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나는 도다] 11
#1. 대전 앞 - 낮
문이 양 옆으로 쫘르륵 열린다. 화들짝 놀라는 윌리엄.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숙이고 좌우로 늘어선 신하들이 보이고... 옥좌에 앉은 왕의 얼굴이 멀리 보일락 말락 한다.
박규가 절하는 모양을 보고 허둥지둥 따라하는 윌리엄.
인조(E) : 고개를 들라.
박규와 윌리엄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윌리엄의 시야에 들어오는 인조의 얼굴.
박철과 홍구락, 사헌부집의, 좌찬성, 영의정도 대신들 사이에 앉아 있다. 박철, 흐뭇한 표정으로 박규를 바라보고 있고...
인조 : (박규에게) 원로에 노고가 많았다. 제주의 일은 익히 들었으니, 장하 도다.
박규 : (깊이 고개를 숙이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마.
박규가 고개를 숙이자, 옆에서 같이 얼른 고개를 숙이는 윌리엄.
윌리엄을 눈여겨 바라보는 인조.
인조 : 네가 제주에서 함께 온 이양인인고?
윌리엄, 인조의 말에 긴장한 얼굴을 들어, 인조를 바라보는데.
인조 : 박연은 왔는가?
동시에 관복을 차려 입은 붉은 머리, 푸른 눈의 이양인 박연이 들어온다.
윌리엄, 자신과 비슷한 이양인이 보이자 눈이 휘둥그레지고 능숙한 폼으로 인조에게 예를 갖추는 박연.
인조 : (박연에게) 어찌하여 이 조선 땅까지 오게 되었는지 소상히 묻거라.
박연 : 예. 전하..
박연,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고는 네덜란드 말을 머릿속으로 찾는데...
박연 : 그러니께.. (네덜란드 말로 더듬더듬) 여기. 왜.. 누구랑. 잤어?
윌리엄 : (갸우뚱) ??
박연 : 그게 아니라.. (다시 시도. 네덜란드 말로) 너.. 여기. 왜.. 섰어?
윌리엄 : (뜨악해서 보면)
대신들, 윌리엄의 반응에 일제히 박연 바라본다.
박연 : 그러니께 그게.. (순간 넙죽 엎드리며) 사실은예... 지가 조선에 산지 어언 13년이나 됐다 아인교.
화란어는 이제 몽땅 다 까먹었어예.
왕을 비롯한 대신들 모두 난감해 하는데, 얼른 거드는 박규.
박규 : 이양인에게 직접 대답을 하게 하심이 어떠신지요.
인조 : 이양인에게?
박규 : 한양으로 올라오는 동안엔 제가 줄곧 가르쳤습니다.
처음엔 어려워 했지만 곧 열심히 배워 이제 제법 우리말을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인조 : 영특한 자로군... 보통 그런 자들이 속에 다른 마음을 품곤 하지.
무표정하게 윌리엄을 바라보는 인조.
박규가 윌리엄을 쿡쿡 찌르자 윌리엄이 벌떡 일어나 어전을 한번 휙 둘러보고 인조를 바라본다.
윌리엄 : 밥 머거수꽈?
대신들, 순간 웅성거리고, 인조도 표정이 굳는다. 박규도 죽을 상을 하고 얼굴을 찌푸리는데, 홍구락이 소리를 지른다.
홍구락 : 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윌리엄 : (다급하게 손 사례 치며) 놀라지맙서! 나 절대 도깨비 아니우다!
잉글랜드에서 배 타고 나가사키 가려다가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제주에 오게 되었수다. 절대루 도깨비 아니우다!
홍구락 : 무엄하도다.
인조 : (손짓으로 홍구락을 자제시킨다) 보거라. 너희들 세상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이 많다지?
윌리엄 : 뭐 말이우까?
인조 : 니놈이 할 줄 아는게 있더냐? 무기를 만들고 대양을 가로지를 배를 만들 줄 알더냐? 넌 무엇을 하던 자이더냐?
윌리엄 : 마마가... 장사는 못하게 해서...책 읽고, 글 쓰고...
인조 : 나약한 놈이군. (대신들에게) 보거라. 이 자를 구금하고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금지토록 하라.
대신들 : 알겠사옵니다 전하.
내시들이 조르르 달려와 윌리엄의 양 팔을 꿰어 나가고, 박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본다.
#2. 대전 - 낮
모든 대신들이 물러가고, 인조 앞에 홀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박규.
인조 : (편한 말투로) 내 자네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당상들과 의논하여 관직을 제수(除授)하려하니,
따로이 원하는 곳이 있는가?
박규 : (머리를 더욱 조아리며)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 소인에게 너무 과중한 상이옵니다. 부디 거두어주소서.
인조 : (허허 웃는) 자네의 겸양함이 과인의 마음을 더욱 확고히 하는도다. 육조에 들겠느냐, 아니면 의정부로 가겠느냐.
박규 : (대답을 주저하면)
인조 : 저어하지 말고 말하라.
박규 :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인, 사헌부로 가고 싶습니다.
인조 : 사헌부라 하였느냐?
박규 : 예. 마마..
인조 : (의아한) 그곳은 몸이 고되지 않겠느냐?
박규 : 주상전하께 힘이 될 수 있다면, 제 몸 하나 고된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인조, 뭔가 마음에 안드는 얼굴이다.
인조 : 내 눈길을 벗어나 있겠다는 뜻인고?
박규 : 아니옵니다 전하. 제 어찌 감히...
인조 : 그래, 모두들 그렇지. 처음엔 내 두리 안으로 오려 하다가도 나중에는 모두 도망가고 싶어 안달을 하지.
박규 : 황송하옵니다 전하. 저는 다만 제 쓰임이 있는 곳에서 일을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인조 : (허탈하게 웃는다) 허허허... 내 경의 뜻을 잘 알았으니, 그리 되도록 해주겠네.
박규 :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 (조심히) 전하..
인조 : (보면)
박규 : 신, 감히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인조 : 말 해 보거라.
박규 : (간곡히 머리 조아리며) 부디 이양인에게 선처를 베풀어 주소서. 비록 우리와 생김은 다르나 심성은 착한 자이옵니다.
마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박규의 간곡한 청에 침묵을 답하는 인조. 바짝 긴장하는 박규의 표정.
인조 : (드디어 침묵을 깨고) 나는 나라 밖 사람들을 믿지 않아. 모두 아조를 치려는 생각들 뿐이지...
허나 경의 청이 그렇다면... 우선은 목숨은 부지토록 하지.
박규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인조 : 하지만 두고봐야 할 것이야. (밖에 대고) 밖에 있느냐.
#3. 빈청 - 낮
조정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빈청 안. 이양인에 대한 의견들로 분분하다.
좌찬성 : 이는 자칫 나라의 뿌리를 뒤흔들 수도 있는 일! 경들은 이양인을 그냥 둔다는 게 말이 된다 여기시오?
형조 : (동조한다) 맞소이다. 게다가 제주에서 끌려왔다면 왜놈들이랑 손을 잡은 세작일수도 있지 않소.
언문에 능한 것도 영 꺼림칙하외다.
호조 : 차라리 문초를 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것은 어떠하오. 세작이라면 입을 열지 않겠소?
집의 : 무에 그리 깊이들 여기시오. 이미 편호(외국인을 호적에 올림)를 한 박연이 있지 않소. 무조건 세작이라 여길게 아니라
양이의 습속은 어떠한지도 좀 들어보고
영의정 : 대감! 그 무슨 망언이오! 아무리 세상천지가 개벽한다해도 양이(서양 오랑캐)의 습속이 궁금하다니!
우의정 : (책상을 내리친다) 엄연히 주상전하가 계시거늘, 신들이 어찌 그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가!!
주상전하의 전교가 있을 때까지 모두 경 거망동하지 말게.
동시에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왕의 중사내관. 대신들, 일제히 돌아보면-
#4. 궁궐 일각 - 낮
퇴궐하는 대신들이 간간히 보이고... 박연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윌리엄의 모습 위로 #2 마지막 장면 연결된다.
<인서트> 인조가 내관에게 이른다.
인조 : 이양인을 박연의 집에 머물게 하며 지켜보도록 하라. 단, 백성들과의 접촉을 금하고, 행동에 제약을 두어
그 해악을 가늠 할테니, 만약 조금이라도 세작이 의심되거나 민심이 동요할시엔 국법으로 엄히 다스리겠다 하명하라.
윌리엄, 박규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앞서가던 박연이 답답하단 얼굴로 윌리엄에게 다가온다.
박연 : 머하노? 따라 온나!
윌리엄 : 박규 같이 가야 되는데... 버진 있는데 물어봐야 해..
박연 : (감탄) 아따, 참말 억수로 조선말 잘 하네. 여서 13년 산 나보다 더 잘 하는갑다.
(목소리 깔며) 조카뻘 정도 밖에 안 되는 거 같으니께 말 놓을꾸마. 기분 안 나쁘제?
윌리엄 : (무슨 소리인지) 네?
박연 : 아까 그 냥반은 고만 잊어뿔고...마마께서 당분간 니를 나한테 맡겼으니까 앞으로 내 말 단디 들어야 할끼다.
싸게 따라 온나.
윌리엄 : 그럼 버진은... (걸음 멈추면)
박연 : 그노무 버진인지 부지깽인지 억수로 찾아쌌네. 난 그냥 니만 잘 감시하라 들었다안카노.
윌리엄 : (안가고 버티자)
박연 : (할 수 없이) 그 버진인지 뭔지는 난중에 알아봐 줄테니께 일단 따라 온나. 지금 여서 버텨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데이.
윌리엄의 팔을 단단히 잡고 걸어가는 박연. 윌리엄이 주위를 보려고 삿갓을 들 때마다 박연이 꾹꾹 눌러준다.
#5. 박규의 집 전경 - 낮
마을 가운데 으리으리한 기와집 전경이 보인다.
#6. 박규의 집 - 낮
버진을 요리조리 훑어보는 엄씨부인. 이것저것 훑어보느라 정신없는 버진의 산만한 표정.
엄씨부인, 버진의 추레한 몰골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진다.
봉삼 : (얼른 둘러대는) 오시는 길에 산적을 만나 요래 추래하셔라.
엄씨부인 : (애써 예를 갖춰) 그래, 문벌이 어찌 되시나?
버진 : (무슨 소린 지 몰라 주저하면)
봉삼 : (눈치보다 잽싸게 끼어드는) 긍게 이...분은...제주에서 되련님께서 머물렀던 산방골 대상군의 딸인디,
사정이 있어서 되련님이랑 함께 올라온 거지라.
엄씨부인 : 대상군? (잘 몰라 고개 갸웃하며 버진 보는데)
버진 : 대상군 모르우꽈? 제주에서 젤로 가는...
엄씨부인 : 그래...먼길 오시느라 고생하시었네. (아무리 봐도 복색이 마음에 안 들고) 복년아~
쪼로록 달려오는 하녀, 복년.
엄씨부인 : 아씨를 별당으로 뫼시고 의복를 갖추어 드리거라.
복년 : 네, 마님. (버진에게) 따라오세요, 아씨.
버진 : (복년의 존대에 놀라고)
복년, 버진을 데리고 간다. 엉거주춤 복년 뒤를 따라가는 버진.
조신하지 못한 버진의 걸음걸이를 보니 마음에 더욱 안 드는 엄씨부인.
엄씨부인 : (버진 뒷모습 바라보며) 아무리 먼 길 올라왔다지만 대상군 따님이면 양갓집 규수일텐데 꼬락서니가 저게 뭔지...
혀를 차는 엄씨부인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봉삼.
#7. 별당 마당 - 낮
연신 두리번거리며 복년의 뒤를 따라 별당으로 들어서는 버진. 어디선가 나타난 봉삼이 버진을 나무 뒤로 홱 끌고 간다.
버진 : (깜짝 놀라 쳐다보면)
봉삼 : (안절부절) 이제부터 행동머리 잘 혀라. 안방마님한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니나 나나 아주 작살이 날테니께.
있는 동안 험한 꼴 안 볼라면 눈치껏 잘 해야한다. 알았제?!
버진 : 근데 돗통이 어디라? (아랫배 문지르며) 물이 벡껴서 그러는지 배도 살살 아프고, 속도 영 매스껍고, 욱! (헛구역질 한다)
봉삼 : 참 골고루 헌다.
그때, 버진을 찾는 복년의 목소리.
복년 : 아씨. (두리번거리는) 아씨~
봉삼, 복년의 목소리에 버진을 확 밀어버린다. 나무 뒤에서 쑥 튀어나오는 버진.
복년, 그런 버진의 모습이 아무래도 미심쩍기만 한데.
#8. 별당 - 낮
-버진의 꼬질꼬질한 저고리와 치마가 바닥으로 툭 흘러내리고.
-은은한 비단 치마, 저고리를 입혀주는 복년의 손.
-대접 받아 본 적이 없는 버진은 복년이 고름을 매주려하자, 어색한 얼굴로 자신이 고름을 매려고 하는데,
복년이가 손을 안 놓자, 자세만 엉거주춤하고.
-깔끔이 빗어지는 머리. 머리가 당겨 인상 쓰는 버진의 표정.
-발에 고운 버선이 신겨지고.
-머리에 단아한 댕기가 묶여 지고.
-어리둥절한 버진의 표정 위로 분첩을 찍어 얼굴로 분가루가 휘익 날리고.
복년 : 아씨, 다 되었습니다.
버진, 양갓집 규수처럼 완전히 아리땁게 변신해 있다.
버진, 여전히 얼이 나간 표정인데, 복년이 면경을 가져다 얼굴을 비춰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선 듯 얼굴을 만져보는 버진.
복년 : 그럼 편히 쉬셔요. (나가려는데)
버진 : 저기, 돗통이 어디라?
복년, 뭔 말인지 몰라 되묻는다.
복년 : 돗통이... 뭐여요?
버진 : 그... 돗통... 모르우까?
복년 : 무슨, 통 같은... 건가요? 통은 저쪽 부엌쪽으로 가면 있긴 있는데요.
버진 : 그럼 거기가...
복년 : 저쪽으로 돌아서 나간 다음에 이쪽으로 틀어서 안쪽으로 들어간 다음에 이렇게 돌면 대문 옆에 있어요.
손발짓을 섞어 열심히 설명해주는 복년. 버진은 하나도 못 알아들은 표정이다.
복년, 꾸벅 인사하고 돌아선다.
<인서트> 큰 소리를 내며 닫히는 별당 출입문.
버진이 텅 빈 마당에 홀로 서있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귀도 파고 코도 파다가
버진 : 한양은 손님이 상전이라. 손가락 하나를 까딱 못허게 허메.
귀양다리가 첨 우리 집 와서 적응 못 했던 거이 이제사 이해가 되나네. (한숨) 그래두 너미 꼽꼽허다...
긴 한숨을 쉬는 버진.
#9. 저자거리 - 낮
홀로 걸어가는 박규, 맞은편에서 서린과 전치용이 오고 있다. 각자 다른 길로 접어들며 서로를 의식하지 못하는 박규와 서린.
그 때, 서린이 뭔가에 이끌리듯 박규를 본다. 박규도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서린을 본다.
서린을 돌아보는 박규... 서린이 몸을 돌린다. 살짝 미소를 보이며 걸어가는 서린 뒤로 박규 모습이 보인다.
#10. 홍염장(천연 염색장) 마당 - 오후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천들 사이로 아름다운 서린의 모습이 보인다. 서린 뒤로 그림자처럼 서 있는 전치용.
카메라 빠지면, 인적 드문 산속에 자리한 작은 규모의 외공장이다.
서린, 붉은 천 위로 날리는 하얀 꽃잎을 맞으며
서린 : (염색천들을 살펴본다) 소문대로 한성 최고 홍염장이 맞군.
서린, 피처럼 붉게 물든 천들을 보며 오묘한 표정이 되는데 인기척에 젖은 손을 닦으며 안에서 나오는 늙은 염색장이 하나.
염색장이의 눈에 아직 서린의 모습은 정확히 보이지 않고,
염색장이 : (전치용 향해) 뉘시오?
전치용 : (돌아본다) 당신이 이 홍염장의 주장되시는가?
염색장이 : 그렇소만..
확인이 된 듯 서린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전치용.
염색장이, 어쩐지 께름칙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숙인다.
전치용 : 우리 대행수님이 거래를 원하시네.
염색장이 : (퉁명스럽게) 한발 늦었수다. 이번건 선전에 나갈 물량으로 죄다 맞춰놓은 것들이라 여분이 없소이다.
보름 뒤에나 다시 와보슈. 그때도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휭하니 돌아서는데)
서린 : 도망친 노비 놈이 버젓이 살아남아 홍염장의 주장이 되다니..
그 말에 우뚝 걸음을 멈추는 염색장이. 천천히 뒤돌아보면
염색장이의 눈에 붉은 천을 걷어내며 모습을 드러내는 서린의 모습이 보인다.
순간 마치 헛것을 본 듯 멍한 눈으로 서린을 바라보는 염색장이.
서린 : (차가운 미소) 날 기억하겠느냐?
염색장이 :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면) ........
서린 : 목 졸라 죽인 제 주인의 얼굴을 잊을 수야 없겠지!
동시에 그대로 칼을 빼 염색장이의 목을 겨누는 전치용.
염색장이 : (주저앉는) 아, 아씨...
사색이 된 염색장이의 눈동자에 비친 서린의 서늘한 모습. 그 모습이 어린 서린으로 변하며-
#11. 서린의 집 - 과거
어린서린 : 아버지!!!!!
금부도사와 관군들이 한바탕 쓸고 간 서린의 집 마당.
전치용을 밀어내고 그대로 달려나와 피 흘리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오열하는 서린.
서린 뒤로 황급히 달려나온 전치용, 차마 떼어내지 못하고 그런 서린의 모습을 아프게 바라본다.
전치용 : 밖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시간은 그것뿐입니다..
슬픈 눈으로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는 전치용.
그때, 집 안에서 온갖 폐물을 훔쳐 나오던 노비(지금의 염색장이) 하나가 어린 서린과 마주친다.
당황한 노비, 손에 들린 폐물과 서린을 번갈아보다 그대로 달려들어 어린 아이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발버둥치다 서서히 숨이 넘어가는 서린. 서린,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노비의 얼굴에서 시선을 놓지 않는다.
겁에 질려 시체처럼 축 늘어진 서린을 밀쳐내는 노비. 떨리는 손으로 폐물을 챙겨 도망치면,
밖을 살피고 돌아오다 쓰러진 서린의 모습에 황급히 서린을 안아드는 전치용.
전치용, 서린을 안고 서둘러 집 안을 빠져나가는 모습에서-
#12. 홍염장 마당 - 현재
화면 가득 겁에 질린 늙은 노비의 얼굴. 늙은 노비, 목에 닿은 칼끝에 밀려 천천히 뒷걸음치기 시작한다.
염색장이 : (애원하듯) 목숨만.. 목숨만 살려주시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요. 뭐든 시키는대로 다 하겠습니다요. 목숨만..
서린 : (입 꼬리 올라가는) 그러면 목숨대신 눈은 어떠냐? 다시는 색을 볼 수 없게!
동시에 목을 겨누던 칼끝을 염색장이의 눈으로 가져가는 전치용. 날카로운 칼날에 염색장이의 눈동자가 거울처럼 비치고..
염색장이 : 제, 제발 그것만은..
흐느끼는 늙은 노비의 얼굴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라보는 서린. 서린, 가소로운 미소를 띄우는 모습에서- out.
아무 일 없다는 듯 평화롭게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염색천들..
#13. 홍염장 내부
자신이 염색한 붉은 천에 목을 매단 염색장이의 모습이 보인다.
#14. 박연의 집 외관 - 저녁
너무나 평범한 조선식 집의 외양이 보인다.
#15. 박연의 집 방 안 - 저녁
혼혈 아이 둘이 올망졸망하게 앉아, 윌리엄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고..
불편한 자세로 앉아 방 안을 둘러보고 있는 윌리엄.
박연 : 당분간 니가 머물 곳이니께 편히 앉으래이.
윌리엄 : (어색하게 양반다리 하고 앉으면)
박연 : 말했다시피 한동안은 여서 갇혀 지내야 할끼다.
윌리엄 : 그럼 나 아무데도 못가우꽈?
박연 : 원칙은 그렇제. 조정에서 특별히 허락하면 모르까.. (월리엄의 실망한 얼굴을 보고는) 목숨 건진걸 다행이라 생각하래이.
나는 여 처음와가꼬 죽을 고생하고 피똥도 여러번 쌌대이.
월리엄 : 피....또옹?
박연 : 그래. 피똥. 그러니께 절대 혼자 돌아댕기면 클란대이. 알아듣제?
윌리엄 : 그럼 버진은...? 버진은 언제 만날 수 있수꽈?
박연 : 그건 니 하기 달린기라.
윌리엄 : (무슨 말인지 몰라 바라보면)
박연 : 니가 임금한테 잘 보이면 빨리 만날 수도 있고, 밉보이면 영영 못 만날 수도 있는기라.
윌리엄 : (천천히 끄덕이며 생각하는 표정)
박연 : 고마 생각하고 밥이나 묵자. (밖에다 대고) 밥 묵자.
밖에다 대고 소리치는 박연.
윌리엄 : 그런데...물어 볼 게 있는데...
박연 : 뭔데? 물어 본나.
윌리엄 : 이곳에 13년이나 있었는데...음식은 입에 좀 맞수꽈?
박연 : 음식 걱정 말고 니 말투나 고치라! 촌스럽게 꽈가 뭐꼬? 음식이야 우리 마누라가 다 해 주니께 아무 걱정할거 없대이.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 니 입에도 딱 맞을 끼다.
동시에 방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밥상.
윌리엄,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밥상을 바라보는데 청국장과 나물, 채소 등의 완전 한식 밥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윌리엄의 눈앞에서 밥에 청국장을 비벼 쫙 벌린 입에 집어넣는 박연. 아이들도 잘들 따라서 먹는다.
이상한 냄새에 청국장으로 코를 가져가던 윌리엄, 화들짝 놀라며.
윌리엄 : (코를 싸쥐며) 이거 무슨 냄새라?
박연 : (히죽 웃으며) 이게 콩을 푹-발효 시켜서 만든긴데 조선의 치즈다. 몸에 억수로 좋다 않카나. 마이 무그라~
윌리엄 : (손을 내 저으며) 괜찮아요. 나...물이나 한잔 줍서.
박연 : (밖을 향해 거만한 표정으로) 임자, 여기 왜 숭늉이 없나?
박연, 젓가락질도 아주 능숙하다. 그 모습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윌리엄.
방문이 열리고 숭늉을 받쳐 들고 들어오는 박연 부인. 조신한 태도로 숭늉을 내 놓고 인사를 하고 뒷걸음질 쳐서 종종 나간다.
박연 : (윌리엄보고 히죽 웃으며) 조선에서 사내로 사는 건 억수로 편한기라. 니도 적응하면 어마무지하기로 편할기라.
어느새 밥을 다 먹었는지 이를 쑤시는 박연. 윌리엄, 그 모습이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16. 박규의 집 안 - 저녁
집으로 들어오는 박규. 하인들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혹시 하인들 사이에 있나...보는데, 버진은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급한 박규. 버진을 찾기 위해 자리를 옮기려 하는데 봉삼을 발견한다.
봉삼 : 되련님 오셨어라...
박규 : 그래. 별 일 없느냐. (두리번) 버진이는
엄씨(OS) : 규야~
버선발로 뛰어나와 박규를 덥석 끌어안는 엄씨부인. 박규는 휘청거리고.
엄씨부인 : (눈물 글썽이며) 우리 규...우리 잘난 규 얼굴이 그새 반쪽이 되어 버렸네...고생을 얼마나 했길래...
박규 : (엄씨 부인을 달래며) 어머니, 전 괜찮습니다.
엄씨부인 : 괜찮기는.. (손 마구 쓰다듬으며) 우리 규 이 손 좀 봐라...섬섬옥수 같던 손이 이 어미 맘처럼 쩍쩍 갈라져 버렸구나.
박규 : (손 빼며, 미소) 어머니, 소자는 괜찮으니 이제 그만하시지요.
엄씨부인 : (생각났다) 그런데 봉삼이가 데리고 온 규수는 도대체 누구냐?
박규 : 그게... ...제가 제주에서 신세진 댁의... 따님으로, 잠시 한양에 올 사정이 생겨... 제가 저희 집에 머물라 청했습니다.
엄씨부인 : (박규 얼굴 살피며) 그게 전부냐? 이 어미 그렇게 믿어도 되는거지?
그때 헛기침 소리 내며 엄씨 부인 뒤에서 나타나는 박철.
박철 : (엄씨 부인의 말이 길어질 듯 하자) 허허! 먼 길 와 피곤한 아이 그만 괴롭히고,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시오, 부인.
엄씨부인 : 괴롭히다니요?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시우? (삐죽대며 안으로 들어가는데)
박철 : (멀어지는 엄씨부인 확인하고) 규야, 따르거라.
#17. 박철 방 - 저녁
마주 앉은 박철과 박규. 박철이 예전 박규가 서찰과 함께 보낸 탁본을 꺼낸다.
박철 : 네가 부탁한대로 이 문양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도성에 아는 자들이 도무지 없더구나. 이게 대체 무엇이냐?
박규 : 제주에서 잡은 자들의 배후 세력과 연관된 것이 분명합니다.
박철 : 배후세력?
박규 : 네. 필시 한양에 그들과 통하던 자들이 있을 겁니다. 무엇을 바라고 그들을 도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분명 거대한 배후가 있을 것 으로 사료됩니다.
박철 : 그래서 사헌부 근무를 청한 것이냐?
박규 : 범인을 잡아야지요.
박철 : 하지만 증거가 없으면 범인도 없는 바와 다름 없는 일. 게다가 조정에서는 이미 제주 일을 종결하였다 들었다.
박규 :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도 제사장을 교살한 걸로 모든 게 끝났다 여기고 있을테지요.
하지만 세상에 완전한 범죄는 없는 법. 저는 그들이 안심하는 틈을 타 조용히 수사를 해나갈 생각입니다.
박철 : 그래... (박규 바라보다) 어찌, 세상 보는 눈은 좀 틔웠느냐.
박규 : 저 박규이옵니다 아버님. 세상 보는 눈이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날카롭지 않겠습니까.
박철 : 허허, 제주에서 고생이 많았을 것인데, 배움이 없었더란 말이냐.
박규 : 많이 배웠습니다. 가장 크게 배운건... 다시는 제주 같은 데에는 내려가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박철 : 못난 놈... 고생을 해야 백성이 보이고, 백성이 보여야 관리를 할 수 있거늘...
박규 : 그러하옵니다 아버님. 소자, 이제야 비로소 제가 아직 관리를 하기엔 부족하다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먼저 범인을 잡는게 순서라는 말 입니다.
박철, 흐뭇한 눈으로 박규를 바라본다.
#18. 박철의 방 앞 - 저녁
박철의 방을 나오는 박규. 아버지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 나오는데,
저만치 별당 쪽 후원에 곱게 단장을 한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버진이다.
잠시 망설이다 후원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박규.
#19. 박규 집 별당 후원 - 저녁
새로운 옷을 입고 완전히 변신한 버진의 모습에 걸음이 멈춰지는 박규.
박규, 아무 말 없이 버진을 한참 지켜보는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던 버진이 그제야 박규를 발견한다.
버진 역시 낯선 환경에서 보는 박규의 훤칠한 모습에 가슴이 살짝 두근거린다.
버진은 박규가 의식되어 그저 옷만 만지작거리는데...
박규도 흠, 헛기침 한 번 하고 버진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왠지 어색한 분위기.
박규 : (힘들게 마른 입을 떼는데) 너 정말...
버진 : (기대하는)
박규 : (멋쩍어서 괜히) ...뭘 입혀놔도 태가 안 나는구나, 쯔쯧... 하긴 호박에 줄 그어봤자 신통치 않은 건 당연지사.
버진 : (치) 나도 입고 시퍼서 입은 거 아니라. 여기 아즈망이 억지로 입힌거라. 근데 저기... 일리암은... (하다가 멈칫)
박규 : 나만 보면 일리암 얘기부터 하는 건 제주에서나 한양에서나 똑같구나. 걱정하지 마라. 무사하니까...
버진 : (얼굴이 확 피며) 다행이나네. 그럼 언제 볼 수 있는거라?
박규 : 당분간 그 녀석을 볼 생각은 말거라. 한동안 거처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버진 : (시무룩해 하지만, 이내 괜찮다는 듯) 살아만 있으면 되메. 그럼 언젠간 만날꺼 아니메.
박규 : (그런 버진의 모습에 기분 나빠지고) 그리 걱정하는 일리암을 두고... 그때 왜 내게 돌아온 것이냐?
버진, 박규의 질문에 순간 당황한다. 아무 대답 않고 머뭇거리는 버진. 박규의 시선을 피한다.
박규, 버진에게 한 발 더 다가오며 뭐라 하려 하는데...
봉삼(E) : 되련님, 지가 이부자리 다 봐놨응께, 어서 자리에 드셔라~
박규와 버진이 돌아보면, 봉삼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서있다. 봉삼은 버진의 모습에 입을 또 삐죽거리고...
박규는 봉삼의 재촉에 아쉬운 듯 돌아서 간다. 버진, 사라지는 박규의 뒷모습을 보다, 벌렁이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20. 윌리엄 방 - 밤
온돌에 자기 손을 넣어보고 있는 박연. 흐뭇한 표정이다.
윌리엄, 방 둘러보면 요와 이불, 앉은뱅이책상, 역시나 완전 조선식이다.
박연 : 요 아랫목에 궁뎅이 지지고 앉아쁠믄, 여기가 극락이다 싶제. (윌리엄 보고) 후딱 앉아봐라!
윌리엄, 박연이 시키는 대로 하는데...바닥이 따뜻하다. 신기한 윌리엄.
윌리엄 : 와우, 그레이트! (바닥 만져보며) 어떻게 이렇게 되지?
박연 : (자랑스런) 이게 조선에만 있다 안 하나. 니도 이 온돌에 맛 들이믄 조선 밖으론 다신 못 나간데이.
윌리엄 : (신기해서 따스한 바닥을 계속 만지작만지작)
문이 열리며 박연의 부인이 술상에 탁주와 김치 하나를 가지고 온다. 이불을 걷어내고 술상을 받는 박연.
박연 : (술상을 보더니) 이게 뭐꼬? 안주가 이게 다가?
박연부인 : 지금 김치 지지미 굽고 있으니까 좀만 기다려셔예~~.
박연부인이 다시 부엌으로 나가고. 박연은 윌리엄에게 탁주 한 잔 준다. 자신의 잔에 한 잔 따르고 건배하고.
박연 : 묵어봐라. 아주 좋다.
윌리엄 : (조금 맛보고 독해서 인상 쓰면) 으... 써.
박연 : (김치를 손으로 쭉 찢어서 주면서) 이거 무라. 근데, 니 뭐 좀 할 줄 아는 거 있나?
윌리엄 : (약간 지저분하다고 느끼지만, 받아먹으며) 그게 무슨 말이우꽈?
박연 : 그러니까, 특기. (못 알아듣자, 춤추는 시늉) 춤, 노래, 뭐 잘하노?
윌리엄 : 춤? 노래? (의아하게 보면)
박연 : 그러니까 니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거. 뭐 그딴 거 없노? 조선에서 살아남을라며는 어떻게서든 임금이랑 대신들
눈에 들어야 한데이. 그래야 버진인가 부지깽인가 그 여자도 만나고, 니도 나처럼 결혼도허고 자식도 낳고 살꺼 아니가.
윌리엄 : (그 말에 눈이 번쩍하고) 그러는 아즈방은 뭐 했수꽈?
박연 : (손에 묻은 김치 자국을 쪽쪽 빨며) 아즈방은 또 뭔 소리고? 기냥 행님이라 불렀라.
윌리엄 : (몸 달아) 뭐든 잘하기만 하면 버진이 볼 수 있는 거우까? 행님은 어떻게 했수꽈?
박연 : 니는 선배가 있어서 억수로 편한 줄만 알아라. 나는 첨에 암 것도 모르고.. 말도 마라... 억수로 고생했다아이가.
궁 앞에서 눈요기꺼리도 하고, 엉덩이로 이름까지 써가면서 별짓 다했구마. 그러다 오랑캐가 쳐들어 오믄 불려나가고...
거서 조선에 같이 온 동무 둘은 다 죽어뿔고, 나만 살아남았다 아이가. 내가 조선에서 겪은 얘기 다 하자믄 하룻밤으론
턱도 없데이. (밖을 향해 버럭) 니는 시방 지지미 만들 김치 담그러 갔나? 싸게 싸게 안 내오고 뭐 하노?
박연은 성질 급한 재촉을 해대고, 윌리엄은 복잡한 표정으로 탁주를 원샷한다.
#21. 서린 상단 마당 - 밤
연못 속을 헤엄치는 비단 잉어들이 보인다.
달빛을 받으며 비단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서린. 긴 그림자가 드리우며 전치용이 다가온다.
서린 : (인기척에 돌아보며 환히 웃는) 오라버니?
전치용 : 여기 계셨네요.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서린 : (농담처럼) 설마 제가 오라버니 곁을 떠나기라도 할까봐서요?
전치용 : (허허롭게 웃으면)
서린 :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전치용 : 다름이 아니오라.. 박규가 사헌부를 자처했다 합니다.
그 말에 먹이를 주던 손을 잠깐 멈추는 서린.
서린 : (코웃음 친다) 생각보다 미련한 자로군요. (다시 먹이를 주며) 이미 일단락 지어진 사건에 시간 낭비를 하겠다니..
도리어 잘 됐습니다. 증거도 단서도 없는 제주 일에 헛수고를 하게 두고 우린 우리 일을 해야지요.
그러면서 거침없는 시선으로 전치용을 응시하는 서린. 전치용,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선가 자정을 알리는 시보(북을 쳐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서린 : 오늘이 바로 소현세자가 들어오는 날이로군요.
전치용 : 그렇군요.
서린 : 연회는 잘 준비되고 있겠지요?
전치용 : 예, 병판이 자신의 이름으로 연회를 여는 모양새를 갖춰 예판과 영상도 꼭 참석토록 유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소 짓는 서린. 자신 만만한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서린 : 달빛이 밝을 걸 보니 날이 맑으려나 봅니다.
서린 눈에 비친 밤하늘을 밝힌 보름달..
#22. 박규 집 별당 - 밤
보름달 아래, 고즈넉한 별당 모습이 보인다. 불편했던지 고운 치마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자기 옷을 입고 있는 버진.
버진 : (속이 안 좋은지 살짝 헛구역질 한다) 앉아서 먹기만 했더니 아무래도 체했나보멘..
버진, 방문을 빼꼼 열고 밖의 눈치를 살피다 한발 내디디려 하는데, 복년이 와서 착 대기한다.
복년 : (기계적인 정갈한 미소로) 아씨,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버진 : (화들짝 놀라며) 아니라...그냥 나가 하믄 되는디...
복년 : (계속 똑같은 미소로) 아씨, 말씀만 하세요. 뭘 갖다 드릴까요?
버진 : (포기하고) 글험 물 쪼꼼만...
복년 : 네...곧 갖다 드리겠습니다.
복년이 가고 나자, 한숨이 나오는 버진.
버진 : 돗통이 어드매뇨...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나고, 버진은 도저히 못찾겠는지 별당 밖으로 뛰어나간다.
#23. 박규의 집 곳곳 - 밤
돗통을 찾아다니는 버진 모습이 보인다.
뒷마당
- 헛간 문을 열어보고,
- 창고 문을 열어보다가 실패하고(창고에는 자물쇠가 걸려있다)
별당 같은 시간, 복년이는 물대접을 든 채 버진을 찾아다니고 있다.
복년 : 아씨~ 아씨~
행랑채 앞
-버진, 더욱 속이 부대끼자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무 방문이나 열어보면, 봉삼을 비롯한 남자 머슴들이 윗통을 벗고 잠들어 있다가 놀라 깬다.
어둠 속에서 버진 모습이 잘 보이지 않자 소리를 지르는 봉삼.
봉삼 : 누구야... 도, 도둑이야~
버진이 놀라 문을 닫는다.
안채
-안방에서는 잠들었던 박철과 엄씨부인이 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봉삼(OS) : 도둑이야~ 도둑이야~
복녀(OS) : 아씨~ 아씨~
엄씨부인 : (짜증) 웬 소란들이야...
봉삼(OS) : 도둑이야~ 도둑이야~
엄씨부인 : 도둑?
행랑채 머슴들이 낫과 시스랑, 몽둥이 등을 들고, 횃불을 밝힌 채 뛰어다닌다.
사랑채 소란을 뒤로 한 채, 배를 싸쥐고 또다른 방문을 여는 버진. 동시에 방문이 열리며 박규가 칼을 든 채 뛰어나온다.
박규 : 버진이 너...
버진 : (완전 울상이다) 귀양다리...
박규 : 피해있거라. 집에 도둑이 든 것 같으니.
칼을 든 채 뛰어나가려는 박규를 붙잡는 버진. 금방이라도 펑펑 울어버릴 듯 애절한 얼굴이다.
박규가 이상해서,
박규 : 무슨 일이 있는거냐?
버진 : ...나 죽을 것 같으메... 돗통, 돗통...이 어디메?
#24. 박규의 집 안채 - 밤
집 안은 횃불로 가득하고, 박철은 대청에 서있고 엄씨부인은 박철 뒤에 숨어있다.
마당에는 머슴과 하녀들이 가득하고, 복년이는 아직까지 물대접을 들고 있다.
박철 : 찾았느냐?
봉삼 : 그게... 꽁무니를 뺀 것 같습니다요.
박철 : 도둑이 확실하더냐.
봉삼 : 그러믄입쇼.
박철 : 그만 소란 떨고 꼼꼼히 돌아본 다음에
하는데, 끼익 소리와 함께 행랑채에서 들어오는 문이 열린다. 모두들 시선이 집중되면 박규가 들어온다.
다들 긴장을 풀려는데, 뒤로 버진이 박규의 옷자락을 붙잡고 들어오고 있다.
모두들 의아한 얼굴인데, 엄씨부인은 눈이 부리부리 커진다.
엄씨부인 : 저런.... 감히 우리 규를 잡고...
박철 : 무슨 일이냐.
박규 : 아무 일도 아닙니다.
슬쩍 외면하고 어딘가로 가는 박규... 버진이 바짝 뒤따라 사라지면 머슴들 사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머슴 : 저긴 뒷간 가는 길인데...
머슴2 : 어이구, 아주 뒷간도 같이 다니시는 모양인데.
봉삼 : 에헤~ 그런 거 아니라니깐.
엄씨부인, 입술을 깨물며 박규와 버진을 바라보고 있다. 복년이 뒤늦게 버진이 사라진 쪽으로 물대접을 들고 뒤따라간다.
복년 : 아씨~ 아씨~
엄씨부인이 치맛자락을 바람이 일게 휘두르며 먼저 안방으로 들어간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25. 마당 - 아침
화 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엄씨 부인 앞에 허름한 옷차림에 어정쩡한 포즈로 서있는 버진의 모습이 보인다.
엄씨부인 : 아니 왜 멀쩡한 옷을 두고 그 걸레 같은 옷을...
버진 : 그게.. 그 옷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맘에 안 들어라.
버진의 말에 뒤집어 지는 엄씨부인.
엄씨부인 : (기가 막혀) 얼마나 지체 높으신 집안 따님이시길래 눈이 그리 높으신지 어디 솜씨 한번 보여주게나.
복년아. 가서 방물장수를 불러오거라.
버진 : (이게 아닌데... 싶은데)
복년 : 예. 마님.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가는 복년.
엄씨부인이 버진과 단둘이 있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엄씨부인 : 어젯밤에는 무슨 일이었느냐.
버진 : 그게 아니라...
엄씨부인 : 거기에서도 밤마다 우리 규를 찾곤 했느냐?
버진 : 밤마다는 아니지만 가끔, 우욱! 에엑!
순간 허물어지는 엄씨부인... 털썩 주저앉는다.
엄씨부인 : 설마... 우리 규가 설마... 아니야...
버진 : 며칠 전부터 속이 계속... 우욱!... 돗통 좀...
버진이 입을 막고 화장실 쪽으로 뛰어간다.
엄씨부인 : 설마 우리 규랑 잤다는 말인가..? (고개 털며) 그럴 리가 없어. 우리 규가.. 설마..
#26. 궁궐 전경 - 낮
#27. 편전 안 - 낮
인조가 무거운 얼굴로 앉아 있고, 난감한 표정의 박철과 영의정. 그리고 인조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홍구락이 보인다.
박철 : 전하, 지금 세자저하께서 돈화문을 넘으셨다 하옵니다.
인조 : 도성에 들어온 게 언젠데, 어째 이제야 들어오는 겐가?
박철 : 도성 안이 환영하는 인파로 혼잡하여, 도착이 지체된 것으로 사료되 옵니다.
인조 : 환영 인파? (못마땅한) 세자가 무슨 공을 세우고 돌아온 것도 아니거늘...
박철 : 청으로 가신 지 4년 만에 첫 귀국이니, 백성들이 어찌 저하를 반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홍구락 : (아부하면서) 전하. 이럴 때 전하께서 친히 세자저하를 맞이하신다면,
저하에 대한 마마의 애끓는 부정을 온 백성이 알게 될 것입니다.
인조 : (잠시 생각하는 표정)
홍구락 : (눈치 보며) 그리하면 전하의 깊은 덕과 부정을 온 백성들이 우러러 보며 찬양할 것이옵니다.
인조, 가만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고치곤,
인조 : 우러러 찬양한다? 청나라에 주권을 내주고 고개숙인 왕을 우러러 찬양한다?
전쟁에 지고 볼모로 끌려간 세자를 버선발로 맞이하는건 패전의 치욕만 더할 뿐!
영의정 : 나라를 위해 볼모로 가신
인조 : (소리를 비른다) 무엇이 나라를 위함인가. 소현은 청에 가서 그들에게 물들었음이야.
매일같이 청나라 관리들과 어울리고 있음을 내 모를것 같아 하는 소린가? 오랜만에 고국에 온단들 잔치가 아닐진대
소현은 무슨 걸음을 지체 하고 있는가. 당장 행렬을 서두르라 일러라!
추상같은 호령에 고개를 숙이는 영의정. 아무도 인조의 뜻을 거역하고 나서지 못한다.
#28. 내전 안 - 낮
인조와 소현 단 둘뿐인 내전 안. 소현세자가 예의를 갖추어 인조에게 절을 올린 후 마주 앉는다.
소현 : 그간 옥체는 강녕하셨습니까? 옥체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인조 : (말 가로채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내 옥체가 어떻단 말이냐?
소현 : 용골대 장군에게 전해듣기로는...
인조 : (손 내저으며) 그자에 관한 얘기라면 명자(名子, 이름)도 삼가거라. (인사치례로 대충) 그간 청에서 노고가 많았다.
소현 : 아닙니다.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인조 : (언짢은) 배우다니? 미개한 오랑캐들로부터 무얼 배운단 말이냐? 삼전도에서 당한 치욕을 그새 다 잊은게냐?
매몰찬 인조... 소현이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말이 없다.
인조 : (비웃는다) 대신들은 그것도 모르고 버선발로 맞이하라 주청을 들이지. 널 위해 연회도 준비했다 하더군.
소현 : 아바마마를 뵈었으면 족한데 연회는 굳이 사양토록 하겠습니다.
인조 : 아니지 아니야... (비아냥거리듯) 오랜만의 부자상봉인데 화기애애해야하지 않겠느냐?
간만에 부자간의 회포라도 풀어야지..
갑자기 소리 내어 웃는 인조. 소현은 변화무쌍한 인조의 기분을 맞춰주지 못한다.
#29. 야외 연회장 - 오후
소현을 위한 연회가 열리고 있는 야외 연회장 풍경.
상단에는 인조가 앉아있고 중단에는 소현이 앉아있고, 그 아래로 조종 대신들이 각자 상 하나씩을 두고 앉아있다.
인조 : 만조백관은 듣거라. 오늘 내 아들 소현이 청의 볼모생활 중 과인의 건강을 염려해 물원천리 찾아왔으니,
이 어찌 하늘에 닿는 효심이 아니겠는가.
대신들 :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인조 : 모두들 내 아들 소현에게 술 한잔 씩 올리도록 하라.
소현세자를 중심으로 박철, 박규 등 조정대신들이 모두 참석했다.
좌찬성이 소현세자 옆자리로 다가온다.
좌찬성 : 저하, 귀국을 감축 드리옵니다. 제 술 한 잔 받으시지요.
소현이 의례적으로 술을 받고, 좌찬성에게 술을 주면,
다른 이들도 앞 다투어 소현에게 잘 보이고자 줄을 서서 술을 따르고 받기 시작한다.
몇몇 사람 지나고...다음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려고 하는 소현.
박규 : (농담) 꽉꽉 눌러 담아 주십시오.
소현 : (고개 드는데, 박규다. 반가운) 이보게...박규.
박규 : (장난기 어린 미소 지으며)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소현 : (이제야 얼굴 밝아지는) 자네를 이렇게 다시 보다니... 참으로 반갑네.
내 청에서 자네와 함께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던 시간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르네.
박규 : 저하,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소현 : 고생은 무슨... 자네야말로 제주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더구만. 역시 예판대감일세.
호랑이는 귀한 새끼일수록 높은 절벽에서 밀어 더욱 강하게 만든다더니만, 자네를 그렇게 키우셨어.
박규 : (조금은 수줍게) 과찬이십니다. 저하.
소현 : 자네를 만나니 비로소 이 조선에서 진정으로 날 반기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쁘구만.
박규 : 주상전하가 계신데,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현 : (대꾸 없이 씁쓸한 미소만)
그때 소현에게 다가오는 인조. 인조, 소현의 잔에 직접 술을 따라준다.
인조 : (술을 따르며) 그렇게도 왕의 자리가 탐나더냐. 아비가 언제 죽을지 알아보러 온 것이겠지.
인조의 술을 받는 소현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소현, 떨리는 손으로 인조의 잔에 술을 따르고..
인조 : (소현의 술을 받는) 청 황제를 등에 업고 이 나라를 차지해 바칠 심산이냐.
소현에게 받은 술을 단숨에 비우는 인조,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인조 : 우리는 활의 나라다. 다신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야!
인조가 벌떡 일어서서 명한다.
인조 : 죄수들을 데려다 각궁을 준비하라. 세자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볼터이니!
#30. 동 장소, 연회장
인조의 명령에 할 수 없이 활터에 서 있는 소현. 소현을 바라보는 인조의 눈빛이 살벌하다.
떨리는 손으로 살을 메기는 소현, 소현, 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조준을 하는데,
소현의 눈에 과녁 뒤에 매달린 죄수의 모습이 언듯 보인다. 차마 활 시위를 놓지 못하는 소현.
소현은 활 시위를 놓지 못하고 계속 당기고만 있고 무섭게 노려보는 인조. 결국 소현이 쏜 화살은 과녁 끝에 간신이 걸친다.
인조 : (조롱 섞인 웃음) 멍청한 놈. 저런 배짱으로 왕의 자리를 넘보다니! (낄낄거리다 말고 무섭게 명령한다) 다시 활을 들라!
소현이 다시 활을 든다. 소현을 바라보는 인조... 소현이 활을 쏜다. 이번에도 과녁 끝에 머물고 만다.
소리 내어 웃는 인조, 마치 즐거운 광경이라도 본 듯 배를 잡고 웃으며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술을 권한다.
힘 없이 고개를 떨구는 소현. 영의정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는 홍구락의 모습이 언듯 언듯 보인다.
#31. 동 장소
그때, 박연과 윌리엄이 연회장으로 들어선다.
윌리엄, 처음 보는 화려한 연회 광경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는데
윌리엄과 박연에게 집중하는 참석자들. 재미난 구경꺼리가 생겼다는 표정들이다.
윌리엄이 박규를 발견하고 내심 반가워하나 박규는 애써 무표정한 얼굴이다.
거나하게 술을 마시다 윌리엄과 박연 쪽으로 시선 돌리는 인조. 얼른 허리를 접는 박연, 윌리엄도 눈치를 보고 인사를 하면
인조 : 왔느냐.
윌리엄 : 밥 먹었수... (박연이 쿡 찌르자) 안녕하시웁니까.
그때 활터에서 소현이 돌아온다.
인조 : (소현을 힐낏 보고) 그래, 서양에도 활이란게 있느냐.
윌리엄 : 우리 활 있습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인조 : 그래? 그럼 나와 함께 겨뤄보겠는가? 네가 이기면 내 큰 상을 내려주마.
윌리엄 : 정말이우까? 그럼 버진이를
박연 : (윌리엄 툭 치고) 성은이 망극합니데예.
인조가 일어선다. 소현을 향해 잘 보라는 표정으로 활터로 나간다.
#32. 동 장소, 연회장
활터에 나란히 서있는 인조와 윌리엄. 무관 둘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듯 칼을 들고 윌리엄 뒤에 서있다.
살을 메기는 인조, 눈빛이 살벌하다. 활을 떠난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고,
소리 : 관중이오~
멀리 과녁에서 붉은 깃발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윌리엄이 쏜 화살은 과녁 근처도 못가고 빗나간다.
인조가 웃고, 대신들도 웃는다. 다만 소현과 박규만이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다시 활을 쏘는 인조와 윌리엄. 인조의 화살이 또 다시 과녁에 명중한다.
소리 : 관중이요~
윌리엄이 점점 감을 잡아가더니, 이내 과녁의 중앙에 가까이 맞추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인조의 평정심은 흐트러져 화살이 빗나가고...
집의 : 전하, 옥체 보중 하소서. 이만 대사례를 마치겠나이다.
인조 : 물렀거라.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다.
계속 시위를 당기는 인조. 손끝은 허물이 벗겨져 피가 나고, 눈은 광기에 사로잡힌 승부사 같다.
하지만 윌리엄은 상으로 버진을 만날 생각에 열심이고, 과녁에 명중할수로 신난다.
과녁 뒤에 사람이 묶여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윌리엄.
마지막 인조의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다. 윌리엄이 화살을 겨누고, 사람들은 모두 좌불안석으로 바라본다.
공기돌 정도의 작은 돌을 집어 드는 박규... 윌리엄이 화살을 날리려는 순간, 손가락으로 돌을 튕겨 윌리엄의 어깨를 맞춘다.
시위를 놓는 순간, 윌리엄의 어깨가 흔들리고, 화살은 과녁을 빗나간다.
소현 이하, 모든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윌리엄을 노려보는 인조, 화살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퇴장한다.
대신들이 인조의 뒤를 따르고 그제서야 과녁을 돌리는 궁중 신하들. 동시에 윌리엄 눈에 과녁 뒤에 묶인 죄수의 모습이 보인다.
인조의 과녁에 묶인 죄수는 피를 흘리고 죽어있고
자신이 쏜 화살을 맞고 피 흘리며 괴로워하는 남자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 윌리엄.
윌리엄 : !
윌리엄, 화살을 놓치며 털썩 주저앉는다.
#33. 연회장 밖 - 저녁
연회가 끝나고 사인교를 탄 대감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있다. 사인교에 오르려는 영의정 옆으로 다가오는 홍구락.
홍구락, 귓속말로 뭐라 주고받더니 자신도 사인교를 올라탄다. 홍구락의 사인교가 떠나면, 그 뒤를 따르는 영의정의 사인교.
#34. 서린 상단 내부 - 저녁
복잡한 구조로 된 상단 내부가 보인다. 꺾어진 복도를 지나며 연회장 깊숙한 곳으로, 영의정을 이끄는 홍구락.
영의정 : 자네 대체 어디로 나를 데려가는 겐가?
홍구락 : 따라와 보시면 압니다. 영의정 대감. 이제 다 왔습니다.
홍구락이 드디어 어느 방 앞에 멈추어서더니, 문을 연다.
#35. 서린 상단 내 밀실 안 - 저녁
문을 열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서린이 서둘러 예의를 갖추어 영의정 대감을 맞는다.
영의정이 어리둥절해서 서 있으면...
홍구락 : 앉으시지요. 영상대감.
영의정 : (앉으며) 병판,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더니...
홍구락 : 우선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제가 설마 대감께 해가 될 만한 일을 하겠습니까?
못마땅한 얼굴로 마지못해 자리에 앉는 영의정.
홍구락 : (서린에게 눈짓한다) 시작하시게.
서린 : (다시 고개 숙여 인사) 저는 이 상단의 대행수 서린이라고 합니다.
영의정 : (마지못해) 그래, 무슨 연유로 나를 불렀느냐.
서린 : 다름이 아니옵고, 대감께서는 거듭된 호란으로 인해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안타까이 여겨
다방면에 대책을 고심하고 있는 걸로 아옵니다... 제가 영의정대감의 큰 뜻을 현실로 가능케 할 방도를 찾아낸 듯하여,
이렇게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영의정 : 어디, 들어나 보세. 그 방도라는 게 무엇인가?
서린 : 조선 주변국을 넘어 먼 이국과도 자유로이 교역을 하는 것입니다. 청과 왜는 물론 이양인 상인까지 조선에 왕래하게 하여
무역을 활성화 시키면, 백성들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넉넉해 질 것입니다.
영의정 : (노여움) 그 말은 지금 조선의 문을 완전히 열어버리자는 소리 아니냐!
서린 : 이제 붓과 고상한 말로 나라를 지키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언제까지 명분만을 찾다 실리를 놓칠겁니까?
영의정 : 네 이년!!
홍구락 : 대감. 저도 처음엔 좀 꺼려졌으나, 생각해보니 개항만 하면 백성들이 살기 좋아진다는데,
한번 진지하게 고려해볼만하지 않습니까?
영의정 : (벌떡 일어나며) 병판 자네 안되겠구만. 개항이라니... 하찮은 장사치의 세치 혀에 놀아나 나라의 문을 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하게. (몸 돌려 밖으로 나가려 하면)
서린 : (갑자기 영의정 앞에 무릎을 꿇으며) 송구합니다.
홍구락 : (서린이 무릎을 꿇자, 놀라 눈 크게 떠지고)
서린 : 백성들의 처치가 안쓰러워 그만...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영의정 : (코웃음) 괘씸하군. 감히 누구를 속이려 드느냐. 입으로만 백성을 들먹이며 상단의 이득이나 챙길 요량이 분명하거늘...
(매섭게) 니년은 명일부로 상단 문 닫을 각오하라!
영의정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면, 홍구락이 안절부절못해서 급히 쫓아나간다.
방에 홀로 남은 서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일어선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서린의 표정.
#36. 상단 내 연못가 - 밤
상단 안에서 나오는 홍구락과 서린.
홍구락 : 영의정 대감이 마음에 걸리는군. 저렇게까지 나오실 줄은 몰랐는데... 자네 상단에 해가 미칠까 염려되네.
서린 : (미소) 말씀만 그리 하셨을 뿐, 설마 별 일 있겠습니까?
(선선이) 대감께서 저리 완강하시니, 미천한 제가 마음을 비워야지요...
홍구락 : (정말? 벌써...의아하다)
서린 : (말 돌리며) 오늘 일에 대한 답례를 제가 좀 준비했습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십시오. (하명에게 눈짓하면)
하명이 궤짝 하나를 홍구락 하인에게 준다. 홍구락 좋아서 입이 찢어지려 하고.
홍구락 : 뭘 이런 걸 다... 예판 대감 마음만이라도 돌릴 수 있으면 좋겠구만. 그러나 그이 역시 워낙에 대쪽 같은 양반이라...
서린 : 예판 아드님인 박규 또한 참으로 빛이 나더군요.
홍구락 : 말도 말게. 과년한 여식 있는 집들은 너나없이 죄다 예판네로 매파를 보낸다 들었네...
서린 : 대감께도 혼기 찬 영애가 있지 않으십니까? (떠보듯) 지체로 보나 뭐로 보나 둘이 잘 어울릴 듯 싶은데...
홍구락 : (아하) 하긴...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꼬. 그런 수가 있었구만. 잘되면 그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일터인데...
서린 : 제가 좋은 매파를 골라 보내드리겠습니다.
흐뭇한 얼굴로 홍구락이 사인교에 올라타면, 서린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한다.
홍구락이 탄 사인교가 점점 멀어지면. 지켜보고 있던 서린.
서린 : (조용히) 오라버니...
어둠 속에서 스윽 모습을 드러내는 전치용.
전치용 : 부르셨습니까?
서린 : (의미심장한 미소) 오라버니께서 해주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37. 영의정 집 - 아침
팔에 수건을 걸고, 영의정이 소제할 물을 들고 온 하인. 방 문 앞에서.
하인 : 대감마님, 기침하셨습니까? ... ...대감마님.
하인, 얼굴을 갸웃거린다. 늦게 일어나실 분이 아닌데...
하인, 물을 든 대야를 툇마루에 놓으며, 마루 위로 올라간다.
하인 : 대감마님,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하인, 조심스레 문을 연다.
#38. 영의정의 방 - 아침
살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하인. 보면, 영의정이 여전히 취침 중이다.
하인, 어찌할까 망설이다 도로 나가려는데, 뭔가 이상한 걸 본 기분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영의정을 돌아보는 하인. 영의정의 귀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나와 굳어있다.
헉, 깜짝 놀라 커지는 하인의 눈.
#39. 궁 - 아침
빠르게 입궐하는 대신들의 모습들.
#40. 사헌부 - 아침
박규, 사헌부 안으로 들어선다.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런 움직임이다.
두리번거리는 박규 앞으로 살살 훑어보며 슬그머니 다가오는 안참봉. 안참봉은 박규와 눈이 마주치자,
안참봉 : 혹시 새로 사헌부 발령을 받으신 박규 감찰 나리?
박규 : (의아한) 그렇소만...
안참봉 : (꾸벅 깊게 고개 숙여 인사) 어서 오십시오, 나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나리의 수족이 되어 보필할 집행아전 안강직 이옵니다. (박규 얼굴 스윽 살피며) 역시 소문대로
인물이 워낙에 훤칠하셔서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보겠습니다.
박규 : (당연하지만 살짝 겸손하게) 그러한가... (주변 돌아보며) 헌데 아침 부터 왜 이리 부산스러운 것인가?
안참봉 : 그게... (괜히 비밀인양 박규 귀에 입을 대며) 어젯밤에 영의정 대감이 급사를 당하셨답니다.
박규 : (놀란) 그럴리가... 내 어제도 대감을 뵈었것만!
안참봉 : (한숨) 그러게나 말입니다. 지천명을 넘기면 하루를 알 수 없다던 선현의 말씀이 새록새록 가슴에 사무칩니다, 허!
박규 : (안참봉 말 안 듣고 생각에 잠기다) 대감댁으로 가세. (안참봉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먼저 발길을 옮긴다)
안참봉 : 허어, 첫날부터 무리하시네. 역시 젊은 피는 다르구만... (그러면서 박규 뒤로 쓰윽 따라붙는다)
#41. 편전 - 오전
박철, 홍구락을 위시한 신하들, 어두운 얼굴로 앉아있는 무거운 분위기. 정면에 앉은 인조 역시 침통한 표정이다.
인조 : (한탄) 영상을 잃다니...내 그간 그에게 얼마나 의지했었는데...
홍구락 :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그리 마음 쓰시다 옥체 상하실까 염려되옵니다.
인조 : (의심스런 얼굴로) 혹여 조정에 불만을 품은 불순한 세력이 저지른 모살이 아니더냐?
일동 : (난데없는 인조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
인조 : (눈 가늘어지는) 모르는 일이도다. 앞으론 궁의 경비를 더욱 철저히 행할 것이며,
영의정에 죽음에 한 치의 의심도 있어선 안 되니, 낱낱이 살피거라.
홍구락 : 전하의 뜻이 그러할 줄 미리 알고, 사헌부 집의가 직접 가 조사를 하고 있사옵니다.
박철 : (그 말에 홍구락 쳐다보고)
인조 : (박철 보며) 예판 마음도 안 좋겠구료. 둘의 우의가 남달랐을텐데...
박철 : 인명은 제천이라 했으니, 신은 그저 고인의 명복을 빌고자 할 뿐입니다.
인조 : (고개 끄덕)
홍구락 : (내심 불편한 얼굴이다)
#42. 영의정네 집 - 낮
박규와 안참봉, 영의정 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마당에 이미 사헌부는 물론 포도청에서 나온 관졸도 여럿이다.
그때 방에서 나오는 사헌부 집의. 안참봉이 집의를 발견하고 코가 땅에 닿아라 인사를 한다.
박규도 집의에게 인사를 올리고, 집의가 마뜩찮은 얼굴로 박규에게 다가온다.
그 사이 안참봉은 얼른 관군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하고...
집의 : 자네가 여긴 어인 일인가?
박규 : 소식을 듣고 어찌된 영문인지 살피러 왔습니다.
집의 : 누구의 명을 받고 왔는가.
박규 : 그게... (대답 못한다)
집의 : 자네의 의욕은 높이 사나, 위에서 명을 내리기도 전에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건 삼가게.
박규 : (고개 숙이며) 명심하겠습니다. (들며) 헌데, 검시는 하셨습니까?
집의 : (불쾌한) 물론이네.
박규 : 시신을 보아도 되겠습니까?
집의 : 실로 의욕이 지나치군. 돌연심부사로 별다른 징후가 하나도 없는데, 자네가 봐서 무얼 하겠는가?
호기심으로 대감의 시신을 욕보일 생각 말게.
박규 : 혹 가족들에게 문진은 하셨...
집의 : (말 자르고) 이보게 자네... (잠깐 생각하다) 오늘 들어온 늑액사(목 매달아 죽은 일) 사건은 마무리 하였나.
박규 : 늑액사 사건이 있었습니까?
집의 : 몰랐나? (비웃는다) 고관대작의 사망 사건은 관심이 있어도 미천한 백성들의 죽음은 관심이 없는게로군.
박규, 더 어쩌질 못하고 예를 올리고 물러선다.
대문으로 향하는데, 관졸들과 얘기하던 안참봉이 박규를 보더니 얼른 옆으로 따라붙는다.
안참봉 : 아랫것들한테 물어보니 대감께서는 오래전부터 흉곽에 통증을 느끼고, 어지럼증 또한 심해서 약을 상시 드셨다는데...
저도 가끔씩은 (손으로 가슴 잡으며) 여기가 콱 막히는 기분이 들고 맥도 약해지는 것 같은데...
(진지한) 나리, 저도 위험한 겁니까?
박규 : (노려보다) 늑액사 사건이 있었던가?
안참봉 : 아! 그거요? 그게... 근데 어찌 그러십니까?
박규 : 왜 보고를 아니했나.
안참봉 : 살기 어려워 목매달고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뭘 일일이 보고까지
박규 : (자르고) 가세!
박규가 추상같이 말을 자르고, 안참봉은 입을 삐죽이며 따라간다.
#43. 사헌부 마당 한구석 - 낮
바닥에 죽은 염색쟁이 시체가 내려져 있고.. 오바이트가 올라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서 있는 안참봉의 괴로운 얼굴.
침착하게 시신을 살피던 박규가 뭔가 미심쩍은 얼굴이 된다.
박규 : 언제 발견된 시신인가?
안참봉 : 어젯 밤에 들어왔는데, 죽은지 하루 이틀... 아니면 사나흘 정도 됐다고, 우욱!
박규 : (정수리를 만지며) 검시는 하였는가?
안참봉 : 육안으로 봐도 특이한 점은 없다면서, 욱!
가까스로 구토를 참는 안참봉.
박규 : 스스로 목을 맨 것이 아니다.
안참봉 : (깜짝 놀라) 자액이 아니라굽쇼?
박규 : 시신의 목에 흔적이 돌지 않았고, 머리 꼭대기가 딱딱하게 굳질 않았다. 누군가 죽인 후 자액으로 위장한 것이겠지.
안참봉 : 분명 목매달아 죽었다니까요.
<인서트>
홍염장 포졸들이 대들보에 목 메 죽은 홍염장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다.
안참봉 : 애들이 끌어내려서 데려왔다고...
박규 : 가족은 있는가?
안참봉 : 꾸준하게 혼자 살아온 걸로... 소문에는...
박규 : (엄하게) 소문만 가지고 수사를 하는가! 당장 나가 이자에 대한 모든 것을 낱낱이 알아오게!
안참봉 : 네, 네... 낱낱이, 샅샅이...
못마땅한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안참봉. 그러다 시신을 보더니만 다시 올라오는지 입을 틀어막으며 돌아선다.
#44. 박규의 집 - 오후
막막한 얼굴로 앞에 놓인 비단을 바라보는 버진의 모습이 보인다.
팔짱을 낀 엄씨부인, 그런 버진을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고..
엄씨부인 : 뭐가 맘에 안드시는가?
버진 : (머리 긁적) 비단은 첨이라..
엄씨부인 : (기가 막히고) 지금껏 한번도 비단 마전을 해 본적 없단 말인가?
버진 : (끄덕이면)
엄씨부인 : (완전 못마땅하다) 얼마나 지체 높으신 집안에서 귀하게 자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옷을 다리고 비단을 마전하는 일은
비록 몸종이 있다 해도 손수 익혀야하는 법이거늘..
버진,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그때, 문이 열리며 마당으로 들어서는 매파들.
열린 방문으로 엄씨 부인의 모습이 보이자 호들갑을 떨며 달려든다.
매파들, 일제히 “마님!” “그새 더 고아지셨어요!”하며 굽신굽신 인사 올리고...
엄씨부인 : (당황하는) 사람들하고는...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오면 어떡하나?
매파 : 잘나신 아드님, 다른 사람이 채가면 어떡합니까?
엄씨부인 : 우리 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어째 이리도 다들 서두르는지...
엄씨부인, 매파들의 눈초리에 버진에게 턱짓으로 가보라는 표시.
버진, 주섬주섬 옷감 싸들고 일어나다 바닥에 우수수 반짇고리를 떨어뜨린다.
인상 확 구겨지는 엄씨부인.
버진, 서둘러 반짇고리 주워드는데. 다시 헛구역질을 한다.
엄씨부인/매파들 : !!!
버진, 아무 생각 없이 배 한번 쓸어내리고 밖으로 나가면서 트림을 한다.
#45. 안방 - 오후
매파들이 꺼내놓은 최고급 비단이며 보석들을 앞에 두고는,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엄씨부인의 표정.
#46. 마당 - 오후
잠시후 엄씨 부인 방에서 나오는 매파들의 모습.
돌아가는 매파들의 눈에 별당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는 버진의 모습이 보인다.
매파1 : 제주에서 달고 온 여자가 있다더니 그 소문이 맞나보네.
매파2 : 아까보니까 헛구역질을 하던데.. 혹시..
매파3 : 한참 혈기왕성한 나이에 한동안 나가지냈으니 뻔한거 아니겠나?
매파2 : 별당까지 내어 준걸 보니 첩실이라도 들여앉힐 모양이네.
매파1 : 근데 영 꼬락서니가 아무래도 천 것 같지않아?
쑥덕거리며 돌아가는 매파들을 바라보는 엄씨 부인의 심각한 얼굴.
엄씨부인, 결심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47. 별당 - 오후
근엄한 엄씨부인과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버진.
버진은 다리 모으고 앉는 것도 너무 불편하고, 자신을 계속 살피는 엄씨부인의 시선도 거북해서 참으로 괴로운데...
엄씨부인 : (뜸을 들이다) 혹 제주에 있을 때.. 우리 규와 무슨 일이 있었는가?
버진 : (못 알아듣고 말똥말똥 쳐다보면)
엄씨부인 :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우리 규에게 잃었다거나...
버진 : (진상패!!) 있지라. 탐라에 오자마자 그것도 첫날에....
허억!! 엄씨 부인이 놀라 버진을 쳐다본다.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만 하는 분위기로흘러간다.
엄씨부인 : 그러면... 자주... 우리 규와 단 둘이 밤을 지샌 적이...
버진 : 자주는 아녀도 가끔 그랬수다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버진. 엄씨부인은 억장이 무너지고 하늘이 내려앉는 기분이다.
버진은 아무 생각없이 후루륵 거리며 차를 마신다.
엄씨부인 : (애써 진정하고) 그래, 제주에선 아녀자들에게 주로 무엇을 가르치는가? 보아하니 다도는 안 배운 거 같고,
‘내훈’이나 ‘삼강행실열녀도’ 같은 것은 배웠나?
버진 : (??) 네? 삼강... ... 그런 건 안 배웠는디...
엄씨부인 : 대상군은 도대체 뭘 한건가...
엄씨부인, 성질 가라앉히며 차 한잔 마시고, 마치 최후의 결단을 내리 듯.
엄씨부인 : (혼자 진지) 정실부인을 들이는 대로 머리는 올려주겠네. 단, 내일부터 당장 규방 수업을 받게.
절대 밖으로 나다니거나 우리 규와의 일을 입 밖에 내서는 안될 것이야.
버진, 정실부인이니 규방 수업이니 전혀 접수 안 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48. 박규의 집 - 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는 박규 모습이 보인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박규 눈에 보이는 불 켜진 버진의 방.
잠시 망설이는 박규, 용기 내어 별당 쪽으로 한 발짝 발걸음을 떼는데,
#49. 버진의 방 - 밤
이불을 쓰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는 버진의 모습. 버진,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다,
버진 : 도대체 정실부인은 뭔 소리고 규방 수업은 또 무시거라. 귀양다리는 한 집에 살아도 놀러도 안오고... 아이고 깝깝시러라...
버진이 방문을 연다.
문 밖에서 박규가 황급히 몸을 감추는 것이 보이나 버진은 보지 못한다.
#50. 버진의 방 밖 - 밤
박규가 몸을 숨기고 버진을 바라보고 있다.
버진 : (한숨 푹) 일리암.. 일리암은 잘 있는거멘?
박규가 윌리엄 소리를 듣고는 얼굴이 굳어진다. 버진을 한참동안 바라보는 박규, 그냥 돌아서 버린다.
#51. 박규와 버진, 윌리엄 몽타주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건성 책을 넘기는 박규.
-역시 잠을 자지 못하고 눈만 멀뚱멀뚱 뜨고있는 윌리엄.
-버진은 가볍게 코를 골며 잘 자고있다.
#52. 버진의 방 - 아침
복년(os) : 아씨, 세숫물 준비해놨으니 어서 일어나시어요.
복년이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뜨는 버진.
#53. 박규의 집 - 아침
동시에 대문이 활짝 열리며,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게
순백의, 하얀, 순결하고 화이트한 도포에 화려한 용 문양이 수놓아진 도포를 걸친 중년의 남성 김훈장이 들어온다.
엄씨(E) : 오늘부터 자네의 수련을 맡으실 김훈장님일세. 인사 드리게.
#54. 안방 - 낮
버진, 대충 고개 숙여 인사하면
버진 : 혼저옵서예.
김훈장이 깐깐한 얼굴로 버진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엄씨부인을 향해 입을 연다.
범상치 않은 차림새처럼, 목소리도 여성처럼 가녀리다.
김훈장 : 옷차림은 털 빠진 꿩처럼 태가 안나고, 피부는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윤기가 없군요.
목소리는 돌쟁반에 자갈이 굴러가듯 품위가 없고, 언행은 개한테 물린 도둑처럼 방정맞으니...
어디서 이런 처자를 들이셨는지요. 여자가 되려면 한참 걸리겠습니다.
한껏 비웃는 얼굴로 버진을 바라보는 김훈장. 버진이 멀뚱 보다가 끽! 짧은 트림을 한다.
- 11부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