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콩깍지] 06 - 백조의 호수
S#1 경수방 (낮)
자막 - 3개월 후.
늘어지게 자고있는 경수.
경 수 (N) 그로부터 3개월이 흘렀다. 나는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고, 시간이 흐르자 절망감마저 옅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뭐하
냐고 물어보면 둘러대는 것도 귀찮았고, 어느 새 나 자신을 백수라
고 소개하는데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시계 11시가 넘었고, 구겨진 이력서와 명함판 사진들. 담배꽁초가
그득한 재떨이,
널려있는 만화책과 먹다 남은 오징어다리, 새우깡 봉지 등이 보인
다.
경수모 (밖에서. E) 경수야! 밥 먹어라!
세상 모르고 자고있는 경수.
경수모 (밥상 들고 들어서며) 남들 밥 먹을 때 안 먹고, 니가
무슨 상전이냐? 그만 일어나!
경 수 (부시시 눈을 뜨며) 예?
경수모 (달려들어 이불 걷어내며) 속 터져. 지금 잠이 오니, 잠
이 와? 으이그... 이놈의 만화책 다 불 싸질러버릴 테니까, 당장 못
갖다 줘?
경 수 (하품하며 밥상 앞에 앉으며) 알았어... (이내 밥 먹기
시작한다.)
경수모 (나가려다 말고) 남들은 취직 못해서 불면증에 시달리
고 우울증까지 걸린다는데, 넌 어째 잠도 잘 자고 식욕도 더 좋다?
경 수 (갑자기 수저 놓더니) 엄마. 백수도 밟으면 꿈틀한다
는 거 몰라?
경수모 (얼굴 들이대며) 지금 니가 나 협박하니?
경 수 (우물우물 씹으며) 아니요...
경수모 (눈 흘기며 나가며) 이젠 아예 도서관에두 안 갈 작정
이야?
경 수 (볼 낯이 없는) 알았어요... (신경질 나서 우적우적 먹
는다.)
S#2 소제목 (밤)
6. 백조의 호수.
S#3 시립 도서관 일각 전화부스 (낮)
한눈에 봐도 백수임이 분명한, 점퍼 차림에 수염도 까칠한 경수.
전화를 걸고있다.
경 수 (천연덕스럽게) 영진이네 집이죠? 안녕하세요, 어머
니. 저 경순데요, 영진이 언제 휴가 나온대요? 말년휴가 나올 때 됐
는데, 연락 없었어요? (점프 컷)
경 수 (조금 주눅들어) 성민이냐? 나 경순데, 얼굴 본지도 오
래됐고 해서... 언제 밥 한번 사라...? (사이) 세미나? 야, 씨 너만
바쁘냐? 나도 바뻐 임마. (점프 컷)
경 수 (더 주눅들어) 상호냐? 얀마 첫 월급 받은지가 언젠
데, 꿩 궈 먹은 소식이냐? 애들은 내가 소집할게, 한번 쏴라? 뭐,
출장? 언제 오는데...? (점프 컷)
신호음이 가는 수화기를 들고 기다리는 경수.
은 영 (E) 대신그룹 홍보실 최은영입니다. 여보세요? 여보세
요...?
경 수 (망설이다 급히) 저기, 은영아...! 나 경순데...
S#4 셀프서비스 커피전문점 (낮)
은 영 (커피가 담긴 쟁반을 놓고 앉으며) 왜 이제 연락했
어...?
경 수 (앉아서 기다라고 있던, 여유 있는 체) 좀 바빴어.
은 영 (커피잔 주며) 진작 연락하지...
경 수 (잔 받아, 프림 타며) 오늘도 간신히 짬 내서 왔다, 야.
(그러다 눈 마주치자, 머쓱하게) 너도 들어간 회살 못 들어갔는데,
어떻게 연락을 하냐. 쪽팔리게... 어쨌든 고마웠다. 니가 애 많이
써줬는데, 면목이 없다, 야.
은 영 아니야. 내가 알아봤더니, 너 점수도 높고 괜찮았어.
근데 원래 3차 면접 땐 외부에서 로비가 많이 들어온대. 취업청탁
으로 합격한 애들 때문에 니가 떨어진 모양이야...
경 수 고맙다. 그렇게 얘기해줘서.
은 영 정말이라니까? 합격한 애들 보니까 모 신문사 사장 딸
도 있고, 국회의원 아들도 있더라. (속상한 듯) 어쩌겠니. 세상이
그런 걸.
경 수 그래... (궁시렁거리는) 자식들, 그럼 처음부터 특채로
뽑지, 왜 나 같은 사람을 생고생을 시키냐?
은 영 그러게 말이야... (커피 마시며) 어떻게 지내?
경 수 (씩씩하게) 잘 지내! (씩 웃고는, '좀머씨 이야기'라는
책을 내민다.) 자, 오다가 하나 샀어.
은 영 (책 집어들며) 서점주인한테 떼써서 바꿔온 건 아니
구?
경 수 야, 내가 아직도 그런 줄 아냐? (멋쩍게 웃으며) 지금
은 이렇지만, 나중에 그 책 비싸질 거다.
은 영 왜?
경 수 내 사인이 들었거든.
은영 웃으며 책표지를 펴보면,
경수의 사인과 함께 '넌 참 좋은 친구야. 고마웠다.'라고 적혀있
다.
은 영 (책 덮고)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내가 밥 사
줄게. 나두 잠깐 백수 해봐서 아는데, 참 견디기 힘들더라.
경 수 그래, 고맙다.
은 영 그럴수록 공부 게을리 하지 말고, 그 동안 못해본 거
많이 해. 여행 같은 거도 다니고...
경 수 여행? 그 것두 돈이 있어야 가지... (쑥스럽게 웃더니)
참 언제 시간 나면, 자전거 타고 춘천에 한번 같이 안 갈래? (나직
이) 자전거는 돈도 안 들거든.
은 영 (웃으며) 그 것도 좋지. 그러자.
웃는 두 사람.
S#5 은영 자취집 (밤)
은영이 들어오면, 방안에서 들려오는 은호와 인경의 웃음소리.
인 경 (E) 야, 너 진짜 왜 그래?
은 호 (E) 아이, 일루와 봐. 안 그럴게. 일루 와보라니까?
인 경 (E) 아악! (까르르) 놔아~! 저리 비켜...!
은영 열쇠와 가방을 놓고, 뭔가 싶어 방문 열고 들어가려 하면,
이때 방에서 튀어나오는 인경과 쫓아 나오는 은호.
인경의 옷자락과 머리 흐트러져 있고, 세 사람 부딪칠 듯 마주친
다.
은 영 (뜨악해서) 니네 거기서 뭐하니?
인 경 (웃음 거두며 얼른 머리 매만지는) 뭐하긴... 일찍 왔
네? 밥 안 먹었지? (부엌으로 피하고)
은 호 (머쓱하게 웃는) 누나 왔어...?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데)
은 영 (인경 힐끔 보고는, 은호에게) 너 이리 좀 나와봐.
은 호 왜에? (하면서 쭈삣쭈삣 돌아서면)
은 영 (겉옷 벗으며 거실로) 이리 와, 앉아봐.
은 호 (뻘쭘해서 인경 힐끔 보면서 와서 앉으면)
은 영 (마주 앉으며) 너 요즘 학교 안가니? 수업 없어?
은 호 ....
은 영 왜 그래? 지난 학기에도 학점 빵구 났다며? 학굘 들어
가기만 하면 뭘해? 공불 해야지?
은 호 (고개 외면하고) 잔소리 좀 그만해. 뭘 좀 모르면 가만
히 있어.
은 영 뭐? 너 안되겠다? 기숙사로 다시 들어가.
은 호 나 거기 못 가.
은 영 못 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기숙사에서 무슨 사고
쳤니?
은 호 몰라, 엄마한테 물어봐. 나도 쪽팔려 죽겠어.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은영 어리둥절해서 돌아보면,
인경, 눈치보며 은영의 시선을 슬쩍 피한다.
은 영 (안되겠는지 겉옷 집어들고 나가며, 인경에게) 너 잠
깐 나와봐.
S#6 아파트 단지 놀이터 (밤)
인경과 은영이 마주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은 영 (놀라며) 뭐? 부정입학?
인 경 응... 그래서,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입학이 취소될지
도 모른대.
은 영 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
인 경 너 정말 몰랐어? 은호 걔 실력에 그 대학을 어떻게 들
어갔겠니? 난 대강 짐작했었는데...
은 영 (너무 어이가 없어) 아니, 그래두 그렇지, 어떻게 2년
씩이나 다닌 학굘 이제와서 그만두라고 하니...?
인 경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니네 엄만 검찰에 자진출두
하지 않으면 구속될 지도 모른대.
은 영 (더 놀라며) 뭐? 아니 그럼, 여태 나만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
인 경 나도 얼마 전에 들었어. 은호한테서...
은 영 근데 너 제정신이니? 그런 앨 붙잡고 희희닥거리고 같
이 놀 때야? (그러다 정색하며) 설마, 너... 내 동생 좋아하니?
인 경 (약간 찔리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내가 연애한
번 못해봤기로소니 어떻게 그런 앨 갖다 붙이니? 기껏 잘해줬더니
엄한 소리나 듣겠네? 솔직히 니가 언제 니 동생한테 신경이나 썼
어?
기분 나쁘다는 듯 돌아서는 인경, 막상 돌아서서는 내심 찔끔하며
화면 밖으로 빠지고,
그 뒤로 어이없어 쳐다보는 은영. 속상하다. (F.O)
S#7 만화가게 (낮)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경수의 표정. 신간코너에 진열된 만화를 보
고있다.
경 수 아니, 며칠 안온 사이에 신간이 이렇게 많이 나오다
니...!
얼른 신간을 한 아름 빼들고 간다.
(시간경과.) 컵라면을 먹으며 신간 만화책을 보고 있는 경수.
재떨이에 꽁초도 쌓여있고, 종이컵과 휴지도 널려있고, 거의 다
봐 가는 상태다.
이때 경수 앞에 쌓여있는 만화책에 손을 대는 남자1. 역시 실업자
임이 분명하다.
남 자1 (자기가 보겠다는) 아저씨 이거 다 보셨지요?
경 수 (뜩 보더니, 못 가져가게 얼른 컵라면 놓고 손대는) 아
뇨! 한 번 더 볼 건데요...?
남 자1 (못마땅한) 그래요...? (무안해서 가며) 아이, 씨... 바
람의 파이터 17권은 언제 나오나...?
다시 만화책으로 시선 향하며 컵라면 국물을 죽 마시는 경수.
S#8 동네 문방구 앞 (낮)
기계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경수가 인형뽑기를 하고있고, 초등학생들이 구경하고 있다.
꼬 마1 우와...! 이 아저씨 디따 잘 한다.
경 수 니들 내 별명이 뭔 줄 아냐?
꼬 마2 뭔데요?
경 수 인형뽑기의 천재! (뽑은 인형을 들어 보이며 씩 웃는
다.) 자, 너 가져.
꼬마 1에게 인형 주면, 이미 아이들 인형을 하나씩 들고 있는 상태
다.
꼬 마1 아저씨 또 해보세요.
꼬 마2 이번엔 이거 뽑아주세요. 요거요.
경 수 그 거? (자연스럽게 손내밀며 눈은 그 인형을 보는) 어
디 동전 줘봐.
꼬마에게서 동전을 받아 막 넣으려는데,
이때 밖으로 나온 문방구 주인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못마땅한 듯 경수를 노려보는 것.
경 수 (주인에게 엉거주춤 인사) 안녕하세요... (동전 다시
내밀며) 얘들아, 오늘은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꼬마들 안돼요, 아저씨. 안돼요~! 한번 만 더해요~!
곤란한 경수. 뽑아놓은 인형 하나를 집어들고 어물쩡 돌아선다.
S#9 은영 춘천집 안방 (낮)
은영모 (침대에 걸터앉으며) 회사는 어쩌구, 내려왔니...?
은 영 (막 집에 온 듯 겉옷도 벗지 않은 채 서서) 지금 회사
가 문제야?
은영모 (되려 큰소리) 자식 앞길 열어주는데, 그 정도 투자는
할 수 있는 거지, 뭘 그러니?
은 영 그게 자식 앞길을 열어주는 거야? 자식 앞길을 막는 거
지?
은영모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니?
은 영 (어이없어 한숨 쉬는데)
은영부 (티 테이블에 앉아, 초조하게 명함첩 뒤적이며) 너무
걱정 마라. 변호사만 잘 선임하면 무죄로 될 수 있다더라.
은 영 (그 소리에 더 어이가 없는데)
은영모 은영아, 너도 좀 알아봐라. 니 주변에 어디 실력 있는
변호사 아는 사람 없니?
은 영 (답답하다는 듯) 정말 왜들 그래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은호 땜에 피해를 본 사람도 있을 거고, 남을 속인 거잖
아. 어떻게 그런 말들이 나와? 아후 챙피해서 증말... 난 몰라. 쇠고
랑을 차든 말든. (이내 핸드백 들고 나가버린다.)
은영부 찔끔해서 얼굴 돌리고, 은영모도 속이 상한다.
S#10 동 은영 춘천집 앞 (낮)
꽝! 대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은영. 속상해서 걸어가는데,
이때 핸드폰이 울리면, 받는다.
은 영 (속상한 투) 여보세요? (톤 누그러져) 어, 경수니...?
S#11 동네 수퍼 옆 전화부스 (낮)
경 수 (전화하는) 오늘 시간 있냐? 기분도 꿀꿀하고, 날씨도
꾸질꾸질한데, 술 한잔만 사주라.
은 영 (E) 저기, 오늘은 좀 그렇다. 내가 지금 술 마실 상황
이 못되거든. 다음에 하자. 미안해서 어떡하지?
경 수 (섭섭하지만) 아냐. 니가 미안할 게 뭐 있냐...? 다음
에 연락할게. 잘 있어라.
섭섭한 듯 전화를 끊는 경수. 인형 들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간다.
S#12 동네 삼류극장 (낮)
B급 3류 한국영화가 흐르는 스크린.
인형을 들고 들어와 객석에 앉는 경수. 잠시 후 옆자리에 중년 사
내가 와서 앉는다.
경수 힐끔 보지만 그대로 영화 보는데,
잠시 후 경수의 인형 위로 들어오는 사내의 손.
인형을 지나 경수의 무릎 위에 슬쩍 손을 올려놓는다.
경수 화들짝 놀라 인형을 안고 벌떡 일어나 나간다.
S#13 극장 앞 거리 (낮)
인형을 안고 극장에서 급히 나오는 경수. 보기엔 꼭 호모 같기도
하다.
경 수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하면서 가려는데)
이번엔 갑자기 경수의 팔장을 끼며 잡는 헌혈 아가씨.
아가씨 아저씨. 헌혈하고 가세요.
경 수 (느닷없는 팔짱에 보면) 네...? (아가씨 뒤로 헌혈 차
가 보이고)
아가씨 헌혈 한번하고 가시라구요.
경 수 (팔 빼며) 저기, 제가 보기엔 이래두, 부실하고 건강이
(기침하며) 안 좋아서요... (도망하는데)
아가씨 (얼른 따라붙어 잡고) 아후, 아저씨 힘 좋게 생기셨는
데, 너무 한다. (억지로 끌고 가는 분위기) 지금 헌혈하시면 빵도
드리고, 영화 티켓도 드려요.
경 수 (간지럼을 타는지, 우디알렌처럼 비비꼬며) 아니, 저
기 아가씨... 아가씨, 이거 놔요. 나 지금 바뻐요. 이거 놔... 아이,
간지러, 아이, 간지러... (자지러지게 웃는다.)
이때 헌혈차 앞에 와서 멎는 중형차.
그 차에서 내리는 정미. 어딘가로 향하려다 경수를 보고는,
정 미 (자세히 보며 다가오는) 아니 오빠! 경수오빠!
경 수 (헌혈차로 끌려 들어가기 일보직전) 아니... 너...? (선
뜻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정 미 나 정미야, 오빠.
경 수 그래, 정미야! (아가씨에게) 히히히... 아이, 간지럽다
니까...?
정 미 (헌혈 아가씨 보며) 근데 오빠, 여기서 뭐해?
경 수 (아가씨 보며 당황) 어?
S#14 카페 (낮)
점원이 찻잔을 놓고 가면, 경수와 정미가 마주 앉아있다.
정 미 세상에...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이렇게 만나네? 정
말 꿈만 같다, 오빠!
경 수 그러게. 정말 오랜만이다.
정 미 그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요즘도 가끔 꿈속에서
오빠 보는데... (약간 섭섭한 듯) 근데 오빤 나 안보고 싶었구나?
경 수 (천연덕스럽게) 아냐. 보고 싶었지...
정 미 (웃고는) 그럼 오빠 졸업하고 요즘은 뭐해?
경 수 요즘...? 더 나은 도약을 위해서 잠시 구상중이야.
정 미 구상 중?
경 수 음. 집에서... 놀아. 백수야.
정 미 (약간 실망) 그래...
경 수 넌 어떻게 지내니?
정 미 (잠시 망설이는) 나...?
경 수 (호기심) 너두 백수니?
정 미 난 주부야.
경 수 (놀라며) 결혼했어?
정 미 응. 애도 하나 있는데 뭐...
경 수 (실망) 그래...? 난 또, 내가 노니까, 남들도 다 노는 걸
로 보여서...
정 미 그럼 오빠 밥 먹고 술도 먹어야 되는데, 애로사항 많겠
다?
경 수 좀 그렇지 뭐... (하다가 솔직히) 사실 애로사항이 한
두 가지겠냐... 글쎄 신용카드 발급받을라고 하는데 백수라서 안된
다는 거야. 미성년자도 다 해주면서, 나는 왜 안되냐?
정 미 백수가 카드가 왜 필요해?
경 수 백수니까 필요하지! (오바 하며) 백수가 돈 쓸 일이 얼
마나 많은지, 너 모르는구나?
정 미 (웃는) 오빤 하나도 안 변했다. 어쩜 이렇게 똑같애?
경 수 너두 그대로 다, 야... 여전히 이쁘구... (웃는다.)
S#15 카페 앞 거리 (해질녘)
카페에서 나오는 경수와 정미. 정미는 핸드백에 지갑을 넣고있다.
경 수 (쭈삣쭈삣) 커피... 잘 마셨다.
정 미 당연히 내가 사야지. 오빠가 무슨 돈이 있다구...
경 수 (괜히 폼 잡는) 아냐. 다음엔 내가 살게!
정 미 (듣던 중 반가운) 그럼 오빠, 커피 마시고 싶으면 내가
전화해두 돼?
경 수 엉? 어...
정 미 (핸드폰 꺼내 저장하려는) 전화번호 불러봐.
경 수 (왠지 가르쳐주고 싶지 않은) 저기, 내 껀 삐삔데... 요
금 부담돼서 안 쓸라 그러거든?
정 미 그래두 빨리 불러봐.
경 수 012에... (뒤는 얼렁뚱땅 빨리) 832에 5683. (하면서 다
른 곳 보는데)
정 미 (재빨리 순발력 있게 누르며) 어머, 832만 외우면 되겠
다. 그 다음은 엘오브이이 Love 자판을 그대로 누르면 되네?
경 수 어? 어...
정 미 (차로 가며) 남편 없을 때 전화할게. 오빠 거의 집에 있
지?
경 수 (떨떠름한 기분) 어...
정미 차에 타고 떠난다. 경수 영 찝찝한 표정으로 돌아선다. (F.O)
S#16 경수방 (새벽)
어둠 속에서 알람이 울리면, 자고있던 경수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
어나
시계를 멈추고는 책상의 스탠드를 켠다. 새벽3시다.
조 부 (자다 깨서 보고) 몇 시냐? 벌써 도서관 가냐?
경 수 (건성으로) 예. 주무세요.
마치 도서관에 갈 듯 책을 주섬주섬 가방에 챙겨 넣고 불 끄고 나
간다.
S#17 안방 (새벽)
어둠 속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경수. 경수부와 경수모가 자고 있다.
경수부 간간이 앓는 소리를 하고...
조심조심 들어가 TV를 켜는 경수. 막 박찬호 경기가 시작된다.
(TV가 안방에 한 대밖에 없는 집이다.) 커다란 볼륨소리에 깜짝 놀
라 줄이고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앉아 경기를 보는 경수.
경수모가 부시시 눈을 떠 경수를 쳐다보더니, 혀를 차고 돌아눕는
다.
S#18 경수집 전경 (낮. 인써트)
S#19 경수집 안방 (낮)
가방을 머리에 베고 누워 박찬호 경기를 보고 있는 경수.
경 수 나두 이럴 줄 알았으면 박찬호처럼 야구나 할 걸...
경수모 (물이 든 대야를 들고 들어오며) 허우대는 멀쩡해가지
구... 해 다 저물고 도서관 갈래?
경 수 (누운 채 약간 비켜주며) 이거만 보고 갈려구요... 엄
만 일 안나가?
경수모 (경수부를 일으켜 앉히며) 그 집에서 그만 오라 그래
서, 다른 데 알아보고 있다.
경 수 네에... (더 면목없는데)
경수모 물수건 만들어 경수부를 세수시킨다. 경수부의 안색이 안
좋아져있다.
경 수 (힐끗 돌아보고) 많이 안 좋으세요?
경수모 오늘 어째 더 안 좋으신 거 같다. (경수 등짝 치며) 아
이구, 저리 좀 가. 그걸 보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경수부 (오히려 경수모에게) 너무 그러지 말어...!
경수, 하는 수 없이 TV 끄고, 가방 들고일어난다.
경수모 어디 가게?
경 수 도서관이요...
경수모 (얼른 주머니에서 돈 꺼내며) 자, 옛다.
용돈 2천원을 받는 경수. 몹시 괴로운 표정이 된다.
S#20 거리 (낮)
뒤로 전경버스들이 서있고,
전경복장의 영진과 경수, 화단에 나란히 걸터앉아 하릴없이 거리
구경을 하고있다.
경 수 너 언제 제대 하냐? 말년 휴가 안 나오냐?
영 진 형, 나 찾아올 시간 있으면 가서 취직 공부나 더해.
경 수 누군 공부 안 했는 줄 아냐? 너두 제대하고 사회에 나
와봐라. 내 심정 알 거다.
영 진 난 형을 거울 삼아서, 지금부터 틈틈이 하고있어.
경 수 (뜩 보더니 대응하지 않고, 다시 거리 보며) 남들은 쉽
게쉽게 잘 하는 거 같은데, 난 왜 이렇게 힘이 드냐...
영 진 남들도 쉽진 않겠지...
경 수 제일 힘든 게 뭔 줄 아냐? 엄마한테 용돈 받는 거다. 우
리엄마가 남의 집 일 해주고 받아온 돈, 타 쓸 때가 제일 괴롭다.
(한숨)
영 진 형, 사람 망가지는 거, 그거 순식간이야. 빨리 눈 높이
낮추고 아무 데나 취직해. 사람이 낮에 일을 해야지.
경 수 나두 진~짜 일하고 싶다. 왜 멀쩡한 내가 일할 곳이 없
고, 수치심을 느껴야 되냐? 아, 씨, 돈은 없고 시간은 넘치고 아주
미치겠다.
영 진 (피곤한 듯, 털썩 내려서며) 형. 미안한데, 자꾸 찾아오
지 마. 내가 형한테 도움두 안되구, 나두 몸조심해야지. 이제 보름
남았는데.
경 수 (내려서며) 그래, 알았다... 대낮에 웬 젊은 놈들이 저
렇게 많은지, 다 실업잔가...? 잘 있어라. (쳐다보지도 않고 간다.)
바라보다 전경모를 쓰며 돌아서는 영진.
S#21 은영 사무실 (낮)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은영.
은 영 (소근소근, 찜찜한) 그럼 저 변호사님 하고 직접 통화
할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니요, 이번엔 성희롱 문젠 아니구
요...
이때 들려오는 부장의 목소리.
부 장 (E) 최은영씨! 은영씨도 이리 좀 오지?
은 영 (부장을 향해) 예, 잠시만요. (전화에) 죄송합니다. 제
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전화 끊고 일어나 간다.)
부 장 자, 인사들 하지. 이번에 수석으로 입사한 친구야.
동료들에게 신입사원 장상두를 소개하는 부장.
상두, 한눈에도 고집스럽고, 농담과 진담을 구분 못할 정도로 고지
식한 타입이다.
장상두 (자신은 표준말을 한다지만 경상도억양 남아있는, 웃
지도 않고) 장상두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동료들과 통성명하면서 악수하는 상두. 웃지 않는다. 거만하게 보
일 수도 있다.
부 장 이 친구 별명이 수석이래. 대학두 수석으로 입학해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장상두 (은영 차례. 악수하면서, 매우 진지하게) 가끔 천채라
고도 불립니다.
은 영 (어이없어) 네, 그러세요...? 둔재 최은영입니다...
사람들 피식 웃는데, 상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어 다른 직원들
과 악수한다.
그런 상두를 보는 은영.
여직원1 (E. 은영 뒤에서 소근소근) 경상도 깡촌 출신이라며?
여직원2 (E) 신입사원 연수 때 꼴통이라고 소문났다더라.
부 장 아, 그리고 오늘 퇴근 후에 신입사원 환영회식 있으니
까 다들 그렇게 알고. 은영씨가 그때 그 일식집 예약 좀 해놓지.
은 영 (순간 기분 나쁘지만) 네. 근데, 부장님, 저는 오늘 사
정이 있어서 참석은 못할 것 같은데요...
부 장 은영씨 후배사원 들어오기만 손꼽아 기다리지 않았
나?
은 영 갑자기 집에 중요한 일이 생겨서요...
상 두 (매우 진지하게 끼여들며) 저, 회식도 회사업무의 연장
이라고 들었는데, 사생활보다 우선 하는 거 아닙니까?
은 영 네?
상 두 연수받을 때 그렇게 교육받았는데... 옛날엔 그런 말
없었던가보지요?
부 장 역시 이 친구 대단해. 은영씨 오늘 빠질 생각하지 마.
다들 마찬가지야!
기가 막힌 은영의 표정.
S#22 빌딩 앞 (밤)
퇴근 차림의 은영과 부장, 장상두, 직원들 우르르 몰려나온다.
사람들 떠들썩한데, 은영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부 장 (E) 이번 신입사원들은 외모가 출중해? 외모 보고 뽑
았나?
여직원1 (E) 그럼 우린요? 부장님?
부 장 (E) 아, 그쪽 깃수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야...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경수가 은영을 보고, 얼른 담배 끄
고 돌아서면,
은영은 이미 경수를 못 보고 지나가 버린 후다.
경수, 부를까 하다가 그만둔다. 초라한 기분. (F.O)
S#23 동네 문방구 앞 (낮)
교복 입은 여고생들이 인형뽑기를 하고 있고,
경 수 (옆에서 응원하듯) 아니, 좀 더 오른쪽, 아니, 그거 말
구, 엉덩이 쳐들고 있는 거... 그렇지, 그렇지... (E. 이때 삐삐가 울
리고, 손으로는 삐삐 꺼내면서, 아깝다는) 아휴... 그게 아닌데...
(삐삐 보려는데)
여고생 (신경질) 아저씨! 진짜 왜 그래요? 정말 재수 없어. 가
자!
여고생들 가버리면, 경수 못마땅하다는 듯 여고생들을 노려보는
데,
이때 문방구 주인과 눈이 마주친다. 동네 아저씨와 바둑을 두고 있
던 중이다.
주 인 거 왜 애들은 쫓고 그래?
경 수 죄송합니다. (이때 또 울리는 삐삐. 얼른 삐삐를 보며
의아한) 누구지...?
S#24 정미의 차 (낮)
정미가 운전을 하고있고, 창 밖의 풍경 미사리 정도. 서울근교로
빠져나가는 차.
정 미 나지, 그럼 누군 줄 알았어? 실망했나보다?
경 수 아이, 영광이지... (창 밖을 보며) 근데 지금 어디 가
니? 우리 밥 먹으로 간다며?
정 미 응. 밥 먹으러 가잖아.
S#25 경치 좋은 야외 레스토랑 (낮)
테이블 근처엔 키 작은 봄꽃들이 피어있는 화분들 보이고,
정미와 경수가 스테이크를 썰고 있다.
정 미 여기 음식 괜찮지? 경치도 좋구.
경 수 응. 넌 이런 델 어떻게 아니? 남편하구 와봤어?
정 미 오빤? 누가 이런 델 남편하구 와? 재미없게...
경수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말없이 먹는데,
정 미 오빠, 그때 나 사랑했어?
경 수 (당황) 응? 그때....?
정 미 옛날에, 우리 연애할 때 말이야...
경 수 그럼... (시선 피하고 먹는데)
정 미 은영이 그년만 아니었어도, 오빠랑 결혼했을 텐데...
그지?
경 수 (당황하지만, 말 돌리며) 너 은영이 미워하냐?
정 미 아니. 이젠 다 지난 일인데 뭐...
경 수 그래... (밥 먹는데)
정 미 오빠랑 결혼했으면 지금쯤 어떨까?
경 수 (또 당황) 너... 나랑 결혼 안 하길 잘했지...
정 미 왜?
경 수 백수건달하고 살 뻔했잖냐.
정 미 그래두... 작년에 남편이랑 제주도 갔는데, 오빠생각
되게 나더라... 옛날에 오빠랑 자전거여행 왔더라면 오빠하고 안
헤어졌을 텐데... 하고 말이야...
경 수 (얼른 화제 돌리며) 저기, 남편은 뭐하는 사람이니?
정 미 조향사야.
경 수 조향사?
정 미 화장품 회사에서 향수 개발해. 후각이 귀신같이 발달
해서, 냄새루다 별 걸 다 안다? 아마 오빤 냄새만 맡아도 백순지 금
방 알 걸?
경 수 (떨떠름하게 웃으며) 그러냐...?
정 미 요즘 신제품 개발하느라 맨날 늦어. (물 마시고는) 오
빠 내일은 뭐해?
경 수 내일...?
정 미 별 일 없으면 나랑 영화나 보자. 싫어?
S#26 영화관 (다음 날. 낮)
뻘쭘하게 객석에 들어와 정미와 나란히 앉는 경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자, 정미가 경수의 팔짱을 낀다.
찔끔하는 경수. 슬쩍 팔을 빼볼까 하는데, 정미 더 꼭 끼고 얼굴까
지 기댄다.
S#27 노래방 (밤)
한 손엔 맥주를 들고, 율동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정미.
기분 좋게 취해서 흐트러진 모습.
정 미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경
수를 향해) 당신뿐이라오...
머쓱하게 미소지으며 피하는 경수. 열심히 노래책만 뒤적인다. (점
프 컷)
노래 바뀌고, 역시 정미가 노래하고 있다.
정 미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경수를 향해) 나는 당
신을 생각해요...
경 수 (지루하다. 마이크에 대고) 정미야. 그만하고 가자. 너
집에 안 들어가? 남편 밥해줘야지.
정 미 (노래음에 맞춰서 가사처럼) 오늘 남편 늦게 들어와.
야~근이야요. (아예 경수 옆에 찰싹 붙어앉아 경수얼굴 바라보며
노래 계속한다.)
경 수 (마이크에) 그럼 니네 애 안 데릴러 가? 놀이방에서 찾
아와야지?
정 미 (역시 노래음에 맞춰) 친정엄마한테 맡겨놓구 왔지. 오
빤~ 걱정 마세요. (노래 계속한다.)
경 수 (난감해서 일어나며) 저기 잠깐만... 대리운전 불러달
라 그럴게.
S#28 정미차 안 (밤)
대리운전수가 운전을 하고 있고. 정미와 경수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있다.
정미 지갑에서 십만원권 수표 한 장을 꺼내 경수에게 내민다.
정 미 자, 오빠.
경 수 (느닷없어서) 이게 뭐니?
정 미 오빠 힘들잖아. 차비나 해.
경 수 야, 너 왜 이래? 이러지 마! (수표 다시 정미 무릎에 놓
는데)
정 미 (다시 쥐어주며) 괜찮아. 내가 오빠한테 해줄게 이것밖
에 더 있어?
경 수 얘가? (대리운전수도 힐끔 보고) 내가 너한테 돈을 왜
받냐? 니네 남편이 번 돈을? (둘이 수표 든 두 손 붙잡고 실강이)
정 미 (눈 흘기며) 아이, 백수가 뭐 그런 걸 깊게 생각하고 자
시고 해? 그냥 줄 때 받어. (경수 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는다.)
경 수 (다시 꺼내려고 하며) 괜찮다니까?
정 미 (못 꺼내게 경수 주머니 막고) 나중에 잘 되면 갚아.
S#29 동네 문방구 앞 (밤)
정미의 차가 와서 멎고, 차에서 내리는 경수. 찝찝한 표정으로 차
문 닫는데,
이때 울면서 허둥지둥 지나가던 경선, 경수와 어깨가 부딪치자, 서
로를 보게 된다.
정 미 (뒷창문 올라가며) 그럼 다음에 봐.
경 수 어... (경선을 힐끔 보는데)
경선 얼른 어리둥절해서 올라가는 차창사이로 정미를 보는데,
차안의 정미 앞을 향하고, 창문 닫힌다. 차 그대로 떠난다.
경 선 (눈물 닦으며) 누구야?
경 수 어? 아무도 아니야... (젖은 얼굴 보며) 근데, 넌 왜 그
러니?
경 선 나...? (그러다 다시 눈물이 핑 돌며) 오빠...!
경 수 왜 또 그래?
이때 문방구 밖으로 나와 빼꼼이 보는 주인.
경수 갑자기 동네사람을 의식하며 경선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면
서,
경 수 무슨 일이야? 왜 그래?
경 선 (고개 숙이고 손으로 눈물 닦아내기만 할 뿐) 오빠...
경 수 그래. ....?
경 선 (훌쩍거리며) 나랑 내일 병원에 좀 같이 갈 수 있지?
경 수 (화가 나며) 갑자기 왜? 그 자식이 뭐라고 하디?
경 선 (얼굴 가리고 와락 우는) 그 사람 아무래두 이혼 못할
거 같애... 오빠가 나 좀 데리고 병원에 가줘...!
경 수 뭐?
울컥 화가 치미는 경수.
S#30 경선 사무실 (밤)
탁자를 내리치는 박두팔의 주먹.
박두팔 뭐요? 제 애를 뗀다구요? 제 애 떼면... 가만 안 둘 겁
니다. (부르르 떤다)
경 수 (움찔 놀라며)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마냥 기다
릴 수만은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경선이는 처녀구...
박두팔 그러니까 저를 믿어주십사 하는 겁니다, 형님! 걱정 마
십시오. 이혼수속 곧 끝납니다. 생각 같애선 지금 당장 아버님 찾
아뵙고 결혼식을 올리고 싶습니다만...
경 수 저기, 저희 집에 아버질 보러 오는 건 삼가해 주시는
게 좋겠구요....
박두팔 죄송합니다. 어쨌든 그 애는 절대루 못 뗍니다. 이 세
상에 하나밖에 없는 제 혈육인데, 절대 안됩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을 시엔... (험악해지는 인상) 경선이 뿐 아니라 형님께두... 어
떤 일이 있을지 장담 못합니다.
경 수 (주눅 들어) 예... (가시방석이다.)
두 팔 참, 형님께서 취직을 하셔야 된다고 들었는데, 제가 한
번 힘을 써볼까요?
경 수 아,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두 팔 (몹시 섭섭한 듯) 아, 예...
경 수 (사무실 둘러보다) 듣기론 사장이라고 하던데, 대체 하
시는 사업이 정확히 어떻게 됩니까?
두 팔 주로 채권추심을 하고있죠.
경 수 채권추심이 뭡니까?
두 팔 쉽게 말해, 빚 받아준다는 얘기죠.
경 수 그럼 해결사요...?
두 팔 그건 무식한 사람들이 쓰는 표현이구, 우리 지부에서
는 과격한 행동은 안 합니다. 대충 제 이름만 대면 쉽게 일이 해결
되거든요.
경 수 예...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런 일을 하실 계획인가요?
두 팔 말씀 놓으세요. 손위 처남이신데...
경 수 아니, 어떻게 할건가 해서요...
두 팔 아이, 말씀 놓으시라니까... (어깨를 딱 짚는다.)
경 수 예, 뭐 그럼... 그렇게 하지, 뭐... (참으로 난감하다.)
S#31 서울 검찰청 앞 (낮)
청사 앞으로 들어오는 검찰짚차. 차에서 수사관들과 함께 은영모
가 내리면,
일제히 사진기자들의 후레쉬가 터진다.
양쪽의 수사관들에게 잡힌 은영모, 얼굴을 가리고,
기자들의 질문세례를 피해 황급히 건물로 향한다. 기자들 은영모
를 쫓아가는데,
그 화면을 채우며 들어서는 한 취재기자와 방송카메라.
기 자 구속된 대학교수가 아직 입을 열고있지 않은 상태에
서, 대학 측에 거액의 돈을 건네준 것으로 알려진 학부모가 오늘
전격 구속됐습니다.
S#32 동 검찰청 앞, 은영부의 승용차 안 (낮)
검은 차창 밖으로 취재기자와 방송 카메라가 보이고,
창 밖을 보고 있다가 앞좌석의 은영이 착잡하게 고개 돌리면,
(운전석엔 기사가), 뒷좌석엔 은영부가 앉아있다.
은 영 아버진 정말 모르고 계셨어요?
은영부 (은영을 힐끔 볼 뿐) ....
은 영 정말 엄마 혼자 다 하신 일이냐구요?
은영부 (시선 돌리며, 운전수에게) 그만 출발하지.
은 영 (실망해서, 안전 띠 풀며) 전 여기서 회사로 들어갈게
요.
은영부 왜? 차로 가지 않구...?
은 영 (쳐다보지 않고) 갑갑해서요. 좀 걷고 싶어요. (문 열
고 나간다.)
S#33 동 차 밖, 검찰청 앞 (낮)
은영이 차 밖으로 나오면, 승용차 이내 떠나고,
쓸쓸하게 보도로 올라서 다른 샛길로 걸어가는 은영. 착잡한 표정
이다.
이내 속상한 듯 멈춰 서고는 한숨 쉬며 허탈하게 올려다보면,
근처 나무에 목련꽃이라도 잔뜩 매달려 활짝 피어있다. 개나리도
좋고...
S#34 검찰청 밖 거리 (낮)
은영이 전화통화를 하면서 걷고있다. 길옆으로 개나리가 활짝 피
어있다.
은 영 경수니? 그래, 나야. 봄은 봄인가부다. 봄인 줄도 몰랐
는데... 미안해. 내가 연락하라 그래놓고 밥도 한끼 제대루 안사
고... 집안 일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우리엄마 9시뉴스 방
송 탔거든.
S#35 경수집 안방 (낮)
경수 전화를 받으며 아버지에게 물을 따라 준다. 약을 먹는 경수
부.
경 수 왜? 무슨 일로?
은 영 (E) 나중에 만나면 얘기해줄게. 아니야, 얘기하고 뭐
할 것도 없겠다. 너무 챙피해서...
경 수 어디니? 밖인가 본데... 나가서 차 한잔 사줄까? 나 돈
있는데...
(전화기 들고 마루로 나가는)
S#36 동 거리 (낮)
은 영 아니야. 회사 들어가 봐야돼. 근데 꽃이 어쩜 이렇게
이쁘니...? 잘 지내지?
경 수 (E) 그럼 잘 지내지...
은 영 어떻게 지내?
S#37 호텔 로비 (낮. 몽타주)
경 수 (E) 어... 도서관 다니고...
정미에게 이끌려 들어가는 경수.
경 수 야, 여긴 호텔이야! 너 어디 갈려고 그래...?
정 미 오빠도 시간 있을 때 몸 좀 만들어. 나랑 같이 운동하
면 좋잖아.
S#38 동 호텔, 수영장 (낮. 몽타주)
정미 유연하게 물을 가르면, 그 뒤에서 첨벙첨벙 개헤엄을 치는 경
수.
경 수 (E) 건강 생각해서 운동도 하고, 그래...
S#39 동 호텔, 커피숍 (낮. 몽타주)
수영을 막 끝냈는지, 젖은 머리의 경수가 혼자 씁쓸하게 앉아있
다.
경 수 (E) 너 혹시 정미 소식은 듣니?
은 영 (E) 응? 아니. 그건 갑자기 왜?
경 수 (E) 아니, 그냥...
경수 착잡하게 담배를 꺼내 물면,
근사한 라이터가 들어와 담뱃불을 붙여준다. 막 수영을 끝내고 올
라온 정미다.
경 수 (라이터 보며) 그건 뭐냐?
정 미 (마주 앉으며 라이터 넘겨주며) 괜찮지?
경 수 멋진데? 비싸 보인다? (보고 주는데)
정 미 오빠 가져.
경 수 (테이블 위에 밀어 놓으며) 뭐 이런 걸 주냐...? 됐어.
정 미 (다시 밀어 놓으며) 오빠 써. 우리 집에 이런 거 많아.
경 수 그래...? (다시 집어서 본다.)
S#40 경수집 마루 (낮. 몽타주)
경선이 벽거울을 들어 보여주면, (미안한 듯한, 그러나 어딘지 밝
아진 표정이다.)
거울 속에, 경수부와 경수의 모습이 들어온다.
모처럼 마루까지 나온 양복차림 아버지에게 머리를 빗겨드리는 경
수.
경 수 (E) 참 여동생이 결혼을 하게 됐거든.
은 영 (E) 그래? 축하한다. 신랑은 맘에 들구?
조 부 (거울 옆으로 들어서며, 경수부를 보는) 하여튼 그 놈
참 바쁘겠다. 이혼할라~, 결혼할라.
S#41 경수집 안방 (낮. 몽타주)
큰절을 올리는 박두팔.
양복을 입은 경수부와 역시 옷차림에 신경을 쓴 경수모가 나란히
앉아 있고,
절을 받는 표정이 좋지 않다.
문가에 서서 보고있는 경선과 경수.
경 수 (E)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데, 냉장고라도 한
대 사주고 싶은데... 그게 영 그렇다.
S#42 포장마차 (밤. 몽타주)
제대를 했는지, 예비군복을 입은 영진. 한쪽에 제대기념 앨범과 물
품들이 보인다.
영 진 형, 내가 돈이 어딨어? 오늘 막 제대했는데...?
경 수 그래, 그렇지...?
고심이 되는 듯 소주잔을 들고 생각에 빠지는 경수.
은 영 (E) 그럼 내가 좀 꿔줄까?
경 수 (E) 아냐. 너한테 어떻게 돈을 꾸니... 됐어.
괴로운 듯 술잔을 털어 넣는 경수.
S#43 호텔 커피숍 (낮)
급하게 핸드백 뒤져, 지갑 꺼내더니, 카드를 꺼내는 정미.
정 미 오빠는?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나한테 얘길 하지...
이 걸루 사줘.
경 수 아니, 이건 됐구...
정 미 괜찮아. 하나밖에 없는 오빤데, 그 정돈 해줘야지.
경 수 아니야, 됐어. 내가 꼭 너한테 돈 빌려달라고 한 소리
같다.
정 미 괜찮다니까? 그럼 나 섭섭해한다?
경수 그대로 난감하게 있자, 정미 카드 집어서 경수 손에 덥석 쥐
어준다.
정 미 부담 갖지 마. 오빤 내 첫사랑이잖아.
경 수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주머니에 넣고) 생기는 대
로 곧 갚을게.
정 미 안 갚아도 돼. 우리 오늘 뭐하고 놀까? (가방 챙겨 일
어나면)
경 수 (엉거주춤 일어나며) 어...?
정 미 실은 나 오늘 안 들어가도 돼. 우리 남편 오늘 안 들어
오거든. 새 향수 개발 막바지라 연구실에서 밤새고 바빠. (자연스
럽게 경수 팔짱끼고 끌고 나간다.)
경 수 저기... 얼른 가서 냉장고 사줘야지... (하면서 끌려나
간다.)
S#44 전자제품 대리점 (낮)
냉장고를 열어보며 고르는 경선과 경수.
경 선 안 사줘도 된다니까... 돈은 어디서 났어?
경 수 그건 묻지 말구.
경 선 은행 털었어?
경 수 그래. 은행 털었다.
경 선 (갑자기 뭉클해서 고개 돌린다.) ....
경 수 왜...?
경 선 그 동안 애먹여서 미안해, 오빠...
경 수 아니야. 오빠라고 하나 있는 게 해준 것도 없는데,
뭐... 그나저나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너 그 사람 정말 좋
으냐?
경 선 응.
경 수 남의 가정 깨면서 결혼하는 거 정말 괜찮겠어...?
경 선 (시선 피한다.) ....
경 수 니가 좋다니까 할 수 없지만, 내가 더 말렸어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그런 놈한테 보내도 되
는 건지...
경 선 자꾸 그러지 마, 오빠.
경 수 그래... 나를 봐도 그렇고, 사는 게 꼭 교과서대로 되
는 거 같진 않다.
씁쓸하게 냉장고를 보는 경수. (F.O)
S#45 동네 문방구 앞 (낮)
문방구 주인과 동네 아저씨가 바둑을 두고 있고, 경수가 옆에서 훈
수를 두고 있다.
이때 서류를 든 청년이 급하게 문방구로 들어선다.
청 년 아저씨, 지금 팩스 보낼 수 있죠?
주 인 (귀찮다는 듯) 어? 팩스?
경 수 (잽싸게 일어나며) 제가 보낼게요. (서류 받아들며) 장
당 500원입니다.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S#46 은영 사무실 (낮)
팩스에서 주루룩 흘러나오는 긴 감열지. (자동으로 페이지 잘라주
지 않는 기계.)
커다랗게 매직으로 쓴 글자가 한 장에 한자씩 이어져 찍혀 나온
다.
상두와 나란히 서서 팩스를 들여다보는 은영.
은 영 (의아해서) 저한테 온 거라구요...?
상두, 팩스에서 감열지를 죽 찢어 긴 종이 잡아당기며 읽는다.
상 두 니.나.간.시.... 어? 아닌데? (반대쪽 잡아당겨 거꾸로
읽으며) 은.영.아. 보.고.싶.다. 언.제. 시.간.나.니? (팩스 수신자
들여다보며) 경수가 누구예요?
부 장 (지나가다 고개 들이밀며) 누구야? 한번 만나주지 그
래?
은 영 (팩스용지 뺏어가며, 상두에게) 남의 일에 참견 말아
요!
은영 화가 난 듯 감열지 자락 들고 자리로 간다.
선 채로 수신자 전화번호 보고 전화를 거는 은영.
S#47 문방구 안 (낮)
전화가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 받는 경수.
경 수 여보세요? (반갑게) 은영이니?
은 영 (E. 약간 격앙된, 하지만 예전처럼 왈칵 화를 내지는
못하는) 야, 너 왜 그래...? 누가 이런 거 회사로 보내랬어? 왜 쓸데
없는 짓을 하고 그러니?
경 수 어? 난 그냥... 오늘 주말이고 날씨도 좋고 해서... 자전
거 타고 춘천 한번 가기로 했잖아...
은 영 (E. 이래저래 짜증 섞여) 안돼. 집안 일로 누굴 좀 만나
야 되거든.
경 수 그래... 하긴 생각해보니 나도 안되겠다. 도서관에서
친구 만나서 취업 정보 좀 나누기로 했거든. 그래, 잘 지내라.
전화를 끊는 경수. 씁쓸한 표정이다.
S#48 경수집 마루 (그날 낮)
주머니에 손 꽂고 풀이 죽어 들어서는 경수.
경수모 (안방에서 문 열리며 내다보는) 경수니? 전화 왔다. 전
화 받어라.
S#49 경수집 안방 (낮)
경수 들어서면,
경수모 (수화기를 넘겨주며) 정미가 누구니?
경 수 (당황하며) 네? (돌아서서 전화 받는) 여보세요? (곤란
한) 야, 왜 집으로 전화하고 그래?
경수부에게 죽을 떠 먹이던 경수모 빼꼼히 올려다보고, 경수부도
쳐다본다.
경 수 (그 사이) 삐삐 그거 요금 못 내서 정지됐어, 그러니
까... 어... (놀라며) 어? 야, 왜 그런데서 만나? (다급하게) 정미
야, 나 지금 못나가... (하는데 전화 끊겼는지, 수화기 내려놓으며
엄마를 힐끔 본다.)
경수모 누구니? 사귀는 아가씨니?
경 수 아니. (아버지 보고는) 좀 어떠세요?
경수모 좋아하는 여자면 한번 데려와 봐. 아버지가 보고싶어
하신다.
경 수 (정미한테 약간 짜증나는) 그냥 친구야.
경수모 (다시 죽 먹이며) 그나저나 아버지 모시고 목욕 한번
같이 가라. 목욕하신지 오래 돼서 꿉꿉하신 모양이다.
경 수 (아버지 보고는) 알았어요. 내일 갈게요. (밖으로 나간
다.)
S#50 호텔 복도 (낮)
쭈삣쭈삣 걸어 들어가는 경수.
한 객실 앞에 멈춰서서 찝찝한 표정으로 망설이다 벨을 누르면,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안에서 정미가 나타난다.
정 미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와, 오빠.
경 수 야, 너 왜 이런데 있어? 얼른 나와.
정 미 뭐 어때? (팔 잡아끌며) 빨랑 들어와.
이때 사람들 지나가며 쳐다보고, 엉겹결에 딸려 들어가는 경수.
S#51 호텔방 (낮)
경 수 (끌려들어오며) 야, 너 왜 그래...?
정 미 앉어 오빠. 방 좋지?
경 수 (골치 아픈) 야, 일단 나가자.
정 미 (침대에 걸터앉으며) 오빤? 이방이 얼마짜린데 나가?
(잡아 앉히며) 일단 앉아봐. 뭐 시켜 먹자. 포도주도 시키고... (메
뉴 집어드는데)
경 수 (야단치듯 명령조) 왜 여기서 그래? 일어나. 나가자.
(일어나려는데)
정 미 (팔 잡아 팔짱 끼며 앉히는) 좀 가만 있어봐. 무드 없
게 왜 그래?
경 수 (팔 빼며) 얘가? 너 왜 이래, 정신 차려. (일어나는)
정 미 (얼른 일어나 붙잡으며) 아이, 오빠...
경 수 얘가? 넌 주부야, 주부. 이래선 안돼.
정 미 (뒤에서 안고 매달리는) 아이, 오빠 정말 이럴 거야?
경 수 (떼어내려고 옥신각신) 아니, 얘가? 절루 안가? 너 미
쳤어?
정 미 (앞으로 와서 막고 매달리며) 미치다니? 우리 사랑하
는 사이 아니야?
경 수 사랑이라니? 너 안되겠다? 이럴려면 우리 만나지 말
자. (뿌리치고 가는데)
이때 정미의 브라우스 앞섶 단추가 주루륵 뜯어지며 넘어지는 정
미.
정 미 (넘어졌다 얼른 일어나며) 아이, 씨... 오빠!
S#52 호텔 로비, 개방된 카페테리아 근처 (낮)
걸어나오는 경수. 옷 대강 손으로 추스리고 쫓아나와 경수를 붙잡
는 정미.
정 미 그냥 가면 어떡해... 그러지 말구 어디 가서 얘기 좀
해...
경 수 (멈춰 서며, 정색) 정미야, 이건 아니다. (카드 돌려주
며) 우리 그만 만나자. 이제 전화하지마. 너한테 빌린 돈은, 뭘 해
서든 곧 갚을게.
정 미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갑자기 돈 얘길 하구 그래?
경 수 넌 가정이 있잖아. 나도 내 갈 길을 가야지. 우리 이렇
게 만나는 거 아무 의미가 없어.
정 미 왜 아무 의미가 없어? 난 의미 있는데...?
무시하며 그냥 가는 경수.
몸을 돌리다 누군가와 마주친다.
은 영 (놀라며) 어?
경 수 어? 은영아...?
정 미 (쫓아오며) 오빠...! (하다가 은영을 본다) 어?
은 영 (뒤의 정미를 보며) ... 너, 정미 아니니..?
경수는 난감하고 정미는 놀라는데,
이때 경수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변호사 (E) 최은영씨, 여깁니다!
은 영 (보며) 아, 예. 이변호사님! 잠시만요!
은영 의아해서 정미와 경수를 본다.
은 영 (경수에게) 니가 이런 덴 웬일이니? 정미랑...?
정 미 (난처한 웃음. 앞섶 손으로 가리며) 은영아...? 되게 오
랜만이다.
은 영 (의아한 미소) 그러게... (하면서 경수를 보고)
경 수 (은영에게) 어... 저기, 우연히 만났어. (괜히 오바하
며) 얜 결혼했어. (정말이야, 확신시키듯) 남편두 있대.
은 영 그래...? (하면서 정미를 보는, 하지만 더 의아한 시
선)
정 미 (둘의 대화에 갑자기 끼여들며) 아니, 너 혹시... 그 동
안 죽 우리오빠 만나왔니? (기분 나쁜) 오빤 그런 얘기 왜 나한테
안 했어?
경 수 (정미에게) 야, 죽 만나긴 뭘 죽 만나?
은 영 (어이없어) 정미야, 너 결혼했다며 아직도 니네 오빠
야?
정 미 오빤 오빠지. 결혼했어두. 안 그래? 오빠?
경 수 (더욱 난처한데)
은 영 (뭔지 알겠다는 듯, 정미에게) 아무튼 반가웠다. 난 약
속이 있어서... (가려는데)
경 수 (뒤를 힐끗 보며, 괜히 시비) 그러는 넌 누구냐? 집안
일 때문에 바쁘다더니, 변호사랑 데이트하는 것도 집안 일이냐?
은 영 데이트 아니야. 그리고 난 데이트하면 안되니? 내가 데
이트하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이니? (가려다가 말고) 그리구 넌, 이
게 도서관에서 친구 만나서 취업정보 나누는 거니? (안 좋은 시선
으로 보더니 가버린다.)
경 수 저기... 은영아... 아이, 씨...! (억울한 표정으로 나가버
린다.)
정 미 오빠, 어디 가? 같이 가...! (따라 나가고)
변호사와 인사하며,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힐끗 보는 은영.
S#53 호텔 로비 밖 광장 (낮)
호텔에서 나온 경수 화가 나서 가는데, 정미 쫓아와 경수를 붙잡는
다.
정 미 오빠, 뭐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아까까지
만 해도 헤어질라 그랬는데, 난 오빠랑 못 헤어져!
경 수 (정말 화가 나는) 못 헤어지다니? 우리가 언제 사궜
니? (어이없어 가면)
정 미 (쫓아가며 붙잡는) 정말 이럴 거야? 오빠, 우리 어디
가서 얘기 좀 해.
사람들 힐끔힐끔 쳐다보고,
경 수 (난처해서, 멈춰 서며) 정미야... 너 왜 이러니...
정 미 (울 듯이 애처롭게) 오빠 너무해. 난 오빠 보고싶을 거
같은데... 내가 오빠 전화번호 잊어먹을 수 있을까...?
경 수 (달래 듯) 정미야. 우린 다시 만나지 안았다면 더 좋았
을 걸 그랬다... 미안해. 다 잊어먹고 잘 살아. 알았지?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정미.
경 수 (마음 약해지며, 정미의 어깨를 안고) 가자. 차 있는 데
까지만 데려다 줄게.
경수와 정미 발걸음 떼어놓는데,
이때 두 사람 앞으로 들어와 멎는 사륜구동의 힘 좋은 레져차 한
대. (코란도 정도.)
정 미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어머, 오빠 어떡하지? 남편이
야!
경 수 뭐? (하면서 얼른 팔 내리며 보면)
레져차에서 나오는 정미의 남편.
야구방망이 꺼내들고 두 사람을 향해 곧바로 걸어온다. 30대 초
반. 거구의 등치다.
정 미 (발발 떨며) 오빠 빨리 어디 숨어.
경 수 (미치고 환장하겠네...) 어딜 숨어?!
정 미 (경수를 밀고) 도망가. 빨리...! (이내 남편을 향해 손
싹싹 비는 자세)
단단히 화가 나 걸어오는 남편.
경수 갑자기 둘러보다 도망하는데,
남 편 (순발력 있게 따라붙으며) 너 이 새끼. 거기 못 서?
정미 발 동동 구르며 돌아보고,
경수 얼마 못 가 근처에서 요리조리 피하다가 금방 덜미를 잡히고
만다.
지나가던 사람들 하나 둘 서서 구경을 하고...
남 편 (경수 멱살 잡아 정미에게로 끌고 오며) 너 뭐야? 니
가 뭔데, 대 낮에 남의 여자 만나, 엉?
정 미 (남편에게도 오빠라고 하는) 어머, 오빠, 그게 아니
구... 이 오빤 그냥 친구야...
남 편 뭐? 오빠? 너 뭐야,
경 수 전 정말... 그냥 친군데요... (꼼짝 못한다.)
남 편 친구? 내가 지금 그 말을 믿을 거 같애?
정 미 오빠, 그거 놓구 얘기해.
남 편 너 이 여자 유부년지 알았어? 몰랐어?
경 수 알았는데요...
남 편 (멱살 쥐고 흔들며) 이 쉐끼가? 너 오늘 죽어볼래?
경 수 (멱살 잡힌 채, 캑캑거리며) 저기, 이거 놓구... 일단 차
근차근...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정 미 (억지로 사이에 들어와 뜯어말리며) 그래, 그거 놓구
말루 해, 오빠... (야구방망인 뺏어가며) 이건 나 주구...
남 편 (멱살을 놓으며) 둘이 언제부터 만났어? 어?
경 수 (안도의 숨 몰아쉬며) 선생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제가 다 말씀 드릴게요. (담배 꺼내 권하고, 라이터 꺼내
불 켜는) 일단 담배나 한 대 태우시고... 차근차근...
남 편 (라이터 채가며 눈 뒤집히는) 아니, 이 라이터? 이거
내 꺼잖아! 내가 아끼는 건데?
경 수 예?
남 편 어떻게 된 거야? 니네 어디까지 갔어? (하면서 정미 등
덜미를 틀어쥐면)
정 미 아니, 나는 가만있는데, 저 오빠가 자꾸 전활해가지
구... 커피 마시자고 불러내는 바람에...
경 수 (더욱 놀라는데) 뭐...?
남 편 뭐야? 그럼 너 지난번에 현금서비스 받은 것도 이놈하
고 유흥비로 쓴 거냐?
정 미 아니, 그건 저 오빠가 돈이 급하다 그래서...
남 편 뭐? 돈까지 뜯었어? (정미 놓고, 경수에게 다가서는)
경 수 (뒤로 물러서며) 아니, 정미야...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남 편 (경수 멱살 잡아 들어올리며) 뭐? 정미? 이 자식이! 너
제비지? 너 그런 식으로 얼마나 해먹었어? 엉?
경 수 (꼼짝못하고 매달린 채) 저기, 전 정말 억울합니다...
(답답하고 억울한) 정미야, 뭐라고 말 좀 해주라! (하면서 정미쪽
보면)
꿀 먹은 벙어리로 외면하는 정미. 그 뒤로 은영의 모습이 보인다.
(사운드 아웃.)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경수와 눈이 마주친 것이
다.
순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은영을 바라보는 경수.
은영, 한심하다는 듯 실망한 표정으로 시선 돌리고는 변호사와 함
께 걸어간다.
남편에게 붙들린 채 은영을 돌아보는 경수의 애처로운 눈빛.
이때 경수의 얼굴로 날아드는 거대한 남편의 주먹.
경 수 (N) 그날 난 결국 유치장에까지 갔다.
S#54 구치소 면회실 (그날 낮)
유리 철창을 사이에 두고, 엄마를 면회하고 있는 은영.
은영모는 미결수 복장을 하고 있다. 은영모 뒤에는 경찰관이 보이
고...
은 영 오늘 중으로 불구속 입건으로 최대한 어떻게 해보겠
대.
은영모 그래. 수고했다. 근데 은영아, 그 변호사 괜찮지 않니?
은 영 무슨 소리야?
은영모 머리가 좀 까져서 그렇지, 총각이랜다.
은 영 엄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이때 뒤늦게 변호사가 들어오면, 은영 주춤하며 비켜주는데,
변호사 (은영모에게) 좀 어떠세요?
은영모 저야 뭐... 저기, 우리 딸 어때요? 지금 회사 다니는
데... 사귀는 남자두 없어요.
변호사 네? (어리둥절 은영을 본다.)
은 영 엄마!
정말 못 말리겠다는 표정의 은영.
S#55 은영 아파트 앞 (그날 밤)
오래된 저층 아파트 단지. 은호의 커다란 가방 두 개를 들고 나오
는 운전기사.
은영부의 승용차 트렁크에 싣는다.
그 뒤로 아파트 계단에서 걸어나오는 은영과 은영부, 은영모.
은영모 그 변호사 진짜 실력은 있나봐요. 검사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더라니까?
은영부 그러게, 어떻게 사람을 하룻만에 빼내네...?
은영모 은영아, 아깝지 않니? 생긴 게 좀 그래서 그렇지, 노총
각이랜다. 언제 한번 만나보지 그러니?
은 영 엄마, 왜 그래, 진짜? 변호사 의사만 보면 날 못 줘서
안달이야? 이번 일루 반성할 생각은 안하고...
은영모 뭐? 저 위해서 얘기해주면 꼭 저래요.
은 영 (한숨. 차라리 말을 말자...)
은영모 그나저나 우리 은호 수능 땜에 또 고생시킬 거 생각하
면... (은영부에게) 차라리 유학을 보내는 게 낫겠지요?
은영부 그래야지. 이제 와서 별 수 있나...
은 영 (은영부에게) 은호 걘 뭐래요? 가겠대요?
은영부 가야지, 어쩌겠니. 신검 나왔던데, 안 가면 군대가야
되는데.
은영모 아니, 얜 뭐하고 아직 안 내려와?
아파트 계단을 올려다보는 은영.
S#56 동 아파트 계단 (밤)
벽에 기댄 인경과 난간을 집고 선 은호가 계단 위아래로 엇갈려 마
주 서있다.
은 호 (진지하게) 누나, 그 사이에 시집가면 안돼? 연애해두
안되구?
인 경 (착잡하다. 쳐다보지 않고)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딴
짓 하지 말구.
은 호 아예 엄마한테 누나랑 같이 보내달라 그럴까...? 혼자
가기도 겁나는데...
인 경 (다른 곳 보며, 안되겠는지 정색하고) 은호야.
은 호 응?
인 경 (쳐다보면)
은 호 왜에...?
인 경 너 내말 명심해. 내가 됐든 누가 됐든, 여잘 좋아하려
면 먼저 남자가 되가지고 와. 니 자신도 책임질 수 없는데, 어떻게
여잘 사랑하겠니? 누가 널 믿고 따라갈 수 있겠어?
은 호 (실망해서 고개 숙일 뿐) ....
인 경 (애처롭다. 가서 안아주며) 잘 다녀 와. 가서 생활 잘
하고. 알았지?
인경의 가슴에 안겨 고개를 끄덕이는 은호.
인 경 (놓고) 어서 내려가. 기다리시겠다.
은호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서서 천천히 내려간다.
그대로 서 있다가 문득 마음 아프게 돌아서는 인경.
S#57 동 아파트 전경 (밤)
은호가 차를 타면, 승용차 떠나고,
혼자 남은 은영이 허허롭게 아파트 단지를 바라본다.
S#58 경수집 마당 (다음날 아침)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든 경수. 쪽팔린 듯 살짝 들어서면, 아무도
없는 집.
마당엔 슬리퍼가 한 짝 뒤집혀 뒹굴고...
하지만 경수는 이상하다는 생각 미처 못하고, 살금살금 몰래 마루
로 올라간다.
마루 위엔 평소 같지 않게 수건과 물그릇, 숟가락 등이 나뒹굴고...
몰래 방으로 들어가려던 경수, 그제야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며, 안
방으로 향한다.
경 수 엄마! 할아버지? (안방 문을 연다.)
S#59 안방 (아침)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무도 없는 방안.
경 수 다들 어디 가셨지...?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이때 전화벨이 울린다.
경 수 (느낌이 이상한) 여보세요?
경 선 오빠... (말을 못하는)
경 수 경선이니...? (하면서 근처에 놓인 아버지의 정년 퇴임
패와 퇴임식날 아버지와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을 본다. 뭔가 멍해
지며) 경선아, 아버지 어디 가셨니? 나 아버지하고 목욕 가야되는
데...?
경 선 오빠... (흐느낀다.)
경 수 왜 그래...?
경 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운다.)
경 수 (멍하니) 뭐...?
S#60 영안실 (낮)
달려 들어오는 경수.
영안실 문가에서 핸드폰 들고 분주한 박두팔의 모습 보이고... (수
의나 관 주문하는)
다급하게 들어서서는 문득 멍하니 멈춰서는 경수.
아버지의 영정이 걸려있고,
경수모와 경선, 할아버지가 경수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경수모 (경수의 바짓가랑이 잡고 달려들며) 아이고, 이놈아.
어디 갔다 이제 오니... 어디 갔다 이제 와...! 널 얼마나 찾으셨는
데...
그대로 서있는 경수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S#61 경수방 (낮. 몽타주)
멍하니 넋이 나간 표정으로 검은 넥타이에, 양복을 입는 경수.
경 수 (N) 결국 난 아버지가 취직하면 입으라고 사주신 양복
을 아버지 장례식에서 입었다.
S#62 장지 (낮. 몽타주)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걸어가는 경수.
뒤로 초라한 장례행렬이 보인다.
할아버지를 뺀 가족들과 박두팔, 영진과 성민의 모습도 보인다.
(화이트 아웃)
S#63 시립 도서관 열람실 (낮)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경수.
깔끔하고 깨끗한 모습에 제법 가벼운 봄옷을 입고 있다.
문득 창 밖을 보는 경수.
S#64 시립도서관 앞 일각, 전화부스 (낮)
여러 번 망설이다 전화를 거는 경수.
은 영 (E) 대신그룹 홍보실 최은영입니다.
경 수 ....
은 영 여보세요?
경 수 은영이니?
S#65 은영 사무실 (낮)
은 영 (심각한 표정) .... 저기, 난 아무리 날씨 좋아도 너랑
자전거 타고 춘천 같이 갈 마음 없거든?
S#66 도서관 전화부스 (낮)
경 수 저기, 은영아, 그게 아니구...
은 영 (E) 생각해보니까 내가 너한테 밥 사줘야 될 이유도 없
구...
경 수 은영아, 밥 사달라고 전화한 건 아니구... 지난번에...
니가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 거 같아서...
은 영 (E. 냉소) 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 정미하고 만나
건 말건, 그 건 니네 자윤데 뭐 어떠니?
경 수 (문득 기분이 나빠지며, 정색하는) 은영아.
은 영 (E) 너 아직도 내 말 못 알아들었니? 넌 실업자야.
경 수 (화가 나서) 그래, 실업자다. 실업잔 여자한테 전화하
면 안되니?
S#67 은영 사무실 (낮)
은 영 안돼! 다시 한번 얘기하는데, 난 비젼있는 남자가 좋거
든? 내 계획으로 볼 때 넌 함량미달이야. 그러니까 자꾸 귀찮게 전
화하지마.
은영, 거칠게 전화를 끊고는,
경수가 사준 책 '좀머씨 이야기'가 눈에 띄자, 집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장상두 (이때 지나가다 보고, 웃지 않고 진지한) 그 책 버리는
겁니까?
은 영 보면 몰라요?
장상두 (꺼내며) 그럼 내가 가져두 되지요?
은 영 그러세요. 대신 내 눈에 안 띄게 해주세요. (외면한
다.)
S#68 도서관 일각 전화부스 (낮)
말없이 수화기를 놓고는 돌아서는 경수.
씁쓸하게 그 앞에서 생각에 빠져있다.
문득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드는 경수.
경 수 (N) 그래, 나도 비젼있는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언
젠가는 반드시 이 수모를 갚아주리라.
힘차게 도서관을 향해 돌진해 걸어 들어간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