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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지애] 09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3.03.13|조회수306 목록 댓글 0

[천년지애] 09











#1. 옷공장


8부 연결.

타쓰지, 들어서자마자 공주만 빤히 쳐다본다.

공주, 난데없는 타쓰지의 출현에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타쓰지의 시선을 피하고

인철, 그런 공주가 이상하다.


혁 : 안녕하세요?

타쓰지 : (공주에게 씩 웃으며) 잘 있었어요?

공주 : (머뭇하는데) ...

인철 : (공주가 대꾸할 새도 없이) 너, 왜 왔어?

혁 : 좀 앉으세요. (의자를 내밀어준다)

타쓰지 : 고맙습니다. (앉으며 인철에게) 사무실에서 전화 왔었냐?

인철 : 그래, 왔다.

타쓰지 : (공장 안을 둘러보며) 괜히 전화하란 거 같은데? 이 정돈지는 몰랐네?

인철 : 여기가 어때서?

혁 : 이 정도면 업계에서는 뒤쳐지지 않는 편인데요? 뭐, 차라도?

타쓰지 : 아, 됐습니다.

인철 : 내가 찾아간 거 때문에 부담 느꼈나 본데, 그럴 필요 없다. 가라.

혁 : (말리며) 야야. 여기까지 오셨는데 너, 왜 그래? (타쓰지에게) 우리 잘 해낼 자신 있습니다. 기회를 한 번 주세요.

인철 : (버럭) 야! 너, 왜 그래?

혁 : 넌 가만있어.

타쓰지 : (인철에게) 자신 없으면 안 해도 돼.

인철 : 누가 자신이 없대?

타쓰지 : 그럼, 한 번 해 보든가.

인철 : (말문이 막힌다)

타쓰지 : (공주에게 일어로) 보고 싶었어요.

공주 : (당황한다)


인철과 혁, 뭐야?


타쓰지 : (일어로) 아픈 건 다 나았어요?

공주 : (역시 일어로) 덕분에.

타쓰지 : (씩 웃으며 계속 일어로) 다행이네요. 또 보러 올께요.


인철과 혁, 일어로 대화를 나누는 공주를 보며 놀라 넋이 나간다.


타쓰지 : (일어나며 인철에게) 어차피 프레젠테이션이니까 하던 말던 니 맘대로 해. 나, 간다. (혁에게) 그럼, 또 봅시다.

혁 : (넋이 나가 있다가) 아, 예. 안녕히 가세요.


타쓰지, 홱 나가버린다.

공주, 나가는 타쓰지를 보고 있고

인철, 너무 궁금한 얼굴로 공주를 돌아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알지 못할 불안감이 서서히 밀려온다.



#2. 인철이네 집 욕실


인철, 얼굴에 비누거품을 잔뜩 묻히고 면도를 하다가 공주와 타쓰지가 주고 받던 일본말이 생각난다.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인철, 면도를 하다말고 문을 박차고 나간다.



#3. 인철이네 거실


공주, 여전히 책을 보고 있다.

인철, 공주의 손에서 책을 뽑아든다.


공주 : 무슨 짓이냐?

인철 : 너, 아까 걔랑 무슨 얘기했어?

공주 : ... 별 얘기 아니다.


인철, 갑자기 공주가 멀게 느껴지면서 마음이 아파진다.

공주, 인철의 손에서 책을 다시 빼앗아 펼친다.


인철 : 근데 너, 일본말은 언제 배웠냐?

공주 : (책을 보며 차갑게)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공주라고.


인철, 점점 모르겠다.



#4. 엄박사네 집 (밤)


엄박사, 순자, 자고 있는데 현관벨 소리가 들린다.


순자 : 누구야, 이 시간에? (엄을 발로 뻥 차며) 여보, 여보.

엄 : (놀라 깬다) 엉?

순자 : 좀 나가 봐.

엄 : (덜 깼다) 뭐야? 누가 왔어?


엄, 현관으로 가 문을 열면 인철, 서 있다.


인철 : 주무셨어요?

엄 : 아니, 지금이 몇 시야? 무슨 일이야?

인철 : 뭐 좀 여쭤보려구요.

엄 : 이 밤에 뭘?

인철 : 남부여 공주라면 일본말을 할 수 있나요?

엄 : (얼떨결에) 그렇다고 봐야지. 당시 왜하고 백제는 거의 한 나라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교류가 잦았으니까.

      근데 왜? 그거 물어 보려고 자는 사람 깨운 거야?

인철 : 아, 아니에요. 안녕히 주무세요. (나간다)


엄박사, 기가 막히다.



#5. 인철이네 거실 (밤)


인철, 잠이 안온다. 도무지 공주의 정체를 모르겠다.

처음 만나 인철을 보고 눈물을 흘리던 공주의 모습.

클럽에서 자신의 뺨을 갈기고 돌아서던 공주.

호텔에서 타쓰지에게 덤벼들며 절규하던 공주.

인철의 집에서 ‘나는 공주란 말이다’ 절규하던 공주.

옷공장에 찾아온 타쓰지와 일본말을 주고받던 공주,

인철, 공주의 말이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6. 옷공장


인철, 혁이와 나란히 앉아 재봉질을 하고 있다.


혁 : 야, 근데 패션쇼 정말 안 할 거냐? 생각해보면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야. 프레젠테이션이래잖아.

      우리가 거저 달라는 것도 아니고 실력으로 겨뤄서 정정당당하게 따면 되는 거 아냐?

      안되면 그때 가서 지방업소를 뚫어보든가.

인철 : ...

혁 : 그리고 공주를 위해서도 돈이 있어야 될 거 아냐? 열이 버느니 한 입 줄이랬다고 쟤 만만치 않게 먹어.

      요새 우리 점심식대, 장난 아니다?


인철, 대답 없이 만들고 있던 옷을 들어서 보는데 공주가 들어온다.


공주 : 휴지가 없더구나.


공주, 들고 온 찢어진 잡지책을 인철에게 홱 던지고 자기 자리에 앉아 다시 책을 읽는다.

인철, 아무렇지도 않은데 혁, 찢어진 잡지책을 들어 보며 경악한다.

인철, 다 만든 옷을 공주에게 홱 던진다.


인철 : (퉁명스럽게) 갈아입어.


시간경과

인철과 혁, 구석에 돌아서 있다.


공주 : 됐다.


인철과 혁, 돌아보는데 화려한 무대 반짝이 패션이다.

인철과 공주는 흡족해 하고 혁, 갸우뚱한다.


공주 : 어떠냐? 예쁘냐?

혁 : (인철에게) 좀 업소 스타일 아니냐?

인철 : (너무 예쁘다. 흡족해하며) 돌아봐.

공주 : (역시 좋아하며 치마를 살짝 들고 한 바퀴 돌아 보인다)

인철 : 역시, 내 감각은 죽지 않았어. 그 의상에 맞게 머리하고 신발도 좀 바꿔야 되겠다. 나가자.


혁, 우울하다.



#7. 미용실


공주와 인철, 안으로 들어온다.

공주, 머리에 뭔가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자들을 보며 신기해한다.


공주 : 여긴 또 어디냐?

미용 : (인철에게)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인철 : 아니, 내가 아니라,

미용 : 같이 오신 분은 저쪽에 앉아 계시구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인철 : 아니요, 저기.


미용, 인철을 잡아끌고 가 의자에 앉히고 인철이 반항할 새도 없이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스프레이를 뿌리기 시작한다.


인철 : 내가 아니라니까요!

미용 : (들은 척도 않고 가위를 꺼내들고) 어떻게 해드릴까?


공주, 가위를 보고 깜짝 놀라 다가와 가위를 든 미용의 손을 잡는다.


공주 : 무슨 짓이냐?

미용 : 네?

인철 : (당황) 야! 조용히 하고 가 있어. (미용에게) 이쁘게 짤라 주세요. (공주에게) 가 있어. 괜찮다니까!


공주, 날카롭게 미용을 노려보며 자리로 가 앉는다.

미용, 공주의 눈치를 보며 인철의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다.



#8. 싸구려 신발가게


신발을 골라주는 인철.

공주, 마냥 즐겁다.



#9. 리어카 악세사리 점


인철, 악세사리를 골라 공주에게 이것저것 대본다.

공주, 행복해 미치겠다.



#10. 서점 앞


공주, 인철을 꼭 잡고 인철이 사준 신발을 내려다보며 걷다가 인철이 서자 선다. 올려다보면 서점이다.

인철, 안으로 슥 들어간다.



#11. 서점 안


인철, 한국사 관련 코너에서 책을 고른다.

인철의 눈에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가 보인다.

인철, 시리즈 중의 한 권(3권)을 뽑아 펼쳐보다가 가격을 보고 깜짝 놀라 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본다.

인철, 문득 공주가 어디 갔지? 찾는데

공주, 구석에서 인철이 사 준 신발만 내려다보며 맴을 돌고 있다.

인철, 그런 공주를 보고 빙그레 웃는다.



#12. 중국집


인철과 공주, 자장면을 먹고 있다.

공주, 산뜻해진 인철의 머리를 보며 괜히 좋아한다.


공주 : 머리를 그렇게 하니까 훨씬 잘 생겼구나.

인철 : 아, 너 때문에 얼떨결에 짤랐잖아. 난 그 머리가 맘에 드는데, 에이... (먹는데)

공주 : 아니다. 정말 보기 좋다.

인철 : 그래? 정말 괜찮아?


인철, 머리를 슥 넘기고 신나서 자장면을 막 먹는데

공주, 손을 뻗어 인철의 앞머리를 슬쩍 올려본다.


인철 : (흠칫 놀라 몸을 뒤로 피하며 작게) 왜 이래?

공주 : 더 아리다와졌다.


공주, 빙그레 웃으며 잠시 보다가 자장면을 먹는데

인철, 얼굴이 굳는다.



#13. 인철이네 집 (밤)


인철, 침대에 엎드려 책을 보고 있다. 첫 장을 넘기는데 하품이 나온다.


인철 : 어떻게 나는 책만 펴면 졸리냐?


인철,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가다가 공주방에 문이 조금 열려 있고 스탠드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자 안을 슥 들여다본다.

공주, 여전히 인철이 만들어준 옷을 입고 보름달이 훤하게 뜬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인철 : 뭐하냐? 안 자고.

공주 : ... 내가 이 곳에 온지도 벌써 한 달이 되어가는구나. 처음 이 집에 온 날도

         저렇게 창 밖에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는데....

인철 : 우리 집에서 달이 보이냐?


인철, 방으로 들어와 공주 옆에 나란히 앉는다.


인철 : 어? 진짜 보이네? 달 본지 오래됐다.

공주 : 그런데 이곳에선 별을 볼 수가 없더구나. 그 많던 별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

인철 : 서울이라 그래. 시골에 가면 잘 보여. 언제 한 번 별 보러 갈까?

공주 : (인철을 돌아본다. 혹시나) 언제 갈 수 있느냐?

인철 : 시간 되면.

공주 : ... (역시나. 다시 고개를 돌려버린다)

인철 : (변명하듯) 지금 보름이라 시골 가도 별 안 보여. 나중에 달 없을 때 가자. 그래야 별이 많이 보이지.

공주 : ... 혹시, 천기를 읽을 줄 아느냐?

인철 : 천기가 뭔데?

공주 : ... 천기는 하늘의 기이고 하늘의 기와 땅의 기는 서로 통하는 법이니, 달과 세성, 그리고 하늘의 이십팔수에 속해 있는

         일천 일백 예순 여섯 개의 별들과 객성, 혜성, 유성의 움직임까지 일일이 관찰한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도 있고 눈앞에 닥친 환란을 벗어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인철 : (놀란 눈으로 보며) 누가?


공주, 순간 아리의 얼굴이 스치자 눈물이 핑 돈다.

공주, 인철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물이 주르륵 흐르자 외면한다.


공주 : ... 나의 아리가 가르쳐주었다.

인철 : ... 아리가 도대체 누구냐?

공주 : ... 나를 사랑한 사람이고 내가 사랑한 사람이다. ... 영원히 나를 지켜주겠노라고 약속해놓고

         내 눈앞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린 사람이다.


공주, 아리에 대한 그리움으로 오열이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자 손으로 입을 꾹 눌러 막으며 참으려 애써보지만 소용이 없다.

인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휴지를 찾는데 휴지가 없자 자기소매 끝으로 닦아주며 공주를 안아 토닥여준다.

공주, 인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인철을 바라본다.

인철, 눈물에 젖은 공주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인철, 공주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다가

빨려들 듯이 자기도 모르게 공주의 얼굴로 다가간다.

공주의 눈에 인철은 이미 아리다.


공주 : (자기도 모르게) 아리.


인철,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공주를 뿌리치고 일어난다.

공주도 순간 정신을 차리고 민망해진다.


인철 : 잘 자라.


인철, 밖으로 나가다가 선다. 긴 침묵.


인철 : (돌아선 채) 난 아리가 아냐. 난, 강인철이야. (나간다)


공주, 나가는 인철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공주의 얼굴 위로 독백이 흐른다.


공주 : 그가 아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난 애써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그가 아리이기를 바라면서...

         그가 아리를 대신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아리가 아니라는 그의 한 마디에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아리만을 사랑하고 있고, 그는 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 그런데... 왜 나의 마음이 이렇게 허전할까...

         그에게 느끼는 이런 감정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14. 호텔 - 타쓰지 욕실 (밤)


타쓰지, 욕조 속에 들어 앉아 와인을 마시며 창 밖을 보고 있다.

미인도를 처음 발견하던 순간, 한국에 돌아가라는 지에꼬의 명령,

유리에 갇힌 공주의 홍보차, 호텔로비에서 마주친 공주, 등등 운명처럼 느껴지는 기억들이 떠오르다가

일어를 하던 모습, 김유석을 아느냐고 묻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집사,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들고 들어와 가지런히 올려놓고 돌아선다.


타쓰지 : 김유석이라는 이름 들어봤어?

집사 : (돌아보며) 누구요? 김유석이요?

타쓰지 : 내가 김유석이라는 사람 후손이라는데.

집사 : 김유석이라면 한국 이름 아닙니까?

타쓰지 : 그래.

집사 :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비웃는다. 일어로) 선조가 누군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후지와라 가문은 일본 제일의 가문입니다.

         한국 사람이 선조일 리가 없지요.

타쓰지 : (역시 일어로) 그렇겠지?

집사 : 도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는 겁니까?

타쓰지 : (생각에 잠긴다)

집사 : 더 물어보실 말씀 없으면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나가려는데)

타쓰지 : 부탁이 있어.

집사 : ....

타쓰지 : 미인도를 다시 찾아 줘.

집사 : 안 된다는 건 도련님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타쓰지 : 그러니까 부탁하잖아.


타쓰지, 욕조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며 밖으로 나가고

집사, 난감한 얼굴로 나가는 타쓰지를 본다.



#15. 강남컨설팅 (밤)


준하, 전화를 받고 있고 춘추, 공주를 보며 계속 생각을 하고 있다.


준하 : (계속 놀란다) 어디? ... 거긴 왜? ... 뭐라구? ... 여보세요. 여보세요. ... 어! ... 응? ... 그래서?

         ... 그 자식들을 그냥 뒀어? .... 뭐라구? 이 바보같은 놈들! 여보세요! 여보세요! ... 여보세요! 여보세요! (끊는다)

춘추 : (계속 공주를 보며) 왜? 끊겼어?

준하 : 예, 회장님.

춘추 : 뭐래? 도착했대?

준하 : (잠시 어떻게 얘길해야 되나 생각하다가) ... 지금 블라디보스톡이랍니다.

춘추 : (이해가 안 된다) 뭐?

준하 : 원양어선이 태풍 때문에 항로를 변경했답니다.

춘추 : 뭐?

준하 : 지금 어부들 숙소에 갇혀 있답니다.

춘추 : 뭐?

준하 : 일본으로 데려다 달라고 선장한테 개기다가 냉동실에 갇혀서 죽을 뻔했답니다.

춘추 : ...(긴 한숨)


춘추, 절망스런 얼굴로 남아있는 부하들을 둘러보더니 다시 공주를 본다.


춘추 : 정부장.

준하 : 예, 회장님.

춘추 : 뭔가 좀 허전한 거 같지 않아?

준하 : 뭐가요?

춘추 : 공주 말이야. 내가 처음 봤을 때 뭔가 있었는데....그게 뭐지? ...그게 뭘까?


춘추, 막 생각을 한다.

준하와 부하들도 같이 생각을 한다.


춘추 : 내가 강에서 발견해서 차에 싣고 호텔침대에 눕히고 뜸북뜸북뜸북새 논에서 울고를 불렀는데....


이때 춘추의 머리에 누워 있는 공주의 목에서 목걸이를 만지던 순간이 퍼뜩 떠오른다.

춘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16. 인철이네 집


인철, 방에서 나와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공주가 안에서 나온다.

두 사람, 괜히 어색하다.


인철 : (부러 퉁명스럽게) 잘 잤냐?

공주 : ... 오냐.


두 사람, 서먹서먹하게 몸을 피해 나오고 들어간다.

시간경과

작은 상 위에 반찬도 없이 김치 하나만 놓고 냄비 채 라면을 먹는 두 사람.

상 옆에 인철의 통장, 장부, 계산기가 놓여 있다.

국물을 흘릴까봐 머리를 냄비에 들이대는 두 사람, 그때마다 머리를 박을 뻔 한다.

인철, 라면을 먹는 틈틈이 통장을 들여다본다.


인철 : 어떻게 사나이 강인철, 스물일곱해동안 모은 돈이 팔만원 밖에 안되냐? 어흐... 이번 달 임대료는 어떡하지?

         춘추 그 자식 때문에 완전히 거덜났네? 애들 외상 깔린 것도 받으러 가야 되는데... (통장을 확 던져버리고 라면을 먹는다)

         아, 이것들이 내가 장사 안 한다 그러면 떼어 먹을라 그러겠지? 아, 증말!

         (장부를 들여다보며 공주에게) 내가 오늘 여기저기 좀 돌아다녀야 될 거 같으니까 숙희네 가 있어.

공주 : ...

인철 : 무슨 일 있으면 숙희한테 전화해 달라 그러고.

공주 : ...

인철 : 집 열쇠 주고 갈 테니까 박사님한테 손님 오면 방해하지 말고 집에 와 있구.

공주 : ...

인철 : 이젠 혼자 있을 수 있지?

공주 : ... 내가 너한테 언제나 짐이 되는구나.

인철 : (먹으며) 그걸 인제 알았냐?

공주 : 미안하다.

인철 : (본다. 왠지 이상하다) 왜 그래? 새삼스럽게.

공주 : ... 밥값이라도 보태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인철 : 니가 무슨 수로 밥값을 해? 넌 사고나 치지 말고 국으로 가만있어. 그게 도와주는 거야.

공주 : 어제 밤에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너한테 신세를 지고 있더구나.

인철 : ...

공주 : 그동안 나의 무례를 용서하기 바란다.

인철 : ... 하, 차. (얘가 왜 이러지? 점점 불안해진다)

공주 : 그리고 지금 당장은 갈 데가 없지만 어디라도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이 생기면 떠나겠다.

인철 : ...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공주 : 날 데려온 것이 후회되고 귀찮더라도 그때까지만 참아다오.

         내가 널 아리로 착각하고 귀찮게 한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공주, 말을 마치고 묵묵히 다시 라면을 먹는다.

인철, 이게 아닌데...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다.



#17. 거리 - 인철의 차


인철, 운전을 하며 공주가 한 말들을 생각한다. 너무너무 불안하고 심란하다.



#18. 마케팅 사무실


이대리, 은비에게 사진을 내민다.


이대리 : 이 여자 어때?


은비, 별 관심 없이 힐끗 돌아본다.


이대리 :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데 실장님은 별론가 보더라구. 고은비씬 어때?


은비, 눈이 커지더니 확 빼앗아 들여다본다. 그 여자다.

은비, 안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타쓰지를 슥 돌아본다.


이대리 : 괜찮지? 괜찮지 않아? 막 찍었는데도 이 정도면 제대로 된 데서 찍으면 물건 하나 나올 거 같애. 어때? 안 그래?

은비 : 이 아가씨, 연락처 있어요?


타쓰지, 안에서 은비를 돌아본다.



#19. 스튜디오


공주, 숙희와 숙희 친구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다.

공주, 인철이 만들어준 옷을 입고 있다.


친구1 : (숙희에게) 야, 옷 좀 딴 거 입혀갖고 데려오지. 저게 뭐야?

숙희 : 죽어도 안 벗어. 우리 엄마랑 나랑 벗기다가 죽을 뻔 했어.

친구2 : 그래도 좀 그렇다. 카메라 테스트라는데.

공주 : 그런데 이게 정말 밥값을 할 수 있는 일이냐?

숙희 : 그렇다니까. 넌 그냥 잠자코 우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절대로 말하지 말고. 얼굴만 들이밀면 되는 거야.

         그러면 돈을 준단 말이야.

공주 : 알았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

친구1 : 어쨌든 얘 덕분에 이런 데도 와본다, 야.

친구2 : 그러게. 길거리 캐스팅이라고 말로만 들었지, 이런 건 처음이다, 얘.

숙희 : 우리, 어차피 대학 가긴 튼 거 같은데 이 참에 얘, 매니저나 할까?

친구1 : 안돼. 나는 대학 가야 돼. 우리 엄마아빠 소원이 집안에 대학 나온 사람 하나 있는 거야.

친구2 : 반에서 꼴찌하는 애가 어떻게 대학을 가?

숙희 : 꼴찌에서 두 번째는 말할 자격 없어.

친구1 : 차! 세 번째는 뭐, 좀 낫냐?

숙희 : 우리 셋만 있으면 내가 일등이야!

친구2 : 잘났어, 그래.

친구1 : 어쨌든 난 대학 갈 거야.

공주 : 그런데 그 돈이라는 게 얼마나 있어야 밥값이 되느냐?

숙희 : 쉿! 너, 말하지 말라 그랬지? 넌 입만 다물면 돈방석이라니까.

친구1 : 그래도 언젠간 뽀록나지 않을까? 인터뷰도 해야 되고 영화랑 드라마 섭외도 들어올 텐데.

숙희 :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공주에게) 너, 조심해야 돼.

공주 : (진지하게) 알았다. 그런데 정말 얼굴만 들이밀면 밥값을 준단 말이냐? 정말 여기는 신기한 세상이로구나.


숙희일행, 짜증난다.

이때 사진, 들어온다.


사진 : 오래 기다렸어?

숙희네 : 안녕하세요?

사진 : (공주에게) 오늘은 더 예쁘네? 자, 시작해볼까?

숙희네 : (합창으로) 네!


공주, 숙희의 눈치를 보면 숙희와 친구들, 공주의 등을 떠밀어 카메라 앞에 세운다.

조명이 환하게 들어오면 공주, 눈을 찌푸리며 숙희를 돌아본다.

숙희와 친구들, 손가락으로 계속 입만 가려보인다.

공주도 손가락으로 자기 입을 가린다.


사진 : 좀 웃어봐.

숙희 : 웃어! 웃어!


공주, 숙희의 말에 어색하게 씩 웃는다.

은비, 조명 밖 어둠 속에 서 있다가 환한 곳으로 나온다.

공주, 은비를 보고 어디서 봤지? 하는데.


은비 : (사진에게) 잘 돼 가세요?

사진 : 아, 오셨어요?

소리 : 전화 받으세요.

사진 : (은비에게) 모델하고 잠깐 얘기 나누고 계세요. (간다)


은비, 공주 앞으로 다가오며 찬찬히 훑어본다.


은비 : 이름이 뭐예요?

공주 : (금화까지?) ...

숙희 : (깜짝 놀라 튀어나온다)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얘, 매니저거든요? 이름은, (공주를 한 번 돌아보고) 공주예요.

은비 : 공주?

숙희 : 예명이에요.

은비 : (피식 웃는데)

공주 : (은비의 눈빛을 맞받으며 계속 보다가 혼잣말처럼)... 어떻게 이런 일이...

은비 : 네?


숙희 일행, 등골이 서늘해진다.


숙희 : (떨리는 목소리로) 공주야.

공주 : 아닙니다. 전에 본 듯한 얼굴이라...

은비 : 기억하시네요? 우리 만난 적 있죠?

숙희 : ?

공주 : (깜짝 놀라) ... 너도 날 기억한단 말이냐?

은비 : (공주의 말투가 기가 막히지만) 하, 차! 물론.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공주 : 나에 대해서 무엇을 기억하느냐?

숙희 : 야, 가자! (공주의 손을 잡아끄는데)

공주 : (숙희의 손을 탁 뿌리치고 은비를 빤히 본다) 그렇다면 너도 나처럼 남부여에서 왔느냐?

은비 : (문득 타쓰지가 남부여에 대해 묻던 기억이 떠오른다) 남부여? 너도 남부여야?

공주 : (더 이상 뵈는 게 없다) 그렇다면 네 년이 정녕 금화란 말이냐?

은비 : 뭐?

숙희 : 공주야! (공주의 손을 다시 잡는다)

공주 : (숙희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내, 네년을 죽여 남부여의 원한을 갚으리라!


공주, 은비에게 다가가면 은비, 무서워 뒷걸음질친다.


은비 : 어머! 쟤, 왜 저래? 어머! 어머! 엄마---!

타쓰지 : (들어서다가) 고은비씨!

은비 : 실장님!!!


공주,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르는데 은비, 기겁을 하고 도망가다가 마침 나타난 타쓰지 뒤에 숨는다.

타쓰지, 은비 대신 공주의 발길질에 맞아 은비와 함께 나동그라진다.

공주, 순간 당황한다.

사진, 달려 나오고 꼴찌 세자매, 문책을 당할까봐 살며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빠져나간다.



#20. 스튜디오 앞 (밤)


타쓰지, 차 조수석에 공주를 앉히고 문을 닫는다.

은비, 이상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본다.


타쓰지 : (차에 타려다가 돌아서며 은비에게) 고은비씨, 일부러 그런 거야?

은비 : 뭐가요?

타쓰지 : 나에 대해서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나? 그렇게 궁금하면 나한테 직접 물어봐. 이런 식으로 돌려서 알아볼 생각하지 말고.


타쓰지, 차에 타고 떠난다.

은비, 기분 더럽다.



#21. 거리 (밤)


달리는 타쓰지의 차 안.

타쓰지, 화난 얼굴로 운전을 하고 있고 공주, 우울한 얼굴로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타쓰지 : (무섭게) 다시는 이런 짓 하지마!


공주, 깜짝 놀라 돌아본다.



#22. 클럽 안 (밤)


인철, 기도들의 눈치를 보며 얼굴을 가리고 안으로 들어와

기도와 웨이터들의 눈을 피해 대기실 쪽으로 샤샤샥 간다.



#22-1. 대기실 (밤)


인철, 문을 빼꼼 열고 안을 살핀다. 춘추네가 없자 얼른 들어온다.


인철 : 언니들, 안녕.

무용들 : 어머, 이게 누구야? 오빠 아니야? 어떻게 들어왔어?

인철 : 잘들 있었어?

무용1 : 우리야 늘 그렇지, 뭐.

무용2 : 오빠 요새 뭐해?

인철 : 오빠야 늘 바쁘지.

무용1 : 근데 여긴 웬일이야?

인철 : (씩씩하고 애교 있게) 외상값 받으러 왔지.


인철, 장부를 펴드는데 무용들, 갑자기 바쁜 척한다.

인철, 이것들이? 하는 얼굴로 노려보는데.


무용2 : 좀 일찍 오지. 일수 아줌마 벌써 돌았잖아.

인철 : 야, 야. 얼마나 된다 그래? 애리, 너 칠만원. 그리고 수, 너는 오만원. 나타샤, 너는 좀 많다. 십일만원.

무용1 : 오빠. 우리 요새 공주 땜에 장사 안돼 가지고 출연료도 제대로 못받고 있어. 다음에 와,

인철 : 야, 니들 나 장사 그만 뒀다고 떼어 먹을라 그러는 거지?


이때 누군가 인철의 뒤통수를 뻑 갈긴다.


준하 : 뭘 떼어 먹어, 자식아!


돌아보면 준하가 서 있다.

인철, 얼굴 하얘진다.



#23. 강남컨설팅 사무실 (밤)


춘추,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슬픈 노래를 감정 잡고 열창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준하가 인철을 안으로 확 밀어넣는다.

인철, 안으로 고꾸라질 듯 들어오다 마이크 줄을 밟아 뽑아버린다.

춘추, 열받는데 인철은 마네킹을 보고 깜짝 놀란다. 엽기다.


춘추 : 얘, 뭐야?

인철 : 안녕하세요?

준하 : 요 앞에서 얼쩡거리길래 잡아왔습니다.

춘추 : 너, 내가 이 근처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라 그랬지.

인철 : 그게 아니라요, 외상값만 받고 바로 갈라 그랬는데요.

춘추 : 그래서 받았어?

인철 : 아뇨.

춘추 : 가 봐.

인철 :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춘추 : 잠깐.

인철 : 예?

춘추 : 그 건방진 놈 있지?

인철 : 예.

춘추 : 그 놈은 공주한테 왜 그러는 거냐?

인철 : 예?

춘추 : 너나 나는 이유가 있다고 쳐. 그 놈은 느닷없이 나타나서 왜 그러는 거야? 그것도 일본놈이.

인철 : 저도 걔랑 안 친해서 잘 모르겠는데요?

춘추 : 그놈이 공주, 일본으로 빼돌린 거 알아?

인철 : (깜짝) 예?

춘추 : 모르고 있었구나. 순진한 놈.

인철 : ...

춘추 : 혹시 그 놈 만나거든 내가 벼르고 있다고 전해라. 블라디보스톡에서 애들만 돌아오면 그 놈은 죽은 목숨이라고. 알았어?

인철 : 예.

춘추 : 가 봐.

인철 :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춘추 : 잠깐!

인철 : (죽을 맛이다)


춘추, 갑자기 공주의 마네킹 앞으로 간다.


춘추 : 공주 목걸이, 니가 갖고 있지?

인철 : (당황한다) 예? ... 목걸이라뇨.

춘추 : (갑자기 화를 내며) 여기 이렇게 길게 걸려 있던 목걸이 말이야!!!

인철 : 저..전..못봤는데요....


인철, 자기도 모르게 안주머니에 손에 간다.


춘추 : 너 그 안에 뭐야?

인철 : 예? 아무 것도 아닌데요.


춘추, 날카롭게 인철의 안주머니를 노려보며 인철에게 다가가는데 전화벨.


준하 : 여보세요. 뭐? (급히 끊고) 회장님, 땅꼬마 애들이 쳐들어왔답니다.

춘추 : 걔들이 왜?

준하 : 공주 때문에 우리가 몇 번 이유없이 치지 않았습니까?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 같습니다.

춘추 : 애들도 없는데 치사하게! 땅꼬마, 이 속 좁은 놈. 너 오늘 죽었어!


춘추, 눈이 홱 뒤집혀 나가고 준하, 급히 따라 나간다.

인철, 안도한다.



#24. 아파트 앞 (밤)


타쓰지의 차가 선다.


공주 : 고맙다. (내리려는데)


타쓰지, 공주의 손목을 잡는다.

공주, 놀라 본다.


타쓰지 : 나하고 같이 가자.


공주, 말없이 타쓰지의 손을 탁 뿌리치고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타쓰지, 차 안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차를 몰아 떠난다.

집으로 돌아오던 인철, 그 광경을 기가 찬 얼굴로 보고 있다.

인철, 공주가 타쓰지의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질투와 함께 알 수 없는 서글픔이 치밀어 오른다.



#24-1. 아파트 복도 (밤)


인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따라 걸어온다.

공주,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다.


인철 : (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열쇠를 꺼내며) 여기서 뭐하냐?

공주 : (흠칫 놀라 고개를 든다)

인철 : 숙희는 어디 갔어?

공주 : ...

인철 :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공주 : ...


인철, 공주가 대답을 못하자 문을 거칠게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공주, 잠깐 머뭇하다가 따라 들어간다.



#25. 인철이네 거실 (밤)


인철, 웃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냉장고를 거칠게 열어 들여다본다.


인철 : 아, 배고파. 밥 먹었냐?

공주 : 안 먹었다.

인철 : (가시 돋친 말투로) 어딜 싸돌아다니느라 밥도 못 먹고 다녀?


인철, 수건을 하나 집어 들고 욕실로 거칠게 들어가 문을 꽝 닫는다.

공주, 인철의 행동이 불안하다.



#26. 욕실 (밤)


인철, 거울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주먹으로 꽝 내리친다.

인철, 문 밖을 돌아보더니 못 참겠는지 다시 나간다.



#26-1. 인철이네 공주방 (밤)


공주, 옷을 갈이 입고 있는데 인철이 불쑥 들어오자 깜짝 놀란다.


인철 : (공주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너, 왜 대답 안 해?

공주 : 옷을 갈아입고 있지 않느냐? 나가 있어라.

인철 : 어디 갔다 왔냐는데 왜 대답 안하냐구?

공주 : ... (퉁명스러운 인철의 태도에 화가 난다) 니가 무슨 상관이냐?

인철 : 허! 가 있을 데 찾았나 보지? 찾았으면 빨리 가.

공주 : ... 뭣 때문에 이러느냐? 내가 뭘 잘못했느냐?

인철 : 너, 잘못한 거 없어.


인철, 문을 꽝 닫고 나가버린다.

공주, 갑작스럽게 돌변한 인철의 태도가 이해가 안된다.

밖에서 인철의 목소리가 들린다.


인철 : (소리) 어, 타쓰지냐?

공주 : (흠칫)

인철 : 나야. 인철이. ... 그거 패션쇼. 생각해봤는데, 하지, 뭐. ... 나 같은 게 자존심 세워봤자지, 안 그래?

         ... 실력도 없는데 연줄로라도 개겨봐야 되지 않겠냐?


공주, 불안한 얼굴로 인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26-2. 거리 (밤)


달리는 타쓰지의 차 안.


타쓰지 : (화를 꾹 눌러 참으며) 잘 생각했다.

인철 : 언제 가면 되냐?

타쓰지 : 내일 열시까지 와.

인철 : 알았다. 고맙다, 친구야. (끊는다)

타쓰지 : (일본말로) 쓰레기 같은 자식.



#27. 스카이 건물 앞


인철의 차가 서고 인철과 혁, 폼잡고 내려 선그라스를 벗고 까마득한 빌딩을 예리하게 올려다본다. 눈이 부시다.



#28. 스카이 복도


인철과 혁, 역시 폼잡고, 씩씩하게 복도를 걸어오다가 사람들이 많이 서 있자 긴장한다.

다양한 회사에서 온 디자이너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의상과 헤어스타일, 악세사리가 장난이 아니다.

그 중 인철과 혁이 제일 초라해 보인다.


혁 : (잔뜩 쫄아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장난 아닌데?... (누군가를 가리키며) 야, 야, 저 사람은 앙드레 장...아니냐?


인철, 긴장한 눈빛으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는데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이대리가 나온다.


이대리 : 이 쪽으로 들어오세요. (인철에게 반갑게) 어머, 오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혁을 보고 이 남자는 또 누구지?) 안녕하세요? (인철에게) 이 분은 누구세요?

혁 : 안녕하세요. 디자이너, 이 혁이라고 합니다.

이대리 : 어머, 이 분도 디자이너시구나. 반갑습니다. 들어오세요.


인철, 혁, 그 외 디자이너들, 이대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29. 회의실


인철과, 혁,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다가 테이블 중앙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은비와 눈이 마주친다.


인철 : (큰 소리로) 고은비씨! 안녕!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네? 나도 바꿨는데.


사람들, 놀라 인철을 보고 은비, 당황하여 외면한다.


혁 : (은비를 보며) 저 여자가 고은비야?

인철 : 응.

혁 : 건방져 보이긴 하는데 귀엽다.

인철 : 귀엽기는? 싸가지야.


혁, 은비를 은근히 아래위로 훑어본다.

은비, 인철의 아는 척과 혁의 시선이 불쾌하여 되도록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으려 애쓰며 마이크를 잡는다.


은비 : (건방, 잘난척) 안녕하세요, 마케팅실 고은빕니다. 이번 프레젠테이션에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먼저 이벤트의 목적과 진행 방법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이번 프레젠테이션에는 모두 일곱 개 업체가 참가해 주셨는데요, 최종적으로 한 개 업체만 선발하게 됩니다.

         앞에 있는 자료를 봐 주세요.


이때 타쓰지, 들어와 구석에 선다.

은비, 순간적으로 타쓰지를 힐끗 보고

인철, 타쓰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다.


은비 : 이번 행사의 컨셉은 환타집니다.



#30. 회의실 앞


이대리, 문을 열고 나오면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 우르르 나온다.

은비, 이대리, 입구에 서서 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이대리 : (혁을 붙잡고) 잘 부탁드립니다.

혁 : 기획의도가 참 좋으네요. 패션과 첨단기술의 만남.

이대리 : 그렇죠? 어떻게 보면 언바란스한 것 같으면서도 포스트 모던한 하모니가 느껴지지 않으세요?

혁 : 예? 예...

이대리 : 특히 컨셉이 맘에 들지 않으세요. 제가 좋아하는 단어예요, 환타지.

혁 : 아, 네.


은비, 사람들을 배웅하다가 인철을 보자 얼른 다른 사람한테 다가가 인사를 하며 인철을 피해버린다.

인철, 피식 비웃다가 마침 밖으로 나오던 타쓰지와 마주친다.

혁, 이대리에게 계속 잡혀 있다.


타쓰지 : (티껍게) 열심히 해봐라.

인철 : (티껍게) 그래.

타쓰지 : (지나가는 말처럼) 여자 등쳐먹지 말고.

인철 : 뭐, 임마?

타쓰지 : 그런 의미에서 기횔 주는 거니까 잘하라구.

인철 : 너, 말 다했어?

타쓰지 :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회사라 좀 그렇다. 다음에 보자. (돌아서는데)


인철, 타쓰지의 어깨를 확 잡아 돌려세우며 턱을 날려버린다.

타쓰지, 우당탕 나가떨어지고 사람들, 비명을 지르며 타쓰지에게 달려와 부축하고

혁은 깜짝 놀라 인철을 붙든다.


소리 : 어머! 실장님! 어떡해!

혁 : 얌마! 너, 왜 이래?

인철 : (나지막하게, 슬프게 분노에 찬 목소리로) 여자를 뭐 어떡해? 걔가 그러디? 니네들이 그렇게 입을 맞췄냐?

         ... 데려가. 안 말려.


인철, 확 돌아서 간다.

혁, 좌중에게 인사하고 쫓아가고

타쓰지, 입가에 흐른 피를 닦으며 인철을 노려보다가 홱 돌아서 간다.

은비, 중간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가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본다.



#31. 은비네 집 (밤)


채여사, 전화를 하고 있다.


채 : 딱딱 맞아. 딱, 딱! 내가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나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거 그냥 다 맞추는 거 있지.

      ... 그런 건 얘기 안 해주지. 가정파탄 낼 일 있어? 그런 건 그냥 막연하게 얘기해 주는데

      그래도 답답한 속이 어느 정도 풀리더라구. 아무튼 언제 한 번 같이 가봐. 사람도 너무 젠틀하고 핸썸해. ... 그러게 말이야.

      나도 점집이라 그래서 무슨 박수무당 그런 건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학자야, 학자. 공부도 무지무지하게 많이 한 거 같애.

      하여튼 간에 얼마나 점잖고 매너가 있는지, 그리고 너무너무 잘 생겼어. 그래, 그렇다니까. ... 그래...


순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며 채여사의 전화통화를 귀담아듣다가 기가 막히다.


순자 : 젠틀? 핸섬? 매너? 잘 생겨? 그래, 내가 잘 생긴 거 하나 보고 넘어갔다. 으이구! 내 팔자야!


순자, 그릇들이 부셔져라 거칠게 닦는데

이때 은비가 요란하게 문을 닫고 들어와 부엌으로 온다.


은비 : 아줌마! 나, 밥!

채 : (전화 끊고 부엌으로 오며) 얘, 얘. 너, 그 실장 생년월일 좀 알아와라.

은비 : 생년월일은 왜?

채 : 궁합 좀 보게.

은비 : 됐어.

채 : 되긴 뭐가 돼?

순자 : (밥을 차리며 고소해한다) 뭐가 잘 안되나 보네.

채 : (째려본다)

은비 : 아줌마. 아줌마네 옆집 사는 걔 있잖아,

순자 : 인철이? 인철이는 왜?

은비 : 뭐하는 집안 아들이에요?

채 : 인철인 또 누구야?

순자 : 혼자 살아. 부모님은 다 돌아가셨대지, 아마?

은비 : 거지같은 자식. 차! 어디서 아는 척이야. 어으 쪽팔려.

순자 :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걔, 괜찮은 애야.

은비 :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걔, 대학도 안 나왔죠?

순자 : 대학 나온 거 하고 괜찮은 거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 집에도 대학 나온 사람 은비 밖에 더 있어?

채 : (흘긴다)

순자 : (반찬 그릇들을 요란하게 내려놓으며) 겉멋이 들어서 그렇지. 속은 꽉 찬 애야. 요즘 젊은 애들 그런 애들 없어.

         착하지. 지 밥벌이 지가 하지. 그럼 됐지, 뭐. (약올리려고) 같이 데리고 사는 색시도 얼마나 이쁜데.

은비 : (깜짝 놀라) 마누라가 있어요? 어머, 세상에. 유부남 주제에. 어머, 기가 막혀. 어머! 어머! 어머! 아아악!

순, 채 : ???



#32. 인철이네 집 (밤)


캄캄한 어둠 속에 두 사람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아주 조심스럽게, 비뚤어진 액자도 바로 해놓고, 어질러진 옷가지도 정리해가며 집안을 뒤지고 있는 닌자들.



#33. 엄박사네 집 (밤)


공주, 서가 앞에 앉아 책을 펼쳐 놓은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

엄박사도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가 공주를 본다.


엄 : 원래 책 읽는 걸 좋아하나?

공주 : 사실 책보다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엄 : (어처구니가 없지만) 아, 그래?


두 사람, 각자 다시 책을 본다.


엄 : (떠보려는 듯이) 여기 올 때가 현경 오년이라 그랬지?

공주 : 예.

엄 : 그렇다면 전쟁이 나기 전에 온 건가? 아니면 후에 온 건가?

공주 : (벌써 눈물이 핑 돈다) 전쟁이 나고 사비가 함락 된 다음입니다.

엄 : 오... 그런데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공주 :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자결을 하려고 절벽에서 몸을 던졌는데 깨어나 보니 이 곳이었습니다.

엄 : 어허. 이제야 알겠구만. 음...

공주 : (이상해서 본다) 무엇을 아셨습니까?

엄 : 내가 부적을 하나 써줄 테니까 몸에 반드시 지니고 다니도록 해.


엄, 갑자기 경명주사를 꺼내 부적을 그리기 시작한다.


공주 : 잘못 아셨습니다.

엄 : (본다)

공주 : 저는 귀신도 아니고, 혼이 씌운 것도 아닙니다.


공주,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엄, 헷갈려 하는데 공주, 갑자기 벌떡 일어나 벽에 귀를 대본다.


엄 : 왜?

공주 : 잠깐 집에 좀 가봐야겠습니다.

엄 : 인철이가 꼼짝 말고 여기 있으라 그랬는데?


공주, 이미 밖으로 튀어나갔다.



#34. 복도 (밤)


공주, 엄박사네 집에서 나와 인철의 집 문 앞에서 귀를 기울인다. 조용하다.

공주, 문고리를 살짝 돌려보는데 문이 스르르 열린다.

공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다.



#35. 인철이네 집 (밤)


공주, 불을 켠다. 나가기 전보다 오히려 집안이 깨끗해진 느낌이다.

공주, 날카롭게 집안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욕실문도 날카롭게 열어보고 자기방도 들어가 본다.

공주, 베란다 쪽을 보다가 다가간다.



#36. 베란다 밖 (밤)


닌자들이 매달려 있다.

공주, 문을 벌컥 열고 밖을 내다보다가 다시 베란다 창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간다.



#37. 인철이네 집 (밤)


공주, 자기가 잘못 들었나보다 생각하며 의자에 앉아 다시 생각에 잠긴다.

무섭게 자기를 보던 인철의 눈빛. 배고프다던 인철의 소리. 욕실문을 부셔져라 닫던 인철.

심란한 얼굴로 앉아 있던 공주,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부엌으로 가 밥솥을 열어본다. 비어 있다.

공주, 씽크대를 열어 쌀을 찾는다.



#38. 호텔 - 타쓰지 거실 (밤)


타쓰지, 룸서비스로 시킨 밥을 먹고 있다. 넓은 방이 더 넓게 느껴지고, 통 밥맛이 없다.

공주가 보고 싶다. 방 여기저기에 마치 공주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타쓰지, 수저를 내려놓고 창 밖을 보다가 안 되겠는지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는다.



#39. 옷공장 (밤)


인철과 혁, 자료를 뒤지고 있다.


인철 : (거칠게 책을 확확 넘기며) 환타지... 환타지... 빤짝이...빤짝이. 야, 뭔가 연결되는 거 같지 않냐?

혁 : 우리 참가할 수는 있는 거냐?

인철 : 참가했잖아?

혁 : 실장 때렸잖아?

인철 : 그렇게 큰 회사에서 공사도 구분 못하겠냐?

혁 : 넌 걱정도 안되냐?

인철 : 안되면 마는 거지. 야, 이 빤짝이 어때?

혁 : 빤짝이 얘기 좀 그만해! 너, 공주하고 무슨 일 있었지?


인철, 갑자기 전화를 한다.


혁 : 니네 삼각관계냐?

인철 : 여기 짬뽕 두개만 갖다 주세요. (끊는다)

혁 : 어디라고 얘기했냐?



#40. 인철이네 집 (밤)


온 집안에 연기가 뿌옇다.

가스레인지의 한쪽에선 끓어 넘치고, 그 옆에선 타고 싱크대의 그릇들은 깨지고, 재료들은 온 부엌에 널려 있다.

공주, 빨간 전기밥솥을 들고 어쩔 줄을 모른다.

인철이 가르쳐준 대로 해보지만 아무리 눌러도 뚜껑을 열 때마다 밥은 그대로다.

밥솥 콘센트가 빠져 있지만 공주는 모른다.

공주, 밥솥을 두들겨도 보고 때려도 보는데 현관벨이 울린다.

공주, 난감한 얼굴로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여는데 타쓰지가 서있자 깜짝 놀란다.


타쓰지 : 좀 들어가도 될까?

공주 : (당황한다) 왜 그러느냐?

타쓰지 :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공주 : 신경 쓸 거 없다.


타쓰지, 집안에 꽉 찬 연기를 보고 공주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온다.

타쓰지, 부엌을 보고 깜짝 놀라 렌지불을 끄고 냄비에 물을 부어놓고 모든 문들을 활짝 연다. 현관문까지.

공주, 민망한 얼굴로 뒤에 서 있다.

타쓰지, 공주를 돌아본다.



#41. 아파트 앞 (밤)


인철,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인으로 들어가려다가 타쓰지의 차를 본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42. 인철이네 집 (밤)


공주와 타쓰지, 같이 어질러진 부엌을 치우고 있다.


타쓰지 : (새카맣게 탄 냄비를 닦으며) 이상하지?

공주 : (바닥에 흩어진 쓰레기들을 치우며)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타쓰지 :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자꾸 만나게 되는 거.

공주 : ... 말은 바로 해라. 니가 자꾸 찾아와서 만나게 되는 거다.

타쓰지 : (슥 째려보고) 어쨌든 난 요새 운명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돼. 너하고 나 사이엔

            분명히 어떤 운명적인 게 있는 거 같아. 미인도도 그렇고, 내가 한국에 오게 된 것도, 인철이를 만난 것도.

공주 : ...

타쓰지 :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공주 : ...

타쓰지 : 널 이런 데 두고 싶지 않아. 못 참겠어. 니가 이런 데 있는 게.

공주 : 늦었다. 돌아가라.

인철 : 너, 뭐냐?


공주와 타쓰지, 놀라 돌아보면 인철, 언제부턴지 현관에 서 있다.


인철 : (안으로 들어오며) 니들, 지금 내 집에서 뭐하는 거야?

타쓰지 : ...

인철 : 왜 왔냐? 벌써 데리러 온 거냐? 그래. 그럼, 데려가.

공주 : (인철을 무섭게 노려본다)

인철 : 쟤, 짐 쌀 것도 없으니까, 그냥 가면 돼.


공주, 인철의 뺨을 짝 갈기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타쓰지, 공주와 인철을 번갈아 보다가 야릇한 미소를 띠며 공주를 따라 나간다.

인철, 멍한 얼굴로 서 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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