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57 - 평행선 2
S#1. 강의실 앞
박교수의 해커 강의가 끝난 시각. 학생들이 교실에서 나오고 있다.
지원 뒤늦게 나오다 보면, 정태가 저 앞에서 기다리고 서있다가 지원을 본다.
지원, 무시하고 그 옆을 지나간다. 정태 말없이 보고 있다.
지원, 결국 멈추더니 돌아와 정태의 앞에 선다.
지원 : 니가 이 수업 듣는 줄 몰랐어.
정태 : (온화하게) 나도 내가 이 수업 듣게 될 줄 몰랐어.
지원 : 어떤 식으로든 자주 만나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었는데..(멈칫했다가) 미안해. 니가 수업 듣는걸 내가 간섭할 자격은 없어. 난 단지..
정태 : 괜찮아.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이 수업 듣는 거. 너 때문이니까.
지원 : ....나 때문이라고?
정태 : 그래.
지원 : 그런 말은 학생으로서 할말이 아닌 거 같은데.
정태 : (여전히 온화하지만 또박또박) 난 그래. 난 여자 하나 때문에 이 수업을 듣는 거고 내가 배우고 싶은 건 너라는 사이트를
해킹하는 방법이야.
지원 : (당황하고 있다) 니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정태 : (잘라서) 니가 말했잖아. 우린 아무 것도 시작한 게 없다고. 그래서 이렇게 시작하는 중이야.
지원, 말이 막혀 보고 있다. 정태, 벽에 기대었던 상체를 떼더니.
정태 : 이 말 해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그럼 먼저 간다.
지원이 뭐라 말하기 전에 정태, 지원을 스쳐 가버린다. 돌아보지도 않고.
S#2. 캠퍼스 / 낮
민재가 자전거를 달려서 오고 있다. 봄의 햇살에 오가는 학생들이 좀 많이 보였으면 좋겠고.....
S#3. 위성센터 랩
급하게 들어서는 민재.
석우가 대희와 뭔가를 조립하고 있다가 들어서는 민재를 보고.
석우 : 이민재. 오늘 수업은 다 끝난거야?
민재 : 예. 이따 잠시 사무실에 좀 들르면 되는데요.
석우 : 미안한데 오늘은 좀 늦을 각오 해줘야겠다. 거기 경진이 책상에 부품 목록 있지?
민재 : (부지런히 경진의 책상에서 목록을 찾으며) 아. 여깄습니다.
석우 : 거기 체크된 부품들, 오늘 중으로 주문 좀 해놔.
민재 : 예... 경진인 아직 안왔습니까?
석우 : 돌려보냈어.
민재 : 돌려보내요?
석우 : 감기가 걸려서 빌빌대고 있잖아. (대희에게) 이거 아무래도 평행이 안 맞는 거 같지?
민재 : 감기에요 경진이?
석우 : 하여간 골고루 하나씩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라니까. 이 바쁜 때 감기까지 걸려봐야 되겠냐고.
민재 : 많이 아프대요?
석우 : 딱 사흘 줬어. 사흘만에 감기 다 나아가지고 오라고 했으니까 그동안만 경진이 자릴 메꿔달라고.
민재 : 예.. 근데.. 얼마나 아픈데요. 병원엔 다녀왔대요?
석우 : (결국 일손을 놓고 민재를 보더니) 넌 손가락 없냐? 전화해서 물어보면 될 거 아냐. 전화도 안해볼 생각이었어?
민재 : 아..
대희 : 거기 좀 잘 잡으세요.
석우 : (다시 작업하며) 설마 너 경진이 방 번호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민재 : 방번호야 알죠. 근데.. (하다가 생각해보더니) 새로 바뀐 방번호는 모르는데요.
석우 : (벌컥) 너 정말.. (하다가 멈춘다)
민재 : ...예?
석우 : (말하려던 것 관두고) XXX호야. (대희에게 괜히 화내어) 그쪽부터 맞추면 어뜩해. 이쪽이 안 맞아있잖아. 지금.
S#4. 경진/지원의 방 / 낮
경진이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는데 울려대는 전화벨소리. 한참만에야 경진이 이불 속에서 비실거리며 나와서 전화기로 간다.
되는대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넘기며 수화기를 들어서 잔뜩 잠긴 목소리로.
경진 : 누구세요 ....(반쯤 감긴 눈이 좀 떠지더니 얼른 수화기를 막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어이 이민재. 웬일이냐.
...내가? 아니 별거 아냐. 내가 언제 진짜로 아픈 거 봤냐? 꾀병 부리는 중이야. 걱정할 거 없어.
하는데 사정없이 나오는 재채기. 얼른 전화기를 멀리하고 주섬주섬 휴지를 찾아 코를 풀고..
S#5. 센터 옥상 정원
민재가 핸드폰으로 전화중이다. 전화기 너머의 경진의 기침 소리에 신경을 쓰다가.
민재 : 감기 지독하게 걸린 거 같은데? 병원엔 가봤어?...약만 먹어서 되겠냐? 그냥 기침만 나오는거야? 몸살은 아니고?
너 어제 보니까 옷을 너무 얇게 입고 다니드라.
S#6. 경진의 방
경진 민재의 말을 따뜻한 마음이 되서 듣고 있다.
민재 : (F) 지금 방은 어때. 따뜻해?
경진 : 좀 추워.
민재 : (F) 너 열나는 거 아니냐? 체온 재봤어?
경진 : 체온계 없어.
민재 : (F) 거 제발 미련하게 굴지 말고 옷이라도 좀 두껍게 입고 있어.
경진 : (정신차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이구 고만 잔소리해. 내가 어린애냐. 알아서 한다구. 걱정마.
민재 : (F) 잘도 알아서 하겠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지원이 편으로 보내줄게.
경진 : 먹고 싶은 거.. 지금은 생각이 안나네.. (한번 더 감정 가다듬고) 근데 너 전화소리가 심상치 않다. 그거 핸드폰이지?
민재 : (F 웃음소리) 감기 들어도 귀의 성능은 여전하구만. 맞어. 하나 샀어.
경진 : 나쁜 놈이야 너. 그런 거 샀으면 당연히 나한테 먼저 알려야지.
S#7. 센터 옥상정원
민재 : 잘못했다. 전화번호 크게 써서 메일로 보내줄게. 근데.. 정말 먹고 싶은 거 없어? 그렇다면 너 아주 심각한거잖아.....
어이 ...(상대의 말이 없는 듯) 여보세요. (핸드폰을 떼어서 한번 들여다보고 다시 귀에 대고) 여보세요. 경진아.
경진 : (F) 있지.. 먹고 싶은 거 대신 딴 거 부탁해도 돼?
민재 : 말해봐. 일단 들어보고.
S#8. 경진의 방
경진 한번 심호흡을 하더니 장난처럼.
경진 : 자주 전화해줘. 나 심심해 죽겠으니까 자주 전화해서 나 없는 동안 지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세히 보고해줘.
(잠시 상대의 대답을 숨죽여 기다린다)
민재 : (F) ...얼마나 자주.
경진 : 할수 있는만큼 자주.
민재 : (F) ...알았어.
경진 : (활짝 미소가 피어난다) 약속했다.
민재 : (F) 그래애. 그럼 쉬어. 끊는다.
경진 : 어.
소리 : (전화 끊기는)
경진,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다시 나오는 기침. 휴지를 빼서 코를 풀고.
그리고 문득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 옆의 스웨터를 집어서 어깨에 두른다. 무릎을 끌어안는데 썩 기분이 좋아졌다.
S#9. 학생 식당 / 낮
중희와 만수 정태 해성이 각자 식판을 들고 자리를 잡는 중이다.
중희, 앉으며 해성의 식판을 내려다보고 해성의 얼굴을 다시 보고..
중희 : 너 지금 니가 뭘 갖고 왔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거지?
해성 : 왜요? 나 이거 xxx 좋아해요.
그제야 보이는 해성의 식판에는 같은 종류의 반찬만 세 접시 놓여 있다.
만수 : 뺏어먹고 싶어도 젓가락 갈 데가 없잖아. 에이.. (하며 중희의 반찬으로 젓가락을 뻗는데)
중희 : (익숙하게 젓가락으로 막으며) 해성이 니 나이때는 골고루 먹어 줘야 돼. 편식하믄 못 써.
(계속되는 만수의 공격을 차단하며) 이렇게 너무 먹어대도 곤란하지만 말이야.
만수 : 이게 다 선배의 다이어트를 도와주려는 후배의 눈물겨운 노력 아닙니까. 이거 봐. 여기 살. 이것도 살. 이건 살 제곱.
해성 : (문득 건너편에 앉은 정태의 뒤쪽을 보더니) 어 지원이다.
정태 : (밥을 먹다가 멈칫. 뒤를 돌아본다)
거기 몇자리 건너 떨어진 곳에 지원이 혼자 식판을 들고 자리를 잡아 앉고 있다.
지원이 정태와 시선이 마주쳤다가 그냥 모른 척 고개를 숙인다. 정태, 잠깐 망설이는데..
해성 : (정태에게) 싸웠어?
정태 : (웃고 다시 밥을 먹는)
해성 : (혼잣말로) 싸웠구나. 어쩐지.. 지원이한테 니 말 물어봤더니 화내드라구.
중희 : 니들 싸웠어?
만수 : 언제? 왜? 어떻게?
정태 : (한심해지는)
중희 : 어 저기 민재잖아. (한손을 번쩍 들어보인다)
지원의 뒤쪽으로 오던 민재가 이쪽을 발견하고 손을 들어보이고는 먼저 지원에게로 간다.
중희 : 어쭈. 이젠 선배를 보고도 그냥 스킵해?
만수 : 가만 있어봐요. 지금 민재가 정태하고 지원이를 화해시키려는 중이잖아요.
정태 : (정말 숫갈을 놓고 싶은데)
만수 : (와중에 중희의 고기 반찬을 집어먹는데 성공한다)
// 지원 쪽.
민재. 지원의 옆으로 자리 잡아 앉고 있고.
지원 : 경진이 어제밤 내내 기침을 하드라구. 결국 결석했구나.
민재 : 랩까지 나오긴 했는데 선배가 돌려보냈나봐. 그리고 이거.. (하며 체온계를 내준다) 체온계야. 열 재보고 너무 높으면
병원에 가라고 해줘. 그 녀석 게을러서 웬만하면 꿈쩍안하려구 들거야.
지원 : 그래. 38도 이상이면 내가 책임지고 보낼게. (미소지으며 받고)
민재 : 근데 혼자 먹어? 저기 정태네 있는데.
지원 : ... (질문에 대답 대신..) 넌 저녁 먹었어?
민재 : 우린 랩에서 시켜먹을거야. 너 만나러 느이 랩에 갔다가 너 식당 갔다고 해서 온건데... (하며 정태네를 돌아보는)
정태는 이쪽에 등을 돌린 채 보지 않고 만수와 중희만 이쪽을 보고 있다가 민재와 시선이 마주치자 만수가 활짝 웃어보인다.
민재 : 다 아는 사람들이잖아. 같이 먹지 왜.
지원 : 너 랩에 돌아가봐야 되는 거 아니니?
민재 : (아무래도 지원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슬그머니 일어나며) 들어가야지. 어... 그럼.. 갈게.
지원 : 경진인 걱정 마.
민재 : 그래. ...그럼.. 저쪽에 인사나 하고...
민재 슬그머니 정태네 테이블 쪽으로 이동해가며 지원을 보고 정태를 본다.
지원도 정태도 각자 밥먹는데만 열중해 있는 듯 하다. 그 위로.
경진 : (E) 좋아좋아. 잘 나가고 있다는 얘기야.
S#10. 센터 내 수신국
혹은 다른 적당한 곳.
민재가 챠트를 들고 모니터의 수치들을 체크해가며 한쪽 귀에는 핸드폰을 끼고 전화 중.
민재 : 피차 삼미터 안에는 접근도 안하고 있고, 눈도 안 마주치고 있다는데 뭐가 잘 나간다는거야... 만수형 말로는 둘이 싸운 거 같다고
하드라고. ...모르지. 뭣땜에 싸웠는지 둘 다 누구한테 광고할 성격들이냐.
S#11. 경진의 방
경진은 이불 속에 들어앉은 자세. 이불 위에는 크리넥스 한통과 전화기 등이 올려져 있고,
경진 : (한손에 수화기, 한손에는 휴지를 들고 훌쩍거려가며 통화중) 그래도 지원이보다는 정태가 허술하잖아. 그러니까 니가 오늘 중으로
슬쩍 알아보라구. 알게 되는대로 바로 전화해주는 거 잊지 마. ..니 생각엔 별거 아닌 거 같은 것도 다 얘기하라구. 원래 추리라는게
버려진 담배꽁초, 머리칼 하나, 이런 걸로 하는 거잖아. .... (재채기) 그럼 전화 기다리고 있을게.. 알았어. 잘거야. 잔다구. 끊어.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코를 풀고.. 멍한 얼굴로..
경진 : 아이구 힘들어 죽겠네. 이래서 맘놓고 아프지도 못한다니까.(기진한 듯 베개에 기대었다가 다시 끄응 일어나 앉으며)
근데 지원이 수업 시간표가 어떻게 되드라.. 아이구 삭신이야. (벌렁벌렁 기어나오며) 아이구 어지러워.. 에구에구..
S#12. 학생회관 매점 앞 휴게공간 / 밤
대욱과 규한, 마이클이 각자 빵이며 음료수 우유 등을 들고 나와 자리를 잡으며.
규한 : 게임하고 연애는 확실하게 일맥상통한다 이거야.
마이클 : 쌍통이 뭐?
규한 : 똑같다구. 세임세임.
대욱 : 계속해보세요.
규한 : 첫째, 자신의 적성에 맞는 게임을 잘 고르는 게 중요하다. 이게 시뮬레이션이냐 롤플레잉이냐. 단순 아케이드냐.
또 게임의 난이도나 시나리오는 적당한가..
대욱 : 그리구요.
규한 : 둘째 게임에 임하기 전에 확실한 사전전략이 필요하다. 매뉴얼이나 치트키 등을 숙지하고 게임의 특성을 파악할 것.
마이클 : 앤드?
규한 : 셋째, 일단 시작했으면 클리어할 때까지는 밤낮없이 도전해야 된다..
대욱 : 아니 잠깐만.. 그런 이론적인 거 말고 실제적인 예는 없습니까? 한 여자를 공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같은거요.
규한 : 있지. 너무 많지.
대욱 : 그럼 그거부터 얘기해보십쇼. 구체적으로요.
규한 : 구체적인 Q를 던져봐. 그럼 구체적인 A를 해주지.
대욱 : 에.. 예를 들면 한 여자로 하여금 날 남자로 인식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냐.
규한 : 오호. 그럼 이건 게임 선정은 이미 끝난거군. 누군데. 그 여자가.
마이클 : (열심히 먹으며) 난 알지.
대욱 : 입 다물고 있어. (규한에게) 누군지 말해도 모르실거고. 알려주고 싶지도 않고 그렇습니다. 강의나 계속하시죠.
규한 : 이 빵쪼가리 가지고 되겠냐?
대욱 : 대답만 확실하다면 소주에 족발.
규한 : 맥주에 통닭.
대욱 : 좋습니다.
규한 : (은밀하게 대욱에게 상체를 붙이며) 일단..
대욱 : 일단..
마이클 : (역시 가까이... 심각하게)
규한 : 여자를 딱 잡아.
대욱 : 딱 잡아요. 그리구요.
규한 : 그리고 키스를 해.
대욱 : (정지했다가) 뭘 해요?
규한 : 키이스. 그럼 상대는 너를 확실하게 남자로 인식하게 될거야. 100퍼센트 장담하지.
대욱, 어이없어 규한을 보다가 자기 먹던 것을 챙겨 일어나더니 그냥 가버린다.
규한 : (마이클을 보며) 이 학교엔 원래 이렇게 어린애들만 살고 있냐?
마이클 : 그건 형이 몰라서 그래. 대욱이 형이 키스.. 우흐흐.. 그거 하면 그 순간 대욱이 형은 맞아 죽어. 이건 백퍼센트 확실해.
죽고 나면 여자 소용없잖아.
S#13. 터미널 실/ 낮
20여명의 학생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각자 컴퓨터 앞에서 치열하게 작업중이다.
이하 박교수의 설명에 맞게 편집이 되면서 공격팀에는 정태가, 방어팀에는 지원의 모습이 보인다.
각 모니터에는 해킹 관련 화면들이 정신없이 흐르고 있다.
박교수 : (E) 현재 두팀으로 나뉘어서 이쪽은 공격을 하는 중이고. 저쪽은 방어를 하는 중이거든. 방어팀은 각자 자기 홈페이지에
여덟개의 깃발을 갖고 있는거야. 그것을 공격팀이 뚫고 들어가서 얼마나 많은 깃발을 가져오느냐..이게 오늘 실습의 주제인거지.
서교수 : (E) 그럼 이게 일종의 시험이 되는 건가?
박교수 : (E) 그렇지. 아무래도 방어가 약한 쪽으로 공격팀들이 몰려갈 것이고 제한 시간이 끝난 다음에 누가 몇 개의 깃발을 빼어왔느냐..
누가 몇 개의 깃발을 지켜냈느냐.. 이걸 가지고 점수를 주게 된다 이거야.
강의실의 뒤편, 혹은 강의실에 복도 쪽 창문이 있다고 한다면 그 창문 밖에서 안을 보며.. 서교수와 박교수가 얘기 중이었다.
서교수 : 재미있네. 과연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업이야.
박교수 : 해킹은 실전이 최고의 수업이니까. 번듯한 도장에서 태극형이니 고려형이니 정통으로 무술을 배우는 방법보다는,
뒷골목에서 바로 치고 박고 싸우면서 싸움질을 익히는 게 더 효과적이다 이거지.
서교수 : 그런데 지금 박교수 손가락이 근질근질하지?
박교수 : 내가? (하다가 자기 손을 보면 손가락 열 개를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러네. 내 손가락들이 자꾸 꼼지락거리네.
서교수 : 저기 들어가서 같이 한판 붙고 싶은거잖아. 지금.
박교수 : 맞어. 그거야 바로. 난 아무래도 방랑의 무사 기질이 있나봐.
서교수 : 제발 부탁인데, 뒷골목의 실전검법도 좋지만 저 학생들 부디 정통 명가의 무사들로 키워줘. 해적군단처럼 만들지 말고.
박교수 : 그럼. 명심하고 있어. 스승은 바담풍해도 제자는 바람풍해야지. 안다구. ...근데 해적군단? 듣기는 그게 더 멋있다.
서교수 : (한심해 보면)
박교수 : (얼버무려서) 하하.
// 학생들 쪽.
지원, 재빠른 손길로 작업을 해나가다가 문득 고개를 들더니 건너편의 정태를 본다.
정태는 그저 화면에만 집중해있다.
S#14. 엔진랩
동현과 다른 연구원이 엔진 정도에 매달려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울리는 전화벨.
동현 기름때 묻은 장갑을 벗으며 수화기를 든다.
동현 : 엔진랩입니다. ...아 처장님. 예. 추자현이요? 지금 이 근처 어디 있을 겁니다. 오늘 수업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예... 예.. 어디로 보내면 되죠? 예 알겠습니다. (끊고 연구원을 돌아본다) 우리가 아무래도 대단한 후배를 모시고 있나부다.
연구원 : 방금 처장님이 전화하신 거에요?
동현 : 어. 다음엔 과기부 장관님이 호출하는게 아닌가 몰라. 우리 대단한 추자현은 어디 있는거야.
연구원 : 오시고 있네요.
병석과 함께 입구를 마악 들어서는 자현. 만두를 입이 미어져라 먹고 있다가 자신을 보는 동현과 연구원을 멀뚱하게 본다.
입이 가득해서 발음도 안되는 소리로..
자현 : 저 찾으셨어요?
S#15. 터미널실
서교수는 돌아간 상황. 이제 박교수는 학생들 앞에 서서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재고 있다.
박교수 : 자 이제 카운트다운 합니다. 5초 4초 3초 2초 1초 땡. 모두 손놔요.
학생들 기진맥진해서 손을 놓고 의자들을 뒤로 물린다. 서로 쳐다보며 웃기도 하고 목운동을 하기도 하고..
박교수 : 수고들 했어. 자 그럼 결과를 볼까. 수비팀부터. 조영식. 뺏긴 깃발이 몇 개야.
영식 : 세갭니다.
박교수 : 그 옆은.
학생1 : 네 개요.
박교수 : 그리고?
학생2 : 저...
박교수 : 몇 개 남았는데?
학생2 : 없는데요.
박교수 : 엥?
학생들 웃음소리.. 학생2, 으이그해서 머리를 긁고.
박교수 : 그 옆에 구지원은.
지원 : 일곱갭니다.
학생들 : (와아... 소리내어주고)
박교수 : 대단하네. 딱 한 개 빼앗긴거잖아. 누가 가져갔는지 알어?
지원 : ...김정태라고 생각됩니다.
모두 정태를 본다.
박교수 : 오호. 난공불락의 구지원 성에서 깃발 한 개를 뺏어왔군. 정태는 전리품이 모두 몇 개나 되지?
정태 : 한 개요.
박교수 : 뭐. 딱 한 개라고?
정태 : 계속 한 개의 성만 공격했었거든요.
박교수, 오잉해서.. 정태를 보고 지원을 보고..
학생들도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데 지원은 말없이 자기 화면만 보고 있다.
S#16. 캠퍼스 내 도로 / 낮
열려져있는 자동차의 본넷에 머리를 틀어박고 있던 자현이 고개를 들더니.
자현 : 시동 걸어봐.
운전석의 병석이 시동을 건다. 푸르릉거리다 꺼진다. 그 옆에 서서 보고 있던 처장.
처장 : 큰 고장인가? 수리점에 보내는 게 낫겠어요?
자현 : 어유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절 믿고 자동차 수리권을 사주셨던 거 언제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회에 은혜를 갚을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시면..저기..추운데 안에 들어가 계시지요. 수리가 되면 찾아뵙겠습니다.
처장 : 아니에요. 학생들이 뭔가 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아요. 좀 더 보다 가고 싶으니까 계속들 해요.
병석, 운전석에서 본넷 쪽으로 오다가 문득 자현을 툭 친다.
병석 : 저기..
자현 : 뭐. (하며 병석이 보는 쪽을 본다)
저만치에 정태와 지원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는데 이쪽에서 보기에 둘은 심각하게 언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지원이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으며 뭐라 하고 그 옆을 정태가 따르며 역시 뭐라고 말하고 있고. 말소리는 들리지 않을만한 거리.
병석 : 심각해 보이는데.
자현 : 니 눈엔 그냥 심각해보이냐? 내 눈엔 싸우는 거처럼 보이는데.
처장도 그들이 보는 쪽을 돌아본다.
S#17. 도로 근처 벤치 부근
정태가 안되겠다 싶은지 몇걸음 앞서나가 지원을 막아선다. 둘 다 지금 좀 격해있는 상태다.
정태 : 앉아.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구.
지원 : (역시 격해있지만 또박또박) 앉아서 할만큼 긴 얘기도 아니잖아. 내 얘기는 간단해. 전에도 같은 말을 했었는데 다시 반복하자면.
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게 싫어. 안 그래도 신경써야 될 게 너무 많다구. 니가 재미있어서 하는 이 모든 게, 나한테 너무 힘들어.
이 말이 그렇게 이해가 안돼?
정태 : 너한텐 내가 재미있어하는 걸로 보이냐? 나도 힘들어. 난 지금 밤낮으로 머리가 터질 거 같다구.
내가 이렇게 하면 너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런 건 유치한건가. 니가 화낼까. 아니면 비웃는 건 아닐까. 이런 게 재미있을 거 같애?
지원 : 그러니까 그만두라고 말하고 있잖아.
정태 : (좀 가라앉히고) 사람이 이만큼 진지하게 말하면 최소한 이해는 해보려고 애써줘야 되는 거 아냐?
지원 : ... (역시 냉정해지려 애쓰며) 뭘 이해해야 되는거지? 오늘 수업시간에 니가 한 행동을 이해하면 되니?
정태 : 그래. 그거부터 시작하지. 오늘의 해킹수업이 나한텐 아주 중요했어.
지원 : (더 말하기 싫어지며 고개를 돌리는데)
정태 : (아랑곳없이) 니가 가진 여덟 개 깃발 중에 한 개를 뺏었어. 8분의 1. 그게 현재 너에 대한 내 실력이야. 그렇지?
지원 : (딴데를 보며) 간단하게 설명해 줘.
정태 : 너의 하루 스물네시간 중에 8분의 1. 세시간을 나한테 줘.
지원 : (정태를 돌아보는)
정태 : 니가 스물네시간 빡빡하게 사는 거 알어. 내가 세시간만큼의 작업을 도와줄게. 그렇게 비는 세시간을 나하고 보내줄 수 있어?
지원 : (보기만)
정태 : 좋아. 매일 세시간이 부담스럽다면 더 적은 시간도 좋아. 일주일에 한번까지 양보할 수 있어. ...어때.
지원 : (웃어보려 하지만 잘 안된다. 잠시 있다가..)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 다음엔? 결론적으로 뭘 생각하고 있는건지
물어봐도 되겠니?
정태 : ...구지원. 이건 프리젠테이션을 해야되는 프로젝트가 아니야. 결론을 미리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라구.
사람 사이에선 결론보다 과정이 더 소중한 거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원 : (똑바로 정태를 보다가) 미안해. 난 결론도 없는 문제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없어.
S#18. 처장의 차 옆
처장의 차에 나란히 기대서서 정태네 쪽을 보고 있는 처장과 자현 병석.
자현 : 뭔가 화해가 되고 있는 거 같지 않습니까? 조용한데요.
병석 : 어이구. 넌 꼭 주먹질을 해야 싸우는 건 줄 아냐? (처장을 의식하고) 죄송합니다.
자현 : 어 떨어진다.
다시 보면, 지원이 먼저 한 방향으로 가버리고 있다. 남은 정태. 그런 지원을 보다가 반대 방향으로 가버린다.
처장 : (E) 그러니까 저 두 학생이 목하 인생의 갈등을 겪고 있는건가요.
자현 : 저기 혹시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 건데요. 저 친구들이 공부는 안하고 그 뭐냐.. 에..
병석 : (슬쩍) 인생의 갈등.
자현 : 예. 인생의 갈등만 하고 사냐.. 하면 절대 그런 건 아닙니다. 저 두 친구 다 학점도 엄청 좋구요. 자기네 랩에서 인정받는
우수학생들이거든요. (병석을 찌르며) 너도 알잖아.
병석 : 아.. 예. 그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처장 : (웃고) 공부는 강의실이나 도서관에서만 하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종이성적표의 학점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학점도 중요해요.
자현 : (접수가 잘 안되며) 아...인생의 학점이요.. 아하하..
처장 : 빛나는 청춘이 지나갔을 때 손에 종이성적표밖에 남은 게 없다면 그게 더 한심한 일이에요.
자현 : (역시 얼른 접수가 안되며) 예.. 아..
처장 : 문제는 주어지는 모든 순간에 얼마나 진심을 다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 그겁니다. 비싼 보석과 싸구려 보석의 차이를 알아요?
자현 : (당황.. 병석에게) 넌 아냐?
병석 : 보..석이요?
처장 : 성분이 얼마나 순수한가가 그 기준이에요. 진심을 다해야 순수해지는 겁니다. 그게 법칙이지요.
(문득 하늘을 둘러보며) 햇살은 봄인데 바람은 아직 겨울이구만. 늙은 나는 먼저 들어갈테니까. 이 늙은 차도 잘 부탁해요.
자현 : 예. 책임지겠습니다.
병석과 자현의 인사를 받으며 처장 흐뭇한 얼굴로 간다.
자현 : (문득 병석을 돌아보더니) 그러니까 뭐냐. ...보석이 어떻게 됐다구?
병석 : 설명한다고 니가 알겠냐? (자현의 머리를 잡아 본넷 안으로 밀어넣으며) 너 아는 거나 제대로 해.
S#19. 민재 벤처 사무실 외경 / 낮
여전히 복잡한 온갖 그림이 그려진 동아리 방들.. 주리리..
그리고 아직은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민재의 사무실 외경 위로.
민재 : (E) 정보는 무슨 정보야. 아직 말도 한번 못 붙여봤어.
S#20. 민재의 사무실 내부
아직은 썰렁하지만 몇가지 기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무실.
민재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옆에 서류며 책들을 쌓아놓고 서류 양식을 타자하면서 전화를 하고 있다.
민재 : 밤에 들어오긴 하지. 그런데 진짜루 눈한번 마주칠 시간이 없대니까. 그 녀석 뭘하는지 밤을 꼬박 새고 앉아있드라구.
그러고보니까 요즘 정태 자는 걸 못 봤어. 맛이 가있다구. .... 근데 민경진. 석우선배가 너 오늘까지 감기 다 나아가지고
내일은 나와야 된다고 했다며. 몸은 좀 어때.
S#21. 경진의 방 / 낮
경진, 초췌한 모습으로 수화기를 어깨에 끼고 쭈그려 앉아서 대야의 찬 물에 수건을 적셔서 짜면서..
경진 : 나도 알어. 내일까지는 다 나아야 된다는 거.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까 나는 지금 푹 쉬어야 돼.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끄응 일어나 침대로 비실비실 걸어 누우며) 내가 골치아프게 여러 생각안하게끔 니가 노력을 해줘야 된다는 얘기야.
뭔 말인가하면...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알아보라구. (수건을 자기 이마에 얹으며 계속 통화중) 그 둘이가 현재 어떤 상태인가.
같이 공동작업을 한다고 하는데 그건 어디서 언제 어떻게 하는가. 기타 등등.. ....정확한 정보를 모르면 내가 이 아픈 머리를
굴려서 자꾸 생각을 해야 되잖아. 그리고 난 너밖에 물어볼 데가 없잖아.
S#22. 민재 사무실
민재 : 어이 난 지금 어떤 중소기업의 특허신청서류를 오늘 중으로 완성해야 되는 사람이야. 이따 저녁에는 그 회사에 가봐야 되구.
(경진이 뭐라고 떠들어대는지 참고 들어주다가) 알았어. 알았으니까 고만 떠들고 좀 자라. 너 아프다는 거 진짜야?
어떻게 그렇게 체력이 좋을 수가 있냐? ....그래 으이그. 너 낫고 난 담에 보자. 빨리 끊어.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쉰다. 다시 작업을 하려고 하지만 이미 맥락을 놓쳤다.
화면을 노려보다가 할수없이 다시 전화기를 든다.
S#23. 이교수 랩 / 낮
전화벨이 울린다. 랩에 혼자 있는 해성. 한가운데 서서 책을 하나 읽으며 집중을 해있다가 책을 보는 자세로 이동을해서
손만 뻗쳐 더듬거려 수화기를 든다. 시선은 책에 가있는 채.
해성 : 여보세요. ...맞는데요. ....김정태는 없는데요. 네. 안녕히 계세요. (수화기를 든 손은 내리는데, 전화기에 얹는 걸 잊어버리고
그 자세로 계속 책을 본다)
S#24. 이교수 연구실 / 낮
명환과 정태, 이교수가 회의 중.
명환 : 조만간 유진 쪽에 다녀와야 될 거 같습니다. 진화연산자에 대해서 브리핑을 한번 해줬으면 하든데요.
이교수 : 스케쥴 봐서 너나 중희가 다녀오는 게 낫겠다.
명환 : 그쪽 이사급이 참석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교수님이 직접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교수 : (귀찮은 얼굴로 생각해보고는 전자 수첩을 들어 체크해보며..) 그럼.. 화요일 밖에 안되는데.
명환 : 미리 알아보겠습니다.
이교수 : (정태에게) 반도체동은 어떻게...(하다가 멈춘다)
부시시한 꼴의 정태, 앉은 채 깜빡 졸고 있다.
명환 : (얼른 정태를 찌르며) 정태야.
정태 : (후딱 깨어나서 벙벙하니 명환을 본다)
이교수 : 반도체동에 테스트는 어디까지 됐니?
정태 : 아... 소자레벨에선 별 문제가 없다고 하구요. 오늘 내일 중으로 서킷 레벨을 테스트 한다고 했습니다.
이교수 : 그럼 이번 주 안으로 시스템 레벨까지 확인되는건가?
정태 : 거기는 다른 일정하고 겹친다고.. 확답은 못해주던데요. 서둘러 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해보겠습니다.
이교수 : 너하고 구지원이 하는 거.. 그쪽 준비는 잘해주고 있는거지?
정태 : ...예 그럭저럭.. (대답이 시원치 않다)
이교수 : (정태를 살펴보며) 너 얼마나 잠을 못잔거야?
정태 : 잠... 잘만큼은.. 자는데요.
이교수 : 그렇게 바쁜데 정보보호 워크샵까지 듣는다며.
정태 : .....
이교수 : 갑자기 왜 해킹 부전공이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한거면 망신당하지 말고 잘해.
내 학생이 어디 가서 모자라단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정태 : 예 알겠습니다.
이교수 : (명환에게) 다음은 뭐지?
명환 : (얼른 수첩을 뒤지는) 작업 분담 문젠데요..
S#25. 박교수 랩
지원이 수업을 끝내고 들어오는 길.
지원 : 늦었습니다.
남희가 작업을 하다가 지원을 보고..
남희 : 아 지원아. 너 메일 열어봐.
지원 : 메일이요? (하며 컴퓨터 앞으로..)
남희 : 좀 전에 정태가 전화했는데 작업한 거 보냈다고 하드라. 그거 반도체동에 학술회의 준비해주는 자료인 모양이든데?
지원 : (빠른 손길로 메일을 열어가는)
남희 : 이따 반도체동에 가볼거지?
지원 : 네.
남희 : 박교수님이 경과 알고 싶어하시니까 다녀와서 찾아 뵙고. 그리고.. (하다가 지원을 보고 멈추는)
지원 : (굳어서 화면을 보고 있다)
남희 : 왜. 뭐 잘못됐어?
말없이 마우스를 클릭해가며 내용을 열어보고 있다. 보이는 화면에는 한글화일이 가득 메워져 있다.
남희 의아해서 보는데. 지원 벌떡 일어나더니 옆의 수화기를 든다.
S#26. 이교수 랩
해성이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울리는 전화벨.
해성 책을 보는 자세로 수화기를 든다.
해성 : 여보세요. ....맞는데요. .....김정태는 없는데요.
정태 : 어 내 전화야?
정태와 명환이 막 들어서고 있다.
해성 : (멍하니 정태를 돌아봤다가 수화기에 대고) 여보세요. 누구 찾으신다구요?
S#27. 박교수 랩
지원이 선 자세로 전화를 하고 있다.
지원 : 방금 메일 봤어. 왜 내가 작업할 걸 니가 해서 보낸거야? 그건 내가 맡았던 거잖아.
남희, 작업하는 척 하면서 지원의 통화내용에 신경쓰고 있다.
지원 : 그러니까 이게 니가 말했던 거니? 내 하루 중에서 세시간만큼 벌어주겠다는 게 이런 거였어?
S#28. 이교수 랩
정태가 서서 전화를 받고 있다.
정태 : 우선은 자료집에 넣을 부분만 정리해서 보낸거야. 프리젠테이션용 화면은 니가 준비하고 있지? 그럼 그거 된데까지만 해서
나한테 보내줘. 내가 정리해서..(상대의 말을 들으며 조금씩 굳어지고 있다) 아직 내가 보내준 거 읽어보지도 않았잖아. 그러면서..
(조금씩 화나고 있다) 뭐 니가 직접 한거만큼 잘하진 못했겠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한거야. 그러니까 그냥 수용해줬으면 좋겠는데.
명환이 자기 자리에서 작업 준비를 하며 힐끔거린다. 해성은 여전히 책에 정신을 쏟고 있고.
정태 : (상대의 말을 자르듯) 전화로 길게 얘기하긴 좀 그렇다. 이따 반도체동에 올거지? 그때 보자.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잠시 자제하려고 애쓰며 서있다)
명환 : 뭐..일이 잘 안되냐?
정태 : 아닙니다.
해성 : (갑자기 책을 들고 일어서며 명환에게) 저기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요.
명환 : (앗 뜨거라 싶어서) 좀 있으면 중희 온다. 중희한테 물어봐라. 난 지금 이거 얼른 해야되거든. (얼른 작업 자세로)
해성 : (정태에게) 이거 좀 봐줄래? 그냥 보기는 아주 간단해 보이는데 있지..
정태, 벌컥 몸을 돌리더니 나가버린다. 해성, 책을 든 채 불쌍하게 서있다.
S#29. 박교수 랩
남희 서류를 챙겨 지원의 뒤쪽으로 지나가다가 문득 지원을 본다. 지원은 컴퓨터 앞에 앉아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남희 그냥 지나치려다가 어어 해서 다시 화면을 본다.
화면에는 정태가 보내온 파일이 검은색으로 블랙 지정이 되서 지원이 page down키를 누를 때마다 한 장씩 블록이 더해가고 있다.
남희 설마해서.. 다가서며 보는.. 화면에는 드디어 마지막 장까지 블록이 지정됐다.
남희 : 저기 지원아. 그거 블록 지정하는 거 그거 설마...
화면을 보는 지원의 얼굴. 지원의 손가락이 delete키를 치는 인서트.
화면은 순식간에 하얀 빈 화면으로 바뀐다.
남희 : 너 뭐하는거야. 정태가 보내온 걸 다 지운거야 지금?
지원 : ..원래 내가 할 일이었어요. 이거.
남희 어이없어 보는데, 지원 꼼짝않고 앉아서 뭔가 글자를 쳐넣고 있다.
S#30. 반도체동 전경 / 저녁
정태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자전거를 세우고 우울한 얼굴로 입구로 간다.
연구원 한명이 카드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얼른 뒤따른다.
그리고 이만치.. 지원이 오다가 들어가는 정태를 보고 멈칫 선다.
이제 입구에는 정태가 들어가버리고 다시 문이 닫겨있다. 지원 천천이 걸음을 옮긴다.
S#31. 반도체동 측정실험실
컴퓨터의 화면에 프리젠테이션용 화면이 실행되고 있다. 그 앞에서 보고 있는 전자과 선배와 지원.
그뒤에 좀 떨어진 곳에 정태가 서서 내키지 않는 얼굴로 화면을 멀리 보고 있다.
지원 : (다음 화면 넘기며) 최대한 단순하게 디자인했어요. 너무 화려한 그래픽이 오히려 브리핑을 방해할 거 같아서요.
선배 : 좋은데. 맘에 들어.
지원 : 계속 보시겠어요?
선배 : 아니 됐어요. 나중에 다 완성되면 그때 보지뭐. 지금처럼만 해주면 되겠어요.
지원 : 화면 자료를 더 보여주신다고 했었는데..
선배 : 아 그거.. (하다가 정태를 돌아본다) 여기 원격강의실에 테잎이 있는데. 정태 너 어디 있는지 알지?
정태 : 예.
선배 : 같이 가서 좀 찾아줘라. (일어나며) 아이구 배고파. 점심을 빵으로 때웠더니 아주 허기져 죽겠네. 나 먼저 나갈게.
정태 : 저희 나갈 때 여기 문 잠궈요?
선배 : 그래 부탁해.
선배 나가고. 정태는 지원을 돌아보면 지원은 말없이 화면의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있다.
S#32. 원격강의실
내부 스케치 잠시... 주욱 팬해서 돌아보면 뒤쪽의 영사실. 입구 쪽에 지원이 서서 내부를 둘러보고 있고.
영사실에서 정태가 뭔가를 뒤적이더니 입구로 가져나온다.
정태 : (시디가 든 케이스를 넘겨주며) 이거야.
지원 : (받아들고 암말 없이 돌아서는데)
정태 : 오늘은 어때.
지원 : (정지한 채)
정태 : 지금부터 세시간 내줄 수 있냐구. 우리 할말이 많은 거 같은데.
지원 : (천천이 돌아서더니) 랩에 가봐야 돼. 하던 일이 있어.
정태 : 기다리지 뭐.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지원 : 언제 끝날지 몰라.
정태 : 한잠 자기 딱 좋은 곳인데 여기. 신경쓰지 말고 일 다하고 와. 나 자고 있을게. 지금 엄청 졸리거든.
지원 : .... (보다가) 집에 가서 자. 난 안 올거야.
정태 : 좀 더 생각해봐.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정태, 말 다했다는 듯 객석으로 내려가더니 대충 편하게 자리잡고 앉는다.
지원 말없이 보다가 돌아서 나간다. 닫히는 문.
남은 정태. 뒤에서 볼 때 자세는 편한데 앞으로 돌아가며 보여지는 그 얼굴은 굳어있다.
석학의 집의 음악이 시작되며..
S#33. 석학의 집
미순과 지민이 나란히 한곳을 보며.
지민 : 가서 커피 리필할거냐구 물어볼까요?
미순 : 지민이 너 말야. 우리 집에서 아르바이트 할려믄 일단 눈치가 빨라야 된다.
지민 : 내 눈치가 어때서요.
미순 : 저길 봐라. 저 분위기가 어디 커피 리필하는 거 신경 쓸 분위기냐.
지민 : (잠시 그곳을 보다가) 좀 심각해보이네요. 무슨 얘기하는지 슬쩍 가서 들어볼까요? 커피 더 마실거냐고 물어보면서?
미순 : 들으나마나 뻔한 대화여.
지민 : 에? 뭔데요?
미순 : 학위를 따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갈 것인가. 아님 인사부터 드리고 정식 관계 속에서 함께 학위를 딸 것인가.
그걸 상의하는 거 아니겄냐.
지민 : 에에.. 언제 거기까지 나갔대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미순 : 그러니까 눈치지 눈치. 쩍하면 짝이야.
지민 : 앗 클났다.
미순 : 뭐가.
지민 : 만수오빤 어뜩해요. 너무 불쌍해애..
미순 : 그래서 자고로 빚보증 서는거 하고 외사랑은 해선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문득) 너 행여 만수한테 괜한 소리했다간 뒷감당 못한다.
입조심해.
지민 : (저도 모르게 자기 입을 막는)
이제까지 그들이 보고 있던 곳에는 남희와 명환이 마주 앉아 심각하게 얘기중이었다.
명환 : 그러니까 정태 그 놈이 밤을 새고 작업을 해서 보내면, 지원이는 한칼에 다 지워버리고 새로 작업을 하고 있다 이겁니까?
남희 : 그렇죠. 지금 둘이 한마음 한뜻으로 합심해서 작업을 해도 될까말까하는데 이대로 놔둬두 되나 모르겠어요.
명환 : 그냥 냅둘 순 없겠죠? 우리가 명색이 직속선밴데.
남희 : 그렇겠죠?
명환 : 어쩌죠?
남희 : 어쩔까요?
명환 : 어떻게든 손을 써야겠죠.
남희 : 정태가 선배님 말은 잘 들을 거 아녜요. 대충 맘 상하지 않게 얘길 해보세요. 이런 상황이다..하구.
명환 : 근데 그게.. 그냥 작업이 지연되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남자 여자.. 이렇게 감정적인 문제가 얽힌 거라서..
선배랍시고 뭐라고 말해야 될지 난감하네요.
남희 :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래서 저두 지원이 잡고 무슨 말을 해줘야 될지 모르겠드라구요.
명환 : 어쩐다.. (물컵 들어 마시는)
남희 : (무의식적으로 자기도 물 마시고)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할텐데..
명환 : 그렇죠? 그러니까 지원이는 지금 정태가 한 작업을 다시 하고 있다 이거죠?
남희 : 네에.. 보다보다 너무 답답해서 전화드린 거에요.
S#34. 이교수 랩 / 밤
정적 속에서 아무도 없는 랩실. 주욱 팬하여 보면..지원이 혼자 앉아 옆에 자료들을 쌓아놓고 작업을 하고 있다.
문득 손이 멈춘다. 저도 모르게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S#35. 원격강의실
다른 이는 아무도 없이 비어있는 공간. 그 한곳에 정태가 혼자 앉아있다. 정태도 손목시계를 본다. 지치는 기분.
뒤로 기댄다.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정태 : (E)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조용히 음악이 시작되고... 정태, 지친 얼굴을 부빈다. (시는 편안한 어투로 읽어주시길...)
정태 : (E)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정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후딱 뒤를 돌아본다.
문이 열리고 연구원 하나가 들어오더니 입구 근처의 책상에 놓여졌던 복사물 한뭉치를 집어들고 다시 나간다. 문이 다시 닫기고.
낙담하여 다시 고개를 돌리는 정태... 그 위로 계속..
정태 : (E)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S#36. 박교수 랩
지원이 입구 쪽에서 불을 끈다. 어두워지는 실내. 지원 나간다. 문이 닫히고.. 그 위로 계속.
정태 : (E)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S#37. 캠퍼스 / 밤
책들을 가슴에 안은 지원이 천천이 걸어오고 있다. 그 위로 계속..
정태 : (E)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S#38. 원격강의실
무릎에 양팔을 얹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정태. 그렇게 기다리다가 문득 일어선다.
옆의 가방을 둘러메고 입구로 걸어나간다. 그 위로 계속...
정태 : (E)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S#39. 반도체동 앞 / 밤
정태가 건물을 나서고 있다. 천천이 걸어가는 정태. 그 위로 계속..
정태 : (E)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정태 어둠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윽고 정태의 모습이 아웃되고..
빈 공간 위에 음악의 여운이 좀 더 충분히 깔리고....
S#40. 민재/정태의 방 / 밤
민재, 침대 위와 바닥에까지 서류들을 늘어놓고 작업을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정태가 들어선다.
민재 : 어서 와라. 아직 안죽고 살아있었냐?
정태 대꾸도 없이 뚜벅뚜벅 들어와 책상에 가방을 던져놓다가 멈추어 서있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의자를 발로 냅다 걷어찬다.
민재 어이없어 보고 있다가.
민재 : 그거 말야. 의자를 집어들어서 저기 벽에다 몇번 패대기를 쳐봐. 그 정도는 해줘야 의자가 부서질걸.
정태 대꾸없이 걸어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벌컥벌컥 마신다.
보고 있는 민재의 얼굴 위로...
경진 : (E) 그래서 술을 멕였어? 잘했다아. 너 제법이다야.
S#41. 경진/ 지원의 방 / 밤
여전히 환자의 모습인 경진이 입에 체온계를 문 채로 전화를 하고 있다.
경진 : 그래 어디까지 꺼집어냈어? ..뭐? 어디서 기다렸다구? 어머.. 몇시까지. ....저런.. 에구에구.. 지원이는 아까 열한시쯤에 들어왔지.
어째 지원이 얼굴도 영 마이너스더라구. ...그래서.
S#42. 민재의 집 근처 골목 / 밤
민재가 추운지 웅크리고 서서 핸드폰을 하고 있다.
민재 : 뭐가 그래서야. 정탠 지금 뻗어 자고 있고. 난 이렇게 몰래 너한테 보고를 하고 있잖냐.
나아참. 나두 이거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뭐? 내일 정태 시간표? 그건 알아서 뭐하게.
S#43. 경진의 방 / 밤
경진 : 내가 다 생각하는 게 있어서 그래. 내일 정태 시간표 좀 알아서 알려줘. ...야아.. 나 지금 환자잖아. 내가 직접 그거 알려구
뛰어다녀야겠냐? (여전히 사탕처럼 체온계를 물고 있음)
하는데 문이 열리며 세수를 마친 지원이 들어오고 있다.
경진 : (얼른 환자의 목소리로) 어어.. 알았어. 문안 전화해줘서 고마워. 안녕. 잘자. (전화 끊으며 괜히 지원에게) 민재야. 빨리 나아서
나오래. 내가 없으니까 센터가 엉망인가봐.
지원 : (경진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체온계 제대로 물고 있었던 거야?
경진 : 그러엄. 한번도 안 빼고 물고 있었지.
지원 : (체온계를 빼내어 수치를 본다) 이게 뭐야. 어제밤보다 열이 더 올랐잖아.
경진 : 정말?
지원 : 38도가 넘어있는데. 안되겠어. 너 내일 병원에 가보고. 학교는 하루 더 쉬어. 위성센터에는 내가 전화해줄게.
경진 : 안 되는데. 나 내일 중요한 일이 있는데.
지원 : (기운이 없다) 니 몸이니까 니가 알아서 해. 이불이나 잘 덮어.
지원, 자기 책상으로 간다. 경진 이불을 끌어덮으며 지원 쪽을 살핀다. 지원은 책상 앞에 멀거니 서있다.
경진 : (머뭇거리다가 그 등에 대고) 너 괜찮아?
지원 : ....
경진 : 너두 어디 아픈 거 같은데.. 괜찮은거야?....나한테 감기 옮은 거 아니지?
지원 : ....(생각난 듯 책을 챙기는)
경진 : ..내가 다 낫기 전엔 아프지 마. 내가 간호해줄수가 없잖어. 날 봐라. 난 옆에 날 보살펴 줄 사람이 없을 때에는 절대로 안 아프다구.
왜? 난 현명하니까.
지원, 갑자기 들었던 책을 놓더니 문으로 간다. 경진, 어어해서 보는데. 지원 급하게 나가고 있다.
S#44. 기숙사 복도 / 밤
지원이 빠르게 걸어오고 있다. 계단으로 온다. 막 몇걸음 내려가다가 멈춘다. 다시 올라온다. 그러다가 다시 몸을 돌이킨다.
그러나 다시 내려가지는 못한다. 그렇게 어쩔줄 모르고 서있다가 지원 결국 계단에 힘없이 주저앉는다.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다가 고개를 드는데.. 스스로도 당황하면서 울고 있다.
S#45. 캠퍼스 / 낮
오가는 학생들.. 여늬때와 다름없이 지속되는 하루 일상.
S#46. 센터 내 복도 / 낮
석우가 손에 들린 서류를 보며 걸어오다가 지나친 계단 참을 다시 돌아와 기웃거려 본다.
거기 민재가 나름대로 구석에 숨은 자세로 핸드폰 전화를 하고 있다.
민재 : 너 지금 지 정신이냐? 무슨 헛소릴 하구 있는거야.
석우, 민재를 부르려다가 좀 더 듣는다.
민재 : 너 아무래도 열이 나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인데. 난 아직 제정신이야. 그러니까 그딴 소리 나한테 안 먹혀.... 야야. 민경진.
석우, 좀 생각해본다. 상대가 경진인 것을 알고는 그냥 조용히 지나쳐 가버린다.
민재 : 제발 부탁인데.. 약 먹고 이불 뒤집어 쓰고 계속 자라 응? 너 도대체 나를 뭘루 생각하고 있는거야?
S#47. 경진의 방
경진이 방 가운데에 이불을 둘러 쓴 모습으로 앉아서 전화를 하고 있다. 오래 앓아서 기운도 없는 목소리로.
경진 : 난 너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지. 니가 그랬잖아. 계속 좋은 친구로 있고 싶다고. 그래서 난 너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거니? (계속 불쌍한 어조로) 그리고 이게 나 좋자고 하는 일도 아니잖아. 우리의 친구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구.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니? 아니지? .....그래. 진작 그렇게 말하지. 나 힘도 없는데 왜 자꾸 여러 말을 시켜.
....사실은 널 도와줄 사람도 벌써 다 수배해놨어. 지금 니 전화만 기다리구 있을거야. ...그래. 너만 믿고 있을게.
너 믿고 나 이제부터 편하게 잘게. 너 잘해야 돼. 응.. 안녕.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쉰다. 그리고는 혼잣말...
경진 : 구지원. 내가 너 땜에 이런 치사한 말까지 한다.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밥이나 사줘라.
S#48. 이교수 랩
중희와 명환이 마주 앉아 뭔가 상의를 하고 있고.
만수는 운동벨트에 들어가서 덜덜 거리고 있고. 해성이 그 옆에 서서 진지하게 만수가 하는 것을 보고 있다.
만수 : 봤지? 이렇게. 허리를 날씬하게 하고 싶다. 그럼 이 부분에 대고.. 들들들들... 가슴근육을 발달시키고 싶다. 그럼 여기 이렇게..
아아아아..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고 싶다. 목을 튼튼하게 해야겠다. 그럼 요기 목에다 대고 ..엄마야. 헥헥..
하는데 정태가 들어선다. 해성이 정태를 보더니.
해성 : 아 김정태한테 전화왔었는데.
정태 : 무슨 전화.
해성 : 반도체동에 원격강의실이 있는데..
정태 : 알어. 근데.
해성 : 이따 저녁 여덟시까지 글루 오래.
정태 : 누가.
해성 : (생각해보더니) 어떤 남자가.
정태 : 어떤 남자라니?
해성 : ...그냥 남자.
S#49. 박교수 랩
지원이 들어서고 있다. 규한이 혼자 랩을 지키며 게임을 하고 있다가 지원을 힐끗 보고.
규한 : 구지원. 책상에 봐봐.
지원 : (책상으로)
규한 : 거기 전화 받은 거 메모해놨어. (게임에 열중하며) 야아.. 이거 그래픽은 죽이는데 시나리오가 엉망이구만.
지원 : (메모를 보며) 이거 누가 전화한건데.
규한 : 뭐야 이거. 게임이 이래가지구 팔리겠나. (게임에 정신이 팔려있다)
지원, 단념하고 다시 메모를 들여다본다.
S#50. 반도체동 앞 / 밤
열리는 유리문. 정태가 안으로 들어간다. 유리문이 스르륵 닫긴다.
S#51. 원격강의실 내부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정태. 두리번거리며 걸어 들어오다 멈춘다.
저 앞에서 혼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지원이 돌아보다가 정태와 시선이 마주친다. 서로 놀라서 잠시 보다가..
정태 : 웬일이야?
지원 : 난.. 누가 불렀다고 해서 왔는데.
정태 : 나도 그런데.. 선배가 불렀나. ...(아무래도 어색하다) 학회 일정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
지원은 더 어색하다. 시선을 피하더니 시계를 들여다본다.
정태 : (혼잣말처럼) 사람을 불러놓고 왜 안오는거지.
문쪽으로 다시 간다. 문을 열려다가 당황한다. 문이 잠겨있다.
돌아보면 지원이 일어서며 의아해서 보고 있다.
정태 : 문이 잠겼어.
지원 : (놀라서 보는)
정태 : 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누가 잠갔나봐. ...전화를 해보지뭐.
영사실로 들어간다. 지원, 영사실 쪽으로 다가온다.
S#52. 강의실 문 밖 복도
닫겨져 있는 문에서 주욱 빠져 보면 그 앞에 민재와 백곰이 긴장해서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백곰 : (손에 들린 마스터키를 달랑거리며) 자아. 이렇게 해서 둘만의 조용한 시간을 만들어줬다 이거지.
민재 : 아마.. 한시간 정도면 될거라고 보는데요.
백곰 : 나도 저 두 사람을 좀 아는데 말이지. 둘 다 말발이 아주 센 편이지?
민재 : 그..렇죠. 아주 세죠. 둘 다.
백곰 : 그럼 한시간으로 승부를 가리긴 좀 어렵지 않을까.
민재 : 두세시간은 필요할까요?
백곰 : 서너시간 정도는 놔둬보자구. 완전히 세상과 차단된 조용한 링 가운데서 맘껏 승부를 가려봐라 이거지.
민재 : 완전히 차단이 됐다면..
백곰 : 내가 미리 손을 좀 봤지. (하면서 등 뒤에 돌렸던 손을 내미는데 전화기가 들려있다)
민재 : (이해했다) 아주 치밀하시군요.
백곰 : 하나 더 있어.
민재 : 뭐가요
백곰 : 완전한 무대효과.
S#53. 원격강의실 내부
영사실 내에서 두리번거리던 정태가 지원을 돌아본다.
정태 : 여기 분명히 전화가 있었는데..
지원 : 없어?
정태 : 이상하네.. (하며 한번 더 둘러보는데)
순간 전등불이 꺼져버린다.
놀라는 두사람이 어둠 속에 보이고.... 잠시 조용했다가...
정태 : 정전인가본데. 조금만 기다려봐. 랜턴 같은 거 있는지 찾아볼게. (부시럭거리며 찾는...) 무서워 할 거 없어.
이 건물, 자가발전기 있으니까 금방 전기 들어올거야.
지원 : 정전은 아닌 거 같애.
정태 : 뭐?
지원 : 거기 기계들은 전원이 들어와 있어.
보면 어둠 속에서 영사기기들의 전원 램프가 파랗게 혹은 빨갛게 비춰지고 있다.
지원 : 그리고.. 내 걱정은 하지 마. 무섭지 않으니까. (잠시 사이) 니가 있어서 ..괜찮아.
정태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다시 정태가 부시럭거리며 뭔가를 한다. 기계들의 전원을 켜고 있다.
지원 : 뭐 하는거야?
정태 : 빛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어두우니까.. 빛이 필요하잖아.
정태 덜그럭거리며 손으로 더듬어가며 테잎을 기계에 넣고 있는 중이다. 정태 이게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는데..
다음 순간 지원의 얼굴에 비추어지는 빛.. 지원 눈을 찌푸리며 앞의 스크린을 본다.
스크린에 영상이 들어오고 있다. 피아노 연주 실황이다.
잠시 후 정태가 볼륨을 만졌는지 피아노 연주 소리가 자그맣게 들려나온다.
영사실 앞, 벽에 기대서있던 지원이 말없이 화면을 본다.
정태가 그 옆으로 나와서 나란히 서서 화면을 본다.
지원 : ... 리차드 클레이더만이야. 저 피아니스트.
정태 : ...그래?
다시 침묵... 둘 다 나란히 서서 화면만 보는 자세로..
지원 : 너한테 사과할 게 있어.
정태 : 어제 일이라면 사과할 문제는 아니야. 내 맘대로 기다리겠다고 한거니까.
지원 : ... 니가 보내준 작업 파일. 내가 지웠어. 니가 밤새서.. 날 위해서.. 작업한건데 내가 지웠어.
정태 :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지원 : 난... 지금 한계치야. 매일 똑바로 서있기 위해선 내 모든 힘을 다해야 돼.
정태 : 알어.
지원 : 그런데.. 이럴 때 누구한테 기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릴거야. 그게 무서웠어.
난 나를 통제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니가 준 파일.. 받을 수가 없었어.
정태 : ... (문득 혼자 웃더니) 오늘 며칠이지?
지원 : (돌아본다)
정태 : (마주 돌아보며) 오늘 날짜를 기억할려구. 왜냐하면 지원이 니가 무너지기 시작한 날이니까.
지원 : (보는데)
정태 : (두어걸음 나서서 지원을 향해 돌아서더니) 난 이제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구. 니가 조금이라도 무너져 주길 바라면서 말이지.
지원 : (울 것 같은 기분인데)
정태 : 우리 아무래도 좀 더 기다려야 될 거 같어. 누군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그때까지 저 앞에 앉아있지 않을래?
정태 앞서서 몇걸음 내려가다가 돌아보면 지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그런 지원을 보다가 정태 한 손을 내민다.
지원, 그 손을 본다.
정태, 기다린다.
이윽고 지원, 손을 내밀어 정태의 손을 잡는다.
정태, 활짝 미소지으며 오래 기다려온 그 손을 꼬옥 잡아 이끈다. 그렇게 내려오는 두사람에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