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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홍시] 권도희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2.11.06|조회수1,029 목록 댓글 1

[홍시] 권도희

 

 

 

 


  1. 교실
  칠판 한 귀퉁이의 날짜. 1980년대 10월 어느날이다.
  여고2학년의 교실안, 수업 시작전의 어수선함 속에서,
  영희(17세), 시를 적은 숙제장 펴놓고 암기 열중한다.
  형섭(남, 27세)이 들어오자, 영희, 자세 단정히한다.
  형섭, 칠판에 ‘詩의 世界’를 적는 동안, 학생들 책장 넘기고 큼큼 마른기        침, 책걸상 당기는 소리 등의 작은 소음들.
  형섭, 교탁 앞에 바로 선다. 소음들 잠잠해지길 기다린다
  영희의 나레이션 들어간다.

나레이션 나는 그를 잘 안다.  (형섭의 목소리 흉내내어) 숙제 해왔나?
형섭 (OL) 숙제 해왔나?
          - 학생들, 대답없다.
나레이션 시 지어 온  사람.
형섭 (OL) 작시해 온 사람.
         - 학생들, 서로 눈치보며 둘러본다. 역시 대답없다.
형섭 그럼 모두 시 열수씩 외워왔겠군.... (출석부를 편다.)
나레이션 오늘은 21일이다.
형섭 21번.
       - 영희, 일어난다.
형섭 (교단 내려와 창가로 가며) 시작해라.
영희 제목 능금.  김춘수 (형섭을 힐끗 본다)

          - 형섭, 창가턱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발끝에 시선을 둔다.

영희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 영희, 힐끗보다가 형섭이 뒤돌아 창너머를 응시하자 낭송 흔들린다.

영희 스스... 로의 무게로
  떨어져 나온다.... 떨어져 나....
형섭 (그대로 창밖을 보며)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형섭, 영희 눈부신 축제의 (형섭, 낭송 그만두고)
영희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영희 이미 가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물은
  이... 이...
형섭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물은
  이  아쉬운 자리에는
형섭, 영희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 두 사람의 마지막 낭송이 좋자, 여학생들 우와~ 탄성.
         영희, 실죽샐죽 웃으며 고개 숙인다.

형섭 (돌아보며) 수고했다.
나레이션  앉으라는 소리다.

       -  영희, 얼굴을 붉히며 고개 숙인다.

형섭 ... 수고했다.
          - 영희, 그대로 서있고, 교실에 긴장이 감돈다.
  학생들, 서로 눈짓한다. 영희의 짝궁 순자,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당기며              눈치준다.  형섭, 영희를 의아하게 쳐다본다.
           순자, 영희의 옷자락을 콱 잡아당겨 앉힌다.

형섭 다음 31번.
        - 31번 일어나서 시암송하고,
            영희, 웃음 패이며 노트에 적는 글과 동시에.
나레이션 그가 나를 보았다. 처음으로 오랫동안.
  
            2. 교무실
  형섭, 책상 위의 홍시 두알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인서트) 감이 담긴 광주리를 들고 웃고 있는 연이(32세, 여)

정선생 (소리) 요즘 애들 같지 않아요. 누군지 몰라도.
형섭        네? 

          - 정선생(여, 36세), 형섭의 옆 자기책상에 앉으며,

정선생 홍시요.  
형섭 아, 예...  ( 홍시 정선생 앞으로 옮기며) 드세요.
정선생 아뇨, (책 넘겨보며) 오늘은 안 먹어요.
형섭        이거 참...
정선생      한번이라두 먹어봐요. 매일 갖다놓는 정성이 있지.
형섭        (피식 웃으며) 감을 못 먹어서요.
정선생      에?

  3. 순자네 집, 앞뜰 평상 -- 오후
        붉게 익는 감나무 아래 평상에서 순자, 은이, 혜진, 영희 제멋대로들
            눕거나 앉아  있다.

순자 내 전학와 가꼬 너를 본 이래로, 말 한마디 붙이는 걸 못 봤다.
혜진        영희 쟤 (머리 콕콕치며) 일루 보내잖아, 일루
순자        텔리파시나 보내는기 그기 무신 사랑이가?  혼자서 소설 쓰는 거제. 
영희 사랑은 어렵게 얻을수록 값진거야.  니가 뭘안다고 떠드니?

          - 은이, 혜진 저들끼리 통하는 눈짓하며 킥 웃는다.

  4. 형섭의 하숙집 마당 (저녁)

  ‘ㄱ’자 한옥집, 마당 수돗가에서 형섭, 세면하고 있다.
  대문 모서리에서 고개 빼고 형섭을 몰래 훔쳐보는 영희.
  뒤에서 은이, 혜진, 키득댄다.
  영희,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다.
  형섭, 대문 쪽의 기척을 느끼나 모른척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행랑 자기 방으로 다가가는데, 대문 쪽의 소란.
  싫다고 뻗대는 영희를 은이와 혜진이 억지로 마당 안으로 밀어 세운다.
  영희, 형섭이 보자 고개 꺽인다.
  은이와 혜진, 키득대며 함께 도망친다.
  형섭, 어이없다.
형섭 ...
영희 ...
형섭        (나가주길 바라는 기색으로) 큼, 큼...

          - 영희, 웃옷자락을 만지작거린다.

형섭 (하는 수 없이) ... 누구... 찾아왔니?

       - 영희, 꼼지락대던 손짓거리 멈칫한다.

형섭 ... ?

       - 영희, 고개를 반득 들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형섭을 노려보는데
  눈물 한줄기 주르룩 흐른다. 영희, 파다닥 뛰쳐 나간다.
  이때, 드르륵 안채 마루문 열리고, 미숙 (33세, 여), 쌀그릇 들고 나온다.  미숙 ... ?

  5. 형섭의 하숙방 -- 비오는 밤
  창, 처마의 빗물 떨구며 추적추적 내리는 비.
  형섭, 학생들의 과제물을 검토하고 있다. 잘못된 맞춤법이나 행간을 붉은              색 펜으로 교정한다.
  다음 노트를 펴놓는데, ‘김영희’ 2학년 3반 21번. 
  첫장을 넘기니 <능금> 시 적혀있다.

소리(영희의)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6. 기차길 (회상컷)
         빠앙-  기차가 지나가고, 
  (E,OL) 어무니이!’ 하는 절박한 소년의 외침.

  7. (다시 현재) 하숙방
            (E) 창밖의 빗소리 낮게 들리고.
  형섭, 재떨이에서 담배갑와 라이터를 집어 피워문다.
  (E) 낮은 빗소리 커지며...

  8. 시골집, 안방 -- 저녁 (회상, 14년전)
  (E)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할머니(65세), 바느질하고 있고, 형섭(13세), 엎드려서 숙제한다.
  할머니, 바느질 멈추고 방밖으로 귀기울인다.

할머니 무신 소리 못 들었냐?
형섭 빗소리 말여?

        - 할머니, 다시 바느질하고, 형섭은 숙제를 한다.

할머니 어이쿠! (손가락 입으로 빤다.) 일이 손에 안잡히는갑다....

        - 바느질감 한 옆으로  밀어놓고 청자담배갑에서 한 개피 피워 물며,
  마당으로 난 쪽방문을 연다.
  (E) 빗소리 시원스레 들이친다. 
  할머니, 마당을 보며 담배 한두모금 피우다가 ...

할머니 할미가 옛날 얘기 하나헐티니 들어보라니?  

          -  형섭, 대꾸대신 바닥을 기어가는 벌레 한마리를 본다.

할머니      옛날에 말이다, 워떤 기생이 있었거든? 성이 응씨라서 응기생이라 불렀               는디 길을 가다 워떤 양반을 보구는 홀딱 반했드랴.

       - 형섭, 벌레를 잡아 꼼짝 못하게 등짝을 누른다. 버둥대는 벌레.

할머니 아 근디, 이 양반이 공부밲에 모르거든? 그러니께 기생은 상대도 안혀.

       - 형섭, 벌레 다리를 하나씩 손톱으로 끊어간다. 

할머니 ... 무신 소리 안났냐?
형섭 (깜짝 벌레를 감추며) 자꾸 무신 소리가 난다 그려?
할머니 이상두 허지? 빗소리가 꼭 발소리로 밻힌다니... 워디까지 얘기 했쟈?
형섭 (모르겠다) 결국엔 기생이 감낭구가 됐단 얘기 아녀...
할머니 그렇지. 왜 감이 익으면 빨갛니 눈에 잘 띄잖여. 나 점 봐달라구.
  서방이 본척두 안혀주니께 애는 타구 말은 못하니께 속까지 빨갛게 여문   것이구먼.
형섭 ... (시무룩)
할머니 시시허냐...?
형섭 맨날 듣잖여.

          - 알전구의 불이 지직거리다가 정전된다.

할머니 또 나가뿌리네. 초 점 갖다주라니?
형섭 야아. (일어나서 마루로 나간다)

  9. 마루
  형섭, 뒤주 위의 초상자에서 한자루 빼내는데,
  마루 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잡종개 쫑, 사립문을 보며 컹 짖고 일어나
  꼬리를 흔든다. 형섭, 돌아보면,
            우비 입은 아버지(37세)와 우산 쓴 연이(32세), 마당으로 들어와 선다.

형섭 아부지....

          - 아버지, 웃고는 저벅저벅 걸어들어온다
          - 연이, 밝은 호기심으로 고개 기웃대며 형섭을 본다

할무니 (쪽방문으로 내다보며) 누가 왔냐.... ( 표정 활짝 피며 ) 왔구먼....
  
  10. 안방
            촛불에 비친 벽 그림자 부걸거린다. 
  할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는 연이와 아버지.
  방구석 한켠에 앉아 연이를 살피는 형섭, 낯설다.

할머니      (연이의 손을 잡고서) 오느라 고생 많았네.
아버지 거기 있지만 말구 가까이 와라.

        - 형섭, 더 뒤로 물러 앉으며 연이를 힐끗본다.
  연이, 형섭과 눈길 맞추며 싱긋 웃는다.
  형섭, 얼른 시선 감춘다.

아버지 얼릉, 새어머니께 인사드려야지.

           - 형섭, 뚜우한 표정으로 아버지 흘긴다

할머니 야가 지금 수줍음 타는갑다.

        - 어른들, 형섭보며 웃는다.
 


            11. 시골집, 마당 -- 낮
  마당 감나무, 사다리에 올라 형섭이 감을 따고, 아버지는 아래에서
  장대로 따고 있다.
  흰색 원피스의 연이, ‘저기요, 저기’ 하다가 잘못 떨어지는 감을 보면
  ‘앗’ 작은 비명 지르고 광주리로 받아내며 어린아이처럼 즐겁다.
  형섭, 하나를 따서 연이에게 내린다.
  연이, 광주리에 담고 형섭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는다.
  형섭, 눈을 껌벅이며 연이를 본다.

  12. 마루 -- 낮
  마루에 앉아 할머니, 아버지, 연이, 홍시를 먹고 있다.
  연이, 홍시를 반으로 갈라 붉은살을 호르륵 호르륵 잘도 삼킨다.
            입가에 가득 홍시를 묻히고, 연이를 지켜보던 형섭, 꿀꺽 침 넘어간다.  
            연이, 홍시 하나를 다 먹자, 손가락에 묻은 것까지 알뜰하게 먹어치운다. 
            형섭, 흉내내서 손바닥에 묻은 감물 핥는데,

할머니      웬일이랴? 벨로 먹지두도 않던 걸 다 핥구?
          - 형섭, 멋쩍어진 손 바지춤에 쓰윽 문대자
            연이, 형섭의 손을 잡고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형섭 손수건 쥐어준다.

연이        (입가에 손가락을 빙 돌리며 닦으라는 시늉) 
할머니      감물 들면 빠지지도 않는다. 아까운 수건 베릴라.
연이        아깝긴요....
          - 형섭, 연이의 손수건 바라본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손수건.
  
  13. 마당 --- 밤
  형섭, 안방에서 나와 아래춤을 잡고 마당 울타리로 뛰어가서 쉬를 본다.
  휴우... 살것같다. 바지 추스리고 마루 댓돌로 올라서는데, 건넌방에서
  숨죽여 나는 소리.

연이(소리) 하지마요. (사이) 하지 말라니까....

       - 형섭, 건넌방 툇마루로 가서 엿본다.

  14. 건넌방
  아버지, 무릎을 대고 엎드려 연이에게 자꾸 보채고, 연이는
  아버지를 밀쳐내고 있다.

아버지 (연이의 목덜미를 덥썩 물듯이 덤비며) 왕!
연이 (밀쳐내고는 입에다 손가락대며 안방을 가리킨다) 들려요...
아버지 (연이의 가슴팍에 덤비며) 왕!
연이 (싫지 않다) 왜 이래 정말....
아버지 (으르렁대다가 연이의 몸 여기저기에 입을 갖다 대며) 왕!왕!왕!왕!
연이 (킬킬 간지럼타며 피한다)
아버지 왕! (연이를 덥쳐 이불로 쓰러진다. )

  15. 건넌방 툇마루
         형섭,  문에서 눈을 떼고 돌아서서 우웩!

  16. 강가 -- 낮
  발가벗은 형섭, 첨벙첨벙 강으로 뛰어든다.
  햇볕을 받으며  한가로롭게 떠 있는데,
  할머니, 연이, 빨래감을 들고 강가로 온다.

할머니 쟈가 형섭이 아녀?
형섭 (연이를 보자, 머리만 남기고 몸을 물속으로 감춘다)
할머니 지금 무신놈의 멱이여... (형섭에게) 안 춥냐?
형섭 괜찮어유.

  (시간경과)
  강가에 벗어놓은 형섭의 옷.
  강물속 형섭, 아래턱을 덜덜 떨고있다.
  할머니와, 연이, 치마자락 걷어 올리고 물로 들어와  이불 호청을 헹군다.              형섭, 더 뒤로 헤엄쳐간다.

할머니 이제 그만 나와 어여. 그러다 감기들라.
형섭 할무니부터 빨리 가유. ( 첨벙첨벙 일부러 더 크게 헤엄친다)
할머니 쟈가 왜 저런댜....?

           - 연이, 웃고, 빨래 헹군다.

  17. 시골집, 마당-- 낮
  빨래줄에 널리는 호청.
            형섭,  쫑의 목을 쓰다듬으며 빨래 너는 연이를 훔쳐본다.
  호청 뒤로 연이의 모습이 가려진다.

형섭 (사립문 밖으로 멀리 막대를 던지며) 가져와, 쫑.
           - 쫑, 달려가고, 형섭, 호청에 어린 연이의 그림자를 본다.
  호청 하나가 더 널리며, 그림자가 바람을 타고 나풀댄다.
         쫑, 컹 짖는다.  형섭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
  연이가 보자,
형섭 (의식하듯) 가져와, 쫑, 달려가.
        - 쫑, 오히려 형섭에게 달려와 얼굴을 핥는다.
연이        에게.... 
형섭 (쫑을 밀치며) 아휴... 

  18. 마루 --- 어스름 저녁
  마루에 거두워 놓은 빨래와 호청.
  쫑이 마루 아래서 물끄러미 형섭을 바라보고 있다.
  형섭, 빨래더미에 대고 으르렁대며 연이의 옷을 입으로 물어 제낀다.
  개짖는 소리내며 여기저기 물고 놀다가, 쫑 앞으로 기어온다.
  쫑, 왕! 한번 짖는다. 형섭, 으르렁대며 계속 쫑과 대치한다.
  쫑, 형섭이 문 옷을 덥썩 문다.
  쫑과 형섭, 옷을 물고 서로 잡아당긴다.

할머니 (소리) 이게 뭔 일이다냐?

       - 형섭, 마당을 보면, 할머니와 연이, 아버지가 막 마당으로 들어선 참이다.
  할머니는 입을 딱 벌리고, 연이는 풋 웃는다.

아버지 저 녀석... ?

          - 할머니, 옷을 빼앗아들고 쫑을 발길로 차 내쫓고, 덥썩 형섭의 이마에 손              을 댄다.

할머니 아가, 괜찮냐?  멱을 감더니 아픈 거 아녀?

       - 연이, 옷을 집어들고 자기 옷이자 어이없다. 

아버지      원... 녀석하군.... 
       - 형섭, 끄응... 목 움츠리며 꼬리 내린다.

  19. 건넌방
  연이, 이불호청을 탁탁 잡아 당기며 형섭을 본다.
  문간에서 연이 기색을 살피던 형섭, 황급히 얼굴 돌려 딴 곳을 본다.

연이 ... 이리와서 잡아줄래?
형섭 ...
연이 응?

       - 형섭, 머쓱하게 마주 앉는다.
  연이, 호청을 한번 펄럭 털고, 잡으라고 턱짓한다.
  형섭, 호청을 잡고, 연이, 호청 주름펴면서 한접씩 접는다.

연이 왜 그랬어?
형섭 .. (슬며시 쳐다보다가 고개 못든다)
연이 내가 싫어서 그래? ... 내가 미워?

       - 연이, 탁탁 소리내어 호청을 잡아당겨 한접 접는다.
  형섭, 힘 빠지는 기색 보이자, 연이, 호청을 세게 끌어 당긴다.
  형섭,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뻔한다.

형섭 ... ?

       - 연이, 장난기 도는 웃음 띤다. 형섭, 저도 따라 호청을 확 잡아당긴다.
  연이, 호청을 더 세게 끌어당긴다.
  형섭,  더 세게 당기는 순간, 연이, 기습적으로 호청을 놓는다.
  제힘에 밀려 자빠지는 형섭.
  연이, 웃는다.  형섭도 헤벌죽 따라 웃는다.

  20. (다시 현재) 하숙방 뒤꼍 -- 밤.
  뒤꼍으로 난 창, 창가에서 긴 재가 달린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형섭. 
나레이션 그는 지금 담배를 톡톡 치고 있을 것이다.

        - 형섭, 담배를 톡 치자 재가 떨어진다. 

  21. 하숙집 바깥쪽 뒷담 -- 밤
  뒷담 너머로 보이는 창가의 형섭.
            뒷담벽 아래 우산 쓰고  선 영희.
나레이션 왜 그에게 화가 났을까?  오늘 보인 눈물이 저 담배연기와 함께
  그의 기억에서 사라지면 좋겠다.

  22. 하숙집 마당 -- 낮 (영희의 회상)
  노려보며 눈물 흘리는 영희, 형섭 앞에서 파다닥 뛰쳐나간다.

  23. 하숙집 골목 -- 낮 (영희의 회상)
  저만치의 하숙집에서 뛰쳐 나오는 영희, 달려온다...
  숨차게 달려와 멈추어 서며 고개 쳐들면, 눈물 흐르는 얼굴.
나레이션 그가 내게서 멀어질까 두렵다.

  24. 영희의 집, 거실 -- 밤
  영희, 거실로 들어와 이층 계단을 밟는데,
  영희모, 계단 옆 부엌에서 나오면서 

영희모 일찍 일찍 다녀.  밤늦게 어딜 그리 쏘다녀? 아버지한테 들키면 나 혼나.
영희 (별안간 엄마에게 뛰어들어 껴안는다) 엄마, 한쪽이 사랑하면
  다른 쪽도 사랑하게 된다구 했죠?
영희모 ...? (영희를 보는데서)

  25. 영희네 교실 -- 오후
  ‘詩의 世界’ 수업. 형섭, 이미지, 상징, 은유, 직유 등의 칠판 필기 중.
  노트필기하는 학생들 사이에,
            영희, 형섭을 바라보며 손가락 하나씩 접고 있다.

나레이션 그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언제나 날짜대로 번호를 부를
  뿐이다.  그가 보는 것은 칠판과, 책과, 허공과 마루바닥뿐이다.
  나는 믿는다.  내 사랑의 힘이 그를 돌려놓을 것임을.
  삼초, 이초, 일초!

          - 형섭, 필기 하다말고 뒤돌아서서 무심코 영희쪽에 시선간다.
  영희, 가슴이 철렁! 얼른 머리 숙인다.
            형섭, 교실안 둘러보고 다시 필기.

순자        니 또 텔리파시 보냈나?

          - 영희, 쌔액 웃는다.

  26. 하숙집 마당 --- 낮
  뒷짐에 프리뮬라 화분을 감추고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영희.
  집안을 둘러본다. 형섭의 방, 아무도 없는 듯 신발도 없다. 

영희 (안채에 대고) 언니... 미숙언니...

       - 반응을 기다리지만 고요하다.
  영희, 반짝 눈을 빛낸다.

  27. 형섭의 방
  영희, 먼지를 털면서 이것저것 만져본다.
  로션 냄새를 맡아보고, 담배를 집어 입에 물었다 도로 답배갑에 넣으며
  아주 신난다.
  말끔하게 치워지는 구석구석의 컷들.
  책상 위에 작은 프리뮬라 화분을 얹어 놓는 영희,
  대단히 만족스러운데, 미숙이 방문을 벌컥 연다.
영희 (깜짝 놀라) 헥!
  
  28. 하숙집 마당
  집마당의 다른 일각.
영희(소리)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 영희, 마당의 평상에서 미숙과 찬거리 다듬는다.
영희 여기서 일부러 멈췄죠.
미숙 왜?
영희 까먹은 척했죠. 그러니까 선생님하고 같이 읊었잖아요. 
  노래로 치면 듀엣송 아녜요?
미숙 (하 웃고)
영희 저 그날 히트했어요.  애들두 부러워하고.
미숙 너 선생님한테 단단히 빠졌구나.
영희 (헥 놀라며) 아, 아니에요.
미숙 뭐가.... 할 얘기 다 해놓구선.
영희 (그런가? 씨익 기분 털고 찬거리 다듬는다)
미숙 선생님 좋아하는 애들이 너 하나겠니? 아서라, 아서.
영희 난 달라요! 어떤 여자한테도 난 안져요? 기집애들 잘난척 해보라지?
  다 소용없어요! 헥! ( 입 틀어막는다. )
          - 형섭, 대문 안으로 막 들어오는 참이다.

            29. 순자네집 마당 평상  
          
영희        (징징대는) 흑,  선생님이 내말 들었음 어떻하니...
순자        고마 징징대라!
영희        몰라 몰라. 으~  (고개 세게 흔든다) 
순자        차근차근 말해봐라. 선생님 방에서 뭐하다 나왔노?
     
  30. 형섭의 하숙방 
  책상의 재떨이 속의 담배갑, 영희 편지 그 옆에 던져진다.
  형섭, 담배갑 집어 한개피 입에 물다가 도로 뺀다. 
  담배 필터를 유심히 살핀다. ‘이상하다?’ 느낌으로 어깨 움찔하고,
         담배 물고 불 붙히는데, 프리뮬라 화분 발견한다. 
형섭 ...!?
       - 형섭, 잠시 정신을 놓은 듯, 치지직 담배불 타들어 정신이 든다.
형섭 허... 별일이군.
          - 기분 털듯 일어서며 창문을 활짝 연다.
            담배 연기 뿜다가 다시 보는 프리뮬라.

  31 시골집, 마당  (회상)
  속잎이 노란 붉은 꽃잎의 프리뮬라
  연이, 화단 가장자리에 난쟁이 꽃을 심고 있다.
            까까머리 중학1학년 하복의 형섭, 자전거 바퀴를 은빛나게 닦고 있고,
  할머니,  장독의 장을 찍어 맛을 본후, 장독 뚜껑을 닫으며

할머니 잠깐 피고 지면 그만인디 한해살인 심어 뭐하누? (장독을 행주로 닦는다)
            이왕 손갈거 누년초면 좋잖았니?         
연이 아... (후회스런 눈길로 꽃을 본다) 제 생각이 짧았네요.... 

  32. 안방 -- 어스름 저녁
  할머니는 재봉틀을 돌리고 연이, 저고리에 동정을 단다.
  열린 안방문을 통해 마루의 형섭이 보인다.
  형섭은 상을 펴놓고, 큰소리로 영어책을 읽는다.
할머니 (재봉틀을 멈추고 실을 끊는다) 해가 지는 줄도 몰랐구나.
  오늘은 이만 허자.
연이 제가 가져가서 마져 할까요?.
할머니 아니다.  옛말에 늦게 일하면 옷 입을 이 몸에도 안 좋다고 했단다.
  남 입을 옷을 지을 때야 지성으로 허야지.
연이 ... (아쉬운 듯 ) 시간이 많아서요.
할머니 (측은한) ... 남정네가 뱃일이라는 게 그랴. 여인네들 가슴에 못 박는 일              이지... 이번에 애비 돌아오면 여기서 뭐라도 하라고 니가 말겨보그라.
연이 ... ( 보면)
할머니 둘째도 봐야허지 않겄냐 ?
연이 ... (쑥스럽게 웃는다) 허드렛천이라두 주셔요. 뭐라도 했으면 해서요.
할머니 옳거니! 조각 이불을 만들려므나. 니가 수는 잘 놓잖니?
연이 ... (잘됐다 싶다)
할머니 (장농으로 가서 뒤적이며) 나두 한때는 조각이불에 푹 빠져 살았단다.
  꽃을 노까, 과수를 노까, 목련이 이쁠까, 가지가 좋으까.   
  그 재미에 시간 가는 줄두 모르구 보냈다. (천을 내와 연이 앞에 놓는  다.) 애비 올 때까지 충분허겄지?
연이 ... (쑥스러워 웃는다)

  33. 마루
  연이가 나오자 형섭, 목청 돋구어 책 읽는다.
형섭        홧 아 유 두잉.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홧 아 유어 네임.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연이, 건넌방 문 닫자 형섭, 시들해진다.

  34. 가로수 길 --- 어스름 저녁
  자전거 타고 달리는 형섭.
  (E) 빵빵 승용차 경적 소리
  형섭,  뒤돌아보고 승용차 보자 질세라 내달린다.
  앞길 도로표시판이 있는 지점을 향해 달린다.
  자동차의 석우(남, 28세),  웃으면서 빠아빵 경적을 울려댄다.
           형섭, 자동차 진로 가로막으며 경주한다.
            석우, 창밖으로 머리 내밀고 경적 울려댄다
            형섭, 지지 않는다.  석우, 밀어부칠 기세다.

석우        꼬맹아 안봐준다 ?
  
          - 석우의 차 , 형섭의 자전거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난다.
            그 바람에 형섭 자전거, 비틀대다 쓰러진다.

  35. 읍내 거리 -- 밤
  대포집의 불빛 새어나오는 밤거리.
  형섭,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는 술집에서 노래가락이 젓가락 장단에
  맞춰 흘러나온다. 
  ‘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아는 죄이라서 말 못하아는 이 가슴은
  오늘도 울어야 하나아...’

  36. 목재소 앞 -- 밤
  문을 닫은 목재소 앞.
  형섭,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원이(19세) 나와 형섭을 확인하고
  문을 연다.

원이 오늘은 늦었네?
형섭 엉. (둘둘 말은 도화지를 들고 들어간다)

  37. 목재소 안.
  서툰 솜씨로 만든 이젤 위의 스케치북.  그리다만 여체.
  원이, 보고 베낀 속옷광고 잡지를 이젤에서 치운다.

형섭 형은 워째 이런 것만 그리남?
원이 이런 것만이라니? 예술에서 알몸 빼면 남는 거 없다? 
형섭 남자는 안 그리잖여.
원이 그야... 시끄럽다.  그려 온거나 내나봐.
형섭 (끄덕이고 도화지를 보여준다)
원이 (펴보면,  서툴게나마 그린 연이의 얼굴) 햐아... 제법인데?
형섭 (쑥스럽게 웃는다)
원이 좋아, 여기 두고가고, 이제부턴 여기와서 그려도 돼.
형섭 응.
원이  그리구 이거 (대추를 듬뿍 담은 바구니를 주면서) 오늘 산에서
  땄다.  춘자한테 꼭 전해주구 가.
형섭 싫은데...
원이        가 임마 !

  38. 다방 앞 -- 밤
  형섭, 망설이다 들어가려고 발길 옮기는데, 사내가 떠밀려 튀어나온다.
  춘자(22세), 나와서 팔 걷어 붙이며

춘자 어따대고 함부로 손 놀리고 지랄이야? 이런데 있다고 국으로 봤다간
            큰 코 다쳐! 이 쇠파리 새끼야. 
사내 하!  열녀났다, 아주 났어.  퉤! 재수없어 년!  에잇!
  (다리털고 손 털며 돌아서간다)
춘자 개자식! 조용히 커피나 쳐마실 것이지.

       - 흠뻑 젖은 가슴팍 털어내면서 돌아서다 형섭을 본다.
            형섭, 대추 바구니 감추며 돌아선다.
            춘자, 시덥잖게 힐끗 보고 들어간다.

  39. 시골길 -- 밤
  길섶에 누운 형섭, 대추씨 훅 뱉는다. 대추 바구니에서 또 한알 꺼내문다
형섭 (무심결에 흥얼리는 노래)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 부르다 말고 히죽거린다.

  40. 시골집, 마당 -- 낮 ( 회상)
       - 연이, 형섭의 손톱에 매니큐어 발라주고 있다.
            형섭, 아무래도 낯가지럽다. 손을 뺀다.

연이        왜에... (손 잡아 끈다) 가만있어 봐.
형섭        지는 싫은디...
연이        (웃는다) 금방 지워줄게. 이리 내봐
형섭        (마지 못해 손 내민다)  
연이 (매니큐어 칠하며) 커서 뭐가 되고 싶어?
형섭 아무거나 다유.
연이 아무거나 중에 아무거나 골라봐.
형섭 아버지처럼 될래유.
연이 외항선 기관사?
형섭 야아.
연이 하필이면 왜?
형섭 아부지가 기관사라서 좋아하신거 아녀유?
연이 ... (쓴웃음)  넌 화가 되두 되겠더라. 그림 잘 그리더라.
            화가되면 나두 좀 그려주구. 알았지?

  41. 다시 시골길 -- 밤
  형섭, 씨익 웃는다.
            형섭,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큰 소리로 노래 부른다.

형섭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밤하늘에 대고 목청껏)
  말 못하는 이내 맘은....

  42. 시골집, 마당 -- 밤
  형섭의 자전거, 사립문 열고, 소리날까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쫑, 기척느끼고 일어나 꼬리 흔들자, 쉬!쉬! 달래며 자전거 세운다.
  안방 동정 살피며 살금살금 행랑의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E) 좍좍 물끼얹는 소리.
  형섭, 돌아보면, 부엌에서 소리난다.

  43. 부엌문 앞
  꼬리를 흔들며 기다리는 쫑을 두고 문틈에 눈박고 있는 형섭.
  (E) 물 끼얹는 소리. 
  형섭, 좀더 잘보이는 문틈을 찾아 헤맨다.
  쫑, 끄응, 끄응, 형섭의 주의를 끌려고한다.
  형섭,  쉬이- 쫑에게 주의 주고, 다시 문짝에 얼굴을 대는데,
  쫑, 컹! 컹! 짖는다. 
형섭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해!

       - 형섭, 다시 문짝으로 얼굴 돌리는 순간,
  문이 열리며 형섭의 이마를 찧는다.

  44. 건넌방 툇마루
  연이, 형섭의 이마에 연고를 발라준다.
  형섭, 겁먹고 앉아서 양손 모아쥐고는 엄지손가락을 문지른다. 
형섭 ...
연이 다신 그러지마?  할머니한테 일러서 혼내 줄거야?
       - 형섭, 머쓱해진다.

  45. 석양의 가로수길 -- (회상, 13년전)
  시골길을 곱게차린 연이, 형섭과 걷고있다.
  석우의 차, 다가가면서 형섭 옆에 선다.
석우 (창을 내리며) 꼬마야, 오늘은 내 차 탈래?
형섭        나 꼬마 아녀유!
석우        (연이에게) 타세요, 모셔다 드릴게요.

  46. 달리는 석우의 차안
  연이, 형섭 뒷좌석에 앉고, 석우는 운전하면서 연이를 백미러로 본다.

석우 섭이 아버지하고는 국민학교 동문이죠 아마? 하하, 하기사 여기선 국민              학교가 하나니까.
연이        ...
석우       하하, 꼬마야 할머니는 정정하시지? 
형섭        (석우가 아주 못 마땅하다) 야아.
석우        시골생활은 처음이세요?
연이 네. 아뇨, 어렸을 때 조금.
석우 여기 생활이 좀 답답하시겠어요?
연이 ... 어린 시절엔... 좋았어요. (씁쓸히 웃는다)
석우 아하! 그러니까 어릴적 향수를 좇아 온 거로군요?
연이 ... (차창밖을 본다)

          - 석우, 백미러로 연이를 탐색하는 눈빛.
  연이, 석우의 시선을 느껴 백미러를 본다.
  석우의 눈길과 마주치자, 차창밖으로 시선 피한다.
  석우, 운전하면서 백미러의 연이를 힐끔 거린다.
  연이, 창유리를 내려 바람을 쐰다.
  형섭, 뭔가 께림직한 분위기에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한다.
    
  47. 과수원 집 앞 뜰--- 낮
  드넓은 과수원.  인부들 일하고 있고, 그들틈에 할머니와 연이도 보인다.
            과수원 둔덕 위에 과수원 주인집.
  석우, 휘파람으로 엘비스의 ‘러브 미 텐더’ 부르며 
  반짝반짝 햇빛을 반사하는 자동차에 왁스질 한다.
  석우의 근육질 팔, 러닝셔츠가 달라붙은 단단한 가슴.
            형섭, 자신의 팔뚝과 비교한다. 한쪽 팔뚝에 은근히 힘을 넣어 알통을
            만드는데, 
석우 어머니는 오신지 오래됐니?
       - 형섭, 호주머니에 손찔러 넣고 경계하여 보다가
형섭 ... 우리 엄니 얘긴 자꾸 왜 물어유?
       - 석우,  피식 웃고는 다시 휘파람분다.

  48. 개천가 -- 다른 날 낮
            폭넓은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있다.
  형섭, 어깨에 그물망 걸고 맑은 강물에 헤엄치는 물고기를 잡으려다
  놓친다.  
  연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하얀 종아리를 물로 축인다. 
  ‘러브 미 텐더’ 휘파람 소리.
  석우, 천천히 다리를 지나다가 연이와 눈 마주치자 목례하고 간다.
  형섭, 노리고 있던 제법 큰물고기를 잡는다. 퍼득거리는 물고기를 치켜들              며 자랑스럽게 연이를 보는데,
  연이, 석우의 모습을 좇고 있다.
  형섭, 손의 물고기 놓친다.
형섭        ...
       - 연이의 앞물에 풍덩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연이, 고개 돌리어 보면,
  형섭이 저만치 도망치고 있다.

  49. 시골집, 건넌방 - 밤
  연이, 조각천에 수를 놓고 있으나 일이 썩 안 잡히는 기색.
연이 아! (손가락을 입으로 빤다)
       - 바느질감을 내려놓고 툇마루의 방문을 연다.
  (E) 풀벌레 소리 자자하다.
  연이, 마당의 감나무를 올려다 본다.
  달빛을 받은 무성한 잎들이 바람에 술렁인다.

  50. 민속놀이 마당
  한편에서는 씨름판, 한편에서는 그네타기 대회가 열리는 민속 한마당.

  51. 씨름판
  장사 두명이 서로 엉키어 경기 중이다.
  경기장을 둘러싼 관중 속을 형섭, 연이의 손을 잡아 끌며 비집고 들어오  다가,  연이, 구경꾼들 사이를 비집지 못하고 밀려난다.
  건너편 관중들 속의 석우, 맨 앞줄에 자리를 잡는 형섭을 발견한다.
  형섭,  뒤돌아 서서 연이를 찾고는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연이, 빽빽한 군중 사이라 엄두가 안난다.

연이 거기 있어.  여기서 볼게.

       - 와 함성에 , 형섭, 경기에 열중한다.
  관중석 다른 일각의 석우, 자리를 뜬다.
  홍샅바가 앞무릎짚기를 걸자 청샅바 용케 피한다. 관중들의 탄식. 
  다시 샅바를 쥐고 대치하는 선수들.
  연이, 어깨에 닿는 손길을 느끼고 보면,
  석우, 어깨에서 손을 내리며 알은체 목례한다.
  연이, 가볍게 목례하고 씨름 본다.
      홍샅바가 청샅바의 다리를 거나, 청샅바, 치켜당기며 팽팽히 맞선다.
  관중들의 열기 고조되는 가운데, 석우, 연이에게 바싹 붙어온다.
  연이, 숨을 고르면서 석우 때문에 신경 쓰이는 눈치다.
  두 선수, 다시 엉키어 붙는다.
  연이, 숨이 가빠진다.  석우, 연이의 목덜미로 턱을 가까이 댄다.
  연이, 움찟하여 곁눈질 치고, 석우, 그런 연이를 잽싸게 훔쳐본다.
  홍샅바, 일방적으로 공격해대고, 관중들 함성 끓어오른다.
  연이, 홱 고개 돌려 석우를 노려본다.  맞붙은 시선....
  관중석에서 와아! 함성과 박수가 터지고, 꽹과리 소리 요란하다.
  청샅바, 넘어져있고, 홍샅바, 거친 숨을 내몰고 있다.
  형섭, 박수치며 신이나서 뒤돌아본다. 
  관중들의 얼굴틈으로 연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52. 씨름판 외곽
  관중들 틈을 비집고 씨름판 밖으로 나오는 형섭, 두리번 두리번 찾는데,
  다른 일각, 석우의 차가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형섭, 두리번 찾아다니다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그네 타는 여인 본다.

  53. 그네타기장 (상상)
  그네타기장의 아래 배경이 규칙적으로 오르락 내리락한다.
  그네 타는 형섭.
  그네의 움직임에 따라 스쳐지나는 사람들 틈에 웃고 있는 연이.
  별안간 형섭의 머리 위로 붉은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연이, 붉은 잎들을 양팔을 벌려 맞는다.
  붉은 잎들이 연이의 이마와 콧날과 입술을 스치고
  목덜미로, 팔로, 봉긋한 가슴으로, 다리를 감은 치맛자락으로 흘러내린다.
  형섭, 그네에서 연이에게로 뛰어내린다. 
  꽃비 속에서 연이의 품으로 낙하하는 도중에서.

  54. 시골집, 마루 - 늦은 저녁.
  쫑, 헤 웃고 있는 형섭의 얼굴을 핥는다.
  형섭, 상상에서 깨어난다.  귀찮은 듯 쫑을 떨쳐내는데,
            연이, 마당으로 막 들어선다. 
  형섭, 연이를 보자 화다닥 방으로 들어가다가,
  발길에 물주전자 채인다.
  그 소란에 연이, 방으로 숨어드는 형섭을 본다.

  55. 다방 -- 낮
  엘비스의 ‘러브 미 텐더’가 흐르는 다방.
  카운터의 춘자,  잡지책 보면서 노래 따라 허밍한다.
  원이, 어항 너머로 몰래 훔쳐본다. 춘자 모습 스케치 중이다.
  춘자, 눈을 들어 원이를 본다.
  원이, 얼른 피한다. 춘자, 비웃으며 자리를 뜬다.

  56. 읍내 거리.
  춘자, 커피 보따리 들고 요염히 걷다 멈춘다.
            뒤좇던 원이, 딴전 피운다. 춘자, 흥 콧방귀 뀌고 걷는다.
  원이, 딴청 피우다 보면, 춘자, 석우의 차에 올라탄다.
            석우 차 떠나고, 원이 뛰어와서 그 길 쳐다본다.
            
  57. 잡목숲 -- 밤
  잡목숲 언저리에 석우의 차가 주차되어있다.
  석우의 앞유리창, 석우와 춘자가 반나로 얽힌다.
            유리창에 돌멩이 날아든다.  석우, 돌아본다.
            저만치 도망치고 있는 원이.

  58. 목재소 안 -- 밤
  춘자를 그린 그림들이 낱장으로 흩어져있다.
  형섭, 바닥의 그림들을 주워 모은다.

원이 나 둬. (무릎 괴고 앉아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과수원 새끼, 이 세상에              딱 한사람만 죽이라면 그 놈을 죽일거다.
  
  
  59. 시골집, 울타리 밖 -- 낮
  집 뒤쪽으로 이어지는 잡목숲 언저리.
  쫑, 컹! 짖다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꼬리를 흔들며 형섭을 본다.
  형섭, 멀리 막대기를 던진다. 
  쫑, 달려가다 말고 킁킁대더니 옆길 잡목숲을 물끄러미 본다.

형섭 쫑! 빨리 가져와.

       - 쫑, 뒤돌아 형섭을 보더니 꼬리를 흔들며 컹컹 짖어대고 막대기와는
  상관없이 샛길로 빠져 잡목숲으로 들어간다.

형섭 쫑! 이쪽이야, 이쪽! ... 어휴....
       - 형섭, 잡목숲으로 쫑을 뒤쫓아 간다.

  60. 잡목숲
  형섭, 혀를 차며 쫑을 부른다.

형섭 쫑.... 쫑....

       -  숲에서 손수건을 물고 나타나는 쫑. 형섭, 손수건을 본다.
  레이스가 달린 연이의 것이다.

형섭 쫑.... (쫑이 나타난 숲길을 바라본다)

  61. 잡목 숲 다른 곳
  형섭, 잡목 숲을 헤치며 걸어가고, 쫑이 뒤따른다.
  제법 깊숙히 들어왔다.  숲의 둔덕에 올라서 내려다 보면,
  탁 트인 숲의 언저리가 나온다. 
  저편 숲 언저리에 세워진 석우의 차.
형섭  ...
       - 형섭의 바지 호주머니에서 삐져나온 연이의 손수건.

  62. 시골집, 마루 -- 늦은 저녁
  상위에서 숙제하던 형섭, 연이의 노래 소리에 필기 멈춘다.
  건넌방의 연이, 조각천에 수를 놓으며 ‘러브 미 텐더’ 흥얼거린다.
  형섭, 연필을 노트에 힘껏 내리 꽂는다.
영희(소리)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63. 순자의 집 앞 뜰 -- 늦은 오후 (다시 현재)
  영희, 한용운 시집을 들고 평상의 은이와 순자 앞에서 낭독하고 있다.

영희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이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순자 야야, 펜질 하려면 니 맴을 적어보내야지 넘의 시는 와 베껴 보내노?
영희 이보다 잘 쓸 순 없으니까.
혜진 (멀리서부터) 영희야아... 영희야. (숨넘어 들어오며) 긴급속보!
       -  모두들, 귀가 솔깃하여 혜진을 본다.
혜진 방금 들었는데, 영희야, 국어선생님 전근 가신대!
영희 (눈 휘둥그레지고)
은이 뭐어?
순자 전그은?
영희 아직 학기도  안 끝났는데?
혜진 그러게! 갑자기 웬일이래니?
은이 오모... 영희야!
          - 영희, 평상에서 내려와 신발 신고 급히 뜰을 나가고
순자 이게 뭐꼬?  맨날 텔리파시만 보내더이 영희 쟈 닭쫓던 개꼴 난 기라...

  64. 하숙집 마당

미숙 전근은 이미 가시기로 되있었는데.
        - 미숙, 평상에서 찬거리 다듬고 있고, 그 앞에 영희 서있다.
미숙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갑자기. 전근 날짜두 그래서 앞당긴 거구.
  나이 드신 할머니 한분 남아 계신데, 거동이 불편하시다니 어쩌시겠니?
영희 ... (죽을 상이다) ... ( 너무 속상한 끝에 털석 주저앉는다)
미숙 ... (어이없고 딱하기도 하여)  흐음... 아예 선생님한테 탁 고백해보면
   어떨까?
영희 그런 거 안 받아 주세요.
미숙 해봐야 알지. 그래야 선생님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두 알아낼 수 있구.
영희 소용없을 거에요.
미숙 그래두 혼자 애만 태우는 거 보단 낫지 않나?
영희 (고개 들고 본다) ...

  65. 영희 방 -- 밤
  구겨서 버린 편지 뭉치들 책상 주변에 흩어져있다.
  영희, 편지를 쓰다가 턱을 괸다.
         영희, ‘사랑합니다’를 적는다....북북 지우고, ‘안녕히 가세요’를 쓴다.
         더 세게 북북 지우고  책상에 팍 엎드리며

영희        어떻게....

           - 영희, 반득 고개쳐든다.

  66. 하숙집 안채 마루 앞 -- 낮
  영희, 미숙에게 봉한 편지봉투를 전한다.
미숙 그래, 내가 맡을게. 걱정마.
영희 저기요 그리고 혹시...
미숙 (웃으며) 그래. 내가 꼭 답장 쓰시게 해서 받아노마.
영희 (걱정이 다소 가시는 듯 웃는다)

  67. 하숙집 골목
  영희, 골목을 걷다가 다시 뒤돌아 하숙집을 본다. (OL)

  68. 시골읍 골목 --- 낮 (회상, 13년전)
  골목을 자전거를 타고 오는 형섭, 자전거 뒤에 실은 봇짐.
  형섭, 자전거 세우며 뒤돌아 본다.
  할머니와 연이 함께 걸어오고 있다.
형섭 저 먼저 가유우?
할머니 그려, 어여 먼저 가아.  우린 예서 빠스 타구 갈거니께.
           - 형섭, 자전거 타고 골목을 앞서 간다.
  형섭이 지나간 길목에 춘자, 팔짱끼고 기다리고 서있다.
  할머니, 연이, 가까이 다가오자, 춘자, 쏘아보며 연이의 길을 막아선다.
  할머니, 연이, 뜬금없어 바라보는 순간,
  춘자, 연이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싸늘한 비웃음을 던지고 가는 춘자.
  할머니, 기막혀 보고, 연이 침 맞은 뺨에 손을 대고 고개 못든다.

  69. 시골집, 안방 -- 늦은 오후
  할머니, 봇짐을 풀면서 연이를 슬쩍슬쩍 살핀다.
  연이, 묵묵히 동정을 다나 바느질을 넣고 빼는 동작이 느리다.
할머니 이불은 다 돼 가니?
연이 ...
할머니 ... 색실 가져간지가 한참인 것 같은디... 모자라진 않구?
연이 ... 예... 아직요...
할머니 ... 
        -  고운 옷감들 펼치며
할머니 내일부텀은 혼례에 입을 옷을 지을 거니께 바쁠 것이여.
  과수원 쥔댁 알지?
연이 ... (뜨끔하여 보다가 눈마주치자 시선 내린다)
할머니 그 댁 아들이 결혼하누먼.
연이 ... (바늘 찔러 넣다가 멈춘다)
할머니     그리 쇡을 썩이더니만 그 댁에서도 한시름 놓게됐지...
  저어기 산 하나 넘으면 시랑골이 나오는디, 그곳 땅 거의 전부가
  신부댁 것이라누먼. ... 잘 살아 그런가?  보내 온 옷감들두 예삿것이
  아니다... (연이를 보면)
연이 ... (바늘 찔러 넣은 채이다.)
할머니 ( 못 본척하며) 내일부텀은 몸도 마음도 정갈히 하구 건너 오그라.
  해가 진 후에 지어서두 안되구, 새벽에 게으름을 피워서도 안될 것이여.
연이 ... 예... 어머님....
할머니 날 유별나다고 헐지 모른다만 옷은 정성으로 지어야 하는 것이니께.
연이 예. 어머님....
          - 하얀 동정에 연이의 붉은피가 배어든다.

  70. 동, 마당 -- 새벽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할머니.
  건넌방에서,   ‘욱’  터지는 연이의 헛구역질이 들린다.
  할머니, 무슨 소린가... ? 기도 멈춘다.

  71. 동, 건넌방
  연이,  ‘욱’ 헛구역질이 나오는 입을 틀어막는다.
  한손은 자신의 배에 갖다 댄다.
  다시 ‘욱’ 헛구역질, 연이, 입 틀어막으며 두려움에 찬다....

  72. 동, 건넌방 앞

           건너방 툇마루 앞의 할머니, 떨려서 차마 말이 안 떨어진다.

  73. 동, 마루 -- 아침
  형섭, 밥상에서 혼자 수저를 든다. 안방의 할머니를 본다.
  (마루에서 보이는 안방) 할머니, 등돌리고 앉아 미동도 없다.

  74. 동, 부엌
  형섭, 상을 들고 부엌으로 와서 보면
  연이, 심한 연기가 새어나오는 아궁이 앞에서 장작을 넣다만 채 물끄러미
  앉아있다.  연이,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린다. 
 
  75. 학교 교실 -- 낮
  미술시간, 아이들 각자 자유그림을 그리고, 선생님이 책상 사이를
  지나다니며 지도한다.
  형섭,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다. 미완성된 연이의 얼굴.
  그리다말고 지우개로 지우는데, 선생님, 손을 잡는다.
  형섭, 올려다 보면,
선생님 좋은데? 계속 해봐.

  76. 시골집, 안방 -- 오후
  할머니, 남자 양복에 단추를 달고 하고 있다.
  형섭, 책가방들고 문간에서
형섭 핵교 댕겨 왔시유.
할머니 ...
형섭 ... 그거는 아부지 꺼 아녀유?
할머니  ... (미동도 앉는다.)
형섭 할무니...
할머니 지지리 복두 읎는 거. 이번에는 잘 살아보나 했구먼...
  (아버지 양복에 엎드려 소리내어 흐느끼며) 지지리 복두 읎는 거...
형섭 ...

  77. 시골집, 마당 -- 낮
  감나뭇잎이 떨어진 장독대 위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78. 동, 건넌방
  수가 완성된 조각천들을 짜집기하는 연이 . 
  방문을 통해 보이는 마당, 하교한 형섭이 우산을 쓰고 방을 보고 있다.

  79. 동, 마당
  형섭, 안방 쪽방문으로 고개 돌리면 .
  할머니, 묵묵히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
  형섭,  우두커니 마당 가운데 서 있다.
  (E) 빗소리 커진다.

  80. 동, 지붕 -- 이른 아침
  비개인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푸르른 대기.
  새한마리가 쉬다 날아간다.

  81. 동, 마당 -- 낮
  할머니, 마루 댓돌 위의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할머니 (건넌방을 본다) ...

  82. 동, 건너방
  연이, 짜집기한 조각천에 천을 잇대 재봉틀로 박고 있다.

할머니     (마른기침 소리) 큼큼....
        - 연이, 재봉틀을 멈춘다.
할머니 (소리) 게 있니?
연이 ...

  83. 동, 마당

연이 (건너방에서 나오며) 예, 어머님...
        - 할머니, 방문 열리는 순간,  몸돌려 사립문가로 나서고,
   연이, 등돌리는 할머니를 보고 일순 멈췄다가 마당으로 내려선다.
할머니 댕겨 올디가 있어서 나간다. 형섭이두 오늘 좀 늦게 오라 일러뒀구먼.
  아마두 즈녁때까정은 집이 비일 게여...
        -연이,  고개 들어 본다.  등돌리고 선 할머니.
연이 (눈이 젖어든다) ... (시선 떨구며) 네... 어머님.
        - 할머니, 낮은 한숨을 토하며 눈 감았다 뜬다. 뒤돌아 서서,
할머니 ...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었거니... 그리 살자.
연이 ...
할머니 ...
연이 ... 네... 어머님... (눈물 뚝 떨어진다)

  84. 학교, 교실. -- 오후
  미술시간, 형섭의 책상.
  완성된 연이의 그림.
  선생님, 기특하여 끄덕끄덕하다가 그림 돌려준다.
선생님 아주 자알 그렸다.  어머니 좋아하시겠다, 응?
형섭 (우쭐한 기분) ...

  85. 가로수 길 -- 석양 무렵
  가로수 사이로 붉은 석양빛이 언뜻언뜻 지난다.
  신바람난 형섭, 자전거를 쏜살같이 몰아 간다.  

  86. 시골집, 마당
  형섭, 자전거도 채 다 못 세우고, 그림 들고 건넌방으로 달려든다.
        할머니, 안방 쪽방문을 열고 내다 본다.
  형섭, 건넌방 문을 열며

형섭 어무니! (흥분이 싹 가신다) ... !

        - 방안, 연이의 옷가지며 흔적들  사라지고 가구만이 단촐하다.
   바닥에 곱게 접혀 있는 조각이불.
             형섭, 할머니를 본다.

할머니 그냥 잊거라. 우리랑은 인연이 아니었던 게여...
형섭 ... !

        - 형섭, 집 밖으로 뛰어나간다.

  87. 기차길 둔덕
  둔덕길 아래로  기차가 지나간다.
  둔덕의 형섭
형섭 어무니이- !
         - (E) 달리는 기차 사운드 형섭의 소리를 삼킨다.

  88. 시골집, 마당 -- 밤
  달빛 밝은 밤.  불 켜진 안방.

  89. 동, 안방
  형섭은 엎드려 숙제하고, 할머니는 허드레 옷을 깁고 있다.
  (E)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소리가  낮고 아득하게 지나간다.
  할머니, 바느질을 멈춘다.
할머니 ... 무신 소리 못 들었냐?
형섭 ... (필기를 멈칫하다가 다시 노트에 끄적인다)

       - 할머니, 바늘질을 한 옆으로 치우고 쪽방문을 연다.
  (E) 풀벌레 소리 방안으로 흘러든다.
  할머니,  담배 한 개피 피워물고 한숨처럼 길게 내뿜는다.
  형섭의 노트 위로 기어드는 벌레 한마리.
            형섭, 버둥대는 벌레 다리 하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할머니 (마당을 본채 혼잣말로) 옛날에 말여 응기생이라고 있었는디...
 
     할머니,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 내뿜는다.
  마당의 감나무, 잎을 거진 다 떨어낸 가지에 붉은 감들이 무성하다.

할머니 벌써 감물이 다 올랐남...? (한숨 토하듯 길게 연기 내뿜는다.)...
            사람 한 자리 난 게 이리 클 줄이야...
   
          - 형섭, 공책 갈피에 벌레를 넣고 덮는다.
  (E)  풀벌레 소리 자지러진다. 
        (페이드 아웃)

  (페이드 인)

  90. 시골집, 마당 -- 낮 (현재)
  조촐한 장례식을 치루는 집.

  91. 건넌방
  아버지의 영정을 모신 곳. 형섭, 영정을 지킨다.
아주머니 (문가로 와서 형섭에게) 저기... 할머니께서 부르시네유....

  92. 안방
  할머니(79세),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일으켜 앉고,
            형섭, 도우려 하자, 손 내젖고 장농을 가리킨다.
        형섭, 장농에서 보퉁이 하나를 꺼내고 할머니를 본다.
            할머니, 끄덕인다
         형섭, 보퉁이를 할머니 앞으로 가져온다.
            할머니, 보퉁이의 매듭을 푼다. 곱게 접힌 연이의 조각이불.

형섭 ... ! (할머니 보면)
할머니 (끄덕인다) 애빈... 여직 이유도 모르고 살았구먼. (목 메이는) 속이 오죽              했겄냐, 그것이....  다 내 죄다.
형섭 할머니....
할머니 묻어 주거라. 이젠 보낼란다.

  93. 묘지
  구덩에 조각 이불을 씌운 아버지의 관이 내려간다.
  관을 내린 무명천들이 끌어 올려진다.
  형섭, 삽을 들어 첫흙을 퍼올린다. 관 위로 뿌리려는 순간 멈칫한다.
형섭 ...
  일꾼들 삽을 들고 기다린다. 
  형섭, 삽에 담긴 흙을 땅 속으로 뿌린다. 일꾼들 일제히 삽질한다.
  툭툭 떨어져 조각이불을 덮는 흙덩이들.
     
  94. 하숙집 형섭의 방-- 저녁
  미숙이 내민 영희의 편지봉투.
  책들을 박스에 챙기다 만 형섭, 난처해서 미숙을 본다.
 
미숙 이번만큼은 받아주시고 답장 하나 써주셔요.
형섭 저...이러시는 건...
미숙 떠나시는 길이잖아요.  다시 안 오실 길이잖아요.
형섭 ... (곤혹스럽다)

  95. 형섭의 방 -- 밤
  책상 앞 형섭, 봉투를 뜯어 영희의 편지를 읽는다.
  한자를 섞어가며 쓴 편지지의 첫장.
나레이션 누군가 이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별의 눈물은 물거품의 꽃이요, 도금한 금방울이다.
  진정한 애인을 사랑함에는 죽음은 칼을 주는 것이요.
          -  형섭, 우습다...  희미한 미소 번진다.
나레이션 이별은 꽃을 주는 것이다.  이별의 눈물은 진이요, 선이요, 미다. 
  이별의 눈물은 석가요, 모세요, 잔다르크다.
            이 말에 편지 쓸 용기를 냅니다.
      -  카메라, 책상 위의 열린 창밖으로 빠져 달을 비춘다
  
  96. 영희방 -- 밤
  달에서 카메라 빠지면서 책상에 앉아 편지 쓰고 있는 영희.
나레이션 어느 날, 선생님이 감나무 아래서 오래도록 서 계신 걸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감나무가 된 응기생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아마도 그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내게 있어서, 글쎄 뭐라고 말씀 드릴까요?
            어떤 비유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97. 교무실... 이른 아침             
          - 아무도 없는 교무실. 영희, 형섭의 책상에 홍시를 놓는다.
나레이션    매일 매일 선생님의 책상 위에 홍시를 갖다놓으며, 기쁨을 누렸습니다.
            오로지 선생님만이 제게 그런 기쁨을 주셨습니다.
           
            98. 형섭 하숙집 마당 ... 낮 
            옷자락을 꼼지락대고 있는 영희, 형섭, 멀뚱거리며 쳐다보는
            형섭을 노려보며 울고 있는 영희,  파다닥 뛰쳐나간다.

나레이션    하지만, 선생님은 한번도 저를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선생님 댁에서 마주쳤을 때는 참담했습니다.
            선생님 댁을 마구 드나드는 그런 애로 저를 경멸하실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편지를 쓰는 손이 떨려옵니다.
           
            99. 영희방 -- 밤
           영희, 편지를 쓰다말고 창가로 가서 턱을 괴고 달을 본다.

나레이션    선생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진실한 표현 앞에서는 목석같이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100. 다시 하숙방 -- 밤
나레이션 선생님 또한 저의 진실을 진정으로 나누어 가지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 형섭, 백지를 펼쳐놓고 턱을 문지르며 쓸 말을 생각한다.
  백지에 펜끝을 댄다... 한글자도 떼기 어렵다.
형섭 ... 
       - 점 하나 찍힌 백지.
  형섭, 펜을 집어들고 쓰려다 또 멈칫댄다.
  펜을 놓고 책상을 두드리는 손가락 앞에 꽃잎이 시든 프리뮬라 화분. 
순자(소리) 답짜앙? 택도 없다.

  101. 순자네 앞 뜰 -- 낮

          - 감나무 아래 평상에서 은이, 혜진 바구니의 밤을 세면서 온다,
  안온다를 따지고 있고, 순자는 셈을 안 한다.
은이 (순자 말에 아랑곳없이) 온다, 안온다, 온다, 안온다....
순자 영희 갸 여직 안 오는 거 보이 집에서 울고 있는 기 뻐언 허다.
       - 순자, 밤톨 하나 집어 깨어물려는데, 은이, 순자의 손등을 때린다.
은이 이따 먹어. 온다, 안온다....
순자 나 참.  그런 다고 올 답장이 안오고 안 올 답장이 오겄나?
혜진 좀 조용해. 헷갈린다.
       - 은이, 아랑곳 없이 밤톨이 다할 때까지 온다, 안온다를 센다.
순자 니들은 모르나? 국어선생님 유우명한 일화 말이다.
혜진 그으래?
순자 국어 선생님 처음 여기루 부임해 와 가꼬, 영희 맨치로 선생님헌티
  폭 빠진 가시나가 있었다 아이가. 방학 때문 하루가 멀다하고 펜지를
  보내다 낭중에는 방학이구 학기때구 답장이 올 띠까지 내 해본다 하구
  펜지를 해댔다네?
혜진 오모모, 그런 일이 있었어?
순자 몰랐나?
은이 아휴, 헷갈려!  온다, 안온다.
혜진 (눈치보고 작게) 그래서?
순자 졸업때가 되놔 선생님께 갔다 안카나. 답장은 몬 받아도,  말이라도 들어
  본다고.  아, 근디 펜지를 주더랜다.
혜진 성공했네?
순자 무신... 학생이 보낸 펜지를 한장도 빠짐없이 도로 앵겨 준기라.
  한장도 안 뜯고 고대로 뫄뒀던기라카이.
혜진 아으 ...
순자 그후, 어떤 학생도 일체 펜지를 안하게 됐다아 이기라.
혜진 으~~ 돌심장.
은이 온다, 안 온다...  (밤 톨 두개 남아있다, 꿀꺽 침 삼킨다. )
순자 (은이에게) 니는 우째 나왔노?
은이 (밤 톨 두개 놓고 미안한 표정으로 친구들 본다)
순자 와? (바구니 본다)
은이 에이, 다시 시작하자 (바구니에 밤톨들 쓸어 담는다)

  102. 하숙집 골목 -- 낮
  저만치의 하숙집에서 뛰어 나오는 영희, 
  숨차게 달려와서 멈추어 서며  고개 쳐든다. 환희에 찬 얼굴.
  편지봉투를 가슴에 안는다. 

  103. 순자네 마당 -- 낮
  평상 위의 세소녀들, 바구니 밤톨을 세고있다.
모두 온다, 안 온다... 온다... (네개 남은 밤톨)
       - 서로 마주보면서 자신있게 고개 끄덕이며
모두 안온다, 온다, 안온다, 온다아!
순자 (저만치 달려 오는 영희 보고 놀래서) 참말이네 !
          - 은이, 혜진, 뒤돌아 본다.
      영희, 달려오는 동안, 순자, 혜진, 은이 한입으로 응원한다.
모두   (손뼉치면서) 김영희! 김영희!  김영희!
       - 영희, 평상에 다다른다.  세소녀, 손뼉을 영희에게 들이대며 계속 응원.
  영희, 자랑스럽게 평상에 올라 치맛자락 들어 인사하고 여왕처럼 앉는다.
모두 (박수하며) 우우우우.....
순자  (바싹 당겨앉으며)  뜯어봐라, 빨리.
영희 큼! (편지 봉투를 뜯고 편지지를 꺼낸다)
       - 은이, 혜진, 순자, 눈을 빛내며 영희를 보고있다.
         영희, 기뻤던 흥분이 싹 가신다.
혜진 뭐라구 했니? 
       - 영희, 침을 꿀걱 삼키며 다음장을 본다. 
  이내 편지를 쥔 손이 힘없이 무릎으로 떨어진다.
  친구들 의아하여 서로 본다. 
  순자, 영희의 손에서 편지를 빼어든다.
  은이, 순자, 혜진, 머리를 한데 모으고 편지를 본다. 놀라는 표정들.
  (인서트) 영희가 쓴 글에 붉은 펜으로 맞춤법을 교정 해 놓은 편지.
은이 영희야...
혜진 어떡하니...
순자 (속상하여 본다) ...
        - 영희, 떨리는 입술을 문다.
나레이션 사랑은 잔혹... 쓰라림... 고통. 그리고...
        - 영희 손등으로 마른 감나무잎이 떨어진다.
  영희, 순자의 무릎에서 서럽게 운다.
  은이, 눈물 닦고, 혜진, 영희의 어깨를 어루만져주고
  순자, 등을 투닥인다.
  그들 위로 이파리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앙상한 가지에 달린
  붉은 감들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멋스럽다.

  104. 빠앙 달려오는 기차

  105. 영희, 도시락가방을 들고 숨차게 달린다.

  106. 기차가 달리고

  107. 영희, 달리고

  108. 달리는 기차

  109. 달리는 영희, 역전
  영희, 멈춰서 헉헉대며 역간판을 보고는 다시 뛴다.

  110. 달리는 기차
  (E) 기차 사운드 낮아지면서 소년형섭의 외침 오버랩
소년형섭 (소리) 어무니이- !

  111. (OL) 기차역 플랫홈 -- 낮
  플랫홈 의자에 앉아있는 형섭. 짐가방 들고 일어선다.
  기차는 이미 플랫홈에 정차하여 있다. 
  영희, 플랫홈으로 들어와서 선생님을 찾는다.
영희 선생님...
형섭 (돌아본다)
영희 (가져온 도시락 가방을 내민다)
형섭 ...
영희 (고개 숙인채) 홍시 넣었어요. 가시다가 드세요.
형섭  ... !
           - 영희, 도시락 떠안기며 얼른 뒤돌아 뛰어간다.
            형섭, ... 착잡하다. 시선 거두고 객실 찾아 걷는다.
  개찰구의 영희, 형섭을 본다. 눈물 차오른다... 갑작스레 형섭에게로 뛴다.
  형섭, 객차 계단으로 막 오르려는 찰라,
  달려든 영희, 형섭의 등뒤에서 꼭 껴안는다
  양손에 짐을 든채 껴안긴 형섭, 매우 놀라고 당황스럽다.
  형섭, 돌아서려고 움찍하자,
영희 잠시만요, 잠시만요, 선생님.
          - 형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영희의 눈물이 형섭의 등자락을 적신다....
            형섭, ....  경직된 표정이 누그러든다.
         영희, 형섭의 허리에서 팔을 푼다.
영희 (고개 숙이고) 고맙습니다. 선생님. (눈물 훔친다)
형섭 ... (영희를 돌아본다)
          - 영희, 부끄러움 떨쳐내며 밝은 웃음 짓는다.
  형섭, 무슨 말인가 하고 싶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영희 (꾸벅 굽히고 밝게)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 형섭,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 떼는 순간,
  역무원, 객실 승차를 재촉하며 다가온다.
  형섭, 단념하고 객실로 오른다.
  영희, 울것 같은 표정으로 지켜본다.
  형섭, 객실 칸사이로 다시 나와 가방을 열어 시집 한권을 꺼내 건넨다.
  영희, 시집 받아들면, 김춘수 시집.
영희 ...!
형섭 (무뚜뚝하게) 국어공부 열심히 해라.
       - 기차 서서히 출발하고, 형섭, 묵묵히 객실로 들어간다.
  영희, 시집을 파라랑 넘긴다. <능금>시편에 프리뮬라 꽃 한송이 납짝눌려              꽂혀있다.
            영희, 함빡 웃음이 터질 것 같더니 어느새 눈물이 괴고... 그 마음 꾹꾹               누르다가 플랫포옴을 벗어나는 기차에 대고 소리친다.

영희 김영희는 이형섭을 좋아했다아~
            (더 크게) 김영희는 이형섭을 좋아했다아--
     (마음을 모두 뱉아서) 김영희느은- 이형섭으을-  좋아했었다아 --

  112. 달리는 기차안
  터널을 지나는 차창으로 형섭의 얼굴이 비친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형섭, 창에서 고개를 돌린다.
  앞좌석의 아이와 엄마. 
  아이, 홍시를 입 언저리에 잔뜩 묻히며 맛있게 먹고있다.
  엄마, 아이의 입술을 수건으로 닦아준다.
  아이, 다시 묻히며 먹다가 형섭을 본다.
형섭 (아이에게 미소짓는다) ...

        - 아이, 다시 홍시를 먹고,
  형섭, 무릎 위에 놓은 도시락 가방을 푼다.
  예쁜 사각함 뚜껑을 열면, 홍시 네알이 오롯이 들어앉았다.
  형섭, ‘흐흥...’ 웃음이 나온다... 홍시 하나를 집어 향기를 맡고
  한 입 물어 음미한다. 
  다시 한 입,  다시 한 입 먹어간다.
  아이, 형섭을 보고 웃는다.
영희(소리)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나온다.

            113. 교실
           형섭의 국어시간. 영희가 일어나 시낭독하던 그 교실이다.
   
영희,형섭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형섭        이미 가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물은
            이 아쉬운 자리에는
영희, 형섭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114. 다시 플랫홈
           영희, 감회의 눈물. 고개 쳐들며 시집 품에 안는다.
          

                                                      < 끝 >

 

 

 

 

 

 


 

 

 

 

 

 

 

 

 

 

 

 

 

 

 

 

 

 

 

첨부파일 2002_홍시 - 권도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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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다반향초 | 작성시간 14.11.17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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