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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지애] 02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3.03.13|조회수608 목록 댓글 0

[천년지애] 02











#1. 동경의 야경 (밤)


네온이 불타는 거리. 경쾌한 생음악이 흘러나온다.

자막 : 2003년 동경.



#2. 동경의 한 재즈바 (밤)


타쓰지, 머리와 와이셔츠가 땀에 젖은 채 열정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고

타쓰지의 연주에 맞춰 드럼과 베이스, 색소폰 등등이 어우러진다.

홀 안에 있는 젊은 남녀들,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며 술도 마시고, 한쪽에선 부둥켜안고 있기도 하고,

아무튼 자유분방하게 놀고 있다.

연주가 끝나자 일제히 환호를 터뜨리는 친구들.

타쓰지, 무표정한 얼굴로 건방지게 다른 연주자들과 악수도 하고 하이 파이브도 하고

친구들이 일렬로 앉아 기다리고 있는 스탠드로 가 앉는다.

친구들, 타쓰지 못지않게 부티나 보이고 태도는 건방지기 이를 데 없다.


친구1 : (이하 일본어로) 웬 일이냐? 안 치던 피아노를 다 치고.

친구2 : 너, 무슨 우울한 일 있냐?

타쓰지 : 일은 무슨? (맥주를 병째로 마신다)

친구3 : 준꼬랑 헤어졌다며?


타쓰지, 얼굴이 굳는데.


친구1 : 어? 쟤 준꼬 아냐?


타쓰지, 돌아보면 남자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는 준꼬가 보인다.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 입구에 나타난 여인을 보고 서로 눈짓을 하더니

타쓰지를 주시하며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타쓰지, 자신을 싸늘하게 외면하는 준꼬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술을 마시는데

준꼬,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타쓰지 일행의 뒤를 지나 다른 테이블에 앉는다.


친구3 : (피식 웃으며) 대단하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타쓰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친구들이 말릴 새도 없이 준꼬의 자리로 간다.

타쓰지, 준꼬 앞 테이블을 두 팔로 짚고 준꼬를 내려다본다.

준꼬, 그제야 싸늘하게 올려다본다.


남자 : 너, 뭐야?

타쓰지 : (남자를 무시하고) 얘기 좀 하자.

준꼬 : 할 얘기 없어.

남자 : 너, 뭐야, 임마!

타쓰지 : (남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잠깐 고민하다가) …. 엄마 일은 미안하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준꼬 : 사과할 거 없어. 나 같이 평범한 여자가 너 같이 특별한 남자를 넘본 게 잘못이지.

타쓰지 : 그건 우리 엄마 생각이고.

준꼬 : 어쨌든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남자 : 얘기하고 싶지 않대잖아, 이 자식아! 좋은 말로 할 때 가! 응?


남자, 웃옷을 벗어젖히는데 몸에 딱 붙는 민소매 셔츠의 밖으로 문신이 드러나 보인다.

일동, 문신에 흠칫 놀라는데.


타쓰지 : (남자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준꼬만 보며) 나가자.

준꼬 : 싫어.

남자 : (못참겠는지 벌떡 일어나 타쓰지의 어깨를 툭 친다) 들었지? 싫대. 꺼져!

타쓰지 : (참는다) 나가자.

준꼬 : 싫어.

타쓰지 : 나가자.

남자 : (타쓰지의 뒤통수를 뻑 갈긴다) 싫다잖아? 안 꺼져?


타쓰지, 잠시 참는 듯 하더니 느닷없이 남자를 패기 시작한다. 준꼬와 주변에 있던 사람들, 놀라 비명을 지른다.

타쓰지, 눈이 홱 뒤집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려는 남자 위에 올라타 미친듯이 주먹질을 해댄다.

친구들이 달려와 타쓰지를 남자에게서 떼어낸다.


타쓰지 :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준꼬에게) 나가자.

준꼬 :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널 사랑한 줄 아니?

타쓰지 : …

준꼬 : 니네 엄마 통 크더라. 후지와라 집안다워.

타쓰지 : …

준꼬 : 이제 와서 널 다시 만나면 상도의에서 어긋나잖아?


주변 사람들, 모두 충격 받은 얼굴로 타쓰지의 눈치를 보고

타쓰지,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준꼬를 보고 있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확 날린다.

일동, 경악하여 비명을 지르는데 타쓰지의 주먹은 준꼬의 코앞에서 탁 멈춘다.

준꼬, 눈을 질끈 감았다가 살며시 뜬다.

타쓰지, 준꼬를 잠시 보다가 주먹을 거두고 홱 돌아서 나간다.


친구들 : (난감한 얼굴로 부른다) 타쓰지야! 타쓰지야!



#3. 재즈바 복도 (밤)


재즈바 안에서 폼잡고 나오던 타쓰지, 주변에 아무도 없자

갑자기 벽에 기대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니 벽에 머리를 쿵쿵 찧는데

늘씬한 미녀가 지나가다가 아는 체를 한다.


여인 : 타쓰지, 여기서 뭐해?


타쓰지, 여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슬쩍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리다가 눈이 번쩍 뜨인다.


타쓰지 : 오늘 시간 있어?



#4. 호텔 앞


검은 세단이 현관에 도착하면 앞자리 조수석에서 집사가 내려 뒷문을 열어준다.

늘씬한 다리와 명품 구두가 내린다.



#5. 호텔 방문 앞


집사, 뒤로 살펴가며 급하게 문을 두드린다.


집사 : (일본말로, 다급한 목소리로 작게) 도련님! 도련님!


어느새 집사의 뒤에 나타난 지에꼬가 집사를 홱 밀쳐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열쇠를 꽂고 문을 벌컥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집사, 큰일이다 싶은 얼굴로 따라 들어간다.



#6. 타쓰지의 방 안


특급 호텔 프레지던트룸.

벌거벗은 채 침대에 엎어져 자고 있는 복도의 그 여인, 여기저기 널린 술병과 옷가지들.

지에꼬,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데 욕실 문이 열리고

아랫도리만 수건으로 가린 타쓰지가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흔들며 나오다가 지에꼬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 굳는다.

집사,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데

자고 있던 여인, 부스스 눈을 뜬다.


여인 : (이하 일본말로) 어머! 누구야?

타쓰지 :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엄마야, 인사드려.

여인 : (당황하여) 안녕하세요.


지에꼬, 여자애는 돌아보지도 않고 장갑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잡아 뺀다.


지에꼬 : (우아하게) 아가씨, 자리 좀 비켜줄래?


집사, 서둘러 여자의 옷을 주섬주섬 집어 들어 여자에게 갖다 주고 나가라는 손짓을 한다.

여인, 분위기에 압도되어 시트를 두른 채 옷을 들고 옆걸음으로 방을 빠져 나간다.

타쓰지, 여자가 나가는 동안에 신경질적으로 셔츠와 바지를 입는데

지에꼬, 여자가 나가자마자 타쓰지의 귀뺨을 짝 소리나게 갈긴다.

타쓰지, 황당한데.


지에꼬 : (너무 화가 나지만 꾹 참고 나머지 한쪽의 장갑을 마저 벗으며 싸늘하게) 바보 같은 놈! 전치 12주 나왔다.

            앞니가 두개 부러지고 코뼈가 주저 앉았어.

타쓰지 : …

지에꼬 : 거지 같은 여자애 하나 때문에 사람을 그 지경을 만들어?

            소문나기 전에 당분간 한국지사에 가 있어.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타쓰지 : …

지에꼬 : 아버지 아시면 넌 끝장이야.

타쓰지 : …

지에꼬 :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확 열다가 뒤를 홱 돌아본다) 명심해라. 넌 후지와라 가문의 후계자야.


지에꼬, 문을 꽝 닫고 나간다.


집사 : (번갈아 보다가 타쓰지에게) 집에서 뵙겠습니다. (나간다)


타쓰지, 착잡한 얼굴로 문을 돌아보다가 피식 웃는다.



#7. 타쓰지네 집 서고


몇백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서고. 마치 도서관 서가처럼 책들이 빽빽이 서가에 꽂혀 있다.

타쓰지, 서가에서 한국에 관련된 책들을 여러 권 뽑아 들고 서고와 연결되어 있는 서재로 들어간다.



#8. 서재


서고와 마찬가지로 오래된 방.

고가구와 골동품들이 방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있어 고풍스럽고 귀족적이며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한편 지극히 일본적이기도 하다.

타쓰지, 방 중앙에 놓여 있는 커다란 책상에 책을 던지듯 내려놓는다.

책상 옆에는 박스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책을 박스에 집어넣던 타쓰지, 문득 자기 신세가 한심한지 책상 위에 걸터앉아 한숨을 짧게 내 쉬다가

책을 한 권 집어 들어 책장을 넘기는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파르륵 책장을 넘긴다.

타쓰지, 방 안에 웬 바람인가 하여 두리번거리다가 창이 열린 것을 발견하고 의아한 얼굴로 일어나 창 쪽으로 간다.

타쓰지, 창 밖을 슥 보고 창을 닫고 돌아서는데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원통 하나가 발에 툭 걸린다.

타쓰지, 긴 원통을 집어든다. 비단으로 고급스럽게 만들어졌지만 무척이나 오래된 듯 낡고 색이 바랬다.

타쓰지,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 보고 말려 있던 두루마리를 꺼내 펴 본다.

거의 타쓰지 키만큼 큰 두루마리가 주루룩 펴지자 실제 사람 크기 정도의 미인도가 드러난다.

그림 속 여인의 미모도 미모려니와 여인이 한 목걸이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타쓰지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가든 찬다.



#9. 공주의 방 (밤)


한바탕 병사들이 약탈을 하고 간 뒤라 마치 폭풍을 맞은 듯 난장판이 된 공주방.

바닥에 뒹굴고 있는 두루마리를 집어 드는 손이 있다. 유석이다.

유석, 두루마리를 펼친다. 공주의 초상이 드러난다.

유석, 초상화를 들여다보는데.


소리 : 장군님!


유석, 날카롭게 돌아본다.



#10. 궁 마당 (밤)


횃불이 빙 둘러 켜 잇고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가운데

신라의 병사들이 금화의 시체를 호위하듯 서있다.

유석, 시체를 내려다본다.

금화, 눈을 부릅뜬 채 공주의 목걸이를 꽉 쥐고 죽어 있다.

유석, 금화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잠시 내려다보다가 냉정하게 금화의 손에서 목걸이를 힘주어 빼낸 다음

금화의 눈을 감겨준다.


유석 : (벌떡 일어나 낮고 차갑게) 모조리 불태워라. 이 땅 위에 남부여의 흔적을 남기지 마라!


유석, 망토를 휘날리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11. 산길 (새벽)


공주를 앞에 태우고 능선을 따라 필사적으로 말을 모는 아리.

말도 점점 지쳐 가는지 걸음이 차차 느려진다.

아리의 뇌리에 신라 장군복을 입고 싸우고 있던 유석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12. 아리의 회상 (아리의 방)


소명 앞에 아리가 앉아 있고 유석은 문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소명 : 가야의 후손들이 이미 왜 나라로 건너 간지가 오래 되었거늘. 너는 어찌하다가 이곳에 남게 되었느냐?

유석 : 신라에 복속하기를 거부하고 왕조의 재건을 도모하다가 이곳까지 흘러 들어오게 됐습니다.

소명 : (끄덕끄덕)

유석 : 거두어 주시면 백제의 신민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소명, 미소를 띠고 유석을 보고 아리, 뭔가 미심쩍은 눈길로 유석을 본다.



#13. 계곡 (낮)


개울을 따라 산을 올라가는 아리와 공주.



#14. 능선 (밤)


공주와 아리, 말을 끌고 험한 산길을 기다시피 올라오고 있다.

비탈에서 미끄러지는 공주.

아리, 얼른 손을 뻗어 공주를 끌어올린다.

아리, 공주의 허리를 끌어안다시피 하여 험한 산길을 올라간다.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며 멀리 불타는 사비성이 보인다.

불타는 사비성을 바라보는 아리와 공주의 눈에서 비통함과 분노의 눈물이 흐른다.



#15. 동굴 (밤)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며 공주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공주, 불 옆에 넋 나간 얼굴로 앉아 있는데

아리, 낙엽과 마른 풀들을 한 아름 들고 들어와 자리를 만들고 자기 망토를 벗어 그 위에 깐다.

아리,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죽 물통을 꺼내 흔들어보고 한 모금 마시려다가 공주에게 내민다.

공주, 물통을 탁 쳐버린다. 아까운 물이 바닥에 쏟아진다.

아리, 기가 막힌 얼굴로 공주를 노려보다가 바닥에 뒹구는 물통을 신경질적으로 확 낚아채듯 집어 올리는데.


공주 : 백제의 칠백년 사직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고천원의 조상들을 무슨 낯으로 뵌단 말이냐.

아리 : …

공주 : 우리는 이제 어찌 되는 거냐?

아리 : …

공주 :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아리 : …적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있을 겁니다.

공주 : 사비성이 적의 손에 떨어졌는데 가긴 어디로 간단 말이냐?

아리 : …

공주 : … 구차하게 도망 다니며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어 버리겠다.


공주,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아리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자신을 찌르려 한다.

아리, 얼른 공주의 손목을 잡고 칼을 쳐낸다.

분노와 절망감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 공주, 아리의 손을 뿌리치려 하지만

아리가 워낙 단단히 잡고 있어 팔을 뺄 수가 없자 잡히지 않은 팔을 휘둘러 닥치는 대로 아리를 두들겨 팬다.


공주 : 놔!


아리, 잠자코 공주가 때리는 대로 맞고 있다가

공주의 손목을 잡아 돌려 세우며 뒤에서 끌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공주, 몇 번 아리의 품에서 벗어나 보려고 힘을 줘 보지만 아리, 꼼짝도 안한다.


공주 :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흐르기 시작한다) …나를 왜 살려냈느냐?

아리 : …

공주 : (발악하듯)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나를 왜 살려냈어! 으아아아!


공주, 절규하듯 울부짖는다.

아리, 처참하게 흐느끼는 공주를 돌려세워 자기 가슴에 공주의 머리를 묻고 묵묵히 머리를 쓰다듬다가

공주의 턱을 쳐들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공주, 아리를 올려다보면 아리의 눈에도 눈물이 핑 맺혀 있다.

빤히 보던 두 사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춘다.

절망 속의 격정에 휩싸인 두 사람, 미친듯이 서로를 탐하며 서로의 옷을 벗겨 내려간다.

시간 경과

공주, 아리의 가슴을 베고 누워 있다. 긴 침묵.


공주 : …모든 것이 꿈만 같구나. …불타는 사비성도… 그대와의 이 밤도…

아리 : …

공주 : 이 밤이 지나면 왠지 그대를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


공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아리 :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공주 : (눈을 들어 아리를 본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아리 :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공주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아리, 천천히 공주에게 입맞춤을 한다.

시간 경과 - 아침

아침 햇살이 동굴 입구로 쏟아져 들어온다.

공주, 코끝에 풍기는 고기 냄새에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키다가 옷을 벗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다시 누우며 옷으로 몸을 가린다.


공주 : 힉!

아리 : (고기를 굽고 있다가 공주의 소리에 돌아보며 씩 웃는다) 잘 잤어요?

공주 : (누운 채) 그래.


공주, 민망하여 아리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아리, 공주가 민망해하는 모습에 고개를 돌리고 고기를 열심히 굽는다.

공주, 얼른 옷을 챙겨 입는다.


공주 : (침을 꿀꺽 삼키며)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냐?


공주, 아리의 어깨 너머로 슬쩍 넘겨다보는데 불 위에 개구리, 혹은 쥐나 뱀 따위가 구워지고 있자 인상을 찌푸린다.

아리, 공주가 넘겨다보자 잘 구워진 개구리 꼬치 하나를 내민다.


아리 : 드세요.

공주 :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걸 어떻게 먹느냐?

아리 : 그래도 드셔야 합니다.

공주 : 됐다. 나는 생각 없다.


아리, 더 권하지 않고 자기 입으로 가져간다.

공주, 두 번 권하지 않는 아리가 야속하다.

아리, 맛있게 먹어치우고 다른 꼬치를 집어든다.

공주, 아리가 다 먹을까봐 불안하다. 공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공주 : (외면하고 있다가 슬쩍 돌아본다) 맛있냐?


아리, 대답 없이 하나를 건넨다.

공주, 냉큼 받아 조심스럽게 입에 대보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아리, 그런 공주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공주, 허겁지겁 먹다가 아리와 눈이 마주치자 민망하게 웃고 다시 먹는데

갑자기 목이 메어오자 더 이상 삼키질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지만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아리, 그런 공주를 잠시 보다가.


아리 : 마음을 굳게 가지셔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치욕을 백배 천배로 갚아줘야지요.

         이대로 신라 놈들한테 나라를 내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공주 : …

아리 : 분하고 원통한 마음으로는 당장이라도 사비성으로 달려가 신라 놈들을 쳐죽이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운명이 우리 편이 아니니 후일을 도모하셔야 됩니다. 가우리는 원래부터 우리의 형제 국가라

         이번 일을 그대로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왜국에 계신 왕자님들도 반드시 구원병을 보내주실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주 : …

아리 : …지금부터 제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이 산을 넘어 서쪽으로 칠십리를 가면 진잠이 나옵니다.

         진잠이나 예산 봉수산에 있는 임존성은 아직 적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겨 헤어지게 되더라도 공주님께서는 그 쪽으로 가십시오.


아리, 이야기하며 공주를 돌아보는데

공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망울로 아리를 보고 있다.


공주 : 내 곁은 떠나지 않겠다 그러지 않았느냐?

아리 : (안심시키려는 듯 씩 웃어주며)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공주,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아리를 보면 아리, 공주의 손을 꼭 잡아준다.



#16. 산채 입구


죽창을 들고 망을 서던 병사, 누군가 다가오자 고개를 쭉 빼고 내다본다.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아리의 말이 보인다.

병사. 얼른 군호를 울리면

산채 여기저기에 힘없이 앉아 있던 몇 안되는 남부여의 패잔병들. 목책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누군가 하여 내다본다.


누군가 : 공주님이시다! 공주님이 오신다!


갑자기 산채 안에서 술렁임이 일더니 여기저기에서 초라한 몰골의 패잔병들이 쏟아져 나온다.


누군가 : 공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아리의 말이 정문으로 들어설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패잔병들, 공주가 들어서자 눈물을 글썽이며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누군가 : 공주님!


누군가의 입에서 비통한 울음이 터지자 패잔병들 사이에 흐느낌이 번져나가더니 곧 통곡으로 변한다.

말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공주와 아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누군가 : (벌떡 일어나 피를 토하며 외친다) 원수 신라 놈들을 몰아내자!!!

일동 : (일제히 일어나 호응한다) 몰아내자!!!

누군가 : 대왕의 원수를 갚자!!! 당나라 놈들을 죽여라!!!

일동 : 죽여라!!!


병사들, 죽창을 흔들며 두 사람을 에워싼다.



#17. 몽타쥬


공주 : (소리) 아리의 판단이 옳았다. 적들은 오직 사비성만을 점령했을 뿐이었다.

         비록 군대는 꺾이고 영토는 깎이어 수많은 군을 잃었고, 아버지는 당나라에서 객사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남부여가 아주 망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죽창을 든 패잔병에 불과했던 우리 군사들은

         아리 같은 뛰어난 장수들의 지휘 아래 차츰 세력을 키워가기 시작했고 가우리와 왜에서도 구원병을 보내겠다는

         약조를 해 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무엇보다도 아리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그는 나의 전부가 되었다. 그의 존재로 나의 불행을 잊을 만큼…


공주의 나레이션 위로 몽타쥬가 흐른다.

1. 대숲에서 대나무를 잘라 죽창을 만들고 있는 아리와 부흥군들.

2. 산채 여기저기에 횃불을 피워놓고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을 격려하는 아리.

3. 부흥군의 승전잔치 - 군데군데 장작불이 피워져 있고 불 위에서는 돼지가 통으로 구워지고 있다.

웃음소리, 음악소리, 북소리, 춤추는 여인, 등등이 어우러져 잔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묶여 있는 신라와 당의 포로들이 보인다.

사람들 틈에 조금 떨어져 앉아 술과 고기를 먹으며 서로 눈을 마주치는 아리와 공주.

아리, 공주의 시선을 피하며 슬며시 자리를 뜬다.

공주, 그런 아리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는다.

4. 바닷가에서 행복하게 말을 달리는 두 사람.



#18. 토굴


신라의 병사, 횃불을 들고 토굴 안으로 들어와 안을 비춰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막는다.



#19. 공주의 처소 (밤)


유석, 공주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좌장군의 말을 떠올린다.


좌장군 : (소리) 지금 남부여 부흥군의 정신적 지주는 주공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주공주를 제거해야 합니다. 헌데 공주의 옆에는 귀실아리란 용맹스런 장수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고 합니다. 그 자만 아니라면 그까짓 오합지졸들 쯤이야 걱정할 게 없는데.


유석, 만지작거리던 목걸이를 콱 움켜쥐며 벽에 걸린 공주의 초상을 바라본다.


유석 : 귀실아리! 이제야 너를 만나는구나.


이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소리 : 장군님!

유석 : 들어와라.


토굴을 뒤지던 병사가 들어온다.


유석 : 데려왔느냐?

병사 : 예.


병사의 뒤에 따라온 아리네 집 늙은 시종이 유석을 보자 사색이 되어 바닥에 엎드린다.


시종 :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유석 :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시종, 유석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유석, 돈주머니를 시종 앞에 던진다.


유석 :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 열배를 주겠다.


시종, 눈이 번쩍 뜨인다.



#20. 산채 뒷산 (밤)


아리, 소나무 한 그루가 멋들어지게 서 있는 절벽 위에서

소나무에 기대 달빛에 물든 산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공주,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다가 아리의 뒷모습을 발견한다.

공주, 조용히 다가가 아리의 옆에 서지만

아리, 생각에 빠져 공주가 온 것을 알지 못한다.


공주 : (아리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냐?


아리, 그제야 돌아보다가 공주가 서있자 몸을 바로 세운다.


공주 :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었느냐?

아리 : …한 여인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공주,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자 아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다.


공주 : … 아버님 소식은 알아보았느냐?

아리 : …

공주 : 부흥군의 소식이 온 나라에 퍼졌을 테니 살아계시기만 한다면 반드시 찾아오실 거다.


이때 병사 한 명이 뛰어온다.


병사 : 장군님!



#21. 산채 입구 (밤)


시종, 불안한 얼굴로 병사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아리가 나타나자 아리의 발밑에 엎드린다.


시종 : 도련님!

아리 : (반갑게) 살아 있었구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아버님은, 아버님 소식은 알고 있느냐?

시종 : (아리의 눈을 피하며) 실은 아버님께서 절 이리로 보내셨습니다.

아리 : 그래? 아버님은 지금 어디 계시냐?

시종 : 사비성이 함락될 때 부상을 당하셔서 성 밖에 은신해 계십니다. 도련님 소식은 진작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부상당하신 몸으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아리 : 그래? 당장 가서 봬야겠다. 앞장서라.



#22. 산채의 본부 (밤)


공주, 말을 타고 산채를 떠나는 아리와 시종을 본다.



#23. 유곽거리(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인적이 끊긴 길을 급하게 달려오는 아리의 말.

아리, 길 가운데 놓인 검은 관을 뒤늦게 발견하고 말고삐를 거세게 잡아당기면 달리던 말이 앞발을 높이 들고 선다.

뒤따라오던 시종은 어느새 간 데 없다.

아리,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에서 내려 관으로 다가가는데

반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또각 또각 들리더니 유석이 나타난다.

유석, 조금 떨어진 곳에 말을 멈추고 망토를 휘날리며 말에서 내려선다.

아리, 유석을 보고 그제야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아리, 유석을 무섭게 노려보고, 유석도 지지 않고 아리의 눈빛을 맞받는다.


유석 : 아리… 오랜만이다.

아리 : 교활한 신라의 도적놈같으니라구! 감쪽같이 아버님과 나를 속였구나. 아버님은 어디 계시냐?


아리,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는데 어둠 속에 신라의 병사들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인다.


유석 : 이걸 찾으러 왔나?


유석, 들고 있던 보퉁이를 아리의 발 앞에 던진다.

아리, 뭐지? 하는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직감적으로 아버지의 머리라는 것을 알아채고

얼굴이 일그러지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유석 : 나머지는 관에 들어 있다.

아리 : …

유석 : 놀랄 거 없다. 니 아비가 한 짓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니까.

아리 : (부들부들)… 넌 누구냐?

유석 : 네 아비의 손에 갈기갈기 찢긴 우리 부모님의 유골은 사비성의 감옥에서 육년을 썩었다.

아리 : …

유석 : (칼을 뽑아 소명의 목을 가리키며) 그건 우리 부모님의 몫이다. 내 형제의 빚은 너한테 받겠다.

아리 : 내가 할 소리!


아리, 칼을 뽑아들고 유석에게 무서운 기세로 달려든다.

용호상박의 대결이 펼쳐지지만 분노로 이성을 잃은 아리가 유석에게 밀리다가 바닥에 쓰러진다.

칼을 내리치는 유석.

아리, 가까스로 유석의 칼을 막고 버틴다.


유석 : (아리와 칼을 맞댄 채) 남부여를 다시 일으켜 보겠다고? 그럴 거면 자신을 다스리는 법부터 배워라.

아리 : 당나라의 신하국이 되어 민족의 자존심을 팔아먹은 주제에 누구를 가르치려 하느냐!


아리, 있는 힘을 다해 벌떡 일어나 유석의 칼을 내리치면 유석의 칼이 부러진다.

유석, 흠칫 놀라는 사이 아리, 유석의 칼을 날려버린다.

신라의 병사들, 재빨리 아리에게 창을 겨눈다.


유석 : (여유 있게 웃으며) 날 찌를 수 있을까?

아리 : 널 죽이고 나도 죽겠다.

유석 : 내가 죽으면 공주도 죽는다.


아리, 아차 싶다. 아리의 칼끝이 파르르 떨린다.

창을 들이대고 있던 신라 병사 한 명이 아리의 뒤통수를 내리친다.

아리, 고꾸라진다.

유석, 병사의 창을 확 빼앗아 들고 아리를 찌르려다가 잠시 생각한다.


유석 : (창을 돌려주고) 끌고 가서 성문에 매달아라. 남부여 패잔병들에게 본보기로 보이겠다.



#24. 산채 (밤)


공주, 왠지 불안하여 입구에 나와 초조하게 아리를 기다리는데

멀리 횃불의 물결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우레와 같은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공주의 눈동자에 횃불이 확 밀려들어 온다.



#25. 성문 밖


남부여의 부흥군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줄줄이 엮여 끌려오고 있다.

공주, 후미에서 따라가는 신라 병사의 말꼬리에 묶인 채 질질 끌려가고 있다.

달리다 넘어지고, 달리다 넘어지고를 반복하며 끌려가던 공주의 눈에 성문 옆 기둥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아리가 보인다.

아리의 얼굴은 여기저기 터져 있고 입술은 허옇게 말라붙어 있다.

아리의 주변을 신라 병사 몇 명이 지키고 있다.

아리, 말 뒤에 묶여 끌려가며 자신을 보고 있는 공주와 눈이 마주친다.

아리, 공주에게 다가가려 힘을 줘보지만 꿈쩍도 안한다.

스치는 두 사람의 눈에 피눈물이 맺힌다.



#26. 공주의 방


유석, 뒷짐을 지고 벽에 걸린 공주의 초상을 보고 있다.

문이 열리면 병사들, 공주를 안으로 밀어 넣고 다시 나간다.

공주, 긴장한 눈빛으로 유석의 뒷모습을 본다. 긴 침묵.


유석 : …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공주 : …

유석 : 여기가 그대가 쓰던 방이오?

공주 : 무슨 상관이냐…


유석, 갑자기 몸을 홱 돌이켜 공주를 빤히 본다.


유석 : 날 기억하시겠소?

공주 : …

유석 : (피식 웃으며) 공주님에게 찔린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벌써 잊으신 모양이군요.

공주 : …이제야 네가 누군지 알 것 같구나. 그때 아리 장군의 집에서 네 놈의 눈빛을 보고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공주의 눈에 눈물이 핑 돈다.


공주 : 그래, 당나라의 개가 된 소감이 어떠냐? 어떻게 이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을 칠 수 있단 말이냐?

유석 : …(한참을 빤히 보다가) …피곤하실 텐데 쉬시죠.


유석, 공주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는데.


공주 : 아리 장군은 어쩔 셈이냐?


유석, 멈칫 선다.


유석 : 살리고 싶소?


공주, 한 가닥 희망이 생기는 듯하여 기대에 찬 눈으로 유석을 본다.


유석 : 그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시오?

공주 : …

유석 : 그대가 내 여인이 되면 모를까.


유석, 나가버린다.

공주, 유석의 말 뜻을 되새기는데 낯선 여인들이 옷을 들고 들어온다.


공주 : (놀라) 너희들은 뭐냐?

여인 : 김유석 장군님께서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먼저 씻으시고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여인들, 공주의 옷을 벗긴다.

공주, 당혹스럽다.



#27. 공주의 방 (밤)


묶여 있는 아리와 유석의 말을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루는 공주, 동이 터 온다.



#28. 성문 앞


아리, 더욱 초췌해진 얼굴에 입술은 완전히 타들어가고 있다.

성문을 지나던 남부여의 백성 한 사람이 아리의 입에 물을 축여주려는데

신라의 병사, 창으로 물통을 사납게 치워버린다.


병사 : 물 한 모금 주지 말라는 장군님의 명이 계셨다. 썩 꺼져라!


백성들, 비통하게 돌아서 간다.



#29. 공주의 방 (밤)


공주, 꼼짝도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문을 벌컥 연다.

밖에 병사들이 지키고 서 있다.


공주 : 장군에게 안내해라.



#30. 궁의 다른 방 (밤)


유석, 공주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고 유석의 앞에는 여인이 서있다.


여인 : 아직 식사도 안 하시고 말씀도 안 하십니다.


유석, 말없이 술을 따라 입으로 가져가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공주가 들어온다.

유석, 술잔을 든 채 멈칫한다.

여인, 눈치 빠르게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다.


공주 : 내 눈 앞에서 아리장군을 풀어 보내라.


유석, 공주를 빤히 보며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는다.



#31. 성문 근처 (밤)


병사들의 횃불이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병사, 유석의 앞에서 아리의 쇠사슬을 풀어주고 있다.

아리, 사슬이 풀리자 기진하여 바닥에 풀썩 쓰러진다.

유석, 그 모습을 보다가 공주가 몸을 숨긴 곳을 슬쩍 올려다본다.


유석 : (아리에게) 공주님이 네 목숨을 구했다. 가라.


아리, 가까스로 일어서서 유석을 죽일 듯이 보다가 다시 푹 고꾸라진다.

유석이 턱짓을 하면 병사들, 아리를 양 옆에서 부축하여 질질 끌고 가 성문 밖에 홱 던져버린다.


유석 : (돌아서며 옆에 서 있는 병사에게 작게) 죽여라.


유석과 병사들, 다시 성문 안으로 들어가고 성문이 굳게 닫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아리의 입에서 절망적인 울부짖음이 터져 나온다.

성문 위에 몸을 숨긴 채 이 광경을 지켜보던 공주의 눈에서도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진다.



#32. 공주의 방 (밤)


공주,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유석이 들어선다.

유석,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공주를 잠시 보다가 공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공주의 뒤로 돌아간다.

공주, 긴장하지만 그 자세 그대로 미동도 않는다.

유석, 금화의 손에서 빼온 목걸이를 공주의 목에 걸어준다.

공주, 흠칫 놀라 자기 목에 손을 댄다.

유석, 공주의 주위를 천천히 돌며 감상하듯 공주를 본다.

공주,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만 뚝뚝 흘리며 옷을 벗기 시작한다.

유석, 갑작스러운 공주의 행동에 긴장한다.



#33. 성문 밖 (밤)


아리,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걷고 있고

그런 아리의 뒤에 말에 탄 신라 병사와 보병 몇 명이 따라오다가 서로 눈짓을 주고 받는다.

아리,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긴장하며 걷는데

병사들, 아리의 등 뒤에서 한꺼번에 칼을 내리친다.

비틀거리며 걷던 아리, 순간적으로 병사들의 칼을 피하며

말을 탄 병사부터 끌어내려 목을 꺾어 버리고 칼을 빼앗아 달려드는 나머지 병사들을 한꺼번에 베어버린다.



#34. 공주의 방 (밤)


공주의 마지막 옷이 벗겨진다.


공주 : (눈물을 참으며) 자, 이제 네 마음대로 해라.


미동도 않고 공주를 빤히 보고 있던 유석, 공주에게 다가간다.

공주, 죽고 싶다.

유석, 옷을 집어 들어 공주에게 다시 입혀 준다.

공주, 의외다.


유석 :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나를 받아들이는 건 참을 수 없소. 오늘은 얘기나 합시다. (자리에 앉는다)

공주 : (비웃음을 머금고) 네가 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이 우리 남부여의 영토를 유린한 것처럼

         내 몸을 가질 수는 있어도, 너희들이 남부여의 정신을 가져 갈 수는 없듯이 내 마음을 가져갈 수는 없다.

         나한테는 오직 아리뿐이니까.


유석, 갑자기 벌떡 일어나 공주를 벽에 몰아붙인다.

공주, 이를 악물고 유석을 노려본다.

유석, 공주를 잡아먹을 듯이 보며 공주의 얼굴로 다가간다.

공주, 유석의 얼굴을 피해 고개를 돌린다.


유석 : 공주, 난 이 전쟁의 승리자고, 그대는 내 전리품일 뿐이야.


공주, 이를 앙다문 채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유석 : 건방지게 굴지 마. 몸도 마음도 넌 이미 내 꺼니까.


이때 밖에서 비명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공주와 유석, 긴장한 얼굴로 밖을 돌아본다.



#35. 공주의 처소 앞 (밤)


운동장처럼 넓은 마당엔 신라군의 시체가 즐비하다.

악귀처럼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쓴 아리, 말 위에서 칼을 휘둘러 달려드는 신라의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며

공주의 처소 쪽으로 오다가 공주의 방에서 나오는 유석과 눈이 마주친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흐른다.

아리, 유석을 보는 순간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아리 : 네 놈을 죽여버리겠다.


아리, 유석을 향해 달려가려는데 이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아리의 오른쪽 가슴에 꽂힌다.


아리 : 윽!


유석, 죽어 자빠진 병사의 칼을 집으려 허리를 굽히는데 칼끝이 유석의 목을 겨눈다.


공주 : 멈춰라! (유석에게) 칼을 버려라.


신라의 병사들 멈칫하고 유석도 칼을 놓고 허리를 편다.

아리, 그 틈에 가슴에 박힌 화살을 부러뜨리고 공주 쪽으로 달려가며 손을 뻗으면

공주, 아리의 손을 잡고 가볍게 말 위로 몸을 날려 사라진다.

유석, 몸을 날려 궁수의 손에서 활을 빼앗아 재빨리 겨누는데

공주의 뒷모습이 아리를 가리고 있자 활시위를 놓지 못한다.



#36. 강가 (새벽)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가. 아리의 말이 물을 먹고 있다.

아리, 말에게 물을 먹이며 자신도 옆에서 가죽물통에 물을 담다가

소매 속으로 흘러내려 손등을 타고 내려오는 피를 강물에 씻는다.

공주, 아리의 팔을 탁 잡는다.


아리 : 윽.

공주 : 어디 보자.

아리 : 별 거 아닙니다.

공주 : 벗어라.

아리 : 괜찮습니다.


공주, 다짜고짜 아리의 망토부터 벗기고 웃옷을 벗기는데 아리, 고통스러워 한다.

가슴과 어깨 사이에 부러진 화살이 꽂힌 채 밤새 흘러내린 피에 웃옷이 흥건하게 젖어 있다.

공주, 눈물이 핑 돈다.


공주 : 바보같이. 이 몸을 해가지고 밤새 달려왔단 말이냐?


공주, 아리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어깨에 박혀 있는 화살을 빼낸다.

아리,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다.

공주, 망토의 안감을 찢어 상처부위를 싸맨다.

아리, 고통 가운데 공주의 손길을 느끼며 행복하다.


공주 : (아리의 상처를 치료하며 너무 속이 상해 울먹인다) 어쩌자고 혼자서 그 안으로 뛰어든 거냐? 죽으려고 작정을 했느냐?


아리, 자신의 앞에서 비지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상처를 돌보는 공주를 물끄러미 본다.

공주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이고 공주의 숨결이 느껴진다.

아리, 공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공주의 머리를 가슴에 안는다.

공주, 아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아리의 심장박동을 듣는다.


아리 : … 다시는 공주님을 혼자 두지 않을 겁니다.


공주,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공주, 아리, 공주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공주, 아리의 입에 뜨거운 입맞춤을 해준다. 긴 입맞춤.

두 사람, 서로를 눈 속에 담아두려는 듯 빤히 보는데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만치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유석과 신라 기마병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리, 공주를 뒤쪽으로 확 밀쳐버리고 저만치 떨어져 있는 칼을 달려가 집어 드는 순간

유석이 말 위에서 높이 쳐들고 오던 칼을 아리에게 휘두른다.


공주 : 안돼!!!!!


유석의 칼에 맞아 쓰러지는 아리, 비명을 지르는 공주와 눈이 마주치지만

아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공주, 너무 놀라 허겁지겁 아리에게 기어가 아리의 머리를 받쳐들고 덜덜 떨며 운다.


공주 : 안돼!! 안돼!!!


유석, 아리와 공주를 지나쳐 저만치까지 달려갔다가 말머리를 돌리고 아리를 붙들고 오열하는 공주를 본다.

아리, 공주를 잡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유석, 말 위에 앉은 채 다가와 울고 있는 공주와 쓰러진 아리를 내려다 본다.

아리,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석의 얼굴과 공주의 얼굴을 본다.


아리 : (들릴 듯 말듯하게) ….죄송합니다. (숨을 거둔다)

공주 : 으아아아!



#37. 산길


아리의 말에 탄 공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유석과 신라의 기마병들에게 둘러싸여 천천히 가고 있다.

공주, 앞에서 가고 있는 유석의 등을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따라가다가

갑자기 말고삐를 확 낚아채 방향을 바꿔 반대편으로 달려간다.

당황하는 유석과 신라병들, 공주를 뒤쫓아 달려간다.

공주, 필사적으로 말을 달리지만 길을 잘못 들어 절벽으로 향하고 절벽을 만난 말은 앞발을 높이 들고 그 자리에 서버린다.

달려오는 유석과 절별 아래를 번갈아보는 공주.

유석, 조금 떨어진 곳에 말을 세운다.

공주, 이미 마음을 정한 듯 유석을 빤히 보는데 공주의 목걸이에서 이상한 빛이 번뜩이더니

갑자기 마른 번개에 이어 일진광풍이 두 사람을 날려버릴 듯 휘몰아쳐 온다.


공주 : (눈물을 가득 담고) 내 죽어서도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리고 유석의 말이 놀라 앞발을 쳐드는 순간

공주, 말에서 몸을 날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유석, 미처 잡을 새도 없이 공주가 몸을 날리자 말에서 뛰어내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엄청난 구름의 소용돌이가 공주를 삼켜버린다.

유석,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38. 절벽 아래 (아리가 죽었던 바로 그 장소)


춘추, 하얀 캐쥬얼 차림에 강태공처럼 낚싯대를 드리우고 찌를 바라보고 있다.

춘추의 뒤로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춘추의 부하들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부하들 중 하나는 마치 경호원처럼 귀에 이어폰을 꽂고 마이크를 쥔 손등을 입에 대고 주변을 날카롭게 둘러보고 있다.

그 뒤로 텐트가 쳐져 있고 그 옆 피크닉 테이블의 파라솔 밑에서는 부하 한 명이 매운탕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강변.

이때 갑자기 폭풍 같은 바람이 춘추 일행을 날려버릴 듯 불어 닥친다.

춘추의 낚싯대가 홱 날아간다.

일동, 낚싯대를 따라 고개를 홱 돌리다가 번개가 번쩍하자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이번엔 춘추의 모자가 날아간다.

이어 파라솔이 날아가고 피크닉 테이블도 뒤집어져 구른다.

텐트도 날아가려 하자 요리하던 부하, 텐트를 잡고 버틴다.

부하들의 머리칼이 솟구치고 양복바지가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팔랑거리지만

춘추가 움직이지 않자 부하들도 그 자리에서 서로 눈짓만 주고 받는데

하늘에 엄청난 구름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사방이 깜깜해지면서

무시무시한 천둥이 울리고 엄청난 토네이도 같은 회오리가 다가오자

일동, 경악하더니 낚시 의자에 앉은 춘추를 의자째 들고 텐트 안으로 우 몰려 들어간다.



#39. 텐트 안


춘추, 텐트 중앙에 앉아 있고 부하들, 좁은 텐트 가장자리에 빙 둘러 앉아 텐트가 날아가지 않게 버티고 있다.

깜깜한 가운데 번개가 번쩍거릴 때마다 춘추와 부하들의 놀란 눈만 반짝거리고 천둥이 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데

어느 순간 텐트가 뒤집어져 구르기 시작한다.

일동, 비명.

텐트가 멈추는가 하면 다시 구르고, 또 구르고… 얼마나 굴렀을까?…

시간 경과

바람 소리가 멈추고 텐트 안이 환해진다.

춘추와 부하들, 텐트 안에 뒤엉켜 있다.


부하1 : 회장님! 어디 계십니까?


엉켜 있는 부하들 밑으로 춘추의 떨리는 손이 겨우 뻗어 나온다.



#40. 다시 텐트 밖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해진 강가.

뒤집어진 텐트의 지퍼가 조심스럽게 지익 열리더니 그 안에서 한명씩 밖을 살피며 나온다.

맨 마지막으로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며 나오는 춘추.


춘추 : (부하들을 쫙 노려보며 무섭고 낮게) 오늘 날씨 좋다고 누가 그랬어?


부하들, 사색이 되어 요리하던 부하를 돌아본다.


요리 : (식은 땀을 흘리며) 어제 여덟시 뉴스 일기예보에서…


춘추, 갑자기 뭔가를 찾더니 바닥에 뒹굴고 있는 냄비 뚜껑을 집어들어 요리하던 부하에게 달려간다.


춘추 : (때리며) 일기 예보 맞는 거 봤어? (때리고) 봤어? (때리고) 봤어?


이때 부하1이 공주를 발견한다.


부하1 : 회장님, 저기 좀 보십시오!!


춘추, 때리다가 고개를 든다.

부하들도 부하1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강가에 공주가 쓰러져 있다.

춘추, 냄비뚜껑을 든 채 예리하게 눈을 번득이며 공주쪽으로 다가간다.

부하들도 그의 뒤를 따르고.

춘추, 이상한 옷차림으로 엎어져 있는 공주를 눈으로 훑고 발로 살살 툭 차 본다. 움직이지 않는다.

일동, 긴장한다.


춘추 : 뒤집어 봐.


부하 한 명이 공주를 조심스럽게 뒤집는데

춘추, 눈부시게 아름다운 공주의 미모에 냄비 뚜껑을 떨어뜨린다.



#41. 호텔 복도


지방관광호텔의 복도. 춘추의 부하들, 경계를 서고 있다.



#42. 호텔 방


공주,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다.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소파에 깊숙이 앉아 공주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던 춘추,

못 참겠는지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가다가 공주를 다시 한 번 힐끗 본다. 아무리 봐도 공주의 차림새가 이상하다.

춘추, 공주의 머리와 머리 장식, 목걸이, 공주의 옷과 신발 등등을 구석구석 자세히 살펴보고

옷감도 슬며시 만져보고는 욕실로 들어간다.

욕실 문이 딸깍 닫히는 소리.

공주, 눈을 번쩍 뜬다.

공주,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핀다. 공주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진다.

공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붙어 선다. 그 바람에 공주의 등에 스위치가 눌려 방 안 불이 모조리 꺼진다.

공주, 어둠 속에서 공포에 휩싸이는데 욕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날카롭게 돌아본다.

잠시 후 욕실 문이 딸깍 열리고 춘추가 나온다.

공주, 더욱 벽에 바짝 붙어 서는데

춘추, 방 안 불이 꺼져 있고 욕실 불빛에 비친 침대 위에 공주가 없자 두리번거리다가

공주가 벽에 붙어 서서 자신을 보고 있자 흠칫 놀란다.


춘추 : (느물거리며) 깨어나셨군요.


공주, 춘추의 옷차림이 너무 이상하다.


공주 : (붙어선 채로) 여기는 어디냐?


춘추, 여자애가 다짜고짜 반말로 하대를 하자 기가 막히면서도 더욱 흥미를 느끼고 천천히 다가가면

공주, 천천히 물러나며 금방이라도 공격할 자세를 유지한다.


춘추 : 여기? 부여.

공주 : 넌 누구냐?

춘추 : (장난기가 발동하여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민다) 난 강남 종합 컨설팅 회사 김춘추야. 흔히들 밤의 황제라고 하지.

공주 : (살벌하게) 지금 김춘추라고 했느냐?

춘추 : (뭔가 이상하지만) … 그래. (다시 다가가려는데)

공주 : (버럭) 가까이 오지 마라!

춘추 : (흠칫 놀라 선다)

공주 : 네가 정녕 그 김춘추란 말이냐?

춘추 : 나, 알아?

공주 : 남부여의 원수! 죽어라!


공주, 다짜고짜 춘추를 공격한다.

춘추, 공주의 발길질에 벽으로 날아가 붙었다가, 주먹질에 다시 침대에 나가떨어지며 비명을 지른다.


소리 : 회장님!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부하들, 문을 부수려고 쿵쿵거리는 동안

춘추, 필사적으로 문 쪽으로 기어가 문으로 손을 뻗지만 팔이 안 닿는다.

순간 부하들, 문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춘추, 떨어진 문짝에 깔린다.


부하 : 회장님! 어디 계십니까?


공주, 들어오는 부하들을 날카롭게 돌아보더니

몸을 날려 한 순간에 부하들을 때려눕히고 포위망을 뚫고 밖으로 나간다.



#43. 관광호텔 입구 (초저녁)


호텔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온 공주,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빌딩들,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이상한 옷차림의 사람들,

지나는 사람들, 이상한 옷차림의 공주를 힐끗힐끗 보고

공주의 눈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방향감각을 잃고 찻길로 뛰어드는 공주, 클락션 소리, 고함소리가 어우러지고

공주, 무작정 이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달려간다.



#44. 지방도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초저녁, 한산한 국도를 달리는 인철의 차.

차창 밖으로 언뜻 언뜻 스치는 풍경이 심상치 않다.

인철, 운전을 하며 라디오 뉴스를 무심코 듣고 있다.


소리 : 오늘 낮 중부지방을 강타한 돌풍에 의한 피해규모가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조차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돌풍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충청남북도 지방 곳곳에서는

         화훼용 유리온실과 비닐하우스, 축사 등이 무너지고 군부대 막사의 지붕이 날아가는가 하면

         일부 도로에서는 산사태까지 일어나 한때 차량 운행이 통제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다만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관측된 이번 돌풍에 대해 기상청에서는

         학계와 공동조사단을 구성해 그 원인을 철저히 규명한다는 방침입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인철, 채널을 돌리면 음악이 흘러나온다.

인철, 무심코 창 밖을 내다보는데 차창 밖으로 뿌리 채 뽑힌 아름드리 나무가 보이더니

조금 지나 뒤집어진 자동차가 보이고 조금 더 가면

길 아래 지붕이 날아간 농가주택 안에 망연자실 앉아 있는 사람들이 뻥 뚫린 천장을 통해 들여다보인다.

인철, 눈이 점점 휘둥그레진다. 비로소 자신이 방금 무심코 들은 방송뉴스의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지붕이 날아간 집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차 앞에 흰 그림자가 확 뛰어든다.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는 인철.

인철, 핸들을 꽉 쥔 채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눈을 살며시 뜨는데

헤드라이트 불빛을 환하게 받고 선 이상한 옷차림의 여인, 넋 나간 얼굴로 잠시 인철을 빤히 보다가 차 앞에 푹 쓰러진다.

경악하는 인철의 얼굴.




























첨부파일 천년지애 0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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