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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내 낡은 지갑 속의 기억] 채승대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3.06.15|조회수2,085 목록 댓글 3

[내 낡은 지갑 속의 기억] 채승대

 

 

 

 

 

 

 

#1 영재의 꿈-몽타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먹구름 가득한 새벽하늘
-빠르게 지나치는 도로의 나무들
-차창을 휙휙 스치는 안개
-거대한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경적과 함께 돌진하는 덤프트럭.
-찢을 듯 들리는 브레이크 소음과 함께 선행되는 비명. 
 
#2 영재의 방 / 밤
악!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는 영재,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누군가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 떨리는 손을 바라보는 영재.
영재가 고개를 돌려 협탁 위 전자 탁상시계를 보면 4시 59분이다.

#3 욕실-샤워 부스 / 새벽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하게 정돈된 목욕 용품들.
뿌연 김이 서린 거울을 헤치면,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영재의 얼굴이 비친다.

#4 몽타주 / 새벽
- 팬 위에선 반숙의 계란 프라이가 올려져있고 그 옆으로 베이컨 3개가 놓여진다.
- 토스트 기에서 적당히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 두개가 올라온다.
- 큰 접시 위에 깔끔하게 차려진 아메리카 스타일의 아침 식사.
- 영재가 나이프로 계란 노른자를 가르면 채 익지 않은 노른자가 고름처럼 흐른다.
  영재가 식빵을 찍어 작게 베어 문다.

#5  이씨서가 앞 / 아침
‘이씨서가’ 라 써진 고풍스런 현판이 걸린 헌책방을 저만치 앞둔 거리에 서서
거울을 보며 립 클로즈를 바르는 수아.
시계를 보더니 동작이 점점 빨라지면서 머리와 교복 매무새까지 익숙한 동작으로
정리한다. 다시 시계를 보면, 6시 59분 55초.

수아  (걸어가며) ( 다섯, 넷, 셋, 둘...)

7시 정각에 이씨서가의 셔터가 올라가면 수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영재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면 깡총 그의 옆쪽으로 뛰어가는 수아.

수아  안녕하세요!!!!

영재가 어색한 눈인사를 하면, 수아가 함박웃음으로 답한다.
돌아서서 가게 안으로 사라지는 영재의 뒷모습을 연신 훔치며 뛰는 수아.

수아(N)  천국에서의 1초가 흐르면...
  
저만치 앞에서 닫힌 교문을 등지고 정신봉으로 손바닥을 치며 위압적으로 서있는 체육선생(훈육주임)과 그 뒤로 지각생 몇몇이 손을 들고 있는데, 고춘자의 모습도 보인다.

수아(N)  지옥 같은 10분이 시작된다.

하아하아...훈육주임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숨을 고르는 수아의 표정이 밝다.

수아(N)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보다 행복한 1초를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활짝 웃는 수아의 얼굴에서 타이틀, 내 낡은 지갑 속의 기억.

#6 학교 운동장 /아침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수아와 춘자.
그 뒤로 지각생 몇 명이 새끼오리처럼 뒤를 따르고 있다.
춘자는 죽을상인데 수아는 연신 히죽거린다.

춘자  그렇게 좋냐? 생각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려?
수아  고상하게 좀 놀자. 벌렁이 뭐냐, 벌렁이.
춘자  그럼?
수아  두근두근, 콩닥콩닥...얼마나 풋풋하고 좋아. 으흐흐
춘자  놀고 있네. 엄마한테 확 까버릴까 보다.
수아  엄만 내 나이 때 나 낳았어.
  양심 있음 할 말 없어.
춘자  도대체 그 노땅이 어디가 좋은 건데?
수아  (시 읊조리듯) 사랑에 이유가 생기면 이미 사랑이 아닌 거야. 캬~
춘자  (후릴 듯 손 치켜드는) 이걸 그냥 확!
선생(소리) 고 춘자, 똑 바로 안 하지!

큭큭, 웃는 수아와 아이들.
춘자가 보면, 훈육 주임인 체육 선생이 다가오고 있다.

춘자  아, 진짜...저 춘자 아니라니까요!
체육   (얼굴 빤히 보는) 춘자 맞구만. 고춘자. 일명 고추장.
아이들  (아까보다 더 크게 웃는)
춘자  개명 했거든요? 은혜로울 은, 아이 아. 고은아!
체육  확실해?
춘자  등본 떼 와요?
체육  됐고, 춘자만 들어가고 나머진 한 바퀴 더 돈다.
춘자  (벌떡 일어나는) 앗싸~( 이내 우스꽝스럽게 굳는)
체육  (히죽) 춘자 맞네. 고 춘자~

얼굴이 고추장처럼 새빨개진 춘자와 배를 잡고 구르는 아이들.

#7 이씨서가 밖 / 저녁
수아가 서있다. 수아의 시선으로 서가 안을 보면, 초미니 스커트에 짙은 화장의 젊은 여자 하나가 책을 고르며 영재를 힐끔거리고 있다.
눈에 날이 서는 수아, 후웁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문 쪽으로 걸어간다.

#8 이씨서가 안 / 저녁
제법 넓은 공간에 커다란 책장이 미로처럼 얽혀있고 내실 문이 측면으로 나있다.
입구 쪽의 작은 탁자에선 영재가 두꺼운 법전을 읽고 있다.
수아가 서가 쪽에서 데면데면 서있는데, 여자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 이란 책을 들고 수아를 지나쳐 영재에게 다가간다.
씰룩이는 여자의 엉덩이를 보며 심기가 뾰쪽해지는 수아.

여자  (다가가는) 헌책방이 아니라 보물창곤데요?
영재   (슬쩍 보는)
여자  (책상 앞에 책을 내려놓는, 잘난 척 하듯) 조르조 바사리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 르네상스 미술가에 관한 책 중에
  이 이상은 없죠.
수아  (여자 뒤쪽으로 다가서는, 팔뚝에 입술을 대는)
여자  유럽 나갔다가 피렌체에 들렀을 때...

수아가 불면, 부욱~ 방귀 소리가 난다.
멈칫하는 여자.

수아  (천연덕스럽게) 고막 나가는 줄 알았네. 살벌하게도 뀌신다, 정말.
여자  (당황) 뀌...뀌긴 내가 뭘...
수아  (윽! 코를 잡는, 손으로 휘휘 젖는) 아줌만 방귀도 숙성시켜요?
  아주 썩네, 썩어. 아우...
여자  어머머, 얘 좀 봐. 누...누가 아줌마야. 뭘 숙성 시켜!
수아  방귀가 잦으면 뭐가 나온다드만...(엉덩이 쪽 보며) 안 지렸나 몰라?

민망하고 당황해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여자, 고개 절레절레 흔들더니 다시 책을 보는 영재와 수아를 번갈아 보더니 울상이 되선 서가를 나간다.
수아가 통쾌한 듯 메롱 웃더니,

수아  (기웃) 무슨 책이 그렇게 두껍대요?

대답대신 책을 잠시 덮었다 다시 여는 영재, 민법 책이다.

수아  아항. ..(눈치 살피더니) 그 거 알아요? 책으로 사람 패도 흉기가
  아니래요. 그래서 대학에선 법대생들이 짱 먹는다던데...
영재  형법상 특수 폭행이야.
수아  (무안 했다가) 저기요, 말 할 때 원래 사람 얼굴 안 봐요?
영재  ...
수아  이건 비밀인데요...(속삭이듯) 저 이래봬도 B컵이거든요?
영재  (탁! 책을 덮고 인상 굳게 올려보는)
수아  (웃으며) 봤다, 흐흐흐~
영재  (차갑게) 이봐.
수아  이봐가 아니라 수아요. (가슴의 명찰을 가리키며) 채.수.아.
  아저씬?
영재  (어이없는)
수아  이씨서가니까 성은 이 씨 겠고...

문이 열리며 우체국 택배 기사가 들어온다.

택배  이영재씨 계십니까? (영재에게 다가오며) 이영재씨?
영재  그렇습니다만...
수아  (재미있다는 듯 웃는) 영재...어쩐지 공부 잘하게 생겼더라. 
영재  (수아 흘기는)
택배  여기 싸인 해주시고요.

싸인을 하고 받는 영재.
영재가 갸우뚱 하며 포장을 풀면, 흙먼지가 묻은 낡은 가죽 지갑이 들어있다.
안을 보면 낡은 운전면허증이 있는데 영재의 것이 틀림없다.
표정이 굳어지는 영재, 더 뒤져 보면 명함 넣는 곳에 사진 귀퉁이가 살짝 삐져나와있다.
영재가 꺼내서 보면, 미모의 여인과 영재가 행복한 표정으로 셀카를 찍은 사진으로,
사진 속 배경은 벽면에 색색의 포스트잇이 가득 붙어있는 까페다.

수아  뭐야, 여친 있었어요?
영재  처음 보는 여자야.
수아  에이, 팔짱까지 꼈구만.
영재  (노려보는) 모르는 여자야. 너처럼.

영재의 차가운 눈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 놀라는 수아.

#9 수아의 집 / 저녁
어두운 내부.
안으로 들어온 수아가 불을 켜면 반 지하의 두 칸 자리 집임이 드러난다.
손바닥만 한 거실엔 엄마의 화려한 옷들과 소주병 등이 널브러져 있고 엄마는 바닥에 널브러져 코를 골고 있다. 
탁자위에 삐뚤 서있는 작은 액자 하나에 시선 멈추는 수아.
수아가 액자를 앞쪽을 보게 돌리면, 아빠, 엄마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8살 정도의 어린 수아가 보인다. 슬픔이 수아의 얼굴에 스친다.
싱크대엔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휴우...한숨 쉬더니 팔을 걷는 수아.

(시간 경과)

덜그럭덜그럭 거칠게 설거지를 하고 있는 수아. 
(인서트) 영재와 미모의 여인의 사진

수아  웃겨, 정말! 여자한테 관심 없는 척 의뭉 떨 땐 언제고...
  딱 달라붙어갖고 말야, 지들이 무슨 자석이야?
  여자 보는 눈도 순 황이드만. 눈은 쫙 째져갖고...광대뼈 튀어나  온 것 좀 봐...딱 봐도 팔자 드럽게 세게 생겼드만...으아아!!!

그릇이 깨져라 설거지를 하는 수아.

#10 영재의 방 / 밤
어두운 방의 스탠드 아래, 수아의 짜증과는 정반대로 생긴 지우의 사진을 보고 있는 영재. 환히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영재 C.U

영재(NA) 내가 웃고 있다. 나조차도 본적 없는 얼굴로...
  그런데....날 웃게 만든 이 여자... 기억나질 않아.
  머리카락 한 올 조차도...

후우...긴 한숨을 내쉬는 영재, 쓸쓸하다.

#11 이씨서가 외경 / 낮
양 손에 빵빠레를 들고선 자못 결연하게 서가를 보고 있는 수아.

#12 이씨서가 안/ 낮
민법 책을 펼쳐 놓고 고개 돌려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있는 영재.
이때 책상에 놓이는 빵빠레 아이스크림.
영재가 보면, 이미 하나 먹고 있는 수아.

수아  그 여자 생각했죠?
영재  (인상 구기는)
수아  (읊듯) 사랑이 변한다는 건 여름날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과 같다~
  생각보다 빨리 녹고, 끈적끈적 지저분해지니까~
  얼음은 녹였다 다시 얼려도 얼음이지만 아이스크림은...(장난스럽게
  ) 우엑~  고로, 떠난 버스 아무리 기다려봤자 소용없다는 말씀~
영재  너하고 장난칠 기분 아니야. 그리고...
  (빵빠레 밀며) 이런 건 먹지 않으니까 가져가. (다시 책보는)
수아  거짓말.
영재  (신경질적으로 들어 보는) 이봐!
수아  (대답대신 명찰을 가리키는)
영재  (한숨 쉬곤) 명현여고 3학년 채수아. 니가 왜 날 귀찮게 하는지
  모르지만...
수아  (말 끊는) 몰라요? 정말 몰라요?
영재  (화를 간신히 참으며) 알고 싶지도 않아.
  그냥 내 눈 앞에서 껴져줬음 좋겠어.
  그리고 다신 오지 마. 모르는 사람이 귀찮게 구는 건 딱 질색이야.
수아  (서운한, 눈물 핑 도는)
영재  (심했나 싶은)
수아  (노려보는) 스트라잌 세 개면 아웃 인 거 알죠?
  두 개 남았어요. (돌아서는)

나가는 수아를 보더니 빵빠레를 집는 영재, 잠시 보더니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다.

#13 이씨서가 밖 / 낮
이씨서가를 등지고 씩씩거리며 학교를 향해 걷는 수아, 눈가를 슥 훔치더니 빵빠레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14 동네 미용실 / 낮
작은 평수의 동네 미용실. 여주인이 춘자의 머리를 하고 있고, 수아는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다.

춘자  언니가 형부 바람피우는 거 잡았을 때 그 자식 첫 마디가
  뭐였는지 알아? 모.르.는 여.자. 그 말 듣고 열 뻗쳐서 이혼했잖아.
  잘못 했다고 싹싹 빌었으면 머리끄덩이 몇 번 돌리고
  계속 살았을 걸?
  남자란 동물이 원래 그런 거야. 뻔히 보이는데 눈 한번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한...가만, (돌아보는) 너 모르는 여자 맞잖아.
  눈인사 몇 번 했다고 아는 여자면 대한민국이 다 친구 먹겠다.
  안 그래?
수아  (짧게 한숨, 건성으로 잡지 넘기는) 너하고 무슨 대화를 하겠냐.
춘자  그렇잖아. 네 말 대로면 사생팬들은 죄다 오빠들하고 살림 차려야
  돼. 눈만 뜨면 마주치니까.
수아  알았으니까 머리나 볶으셔.
춘자  수아야, 나의 자랑 전교 7등 채수아씨!
  이제 그만 정신 차리시지? 여섯 달 뒤면 이대 들어간 여자 되잖아.
  쭉쭉빵빵에 머리까지 꽉 찬 니가 뭐가 아쉬워서 임자 있는
  노땅한테 기웃거리는데? 
수아  임자 없어. 있다고 해도 상관 안 해.
춘자  진짜 미쳤네, 이거...
수아  아 몰라, 몰라. 말 시키지 마.

수아가 잡지를 넘기다가 얼음처럼 굳는다. 
춘자가 그런 수아를 멀뚱히 보는데, 수아의 얼굴에 갈등하는 표정이 스친다.
이어 결심한 듯 갑자기 쫙! 잡지를 찢더니 미용실 밖으로 튀어 나가는 수아.

춘자  야! 어디가!
여주인  고춘자.
춘자  (돌아보는) 춘자 아니라니까요!
여주인  (도끼눈 뜨는, 바리깡 드는) 원상복구 해놔. 확 밀어버리기 전에.
춘자  (울상이 되는)

#15 이씨서가 / 낮
책상에 앉아 지우와 찍은 사진을 보는 영재, 뭔가가 생각난 듯 일어나더니
등 뒤의 개인 서고의 책들을 뒤지기 시작한다.

어느새 책상엔 책들이 너저분하게 쌓여있고, 영재는 뭔가에 홀린 듯 열중해서
책을 뒤진다. 영재가 마지막 남은 책인 ‘백 년 동안의 고독’ 을 반쯤 빼는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린다.
책에서 손을 떼는 영재, 뒤돌아보면 들이닥치고 있는 수아.

수아  (잡지 면 책상에 내려놓는) 찾았어요!

영재가 내려 보면 찢긴 잡지 면이 눈에 들어오는데 사진 속의 배경처럼
온갖 색상의 포스트잇으로 천정과 벽면이 도배된 까페 사진과 소개 기사임이
드러난다.

수아  선셋 카페. 사진 속의 장소와 똑같아요!
  그 여자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영재  (잡지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수아  무...무슨 짓이에요!
영재  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수아  아저씨완 상관있잖아요. 사고 전에 사귀었던 사람일 수도 있고...

아차, 하는 얼굴이 되는 수아.
살벌한 얼굴로 일어나 다가서는 영재.
뒷걸음을 치는 수아.

영재  무슨 뜻이지?
수아  그...그게...
영재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수아  그...그만 해요.

턱, 책장에 등이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된 수아.   
 
영재  말해! 사고 난 걸 어떻게 아냔 말이야!
수아  우...우연히 들었어요!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영재  (멈칫하는)
수아  1년 동안 방안에만 처박혀있다 다시 문 연지 얼마 안 됐잖아요.
  동네 사람들 다 알아요. 아저씨만 모른다구요!

영재를 밀치고 서가를 나가는 수아.
쾅! 책장을 세게 치는 영재.

영재  나만 모르고 모두가 안다...나만 모르고...나만...

책장에 머리를 대고 괴로워하는 영재.

#19 놀이터 / 저녁
고개를 숙인 채 터벅터벅 걸어오다 그네에 푹 주저앉는 수아

수아  누군 뭐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아?
  안쓰러워서...맘에 걸려서 그런 건데...툭하면 꺼져라,
  다신 오지 마라...

이때 문득 아래를 보면, 옷 밖으로 나와있는 목걸이인데...팬던트가 일반 열쇠다.
열쇠를 꼭 쥐며 시무룩해지는 수아.

수아  (슬픈) 못 됐어...정말...

#20 수아의 집 앞/ 밤
불이 켜진  집.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곤 안으로 들어가는 수아.

#21 수아의 집 안
문을 열고 수아가 들어오면 진한 화장의 엄마가 늙은 남자(박사장)와 술을 마시고 있다. 거나하게 취한 듯 둘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둘.
이때 수아가 티비 옆 탁자 쪽을 보면,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가 엎어져있다.
싹, 굳어지는 수아.

엄마  (손들며)어이~ 딸 왔능가? 인사드려라, 대성목재 박 사장님~
수아  (경멸스런 눈으로 보는, 쾅!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는)
엄마  저 계집애가...! (일어나려는) 저걸 그냥!
남자  (잡아 앉히는) 에이...김 여사가 참어.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쏘맥잔 주는) 자자, 한 잔 하시고~
엄마  (수아 방문 흘기곤 쏘맥을 벌컥이는)
남자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옳지~ 그렇지~ 자알 넘어 간다~

#22 수아의 방 / 밤
책상과 작은 책장, 옷걸이에 1인용 침대로만 구성된 단출한 내부.
문 잠금 버튼이 눌려있고, 이중 잠금 장치까지 채워진 방문.
팬 하면,  교복 채로 침대에 엎드려있는 수아.
밖에선  젓가락 치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파묻은 수아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23 영재의 방 / 밤
스탠드 불빛 아래 멍하니 앉아 있는 영재.
화면, 책상 위를 훑으면 여인의 사진, 사법시험 합격증서, 혼자뿐인 주민등록 등본 등이 놓여있다.

영재  고아, 헌책방 주인, 기억상실, 사법 고시, 내가 모르는 여자,
  그리고 날 아는 여자...
  뭐가 더 남았지? 얼마나 더!!!

쾅! 책상을 내리치며 괴로워하는 영재.

(시간경과 - 새벽)

협탁 위에 놓인 수면제 두 알, 물 잔, 그리고 전자 탁상시계.
침대에 앉아 수면제 너머의 전자 탁상시계를 바라보는 영재, 새벽 4시 40분이다.
수면제 한 알을 더 꺼내더니 모두 모아선 입에 털어 넣는 영재, 침대에 시체처럼
눕는다.

화면이 수면제의 효과와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듯 일렁이며 천천히 이동해서 전자 탁상시계를 잡으면 4시 58분.
59분으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아악!!!! 영재의 신음 소리.
화면 빨리 영재를 잡으면,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영재.
시간을 확인하곤 절망하듯 일그러지는 영재, 머리를 쥐어뜯는다.

영재(NA) 악몽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이 시간이다...
  (무릎에 얼굴 묻는) 4시 59분...1초의 어긋남도 없는 그 시간...

#25 수아의 집 / 아침
교복에 책가방을 메고 방에서 나오는 수아.
거실은 간밤의 술잔치로 술병들과 안주거리들이 널브러져 있고 안 방에선
엄마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티비 옆 탁자로 가서 엎어진 가족 액자를 다시 세워 놓는 수아.

문을 열고 나가다, 고개 돌려 액자를 한 번 더 보곤 침울한 표정으로
문을 닫는 수아.
 
#26 학교 운동장 /  낮
체육시간, 모두들 체육 활동 중인데 수아만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다.
춘자가 눈치 살피며 옆으로 앉는다.

춘자  또 그 생각이냐?
수아  ...
춘자  쯧쯧...이 정도면 병이다, 병.
  안 되겠다. 어디 가서 검사라도 좀 받자. 응?!
수아  ...
춘자  (수아 흔드는) 야아...
체육(소리) 고춘자!
춘자  에이 씨...(보면 체육 선생이 부릅뜨고 서 있는)
체육  이 자식은 틈만 나면 짱 박히네. 당장 안 튀어 나가!
춘자  새임 눈에 저만 보여요?!!
체육  (수아 보는, 나긋한) 수아, 어디 아프니?
춘자  (어이없는)
수아  (쳐다보지도 않고) 터졌어요.
체육  (민망한) 어...그래...진즉 말하지 않고. 양호실 가서 좀 쉬어라.
수아  (체육에게 인사를 한 뒤 사라지는)
체육  (춘자 째리는) 넌 왜 개기고 있어?
춘자  저도 터졌어요. 첫날이라 아주 콰알콸!!!
체육  (춘자의 볼 따귀를 댕기는) 그 놈의 생리는 한 달 내내 터지냐?
  맨날 터진다는 놈이 혈색 좋은 거 봐라, 이거. 
춘자  (끌려가며) 아악! 이번엔 진짜라니까요!!!! 아악!!!

#27 이씨서가 밖 / 낮
굳은 얼굴의 수아가 멀리 학교를 등지고 걸어 내려온다.
이씨서가 쪽은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데, 저만치 앞에서 서있는 영재를 발견한다.
수아가 멈춰서면, 영재가 천천히 다가와 앞에 선다.

영재  소리쳤던 것 사과하마.
수아  신경 안 써요, 그런 거...그러니까 아저씨도 신경 쓰지 마요.
  (지나치는)
영재  (돌아서는, 수아의 뒤에 대고) 내 얘기를 하고 싶어. 아직도 듣고
  싶다면...
수아  (멈추는)
영재  투 스트라이크... 아직 하나 남은 것 같다만...

#28 이씨서가 안 / 낮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앉은 두 사람.

영재  눈을 떴을 땐 내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랬다니까 그랬을 거라 믿을 뿐이지.
  필사적으로 나 자신을 찾는데 매달렸어.
  33살에 서울 출생, 미혼에 부모형제 없는 고아, 기타 등등.
수아  (그제야 영재를 보는) 친구는요?
영재  입원해 있는 동안 누구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어.
  단 한통의 전화도, 아니 흔한 안부 문자조차 없었지.
  무려 2년 동안이나 기다렸지만 그 누구도... 날 찾지 않았어.
수아  (고개 숙이는) 그랬...군요.
영재  처음엔 사람들을 원망했지만 나중엔 원인이 내게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점점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두려워졌어.
  예전의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겁이나 차라리 이대로 사는 게
  좋겠다 싶었어. 그런데 그때...그 지갑이 되돌아 온 거야.
  사진 속의 여자와 함께...
수아  찾을 수 있어요.
영재  찾으면?
수아  (고개 들어 보는)
영재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 여자도 날 찾지 않은
  사람들 중에 하나일 뿐이야.
수아  못 찾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요.
영재  난 여전히 여기에 살고 있고 전화번호도 바꾸지 않았어.
  찾지 못하는 게 아니라...찾지 않는 거야.
수아  하지만...
영재  (말 끊는) 때론...묻어두어야 할 기억이란 것도 있는 거야.
  그러니까...그만 하자.
수아  찌질이.
영재  (뜻밖의 말에 멈칫하는)
수아  겁쟁이, 바보, 머저리.
영재  너 정말!
수아  (눈물 글썽, 버럭 하는) 왜요?! 그 여자가 죽기라도 했을까 봐요?!!!
영재  (얼어붙는)
수아  (일어서는) 다신 안 와. 평생 그렇게 도망치며 살아요!(뛰어 나가는)
영재  (망연한 얼굴로 사라지는 수아 보는)

#29 이씨서가 밖 / 낮
이미 저만치 달려 나간 수아, 목에 걸린 열쇠를 잡아 뜯는다.
이씨서가를 분한 듯 노려보더니, 길 옆 개수구 근처로 던져 버리는 수아.

#30 영재의 방 / 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영재.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는다.

#31 영재의 꿈
#1의 장면에 더해서, 누군가에게 화난 목소리로 소리치는 영재.
헤드라이트가 달려오면, 영재의 비명에 더해지는 누군가(지우)의 날카로운 비명에
이어지는 충돌음.

#32 영재의 방/ 새벽
잠에서 깨는 영재,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있고 푹 꺼진 눈엔 절망감이
가득하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영재.

#33 이씨서가 안/새벽
내실 쪽에서 문을 열고나오며 불을 키는 영재.
영재의 초췌한 시선으로 보면 책상 위에 마구 흐트러져 있는 책들.
책들을 주섬주섬 주워 책장에 꽂으려는데, 덩그러니 홀로 책장에 꽂혀있는
‘ 백 년 동안의 고독’이 눈에 들어온다. 
들고 있던 책들을 책장에 놓고, 그 책을 꺼내서 펼치면 씨디 한 장이 끼어있다.
시디엔 ‘2004. 5, 14, 한강공원’. 시디를 든 손끝만큼이나 떨리는 영재의 눈동자.

#34 영재의 방 / 새벽
어두운 방. 노트북에 시디를 넣는 영재. 잠시 암전에서 화면 환해지면,
눈이 시리도록 화사한 봄날의 오후 어느 공원에서 얼굴을 가리며 쑥스러워하고, 때론 환하게 웃고, 카메라를 든 영재에게 장난치곤 도망치고, 빵빠레를 장난스럽게 먹는 지우의 모습이 과다 노출되어 더 아련하게 느껴지는 화면으로 보여 진다.

화면에 빠져들듯 몰입하는 현재의 영재.
이때, 잔뜩 클로즈업 된 얼굴로 마치 현재의 영재에게 묻는 것처럼 말하는 지우

지우  매일 볼 텐데 뭐 하러 자꾸 찍어?
영재(E)  음...지금의 모습은 지금밖에 볼 수 없으니까~
지우  기억하면 되잖아. 좋은 머리 뒀다 어따 쓸래?
영재(E)  기억하지 못 할 수도 있잖아.
지우  그럴 일 없어. 난 네 눈을 처음 본 날, 네 손의 감촉, 숨소리...
  모두 기억해. 하나도 빠짐없이...

이때 둘이 포옹을 하는 듯 카메라가 땅을 찍다가 끊기면, 어두워지는 화면.
다시 되돌려 보는 영재.
“ 그럴 일 없어...” 부터의 대사가 다시 나온다.
이때 영재가 떨리는 손을 뻗더니 화면 속 지우의 뺨을 만지면, 마치 지우가
대답하는 것처럼 “ 네 손의 감촉, 숨소리...모두 기억해. 하나도 빠짐없이...” 하는 대사가 이어진다.
그런 지우를 보며 눈물이 맺히는 영재.

#35 교실 안 / 낮
칠판에 두보의 귀안을 쓰는 여선생님. 창가에 앉은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목 부분을 매만지다 열쇠를 버렸음을 깨닫고 굳어진다.

선생  두보의 귀안이라는 시조다. 해석해 볼 사람?
아이들  (조용)
수아  (열쇠 생각에 골몰하는)
선생  없어? 이것들이 단체로 꿀을 먹었나. 고전문학 쌩 까다간
  등급 말아 드신다고 했어, 안 했어! 
수아  (결심한 듯 벌떡 일어서는)
선생  그래, 수아.
수아  (뒷문으로 뛰어 나가는)

선생, 어이없고 아이들도 황당한 얼굴.

#36 열쇠 버린 곳 근방 /낮

수아가 쭈그린 채 열쇠를 찾고 있다. 여기저기 보다가 개수구 쪽을 보면, 그 안에
있는 열쇠. 수아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친다.

(시간 경과)

입 안 가득 껌을 씹는 수아. 꼬챙이에 껌을 붙이더니 조심스럽게 안으로 밀어 넣어
열쇠를 꺼낸다. 수아가 땀 범벅된 얼굴로 환히 웃는데 그림자가 등 뒤에서 드리운다. 수아가 돌아보면 초췌한 얼굴의 영재다. 재빨리 열쇠를 뒤로 감추는 수아.

영재  그 까페...어디라고 했지?

#37 시외버스 안 / 낮
텅 빈 시외버스. 맨 앞자리에 할머니 한명 앉아있고 영재와 수아는 중간쯤에
앉아있다. 이때, 수아의 시선으로 낮은 언덕 위엔 조그맣고 예쁜 하얀 집이 보인다.

수아  와...저기 좀 봐요.
영재  (보는 둥 마는 둥)
수아  아...멋지다. 저런 집에서 예쁘고 어.린. 와이프랑 살면
  행복할 것 같지 않아요?
영재  ...
수아  (시무룩, 다시 차창 보는)
영재  왜 나지?
수아  뭐가요?
영재  네 말대로 난 찌질이에 겁쟁이일 뿐일지도 몰라.
  그런데 왜 하필 나 같은 사람을...
수아  좋아하냐구요?
영재  ...
수아  처음엔 고마웠고, 그 다음엔 좋아졌고, 그리고 지금은...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영재  고맙다니...?
수아  (피식) 그런 게 있어요.

다시 창밖의 하얀 집을 바라보는 수아.
영재도 보면, 언덕 위의 하얀 집이 수아의 머리 뒤쪽으로 사라져 간다.

#38 까페 선셋으로 이르는 길. / 낮
아담한 교외의 까페를 향해 걸어가는 둘.
까페가 다가올수록 영재의 표정이 무거워 진다.

#39 까페 안 / 낮
사진을 받아들고 유심히 보는 초로의 카페 주인.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영재와 수아.

주인  (갸우뚱)글쎄요...기억이 나질 않네요. 미안합니다. (사진 건네는)
수아  (실망하는)
영재  (사진 받아 지갑에 넣는) 아닙니다, 괜한 폐를 끼쳤네요.
수아  다시 한 번 봐주실래요? 혹시 생각이 날지도...
주인  (난감한)
영재  그만하자. 난 괜찮아. (주인에게 눈인사) 그럼...
수아  사진 줘봐요.
영재  수아야.
수아  어서요!

사진을 뺏듯 받아서 유심히 보더니 5년 전에 둘이 앉았던 자리를 확인하는
수아. 자리 앞에 서서, 벽면에 가득한 포스트잇을 바라보는 수아.

수아  분명히 이 근처일 거야.
영재  붙이지 않았을 수도 있어.
수아  (픽 웃는) 아저씬 여자를 몰라요.
영재  너 설마...
수아  (귀엽게 웃으며 윙크하는)

(시간 경과)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영재.
노을이 커피 잔을 물들이고 있다. 영재가 돌아보면, 수아가 포스트잇을 일일이 떼었다 붙이면서 확인하고 있다.
다시 노을 보며, 후우...긴 한숨을 쉬는 영재.

이때 영재의 앞으로 서는 수아.
땀을 뻘뻘 흘리며 환하게 웃으며 포스트잇 하나를 내미는 수아.

수아  이름 예쁜데요?

영재가 받아서 보면, 2007, 10, 18. 영재♥지우. ‘ 사랑해, 영원히...’ 이라 써져있다. 감전된 듯 포스트잇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영재.

영재  (읊조리듯) 지우...

이때 영재의 귀에 들리는 4년 전 영재의 목소리

과거 영재(E) 야, 한지우.

영재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면, 사진 속의 그 자리에 4년 전의 풋풋한 영재와
지우가 앉아있는데, 지우는 포스트잇에다 뭔가를 쓰고 있다.
얼어붙는 현재의 지우.

지우  말시키지 마.
과거 영재 하여간 여자들이란...
지우  미신이 아니라 바램이야. 원가 십 원짜리 소원.
과거 영재 뭐라고 썼는데?
지우  비밀~ (다른 포스트잇의 안쪽에 붙이는)
과거 영재 보지도 않을 걸 하러 붙여?
지우  어차피 배고파질걸 뭐 하러 밥 먹어?
     
픽, 웃는 과거의 영재. 킥킥, 웃는 지우.
이내 하하하~ 유쾌하게 웃는 둘.
그 둘을 먹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현재의 영재.

수아  아저씨...아저씨.
영재  (문득, 정신을 차리는) 으응?
수아  괜찮아요?

영재가 다시 보면, 지우와 과거의 영재는 사라지고 없다.

영재  아...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머뭇거리듯 말하는 영재를 뭔가 있는 듯 보는 수아.

#40 돌아오는 버스 안 / 저녁
멍하니 창밖을 보는 영재를 슬쩍슬쩍 훔쳐보는 수아. 

수아  내가 모르는 거 있죠?
영재  ....
수아  아저씨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요. 그렇죠?

이때 막 교차로를 도는 버스, 반대편 차선에서 앰블런스가 요란한 싸이렌을
울리며 지나쳐간다.
놀란 영재의 시선이 앰블런스를 따라가면 우뚝 서있는 ‘성혜병원’의 들어온다.
표정이 굳어지는 영재, 감전 된 듯 벌떡 일어나 운전석으로 달려간다.
 
수아  (놀란) 아...아저씨?
영재  차 좀 세워 주세요. (발악하듯) 차 세워요, 당장!!!
수아  (멍한 얼굴로 영재 보는)

#41 광주 성혜 병원 / 밤
외부로 난 병원 응급실 출입구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영재.
30미터쯤 떨어져서 뛰어오다가 멈추곤 거친 숨을 고르는 수아, 이를 악물고
영재가 사라진 곳을 향해 뛰는 수아.

#42 응급실 밖 - 안 / 밤
응급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헤집고 다니는 영재.
커튼 뒤의 침상엔 여기저기 깨지고 다친 환자들이 누워있다.

간호사1  무슨 짓이에요!
영재  (다른 커튼들을 젖히며 확인하는)
간호사1  (간호사2에게) 보안요원 불러.
간호사2  (문 쪽으로 뛰어가는)

미친 듯 다른 커튼들을 젖히며 확인하는 영재, 구석 쪽의 커튼을 여는 순간
얼어붙어 버린다. 안에선 피투성이가 된 과거의 영재를 응급조치 하는 의사, 간호사들로 북적인다. 삐...소리와 함께 바이탈이 수평선을 그린다.

간호사3  어레스트에요.
의사  제세동기!
간호사3  (제세동기에 젤 바르고 건네는)
의사  200줄 차지.
간호사3  200줄 준비 됐습니다.
의사  샷!
과거 영재 (가슴이 퉁겨 오르는)
의사  (바이탈 움직임 없자) 한 번 더, 샷!

맥없이 퉁기는 과거의 영재를 보던 현재의 영재 시선으로 옆 침상의 커튼이
눈에 들어온다. 영재가 떨리는 손으로 커튼을 열면, 피투성이에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지우가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다.

영재  지...지우야...(절규하듯) 여...여기 좀 와주세요. 누가 좀 도와줘요.
  (반응 없자) 내 말 안 들려?!!! 이 여자 살려내란 말이야!!!

이때 인턴과 간호사가 지우의 옆으로 급히 붙는다.

인턴  (청진기로 급하게 진찰하곤) 화상 외과 호출했어요?
간호사  오고 계십니다.
 
이때 지우의 다리 사이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하는 인턴.
숨이 멎을 듯 충격을 받는 영재.
 
인턴  산부인과!!  빨리!!!
간호사  (재빨리 뛰어나가는)

하혈 부위를 응급처치를 하는 인턴을 넋이 나간 얼굴로 보는 영재.
무릎을 꿇더니 눈물, 콧물 범벅 되서 지우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 절규하는 영재.

영재  안 돼...안 돼...지우야...제발...으흐흑...

현재의 간호사1을 비롯한 주위 환자들도 텅 빈 침상을 잡고 울부짖는 영재의 광기에 움찔한다. 이때 수아가 간호사1의 옆에 선다.
빈 침상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영재를 멍하니 바라보는 보안요원, 간호사, 레지던트.
이때 영재에게 다가가는 수아.
가만히 영재의 들썩이는 어깨를 손으로 감싸는 수아.
으흐흑! 오열하면서 수아의 품에 안기는 영재.
그런 영재를 꼬옥 안아주는 수아의 뺨에도 눈물이 흐른다.

#43 응급실 밖 /밤
대기 의자에 앉아있는 영재와 수아. 레지던트와 보안요원이 그 앞에 서있다.
영재는 다소 진정됐지만 눈에 띄게 초췌해 보인다.

레지던트 심정은 이해하지만 환자의 신원을 알려 드릴 순 없습니다.
영재  살았...나요? 그것만 알려주세요.
레지던트 죄송합니다. 확인해 드릴 수 없습니다.
영재  혼자가 아니었단 말이야!!!! (머리를 쥐어뜯는)
  혼자가 ...아니었다고...흑흑...혼자가...으흐흑....
수아  (입을 막고 울음 참는)
레지던트 환자의 치료내역이나 사망여부는 오직 가족에게만 확인 또는
  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만...( 보안요원에게 눈짓하는)

보안요원이 영재를 일으키려 하자 거칠게 팔을 쳐내는 영재.
힘겹게 일어서더니 비틀거리며 응급실 복도를 걸어 나가는 영재.
그런 영재를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수아.

#44 이씨서가 앞 /밤
넋을 잃은 듯한 얼굴로 걸어오는 영재. 한 걸음 뒤로 조심스럽게 걷는 수아.

수아  ...살아 있을 거예요. 반드시...
영재  (멈추는, 수아 돌아보는)
수아  (멈추는,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는)
영재  힘든 하루였어. 그렇지?
수아  (고개 끄덕이는)
영재  쉬고 싶어...지금은...(돌아서는)

이때 고개 숙인 채로 영재의 소매를 잡는 수아.

수아  (눈물 흘리는)분명히 살아있어요...그러니까 포기하지 말아요.

영재가 말없이 걸음을 떼면 수아의 떨리는 손가락이 소매에서
떨어진다. 영재가 서가의 문을 열고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서있는 수아. 
  
#45 수아의 집 / 밤
힘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아.

수아  다녀 왔...

수아가 보면, 누구와 싸웠는지 머리는 산발을 하고 옷은 여기 저기 찢긴 채로
쏘주로 병나발을 불고 있는 엄마 보인다.

엄마  딸 왔어?  미아안, 엄마가 쫌 취했네...? 꺼억~
수아  또 싸웠어?
엄마  싸웠지. 그것도 귀신하고 아주 대에판 했지~ 크크크~
  (나발 한번 불고) 박 사장, 그 개 같은 인간이...뭐? 외로운
  사람들끼리 의지하면서 살자고...? 그래, 좋다 이거야.
  살지 뭐. 까짓 거 못 살 게 뭐있어. (버럭) 근데 왜 죽었다는
  여편네가 튀어나오냔 말이야!!! 왜 내 머리끄댕이를 돌리는데에!!!!   왜에!!!
수아  (참담하게 일그러지는)
엄마  (눈물)내가...이 김말숙이가...으흐흑...어쩌다 이 꼴이...으흐흑...
  (가족사진의 아빠 보며) 이게 다 저 인간 때문이야...뒈지려면 그냥
  콱 뒈져버리던가! 마지막까지 쪽쪽 빨아먹고...땡전 한 푼까지
  바락바락 긁어서 저승길 노잣돈으로 쓸어간 인간이야, 저 인간이!!!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 알아?!!! 너 때문에...으흐흐흐흑...
  
무너져 통곡하는 엄마를 보다가, 힘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수아.

#46 수아의 방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세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수아.
밖에선 엄마의 통곡 소리가 계속해서 들린다.
수아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그렇게 오랫동안 수아가 운다.

#47 하교길- 이씨서가
시무룩한 수아, 옆엔 춘자가 게걸스럽게 핫바를 먹으며 하교 중이다.

춘자  진짜 안 드셔?
수아  ...
춘자  웬일이래? 두 개씩 처묵처묵 하는 지지배가.
  (팔꿈치로 수아 옆구리 살짝 찌르는) 왜? 콩닥콩닥이 속 썩여? 응?
  
이씨서가 앞에 멈추는 수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본다.

춘자  (알았다는 듯) 아항...견적 딱 나오네.
  어쩐지 너무 달라붙더라. 지가 무슨 쇠파리도 아니고 말야.
  자고로 밀당은 필수, 내숭은 선택이야.
  적당히 거리 두다가, 응? 좀 식었다 싶음 고마 손 한번 잡아주고...
  확 달아올라서 막 들어오믄 (부끄러운 연기하는, 배배꼬는)
  아이...왜 그러세요옹~ 이러면서 내숭 한번 작렬시키고...응?
  아무튼 여자가 너무 들이대믄 남잔 도망치게 돼있어.
  그게 수컷의 본능이거든. 암~ (핫바 씹는)
수아  (한숨 쉬는)
춘자  너 솔직히 말해봐. (은근슬쩍) 키스했지?
수아  (빡! 춘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걸음 떼는)
춘자  (뒤통수 잡고 고개 숙이는) 악! (고개 드는) 왜 때려!!!
수아  (저만치 가는)
춘자  (수아 뒤 따라가는) 물어 보지도 못해? 궁금한 게 죄냐? 엉?

수아와 춘자가 화면 밖으로 사라지면, 카메라는 계속 닫힌 이씨서가를 잡는다.

춘자(E)  그럼 뽀뽀는? 표정 봐라 이거, 쯧쯧, 했네, 했어!

빡! 때리는 소리와 춘자의 비명소리 등이 점점 멀어지면 화면은 여전히 이씨서가의 굳게 닫힌 문을 잡는다.

#48 이씨서가 안
어두운 방안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영재.
주위엔 빈 소주병이 뒹굴어 다닌다.
눈꺼풀이 떨리더니 힘겹게 눈을 뜨는 영재.

#49 거리들- 몽타주 / 낮과 밤 교차
인사동, 대학로, 홍대 등등을 홀로 걷는 초췌한 몰골의 영재.
거리는 연인들로 가득차서 모두들 행복해만 보인다.
폐인처럼 거리를 비틀거리며 배회하는 영재.

#50 홍대 까페 앞 / 밤
분위기 좋은 까페 앞에 멈춰서는 영재,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간다.

#51 홍대 까페 안 /밤
연인들 몇 커플이 앉아 있는 내부.
영재가 들어오더니, 테이블이며 의자 등을 손으로 쓰다듬고 다닌다.
여자들은 ‘뭐야 저 사람?’ 하거나 놀라고, 남자들은 발끈해서 노려보거나 한다.
이때 영재가 의자에 걸려 여자1의 커피를 쏟아버리자, 남자1이 주먹을 날린다.
테이블 하나를 엎으며 쓰러지는 영재.
비명을 지르는 나머지 여자 손님들. 달려오는 직원들.

#52 홍대 까페 밖 / 밤
직원들에게 떠밀려서 문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영재.
터진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영재.
크크크...허탈하게 웃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53 이씨서가 앞 / 밤
지친 얼굴로 이씨서가를 향해 걷는 영재.
이씨서가로의 계단엔 수아가 앉아있다.

영재  (다다 가서 서는) 까페에서 그녀를 봤어. 병원에서도...
수아  알아요.
영재  함께했던 장소를 가면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서울의 모든 곳을 뒤지기 시작했어.
  유명한 데이트 코스...맛 집들...하지만 어디서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어. 단 한 번도 그런 곳에 데리고 다니지 않았던 거야.
  도대체 난 그녀에게 뭘 해줬던 걸까?
  사랑하긴 했던 걸까...?
수아  ....

열쇠를 꺼내 셔터 자물쇠를 여는 영재.
셔터가 올라가고, 안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영재. 

수아  아저씬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건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영재  나도...그랬으면 좋겠다.
수아  그땐 고마웠어요.
영재  (멈칫하는) 그때?
수아  (일어서서 목걸이 열쇠를 풀고 내미는)

영재가 받으면, 손에 똑같은 두 개의 열쇠가 놓여있다.

영재  이걸 네가 어떻게...
수아  걱정 마요...훔친 건 아니니까.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수아.
수아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영재, 돌아서다가 뭔가가 생각났는지 확!
얼굴을 돌리면, 교복 브라우스의 단추가 떨어지고, 머리가 흐트러지고 뺨은 붉게
부어오른 3년 전의 수아가 현재의 영재를 스치고 지나가더니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과거 수아 도...도와주세요...

영재가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책을 보던 3년 전의 영재가
수아에게 다가간다. 현재의 영재도 놀란 눈으로 책방 안으로 들어간다.

과거 영재 괘...괜찮아요?
수아  저 좀 숨겨 주세요. 제발...
과거 영재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때 쾅! 문을 세게 열며 안으로 들어오는 만취한 수아의 의부인데 얼굴이 손톱에 긁혀 피가 흐르고 있다.  

의부  햐...이년 봐라. 오갈 데 없는 것들 거둬서 쌔빠지게 먹여 살렸더니
  지 아비 얼굴을 이 꼴로 만들어? 엉?
수아  누가 아버지야!!! 세상 어떤 아버지가...흑흑...

풀어 헤쳐진 가슴 부위의 옷깃을 여미며 우는 수아.
과거의 영재의 눈에서 불이 인다.

의부  그 어미에 그 딸년이라더니...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뭐?
  누가 아버지야아?! 너 일루와! 오늘 아주 작살을 내버릴 테니까!
  (위압적으로 다가가는)
과거 영재 (막아서는)
의부  넌 또 뭐야? 아하... 저 년이랑 붙어먹었구만.
  내 이럴 줄 알았지. 자알들 논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벌써부터 오입질이나 하고 다니...

의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부의 얼굴에 작렬하는 과거 영재의 주먹
우당탕, 의부가 나가떨어지면 올라타서 계속 주먹을 날리는 과거 영재.
의부가 피떡이 되서 뻗었는데도 주먹을 날리려는 과거 영재의 팔을 잡는 수아, 눈물 가득한 고개를 젓는다. 그런 수아를 보더니 주먹을 내리는 과거 영재.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현재의 영재가 손에 든 열쇠를 꽉 쥐더니, 밖으로 달려 나간다.

#54 동네 공원 / 밤
공원에서 고개를 숙인 채 그네를 타고 있는 수아.
이때 빵빠레가 수아의 앞으로 쑥 들어온다.
수아가 보면, 이미 빵빠레를 먹고 있는 영재가 서있다.
픽, 웃더니 빵빠레를 받는 수아.

영재  (옆 그네에 앉는) 그때도 여기에 있었지?
수아  (고개 끄덕이는)
영재  내가 아이스크림을 줬고...
수아  (고개 끄덕이는)
영재  맛있네, 이거...
수아  거봐, 내가 거짓말이랬잖아요.
 
피식, 웃는 둘. 잠시 침묵

영재  그 다음엔 어떻게 됐지?
수아  (피식) 난리도 아니었죠 뭐. 그 자식은 쫓겨나고, 엄만 다시
  술집 나가고...
영재  (손에 든 열쇠를 만지작거리는) 그랬군.
수아  열쇠 주면서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영재  (수아 보는)
수아  (영재 흉내 내는) 착각하지 마. 꼬시는 거 아냐.
영재  (픽, 웃는) 멋지네.
수아  (표정 다잡고) 딱 두 번만 더 도망치라고 했어요.
  세 번짼 무슨 일이 있어도 맞서 싸우라고...그런데...
영재  오히려 내가 도망쳐버렸군.
수아  도와주고 싶었어요. 내가 받은 만큼 갚고 싶었어요.
  미안해요...도움이 되지 못 해서... 
영재  내일...사고 현장에 가보려고...(수아 보는) 혼자서.
수아  (영재 보는)괜찮...겠어요?
영재  (고개 끄덕이는) 이젠 내가 맞서야 할 때인 것 같아.
수아  부탁 하나 해도 되요?
영재  ?
수아  돌아와요. 무엇을 보든...어떤 말을 듣든...꼭 돌아온다고 약속해요.
영재  약속...할게.

눈물 젖은 눈망울로 웃는 수아.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영재.

#55 버스 / 오후
교외의 도로를 달리는 버스.
창가에 앉아 손에 쥔 지우의 사진을 만지작거리는 영재.
그런 영재의 모습 너머로, 언덕 위의 하얀 집이 스쳐 지나간다.

#56 길-몽타주- 회상.

- 정류장에 내리는 영재
- 쭉 뻗은 편도 1차선 도로를 따라 걷는 영재인데, 손에 사고 현장
  약도가 들려있다.
- 저만치 앞 급회전 길이 나오자 긴장하는 표정이 되는 영재.
- 가슴의 울림은 점점 커지고, 입술은 바짝바짝 말라온다.
- 이때 쐐애앵!!! 엄청난 속도로 앞에서 달려오자, 놀라선 몸을 옆으로 트는 영재의    모습에서, 자동차 안으로 화면 전환.

부아아앙! 엄청난 속도로 운전하고 있는 세련된 헤어스타일의 영재.
그 옆엔 굳은 시선으로 정면만 바라보는 지우.

지우  할 말 있으면 해. 들을 준비 돼있어, 난.
영재  ...
지우  자는 사람 불러내서 벌써 세 시간째 운전만 하고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영재  내일 연수원 들어간다. 
지우  알아.
영재  시험만큼 중요해. 연수원 성적에 따라 임용 여부가
  달려있어. 내가 얼마나 절실히 원해왔는지 너도 알 거야.
지우  (지그시 이를 깨무는)
영재  당분간 시간 내기 힘들 거야. 연수원 생활이란 게 여유가
  많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당분간 서로 생각해 볼 시간을 갖자.

주르르...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지우.
허벅지의 옷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린다.

영재  재수 없게 또! 도대체 왜 우는데? 사정이 있다 잖아, 사정이!!!
  그 정도도 이해 못 해?!!
지우  (간신히 침착 되찾고)이해시켜봐 그럼.
영재  (멈칫하는)
지우  고시 합격했다고 하늘에서 차가 떨어지진 않아.
  낡은 츄리닝이 고급 양복으로 바뀌지도 않고  지갑이 갑자기
  부푸는 법도 없어.
영재  그...그건...
지우  왜 우냐고 물었지?
  내가 우는 건...너와 헤어지는 게 슬퍼서가 아니야...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을 사랑했다는 게...그게 분해서 우는
  거야.
영재  (말문이 막히는)
지우  날... 사랑하기는 했니?
영재  ...
지우  차 세워.
영재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차를 세워!

INS)   자동차 시계. 4시 58분.

지우  세우란 말이야, 이 개자식아!!!!

영재가 머뭇하는데, 저만치 커브길에서 덤프트럭이 회전하면서 돌아들어온다.
영재의 차가 중앙선을 살짝 먹으면서 가자 빠아앙! 클락션을 울리는 덤프.
영재가 보면, 충돌하기 직전이다.
영재가 핸들을 확, 꺾으면 쾅! 차의 후미가 덤프에게 받치는 순간의 내부 시계는
4시 59분.

충돌하는 순간 번쩍 눈을 뜨는 현재의 영재인데, 땀에 흠뻑 젖은 채 경기하듯 몸을 부들부들 떤다.
현재의 영재가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논두렁에 거꾸로 처박힌 차의 앞부분에서 불길이 나고 있고 지우는 저만치 튕겨 나와 있다.
과거 영재는 운전석에 낀 채 꼼짝 못하고, 언제 불길이 덮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때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피투성이의 지우가 기다시피 영재에게 다가간다.
이를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는 현재의 영재가 눈물을 흘린다.

영재  그만둬...

이를 악물고 영재에게 다가간 지우가, 영재를 빼내려 기를 쓴다.

영재  하지 말란 말이야...제발...

불길이 점점 커져서 지우의 등을 덮칠 기세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사력을 다하는 지우.
아악! 모든 힘을 토해내며 문을 열면 영재의 다리가 빠진다. 사력을 다해 영재를 끌어내는 지우. 동시에 콰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폭발하는 자동차.
충격에 튕기듯 나가떨어지는 지우와 과거의 영재.

비틀비틀...넋 나간 얼굴로 불타는 자동차 주위에 널브러진 지우를 향해 걸어가는 현재의 영재. 현재의 영재가 다가가면 불타고 널브러진 상황들 모두 사라지고 평온한 해질녘 풍경이 펼쳐진다.
지우가 누워있던 자리쯤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는 현재의 영재.
흙을 두 손으로 움켜지며 흐느끼는 현재의 영재.

영재  왜!! 도대체 왜!!!! 으흐흑...

어느새 노을이 지는 길가에서 현재의 영재가 오랫동안 그렇게 운다.

#57 수아의 집 / 밤
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켜는 수아. 힘없이 방으로 가려다 멈칫하는 수아.
수아의 시선으로 보면, 가족사진 액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
당황한 표정으로 집안을 뒤지는 수아, 쓰레기통에서 깨진 액자를 발견한다.
이를 악물고 액자를 집어 들더니, 문을 박차고 나가는 수아.

#58 술집 / 밤
쾅! 문이 열리며 액자를 쥔 채 안으로 들어오는 수아.
독기 서린 시선으로 술집 내부를 살피면, 엄마가 구석 테이블에서 놈팽이 하나와
시시덕거리고 있다. 다가오는 수아를 보더니 당황하는 엄마와 뜨악하는 놈팽이.

엄마  이 기집애가 여길 어디라고...
수아  (탁자에 액자를 던지듯 내려놓는) 엄마한텐 못나고 능력 없는
  남편이었는지 몰라도 난 아니야! 엄만 병수발 지긋지긋해서 아빠 빨  리 죽으라고 빌었는지 몰라도 난 아니란 말이야!!!
  (눈물) 내... 내겐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간이었어!
  그런데 누구 맘대로 지워! 엄마가 뭔데 깨부숴!!!!
엄마  (따귀 때리는) 이런 못 된 년!  당장 못 나가!!!  
수아  (발악하듯) 엄마가 뭘 하든, 누구하고 살든 상관 안 해.
  하지만...이것만은 건드리지 마. 한번만 더 건드리면...
  그땐 가만 안 있어! 절대로!!!

독기 그대로 돌아서는 수아. 참담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는 엄마. 

#59 술집 밖/ 밤
뛰쳐나온 수아가 분기가 가시지 않는 얼굴로 술집을 노려보더니
들고 있던 가족사진을 본다.
결심한 듯 이를 악물더니 엄마가 있는 부분을 찢어가는 수아.
막 엄마의 얼굴이 찢겨지기 직전...차마 찢지 못하고 멈추는 수아 그대로 돌아서
뛰어간다.

#60 수아의 방 / 밤
문을 등진 채 침대에 누워있는 수아, 베갯잇이 축축하다.
이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 그리고 닫히는 소리.
이어 방문이 열리면 눈을 감는 수아.
엄마가 천천히 다가와 등을 돌린 채 침대에 걸터앉는다.

엄마  그래, 엄만 술 없이 못살고 남자 없이
  못 살아...돈에 한이 맺혀서 돈 없이도 못 산다.
  그런데...엄만...너 없음...정말이지...단 하루도...살 자신이 없어...
수아  (눈물 흘리는)
엄마  이해해 달라곤 안 해.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아줘.
  사진 속의 그 때는...내게도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간이었다는 걸...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엄마, 이때 엄마의 손을 잡는 수아의 손.
시간이 멈춘 듯 꼼짝도 하지 않는 둘. 소리 없는 흐느낌 속에서 더욱
손을 꽉 잡는 엄마와 수아.

#61 길- 이씨서가 / 아침
힘없이 터벅터벅 등교하는 수아의 시선으로 이씨서가 앞에 세워진
이삿짐 차가 세워져 있고 두 명의 일꾼이 바삐 짐을 나르고 있다.
뛰어가는 수아.

수아가 이씨서가 안으로 들어가면 안채에서 영재가 한 꾸러미의 법률책을
들고 나오고 있다.
수아의 앞에서 멈추는 영재, 책을 밑으로 내려놓고 땀을 닦는다.

영재  휴우...무겁네.
수아  하지 말아야 할 건 죄다 써놓은 거니까요.
영재  (피식) 오랜만이야.
수아  아저씨도요.
영재  (아래 책을 보며) 혹시 법대 갈 생각 있으면...
수아  (미소)전혀요.

어색한 침묵

수아  언니...봤어요...?
영재  (표정 어두워지는, 고개 끄덕이는)
수아  미안해요...(고개 숙이는)
영재  나... 지금 도망치고 있는 걸까?
수아  (고개를 젓는)
영재  (후우...한숨을 쉬더니) 가게는 넘겼다. 새 주인에게 말해 놓을 테니
  책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수아  열쇠...가지고 있어요?
영재  (주머니에서 꺼내는) 소용없을 거야, 이제.
수아  알아요.

영재가 건네면 수아가 받아 쥔다.

수아  도망치고 싶어질 때...그 때마다 꺼내 볼 게요.
  딱 두 번만...
영재  그래, 딱 두 번만...

이때, 영재의 뒤쪽에서 일꾼이 리본으로 묶여 있는 작은 박스 하나를 들고 나오는데, 쌓인 먼지가 딱지처럼 굳어졌다. 

일꾼  사장님요.
영재  (돌아보는)
일꾼  (박스 들어 보이는)이것도 짐인가요? 쓰레기 하고 분간이 안 가서...
영재  (머뭇거리는) 그런 게 있었나...?
수아  쓰레기를 리본으로 묶진 않아요.
일꾼  그렇...겠죠?
영재  이리 주세요. (손 내미는)
일군  (건네고 가는)

받아서 법률 책 위에 놓고 자세를 낮춰 리본을 푸는 영재.
영재가 뚜껑을 열면, 카드, 사진, 편지 등등이 수북이 쌓여있는데
모두 지우와 보낸 사진이고 편지들이다.
일순 굳어지는 영재의 표정.
수아도 난감한 얼굴이 된다.

영재  언제나 환한 미소뿐이야...
  그게 날 더 힘들게 해...(먹먹한 눈으로 올려보는) 부탁 하나 할까?

박스를 들고 일어나더니 수아에게 내미는 영재.
받아야할지 말지 머뭇거리는 수아.

영재  간직할 자신이 없어. 버릴 자신은 더 없고...
수아  후회하지 않겠어요?
영재  후회하며 살 거야. 평생 동안...
수아  잘 보관하고 있을게요. 언제든 보고 싶으면...
영재  고맙다. 그럼...

수아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영재.
우두커니 서서 지우의 사진들을 하나 둘씩 바라보는 수아.
수아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어리다가... 마지막 종이를 든 채 경악하는 얼굴이 된다.

수아  아저씨!!!!!!!

걸음을 멈추는 영재, 돌아보면 수아가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화면이 천천히 당겨지면, 버스에서 보았던 언덕 위의 집과 똑같은 그림이다.
숨이 멎은 듯 바라보는 영재.
인서트 되는 버스에서 보았던 언덕 위의 하얀 집.
눈물 섞인 미소와 함께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수아.
영재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면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환한 웃음을 짓는다.

일꾼  (짐칸 문을 닫으며) 다 실었는데요?

이때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트럭으로 달려가는 영재와 수아.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타는 영재와 수아.
끼이익, 급출발 소리를 내며 떠나는 트럭.
멀리 사라지는 트럭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꾼들.

일꾼  저...저기요...

#62 도로를 질주하는 트럭 / 낮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영재와 수아.
한 손에 그림을 쥔 채 눈물이 가득 고여 금세라도 떨어질 듯 영재의 얼굴에서
회상으로.

#63 회상 - 펜션 / 낮
바다, 또는 강이 보이는 펜션.
순백의 침대에 누워있는 영재에게 쏟아지는 햇볕.
눈을 뜬 영재의 시선으로 발코니에서 뭔가를 그리고 있는 지우의
뒷모습이 들어온다.

영재  (앞에 앉으며) 뭘 그리는데?
지우  비밀.
영재  어디 보자~

영재가 가로채서 보면 언덕 위의 하얀 집이다.

영재  오~ 제법인데?
지우  예쁘지~
영재  창이 좀 작은 거 아냐? 이리 줘봐.

영재가 창의 크기를 늘리면 흐뭇하게 바라보는 지우.

영재  울타리는?
지우  없어, 그런 거.
영재  여자가 겁도 없어. 지붕 색깔은?
지우  하얀색. 안도 밖도 온통 하얀 집을 지을 거야.
영재  무슨 정신 병원도 아니고...

지우가 살짝 꼬집으면, 아얏! 과장되게 소리 지르는 영재.
행복한 얼굴로 품에 안기는 지우를 감싸주는 영재.

지우  꼭 지을 거야. 내 손으로...
영재  같이 짓자. 우리 손으로...

한 없이 행복한 표정의 둘에서,

#64 도로를 질주하는 트럭 / 낮
부아앙! 끝까지 엑셀을 밟는 영재.

#65 하얀 집 진입로/ 낮
끼익! 거친 파열음을 내며 서는 트럭.
영재가 튀어 내리더니 언덕으로 난 좁은 길을 뛰어간다.

#66 하얀 집 마당 / 낮
울타리 없는 마당엔 빨래를 걸 수 있는 하얀 기둥이 여러 개 박혀있고,
빨래줄 위엔 하얀 커튼과 시트 같은 넓은 천이 바람에 나풀거린다.
천천히 다가가는 영재.
바람에 천이 나부낄 때마다 천을 널고 있는 여인의 실루엣이 비친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천을 걷으며 천천히 다가가는 영재.
이윽고 마지막 천을 영재가 걷으면, 막 빨래를 널고 문득 뒤를 돌아보는 지우.

눈이 마주치자 얼어붙어 버리는 둘.
지우의 얼굴의 반쪽은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다.
떨리는 뺨. 두 사람의 눈에 가득 고이는 눈물.


영재  미안하다.
  이 것 밖에 안 되는 나라서 미안하고,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나를 사랑하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이제야 찾아와서... 정말 미안하다.

영재가 하얀 집이 그려진 스케치를 들어 보이면 눈물이 고이는 지우.
천천히, 흥분을 억누르며 다가가는 영재.
이어 부서질 듯 포옹하는 둘.

화면 쭉 빠지면, 마당에서 나풀거리는 하얀 천들 사이로 이 광경을 바라보는 수아.
눈물과 미소가 교차하는 얼굴인데, 언뜻 보면 그 둘 보다 더 행복해 보인다.

수아(NA) 내 천국의 1초는 사라졌지만 아저씨의 천국은 지금부터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언젠간 내 천국도 다시 시작될 테니까.
  그게 1초든...아님 평생이든...

수아 빠지면, 조심스럽게 지우의 화상 입은 뺨을 만지는 영재.
머뭇하다 눈을 감는 지우,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영재의 손을 적신다.
마치 처음인 듯 입술을 맞추는 둘.

#67 에필로그
-이씨서가 앞에서 화분 등을 정리하는 영재를 멀리서 바라보는 지우.
 영재가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지만, 막상 영재가 이쪽을 보면 고개를 돌리는
 지우.
-봉투에 지갑을 담는 지우, 슬픈 미소가 살짝 스친다.
-선셋 까페에서 사진을 찍는 영재와 지우의 행복한 얼굴에서,
 


 

 

 

 

 

 

 

 

 

 

 

 

 

 

 

 

 

 

 

 

 

 

 

첨부파일 낡은지갑 최종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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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ellen | 작성시간 13.06.30 재밌게 본 단막인데 감사합니다. 최신 단막 올려주셔서 ^^
  • 작성자성공현 | 작성시간 13.07.03 감사합니다~
  • 작성자다반향초 | 작성시간 14.11.17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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