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사랑] 16
S# 1 기태집 전경 (낮)
S# 2 기태방 (낮)
기태모, 한약을 내밀면, 침대에 앉아 마시는 기태.
기태모 대체 뭘 하는 거야? 여태 그놈 하나 못 잡고? 더 윗선에다
얘길 했어야 되는 거 아니니?
기 태 걱정 마세요. 전국에 수배했다니까 곧 잡을 거예요.
기태모 겁도 없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니? 기가 막혀서.
여태 그런 놈을 집안에 뒀으니...
기 태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그때 딱 끊었어야 되는 건데. 제가
마음이 약한 게 그게 탈을 부른 거 같애요.
기태모 너도 이제 중요한 거 배웠으니까 정신 차려. 내가 누누이
얘기했지? 그래서 가정환경이 무서운 거다. 하는 짓 좀 봐라.
그 놈 자식 잡기만 해봐. 내가 가만두나.
기 태 우린 가만있으면 되요. 괜히 그런 자식 때문에 우리만
웃기게 되요.
기태모 그래, 그만 잊어버리고 좀 숴라. (나간다.)
기태 아직도 화가 안 풀린 표정.
S# 3 트럭 회사 (낮)
다급한 희정이 서있고, 대호 달려나온다.
희 정 어떻게 된 거예요? 민수오빠 지금 어딨어요?
대 호 갑자기 민수는 왜 나한테 와서 찾아요?
희 정 대호씬 알잖아요. 가르쳐줘요. 트럭 빌려줬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대 호 난 몰라요. 그 놈 어디 있는지.
희 정 정말 왜 이래요? 민수오빠한텐 중요한 일이에요. 지금
손쓰지 않으면 안돼요.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가 더
커진다구요. 이대로 놔두면 민수오빠 인생 망치는 거니까,
대호씨도 가만히 있으면 안돼요! 최대한 피해 줄여야 되요.
나 꼭 민수오빠 만나야 하니까, 빨리 나한테 연락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꼭이요.
시선을 피하는 대호.
희 정 내 말 꼭 전해요. 나중에 친구 잘못되면 후회하지 마시고.
희정 답답하게 보다가 돌아선다. 착잡한 대호의 표정.
S# 4 남산 (낮)
민수 불안한 듯 앉아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대호가 나타나 자기 뒤를 살피며 좀 떨어진 곳에 앉는다.
서로 쳐다보고는 주변을 살핀다. 잠시 후 대호 민수 옆으로 와 앉는다.
대 호 어제 회사로 희정씨가 찾아왔었다. 형사도 왔었어.
희정씨한테 연락해봐라, 꼭. 어떻게 손을 쓸 모양인데, 니가
이러고 있으면...
민 수 아니야, 됐어.
대 호 너 이러고 있으면 안돼. 그럼 서울 뜨던지.
민 수 연주 찾을 때까지는 못 떠나.
대 호 니 몸은 생각 안 하냐? 너 이렇게 오래 못 가. 이러다
어떻게 되면...
민 수 (말 끊으며) 내가 알아서 해. 일단 돈은 잘 보관하고 있어라.
연주 분명히 찾아서 다시 입원시킬 거야.
민수의 굳은 얼굴을 보는 대호. 시선 돌린다.
민수 주변을 보며, 일어나 어술렁 거리며 가다가 재빨리 사라진다.
S# 5 야외 가든 식당 (낮)
분주한 시각.
식탁을 치우는 연주. 자기도 모르게 소매를 걷어올리다보면, 팔목에 멍이
들어있다.
얼른 소매를 내리고, 그릇이 그득한 쟁반을 들고 힘들게 주방으로 간다.
남 자 (E) 여기 좀 빨리 치워달라니까?
연 주 네. 곧 가요.
S# 6 동 식당 주방 (낮)
연주 들고온 쟁반을 내려놓고, 다른 행주와 쟁반 들고 나가려는데,
아줌마 (설겆이 하던) 너 왜 그러냐?
연 주 (무심코 코를 슥 문지르며) 네?
이때 손에 묻어나는 코피.
연주 얼른 주방 안으로 들어가 코피를 닦는다.
불안한 듯 고개를 젖히고, 코피를 닦아내는 연주.
S# 7 연주 월세집 전경 (밤)
낡고 다닥다닥 붙은 셋집이 많은 동네의 한 집.
S# 8 연주 월세방 (밤)
힘들게 들어와 불을 켜는 연주. 작은 문갑과 거울 뿐. 초라한 가방과 옷가지들.
들어서자마자 벽에 기대어 주저앉는다.
그 뒤로 낡은 문갑 위에 민수의 사진 액자가 보이고 그 옆에 놓여있는 핸드폰.
S# 9 옥탑방 (밤)
전화벨이 울리면, 혼자서 밥을 깨작거리다가 얼른 받는 정애.
정 애 여보세요...
연 주 (E) ...
정 애 여보세요? ....여보세요! 연주니? ....연주구나!
연 주 (E) 정애야...
정 애 연주야! 너 어딨니? 지금 어디야? 서울이니?
S# 10 연주 월세방 (밤)
연주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있다.
연 주 나 걱정 말어. 잘 있으니까.
정 애 (E) 어딨어? 빨리 말해! 빨리!
연 주 정애야, 나 괜찮아. 난 괜찮은데... 민수씬 어떻게 됐니?
S# 11 옥탑방 (밤)
정 애 어떻게 되긴, 너 찾고 있지. 너 땜에 그 사람 아무것도 못해.
연 주 (E) 나 찾지 말라고 해. 니가 좀 말려 줘.
정 애 그 사람 연락도 잘 안돼. 연주야, 지금 어디야?
S# 12 연주 월세방 (밤)
정 애 (E) 제발 와서 편안하게 내 옆에라도 있어. 치료 안 받아도
좋아.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해도 좋으니까, 제발 나하고
같이 있어. 응? ... 여보세요? 연주야? 듣고 있지?
그냥 핸드폰을 말없이 보다 접는 연주. 다시 플립 열어, 전원 꺼버린다.
핸드폰을 손아귀에서 놓아버리고, 괴로워하며 벽에 기대어 눈을 감는 연주.
S# 13 연립주택 골목길 (밤)
나타나는 민수. 주변을 살피며, 골목을 조심스럽게 올라온다.
한번 더 주변을 살피고는 연립주택으로 들어가는 민수.
S# 14 옥탑방 (밤)
멍하니 앉아있는 정애. 상을 내간다. 이때 나직이 현관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
정 애 (얼른 문 열며) 누구세요? 연주니?
하며 문을 열면, 서있는 민수.
민 수 나예요.
정 애 어떻게 된 거예요? (밖을 얼핏 보며) 얼른 들어와요. 낮에 몇
번 형사가 왔다 갔대요.
민 수 (들어오며) 그래요...?
정 애 (얼른 문 잠그며) 무슨 일 있는 거죠? 왜 연락은 잘 안되고
그래요?
민 수 사정이 좀 있어요.
정 애 들어가요.
방으로 돌아서는 민수와 정애.
(시간 경과)
초조하게 마주앉아있는 민수와 정애. 정애는 이야기를 다 들은 후다.
정 애 (놀라며) 그럼 이러고 있으면 안되잖아요? 서울을
벗어나든지, 빨리 어디로 가야죠?
민 수 내 걱정은 말아요. 난 연주만 찾으면 어떻게 되든 알아서 할
테니까.
정 애 왜 그랬어요? 정말...! 연주도 뭔가 눈치채고 있는 거
같았어요.
민 수 서울에 있는 건 확실해요?
정 애 그런 것 같아요.
민 수 어디 갈만한 곳이 더 없는지, 잘 생각해봐요.
정 애 (고개를 젓는) 모르겠어요.
민 수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분명히 짐작이라도 가는 곳이
있을 거예요!
고민하고 있는 정애의 얼굴.
그런 정애를 절실하게 보고 있는 민수.
S# 15 나무가 있는 골목길 (밤)
골목으로 들어서는 연주. 걸어온다.
민수와 헤어지곤 하던 그 자리에 서는 연주.
골목을 둘러본다.
연주의 얼굴 위로 빗소리가 화면 가득 들려온다.
S# 16 인써트
비가 오던 날 첫키스를 하던 민수와 연주.
S# 17 나무가 있는 골목길 (밤)
고통스럽게 그 자리에 서있는 연주. 오랫동안 그렇게 혼자 서있다.
S# 18 카페 안 (낮)
'박소영과 문경철의 결혼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이 쳐있고,
하얀 풍선들을 달고 장식을 하는 젊은이들.
서로 깔깔대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의자를 옮기며 결혼식 대형으로 준비를
하는 친구들.
카페 밖 유리창 너머로 나타나는 연주의 모습.
연주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연주 카페 안을 둘러보는데,
여학생 신부 찾아오셨어요?
연 주 네.
여학생 저 안쪽으로 들어가 보세요.
연주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며 카페 안쪽으로 들어간다.
칸막이 너머에서 여자친구들과 화장을 하는 소영이 보인다.
간단한 웨딩복장에 약식 면사포를 쓴 소영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연주.
다 좋은데 배가 좀 불러 보이지 않냐는 둥,
결혼선물로 아기 요람을 준비했다는 둥,
방이 좁아서 아기 요람 놓을 데나 있냐는 둥, 재잘거리는 여자애들.
거울을 보던 소영이 문득 연주를 발견한다.
소 영 어머 연주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연 주 (다가가 손 잡으며) 어, 축하해! 소영아...
소 영 다들 너 찾고 있던데...? (손을 잡아 앉히며, 잡고서)
안되겠다. 정애씨한테 연락해야지. 너 여기 가만있어.
(친구한테) 핸드폰 줘봐.
연 주 괜찮아. 나 어제 집에 들어갔어. 정애 나 여기 온 거 알아.
걱정 마.
소 영 그래...?
끄덕이며 미소짓는 연주.
연 주 (면사포를 만지며) 참 예쁘다.
S# 19 택시 안 (낮)
민수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앉아있다.
정 애 (E) 2시라 그랬던 거 같아요. 학교 앞에 있는 카페라
그랬는데... 뭐라 그랬더라... 맞다. 민들레 영토. 거기에서
한다 그랬어요.
S# 20 카페 안 (낮)
민수 들어서면, 결혼식이 진행중인 카페 안.
신랑과 신부가 서있고, 대학교수가 주례사를 하고 있다.
문가에서 둘러보며 연주를 찾는 민수.
안쪽에 연주의 뒷모습이 보인다.
민수 연주에게로 가려다가 멈춰서서 연주의 모습을 본다.
앉아서 결혼식을 보고 있는 연주. 뒤로 민수의 모습이 보인다.
주 례 서로에게 언제나 큰 힘이 되십시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다른 사람은 못해주는 것을 해주십시오. 그것이
부부입니다. 연애는 꽃들이 만발한 향기로운 정원이지만,
결혼은 쐐기풀이 돋은 들판과 같습니다. 서로 노력해서 그
들판을 헤쳐나가 다시 아름다운 정원에 이르는 것이
결혼입니다. 인생이 길지 않습니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그것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내일 당장 죽는다면, 아내가
남편에게 함부로 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매일매일 서로에게
충실하십시오. 사랑만 하기에도 모자라는 게 우리의 짧은
인생입니다. 서로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여 후회없이
사랑하십시오.
자꾸만 나오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중간에 조용히 일어서는 연주.
고개를 숙이고 걸어나온다.
민수와 가까워지는 연주.
가까이 와서야 민수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는 연주.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마주보고 있는 연주와 민수.
그렇게 서있는 두 사람의 모습 위로 신랑신부 서약의 소리가 들려온다.
사 회 다음은 혼인서약이 있겠습니다.
마주보며 서서 혼인서약을 하는 소영과 경철.
소 영 나 박소영은 문경철을 남편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거나 고생스러울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늘 당신과 함께 할 것을 약속합니다.
경 철 나 문경철은 박소영을 아내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 중 한 사람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함께
사랑하고 함께 고생할 것을 약속합니다.
연주 눈물을 흘리며 민수를 바라보고 있고, 민수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렇게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혼인서약 끝나자, 박수소리 들려온다.
민수와 연주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S# 21 카페 건물 뒷길 (낮)
환풍구가 있고, 어수선한 뒷골목.
건물 옆에 서있는 연주와 민수. 둘 다 차분한 상태다.
연 주 무슨 말하고 싶은지 알아. 그런데 나, 병원엔 가지 않을
거야. 더 이상 설득하려고 애쓰지마.
민 수 내가 잘못했다. 너 그렇게 놔두고 가는 게 아닌데. 그럼 우리
같이 있자. 병원에 데려가지 않을 게.
연 주 (고개 저으며) 아니. 나 민수씨 만나서 좋았어. 내가 민수씰
알지 못했다면 평생을 산들 무슨 의미가 있었겠어. 하지만
우리 여기까지만 만나자. 그게 좋아.
민 수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죽더라도 내 품에 안겨서 죽어야지,
이게 무슨 짓이니?
연 주 민수씬 나 절대 포기 안 할 거잖아. 또 병원에 끌고 갈 거고,
나 모르게 아무 일이나 막할 거고... 민수씬 지금 실연 당한
거야. 나 같은 거한테 채인 거라구. 그러니까 날 미워하고
증오하고 다시는 생각도 하지 말고, 악착같이 잘살아야 돼...
(울면서) 그래야 돼. 제발...
민 수 내가 왜? 나 혼자서는 의미가 없는데? 나 혼자는 아무 것도
아닌데? 니가 없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혼자
죽겠다고? 더 이상 같이 있지 말자고?
연 주 그렇게 아무렇게나 자기를 버리면 안돼!...
민 수 너야말로 왜 아무렇게나 널 버리니? 너 아무대서나 살다가
아무렇게나 죽고싶어? 정말 그렇게 죽고 싶니? 그럼 같이
죽자. 이리 와. 같이 가.
민수 연주를 끌고 간다.
S# 22 기찻길 옆 (낮)
연주를 끌고 오는 민수. 두 사람 뒤켠으로 기차가 지난다.
연 주 제발 그만 둬. 민수씬 나랑 같이 있으면 안돼! 민수씨 미래는
어떡하고?
민 수 내 미래? 니가 없는데 내 미래가 어딨어?
연 주 그럼 나 죽으면 같이 따라 죽기라도 할 거야?
민 수 그래. 나 너 땜에 너 살릴려고 도둑질까지 했어! 너 어디
가서 죽는지도 모르게 죽어버리고, 난 감방 가서 너 언제
죽는지도 모르고, 그럴 바엔 차라리 내 눈앞에서 죽어라.
같이 죽자. 어차피 희망 없는데, 너까지 없다면 나 더 살
이유 없어. 잘됐다 같이 죽어.
연 주 민수씨, 왜 이래...
민 수 너 이렇게 아무렇게나 니 맘대로 죽어버리면 내가 용서할 거
같애? 죽는다고 다 용서해 줄줄 알아?
민수 와락 연주를 끌어안는다. 안고 우는 두 사람.
민 수 어림도 없어. 나 너 용서 안 할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너 죽어도 용서 안 할 거야...
기차 지나가고 두 사람 뒤로 넓은 철길들이 뻗어있다.
그렇게 안고 울고있는 두 사람.
S# 23 병원 근처 (낮)
멀리 병원이 보이고, 민수 대호에게 말없이 연주의 가방을 준다.
(연주 월세방까지 가서 가방을 이미 싸온 것.)
민수, 연주를 보고,
연주도 민수를 본다.
민 수 (대호에게) 잘 부탁한다.
대호, 말없이 연주의 등에 손을 얹어 가자는 몸짓하고,
연주, 말없이 대호를 따라간다.
민수, 연주를 대호와 함께 보내고 바라보고 있다.
연주 돌아보면서, 돌아보면서 대호와 함께 천천히 멀어진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연주와 대호를 보고 있는 민수.
둘의 모습 사라지자 민수 돌아선다.
S# 24 공중전화 부스 (낮)
전화를 거는 민수.
S# 25 옥탑방 (낮)
외출준비를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전화를 받는 정애.
정 애 여보세요? 어떻게 됐어요?
S# 26 공중전화 부스 (낮)
민 수 설득했어요. 지금 막 병원으로 들어갔어요.
S# 27 옥탑방 (낮)
정 애 잘했어요. 고마워요, 민수씨. 고마워요...
민 수 이제 정애씨가 잘 좀 해줘요.
정 애 그건 걱정 말고 민수씨나 조심해요. 그럼 병원으로 가볼게요.
전화를 끊고 서둘러 달려나가는 정애.
S# 28 기태방 (밤)
기태 신문을 보고 있는데, 희정 들어온다.
희 정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민수오빠 풀어 줘. 민수오빠 감옥에
넣어서 뭐 할 거야?
기 태 난 니가 그럴수록 해줄 마음이 생겼다가도 싹 달아난다. 넌
누구 동생이냐?
희 정 그래, 내가 여태까지 했던 말 다 취소할게. 오빠한테 심하게
할 마음 없었어. 그러니까 경찰 수사 중단시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
기 태 누구 맘대로. 너 내가 어떻게 당한지는 생각도 안 하냐? 그
자식이 한 짓 난 용서 못해. 너 계속 이런 식으로 그 놈
감싸면 너도 각오해라.
희 정 감싸는 게 아니야. 둘이 친구잖아. 이런 식으로 끝낼려고 그
동안 같이 지냈어? 그런 거 아니잖아. 제발 그러지 마.
기 태 친구? 넌 걔가 내 친구로 보였냐? 난 그놈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 한번도 없다. 그 자식 감옥에 집어넣고 말 거야!
희 정 미쳤어. 민수오빠 먼저 코너에 몰아넣은 건 오빠잖아!
인간적으로 불쌍하지도 않아?
기 태 (신문 넘기며) 지 발로 걸어 들어와서 엎드려 사죄라도
한다면 모를까, 절대로 안돼.
희정, 기태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나간다.
S# 29 희정방 (밤)
방으로 들어와 걱정이 되는 희정. 고민하다가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가도 받지 않는 전화.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니 메모 남겨달라는 통신회사의 안내 메시지가
흐른다.
희 정 (메모를 남기는) 민수오빠, 나 희정이야. 대체 어디 있어?
제발 연락해 줘. 난 오빠 탓할 생각 없어. 오빠가 뭘
생각하는지도 알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안돼. .... 연주씨도
오빠 이러는 거 원치 않을 거야. .... 그 사람 생각해서라도
제발 극단적으로 치닫진 말아. 시간이 흐를수록 오빠한테
불리해. 빨리 나한테 연락 줘... 나 곧 떠나. 오빠 이런 거
보고 그냥 갈 수는 없잖아. 오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럼, 다른 이유 없이 나 한번만 보자. 가기 전에 잠깐
얼굴이라도 봐. 꼭 연락해 줘...
울상이 되어 수화기를 내려놓는 희정.
S# 30 병원 전경 (낮)
S# 31 진찰실 (낮)
대호와 정애가 황박사 앞에 앉아있다.
황박사 상태가 너무 안 좋아졌어요. 현재로선... 가망이 없네요.
정 애 네?
황박사 집에 가서 편히 쉬게 하는 게 좋겠어요.
정 애 안돼요, 선생님. 그럴 리가 없어요.
대 호 그래도 좀 더 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고개를 젓는 황박사.
멍하니 넋이 나가는 대호와 정애.
S# 32 진찰실 앞 복도 (낮)
정애 벽을 붙잡고 오열을 터뜨린다.
대호 참담하게 서있다.
정애 그대로 벽을 따라 쪼그리고 앉아 운다.
대호도 다른 쪽으로 고개 돌리고 그대로 서있다.
S# 33 병실 (낮)
대호 혼자 병실에 들어서면,
옷을 갈아입은 연주가 환자복을 개서 침상에 놓고 돌아본다.
대 호 (약간 놀라며) 연주씨...
연 주 우는 소리 들었어요. 괜찮아요. (가방 챙기며) 가죠.
대호 가방을 들면, 먼저 나가는 연주.
S# 34 어느 여관방 (낮)
민수 잠긴 문을 열어주면, 들어서는 대호.
민 수 어떻게 됐니? 결과 나왔냐?
대호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돈 가방을 떨어뜨린다.
민수의 멍한 표정.
S# 35 마을 버스 (낮)
나란히 앉아있는 연주와 정애.
창백하고 무표정한 연주.
연신 닦아내지만, 정애의 볼에는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연 주 그만 울어. 나 괜찮아...
정 애 그러구 돌아다니지만 않았어두...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
아니야...
연 주 나 괜찮대두... 결국은 이렇게 될 걸 왜들 그랬어... 이렇게
간단한 걸 가지구... 난 괜찮아. 정말이야... 난 괜찮아...
차체에 흔들리며 나란히 앉아있는 두 사람.
S# 36 포장마차 (밤)
술을 마시는 민수. 여러 개의 빈 병들이 보이고, 이미 취해있다.
절망적인 민수,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괴로워한다.
S# 37 거리 (밤)
비틀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는 민수.
S# 38 교회 앞 (밤)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민수.
걸어오다 불이 켜진 십자가를 보는 민수.
S# 39 교회 안 (밤)
교회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취한 민수가 들어선다.
민 수 당신 왜 그래? 왜 연줄 데려가겠다는 거야. 망할 놈의
하느님. 이건 너무하잖아!
비틀비틀 단상을 향해 들어가는 민수.
민 수 그 앨 지금 데려가서 뭐 할려고 그래? 대체 뭘 잘못 했길래?
당신 잘못하는 거야. 나한테 이러면 안돼.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빌어먹을. 젠장. 왜 데려가는
거냐구! 왜 당신 마음대로야? 씨발, 한번만 살려주면
안되냐... 조금만 더 살려주면 안돼요? 많이도 말고 1년만.
6개월만이라도... 그 앤 겨우 스물 넷인데, 우린 이제야 겨우
사랑을 시작했는데... 이건 너무 하잖아요!
울음을 터뜨리는 민수. 주저앉듯 꿇어앉는다.
민 수 제발 기적이라도 일어나게 해줘요. 그 애를 살려줘요. 당신은
할 수 있잖아. 왜 하필 우리한테 이러는 거야. 왜 하필... 그
애를 놔두고 차라리 나한테 다른 걸 줘요. 어떤 어려움도
상관없어요. 그 동안 내가 잘못한 거 다 달게 받을 테니까,
제발 그 애만은, 그 애만은 데려가지 말아요. 제발...
엎으려 우는 민수.
마치 용서를 구하듯 두 손을 머리 위로 비비다 맞잡는다.
그렇게 낮게 엎드려 울고 있는 민수. (F.O)
S# 40 연립주택 골목길 (낮)
주변을 살피지 않고, 멍한 표정으로 걸어 올라오는 민수.
집 앞까지 와서는 멈춰서더니 눈물이 나오는 민수.
잠시 벽을 보고 혼자 우는 민수.
진정을 하려고 하늘을 보며 애쓴다.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서있는 민수.
S# 41 옥탑방 (낮)
연주, 벽에 쿠션을 기대어 앉아있고, 정애와 마주 앉아있다.
연 주 곧 겨울 될 텐데, 보일러 주인집한테 새로 교체해 달라고 해.
정 애 ....
연 주 그런 표정 좀 하지 마. 차라리 잘 됐잖아. 이제 민수씨나
너나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되고, 우리 편안하게 있자. 우리
항상 같이 있었는데... 친형제나 다름없었는데...
정애, 눈물이 고인다.
연 주 그 동안 도망 다니고 니 속 썩힌 거 미안해. 나 용서해 줄
거지?
정 애 (눈물이 쏟아진다.) 나쁜 기집애. 나쁜 기집애...
연 주 (손잡으며) 미안해, 정애야. 미안해. 용서해 줘야 돼...
정 애 너 나한테 잘못한 거 없어.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연 주 그래, 그래... 그리고 나 민수씨랑 같이 보내고 싶은데...
그래도 되지? 그 사람한텐 내가 필요해. 나도 그렇고.
정 애 (끄덕인다.)
연 주 그렇다고 니가 1순위가 아니라는 건 아니야. 넌 이미 날
분양 받았잖아.
정 애 알아. 괜찮아.
연 주 (작은 반지 선물상자를 내밀며) 그리고 이거. 돌아다니다가
샀어. 너 줄려고.
정 애 이거 뭔데...
연 주 생일 선물. 암만 생각해도 내년 봄까진 어려울 것 같아서.
미리 주는 거야. 저축.
정애 연주에게 엎드려 운다.
연주 정애를 도닥거린다.
이때 민수 들어오자, 눈물 훔치며 일어나는 정애.
연주와 민수는 멍하니 서로만 바라보고...
정 애 어서 와요. 둘이 얘기해. (눈물 훔치며 나간다.)
민수 들어와 앉고, 연주를 보지 못하고 시선 피하고 있다.
연 주 (민수를 보다가) 손잡아 줘.
손을 잡을 뿐 쳐다보지 못하는 민수.
연 주 바보야. 니 잘못이 아니야.
민수 문득 연주를 본다.
둘 와락 끌어안는다.
우는 민수. 우는 연주.
잠시 후 연주가 먼저 진정한다.
연 주 울지마. 울지마... 제발 울지마... 우리 이제 같이 있을 수 있게
됐잖아. 민수씨 가는 대로 나도 데리고 가. 혼자 가게 두지
않을 거야. 우리 남은 시간 동안 같이 있어. 한시라도 떨어져
있지 않을 거야. 그래도 되지?
민수 젖은 얼굴로 보면,
연 주 우리 여행 가자. 파도소리. 듣고 싶어. 지금 가야돼 빨리.
여기 있으면 안돼.
민 수 그래.
S# 42 옥상 (낮)
밖에서 혼자 울고 있는 정애.
가방을 챙겨서 나오는 연주와 민수.
정애 당혹해서 허둥대며 쳐다보면,
연 주 우리 잠깐 여행 좀 갖다올게. 괜찮지?
정 애 그래, 잘 다녀 와.
연주와 민수, 내려가려 하는데,
정 애 잠깐만요, 민수씨. 잠깐 나 좀 봐요.
정애 옥탑방으로 들어가면, 민수, 가방 놓고 따라 들어간다.
S# 43 옥탑방 (낮)
정애, 방에서 작은 의약품 봉투를 찾아와 민수에게 내민다.
정 애 이거.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까 가져가세요. 고통이 심하면
놔주래요. 몰핀이에요.
민수 받고는 돌아서려다가 정애 어깨위에 손을 얹었다 놓고 나간다.
그대로 울며 멍하니 서 있다가 다급하게 달려나가는 정애.
S# 44 연립주택 골목길 (낮)
손을 잡고 골목길을 내려가는 연주와 민수.
연주, 옥탑방을 돌아본다.
민수도 연주를 보고 같이 돌아보는데, 연주 다시 내려간다.
민수와 함께 사라지는 연주.
옥상에서 바라보며 울고 있는 정애.
S# 45 기태방 (밤)
골프채를 꺼내보고 있는 기태. 이때 전화 오면, 받는다.
기 태 여보세요.
민 수 (E) 나 민수다. 집 앞인데 잠깐 나와라.
기 태 그래, 니 발로 왔냐? 들어올 용기는 없다 이거지?
이내 끊기는 전화.
기 태 어? 이 자식 봐라.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나가는 기태.
S# 46 기태집 거실 (밤)
소파 위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희정.
2층에서 내려오는 기태, 희정을 보더니,
기 태 니가 얘기했냐?
희 정 뭘?
기 태 (그대로 현관으로 향하며) 자식이 별 수 있어?
희 정 (쫓아가며) 어디 가? 옷도 안 입고?
기 태 니가 대단하게 치는 놈이 어째 여기 들어올 배포는 못되는
모양이다. (나간다.)
희정 놀라며 따라나가려다 그만두고 올라온다.
S# 47 기태집 앞 (밤)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민수.
나오는 기태, 민수를 보며 가까이 다가온다.
민수 담배를 끄고, 기태를 본다.
돈 가방을 바닥에 툭 던지는 민수.
민 수 필요 없게 됐다.
그리고는 민수 말없이 기태를 지나가려는데,
기 태 이럴 줄 알았다. 왜, 생각해보니 안 되겠든?
멈춰 서며 고개를 돌리는 민수.
기 태 방법이 없지? 결국 나한테 돈 들고 와서 다시 사과할 걸, 왜
그랬냐? 왜? 겁나든? 감옥에서 썩을 생각하니까 겁나?
기태를 노려보는 민수.
기 태 이렇게 한다고 내가 풀어줄 것 같으냐? 강도 같은 새끼. 너
원래 그거 밖에 안되지?
민 수 (순간 멱살을 뒤고 주먹이 나가며) 뭐? 이 자식이!
민수가 기태를 패기 시작한다. 굳은 표정. 인정사정 없이 팬다.
기태 겁에 질려 피하는데 급급하다.
민 수 그래 이 이 새끼야. 그래, 너 바라는 대로 내 여자 죽게
생겼다. 내 여자 죽어. 죽는다 이 새끼야! 너도 한번 죽어봐.
일어나 이 새끼야. 죽어봐, 너도. 죽어봐!
기 태 (동시에, 적절히) 민수야, 너 왜 이러냐. 그래? 난 그런
것까지는 몰랐다. 민수야, 왜 이래... 미안하다, 민수야. 내가
잘못했다...
나가 떨어지며 구르는 기태. 기태를 잡아 올려 또 내리치려는 민수.
아직 치지도 않았는데, 겁에 질려 눈부터 감고 고개 돌리는 기태.
S# 48 기태집 거실 (밤)
불안하게 서성이는 희정.
자꾸 현관 쪽을 보다가 안되겠는지 나간다.
S# 49 기태집 앞 (밤)
희정 이리저리 살피며 급하게 달려나오면,
민수의 소리와 엉켜있는 두 사람의 모습 보인다.
민 수 (울부짖는) 그래, 이 새끼야. 내 여자 죽는다. 죽어! 어디
니가 한번 먼저 죽어봐라. 죽어 봐 이새끼야. 어딨어?
기태 널브러져 있고, 민수 막 기태 옆에 놓인 커다란 돌을 높이 치켜든다.
기태를 향해 내리치려는데, 놀라서 달려들어 말리는 희정.
희 정 오빠! 왜 이래. 왜 이래, 오빠... 이러지 마, 이러지마, 오빠.
그만 둬. 제발 그만 둬...
돌 치켜든 채, 겁에 질려 발발 떠는 기태를 내려다보는 민수.
기 태 왜 이러냐. 다 없던 일로 해줄게, 민수야... 왜 이래... 한번만
살려주라. 아무 일도 없던 거야. 우리. 한번만 살려주라.
(겁에 질린 소리) 으흐흐흐...
희 정 (민수를 붙잡고) 오빠 이러지 마, 오빠. 제발... (운다.)
돌을 던져버리는 민수. 민수를 놓는 희정.
기태 안심하며 바닥에 눕는다.
민 수 난 너 같은 새끼하고는 틀려. 너 같은 게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하겠냐.
희정, 기태를 붙잡고 운다.
그런 희정을 연민의 눈으로 쳐다보고 돌아서는 민수.
내려가는 민수의 뒷모습을 보면서 우는 희정.
기태는 널브러져 있고,
희 정 (기태에게) 이게 뭐야, 이게 뭐냐구! 이게 오빠가 원한 거야?
겨우 이런 거였어?
기 태 (그대로 누워, 허탈하게) 내가 잘못한 게 뭐냐. 나 저 새끼
정말 좋아했다. 저 놈이 이렇게 만든 거지. 난 잘못 없다...
희 정 (기태를 붙잡고 흔들며) 왜 민수오빠를 못 믿었어. 왜.... 다른
사람들처럼 돈 때문에 오빠 옆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왜 민수오빠를 못 믿었어... 우정은 그런 게 아닌데... 친구는
그런 게 아니잖아....
S# 50 근처 길 (밤)
트럭이 세워져있고, 그 안에 연주 혼자 앉아있다.
민수가 와서 올라타면, 연주 민수를 본다.
민수도 연주를 보고, 서로를 말없이 보는 두 사람.
시동걸고, 라이트를 켠다.
움직이는 커다란 바퀴. 출발하는 트럭.
S# 51 강릉 경포대 (낮)
트럭이 세워져있고, 트럭 안에서 바다를 보는 두 사람.
연 주 나가고 싶어.
민 수 추울텐데...?
연주 말없이 가방에서 겨울코트를 꺼낸다.
민수 말없이 보고만 있다.
연 주 문 안 열어 줄 거야?
민수, 그제야 문을 열고 나간다.
S# 52 경포대, 바닷가 (낮)
바다를 보며 서있는 연주와 민수.
민수가 연주를 부축하고 있고, 연주는 겨울코트를 입고 있다.
한참동안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를 보며 말없이 서있는 두 사람.
연 주 (문득 보며) 나 이거 입고 진짜 놀러 왔네... (공허하게
웃는다.)
민수는 웃지 않는다.
이때 다가온 사진사가 둘에게 말을 건다.
사진사 사진 한 장 찍으세요. 싸게 해드릴게. 예? 찍어요.
민 수 (손을 내저으며) 됐어요.
연 주 아니야. 찍자. 찍어주세요.
(시간경과)
나란히 서있는 민수와 연주. 무표정하다.
연 주 병자 같으니까 손 놔.
민수 부축하던 손놓으면, 연주가 천천히 팔장을 낀다.
다시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향하는 두 사람.
연 주 웃어. 웃어. 웃어봐.
사진사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김치!
민수의 일그러진 웃음. 그대로 멈추는 두 사람의 모습.
S# 53 바닷가 식당 (낮)
말없이 밥을 먹고있는 연주와 민수.
연주 문득 민수의 밥 위에 반찬을 놓아준다.
민수, 연주를 본다.
다시 말없이 밥을 먹는 연주. 민수도 말없이 먹는다.
그러다 민수를 보고, 화가 난 듯 수저를 놓는 연주.
민수 보면,
연 주 나한테 실연 당하고 싶어?
민 수 아니.
연 주 그럼 웃어봐.
민수 그냥 시선 피한다.
연 주 언제까지 그렇게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닐 거야? 우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이렇게 다 보내버리다간 나중에 후회할
거야. 내가 자기한테 해주고 싶은 게 있다는 걸 왜 몰라?
민수, 연주를 보고만 있다.
연 주 죽도록 원해도 끝내 못 얻는 것들이 있어. 그런데 우린
얻었잖아. 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 어떤 여자애. 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했는데, 다음 날 죽었대. 행복한 순간에 죽고
싶어서. 내가 바로 그래. 수석한 거보다 더 기뻐. 민수씨.
이거 믿어야 돼. 나 기뻐. 그러니까, 제발 세상 끝난 것처럼
그러지 마. 나 때문에 아파하지 좀 마!
민 수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그대로 말없이 마주 앉아있는 민수와 연주.
연주 다시 조용히 밥을 먹는다.
민수도 수저를 들지만, 멍하니 들고만 있다.
S# 54 달리는 바닷가 풍경 몽타주 (낮)
트럭에서 보는 시점의 달리는 풍경들.
S# 55 어느 길가, 트럭 안 (낮)
아이들이 뛰어 놀고, 개도 한 마리 어슬렁거리고, 한가로운 일상의 동네 길가.
그 길가에 세워져있는 트럭.
연주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이따금씩 새어나오고, 트럭을 따라가 보면,
고통스러워하는 연주를 붙잡고 놀란 민수, 어쩔 줄 몰라한다.
연주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느라 떨리는 몸.
민 수 연주야, 연주야! 왜 그래... 연주야, 어디가 아파, 어디가? 뭐
줄까? 어떻게 할까... ( 가방을 끌어당겨 뒤지며) 잠깐만
기다려. 잠깐만. (연주를 보면서,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꺼내며 찾는)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빌어먹을 약이 어디에
있는 거야! 빌어먹을! (손에 봉투가 잡히면 꺼내, 몰핀을
찾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허둥대며) 망할 놈의 몰핀.
(설명서라도 보며) 잠깐만 기다려. 다 되가. 다 되가.
빌어먹을...
떨리는 손으로 몰핀을 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연주를 보는 민수.
결심한 듯 과감히 몰핀을 놓는다.
몰핀이 들어가자, 이내 마약처럼 스르르 고통에서 벗어나며 눈이 감기는 연주.
떨리는 민수, 사그라지는 연주를 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듯 빈손을 허둥대고 옴지락거리며
괴로워한다.
온통 엉망인 차안. 그러다 코트를 덮어주고는, 고통스러워하는 민수.
민수 눈물을 흘리며 차창에 머리를 찢는다.
S# 56 도로, 달리는 트럭 (낮)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트럭.
S# 57 달리는 트럭 안 (낮)
연주, 코트를 덮고 잠이 들어있고,
이따금씩 연주를 보면서 묵묵히 운전을 하고 있는 민수.
S# 58 연주 아버지 묘 (석양)
소주와 북어가 놓여있고, 하얀 국화 꽃다발이 놓여있다.
연주와 민수 무덤가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본다.
연 주 우린 항상 거꾸로만 하나봐. 남들은 아버지가 손 붙잡고
신랑한테 데려다주는데...
민수 연주를 보면,
편안하게 미소를 짓는 연주.
연 주 민수씨. 내 무덤에도 꽃 사들고 와줄 거지?
민수, 차마 못 보고 고개 돌린다.
연 주 (잠시 혼자 생각하는 듯 하다가) 민수씨...
민 수 (고개 숙이고) ...
연 주 나 희정씨 참 좋더라. 한번 봤는데, 그 정도면 괜찮을 거
같아.
민 수 뭐가 괜찮아?
연 주 나중에 희정씨 찾아가.
민 수 걜 왜 찾아가래?
연 주 다행히 희정씨도 민수씨 좋아하는 거 같고, 그러니까 둘이...
민 수 그딴 소리 집어쳐. 너 아프다고 봐주니까, 니 마음대로 막
해도 되는 줄 아는데, 다시 한번 그딴 소리하면 가만 안둬....
(굳어진 얼굴 돌린다.)
연주 고개 숙이고, 둘 잠시 말이 없다.
연 주 소주 마시고 싶다. 그건 되지?
풀어지는 얼굴로 안쓰럽게 연주를 보는 민수.
S# 59 포장마차 (밤)
연주와 민수 잔을 부딪친다.
민 수 조금만 마셔.
연 주 (입에 조금만 댔다 떼며) 말 들어야지. 괜히 또 혼날라.
두 사람 잠시 말이 없다.
연 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너무 늦게 만났어. 만나서는 거짓말만
하다 시간 다 보내고.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걸. 그지?
민 수 ....
연 주 또 대답 안 한다.
민 수 그래.
연 주 1년 전에는 어디 있었어?
민 수 서울에.
연 주 2년 전에는?
민 수 서울에.
연 주 3년 전에두 서울에?
민 수 응.
연 주 나도 서울에 있었는데...
둘 술잔만 댕그라니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혼자 생각하며 웃는 연주.
민수 보면,
연 주 생판 모르는 동네 가서 키스해본 놈들은 우리밖에 없을
거야. 그지?
민수도 웃는다. 민수 모처럼 미소 짓는데, 금새 웃음기 사라지는 연주.
연 주 거기 민수씨랑 같이 다시 가보고 싶었는데...
민수, 술을 마신다. 그 위로 마치 슬픈 기운을 걷어내려는 듯 들리는 연주의
목소리.
연 주 아줌마 여기 화장실이 어디예요?
아줌마 저 뒤곁으로 돌아가면 있어요.
연 주 (일어나며) 같이 가. 무서워.
연주를 따라나가는 민수.
S# 60 시골 화장실 앞 (밤)
걸어오는 연주와 민수.
연 주 잠깐만. (노크하고 들어간다.)
기다리는 민수. 기다리는 무료함이나 어색함 등 무표정한 일상의 느낌.
불이 켜진 화장실 작은 창.
잠시 후 연주 나온다.
연 주 가자.
다시 걸어가는 두 사람.
S# 61 민박집 (밤)
트럭이 와서 멎고, 민수와 연주가 내린다.
민박집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
주 인 (나와서 맞는) 어서 오세요.
민 수 방 있습니까?
S# 62 방안 (밤)
편안 옷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 추리닝 정도.
연주 앉아있고, 민수 세수를 했는지 수건으로 닦으며 들어온다.
민수를 훑어보는 연주.
민 수 (닦다가 말고) 왜?
연 주 이런 옷 입은 건 처음 본다.
민수 수건을 걸고, 나란히 앉는다.
연 주 자기 맨발도 처음 봐. 우리 꼭 부부 같다. 참 좋다.
연주 미소를 지으며 보는데, 민수 웃지 않는다.
연 주 우리가 마흔이 되면 어떨까. 생각해 봤어?
민 수 아니.
연 주 난 배가 좀 나왔을 테고... 성질은 더 못돼졌을 거야. 어쩌면...
민수씬 다른 여자랑 노느라고 날 화나게 할지도 몰라.
민 수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절대로.
연 주 그래? 고맙군.
둘 다소 우울해지며 말이 끊긴다.
연 주 시간이 지나면 내 얼굴 기억할 수 있을까...?
민 수 아까 사진 찍었잖아. (하면서 울컥 하는 감정을 감추며 고개
돌린다.)
연 주 제발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받아들여 줘.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민 수 어떻게 아무렇지 않니? 니가 죽는다는데. 니가 내 옆에 없을
거라는데, 어떻게 아무렇지가 않아... (얼굴 일그러지며 운다.)
연주, 민수를 안아준다.
민 수 기다리던 반쪽이 바로 너였는데...
연 주 괜찮을 거야. 두려워하지 마. 괜찮을 거야... 대신 민수씬 날
영원히 갖는 거잖아.
민 수 (얼굴을 연주 가슴에 묻으며) 너도 날 영원히 갖는 거야...
연 주 아니야. 그러지 마. 그러면 안돼... 나 민수씨 만나서 보낸
시간들. 짧았지만 좋았어. 날 여자로 만들어 주었잖아.
아프다는 사실도 잊게 해줬어. 고마워, 고마워... 정말 꿈같은
나날들이었어. 망할. 민수씨랑 함께 보내서 더 짧았어. 더
가까이 와. 더 꼭 안아 줘. 힘껏!
민수 더 다가앉아 연주를 품 앞으로 앉혀 꼭 안는다.
잠시 절실하고 고통스러운 두 사람.
진정하려 애쓰고, 다시 차분해진다.
연 주 잘 살아야 돼. 내가 없어도.
민 수 (멍하니) 알잖아. 그럴 수 없다는 거...
연 주 나 같은 여잔 잊어버리고 잘 살아야 돼. 다른 사람 밑에서
비굴하게 살지도 말고, 나 못 잊어서 형편없이 망가져서도
안돼. 다른 여자 만나면 나한테 했듯이 이렇게 사랑해줘야
해. 그리고... 내게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한 사랑을 그
여자에겐 받아야 해... 이건 널 위한 거야. 넌 행복해야 해.
내가 주지 못한 많은 것들 느끼면서... 날 위해서 약속해 줘.
그렇게 한다고.
민 수 (울기만 할 뿐) ...
연 주 약속해. 내가 죽고 나면 너 자신을 위해서 살겠다고. 나를
잊을 수 있다고도 약속해 줘. 얼른. 얼른!...
민 수 (고개를 젓다가 마지못해 끄덕이는) 그래, 그래...
연주, 민수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준다.
서로 꼭 끌어안는 두 사람.
S# 63 방안 (밤)
서로를 안고 있는 두 사람.
타이틀 같은... 끝없이, 끝없이 눈물이 흐르는 두 사람의 정사.
S# 64 여행길의 아침 인써트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저수지. 부지런한 새라도 한 쌍 날아간다.
밤 새 맺힌 이슬이 떨어지고,
나뭇가지 사이로 아침햇살이 반짝거린다.
새소리와 바람소리. 희망이 열리듯 따뜻한 아침의 풍경.
S# 65 비포장 도로 (낮)
트럭에 나란히 앉아있는 연주와 민수.
둘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 민수 시동을 건다.
출발하는 트럭.
길을 따라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간다.
연 주 (E) 날씨 참 좋다. 여행하기에 딱 좋은 날이네....
두 사람을 태운 트럭이 길게 난 길을 따라 점점 멀어지고 작아진다.
트럭, 하나의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고,
흙먼지도 가라앉고,
그들이 지나간 긴 길만 풍경이 되어 남는다.
그 위로 민수의 목소리 들려온다.
민 수 (E) 넌 나에게 널 잊으라고 했지. 하지만 난 가끔씩 그날 밤
너와 한 약속을 어기곤 해. 널 잊을 수가 없다. 벌써 니가
보고 싶어...
가끔 내가 널 만나지 않았다면... 널 만나서도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곤 해. 난 여전히 희망도 없이
그날그날을 형편없게 살아가고 있겠지... 고마워.... 니가
아니었으면 결코 알지 못했을 그 소중한 사랑을 난 버리지
않을 거야.
넌 내게 사랑을 간직하게 해주었고, 그 사랑으로 내 삶에
희망을 주고 떠났어. 니가 주고 간 이 사랑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넌 나머지 내 삶에 영원히 살고
있는 거야....
안녕. 내 사랑...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