집어들고 보는 민수. 애틋한 마음을 느끼는 민수.
S# 6 공장 전경 (아침)
S# 7 공장, 락켜룸 (아침)
이미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정애. 연주 들어오자 둘 눈이 마주친다.
연주는 말없이 무표정하게 락커문 열고 작업복을 꺼낸다.
정애 노려보다가 말없이 나간다.
S# 8 생산과 (아침)
말없이 일을 하고 있는 연주와 정애.
정애는 화가 나있고, 연주는 무표정하다.
S# 9 관리 사무실 (낮)
출근한 민수,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 하면, 기태 방에서 나오는 기태와 만난다.
기 태 어제 외박했나보더라. 아침에 전화했더니 없대?
민 수 뭐 땜에 전화했는데?
기 태 골치 아프게, 핸드폰을 분실했는데, 어디다 놓고 온지 몰라서.
민 수 가면 있나 한번 찾아볼게.
기 태 어제 너 누구랑 있었니? 새로운 애야?
민 수 (사무실 눈치보며) 잠깐 들어올래?
민수와 기태, 민수방으로 들어간다.
S# 10 민수 사무실 (낮)
기태와 민수 들어오고, 민수 방문을 닫는다.
민 수 기태야.
기 태 왜?
민 수 나 만나는 여자 있긴 있는데, 내가 만나는 여자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이제 너랑
어울려서 기집애들 만나고 그러지 않을 거야. 여태까지
개판으로 살았지만, 이젠 달라. 그런 예의 사무실에서
지켜주기 바란다.
기 태 너 그럼 나랑 개판이었다는 얘기냐? 지금?
민 수 그런 뜻은 아닌데...
기 태 아니, 괜찮아. 니가 개판이었다는데, 내가 뭐 할말 있냐?
잘해봐라. (나간다.)
민수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하다가 전화를 건다.
S# 11 생산과 (낮)
여전히 말없이 일하고 있는 연주와 정애.
핸드폰이 울리자 받는 정애.
정 애 여보세요.
민 수 (E) 정애씨, 저 민순데요...
정 애 잠깐만이요. (말도 없이 핸드폰만 내민다.)
연 주 (받는) 여보세요?
민 수 (E) 나야. 왜 먼저 갔니?
S# 12 민수 사무실 (낮)
민 수 출근하느라고 그랬구나.
연 주 (E) 으응...
민 수 나 일찍 일어나도 되는데...
S# 13 생산과 (낮)
민 수 (E) 그냥 깨우지 그랬어. 같이 나갔어야지.
연 주 (정애 눈치볼 뿐 듣고만 있는) ....
민 수 (E) 지금 통화하기 곤란하구나?
연 주 응.
S# 14 민수 사무실 (낮)
민 수 출근 잘했다니 됐다. 일 잘해.
연 주 (E) 응. 민수씨도.
민 수 참, 양말 고마웠어.
S# 15 생산과 (낮)
연주 미묘한 감정으로 전화 끊고 정애에게 핸드폰 준다.
정 애 (받으며) 그 사람하고 같이 있었구나?
대답 없이 일만 하는 연주. 정애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S# 16 민수 사무실 (낮)
전화를 끊고 난 민수, 혼자 생각하며 미소짓고 있다.
S# 17 관리 사무실 (낮)
갑자기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대호. 기태방으로 직행한다.
S# 18 기태 사무실 (낮)
들어선 대호, 기태에게로 직행해서 책상에 돈다발 거칠게 내려놓으며,
대 호 이따위 더러운 돈 필요 없어, 자식아!
기 태 (돈과 대호 번갈아 보며) 왜 이래? 넌 또 뭐야?
기태 겁이 나 구석으로 물러서는데,
대 호 인간 같지도 않은 쉐끼. 내가 죽여버리겠어. 이리 나와. 이리 나와!
S# 19 민수 사무실 (낮)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는 민수. 이내 밖으로 튀어 나간다.
대 호 (E) 니가 돈 좀 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기 태 (E)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
S# 20 기태 사무실 (낮)
대호 기태의 멱살을 잡을 듯 다가서며,
대 호 너 민수 불러다가 어떻게 했어? 어떻게 했어!
이때 달려 들어와 대호에게 화를 내며 말리는 민수.
민 수 야, 야! 대호야! 너 왜 이래! 왜 이래, 임마!
대 호 놔, 이 거 놔! 너 오늘 내 손에 좀 맞아봐야겠다.
민 수 너 정말 왜 이러니? 나가! 빨리. 이리 와! (떠밀고 안다시피 끌고 몇 발짝 나가는)
기 태 어라, 이제 혼자 안되니까, 친구놈까지 동원하냐?
대 호 내가 너, 민수 얼굴 봐서 참는 거야! 다시 한번 더 그랬단
그땐 죽여버릴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기 태 하 참, 재수가 없을래니까. 별 웃기지도 않는 게 와서 꼴깝을 떠네.
대 호 (순식간에 달려들며) 이게 진짜! (연속 펀치를 날린다.)
순식간에 얼굴을 쥐고 나가떨어지는 기태.
대 호 참을라 그랬더니...
민 수 야, 야, 야! 너 정말 왜 이래! 미쳤어! (끌고 나가는) 그만 해.나가.
대 호 (나가면서) 싸가지 없는 쉐끼...
기태 턱을 만지며 본다.
S# 21 빌딩 앞 (낮)
서로 뚱하게 나와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는 민수와 대호.
민수, 대호를 마땅치 않게 보고만 있고, 대호는 분이 안 풀린 듯 다른 곳 향하고 있다.
민 수 (이윽고 입을 여는) 니 마음 다 알어. 고마운데, 너 잘못한
거야. 니가 이러는 거 나한테 도움 안돼. 가라.
대 호 생각 같아선 니가 먼저 맞아야돼, 자식아! 너 여기
빌붙어있는 한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 달라지기 전까진
나 너 친구로 생각 안해. (가버린다.)
민수 보다가 돌아선다.
S# 22 기태사무실 (낮)
민수 들어오면, 기태 민수를 노려본다.
민 수 (잠시 할말이 없어 있다가) 괜찮냐?
기 태 저 녀석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더러운 돈? 그때 돈
빌려줄 때 난 이유도 묻지 않고 내줬다. 근데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되니?
민 수 미안하다.
기 태 너 밖에서 뭐라고 떠들고 다녔니?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저런 놈까지 와서 나한테 이래?
민 수 .....
기 태 난 너한테 충분히 미안해했고 반성도 많이 했다. 아버지한테
니 편의 봐주느라 솔직히 쪼이면서 힘들었어! 하느라고 다
했는데, 이제 아예 날 대놓고 우습게 봐?
민 수 그건 오해야.
기 태 너 아버지 빽 믿고 이러니?
민 수 기태야...!
기 태 아버지 빽이 무섭긴 무섭다. 파워가 생기니까 친구놈까지
와서, 참... 이렇게 달라지는 거냐? 니 친구들이 벌써 너
이렇게 된 거 알고 나 우습게 보는 거야?
민 수 그건 오해라니까. 어쨌든 미안하게 됐다.
기 태 너 전 같으면 이런 일 있고 여기 계속 있을 수 있겠어?
아버지 빽 믿고 이러는 모양인데... 날 이런 식으로 대접하고
여기서 일 잘 할 수 있을 거 같애!
나가버리는 기태. 민수 돌아본다.
S# 23 카페 (밤)
소영과 정애 마주 앉아있다.
정 애 내가 왜 만나자고 했는지 알지요?
소 영 (짐작하면서도) 네...?
정 애 나한테 감출려고 하지 말아요. 연주 공장에서 쓰러졌어요.
소 영 (놀라며) 네?... (걱정이 된다.)
정 애 걔 말로는 빈혈이라 그러던데, 무슨 일인지 말해줘요.
소 영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난감한 표정.) ....
정 애 같이 병원까지 다니고서 모르지는 않겠죠? 진정한 친구라면
그런 거 같이 숨겨주는 게 우정 아니에요. 어서 말해줘요.
정애의 시선 피하고 고민하는 소영의 난감한 표정.
S# 24 옥탑방 (밤)
겨울 코트를 입은 연주. 거울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 이내 고개 저으며 코트를 벗는다.
S# 25 카페 (밤)
소영에게서 연주의 병에 관해 이야기를 막 들은 정애.
정 애 (놀라는) 뭐라구요? 혈액암이요?
소 영 (눈물 그렁그렁해서) 네. 그냥 놔두면 몇 개월 못 산대요.
정 애 도대체 뭐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이러고 있어요? 왜 진작
얘기 안 했어요!
소 영 연주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래요. 연주 잘 알잖아요.
정 애 둘이 친구 맞아요? 말하지 말랜다고 그딴 비밀 지켜주는 게
의리예요? 친구가 죽어 가는데, 넋 놓고 앉아서 구경만 하는
게 우정이냐구요! 좋을 때만 나타나서 히히닥거리고, 뭐
필요할 때만 쏙 불러내서 부탁하면서, 이젠 죽게
내버려둬요? 맨날 아쉬울 때 달려오더니, 연주 죽어버리면
누구한테 달려가려고 가만히 있었어요!
소영도 울고, 정애도 운다.
그대로 일어나서 가버리는 정애.
S# 26 거리 (밤)
정애 울면서 걷고 있다.
하염없이 울면서 걸어가는 정애.
S# 27 대호집 마당 (밤)
민수 들어서면,
세수를 하다가 민수를 보고는 물을 버리는 대호. 쳐다보지도 않는다.
민 수 잠깐 나와라.
민수 먼저 나가면, 대호 보다가 나간다.
S# 28 대호집 근처 골목 (밤)
민수 서서 기다리면, 대호가 와서 선다. 서로 잠시 말이 없다가,
민 수 너 나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되냐?
대 호 ....
민 수 그냥 지켜봐 주면 안돼? 너 나를 그렇게 모르냐?
대 호 니 마음 아는데, 그래서 뭐? 뭔데?
민 수 나 거기 명분 없이 들어간 거 아니야. 그리고 평생 있겠다는
것도 아니고. 오래 안 걸려. 아무 소리 말고 조금만 기다려 주라.
대 호 그래서 결국 자존심 다 버리고, 별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한테 개처럼 기겠다는 거 아니야?
민 수 그렇지 않아. 이제 기태 그 자식 나한테 함부로 못해. 내가
그렇게 놔두지도 않을 거고. 나 그때하고 달라. 당장
편할려고 이러는 거 아니다. 지금은 장기적인 플랜이 있어.
그 계획 누구 눈치보면서 하는 것도 아니야.
대 호 그런 소리 할려거든 찾아오지 마라. 나 너 안보면 속
시원하고, 너도 나한테 이런 얘기 늘어놓을 필요 없는 거 아니냐?
민 수 왜 이러니? 너나 나나 우리 인생 뻔히 보이지 않냐? 이렇게
사는 거 끝도 안보이고, 정말 지겹지 않아? 우리 엄마
지긋지긋하게 고생만 하다 가셨다. 누가 될진 모르지만, 난
내 여자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아. 내 자식놈,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세상을 노려보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 이게 그렇게
잘못된 거냐?
대 호 너 왜 그렇게 말이 많아졌냐? 너 그렇게 말 많지 않았다.
차라리 세상 더럽다는 말은 내가 들어줄 수 있어. 자꾸
화나게 하지 마라. 사는 데 이유 같은 거 갖다 붙이고
그러지 말란 말이야!
민 수 대호야, 내가 칼 들고 강도짓 하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온
기회 잡겠다는 건데, 그게 뭐가 나쁘냐? 고1 때 아버지 장례
치르고 돌아와 보니까, 우리 집만 불이 꺼져 있더라. 수많은
불빛들 속에 이제 나도 내 힘으로 불을 켜보겠다는 데, 그게 왜 나뻐?
대 호 니 생각대로 될 거 같애? 그 불 켜도 오래 못 가. 그걸 왜 모르니?
민 수 나한텐 이게 최선이야. 내 나이 서른쯤엔 나도, 저녁 먹고
9시 뉴스보고, 와이프랑 애들 데리고 아파트 산책 나가고
싶다. 많이 바라는 것도 아니야. 내 꿈이 잘못된 거라고 하지
말라. 나 더 이상 희망 없는 방향으로는 길 틀지 않을 거야.
나 한번만 믿어 주라. 실망시키지 않을 게. 간다.
그대로 대호를 남겨두고 내려오는 민수.
S# 29 대호집 동네, 다른 골목길 (밤)
착잡하게 걸어 내려오는 민수.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온 민수, 차에 타려다가 핸드폰을 건다.
S# 30 옥탑방 (밤)
연주 혼자 밥상을 차리고 있다. 수저를 두 개 놓다가,
전화벨이 울리자, 수저 든 채로 달려들어가 받는다.
연 주 정애니?
민 수 (E) 나야, 민수. 혼자 있니?
연 주 응....
S# 31 골목길 (밤)
민 수 오늘도 하루종일 일이 많은 날이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매번 느끼지만, 하루는 인생을 축소해놓은 거 같다.
왜 이렇게 사는 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하루하루가 간다는
게 어디 끌려 다니는 느낌이다.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간간이 니 생각도 많이 났다. 내가 왜 이러고 다니나
생각해봤는데,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다는 걸 알았어. 너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그런 남자가
되야겠다.
S# 32 옥탑방 (밤)
말없이 듣고 있는 연주.
민 수 (E) 연주야, 듣고 있니?
연 주 응. 듣고 있어...
연주의 표정 슬퍼지고, 착잡해진다.
민 수 (E) 하루 종일 어쩌면 그 생각만 했는지도 몰라. 너에게
근사한 남자가 되겠다고.
S# 33 골목길 (밤)
민 수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너만은 나 믿어줬으면
좋겠다. 지금은 너한테 아무 것도 줄 게 없지만, 언젠가 많은
걸 해줄 수 있는 남자가 될 거야. 나 믿어줄 수 있지?
연 주 (E) .... 응...
민 수 그래. 고맙다. 고마워...
안도하듯 미소짓는 민수.
S# 34 옥탑방 (밤)
민 수 (E) 잘자라. 안녕. 내 사랑...
연 주 안녕...
수화기를 내려놓는 연주 표정이 무거워진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나는 연주.
S# 35 동네 포장마차 (밤)
정애 혼자 술 마시고 있다. 속이 상하면서도 화가 나있는 상태.
연거퍼 술을 마신다.
아저씨 (안주 가져오며) 아니 왜 혼자 왔어? 연주는 어디 갔나봐?
정 애 그년 얘긴 꺼내지도 마세요.
아저씨 왜 둘이 싸웠어? (허허허 웃고 간다.)
정 애 (술잔 들고) 나쁜 년!...
술을 마시는 정애.
S# 36 옥상 (밤)
취해서 올라오는 정애.
화가 나서 올라왔지만 막상 현관문을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진다.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정애. 진정시키려고 애를 쓴다.
S# 37 옥탑방 (밤)
상보를 덮은 밥상 앞에 물끄러미 앉아있는 연주.
이때 술에 취한 정애가 들어온다. 연주 얼른 애써 밝게 맞는다.
연 주 어디 갔다와? (좀 이상한) 술 마셨니?
정애는 그런 연주를 바라만 보고 있다.
연 주 저기, 어제 전화 못한 거 미안해. 밤 새 걱정했지? 그냥 그렇게 됐어.
정 애 (물끄러미 보다가) 나쁜 기집애!
연 주 왜 또 그래... 미안하다는 데...
정애 갑자기 옷장문 열어 젓히고 옷을 다 꺼내 집어던지며,
정 애 나가. 나가! 너 혼자만 알고 너 혼자 되져버리면 난 편할 줄 알았어?
연주 얼굴 굳어진다.
정 애 혼자서 난리치다가 아무 때나 쓰러지고, 난 뭐야? 난 너한테
아무 것도 아니니?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당하길 바랬어?
그럼 내 속이 시원할 거 같애? 니가 원한 게 그거면 나가. 당장 나가!
연 주 미안해. 정애야. 미안해...
정 애 왜 말 안 했어? 난 알아봤자 별 도움이 안될 거 같아서
그랬니? 내가 널 거추장스러워 할까봐 그랬어?
연 주 걱정할까봐서 그랬어...
정 애 너 대단하다. 죽는다는데, 왜 말을 안해! 그게 숨길 일이야?
혈액암이라는데, 왜 말도 안하고 이러고 있었어! (왈칵 울음이 쏟아진다.)
연 주 무서웠어. 겁이 났어... 도망치고 싶었어... (운다.)
정 애 (와서 때리며) 도망가봐라. 도망가봐! 이게 도망간다고
피해질 일이니? 병원 가자. 나랑 내일 당장 병원 가.
연 주 소용없어... 소용없어...
정 애 그럼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죽을 거야?
연 주 나도 알아봤어. 다 알아봤는데... 아무 것도 할 게 없단 말이야...
둘이 같이 붙들고 울면서,
정 애 너 돈 없어서 이러는 거야? 그런 거니? 그렇다고 해보지도
않고 왜 이래? (제정신이 아닌) 우리 방도 빼고, 퇴직금도
합하고, 적금도 깨면 되잖아! 왜 가만히 있어. 왜 그냥 가니?
억울하지도 않아?
연 주 억울해. 억울해. 나도 억울해... 죽고 싶지 않아...
정 애 걱정 마. 걱정 마... 내가 너 어떻게든 살릴 거야. 어떻게든...
부둥켜안고 우는 정애와 연주.
S# 38 기태집 전경 (아침)
S# 39 기태방 (아침)
넥타이를 매며 얼굴에 든 멍을 보는 기태.
이때 기태모가 노크하며 들어온다.
기태모 (들어오며) 왜 안 내려오니? 밥 안 먹어?
기 태 (얼른 얼굴을 감추며) 됐어요. 생각없어요.
기태모 (이상해하며) 왜 그러니?
기 태 아무 것도 아니예요.
기태모 (달려들며) 어디 이렇게 좀 해봐. (놀라서) 세상에. 이게 뭐니? 왜 이렇게 됐어? 누구랑 싸웠니?
기 태 싸우긴요.
기태모 아니 일하는 사람 얼굴이 이래서 어떡해? 출근해야 되는데?
설마, 민수가 그랬니?
기 태 아니요. 뭐 민수가 그런 건 아닌데...
기태모 그런데?
기 태 나 참... 이제 민수 그 자식 친구 놈까지 나를 우습게 보네...
기태모 뭐? 그 녀석 친구가?
기 태 이게 다 아버지가 그 녀석만 키워줘서 이렇게 된 거예요.
도대체 나한테 뭐하나 제대로 맡겨준 게 있어요?
기태모 어떡하겠니. 니가 좀 참아라. (얼굴 보며) 아휴, 세상에 이걸 어떡하니? 내 이녀석을 그냥...!
기 태 엄만 가만히 계세요.
S# 40 기태집, 안방 (아침)
기태모, 기태부에게 보약을 내밀며 눈치를 살피고 있다.
기태모 기가 막혀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기태부 뭐가.
기태모 당신 기태 얼굴이 어떤 줄이나 알아요?
기태모 그 녀석 얼굴이야 당신 눈에는 항상 안되보이겠지.
기태부 그게 아니라요. 민수 그 녀석, 친군가 뭔가 하는 놈이 기태
얼굴을 형편없이 만들어놨다구요.
기태부 (멈칫하다가 얼른) 맞을 짓을 했겠지. (그러면서도 혼자의
표정은 안 좋다.)
기태모 당신 뭐예요? 기태가 옆집 애예요? 아들 기를 살려줘야지
누구 기를 살려주는 거예요? 내가 민수 그 녀석 속을
모를까봐서요? 지가 직접 못 때리니까 친구를 시킨 거겠지.
기태부 시끄러워! 오죽 못났으면 그 나이에 얻어터지고 다녀?
S# 41 옥탑방 (아침)
연주 출근준비를 하며 작업복을 개서 가방에 넣으려 하고있다.
정 애 (작업복 뺏으며) 병원엘 가야지 무슨 출근이야?
연 주 다 가봤어. 소용없다니까 왜 이러니? (다시 뺏어 구겨넣는)
정 애 일단 입원을 해야 한다잖아. (연주 잡아 앉히며, 시계 보는)
가만히 있어. 기다렸다 나랑 병원 가서 입원해.
연 주 (뿌리치고) 한번 입원하면 밑도 끝도 없이 해야 돼. 그거 할
수 없잖아! 뻔히 알면서 왜 이러니? (다시 일어난다.)
정 애 돈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아. 일단 입원을 해보잔
말이야. 왜 지레 겁을 먹고 이래?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다 되게 돼 있어.
연 주 (현관으로 나가며) 됐어. 니가 이런다고 바뀌는 거 없어.
정 애 (또 잡으며) 그럼 나랑 오늘 한번만 가봐. 내 소원이야.
연 주 싫어! 싫다는 데 왜 이래? 우리 아버지 어떡하다가 죽었는
줄 알아? 맨날 약만 한웅큼씩 먹다가 죽었단 말이야! 나중엔
약을 먹다가먹다가 토하더라. 너무 끔찍했어. 난 안해. 안가.
정 애 그때하고 지금하고 같니?
연주 말도 안 듣고 나가버리면, 정애 얼른 부르며 뒤쫓아나간다.
S# 42 동네 정류장 부근 거리 (아침)
연주 급히 걸어오고, 정애 쫓아오며 잡는다.
정 애 (와서 잡으며) 제발 내말 좀 들어. 너 지금 이러면 나중에
후회해. 그땐 후회해도 소용없어!
연 주 후회를 하든 말든 난 나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넌
상관하지 마.
정 애 누구 미치는 꼴 볼라 그러니?
연 주 니가 왜 이래? 왜 이 난리야! 니가 내 피붙이라도 되니?
(절망적인) 너 거기 갔다가 그냥 나오는 심정이 어떤지
알기나 해? 너 왜 나 괴롭히니? 가. 출근 안할 거면
따라오지 마. 난 안가! 그렇게 가고 싶으면 너나 혼자 가!
연주 얼굴 일그러지며 달려가버린다.
정애 더 쫓아가려다가 안타깝게 바라본다.
S# 43 공장 락커룸 앞 (아침)
연주, 락커룸에서 나오면, 동식이 기다리고 있다가 마주친다.
연 주 안녕하세요.
동 식 아직 시간 좀 있는데, 같이 차나 마실래?
전과는 달리 선뜻 끄덕이는 연주.
S# 44 공장, 자판기 앞 (아침)
동 식 너 계속 일해도 되니? 몸도 안 좋다면서.
연 주 괜찮아요.
동 식 내가 알아봤는데, 빈혈에는 개소주가 좋대. 고향집에
얘기해서 개소주 좀 내려서 보내라 그럴까?
연 주 됐어요. 오빠.
동 식 악성빈혈이면 잘먹고 푹 숴야 된다는데...
연 주 (물끄러미 동식을 보다가) 오빠 좋은 사람이야... 오빠 다른
여자 만나요. 난 착하지도 않고, 틱틱 거리기나 하고
싸가지도 없고 그런데... 왜 나 같은 거 좋아하세요? 나보다
더 착하고 괜찮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 동안 내가
너무 심하게 한 거 잊어버리세요. 내가 남자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오빠 정말 좋은 사람이고, 잘살 거야.
누군지, 오빠 만나는 여자는 행복할 거예요.
동 식 너는 아니고?
연 주 왜 그래...? 알면서.
동 식 그 사람이랑은 잘 되냐?
연 주 나 곧 결혼해요. 오빠만 알고 있어야 돼? 그래서 곧 그만둘지도 몰라요.
동 식 그래...
이때 벨 울리면, 순간 둘 각자 가야할 방향 섭섭하게 본다.
연 주 (서둘러) 차 잘 마셨어요. 그만 가볼게요. (가는데)
동 식 연주야. 축하한다. 잘 살아야 돼.
연 주 네.
동식 간다. 연주 동식의 뒷모습을 찡하게 본다.
S# 45 민수 사무실 (낮)
메모하면서 전화통화를 하고있는 민수.
민 수 서귀포 쪽에 가까운 아파트는 시세가 어때요? 네... 전세로
나온 물량은 있나요? 네... 잘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메모지를 들여다보며, 고민하는 민수.
잠시 후 메모지 들고 일어선다.
S# 46 기태 사무실 (낮)
노크하고 들어오는 민수. 멍이 든 기태의 얼굴을 보고는 멈칫 미안해진다.
민 수 괜찮니?
기 태 니가 보기엔 이게 괜찮아 보이냐? 아이, 씨, 윤경이랑 저녁
약속 있는데... 무슨 일이냐?
민 수 (그제야 메모지 보며) 상의할 게 있어서.
기 태 나하고?
민 수 음. 공사 끝나고 오픈하면 난 거기서 정착을 해야 할 텐데...
이번에 내려가면 있을 곳을 정할려고. 계속 호텔에서 묶을
수도 없고, 하숙은 좀 그렇고, 아예 집을 하나 구하는 게
어떨까 싶어.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기 태 왜 아버지한데 얘기하지 그러냐?
민 수 아버님한테까지 들고 갈 사안은 아닌 것 같아서. 너랑 먼저
얘길 할려고.
기 태 니 생각은 어떤데?
민 수 알아봤는데, 전세로 나온 아파트가 무난할 거 같아. 넓을
필요는 없고, 25평 정도로. 그 정도면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이사 같은 거 또 할 필요 없이 거기서 그대로
시작해도 되고...
기 태 결혼? 너 혹시 아직도 연주 만나냐?
민 수 음.
기 태 그래서 둘이 결혼까지 할거야?
민 수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닌데, 난 그러고 싶다. 내년 가을쯤에.
기 태 어, 그래? 알았어. 집 문제는 내가 아버지한테 한번 말씀 드려보께.
시선을 돌리는 기태. 그런 기태를 바라보다 돌아서는 민수.
S# 47 병원, 진찰실 (낮)
황박사 앞에 앉아있는 정애.
정 애 (메모지에 적은 거 보며) 그러니까 처음엔 한 달에 400
정도가 계속 들어가고, 나중에 무균실로 옮기면 더 들어간다구요...?
황박사 네...
정 애 (생각하며) 그럼 목돈은 나중에 골수 이식할 때까지만
어떻게 준비하면 되겠네요...?
황박사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예요. 밖에 있는 사람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정 애 일단 입원시킬게요. 데려오겠어요.
황박사 할려면 빨리 시작해야 돼요. 시간이 지나면 치료과정도
그만큼 어려워지니까.
정 애 저기, 골수... 그런 거는 나랑 맞으면 내가 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황박사 지금 단계에서는 골수를 찾는 것보다, 하루라도 빨리 백혈구
수치를 정상으로 떨어뜨려야 됩니다. 항암치료 빨리
서둘러야 되요.
정 애 제가 보호자나 다름없어요, 선생님. 연주 좀 꼭 살려주세요.
S# 48 거리 (낮)
정애 생각에 빠져 걸어온다.
가판대 옆을 지나다 문득 다시 돌아가 신문을 사는 정애.
정애 몇 걸음 걸어와 신문을 뒤적여 펼친다.
여종업원 구함. 광고들.
S# 49 거리, 다른 곳 (낮)
광고란만 작게 접혀진 신문이 보이고, 정애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고있다.
전화를 여러 통 했는지 신문엔 월수입 낙서나 메모들이 적혀있다.
정 애 (전화하는) 한 달에 얼마까지 벌 수 있어요?
S# 50 공장, 퇴근길 (저녁)
수위실 밖 길가에 민수의 자동차가 보이고, 차 옆에 민수가 서있다.
퇴근하는 여공들 힐끔힐끔 보고 지나가고,
잠시 후 연주 혼자 힘없이 걸어나온다.
민 수 (연주를 발견하고) 연주야!
민수를 보고 놀라는 연주. 순간 반가움이 스치는데,
이내 민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표정 무거워지는 연주.
민 수 정애씨는? 같이 저녁 먹을려고 온 건데?
연 주 어... 오늘 출근 안 했어.
민 수 그래...? 가자. 저녁 안 먹었지?
연주 의아하게 차를 보면,
민 수 내차야. 타. (차 문을 열어주며) 이번에 제주도 일 맡으면서,
기태 아버님이 주신 거야. 일하면서 쓰라고.
연주 차에 탄다.
민수 돌아와 운전석으로 향한다.
두 사람을 태우고 출발하는 차.
S# 51 식당 (밤)
마주앉아 밥을 먹고있는 연주와 민수.
민 수 회사로 찾아가서 당황했니?
연 주 좀.
민 수 괜히 그러고 싶었다. 너 일하는 데가 어떤지 보고싶기도
하고, 한번 놀래켜 주고싶기도 하고 그랬어. 기다리면서 니가
저 안에 있구나 생각하니까, 웬지 거기가 친근하고 좋더라.
맨날 니가 왔다갔다 지나다녔을 길도 자세히 한번 더 보고
그러면서 기분 좋았어.
민수를 보면서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는 연주.
연 주 거기 뭐 볼게 있나...
민 수 그래두...
둘 잠시 말없이 밥만 먹는다.
민 수 일 끝내고 나오는 사람 저녁 사주는 기분도 괜찮네.
연주 착찹하게 젓가락만 깔짝거린다.
민 수 많이 먹어. 이제부터 내가 사주는 밥은 내가 정식으로
일해서 버는 돈이야. 곧 제주도 내려가. 내가 호텔 디스코텍
맡기로 했다는 얘기했나?
연 주 아니...
민 수 그렇게 됐어. 좀 거친 일이긴 한데, 나 거칠게도 많이
살아봤거든. 할 수 있어. 지금은 내가 이렇지만 몇 년 열심히
하면, 혼자 독립할 정도는 될 거야. 나 한번 믿어봐라. 나
괜찮은 놈이야.
민수 다시 밥을 먹는다. 연주 착잡해진다.
민 수 참, 이번에 내려가면 아예 거기서 정착해야 할거야. 너
놀러오면 같이 9시 뉴스보고 산책 나갈려고 아파트도 하나
마련해달라고 얘기해놨어. 나 보러 놀러 올 거지?
연 주 (쳐다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민 수 (농담처럼) 놀러올 게 아니라, 너 그냥 나한테 확 시집와라.
연주, 문득 쳐다보고 말이 없다.
민 수 농담이야, 농담. (이상하다는) 오늘은 왜 이렇게 얌전해?
겁난다.
연주, 시선을 피할 뿐...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이 복잡해진다.
S# 52 달리는 민수 차안 (밤)
민수와 연주 앉아있다. 연주는 말없이 고민만 하고있다.
민수의 이야기가 더해질수록 연주의 고민 심각해진다.
민 수 생각해보니 우리 정식 데이트는 이번이 처음이네? 같이 밥
먹고, 집에 데려다주고...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됐는데... 오늘
낮에 신문에서 어떤 남자가 쓴 에세이를 봤는데, 자기
아내랑 연애할 때 총 700번을 데려다주고 결혼했다고
하더라. 난 이번을 처음으로 쳐야겠어. 맨날 엉뚱한 동네만
가고, 진짜 데려다 준 게 아니잖아. 오늘 기분 참 좋다.
연 주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잠깐 할 얘기가 있어. 술 한잔만
사줘. 나만 마실게.
S# 53 실내 포장마차 (밤)
마주 앉아있는 민수와 연주. 연주, 소주를 연거퍼 따라 마신다.
민 수 왜 또 그러니? 오늘은 많이 먹지 마라.
연주 술을 따르면,
민 수 (술병을 뺏으며) 왜 이래? 그럼 천천히 마시든가.
연 주 줘봐. 괜찮아. 줘봐.
민 수 (술병 주지 않고) 무슨 얘긴지 몰라도, 술 마시지 말고 한번 해봐라.
연주 한동안 말이 없다. 민수 가만히 보고만 있다.
연 주 나 민수씨 괜히 만났나봐.
순간 민수 보면,
연 주 그렇게 생각 없이 찾아가는 게 아니었는데...
민 수 무슨 소리니?
연 주 우리 만나서 좋을 게 없단 얘기야. 나랑 있었던 일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민 수 뭐야? 지금 그만 만나자는 소리니?
연 주 응. 그런 얘기야.
민 수 (술병 놓으며) 너 왜 이러니? 왜 또 그래?
연 주 회사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어. 오늘 하는 얘기들 듣고
있는데, 너무 부담스럽더라.
민 수 뭐가 부담스러워? 내가 회사로 찾아간 게 잘못 한 거니? 뭐 실수한 거야?
연 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민 수 그러면 왜? 그날은 양말까지 사놓고 가고서, 갑자기 왜 이래?
연 주 그건 칫솔 사러 갔다가 보이길래 그냥 산 거야. 우리 여기서
그만 정리하는 게 좋겠어.
민 수 그 새 또 마음이 변했니? 내가 싫어졌어?
연 주 아니, 그건 아니고...
민 수 그럼 왜 이러냐구! 알기 쉽게 말해봐. 왜 헤어지자는 거야?
연 주 나 실은... (보았다가 시선 피한다.)
민 수 괜찮아, 말해. 이랬다 저랬다 사람 희롱하지 말고, 차라리 깨끗하게 얘길 해.
연 주 (말 못하는) 민수씨랑 너무 깊이 빠진 거 후회해.
민 수 (골치가 아파진다.) 넌 뭐가 그렇게 복잡하니? 솔직히
말해봐. 왜 또 이러는데? 나 너 만나고 사흘을 편해 본 적이
없다. 좀 됐나 싶으면 이러고, 이제 좀 되가나 싶었는데, 왜 또 이래?
연 주 나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서 부담스러워.
난 민수씨랑 어떻게 하겠다 그런 마음까진 없어.
민 수 아니, 누가 지금 당장 어떻게 하재니?
연 주 당장이고 나중이고, 난 민수씨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 내
미래하고 연관짓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까... 헤어져.
민 수 날 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연주 병 가져다 소주를 따라 마신다.
연 주 솔직히 말해도 돼?
민 수 말해.
연 주 나 실은, 너 사는 거 맘에 안 들어. 솔직히 별루야.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잖아. 남들한테도 챙피해. 제주도에 그거, 그게
뭐 별거야? 그래봤자 기태씨네 꺼잖아. 내가 남자라면 너
같인 안 산다. 하물며 내가 너 같은 남자한테 내 미래를
맡길 거 같애?
표정이 굳어가는 민수. 연주 소주 한잔 더 따라 마시고는,
연 주 차라리 뭘 하나 건실하게 하든가. 너 니 손으로 뭐 만들어본
적 없지? 사람이 먹고 죽는 약이라도, 니 손으로 뭐
만들어본 적 있냐구? 난 너 같은 종류의 인간 딱 질색이야.
사실 그 동안 매력도 있고 해서 고민도 좀 됐는데, 점점
볼수록 아니라는 생각만 들더라. 한 마디로 말해서, 나
너한테 취미 없어. 혹시 또 몰라. 기태씨 정도 되면. 정말 그
정도라면 내가 심각하게 한번 고려해볼 수도 있겠다.
이때 연주의 따귀를 갈기는 민수.
그대로 나가버리는 민수.
혼자 남는 연주.
S# 54 달리는 차안 (밤)
비가 내리고 있고,
움직이는 윈도우 브러쉬 너머로 혼란스러운 민수의 얼굴이 보인다.
화가 나는지 핸들을 힘껏 두드린다.
S# 55 실내 포장마차 (밤)
빗소리 점점 커지고, 혼자 멍하니 앉아있는 연주.
S# 56 거리 노변 (밤)
노변에 차가 세워져 있고, 차 밖의 민수 비를 맞으며, 분노의 표정으로 서있다.
갑자기 주먹으로 사이드미러를 쳐버리는 민수.
사이드미러 떨어져 달랑거리고, 민수의 주먹에서 피가 흐른다.
S# 57 옥탑방 (밤)
들어와 있는 연주, 옷도 갈아입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다.
잠시 후 술에 취해 들어오는 정애.
연 주 어디 갔다 오니? 또 술 마셨니? 니가 꼭 곧 죽을 사람 같다...
정 애 나 면접보고 왔어.
연 주 무슨 면접?
정 애 합격했어.
연 주 무슨 소리야?
정 애 나 내일부터 회사 때려칠 거야.
연 주 뭐?
정 애 너도 곧 그만 둬.
연 주 너 무슨 짓 할려고 그래...?
정 애 너 걱정 마. 내가 돈 벌게.
연 주 너 어디 이상한 데 갔었니?
정 애 병원비 내가 댄다구. 넌 걱정 말고 치료나 시작해.
연 주 너 또 뭐 할려구 그래? 그러지 마라. 제발 나 이대로
편안하게 해 줄 수 없니?
정 애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 마. 넌 너 하고 싶은 대로
한댔지? 나도 내 맘대로 할거야. 대신 넌 치료받아야 돼.
연 주 (말을 않는) ....
정 애 기집애야! 그럼 나보고 구경만 하고있으라고? 너 어쩜
이렇게 잔인하니? 독한 년. 너한텐 나밖에 없잖아! 나도
그렇고... (눈물 보인다.)
연 주 울지마.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징징 짜지 좀 마...
연주 말없이 다시 멍한 상태로 돌아오고,
정애도 돌아앉아 말없이 스타킹 벗어 팽개친다.
연 주 혹시 너한테로 그 사람 연락 오면... 나 이렇다는 얘긴 절대
하지 말아줘... 이제 전화 안 올 건데, 혹시라도 오면 말이야...
꼭 부탁해...
말없이 듣고 있는 정애.
S# 58 제주도 호텔 전경 (낮)
S# 59 제주도, 디스코텍 (낮)
민수, 지배인과 실내를 둘러보고 있다.
지배인 아무래도 여긴 직영으로 돌리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민 수 곽영근이가 내놓으려고 하지 않을 거라는 거죠?
지배인 그렇지요. 이런 거 하나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게 그쪽
세계에서는 안정적인 돈줄인데 쉽게 포기하겠어요? 주인이
아무리 바뀌어도 꿈쩍도 안 할걸요?
민 수 무슨 방법이 있겠지요.
민수를 유심히 보는 지배인.
S# 60 제주도, 호텔 지배인 사무실 (낮)
은밀한 느낌으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지배인.
지배인 오늘 저랑 디스코텍 둘러보고요, 내부수리 문제로 영선부
직원하고 인테리어 업자 만나고 있습니다.
S# 61 기태 사무실 (낮)
전화로 보고를 받고있는 기태.
기 태 그래요.
지배인 (E)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장실장이 곽영근이를 칠만한
다른 세력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 같아요.
기 태 그러다 거꾸로 곽영근이한테 당하기라도 하면 문제가
커질텐데요.
지배인 (E) 글쎄 말이에요. 어차피 다른 세력이 들어와도 그에
해당하는 이권은 줘야하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기 태 아무튼 계속 더 수고를 해주세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생각이 복잡한 기태.
S# 62 호텔, 야외 카페 (낮)
민수 인테리어 업자와 악수하며 헤어진다.
서류를 챙겨 일어나려던 민수, 다정한 신혼부부를 보며 그냥 자리에 앉는다.
우울하게 혼자 앉아있는 민수.
S# 63 공장, 식당 (낮)
연주 혼자 식사를 하고있는데, 동식이 식판을 들고와 앉는다.
연주 빙긋이 웃어준다.
동 식 정애 무슨 일 있니? 왜 말도 안하고 갑자기 회살 관뒀니?
연 주 너무 힘들었나봐요.
동 식 그래...
둘 밥 먹는데,
동 식 넌 괜찮고? 전보다 얼굴이 더 창백해 진 거 같다.
연 주 괜찮아요. 많이 좋아진 걸요.
동 식 그래...
둘 다시 밥을 먹는데, 이때 여공1이 돈을 모금하며 나타난다.
여 공1 (조의금이라 좀 차분하게) 현숙이네 아버님 조의금 걷거든.
2만원이야. 오빠도 내세요.
동 식 (주머니 뒤지며) 저번에 병원비 걷더니 돌아가신 모양이구나.
안됐네...
연주 쳐다보며, 기분이 좋지 않다. 말없이 지갑에서 돈을 꺼낸다.
여 공1 (연주보고) 니가 웬일이니? 군말 없이 돈을 다 내고?
연 주 (돈을 내놓고, 식판 들고 일어서는) 근데 이런 게 이제 무슨 소용이 있겠니. 죽어버렸는데...
여 공1 (돈을 집으려다 다시 놓으며) 뭐? 너 진짜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차라리 내지를 마!
연 주 (얼른 식판 놓고, 다시 주는) 아니야. 그런 뜻이. 자.
여 공1 (돈 안 받으며) 아니긴 뭐가 아니냐? 너한테 정말 질렸다. (가는데)
연 주 (잡아서 주며) 아니라니까. 자, 받어.
여 공1 됐어. 니 돈 필요 없어. (가버린다.)
연주 손에 들린 돈을 본다. 동식 물끄러미 연주를 본다.
연주 보면, 주위의 여공들이 모두 연주를 보며 수근거린다.
연주 우울하게 식판 들고 나간다.
S# 64 병원, 진찰실 (낮)
황박사와 정애 마주앉아있다.
정 애 선생님, 입원수속 밟아주세요. 다음주에 하겠어요.
황박사 본인은 지금 상태가 어때요? 본인이 치료 의지가 있어야 되는데.
정 애 제가 어떻게든 데려올게요.
황박사 서연주씨는 깡깡하게 보여서 살려는 의지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정 애 제가 어떻게든 설득해볼게요.
황박사 급해요. 이런 식으로 시간을 자꾸 보내면 큰일나요. 내가
병실을 알아볼테니까 꼭 데리고 와야 됩니다.
정 애 걱정 마세요...
그러나 불안한 표정의 정애.
S# 65 제주도, 호텔 룸 (밤)
디스코텍 설계도면과 서류들을 보고있는 민수.
전화가 울리자 받는다.
민 수 여보세요.
직 원1 (E) 서울에서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민 수 누가요?
S# 66 호텔 로비 (밤)
민수 나오면, 안내 데스크에 희정이 서있다.
희정은 평소와 다르게 진지해 보이고, 민수는 보는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희 정 오빠...
민 수 여긴 어떻게 왔니? 혼자 온 거야?
희 정 음.
민 수 집에는 말씀 드렸어?
희 정 친구 집에 간다 그랬어.
민 수 (직원들 의식하며) 가자. 저녁은 먹었어?
희 정 응. 나 술이나 한잔 사줘.
민 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올려면 낮에 오지.
희 정 (민수의 팔짱 끼고 따라가며) 어때? 자고 가면 되지.
민수 팔을 빼려는데, 다시 끼면서 따라가는 희정.
라운지로 향하는 민수와 희정의 뒷모습을 보고있는 지배인.
S# 67 호텔 라운지 (밤)
민수와 희정 칵테일을 마시고 있다.
희 정 오빠랑 이렇게 낯선 데 와있으니까 기분이 참 묘하다.
옛날에 내 친구들이랑 동해안으로 캠핑 갔던 생각난다. 그때
우리가 오빠보고 보디가드 해달라고 며칠을 졸라서 같이 간
거였지...? (웃으며) 내가 일출 본다고 오빠 끌고 나왔다가,
오빠 바위틈에 슬리퍼 한 짝 잃어버렸잖아. 그래서 다음날
신발가게 갈 때까지 한발은 맨발로 다녔던 거 생각 나?
민 수 생각 나.
희 정 그때 내 친구들이 오빠 되게 좋아했는데... 그래서 내가
걔네들 단념시키느라고 오빠 몰래 얼마나 물밑 작업을 한 줄 알아?
민 수 그런 일이 있었니?
희 정 그래.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꽤 오래 전 일이다...
둘 술을 마시고, 잠시 말이 끊긴다.
희 정 나 곧 외국 나가. 영화 공부하러.
민 수 학교는 어쩌구?
희 정 졸업 같은 거 중요하지 안잖아. 작년에 찍어놓은 필름 보냈는데, 거기서 오래.
민 수 (말없이 끄덕인다.)
희 정 지금 수속중이야, 아무도 몰래. 일단 가고 나서 다 알게
될텐데, 그땐 집에서도 어떻게 못하겠지, 뭐. 빠르면 다음달
초에 가게 될지도 몰라.
민 수 그래... 잘됐다. 하고 싶은 거 해야지.
민수 술을 마시고, 희정은 민수를 본다. 둘 잠시 말이 없다.
희 정 오빤 어때? 여기 일 계속 할거야?
민 수 글쎄... 막상 내려와서 보니까, 처음보다는 그렇네. 생각도
복잡하고.
희정 민수를 보며 잠시 망설인다.
희 정 오빠, 이번에 나랑 같이 가자.
민수 문득 본다.
희 정 나랑 여기 뜨자.
민 수 내가 거기 가서 뭐하게.
희 정 호텔경영 배우고 그쪽에 취직해서 경력도 쌓고 하면 되지.
어차피 집에서 돈 넉넉하게 보내줄 거고, 시간제
아르바이트하고 그러면 오빠랑 같이 나눠 쓰는 덴 문제없어.
민 수 말이라도 고맙다. 고맙게 생각할게.
희 정 그러지 마. 가서 결혼하잔 소린 아니니까 너무 겁먹지는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봐. 생각해 볼 거지?
민수 대답 없이 술을 마신다. 흔들리는 기분.
희 정 난 평생 기다릴 순 없어. 오빠도 빨리 결정해. 거기 가서
기다리거나 하진 않을 거야. 여기서 비행기 타는 순간 오빠
정리할 거니까. 기회는 그 전까지 만이야. 잘 생각해봐.
S# 68 객실 복도 (밤)
적당히 취한 민수와 희정이 걸어온다.
희 정 내가 와서 좋았지?
민 수 (희정방 문을 열며) 그래. 들어가라.
희 정 오빠 방은 어디야?
민 수 (옆방 가리키며) 요 옆방.
희 정 (옆방 한번보고, 들어가며) 잘 자, 오빠.
민 수 잘 자라.
민수 옆방으로 가 문을 여는데, 희정 문을 닫지 않은 채 보고있다.
희 정 내가 한 얘기 잘 생각해봐. (문을 닫는다.)
민수, 닫히는 희정 방문을 쳐다보고는, 자기 방문으로 들어간다.
S# 69 민수 객실 (밤)
혼자 침대에 누워있는 민수. 생각이 복잡하다.
- 10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