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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악연] 여은희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3.10.04|조회수825 목록 댓글 1

[악연] 여은희

 

 

 

 

 

 

 

 

 

 

#1. 시골집 앞 (과거)

거칠게 대문을 열고 옥천댁(35살)의 멱살을 끌고 나오는 귀분(60살).
울면서 따라 나오는 필남(10살).
귀분, 옥천댁을 밀어버리면, 땅에 가 뒹구는 옥천댁.

필남           엄마! (옥천댁에게 달려간다)
귀분           퉤! (옆에 침 뱉고 손 털고는 들어가려고)
옥천댁         어머님예. (매달린다)
필남           엄마... (옥천댁 옷자락을 잡고 있다)
귀분           이년이! 어디를 잡고 늘어지노. 안 놓나.
               가라! 가라 카이께네! 인자 니깐 년은 우리 집안에 필요없다!
               (다시 밀어버린다)
옥천댁         (다시 매달리며) 어머님예. 어머님예.
필남이         아부지를 생각해서라도...
귀분           니 말 한번 잘했다. 내 아들이 우째 얻은 아들인데...
               그 아들을 잡아묵고...
               삼동네 흔해 빠진 아들도 하나 못 낳아가 백골 양자꺼정 들이게
               만든 기 어디서 뻐등뻐등하이 대드노 말이다.
               양자라꼬 시피(쉽게) 보지 마라. 용식이는 인자 우리집안 종손이다.
               (필남을 가리키며) 저년 저거하고는 하늘하고 땅 차이라 말이다.
필남           (발끈한다)
옥천댁         하지만... 이거는 다릅니더. 필남이 핵교를 그만두라 카시는 거는...
귀분           시끄럽다. 까시나가 공부는 무슨 공부고.
               까시나가 무슨 자식이라꼬 국민핵교꺼정 시킨다 말이고.
               내가 미칬는 중 아나?!

귀분에게 달려가 귀분의 팔뚝을 냅다 물어버리는 필남.

귀분           악! 이년이! 이년이!

귀분, 손으로 필남을 사정없이 밀어버리는데,
그만 돌맹이에 한쪽 머리를 박는 필남. 머리에서 피가 흐른다.

옥천댁         (안으며) 필남아. 필남아!

씩씩대며 집안으로 들어가는 귀분.
잠시 뒤, 대야를 들고 나와서는 옥천댁과 필남을 향해 물을 부어버리는 귀분.
그 표독스러운 얼굴.
타이틀.
 
#2. 한방병원 (현재)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의사를 보고 누워 있는 옥천댁(65살).
한의사, 옥천댁을 진맥하고 있다.

옥천댁         큰 빙은 아이겠지요...? 어떨 때는 요기...
               (윗배를 만지며) 몽우리 같은 기 만져지기도 하고...
               여는... (명치) 맨날 뭐가 걸린 거겉이 그득하고...
               가슴은 꼭 돌덩어리를 얹어놓은 거겉이 답답고...
               자다가도 벌떡벌떡 깨이고...
한의사         심장에 화기(火氣)가 많으세요.
옥천댁         화기?
한의사         울화병이라고 아시죠? 홧병이요.
옥천댁         내가 홧병이라 말이요?
한의사         살아오시면서 겪은 여러 가지 고생이나 괴로움이 속에 한을 만든 거예요.
               그 한이 뭉쳐져서 몽우리나 돌처럼 느껴지는 거죠.

(임맥 부위를 누르면)

옥천댁         (아파서 얼굴을 찡그린다) 우리 나이마 그란 거는 쪼매씩이라도 다들 있는
               기고... 나는 똑 죽을 꺼 같은데...
한의사         그것도 홧병의 한 증상이에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침이나 약으로 화기를 빼는 것밖에 없구요.
               뭣보담두, 한을 삭혀내려는 의지가 필요하세요.

(침통에서 침을 꺼낸다)

옥천댁         우째 하마 되능교?
한의사         (침을 놓으며) 계속 그냥 누르고 사시는 건 가장 안좋구요.
               말씀으로도 풀고 노래도 하시구...
               종교를 가지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옥천댁 ...
한의사         실컷 웃고 실컷 울고... 소리도 지르시구...
옥천댁         내보고 미칭게이짓을 하라 말이네.
               죽을 빙(병)이 아이라 카는 거는 다행이다만서도...


#3. 필남의 집, 마당

대문이 열리고 옥천댁, 들어선다. 그 위로,

필남(E)        글세. 그게 말이 돼?
용식(E)        누님!

옥천댁, 소리나는 쪽을 본다.

꽤 넓고 잘 가꿔진 마당. 한쪽에 테이블, 의자가 있고 필남과 용식이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쥬스. 옥천댁이 오는 것도 모르고 언성 높이고 있는 필남과 용식.

필남           그 늙은이가 다쳐서 누워있든 말든, 죽든 말든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야? 왜 우리가 그걸 신경쓰면서 살아야 하냐고!
용식           누님은 김가 아니에요?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싫어도, 좋아도 할머니잖아요.
               내 형편 뻔히 알면서... 방이 둘만 돼도 이렇게 안 오고 내가 모셔요.
               일이년도 아니고 한두 달만 어떻게 좀 돌봐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에요?
필남           ... 못들은 걸로 할게. 가봐. (일어난다)
용식           누님!
옥천댁         (다가와서) 무슨 일이고, 대관절?
필남           언제 오셨어요?
옥천댁         무슨 일이고?
필남           ...
용식           (화를 삭히다 일어서며) 어머니, 저 진짜 섭섭합니다.
               어머니, 시집사시느라 엄청 고생하신 거...
               그거 누가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하도 부탁하시고 해서 아버지 제사도 넘겨드렸는데...
               (필남 보고) 늙은이요? 죽든 말든? 하!
필남           말은 똑바로 하자. 아버지 제사, 내가 공짜로 받았니?
용식           뭐요?!
옥천댁         와 이카노들!
둘다           ...
옥천댁         용식아, 무슨 일이고? 느그 할매가 와? 죽기라도 했나?
용식           돌아가셨음 차라리 낫죠. 지난 겨울에 빙판길에 미끄러지셔서,
               가뜩이나 아픈 허리에 다리까지... 아, 됐습니다! (간다)
옥천댁         용식아!
용식           (돌아보며) 혼자 자알 먹고 잘 사슈, 김필남 교수님!
               (대문 쾅 닫고 가버린다)
옥천댁         ... (필남을 본다)
필남           ...(퉁명스럽게) 다리를 다쳐서 밥도 못해먹고 있대요.
               모셔가라고 동네사람들이 연락을 했다나봐요.
옥천댁         그란데? 용식이가 니보고 델꼬 있으라 카더나?
필남           ...걔는 안팎이 다 공장 다니잖우.
옥천댁         망할 놈. (화난 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간다)

#4. 동 작은방, 밤

누워 있기는 하지만, 잠들지 못하는 옥천댁.
엎치락뒤치락하더니, 벌떡 일어난다.

옥천댁         망할 놈. 망할 놈... 으이...

답답증. 웃옷 단추를 열어젖히고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5. 동 부엌

식탁 앞에 앉아 숟가락 드는 옥천댁.

필남           (옥천댁 맞은편에 앉으면서 밖을 향해) 지은아, 밥 먹자.
               (국 떠먹는 옥천댁을 보고) 간이 맞아요?
옥천댁         (고개 끄덕) 장서방은? 오늘 온다 안 캤나?
필남           세미나 일정이 늦춰졌대요. 빨라야 이번 주말?
옥천댁         (밥 먹는 필남을 물끄러미 본다. 물어볼까 말까?)
필남           (느끼고 보면)
옥천댁         (눈 피한다) ... 다리가 우째 다쳤는데?
필남           ?
옥천댁         느그 할매... 얼매나 죽을 지경이 됐길래 실어가라꼬 연락이 다왔노 말이다.
필남           발목이 부러졌대나 어쨌대나... 노망이지 뭐.
               늙었으면 집에 얌전히 들어앉아 죽을 날이나 기다릴 것이지...
옥천댁         니는 말을 그래밖에 몬하나?
필남           (아차)
옥천댁         늙었으마 다 죽을 날이나 기다리고 앉아 있어야 되나?
필남           엄마, 그건...
옥천댁         오이야, 알았다. (숟가락 소리나게 놓는다)
               니는 느그 엄마가 더 늙으뿌마 팍 갖다버리겠다, 고마. 엉?

(나가버린다)

필남           엄마! (따라 나가는데)

수건으로 머리 닦으며 들어서던 지은. 갸우뚱해서 쳐다본다.

#6. 동 작은방
 
장롱에서 옷(정장)을 꺼내 입는 옥천댁. 필남, 옆에서 보고 있다.

필남           그래서 지금 데릴러라도 가겠단거에요?
옥천댁         누가 데리러 간다 캤나?
필남           그럼? 다시 시집이라도 살러 들어가겠단거에요?
옥천댁         들다보고만 올끼다, 들다보고만.
               사람같지도 않은 인사, 거렁뱅이 꼴로, 우째 해가 사는지
               구경만 하고 올끼다.
필남           암튼 난 못 모셔. 그렇게만 아세요. (나가버린다)
옥천댁         누가 뭐라 캤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매만지는 옥천댁.
화장대 서랍에서 패물함 꺼내서, 목걸이(순금)를 한다.
입술에 가볍게 립스틱도 바르고.

#7. 시골길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달려가는 버스가 선다.
내리는 옥천댁 주위를 둘러보고 걷기 시작한다.

#8. 시골길

양장에 순금반지, 목걸이까지, 잘 차려입었다.

옥천댁         보고만 오는기다. 보고만...
               벌 받아서 얼매나 망했는지 눈으로 보고만 오는기다...
옥천댁         그런 얼굴에서...


#9. 길 (과거)

먼지가 날리는 비포장길. 필남(10살)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옥천댁(35살).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옷은 먼지가 얼룩덜룩. 넋 나간 듯이 걷고 있다.
필남은 소리 없이 눈물을 닦고 있는데, 한쪽 머리에서부터 말라 있는 피딱지에 눈물과 먼지가 엉키면서 얼굴에 얼룩덜룩한 자국을 남긴다.

E              꼬르륵~ (필남의 배에서 나는 소리)
옥천댁         ... (본다)
필남           ...
옥천댁         조끔만 참아라. 읍내 가마 묵을 꺼 사줄테이께.
필남           ...돈도 없잖아... 돈도 없으면서... (울먹인다)
옥천댁         (화난) 카마 도로 돌아가까? 이놈으 지지바. 터도 지대로 몬 팔고...
               지 욕심 챙기느라 터도 다 털고 나왔네...
               까시나가 공부는 무슨 공부...
               천날만날 그란 소리 들으면서 살고 싶나?
필남           ...
옥천댁         (옷고름에 침을 묻혀 필남의 얼굴을 닦아준다) 필남아, 필남아...
               아부지도 돌아가싰고... 인자 세상에는 니캉내캉 우리 둘밖에 없다...
               (상처를 어루만지며) 우리... 다시는 울지 마자.
               울마 다리에 힘이 풀린다. 다리에 힘이 풀리마...
               주저앉아가 다시는 몬 일(어)날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 중 알겠나?
필남           ... 예.
옥천댁         (필남을 끌어안으며) 우리, 잘살끼다. 잘살끼다, 보란듯이.
               중핵교, 고등핵교도 가고... 대핵굔들 몬 가겠나...
               이 어매가 다 시키줄끼다. (입술을 깨문다)

고름도 단단이 매고 머리도 만지고 다부지게 차림을 추스리는 옥천댁.
아까와는 다르게, 힘있게 걸어간다.

#10. 시골길 (현재)

걷고 있는 옥천댁

#10. 동 안방 (현재)

이부자리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귀분(90살).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오른쪽 다리, 발등에서 무릎 아래까지 붕대가 감겨 있다.
방안은 낮인데도 컴컴하다.
대문이 삐걱대는 소리, 인기척이 들리자, 눈 뜨는 귀분.

귀분           (다 죽어가는 목소리) 누고...? 누고...?

#11. 동 마당

멍하니 집을 보고 섰는 옥천댁.
한쪽이 허물어진 한옥. 한때는 규모있는 집이었으나, 현재는 초라하다.
마당 한쪽 빨랫줄에는 뻣뻣하게 말라 있는 빨래.
수돗가에는 요강이 뒹굴고 있다. 파리떼.

귀분(E)        누고...?

문이 열리고. 양팔을 이용해서 기어나오는 귀분.
(마루 한켠에 목발이 놓여 있다)
구부정한 허리를 펴는데, 옥천댁과 눈이 마주친다.

귀분           ... 누군교...?
옥천댁         ...
귀분           (알아봤다!)
옥천댁         아이구, 세상에. 빨래를 했는 기가, 말았는 기가....

거친 손길로 빨래를 걷어 터는 옥천댁.
물 한바가지를 요강 위로 퍼부으면, 흩어지는 파리떼.

#12. 동 마루, 저녁

열린 방문으로 방안을 안 보는 척, 들여다보고 있는 옥천댁.
불빛 아래 초라한 세간.
한때는 윤이 났을 자개농이며 문갑이,
자개가 떨어지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채로 놓여 있다.
옥천댁, 귀분에게 눈을 돌리면, 붕대감긴 오른쪽 다리를 뻗은 채 밥상 앞에 앉은 귀분.
입가에 밥풀을 묻히고 반찬을 흘리면서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
밥이 목에 걸려 캑캑거린다.

옥천댁         그 옆에 물 안 있능교.
귀분           ... (물 마시고 또 먹는다)
옥천댁         (혼잣말) 굶고 살았나...
귀분           ... 저번달에... 용식이가 왔는데... 아플수록에 잘 무야된다꼬...
               어디서 사왔는지 소고기를 (손으로 표시) 이만큼 사왔는데...
               얼매나 맛있던지... 국물도 맛있고... 고기도 연하고...
               우리 용식이 애비가 살아 있시마 더한 것도 사올낀데...
옥천댁         (기가 막힌다) 용식이 애비?

답답증. 웃옷으로 부채질을 하는 옥천댁.
그런 옥천댁의 차림새며 반지, 목걸이를 힐끗힐끗 보는 귀분.

#13. 문터댁의 집, 마루, 저녁

옥천댁, 전화하고 있고 그 옆에 문터댁, 참외를 깎으며 지켜보고 있다.

옥천댁         그래, 내일 갈끼다. 알았다. 간다 안 카나. (끊는다)
문터댁         와? 필남이가 뭐라 카나?
옥천댁         ... 퍼뜩 오라 카지 뭐...
문터댁        (고개 끄덕) ... (참외 건네면, 옥천댁, 받는다) 아까 자네가 우리집 삽짝문                   들어설 적에, 깜짝 놀랬다. 귀신인 중 알고. 자네가 올 줄 누가 알았겠노.
옥천댁         ... 정신은 멀쩡하다꼬?
문터댁         하모. 총기 있는 걸로만 따지마 젊은 아아들보다도 낫지.
               지금도 한번씩 들르마, (귀분을 흉내내며) 자네는 지금이 낫다.
               처음 시집왔을 때는 몬 생기도 그래 몬 생긴 신부는 첨 봤다 캤다.
               신랑이 첫날밤에 뛰나왔다 카마 말 다했지... (웃음)
옥천댁         기억할 끼 그래 없나...
문터댁         그래 총기가 있으마 뭐하노.
               하나밖에 없던 아들, 영감님, 큰딸에 작은딸꺼정 차례차례 다 앞세우고...
               인자는 마, 망한 집구석에 들어앉아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인데...
옥천댁         ...
문터댁         종손이라꼬 하나 있는 거는, 묵고 살기 바빠가,
               일년 가도 얼굴 한번 들이밀똥 말똥이고...
옥천댁         저번 달에 고기 사갖고 왔다갔다 카던데?
문터댁         흉본다꼬 카는지, 맨날 저번달에 왔다갔다 칸다.
               따지고 보마 용식이도 안됐지.
               양자 올 때나 괜찮았지, 인자는 망한 집안에 종손 노릇이 안 디겠나.
옥천댁         ...
문터댁         원래 당한 놈이 더 무섭다꼬...
               시집살이도 당한 사람이 더 디게 시킨다 카더라마는...
               다 벌받았다 칸다. 당신도 그래 디게 시집살이했다 카민서...
               하나뿐인 메누리하고 손녀를 그래 구박해가 쫓가내고...
               다 짓는 대로 받는기라.
옥천댁         (한숨)
이장(E)        옥천댁 아지매 오싰다꼬요?

문 열리고, 이장이 얼굴을 들이밀고 인사한다.

문터댁         이장들 모임 있다꼬 가디, 인자 왔구나.
옥천댁         자네가 날 알겠나?
이장           그라믄예. 오미가미 지만 보마 한번씩 안 쓰다듬어주싰습니꺼.
옥천댁         그랬지. 남으 자슥이라도 아들이라카마 예사로 안 븼으이...
이장           잘 오싰습니더.
               그렇잖아도 용식이 할매를 우째 해야 되나 싶었는데...
               아지매가 계셔주시기마 하마 동네서도 한시름 놓지예.
옥천댁         (손사레) 아이다. 내일 가야 된다.
문터댁         진짜로 갈라꼬?
옥천댁         ...
문터댁         그래, 맞다. 언제적 시어매라꼬, 인자 다 늙어가 모시겠노.
               내가 자네라도 그래한다.
이장           카마 클났네, 이거.
               집집마다 돌아가민서 밥대는 것도 한가할 때 얘기지,
               밭철이라서 강새이 손모가지도 빌릴 판인데... 하~ 이거 참...
옥천댁         ...

#14. 버스터미널 앞

옥천댁을 태우고 달려오는 이장의 트럭 멈춰서면,
옥천댁, 가방 들고 내리고 이장은 인사하고 간다.
옥천댁,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정육점이 보인다.
진열장에 고기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옥천댁         ... (심란한 얼굴로 보고 섰다)

#15. 시골집, 부엌, 저녁

백열등 전구 아래 보글보글 끓고 있는 소고기국.
옥천댁, 파를 썰다가 손가락을 벤다. 얼른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간다.

옥천댁         아이구 마 모르겠다. (대충 썬 파를 냄비 안에 거칠게 던져 넣는다)
               이 등신아, 미칬나... 누가 잡는다꼬 가지도 몬하고...
               (짜증) 내가 여서 와 이카고 있는 중 모르겠다, 참말로...
               그래. 그래 묵고 싶다 카는데,
               국만 한번 끓이주고 가자, 국만 한번...

국을 뜨는 옥천댁.

#16. 동 안방, 저녁

고기국을 맛있게 먹고 있는 귀분. 국물이 흐를새라 다부지게 먹는다.

#17. 동 마루

노란 보자기를 두르고 앉아 있는 귀분.
옥천댁, 귀분의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고 물대야며 비누가 마루 위에 놓여 있다.

옥천댁         (머릿속을 살피며) 이기 뭐꼬. 이도 아이고. 세상에...! 안되겠구마.

**********

옥천댁, 가위를 들고 귀분의 머리채를 자르려고 덤비는데, 귀분은 질색하며 피한다.

옥천댁         이리 좀 와보소.
귀분           몬한다.
옥천댁         간수도 몬하는 머리채가 뭐가 아깝다꼬 몬 짜르게 하노 으이.
               이리 오소, 퍼뜩.
귀분           안된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옥천댁         개명된 지가 언젠데... 그깟 머리채 갖고 있다꼬 누가 상준다 카등교.
귀분           그래 자르고 싶으마 니나 짤라라, 이년아.

옥천댁, 한 손으로 귀분의 머리채를 잡는다.

귀분           아이고! 아이고! 동네사람들! 동네사람들!
               이년이 시에미 목을 짜를라 칸다! 동네사람들!
옥천댁         가만 좀 있어보소!

머리채에 가위를 갖다 대는데,
가위가 미끄러지면서 귀분의 이마 한쪽을 찌르고 만다. 피.

#18. 동 마당

빨래를 하고 있는 옥천댁.
안방 앞마루를 보면, 새 옷을 입고 멍하니 앉아 있는 귀분.
머리가 잘려 있고 이마에는 벌겋게 약이 발려 있다.

옥천댁         ...(미안함)

빨래를 비비는데, 반지가 비누에 미끄러져 빠진다.
얼른 건져내서는 비누곽 안에 넣어두고 다시 빨래하는 옥천댁.

이장(E)        아지매.

밀가루 포대와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서는 이장.
포대를 부엌 안에 들여놓고 나온다.

옥천댁         (다가오며) 웬기라?
이장           극빈자용 배급입니더.
               겨울에는 연탄값을 주드마, 이번에는 밀가리를 주네요.
               카고 이거는... (비닐봉지를 주며) 어무이가 갖다드리라 캅디다.
               장에 간 김에 집에서 입는 옷 몇개 사싰다꼬...
옥천댁         이기 무슨 필요가 있다꼬... 곧 갈낀데...
이장           (귀분을 보고) 아이고, 할매. 머리를 이쁘게도 짜르싰네.
               쯧쯔... 얼굴은 우짜다가 그래됐십니꺼?
귀분           저기 저년한테 물어봐라!

옥천댁을 노려보고는, 방으로 기어들어간다. 문 쾅! 닫고.

옥천댁         ...
이장           (다가오며) 아지매, 저기...
옥천댁         ?
이장           우짜마 좋은 소식이 있을란지도 모르겠십니더.
옥천댁         좋은 소식?
이장           예. 아직까지 확실한 건 아이고...
               군청에 간 김에, 효부상을 준다 카길래 추천을 했다 아입니꺼.
옥천댁         (깜짝) 그기 무슨 소리고?
               효부상은 뭐고 또 누가 그거를 받는단 말이고?
이장           요새는 젊은 사람도 노인을 안 모실라 카는데,
               노인이 노인을 모시는 기 쉽십니꺼 어디.
옥천댁         말도 안되는 소리 마라. 사람을 우째 보고.
               내가 그깟 상이 탐나가 여(기) 있을 중 아나?
이장           어데요. 이기 참... 아지매한테는 쪼끔 죄송시럽지마는...
               그기, 우리 동네가 받는 거하고 똑같단 말씸입니더.
               그라이까네... 대출이나 지원금 받기도 좋고...
               집집마다 하우스 손볼라카마 목돈도 필요한데...
               길도 다시 닦아야 되고...
               효부상 받은 동네라 카마 듣기도 좋다 아입니꺼.
옥천댁         자네 이장 공명심 때문에 여 더 있을 생각은 없네.
이장           우째 될랑가는 몰라도 부탁 좀 드립시더.
               아지매는 그냥 가마이 계시주기만 하마 됩니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십니더. 예?
옥천댁         ...
이장           그라마 지는... (인사하고 간다)

다시 빨래하는 옥천댁.

옥천댁         ... 이기 무신 꼴이고, 이기!

비누를 던지듯이 내려놓으면 그 기세에 비누곽이 엎어진다.
한쪽으로 떠내려가다가 수채구멍 한쪽에 숨듯이 걸리는 반지.


#19. 동 마루

귀분 앞에 밥상을 내려놓는 옥천댁. 밀가루 수제비.

옥천댁         비가 올라 카나... 아이고...

온몸이 쑤신다. 어깨며 허리를 두드리는 옥천댁.
뒤쪽으로 보이는 빨랫대에는 빨래가 널려 있다.

귀분           내보고 이거를 무라 말이가?
옥천댁         그라마요? 여기 묵을 사람이 또 있능교?
귀분           ...
옥천댁         뜨실 때 잡수소.

상을 밀어내는 귀분. 옥천댁, 본다.

귀분           나는 젊었을 적부터 속이 안 좋아가 밀가리는 안 묵는다.
옥천댁         뭐요?
귀분           밀가리가 속을 훑는다 캤다.
옥천댁         (빈정거림) 그래 늙어갖고도 훑어낼 속이 아직 남았는강.
귀분           늙으이 속은 속이 아이가.
옥천댁         ... 진짜 안 묵을끼요?
귀분           ...
옥천댁         진짜 안 묵을끼지요? 알았소. 묵지 마소!

수제비를 땅에 확 부어버리는 옥천댁.
뜨거운 김이 피어오른다.

#20. 동 부엌 (과거)

무쇠 솥에서 피어오르는 김.
어린 필남(2살)을 업은 옥천댁(27살), 밥을 퍼서 상 위에 올려놓는다.
다섯 그릇을 올려놓고 나면 솥에 남는 밥이 없다.

귀분(E)        다됐으마 갖고 온나.
옥천댁         예.

솥에 물을 부은 뒤, 휘청거리며 상을 들고 나가는 옥천댁.
잠시 뒤에 들어서는 옥천댁.
눌은밥을 퍼서 필남에게 떠먹이려는데, 귀분(52살)이 들어선다.

귀분           눌은밥은?
옥천댁         예? 여기... (얼른 그릇을 건넨다)
귀분           내가 오늘 속이 안 좋다. (훌훌 마신다)

먹을 것을 빼앗기자 울어젖히는 필남.

귀분           까시나가 재수없구로, 아침부터!
               (눈을 부라리면, 더 울어젖히는 필남)
옥천댁         (필남을 어르며) ... 어머님 진지는...?
귀분           알아서들 나놔묵겠지. (마저 마신다)
옥천댁         ...

#21. 동 장독대

축 늘어진 필남을 업고 장독을 닦고 있는 옥천댁. 핑~ 현기증이 돈다.
장독대 한켠에 널려 있는 생보리쌀.
주위를 살피는 옥천댁. 아무도 없자, 얼른 한줌 쥐고는 달아나듯 걸어간다.

#22. 동 뒷뜰

연신 주위를 살피면서 생보리쌀을 꼭꼭 씹는 옥천댁. 가슴을 쳐가면서 꼭꼭 씹는다.
연해진 보리쌀을 꺼내 필남의 입에 넣어주고 자신도 먹는 옥천댁.

#23. 동 작은방, 밤 (현재)

배를 움켜쥐고 방을 구르는 옥천댁.

옥천댁         아이구야, 나 죽는다. 아이구야... 아이고...

기어서 밖으로 나간다.

#24. 문터댁의 집, 마당, 밤

평상. 옥천댁에게 약을 먹여주고 등을 쳐주는 문터댁.

문터댁         단다이 체했구마는. 따고 약도 묵었으이 인자 괜찮을끼다.
옥천댁         (트림하며) 자네 없었으마 내는 죽었다.
문터댁         빌소리... 체해서 죽었다 카는 사람 몬봤다.
옥천댁         벌을 받은기라. 음식을 그래 버맀으이 벌을 받아도 샜지(당연하지)...
문터댁         ... 자네 마음 내가 다 안다.
옥천댁         악연도 우째 이런 악연이 다 있겠노. 빌어묵을...
               내가 여서 와 이카고 있는 중 모르겠다카이.
문터댁         다 인연이 남아서 안 그렇나.
옥천댁         아이구, 인연이라 카지 마라. 내사 은선시럽다 마.
문터댁         나도 어른 모시고 살아봐서 안다.
옥천댁         그 어른겉은 어른이마 내 열번, 스무번이라도 모신다.
문터댁         남말 하기 쉽다꼬... 어느 고부간이라도 열에 아홉은 비슷할끼구마.
옥천댁         ...
문터댁         자네사 인자 눈치볼 끼 뭐 있노. 맘에 거슬리마 막 해대마 안되나.
               그라마 자네 속도 좀 풀릴끼고... 안됐다 싶기도 할끼고...
옥천댁         에이, 빌어묵을.
문터댁         겉으로는 우짜는지 몰라도, 속으로는...
               필남이 할매는 자네가 놔뚜고 갈까봐 밤에 잠도 제대로 몬 잘끼다.
옥천댁       잠도 몬 자는 양반이 사람이 그래 죽어가는데도 내다보도 안한다 말이가.                    (코웃음)

#25. 시골길

달려오는 필남의 차. 필남과 지은이 타고 있다.

#26. 시골집, 마루

마루기둥에 기대앉은 채, 연신 목을 빼고는 대문 밖을 내다보는 귀분.

귀분           도대체 어디를 갔노, 이년이...
               도망을 갔나...

마루 한켠에 놓인 목발을 짚고 일어서려는 귀분.
몇 번이나 헛짚어서 마루에 엉덩방아를 찧는데, 대문을 들어서는 옥천댁.

귀분           니는 말도 없이, 어디 갔다가 인자 오노?
옥천댁         (못들은 척, 부엌으로 들어가려는데)
귀분           시에미 말이 말 같잖다 말이가? 와, 대답이 없노?
옥천댁         (돌아서며) 와요? 와 아침부터 시빈교?
귀분           이년이 어디서 눈을 부릅뜨고...!
옥천댁         (코웃음)
귀분           때가 됐시마 상을 채리야 될 꺼 아이가.
               어른 모시고 사는 년이 그것도 모리나.
옥천댁         어른? 누가 어른인데?
귀분           이, 이년이!
옥천댁         그짝에 눈에는 내가 메누리(며느리)로 븨요?
               나는 웬수로 븨는구마.
귀분           뭐라 캐샀노, 이년이!
옥천댁         달리 웬수가 아이다. 해줘도 고마운 중을 아나, 잘했다 소리를 한번 하기를
               하나. 옛날부터 그랬다. 아이고, 징그럽어라. (들어가려고)

노기띤 귀분.
손에 쥘 만한 것을 찾다가, 댓돌 위에 놓인 고무신을 옥천댁의 뒷통수를 향해 냅다 던진다. 제대로 날아가지도 못하고 떨어져버리는 고무신.

귀분           이년! 이년! (씩씩댄다)

귀분, 목발로 일어서려다 잘 안되자 목발을 이리저리 휘두른다.
기둥도 쳤다가, 방문을 쳐서 창호지를 찢어놓고...
목발을 휘두르던 그 서슬에 그만 마루에서 떨어져버린다.

귀분           아이구, 아이구, 나 죽는다, 아이구...!
옥천댁         허! 참 자알한다, 잘해. 밉다밉다 카이 인자는 별지랄을 다떠는구마.
귀분           동네사람들! 동네사람들!
옥천댁         시끄럽구마! 뭐 잘했다꼬 사람들을 부르노 으이!

귀분을 일으켜주려고 하지만, 뻣대는 귀분.

귀분           (일부러 더 크게) 아이고! 아이고!
옥천댁         누가 우는지 참 자알 운다.
               초상집에서 곡비하라꼬 모시러 오겠네. (고개 드는데)

지은을 앞세워 대문을 들어서던 필남과 눈이 마주친다.

지은           할머니....
옥천댁         ...!
필남           ...
귀분           (옥천댁과 필남을 번갈아본다)

#27. 동 마루

귀분과 한참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는 지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까딱까딱.
귀분, 떨어지면서 다친 곳을 주무르면서 지은을 흘깃흘깃 본다.


#28. 동 작은방

필남의 눈치를 보면서 가방을 챙기고 있는 옥천댁.
필남, 착잡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옥천댁         내일 갈라 캤는데, 말라꼬 왔노...
필남           (일어나며) 차에 가서 기다릴게요. (나간다)

#29. 동 마루

신발을 신는 필남. 옆으로 귀분이 보이지만, 본 척도 않고,

필남           지은아, 가자.
지은           응? (이어폰 빼고 필남을 본다)
필남           (나가면)
지은           (필남을 따라 나가다 귀분을 돌아보며) 안녕히 계세요. (나간다)
귀분           !

잠시 뒤, 가방 들고 방에서 나오는 옥천댁.
귀분을 보더니, 가방은 놔두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밥상을 들고 나온다.

옥천댁         (마루 한쪽에 놓아두며, 보지 않는 채로)
               저녁은... 문터댁 오마 챙기달라 카소.
귀분           ...
옥천댁         ...

가방 들고 나가는 옥천댁.

#30. 동 대문 앞

필남의 차. 필남, 차문을 열어주는데, 옥천댁, 잠시 머뭇댄다.

필남           왜요?
옥천댁         응? (손사레) 아이다...

옥천댁, 타면, 필남과 지은, 앞자리에 탄다.

#31. 동 마루

왼쪽다리에 힘주고 목발과 마루기둥에 의지해서 간신히 일어서는 귀분.
있는 대로 목을 빼서 담 밖을 본다.
떠나가는 필남의 차.
차가 마을을 빠져 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쳐다보고 섰는 귀분.

귀분            ...

#32. 필남의 자동차 안

필남, 룸미러로 뒷자리에 앉은 옥천댁을 힐끗 본다.

옥천댁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다)
필남           그동안에 정이라도 들었어요?
옥천댁         정은 무신... (한숨)
지은           (보조석에서 필남 보며) 그 할머니가 큰할머니셔?
필남           ...
지은           되게 무섭게 생기셨을 줄 알았는데, 하나도 안 무섭던데?
               그럼 이제 그 할머니 혼자 사시는거야?
필남           똑바로 앉어. 위험해.

옥천댁, 한숨쉬면서 손을 내려다보는데, 손가락에 반지가 없다.
놀란 옥천댁, 시트 자락을 들치면서 이리저리 반지를 찾는다.

필남           왜요? 뭐 떨어졌어요?

INS
#18. 반지를 비누곽 안에 넣어두는 옥천댁.

옥천댁         (허벅지를 치며) 맞다! 차 돌리라.
필남           예?
옥천댁         얼릉.

#33. 시골집, 마당

반지를 찾는 옥천댁.
비누곽 안도 살펴보고 대야도 들어보고 수돗가 주변을 뒤져보지만,
반지는 보이지 않는다.
필남과 지은은 함께 찾고 있고 귀분은 멀찌감치 마루에 앉아 보고 있다.

옥천댁         아이고 참, 얄궂다. 그기 어디로 갔을꼬.
필남           그냥 가요.
옥천댁         안된다. 그기 어떤 긴데.
               니가 첫월급 털어가 해준 거 아이가. 꼭 찾아야 된다.
필남           다시 해드린다니까.
옥천댁         텅빈 그릇에도 마음이 있다 캤다. 십년을 넘게 끼온 반진데...
               낐다 뺐다 해서 그렇지 내 손가락이나 마찬가지다.
               (귀분에게) 혹시 반지 몬 봤능교?
귀분           (펄쩍 뛴다) 빌소리 다하네. 나는 구경도 몬해봤다.
옥천댁         아이고, 얄궂데이. (찾는다)

이때 대문을 들어서는 문터댁. 손에는 부침개 접시.

문터댁         이기 누고?
모두           (돌아본다)
문터댁         필남이 아이가? 필남이 맞제? (필남의 손을 잡는다)
필남           안녕하셨어요?
문터댁         하마 이래 장성했구마. 그 코찔찔이가.
               아이고, 교수님한테 코찔찔이라 캐가 되겠나.
필남           (웃음)
귀분           (어정쩡한 모습으로 보고 있다)
문터댁         우짠지 내가 오고 싶더라 카이. 이럴 게 아이고 우리집으로 가자.
               (필남의 손을 끈다) 밥이라도 한끼 해믹이야지.
필남           아뇨... (구원을 청하듯이 옥천댁을 보는데)
옥천댁         됐다. 자네 메누리 번거롭게 할 필요가 뭐 있노.
               자네만 오마 되지. 여서 묵자.
문터댁         그라까? 카마 기다리라. 내 퍼뜩 가가꼬 푸성귀라도 좀 뽑아오꾸마.
               (옥천댁에게 부침개 접시 건네고는 말릴 새도 없이 간다)
필남           서울은 언제 갈려구요?
옥천댁         기왕지사 반지도 찾아야 되고... 내일 아침에 뜨자.
필남           (마땅찮다)

#34. 동 마루, 저녁

밥 먹고 있는 사람들.
귀분은 방안에서 따로 밥상을 받았고, 나머지는 마루에서 다른 밥상에 둘러앉아 먹고 있다. 모두의 모습이 한 화면에 잡힌다.

문터댁         자네가 교수 됐다 카는 소리 듣고 우리 다 박수쳤다.
               양말장사에 남으 집 살이에... 옥천댁이 그래그래 고생한다 카디만,
               보람있는 고생했다꼬 다들 치하했다 아이가.
필남           말씀 낮추세요.
문터댁         아이다. 교수님 아이가. 이래 될 중 알았으마 나도 대처로 갈꺼를.
               혹시 아나. 우리 아들도 교수님 됐을지.
옥천댁         와? 이장은 나빠서? 교수님만 님이고 이장님은 님 아이가?
문터댁         맞네.
모두           (웃지만)
귀분           (혼자 외롭다) ...
문터댁         우리가 이래 자슥 얘기할 때가 올 중 누가 알았겠노.
옥천댁         그래 늙는기지.
문터댁         (필남을 보고) 자네는 넘으 일 같제? 그때가 좋은기다.
귀분           에이, 미친 년들!
               시끄럽어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네. 에이!
               (방문 쾅 닫아버린다)

주춤했다가, 모두 다시 웃고 떠든다.

#35. 전경, 저녁(해지기 전)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필남,
작은방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옥천댁과 문터댁,
이어폰 꽂고 마루에 걸터앉아 하늘 보고 있는 지은,
안방에서 지은을 내다보고 있는 귀분이 한 화면에 잡힌다.

#36. 동 안방,

귀분           (지은의 뒤에 대고) 야야... 야야...

못 알아듣는 지은.

#37. 동 마루,

지은 옆으로 다가가는 귀분. 지은에게 주먹을 쑥 내민다.

지은           (이어폰 빼고) 예?

귀분, 주먹을 펼치면, 사탕이 한주먹이다.
귀분, 조용히 하고 너만 먹으라는 시늉을 한다.

지은           고맙습니다. (하나 까먹고 웃는다)
귀분           (이어폰을 가리키며) 그거는 뭐꼬?
지은           이거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귀분의 귀에 꽂아주는데,
귀분, 갑작스런 소리(댄스가요)에 깜짝 놀란다.

지은           (놀라서) 괜찮으세요?
귀분           ... (괜찮다는 손시늉)
지은           우리 할머니랑은 가끔 같이 듣는데...
               할머니처럼 싫어하시긴 하지만... (웃음)
귀분           피는 몬 속인다 카디... 참 마이 닮았다.
지은           제가요? 누구랑요?
귀분           느그 할배...
지은           ?

#38. 동 부엌,

손 닦으며 부엌을 나서는 필남의 귀에, 귀분과 지은의 말소리가 들린다.

귀분(E)        그래, 오래비도 없고 남동생도 없다 말이가?
지은(E)        예.
귀분(E)        쯧쯧... 터를 다 털고 나왔구마.

열받는 필남.

지은(E)        예?
귀분(E)        기왕에 나올라 카마 달고 나오든강,
               아니마 터라도 잘 다독거리놓고 나오든강 안 하고...

필남, 입술을 깨문다.

귀분(E)        내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다...
               여자텃밭은 어매한테 물리받는 기라...
               마른 텃밭을 물리받았으이 실한 열매가 맺힐 리가 있나...

나가는 필남.

#39. 동 마루,

필남           (나서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귀분           (깜짝 놀라서 본다)
필남           (시종일관 냉정하게 따지고 드는 말투로)
               애를 앞에 앉혀두고... 뭐에요?
               마른 텃밭? 그게 애한테 할 소리에요?
지은           엄마...
필남           나한테 그런 걸로는 모자라요? 모자라서 애한테 그딴 소릴 해요?
귀분           이년... 이년. 엇다 대고 대드노!

옥천댁과 문터댁이, 다투는 소리에 놀라 나오자, 보란 듯이 더 펄펄 뛰는 귀분.

귀분           이년 눈깔 좀 보소. 내 어맀을 때부텀 알아봤다.
               저 독기 서린 눈에...
               내 팔뚝에 거미리같이 매달리가 악착같이 깨물 때부텀 알아봤다.
필남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데요? 누가 그렇게 악받치게 만들었는데?
옥천댁         (문터댁의 눈치를 보며 말린다) 야가 와 이카노! 동네 우세시럽구로!
필남           남자형제 없는 게 무슨 큰 죄에요?
               그게 무슨 죽을 죄라고 엄마하고 나를 그렇게 구박하고...
               당신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 귀한 줄도 알아야죠.
               아들이 귀하면 딸도 귀한 줄 알아야죠.
옥천댁         필남아!
귀분           이년이 이기 뭐라 카노, 이기!
               오늘날 이 집안이 이래 된 기 누 탓인데. 다 느그 모녀 탓인기라.
옥천댁         뭐요?
귀분           니가 느그 어매 부실한 터를 다 털고 나오는 바람에,
               대 이을 손주가 안 생긴 거 아이가.
               지금 니가 교수라꼬 유세떠는 모냥인데,
               그기 바로 터를 다 털고 나온 증거 아이고 뭐꼬!
옥천댁         하이고~ 갖다댈 말이 없어서... 말 겉잖은 소리 집어치우소, 고마!
귀분           이년이...! 그래, 이제 두년이 같이 덤비보겠다 그말이가.
               그래, 한번 해보자, 한번 해보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떤다)
옥천댁         한번 해보자 카마 겁낼 중 아나.
               (몸을 들이밀며) 자, 해보소. 해보소.
문터댁         옥천댁아!
옥천댁         해보라카이!
귀분           이년! (옥천댁의 가슴팍을 때려버린다)
옥천댁         !
문터댁         아이고, 필남이 할매! 와 카십니꺼. 들어가입시더. 들어가입시더.
               (방으로 거의 끌다시피해서 데리고 들어간다)
귀분           (끌려가면서도) 이년! 이년!

마루에 철퍼덕 주저앉는 옥천댁.
지은은 옥천댁과 필남의 눈치를 살핀다.

필남           ... 이럴려고 왔어요?
옥천댁         ...
필남           (지은에게) 할머니 가방 챙겨서 나와. (나가버린다)
지은           할머니...
옥천댁         ...

#40. 마을길, 해질무렵

차에 타는 필남.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킨다.
가방 들고 오는 지은과 옥천댁. 필남, 시동 건다.
지은, 차문을 열어주고, 옥천댁, 타려는데, 문터댁이 뛰어나온다.

문터댁         옥천댁아. 클났다. 지금 필남이 할매가... 똥을 싸고 난리도 아이다.
옥천댁         ...!
문터댁         옥천댁아. (옥천댁 팔을 흔들며) 옥천댁아...
옥천댁         (필남을 보는데)
필남           (돌아보지 않는다)
옥천댁         (한숨) ... (지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밤길 조심해가 가고...
               도착하마 늦더라도 전화해라.
지은           할머니...

옥천댁, 집으로 가려다 필남 쪽으로 간다.
차창을 두드리면, 내려가는 차창.

옥천댁         (보지 않고) ... 니하고 내한테는 저승사자 겉은 사람이었지만...
               느그 아부지한테는 세상에 그지없는 어매였다.
               지금 내가 그냥 가뿌리마...
               난중에... 느그 아부지를 내가 무슨 낯으로 보겠노...
필남           ...

집으로 들어가는 옥천댁.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필남의 차.

#41. 동 마루, 밤

이불호청을 뜯는 옥천댁.
열린 안방문으로, 속옷차림으로 등돌리고 누워 있는 귀분이 보인다.

#42. 동 마당, 밤

달이 밝다.
빨래하는 옥천댁. 발로 빨래를 밟으면서 연신 한숨을 쉰다.

옥천댁         가야지... 얼릉 가야지... 내라도 먼저 가뿌리야지...
               그래야 이 업보가 끝나는기라... (한숨)

#43. 동 작은방

누워 있는 옥천댁. 땀을 흘리면서 끙끙 앓는다.

#44. 동 마루

마루에 앉아, 안절부절 못하는 귀분.
작은방 쪽을 보면, 댓돌 위에 신발은 있지만 기척이 없다.

귀분           뭐하는 기라... 해가 엉디에 치받치 올랐는데...

이때, 대문을 들어서는 여자1.

여자1          아유, 할머니, 안녕하세요?
귀분           누고...?

#45. 동 장소

귀분에게, 수의 사진이 담긴 앨범을 보여주고 있는 여자1.

여자1          아유, 자손분들이 너무하시네.
               어떻게 아직까지 수의도 마련 안해놓으셨대...
귀분           ...
여자1          이거 한번 보세요. (봉투에서 삼베 2장을 꺼내 보여준다)
               보기엔 잘 모르시겠지만, 이건 나이롱이 섞인 거구요,
               이건 순수 삼베에요.
귀분           (만져본다)
여자1          제가 한번 보여드릴게요. (라이터불에 삼베를 태워본다) 보세요.
               나이롱이 섞인 건 딱딱하게 굳어지고 까만 그으름이 남지만,
               이건... 재가 뽀얗고 곱게 부스러지죠?
귀분           ... 그렇네.
여자1          진짜 삼베냐 아니냐에 따라서 값이 천양지차라니깐요.
귀분           (삼베를 만져본다) 삼베는 안동포가 최곤데...

#46. 동 작은방

끙끙 앓는 옥천댁. 그 위로,

여자1(E)       오늘은 그냥 계약만 하세요.
귀분(E)        돈이 없는데...
여자1(E)       행사기간이 끝나기 전에, 계약금만 먼저 내세요.
귀분(E)        ...반지로 줘도 돼나?
여자1(E)       금반지요? 그럼, 돼죠.
옥천댁         ...뭐라 캐샀노...

#47. 동 마루

금반지를 깨물어보는 여자1.
귀분, 옆에서 보고 있다.

귀분           진짜라 카이.
여자1          (금반지를 주머니에 넣고 일어선다) 그럼, 할머니.
               제가 담에 계약서 갖구 들를게요. (급히 나가며) 담에 봬요.
귀분           (잡으려고) 봐라. (여자1, 그대로 나가버린다) 다음이 언제고...

방문 열리면서, 옥천댁, 끙~ 하고 나와 앉는다.

옥천댁         아이구, 머리야... 누가 왔다갔능교?
귀분           ...
옥천댁         금반지가 어쩌구저쩌구 카더구만... 그기 뭔 소링교?
귀분           수의 했다... (변명) 내 좋으라꼬 한 기 아이다.
               좋은 삼베를 써야지, 잘 썩어가 후손이 잘된다 카더라.
옥천댁         죽으마 어련히 알아가 입히줄낀데... 뭐 좋은 기라꼬 탐을 내노...
               금반지는 어디서 났능교?
귀분           ...
옥천댁         어디서 났능교?
귀분           ...용식이가 해줬다.
옥천댁         용식이요? 용식이요? (억장이 무너진다)
               저번 달에 용식이가 와서 소고기도 사주고 금반지도 사줍디까?
               그기 어떤 반진데...!
귀분           우리 용식이가 해줬다 카이!
옥천댁         하이고~ 인자는 거짓말꺼정... 장사 어딨노? (급히 일어나 나간다)

#48. 마을길

급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옥천댁.
주변을 돌아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옥천댁         아이고. (허벅지 치고는 주저앉아버린다)


#49. 시골집, 마당

대문을 밀고 들어서는 옥천댁. 마루에 앉아 있던,

귀분           (놀린다) 없제? 내, 그럴 중 알았다. 하마 읍내꺼지도 갔을끼다.
옥천댁         뭐요? (화를 애써 참는다) ...
               남으 귀한 딸내미가 해준 반지가 그래 탐이 나디요?
귀분           뭐라 카노, 저년이.
옥천댁         우리 필남이... 엄마 이제꺼정 고생시킸다꼬 울민서...울민서 내 손에
               끼아준 기요, 그기...
               그란데 그거를 지 욕심 채리자꼬...
              사람이 그카마 안되능구마. 벌받소.
귀분          우리 용식이가 해줬다 카이!
옥천댁        하~ 인자는 인간 겉지도 안하다. 내 꼭 볼끼요!
              내 반지 훔치가 산 수의 입고 얼매나 호사스럽게 죽을란지
              내가 꼭 볼끼요! (문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간다)
귀분          저년 저거...! (큰소리로 부른다) 보소! 문밖에 아무도 없능교?
              아무도 없능교?

#50. 문터댁의 집, 마루

전화 통화하는 귀분.
문터댁, 옆에 앉아 나물을 다듬으면서 안 듣는 척 듣고 있다.

귀분           니가 와야 된다, 용식아. 니가 와가, 그년을 물고를 내야 할끼다.
용식(F)        할머니, 자꾸 그러시지 말구요. 어머니랑 잘 지내세요, 예?
귀분           용식아...
용식(F)        저 형편 잘 아시잖아요. 저 당분간 못 가구요...
               암튼 할머니 모실 분은 어머니밖에 없으니까, 말 잘 들으시구요, 예?
               저 바빠요. 이만 끊을게요.
귀분           (다급하게) 용식아, 용식아! 명심해라이, 단디 명심해라이.
               니는 우리집안 종손이다, 종손! 알제?

수화기를 내려놓는 귀분. 기가 죽었다.

#51. 시골집, 마당

수돗가에서 쌀을 씻고 있는 옥천댁.

옥천댁         에이, 빌어묵을.

거칠게 물을 붓다가 쌀을 확 쏟아버린다. 허겁지겁 주워담는 옥천댁.
문터댁의 부축을 받으며 목발 짚고 대문을 들어서는 귀분.

귀분           우리 용식이가 오마 니년을 가마이 안 놔뚤끼다. 어디 한번 두고보자.
옥천댁         아이구, 무서버라. 억수로 무섭네.
귀분           이년이!
문터댁         아이구, 힘들어 죽겠다. 고마 들어가입시더, 아지매.
               (귀분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마루에 앉아 숨 돌린다)
옥천댁         고래고래 가물(고함) 질러샀디, 은제 또 그까지 갔더노?
문터댁         (마루에서 내려서며 작은 소리로) 옆집 아제가 업고 왔더라.
이장(E)        아지매.
이장           (웃으면서 들어선다) 어무이도 계시네.
문터댁         니가 여(기)는 웬일이고?
이장           아지매한테 좋은 소식 전할라꼬요. 아지매, 축하합니데이.
옥천댁         무신 소리고?
이장           아지매가 효부상을 타게 됐십니더.
옥천댁         뭐라?
문터댁         진짜 좋은 소식이구마.
이장           내일 군청에서 시상식이 있다 캅니더.
옥천댁         내는 그런 거 안 받는다.
이장           예?
옥천댁         내가 여 있은 지 일년이 됐나, 이년이 됐나.
               받을 자격도 없고 받고잡지도 안하다.
이장           아지매가 자격이 없다 카마, 낳은 자슥도 부모를 버리는 요새 겉은
               세상에 누가 받겠십니꺼?
옥천댁         (역정) 됐다 고마. 싫다 안 카나.
귀분           (방문 열고) 상을 준다꼬?
이장           예. 옥천댁 아지매가 할무이를 잘 모신다꼬 군수님이 상을 주신답니더.

귀분, 옥천댁을 힐끗 보는데,
쌀을 줍다 말고 쌀바가지 들고 부엌으로 훽 들어가버리는 옥천댁.
문터댁이 대신 줍는다.

#52. 동 마루

귀분           뭐뭐 주는데?
이장           (안방 쪽으로 다가앉으며) 자세한 거는 모르지만...
               상패도 주고요, 은수저도 아마 줄깁니더.
귀분           (화색) 은수저? 진짜 은수저 말이가?
이장           그라믄요. (웃음)


#53. 동 부엌

거친 손길로 솥에 쌀바가지를 들이붓는 옥천댁. 그 위로,

귀분(E)        은이, 원래 독을 가리준다 안 카나.
               그래가 옛날 임금님들도 다 은수저를 썼다 아이가.
               독이 든 음식을 무마 안되이께네...
옥천댁         욕심! 저 욕심!
이장(E)        할매 잘아시네요. 하하...
문터댁(E)      옥천댁아, 부탁 좀 하자.
               싫다 카지만 말고 우리 아들 낯 좀 세와도. 엉?
옥천댁         ... 빌어묵을...!
               (화가 나서, 쌀이 튀어나갈 정도로 바가지를 솥에 대고 탕탕 친다)

#54. 동 마당

수돗가에서 쌀을 줍고 있는 문터댁.

문터댁         이기 뭐꼬?

빗자루를 가져와 수채구멍을 한참 뒤지는 문터댁.
구멍을 막고 있던 찌꺼기 사이로 뭔가 반짝인다.
손으로 그것을 건져올리는 문터댁.

문터댁         반지 아이가?


#55. 동 작은방, 밤

자신의 반지를 보고 있는 옥천댁.

귀분(E)        우리 용식이가 해줬다 카이!
옥천댁(E)      내 꼭 볼끼요! 내 반지 훔치가 산 수의 입고 얼매나 호사스럽게 죽을란지
               내가 꼭 볼끼요!
옥천댁         우짜다가 이런 지옥불에 떨어짔노, 내가...
               같은 인간이 되마 안되는 중 알민서 내가 와 이래 됐노 말이다...(한숨)


#56. 군청 군수실

상패를 받는 옥천댁. 받기는 하지만, 심란한 얼굴이다.

#57. 식당

갈비탕을 먹는 옥천댁과 이장. 옥천댁은 뜨는둥 마는둥.

이장           (밥을 말아준다) 푹푹 좀 잡수이소.
옥천댁         됐네...
이장           진짜로 아지매가 안 받으시마 우짜노 싶어가 밤에 잠도 못잤십니더.
               아지매, 진짜로 고맙십니데이.
옥천댁         자네가 고마울 끼 뭐 있노...
이장           우리 동네에 알아줄 끼 뭐 있십니꺼.
               소출이 마이 나오는 것도 아이고
               대학에 척척 붙을 젊은 아아들이 있는 것도 아이고...
               노인들만 사는 동넨데... 있는동 없는동 사는 동네가 효부상을 받게
               됐으이 크지요. 안 그렇십니꺼?
옥천댁         ...
이장           지원금 신청한 기 나오마, 인자 마 하우스도 마카 새로 싹 갈아뿌고
               뽄때나게 한번 농사지볼라 캅니더. 하하...
옥천댁         ...

#58. 동장소 밖

식당에서 나오는 옥천댁과 이장.
옥천댁은 상패곽을 싼 보따리를 들고 있다.

이장           제가 들다 드리야 되는데...
옥천댁         가보게. 약속 있다 안 캤나.
이장           예. 그라마... (인사하고 간다)

옥천댁, 멍하니 서있다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저 멀리 금은방이 보인다.
옥천댁, 끼고 있던 반지를 내려다본다.

#59. 금은방 안

목걸이를 풀어 진열대 위에 놓는 옥천댁.
주인은 옥천댁의 반지를 감정하고 있다.
그 옆에 멍하니 앉아 있는 옥천댁.

#60. 시장 안 포목점 골목

골목 한쪽으로 수의전문점들이 있다.
밖에 걸린 수의를 만져보는 옥천댁.

#61. 길

상패곽 보따리를 들고 힘겹게 걸어오는 옥천댁. 연신 멈춰서서 땀을 닦는다.
보따리를 땅에 던지듯이 털썩 내려놓고, 강이 내려보이는 길가에 앉는다.
상패곽과 은수저곽을 열어본다. 상패와 은수저를 보는 얼굴이 심란하다.
멍하니 길을 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모습.

INS
#1 : 옷고름에 침을 묻혀, 울먹이는 필남의 상처를 닦아주는 옥천댁

바위 위에 상패를 내려치는 옥천댁.
유리가 깨지고 나무가 부서지도록 내려치다가, 기운이 빠지면서 털썩 주저앉는다.
그 옆에, 떨어져 있는 은수저곽. 에이! 강물로 던져버리려다가 주춤한다.

옥천댁         ...

무심히 흐르는 강물.

#62. 시골집, 마루, 저녁

밥상 앞에 앉아 있는 귀분. 밥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은수저를 만지고 있다.
옥천댁은 마루를 닦으면서 연신 허리를 두드리고 무릎을 만진다. 피곤하다.

귀분           참 좋다! 참 좋다! 모냥도 좋고 때깔도 곱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효부상이라꼬...? 고부간은 하늘이 낸다 카는데...
옥천댁         (혼잣말) 하늘이 미칬나. 할짓이 없어서 고부간을 내구로...
               얼릉 잡수소. 퍼뜩 치우고 자구로.

귀분, 은수저로 밥을 먹는데, 밥알을 흘리고 국물을 쏟고 난리다.

옥천댁         (짜증) 턱이 빠짔능교. (걸레로 바닥도 닦고 귀분의 손도 닦아준다)
귀분           이년이, 어디 닦을 기 없어가 걸레로 닦노.
옥천댁         카마 더러븐 걸 그냥 놔두꾜?
귀분           어디서 말대답이고. 내 덕에 효부상꺼정 받았시마 고맙다 소리는 몬해도
               말대꾸는 안해야 될 꺼 아이가.
옥천댁         뭐요?
귀분           와? 내 말이 틀맀나? 언감생심 니깐 년이 효부상이 당키나 하나.
               내가 조가비겉이 입을 꽉 다물고 있으이 받은기지.
옥천댁         !
귀분           (밥 먹으며) 모르는 것들은 진짜로 효부 났는 중 알끼다. 속도 모르고.
옥천댁         허!
귀분           내가 이래 구박받고 사는 중은 모르고 다들 메누리가 잘 모시가
               이래 오래 산다 안 카겠나.
옥천댁         (걸레를 바닥에 던지며) 가소! 인자 고마 가소!
               아주 지겨워 죽겠구마!
귀분           이년이 미칬나!
옥천댁         인자는 하루라도 빨리 가야 호상 소리 듣는구마.
               더 살아서 무슨 영화를 볼라꼬 사는 데 미련을 몬 끊능교.
               내하고 무슨 웬수가 졌다꼬 이 나이가 될 때꺼정 나를 이래 힘들게 하노
               말이요!
귀분           (파르르) 오이야. 내 진작에 알았다. 평생 가야 콧배기도 안 들이밀던 년이
               갑자기 찾아올 때부텀 내 알아봤다.
               그래, 인자 내가 늙었다꼬 괄세하러 왔구나. 복수할라꼬 왔제?
옥천댁         하~ 복수라 캤능교? 그짝에야말로 내한테 무슨 웬수가 졌다꼬
               이날이때꺼정 나를 이래 괴롭히노.
               가소! 가소, 고마! 살 만큼 살았소.
               인자는 가도 섭섭하달 사람도 없고 울어줄 사람도 없구마.
               살만큼 살았시마 적당한 때 갈 줄도 알아야 인사도 듣는기지,
               자식들꺼정 줄줄이 다 앞세우고...
               자식 명꺼지 짤라묵고도 부끄럽지도 안항교?
귀분           뭐라... 뭐라 카노 이년이... 이년이...! (왼쪽 다리로 상을 밀어버린다)

와장창! 마당으로 떨어지는 상.

옥천댁         (놀라서 본다)
귀분           그래... (흐느낀다) 자식 명꺼지 다 짤라묵었다...
               이래 살기는 좋은 중 아나... 영감... 자식들... 다 내손으로 묻고...
               밤마다 오늘은 가야지, 가야지...
               아침마다 눈뜨는 기 얼매나 큰 고통인지 아나...
               시도 때도 없이...내 손에서 식어간 자식들이 떠오르마 자다가도 벌떡
               깬다... 니도 늙어봐라. 내 나이꺼정 살아보마 알끼다...
               잊도 몬하고 죽도 몬하는 기 얼매나 큰 고통인지...
               내한테는 사는 기 고통이고... 죄값이다... 아나... (운다)
               얼매나 더 살끼라꼬... 얼매나 더 살끼라꼬, 나를 그래 밉어하노...
               밉어하노...

울다가 스르르 옆으로 쓰러지며 까무라치는 귀분.

옥천댁         (깜짝 놀라) 보소! 보소! (귀분을 흔든다)

#63. 동 안방, 밤

잠든 귀분을 내려다보고 있는 옥천댁. 착잡하다.
잠든 귀분. 그 위로,

문터댁(E)      꼼짝도 안한다 말이가?

#64. 비닐하우스

참외를 씻고 있는 문터댁. 옥천댁이 와있다.

문터댁         조만간에 일 치를라 카는 거 아이가?
옥천댁         일?
문터댁         아아들한테 미리 연락해라. 난중에 안 놀라구로.
옥천댁         ...

#65. 동네가게 옆 공중전화

통화중인 옥천댁.

옥천댁         니가 한번 댕기가야 되겠다, 용식아...
               느그 할매가 다 죽게 생깄다 카이...
               (화가 나서) 그래, 느그 할매 죽고 관 나갈 때 온나. (퍽 끊어버린다)
               빌어묵을 놈...! (화가 나서 간다)

#66. 시골집, 부엌, 저녁

저녁상을 차리고 있는 옥천댁.
밥상 위에는 고기국이며 불고기며 나물이 풍성하다.

옥천댁         (거친 손길로 밥을 푸며)
               바빠서 몬오겠다 카는 소리가 우째 그래 쉽게 나오노 으이...
               즈그 할매가 지를 우째 키았는데...! 망할 놈.

#67. 동 안방, 저녁

귀분을 억지로 일으켜 밥상 앞에 앉히는 옥천댁.

옥천댁         (은수저를 쥐어주며) 자요, 자...
귀분           ... (힘이 없어서 쥐지 못한다)
옥천댁         (답답해서 떠먹여주려고) 아 하소, 아.
귀분           (옥천댁을 물끄러미 본다) ...
옥천댁         와요? 독이라도 들었으까봐? (먹어 보인다) 자, 괜찮지요?
귀분           ...
옥천댁         묵으소. 갈 때 가더라도 묵고 가소.
               내 굶긴 시어매 (일)부러 굶기 죽있다 카는 어문 소리는 듣기 싫구마.
               아 하소, 얼릉. (숟가락을 들이밀면)
귀분           ... (숟가락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입 벌린다)

옥천댁, 밥이며 반찬을 떠먹여주면 귀분, 간신히 씹는다.

옥천댁         옳지. 옳지. 잘 묵는다. 잘 묵는다.

#68. 시골집, 작은방, 밤

캄캄한 방안. 옥천댁, 자고 있다.
돌아누우려다가, 이상한 기분에 눈을 뜨면, 귀분이 괴기스런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깜짝 놀라 일어나는 옥천댁.

귀분           ... 내 좀 씻기도...

#69. 동 마루, 밤

달빛. 귀분은 내의만 입고 있고 수건으로 귀분을 닦아주는 옥천댁

귀분           내... 너무 밉어하지 마라...
               ... 니만 굶고 산 기 아이다.
옥천댁         ...!
귀분           다 떠나고... 용식이도 떠나고...
               내한테도... 지옥 겉은 세월이었다...
옥천댁         ...
귀분           ...
옥천댁         ...

#70. 집 밖

필남의 차가 세워져있다.

#71. 동 안방, 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귀분.

#72. 동 마당, 밤

수의를 털어 거풍시키고 있는 옥천댁 필남은 마루에서 그런 옥천댁을 보고 있다.

필남           지금이래두 병원으로 옮겨요. 거기가 편해요.
옥천댁         누가 편한데? 평생을 살아온 집이다. 여서 가시고 싶을끼다.
필남           엄마.
옥천댁         밤이 늦었다. 드가서(들어가서) 눈 좀 부치라.

#73. 동 안방, 밤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옥천댁.

옥천댁         (문 닫으려는데)
귀분           으음...
옥천댁         (깜짝 놀라 들어와앉는다) ...
귀분           (눈을 뜨고 본다) ... 여(기)가 어디고...?
옥천댁         ...
귀분           (옥천댁을 한참 본다) 누고...? 옥천댁이가...?
옥천댁         우째, 정신이 좀 듭니꺼?
귀분           ... 내를 좀 일으키도.
옥천댁         (일으켜준다) 뭐 좀 드실랍니꺼?
귀분           물... (옥천댁이 먹여주면) 맛있네...

약하지만 또록한 눈빛으로 옥천댁을 바라보는 귀분.

귀분           ... 니도 인자 마이 늙었다...
               그래 곱던 얼굴이... 은제 이래 돼뿌맀노...
옥천댁         ...
귀분           ... 필남이 애비 낳을 때 꺼정... 그래그래 수모를 당하고...
               나는 내 메누리한테 안 그캐야지, 안 그캐야지... 캤는데...
               메누리 늙은 기 시어매라꼬... 평생 그짓을 고대로 하고 살았다...
옥천댁         ...
귀분           ... 손주를 볼라카는 내 욕심이 필남이 애비를 잡아묵었지 싶다...
               그쟈...?
옥천댁         ... 어머님...
귀분           (옥천댁의 손을 잡는다)... 고맙데이, 옥천댁아...
               영감도 아들도 딸도... 다 먼저 가고 없는데...
               그래도 자네가 있어가... 내를 지켜주는구마... 고맙데이...
               (옥천댁의 손을 꼭 쥔다)
옥천댁         ... (운다)
귀분           ... 복 마이 받으소...
옥천댁         ...
귀분           (앞을 보며 반색) 당신 왔능교? 마중왔나?
옥천댁         보소. 보소...
귀분           (손을 내밀며) 그라요. 같이 갑시다... 같이... (웃음)

손이 툭 떨어진다. 축 늘어지는 귀분.

옥천댁         어머님! 어머님! 아이고, 어머님! 아이고~ 아이고~ (운다)

옥천댁에게 안겨 잠자듯이 편안하게 눈감고 있는 귀분.

#74. 산소

구덩이 안에 놓이는 관.
그 위로 흙이 덮이고... 오열하는 옥천댁. 그 위로,

옥천댁         (마음의 소리) 참말로 마이 울었대이...
               사는 내내 악에 받치서만 살아가...
               내 속에 그래 많은 눈물이 있는 중도 모르고 살았다...

INS 귀분의 모습.
#17 : 노란 보자기를 쓴 채, 머리채를 잘리지 않으려고 가위를 피하는 귀분.

#26 : 씩씩대는 귀분. 목발을 이리저리 휘두른다.
기둥도 쳤다가, 방문을 쳐서 창호지를 찢어놓고...

#62 : 발로 상을 밀어버리는 귀분.

#69 : 달빛 아래, 노란 보자기를 두르고 앉아 있는 귀분과,
귀분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옥천댁...

옥천댁         (마음의 소리) 어떤 인연인지는 몰라도...
               맺힌 거를 풀었으이... 인자 다시는 인연 맺을 일도 없겠지...
               그라마 된기라.
               내사 마 섭섭할 것도 없고... 그리블(그리울) 것도 없다...
               다시 만난다 카마... 인자는 좋은 것만 있겠지 뭐...
옥천댁을 안고 있는 필남의 눈에도 눈물이 흐른다.

#75. 시골집 마루

안방 앞 마루(귀분이 앉아 있던 곳)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옥천댁.
흰머리가 많이 늘어 한결 늙어 보인다.

E              새소리

옥천댁, 깨서 보면, 빨랫대 위에 노란 새 한 마리.

필남 (E)       뭐하세요?

옥천댁, 보면, 필남이 작은방에서 옥천댁의 가방과 짐을 들고 나오고 있다.

옥천댁         저기... (손을 들어 가리킨다) 새...
필남           (본다) 새가 어딨다고... 엄마도 참... 가요. (나간다)

옥천댁의 눈에만 보이는 노란 새.
옥천댁 얼굴에 미소.

옥천댁         (마음의 소리) 잘가싰능교...? 거서 편히 기다리소...
               나도 쪼매만 있으마 갈끼요... (천천히 마당으로 내려선다)

대문을 넘어 (#31, 귀분의 시선 높이), 옥천댁을 차에 태우는 필남이 보인다.
이윽고 출발하는 차. 차가 동네를 돌아나가 멀어지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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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다반향초 | 작성시간 14.11.17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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