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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절정 ①] 황진영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3.03.21|조회수932 목록 댓글 1

[절정 ①] 황진영

 

 

 

 

 

 

 

 

 

 

 

1. 카페 안.
무지화면 위, 하아... 하아... 불안하고 거친 숨소리가 가득.
화면 점점 또렷해지면, 깨진 창, 부서진 문고리 등으로 난장이 된 수표교 인근 근대식 카페 안에 삼십 대의 육사가 거친 숨을 고르며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
다다다닥, 헌병경찰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혹은 끊겼다... 육사의 심장을 졸아들게 하고. 육사의 곁에 탈진한 채 앉아있는 사내, 문석. 이윽고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

육사  이제 가려나 봅니다.
문석  가기는... 벌써 수포교 초입을 막고 있을 거인데. 이 꼴을 해서는 잡히기   딱이다.  니나 나나 둘 중에 하나는 죽는다. 아니디... (피식) 둘 중에 하나  는 사는 거이디.

보면, 문석의 다리에 총상. 육사, 문석의 총상 위쪽에 헝겊을 고쳐 메어준다.

문석  (육사를 가만... 보다가) 니 그 얘기 좀 해
보라.
육사  허구헌날 그 얘기.
문석  해 보라.
육사  ... 날 때부터 발에 쇠고랑을 찬 채, 평생 다리도 펼 수 없는 작은 감옥에   갇혀 살았던 사내가 있었습니다. 사내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이곳이   세상의 전부려니... 하고 별 불평도 없이 살았는데 말입니다. 딱 하루, 창이   열리더니 달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내는 그만 달빛을 사모하게 되었지요.   이제 평생 달빛을 볼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문석  ...
육사  달빛을 보게 된 건 사내에게 잘 된 일입니까... 아니면 잘 안 된 일입니까?
문석  (피실피실...) 말 도 안 되는 이야기디...
육사  그러면서 뭘 그리 허구헌날 해달라고 합니까?
문석  (피실... 웃다가 조금 진지해지며) 예전에는 그래두 고운 달님을 한 번  이라도 본 게 낫디 않겠나... 생각했는데 말이디...

문석 안 춤에서 알약이 든 작은 약병을 꺼내더니, 입안에 털어 넣고 질겅질겅 씹어 먹는다.

문석  요새는 차라리 몰르는 게 낫디 않나... 평생 다시 못 볼 달님이라면 아예   안 보는 게 낫디 않았을까... 싶단 말이디.
육사  좋게좋게 생각하시오. 다시 달빛을 볼 수있게 수를 쓰면 될 일 아니오?   오늘 같은 날두, 둘 중에 하나만 사는 게 아니라 형님도 살고, 나도 살면 됩니다.

문석  그래, 그러면 좋디...(옆에 놓인 서류가방 열어 두루마리 종이 꺼내주며)   이거 좀 처리하라. 먹어 없애면 깔끔하고 좋디. 둘이 하면 좋겠지마는   나는 위장이 나뻐서리... (하다가 쿨럭쿨럭, 코에서 주르륵... 피가 흐른다)   이야... 생각보단 많이 아프네...

동시에 문석의 손에서 떨어져 떼구르르... 구르는 약병. 육사, 하얗게 질린다.

육사  이봐, 이게 뭐하는... 뭐하는 짓이야!

육사, 문석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 토하게 하려는데, 턱, 고요하면서도 단호하게 육사의 손을 잡는 문석. 

이문석  내는 이제 잽히기 싫다. 니는 고문당하는 거 질리지도 않네?

서로 마주보는 두 사람. 육사의 눈동자가 떨리고...

문석  그러고 보니 자네 진짜 이름도 몰랐구만. 말해보라, 진짜 이름이 뭐이야?
육사  내, 내 이름은...(하는데)

마지막 순간이 오는 것을 느끼는 문석.
 
문석  ... 안동촌양반, 내 먼저 갈테니 자네는 모쪼록 천천히... 있다 오시오.

문석, 깨진 창 밖을 본다. 달무리에 갇혀 빛이 보이지 않는 달. 한 순간 비감한 미소 스치는 문석.

문석  보고 싶네... 우리 옥분이...

그렇게 눈을 뜬 채로 툭, 고개를 떨구는 문석. 

CUT TO

문석의 곁에 앉아 넋이 나간 채로 문석이 준 종이를 찢어 씹어 먹는 육사.
마지막 조각을 씹어 먹었을까...
다시금 가까워지는 헌병 경찰들의 발소리, 곧 우당탕... 문짝을 부수는 소리,
그 사이, 육사가 마주한 깨진 창문 밖, 구름이 서서히 비껴나며 달이 천천히 드러난다.
육사의 얼굴을 비추는 달빛.
그 달빛에, 우는 듯 웃는 듯, 비애로 일그러지는 육사의 얼굴. 육사, 질끈 눈을 감으며 암전.

2. 원촌리 전경
화면 열리면, 웅비한 산기슭 사이로 흐르는 낙동강 상류의 전경, 부감으로 펼쳐진다.

이육사(E) 이 골물이 졸졸, 저 골물이 콸콸, 열 두골물이 한데 모여 천방져지방져   흐르던 그 강 기슭.

강물 따라가던 카메라. 산과 강에 둘러싸인 모습이 아늑한, 원촌리에 멈춘다. 

이육사(E) 동리 집 지붕마다 고지박이 드렁드렁 굵어 가던 이맘때쯤, 우리 형제들이   오언시 지은 것을 발표한다 하면 왼 동리가 모여서 잔치를 하며 야단법석을 하였다.

- 마을 정자.
원록의 할아버지 치헌공 이중직과 아버지 이가호를 비롯한 마을 어른들 앞에서 각자 지은 오언시를 발표하는 여섯 명 아이들, 바로 일곱 살 원록(이육사)과 원록의 다섯 형제들이다. 

이육사(E) 장원례는 술 한 동에 북어 한 떼도 좋고, 참외 한 접에 담배 한 발도 좋았  다. 담배는 어룬들이 갈러 피우고, 참외는 아해들의 차지였다.

- 정자 + 원촌리 강변.
정자에 앉아 담뱃대를 털거나,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이중직과 마을 어른들의 여유로운 모습. 이중직, 저만치 뭔가를 보는 눈빛. 
보면, 마을 앞 강물에서 물장난을 하거나 강변에서 말을 달리는 원록과 형제들.
붉은 노을 아래, 그림 같은 풍광.

이육사(E) 날이 저물면 강가에 가서 목욕을 하거나 말을 타고 달렸다.

물장구 치고 놀던 원록, 한 순간 강변의 어디쯤을 보고는 놀던 것을 멈칫한다.
원록의 시선 끝, 아이들이 타고 놀던 여러 말들 가운데 눈에 띄게하얀 백마 한 마리가 홀로 이리저리 거닐고 있다. 이상하다... 하며 고개 갸웃하는 원록에서.

- 원록의 집 마당.  
깊은 밤, 평상에 누워 참외를 먹으며 할아버지의 말을 듣는 여섯 형제들.

이육사(E) 밤이 으슥하고 깨끗하게 개인 날, 할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을 불러 앉히고   별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다. 저 별은 문천성, 저 별은 남극 노인성... 그  러다 삼태성이 우리 화단의 동편 옥해와 나무 우에 비칠 때 별의 전설에   대한 강의도 끝이 나는 것이었다.

3. 원록(이육사) 생가 전경.
햇살이 노란 오후.
열 살 원록을 비롯, 형 원기, 동생 원유, 원지, 원우, 그리고 막내 세 살 원룡까지.
여섯 형제들이 하나같이 똑같이 목에 천을 두른 채 마루위에 앉아있다. 형제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는 어머니 허길. 원록, 손거울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이모저모 살펴보다가,

원록  어무이, 저는 이래 일자로 하지 마시고요, 여기 옆 머리를 살짝 내려주소.
허길  (등어리 찰싹 때리며) 가마이 있으라캐찌.

그 때, 사랑채에서 들리는 ‘아이고오, 아이고오...’ 곡소리. 바로 원록의 할아버지 이중직의 울음소리다. 
놀라 사당채를 보는 원록. 따라 보는 여섯 형제들. 

(ins)
사랑채 안, 하얀 삼베옷을 차려입은 이중직.
궁궐 쪽을 향해 절을 한 자세로 아이고... 아이고... 비통한 울음을 울고 있다.

할아버지의 애통한 오열에 세 살 원룡이 삐죽삐죽 거리더니 훌쩍 거리고 덩달아 눈물 나는 다섯째 원우. 원록 역시 쿨쩍, 콧물을 들이키다가 곧 으앙... 울음이 터지려고 하는데,

허길  헤프게 울지 마라. 우는 걸로 다 쏟아버리면 안 되니라. 

꿀꺽, 눈물을 삼키는 원록.
허길, 다시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손질하지만 어쩔 수 없이 허길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힌다. 이중직의 오열이 길게 이어지고... 그 위로 자막 뜬다.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조약 체결

- 원록의 집 마당.
깊은 밤, 부스럭...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조심히 다가가는 원록.
보면, 할아버지 이중직이 화단에서 꽃을 심고 있다. 구부러진 이중 직의 등.

원록  할배... 거서 뭐하는교?
할아버지 (원록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혼잣말로 중얼중얼) 이... 잡초를 뽑아야   하는 것을, 멀쩡한 꽃을 뽑았으니, 이...
원록  할배. 드가이소. 또 병납니다. 요새 할배 음식도 안 자시고, 툭하면 피가래  나온다고 어무이 걱정이 많습니더.

하지만 중직, 맨손으로 흙 파내며 기운 없이 쓰러진 꽃 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원록, 할아버지에게서 꽃을 받아 자신이 심는다.
한 켠으로 물러나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중직.

중직  한 번 뿌리가 꺾이면 다시 심어지지 않는 법인겨...

원록, 손은 흙에 둔 채로 밤하늘을 보다가, 베시시 미소 짓는다.

원록  (별이 나무 끝에 걸린 모습) 할뱀요, 별나무래요.
중직  이눔... 별나무가 어데있노?

하고 보면, 나뭇가지 끝에 열매처럼 걸린 별. 설핏, 미소 짓는 이중직.
원록, 손등으로 눈을 비비적거리며 하늘의 별을 제대로 보겠다는 듯 눈을 꿈벅인다.

원록  할배 지는요, 이래 별 밝은 날도요, 기냥 밝다... 그라믄 괜시리 미안시런  맴이 들고요, 또 아츰에 쌍봉 아래로 안개가 자욱이 피는 기 보고 기냥   안개가 마이낐다... 하고 나믄 또 고운 안개 개루한테 미안한 맘이 들어요...   꼭 별님한테 맞는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근심스런 표정)그기 뭐꼬...   자꾸 생각하게 되고요...
중직  ...우리 록이 눈은 진짜구나.
원록  ...!
중직  록이는 눈도 코도 입도 귀도... 다 진짜구나...
원록  가짜 눈도 있니껴?
중직  있지.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안들은 양, 가짜로 말하는 입이 있다. 많다.
원록  진짜 눈은 좋은 거니껴?
중직  (잠시 원록 보다가) 좋지...

신이 난 원록, 훌쩍 화단 옆 바위 위로 올라가서 하늘을 보며 선언하듯 외친다.

원록  할뱀, 지는요 한 번 대차게 살아볼 거에요. 요 눈으로 세상 이쁘고 좋은   거 다~ 볼 거에요. 어매, 아배랑 아미리카도 가고요, 원기 성이랑 원유, 원  지 델꼬 축지법 쓰는 쇳바퀴도 타고요,
중직  (근심스런 표정 스친다) 그란데 록아, 눈이 밝으면 살기가 고난시럽다.
원록  (하지만 원록에게는 중직의 음성 들리지 않고) 난중에 이쁜 색시랑 같이   한강에 가서 뽀-트도 타고요, 울 동리 아들 다 데리다 연예관 구경도 시켜  주고요...

원록 뒤, 근심스러운 중직의 표정에서.

- 원록의 방.
모두 잠든 새벽녘, 형제들이 이리저리 엉켜 자고 있는 방. 아이들의 얼굴 모두 평온하다.
홀로 커다란 들창문을 열어놓고 창턱에 팔을 괴고 앉아 달을 올려보는 원록.

- 할아버지 이중직의 방 앞/같은 시간,
옷을 갖춰 입은 채, 들창문을 열고 궁 쪽을 보고 앉은 이중직.
중직의 손톱 끝 까맣게 밀려들어간 검은 흙.
달빛을 받은 중직의 얼굴과 하얀 도포자락이 더욱 파리해 보인다.
비애로 가득 찬 중직, 한 순간, 앉은 자세 그대로 푹, 고개를 떨군다.


- 다시 원록의 방.
문득 원록에게도 꾸벅... 졸음이 온다.

이육사(E) 그 시절... 말 달리던 들판과 굽이 흐르던 낙동강, ‘원록이 저 놈은 맹랑한   놈이야’ 하며 좋아하시던 할아버지를 오래 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내   형님과 아우들의 웃음소리가 담을 타고 넘치던 그 시절이 시름없이 흘러,   이제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을 알지 못했다.

잠든 원록의 눈썹이 가느다랗게 흔들렸을까... 히히힝, 말 우는 소리 들린다.
동시에 하얀 빛이 원록의 얼굴에 아른거리고.
보면, 눈부시게 하얀 백마가 또각또각 걸러 집 마당으로 들어와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다.

이육사(E) 그 시절, 내 이름은 아직...

휘이, 바람이 불자 빛의 조각인 듯한 백마의 갈기가 달빛을 받아 부시게 흩날리고,
그 빛이 사방으로 흩트려지며 화이트 아웃.

이육사(E) 이육사가 아니었다.

타이틀 오른다.

<절정>

그 위로, ‘록아, 원록아...’ 하고 부르는 어머니 허길의 음성.

4. 대구 원록의 집, 원록의 방/ 오전.
이불을 걷어 빳빳하게 각이 잡힌 양복 바지를 꺼내는 손.
기름을 발라 머리를 단정하게 넘기는 손.
마지막으로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쓰자 드러나는 얼굴, 장성한 원록이다.

허길(E)  록아, 아즉 멀었노?
원록  지금 나갑니더. (거울 보며) 할배... 오늘도 대차게 공부하고 올게요.

5. 집 마당.
원록, 반질 윤이 나는 구두를 신으며 섬돌 내려오면, 툇마루에 앉아 사돈지를 쓰는 어머니 허길과 화단을 가꾸는 아버지 이가호.

이가호  돗수도 없는 개화갱(안경)은 뭐하러 쓰노?
허길  (피식) 두시오. 멋 부리는 거 아닌교.
원록  (베실... 미소) 지는 뭐든 멋진 게 좋아요. 핵교 다녀 오겠심니더.(하는데)
이가호  내달에 함 들어온다.
원록  (멈칫) 아배... 좀 미루면 안 됩니껴? 지금 공부해야 하는데요.
허길  공부는 핑생 하는 기 아이가? 색시 맞으면 공부 그만 둘라 그랬노?  
원록  (말문 막혔다가) ...그 아가씨 보통핵교는 나왔지요?
허길  ... 아가씨가 배움이 짧다니께네 니가 자알 끌어 줘라.

배움이 짧다는 어머니의 말에 시무룩해지는 원록에서...

6. 신방 전경 + 신방 안.
결혼식 하객들의 왁자한 소리.
신방 앞, 섬돌 위에 심란한 표정으로 앉은 원록. 하지만 결국 끄응... 자리에서 일어선다.

- 신방 안.
원록, 신방안에 들어서면 주안상 앞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앉은 신부.
원록, 술잔을 들어 혼자 벌컥 마신다. 다시 벌컥, 연거푸 몇 잔을 마신 원록.

원록  (신부 잔에 술 따르며) 드시오. 난 녀성들이 술도 하고 영화도 보러 다니고   가베도 즐길 줄 알고, 공부도 하고... 그런 게 좋소. 자, 드시오(하는데)

스르르... 옆으로 기울어지다가 툭, 쓰러지는 신부.
원록, 화들짝 놀라 다가가보면, 신부는 스러진 채로 아주 옅게 드르릉... 코를 골고 있다.
피식, 웃고 마는 원록, 얼굴 앞으로 쓰러진 족두리를 가만... 벗겨본다.
드러나는 신부, 열 여덟 안일양의 얼굴. 통통한 볼살이 발그레한... 여여쁜 신부다.
원록의 얼굴에 스르르 미소가 뜬다.

7. (스케치) 시집살이 하는 일양.
- 부엌/
일양,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실수로 치마에 불이 붙고 만다.
음마! 하면서 부엌 밖으로 튀어나온 일양.
원록. 요란한 소리에 밖을 내다보면, 일양이 치마에 붙은 불을 털면서 호들갑을 떨고,
시어머니 허길이 바가지 물을 부어 불을 꺼트린다.
순식간에 옴팡 물을 뒤집어쓴 일양.

- 마당
일양, 방망이질 열심히 해서 마당 빨랫줄에 빨래 널고 돌아서는데,
이 모습을 보며 끌끌... 혀를 차는 허길.
보면, 어찌나 방망이질을 열심히 했는지 바지에 뻥...구멍이 뚫렸다.
막 집 안으로 들어서다가 이 모습을 본 원록, 큭, 웃다가 허길의 눈치에 입 다물고.
 
- 원록의 방/
잠자리에 나란히 누운 일양과 원록.
원록이 ‘이보오...’하고 다가가면 일양, 베게로 가운데 금을 만들며, 쌩하니 외면한다.
8. 마당 일각/ 밤.
모두가 자는 깊은 밤. 장독대 근처에 어른거리는 분주한 실루엣.
원록,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면, 일양이다.

원록  뭐 하시오?
일양  (화들짝 놀랐다가) 독이 드럽어서... 그냥.. (다시 벅벅 장독 닦고)
원록  잠이 안 오시오? (가만 보다가) ...장모님이 보고 싶은 모양이구만.
일양  ...그런 거 아니에요. (하는데)

원록, 일양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일양, 당황스럽고. 

원록  마음에 맺힌 것이 있는데 술을 마셔도, 화를 내도, 소리를 질러도 풀어지  지 않을 때 말입니다. (조용히 소근 거린다) 나는 시를 씁니다.
일양  ...!
원록  임자도 한 번 해 보시오.
일양  (조금 불쾌한 얼굴이 된다) 놀립니껴? 지글 몰라요.
원록  글은 차차 배우시오. 글을 몰라도 시를 읊을 수는 있으니까.
일양  약도 아이고, 그런 기 속 풀리는데 무신 도움이 된다꼬...(더 박박 닦는데)
원록  (하늘의 달을 보며) 뵈올까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람... 하루가 열흘  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일양  ...!
원록  잠조차 없는 밤에 촉 태워 앉았으니... 이별에 병든 마음이 나을 길 없오매라.   저 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까 하노라. (일양 보며) 내 돌아가신   할배 생각 날 적에 썼던 시요.

하고는 끄응... 몸을 일으켜 간다. 시조 읊는 것을 듣는 둥 마는 둥 장독만 닦던 일양,
원록이 사라진 후, 문득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읊조려 본다.

일양  저 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까... 때로 볼까 하노라...
  (하다가 울컥, 눈물 고인다. 쓰윽... 눈물 훔치다가 결국 터진다) 어매... 

앞 치마에 얼굴을 묻고 원 없이 엉엉엉, 눈물을 쏟는 일양.
먼발치서 그 모습을 보는 원록의 따듯한 눈빛에서.

9. 마당 전경.
다음 날 아침, 원록 어머니 허길에게 등교 인사를 드리면,
허길 옆에 선 일양, 원록에게 눈인사 한다. 왠지 전과 달리 수줍어 볼이 발그레해진 일양.
원록도 베시시 웃고...

10. 전차 안.
전차에 타서 자리를 잡는 원록.
뒤편에서 여학생 두 명이 조선말과 일본말을 섞어 대화하는 소리 들린다.

여학생1  낙화유수 변사가 내려왔대. (일본어) 극장에 같이 갈래?
여학생2  (일본어) 정말? 좋아. (조선말) 가기 전에조지아에 들러서 눈요기나 할까?
여학생1  이왕이면 조지아 말구 화신 백화점으로 가자. 조지아엔 좋은 물건이 없어.

한복 치마를 입고 뾰족 구두를 신은 여자들, 넥타이 와이셔츠를 갖추고 고무신을 신은 남자, 양장으로 쫙 빼입었지만 그 뒤에 봇짐 든, 한복차림의 식모를 대동하고 앉은 여인 등등뒤죽박죽 근대 조선인들이 가득한 전차 안 풍경.
전차 차장, 목에 계수기를 걸고 다니며 승객들로부터 엽전 받다가 갑자기 역정을 낸다.

차장  아 빨리빨리 합시다.
조선 노인 아니 분명, 여다 돈을 뒀는데...(당황하며 안 춤 뒤진다.) 내, 요것들 전차  구경시켜준다고 전답 팔아 맹근 돈을 분명 예 뒀는데....

보면, 하얀 두루마기에 망건을 쓴 전형적인 조선 노인과 그의 식솔들.
조선 노인이 전차비 를 찾지 못해 두루마기 안 춤을 뒤지고 있다.
식솔들이 불안한 듯 차장의 눈치를 보고...

차장  돈이 없으면 내리시오. 이거 원 두루마기들이란...

곧 으앙... 울고 마는 노인의 손자, 등에 업힌 아이를 어르는 며느리와 눈만 꿈뻑이는 아들. 그리고 이들을 보는 전차 안 사람들의 무시하는 눈빛. 이 모든 광경을 지켜 보는 원록에서.

11. 원록의 방/ 늦은 밤.
원록, 머리맡에 손을 괴고 누워, 천장을 보고 있다.
잠시 후 들어온 일양, 슬쩍 원록의 눈치를 살피더니 두 사람 사이, 베게 금을 치우고 가만... 원록의 옆에 가깝게 눕는다. 하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천장만 보고 있는 원록.

일양  ...어무님께서 그러시는데요, 이제 서방님도 지도 나이가 찼으니께네...   부부의... (흠흠... 헛기침) 그러니께네.... 부부의...(하는데)
원록  우리 어릴 적에는 흰옷만 즐겨 입었지. 나라가 넘어가고 나서, 조선 사람  들을 개화시킨다며 관리들이 검은 물이 든 물총을 쏘아댔어도 고집스럽게   양잿물에 삶아 희게 입었건만. 요즘엔 같은 조선인들끼리도 흰 옷 입은   사람들은 두루마기라고 무시하더군. 
일양  (눈만 꿈벅꿈벅)
원록  자네 새로 생긴 동물원을 아나? 그 자리를 만드느라 순종 황제께서 창경궁을   허무셨다네. 총독부에서 순종황제께 스스로 궁을 허물게 했다지? 창경원엔   지금도 밤낮으로 사람들이 북적인다네. 참 모를 일이야. 몇 해 전, 만세운동 때   목청껏만세 부르던 자들이 이젠 창경원에 가서 희희낙락 거리고 있으니...(하는데)

일양  창경원에 사람들이 많이 가지요? 지도 꼭 가고 싶습니더. 듣도 보도 못한   진기한 짐승들이 많더믄서요?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일양.
원록, 잠시 일양을 보다가 다시 모로 누워 들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고,

일양  어무님께서 그러시는데요, 이제 서방님도 저도 나이가 찼으니께네...
원록  난 이제 일본으로 가려네. 가서 듣고, 보고 오려네.

말문이 막히는 일양.
벌써부터 창 밖, 먼 곳을 더듬는 원록의 눈동자. 일양, 막막해지고...

12. 안방 + 툇마루
안 방, 허길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원록.
그리고 방 밖, 툇마루에서 빨랫감을 뜯으며 방 안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일양.

- 방 안.
서로 마주한 육사와 허길. 허길, 곰방대에 담배를 꾹꾹 채우다가 들창 밖 풍경을 본다.

허길  날 좋네. 만주에는 삼월에도 눈이 펄펄 내린다는데... 지금은 어쩔란가?
원록  너무 자주 태우지 마세요. 기침병 도집니더.
허길  그래, 이놈의 기침병도 내력이다. (잠시 틈) 늬 외할아버지도 이 병으로 갔으이.
원록  ...
허길  니 외가 사람들이 독한 양반들이다. 만세운동 때 손을 안 쳐든 사람이   없었데이. 그래, 감옥소 들락거리다가, 아예 일가 재산 털어 군자금으로   주고 만주로 가, 거서도 또 그라고 살고 있다. 덕분에 늬 외숙 어른 감옥  살이 하다 세상 떴을 때도 조선에 시신 찾아올 피붙이 하나가 없었데이.
원록  ...
허길  피도둑은 못한다카더이... 니 형을 봐라. 벌써부터 동네 청년들 끌고 댕김서   뭐라뭐라 쑥덕거린다. 원일이

원조는 말할 것도 엄꼬. 보고 있음, 가심이 철렁한다.
 
(잠시 틈) 원록아.

원록  (보면)
허길  돌아가신 니 조부께서 말씸하시기를... 록이 니 눈이 밝아 앞으로 고난시러  우면 어쩌나... 내는 그 말이 내내 걸맀다.
원록  ...
허길  록이 니는 일본 가서 이것저것 많이 배우거든 니 성처럼 말고,    늬 외할아버지처럼 말고... 잘 살아봐라. 무신 말인지... 알겠노?
원록  왜 성이며 원조 원일이는 두고... 지만 그리 살라 합니껴?
허길  ... 니는 어려서부터 멋 내는 거 좋아했재? 멋나게 살고 싶으면... 참고   살줄도 알까 싶어 그런다. 여섯 놈 중에 하나라도 그리 살면...애미 맘이 좋겠다.

- 방 밖
정신 줄을 놓고 허길의 말을 듣던 일양. 원록의 대답을 기다리며 조마조마 한데.

- 방안.
잠시 마주치는 원록과 허길의 시선. 이윽고 원록, 씨익... 미소 지으며 말한다.

원록  걱정 마소, 어무이. 한 번 사는 거... 지는 최고로 멋나게 살아볼랍니더. 

- 방밖.
원록의 말을 들은 일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뜨고...

13. 원록의 방 안.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는 원록. 상기된 표정.
그런 원록을 근심스럽게 흘끗 보며 여행 가방을 챙기는 일양. 

일양  일본에 가면 좋은 동무들 만나고 좋은 공부만 하고 오시소. 그러니께네...   지 말은요, 어무님도 말씀하셨지마는... 이상한 사람들이랑 어울리다보면...  (하는데)
원록  좋은 구경 많이 하다가 님자 생각나면 어쩝니까?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는 원록. 순간, 울컥하는 표정이 된 일양에서.

14. 원록의 집 앞 길.
저만치 원록이 멀어져 간다.
원록이 작아질 때까지 하염없이 보는 일양의 모습에서.

15. 일본 교토 어학당 안.
(INS.) 일본 교토, 일본어학당 전경.

일본어를 배우러 온 각국의 학생들.
선생을 따라 일본어를 발음하는 학생들. 그 중의 원록.
원록, 금발의 백인을 흘끗흘끗 신기한 듯이 보며 열심히 일본어를 따라한다.

16. 길 일각.
자전거를 타고 가던 원록.
문득, 만국기가 펄럭이는 도서 박람회장 앞에서 자전거를 멈춘다.
만국기 아래, 화사한 마네킹 걸이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다.
17. 도서 박람회장 안.
박람회장 안으로 들어선 원록. 도서 박람회장의 풍경 펼쳐진다.
셰익스피어의 고전들이 번역된 서적들, 그리고 수많은 클래식 음반들, 질 좋은 문구류 등등.
그 사이를 홀리듯 지나가던 원록, 누군가와 부딪힐 뻔 한다.
보면, 아이의 손을 잡고 박람회 구경을 온 일본인 여성.
일본인 여성, 예의바르게 고개 숙여 ‘쓰미마셍’하고는 지나간다.
원록, 일본인 여성이 아이에게 이 책, 저 책 설명해 주며 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본다.
맞은 편 진지하게 책을 읽는 여학생의 모습도, 레코드판의 음악을 들으면서 희미하게 고개를 까닥거리는 노신사의 모습도.
박람회장 곳곳의 활기찬 문명의 향기를 느끼는 원록, 왠지 부럽고 샘이 난다.

원록  (문구류 전시장의 질 좋은 종이를 만져보며) 좋구만...(하다가)

문득,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반가워 펼쳐든다.

원록  조선 사람들은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다. 하지만 자제와 절제의 미덕을   모르는 민족... 그들은 무턱대고 일본에 적대적이지만, 일본은 가난한   조선에 철도며 전신, 우편 서비스를 만들었... (점점 표정이 굳어지는데)
기모노 사내(E) (일본어) 좋은 책이지요.

원록 돌아보면, 기모노를 입은 원록 또래의 훤칠한 미남형의 사내다.

기모노사내 (일본어) 모쪼록 동아시아 모든 국민들이 이런 책을 많이 읽어서 서로   뭉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책 펼쳐 읽는다) 어떤 민족이 식민지가 되었다면   그것은 그들 내부에 그럴만한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망한 민족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원록  (표정이 어두워지고)
기모노사내 (일본어) 기분 나쁘게 생각할 거 없지 않소? 석탄이 부족한 나라에서 석탄  을 수입하듯,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일본의 정신을 수입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 아니요?

잠시 생각에 잠긴 원록. 조선말로 대답한다.

원록  일본이 참으로 아시아를 위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좋겠는데 말이오.

돌아서는 원록, 그런 원록의 뒷모습을 보는 기모노 사내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고.
그렇게 몇 발자국을 갔을까.
갑자기 부르르르... 바닥이 진동하더니 곧 책장이 무너지며 책들이 와르르 쏟아지고 비명 소리 겹쳐진다. 놀라 돌아보는 원록의 위로, 자막 뜬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발발.

18. 박람회장 전경 + 길 일각.
거리로 나선 원록.
사방에 흩날리는 지진 호외, 아이의 손을 잡고 바쁘게 걷는 사람들, 다급히 문을 닫는 거리의 상점들로 어수선한 거리 풍경. 원록역시 우왕좌왕 하다가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골목길을 도는데, 순간, 절컥 원록의 가슴팍에 박히는 총구.
이제 거뭇한 수염이 나기 시작한, 앳된 얼굴의 열 대여섯 쯤 되어 보이는 자경단 소년이다.

자경단소년 (일본어)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 따라해, 어서! 

발음하기 어려운 일본말을 시키는 자경단 소년.
원록, 당황하여 입을 오물거려 보지만 어설픈 발음.
자경단 소년, 총구를 원록의 목덜미 속으로 더 깊게 들이대는데,
그 때, 불쑥 나서는 이. 바로 조금 전의 기모노 사내, 윤세주다.

세주  (유창한 일본어) 이봐 슈이치, 여긴 왠일인가? 이 사람은 내 고향 동기요.   오사카 사투리가 심해. 그렇다고 조선인처럼 취급해서 되겠나?

자경단 소년, 잠시 의심하는 표정이 되더니 결국 총구를 치운다.
휘청... 다리가 풀리는 원록을 부축해 재바르게 골목을 벗어나는 세주.

19. 길 일각. 
세주, 자경단들이 지키고 있던 길목을 벗어나자마자 원록을 밀치듯 부축하던 손을 푼다.

세주  물정 모르고 돌아다니고 있구만.
원록  다, 당신은... 박람회장의 그 일본인?
세주  나도 조선인이요. 당신처럼 순진한 조선인은 아니지만...
원록  ...!
세주  간토에 지진이 났소.
원록  간토에 지진이... 그럼 곧 여기까지 지진이 번진단 말이요?
세주  아니, 이건 그저 지진의 여파일 뿐이라더군.
원록  지진의 여파일 뿐이라면... 문제 될 게 없지 않소?
세주  돈 잃고, 가족을 잃은 일본인들이 분풀이할 대상을 찾고 있소.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거짓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단 말이요.
원록  ...!
세주  (슬쩍 골목 안 자경단들을 살피며) 일본 정부와 경찰은 저들을 방관하고   있소. 일본국민들이 정부에 분노를 터트리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지.
원록  그럴 리가 있나? 설마하니... 그럴 리가,
세주  그러니 자경단을 피해서 어서 가시오.
세주, 기모노 옷을 탈탈 털며 자리를 뜨는데, 저만치 자경단 소년들이 또 한 중국인을 잡았다. 겁에 질려 중국말로 횡설수설하는 중국인.
도망가려다 말고 멈칫, 서는 원록.

중직(e)   록아... 눈이 밝으면 살기가 고난 시럽다..
허길(e)  록이 니는 늬 성처럼 말고, 늬 외할아버지처럼 말고 잘 살아봐라.    무신 말인지 알겠노? 
원록(e)  할배, 지는 한 번 대차게 살아볼 거에요.

중직와 허길 등의 음성이 얽힌다. 하지만 원록, 어느새 다시 자경단에게 다가서며,

원록  이보시오. 그만 멈추시오... 그만 멈추...(하는데)

탕! 총소리. 앳된 소년 자경단이 중국인에게 총을 쏘았다.
소년 자경단의 얼굴 위로 튀는 피. 충격을 받아 서버리는 원록.
원록의 기척을 느낀 자경단 소년이 피 묻은 얼굴을 돌려 원록을 보고...
격하게 흔들리는 원록의 눈동자.
그 때, 세주가 성큼 다가와 다시 원록을 끌고 간다.

원록, 세주에 끌려가면서도 연신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꿈뻑거리며 본다. 
얼굴에 피가 튄 앳된 자경단 소년을 본다.

20. 일본식 주점 안.
손님이 없는 빈 주점으로 들어서는 세주와 원록. 주점 주인장은 아마도 세주와 안면이 있는 듯 잠시 눈인사를 하고는 ‘금일 폐업’ 팻말을 내건다.
세주, 테이블에 놓인 술병 중 아무거나 따더니 벌컥 술잔에 따라 마신다.
두잔 째 벌컥, 세잔 째를 따르려다 망설이는 세주. 결국 탁, 술잔을 엎는데,

원록  (넋이 나간 듯) 보았나?
세주  (흘깃 원록 보곤) 허긴... 총질하는 걸 처음 봤으면 충격이 크겠지
원록  ...자경단 아이의 코 아래 거뭇한 수염이 났더군. ...보았나?
세주  (뭐라는 건가?)
원록  맨들맨들한 살을 뚫고 수염이 삐죽거리는 걸... 보았나?

그 때, 옷을 갈아입고 나온 주점 주인, 조선말로 세주에게 말한다.

주점주인 성당에서 조선인들을 보호해 준답니다. 갑시다.
세주  (일어서려는데)
원록  (덥썩 세주 잡으며) 난 못 믿겠네. 왠지... 느낌이 좋질 않아.
세주  ...! 
주점주인 여기서 자경단들이나 기다리고 있기는 싫소. 나는 먼저 가겠소.
주인장이 나가버리고. 남겨진 두 사람.
세주 자리에 앉아 원록을 본다. 원록, 완강한 태도로 앉아 있다.

세주  ... 그럼, 이렇게 합시다. 둘 중에 내기에서 진 사람이 먼저 정탐을 하고   와서 남은 사람에게 알려줍시다.
원록  내기?
세주  자식이 있소?
원록  없... 소.
세주  나도 없소
원록  ...?
세주  아내가 있소?
원록  있소.
세주  나는 없소. 부모님은 계시오?
원록  두 분 다 계시오.
세주  나는 두 분 다 안 계시오.

원록, 의아하다. 이게 무슨 내기인가?

원록  누가 이긴 거요?
세주   (미소 지으며) 당연히 그 쪽이 이겼소. 가족이 없는 내가 먼저 정탐을   하고 와야지.

원록의 눈동자 흔들리고... 세주,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원록이 잡는다.

원록  이름이 뭐요? 조선 이름.
윤세주  ...윤세주요.

서로 잠시 시선이 마주치는 원록과 윤세주.
곧 세주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타박타박, 윤세주의 잰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CUT TO
바 문 옆에 붙어 선 채, 밖의 분위기를 살피는 원록.
갑자기 요란한 비명소리, 타다다당, 총소리와 차들의 경적소리.
골목 밖으로 튀어나가는 원록. 보면, 저만치서 활활 불길이 오르고 있다.
뛰어가는 사내 중 하나가 순간 발을 헛디디며 ‘엄마야!’ 조선말 하는 것을 보고,
덥석 그를 붙는 원록. 소스라치며 두려워하는 사내. 

원록  나도 조선인이요. 저기 무슨 일이 난 거요?
사내  성당에서 조선인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렀소. 성당 밖으로 도망치는 자들은  모조리 총살당했소. 나도 그리로 가다가 피해 오는 길이요. 당신도 어서   피하시오.
말만 남기고 뛰어가는 사내.
망연히 남은 원록, 도망 나오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 성당을 향해 뛰기 시작한다.

21. 성당 앞.
활활 불에 타오르고 있는 겐찌 성당. 그 앞에 널브러져 있는 수십 구의 시체들.
반쯤 불에 탄 시체들 속, 누가 윤세주인지 알 길이 없다.
원록, 넋이 나간 얼굴로 시신들 하나하나 뒤집어 찾아본다. 서너 구의 시체를 들춰봤을까...
이글거리는 불길, 마치 원록을 삼킬 듯이 번져오고. 한 순간 mute 되며,

22. 일양의 방 안. 
(일양의 꿈)
칼국수를 맛나게 먹는 원록.

원록  다른 집 칼국수는 목이 메어 못 먹겠어. 임자 칼국수는 이래 술술 넘어  가는데 말이야.

일양, 원록 앞에 앉아 뿌듯하게 보고 있는데,
원록이 드는 칼국수 면발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핏방울이 대접을 시뻘겋게 물들여가고...

화들짝 눈을 뜨는 일양. 꿈이다.
일양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 숨을 고르는 일양. 불안한 마음.

CUT TO
이불을 개켜 벽장에 넣는 일양. 벽장 안, 손때가 묻지 않는 새 이불.
일양, 가만 새 이불을 쓰다듬어 보는데, 밖에서 허길의 음성 들린다.

허길(E)  좋은 손님이 올라나...

일양, 나가보면, 허길이 안방 문기둥 밖으로 나오는 커다란 거미를 보고 있다.
일양은 이그, 징그러운 것, 하며 때려잡으려는데 허길이 말린다.

허길  안방에서 왕거미가 나오면 손님이 올 징조인겨. 좋은 손님이 올라는가...
일양  어무이도... 그런 게 어딨니껴.

하면서도 거미를 유심히 보는 일양.

23. 마당.
마당 수돗가에서 빨래하던 일양. 뒤를 돌아본다. 
거미는 아직도 꼼지락 거리면서 안방문살 위를 올라가고 있다.
괜히 기분이 좋아, 기운차게 빨래하는 일양.
다시 거미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한다.
그러다, 문득 어떤 기운을 느끼며 벌떡 일어서는 일양. 서둘러 대문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저만치 길의 끝자락을 본다. 아무도 없다.
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서던 일양, 다시 대문 밖으로 나간다.
길의 끝자락을 본다.
아무 것도 없다... 아니, 뭔가 아주 작고 까만 점이 보인다.
그 작고 까만 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원록이다.

일양, 주춤주춤 걷다가 원록을 향해 뛰어간다.
가다 고무신을 놓친 것도 내버려두고 뛰어가던 일양, 이윽고 원록의 앞에 선다.
일양, 뭐라 말을 하려 입을 오물거리다 못하고 그저 왈칵 원록의 가슴에 안긴다.
하지만 원록의 얼굴은 하얗게 식어 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채, 반가움에 눈물마저 글썽이는 일양에서...

24. 일양의 집 부엌.
일양, 부엌 깊고 서늘한 곳에 아껴두었던 밀가루를 꺼낸다.
멸치 육수를 내고, 밀가루를 반죽해 밀대로 밀고, 계란 지단을 부치고... 그 정성스런 손길.

25. 방 안.
칼국수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선 일양. 하지만 요동 없이 벽만 보고 누운 원록.

26. 일양의 집 마당.
마당 장독을 닦다가 안방 쪽을 보는 일양.
마치 사람이 없는 것 마냥 고요하다. 섬돌 위, 원록의 신발만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
일양, 섬돌 위 원록의 신발코를 바깥쪽으로 놓고는 다시 장독을 닦는다.

27. 안방 안.
어두운 밤, 벽을 보고 누운 원록. 자는 걸까?
잠시 후, 일양이 들어와 아껴두었던 새 이불을 꺼내 편다.
그리곤 가만... 원록의 등에 얼굴을 묻는 일양. 하지만 원록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없고...
결국 돌아눕는 일양, 서러움에 눈물을 흘린다.
일양의 서러움을 알지도 못한 채, 겁에 질린 듯 부릎 뜬 눈으로 벽을 보고 있는 원록에서.

28. 원록의 집 전경.
눈이 소복히 내렸다.
일양이 눈을 피해 툇마루 아래 내려놓았던 원록의 구두를 다시 가지런히 섬돌 위에 놓는데, 뽀득뽀득, 누군가 일양의 집으로 들어서는 소리.

29. 원록의 방 안.
여전히 벽을 본 채 누워 있는, 수염이 검게 난 원록.

세주(E)         여기가 이원록군 집입니까?
둔탁하던 원록의 눈에 순간 빛이 반짝, 한다.

30. 원록의 집 마당.
벌컥 문이 열리며 원록이 튀어나온다. 놀라는 일양.
원록, 그간 일양이 부지런히 단속했던 구두도 신지 않은 채 세주 앞에 나선다.

세주  (원록을 보곤 빙긋 미소) 맞구만. 살아 있어 다행이네.

세주, 환하게 웃는데, 원록, 그렁... 눈물고인 눈이 되어 덥석 세주의 손을 잡는다.
일양, 이런 원록의 반응이 의아하고. 

31. 사랑채 안/ 밤.
술상을 마주하고 앉은 원록과 세주. 세주에게 맑은 술을 따라주는 원록.
서로 번갈아 두 번을 오가더니 세주, 세 번째 술잔은 받지 않겠다 고개를 젓는다.
원록, 의아한데.

세주  오래 앓았다지? 혹 지진 나던 날, 자경단들이 횡포 부렸던 것을 담아두고   있었나? 지각없는 소수가 벌인 일이네. 그런 것에 신경을 써서야 일본을  배울 수 있겠나?
원록  ...일본을 배워?
세주  왜? 자네도 일본을 배워보려 유학길에 올랐던 게 아닌가? 일본은 좋은   점이 많은 나라야.

원록의 안색을 살피는 세주의 눈빛이 기민해진다.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술잔만 드는 원록. 이윽고 입을 연다.

원록  교토 거리 사람들은 위대한 문인의 작품을 읽고, 거장의 음악을 듣고,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더군. 그들 말대로라면 일본은 문명을   이룬 셈이지.  
세주  ...
원록  헌데 그들이 깔고 앉은 방석아래, 조선과 만주 백성들의 핏물이 줄줄   흐르고 있지 않나? 핏물 위에서 과연 진정한 아름다움이며 문명이 존재  할 수 있는가? (벌컥 술 들이키며) 거기에 문명은 없네. 그곳에선 가장   배부르게 먹은 자가 가장 야만스러운 자일세.

원록의 말 끝에 비로소 미소가 감도는 세주.

세주  역시... 자네도 일본을 몰아내야 조선 백성의 고통이 끝날 거라 생각하고   있구만. 일본에게 분노하고 있구만!
원록  처음 기차를 탔을 때 기억나나?
세주  ...!
원록  마치 우레 속에 앉아 있는 듯 했네. 산천초목이 앞에 번쩍 뒤에 번쩍...   철마라는 게 일단 출발하면 아무도 세우지 못하는 물건이더군. 일본 역시   마찬가지네. 멈추지 못하고 달려가는 꼴이더라... 그 말일세.
세주  (한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며) 무슨 말인가? 저 악질적인 제국주의 국가의   만행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말인가?
원록  미국이 일본과 체결했던 불평등 조약을 일본은 조선에 똑같이 반복했네.   일본이 어디서 배웠겠는가? 미국에게서 배운 걸세. 허면 미국은 어디서   배웠겠는가? 미국을 식민지 삼은 국가에게서 배운 것이겠지.
세주  ...
원록  차라리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조선 사람들이 날로   늘고 있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일본처럼 살고   싶을 걸세.
세주  조선백성이 타락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말없이 술만 들이키는 원록. 세주의 안색이 차가워진다.

세주  아무래도 내가 잘못 찾아온 모양이네.(하며 일어서려는데)
원록  난 이제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걸세.  필요하다면 총도 들고 칼도 들고 폭탄도 들겠어. 대신,
세주  ...?
원록  새로 태어날 조선은 절대 일본이며 아미리카 따위를 닮아서는 아니 되네.   새로 태어날 조선의 백성들은 천리 밖 먼 곳에서 나는 신음소리라 해서   못 들은 척 해서도 , 내 입에 들어오는 쌀을 기름지게 먹겠다 하여 다른  이의 고혈이 빨리는 것을 못 본 척  해서도 아니 되네. 

잠시 쨍... 마주치는 두 사람의 시선.

원록  대답해보게. 자네가 꿈꾸는 조선은 어떤 모습인가?

강한 눈빛으로 원록을 보던 세주, 이윽고 피식 웃더니 술잔을 뒤집어엎는다.

세주  좋은 날이 오면 취하려고 세 잔째는 항상 비워두네. 자네 보기엔 어떤가?
원록  ...?
세주  내, 술로 취하는 날이 오겠는가? 

- 사랑채 밖.
새벽 동이 트고 있다. 날이 새도록 계속된 두 사람의 대화.
마당에 서서 문살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선 일양, 왠지 불안해진다.
암전.


32. 대구 경찰서 박이만 사무실 안.
햇살이 노랗게 화사한 봄날, 한 사내가 벚꽃이 흩날리는 창가에 서서 경치를 보고 있다.
감동하는 표정이 된 사내,

이만  좋구만... 허연 것이 날라댕기는게 꼭, 꼭
  (뭔가 멋진 표현을 하고 싶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입만 움찔거리다)  하얗고 좋구만...(하고 만다. 쩝... 실망스러운데)

카메라 멀어지며, 사내의 허리춤에 찬 권총, 벽에 걸린 일본 총독의 사진 등 보인다.
여기는 대구 경찰서 고등계 사무실 안, 사내는 고등계 형사 주임, 박이만이다.
곧 박이만 옆에 서는 부하 마시모토. 

박이만  (책상 위 땅콩 접시의 땅콩 따깍따각 부셔먹으며) 준비됐나?
마시모토 하이! 용의자들 모두 구치소에 수감해 두었습니다.  
박이만  (신경질적으로 땅콩 까먹으며) 제대로 지원도 안 해주면서 툭하면
  (따각따각) 발본색원을 하라는 둥, 뿌리를 뽑으라는 둥... 하루빨리 경성   보안과에 자리를 잡아야 드러운 꼴을 안 보고 살지...
  (하다 흘끗 마시모토 보며) 명단 읊어봐.
마시모토 예. 이번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의 용의자 명단입니다. 김주사,   김영록, 나병찬, 마순천, 이원록, 한순금..
박이만  거... 이원록이는 전에 격문 사건 때도 용의선상에 오른 적이 있지 않나?
마시모토 하이...

따깍따각 땅콩껍질을 부스며 눈이 가늘어 지는 이만. 그 눈빛이 매섭다.

33. 고문실안.
고문실 안으로 들어선 원록.
피와 머리카락 엉킨 것이 붙은 고문 도구, 바닥에 진득하게 남아있는 피고름 자국,
축축하고 쾌쾌한 고문실. 흡... 숨이 막히는 원록.
이만이 의자에 앉아 대나무 기둥을 칼로 잘라내고 있다.

이만  꿀단지에 폭탄을 넣어 은행장한테 건네줄 생각은 어떻게 했나? 
원록  폭탄이 꿀단지에 들어있었소? 거 기발한 방법이오만... 나는 금시초문이요.

이만, 씨익... 웃더니 대나무 잘라낸 것을 바닥에 놓고는 퍽, 원록을 무릎 꿇린다. 튀어나온 대나무가 원록의 허벅지 살을 뚫고... 윽, 신음을 참는 원록.

이만  난 피냄새가 싫어서 말이지. 여기만 들어오면 말을 길게 하기 싫어.    입으로 핏물이 들어오는 것 같단 말이야.

하면서 단숨에 대나무를 잡아당긴다. 으아아악... 원록의 살점이 찢겨져 나가고,
34. 고문실 복도.
으아악...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엉켜 들리고... 

35. 독방 안.
독방 안으로 쳐 넣어지는 원록.
쭈그려 앉으려다가 너무 아파 차마 앉지 못하는 원록. 피로 흥건하게 젖은 원록의 바지.
앉을 수도 없고 서 있기도 힘든 원록, 감방 구석에 모로 몸을 기대어 서는데,
누군가 똑, 벽을 두드린다. 잠시 후, 또 똑똑.
원록, 똑똑, 답한다. 곧 다시 똑똑... 대답이 돌아온다.

CUT TO
감방 전경.
똑똑, 똑똑... 수신호로 안부를 묻고 답하는 원록과 다른 독방의 죄수들.

36. 박이만 사무실.
원록의 죄수복에 새겨진 수형번호 ‘264’번 C.U.
카메라 멀어지면, 박이만 사무실 창가에 서서 저 아래, 원록과 노크 인사를 나누었던 감방 동지들이 풀려나고 있는 모습을 보는 원록. 원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 뜬다.

이만(E)  (따각따각 땅콩 까 먹으며) 자네 동지들이 풀려나는구만.

원록 보면, 땅콩 까먹으며 헐렁하게 말 거는 이만. 그리고 바싹 긴장한 자세로 이만 옆에 서서 재떨이가 땅콩 껍질로 차자 얼른 비우고 올려놓는 마시모토.

이만  자네도 풀려날 수 있어. 자, 말해 보시오. 자네한테 의열단원이 되라고   추동한 자가 누군가? 너랑 쿵짝이 맞아 붙어먹는 놈이 누구냔 말이야? 응?
원록  땅콩만 먹다 보니 머리에 뇌 대신 고수한 땅콩만 든 게 아니요?

원록의 말 끝에 핏, 웃고 마는 마시모토.
이만, 슷... 마시모토를 노려보고. 마시모토, 얼른 고개를 숙인다.

원록  엄한 사람들을 잡았다가 증거가 없으니 풀어준 게 아니요. 부당하게 가둬  둔 값을 주지도 않으면서 풀어줬다고 생색을 내니 기가 차외다.
이만  그렇지, 증거는 없지. 헌데 부당하게 괴롭힌 값을 왜 안 주는지 아나?
원록  ...?
이만  너희들한테는 괴롭힌 값을 줄 필요가 없으니까. 괴롭혔다고 내 밥줄을   끊을 사람도 없고, 나를 해꼬지 할 사람도 없어. 너희들을 내 마음대로   굴려도 된다는 말이지.

잠시, 표정이 굳는 원록. 하지만 곧 능청스럽게 표정을 고치곤 바
닥에 떨어진 땅콩을 발끝으로 또르르... 굴린다. 
원록  신기하구만. (마시모토 보며) 땅콩 따위야 지 몸뚱이만 굴리는 줄 알았더니,   무슨 수로 인간을 굴린단 말인가?

큭큭... 이번엔 소리 나게 웃고 마는 마시모토.
이만, 땅콩 껍질이 든 재떨이를 들어 마시모토를 후려친다. 윽, 쓰러지는 마시모토.
이제 차가운 눈빛으로 원록을 보는 이만, 금 손목시계를 풀고

CUT TO
사무실의 문이 쿵, 닫히고... 사무실 밖, 퍽퍽퍽, 육사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폭력의 소리.
천천히 암전. 

37. 독방 안.
화면 밝아지면, 독방 안.
 원록, 독방 구석에 옹송그린 채 구겨져 있다.
똑... 벽을 두드려 보는 원록. 이제 되돌아오는 소리는 없다.
다시 똑똑... 해보는 원록. 하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깜깜한 어둠뿐.

원록, 손가락으로 벽에 네모난 창에, 격자 창문을 만든다.
상상 속 창문을 여는 원록.
곧 쏴... 바람이 들어오며 원록의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 봤던 것 같은 까만 하늘에 별무지가 총총... 뜬다. 
그리고 어디선가 히히힝... 소리.
보면, 저만치 어둠 속, 기운 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선 말이 있다.
눈곱 낀 눈이며, 부석부석한 갈기며, 초점 잃은 눈빛을 한 백마.
안타까이 기운 없는 말을 보는 육사. 그 위로 육사의 음성.

육사(E)  흐트러진 갈기, 후주군한 눈, 밤송이 같은 털... 오, 먼 길에 지친 말이여,   채찍에 지친 말이여... 수굿한 몸통, 축 쳐진 꼬리 서리에 반짝이는 네 굽.

육사의 음성과 감옥 벽에 손톱으로 긁어 새긴 시 <말>이 오버랩된다.

(insert)
서리에 반짝이는 네 굽
오! 구름을 헤치려는 말이여
새해에 소리칠 말이여.

38. 박이만 사무실.
아무 말 없이 땅콩을 먹고 있는 이만. 그런 이만을 불안하게 보는 마시모토.

이만  진범이 잡혔단 말이지...

마시모토 예, 장진홍이란 잡니다. 일본에서 검거됐는데, 조선으로 건너오기도   전에 자결했다고 합니다.
이만  (차갑게 식는 표정)
마시모토 진범이 밝혀졌으니 이원록을 풀어주라는 상부의 지시가...
이만  거 참... 이원록이를 캐면 뭔가 큰 게 나올 것 같은데...

안타까운 듯 입맛 다시며 땅콩 껍질만 부스던 이만, 뜬금없이 묻는다.

이만  김치 좋아하나?
마시모토 기, 기무치는...
이만  왜? 조선 음식은 다 싫은가 보지? 흥, 건방진 새끼.
마시모토 (얼굴 벌게지며) 아닙니다. 잘 먹습니다. 다 잘 먹습니다.
이만  김치란 게, 소금으로 숨을 죽여 겨울이 새도록 먹는 음식이야.
마시모토 ...?
이만  숨을 죽여 놔야, 겨울이 가도록 먹을 수 있다... 그 말이야.
  (끄응... 몸 일으킨다) 어디 숨이 얼마나 죽었는지 볼까...

39. 원록 감방 안. 
원록의 감방 안, 멀건 죽이 원록의 감방 안으로 배식된다.
멀건 죽에 쌀 알이 몇 개 동동 떠 있다. 쌀알을 수저로 하나하나 세어보는 원록.
그 때,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앙칼진 여자의 음성.

40. 감옥 로비.
양 옆에 감방이 늘어선 복도식 교도소 로비.
하이힐, 짧은 치마, 속이 비치는 시스루 블라우스를 입고 퍼머를
한 노윤희가 간수1의 손에 끌려가고 있다.

노윤희  손 대지마! 이게 얼마짜린 줄 알어? 사십원짜리 치마에, 오원짜리 스타킹  이야. 늬들은 몽파리도 모르고 촬스톤도 모르지? 그러니까 고작 퍼머넌트  를 했다고 풍기문란이니 뭐니 지랄이 아냐!

- 원록의 감방 안.
쌀알을 세던 원록의 귀에도 밖에서 윤희가 떠드는 소리가 훤히 들린다.
기세등등한 여자의 음성에 핏, 웃는 원록.

- 감옥 로비.
잠시 후, 박이만과 마시모토가 감옥 로비로 들어선다.
맞은 편, 끌려가던 윤희의 고함소리는 계속 되고, 이만이 눈살을 찌푸리면,
마시모토 윤희에게 으름을 준다.

마시모토 이 미친년, 입 다물지 못해!
그 사이, 맞은편 원록의 감방문을 여는 박이만.
보면, 뜻밖에 원록은 때에 절은 손수건을 목에 걸친 채, 마치 고급스런 요리나 되는 양 폼나게 죽을 먹고 있다.

원록  (이만에게) 한 수저 드실라우?

이만의 실망스런 표정. 맞은편 윤희 역시 원록을 보고 어라? 흥미로운 눈빛이 되고,

이만  이륙사 번. 이런 걸 먹고 어찌사나? 자네야말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미식가  라던데. 딴 놈 섞는 가배는 입에 대지도 않는다지? 지금이라도 자네와   연락이 닿은 의열단원이 누군지 말하게. 허면, 내 자네 입맛에 딱 맞는  버터랑 가배를 구해 줄테니.

원록, 잠시 밥 먹던 수저를 멈춘다. 원록에게 집중되는 시선.

원록  (목에 걸었던 수건으로 입가를 톡톡 우아하게 닦으며) 맛은 좀 덜합니다만,   여기 음식이 내 몸에 맞는지, 속이 한결 편해졌소. (속닥인다) 그래서 말인  데 형사님도 어지간하면 여기서 며칠 지내는 게 좋을 듯 싶으이. 이만  ...?
원록  전에 보니 방귀냄새가 아주 고약하던데...

그 모습을 본 노윤희, 피식 웃고.
이만, 눈 아래 근육이 욱씰하더니, 순간 얼음장 같이 차가운 표정이 되어.

이만  좋다. 솔직히 말하지. 대구 은행 폭파사건의 진범 장진홍이 검거됐다.   오늘은 너를 풀어주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
원록  ...?
이만  나가서도 조선독립, 조선 독립... 못나게 굴 게 아닌가? 그래야지, 그래야   하구 말구. 너 같은 놈이 많아야 나 같은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가   설 자리도 있는 거야.
원록  ...
이만  내가 장차 총독부 보안과에 떡하니 자리를 잡으면 그게 모두 네 덕분이다.

원록, 표정 굳어지고. 이만, 차가운 비소를 지으며 나가버린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윤희에서.

41. 철문 전경.
이윽고 삐이익... 철문이 열리고, 원록이 출옥한다.
햇살을 느끼며 눈을 감는 원록. 미소 짓는다.
그리고 먼발치의 일양, 원록 앞에 나서지 않고 원록이 햇살을 느끼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만 본다. 일양에게도 감격의 미소가 뜬다.
42. 안방.
이가호와 허길이 보는 앞에서 밥상을 차려놓고 열심히 먹는 원록.
곰방대를 탁탁 털면서 보는 이가호. 잔잔한 눈빛의 허길.

- 사랑채/
일양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원록.
다 큰 학생, 일양이 미간을 좁히며 한 일, 이며 달 월, 날 일등을 쓴다.

- 마당/
이가호가 화단을 가꾸는 옆에 붙어 아버지를 거드는 원록. 
이마에 땀을 송글거리며 일하는 원록을 잠시 동안 보는 이가호. 

- 일양의 방.
난을 치는 원록. 옆에서 원록이 난치는 모습을 보던 일양.
원록이 “李戮史”라 낙관 찍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일양  어째 이름자가 달라뵈니더. 다른 건 몰라도, 당신 이름은 아는데...
원록  앞으론 누가 바깥양반 이름이 어찌 되냐고 묻거든 ‘이육사’라고 하시오.
일양  ...!

43. 원록의 집 마당.
허길이 장맛을 보고 있다. 그 옆에서 장독을 닦는 일양.

허길  그놈의 장독은 왜 허구헌 날 닦는겨?
일양  장독이 반들해야 우환이 없대요.
허길  (끌끌... 웃고 마는데)
일양  그런데 어무님. (나뭇가지로 땅에 ‘戮’ 자를 쓴다. ) 이게 무슨 자니껴?
허길  (대수롭지 않게) 죽일 ‘육’, 아니냐.
일양  죽일...육...이요?
허길  (장독 뚜껑 닫으며) 죽일 육, 육시할 육... (다른 장독의 장맛 보며) 육시가   뭔지 아노? 육시란 기가 사지를 잘라 팔 따로 다리 따로 토막 내는 것을  말하는 긴데...

얼굴이 굳어지는 일양에서.

44. 안방. 
깊은 방, 들창을 활짝 열고 창 밖을 보고 있는 원록.
방 안에 들어섰다가 이런 원록을 보고 멈칫, 선채로 굳어진 일양.
붉은 달빛에 홀린 듯, 일양이 온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일본에 가겠다고 말했던 날 밤과 같은 모습의 원록이다. 일양, 불안해진다.  

CUT TO
잠든 육사와 일양.
하지만 잠든 줄 알았던 일양이 눈을 뜨더니 서랍장에서 육사가 그림을 찾는다.
일양, ‘李戮史’의 죽일 ‘육戮’을 땅 ‘육陸’으로 바꾸어 쓰고는 혼자
베시시... 웃는데,

원록(E)  뭐하나?

보면, 화난 얼굴의 원록.

일양  알아보니 더 좋은 뜻도 많아서요. 죽일 륙보다는 훨씬...(하는데)
원록  (홱, 그림을 낚아 채 거칠게 구겨버리는데)
일양  (왈칵 육사의 허리를 껴안으며) 박이만이한테서 죽어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더. 그런데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껴. 이제 됐니더. 모든 일이   다아... 끝났니더. 인차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니더. 그렇지요? 그렇지요,  서방님?

원록, 돌아보고... 간절한 얼굴로 원록을 올려보는 일양.
일양, 원록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다가 자신에게 끌어 키스한다.
격렬하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키스.

CUT TO
사랑을 나눈 후, 평온한 얼굴이 되어 잠이 든 일양.
쌔액...쌔액... 깊은 숨소리. 하지만 원록은 잠들지 않았다.

원록  이보게...
일양  (깊게 잠이 들어있을 뿐이고)
원록  자네는 나보다 씩씩하지 않은가?

좋은 꿈을 꾸는지 입가에 미소가 어린 일양. 그런 일양을 보는 원록의 복잡한 눈빛에서.

CUT TO
자다가 번쩍 눈을 뜨는 일양.

일양  서방님, 방금 꿈을 꿨는데 아무래도 태몽 같니더. 개구리 한 마리를 구렁  이가 친친 감고 있다가 갑자기 지한테 확, 달개들지 않니껴? 구렁이 꿈은  아들이라는데, 태몽 맞지요? 그렇지요?

하며 옆을 보면, 육사가 없다.


45. 원록의 집 전경.
신발도 신지 않고 방 밖으로 뛰쳐나오는 일양.
사방에 안개가 자욱하고... 아무리 둘러봐도 원록을 찾을 수 없다.
일양,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툇마루에 앉아있는 누군가, 허길이다.
잠시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 그 형언할 수 없는 허길의 눈빛.
허길, 끄응... 일어서더니 옷소매 걷으며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렁, 눈물이 맺힌 일양에서.

46. 북경의 기차역.
안개 자욱한 북경의 기차역. 기차가 멈추고 플랫폼에 내려서는 원록.
원록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누군가를 보며 미소 짓는다. 세주다.
육사에게 다가온 세주, 잠시 먹먹하게 육사를 보지만... 누른다.

세주  나를 숨기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네. 내가, 뭐라...

뭐라 더 말하려다 말고, 덥석 육사의 가방을 뺏듯이 들고 앞서는 세주.
그런 세주를 보며 빙긋... 미소 짓는 육사에서. 

47. 난징 쉬엔후호 호수 전경.
호수 위에 작은 조각배 하나가 떠있는 고요한 정경. 호숫가에 서서 배를 보는 육사와 세주.

세주  자네를 꼭 한 번 보고 싶어 하시네.
원록  (세주 보면)
세주  의열단 단장 김원봉 선생이시네.

CUT TO
조각배 위에 마주앉은 원록과 김원봉. 다소 긴장한 원록, 뭐라뭐라 길게 말을 쏟고 있다. 

육사  우리는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습니다. 향후 두 나라가   긴밀해진 이후에는 일본이 문제되지 않을 겁니다.
김원봉  (노만 젓고)
육사  국공합작 이후, 장개석은 변했습니다. 장개석의 미래가 미합중국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만, 장개석의 미래야 말로 러시아에 달려있습니다. 러시아  가 모택동을 어찌 대하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하는데)
김원봉  시골에서 양반행세 깨나 했다더니, 이것저것 주워들은 건 많은 모양이야.
육사  (당황스럽고)
원봉  글 읽기를 즐기고, 난도 제법 치고, 풍류도 즐길 줄 안다지?
육사  ...
원봉  나는 전사가 필요하오. 필요하면 온 몸을 불태울 수 있는 열사, 상대가   누구든 덤빌 각오가 되어있는 투사, 온 몸의 피와 뼈가 으스러지고 말라붙  어도 아까워하지 않을... 그런 자 말이오.
마른 얼굴의 원봉, 하지만 그 눈빛만이 섬뜩하도록 형형하다.

원봉  안동 촌놈 이육사... 자네는 어떤 사람인가?

잠시 입이 마르는 육사. 그러다 다음 순간, 단호한 눈빛이 되어 입을 연다.

육사  저는 제 온 몸의 피와 뼈가 으스러지고 말라붙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남김없이 이용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원봉  (이놈 봐라... 하는 미소)
육사  어르신은 어떤 지도자십니까?

- 호숫가.
바위 따위에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바닥에 낙서질을 해가며, 두 사람을 기다리던 윤세주. 호숫가 위에 둥둥 떠 있는 조각배를 그린 솜씨가 제법이다.
곧 껄껄껄 웃는 김원봉의 웃음소리 들려온다.
육사가 김원봉의 눈에 든 것을 알게 된 세주, 씨익... 미소 짓는다.
안개 낀, 호숫가 정경이 고요하다.

48. 조선정치군관학교 실내 강당. 
(ins)
조선 혁명 군사정치간부 학교 전경. 황량한 벌판에 세워진 세 채의 군관학교 건물. 

- 강당 안/ 입교식 스케치, 선서문을 읽는 윤세주.
- 운동장/ 커다란 배낭에 돌덩이를 넣는 육사와 동기들.
- 사격 훈련장/ 총기점검 훈련 받는 이육사와 동기들. 육사, 총을 쥐는 것부터 어색하다.
- 운동장/돌덩이 배낭을 메고 뛰는 육사와 동기들.
- 사격 훈련장/ 탕! 쏘고는 화들짝 뒤로 나가떨어지는 육사. 손바닥에 상처가 났다.
- 식당/ 식사시간. 식판에 식사를 담아오던 육사, 손바닥 상처가 쓰라린다. 식판 위 음식     중에 정체불명의 노란 기름덩이가 있다. 육사, 왠지 께름칙해 눈살 찌푸리는데,

이문석(e) 이거 내가 먹어도 되갔네?
육사  (보면)
문석  나, 회령에서 온 강문석이야.
육사  이육사요.

하며 손 내밀려다가 상처를 보고 찔금... 다시 집어넣는다.

문석  (놀라) 피 나는구만. 치료를 해야디...
육사  ...됐소. 이만 상처로 무슨 치료를 받나.
문석  (베실...) 곱게 자란 샌님이 센 척하느라 아픈 것도 꾹 참고 있구나.   (낼름 기름 완자 챙기며) 기름 덩이도 니글거려 싫다는 기지? 기래두 이걸   먹어야 기운이 나는 거이야. 애껴 뒀다가 구보 뛸 때 먹으면 없던 힘도   나고 말이디.
육사  그런 거 아니요.
문석  (육사의 손가락에 낀 가락지 보고) 안사람은 두고 온 모양이디?
육사  ...
문석  처자식 간수나 잘 할 일이지 메하러 손에 피칠이나 하구 앉았어?

멀리서 식사하던 세주, 문석과 육사가 대화하는 모습을 주시한다.

문석  (기름덩이를 종이에 싸서 주머니에 넣으며) 내래 애미나이 살아 있으문   여기 안 왔다. 일본 놈들 구두코를 핥더라도 밭뙈기 갈아먹고 살지.
육사  ...
문석  고향 있을 때 뗏목잡이였어. 상삼봉 나무들을 다 끌어 옮기면 일본놈들이   철로에 싣고 갔디. 거참... 내 논에 쳐들어 온 도둑놈한테 주인이 낱알까지   골라 준 셈이디. 그래, 3.1만세운동이 났을 때, 나도 흥이 나서 의병대에  휩쓸렸드랬어.
육사  ...
문석  그러다 옥분이, 아, 내 애미나이 이름이 옥분이야. 옥분이하고 가락지도   못 나눠 끼고 헤졌는데 말이디... 내래 그기 두고두고 후회가 돼. 가락지만   있었어도 님자 있는 여자라고 우겼으면 어찌 됐을지 모르는 긴데 말이디.  죽다 살아 고향에 돌아가 보니, 옥분이는 징병돼 끌려 갔더라니.
  (울컥, 괜히 큼큼 기침을 해본다)
육사  (점점 이야기에 빨려들고)
문석  ... 내 정신대 얘긴 들어서 알고 있었디. 남들은 더럽다 어쩌다 했지만   나는 기런 생각 안했어. 살아만 돌아오면 평생 고마워하면서 살 작정이  었디... 기런데 옥분이가 정신대 끌려다니다 병이 나니까디, 1664부대로   넘어갔다 하더군.
육사  1664부대요?
문석  1664부대, 731부대... 사람 몸 가지고 이리저리 굴리면서 실험하는 부대  말이야. (애써 무심한 말투)피부껍질을 홀딱 벗겨내기도 하고, 임신한 여자  들 배를 갈라서 아도 꺼내보고, 어린 아들도 산채로 해부를 하기도 했다는  데 말이디...
육사  (하얗게 얼어붙는 표정)
문석  요새 생각하면 말이디, 내래 의병대에 휩쓸리지만 않았으면 우리 옥분이가   정신대에 끌려가지도 않았을 거이고... 그러면...(말 삼킨다) 그깟 일본놈들  더러운 꼴 좀 참아줬으면 말이디... (핏, 씁쓸한 웃음) 어쨌든 이제 지난   일이다. 내래 우리 옥분이 그리 만든 놈들한테 똑같이 되갚아 줄 작정이  야. 그 전에는 내래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하는데)

다가서며 말을 자르는 세주.

세주  불필요한 말들이 너무 길어지고 있소.
문석  (쓱...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음에도 빠다 먹기 싫으면 내래 주시요.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육사의 표정에서.

49. 숙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육사.

(육사의 환영)
나무가 모두 베어진 벌건 민둥산. 그 위로 휘이잉... 황량한 바람소리 분다.

휘잉... 휘잉... 메마르고 거친 바람소리 육사를 괴롭힌다.
뒤척이던 육사, 결국 눈을 뜬다. 살이 아픈 듯 팔뚝을 쓱쓱 문지르던 육사.
곧, 종이와 펜을 꺼내 부스럭부스럭 뭔가 적기 시작한다.
육사의 손 끝에서 태어나는 <황혼>의 싯구. ‘골방’... ‘황혼’... ‘인간은 외로운’...
그 위로 오버랩되는 육사의 <황혼> 나레이션.

육사(E)  내 골방의 커튼을 걸고
  정성스런 맘으로 황혼을 맞이하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세주(E)  글이 좋구먼.
육사  (놀라 돌아보았다가 세주인 것을 알고 미소 지으면)

세주, 육사 옆에 앉아 육사가 쓴 시를 본다.

세주  시절이 좋으면 이만한 소일거리가 또 어디 있겠나?
육사  ...?
세주  하지만 지금은 아닐세. 이런 글을 쓰느라 마음이 뭉글해져서도 안 되고,   밤잠을 설쳐 내일 훈련에 방해가 되어서도 안 돼.
육사  ...
세주  총을 든 자와 싸우는 길은 마주 총을 드는 일 뿐일세.
육사  ...!
세주  쉬게.

세주가 나가고... 잠시 그 뒷 모습을 보던 육사, 노트를 덥고는 벌렁 드러누워 버린다.

육사  (천장 보며 혼잣말) 임자, 어찌 지내오? 임자...

50. 원록의 집. 
빨래를 하다가 마치 누가 부르기라도 한 듯, 뒤를 돌아보는 일양.
벽락같이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났던 것.
일양, 방안으로 들어가 아이를 들쳐 업고 나온다.
아이를 업고 나오다가 예전 거미가 나왔던 안방 구석을 보는 일양.
하지만 거미는 없다. 실망스러운 일양. 

일양  아가야, 머리 한 번 긁어보니라. 아부지 어디만큼 오싰노... 아베 오시면   퍼뜩 이름부텀 지어달라꼬 하자.

51. 군관학교 강당. 
화면 밝아지면, 군관학교 졸업식이 열리고 있다. 졸업생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김원봉.

김원봉  오늘로서 조선군관학교의 모든 과정이 끝났소. 나는 여기 있는 스물 여섯   명의 얼굴을 기억하겠소.

묵직한 기운이 감도는 강당 안.

김원봉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숨을 적들의 목숨과 바꾸는데 동의해 주었소.
  고맙소. 나는 좀 더 살아있겠소. 살아서 평생을 죄 진 마음으로, 여러분의   목숨 값을 갚으며 살 것이오. 나는 죽기 전까지 여러분들을 부러워하다,   마지막 순간 여러분과 같이 산화할 것을 약속하오.

김원봉, 군관학교 학생들을 향해 큰 절을 올린다.
군관학교 학생들 하나둘... 모두 단상 위, 김원봉을 향해 절한다. 
지는 해의 강렬한 붉은 빛이 이들을 감싸고 있다.

52. 숙소 안.
밖에서는 졸업식을 끝낸 후, 동기생들이 왁자하게 술을 마시고 군가를 부르며 놀고 있다.
‘압록강 얼음 위엔 은월이 밝아 고국에서 불어오는 피비린 바람, 갚고야 말 것이다 골수에 맺힌 한을...’ 하지만 육사와 문석 등 몇몇의 학생들은 이미 정장을 갖춘 채 세주의 설명을 듣고 있다.

세주  여러분들은 다른 동기들보다 먼저 상하이를 거쳐 조선으로 돌아갈 거요.

육사를 비롯한 동기들 각각의 표정이 진지하고.

세주  각자 회령 식료품 보급소, 전주 철도청, 경성 조선일보 지국에 일자리를   알아봐 두었소. 곧 지령이 내려갈 것이오. 후원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만주의 독립군에게 여러분이 생명줄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주로부터 기차표를 받아든 동기들이 숙소를 나선다. 강문석, 문을 나서며 육사에게 특유의 찡긋, 눈인사를 한다. 문석 등이 사라지고, 육사와 세주만 남았다.
마지막 날이지만 여전히 사무적인 세주.

세주  자네는 경성조선일보 지국에서 일하게 될 걸세. 가거든 ‘조선 해방, 일제   타도’를 말하는 자와 접선하게. 그 자를 만나거든...(하는데)
육사  (피식 웃으며) 정말 대낮에 그리 떠드는 자가 있단 말인가?
세주  (진지한) 그 전에 미리 중간 접선책을 포섭해 놓는 게 좋을걸세.(하는데)
육사  이번에 헤어지면 또 언제 자네를 보려나.

하며, 세주에게 작은 주머니를 내미는 육사.

육사  내 생명을 구해준 자네에게, 목숨만큼 귀한 것이 아니고는 갚을 것이   없네. 허나 지금 가진 것이 없으이. 내가 직접 새긴 인장일세. ...
  내 목숨이 자네한테 달렸다는 증표일세.

비취인 한 면에 새겨진 육사의 이름. 
일양이 조언한 대로, 죽일 ‘육戮’이 아닌 땅 ‘육陸’으로 바뀌어 있다.
감동받은 마음을 숨길 수 없어 어색하게 흔들리는 세주의 눈빛.
그런 세주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소짓는 원록에서.

53. 일양의 집 부엌.
뭔가를, 미간을 좁히며 보는 일양의 얼굴이 화면 가득.
보면, 일양이 ‘문명적 조미료 - 아지노모도’라는 한글 이름이 쓰여진 금색 캔을 생소한 얼굴로 보고 있다. 조미료 캔을 선전하러 온 동리 아낙, 일양의 안색을 살피고,

일양  아지노도모... 이걸 국에다 넣으라꼬요?
아낙  국이든 찌개든 이기 하나만 넣으면 된다 카데.
일양  얼만데요?
아낙  요 깡통은 10전짜리.
일양  (화들짝) 에구... 지는 이런 거 못 삽니더.
아낙  둘이 나누면 5전씩이면 된 데니까.
일양  형편이 안 됩니더. (하며 국 솥 젖는데)
아낙  (쩝) 바깥양반이 아무리 똑똑하고 아는 기 많으면 뭐하노? 허구헌날 밖으  로 싸돌아다니고 집안을 돌보기를 해, 애 아플 때 의지가 되기를 해.
일양  ...

아낙  그나저나 얼마 전에 우리 집 양반이 경성 갔다가 이 집 애 아빠랑 똑 닮은  사람을 봤다든데. 뭐라드노... 취재를 한다나 뭐라나... 혹시 딴 살림 차리   논 건 아니재?
일양  (피식) ...그럴리 있싰니껴? 애 아부지 지금 중국에서 공부중이에요. 높은  사람들 만나고, 귀한 공부하느라 한창 바뻐요.
아낙  그래? 신문에 이름 난 것도 봤다던데... 이 집 양반 이름이 뭐랬노?
일양  원록, 이원록이요.
아낙  그람, 딴 사람인가베. 그 사람은 다른 이름 썼다니께. 
일양  (그럼 그렇지... )
아낙  이육사라든가...
일양  ...!

54. 신문사 안.
제보 전화를 받고, 신문을 교정하고, 기사를 쓰는 신문사 안의 풍경.
전화벨이 울리고 기자 1, 전화 받는다.

기자1  제보요? 희대의 치정극? (흥미 보인다) 말씀하시오! 응... 그래, ‘조선’ 화신  백화점에서 쇼핑 하던 여자가 속옷을 샀단 말이지... 남자 속옷을? 오호,   점원에게 수작을 부려? ‘우리 바깥양반이 출장이라 오늘은 해방이에요.’...   허허, 앙큼하구만.

기자1와 등을 맞대고 앉은 맞은편 기자, 뭔가를 적고 있다. ‘조선’...‘해방’...

기자1  ... 역시 옷감은 ‘일제’가 좋아... 하면서 옷을 자기 볼에 스르르 문대더란   말이오? 벌건 대낮에? 허허, 가관이구만. 헌데 점원이란 작자가 여자를   닭 보듯 하더란 말이요? 그래, 여자가 어찌했소? 여자 맘도 몰라주는 저런   것들은 다 ‘타도’ 해야되... 하며 팽하니... 돌아, 돌아서... 련초다방에서   차나 마셔야 겠어... 하며 갔다고? (표정 일그러진다) 이보시오. 이게 끝이요?

‘조선’, ‘해방’ 옆에 ‘일제’, ‘타도’, ‘련초다방'이 채워지자 옅은 미소가 뜨는 기자의 입매
육사다!
육사, 받아 적은 종이를 잘게 찢어 버리곤, 맥고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사무실을 나선다.
그 모습에서 STILL.

1부 끝.

 

 


 

 

 

 

 

 

 

 

 

 

 

 

 

 

 

 

 

 

 

 

첨부파일 광복절 특집극절정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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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다반향초 | 작성시간 14.11.17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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