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단막극대본

[절정 ②] 황진영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3.03.21|조회수621 목록 댓글 1

[절정 ②] 황진영

 

 

 

 

 

 

 

 


1. 련초 다방 안. 
육사, 맞은 편 제보자의 말을 듣고 있다.

문석(E)  키쓰걸이라고 들어보았소?
육사  키쓰걸?

카메라 팬하면, 제보자는 다름 아닌 콧수염 사내로 변장한 문석이다!

문석  내 박람회 구경을 갔는데, 아심아심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내 옆으로    쓰윽... 오더니 키쓰걸을 찾으세요... 하는 게 아니요?
육사  호오...
문석  그래 키쓰걸이 뭔가? 하고 물으니...
육사  물으니?
문석  구지베니(립스틱)를 척 바르더니, 내 입술이 탐나면 오십 전을 내시오...
육사  오호... 입술을 사고판다 해서 키쓰걸인 모양이군.
문석  저기 오는구먼!

보면, 하이힐, 하늘한 스커트에 멋스런 모자를 쓴 여자가 안으로 들어선다.
노윤희다!

육사  가서 다시 키스를 거래해보시오. 현장을 봐야 기사를 쓸 것 아니요?
문석  옳거니! 허면 내가 일을 치른 후에, 기자양반도 직접 키쓰걸을 겪어 보시구랴.

문석, 윤희에게 다가가 몇 마디 나누더니 두 사람, 카페 화장실 쪽으로 들어간다.
종업원, 컵을 닦으면서 이 모습을 혐오스럽게 보고...
육사, 은밀히 두 사람을 따라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2. 화장실 안.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간 윤희와 문석. 문석, 안 춤에서 두툼한 돈뭉치를 주더니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문석이 있는 옆 칸 화장실로 들어서는 육사.
노윤희, 화장실을 나와 육사가 있는 칸으로 들어간다.
좁은 공간에 몸을 맞댄 두 사람. 잠시, 어색한 긴장 흐르고.
윤희, 육사에게 돈을 건네면 육사, 서류가방에 돈뭉치를 넣는다.
윤희가 건네준 돈뭉치로 가방 안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 맞추듯 꽉 찬다.
윤희를 남겨두고 먼저 화장실을 나서는 육사.
3. 기차역.
기차역 벤치에 앉은 육사.
기차역을 돌아다니며 ‘우리 무라이사의 히어로 담배를 피워보시지요, 히어로 담배 있습니다’ 하던 담배팔이 소년이(금석) 육사 옆에 앉는다.
육사, 계란을 까먹다가 흘끗 소년을 본다. 한쪽 귀를 붕대로 막아놓은 소년.

육사  ...(달걀 건네며) 먹으련?
소년  (쓱... 보더니) 소금 있습니까?
육사  (고개 저으면) 
소년  소금 없으면 목메서 싫습니다.

자리를 뜨는 소년. 그런데 군자금이 든 육사의 서류 가방을 들고 가고 있다!
이를 보고도 소년을 잡지 않는 육사.
소년, 기차표를 끊고 역사 안으로 들어가다가 한 번, 뒤를 돌아본다.
붕대감은 귀에서 설핏 스며 나온 피, 그 눈빛의 비장함.
소년과 육사의 시선이 아주 짧은 순간 마주치고... 소년에게 옅은 미소를 보내는 육사. 
육사의 미소를 알아본 듯, 설핏 고개 끄덕인 소년이 역사 안으로 사라진다.

소년이 완전히 사라진 후, 육사, 계란껍질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데,
쓰레기통 주변에 땅콩 껍질이 지저분하게 널려있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는 육사. 하지만 어디서도 박이만을 볼 수는 없다.
육사, 피식... 과민 반응한 자신을 비웃으며 자리를 뜨고.
하지만 육사가 떠난 자리, 버려진 땅콩 껍질을 밟고 선 누군가의 구둣발.

4. 전차 안.
전차에 앉아 창밖을 보는 육사.
잠시 후, 누군가 육사 옆에 앉는다. 노윤희다.

육사  (시선을 창 밖에 둔 채) 당신 같은 여자가 왜 이런 일을 자청하는지 모르  겠소. 소설의 소재거리라도 찾는 거요?
윤희  (풋...) 제가 예전에 속살 비치는 옷을 입었다고 문란죄로 감옥소엘 간   적이 있었는데 말에요. 어떤 죄수 하나가 멀건 죽을 맛나게 먹으면서   고등계 형사를 빙글빙글 놀리지 않겠어요?
육사  (핏, 웃고)
윤희  보구서 저 사내 참 산뜻하다... 싶었어요.
육사  ...
윤희  전 세상에서 구질한 게 제일 싫어요. 요즘 보통학교 나온 조선 여자들이   젤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뭔지 알아요? 버스 걸, 백화점 걸, 타이피스트,   에레베타 걸이에요. 그럼 뭐하나요? 월급으로 이삼십원씩 받아도 동생   학비대고, 고향집에 부쳐주고 나면 자기 용돈은 이원밖에 못 쓰는 걸.   그나마도 일본인이 아니면 잘 써주지도 않구요.
육사  ....
윤희  조선이 독립되면... 적어도 그런 구질한 꼴은 덜 보겠죠.

설핏, 미소가 뜬 육사. 윤희, 그런 육사의 옆얼굴을 본다.
육사 역시 차창에 비친 윤희를 본다. 차창에 비친 윤희는 육사를 보고 있다.
다음 순간, 차창을 통해 잠시 시선이 마주친 육사와 윤희.
그러다 육사, 깨어나듯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육사  또 연락하리다.

전차에서 내려 멀어지는 육사. 윤희, 육사의 뒷모습을 아쉬운 듯 보기만 하고...

5. 육사의 하숙집 안.
자신의 하숙집으로 들어서던 육사, 문득 멈춰 선다.
보면, 일양이 하숙방 앞마루에 앉아 있다.
육사를 본 일양, 다행스럽고, 분하고, 서운하다.

일양  어무님, 아부님께서 걱정이 많으셔서... 건강하신 기 봤으이 지는 그만   가볼랍니더. (하고 벌떡 일어서는데)
육사  (덥석 일양의 손 잡으며) 어찌 지냈소? 아버지, 어머니 건강은 어떠신가...
일양  어무님, 아부님 다 건강하십니더. 내려가믄 퍼뜩 아 이름부텀 지어야재.   여태 이름도 없이 지냈구마...(화난 얼굴로 나서려는데)
육사  아이 이름은 벌써 지어놓았네. 동녘 동, 이을 윤, 동윤이 어떤가?
일양  동...윤이요? (혼잣말처럼) 동윤이, 동윤아... (베시시 미소 뜨는데)

그 때, 삐이익... 열리는 대문.

이만(E)  이원록이... 그간 잘 지냈나?
육사  ...!
이만  그래, 순진한 아이를 꼬드겨 군자금 나르는 위험한 일을 시키고 마눌님이  랑 노닥거릴 기분이 나시나? 
육사  (낯빛 굳는다) 무, 무슨 소린가? 금석이는 어찌 됐나?
이만  호오... 그 꼬맹이 이름이 금석이었구만.
육사  ...!
이만  죽은 자는 입이 없으니 이름도 못 물어봤지 뭔가.

소년이 죽었다는 말에 하얗게 질린 육사. 이만을 덮치지만 곧 이만이 개머리판으로 육사를 찍어 제압한다. 일양, 놀라 육사 앞을 몸으로 막아서며,

일양  이 앞잽이 놈, 어데 함부로 드러븐 손을 대노!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독기를 뿜어내는 일양.
이만, 잠시 멈칫했지만 곧 느물한 미소 지으며,

이만  바깥양반이 어쩌다 탄로 났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만.
일양  ...!
이만  당신 오라비가 처남을 찔렀소. 당신 남편이 조선정치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고 불었단 말이요.

충격 받은 얼굴이 된 일양.
곧 육사가 이만의 마시모토 등에게 잡혀 끌려가고, 망연해진 일양에서. 

6. 면회실.
동윤이를 엎은 채 육사를 기다리는 일양. 하지만 육사 대신 마시모토가 나와 전한다. 

마시모토 면회를 거부했소.

마시모토, 일양에게 육사의 소지품을 건네주고 돌아서는데, 턱, 마시모토를 잡는 일양.
일양, 자신이 들고 있던 보퉁이를 내밀며 비굴한 웃음을 흘린다.

일양  춥지요? 감옥소는 몇 곱절 춥다믄서요? 이건 형사님 드리려고 해 왔니더.   솜 안 애꼈어요. (다른 보통이 내밀며) 그리고 이건 우리 동윤 아부지한테 꼭...

얼결에 보퉁이 받아든 마시모토, 잠시 일양의 간절한 눈빛을 보다가 안으로 들어간다. 
혼자 남겨진 일양, 마시모토가 준 육사의 소지품 풀어본다.
그러다 곧, 흡... 입을 틀어막는 일양. 후드득... 눈물이 떨어진다.
보면 보퉁이 안, 온통 검은 피에 절은 채 찢겨진 육사의 옷. 
그 옷을 품에 안고 서럽게 우는 일양, 일양의 등에서 천연스럽게 옹알이하는 동윤에서.

7. 서대문 교도소 전경/ 여름 오후.
서대문 감옥 앞, 매미소리가 쨍...하다.
여름 모시옷을 싼 보퉁이를 들고 육사를 기다리는 일양, 옹색하게 보퉁이를 머리 위로 들어 쨍쨍한 해를 막아보는데, 저만치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
보면, 원피스 차림에 작은 양산을 든 윤희가 일양처럼 누군가 출옥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왠지 윤희에게 자꾸 시선이 가는 일양, 햇볕 가렸던 보퉁이를 내리고 괜히 탈탈 옷을 털어보는데, 삐익... 교도소 철문이 열리며 육사가 출옥한다.

반가워 성큼 다가가려던 일양, 하지만 다음 순간 멈춰서버리고 만다.
보면, 윤희가 먼저 걸어가 육사 앞에 서더니 애교 있게 육사의 팔짱을 낀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육사와 걸어가는 윤희.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보는 일양, 망연해지고...

8. 집 부엌.
힘없이 장독을 열어 간장을 푸는 일양.

허길(E)   간만 맞출 거이니께네 쪼매만 퍼 온나.

예... 대답은 해놓고 넋이 나가 가득차게 간장을 푸던 일양. 결국 넘친다.
어마.. 하고 간장이 가득 담긴 대접을 보던 일양. 갑자기 간장을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부엌을 나서다가 이 모습을 본 허길, 놀라 일양에게 달려든다.

허길  와 그라노, 으이!
일양  지는 죽어야 됩니더. 죽어야 됩니더. (하며 다시 간장 들이붓고)

허길, 황급히 들어가 쌀뜨물을 들고 나와 일양에게 먹인다. 우웩우웩 토하는 일양.
처절한 일양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 허길에서.

9. 길 일각.
육사의 뒤에서 한 걸음쯤 떨어져 가던 윤희.

윤희  아까 그 분... 와이프죠? 왜 모른 척 한 거에요?
육사  ...
윤희  내가 모를까봐서요?
육사  ...
윤희  형사들이 부인을 귀찮게 할까봐 아예 당신 주변에서 떼놓으려는 거잖아요. 

대꾸 없이 걷는 육사. 그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종종 따라 붙는 윤희에서.

10. 일양의 집 전경.
마당에 엎어진 간장 자국, 간장대접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마당에서 아장아장 놀고 있는 동윤. 그리고 먼발치에서 이를 보는 시선, 육사다.
동윤, 간장국대접을 발로 차고는 꺄르르... 웃는다. 동윤 따라 활짝 웃었던 육사, 하지만 웃음 끝에 눈물이 맺힌다. 결국, 동윤 앞에 나서지 못하고 돌아서는 육사.
육사가 떠난 자리, 집 대문 앞에 색동 고무신이 놓여 있다.

비애를 꾸욱... 삼키고 걷는 육사의 위로, 시 <노정기> 흐른다.

육사(E)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볏조각...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  다 내 꿈은 서해를 밀항하는 정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렸한 밤 암초를 벗어나면 태풍과 싸워가고... 전설에 읽어  본 산호도는 구경도 못하는...

그 위로 육사의 시를 읽는 사람들의 모습 스케치.
11. 육사의 시를 읽는 사람들 스케치.
- 박이만 사무실.

이만의 사무실 바닥에 지저분하게 흩뿌려진 땅콩 껍질을 치우던 마시모토.
책상 위에 놓여진 신문에 실린 <노정기>를 흘긋흘긋 보다가 박이만이 들어오자 화들짝 다시 청소한다.

- 길 일각.
또 다른 분장을 한 문석, 육사의 시를 읽고 있다.

- 전차 안.
전차 안, 신문을 든 몇몇 중에 육사의 시를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
육사, 시를 읽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미소 짓는데, 누군가 육사옆에 앉는다.
세주다!
육사, 반가운 표정이 되지만 세주의 얼굴은 어둡다. 웃음기 거두는 육사.

CUT TO
육사와 세주 주위에 승객들이 내리고... 단둘만 남았다. 이윽고 입을 여는 세주.

세주  군자금이 목표액을 채우지 못했더군.
육사  그렇게 되었네.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것들이 여간 요란스러워야 말이지...

하지만 모자 아래, 세주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진다. 말을 멈추는 육사.

세주  기미년에 만세 운동이 일었지. 그날...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네. 목이 찢어  져라 외쳤어. 만세, 만세, 만세... 헌데 끝은 참혹했어. 나도 난생 처음   감옥소라는 델 가게 되었네.
육사  ...
세주  자네도 독방이 어떤 곳인지 알지? 내 똥오줌 냄새를 내가 맡아야 되는   곳이야. 헌데... 똥냄새를 맡으면서도 배는 고프더군. 간수들 발소리만 들려  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창자가 요동을 치더란 말이야. 
육사  ...
세주  난 결심했네. 두 번 다시 감옥엔 가지 않겠다.

세주,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작은 알약 두 알이 든 병을 내보인다.
독약을 본 육사, 놀란 표정이 되고. 알약을 다시 가방 안에 넣는 세주의 손이 가볍게 떨린다. 육사, 아직까지 세주에게 남아있는 두려움을 본다.

세주  한번만 더 일이 꼬이면, 앞으로는 자네에게 일을 맡길 수 없네.  

정적. 덜컹거리는 전차의 소리뿐. 세주. 이윽고 모자를 눌러쓰며 일어선다.
세주  마지막 기횔세.

세주가 전차에서 내리고, 전차 안, 홀로 남아 흔들거리는 육사에서. 

12. 카페 몽파리 안.
재즈음악이 흐르고, 블루스를 추는 모던걸과 모던 보이들.
칵테일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윤희와 육사. 윤희, 기분이 좋다.

윤희  매일 오늘처럼 지냈으면 좋겠어요. 음악도 있고, 춤도 있고...
  (의미있는 눈빛 보내며) 당신도 있고... (하는데)
육사  내일 아홉시요. 당신이 들어오면 누군가 댄스를 청할 거요. 두 사람이   춤을 추는 사이, 내가 가방을 들고 나오는 거지. 모든 시선이 당신에게   집중되도록... 가장 아름답게 차려입고 오시오.

사무적인 말만 뱉는 육사에게 실망한 눈빛이 된 윤희.

윤희  난 사실 일본이 없는 조선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어요. 지금과 다른 조선의 미래가 뭔지... 그려지지  도 않아요. 우리가 하는 일은 마치... 해를 달로 바꾸는 일 같아요. 

잠시, 윤희를 깊게 보던 육사. 윤희의 손을 잡는다. 움찔, 긴장하는 윤희.

육사  여긴 북촌 종로통 거리요.
윤희  ...?
육사  볼이 발그레하고 통통한 아이들이 학교엘 가고 있소. 아이의 아버지는   징병에 끌려가는 대신 농사를 지어 쌀을 수확했소, 어미는 정신대에 끌려  가는 대신 아비가 수확한 쌀로 밥을 지어 도시락을 싸 주었소.

육사의 시선은 카페 유리문 밖을 향해 있다.
죽은 금석의 환영. 교복을 입은 금석이 책가방을 매고 자전거를 타고 밝은 얼굴로 등교하고 있다. 금석의 귀에, 이제 붕대는 없다. 

육사   황국신민선서를 외우지 못했다고 따귀를 때리는 일본인 선생 따위는 없소.   선생한테 맞고 고막이 터져 귀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아이들도 없소.   선생을 따라 가갸거겨고교를 배우던 아이가 창 밖을 보오.
윤희  ...
육사  하늘이 높고, 바람이 흐르오... 그렇게 새로운 날이요. 아이들의 볼이 통통  하고 발그레하니 보기가 좋소. (윤희를 보며) 조선의 미래는... 있소!

잠시, 서로를 마주보는 육사와 윤희. 

윤희  당신과 나... 우리도 미래가 있을까요?

육사, 대답하지 못하고...
실망을 감추려, 어색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되어버린 윤희에서.

13. 일양의 방 안.  
동윤에게 밥을 먹이는 일양. 밥상 위에는 함께하지도 않는 육사의 밥그릇과 수저도 올려져 있다. 일양, 국에 만 밥을 동윤에게 떠 주는데, 왠일인지 아이는 벽락같이 울기만 한다.
문득 이상해 아이의 머리를 짚어보는 일양. 불덩이다.

14. 카페 몽파리 안.
젊은이들이 재즈 음악에 맞춰 신나게 촬스톤을 추고 있는 카페 안.
바 가장자리에 앉은 육사. 육사의 시선 끝, 이번엔 모던 신사로 분장한 문석이 들어온다.
문석,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시선 돌리고.

15. 마을 의원 앞.
밤길을 뛰어 의료소로 간 일양. 하지만 ‘왕진중’이란 팻말, 의료소의 문이 닫혀 있다.

16. 양장점 안.
양장점 거울 앞에서 이옷저옷 대 보는 윤희. 시계를 본다. 아홉시가 다 되어 간다.
하지만 윤희, 웬일인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윤희  다른 옷도 보여줘요.

17. 카페 몽파리 안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윤희가 나타나지 않자 문석, 눈에 띄게 초조해하는데...
문득, 저만치서 춤을 추고 있는 사내중의 한명이 허리춤에 총을 차고 있는 것을 본다.
화들짝 놀라 무작정 가방을 들고 카페 뒷문으로 뛰쳐나가는 문석.
그제야 무리 속에 숨어있던 형사가 문석을 쫓아가고... 육사, 그 뒤를 급하게 따라간다.

18. 골목길 일각.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길 양쪽에 낮게 몸을 숨긴 문석과 육사.
저만치서 형사들과 헌병경찰들이 다가오고 있다.
육사, 총을 들어 헌병경찰들을 조준하지만 차마 쏘지 못하고 망설인다.
이 모습을 보는 문석.

결국 육사, 골목 입구에 걸린 플랭카드를 묶는 끈을 겨냥한다. 탕탕... 두 발이 명중하고 플랭카드가 떨어져 한 순간 형사들을 우왕좌왕하게 한다.
그 사이, 육사와 문석 도망치는데... 그 때, 탕...! 허벅지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문석.
육사, 문석을 부축하고 근처 문을 닫은 카페의 창문을 부숴 안으로 들어가고...

19. 일양의 집
일양, 동윤의 이마를 집어보곤 열이 내린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일양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
일양, 잠시 방 밖으로 나갔다 국에 밥을 만 것을 들고 와 후루룩..먹는데, 저만치 아랫목에 누워있던 동윤이의 손이 툭... 떨어진다.
암전.

20. 카페 안. 
육사가 문석의 다리를 지혈하는 사이, 문석, 안 춤에서 독약을 꺼내 털어 넣는다.

문석  니 그 얘기 좀 또 해보라. 
육사  허구헌 날 그 얘기...
문석  해 보라.
육사  ... 날 때부터 발에 쇠고랑을 찬 채, 평생 다리도 펼 수 없는 작은 감옥에   갇혀 살았던 사내가 있었습니다. 사내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이곳이  세상의 전부려니...

비감해진 문석의 얼굴. 육사의 음성 천천히 잦아들며... 암전.

21. 길 일각.
본 중 가장 화려하게 차려입은 채, 이리저리 밤거리를 거니는 윤희, 그 황황한 표정. 암전.

22. 카페 전경.
끌려나온 육사. 들것에 실려 가는 문석의 시선을 보며 망연하고... 경찰 호송차 앞, 이만이 육사를 기다리다가 싱긋, 비리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가는 전차 안, 세주가 이 모습을 보고 있다.
짧은 순간, 육사와 세주의 시선이 만난다. 하지만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육사의 시선을 외면해 버리는 세주. 세주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암전.

23. 면회실.
화면 천천히 밝아지면, 감옥 면회실에 앉은 일양의 헬쓱하고 독해진 얼굴이 화면 가득.
카메라 멀어지면, 감옥 면회실에 앉은 일양. 잠시 후, 육사가 면회실로 들어선다.
육사, 일양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외면하며 돌아서려는데,

일양  그럴 것 없심니더. 이제 나도 당신 볼 일 없으니.
육사  (돌아보면)
일양  동윤이가 갔소.
육사  ...!

일양  어린 것이 잠도 못자고, 죽도 못 넘기고, 온 몸이 불덩이라... 의원은 왕진  가서 기약이 없고... 그래, 잘난 당신한테 사람을 보냈더니, 그 독립운동인  가 하느라 못 온다고 했다믄서요? (점점 떨리는 목소리) 독립? 흥? 그게  뭐니껴? 그것이 우리 동윤이 목심만큼이나 중한 거니껴? 동윤이 가는 길에   낯짝 한 번 못 뵈줄 만큼 대단한 거니껴?
육사  (하얗게 질린)
일양  이제 알겠니더.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육사  ...!
일양  아무것도 아닌 사내란 말이요.

단호하게 일어서 나가버리는 일양. 망연히 남겨진 육사에서.

24. 독방 안.
쿨럭쿨럭, 밭은기침을 하면서도 배식된 밥을 꼭꼭 씹어 열심히 먹는 육사.
독방 문 위, 손바닥만한 쪽창으로 육사를 보는 마시모토, 배식대를 끌며 옆에 선 간수1.

간수1  독한 놈. 자식이 죽었다는 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육사를 보는 마시모토에서. 

25. 박이만 사무실.
땅콩을 부스고 있는 이만. 마시모토, 이만 옆에서 땅콩 껍질로 지저분해진 재떨이 비우며, 

마시모토 가방 주인이 죽었습니다. 이번에도 오래 붙들어 두진 못합니다.
이만  그렇겠지.
마시모토 그런데 왜...
이만  왜... N그 놈한테 집착하느냐... 그 말이야?
마시모토 보잘 것 없는 폐병쟁이 아닙니까. 그냥 둬두 얼마 살 것 같지도 않는 놈한테...
이만  그 놈만 생각하면 속이 뒤틀리니까.
마시모토 ...?
이만  (차가워진 눈빛) 난 피가 싫어. 처음 고등부 형사가 되었을 때, 피 냄새가   싫어서 매일 같이 토해댔다. 어떤 날은 손가락을 넣어 억지로 토해내고서  야 잠이 들 수 있었지. 죽을 각오로 버텨... 이만치 올라왔어. 나 같은 조센  징이 너 같은 일본인 부하까지 두고 있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게 아닌가?
마시모토 ...
이만  헌데, 저 놈은 날 인정하지 않아. 내가 죽을 각오로 이룬 것을 전혀 쳐주  지 않는단 말이야. 저놈 실실거리는 면상을 보면 꼭...
마시모토 ...
이만  저놈이 아니라 내가 시궁창에 있는 기분이란 말이지.

독기어린 눈빛을 하고 가루를 낼 듯 땅콩을 부스는 이만에서. 
26. 형무소 안, 출소 대기실.
출옥 전, 마시모토에게 소지품을 받아 챙기는 육사.

마시모토 이게 몇 번째 출옥이요? 열네 번째요... 열다섯 번째요?
육사  (대꾸 없이 소지품만 챙기는데)
마시모토 우리 아버지는 조선인이요.
육사  ...?
마시모토 어머니는 날 임신하고 조선으로 쫓겨났소. 평생 나만보고 사셨는데, 여태   땅콩 껍질이나 치우고 있지. 아무튼... 일본에 가면 나보고 백정 냄새나는   춍이라고 하고, 조선에서는 김치 맛도 모르는 왜놈이라고 하고... 죽을 맛  이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  매운 김치는 싫은데 조선 된장은 좋고, 우동  은 맛있어도, 회는 싫소.
육사  ... 나한테 그런 얘기를 왜 하는 거요?
마시모토 (잠시 무안했으나) 그냥... 시인 선생이잖소.
육사  ...
마시모토 ... 시인선생은 혹 내 사정을 이해해줄지도 몰라서 그러오.

잠시, 마시모토 보던 육사, 소지품 챙겨 돌아서는데,

마시모토 아이 일은 안 됐소.
육사  (잠시 멈칫, 했으나) 두 돌도 못 넘길 놈이면 커서도 인간구실 못하오.

하고는 나가버리고... 잠시 그 뒷모습을 보는 마시모토에서.
 
27. 육사의 하숙방.
책상에 앉아 기사를 쓰는 육사. 주위로 수북하게 쌓인 중국어, 일본어 원서들. 
그 때, 드르륵 문이 열리며 윤희가 들어온다.

윤희  오늘 출옥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갔어요.   (잠시 틈) 그날 일은 미안해요. 시간을 못 맞춰서.

하지만 육사, 윤희를 돌아보지도 않고 중국, 일본어 원서를 들추며 기사를 쓰는데 열중이다.
육사가 쓰고 있는 글의 헤드라인 <대공황과 중국의 정세>

육사  미국에서 대공황이 일어났네. 공황이 곧 일본을 삼킬 걸세. 그리되면 일본  은 조선을 쥐어짜서 기름칠을 하려 할 거야.
윤희  아직 몰라요?
육사  ...?
윤희  당신... 신문사에서 해고됐어요.
육사  (잠시 당황) 그럼... 일단 기사를 쓰고 투고할 만한 곳을 찾아봐야 겠어.   어딘가 실을 데가 있겠지.
윤희  (역정이 난다) 그만 둬요. 그런 글을 써 올리면 또 감옥에 간다구요.
육사  (기사만 쓸 뿐이고)
윤희  당신은 감옥 시멘트 바닥이 무슨 온돌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육사  ...
윤희  우리 나가요. 미쓰코시에 좋은 가베가 들어왔대요. 당신도 미쓰코시는   좋아하잖아요.

여전히 대꾸 없는 육사. 그런 육사를 가만 내려 보던 윤희,

윤희  난요... 정말 싫어요. 구질한 거.

윤희, 나가버리고. 타이프 치던 손을 잠시 멈추는 육사에서.

28. 카페 안.
재즈 선율 아래 춤을 추는 사람들이 흥겨운 카페 안.
윤희, 춤추는 사람들 따라 들썩거리며, 옆자리에서 추근대는 남자
의 수작에 과하게 웃어가며 칵테일을 마신다. 하지만 한껏 웃다가도 금세 표정이 어두워지곤 하는데,

김승환(E) 혹시... 소설가 노윤희씨 아닙니까?

윤희 보면, 말쑥한 양장차림의 반들반들한 훈남, 김승환이다.

승환  인사드립니다. 저는 글쟁이 김(하는데)
윤희  김승환 선생이시죠?
승환  나를 아시오?
윤희  경성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소설가 김승환을 모를 리가 없죠.(하는데)

승환의 시선이 윤희가 두른 스카프에 머물러 있다. 끝단이 닳아 보풀이 일어난 스카프.
윤희, 괜시리 수치심을 느끼며 스카프를 옷 속에 넣고.

승환  당신이 쓴 소설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소. 그만한 재주에, 이만한 미모에...   고작 이런 싸구려 술이나 마시고 있어야 된다니.
윤희  (얼굴 붉어지며 일어서려 하는데)
승환  (턱, 윤희 잡으며) 항상 이 자리에서 당신
을 보곤 했소. 오늘처럼... 당신이 혼자 오는 날을 기다리면서 말이오.

서로 마주보는 승환과 윤희에서.

 

29. 길 일각. + 차 안.
인적 드문 길가에서 택시를 잡는 육사. 육사 앞에 멈춰서는 택시.
보면, 안에 세주가 타고 있다.

CUT TO
콜록콜록, 독한 기침을 하는 육사.

세주  갈수록 심해지는 군.
육사  (손 휘저으며) 신경 쓰지 말게. 병이란 놈은 아는 척을 하면 더 기승을  부리는 법이지.
세주  앞으론 푹 쉬면서 요양이라도 하게. 이제... 자네는 자율세.
육사  (안색 변하는) 세주! 이번엔 운이 나빴네. 그래도 끝까지 버텼어. 그러니   고작 넉 달 만에 나를 풀어준 게 아닌가.
세주  그렇지. 자네를 열다섯 번이나 감옥에 넣고도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지.
육사  (희망의 빛)
세주  하지만 자네 건강은 엉망이 되 버렸네.
육사  아닐세. 며칠만 쉬면 좋아지네. 내 건강은 걱정할 필요가 없(네 하려는데)
세주  자네가 아니라 자네로 인해 고통 받을 동지들을 걱정하는 거네. 그날...   (매서워진 눈빛) 자네한테는 기회가 있었어.
육사  (할 말을 잃고)
세주  이 일을 무엇으로 하는지 아나?
육사  ...!!
세주  분노로 하는 거야. 자네 분노는 거짓이네. 처음부터 그랬어.
육사  ...
세주  자네는 가짜야.

CUT TO
가로등 아래, 인적 없는 밤거리에 홀로 남겨진 육사.
저만치 멀어지는 세주의 차.

30. 육사의 방.
전등불을 밝히고 뭔가를 쓰는 육사의 구부러진 등.
카메라 멀어지면, 수십 장의 습작시들이 이러저리 굴러다니고 있다.
열정적으로 펜을 굴리는 육사, 하지만 자세히 보면, 계속 같은 단어만 반복해 쓰고 있다.

‘내 고장 칠월은... 내 고장 칠월은... 내 고장 칠월은...' 같은 단어로 빽빽해진 종이.
육사의 얼굴에 광기가 어리고... 창 밖에선 하얗게 동이 트고 있다. 

CUT TO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 육사. 그 때, 우당탕탕탕!!! 소리. 번
쩍 눈을 뜨는 육사.
31. 동네 골목길 일각.
동네 꼬마 아이들 대 여섯이 전쟁놀이를 하고 있다.
쪼그리고 앉아 아이들 노는 양을 보던 육사, 파리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뜬다.

아이들, 탕, 탕, 탕... 총쏘기 시늉을 하며 돌멩이를 던지는데, 돌멩이 하나가 육사의 이마에 맞는다. 피를 본 아이1, 곧 으앙... 울음을 터트리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아이1를 안아 올린 육사. ‘괜찮다, 괜찮아...’ 하며 다독인다.

육사  그런데 이놈들, 사람 죽이는 놀이가 뭐 그리 재미있다고 신이 난 게야?
아이2  연습해두는 거에요.
아이1  호외가 났어요. 곧 전쟁이 난데요.

아이1, 주머니에서 호외 종이로 만든 딱지를 펴서 준다. 
호외를 펴 확인한 육사의 손이 떨려온다.

자막 뜬다.
1941년 일본, 진주만 공격. 태평양 전쟁 발발.

콜록,콜록 기침이 점점 심해지던 육사, 스르르... 쓰러진다.
아저씨!! 하며 놀란 아이들에서.

32. 일양의 집, 안 방.
잠든 육사. 일양, 육사의 머리에 수건을 얹어주다가 가만... 육사를 본다.
애증이 얽힌 복잡한 눈빛. 흠칫, 고개를 저어 감정을 털어내고 방을 나서는 일양.

CUT TO
미음 따위를 들고 들어서던 일양.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육사가 들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보고 있다.
구름 사이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 왠지 기이한 고요에 잠긴 육사의 뒷모습. 

일양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걸 누가 집까지 데려다 줬니더.

천천히 일양을 돌아보는 육사.
곧 육사의 시선이 작은 서랍 위, 예전 육사가 놓고 갔던 동윤이의 색동고무신 위에 멈춘다. 일양, 조금 난처한 표정 되는데,

육사  이미 끊긴 인연, 연연하지 말게.
일양  (서운하면서도 분한) 정신 차렸으면 그만 가시오.

다시 시선을 돌려 들창 밖, 달을 보던 육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육사  저것 좀 보시오.
일양  ...?
육사  저 벌건 눈구멍을 보란 말이요. 전엔 저것이 어둠을 밝히는 빛인 줄 알았  는데 요새 보니 아니오. 저건 사악한 어둠의 눈구멍이요. 이편을 감시하는  독하고 질긴 눈구멍이란 말이요.

눈의 실핏줄이 터질 듯, 핏대를 세우는 육사.
일양,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육사의 모습에 당황스럽고.
육사, 벌떡 일어서더니 이불로 들창문을 막겠다며 못질을 해대기 시작한다.

육사  이편을 보지 못하게 해야겠어. 저놈의 눈깔이 이편을 보지 못하게...
일양  정신 차립시더, 보시오, 정신, 정신 채리란 말이요!

결국 철썩 육사의 뺨을 때리는 일양, 다음 순간, 놀라 자신의 손을 흠칫 떤다. 
스르르 기운 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이불. 망연히 그 이불을 보는 육사에서.

CUT TO
다시 잠든 육사.
가만... 그런 육사를 보다가 꾸벅 졸던 일양, 눈을 떠보면 자리에 육사가 없다.

33. 집 밖, 골목길.
집 밖으로 뛰어나와 육사를 찾던 일양, 문득 멈춰 선다.
보면, 자박...자박... 눈 밟는 소리.
하얀 눈 밭 위에 오직 육사의 발자국만 길게 나있다.
맨발로 눈 위를 걷고 있는 육사. 
육사, 하얀 눈을 손으로 퍼 본다. 곧 그 위에 툭... 육사의 코피 떨어진다.
붉은 피, 하얀 눈 속에 스며들고. 육사, 차가운 눈을 한 입 입에 머금어 본다.
육사의 얼굴에 희미한, 하지만 처절한 비애를 숨긴 미소가 뜬다. 

육사(E)  세주, 자네 말이 맞았네. 나에겐 분노가 없네. 나를 타오르게 하는 것은   분노가 아니었네. 그것은 슬픔이네. 지독한 슬픔. 세주... 또 다시 전쟁이   났네. 지독한 슬픔의 광풍이 몰아치려 하네.

걷는 육사 위로, 시 <청포도> 올라간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곱게 밀려서 오면..
에서 다음 씬, 동인1이 낭독하는 시 <청포도>로 연결

34. 지하 카페 안. 
시 낭독회가 열리는 지하 살롱. 진지한 표정으로 동인1이 낭독하는 시를 듣고 있는 청중들.

동인1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판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중들 속에 앉은 육사, 헬쓱하고 파리해진 모습이 마치 수도승과 같은 청빈한 느낌을 풍긴다. 육사, 시를 듣는 사람들을 훑어본다.
그중에 한 명, 눈을 감고 음미하듯 육사의 <청포도>를 듣던 스무살 남짓의 청년.
시를 듣던 청년의 얼굴에 스르르... 미소가 뜨고, 육사, 덩달아 설핏 미소 짓는데, 곧 낭독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 터진다.
육사, 자신의 시가 청중들에게 불러일으킨 반응이 사뭇 놀랍다.
다음 순서. 육사의 시를 느끼던 스무살 청년, 서진섭이 올라간다. 

서진섭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 그저 평범한 사람인데, 이 자리에 불러주셔서...
동인2  (벌떡 일어나며) 아니오. 서진섭 시인은 얼마 전 학생운동 1주년 기념시위   주동자로 몰려 퇴학당하고 옥고를 치르셨소. 누구보다 우리와 뜻을 같이하  는 동지요!!

다시 터진 박수. 하지만 여린 외모의 서진섭은 이런 상황이 어색한 듯 얼굴만 벌게진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내 자신의 시를 낭독하는 서진섭.

서진섭  첫... 사랑. 여보오 여보시오... 내 어룬 고운님 곱게 핀 이 마음으로 와보오 님 계신 곳 달디 단 오얏, 오얏처럼 시디 신 그리운 맘... (하는데)

곧 사람들 웅성거린다.

동인1  말랑한 사랑시 말고 좀 더 기개 있고 패기에 찬 것을 낭독해 보시오.
동인2  그렇소. 일전에 발표한 ‘역사야 노래하라’ 같은 거 말이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마치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서진섭의 시를 듣는 육사. 얼굴이 벌게진 서진섭, 자리를 뛰쳐 나가버리고...

35. 박이만 사무실.
박이만이 바싹, 긴장된 모습으로 선 채로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있다.

상관(F)  (일본어) 자네는 남는 시간에 뭘 하나?

이만  (일본어, 당황스러운) 남는 시간엔... 남는 시간 따윈 없습니다.
  오직 대일제국의...
상관(F)  (일본어) 쯧쯔... 자네도 역시 재미없는 조선인일 뿐인가?
이만  ...?
상관(F)  (일본어)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고, 시를 읽고, 자연을 즐겨야지. 사람을   진정 변화시키는 것은 그런 것들이야. 총독부 보안과에서는 그저 범죄자만   색출할 줄 알 뿐, 교양이 없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어.
이만  (일본어)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고, 시를 읽고,   자연을 즐기고...(하는데)
상관(F)  (일본어) 도조 히데키 총리께서는 대동아 공영권을 구상하시어 일본과   조선을 함께 살리는 길을 계획하고 계시네. 우리의 아들들이 필리핀과   마닐라에서 죽어가는 이때에... 조선에서도 천황께 뭔가를 바쳐야 되지   않겠나?
이만  (일본어) 더 많은 조선의 청년과 여자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상관(F)  (일본어) 그걸론 부족하네, 박이만 경사.
이만  ...!
상관(F)  (일본어) 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해. 조선인들의 마음  을, 진정 변화시킬, 그 뼈 속까지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단 말이네.
이만  하이!!

곧 툭, 끊기는 상관의 전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는 이만에서...

자막 뜬다.
민족 말살 통치 본격화. 그 아래로,
국가 총 동원령, 내선일체 일선 동조론, 황민화 정책의 자막이 따로따로 떴다가 사라진다.

36. 대강당 + 단상 아래 대기실.
‘조선임전 보국단’의 플랭카드가 크게 걸린 강당 단상 위, 김승환이 연설을 하고 있다.

승환  조선의 어머니들. 여러분의 자식들을 천황의 품에 안기십시오. 여러분의   자식은 여러분의 좁은 가슴이 아니라 제국의 넓은 대지에 묻혀 영원히 기  억될 것입니다!

동시에 터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
카메라 팬 하면, 수많은 관중들이 기립해 박수치고 일장기가 흩날리는 장관이 연출되고 있다. 하지만 객석의 뒤편, 작은 보리쌀 주머니를 든 아낙네들 수십 명은 기계적으로 박수나 치고 있을 뿐인데... 그 중의 한 명, 일양이다!

연설을 마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단상에서 내려온 김승환, 누군가를 보며 미소 짓는다. 보면, 노윤희가 긴장된 자세로 앉아있다. 잠시 김승환을 올려보던 윤희,

윤희  (고개 저으며)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제가 미쳤나봐요.(일어서 가려는데)
승환  어떤 여자가 진짜 여자인지 아시오?
윤희  (우뚝 멈춰서고)
승환  진짜 남자가 옆에 두는 여자가 진짜 여자요. 그럼, 진짜 남자는 어떤   자인지 아시오? 진짜 여자를 옆에 두고 있는 남자? 흥... 아니! 
윤희  ...
승환  내 여자를 호강시켜줄 수 있는 남자가... 진짜 남자요.
윤희  ...
승환  이육사가 당신에게 해준 게 무엇이요? 조선이 당신에게 해준 게 무엇이요?

흔들리는 윤희의 눈동자. 승환, 윤희의 손을 이끌어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안내한다.
결국 주춤... 단상위로 올라 마이크 앞에 선 윤희. 

윤희  천오백만 조선의 여성분들!

좌중 집중되고, 긴장해서 목청이 흔들리는 윤희, 흠흠... 목소리 다듬는다. 

윤희  천오백만 여성이 한뜻으로 총후봉곡하면 우리 민족이 대대손손 황국의   신민으로 무한한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떨리던 음성 가라앉고)    저는 여자이기 때문에 군인은 될 수 없지만, 군인과 똑같이 이 몸을,   이 몸뚱아리를, 조국에 바치고 싶습니다.

연설하는 윤희를 믿을 수 없다는 듯 꿈뻑꿈뻑 보는 일양. 하지만 다시 봐도 윤희가 맞다.

일양  (얼굴이 욱씰... 일그러지며) 미친년.

일양, 보릿쌀 받은 것은 내 던지고 나가 버린다.

37. 친일행적을 벌이는 문인들.
친일 행적을 벌이는 문인들의 다양한 모습과 음성.

- 강당에서 강연하며 일장기를 들어 펄럭이는 서진섭.
서진섭(E) 마쯔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심장, 우리의 기쁨,
  그대는 우리의 가마가제 특별공격대원.

- 학교 교단, 학생들 앞에서 친일 작품을 낭독하는 노윤희.
노윤희(E)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 ‘국민문학’이라는 제목의 잡지에 실린 친일시 전문.
김승환(E)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하데오여, 너로 하여 향가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사람. 인씨의 둘째아들 스물 한 살 먹  은 사내라네.

38. 련초 다방 안.
신문을 읽던 육사, 장을 넘기다 ‘군국의 어머니, 그 뜨거운 모정’이라는 칼럼 아래, 노윤희의 사진을 보게 된다. 육사의 눈빛, 복잡해지는데,

이만(E)  선생도 좋은 시 한 편 써 보시오. 

보면, 이만이 털썩 육사의 앞에 앉아 느물스럽게 웃는다.

육사  (흘끗 보고 외면하며) 여긴 웬 일이요?
이만  나도 조선 문객들이 드다든다는 다방이 어찌 생겼나 구경 좀 해보려고 왔수다. (주욱... 둘러보더니) 붓자루 쥔 것들도 노는 건 별 거 없구만. 
육사  ...
이만  신문을 보았으면 노윤희가 요새 뭘 하고 돌아다니는 지 알겠지? 선생이   조선 최고의 시인이 될 거라 치켜세우던 서진섭이란 자는 또 어찌 지내는  지 아시오?

잠시 동안, 이만과 육사의 시선 쨍... 마주친다.
육사, 곧 주머니에서 줄칼을 꺼내더니 손톱을 손질하더니 손질한 손톱을 훅... 분다.
손톱가루가 이만의 얼굴로 날리고... 이만, 눈살을 찌푸리는데.

육사  좋은 시를 쓰면, 나한테 뭘 해줄 셈이요?
이만  올  겨울이 유독 춥소. 부모님 댁에 땔감도 넉넉히 넣어드리고, 옥에 있는   선생 동생들도 나오도록 손을 써 보겠소. 안 사람이 손바느질하고 하숙해  서 버는 돈으로 먹고 산다던데... 올 겨울엔 얼음물에 손 부르트는 일 없게  해주리다.

줄칼질 하는 육사의 손짓이 멈칫한다. 그 모습에 씨익... 승리의 미소를 짓는 이만. 그 위로,

육사(E)  나는 손톱을 소중히 하고 자르고 으르고 닦고 하는 동안에 한 가지 방편을  얻었다. 그것은 나에게 거북한 일을 말하는 사람 앞에서 손톱을 닦는 것이다.

39. 박이만 사무실.
신문을 든 박이만, 파르르... 떤다. 보면, 육사의 칼럼. <전조기>

육사(E)  배알에 거슬리거나 듣기 싫은 말을 듣고 억지로 참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짢은 표정을 할 수도 없어 손톱을 닦노라면 시골 계신 어머니도 그려  보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 수도 있다.
쿵, 분에 차서 책상을 내리치는 이만.

40. 감옥 안.
감옥 안, 길게 자란 손톱을 벽에 문질러 가는 육사. 시멘트에 쓸려 피가 나지만 조금은 신경질적인 육사의 행동은 멈추지 않는데, 그 때, 찌이익... 감방 문이 열리며 간수1이 들어와 육사를 끌고 나간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질질 끌리는 육사의 발 뒤꿈치. 쩌억 갈라져 피고름이 흐르고 있다. 감방 로비에 서서 끌려가는 육사를 차가운 눈빛으로 보는 이만에서.

CUT TO  
마시모토가 육사가 머물던 감방의 이불을 털고, 선반을 뒤집어 엎어가며 뒤진다.

마시모토 별거 없습니다. 그냥 글 나부랭이 몇 개...(하는데)

하며, 이만에게 건네주는데, 대꾸 없는 이만.
보면, 육사가 벽을 긁어 써 넣은 시 <절정> 앞에 선 이만.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제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충격을 받은 듯 멍~해진 이만의 눈빛에서.

41. 서대문 경찰서 전경.
감옥의 철문이 열리고, 눈에 띄게 헬슥해진 육사가 출옥한다. 계절이 바뀌었다.
육사, 주위를 둘러보지만 이제 아무도 자신을 기다려주는 이는 없다.
옷깃을 바싹 세우고 몸을 움츠리고 걷는 육사.
그런데 뜻밖에 육사의 앞을 막는 이, 일양이다.

일양  집으로 가입시더.
육사  (그냥 지나쳐 가려는데)
일양  하숙방에 가면 누가 있니껴? 이제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을 거 아니요?
육사  (멈칫하면)
일양  나도 넘들처럼 살아봅시더. 아침에 밥 냄새 풍기면 깨시오. 한 술 뚝딱   뜨고는 같이 밭일 하러 갑시더. 깍지로 긁고 호미로 매고 씨가시 뿌리고   총생이 옮겨 심고 적당히 거름도 주고... 딱 한 달만 이렇게 살아봅시더.

잠시 서로를 바라보는 일양과 육사의 모습에서.

42. 육사와 지내는 일양 스케치.
- 안 방.
아침, 밖에서 총총총 도마질 하는 소리가 들린다. 청아한 새소리도 들린다.
잠들었던 육사, 아침의 소리에 스르르... 눈을 뜬다.

- 부엌
도마질 하는 일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리고.

- 마당.
일양이 장독대를 닦고, 육사가 장독 옆 가장자리에 무너진 벽돌을 싸흔다.  
그 때, 골목길에서 공놀이를 하던 아이들의 공이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오고, 까까머리 아이하나가 빼꼼이 고개를 내민다.

육사  이름이 뭐니?
아이  수철이요.
육사  응...수철이. 옛다.

이제 대여섯 살쯤 되었을 꼬마아이, 수철이가 꾸벅 절을 하고는 공을 받아 뛰어간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육사, 혼잣말처럼 말한다.

육사  동윤이 저 놈... 눈에 장난 끼가 그득하구먼...

동네 꼬마를 죽은 아들, 동윤으로 부르는 육사.
하지만 육사는 자신이 말실수한 것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화단 잡초만 뽑고 있다.
그런 육사를 보는 일양에서.

- 사랑채 + 마루.
사랑채에서 난을 치는 육사.
문 건너 마루에서 일양이 솜 누비옷을 짓고 있다. 서랍장을 열아 완성된 바지를 넣는 일양.
보면, 서랍장 안에는 솜 누비옷이 한 가득이다.

육사  자네는 지겹지도 않은가? 허구 헌 날 솜옷이나 짓는 거 말이야.
일양  또 갈 일 있으면 입어야 될 것 아닌겨? 이래 쌓아놔야 든든허지...
중얼중얼 하면서 솜 바느질에 열심인 일양.
그런 일양을 보는 육사에서.

43. 육사의 집 마당.
간식거리 담은 쟁반을 들고 뿌듯한 미소를 띤 채 부엌을 나서다가 멈칫, 서는 일양. 
보면, 툇마루에 앉아 먼데를 더듬는 육사의 눈빛. 육사의 손에 들린 신문.

(ins- 신문 내용)
제국의 화북침략군, 타이항산의 반군에 대한 5월 소탕작전 개시!

이 모습을 본 일양, 불안해지고.

44. 육사의 방. 
화창한 봄날 오후. 창가에 앉아 창 밖 모습을 보는 육사. 벚꽃이 흩날린다.

육사  이야... 임자, 이리 좀 와 보오.

일양이 육사 옆에 앉고. 잠시 꽃구경을 하는 두 사람.

육사  오늘은 당신이랑 가볼 데가 있어. 제일 이쁜 옷으로 차려입어야 하오. 

묻는 얼굴이 된 일양의 표정에서.

45. 카페 몽파리 안.
육사의 손에 끌려 카페 안으로 들어온 일양, 신여성의 차림새를 했다.
육사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웨이터를 불러 팁을 주고는 뭐라 속삭인다.

일양  이런 덴 뭐 하러... 남사스럽게.

육사, 고요히 미소를 지을 뿐이고... 일양,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곧 육사가 신청한 음악이 나온다. 육사, 일양에게 손을 내민다.

일양  (화들짝 손사레) 아이고, 됐니더. 우세스럽게 이러지 마세요. 

하지만 육사의 강한 팔에 이끌려 결국 스테이지로 나가게 되는 일양.
곧 육사가 일양의 허리를 감싸고 춤을 춘다.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육사의 눈빛은 특히나 부드럽다.
일양,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이끌려 육사에게 몸을 맡겼다가 곧 육사의 시선을 외면한다.

일양  흥, 이런 데 자주 다닌 모양이니더.
육사  (설핏 미소)
일양  이제 지치고 병드니께네... 내라도 델꼬 온 거 아닌겨?
육사  나한테... 여인은 당신뿐이었다고 하면 믿어주겠소?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육사와 일양.
떨리는 일양의 눈빛. 하지만 일양, 다시 육사의 시선을 감당하지못하고 외면한다.

일양  일본 놈 싫다면서 일본 놈 술집엔 뭐 하러 데리고 온 거니껴?
육사  조선이 독립하면 여기 보다 훨씬 좋은 카페에 가서 임자랑 춤을 출 테요.   한강 뽀트도 타고... 그렇지, 빨간 벽돌로 지은 2층짜리 문화주택에서   아들, 딸 낳아 키웁시다. 약초극장에서 낙화유수도 보고, 동리 애들 다   데려다 연예관 구경도 시켜 줍시다.
일양  ...
육사  조선이 독립하면, 임자랑 나랑 일본 열도를 구석구석 구경합시다. 내친김  에 저기 불란서도 가고 아미리카도 갑시다.
일양  ...
육사  조선이 독립하면... 나는 일본도, 아미리카도, 러시아도 미워하지 않고...   그리 할 수 있을 것 같소. 조선이... (순간 목이 멘다) ...하면...

흔들리는 일양의 눈동자. 일양, 스르르... 육사의 품에 안긴다.
생애 마지막 순간을 즐기는 육사와 일양.
음악은 그렇게 흘러간다.

46. 육사의 집, 안방 안.
어둠 속, 안방에 나란히 누운 육사와 일양. 잠시간 침묵.
곧 육사, 가만... 일양의 손을 잡는다.
육사의 손길에 눈을 질끈, 감는 일양. 뭔가 올 것이 왔다는 느낌.

육사  화북에서 조선 의용군 육백 명이 일본군 오만 명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다는군. 세주가 거기 있네.
일양  ...(눈을 질끈 감는다. 뭔가 올 것이 왔다는 느낌)
육사  세주가 나를 찾지 않으니 나라도 세주를 찾아가야겠네. 자네에게는...   참으로...(하는데)
일양  그 날도... 당신은 내 손을 잡고는 일본에 가겠다고 했니더. 난 그 때부터  싫었어요. 꼭 무슨 일이, 당신과 나 사이에 꼭, 무슨 일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CUT TO
새벽, 잠든 일양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스레 짐을 챙겨 밖으로 방 밖으로 나선 육사.
그런데, 문 밖에 솜옷 여러 벌을 싼 보퉁이가 있다. 돌아보는 육사.
모로 누워 자는 일양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잠시 목젖이 울리는 육사, 솜옷이 든 보자기를 들고 집을 나선다.
육사의 타박타박 발소리가 멀어져가고... 감은 일양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47. 서진섭의 집.
마당을 쓸러 나오던 서진섭,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화들짝 놀란다.
보면, 육사가 서진섭의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서진섭이 나오자 씩... 웃어 보인다.

48. 서진섭의 집안.
서진섭이 내오는 차를 두 손으로 호호 불며 맛있게 마시는 육사.
서진섭, 육사를 보는 표정이 불안하다.

육사  (찻잔 내려놓으며) 좋구만.
서진섭  향이 마음에 드십니까? 좀 싸드리라 하겠습니다. 댁에서도 즐기십시오.
육사  아닐세. 난 곧 조선을 떠나네. 가기 전에 자네한테 이를 말이 있어서 왔네.
서진섭  ...?
육사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자네가 어떤 시인인지, 자네의 시가 어떤   시인지... 자네도 모르고 있다고 했던 말 말이네.
서진섭  ...
육사  자네의 시를 버리지 말게. 자네의 시를 배신해서는 안 되네.
서진섭  하지만 전... 시 쓰는 것 밖에 모릅니다. 다른 것은 자신 없습니다. 다른   것은... 버텨낼 자신이 없습니다.(하는데)
육사  (단호한 시선으로 진섭 보며) 아닐세, 아니야. 자네의 시가, 곧 자넬세.
서진섭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맡게 됐습니다. 곧... 반도학도 지원병에게 바치는  헌시를 쓸 예정입니다. 서진섭이 아니라... 이시하라 토시오로 살겁니다. 

충격 받은 육사. 찻잔을 쥔 손이 떨린다. 그 모습에 간절한 표정이 되는 서진섭.

서진섭  일본은 망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저와 함께 하십시오.

하지만 매몰차게 서진섭의 손을 뿌리치는 육사.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집을 나선다.

육사  역시...  세주의 말이 맞았네. 세주의 말이... 그 말이...

휘청거리며 서진섭의 집을 나서는 육사에서...
 
49. 군 기지 안.
화북(華北) 타이항산(太行山), 천막으로 만든 조선 의용대 군기지 안.
세주, 부상당하고 지친 조선 의용대원들 사이를 지나며 의용대 군인들을 독려하고 있다.

세주  일본군 천명과 비행기 두 대가 동원되었다. 우리 조선 의용대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전군이 탈출하는 혈로를 개척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동지들,   잊지 말자! 항일 투쟁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는 중국인의 스승이다.    조선 의용대는 최전방의 돌격부대이자 첩보부대이며 선전부대다!

하다가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멈춰서는 세주.
보면, 저만치 천막 입구 앞,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환한 아이보리 양복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여행 가방을 든 이, 육사다!
세주를 향해 환하게 웃는 육사. 그런 육사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보는 세주에서.

50. 벌판 일각.
관목 숲 일각,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
세주와 육사가 나란히 비트 안에 몸을 숨기고 적과 대치중이다. 

육사  자네 말이 맞네. 시인들이란 박약하기 짝이 없어. 지금 서로 다투어 친일   선동글을 발표하고 지랄이야...
세주  (듣는지 마는지, 탄창을 바꿔 끼우고 다시 사격을 개시하고)
육사  그 더러운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오장 육부가 다 뒤틀려서(하는데)
세주  그래서 여기까지 쫓아 들어왔나?
육사  ...?
세주  돌아가.
육사  아닐세. 난 여기서 죽기까지 자네랑... (하는데)
세주  (덥썩 육사의 멱살을 잡으며) 여기가 어디라고... 오백이 육만을 상대하는   곳이야. 자네처럼 글줄이나 쓰는 사내가 올 데가...(하는데)

다음 순간, 억... 소리와 함께 총을 맞고 쓰러지는 세주.
놀란 육사, 세주를 끌고 비트 안으로 들어간다. 옷을 벗겨 보지만 복부 깊이 박힌 총알.
중상임을 감지하는 세주의 눈빛. 당황스러운 육사, 하지만 가벼운 상처인양,

육사  조금만 기다리게, 내 가서 당장 의무병을...(하는데)

육사의 옷깃을 잡는 세주, 안 춤에서 독약병을 꺼내 저만치 던져버린다.

세주  (미소) 됐네, 난 저 놈한테 이겼네. 
육사  (눈물 차오른다)
세주  내... 힘들었을 때마다 뭘로 버텼는지 아나?

세주,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의 군복 윗 주머니에 꼬깃꼬깃하게 접었던 신문조각을 꺼낸다.
바로 육사의 시 <청포도>가 실린 신문 조각이다. 

세주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기운이 났네. 이상하게 자네의 시를 읽고 있으면...   그래, 언젠가는 그 날이 오겠거니... 기분이 좋아졌단 말이지.
육사  세주...
세주  ... 돌아가게. 자네 시는 어쩌면... 어쩌면 말이네...

하다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세주.

육사   이러지 말게. 세 번째 잔은 언제 마시려나. 이보게... 이보게, 세주...

천천히 암전.

51. 취조실 안.
무지화면 속, 아아아악... 젊은 여자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
천천히 화면 밝아지면 서대문 경찰서 취조실 안, 고문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여자의 얼굴이 화면 가득. 그리고 맞은편에 고문을 지휘하고 있는 박이만.
핏물이 흘러 이만의 구둣발 아래로 스며든다.
박이만의 눈 아래 근육이 움찔, 떨린다.

52. 화장실.
핏물 가득한 손을 씻는 이만, 벅벅 비누칠을 해, 피를 닦는다.
하지만 아무리 비누칠을 해도 손톱 아래 낀 핏물은 빠지지 않는다.
점점 손 씻는 손길이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이만에서. 

53. 박이만 사무실.
의자에 온 몸을 기대고 널브러진 채 앉은 이만. 
문득, 책상을 더듬거려 ‘이육사 소행보고서’라는 제목의 파일 안꼬깃꼬깃해진 종이를 편다. 펴면, 육사의 시 <꽃>

54. 감옥 안.
배식 받은 죽을 먹는 육사. 기력이 없어 제대로 뜨지도 못한다.
하지만 죽을 흘릴 때마다 손수건으로 정갈하게 닦아내고 다시 먹으려 한다.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는 이만. 기력은 없을지언정 품위는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
곧 감옥 문이 열리고 박이만과 잘 차려진 음식 쟁반을 든 마시모토가 들어온다.

이만  왜? 내가 주는 것이니 싫은가?
육사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한 입 먹으려던 육사, 움찔하더니 입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뺀다. 이빨이 빠졌다. 

이만  이번엔 쉽게 석방되지 못한다. 조선의용대에 합류했던 것도 모자라,    조선에 무기를 반입하려 하지 않았나? 
육사  (대꾸 없이 다시 밥술을 뜨는데)
이만  니가 쓴 글을 몇 자락 읽었어. 꽤 쓸만하더군. 그 재주로 세상에 나가면   뭔들 이루지 못하겠나? 뭔들 얻지 못하겠나?
육사  ...
이만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조선 백성들은... 네가 여기서 허물어지고 있는   것도 모른다.

먹던 것을 멈추고 이만 보는 육사. 그 눈빛.

육사  내가... 조선 백성만 안타까워 이러는 줄 아나? 난, 자네가 안타깝네.
이만  ...!
육사  (다시 밥술 뜨며) 한 번도 자네가 제대로 웃는 것을 본적이 없어. 비아냥    거리는 웃음 말고, 분해서 짓는 웃음 말고, 참으로 좋아 웃는 웃음 말이야.

당황한 듯 흔들리는 이만의 눈동자에서.

55. 면회실.
면회실에 들어선 육사, 자신을 면회 온 누군가를 보고 표정이 환해진다.
보면, 서진섭이다.

육사  와 주었구만. 한 번 와달라 연통을 넣기는 했지만 정말 와 줄지는 몰랐네.   고마우이.

서진섭, 왠지 자리가 불안한 듯하다. 그런 진섭의 기분을 알아채는 육사.

육사  걱정 말게. 내가 미리 다 말해 놓았네. 자네를 나와 연루해 보는 일은   없을 걸세. 
진섭  ...
육사  어찌 지냈는가?
진섭  그날이 그날입니다. 그저, 시 쓰는 일만 하루가 다를 뿐입니다.
육사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렇지. 그럴 줄 알았네. 내, 자네가 그런 시인일 줄   알았네.

육사, 바싹, 면회실 유리창으로 다가선다. 서진섭, 잠시 움찔하고.
육사, 깊은 눈으로 서진섭을 본다. 그 형형한 눈빛. 진섭, 그 눈빛을 피할 수 없다.

육사  자네의 시를 보면 조선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조선 처녀의 볼 살이   조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또한 얼마나 눈물겹게 고운지 알 수 있네. 조선  의 자연과 조선의 백성들이 자네의 시를 키웠네. 그렇지 않은가? 헌데...   어찌 이를 배반하려는가?
진섭  ...
육사  정 겁이 나면 자네 두려움이 안내하는 길로 가게. 하지만... 자네의 시는   자네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게. 자네 시를 배반해서는 안 되네.  지금의 자네는 인간으로 서는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진섭  ...
육사  시인으로서는 용서 받을 수 없네.

서진섭의 눈동자 흔들리고...

56. 박이만 사무실 안.
박이만 사무실, 이만의 책상 맞은편에 앉은 육사. 이만은 창밖을 본 채 뒷짐을 지고 있다.

박이만  내일이면 북경 일본 영사관 감옥으로 이송될 거요. 거기서 국내 무기 반입   계획에 대해 취조 받게 될게요.
육사  ...
박이만  그곳에 가게 되면 설사 모든 사실을 자백해도 당신 목숨을 보장할 수   없소. 게다가 그곳 형사들은 지독해서...(잠시 틈)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도 없을 거요.
육사  ...
박이만  그러니 차라리 내게 말 하시오. 무기 반입과 관련된 자들을 모두 내게 말  하면 당신은 구해주겠소. 당신과... 당신 시를 구해주겠단 말이요.

육사, 박이만을 보더니 희미하게 웃는다.

육사  그렇게 목숨을 부지하면 내 시도 죽는 것을... 무슨 수로 한 쪽만 살린단   말이요.
이만  ...
육사  난 보고도 못 본 척 할 수 없소. 알면서도 모르는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슬프면서도 안 슬픈 척, 화났으면서도 화가 나지 않은 척, 고통스러우면서  도 고통스럽지 않은 척... 할 수 없단 말이요. 나는...

잠시 동안 이만과 육사의 눈빛 마주치고...

육사  시인이요.

잠시 정적이 흐른다.
붉은 저녁놀, 덩달아 붉어진 이만의 얼굴. 언뜻, 눈물이 번들거리는 것도 같다.

이만  허면... (잠시 울컥) 잘 가시오. 내 짐작이 맞다면...
육사  ...
이만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요. 그곳은... 그런 곳이요.

57. 서대문 경찰서 전경.
포승줄에 묶이고 세모꼴 용수를 쓴 채 호송차로 이동 중인 육사.
그 때, 저만치서 아이 우는 소리. 보면, 일양이 이제 갓 돌을 넘긴 아가를 업고 있다.
용수 속, 흔들리는 육사의 눈동자.
마시모토, 육사의 마음을 짐작하고 잠시 용수를 벗겨 주며 가보라 눈짓한다.
육사, 일양에게 다가가 포대기를 열어본다. 짧은 탄성과 함께 눈물이 맺히는 육사.
육사, 손을 쓱쓱 죄수복에 닦고는 조심스레 아이의 얼굴을 만져본다.
육사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이 모습에 목이 메는 일양. 하지만 꿀꺽, 침을 삼킨다.

육사  (죄수복 속에 껴입은 솜 옷, 일양에게 보이며) 든든허이.

일양, 고개 끄덕끄덕. 육사, 아가의 손을 잡아 가만... 볼에 갖다 댄다.

육사  옥비야... 아버지 어데 잠깐 다녀오마.

목이 메어 끝이 뭉개지는 육사의 음성. 마시모토 흠흠... 헛기침을 한다.
결국, 육사 돌아서려는데, 턱... 일양이 육사의 팔을 잡는다.
이대로 가면 나는 어쩌냐는 듯, 간절한 눈빛.

육사, 일양에게 뭔가 말하려다가 뒤의 시선을 느끼고 일양의 귀에 작게 속삭인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육사의 속삭임을 듣던 일양, 울 것처럼 혹은 웃을 것처럼 애매해진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알았니더, 알겠니더... 고갯짓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말을 마친 육사, 환하게 웃어 보인다. 일양도 마주 본다.
일양, 웃으려 애쓰지만... 울고 있다.

58. 베이징 일본 영사관 전경.
삭막한 영사관 전경.

59. 영사관 안.
육사 새로운 죄수복을 받아들고는 얼굴을 찌푸린다.

육사  이런... 내 낯빛에는 이런 때깔이 안 어울리는데 말이오. 서대문 경찰서   죄수복은 그나마 색이 밝아서 입을만 했었는데, 혹 좀 밝고 은근한 색으론   없소?(하는데) 

퍽, 곤봉으로 입을 쳐버리는 간수의 무표정한 얼굴. 한순간, 피칠갑이 된 육사의 얼굴.

60. 일양의 집 부엌 안.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일양. 
솥단지에 쌀을 씻고, 냄비에 쌀뜨물을 받아 주걱으로 된장을 푼다.
그리고 솥단지의 뚜껑을 닫고 돌아서는데, 한순간 일양의 표정이굳어진다.
보면, 냄비 속 주걱이 물 위에 떠있지 않고 기이하게도 세로로 서있다.
불길하게 주걱이 서 있는 모양을 보는 일양.
61. 독방 안.
거무죽죽하고 차가운 독방의 벽을 비추는 카메라.
육사, 이제껏 본 중에 가장 험하게 피칠갑이 된 모습으로 독방 구석에 허물어져 있는데,

원록(E)  이기 뭐꼬?
육사  (놀라 소리나는 쪽 보면)
원록  한 번 대차게 살아보자 했더니 이기 뭐꼬?

일곱 살 원록이다! 원록을 알아본 육사의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린다.
어린 원록, 감방 안을 휘이... 둘러보더니 급기야, 팽 육사를 외면하고 벽에 붙어 선다.

원록  이기... 이기 뭐꼬? (훌쩍) 동리 아들이랑 연예관 구경도 하고, 어매아배랑  아미리카도 가고, 이쁜 색시랑 한강 뽀트도 타고 싶었는데... 이기 뭐꼬?

육사, 가만... 어린 원록을 안아본다.
육사에게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가장 뜨거운 눈물 한 줄기 흐른다.
어린 원록의 작은 고사리 손이 육사의 등어리를 토닥토닥 해주었을까...
아련히 사라지는 어린 원록의 환영.

육사, 빈 감방 안에 망연히 남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이제 혼자다.
쓰윽 눈물을 훔친 원록, 주춤 벽으로 다가선다.
육사, 피에 절은 손가락을 들여 막막한 감방 벽에 네모난 창을 그린다. 하지만 채, 네모를 다 그리기도 전에 컥컥... 기침이 시작된다. 입을 훔치는 육사의 손에 피가 흥건하고.
쓱, 쓱 죄수복 소매로 입가를 닦아 내고는 마저 네모난 창을 그리는 육사.

그리곤 온전치 않은 몸을 움직여 감방 바닥에 느긋하게 팔베개를 하고 눕는다.
곧, 육사의 환영 속에서 창이 열리고, 까만 밤이 펼쳐진다.
그리고 총총... 아름다운 별들과 달, 달빛.
시원한 밤바람이 육사의 머리카락을 흩트린다.
육사의 눈이 스르르... 감기려 하는데 그 때, 어디선가 들리는 히히힝... 기운찬 말 소리.
육사,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 기운찬 말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본다.
어두운 밤, 믿을 수 없이 하얀 빛이 점점 육사에게 가까워져 오고 있다.
흔들리는 육사의 눈동자에서.

62. 이만의 새 사무실 안.
새로 배정받은 총독부내 이만의 사무실.
책상 위, ‘경부 박이만’이라 새겨진 명패. 이만, 명패를 옷소매로 쓱쓱 닦아 내려놓고는 본다. 널찍한 공간, 너른 책상, 반들반들 윤이 나는 소파. 뿌듯하고 감격스러운 이만.
그 때, 마시모토 들어온다. 마시모토도 승진을 한 듯, 어깨 위 견장이 반들반들 윤이 난다.

이만  보기 좋구만. 그래, 내 뒤만 따라붙어도 먹고 살만은 할 거라 했지?
마시모토 하이!

이만,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본다.
자랑스럽다. 웃어 본다. 그런데 웃는 모습이 조금 부자연스럽다.

마시모토 학도지원병 20만 명을 달성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근로보국단 신설  과 관련한 인물 색출 작업도 있을 예정입니다.

이만, 응응... 하면서 건성으로 듣고는 여전히 거울을 보며 표정연습 중이다.
억지로 몇 번 웃어 보다가 포기하고, 그냥 항상 짓던, 다소 화난 듯한 표정을 지어보는데,

마시모토 그리고... 방금 북경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이육사가사망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이육사 소행조서를 올리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거울을 보고 이러저런 표정을 짓던 이만, 육사의 사망 소식에 잠시 멈칫한다.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마시모토 이상입니다.(경례붙이고 나가려고 하는데)
박이만  어찌 죽었다든가?
마시모토 고문...(하다가 말 고친다) 건강악화로, 지병인 폐병으로...

거울 속의 박이만의 표정이 애매해진다.

박이만  남긴 것은... 없었는가?
마시모토 시를... 감옥에서 쓴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CUT TO
구겨진 종이 위에 육사의 친필로 써진 마지막 시, <광야>.
노을이 붉다.
창문에서 저녁 바람이 하염없이 커튼 자락을 흩날리도록 둔 채,
<광야>가 적힌 종이를 오래토록 보고 있는 박이만의 모습에서. 

63. 카페 몽파리 안.
화려한 남촌의 카페 안. 조선 상류층 인사들의 한가한 한 때.

신사1  취인소 간일은 어찌 되었나?
신사2  쉽지 않아. 그나마... (속삭이듯 일본어) 막판에 사두었던 군수주식이 버텨  주고 있어.
신사1  (일본어) 역시 희망은 군수주식 뿐인가? 만주 특수 때처럼?
신사  (일본어) 그런 셈이지. 쉽게 끝날 전쟁이 아니네. 대륙특수를 잡아야 해.

뒤편에서 들리는 대화소리를 들으며 왠지 답답해진 진섭, 나비넥타이를 잡아끈다.  
그 때, 한껏 멋을 낸 윤희가, 김승환의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온다.
먼발치에서 그런 윤희를 보는 진섭. 시선을 느낀 윤희도 진섭을 보고...
잠시,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 하지만 곧 서로를 외면한다.

윤희, 승환과 마주 앉아 행복한 여인의 모습을 연기하고, 진섭, 나비넥타이가 더욱 답답하게 느껴져 아예 뜯으려는데, 갑자기 지지직, 지지직... 소리와 함께 흐르던 재즈음악이 중단된다. 웅성웅성하는 사람들. 곧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일본 천황의 항복유시!

천황  (일본어) 나는, 이대로  전쟁을 계속한다면, 마침내는 우리 민족의 멸망을   부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인류 문명도 파멸하고 말 것이다... 이것이,   무조건 항복하도록 하명하기에 이른 이유인 것이다.

자막 뜬다.
1945년 8월 14,일 정오, 일본 천황 무조건 항복 선언.

카페 안 사람들, 우왕좌왕하기 시작하고... 서진섭, 얼빠진 사람처럼 피실, 웃음을 흘린다.

서진섭  ...그 분 말이 맞지 않습니까? 백마 탄 초인이, 결국에는 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만치 구석 소파에 앉아 칵테일 잔을 든 채 서진섭처럼 피식... 웃는 윤희.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윤희, 마치 건배를 하자는 듯 잔을 내민다. 설핏, 눈물이 고인 윤희의 눈동자.

64. 원촌리 전경.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듯, 아침 안개에 쌓인 봉우리.
맑은 햇살 사이, 구름 그늘이 마을 위로 천천히 흐른다.
그리고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가변 한 곳에 하얀 빛을 뿌리는 백마가 있다. 
백마 옆에 앉아 강 너머를 보는 소년 원록.
한 순간, 원록의 얼굴에 베시시... 미소가 뜬다. 

65. 일양의 집.
화단을 가꾸고 있는 일양. 생전 육사가 했던 것처럼, 잡초를 뽑고 있다.
그리고 화단 주위로 아장거리며 노는 다섯 살 옥비.
누군가의 기척, 일양 돌아보면 서진섭이다.

CUT TO
툇마루에 마주한 일양과 진섭.

진섭  처음엔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시던 날을 바로 코앞에 두고  가셨으니 얼마나 아깝습니까,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일양  ...
진섭  헌데 이제 보니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나라가 두 쪽이 났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고, 형이 아우의 목을 매다는 일이 널리게 되었습니다. 김  원봉 선생이 어찌 되셨는지 아십니까? 암살당했습니다. 같은 민족의 손에   당하셨소. (울컥...) 이런 조선 따위에 목숨을 바친 선생님만 아깝게 되었습  니다. 어리석게도 아까운 목숨만...(하는데)
일양  별나게 호들갑 시럽데이.
진섭  ...!

목에 둘렀던 수건을 탈탈 털며 일어난 일양, 다시 화단으로 가 잡초를 뽑는다.
그러다 빨갛게 핀 꽃에 시선 주는 일양, 문득 떠오른 마지막 만남의 한 순간.

(INS. #61)
일양과 육사의 마지막 만남. 일양에게 뭔가를 말하는 육사.

잠시 지난 순간을 느끼던 일양.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듯 손으로 귓가를 잠시 만져본다. 일양의 표정은 슬프면서도 한 편으로는 행복해 보인다.

일양  이게 끝이 아니요. 옥비 아버지는 그리 알고 있었소.
진섭  ...?
일양  (진섭 보며) 정말 모르겠니껴? (끌끌... 절레절레) 시인이란 양반이...

일양, 붉은 꽃에 다가가 꽃향기를 맡는다. 설핏 미소가 뜬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알 듯 모를 듯 어려워하는 눈빛이 된 서진섭.
화단 주위로 색동 고무신을 신은 옥비가 아장거리며 나비를 좇고 있다.
꺄르륵... 웃다가, 아장아장... 걷다가, 그런데 어디선가 들리는 그리운 음성.

육사(E)  옥비야...

다섯 살 옥비, 저기 먼 데, 소리는 나는 곳을 보고, 그 위로, 다그닥다그닥 기운찬 말발굽 소리.

66. 감방 안.
#61 연결. 하얀 빛을 받는 육사의 얼굴이 화면 가득.
육사의 시선이 향하는 곳, 눈부시게 하얀 말이 너른 벌판을 달리고 있다.
빛의 조각 같은 갈기를 흩날리며, 거친 콧김을 내뿜는 백마.
앞 다리를 들어 흐히히힝-- 기운차게 도약한다.
백마를 담은 육사의 눈동자에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이 뜬다.
육사의 얼굴 위로 점점 더 눈부시게 쏟아지는 하얀 빛. 그렇게 천천히 화이트 아웃.
그 위로 육사의 시 <광야>, 육사의 음성과 함께 뜬다.


육사(E)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굉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the end

 
 

 

 

 

 

 

 

 

 

 

 

 

 

 

 

 

 

 

 

 

 

 

 

 

 

 

 

첨부파일 광복절 특집극절정2.hwp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다반향초 | 작성시간 14.11.17 고맙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