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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자미성의 노래] 이선영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3.05.11|조회수782 목록 댓글 0

[자미성의 노래] 이선영

 

 

 

 

 

 

 


#프롤로그 (#74 중에서)

-액자에 김동환에게서 받은 사진을 넣는 한영실의 손.
-접혀진 채로 넣어 김동환의 얼굴만 보인다.
-잠시 말갛게 보는 한영실. 문득, 사진을 다시 꺼낸다.
-접힌 부분을 엄지끝으로 정성껏 편다.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 감정이 북받친다.
-편 사진을 액자에 넣고는 떨리는 손으로 액자를 훑는다. 어느새 젖어있는 눈.
-한영실의 손이 지나가면 오롯이 나타나는, 김동환의 단란한 가족사진.

타이틀 : <자미성의 노래>

S#1 개성집 (낮)

-점심시간. 시끌벅적 요란한 실내. 손님들 꽉 들어차 주문하고 나르고 정신 없다.
-카운터 옆에 선 단아한 한복 차림의 한영실. 걷어올린 소맷부리, 손엔 밀가루
 반죽이 묻어 있다. 목과 어깨 사이에 수화기를 끼고 전화 통화 중.

한영실    아유, 넌 한참 바쁜 때 왠 전화야... 이 사람이 뜬금 없이... 아니 지금
          청심환이 어딨다니? 왜 뭘? 무슨 맘을 단단히 먹어? ....
          얘, 여기 지금 정신 읎다. 놀랄 말이 뭔지, 해 어서.

-그때, 단체로 들어오는 나이 많은 노인 손님들. 한영실에게 인사를 건넨다.

한영실    (와락 반기며) 아유 오셨시니까? 오랜만들이세요.
          (수화기에 대고) 뭐? (손님들을 향해 내실을 가리키며) 저기 방으루...예
          예... (수화기에) 찾았다니, 뭘? 뭐얼? (하다가 갑자기 굳어지며 충격.
          떨리는 음성) 뭐라 했는? 누굴 찾어? (순간, 몸이 축 늘어진다)

-한영실의 어깨에서 떨어지는 수화기, 대롱대롱.
-쓰러질 듯 양손으로 무릎을 짚는 한영실. 고운 치마에 반죽이 범벅된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충격에 휩싸인 한영실의 얼굴에서.

S#2 인천공항 고속도로 - 김정수의 승용차 안 (오후, 다른 날)

-운전하고 있는 김정수. 조수석의 이영희, 걱정스러운 듯 한영실을 돌아보면,
 혼란과 초조 속에 격앙된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한영실.
-이 혼란처럼 아득하게 들려오는 소리.
(한수)    중국 최선교사님이 연락을 하셨어요. 아버질...찾은 것 같습니다.

-훅 숨이 차올라 고개를 반대로 돌리는 한영실.

E  찢어질 듯 요란한 총성

(영실)    (비명같은 절규) 여보-! 어서요!! 어서 오세요!!

S#3 강 나룻터 (밤, 회상)

-저쪽 뭍가로부터 뛰어오고 있는 동환.
-그의 뒤를 쫓아오는 서너 명의 인민군. 공중을 향해 위협사격을 한다.
-총소리에 기겁하는 동환. 사력을 다해 물 속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물 위에선, 공포에 질려 있는 힘껏 노를 저어 도망가는 뱃사공.
-나룻배엔, 떨면서 귀를 막고 몸을 웅크린 십여명의 피난민들.
-간난아기(한수)를 들쳐 업은 채, 노에 매달리며 노젓기를 저지하고 있는 영실.
 제정신이 아니다. 비명처럼 울어대는 아기.

영실      멈춰요, 사람이 오고 있잖아요! 멈춰요, 멈춰!!
          (동환을 돌아보며) 여보-, 어서요! 어서요!!

-순간, 돌부리에 걸려 첨벙 넘어지는 동환.

영실      (미친듯이) 여보! 여보!!

-다시 몸을 일으키는 동환.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절룩거리며 첨벙첨벙 뛰는데.
-어느새 뛰어와 동환의 등에 총을 겨누는 인민군.
-헉, 총부리를 느껴 멈춰서는 동환. 양 옆에도 총을 겨눈 인민군들.

영실      아아악--! 여보--! 여보--!!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는 동환. 붉어진 눈으로 아내 영실을 바라본다.
-영실의 절규가 메아리 치고... 그때 나룻배 곁에서 펑- 터지는 대포.   

S#4 인천공항 내 입국장 앞
          
-턱~, 난간을 움켜쥐는 한영실의 손.
-격정에 싸여 가뿐 숨을 몰아쉬는 한영실. 마음을 다잡으려 호흡을 고른다.
-긴장된 얼굴로 안내판과 출입구를 보는 김정수 부부와 김한수․정진숙 부부.
-YANJI발 여객기가 착륙했음을 알리는 안내판.

영희      피켓이라도 하나 써들고 올 걸 그랬나봐요. 서로 찾기 쉽게.
진숙      어머님이 알아보시겠지. 아무리 50년 넘어 보시는 거라구 해두, 부부끼
          리야 못알아보시겠어? 근데 어머님, 아버님이 키두 훤칠하시구 그렇게
          멋쟁이셨다면서요?

-한영실, 출입구를 지켜보느라 들리지도 않는다.
-멋진 외모의 젠틀한 노신사가 나오자, 긴장하여 주목하는 식구들.
-한영실, 저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러나 한 꼬마가 “할아버지” 하고 부르고, 자신의 가족들에게 다가가는 노신사.
-연이어 서너 명의 노인들이 나오지만 모두 각자의 가족들이 달려와 반기고.
-초조해지는 한영실.
-다시 문이 열리고, 깔끔한 차림의 노신사 하나가 나타난다.
-한영실, 그를 뚫어지게 보며 몸이 떨려오는데.
-한영실의 시야를 가리며 노신사를 반기는 그의 식구들.
-한영실, 실망해서 그들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는데.
-그들이 사라지자, 그 자리엔 김동환. 나름대로 신경 써 입은 양복에 중절모 차림
 이나, 깡마르고 새까만 얼굴에 촌스런 풍모이다. 애타게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한영실,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나 무심히 다른 사람들만을 살피고.
-한영실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는 김동환. 첫눈에 알아봤다. 뚫어져라 보는데.
-다른 사람들을 보느라 여념이 없는 한영실과 식구들. 김동환의 시선을 느끼자
 한영실과 김동환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이영희. 설마? 하는 얼굴들.
-그제서야 김동환을 찬찬히 뜯어보는 한영실.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벗는 김동환. 감정이 북받쳐 울음이 차오르고 있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한영실.

S#5 김정수집 거실 (저녁)

-벽에 걸린 가족사진. 가운데 앉은 한영실과 그 뒤로 김한수․정수 부부, 김한수의
 두 아들(20대), 그리고 지은. 사진 위로, 김동환의 통곡 소리.

(김동환)  (요란벅적) 아이구 우우우..아이구 우우우....

-신도시 전원주택의 잘 꾸며진 실내. 나란히 서서 눈물 찍어대는 김한수․정수 내외.
김동환    (한영실을 끌어안고 있다가 얼굴을 보듬어 보며) 어디 다시 좀 봅시다,
          다시 좀 봐. 우우우...
한영실    (펑펑 울지만 김동환만큼 격하진 않다) 흑흑..북에 계신 줄 알았죠.
          북으루 끌려가시는 걸 봤다는 이가 많았에요. 중국에 계신 줄도 모르   
          구.. 이산가족찾기다 상봉이다, 이날 입때껏 얼마를 찾아헤맸게요...
          진작 좀 찾으시지요... 게서 그렇게 살고 계셨으면 진작 좀 찾으시지요..
김동환    죽은 줄 알았쇠다.. 난 한수엄마 그때 죽을 줄만 알았쇠다... 대포가 터져
          서리 산 사람이 아무도 없다 했소. 기래 닌민군 군의관으로 끌려가면서
          두 한수엄마 죽은 줄 알고, 내 그만 탈출이고 뭐고 다 포기했댔는데...
          기랬댔는데... 살아있었다니.. 살았었다니... 우우...
한수      저-, 절 받으시죠, 아버님.

-김동환이 눈물을 훔치며 고쳐 앉자, 절 올리는 네 사람.

김동환    (흥분해, 절하고 있는 자식들을 끌어 안으며) 우우.. 죽지 않고 살다보
          니 느이들한테 절을 다 받는다. 죽었던 자식들이 살아와 절을 한다...
정수      (엎드린 채로 훅 터지며) 흑-, 아버지...(엉엉)
김동환    (요란하게 몸부림치는) 아구 우우우...아구 우우우...

-서로 부둥켜 안고 엉기고 눈물 바다. 와중에도, 김동환의 요란함은 튄다.

S#6 주방 (시간 경과)

-앞치마 차림의 이영희. 커다란 플라스틱통에서 음식을 덜어내 접시에 담고 있다.
-역시 앞치마 차림으로 신선로에 음식을 담고 있는 정진숙.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
 지는, 잘 다듬어진 매니큐어한 손톱. 손톱에 음식이 묻을새라 손가락을 쭉 편 채
 엉거주춤 젓가락을 쥔 모양새가 얄밉다.

영희      (바삐 일하다 그 모양을 보곤 얄미워) 손톱 다듬으셨나봐요?
진숙      (눈치 보인다) 으응..마사지 받으러 갔다가...낼 모임이 있거든.
          아이, 동서두 도우미 아줌말 좀 쓰지 그래? 힘들지 않아, 혼자?
영희      (능청) 힘들긴요? 어머님두 그 연세에 가겔 다 꾸리시는데 집에서 살림
          하는 사람이 힘들다고 하면 되겠어요?
진숙      (치, 속 보인다)
 
-이때, 허둥지둥 들어오는 한영실.

한영실    아니 아직 신선로도 안내오고 뭐하고 있는 거야, 얘들이?
영희      예, 지금 내가려구요.
한영실    (허둥지둥 신선로에 재료 담으며 꿍덜꿍덜) 원, 찬이며 국이며 가게서
          전부 해날러, 즈이야 그냥 그릇에 담기만 하면 되는걸, 그것도 빨리빨리
          못내 이렇게 뜸을 들이니, 그래? 육순?
진숙      육수 여깄어요, 어머님. (신선로에 육수 붓는다)
한영실    얼른얼른 내와, 얼른얼른. 시간이 멫시야, 벌써? (쟁반에 신선로와 음식
          접시 받쳐들고 허둥지둥 나간다)
영희      (??, 그 뒷모습 보며) 형님, 어머님 저러시는 거 본 적 있던가요?
진숙      (역시 한영실의 뒷모습을 보며)...없지, 아마?

S#7 거실 (약간의 시간 경과)

-커다란 잔칫상. 신선로도 보이는, 성대하게 차린 개성식 상차림이다. 

진숙      (생글생글) 많이 드세요, 아버님? 어머님이 아버님 드리신다구 순개성식
          으루 손수 다 장만하신 거예요.
영희      (어유, 여우...)
김동환    아구 기래, 안그래도 척 보면서 벌써 고향 냄새가 난다 했다.
정수      아버지 개성 음식 제대로 못잡수셨나 보네요?
김동환    (갑자기 정수를 빤히 보곤) 너한테 아버지 소릴 들으니까니 다시금 감개
          가 무량해진다. 느이 형이야 간난쟁이 때 얼굴이라도 보고 갈라졌지마는,
          내 정수 너는 생긴 줄도 몰랐댔는데, (눈물 찔끔) 오늘날 일케 너로부터
          아버지라 불리울 줄은...

-김정수, 눈물 찔끔. 손수건으로 눈물 훔치는 한영실.

김동환    (갑자기 호들갑) 아 이, 호박지 아이오? 아구, 이기 이, (한 입 먹곤)
          아오, 개성서 먹던 그 맛이구만 기래, 응? 아주 딱 옛날 맛 기대로야.
한영실    (얼른 고수김치 접시를 집어 앞에 내놓으며) 이 고수김치도 들어보세요.
          서울서 의대 다니실 적에 이거 없인 진질 못자시겠다구 허셔서, 제가
          때마다 개성서 서울까지 해나르느라 고생을 했댔지 않았시니까?
          (픽) 그게 다 절 불러올릴려는 핑곈 줄 어머님도 진즉부터 아셨댔에요.
김동환    아셨댔소? (웃음) 내 기래서 옛날 생각날 적마다 이 고수김치 생각이
          더 간절했지 않았소? 반백년도 더 돼 이제야 맛보게 되는구만요.
진숙      (물색 없이 툭) 부인 되시는 분한테 해달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왜?
 
-일동, 갑자기 분위기 어색. 순간 굳어지는 한영실의 얼굴.

진숙      (말 잘못했구나) 아니 저기.. 해주실 분이 계신데 왜 그걸 못드시구....
김동환    (분위기 파악 못하고) 어디 남새들이 여기 것과 같아야 말이지. 어쩌다
          비슷한 게 있어서리 해먹어봐도 맛이 영판 아니야. (갑자기 또 오바)
          아호, 기래두 우리집 할마이가 살림 사는 솜씨가 제법이다. 중국 녀자들
          은 자존감이 높아서리 살림은 거꾸로 남자가 산다 해도 틀린 말이 아이
          지. 긴데 우리집 할마이는 유독이 남편을 공대한다 말이다. 찬 짭짤하니
          해서 내놓지, 집안에 티끌 하나 없도록이 쓸고 닦고 윤을 내지, 마을에서
          도 기런 녀자 없다고 모두가 칭찬들을 많이 했다. 으하하하...
일동      (뜨악)
한영실    (무심한 듯 음식만 뒤적인다)
한수      아드님이.. 있으시다구요?
김동환    어 기 기래. 그애 이름도 한수다, 김한수. 내 한수 너를 잃고 얻은 자식
          이라 이름을 길케 붙였다.
한수      (기분이 묘하다)
김동환    형님들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느들 만나면 안부인사 꼭 전해달라 했다.
          (또 왁자지껄 오바) 하, 이 애가 상해에서 무역사무소를 크게 냈는데,
          수완이 얼마나 좋은지 돈을 아주 망태에 글어모은단다. 기덕분에 우리집
          할마이랑 나는 호강타령이나 하면서리 살지 않니? 우하하...
정수      선교사님께 들었습니다. 근데 회사 상호가 어떻게 돼요? 중국 쪽 무역업
          체면 제가 좀 아는데...
김동환    (당황) 으 으응, 기거이.. 여 여게 대한민국하고는 래왕을 하지 않아서리
          너는 잘 모를 거이야. (얼른 말 돌리는) 밑으루 딸이 하나 있는데 말이
          다, 일곱 살 먹은 계집아이가 어찌나 암팡맞은지 즈 할바지랑 애비를
          아주 살살 녹이지 않니. 으하하하... 길구 말이다....
한영실    (우걱우걱 먹기만)

S#8 안방 (시간 경과, 밤)

-고풍스런 전통 가구로 꾸며진, 단아하고 넓은 방. 문갑 위론 창문과 커튼.
-문갑 위에 액자가 놓여져 있다.(사진은 아직 보여주지 않습니다)
-한영실과 마주 앉은 김동환. 눈물콧물 닦아가며 여전히 떠드는 중.
-한영실 딴 생각에 빠져있다.

김동환    기래 내 닌민군으루 끌려갔다간, 중공군을 따라 중국으로 넘어가서리
          지금까지 일케 살고 있지 않갔소? (눈물 훔치고) 서울서 온 선교사가
          포교를 한다 하기에 구경이나 해본다 집회장에 드나든 거인데... 나도 서
          울서 학굘 다녔고, 개성이 고향이오, 아들 이름은 김한순데 6.25 때 죽
          은 아들 이름을 본따 붙였소 했더니, 아 이 선교사 양반이 나를 세게
          쳐다보더이마는, 한영실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묻는 거우다. 흑.. 당신과
          한수가 다니는 예배당 양반인 줄이야 내 어찌 꿈엔들...
          하늘이 돕나 보우다. 죽기 전에 만나보라구 하늘이 돕나보우다. 흑흑..
한영실    (눈 안마주친 채로 대뜸) 좋은 여자예요?
김동환    (??)
한영실    (보며) 애기 엄마 말씀이에요. 좋은 여자냐구요.
김동환    우리 메늘아이 말이오? 기럼요, 여간 곱디요. 이 애가 소학교 선생인데
한영실    (O.L) 아들 엄마요 아들 엄마. 한수엄마... (기어코 내뱉게 되는) 당신
          부인이요. (심기 불편)
김동환    (어색) 아 기 사람.. 기 사람, 좋은 녀자요. 착해요.
한영실    당신한테 잘해요?
김동환    (잠시 보고는) 잘허우다. 아주 잘허오.
한영실    (잘라) 됐에요 그럼. (심정 감추며 일어나 장롱으로 가며) 그럼 된 거예
          요. 늦었네요. 비행기 타고 오시느라 고단허셨을텐데 그만 주무셔야죠.

-장롱 문 열리면, 눈에 확 들어오는 신혼부부용 청홍 원앙금침.

(영희)    아이, 어때요 어머니? 신혼이나 마찬가지시잖아요.

<인써트 - 거실, 낮>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놓인 원앙금침 보고 놀라 입 벌리고 선 한영실.
영희      한참 좋을 때 헤어져 첨 만나시는건데, 신혼이죠, 아녜요?
          (놀리듯) 주무시면서 좋~은 꿈 꾸세요, 어머니? (쿡)
한영실    (빽) 얘! (그러나 싫지 않다)

-정신 차리는 한영실. 떨리는 손으로 원앙금침을 꺼내려는데.

김동환    아니, 아니오. 내 어찌 안방을 차지하겠소. 마루가 여간 넓던데
          내 게서 자믄 그만 좋겠더우다.
한영실    (확- 손이 무안하다. 얼른 원앙금침에서 손 떼며 당황) 이..이불 내드릴
          려구 그래요. (얼른 둘러댄다는 게) 건넌방을 치워놨에요. 그 방 쓰세요.
          (다른 이불을 꺼내려는데)
김동환    (일어서며) 가만, 가만 두오. 내 들고 나갈테니.
한영실    (당황. 이불 확 잡아빼곤 장롱문을 후딱 닫아버린다)
김동환    (??)
한영실    (뻘쭘)

S#9 거실

-방에서 나오는 한영실과 이불 들고 따라나오는 김동환.
-TV 켜놓은 채 소파에서 잠들었던 이영희가 “지은이니?” 하며 퍼뜩 깬다.

영희      (김동환의 손에 들린 이불 보고는) 어머니, (왜- 하려는데)
한영실    (O.L) 아버님방에 보일라 잘 돌아가지?
영희      예??
한영실    보일랄 새로 깔아서 방이 아주 절절~ 끓을 거네요. 절절 끓어요.

-이때, 김정수와 교복 차림의 지은이 현관으로 들어선다.

지은      (발랄) 다녀왔습니다. (하다가 김동환을 보곤 어?)
정수      아직 안주무셨어요?
한영실    (화풀이) 원, 그 과외는 하루쯤 빼먹으면 무슨 큰일이 난다니? 기를
          쓰고 그렇게 꼭 가야겠어, 오늘 같은 날?
영희      (벙-) 교수님이 독창회 때문에 다음 주 레슨을 못하신대나봐요. 그래서
          오늘 한꺼번에 몰아서 하느라구, 정말 어쩔 수 없이...(얼른) 지은이
          모해, 할아버지께 인사 드리지 않구?
지은      (눈을 뗄 수가 없다. 시선은 그대로, 허리만 숙여) 안..녕하세요.
김동환    (인사 끝나기도 전에 후다닥 달려와 지은의 손을 덥썩) 아호 기래, 니가
          그 음악공부 한다는 지은이로구나, 응?
지은      (놀라 멀겋게 보고만 섰다)
영희      (정신 차리라고 지은을 툭 치며) 예, 아버님. 성악 전공하려구 준비하고
          있어요.
한영실    (신경질) 뭘 그렇게 멀거니 섰는? 할아버지 첨 뵙는데 얼른 절부터 올
          려야할 거 아니니?
지은      (벙-해서 이영희를 돌아본다. 할머니 왜 저러시냐는 표정)
김동환    (이뻐 죽겠다) 아니, 일 없다, 일 없어.  지은아, 절은 일 없고, 할바지한
          테 노래 한 곡조 들려줘 보라. 음악 공부한다 소리 듣구 이 할바지가 벌
          써부터 니 목청이 듣고 싶었댔어.
지은      네??
 
-이때, TV에서 애국가가 시작된다.
-깜짝 놀라 TV로 고개 돌리는 김동환. 가슴이 뭉클해진다. 주체할 수 없는 벅찬 감
 격. 김동환, TV 소리에 빨려들어간 듯 보더니 갑자기 가슴에 손을 척 얹고는 애국
 가를 따라부르기 시작한다.
-식구들, 벙-.
-노쇠했으나 제법 우렁찬 테너 음성. 김동환의 두 눈이 벌겋게 젖어온다.
 “무~우궁화 사~암천리 화려가앙산~ 대~~한사람 대~하안으로...”

S#10 안방 (시간경과)

-잠자리에 든 한영실. 상념 가득한 얼굴.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인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문 쪽을 뚫어지게 응시. 다시 누우려는데 문갑 위의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액자를 집어 보는 한영실.
-젊은 시절 동환의 낡은 흑백사진이다. 연미복에 기름 발라 빗어 넘긴 머리, 귀공
 자풍의 잘생긴 얼굴.. 굉장한 멋쟁이다.
-뚫어지게 보는 한영실. 액자를 문갑 서랍 안에 넣는다. 닫히는 서랍에서.

(춘길)    재에~~파쇼! 재에~~파쇼!

S#11 개성 변두리 마을 (오후, 과거 회상)

-자막: 1948년 여름. 개성
-실개천이 굽이굽이한, 변두리 마을의 초입.

(아이들)  똥장수래요~~ 똥장수래요~~ 춘길이는~~ 똥장수래요~~.

-똥장군을 지고 마을로 들어서는 춘길. 찢어지고 더러운 옷에 빡빡 깎은 머리.
-그 뒤로, 합창하며 따라오는 너댓의 아이들.
-익숙한 듯, 신경 쓰지 않는 춘길. 굶주린 얼굴이다.
-집 앞. 안주인이 장독을 닦고 있는 게 보인다.

춘길      재에~~파쇼! 아주머니, 재 없시니까? 통에 삼전 드려요.

-없다고 손 내젓는 안주인.
-“야, 똥길아 똥길아” 하며 춘길에게 잔돌맹이를 던지는 아이들. 킬킬 신이 났다.
-팔로 얼굴을 감싸는 춘길. 익숙한 몸짓이다.

(영실)    뭐하는 짓들이야!
-아이들과 춘길 놀라서 보면, 초라한 차림이나 단아한 얼굴이 해사한 영실.

영실      (무섭게 단호한) 이게 무슨 못된 짓들이니? 늬들, 집이 어디야?
          앞장 서라. 내 늬들 부모님 앞에 가서 어째 자녀들 버릇을 이렇게 못되
          게 가르치셨냐고 따져 물을테다. 앞장 서!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아이들.
-그때, 아이들을 헤치며 나타나는 삐까뻔쩍 자동차.
-아이들, 도망가면서도 우와- 신기해 구경이 나는데, 영실의 고함에 다시 후다닥.

영실      (아이들 뒤통수에 대고) 한번만 더 춘길이 놀려라! 그땐 늬들 모두 똥통
          에 빠뜨려줄 줄 알아!!

-이 소리에, 자동차 뒷좌석의 동환이 흠칫 뒤돌아보는 모습이 차창 너머로 보인다.
-춘길, 영실과 눈이 마주치자 미안해 눈을 내리깐다.

영실      (엄한) 가자. 오늘까지 빠지면 넌 퇴교야.
춘길      (버티고 섰다)
영실      동생들 걱정은 마. 밥 잔뜩 먹어 개구리배 해가지구 지금 쿨쿨 잠들어
          있으니까. (똥장군을 들어 매곤, 먼저 성큼성큼 걷는다)
춘길      (어어?) 주세요, 선생님. 옷 버려요, 주세요. 주세요....

-붉은 석양. 실개천을 따라 늘어지는 길쭘한 두 개의 그림자.

S#12 ‘개풍 국문강습소’ 문패가 보이는 허름한 강습소 전경 (저녁)

E  “가갸거겨..” 합창하는 아이들 소리.

S#13 강습소 교실 (동)

-흑판에 가갸거겨고교구규 등이 씌어있고, 영실 아이들과 함께 읊고 있다.
-누런 콧물이 주렁주렁한, 나이가 제각각인 아이들 바글바글. 그 중에 춘길.

S#14 교실 (다른 날, 저녁)

-일렬로 늘어선 아이들. 손바닥만한 주머니를 하나씩 들고 섰다.
-차례로 와 주머니를 벌리면, 포대에서 하얀 가루우유를 한컵씩 퍼담아 주는 영실.
-받자마자 손가락으로 찍어 먹고, 입에 툭 털어넣고, 입가가 온통 하얀 아이들.
-춘길 차례. 등 뒤로 감췄던 주머니를 꺼내 벌리며, 푹 고갤 수그린다.
-와하하 터지는 아이들의 폭소. 남들의 서너 배는 더 큰 주머니다.
-흠칫 동작이 멈춰지는 영실. 우스꽝스럽게 커다란 주머니, 죄인처럼 고갤 못드는
 춘길, 그 모습을 보며 발갛게 눈가가 젖어온다. 그러나 애써 모른 척, 똑같이 한
 컵만 부어주고.
-춘길, 실망하여 돌아서는데, 뒷순서 아이가 우유 받은 주머니를 풀썩 놓친다.
-바닥에 뽀얀 가루우유가 쏟아져 내리고, 순간 달려들어 정신 없이 자신의 주머니
 에 퍼담는 춘길. 그러자 애들 하나둘씩 달려들고, 놓친 아인 ‘으앙~, 내 우유,
 내 우유’ 하며 울어대고, 난장판.

S#15 강습소 앞 (약간의 시간경과)

-동환의 자동차가 와 정차한다. 내리는 동환. 강습소를 둘러본다.

S#16 교실 (동)

-모두 돌아가고, 춘길에게 회초리를 치고 있는 영실.

영실      (흥분) 니가! 거지야? 거지야? 몇 번 말해야 알아! 부끄러움을 몰라선!
          사람이 안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니! 몇 번을!
춘길      (아야 아야..아파 죽는다)

-회초리가 부러진다.

영실      (갑자기 홱 돌아선다. 잠시... 침착해진) 그만 가봐. 동생들 기다린다.
춘길      (엉금엉금 나서는데)
영실      (돌아선 채로) 교탁 안에 감자 찐 거 있다. 가서 나눠 먹어.

-춘길,  순간 미안해지지만, 얼른 교탁 안에 손 넣어 보자기 꺼내든다. 뛰어나가려
 는데 누군가의(동환) 허리께에 부딪힌다. 힐금 올려다보곤 그대로 뛰어가는 춘길.
-카메라 영실의 앞으로 가면,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는 얼굴.

(동환)    (조심스런) 저.. 실례합니다.

-영실, 깜짝 놀라 얼른 눈물 훔치고 돌아보면,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 하얀 얼굴,
 귀족 같은 용모의 동환. 모든 걸 봐버려 미안하고 멋쩍은 표정이다.
S#17 강습소 앞 (동)

-화난 얼굴로 교실에서 성큼성큼 걸어나오는 영실. 그 뒤로 동환이 따라나오고.

동환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후원금을 안받겠다니요?
영실      (본 척도 안한다) 그렇게 하시려거든 그만 두시라구요. 매달, 제 날짜
          에, 빠짐 없이 보내시기루 약속해놓구, 두 달만에야 나타나 미안하다
          착오가 있었다구요? 그런 돈, 필요없어요, 안받습니다.
동환      그건 제가 설명을 드렸잖습니까. 아버님이 개성 비우신 사이에 일 보는
          사람들이 실수로
영실      (O.L, 폭발) 굶기를 먹기보다 많이 하는 애들이에요. 종일 일해 번 돈으
          론 식구들 거둬먹이구, 지들은 여기 와 배급받는 걸루 하루 한 끼를 때
          우는 애들이라구요. 매일 줄 꺼 하루 건너 주구, 하루 건너 주던 게
          사흘에 한번, 닷새에 한번!  다음부턴 매일 주마, 다음 번엔 쌀이다!
          실수라구요? 댁에 그 실수 덕분에 저는 매일 거짓말쟁이가 됐구, 우리
          애들은 배를 곯았군요. 가세요. 차라리 다른 후원자를 찾아보겠어요.
          해서는 안될 실수를, 절대로 하지 않는 후원자가 어딘가엔 있겠죠.
동환      (벙-. 영실의 비장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싸늘히 가버리는, 영실의 깐깐한 뒷모습.

S#18 교실 (다른 날, 저녁)

-눈 동그래져서 입 벌리고 보는 아이들.
-서너 명의 일꾼들이 쌀가마를 교실에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다.
-낡고 작은 흑판을 떼고, 대형 새 흑판을 걸고 있는 두 명의 일꾼들.

영실      (동환에게 화 내는)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제가 분명히 필요없
동환      (O.L) 여러분,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후원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착
          오가 생겨서, 여러분들께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가슴 깊이 사죄드립니
          다. 차후론 이런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을 맹세합니다. (아이들을 애정 어
          린 눈길로 한 명씩 두루 보며)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여러분...

-그때, 일꾼 하나가 미제 초컬릿을 박스 채 들고 들어오고, 동환의 ‘여러분’ 소리가
 떨어짐과 동시에 아이들 ‘우와~~’ 하며 앞으로 몰려나온다.
-어이 없어, 보는 영실.
-‘좀 봐주시죠?’ 하는 얼굴로 영실을 향해 슬몃 웃는 동환.
S#19 교실 (다른 날, 저녁)

-아이들 또 죽 일렬종대 해있고, 청진기로 아이들을 진찰하고 있는 동환.
 사람 좋아보이는 환한 미소 함빡.
-동환을 물끄러미 훔쳐보고 선 영실. 동환과 눈 마주치자 얼른 고개 홱.
 그러나 픽 터지는 미소.
          
S#20 개성역 (겨울, 낮)

-개찰구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실. 개찰구 위론, ‘개성역’이란 글씨.
-숨 넘어가게 뛰어나오는 동환. 서울대 교복 차림이다.
-두 사람, 서로 마주보곤 반가움에 빙긋빙긋 웃는다.

영실      반 년만이네요, 김동환 학생.

-동환, 갑자기 덥썩 영실의 손을 잡는다. 놀라 눈 동그래지는 영실.
-동환, 누가 뭐라거나 말거나, 잡은 손 꼭 쥐고 달린다.
-문 밖을 향해 뛰어나가는 두 사람.

S#21 대학 캠퍼스 (봄, 낮)

-건물 안에서 나타나는 동환과 영실. 흰 한복에 하얀 베일, 동환은 양복 정장.
-박수치고 환호하는 인파들. 교복 차림의 친구들과 멋진 양장차림의 하객들. 즐비
 한 고급 자동차들. 종이가루 뿌리며 폴짝폴짝 뛰고 난리난 춘길과 강습소 아이들.
-행복하게 웃는 동환과 영실.

S#22 교실 (저녁)

-모든 게 새로 꾸며진 말끔한 실내. 영실, 흑판에 쓰인 글씨를 지우고 있다.

(동환)    수업 끝나셨습니까, 선생님?

-영실, 놀라 돌아보면, 교복 차림의 동환이 빙긋이 웃으며 서있다.

영실      (와락 반갑다) 어떻게 오셨어요? 시험 준비 때문에 이 달엔 못오신다구
          
-O.L로, 영실을 와락 부둥켜안는 동환. 굶주린 듯, 뜨거운 키스를 퍼붓는다.
-영실, 놀라지만 이내 동환의 팔을 잡는데.
-영실의 두 팔이 꼬옥 끌어안아오고 있는 동환의 등에서.  (F.O)

S#23 F.I 하면, 제법 큰 규모의 식당 전경. ‘개성집’이란 간판이 보인다. (낮)

S#24 개성집 안

-눈 휘둥그레한 김동환.
-손님들로 가득찬 식당 안. 종업원들, 정신 없이 뛰고 나르고 분주하다.

김동환    식당을 한다하기에 고만고만한 밥집만 생각했지, 이건 숫제 공장이
          아이오?
한영실    한순 들쳐 업었지, 배는 불러오지, 도무지 먹고 살 길이 막막허잖겠에
          요? 먹는 장살 허믄 자식들 배는 안곯리겠다 싶어 장터에 솥단지를
          내건 게 벌써 50년이 됐네요.
김동환    (들리지도 않는다) 아오, 손님들이 저 모두 멫 명이오? 국밥 한 그릇씩
          만 팔아도 하루에 그 벌이가 얼마가 되는 게요? (아오..)
한영실    (?) 말죽거리에다 츠음 가겔 얻었는데 불이 나서 덜컥 들어먹었댔에요.
          그때 애들 그만 죽이는 줄 알지 않았시니까.
김동환    아호, 걱정이 없갔소. 사는 데 아무런 걱정이 없갔쇠다.(거의 무아지경)
한영실    (......)

S#25 몽타쥬

[백화점]
-남성복 매장. 점퍼며 셔츠며 고르고 걸쳐보고 하는 김동환. 옷에 붙은 가격표를
 보더니 입을 떡 벌리고 놀란다.
-이것도 입어봐라 저것도 입어봐라 정신 없이 들이미는 한영실.
-구두매장. 구두 신어보고 있는 김동환. 여러 개의 쇼핑백을 들고 선 이영희.
 들떠 있는 한영실이 마냥 낯설다.

[한강유람선]
-유람선 관광 중인 김동환과 한영실. 손끝으로 강너머를 가리키기도 하며 얘기.
 
[아쿠아리움]
-수족관 벽에 얼굴을 딱 붙인 채 아이처럼 신기해하며 들여다보고 선 김동환.
-사람들 그런 김동환을 힐끔거리고, 한영실 민망해 김동환을 슬쩍 잡아끄는데
 붙어버린 것처럼 꿈쩍도 않는 김동환. 한영실, 남 보기 창피하다.
 
S#26 김한수 빌라 거실 (밤)

-사치가 느껴지는 넓고 호화로운 거실. 차 마시는 중.

김동환    오 기래? 애비 병원이 길케 유명하다 말이니?
진숙      (좀 뻐기는) 그럼요 아버님. 택시 기사한테 서초동 김한수 피부과 가자
          고 하면 다 알아서 갈 정돈데요?
김동환    아구, 참으로 대단타, 대단해. 정순 대한민국에서 제일로 쳐준다는 큰 회
          사에 다닌다 하고, 한수 너는 애비가 못다한 의학도의 길을 걸어 길케도
          이름 높은 의사가 됐다 하니 더 바랄 거이 옶갔다, 부족할 게 옶어.
          기래, 애들은 모다 미국에 있다구?
한수      예. 큰놈은 가업을 잇는 건지 거기 의대에 다니구 있구, 작은놈은
          MBA라구 경영학 공부 중입니다.
한영실    근데 인석들이 어째 전화 한 통이 없는? 할아버지 오신 지가 벌써 메칠
          짼데?
진숙      둘 다 중요한 시험 앞두고 있잖아요, 어머님. 바빠서 아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에요.
한영실    (진숙을 빤히 보더니) 얘들, 할아버지 찾은 줄 알고 있는 거 맞는?
          시험치는 데 방해된다구 설마...?
진숙      (엄-, 당황)
한수      (얼른 수습) 저 안그래두, 할아버님께 전화로나마 인사 올린다구 메일
          이 왔습니다. 아마 내일은 전활 할거예요, 아버님.
한영실    (흠-, 알만하다는 눈초리로 진숙을 본다)
진숙      (얼른 말 돌린다는 게, 김동환의 낡은 손목시계가 눈에 띈다) 엄-, 우리
          아버님 시계 하나 새로 해드려야겠다? (들여다보며 픽) 이게 언제적 꺼
          에요? 아이, 아드님 사업이 그렇게 잘 되신다면서, 웬만하면 좀 바꾸시
          지 그러셨어요?
김동환    (저도 모르게 손으로 시곌 가리며) 으 으응, 기건 니 몰라 하는 소리다.
          안그래두 거게선 한국으로 돈을 벌러간다, 시집을 간다 해서리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고 빚더밀 쓰고 애옥살이들을 하는데, 우리만 갑작부자가
          돼서리 마을에서들 시기가 많다. 기래서 나도 세게 조심을 하는 편이야.
          느두 일케 대궐같이 해놓고 산다고 방심하지 말고 돈 단속을 잘 하라.
          어찌 아니? 낼이라두 애비가 죽을 병에 걸려 고만 들어눌지?
          사람의 앞날은 모르는 거이야.
한수․진숙 (뜨악--)
한영실    (자식들 눈치 보이는) 무슨.. 그런 말씀을....
진숙      (눈치껏 생글생글) 저기,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버님? 제가 아버님 어머
          님 주무시라구 안방에 이부자릴 봐놨어요.
한영실    (차를 마시고 있지만 동환의 반응에 신경이 다 가있다)
김동환    아오 아니다, 안방은 무슨. 나는 여게서 자도 일 없으니, 어머니나 방을
          내드리라.
진숙      예? 저기, 그럼...?
한영실    (팩) 방은 둬 뭐에 쓸래? 아버진 민석이방, 난 민재방, 그럼 되잖는, 그
          러면! 원, 방이 없어 못잘까봐??
한수․진숙 (서로 보며, ???)
김동환    (분위기 파악 못하고 차 후르륵 마셔가며, 집안 두리번거리며 감탄
          연발) 아호, 좋다..좋아!

S#27 김한수 아들방1 (동 밤)

-침대 밑에 이부자리가 깔려 있다. 왼쪽을 향해 모로 누워 담배연기 피워올리고
 있는 김동환. 복잡한 얼굴.

S#28 김한수 아들방2 (동 밤)

-김동환과 똑같은 방향과 포즈로, 침대 밑에 누운 한영실. 착잡한 얼굴.
 한숨 푹 내쉬며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화면 분할.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돌아눕는 김동환. 

S#29 애기봉 망배단 (낮)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북녘 땅.

(김동환)  (통곡) 어머니~~! 우우우... 아버지~~!

-망배단에 차려진 제사상. 김동환이 북녘땅을 바라보며 울부짖고 있다.
-그 옆엔, 수건에 얼굴을 씻어가며 흑흑 울고 있는 한영실.
-흐느껴 우는 김정수와 처연한 얼굴의 김한수.
-진심으로 울고 있는 이영희완 달리 남의 일 보듯 멀거니 선 정진숙.

김동환    어머니, 한수 에미가 살아있슴다. 아버지, 아버지 장손 김한수를 찾았음
          다. 고향땅 못떠나신다고, 즈이만 길케 떠나보내시더니, 기 땅에 살아계
          심까 고만 먼 길 가셨댔슴까.. 대답 좀 해보십시오, 우우우, 대답 좀 해
          주시오, 우우우.. 어머니, 보고 싶슴다... 어머니!! ...아구, 우우우.....

S#30 김정수집 뜰 (밤)

-의자에 앉아 담배 피우고 있는 김동환. 우울한 얼굴이다.

(한영실)  아직 안주무셨시니까?
김동환    (돌아다보곤) 으응, 잠도 안오고 답답해서리... 어째 나오?
한영실    저두 통 잠이 안오네요, 현관문이 열려있길래... (옆 의자에 앉는다)
김동환    (담배만 후....)
한영실    (.....)
김동환    돌아가셨갔지요? 돌아가셨을끼요. 개성이 니북땅이 되고서는 지주란 지
          주들은 모다 숙청을 당했다고 들었소. 살아계실 리가 없지, 연세가 벌써
          멫이신데...
한영실    (그 모습을 말갛게 보는)
김동환    아버지가 한수엄말 참 고와하셨는데 말이오. 독립운동가의 따님을 며느
          리로 맞이하셨다고 보는 사람마다 자랑을 많이 하셨댔소.
한영실    이쁨 많이 받았죠. 어머님 저 한수 가진 거 아시고는 손 끝에 물기 한
          번을 못대게 허셨에요. (한숨) 가게서 편수 빚을 적마다 아버님 생각이
          나요. 편수에 국물을 자박자박허게 해서 드리면 그걸 어찌나 맛나게
          자시는지, 꼭 씹지도 않구 후루륵 삼키시는 것처럼 보였었에요.
김동환    (담배 후...) 잘못했소, 억지루라두 모시고 떠나는 거인데. 내가 그만
          죄인이우다. 내 금방 돌아가게 될 줄 알았는데... 일케 영 갈라지게 될
          줄 몰랐댔는데...
한영실    난리 통입니다. 모시고 왔다한들 무사허셨다는 보장을 어떻게 할거며,
          지금까지 게서 장수하고 계신 줄 또 모르잖아요?
          사람이 허는 일이 아닌 걸요. 사람이 어쩔 수 있는 일 같으면 서로가
          버젓이 살아있으면서도 그 오랜 세월을 못찾고 보내버렸겠에요?
          생떼 같은 자식들을 여기 두구, 그 먼 남의 땅에서 다른 이의 아버지루,
          (잠시..) 남편으루.. 살아가겠느냔 말씀이에요.
김동환    (아프게 담배 후...)..... 아까 게선 송악산 언저리가 보이던데... 내 이제
          돌아가면 언제 또 고향땅을 볼 수 있을지... 보름이 참 빨리 가우다.
한영실    (얼굴 어두워진다)
김동환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다간 쿨럭쿨럭 연신 기침) 
         
 
S#31 현관 앞 (다른 날, 오전)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김동환. 뒤따라 한영실, 이영희.

한영실    아니 글쎄, 지리도 모르는 양반이 혼자 어딜 가신다고 그러세요?
김동환    중국서 여게 일하러 온 친구가 있다 하질 않소. 택시만 타면 쉬 찾아갈
          수 있는 데우다.
영희      아버님, 그럼 제가 차로 모셔다 드릴게요. 타고 가세요.
한영실    그럭허세요. 아니, (서둘러 들어가려 하며) 아니 잠깐 계세요. 내 따라
          나설테니.
김동환    아니, 일 없소. 혼자 갈 수 있다는데. (급히 돌아서며) 내 그럼 다녀오
          우다?
한영실    아니 저... (???)

-바삐 가는 김동환의 뒷모습 너머, 오전의 거리 풍경.

S#32 거리 (동 오후)

-아스팔트 위로 저물어가는 석양.
-저쪽 벤치에 김동환이 털썩 주저앉아 있다. 카메라 다가가면, 땀에 절고 지친 얼
 굴. 손에 든 사진이 얼핏 보인다. (사진의 내용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넋이 나간 듯한 김동환의 모습에 행인들 가끔씩 힐끔거리고.
-김동환, 행인들의 시선 느껴 정신차리면, 벤치 옆에 꽃노점. 꽃통에 하얀 소국.

S#33 안방 (동 저녁)

-하얀 소국 한 다발이 내밀어진다.

한영실    (??) 
김동환    유달리 구절초를 좋아하지 않았댔소? 비슷해 보이길래...
          (회한 섞인 미소) 내 구절초를 한아름 꺾어다 주면 한수엄만 그걸 방이
          며 마루며 소담하게 꽂아놓고는, 꽃잎 곱게 얹어서리 부꾸밀 부쳐주곤
          했댔는데...
한영실    (웃음) 절더러 구절초꽃을 닮았다고 허셨었죠.
김동환    (안타깝게 보며)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그때의 그 꽃만 같으오.
한영실    (얼굴 붉어지는. 열아홉 새색시처럼 부끄럽다)

S#34 거실 (동 밤)

-쟁반 들고 건넌방으로 가는 한영실. 쟁반 위엔, 가장자리에 소국 꽃잎을 돌려가며
 곱게 부쳐낸 부꾸미.
-한영실, 가다보니 거실의 무선전화기 충전기에 수화기가 없는 것이 눈에 띈다.
 무심히 보곤, 방으로 가 문 앞에서 머리며 매무새를 만진다. 노크 하려는데.

(김동환)  (잘 안들려 소리치는) 기래 우리집 식구들은 잘 있소? 별 일 없어요?...
          기렇구만요. 여러 가지루 신세가 많우다. 내 가서 꼭 보답을 할터이니
          기때까지 잘 좀 부탁허우, 예? 길구, 우리집 사람한테 내, 보고 싶다
          하더라구, 내 금방 간다구, 꼭 좀 전해주기요?

-확 얼어버리는 한영실. 절로 파르르해지는 입가.

S#35 현관 (아침)

-등교 차림의 지은과 데리고 나서는 이영희. 흐뭇한 얼굴로 배웅하며 선 김동환.

지은      (허둥지둥)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서는데)
(한영실)  얘, 지은아!
지은      (돌아보면)
한영실    (달려와 작은 쇼핑백 내민다)
지은      뭔데요, 할머니?
한영실    학교 가 먹어. 부꾸미야.
김동환    (??)
영희      어머니, 그건
한영실    (O.L로, 이영희와 지은을 떠밀어내며) 아유 얘 늦겠네. 얼른 가, 얼른.
          (밖으로 소리치는) 가 애들이랑 맛있~~게 먹어라아? 실~~컷 먹어-!!
           
S#36 개성집 (낮)

-내실에서 두세 명의 종업원 아줌마들과 만두 빚고 있는 한영실.

아줌마1    서방님 가실 때까진 안나온다시더니 왠일이세요, 서방님은 어쩌구?
한영실     (조용히 만두나) 왜? 나 없을 때 농땡이 좀 칠려구 그랬는데 섭섭해?
아줌마1    하여간 눈치 못 당한다니깐... (장난스런) 서방님 품고 주무시니 어떠세
           요? 좋으세요? (낄낄)
한영실     (픽) 그래 좋다. 생과부 50년 설움이 봄눈 녹듯 허드라. 됐는?
아줌마들   (까르르)

S#37 가리봉 조선족 거리 (낮)

-손에 사진을 든 채 여기저기 헤매고 있는 김동환.
-한자로 가득 채워진 식당 문을 빼꼼 열어 뭔가 물어보곤 힘없이 돌아선다.
-일상이 고단해보이는, 조선족인 듯한 행인들. 그들에게 사진 뵈주며 물어보는
 김동환. 모두가 고개를 저을 뿐이다. 실망.
-김동환, ‘국제전화 선불카드’라고 써붙여진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국으로
 전화 거는 집‘이란 간판.

S#38 공단 일각 (다른 날, 낮)

-영세 공장 안에서 나오는 김동환. 입국 때 입고 왔던 그 옷차림으로, 손엔 백화점
 쇼핑백(#25의) 여러 개를 들고 있다. 실망 가득한 얼굴.
-돌아서 가려는데, 공장마다 열린 문으로 작업실 안 풍경이 보인다.
-먼지 자욱한 지저분한 틈에서 무표정하게 인형을 봉제하고 가죽을 자르고 하는
 조선족풍의 여인들과 동남아계 노동자들.
-쓰게 보고 선 김동환.

S#39 집 거실 (동 저녁)

-현관에 들어서는 한영실. 맞이하는 이영희.

영희      이제 오세요?
한영실    그래. (둘러보곤) 아버진?
영희      수퍼에 잠깐 갔다와보니까 나가시고 안계시던데요?
한영실    또오? 아니, 어디서 무슨 긴한 일을 보시길래 메칠 째 혼자 외출이시라
          니, 으응? 
영희      (한영실의 눈치를 살피며) 중국 가족들 선물이라도 사러 다니시는 거 아
          닐까요? 아버님이 너~무 가정적이시구, 식구들한테 애정이 남다르신 것
          같던데...
한영실    (심기 불편)

-전화벨 울리고, 달려가 받는 이영희.

영희      여보세요? ... 네 맞는데, 어디시죠? ... 네? 백화점이요?
한영실    (???)

S#40 인테리어 잘된 세련된 건물 전경, ‘김한수 피부과’ 간판 (동 저녁)

(간호사)  (무시하는, 고압적인 어투의) 진료시간 끝났는데요?

S#41 피부과 안

-고상하고 고급스런 실내. 김동환이 실내를 둘러보고 있다.
-그 촌스러움에 무시하듯 보고 선 간호사.

간호사    진료 끝났다니까요?
김동환    저.. 여게가..(하는데)

-원장실 문이 열리고, 재킷을 입으며 나오는 김한수.

한수      아니 아버님, 여길 어떻게..?
김동환    (어색한 미소)
 
S#42 보석상 앞 (동 저녁)

-쇼윈도 안쪽으로, 손목시계를 고르고 있는 김동환과 김한수의 모습이 보인다.
-누런 금시계만 골라들며 입이 함빡 벌어진 김동환. 금시계 차고, 금반지, 금목걸이
 도 해보고, 게걸스럽게 보인다.
-이것저것 권하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의 김한수.

S#43 김동환 방 (동 밤)

-문 열고 들어오는 김동환과 한영실.

김동환    (왁자지껄) 서울 서울 하길래 내 서울엔 전부 한수․정수 집처럼 으리으
          리한 집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가보니 그것도 아니 (하는데, 방 한
          가운데 놓인 백화점 쇼핑백이 보인다. 얼굴 굳어지고)
한영실    (눈 안마주친 채 겉옷 받아들어 옷걸이에 건다) 즌화 왔대요, 놓고 갔으
          니 찾아가라구요.
김동환    기..길쿠만요.. 아구 내 이..
한영실    (O.L로, 여전히 안본 채) 말씀을 허시지 그러셨에요?
김동환    (놀란다)
한영실    살 때부터 떨떠름하시다 싶었에요. 말씀을 허셨으면 바꿔다 드렸을 걸,
          그걸 뭘 가서 물러달라고 허세요? 그렇게도 맘에 안드시니까? 
김동환    (안심) 아무래도 내 취미엔 맞지가 않아서리... 입지도 않을 거 가져가
          썩히면 뭐하겠소?
한영실    취미 많~이 변허셨네요. 예전엔 뭐든 제가 해드리는대로 입는 걸 좋아
          허셨었는데. (쓴웃음) 하긴 세월이 얼마에요? 겨우 일년이나 되게 살아
          보군 수십 년을 같이 산 사람 눈썰밀 따라가려구 했으니...
          낼 지은에미랑 가 바꿔오세요. 일러둘게요.
김동환    아니 아니오, 일 없소. 내 잘 입으리다. 맘에 안들어서가 아니라 
한영실    (횅 나간다)
김동환    (.....)

(영희)    틀림 없다니까요?

S#44 김정수 방 (동 밤)

영희      형편이 어려우신 거에요. 아님 왜 아무도 모르게 환불을 하러 가셨겠어
          요? 카드로 결제한 거라 현금으론 환불이 안된다고 해두, 맘에 안들어
          못입겠다구 돈으로 내달라 끝까지 우기시더래잖아요? 솔직히 맘에 안드
          실 게 뭐있어요? 그게 얼마나 비싼 것들인데...
정수      맘에 안드실 수도 있지. 비싼 건 무조건 맘에 들어야 하나? 생각하는
          게 어떻게..? (으이으이)
영희      글쎄 내 짐작이 맞다니까요. (조심스럽다) 아버님 얼굴을 봐요. 어디 돈
          잘 버는 아들 덕에 호강하시는 얼굴이세요? 아버님 행색이며 얼마나 이
          상했으면 백화점 직원이 카드 결제한 사람한테 확인전활 해보겠다고
          했다잖아요. 그랬더니, 아니 됐다구, 돈으로 못준다면 관두라고 하시면서
          급히 가시더래요. 그러다 쇼핑백 하날 놓고 오신 거구요. (퍼뜩 생각나)
          어-, 첨부터 돈 바라고 오신 거 아녜요?
정수      뭐야?
영희      만에 하나 아버님이 여기 그냥 눌러앉겠다구 하시면 이거 일 복잡해지는
          거에요. 거기두 엄연히 아버님 부인이구 자식인데 딱 잘라 모른 척 하시
          겠어요? 끊임없이 손 벌리구 골치 아프게 하면 그땐 그거 어떡해요?
          그리구 뭣보다두..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아버님 보다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시면.. 그건 더 문제죠.
정수      이 사람이 정말?
영희      (움칫 눈치 보여) 어우 당신두 좀 솔직해 봐요. 당신 퇴직 그거 얼마 안
          남았어요? 지은이 유학두 보내야되구, 당신두 무슨 생각이 있었을 거
          아녜요. 어우, 장남집을 놔두구 왜 우리가 여지껏 어머님을 모셨는데?
          부잣집 무남독녀루 자라 가뜩이나 제 몸․제 식구 밖에 모르는 형님, 누
          구 덕에 지금껏 팔자 편한 맏며느리 노릇을 했는데요? 큰집이야 일찌감
          치 친정 재산 물려받아 아쉬운 게 없으니까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죠.
          우린 그럼 안되지. 보통 문제 아녜요, 이거?
정수      (딴엔 그렇다. 곰곰...)

S#45 김동환 방 (아침)

-마주앉은 김동환에게 흰 돈봉투 내미는 김정수.

김동환    (??)
정수      많진 않아요. 용채 쓰세요. 귀국하실 날 얼마 안남아 이것저것 쓰실
          데가 많으실텐데...            
김동환    (겸연쩍지만 눈이 번쩍 뜨인다) 어째 이런 걸 다... 나두 섭섭잖게 갖고
          있는데... 아오, 이기 이..(살짝 돌아앉으며 봉투 입구를 후- 불어선 얼마
          나 들었나 들여다본다)
정수      (보기 민망하다)

S#46 거실 (동 오전)

-대형 TV 앞에 바짝 다가앉은 김동환. 리모컨이 신기한 듯 어정쩡하게 눌러가며
 다양한 채널에 흠뻑 빠져있다. 일본․홍콩 위성방송, 홈쇼핑, CNN.. 별세계 같다.
-연이어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거실에 가득. 쿨럭쿨럭 연신 기침 해댄다.
-지은의 방 문이 열리고 지은의 가방을 든 이영희와 지은이 나온다. 얼굴 찌푸리는
 지은. 켁켁 기침 해댄다. 깜짝 놀라 얼른 지은의 입을 손으로 막는 이영희. 한 손
 으론 지은의 얼굴 앞을 부쳐대며 후다닥 지은을 현관으로 밀고 나간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는 김동환.

김동환    (얼굴 환해지며) 어-, 지은이 학교 가(하는데)

-문 쾅 닫히며 그대로 가버리는 지은과 이영희. 좀 벙-해지는 김동환.
-주방에서 나오다 이 광경을 목격하는 한영실. 아니 쟤들이....


S#47 한의원 (낮)

-한의사 앞에 앉아 한참 설명 중인 한영실.

한영실    담밸 아주 입에 달고 계시는데 기침을 그렇게 허세요.
          그냥 기침이 아니구 왜 쎄엑쎅 밭은 소리 나는 기침 있잖어요?
          그리구 통 진질 못드세요. 밥 한 공길 다 못비우시니, 원...

S#48 한식당 (낮)

김동환    (와락 반가운) 참말이오? 참말 게서 봤다 말이오?
조선족女  (김동환이 내민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곤) 틀림 없슴다. 아직도 거게
          있는 줄은 모르지마는, 여름까진 게 있었슴다.
김동환    (찾았다, 이제 찾은 거다)

-김동환 기뻐하며 사진을 들여다보면, 가난하지만 단란해 보이는 가족사진.
 부인(50대)과 아들(30대 후반), 며느리(30대 초반), 손녀(3․4세), 그리고 김동환.

S#49 집 주방 (동 오후-밤)

-식탁 의자에 앉아 우메기를 만들고 있는 한영실. 찹쌀반죽을 동그랗게 빚어 참깨
 소를 넣는다. 
(O.L)
-완성된 우메기, 식탁 위에 정갈하게 놓여져 있다.
-한쪽 팔을 괴고 졸고 있는 한영실. 꾸벅 졸다 퍼뜩 깬다.
-시계를 보면, 9시 10분 경. 의아한 얼굴이 되는 한영실.

S#50 유흥가 (동 밤)

-‘미씨방’ 간판의 술집 안에서 깍두기들에게 떼밀려 나오는 김동환.
-거칠게 팽개치고 돌아서는 사내들.

김동환    (얼른 일어나 매달리며 필사적으로 애원) 사정 좀 봐주시오. 잠깐이면
          되우다. 잠깐만 들어가게 해주오.
깍두기1   (눈 부라리는) 놔! 안놔?
김동환    (두 손 모으며 굽신굽신) 제발 부탁이우다. 들여보내 주오, 예?
          제발..제발 부탁이우다.
깍두기1   (거칠게 멱살 움켜잡으며) 아우 증말! (살짝 성질 죽이며 위협) 존 말로
          할 때 꺼져?  (팩 팽개치곤 돌아서간다) 하, 재수가 없을라니까 왠 그지
          같은.... 으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침 찍-)

-깍두기들 비웃으며 들어가고, 널부러진 김동환.

S#51 집 거실 (동 밤)

-서둘러 현관으로 들어서는 김한수와 정진숙.
-입 꼭 다물고 소파에 앉은 한영실. 그 뒤로, 12시가 넘은 시계가 얼핏 보인다.

영희      오셨어요?
진숙      아버님이 없어지셨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영희      (한영실의 눈치를 보며) 저 나갈 때까진 분명히 계셨는데... 아직 안들
          어오셨어요.
진숙      아니 이 시간까지? 연락도 없으시구?
한수      어디 가신다는 말씀 없으셨어요?
정수      아무 말씀 없으셨대요. 우린 어머니랑 집에 계시는 줄 알았지.
진숙      어디, 갔었어?
영희      (한영실 눈치 보며) 모임에요. 지은아빠 회사 일이라 정말 어쩔 수 없이.
한수      안되겠다,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겠어.
정수      했어요, 좀 전에. 연락 오기 기다리는 중이우.
진숙      혼자 나서셨다가 길을 잃으신 모양이네, 그렇죠 여보? 택실 타두 지릴
          잘 모르면 찾기가 (하다가 화들짝) 어므나, 시계! 목걸이!!
일동      (??)
진숙      당신이 아버님 사드린 거요! 요즘 택시 잘못 탔다가 험한 일 당하는 사
          람이 많다던데, 그 비싼 걸 하고 나가셨다면, 엄- 혹시...?
영희      아버님 오늘 현금두 많으세요! 이이가 오늘 아침에... (나부대는) 설마
          그 많은 돈을 다 지니고 나가신 건 아니겠죠, 여보?
정수      (쓰읍-, 조용히 하라 눈치 준다)
한영실    (이 소란함에 오히려 아득해진다)

S#52 파출소 (동 밤)
  
-긴 의자에 처량하게 앉은 김동환. 얼굴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있다.
-문 열리며 급히 들어오는 김한수 내외와 김정수, 한영실.

진숙      어므나, 아버님!
김동환    (한영실이 보이자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서진다)

-경찰 하나가 문 열고 들어서다 이 광경을 보곤,

경찰      어-, 정말이네? 불체 아니네?
한수      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경찰      (기분 나쁘게 빙긋빙긋) 병원 하세요?
한수      네? 그렇..습니다만...?
경찰      (모자 벗고, 귀 가려워 긁고, 제 볼 일 다 보며 무성의․무례) 유흥업소에
          못들어가게 한다고 난동을 부리신 모양이에요. 얼마나 귀찮게 했는지
          업소에서 불법체류자 잡아가라고 신골 했어요. (피식) 돈 내면 될 꺼
          아니냐, 돈 여깄다 이놈들아, 길거리에 돈을 막 뿌리구, 허이구- 볼 만
          했대니까요?
식구들    (뜨악-)
경찰      불법체류자 아니라고 박박 우기시는데, 여권도 없지, 주소․전화번호 다
          모른대지.. 아드님이 병원 하신다는 거 생각 못하셨으면 출입국관리소루
          넘어가실 뻔 했어요. (김동환에게) 영감님, 담부턴 여권 갖고 다니세요,
          예? 그러고 다니시다가 운수 사나우면 잡혀가요, 잡혀가. (킥) 아 저렇게
          고운 할머니가 계신데 뭘 그런 델 다니시구 그러실까, 점잖으신 체면에.
한영실    (입술이 앙다물어지는)

S#53 집 현관

-경직된 얼굴로 현관에 들어서는 한영실, 김동환, 김정수.
-김동환 한영실에게 뭔가 말하려는데 부르르 안방으로 가버리는 한영실.
-맞이하던 이영희, ???

S#54 안방

-잠자리에 든 한영실. 팔을 이마에 얹은 채 회한에 젖은 얼굴이다.

E 피아노 소리. 슈베르트의 ‘음악에(An Die Musik)’ 전주 부분.

S#55 개성 김동환집 (봄, 낮, 과거 회상)

-대저택의 한옥. 넓은 정원에서 성장을 한 반주자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연미복 차림의 동환, 한 손으로 피아노를 짚은 채 노래 부르려는 중이다.
-멋진 (구식의) 정장 차림 남녀들이 그 앞에 모여서서 티파티 중.
-차와 양과자가 놓인 쟁반을 들고 손님들에게 권하며 다니는 영실.
-전주가 끝나고 동환이 노래를 시작한다. “Du holde Kunst, in wieviel grauen
 Stunden, Wo mich des Lebens wilder Kreis umstrickt, ...“
-동환의 노래가 시작되자 일동 동작 멈추고 노래에 주목. 행복한 얼굴들.
-빠져들어갈 듯 동환을 보는 영실. 낭만적인 미성, 잘생긴 얼굴에 멋진 미소,
 나뭇잎 사이로 동환에게 일렁이는 햇살.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린다.

S#56 집 식당 (아침)

-굳은 얼굴로 식사하고 있는 한영실, 김동환, 김정수, 이영희, 그리고 지은.
-무거운 침묵. 지은이 어른들의 눈칠 살핀다.

한영실    (눈 안마주친 채로) 오늘 저허구 어디 좀 가세요.
김동환    (??)

S#57 대학 캠퍼스 (낮)

-벤치에, 멀찌감치 거릴 두고 앉은 김동환과 한영실.

김동환    (흥분한) 아오, 정말 많이 변했구만요, 많이 변했어. 저게 저쪽은 치과대
          건물이었댔는데... 이젠 길안내를 보지 않고는 어데가 어딘지 찾지도
          못하겠구만 기래.
한영실    (....)
김동환    저.. 어제 참에 일은
한영실    (O.L) 음악부 강의 몰래 들으시다 발각돼서 징계당하실 뻔한 적 있었죠?
          그때 아버님이 직접 학장실까지 찾아가 사죄하시고는 겨우 구제받으셨댔
          잖어요.
김동환    (옛기억에 얼굴 편안해지는) 기랬댔지요. 내 음악부에 진학하겠다는 걸
          아버지가 끝끝내 의대에다 넣으셨으니...
한영실    의사 공부 보단 노래 부르는 걸 더 좋아허셨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당신은 철이 들 나셨던 것 겉에요. 안식구에 간난 아들에, 딸린 식솔들
          먹여살릴 궁린 안중에두 없구, 그저 레코든지 뭔지 노래판이나 구하러
          댕기셨으니... (한숨처럼) 그래두 그때가 좋았던 것 겉네요.
김동환    (담배 피워무는) 좋은 시절이었지... 참 좋은 시절이었댔소.
한영실    ......한수아버지, 예서 사시겠에요?
김동환    (??)
한영실    (말갛게 보며) 살고 싶으시면 그럭허세요. 예가 그리 좋아보이구 부러우
          시면 예 살면 되지요.
김동환    (자존심 상해) 기거이 무슨 말이오? 내 언제 부럽다 했소?
한영실    아무래도 사는 건 거기보다 예가 낫겠죠. 좋은 거 입구 좋은 데 가구,
          남은 인생 그렇게 살고 싶으시겠죠, 왜 아니겠에요?  괜찮어요, 다 당신
          자식이구 안사람입니다. 속 좀 보인다구 숭하다지 않어요. 말씀해 보세
          요. 예 살고 싶으세요?
김동환    (벌떡 일어서며) 어째서 앞뒤 들어보지도 않고서리 사람을 불한당 취급
          을 허오? 여게 사람들은 덮어놓고 우리 동포들을 비렁뱅이 취급을 하고
          낮추본다 하더니 그 말이 틀리질 않나 보우다!
한영실    (??)
김동환    여게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 진 모르겠지마는, 나도 중국선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 말이오. 기런 내가 왜 예서 비렁뱅이 노릇을 하며
          살겠느냐 이 말이우다!
한영실    (순간 눈에 불 번쩍) 네에! 그러시겠죠. 어련허시겠에요? 마누라랑 자식
          이 평생을 찾아헤매는 줄도 모르구, 새장가 들어 깨가 쏟아지게 사신 양
          반이, 어이구 그렇죠, 예서 사실 리가 없죠, 가 우리 동포랑 사셔야죠.
김동환    (실수했나?) 예서 살기 싫다 하는 말이 아니우다. 나는 고저
한영실    (O.L) 아유-, 그 말씨 참 거슬리네요, 예? 그게 대체 함경도 말입니까,
          평안도 말입니까? 고향말은 평생을 가도 안잊어먹는다는데, 옛날 건
          뭐든 아주 다 잊어먹으신 모양이지요?
          그렇게도 거기가 좋으신 양반이 그럼, 이게 왠 횡재냐 싶은 사람처럼 왜
          그러셨에요? 금붙인 뭐구 돈봉툰 또 뭡니까?
          오신 첫날부터 그저 좋겠다 좋겠다. 왜, 가시는 길에 좀 안보태드릴까봐
          서요? 걱정허지 마세요. 내 밥장사 해서 뫄둔 돈, 넉넉히 보태드릴테니.
          (홱 일어서며) 원, 변해도 어떻게 이렇게 변허실까...
김동환    (굳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날더러 변했다 하지마는, 내 보기엔
          .... 당신도 많이 변했수다. 
한영실    (빤히 보더니 횅 돌아서 간다)

M 보이소프라노 음성의(빈소년합창단) 'An Die Musik'

S#58 몽타쥬

M 계속
-학교 일각. 학생들 틈을 걸어가는 한영실. 복잡미묘한 슬픈 얼굴. 부서지는 햇살.
-벤치. 침통하게 앉은 김동환.

(영실)     저기에요, 저기.

<인써트 - 과거회상, 밤, 개성 김동환의 집>
-정원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동환과 영실.
영실      저게 자미성이에요. 별들을 다스리는 제왕별이요.
동환      (웃음) 별에도 왕이 있어요?
영실      그럼요. 저 자미성을 가슴에 품으면, 부부가 헤어지지 않고 오래오래
          사이좋게 살 수 있도록 지켜준다구, 저희 할머니께서 그러셨는 걸요?
동환      그래서 그렇게 보고 있던 거에요? 자미성을 가슴에 품으려구요?
영실      (고개 끄덕끄덕) 매일매일 바라볼 거에요.
동환      푸하...

-침통히 앉은 김동환. 그 곁을 스치는 빛나는 젊음들. 청명한 웃음소리들.
-햇살 속을 처연히 걷는 한영실.
-두 사람의 모습이 연속으로 교차된다.

S#59 ‘미씨방’ 앞 (동 오후)

-젊은 여자들이 하나둘 ‘미씨방’으로 출근하는 모습들.
-문가에 숨어 지켜보는 김동환. 줄줄이 오던 여자들이 모두 들어가지만 없다. 실망.
-길 저쪽에서 뛰어오던 여자, 김동환을 빤히 본다.

S#60 다방 (동 오후)

김동환    기거이 무슨 말이오? 찾지 말라니?
미씨방女  작정하고 숨은 사람 찾아 뭐함까? 송금 끊어진 지도 오래 됐다믄 알아
          볼 쪼 아님까?
김동환    무..무슨 말인지 나는 도무지 못알아먹갔소. 안산이라 했지요? (일어서
          며) 내 지금 당장
미씨방女  (잡으며, O.L) 가지마십쇼.
김동환    (??)
미씨방女  남자랑 삼다. 그 남자랑 살려구 여게 일 관둔 검다.
김동환    (눈 앞이 캄캄하다. 털썩 의자에 주저 앉는데)
미씨방女  너무 원망은 마십쇼. 그애도 고생을 많이 했슴다. 어찌하든 중국으루  
          돈을 부쳐야된다구, 병들어 까맣게 죽은 얼굴을 해서리 이악하게 일만
          했다 이 말임다. 그 남자가 돌봐주지 안했으믄 벌써 뭔 일이 났을 검다.
          그냥 살게 놔두십쇼. 그만하믄 그애도 할만큼 했지 않았슴까?
김동환    (벌떡 일어서며) 기럴 순 없소. 애가 기다리오. 에미 데려다주마 약조
          를 했다 말이오! (고집스레 뛰쳐나간다)

S#61 지하철 4호선 승강장

-벽에 그려진 지하철 노선도를 손으로 짚어가며 보는 김동환. 4호선 ‘안산’에서 손
 가락이 멈춰진다.
-이때 신호음이 울리고 오이도행 열차가 도착하고 있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들려
 온다.
-결연한 얼굴로 돌아서는 김동환. 열차를 타기 위해 가는데, 앞에 커다란 짐 여러
 개를 발 앞에 둔 젊은 부부가 있다. 큰 짐을 들려는 부인.

남편      (뺏어들며) 놔둬, 당신 무거워 못들어.
부인      (뺏으며) 당신 짐두 많잖아. 괜찮아, 이 정돈.
남편      (뺏어들며 작은 짐을 가리킨다) 이거나 들어. 허리두 안좋은 사람이...
부인      (피식 웃으며 작은 짐을 든다)

-반대편 승강장에서 잡은 모습. 열차가 도착했다 떠나면 혼자 그대로 남은 김동환.
-만감이 교차하는 복잡한 얼굴. 힘없이 돌아서 계단으로 향한다.

S#62 집 거실 (동 저녁)

-모여앉은 김한수․정수 내외.

진숙      어머님은 어떻게 되신 거야? 아버님두 안들어오시구.. 동서, 무슨 일이
          야? 무슨 일인데 또 모이라구 하시는 거야?
영희      (찜찜한 얼굴) 설마.. 중대발푤 하시려구..?
진숙      중대발표?

(JUMP)

영희      (조심스런) 아니 물론, 아버님을 찾아서 기쁜 마음이야 저두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이죠. 하지만 감격은 감격이구, 우리들만이라도 좀
          이성적으루 현실적인 판단을 해야지 않나 싶어요. 저는 정말 아무런
          사심 없이 어머님과 큰집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진숙      (O.L) 엄-, 우리가 뭘? 뭘 걱정해?
영희      아버님이 아주 오신다구  생각해보세요. 아주버님 서울 사람이 다 아는
          명망 높으신 인사신데, 어제처럼 그런 일 소소하게 자꾸 생기면 아주버
          님 명성에만 흠집 생기는 거 아니겠어요? 그럼 아무래두 민석이․민재한
          테두 좋지 않죠.
한수․진숙  (음..., 엄-)
영희      어머님두 그렇죠. (조심조심) 아버님이 먼저 돌아가신다면 모르지만, 혹
          시 어머님이 먼저 가시기라도 한다면, 그땐 어머님 평생 홀로 고생고생
          하시면서 모으신 재산, 엉뚱한 사람들 좋은 일만 시키게 될 형편이잖아
          요? 그럼 정말, 우리 어머니 불쌍해서 어떡해요?
진숙      아버님이 오시겠어, 설마? 그럴 수는 있구?
한수      그쪽을 정리만 하신다면야 오시는 덴 별 문젠 없을 거요. 어머니가 새로
          호적을 만드실 때 아버님을 호주로 해놓으셨거든.
진숙      엄-, 그럼...?
영희      저기, 아버님이 아주 돌아오시는 것 보단, 그냥 거기 계시면서, 1년에
          한번쯤 왕래하시구 안부전화 자주 드리구, 또 모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좀 도와드리구,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두루두루?
한수․정수 (음음..침묵의 동의)
영희      그래서..말인데요, 우리 모두가 우려하는 사탤 미연에 방지하자는 차원
          에서, 아버님께 미리...

-카메라, 서서히 뒤로 빠지면, 현관의 김동환. 들어오지 못하고 듣고 섰다.

(영희)    거기서 충분히 사실만큼 해드리면 굳이 가족들 버리고 이리로 오시겠
          어요?

-김동환의 손에 들린, 하얀 소국 한 다발이 떨린다.

S#63 김정수집 앞 (동 저녁)

-대문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김동환. 한영실이 타고 온 택시가 와 정차한다.

한영실    (음식 보따리 들고 내리다 김동환을 보고 흠칫) 왜 한 데 그러구 앉아
           계세요? (새침하다)
김동환    (천천히 일어나 빤히 보더니 소국을 내민다)
한영실    (보곤) 필요 읎네요, 가서 당신 어부인한테나 주시구랴? 그까짓 돈 몇
          천원만 주면 얼마든지 살 걸... (벨을 누른다) 응, 얼른 열어라, 무겁다.
-대문 열리자 뿌르르 들어가버리는 한영실.
-넋없이 보고 선 김동환.

S#64 거실 (동 밤)

-잔뜩 찌푸린 김한수․정수 내외. 식사가 끝난 상차림. 김동환 앞에 고급 양주병 여
 러 개가 놓여 있다.

김동환    (거나하게 취한) 기래서, 기래서 말이야, 우리 한수가 (곁에 있는 김한
          수를 확 잡아끌어안으며) 아니 여게 이 한수 말고 우리집에 있는 우리
          한수. 우히히, 우리 한수 이놈이 얼마나 효성이 지극한지 모른다.
          돈도 기렇게 잘 벌지 부모한테 효도하지 (잔에 술 부어 마시려)
한영실    (술잔 뺏어들며) 아 고만 좀 허세요, 이제. 다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바쁜 사람들 불렀드니 원, 누가 당신 아들 자랑 듣잡니까?
영희      아버님, 그만 들어가 쉬세요. 많이 취하셨어요.
김동환    (보곤) 응? 지은이 이눔은 어째 코빼기도 아니 보이니?
영희      티비 보느라구 저희방에... 수능특강 하는 시간이거든요.
김동환    (비틀비틀 일어서며) 어-, 기래? (정수네 방으로 가며) 지은아-, 할바지
          좀 보자-! (정수네 방 문을 열며) 지은아-!
영희․정수 (놀라 얼른 따라간다)

-문 열리자, 쏟아져 나오는 수능프로그램 소리. 볼륨이 크다. 놀라서 보는 지은.

김동환    이눔아, 할바지 좀 보자니까니...(비틀비틀)
정수      아이 아버지, 그만 주무세요. (부축하려) 자자, 저랑 들어가세요.
김동환    흐흐흐, 정수야, 정수야 이눔아, 너 나 돈 좀 주겠냐? 얼마 줄테냐?
          한수 니가 줄래? 나 돈 좋아한다, 애비 돈 좀 주라. 우히히, 부자 자식
          들을 두니 어데 가도 호강이구나 야. (한영실에게) 당신도 줄려오?
한영실    아니, 저 양반이...
김동환    지은아, 이 집에서 젤로 바쁜 우리 손녀딸... 할바지 앞에서 노래 한 곡
          조 불러보라. 저 눔은 어째 할바지가 길케 노래 좀 해보라 해두 한번을
          안해준다? 어째, 너도 돈 주믄 할테냐? 얼마 주믄 할테냐? (비틀비틀)
지은      (놀라) 엄마아-.
영희      (지은을 끌어안는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듯한 방어적인 태도)
한수      (못마땅해서 일어서며)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간이 벌써...
김동환    (소리 버럭) 가긴 어델 간다 하니?? 애비가 돈을 달라 했는데 어째서
          안주고서리 그냥 가느냐 말이다! 돈 많지 않니! 느들 돈들 많지 않니!!
한영실    (버럭) 저 양반이 정말! 아니 왜 이러십니까, 예? 아무리 약주가 과하셔
          도 그렇지, 얘들한테 무슨 돈 맡겨놓셨시니까? 아니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그래? 정말, 이런 꼴은 서로가 보지 않느니만 못허죠, 안보느니만
          못해요! (한수네한테) 얘, 니들 어서 가라. (정수네한테) 지은이랑 니들두
          그만 들어가 자. 원, 노인네 망령을 허시나...

-자식들, 못마땅한 얼굴로 각자 흩어지려는데 그때, TV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눈에 핏발이 선 채 듣고 선 김동환. 갑자기 중국어로 중국 국가(의용군행진곡)를
 부르기 시작한다.
-식구들 놀라 돌아보면,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고함치듯 노래하는 김동환.
-뜨악한 식구들. 김동환의 터질 듯한 분노의 노래.

S#65 안방 (새벽)

-어스름 밝아오는 새벽녘. 잠들지 못하고 있는 한영실. 한숨을 내쉬며 일어난다.

S#66 거실

-주방으로 가려는 한영실. 건넌방 문이 열린 게 보인다.
-의아해 다가가 천천히 문을 열어보면, 방이 비어있다. 방 한가운데에 식구들이
 사준 옷이며 구두, 금시계, 목걸이, 돈봉투 등이 놓여있다. 그 위에 편지 한 장.
-놀라 아득해지는 한영실.

S#67 안방 (아침)

-김동환의 편지. ‘폐가 많았습니다’ 한마디.
-편지를 내려놓는 김정수의 손. 죄책감 드는 얼굴.
-역시 죄 지은 사람처럼 찜찜해하는 이영희.
-꼿꼿한 자세로 모로 앉은 한영실.

영희      저기..공항에 전화해볼까요 어머니? 아직 비행기 안타셨다면 가서 모셔
          와야죠.
한영실    그럴 것 읎다. 싫다고 가신 양반을 뭐하러?
영희      그래두...
한영실    놔두라니까! 어차피 가실 거 며칠 빨리 가시면, 그 애닲은 가족들 더 빨
          리 만나구 좋으시겠지. 그냥 둬!
S#68 현관 (낮)

택배직원   김동환씨 댁 맞으시죠? (한약 박스 내민다)
영희      (받아들며 한영실을 본다. ??)
한영실    (.....)

S#69 안방 (동 오후)

-심란한 얼굴로 누운 한영실. 그 옆에 한약 박스. 물끄러미 박스를 보던 한영실,
 안되겠다 싶어 벌떡 몸을 일으켜 전화를 건다.

한영실    응, 에미다. 혹시 너 중국 아버지집 즌화번호 아는? ...아니, 넌 장남이
          돼갖구 그래, 그런 것도 안알아두구 뭘 했는? 알았다. (툭 끊어버린다)
          (어쩌나 싶다가 방을 나선다)

S#70 김정수방 앞

-한영실, ‘얘, 애미야’ 하며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들려오는 전화 통화소리.

(영희)    아우 어떡해? 아무래두 아버님이 큰집이랑 하는 얘길 들으신 것 같은데,
          그쵸 여보? ... 왜 소린 지르구 그래요? 나 혼자 생각이었어요? 어우,
          아버님 여기 눌러앉으실까봐 자기들이 더 안절부절을 했으면서...

-한영실, 억장이 무너진다.

S#71 거실

한영실    (전화 통화 중) 어, 선교사님? 저 한권삽니다, 한영실이에요! 아유 네네.
          이거 인사도 제대로 못허구... 저기, 이번엔 찾은 즈이집 양반이요, 도착
          허셨죠? 아침에 가셨는데. ... 네에? 아직이요? 저기 그럼, 그 집 즌화
          번홀 좀... 제가 깜빡 했지 뭡니까? 네? 즌활 받을 수가 없다니요?

S#72 거리 (동 오후)

-아득해진 얼굴로 이리저리 헤매는 한영실. 이 양반이 어딜 가셨을까..이 양반이...

(선교사)  죄송합니다. 직접 말씀하실테니 그때까진 비밀로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
          을 하셔서,  제가 본의 아니게 모두를 속인 셈이 됐네요. 사실은.. 그댁
          아드님, 공장에서 사골 당해 3년 째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계십니다.
          부인 되시는 분두 그 충격 때문에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셨구
          요. 그럼, 며느님 일두 모르시겠군요? 1년 전에 한국으로 돈 벌러 가선
          연락이 끊어졌답니다. 참, 딱해서 못보겠습니다. 나이 드신 분이 환자들
          병수발에 손녀딸까지 돌보시구, 빚은 점점 불어나구...
          말씀을 안하셨나 보네요. 전 거기 가족들을 찾아 다행이시다 했는데...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매던 한영실. 문득 뭔가 생각났다. 택실 잡아탄다.

S#73 애기봉 (동 오후)

-고갯길을 올라오는 한영실. 이리저리 헤매 보며 찾는다.
-저쪽 고개 끝에, 넋없이 담배를 피워올리며 멀리 북녘땅을 그리며 앉은 김동환.

(한영실)  아직 안가셨시니까?
김동환    (놀라 돌아본다)
한영실    (울컥 감정이 솟는. 다가와 곁에 앉는다) 어째 아직 안가셨시니까?
          만정 떨어진 양반처럼 그렇게 부르르 가시더니....
김동환    (다시 멀리 바라보며 담배 후..) 죽기 전에 가볼 수 있을까? 내 죽기 전
          에 아버지 어머니 묘소에 벌초라도 한번 해드리고 가얄텐데.
한영실    전요? 제 껀 안해주세요?
김동환    (정색을 하고 보며) 기런 소리 마오. 내 딴 건 몰라두 나보다 당신 앞서
          는 거이 다신 보고 싶지 않으오.
한영실    (피식) 그럼 저더런 당신 앞세우라구요? 과부살이 부족해서 또요? 
          이젠 싫네요, 저두.
김동환    (담배 후....)
한영실    ...... 예전엔 하늘 보구 참 원망도 많이 했에요. 난 무슨 팔자가 이런가..
          남들은 내외 간에 죽이니 살리니 쌈질을 해대면서두 새끼들 낳아 키우
          구, 시집․장가 보내구, 지지구 볶으면서 잘만들 사는데, 난 무슨 죄가
          많어 그 다정하던 낭군을 잃어버리구 평생을 이렇게 애통하며 찾아헤매
          야 하는가... 차라리 당신이 그때 죽었더라면,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듣는
          다면, 다 포기허구 속이라두 편케 살텐데 싶었에요.
김동환    (......)
한영실    근데.. 그게 아닌 것 겉에요. 저야말루 참 복 받은 인생 겉에요.
김동환    (??)
한영실    (말갛게 보며) 저헌텐 추억이 있드라구요. 당신한테 받았던 큰 사랑, 그
          좋았던 시절이 있드라구요. 그 힘으루 살았다는 걸.. 그 잠깐의 행복이
          내 평생을 지켜준 힘이었다는 걸.. 다 늙어 이제야 알겠에요.
김동환    (울컥해져 고개 돌리며) 내... 당신한테 고백할 거이 있소. ...사실로 나
          는... 당신한테 돈을 구걸할 요량이었소. 당신 말대로, 내 첨부터 기런 불
          온한 속을 품구 왔다 이 말이오.
한영실    그럼 달라시죠. 그게 뭐 어때서요? 왜 달란 말씀을 못허셨에요?
김동환    긴데 말이오, 기런데 말이우다... 내가 아직... 사나이더라 말이오.
          당신은 열아홉 그 한영실이고 나는 당신의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울렁울
          렁하던 그 김동환이더라 이 말이오. (눈가가 젖어오는) 당신의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고, 가슴팍이라도 한번 보듬어 보고 싶은, 내 사나이 김동환
          이더란 말이우다.
한영실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는)
김동환    사나이 김동환이가 한영실이란 녀인한테, 어찌 비렁질을 할 수가 있었겠
          소? 기런 비굴한 꼴을 보이고야 내 어찌 또 돌아서 가겠느냐 말이오.
          아직 멀었지요? 내 철 날라 하믄 아직 멀었지요?
한영실    (눈물 감추려고 부러) 네, 아직 멀으셨네요. 철 안나 저 세상두 못가시겠
          네요... 식구를 생각허셔야죠. 식구부터 살리고 보셔야죠.
김동환    (굳는) 어찌 알았소?
한영실    그런 일이 있으면 진즉 말씀을 허셨어야지...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누운 사람 수발까지 들려면 을마나 고생일꺼야, 그래?
김동환    ..... 내 기 사람한테 죄를 많이 지었수다. 혼인할 적에 내 기랬소. 나에
          게 아내는 한 사람 뿐이라구, 죽은 아내를 평생 가슴에 두고 살 거라구.
          그래두 좋겠냐 했더니 이 딱한 녀자가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거우다.
          약조한대로, 평생 마음을 온전히 받지 못하면서두 불평 한번 않더우다.
          남편 공대하는 낙으루만 살은 사람이오, 기 사람.
한영실    (눈시울 붉어져 부러 씩씩하게) 그래두 저보다 낫네요. 전 별 낙두 읎이
          산 것 겉은데.
김동환    왜 낙이 없어요? 크게 된 자식들과 어엿한 사업장이 있는데?
한영실    (피식. 부러 농처럼) 그럼 바꿔살자고 해볼까요? 예? 거기 사람한테 나
          허구 바꿔살자구 한번 해볼까요?
김동환    (피식. 갑자기 주머니에서 가족 사진을 꺼내 자신의 얼굴만 두고 나머
          진 접어 건네준다) 내 얼굴만 보우다. 다른 쪽은 보지 말구.
한영실    (받아든다)
김동환    (젖은 미소) 꼭 한번 놀러오오.
한영실    네, 그러지요.
김동환    꼭이우다. 꼭 오오?
한영실    (고개 끄덕이며 젖은 미소)
-젖어오는 눈시울을 감추며 말 없이 멀리 고향땅을 바라보는 두 사람.

S#74 안방 (동 밤)

-서랍에서 액자를 꺼내는 한영실. 젊은 동환을 빤히 보더니 사진을 빼고 김동환에
 게서 받은 사진을 넣는다.
-접혀진 채로 넣어 김동환의 얼굴만 보인다.
-잠시 말갛게 보는 한영실. 문득, 사진을 다시 꺼낸다.
-접힌 부분을 엄지끝으로 정성껏 편다.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 감정이 북받친다.
-편 사진을 액자에 넣고는 떨리는 손으로 액자를 훑는다. 어느새 젖어있는 눈.
-한영실의 손이 지나가면 오롯이 나타나는, 김동환의 단란한 가족사진.
-흑흑 울음이 터지는 한영실. 참았던 통곡이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윽흑흑 윽흑흑..
 눈물 속에 희미한 미소.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다.
-액자의 사진에서 (F.O)

#에필로그

-F.I 하면, F.O과 같은 프레임. 그러나 바람에 커튼이 가볍게 날리며 환한 햇살이
 그 사이로 비쳐오고 있고, 액자 속 사진이 바뀌어 있다.
-손녀를 안고 있는 김동환. 그 옆엔, 얼굴과 몸 한쪽이 마비된 김동환의 아내.
 그리고 그녀를 부축해 안고 있는 한영실.
-모두가.. 환하게 웃고 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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