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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2012][저어새, 날아가다] 유보라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2.11.06|조회수2,657 목록 댓글 2

[저어새, 날아가다] 유보라

 

 

 

 

 

 

 

 

 

 

#. 프롤로그 / 갈대밭

 

갈대밭이 바람에 휩쓸리면서 마치 비가 오는 듯 쏴아, 하는 소리.

한껏 누운 갈대밭 위로 언뜻 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저어새.

서서히 다가가려는 순간, 유연한 날갯짓으로 날아오르는 저어새. 하늘로 치솟아 순식간에 멀어져 버리면.

다시금 텅 빈 하늘, 갈대밭에 스치는 바람소리만 쓸쓸하게 들린다.

그 위로 타이틀. ‘저어새, 날아가다’

 

 

1. 장례식장 로비 / 저녁

 

문상객과 관계자들로 어수선한 장례식장. 한쪽에 이제 막 차려지고 있는 제단.

식장 앞에 고인의 이름이 적힌 안내판. ‘전청수 - 5호실’ 그 아래 ‘상주 - 전경호’라고 적힌 표지를 무심히 보는 경호.

상주 표식 완장을 손에 든 채 머뭇거릴 뿐, 들어가지 못한다.

상조 회사 직원, 영정 사진을 올려놓는데, 경호, 결국 영정 사진을 보지 않고 돌아 나온다.

 

 

2. 배식실 / 저녁

 

어슬렁거리며 배식실을 지나치던 경호, 안에 있는 동료 작가 이, 박을 보고는 들어온다.

테이블에 널린 빈 술병들. 그 중에 이 작가는 서툴게 문자를 보내느라 여념이 없다.

 

경호 : 왔어요? 빨리 왔네?

박 작가 : 경호야,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냐, 어?

 

들어오는 경호를 보고 일어나는 박 작가. 박 작가가 끌어당기는 바람에 엉거주춤 앉게 되는 경호.

 

박 작가 : (경호에게) 경호야… 인간이 그래, 백 년도 못 살고 죽어. … 근데 니 아부진 아직 좋은 나이 아니시냐?

이 작가 : (끼어드는) 뇌종양이셨다잖아. 넌 이렇게 심각하면 전에 말 좀 하지, 자식.

경호 : …….

박 작가 : (한숨) 인생 별 거 없어. 까딱하면, 가는 거야.

이 작가 : (다시 끼어드는) 경호야, 니 동기들한텐 연락했냐?

경호 : 아직이요.

박 작가 : 사람 가는 거 순식간이다, 경호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는데)

이 작가 : (휴대폰 보며 인상 쓰는) 뭐야, 이거 왜 다 지워져!

경호 : …….

박 작가 : 만고강산 살 거 같아 아등바등 대면 뭐하냐, 저 가는 때도 모르는 게 인간인데. (하는데)

이 작가 : (박 작가에게) 형, 청문 편집장 전화번호 좀 줘봐.

박 작가 : 나도 모르지, 안 본지가 몇 핸데…. (갑자기 짜증이 나는) 넌 그 전화질 좀 그만해! 내가 얘기중이잖아.

이 작가 : 내가 지금 괜히 그래요! 연락 돌리는 중이잖아.

 

경호, 시끄러워지는 게 싫은, 제 휴대폰을 꺼내 이 작가에게 넘긴다.

 

이 작가 : (전화 받아들고는) 그래, 니 걸로 한 번에 보내자. (문자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입력하는 형식이 달라 낑낑대다가)

             에이, 이건 또 왜 달라! (몇 번 더 시도하다) 아유우! 휴대폰 문자 보내는 것도 통일 못 시키는 나라니

             동서고 남북이고 통일될 리가 있겠어!

 

투덜투덜 대면서 문자를 보내는 이 작가와 못마땅해 하는 박 작가.

경호,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주 완장만 만지작거린다.

 

 

3. 경호의 집, 거실 / 새벽

 

경호 들어가면, 현관 센서 등이 켜지며 경호의 모습을 비춘다. 그러나 곧 꺼지며 다시 어둠.

경호,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방문 앞으로 갔다가 남자 코고는 소리가 들리자 들어가지 않고 돌아선다.

 

 

4. 경호의 집, 경호의 방 / 새벽

 

책상 위에는 책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켜켜이 쌓여있다. 경호, 책상 위에 스탠드만 켜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몸을 뒤척여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경호. 전화를 걸고는 벨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꺼버리는데, 그 행동이 익숙하다.

한동안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내 울리는 전화벨. 발신자, 명은.

 

경호 : (일부러 기운 없는 목소리로) 어디야? … 태준인? … 아아, 얘기 들었어?

 

경호, 베개를 끌어와 머리에 제대로 대고는,

 

경호 : 뭐. 아직은 실감이 안 나. 뵌 지도 한참 됐고… 아부지하고야 왕래가 뜸했으니까. … 됐어, 오지 마.

         (하다가 떠보는) 그래? 그럼 올래? …… 사랑한다고 말해주라 …

 

대답 듣고는 전화 끊는데, 만사가 귀찮은 몸짓. 누운 채로 바지만 대충 벗고는 자버린다.

 

 

5. 경호의 집, 거실 / 아침

 

방에서 나오는 경호. 잔뜩 구겨진 와이셔츠, 트렁크 팬티 차림으로 나온다.

현관에서 남편을 배웅한 경호의 엄마, 영지. 현관문 닫는 소리와 함께 경호를 대하는 영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꼴이 우스운, 나잇값을 못하는 경호가 못마땅하다.

경호의 눈에 소파에 놓인 상복이 눈에 띈다.

 

영지 : 니 아빠 거야. 식장에서 빌려 입은 거 보다 낫겠지.

경호 : (상복 건성으로 보며) 새아버지 상복입고 친아버지 상 치르는 거, 불편해요.

영지 : (맘에 들지 않는, 신경질이 나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했길래 제대로 된 상복 하나 없어?!

경호 : … 안 올 거예요?

영지 : (머뭇거리다) 가서 뭐 해. 뭐 좋은 관계라고.

경호 : 생판 모르는 남은… 잘도 챙기면서….

영지 : 남이면 낫지.

경호 : (짜증스런) 뭐, 좀! 헤어지더라도 친구처럼, 그런 거 안돼나?

영지 : (버럭) 친구 될 사이였으면 헤어졌겠니!

 

경호,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면, 변기에 오줌 떨어지는 소리, 물 내리는 소리,

곧이어 웩웩 거리면서 양치하는 소리 적나라하게 들린다.

그러는 동안 영지는 의미 없이 상복 소매의 솔기를 뜯는다.

 

영지 : 병이 심했다디?

경호 : (수건으로 입 훔치며 나오다가) 심하니까 돌아가셨겠죠.

영지 : 무슨 대답이 그래? 남이니?

경호 : 남이 더 낫다며? … 떨어져 산 날이 길었는데, 나라고 뭘 알겠어요?

영지 : …

 

두 사람 사이, 다시 침묵이다.

 

 

6. 화장장 / 오전

 

화장터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 덤덤한 표정으로 그저 보고 있는 경호.

그때, 경호 곁으로 다가오는 중년의 남자, 경호에게 서류봉투를 내민다.

뭔가 싶어 보면, 각종 서류 속 주소가 적힌 메모와 함께 열쇠 꾸러미.

 

중년 남 : 자네 아버지가 중환자실 들어가기 전에 정리해 둔 걸세. 따로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유족이라야 자네 한 명 아닌가.

경호 : …….

 

경호, 열쇠 꾸러미를 물끄러미 보는데,

 

 

7. 경호 父의 집 앞 / 오후

 

열쇠가 돌아가며 찰칵, 하는 소리.

문을 열었지만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 마냥 조심스러운 경호.

 

 

8. 경호 父의 집 안 / 오후

 

단출한 살림살이. 하얀 눈 위를 사뿐사뿐 걷고 있는 저어새 한 쌍의 사진을 보는 경호. 아무리 둘러보아도 눈에 익은 물건이 없다.

경호, 아버지가 더욱 타인처럼 느껴진다. 반쯤 열린 방문으로 향하는 경호.

 

 

9. 경호 父의 집, 방안 / 오후

 

소박한 분위기의 방안. 창문 사이로 붉어져가는 햇빛이 들어온다. 앉은뱅이책상이 창가에 놓여 있다.

창문을 열어보는 경호, 은행나무가지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린다.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는 경호. 아버지가 썼던 물건들은 경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그때, 경호의 손에 잡히는 구형 필름 사진기. 꺼내려다가 무심결에 버튼을 누르면 ‘찰칵’하고 찍히는 카메라.

순간 이게 뭔가 싶어 보면, ‘26’이란 카운트 표시. 아직 필름이 남아있다.

필름에 찍힌 사진이 무얼까, 문득 궁금해지는 경호.

카메라에 눈을 대고 방안을 둘러보다가 벽 위에 걸린 낡은 양복에서 시선 멈춘다. 찰칵, 양복 위로 후레쉬가 터진다.

 

 

10. 승용차 안 / 저녁

 

운전 중인 경호. 조수석에는 아버지 집에서 가져온 카메라가 있다.

휴대폰 벨소리. 스피커폰으로 받는 경호. 말하는 주체는 보이지 않으면서 그 주체의 목소리나 생각 등이 들리는 기법.

시나리오상에서는 V.O나 v/o로 표기된다.

 

명은 : (v.o) 어디야?

경호 : 아부지 집에 갔다 가는 길이야.

명은 : (v.o) 못 가서 미안해. 일이 좀 있었어.

경호 : 됐다. 니가 그 집에 매인 몸인 거 모르는 바 아니다.

명은 : (v.o) … 괜찮아?

경호 : 모르겠어. (한숨) 그냥… 별 게 없어. 너무.

명은 : (v.o) 뭐가?

경호 : 혼자 산 남자 집. 재미가 없다고. 우리 아부지 말이야. 스물 셋에 결혼했다고 들었거든. 지금 생각하면… 어리지.

         결혼하자마자 바로 나 낳고는 10년도 안 돼 이혼해, 재혼도 안하고 평생 혼자 사시느라 고생했겠지.

         그리곤 덜컥 뇌종양에… 인생 이렇게 끝날 줄 아셨을까? … 재미없다, 진짜.

명은 : (v.o) 재미로 사나. 사는 게 그렇지 뭐. 아등바등 살다가, 하나씩 포기하면서, 그렇게 사는 거라고.

         재밌어서 사는 게 아니라.

경호 : (표정) 너도 그래? 포기 못해, 그렇게 사는 거냐?

 

전화기 안에서 띵동, 하는 차임벨 소리.

 

명은 : (v.o) 미안, 나중에 전화할게.

 

대답할 틈도 없이 뚜뚜뚜….

 

경호 : (혼잣말) 황태준… 타이밍도 좋다….

 

 

11. 한강변 / 오후

 

산책로를 걷고 있는 경호. 동작대교 밑,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와 어슬렁거린다.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으면 동작대교 위로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인상을 쓰며 방향을 바꾸는데, 경호의 얼굴이 누군가를 알아본다.

손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리던 경호, 문득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뀐다.

보면, 이 작가와 태준, 그리고 젊은 여성 두 명이 함께다.

이 작가가 가장 먼저 다가오고 태준과 일행은 자리에 멈춰서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를 한다.

경호,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이 좋지 않다.

 

경호 : (태준 일행에게 눈짓하며) 뭐야?

이 작가 : 니가 외롭다고 우는 소리하니까 같이 온 거 아니야? 저것들 데리고 오느라 얼마나 힘을 뺐는데.

 

 

12. 한강변, 편의점 앞 / 늦은 오후

 

편의점 앞에 마련된 간의 테이블에서 캔맥주를 마시고 있는 경호와 일행들.

땅딸막하고 살짝 대머리 기운에 안경을 쓴 태준과

훤칠한 키에 부드러운 생머리가 이마를 덮어 바람에 살짝살짝 날리는 경호의 모습이 대비된다.

태준과 함께 온 여학생들은 처음 만난 경호를 호기심어린 눈길로 살펴보고 있다.

 

태준 : (여학생들의 시선이 못마땅한, 경호에게) 잘 치뤘어?

이 작가 : (여학생들에게) 이 친구가 얼마 전에 부친상이 있었어요.

 

경호, 이 작가의 말에 괜히 더 표정을 어둡게 만든다.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맥주를 마시는데,

서로 인사할 틈을 놓쳐 분위기가 싸하다.

 

태준 : (여학생들 가리키며) 내 새 조교야. 학생하고. (여학생들한테 경호 가리키며) 나랑은 동기고.

이 작가 : 전경호라고, 소설 좋다아? 잘 보여 둬.

여학생들 : (빙긋 웃으며 고개 까딱하는)

경호 : 학기 중간에, 웬 새 조교?

이 작가 : 전에 있던 애가 유학갔데. 똘똘한 학생으로 다시 뽑은 거지.

경호 : (슬쩍 보고는) 외모로 뽑았는데?

여학생들 : (싫지는 않은, 웃는)

이 작가 : 외모도 중요하지. 좋아서 나쁠 거 뭐 있냐?

경호 : 시 쓴다는 사람이 그런 말 쉽게 뱉어도 돼? 가벼워 보이게.

태준 : 외모 덕 본 사람이 그렇게 얘기해서야 쓰나? 그리고, 좀 가벼워 보이면 어때서?

         시는 꼭 무겁고, 뭔 소린지 모르겠고, 그래야 돼나?

경호 : 그러냐? 그래도 난 시는 좀 그랬음 좋겠다. 시인은 바닥도 좀 치고, 허우적거리는 것도 괜찮다고 해주고.

         지 상처도 다 까발려주고…

태준 : (경호의 말이 아니꼬운) 그래서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셔?

경호 : (움찔하다가, 냉정하게) 너 요새 살기 좋지?

태준 : 나쁠 건 없지.

경호 : 그럴 줄 알았네. (여학생들에게) 얘가 너무 넓은 길로만 다니거든.

         (태준에게) 골목길의 고단함을 알겠어. 생긴 건 진득한 학잔데 쓰는 거라곤 감정놀음에 기교에. 그래도 잘 팔리지?

태준 : 잘 팔리지. 근데 너는? 이도 저도 아니어서 안 쓰는 거야? 학생 때는 지가 제일 잘난 줄 알고 떠들더니…

         여기저기 얼굴만 내밀고 다니면 다냐? 행사다 시상식이다 다 찾아다니고 글은 언제 쓰냐? 연예인이야?

         작가가 얼굴 팔아 뭐하게?

이 작가 : (경호 표정 일그러지는 것 보고는 끼어드는) 요새는 어차피 시대정신이 없단 말이야.

             배고픈 작품 쓰면 유난이고, 시류 따라가면 변질했다 그러니까.

여학생 : 맞아요. 그런 거 같아요.

 

이 작가와 여학생이 이야기하는 동안 묵묵히 술을 비우는 경호. 빈 맥주 캔을 구기는데,

재빨리 일어나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사와 건네는 태준의 조교.

 

경호 : (보곤) 고마워요.

조교 : (부끄럽게 싱긋)

 

태준, 그런 두 사람 보는 표정, 또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좋지 않다.

 

 

13. 모텔 안 / 오전

 

엉망인 채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경호, 상반신을 탈의한 채다.

괴로워하며 눈을 뜨는데, 몸을 움직이자 취기가 더 오르는 것 같다.

옆에 등을 보이고 엎드려 있는 여자의 나신이 언뜻 보인다. 어제의 조교다.

일어나려다가는 다시 누우며 여자의 품으로 파고드는 경호.

 

 

14. 사진관 앞 / 오후

 

어제와 같은 후줄그레한 차림의 경호, 사진관에서 나온다. 경호의 손에 봉투가 하나 들려있다.

발길을 돌려 조금 언덕진 길을 오르는 경호.

나뭇잎 사이사이로 빛이 떨어지는데,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 보는 경호.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사진 한 장을 유심히 본다.

 

 

15. 주방 / 오후

 

식탁 위에 탁, 하니 오르는 사진. 젊은 여자다. 뭔가 싶어 보면, 영지가 사진을 피해 반찬을 내려놓는다.

경호, 쓱 사진 치우고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깨작거린다. 그런 경호를 못마땅하게 보던 영지,

 

영지 : 나가서는 너도 사람인척 하고 다니지? 서른… (하다가) 반올림하면 마흔이지.

         내가 아직도 너한테 밥 차려 내고 술국 끓여줘야 되니?

경호 : (모른 척, 국을 후루룩 마시는)

영지 : (사진 다시 내밀며) 피아노학원 한단다. 밥벌이는 될 거 아니야? 날 잡아?

경호 : (귀찮은) 왜?

영지 : 왜긴?! 왜겠어? 몰라 물어? 너 빨리 치워버리려 그런다. 부끄러워 죽겠어, 아주. 밖에서 사람대접 받으면 뭐하냐구.

         기본적인 사람 구실을 해야지. 열시 열한시까지 내쳐 자고. 나가면 뭐해, 술 쳐먹고 들어오니. 그 나이에 집에 얹혀 있는 거

         너는 아무렇지도 않니? 사람들이 선생님, 선생님 하니까 지가 뭐 잘난 줄 알고….

경호 : (더는 못 듣고 있겠는, 수저 내려놓으면)

 

영지, 말은 독하게 하면서도 반쯤 빈 경호의 국그릇에 다시 국을 한 국자 떠서 준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그릇. 경호의 얼굴이 살짝 가려진다.

 

경호 : (불쑥) 나 어렸을 때, 아버지하고 여행 간 기억이 나. 내 키보다 큰 풀, 갈대밭이었나. 하여간 엄청 넓었거든.

         거기서 아부지만큼 큰 새를 봤는데, 거기가 어디였지?

영지 : (뭔 소린가 싶은)

경호 : 거기가… 어디였더라? 기억나요? 같이 가지 않았어?

영지 : ……

경호 : 어?

영지 : 갔어도 기억 안 나고, 안 갔어도 이상하지 않아.

경호 : ?

영지 : 결혼하고 니 아빠랑 어디 같이 간 기억 없어.

 

영지, 더는 말하기 싫은지 일어나 괜히 싱크대 정리를 한다.

 

경호 : 왜 헤어졌어요?

영지 : ……

경호 : 이제와 말 못할 게 뭐 있어?

영지 : 시끄러.

경호 : 성격차라던가, 경제적 이유라던가. 그런 거 없어?

영지 : 간단해 좋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날 잡으면 멀쩡하게 하고 나와.

 

영지, 경호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경호, 식탁 위에 놓인 선 볼 여자의 사진을 본다.

 

 

16. 경호의 방 / 저녁

 

침대에 누워 사진을 들고 있는 경호. 누운 경호의 옆에 펼쳐져 있는 몇 장의 사진은 갈대밭을 배경으로 한 풍경 사진이다.

(인서트) 손에 든 사진,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을 배경으로 한 여자가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을 살피는 경호의 표정이 진지하다. 갑자기 일어나 앨범을 찾아드는 경호. 어릴 적 사진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17. 출판사 안 / 오후

 

경호가 들어가면 알아보고 일어서는 민영해.

출판사 직원들 몇이 고개만 까딱하고는 일에 집중하면, 일부러 시선 돌리지 않고 영해에게 바로 다가가는 경호.

 

 

18. 출판사 내 회의실 / 잠시 후

 

반투명 유리로 되어 있는 회의실 안. 영해와 단둘이 앉아있는 경호.

 

영해 : 이게 소설집을 내도 문제야. 작품 발표한지 너무 오래 됐잖아. 작년이 마지막이지?

경호 : 예.

영해 : 그것도 단편 아니야? 너 장편 안 쓸 거야?

경호 : …….

영해 : (보다가) 강의 어디 나간다고?

경호 : 아니, 뭐 별 데 아니고….

영해 : 근데 왜 나가? … 이게 문제야. 안정되면 안돼요. 그 별 데도 아닌데 나가서 소속감이 생기니까 자꾸 등한시하는 거거든.

         써. 현실에 발붙일 생각 말고, 쓰란 말이야. 요새 니 작품 거론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

         니 이름 기억하고 있는 독자나 있겠냐?

경호 : 오늘 왜 이렇게 독해?

영해 : 겨울호에 넣자. 단편으로.

경호 : 그렇게 급하게?

영해 : 아버님 돌아가셨다며.

경호 : ?

영해 : 뭐 자극 받은 거 없어? 느낌이 없냐?

경호 : (한숨)

영해 : 섬세한 게 없어, 너는. 감정이 그렇게 무뎌서 어떻게 글을 쓰냐. 전에 뭐더라? 너가 쓴다던 게…

         하여튼, 그거 아버님하고 연결해서 뭐 좀 그럴싸하게 응?

 

경호, 뭐라고 말하려는데 밖이 소란스럽다.

출판사 직원들이 일어나 인사하고 악수하는 번잡한 기운이 유리벽을 통해 전해진다.

영해가 힐끗 유리 너머를 보다가 반갑게 일어선다.

 

영해 : 잠깐만.

 

일어나 바로 나가는 영해. 영해가 여는 문틈으로 황태준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혹여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돌려버리는 경호.

태준의 시선이 경호를 향하는 순간, 스르륵 닫히는 문.

 

 

19. 전통 주점 / 저녁

 

원형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공간. 영해와 태준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경호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영해가 점원을 불러 맥주 세 병과 대구포를 시키는 동안,

태준이 경호에게 책 한권을 내민다. 보면, ‘현대문학수상작, 황태준’이란 타이틀이 박혀있다.

경호, 뜨악한 표정으로 받아드는데 주문을 마친 영해가 끼어든다.

 

영해 : 이번엔 정인숙 작가가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대세가 너로 가나보다. 뒤풀이 장손 잡았어?

태준 : 형이 말한 데서 하려구요. 종로 2가 그 집.

영해 : 거기가 젤 나아. 품위도 있고, 장소도 넓고.

태준 : (고개 끄덕이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좀 많이 올 거 같아서.

경호 : (무심한 태도로 책 뒤적이고 있으면)

태준 : 너도 장편 나올 때 되지 않았어?

경호 : … 나한테 제발, 신경 끄세요.

영해 : 제발 좀, 써라, 써. 너 그 한물간 이 작가니 박 작가니 만나서 술이나 퍼 마시니까 이런 거 아니야?

         감 좋던 애가 같이 휩쓸려서는. 맨날 세상이 어쩌니 사회가 어쩌니 불평불만, 옛날에 잘 나갔다는 얘기, 지겹지도 않냐.

         작가한테 옛날이 어딨어? 좋은 작품이 시간 지난다고 변하디? 지들이 못 내니까…

 

경호, 뭐라 한 마디 하려는데, 갑자기 일어나는 영해.

 

영해 : 편집장님! 여기요, 여기. (태준에게) 황 작가 왔다고 하니까 바로 나오시는데?

 

경호, 편집장 걸어오는 것을 보는데 표정이 좋지 않다. 괜한 자리에 꼈다는 생각에 불편하기만 하다.

 

 

20. 주점 화장실 / 저녁

 

쫄쫄쫄, 삼십대 중반의 나이답지 않게 약한 소변줄기.

지저분한 세면대 거울 앞에 선 경호. 괜히 배를 한 번 툭툭 쳐본다. 탄력이라곤 쥐뿔도 없다.

물을 틀어 손을 씻나 했더니, 손에 살짝 묻히기만 한다. 그러다 생각난 듯, 휴대폰 꺼내 들고 전화하는 경호. 명은이다.

 

경호 : (신호 기다리다) 어, 나야. … 혼자 있지?

 

경호, 전화하면서 화장실 나가고,

 

 

21. 주점 화장실 앞 / 잠시 후

 

경호의 시선으로 보이는 술자리의 모습. 태준의 말에 영해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다.

 

경호 : 나와. 보고 싶다. … 글쎄 나오라니까. 태준이 오늘 늦을 품새다.

 

경호, 술자리로 가지 않고 그대로 입구를 향해 나간다.

 

 

22. 경호의 집, 거실 / 새벽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경호, 샤워를 하고 들어와 머리칼이 젖어있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엄마, 영지.

 

경호 : 안 주무셨어요?

영지 : 잠이 안 오네.

경호 : (들어가려다가, 털썩 옆 소파에 앉는)

영지 : (경호의 젖은 머리칼 보는) 여자가 있는 거니?

경호 : (흠칫, 머쓱해서 머리칼 터는)

영지 : 있음 다행이지, 니 나이에 뭐가 부끄럽다고.

경호 : (TV에 시선 두고 있는 영지 보다가) 엄마.

영지 : (시선 거두지 않은 채로) 왜?

경호 : 아버지, 돌아가신 아버지. 여자가 없었을까?

영지 : (그제야 보며) 뜬금없긴.

경호 : 재혼도 안 하셨잖아요. 이혼하고 몇 십 년 동안 정말 여자를 안 만을까?

영지 : 이제 와 그거 알아 뭐하게. 원래 꽉 막힌 양반이었어. … 얼른 자.

 

영지, 불쑥 TV 꺼버리고는 방에 들어간다.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있는 경호.

 

 

23. 경호의 방 안 / 새벽

 

책을 펼쳐보는 경호. 철새 관련 사진집이다.

풍경과 철새의 사진을 유심히 보다가, 서랍에서 아버지의 카메라에서 뽑은 사진과 비교해보는 경호.

그러다 멈칫, 한다. 갈대밭을 배경으로 한 여자의 사진.

 

경호 : 완…이네?

 

경호의 시선 따라 사진 보이는데, 여자의 뒤쪽 건물에 ‘완이네’라는 간판이 작게 보인다.

포털사이트에 ‘철새, 갈대밭, 완이네’란 검색어를 치는 경호.

 

 

24. 버스 안 / 오전

 

정차한 버스, 입구가 열리면 승객들이 하나 둘 짐을 챙겨 내리기 시작한다.

승객이 거의 내린 버스 안, 코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보면, 고개가 한껏 꺾여 잠이 들어있는 경호다.

‘내리세요!’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짐을 챙겨 허우적거리며 버스를 내리는 경호.

 

 

25. 택시 안 / 오전

 

뒷좌석에 타는 경호. 택시 기사에게 ‘완이네’란 가게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넨다. 택시, 천천히 출발한다.

책을 펼쳐보는 경호. 드넓은 갈대밭과 날아오르는 철새의 모습이 담긴 책자.

사르륵, 몇 장 더 넘기면 책 사이로 여자가 찍힌 예의 사진이 툭 나온다. 사진의 풍경이 책 속의 그것과 닮아있는 듯하다.

경호, 창밖으로 시선이 돌리는데, 도로위의 풍경은 아파트만 즐비할 뿐이다.

자동차의 완만한 흔들림 속에서 경호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시간 경과)

 

기사 : 손님, 손님!

경호 : (잠에서 깨어 보면)

기사 : 더는 못 들어갑니다. 저만치 어딜 텐데.

 

경호, 어느새 창밖으로 펼쳐진 갈대밭을 본다.

 

 

26. ‘완이네’ 앞 / 오후

 

차량이 드문 2차선 도로. 도로 한쪽으로 넓게 펼쳐진 억새풀밭.

풀밭 뒤로는 늪처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강(저수지)이 일렁이고 있다.

멀리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 몇이 눈에 띌 뿐, 인적이 드물다.

그 한복판, 단층으로 된 개조 한옥에 ‘민박, 식사 [완이네]’라고 쓰인 간판이 외로이 눈에 띈다.

도로에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경호, 풀밭 사이로 난 작은 길로 들어선다. 길게 자란 억새풀이 가슴께까지 올라온다.

사진을 꺼내 보고 있는 경호. 사진 속에서 여자가 서있던 장소 즈음 까지 오면,

경호의 시점 샷. 억새풀 뒤 강(저수지)물결 위로 주변의 나무와 산의 그림자가 오롯하게 비춰지고 있다.

사락사락, 풀이 옷깃에 스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점점 ‘완이네’와 가까워지는 경호.

 

 

27. ‘완이네’ 안 / 오후

 

테이블이 몇 개 놓인 작은 식당 안, 손님도 주인도 없다.

잠시 서성이던 경호, 아침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지치고 피곤이 몰려와 털썩 앉고 본다.

얼마 후,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파와 알타리 무 등이 한 가득 담긴 푸르스름한 봉투를 안고 주희가 들어온다.

주희, 탁자 위에 무거운 짐을 올리고 경호를 본다.

 

주희 : 식사하시게요?

경호 : …… 예.

주희 : (주방으로 들어가며) 지금 백반밖에 안 되는데?

경호 : 주세요.

 

경호, 주방에서 움직이는 주희의 실루엣을 살짝 보고는 몸을 돌려 뿌옇고 흐릿한 창밖을 응시한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가끔 주방 쪽을 보기도 하는 경호.

곧, 큰 철제 쟁반에 밑반찬과 공기밥을 내오는 주희.

 

주희 : 국은 좀 끓으면 드릴게요. 먼저 드셔. 오늘 한 끼도 못한 얼굴이길래.

 

주희의 말에 경호가 그제야 주희의 얼굴을 제대로 본다. 대충 뒤로 올려 묶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더분한 차림.

경호, 젓가락 들어 반찬 몇 점을 먹는데 맛있다.

그때 국을 들고 다시 오는 주희. 김이 나는 우거지 된장국이 먹음직스럽다.

국물 떠먹는데, 주희는 경호가 식사하는 옆 탁자에서 파와 알타리 무를 다듬는다.

 

주희 : 어디서 오셨어요? 여기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경호 : 서울이요.

주희 : 혼자 오셨나 봐요?

경호 : 예.

주희 : (얼굴 들어 경호보고는) 낚시하러 오셨어?

경호 : 아니요.

 

주희, 경호와 시선 마주치면 단답형 대답에 민망해 그저 웃고 만다. 주희의 웃는 모습, 사진 속 여자와 닮았다.

경호, 손놀림이 멈춘다. 경호의 노골적인 시선에 어색해진 주희, 묻는 걸 멈추고 파를 다듬는데 열중한다.

식사를 하며 힐끗힐끗 주희를 보는 경호. 주희, 조금 경계하는 눈친지 슬쩍 몸을 튼다.

투박한 식당 안, 벽에 걸린 새와 주변 풍경 사진들을 발견한 경호.

야채 다듬는 주희의 손이 바빠질 뿐, 식당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경호 쭈뼛쭈뼛, 주희에게 말을 걸어볼까 하는 사이, 주희가 다듬은 야채를 챙겨 주방으로 들어간다.

타이밍을 놓친 경호, 어쩔까 하는데, 작은 쪽문에 빨간 색으로 ‘민박’이라 쓰인 것을 발견한다.

 

 

28. ‘완이네’ 민박 / 오후

 

주희, 방문 하나를 열어 환기를 시키고는 걸레를 들고 들어간다.

주희가 방을 치우는 동안, 경호는 그 앞을 서성거린다. 바로 앞으로 억새군단으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나있다.

 

주희 : (방에서 나오며) 여기는 낚시하는 분이나, 겨울에 사진 찍으러 오시는 분들이 잠만 주무시는 데거든요.

경호 : 예.

주희 : 방이 지금은 좀 찬데, 불 떼면 따뜻해져요.

경호 : 예.

주희 : 이만 오천원이요.

 

경호, 주섬주섬 주머니 뒤져 돈을 꺼내는데,

‘엄마!’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예닐곱살 된 사내아이가 식당 쪽 방에서 나와 주희를 부른다.

 

주희 : 잠깐 기다려. 손님 계시잖아.

 

경호, 돈을 건네며 사내아이를 주시한다. 돈을 받고는 웃는 주희.

아이를 향해 가는 주희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경호. 아이가 그런 경호를 이상하게 본다.

 

 

29. 민박 집 방 안 / 오후

 

창문이 있지만 어두침침한 방안. 이부자리가 모서리에 개켜져 있고, 서랍장과 벽거울 이외에 별다른 가구가 없다.

경호, 이불을 베개 삼아 눕는다. 창문으로 억새풀이 바람에 일렁이는 그림자가 어지럽다.

경호, 사진 꺼내보는데, 스르르 눈이 감긴다.

 

 

30. 경호의 기억 / 꿈

 

앞 씬에서 보았던 사내아이가 어린 경호가 되어 제 키보다 높은 억새풀 사이를 걷고 있다.

무성한 억새풀이 무서워 울상이 되는 아이.

곧, 억새풀이 갈리며 어른 남자의 발이 보인다. 아이의 눈높이에선 남자의 허리께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이 : 아빠, 아빠!

 

아이, 남자의 바지춤을 잡고 응석을 피워보지만 남자는 움직일 줄 모른다.

그때 아이의 눈에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반갑게, 남자에게 손가락으로 새를 가리키는 아이.

그러나 남자는 무심히 반대편을 향해 몸을 돌린다.

아이, 새를 보라고 남자를 다그쳐도, 남자의 시선은 펼쳐진 억새군단을 향해 있다.

 

 

31. 완이네 안 / 오후

 

피곤한 얼굴로 가게 안을 들여다보는 경호.

낚시꾼들이 매운탕을 안주로 식사와 반주를 하고 있다. 한쪽에선 사진기를 들고 있는 한 무리의 중년 남자들이 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주희. 잠시 후 사진을 보여주는 중년 남자에게 웃음을 보내는 주희. 뭐라고 말하고, 맞장구치고, 웃는다.

그런 주희를 유심히 보는 경호.

 

 

32. 억새군단 / 석양

 

붉은 석양이 강과 억새군단을 물들이면, 강물이 마지막 태양 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인다.

하얗던 억새풀이 석양의 기운에 붉은 물결이 되어 흔들리고, 강 한가운데 낡은 나무 배 한척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경호, 고즈넉한 풍경에 취해 하염없이 지켜보고 섰는데, 억새풀 사이로 흐릿하게 하얀 무엇인가가 보이는 듯하다.

경호,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데, 어느 순간 보면 푸드득, 사라지고 없다.

억새풀을 헤집고 다니는 경호. 타닥, 물닭의 둥지를 밟아 알이 깨져 버린다.

깨진 알을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데, 어미새는 경호의 인기척에 피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는 바람에 날리는 억새풀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경호 홀로, 억새풀 한 가운데 서있다. 어딘가에서 물닭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휘청거리며 억새풀을 빠져나오려던 경호, 질퍽한 기운에 기우뚱하는데,

보면 얕은 늪지대에 무릎까지 빠져 신발이며 바지가 엉망이다.

 

 

33. ‘완이네’ 안 / 저녁 (인서트)

 

빨랫줄에 걸린 경호의 바지, 나부낀다. 허름한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는 경호.

주희가 나와 찌개와 소주 한 병을 테이블에 올린다.

 

주희 : 날이 차긴 한데, 바람이 있어서 빨리 마를 거예요.

경호 : 감사합니다.

 

식사를 하고 있는 중년 남자, 차림새가 낚시꾼이다.

남자, 경호를 힐끔 보곤 막걸리를 시원하게 마신다.

 

주희 : 오늘 많이 잡으셨어?

낚시꾼 : 블루길 밖에 없어. 예전엔 여기서 연어도 잡혔잖아. 없어, 이젠.

 

주희, 안면이 있는 양, 익숙하게 남자에게 말을 건다. 그런 주희를 보는 경호, 괜히 남자를 경계한다.

주희가 주방으로 들어가면 남자가 자신을 빤히 보는 경호를 돌아본다.

 

낚시꾼 : 뭐요?

경호 : (기가 눌려) 예?

낚시꾼 : 날 알아?

경호 : 아닙니다.

낚시꾼 : (슥 훑어보고는) 혼자 왔어요?

경호 : 예.

낚시꾼 : 뭐, 낚시?

경호 : 아니요.

낚시꾼 : 그럼?

경호 : 여행 삼아….

낚시꾼 : 여행… 좋지이. 여기 좋잖아. 조용하고. 여가 가을이 제일 좋아요.

경호 : 예에. 잘 아시나 봐요?

낚시꾼 : 그러엄. 내 송정 살거든요. 봄 가을엔 꼭 여기와서 살다시피 하니까.

경호 : 새를 좀 볼 수 있나요? 이 부근에?

낚시꾼 : 여기 겨울 되면 사람보다 새가 많다니. 아직 때가 안 맞아 그렇지, 그래도 저 밑으로 가면 오리떼는 한창일건데?

경호 : 오리가 아니라… 흰 샌데. 크고, 부리도 길고, 날개도 크고.

낚시꾼 : 여서 봤다구요?

경호 : …… 아마도…

낚시꾼 : 여름? 겨울에?

경호 : 추웠거든요.

낚시꾼 : 날개가 큰 거면… 저어샌가 보네.

경호 : (눈빛 반짝이는) 저어새?

낚시꾼 : 요샌 보기 참 힘들어. 옛날엔 많았지요. 낙동강에서도 흔하게 보고, 그게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이래 오는데.

            겨울에 오는 건 또 다른 거라 카드라고. 부리가 노래서. 사뿐사뿐 걷는 게 아주 품위 있어.

 

경호, 생각에 잠긴다. 낚시꾼, 막걸리를 챙겨 경호의 테이블로 옮겨온다.

경호, 저도 모르게 부엌 안에서 움직이는 주희를 멍하게 보면, 낚시꾼이 경호의 시선을 눈치 챈다.

슬쩍 주희를 가리려 몸을 기울이는 낚시꾼.

 

 

34. 민박 쪽 화장실 앞 / 저녁

 

화장실에서 나오는 경호, 술기운이 확연하게 올랐다.

주방 쪽 보면 주희가 고무 다라에 다듬은 알타리 무를 넣고 버무리고 있다.

 

 

35. 주방 / 저녁

 

경호, 술기운 빌려 주방으로 들어간다. 인기척에 경호를 보는 주희, 넉살좋게 주희의 옆에 앉는 경호.

 

주희 : 뭐 필요하셔?

경호 : 아니요. 김치가 맛있어 보이길래요.

 

경호, 조금 집어 먹어보는데,

 

주희 : 풋내 날 텐데…

 

김치 씹는 경호 표정, 떨떠름하다. 주희, 양념이 잘 밴 김치를 김치통에 옮겨 놓는데, 경호가 있어 움직임이 불편하다.

 

경호 : (개의치 않고, 떠보는) 남편 분은 안 오시나 봐요?

주희 : 에?

경호 : (대신 김치통 들며) 아니, 이런 건 같이 해야 안 힘들지.

주희 : … 강원도 가서 안 온지 한참 됐어요.

경호 : ?

주희 : 도박에 빠져 살았는지 죽었는지. 기어 들어와야 알지…

 

주희, 빈 고무다라를 들고 수돗가에 가서 씻기 시작한다.

 

경호 : 그래도 이런 외진 데서 일하기 힘들지 않아요? 남자 손님도 많은데.

주희 : 엄마가 자주 와 계세요.

경호 : 에이, 그래도 남편이 있는 게 낫지.

주희 : (한숨) 같이 살아봐야 아는 거지. 남들이 뭘 아나.

경호 : …… 그렇긴 하죠.

 

다라를 뒤집어 물기를 빼는 주희. 허리를 피며, 아유유, 한다.

경호가 급히 주희를 부축한다. 주희, 경호를 향해 배시시 웃는다.

 

 

36. 식당 안 / 저녁

 

낚시꾼, 주희와 함께 앉은 경호. 주희, 막걸리 한 잔을 가볍게 비운다.

 

경호 : (간판 가리키며) 간판에 ‘식사 일절’이라고 쓴 거, 그거 틀렸어요.

주희 : 뭐가?

경호 : ‘식사 일체’ 라고 써야죠. 일절은 아무것도 없다는 건데.

주희 : (웃으며) 그래요? 몰랐네.

낚시꾼 : 아이구, 그러네. 우리 손님이 잘 봤네. 나도 전에 생각은 했었는데.

주희 : 다들 그냥 지나치니까… 어떻게 잘 알아보셨네?

경호 : (멋쩍은) 제가… 글을 좀… 쓰거든요.

주희 : 어머! 그래요? 작가셨구나.

낚시꾼 : (주희의 반응이 못마땅한) 여 오는 사람, 다들 글쟁이라 그러지 뭐.

경호 : (못 들은 척 둘러보며) 사진이 좋네요.

주희 : 사진 찍으러 오는 손님들이, 한 두장씩 주고 가요.

낚시꾼 : 여가 이래 허술해 보여도 겨울이면 손님이 밀려. 방송국서도 오고.

주희 : 겨울엔 힘이 부치고, 없을 땐 또 너무 없고. 시내 나가 남의 집 주방 일 하는 게 날까 싶다가도.

         (경호보고) 밖에 보셔요. 얼마나 예뻐. 난 억새풀이 제일 예쁘더라. 딱 요맘때가.

경호 : 제 아버지도… 이런 데를 참 좋아하셨던 거 같아요.

주희 : 이만한 데가 없어요. 나도 젊었을 땐 여기저기 다 다녀봤는데, 그래도 일루 오게 되더라구.

         여름엔 자운영 꽃이 한창이었는데, 벌써 가을이야.

낚시꾼 : 우리 사장님, 또 무드 타신다. 참 감성적이야. 밥집하고 민박하고 이런 거 하기 아깝다니까.

            (꺼억, 하고는) 내가 송정 사는데, 봄가을엔 꼭 여기 와서 산다니까.

경호 : (취해서 발음이 흐트러지는 낚시꾼은 무시하고) 아버지가 여기에 다녀가셨던 거 같아요.

주희 : 그래요?

경호 : 사진도 좀 찍으시는 거 같아요.

주희 : 여기 사진 찍는 분들 많이 오셔. 손님하고 닮으셨음 점잖으시겠네. 어떻게 생기셨어요?

경호 : … 어떻게 … 생기셨더라…

주희 : ?

 

주희에게 아버지의 외모를 설명하지 못하겠다. 대답 못하고 머뭇거리는 경호가 이상한 주희.

 

주희 : 하긴 뭐, 말한다고 아나. 손님이 한 둘도 아니고.

경호 : 아니, 우리 아부지는 아실텐데. 그러니까, 코는 좀… 콧대는 좀 있고, 왜 생각 안 나세요? 어? 어… 키가 …

낚시꾼 : 에이, 지 아빠 얼굴 생각 안 나는 사람이 어딨어? 아주, 우리 여주인 꼬시려고 별 말을 다 지어내네.

주희 : (괜히 얼굴 붉어지는)

경호 : 아저씨, 그게 아니라…

낚시꾼 :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부터 힐끔힐끔 쳐다보두만. 왜, 남편 없는 여자라 쉽게 넘어올 거 같아?

            여기 여주인이 얼마나 대쪽인데 그래!

경호 : (주희에게) 그게 아니라요. 제가, 사실은 우리 아빠, 저… 아부지가 여기서 사진을 찍었는데…

         옛날에 저랑도 왔던 덴가 해서요…

낚시꾼 : 떽, 남자가 구구절절 변명은, 이 사람아 여기 당신같은 놈팽이들이 한 둘인 줄 알아?

            여자 혼자 장사한다고 넘보는 파렴치한 놈들. 에이 퉤퉤. 더러운 놈들.

경호 : 아, 진짜 아니라잖아요!

주희 : 그만 하세요 들! 허씨도 취했네. 빨리 들어가 주무셔요.

 

주희, 소리 나게 그릇을 챙겨 주방으로 가져가려고 일어서는데, 다급하게 주희를 잡는 경호.

놀란 주희, 무심결에 손을 놓치면 그릇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이 소리에 취한 낚시꾼이 경호의 멱살을 붙들고 선다.

 

낚시꾼 : 뭔 짓을 할려고! 어딜 잡고 난리야! 나도 몇 번 스치지 못한 손을!

경호 : (멱살 잡혀 한껏 표정 일그러져서) 알지도 못하면 좀 가만히 좀!

주희 : 그만 못해요, 진짜?! (그릇 챙기며) 아우, 여자 혼자 장사 한다고 매번 진짜.

         지긋지긋해. 내가 이 꼴을 안 보려면 그만 둬야지. 지겨워. 지겨워.

경호 : (그 와중에도 주희를 향해) 아주머니, 그게 아니라. 그쪽 사진을 찍었다니… (하는데)

 

취해서 휘청이는 낚시꾼이 균형을 잃는 바람에 같이 우당탕 넘어지는 경호.

어이쿠,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허리를 부여잡는 경호.

경호가 지지대가 되어 별로 다친 곳이 없는 낚시꾼, 주희의 날선 시선에 움찔하며 일어나더니

‘취했나’ 하며 능청스럽게 말하곤 민박 쪽으로 들어가 버린다.

 

 

37. 민박집 방 안 / 밤

 

엎드려 누운 경호. 지저분한 트레이닝 바지가 이제는 제 것처럼 어울린다.

티셔츠를 가슴께까지 올리고 있으면, 주희가 파스를 조심스레 허리에 붙인다.

 

주희 : 이걸로 괜찮겠어요?

경호 : 예에 … (끄응, 신음하며) 감사합니다.

 

허리를 손으로 지탱해 일어나는데, 경호의 표정이 진심으로 아프다.

주희, 걱정스럽게 경호를 본다.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신음소리를 내며 책을 끄집어내는 경호.

 

경호 : 아까 그 아저씨 말, 아니에요.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주희 : (피식 웃고 마는)

경호 : (사진 보여주는)

주희 : 어머? 나네?

경호 : (주희의 반응에 의아한)

주희 : (보다가 미소 짓는) 잘 나왔네. 젊게 나왔다, 그죠?

경호 : 예. … 이 사진, 아버지 사진기에서 현상한 건데. 기억 안 나세요? 작년 가을쯤인 거 같은데.

주희 : (뭔가 싶어 경호를 보며) 글쎄요. 가을엔 하도 뜨내기 손님들이 많아서. 사진을 찍었던 거 같기도 하고.

경호 : 이렇게 웃고 있잖아요. 봐요. 카메라 보고 웃는 거, 보통 웃는 게 아닌데.

주희 : (기분 나쁜) 보통 웃는 게 아님, 뭔데요?

경호 : 정말 기억 안 나세요?

주희 : 기억날 만한 게 없는 분이니까 기억이 안 나겠지. 나는 걸 안 난다 해요?

경호 : 이상하네. 웃는 게 진심인데 … 아무한테나 이렇게 웃어줘요? 그건 아니잖아요.

주희 : (경호가 뭐를 묻나 싶은) 그래요, 사진 찍었나 보죠. 사진 한 장 찍었다고 별 사이나 되는 것처럼.

경호 : 그게 아니라, 나는… (사진 가리키며) 애인 사이처럼 보이니까, 아니, 이상한 뜻은 아니구요.

주희 : 애인? 당신 아버지하고?

경호 : 그러니까, 사진이 꼭 그렇잖아요. 애인 찍은 것 같이. 다른 건 아니고. 제 아버지가 뭐, 30년 가까이 혼자 사셨으니까…

         함께 하는 분이 계셨으면 좋은 거죠.

주희 : 아유, 내 참…… 별. 이상한 생각 하나봐. (일어나며) 아무렴 혼자 장사한다고 노인네하고 그럴까.

 

주희, 쾅, 하고 방문 닫고 나가버리면, 멍한 경호, 뭘 잘못했나 싶다.

사진 속의 주희는 여전히 환한 미소로 경호를 바라보고 있다.

 

 

38. 민박집 밖 / 밤

 

어둠속에 희미한 억새군단을 향해 서서 담배를 피는 경호. 한쪽 방에서 낚시꾼이 코고는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담배를 끄고는 주방으로 들어가는 경호. 조심조심 움직이는 소리 경호, 주방에서 나오다가 주희의 방 앞에서

한손에 막걸리, 다른 손엔 저녁에 주희가 담근 김치 한 접시를 들고 귀를 기울인다.

 

경호 : 아주머니, 저 막걸리 한 병 마십니다?

 

방 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한 번 더 불러보고는 제 방으로 돌아오는 경호.

방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댓돌에 쪼그리고 앉아 막걸리를 흔들어 딴다.

벌레 우는 소리, 억새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강물이 찰랑이는 소리.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주위를 둘러보는 경호.

마치 저 풀밭 어딘가에 지난날의 아버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경호의 눈이 기억을 떠올리며 촉촉해진다.

막걸리 마시는 목넘김 소리만 공허하게 들린다.

 

 

39. 주희의 방 (내부→외부) / 밤

 

(E)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주희. 좀체 일어나지 않다가 힘겹게 눈을 뜨면 점점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뭔가 싶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중얼거리는 소리.

 

주희 : (무서워 문은 열지 못한 채로) 뭐예요? 누구세요?

 

가만히 들어보면, 취해서 발음이 흐트러진 경호가 ‘아주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

주희, 짜증이 난다.

 

주희 : 왜요? 뭔데요?

경호 : (v.o) 아주머니. 제 말 좀 … 들어보세요. 제가요…

주희 : 늦었어요! 들어가 주무셔.

경호 : (v.o) 잠깐만요. 아주머니, 잠깐이면 돼요. 예?

 

주희, 망설이다가 문 열면, 문에 기대 있다가 균형 잃고 쓰러지는 경호, 엉겁결에 주희의 방문턱에 걸쳐 앉는 꼴이 된다.

 

주희 :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왜 그러시는데?

경호 : 다시 한 번만 기억해 보세요. 우리 아빠가 아주머니 사진을 찍었잖아요.

주희 : 아, 글쎄. 난 손님 아버님을 몰라요.

경호 : 어떻게 있었던 사람을 모른다고 합니까. 예? (억지로 웃어 보이며) 이렇게, 웃어주고는 모른다니요.

주희 : 손님, 많이 취하신 거 같은데 들어가 주무시고 낼 얘기하세요. 네?

경호 : 왜 기억을 못하세요, 예?! 왜요오! 난 어렸잖아요. 어리니까 까먹었지. 왜 우리 아빠를 기억 못하냐고오.

 

경호, 몸부림치며 소리치자 흠칫하며 물러서는 주희.

다른 방에서 자고 있던 낚시꾼이 소란에 나와 들여다본다.

 

낚시꾼 : 이 사람, 왜 이래, 이거? (주희 향해) 괜찮아요?

주희 : 취했나 봐. 허씨가 좀 방에다 데려다 줘요.

경호 : 취한 게 아니라, 내가 물어보는 거잖아요.

낚시꾼 : 이 사람아, 처음 본 사람한테 뭐 물어볼 게 있다고 이래? 들어가!

경호 : (낚시꾼의 손길 뿌리치며) 아저씬 상관 마시구요! 아주머니, 우리 아빠요. 예?

주희 : (낚시꾼의 등장에 목소리 톤이 올라가는)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그럼! 왜 엄한 사람 잡고 난리야.

경호 : …… 물어보고 싶죠. … 저도 물어보고 싶습니다!

 

낚시꾼에 의해 끌려 나가는 경호, 기운이 없어 별달리 저항도 못한다.

 

경호 : (질질 끌려가며) 돌아가셨으니까, 못 물어보죠. 제가 왜 이러겠습니까. 답답하네. 왜 모르세요? 우리 아빠 죽었다고!

         아줌마, 아무렇지 않아요? 예!? 죽었다니까!

 

경호 방으로 쳐넣고 문을 닫아버리는 낚시꾼. 방 안에서도 경호의 외침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낚시꾼이 주희를 보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주희.

 

낚시꾼 : (왜 저러냔 표정)

주희 : (곰곰이) 봄가을에 왜, 며칠 묶었던 분 얘기하는 거 아닌가?

낚시꾼 : ?

 

제풀에 지쳤는지 조용해지는 경호의 민박집 방. 주희,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본다.

 

주희 : (혼잣말) 갈대밭에서 한참 사진 찍고 가신 분이었는데. … 아유 모르겠다. 정신 나간 남자들이 왜 이렇게 많아.

 

 

40. 주희의 기억 / 갈대밭

 

찰칵, 찰칵. 갈대밭을 향해 셔터를 누르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 경호의 아버지다.

주희, 경호의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주희 : 내 보기엔 한결같은데, 며칠 동안 계속 찍으시네. 사진기로 보면 뭐 달라요?

경호 父 : 예에… 달라 보이네요.

 

주희, 쭈뼛하다. 지나치려다 소쿠리를 놓치는 주희. 집어 올리려 몸을 숙였다 일으키는데, 찰칵.

그런 주희를 경호의 아버지가 찍는다.

 

주희 : 아유, 갑자기 그렇게 찍으시면 좀.

경호 父 : 죄송합니다. 참… 예쁘셔서요.

주희 : (싫지 않은) 이왕 찍으시는 거 그럼 더 이쁘게, 웃는 거 찍어줘요.

 

주희, 경호 아버지 앞에 포즈를 잡고 환하게 웃어준다.

카메라 프레임 안에 잡히는 주희의 모습.

셔터에 손을 댄 경호 아버지의 손이 떨린다. 머뭇거리던 손, 천천히 셔터를 누른다. 찰칵.

 

 

41. 민박집 방 안 / 새벽

 

맨 바닥에 쪼그려 자고 있는 경호. 김치 국물이 군데군데 묻은 트레이닝 바지 차림의 모습이 초라하다.

몸을 떨다가 잠에서 깨는 경호, 마른 기침을 한다. 갈증이 나 물을 찾는데,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마시다 푸, 그대로 뱉어 버린다. 보면, 마시다 만 막걸리 병이다.

잠이 덜 깨 균형 감각이 없어 네발로 기어서 밖으로 나가는 경호.

 

 

42. 수돗가 / 새벽

 

몸을 한껏 구부린 채로 수도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는 경호.

어느 정도 갈증이 풀려 몸을 일으키면, 물이 경호의 가슴부근까지 흘러있다.

부르르, 몸이 떨리는 경호. 조금씩 해가 밝아오고 있다.

경호, 덜 떠진 눈으로 어둠이 걷히는 억새군단을 본다.

석양이 질 때와는 달리 푸르스름한 빛과 검은 강 표면이 어우러져 스산한 느낌이 든다.

경호의 바스트 샷. 날이 밝아지며 경호의 얼굴에서 서서히 음영이 걷히기 시작한다.

바람이 불면 하얗게 익어가는 갈대가 너울거린다. 넋을 놓고 보던 경호, 에? 하며 한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경호의 시선이 닿는 곳, 하얀 갈대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 (환상처럼 보여도 좋다)

유유히 공중으로 날아오른 새, 커다란 날개를 기세 좋게 몇 번 퍼덕이더니

날개를 곧게 편 채로 얼마간 하늘 위를 빙 돌며 소소히 난다.

 

경호 : (웅얼거리는) 새… 새다…

 

곧이어 낮게 뜬 구름 속으로 올라가는 새 … 어느새 모습을 감춘다.

경호, 아… 한숨인지 신음인지, 길게 뱉어낸다.

멀뚱히 서서 이젠 새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흐린 하늘만 멍하게 보다가, 주저앉고 마는 경호.

 

 

43. 버스 정류장 인근 / 이른 아침

 

2차선 도로 한 복판에 덩그러니 있는 정류장.

진흙이 얼룩덜룩 남아있는 바지 차림의 경호, 억새 군단을 등지고 하염없이 걷고 있다.

혹여 버스나 택시가 오나 뒤를 돌아보기도 하는데 간혹 트럭이 지나갈 뿐, 통행하는 차량이 뜸하다.

포기하고 계속 걷고 있는데, 뒤에서 차가 오는 소리 들린다. 뒤돌아보는데, 웬걸, 택시다.

‘빈차’ 표시는 없지만 일단 서서 손을 흔들고 보는 경호.

경호 앞에 선 택시, 살짝 창문을 내리면,

 

경호 : 터미널이나 시내까지 좀 부탁드립니다.

 

썬팅 된 유리창 너머, 운전기사가 고개를 끄덕하는 게 보인다.

 

 

44. 택시 안 / 이른 아침

 

뒷자리에 앉아 몸을 떠는 경호. 새벽부터 나와 한기가 들어 뭉친 어깨를 풀다가 문득 앞좌석을 보면,

조수석에 파마머리를 한 중년 여자가 앉아있다.

경호, 모른 척 시선을 돌리는데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슬쩍 경호를 본다. 어색한 침묵.

이때, 여자가 휴대폰을 받는다. 조용조용 말하는 여자, ‘잠깐 나왔어, 왜 일찍 깼어? 가스 켜지 말고, 엄마가 가면 해줄게.

할머니는?’ 이라는 말들이 띄엄띄엄 들린다.

일부러 창문을 열어 소음을 만드는 경호.

경호, 물기가 가시지 않은 조수석 여자의 머리칼을 유심히 바라본다.

 

 

45. 경호의 방 / 오전

 

침대 위에 벗어놓은 옷가지로 지저분한 방안.

문이 열리며 영지가 들어온다. 영지, 얕게 한숨을 쉬고는 창문 열어 환기시킨다.

책상 위에 영지의 오래된 앨범이 놓여있다.

 

영지 : 이건 왜 갔다났데?

 

그러면서도 오랜만에 보는 앨범이라 몇 장 넘겨본다. 젊은 시절 영지의 모습이 흑백 사진에 담겨 있다.

영지, 몇 장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다가는 앨범 덮어 챙긴다.

빨랫감을 챙기려 옷을 툭툭 털어 잡는데, 마른 흙 찌꺼기와 함께 억새풀 한줄기가 바닥에 떨어진다.

억새풀을 들어 보는 영지, 그냥 버리지 못하고 계속 본다.

 

 

46. 한강변 / 오후

 

나무 밑 벤치. 예의, 억새풀 사이에서 웃고 있는 민박집 주희의 사진이다. 주희의 사진 뒤에 다른 사진이 겹쳐져 있다.

경호, 천천히 뒷장의 사진을 보는데, 역시 억새풀 사이에서 웃고 있는 여자의 사진이다.

언뜻 비슷한 구조로 찍혀져 있는 사진, 그러나 그 흑백사진이다.

한숨 내쉬며 사진을 다시 집어넣는 경호.

 

 

47. 경호의 집, 거실 / 오전

 

사우나에 다녀온 영지. 들어오자마자 시원한 물을 따라 마시는데, 경호가 방에서 나온다.

잠에서 깬 모습이 아닌, 외출 준비를 끝내고 웬일로 가방까지 들고 있다.

 

영지 : 무슨 일이래, 아침부터?

경호 : 아버지 집, 어차피 비어 있으니까 거기 좀 가있을게요. 원고 청탁 받은 게 있어서…

영지 : 언제부터 가려 썼다고 유난이래?

경호 : 주말 지나 와요.

 

경호, 그대로 거실 지나쳐 현관으로 간다. 말이 심했나 싶은 영지, 냉장고 열어 홍삼 몇 팩을 꺼내 들고 뒤따라온다.

 

영지 : 니 아빠 집, 괜찮디?

경호 : 예.

영지 : 혼자서 잘 먹고 산 거 같아?

경호 : … 나도 잘 몰라요.

 

경호, 신발 신고 가방 들다가 영지를 본다. 물기가 떨어지는 웨이브 파마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육십에 가까운 나이가 무색하게 곱다고 생각한다.

 

경호 : 엄마. 젊었을 때 미인이었겠어.

영지 : (왜 이러나 싶은 표정) … 돈 필요하니?

경호 : (피식) 난 누구 닮았어요? 아부지 닮았나?

영지 : (보면)

경호 : … 목소리 기억나요?

영지 : (뜬금없는) ?

경호 : 돌아가신 아부지. 사진 같은 거 보면 알겠는데, 목소린 전혀 생각이 안 나. … 어땠어요? 굵었어? 뭐, 허스키하거나…

영지 : …… 지금 니 아빠 목소리도 기억하기 바쁘다. … 그 양반 목소리, 기억하지두 않고 나지도 않아.

경호 : (본다)

 

잠깐 침묵.

 

영지 : 무슨 얘기 쓰려고?

경호 : … 빌어먹을 사랑 얘기. …… 갔다 올게요.

 

경호가 더는 말없이 나가버리자, 영지는 뭔가 싶다.

닫힌 문을 물끄러미 보고 서있는 영지. 아차 싶어 보면, 손에 홍삼진액을 그대로 든 채다.

 

 

48. 경호 父의 집, 방 / 저녁

 

아버지가 쓰던 앉은뱅이 책상에 노트북을 켜놓고 앉아 있는 경호.

단 번에 몇 줄씩 쭉 쓰다가,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다시 지우다가를 반복한다.

담배를 찾다가 보면, 이미 비어있는 담뱃갑. 담뱃갑 구겨 던지고는 다시 쓰기 시작하는 경호.

 

(시간 경과)

창문으로 들어온 밝은 빛이 방안을 비춘다. 책상 앞에 경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저 구석에서 벽에 기대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경호.

 

(시간 경과)

타닥타닥, 노트북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책상 앞에 앉은 경호의 뒷모습.

 

 

49. 출판사 안 / 오후

 

출판사 직원 몇몇, 들어오는 경호 보고는 가볍게 눈인사 하고 만다.

영해가 자리에 없어 뻘쭘해진 경호. 책장에서 지난 계간지를 들춰본다. 매 계간지마다 목차에 태준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계간지를 덮어버리는 경호, 그때 휴대폰 울린다. 발신자, ‘명은’이다.

때마침 영해가 다가와 전화 받지 못하는 경호.

 

 

50. 2층 바 / 저녁

 

영해가 앞장서고 뒤따라가고 있는 경호. 입구에 ‘현대문학상 수상집’ 책이 쌓여 있다.

긴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 들어오는 영해와 경호를 보고는 아는 척을 한다.

태준이 기분 좋게 술에 취해 평론가와 떠들고 있는 게 보인다.

테이블 가에 앉은 경호, 인사가 끝나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여기저기 인사하고 뒤늦게 경호의 앞에 앉는 영해.

 

경호 : (다짜고짜) 선배… 어때요?

영해 : 어?

경호 : 원고. 봤으면 가타부타 말이 있어야 될 거 아니야.

영해 : (건성) 아… 야, 근데 너 답지 않게 웬 순정 놀음이냐?

경호 : ….

영해 : 그런 멜로 너무 올드하지 않아? … 너 요새 연애하냐?

경호 : 그래서, 어떻다는 건데?

영해 : 손 좀 보자. 뻔한 부분이 있잖아.

경호 : 어디가 뻔한데? 형한테 그 얘기가 뻔해? 그래?

영해 : 경호야… 진득한 사랑? 요즘 세상에? 그게 뻔하고 올드한 거야.

경호 : 그게 왜 뻔하고 올드한 얘기야? 형은 그런 뻔한 사랑 해봤어? 어? 그런 사랑 하는 놈이 요새 몇 이나 될 거 같아?

         그러니까 이건 순수, 정정한 마음… (하는데)

영해 : 알았어, 알았어. 잠깐만.

 

영해, 태준 옆에 자리가 나자 재빨리 일어나 자리를 차지한다. 뻘쭘해진 경호, 괜히 맥주만 들이킨다.

태준 곁에서 역시 쭈뼛거리던 조교가 경호가 혼자되자 슬쩍 자리를 옮겨 아는 척을 한다.

경호와 얘기를 주고받으며 술을 몇 모금 하는 조교.

그런 두 사람을 슬쩍 보는 태준. 심사가 불편한 눈치다.

 

 

51. 아파트 내 공원 / 새벽

 

벤치에 앉아 전화를 걸고 있는 경호. 앉아서도 몸이 휘청하는 게 술이 오른 모습이다.

신호음이 가지만 받지는 않는 상대방, 명은이다.

에이취, 몸까지 굽혀가며 크게 재채기를 하고는, 다시 전화를 걸려는데,

가로등 밑으로 조교의 부축을 받으며 오는 태준의 모습이 보인다.

경호, 피해보려는데 이미 늦었다.

 

태준 : 어어? 전경호?

 

조교, 어색하게 인사하면.

 

경호 : (조교 보고) 뭘 여기까지 와요? 가, 내가 올려 보낼게.

 

경호도 취한 게 역력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조교.

 

태준 : 진희야, 가서 여명 좀 사와라. 어?

조교 : (머뭇) 네.

경호 : 됐어. 가요, 가.

태준 : 니가 뭔데?!

경호 : 조교가 술시중 드는 사람이냐!

태준 : 미친놈. 니가 할 말이냐!

 

조교,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얼굴 붉어지다가 이내 자리를 피한다.

 

태준 : (다시) 퍽이나 니가 할 소리다.

 

태준, 뭘 어쩌지도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벤치에 앉는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경호의 휴대폰 울리고, 발신번호만 확인하고 받지 않는 경호.

태준, 그런 경호가 아니꼽다.

 

태준 : 왜 안 받냐? 내가 아는 사람이라서?

경호 : ….

태준 : 우리 집 여긴지 어떻게 알았냐?

경호 : (옆에 앉는, 될 대로 되라) 너 보러 온 거 아니다.

태준 : … 미친 놈…. 뻔뻔한 새끼….

 

태준, 일어나 경호 멱살 잡으려다 휘청거리며 넘어진다. 뭐 씹은 표정으로 태준 보다가, 안됐는지 부축해 벤치에 앉히는 경호.

 

경호 : 너… 왜… 왜 명은이랑 결혼했냐?

태준 : (빤히 보는) 넌 왜 그랬냐? 명은이가 너한테 푹 빠져있는데 뭐가 아쉬워서 후배들이랑 쳐 자고 다녔냐?

경호 : (한숨)

태준 : 아랫도리 관리 잘 해라. 그때야 젊어 호기라지만, 이젠 추하다. 작품으로 보여줘야지, 여기저기 얼굴 내밀어 빌어먹을 거야?

 

경호, 태준과 얘기하기 싫어 일어서는데,

 

태준 : 명은이 친정 갔다. 여기 없어, 새끼야. (혼잣말처럼 웅얼웅얼) 뭐에 토라졌는지 며칠째 말도 없다가…

경호 : (듣기 싫은, 가려는데)

태준 : (키득키득 웃으며) 내가 명은이한테 결혼하자고 안했다. 명은이가 먼저 손가락 걸었다.

경호 : (보면)

태준 : 내 외모면 바람은 안 필거라고 생각했나.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는) 왜 나랑 결혼했지?

         너랑 나랑 요만-큼도 안 닮았잖아?

경호 : … 니가 입학 때부터 내내 명은이 해바라기 한 거… 미련한 놈.

태준 : 맞다. 미련하다, 사랑… 니미. 사랑하지. 해바라기 했다. 근데 …

경호 : (걸음 멈추고 다시 보면)

태준 : 너한테서 뺏으려고 결혼했지. 너한테 너무 아까운 여자잖아. … 난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었거든. 너랑 다르게.

         그래서 너도 비참하게 하려고. 명은이 없어 아쉬운 줄도 모르는 놈. …… 넌 좀 비참해져 봐야 되거든.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본다. 태준, 일어나려다 보기 안쓰럽게 넘어진다.

내키지 않지만 태준을 부축하는 경호. 경호의 부축이 싫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태준.

 

 

52. 엘리베이터 안 / 새벽

 

경호의 부축을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타는 태준, 안전봉을 잡으면서 경호에게서 떨어진다.

태준이 층수를 누르기도 전에 6층을 눌러버리는 경호. 취했어도 경호의 행동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태준.

한층 한층 올라가고 곧 도착하려는 순간,

 

태준 : 이혼 해줄까?

경호 : ?

 

경호, 태준을 보는데 태준의 눈빛이 진심으로 힘들어 보인다.

태준, 눈물을 보일 것만 같다가, 눈 부릅뜨고는,

 

태준 : (일부러 웃음 섞으며) 니들이 바라는 게 그거 아니야? 드런 년놈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니들이 하는 게 사랑이냐.

 

태준, 곧 달려들 것 같은 기세. 경호, 흠칫 물러서는데,

 

 

53. 6층 엘리베이터 밖 / 새벽

 

엘리베이터 열리며 나오는 경호, 태준과 한바탕 몸싸움을 해 흐트러진 모습.

 

태준 : (입가에 상처) 주먹도 좋다, 넌. (기침)

 

엘리베이터 앞에 주저앉는 태준. 갑자기 어깨가 들썩인다.

 

경호 : (보다가, 어이없는) 우냐?

태준 : 그래. …… (꺽꺽)

경호 : (난감한 표정)

태준 : (눈물 감추지 않는) 그래 운다. 그러니까… 니가 나 좀 봐주면 안돼냐.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태준.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태준 : 못하겠다. 씨발… 도저히 못 헤어지겠다. 나는 명은이 아니면 안 되겠다. (엉엉, 우는) … 넌 아니잖냐. 넌 여자 많잖아.

         … 그러니까 나 좀 봐주라. 명은이 좀 놔주라.

 

경호, 멀뚱히 태준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나 우월감이 아닌, 넋이 나간 얼굴이다.

돌아서는 경호의 뒤로,

 

태준 : 넌 명은이 없이도 살 수 있잖아!

 

경호 얼굴, 일그러진다. 그러나 태준처럼 눈물이 흐르지는 않는다.

 

 

54. 경호의 집, 주방 / 새벽

 

주방 등이 켜져 있어 어느 정도 훤한 거실.

경호, 들어오면서 불을 끄려는데, 주방에서 영지가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영지 : (경호 꼴을 보고는) … 너 참…

경호 : 뭐 해요?

영지 : (코고는 소리 나는 안방 가리키며) 아빠랑 청량사 갔다 올 거야.

경호 : 거긴 왜요?

영지 : 가을 다 가기 전에 여행 좀 갔다 오려 그런다.

 

경호, 냉장고에서 맥주 꺼내서는 식탁에 앉는다. 영지가 준비 중이던 음식에서 당근을 골라 아작거린다.

 

경호 : 죽은 아부지랑은… 여행 간 적 없어요?

영지 :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바로) 없어.

경호 : …… 아부지랑… 왜 결혼했어?

영지 : (돌아보고는) 니 할머니가 좋아하셨어.

경호 : 에?

영지 : 니 삼촌, 가정교사로 와서 살았는데, 똑똑했거든.

경호 : 엄마는요?

영지 : 할머니가 좋아하셨다니까… 그땐 그럼 됐어.

경호 : 연애도 못하고 바로 결혼했겠네?

영지 : 연애는 했는데….

경호 : 그때도 별 맘이 안 생겼어요?

영지 : (싱크대에서 달그락거리며 담담하게) 다른 사람하고 했지, 연애를. 그래서 니 아빠랑 결혼하기 싫었어.

경호 : (표정)

영지 : (한숨) 그 양반도 알았을 텐데… 미련했지.

 

경호, 영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경호 : 그래서… 헤어졌어요?

영지 : (컵 가져와 경호의 맥주를 조금 따라 마시고는) 그래…. 정으로 산다는 말, 난 모르겠더라. 넌 사랑이 참아지디?

경호 : (피식, 헛웃음 나는) … 어우, 어색하다, 이런 거… (뒤로 물러나는)

영지 : 니 엄만 태어나면서부터 육십 이었는지 아니.

 

경호, 빈 맥주캔 구겨 쓰레기통에 넣는다. 영지도 싱크대로 돌아가 컵을 씻는다.

 

경호 : (안방 보다가) 지금 계시는… 분이에요?

영지 :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아름답게 마무리됐음… 니 아빠한테 덜 미안했겠지.

 

쏴아, 수돗물소리가 침묵을 메운다.

경호, 설거지하는 영지의 뒷모습을 보는데, 문득 낯설다.

다시 태준이랑 싸우다 난 손의 상처를 보는 경호, 다른 손으로 꾸욱 눌러보는데, 아프다.

 

 

55. 경호의 방 / 이른 아침

 

밖에서 부산한 소리가 나도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는 경호.

방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외출 준비를 끝낸 영지가 방안을 들여다본다. 미동 없는 경호를 보고는 나가는 영지.

곧이어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난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책상을 뒤져 아버지의 필름 카메라를 찾아 들고는 뛰어 나가는 경호.

 

 

56. 납골당 / 오전

 

경호,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묵묵히 바라본다. 쟈켓 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꽂아 놓고 가는 경호.

유골이 쭉 나열된 길고 좁은 통로를 천천히 걸어가는 경호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잡힌다.

대리석 바닥에 닿는 구두소리가 점점 멀어질 즈음, 살짝 보이는 사진.

구도가 갈대밭에서 웃고 있는 주희의 사진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꽃밭에서 코스모스 한 송이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영지의 모습이다.

(영지의 의상은 씬 55에서 외출시에 입었던 차림이다)

 

 

57. 한강변 / 오후

 

말끔한 양복 차림으로 한강을 향해 앉아 있는 경호. 강 건너 유령도시처럼 보이는 아파트.

흑백 사진 한 장을 만지작거리는 경호. 라이터 불을 사진의 모서리에 갖다 댄다. 서서히 타들어가는 흑백 사진.

(인서트, 사진) 사진 속 갈대밭 한 가운데 영지, 젊다. 갈대를 손에 들고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다.

사진에서 영지의 어깨가 타들어 간다. 영지의 머리 위로 막 날아가기 시작한 하얀 새 한 마리가 보인다.

사진에서 영지의 한쪽 얼굴이 타들어간다. 영지가 든 갈대 뒤로 펼쳐진 하얀 갈대밭. 갈대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58. 경호의 기억, 갈대밭

 

어린 시절의 경호, 제 키보다 큰 갈대밭에서 아버지의 바지춤을 꼭 붙들고 섰다.

그때 경호의 눈에 보이는 커다란 새 한 마리.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아빠를 불러 새를 가리키는 경호.

그러나 아빠의 시선은 바뀔 줄을 모른다.

 

경호 : 아빠, 아빠. 새다, 무지 큰 새다.

 

경호, 새가 점점 멀어지자 급한 마음에 아빠를 더 세게 흔든다. 그러다 아빠를 올려다보는 경호.

아빠,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양 시선을 돌려버린다.

아빠가 화난 것 같아 움츠려드는 경호의 눈에 멀리서 낯선 남자와 사진을 찍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여자, 포즈 취하며 돌아서는데,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 젊은 영지다.

 

경호 : 어, 엄마다. 엄…

 

경호가 엄마를 부르려 하자 덥썩 경호를 꽉 안아버리는 아빠. 경호, 아빠의 가슴에서 숨이 막혀 켁켁 거린다.

아빠의 심장 박동이 거세지는 것을 느끼는 경호의 눈에 점점 하늘 높이 사라져가는 저어새가 보인다.

 

 

59. 한강변 / 이어서

 

다 타들어간 사진이 뜨거워 더 이상 손에 들고 있지 못하겠는 경호.

결국 놓아버리면 바람에 날려 날아가는 사진의 마지막 조각. 바람에 떠밀려 점점 높이, 멀리 날아가는 조각.

경호, 휴대폰을 들어 명은의 전화번호를 익숙하게 누른다. 이번에는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신호음을 듣는다.

전기톱 소리가 갑자기 섞이며 경호의 목소리를 덮는다.

경호, 계속 이야기를 하며 소리가 나는 쪽을 보면,

한강 정비 사업단이라 쓰인 잠바를 입은 인부들이 한강변의 버드나무를 자르려고 준비 중이다.

인부 중 한 명이 손을 휘두르면, 전기톱 소리가 멈추고 다른 나무로 이동을 한다.

경호, 다시 시선을 한강 쪽으로 돌린다.

 

경호 : 저어새 말이야. 넓적한 부리로 바닥을 저어 먹이를 찾아 저어새래. 다른 새처럼 먹이 사냥도 못하고… 미련하지?

         그런데 엄청 아름답더라. …어렸을 때 봤지. … 명은아. …… 태준이 말이다.

 

다시금 전기톱 소리. 말하지만 잘 들리지 않는 경호의 목소리. 전기톱 소리 멈추면.

 

경호 : 진짜야. 그 자식이 내 앞에서 울더라니까. 근데 난 눈물이 안 나더라. 내가 부끄럽고, 내 존심 상하는 게 먼저더라.

         … 너 때문에 울지 못하겠더라.

 

다시 전기톱 소리. 이번엔 조금 멀리서다.

 

경호 : 내가 널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태준이처럼?… 우리 아부지가 그랬던 것처럼?

 

전화기 너머 ‘무슨 소리야’ 하는 명은의 목소리가 들린다.

 

경호 : … 나, 선 봤다 …

 

경호, 전화를 끊고 강 건너를 응시한다. 멀리서 나무가 쓰러지며 우지끈 하는 소리 들려온다.

경호의 뒷모습,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 끝 -

 

 

 

 

 

 

 

 

 

 

 

 

 

 

 

 

 

 

 

 

 

 

 

 

 

 

 

 

 

 

 

 

 

 

 

 

 

 

첨부파일 [저어새 날아가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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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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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꿈꾸는앤 | 작성시간 13.02.22 지난 가을 이 작품 드라마로 잘 봤는데...여기 있었네요.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다반향초 | 작성시간 14.11.17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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