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을 그 연둣빛] 김도우
씬 1 프롤로그
예식장 외경.
예식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난주(28세)...신랑에게 인계되고....
주례를 향해 나란히 선 난주와 신랑, 차분하고.
양친석의 아버지와 새엄마, 흐뭇하게 보고.
퇴장하는 신랑신부.
오색색종이와 폭죽이 터지고 박수 치는 친구들, 하객들... 등
결혼식의 여러 풍경들....
웨딩카에 달린 풍선이 하늘거리고, 연둣빛 예복을 입은 난
주와 신랑, 몇몇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다.
그러다가 웨딩카 문을 열던 난주, 문득 고개 들다 굳어버린다.
시야에 섬광처럼 들어오는 모습.
계단 위에 우뚝 서 있는 할머니.
예의 연둣빛 원피스를 허연 머리를 뽀글뽀글 파마한 채,
무슨 상징처럼 높다란 계단 위에 서서 쏘아보는 할머니.
강렬한 연둣빛...무언가를 외치듯 강렬한 눈빛....
난주 휘청이며 차에 기댄다.
신랑, 의아한 얼굴로 괜찮냐며 재빨리 난주를 차 안에 앉힌다.
앉은 채 다시 계단 위를 쳐다보는 난주.
아무도 없다.
안도감과 실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앞을 보는 난주.
난주 (Narr) 그녀가 12년만에 나타나 나에게 보여준
건 강렬한 연둣빛이었다.
씬 2 달리는 차 안 (동)
생각에 잠긴 난주.
난주 (N) 그 연둣빛은 그녀와 내가 함께 했던 모든
기억들을 되살아나게 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 그녀와 함께 살던 집, 그녀가 만들어
준 음식, 평범한 들까지도.....
달려가는 웨딩카 (디졸브)
씬 3 난주의 집
(지방의 소도시 1980년대 초반의 봄 오후)
먼지를 일으키며 오는 지프형 차.
집 앞에 멈추면 뒷좌석 문이 열리고 때 묻은 고무신 두짝이
내려선다.
50대 초반의 할머니다.
벌써 흰머리가 반 너머 차지한 파마머리에, 월남 치마, 보풀
이 인, 낡은 스웨터를 입고 옷보따리를 안고 서서 쏘아 보
는 듯한 눈빛으로 집을 찬찬히 둘러본다.
난주 (N) 나는 왜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녀는 그렇게 살아서 외치고 있는데 왜 날
잊었느냐고.
아담한 단층의 양옥집에서 뛰어나오는 진주(15세), 난주(13
세), 선주(10세) '아버지' 부르며 반갑게 달려나오던 셋,
할머니를 보자 우뚝 멈춰서 경계의 눈초리로 위아래를 훑어본다.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할머니, 예의 그 무심한 얼굴이다.
아버지 (차 문 닫고 아이들 옆으로 오며) 제 자식
들입니다. 진주, 난주, 선줍니다. 인사드려라.
진주,선주 (어정쩡하게) 안녕하세요.
난주만이 꼿꼿하게 선 채 흰눈으로 보고 있다.
인사를 하든말든 그저 무심한 얼굴로 다시 한번 집을 둘러
보고는,
할머니 (마치 탓하듯) 집이 낡았네. (당당하게 집으로
들어간다)
아버지 (따라들어가며) 철새처럼 현장 따라다니다보니
어떻게 그렇게 됐습니다.
난주, 할머니의 뒷모습을 못마땅한듯 쏘아보다가,
난주 아버지 공사장에서 벽돌 나르던 아줌마래.
진주 (보는)
난주 태어날 때부터 바보였대.
선주 (보는)
난주 어떻게 저런 아줌마가 우리 식모야?
진주 그럼 니가 밥하고 빨래할래?
난주 다른 아줌마 데려오면 되잖아.
진주 이번이 세 번째야. 너 또 저 아줌마 쫓아내면
내가 가만 안둘거야.
난주 언닌 딴 아줌마들이 엄마 그릇 쓰는게 싫지도
않어?
진주 새엄마보단 나.
선주 맞어.
진주 (선주 데리고 들어가면)
난주 (잔뜩 찌푸린 채 보고)
씬 4 할머니방 (오후)
난주 문을 확 열고 들어온다.
할머니 누덕누덕 기운 런닝과 속옷차림으로 자고 있다.
난주 밥 안해?
할머니 (부시시 일어나 런닝 속으로 손 넣어 북북
긁으며) 벌써 밥때야? 난 아직 배 안고픈데.
난주 (어이없고)
씬 5 부엌 (동)
할머니, 생선을 토막내고 있다.
난주 (들어오며) 식모, 물 줘.
할머니 (쳐다보지도 않고) 넌 손 없냐
난주 (밉게 보고)
할머니 (그렇건 말건, 토막낸 생선을 팔팔 끓는
냄비에 넣는다)
난주 (다가오며 시비조로) 그건 뭐야?
할머니 갈치국.
난주 갈치로 국 끓이는 사람이 어딨어? 지느러미도
안치고.
할머니 다 소용이 있으니까 달렸겠지. 그걸 괜시리
치기는 왜 쳐.
난주 그거야 헤엄치라고 달린 거지, 갈치가 냄비
안에서 헤엄치는 거 봤어?
할머니 (행주로 도마 닦으며) 너는 좋겠다, 아는 것도
많아서.
난주 (행주를 빼앗아 냅다 던진다) 이건 걸레란 말야.
할머니 (심드렁하게) 태어날 때부터 걸레 따로 행주
따로 정해졌냐 (행주 주우며) 걸레로 쓰면
걸레고 행주로 쓰면 행주지? (행주로 도마
닦자)
난주 (빼앗는다) 드러워!
할머니 가시나 쇠심불이네. (빼앗지만)
난주 (빼앗기지 않고)
할머니 얼씨구? 이리 안내?
난주 (쏘아보고)
할머니 콩알만한 게 눈알 돌리는 것 좀 보게. 얼른
안내놔? (빼앗으려 하지만 만만치 않자) 오냐,
니 고집이 쇠심줄인가본데 오늘 임자 잘못
만났다. 쇠심줄이 더 쎈가 고래심줄이 더 쎈가
대보자 (확 잡아당겨 빼앗으며)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게 어른을 이겨먹을려고 들어?
난주 (분하다, 주먹으로 할머니를 마구 때리며) 나가.
여긴 우리 엄마 부엌이야. 나가!
할머니 (내치며) 쥐벼룩만한게 무슨 손이 이렇게 메워.
난주 (다시 달려들어 때리며) 나가. 나가.
할머니 (힘껏 내치며) 그런다고 내가 나갈 거 같냐.
난주 (뒤로 자빠지더니 혹 울음 터트린다) 급기야
엄마-를 부르며 울기 시작한다)
할머니 (아랑곳 없이 부엌일 하고)
난주 (울음소리 커지고 엄마를 찾는 소리 더욱
서럽게 변해간다)
할머니 (울든 말든 관심 없다) 그래 울어라 울어. 니
눈물, 니가 짜는데 누가 말리냐. 세상에 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깟 일로 죽은 엄마까지
찾으면서 울어. 그래봤자 힘만 빠지지.
난주 (지쳐 끅끅댄다)
할머니 (궁시렁) 가시나 울음보 한 번 질기네.
난주 (울면서 일어나 가고)
할머니 (심드렁하게 힐끗 보고는 하던 일 한다)
씬 6 안방 (동)
눈물 훔치며 들어오는 난주.
아버지 책상 위의 엄마 사진을 본다.
젊고 단아한 모습이다.
엄마 생각에 서글퍼지는 난주.
눈물 주르르 흘린다.
F.O
씬 7 집 전경(아침.FI)
씬 8 안방 (아침)
상에 둘러앉아 아침 식사중인 식구들과 할머니.
아버지 (수저질 멈추고 아이들과 할머니를
둘러보다가) 얘들아.
자매들 (쳐다보면)
아버지 (엄한 얼굴로) 이제부턴 이 분을 할머니라고
부르고 잘 따르도록 해라.
세자매, 일제히 할머니를 쳐다본다.
할머니 (생선대가리를 쪽쪽 빨다가) 뭐 해. 어여 먹고
학교 가.
난주 (찡그리며 보는)
씬 9 학교 전경(동,아침)
씬 10 교무실
예쁜 원피스를 입은 난주,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아버지 뒤
에 숨어있다.
아버지 (정중하게) 워낙 낯가림이 심한데다 일 때문에
전학을 자주 시켰더니 적응을 잘 못합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여선생님 걱정 마세요. (난주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름이
뭐라고?
씬 11 학교 복도
신발장에 어수선하게 놓여있는 아이들의 신발.
낡고 고만고만한 운동화를 중에 난주의 빨간 에나멜 구두가
유독 반짝인다.
난주 (E)저, 정난주입니다.
씬 12 교실
교단 위의 난주를 쳐다보는 올망졸망한 눈들.
난주, 새빨개진 얼굴로 바닥만 쳐다보고 있다.
여선생님 고개 들고. 마룻바닥이 니 친구니?
아이들, 키득댄다.
난주, 간신히 고개 들어 아이들을 보다가 다시 고개 숙인다.
씬 13 복도
쉬는 시간의 왁자함.
교실 안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
아이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씬 14 교실
난주, 고개 떨군 채 분을 참고 있다.
짓궂은 남자아이들, 난주의 구두를 높이 치켜들고
책상 사이를 누비며 합창한다.
아이들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샤바 아이샤바 얼마나 슬펐을까, 샤바샤바
아이샤바
난주, 입술을 앙다문다.
짝궁 (남자아이들을 향해) 야 하지 마.
아이들 아랑곳없이 노래하며 우스꽝스런 제스츄어를 하기도
한다. 점점 더 일그러지는 난주의 얼굴.
아이들, 난주 옆을 지나간다.
그 순간 벌떡 일어난 난주, 구두를 빼앗아 남자아이의 얼굴
을 정면으로 후려친다.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아이들.
남자아이 주저앉아 앙 울음 터트리는데 코피가 줄줄 흐르
고. 난주, 구두와 가방을 들고 얼른 교실을 빠져나간다.
짝궁 너희들 나뻐. 쟤네 엄마 정말 안계신단 말야!
씬 15 토목공사현장
한쪽 실내화는 벗겨진 채, 지친 얼굴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며 오는 난주.
소장실로 쓰이는 가건물을 향해 가고.
문을 힘겹게 열면.
설꼐도면 보던 아버지 고개 돌리고.
난주, 참고 참았던 울음을 폭포수처럼 터트린다.
놀린 채 다가오는 아버지.
눈물까지 흘러 더러워진 얼굴로 울어대는 난주.
할머니 (E)뜬금없이 뭔 소리래요? 분가라니?
씬 16 가건물 소장실 (동 오후)
난주,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할머니가 가져온 운동화를 신고
있다.
아버지 (책상에 앉아) 전학을 자주 하니까 애가 자꾸
삐뚤어지는 거 같아서요. 내년이면 중학교도
가야 되는데 아무래도 분가시켜서 한학교에
정착하도록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할머니가 같이 있어주시면 더 좋구요.
난주 (뜻밖의 얼굴로 쳐다보고)
할머니 (서서) 지야 뭐 소장님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죠.
난주 싫어!
아버지, 할머니쳐다보면
난주 할머니랑 같이 안살아. 나도 혼자 살 수 있어.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아버지 (끊으며 매서운 눈길로) 그런 건 아버지가
결정한다.
난주 !...
씬 17 시골길 (황혼녁)
노을로 하늘을 붉고 산은 검게 보인다.
검은 산 밑 들판길을 걷는 난주와 할머니,
난주, 할머니랑 같이 가기 싫어 저만큼 앞서간다.
원경으로 길게
난주 (N)나도 할머니도 우리만의 동거를 원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지
않았다. 한 인간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F.O)
씬 18 여고 수돗가
(오후, F.I)-5년후 (서울)
대걸레 빨고 있는 난주.
친구 순영, 양동이 들고 온다.
순영 (물 받으며) 너 성적 또 올랐더라?
난주 (관심없다) 어.
순영 너 나 몰래 과외하고 밤새 공부하고 그러지.
(옆구리 찌르며) 맞지. 그지.
난주 (피하며 웃는) 아냐.
순영 아닌 거 같은데?
난주 아냐. 그냥 죽어라고 외우는 것 뿐이야.
공부라도 안하면 미쳐버릴 거 같애서.
순영 (삐죽) 미칠 일도 많다. 근데 너 정말 약대 갈
거야? 그럼 이과잖아, 난 문관데.
난주 아니 난 안가.
순영 약대 나오면 아버지가 약국 차려주신다며.
난주 난 싫어. 고등학교 졸업하면 떠날 거야.
순영 ? 어디루?
난주 아무데나. 미국이든 캐나다든. (하던 일
멈추고) 아니 아프리카도 괜찮아.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먼 하늘 바라보며) 가서 자유롭게 살 거야.
(해지는 하늘이 붉다.)
씬 19 집 근처 약국 앞
(동 저녁)
약국 앞을 지나던 난주,
멈칫하고는 안을 쳐다본다.
유리 너머로 30대의 여자 약사가 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난주, 그 무료함이 보기만 해도 지겹다는 듯
살짝 인상 찌푸리고 간다.
씬 20 자취집 대문 앞
(동 밤)
한옥을 개조한 집.
작은 1층 단독주택이다.
초인종 누르는 난주.
대답없자 문을 쾅쾅 두드리지만 그래도 조용하자 발로 쿵
차는데 열리는 문
할머니 밖에서 재울까봐 그래? 왜 죄없는 대문은 차고
그래.
난주 또 레슬링 봤지?
할머니 (급하다) 빨리 빨리 들어와. 레슬링 끝난다.
난주 (마땅치 않게 보며 들어가고)
씬 21 마루(동 밤)
방 두개, 입식으로 개조한 부엌과 거실로 쓰이는 마루가 있
는 공간.
할머니 성격대로 있을 것만 있는 소박한 꾸밈새.
상에 밥상 차려져 있고
할머니, AFKN에서 나오는 레슬링보느라 무아지경이다.
할머니 (직접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그렇지. 밟아,
밟아. 하이고 덩치는 산 만한게.. 옳지. 그래
그래.
난주 (N)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일에도 관심조차
없는 그녀가 유일하게 몰두하는 것은 레슬링
이었다.
TV화면의 레슬러들과 할머니의 무아지경인 얼굴 위로.
난주 (N) 레슬링을 좋아하는 그녀, 삶에 대한
어떠한 열정도 희망도 없는 그녀, 게으르고
지저분한 식모. 그 시절, 그녀는 내가 함부로
멸시해도 되는 대상이었다.
난주, 상 앞에 앉으며 숟가락 들다가 질색을 한다.
난주 (숟가락 탁 놓으며) 도대체 왜 이래.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어?
할머니 (TV에 눈길 둔 채) 가시나가 또 뭔 지랄방광
이래?
난주 미역국에 생선 넣지 말라고 몇번 얘기했어. 귀
먹었어?
할머니 미역국은 생선으로 끓여야 개운한 거야.
난주 제발 식모면 식모답게 굴어. 할머니가
주인이야?
할머니 (난주의 국그릇을 가져가며) 안먹으면
그만이지 성깔은?
난주 (흘겨보다가 퉁명스레) 마가린에 비벼줘.
할머니 니가 비벼먹어. 늙은이 부려먹는 게 그렇게
재밌냐? (하다가 TV 보며) 아이구 잘한다.
그렇지.
난주 (입이 한발은 나온다. 그래도 자기가 하기는
귀찮고 그냥 맨밥 한술 뚝 떠먹는다)
씬 22 집 전경(밤)
씬 23 난주 방(동)
통증으로 잠에서 깨어난 난주, 아랫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런
표정이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못참겠는지 힘겹
게 일어나 나간다.
씬 24 할머니 방(밤)
코 골며 잠에 깊이 빠진 할머니.
할머니를 흔드는 난주.
난주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자는)
난주 할머니.
할머니 (누운 채 돌아보며) 왜 그래, 한참 달게
자는데.
난주 (아랫배 움켜쥐고 고통스럽다) 나 배 아퍼.
아파죽겠어.
할머니 칙간 가면 되잖아.
난주 그, 그게 아니란말야.
할머니 (성가시다. 느릿느릿 일어나며) 진짜 아픈
거야?
난주 (끄덕이며 흐느낀다)
할머니 잘못 먹은 것도 없는데 왜 이런대.
씬 25 집 전경(아침)
씬 26 화장실(아침)
할머니, 이불호청을 빨다가 우스운지 픽 웃음을 흘린다.
씬 27 마루(낮)
난처한 얼굴로 웅크리고 앉아있는 난주.
길쭉하게 잘라진 기저귀감이 널려있다.
할머니, 기저귀감 가장자리를 공굴리기 하고 있다.
힐끗 난주를 보고는
할머니 유난스럽긴. 아 너만 해? 조갑지 끼고
태어났으면 다들 하는 건데. 늦다늦다 했더니
이제사 터지네.
난주 불결해.
할머니 염불하고 자빠졌네. 그게 없으면 자식은 어찌
날래.
난주 할머닌 애 안낳잖아.
할머니 (굳어지는).. 팔자가 사나워서 그렇지..
난주 (기저귀감을 가로챈다) 하지 마. 사다
쓸거니까.
할머니 (빼앗으며) 그건 몸에 나뻐 안돼. 공장에서 뭔
약을 쳤는지 어떻게 알어? 자궁암인가 뭐신가
그런게 괜히 걸리는 줄 알어?
난주 (마땅치 않게 보다가 가방 들고 나간다)
씬 28 약국 안 (동 낮)
난주, 생리대 하나를 골라 내민다.
무료하게 TV 보던 약사, 비닐봉지에 넣어주고 돈 받는다.
난주, 비닐봉지를 가방에 넣으며 돌아서다가 멈칫하고는 다
시 돌아선다.
난주 저...
약사 (TV 보는데 정신 팔려 있고)
난주 저 아줌마...
약사 (그제야 보는) 응? 또 뭐.
난주 그게 아니구.. 약 파는 거, 재밌..어요?
약사 (흥미롭다) 왜, 너두 약사 되고 싶니?
난주 ...아뇨.
약사 근데 그건 왜 물어봐.
난주 그냥...
약사 (웃으며) 학생. 뭐든 직업으로 삼아서 재밌는
일은 별루 없어.
난주 ...알겠습니다. (꾸벅 인사) 안녕히 계세요.
(나간다)
씬 29 거리 (동)
난주, 오다가 도장 집 앞에 멈춘다.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굳게 결심한듯 들어간다.
씬 30 교실(오후)
방과 후. 난주, 칠판 지우고 있다.
순영 (뛰어들어오며) 야 난주야,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래.
난주 (보며)?....
씬 31 교무실 (동)
들어오는 난주.
담임에게로 다가가다가 놀라 우뚝 멈춘다.
담임과 얘기하고 있는 아버지.
난주, 긴장한다.
담임 (보고) 어 난주야, 아버님 오셨다.
난주 ...(아버지한테 끄떡 눈인사하고 다가간다)
아버지 서울에 일 보러 왔다가 들렀다. (담임에게)
이거 연락도 없이 와서 실례가 안됐나
모르겠습니다.
담임 아닙니다. 근데 약대를 갈려면 이괄 가야
되는데 어제 보니까 문괄 선택한 거 같은데
가만 있자..(쌓여 있는 원서에서 난주 것 찾는)
아버지 (의아하게 난주 보는)
난주 (겁에 질러 굳은 채 외면하는)....
씬 32 난주집 외경 (밤)
씬 33 마루(동,밤)
무릎 꿇고 앉은 난주.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난주와 아버지의 눈치 살피는 할머니.
아버지 니 맘대로 도장 찍은 이유가 뭐냐.
난주 ...
아버지 왜 말 못해. 이유가 뭐야.
난주 (야무지다) 약사 싫어요.
아버지 왜.
난주 재미 없어요.
아버지 (버럭) 넌 세상을 재미로 사니!
난주 (움찔하고)
할머니 (난주가 안스럽다) 살살 얘기해 살살. 다 알아
들어.
아버지 (가라앉히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어? 이젠 여자도 직업이 있어야 되는
세상이야. 여자한테 약사만큼 좋은 직업은 없다.
난주 그것보다 더 좋은 직업도 있어요.
아버지 그럼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난주 ...
아버지 날 설득해봐라. 그럼 니 뜻대로 하마.
난주가 입을 떼기를 기다리며 보는 아버지와 할머니.
난주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어요. 약국에선 그렇게 살 수 없어요.
아버지 (실망했다는 듯 노엽게 보다가) 애비 말대로
해라. 나중에 고맙다고 할 거다. (새 원서에
도장 찍는)
난주 !.... (절망감으로 보는)
씬 34 난주 방
난주, 문 박차고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는다.
신경 날카로와져 손톱 물어뜯고 있는데.
할머니, 빼꼼 문 열고 보다가 슬며시 들어온다.
할머니 약사가 어때서 그래.
난주 (낮게) 나가.
할머니 아픈 사람 병 고쳐주고 선생님 소리 듣고
왼죙일 앉아서 돈 버는 건데.
난주 (버럭) 나가란 말야!
할머니 성질머리는... (궁시렁 거리며 나가고)
난주 (분이 안풀려 획 베개 던지고)
씬 35 교실
시험시간이다.
책가방을 사이에 두고 답안지 메꾸기에 열중한 학생들.
난주의 시험지(국어)에 1학년 3반 37번 정난주라고 씌어진다.
난주, 답안지를 교단에 제출하고 나간다.
감독과 선생님, 의아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보고(너무 일러
서) 교단으로가 답안지를 본다.
백지다. 디졸브.
교단에 제출되는 난주의 백지(영어)
교단에 제출되는 난주의 백지(수학)
씬 36 난주집 외경 (창문 중심으로)
비가 내리고 있다.
씬 37 난주 방 (다른 날, 오후)
아버지, 옷장에서 난주의 옷을 꺼내 방바닥에 던진다.
아버지 이러라고 분가까지 하면서 공부 시킨 줄 알어?
당장 내려가자. 짐 싸!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난주, 불만 가득한 날카로운 눈
빛으로 방바닥만 쏘아보고 있다.
할머니, 눈치 살피며 안절부절이다.
아버지 짐 싸라니까!
난주 ....
아버지 (화를 삭이며) 도대체 뭐가 문제냐?
난주 ....
아버지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난주 ... 난 불행해요.
아버지 ! 뭣땜에!
난주 (울먹) 불행한데 이유가 있어야 돼? 그냥
불행해. 집도 학교도 아버지도 다 싫어! 이까짓
세상 뭐가 대단하다고 이러고 살아야 돼?
아버진 뭐든 맘대로 하면서 왜 난 이렇게
살아야 돼. 새엄마 얻는데, 언제 우리한테 상의
한마디 했어? 아버진 아버지 맘대로 살잖아.
아버지 (분노해 난주의 뺨을 친다)
난주 !!!
할머니 (달러들어 말리며) 아이구 왜 이래, 말로 하지.
난주 때려, 맘대로 때려! 죽어버릴거야.
아버지 (난주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세운다) 그게
애비한테 할 소리야? 니 에미가 이꼴 안보고
죽은 게 다행이다!
할머니 아이구 왜 이래. 딸네미 죽이겠네. 애비가
참어.
아버지 (멱살 잡아 흔들며) 집을 나가든지 죽든지
맘대로 해! 너 같은 자식 필요없어!
그 순간 「악」-소리 지르며 주져앉는 난주.
아버지, 놀라 주춤 물러나고.
난주, 머리를 감싸쥔 채 경기 일으키듯 소리 지르며 운다.
아버지, 파랗게 질린 채 보고.
할머니 (다독이며) 괜찮아, 괜찮아, 우리 애기 괜찮아.
난주의 흥분 서서히 가라앉고 할머니 품에 안겨 흐느끼기
시작한다.
놀라움이 가시자 거칠게 나가는 아버지.
흐느끼는 난주.
씬 38 집 앞 (동 저녁)
아버지의 차 빗속으로 떠나간다.
씬 39 난주 방 (동 밤)
난주, 책상의자에 무릎 세우고 앉아 어두운 얼굴이다.
난주 (N) 그 시절, 내 곁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대상이 없는 막연한 분노, 이루어질 수
없는 숱한 꿈들이 맴돌다 사라지곤 했다.
방바닥 걸레질 하는 할머니.
난주 (N) 나에게는 나의 두려움과 분노를 이해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무심히 할머니에게로 시선 돌리는 난주.
난주 (N) 그러나 도저히 알 수 없는 저 여자.
지루하게 반복되는 그녀와의 일상. 어쩌면
그녀가, 아버지보다도 더 강하게 내 인생을
붙들어매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할머니 (걸레질 하며 무심한 듯이)약댄가 뭔가 그게
그렇게 싫으면 애비한테 싹싹 빌고 한 번 더
말을 해보지.
난주 상관 마.
할머니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싫으면 뭐가 싫다
조목조목 따져야지 불같이 성깔 부터 내기는..
내가 개똥으로 보인다고 애비도 개똥으로
보이지?
난주 (톡 쏘는) 식모 주제에 왜 남의 일에 참견이야.
할머니 내가 식모 주제밖에 안되는 거 이제 알았냐.
난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참견하지 마.
할머니 잘도 알아서 하겠다. 양말도 한짝 못빨아 신는
주제에.
난주 밥해주고 빨래해주는 게 그렇게 유세야? 유세
부릴 거면 가. 나 혼자도 잘 사니까.
할머니 그래? 그럼 혼자 잘 살아봐라. (일어나는데)
난주 그래 가! 나 혼자 살 거니까 가!
(하며 크리넥스 통을 던지는데)
그만 할머니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만다.
순식간에 험상궂게 변하는 할머니의 표정.
난주 자신도 놀라고.
할머니 (눈을 부라리며)오냐, 나갈테다. 나가도 그냥은
못나간다. 니년 몸종 노릇한거 다 받기전엔
못나간다. 피걸레 빨아준 것까지 다 쳐서 내놔.
이 천하에 고약한 년. 너 혼자 잘 살줄 아냐.
잘 살면 내가 니 딸이다 이년아. 물 한그릇
떠먹을 줄 아나, 운동화 한짝을 빨을 줄을
아나. 이 배은망덕한 년! (부술 듯 문 쾅 닫고
나간다)
난주 (의외의 반응에 좀 놀란)
씬 40 마루
할머니, 자기 방에서 옷보따리 들고 나온다.
신발 꿰차며.
할머니 혼자 잘 먹고 잘 사나 두고 볼테다 내가.
난주 (방에서 나와 나가는 할머니 등 뒤에 대고,
마음과는 달리 자꾸 엇나간다) 그럼 누가 잡을
줄 알고? 다신 오지 마.
할머니 (가다가 휙 돌아선다. 어느새 눈물 맺혀있다)
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 줄 알어? 그랬으면 너하고 내가
만나지지도 않았을 테고, 이런 수모 당하지도
않았을 테고, 내 팔자가, (새삼 서러워
울먹이며) 이렇게 꼬부라지지도 않았을 거다.
(미련없이 나간다)
난주 !...
난주, 처음 보는 할머니의 눈물에 충격을 받은 듯 넋나간
얼굴로 열린 대문만 바라보고 있다.
씬 41 비오는 거리 (동 밤)
옷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타박타박 걸어오는 할머니.
실은 갈 데가 없다.
서럽고 막막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적없이 또 걷는
다.
씬 42 비오는 여인숙 앞 (동, 밤)
여인숙 간판 앞에서 치마를 걷어붙이고 쌈지 속의 돈을 계
산해보는 할머니.
턱도 없이 모자라는 모양이다.
한숨 짓고는 아무데나 걸터 앉아 아픈다리를 두드린다.
그러다가 새삼 서러운 마음에 또 한숨 짓고...
난주 (N) 그녀에게 눈물이 있었다니... 그땐 그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슬픔 따위는
전혀 모르고 살던 그녀였으니까. 그리고 난
그녀의 눈물을 잊어야 했다. 나만의 자유가
주어졌으니까.
F.O
씬 43 교실 (F.I)
친구들과 어울려 도시락 까먹으며 깔깔 웃는 난주.
할머니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가벼운 마음이다.
씬 44 집 앞 골목 (동 오후)
습관적으로 발로 대문 차는 난주.
난주 뭐 해 문 안열고. ...빨리 문 열어.
하며 몇 번 발길질 하다가 문득 멈추는 난주.
그제야 할머니의 부재를 깨닫고
힘 빠져 가방에서 열쇠 꺼낸다.
씬 45 부엌 (동.오후)
난주, 냉장고 연다.
커다란 김치통 외엔 별 반찬이 없다.
난주, 가스 레인지 위에 있는 냄비를 열어보고는 찡그린다.
생선대가리만 들어있는 생선국이다.
난주, 문턱에 쭈그리고 앉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냄비를 노
려보고 있다. 먹으면 안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공기밥 하나 떠놓고 쭈구리고 앉아 아까의 생선국을 걸신들
린 듯 먹는 난주.
그러나 입 안 가득 밥 문 채 뚝 멈춘다.
할머니 생각에 꾸질꾸질한 할머니의 앞치마를 쳐다보다가,
그렇게 지겨워하던 생선국을 먹고 있는 자신이 기가 막혀
한심스럽게 냄비를 보다가 탁 내려놓는다.
난주 (오기가 발동해)흥! 나 혼자 못살줄 알고?
(냄비뚜껑 탁 닫고 나간다)
씬 46 집 앞 (오후)
새엄마, 지프차(기사 딸린)에서 내리기 싫어하는 할머니를
끌어당기다.
할머니, 심드렁한 얼굴로 마지못한 듯 어기적어기적 내린다.
씬 47 마루
새엄마,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난주와 할머니 사이에 앉아
중재중이다.
새엄마 얘 사주를 보니까 크면 지 아버지보다
할머니한테 더 잘할거라고 합디다. 그러니까
한번만 참고 시집갈때까지만 데리고 있으세요.
난주 (기가 막혀) 새엄마, 누가 누굴 데리고
살아요?(짐짓 거드름 피우는)난 혼자서도 잘
사니까 할머니 맘대로 하라고 하세요.
할머니 (역시 거드름 피우는) 나도 같이 살 생각,
새발의 피만큼도 없다고 전해. 따뜻한 밥
지어주니 고마워할 줄은 아나, 사시사철
이불호청 빨아 빳빳히 풀매겨 덮어주면
고생했단 말 한마디 할 줄을 아나,
쥐벼룩만한게 성깔만 있어 가지구.
난주 (흘겨보며) 눈물 나게 고마워요 그래.
할머니 그래, 혼자 잘 살어봐, 나도 지긋지긋하니까
(일어나면)
새엄마 (붙잡으며)할머니이-
난주 (힐끗 흘겨보고)
씬 48 마당
새엄마, 할머니를 붙잡고 작은 소리로 애원한다.
새엄마 (밉지 않게) 할머니 저 좀 살려주세요, 할머니
나가면 쟤 어떡해요. 쟤 성질 아시잖아요. 저
쟤 성질 감당할 자신 없어요. 예? 저 좀
살려주세요.
할머니 (딴청하는) 자네만 감당 못하는게 아냐, 나도 못해.
새엄마 그러지 말고 나랑 나갑시다, 그동안 변변히
옷도 한벌 못해드렸는데 나가서 옷도 사고
만난 것도 먹고 그럽시다.
할머니 (좋으면서) 내가 무슨 옷이 필요있다구..
씬 49 음식점
할머니 새엄마, 난주 식사한다. 난주 음식맛이 별로다.
씬 50 옷가게
새엄마, 할머니 옷고르고 있고, 별관심 없이 다른 옷들을 보
고 있는 난주. (연둣빛 원피스 고름)
씬 51 할머니 방 (동 밤)
할머니, 환한 연둣빛 원피스(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를 입고
맵시를 보아 가며 만족스러운지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난주, 우스꽝스런 그 모습에 기가 찬다.
난주 할머니다가 열여섯 꽃띠야? 왠 연두색?
할머니 괄시 말어, 맘은 이팔청춘이니까.
난주 그렇게 좋으면서 왜 한번도 옷 안사입었어?
할머니 돈이 어딨다구.
난주 맨날 월급 받아서 뭐해?
할머니 (조금 당황한)으응 거시기 뭐냐.. 저금 하잖아.
난주 저금? 저금해서 뭐할건데?
할머니 뭐하긴, 집도 사고 빌딩도 사고 그러지.
난주 치, 한글도 모르면서 빌딩을 어떻게 사?
할머니 내가 왜 한글을 몰라, 이름 석자자는 쓰고
읽을 줄 안다.
난주 할머니가 이름이 어딨어?
할머니 내가 짐승이야? 이름도 없게?
난주 (의외라) 정말? 뭔데?
할머니 큰눈이. 성은 한가고.
난주 (쿡 웃으면)
할머니 태어날때 눈이 퉁방울만하다고 해서 친정
아부지가 지어준 이름이야. 이래뵈도 처녀적엔
동백꽃마냥 볼그스름하고 이뻤지.
난주 친정? 할머니 시집도 갔어?
할머니 난 여자 아냐? 시집도 못가게?
난주 근데 왜 말 안했어?
할머니 니가 언제 물어봤냐.
난주 그럼 식구 있어?
할머니 있지!
난주 어디?
할머니 내 앞에
난주 ?
할머니 니가 내 딸이잖아.
난주 ???
할머니 (확신에 찬) 넌 내딸이야.
할머니, 무심히 그 말을 던져놓고 나간다.
새삼스럽게 보는 난주.
F. 0
씬 52 난주집 외경(밤)
씬 53 마루 (다른 날 밤 )
TV에서 레슬링이 나온다.
할머니 그려 그려, 잘헌다. 엎어치고! 그렇지. 매치고!
그럼 그럼, 자알 헌다. 어이구 저 장딴지 좀
봐, 우리 난주 허리보다 굵겠네
난주 (옆에서 보다가 찡그리며) 끔찍해
할머니 끔찍하긴, 이건 쇼야, 즈네들끼리 다 짜고 하는
거라구.
난주 근데두 그렇게 재밌어?
할머니 쑈니까 재밌지
난주 (삐쭉거리는데)
그때 대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 (소리) 나야 나야
난주, 의아한 얼굴로 소리 나는 쪽 보다가 할머니 보면.
싸늘하게 굳어있는 할머니.
난주, 할머니의 표정이 낯설고 무섭다.
남자 (소리)나라니까? 나와 봐
더욱 싸늘해지는 할머니.
또는 올 것이 왔다는...
난주, 겁먹은 얼굴로 보기만 하고.
할머니, 서랍을 열고 맨 밑바닥에서 봉투(돈봉투)를 꺼내 나
간다.
의아하게 보는 난주
씬 54 마당 (동.밤)
쭈구리고 앉아 담배 피우는 할머니. 공허한 눈길로 아무런
표정이 없다.
난주, 슬며시 나와 옆에 선다.
난주 아까 그 남자 누구야?
할머니 ...
난주 응?
할머니 ...
난주 할머니!
할머니 (말없이 담배 비벼 끄고 들어간다)
난주 (갸웃하며 입이 삐죽 나온다)
F.O
씬 55 할머니 방(오후)
F.I
할머니, 한쪽에 모로 누워 벽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난주 (눈치 살피다가) 지금 레슬링 할 시간인데
할머니 (눈길도 안준다)
난주 (답답해 죽겠다는)말 좀 해봐. 숨막혀 죽겠단
말야.
할머니 ...
난주 에이 (일어나 나간다)
씬 56 골목 구멍가게 앞 (동 오후)
난주, 콜라를 마시며 나오다가 이웃집 아줌마와 마주친다.
난주 안녕하세요?
아줌마 응, 독서실 가니? 참, 난주야.
난주 네.
아줌마 집에 혹시 뭔 일 없니?
난주 무슨 일이요?
아줌마 아니 뭐 도둑이 들었다거나 없어진 물건이
있다거나...
난주 (갸우뚱하며) 없는데요. 왜요?
아줌마 응? 아, 아냐. 나중에 어머니 올라오면
얘기하자. (간다)
난주 (의아한 얼굴로 가다가 무슨 생각이 나는지
문득 멈춘다)
씬 57 마루(회상)
난주, 서랍을 다 꺼내놓고 뭔가를 찾는다.
할머니, 방망이로 북어 두들기고 있다.
난주 할머니, 내 시계 못봤어?
할머니 시계?
난주 손목시계. 내 생일날 아버지가 사준 거 있잖아.
할머니 몰라. 잘 찾아봐, 어디 있겠지.
난주 없으니까 그러지.
할머니 학교에서 풀어놓고 깜빡했나부지
난주 (다시 서랍을 뒤지고)
할머니 (계속 방망이질 하다가 문득 멈춘다. 그제야
짐작이 가고 불안해진다)
씬 58 독서실(현재, 동 밤)
난주, 생각에 골몰해 있다.
'나야, 나와보라니까' 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생각 난다.
난주, 뭔가 짚이는게 있다.
씬 59 난주집 외경(아침)
씬 60 난주 방(아침)
난주, 옷서랍을 뒤지다가 찾는게 없자 옷장 안에 걸린 옷주
머니를 뒤진다.
그래도 없자 뛰쳐나간다.
씬 61 마루(동)
할머니, 탁자에 밥상 차리고 있다.
난주, 문을 박차고 나온다.
할머니 어여 앉어, 밥 먹자.
난주 (다짜고짜) 내 돈 내놔!
할머니 ?
난주 빨리 내놔. 등록금 낼 거란 말야.
할머니 우물에서 숭늉 달라네, 무슨 소리야 그게.
난주 훔쳐갔잖아.
할머니 (짐작이 간다)
난주 (잡았다는 듯 자신있게)누구야 그 남자.
할머니 ! (외면하고)
난주 그 남자랑 짜고 훔쳤지? 내 시계도
훔쳐갔잖아.
할머니 모, 몰라.
난주 순 도둑이잖아? 내 돈 내놔!
순간, 광분한 얼굴로 난주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할머니.
할머니 다시 한번 말해봐라. 이 배은망덕한 년아! 그깟
돈 몇푼 잃었다고 이 지랄발광이야?
난주 (비명 지르며 몸부림치고)
할머니 (머리채를 흔들며) 천하에 은공도 모르는
더러운 것들 같으니라구! 그래, 그 돈으로 떡
사먹고 옷 해입었다. 어쩔테냐. 내가 그 돈
내놓을 줄 아냐? 어림도 없다!
난주 (할머니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바락바락 악을
쓴다) 더러운게 누군데?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도둑질이야?
할머니 오냐 먹여주고 재워줘서 고맙다 이년아! 이
못된년. 니 년 성깔 다 받아준건 어쩔테냐.
그동안 천대받은거 그깟 등록금 백배천배로도
못갚어 이년아.
서로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뒹구는 난주와 할머니.
상이 엎어지고 그릇이 바닥에 뒹군다.
김치국물을 뒤집어 쓴 두 여자, 종국에는 왜 싸우는지도 잊
은채 어디서 솟아나는지 모를 힘으로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싸우고 뒹군다.
씬 62 집 전경(동)
씬 63 마루(시간경과)
숨 넘어갈 듯 우는 난주. 꺼이꺼이 통곡하는 할머니.
두 여자의 손아귀에 든 서로의 머리카락.
그렇게 앉아 하염없이 우는 두 여자.
난주 (E)오로지 그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짓밟으며 처절하게
싸웠다. 왜 싸우는지 이유도 잊은 채..
울음 잦아드는 두 여자. 사이두고
할머니 (치맛자락으로 눈물 콧물 닦고)...그놈...내
자식이다.
난주 ?...
할머니 깜둥이 튀기지만 내 자식이야.
난주 ???
할머니 니 돈이랑 시계 다 갚아줄 테니까 걱정 마라.
(끙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간다)
난주 (보는)...
씬 64 할머니 방(동 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할머니.
온갖 회한이 스쳐가는 듯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씬 65 난주 방(동 밤)
어둠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난주.
(회상 인서트) 그놈, 내자식이다하던 할머니.
난주, 착잡하다.
F.O
씬 66 대문 안 (낮) F.I
문 열어주는 난주.
부리나케 들어오는 새엄마.
난주 (뜻밖의 방문에) 왠일이세요?
새엄마 괜찮니 응? 혹시 그놈이 해꼬지 하지 않았어?
난주 ???
씬 67 마루
눈 감은채 면벽하고 앉은 할머니.
새엄마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는 듯 부들부들
떤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요? 그래, 그 깜둥이 놈하고 작당해서
그동안 얼마나 해먹었어요?
할머니 ...
난주 (모른 척)..
새엄마 세상에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네. 내가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할 줄 누가 알았어.
그런 인종을 먼발치에서라도 봤으면 이렇게
놀라진 않겠네.
할머니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네.
새엄마 듣고 싶지도 않아요. 그 놈이 어제 어쨌는지
알아요? 할머니 월급을 1년치 선불해
달랍디다. 말이나 곱게 했으면. 돈 안주면
난주를 가만 안두겠다고 협박까지 합디다.
세상에 남의 귀한 집 딸을 5년씩이나 맡고
있으면서 길러준 정이 있지 어떻게 그런
놈하고 작당을 해서 돈 울궈먹을 생각을 해요?
난주야 혹시 그 깜둥이 못봤니?
난주 (고개 젓는데)
할머니 시커먼 짐승 보듯 너무 그러지 말어. 걔도
인간이야. 내 한점 혈육이구.
새엄마 !!
난주 (할머니 보는)
할머니 장사밑천 한다고 돈 빌려달라길래 조금만
기다리랬더니 그새 찾아갔네. 난주는 걱정
말어. 보고배운 게 없어 말만 거칠지 심성은
착한 애니까.
새엄마 긴 말 할 거 없이 당장 짐 싸요!
씬 68 부엌 (동)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밥상 차리는 할머니.
그 손을 쳐내는 새엄마.
새엄마 말이 말같지가 않아요? (등 떠밀며) 당장 짐
싸요.
할머니 (새엄마의 팔을 뿌리치고 계속 밥상 차리며)
난주 밥 먹여 독서실 보내야 돼. 자네도 먼 길
오느라 허기졌을 텐데 한술 뜨고 가.
새엄마 (기가 찬다)
난주 (문가에서 난처한 얼굴로 보고 있다)
새엄마 (마음 바꿔먹고 구슬르기 시작한다) 할머니,
우리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좋게좋게
끝냅시다. 이렇게 미련 떤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할머니 (묵묵부답으로 일만 하고)
새엄마 좋아요, 다른 일자리 구할 때까진 월급
쳐드릴께요. 됐죠?
할머니 ...
새엄마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우리한테 억하심정
있어요?
할머니 ..
새엄마 (울화통 터져 막말로 나온다) 배짱으로
나가겠다? 아무리 무지렁이라도 양심은
있어야지. 당장 나가요! (설거지하는 손을
잡아채 끌며) 그동안 거둬준 게 어딘데 이럴
수가 있어요?
그때 뛰어들어오는 난주.
거칠게 새엄마의 손을 떼어낸다.
난주 (할머니에게) 바보야? 등신이야? 왜 암말로
못하고 당하기만 해? (새엄마에게) 깜둥이든
뭐든 상관 없으니까 할머니한테 욕하지말아요.
아무도 그럴 자격 없어.(할머니의 손을 잡아끌고
나간다)
씬 69 공원(동 밤)
벤취에 나란히 앉아있는 난주와 할머니.
난주 (눈치 살피며) 술 마실래?.. 소주 사올까?
할머니 (앞만 보며)..
난주 (일어나는데)
할머니 흰둥이 튀기도 천대받는 판에 껌둥이튀기는
오죽했겠어.
난주 (슬며시 도로 앉는다)
할머니 세상에 태어나 받은 건 괄시하고 천대뿐이니
도둑질밖에 뭘 하겠어. 웬수같은 놈, 병신 같은
놈... (눈물을 삼키며) 그 놈은 저주를 받고
태어났어. 내 팔자에 못을 박을려구. 난 지
팔자에 못 박고... 불쌍한 놈... (눈물 흐른다)
난주 (아프게 보는)...
할머니 (난주의 손 부여잡고) 난주야. 넌 아냐. 넌
축복받고 태어났잖아. 넌 사람들 한테
사랑받는 여자가 돼야 된다. 넌 행복하게
살아야 돼. 내가 뒤를 봐줄께. 너 시집 가면
내가 살림 다 해주고 애들도 키워주고, 넌
행복하게 살아야 돼, 응? 넌 내 딸이니까.
난주 (목 메인다)... 할머니...
할머니 난주야 나 버리지 마 응? 이 핼미 버리지 마.
안버릴 거지? 응? (눈물 흐르고)....
난주 (울고)
그런 둘의 모습 부감된다.
F.O
씬 70 난주 방 (낮) F.I
새엄마, 급하게 난주의 짐을 챙기고 있고 아버지, 책상 앞에
마네킹처럼 앉아있는 난주에게 재촉하고 있다.
난주 내가 왜 도망을 가? 안가!
아버지 이건 고집 부릴 일이 아니다.
새엄마 그래 난주야. 천만다행으로 너 없을 때만 와서
뒤지고 갔다 그러더라만 그 놈이 무슨 맘을
먹을지 어떻게 아니. 아유 생각만 해도 끔찍해.
난주야, 너 혼자 살고싶어 했잖아. 학교 앞에
하숙방 구해놨으니까 가자 응? (방 밖을
살피며) 할머니 알면 큰일 나, 얼른 가자.
난주 (요지부동이다)
씬 71 대문 앞
새엄마, 짐가방 들고 나오고 뒤이어 아버지가 난주를 강제
로 끌고나오다시피 한다.
난주 (반항하며 절박하게) 싫어! 안가! 놔.
아버지, 난주를 안아 끌고 나가다가 우뚝 멈춘다.
장승처럼 서있는 할머니.
새엄마와 아버지, 도둑질하다가 들킨 것처럼 외면한다.
할머니 (아버지 보며) 대낮엔 뭔 보쌈이우?
새엄마,아버지
할머니 갈테면 얼른 가소.
의외의 반응에 놀라는 난주, 아버지, 새엄마.
새엄마, 짐을 지프차에 싫고 아버지, 난주의 손을 잡아끈다.
난주, 할머니의 냉담한 반응에 힘 빠져 그저 아버지가 이끄
는대로 차에 오른다.
할머니, 애써 외면하며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난주 할머니!
할머니, 멈칫한다. 돌아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지만...
난주, 애처롭게 쳐다본다.
가지 말라고 붙잡아주기라도 했으면...
그러나, 굳은 얼굴로 들어가버리는 할머니.
난주, 절망한다.
버림 받은 기분이다.
씬 72 할머니 방 (동 밤)
보자기에 얼망 안되는 옷가지 싸는 할머니.
막막하고 서럽지만 애써 무표정이다.
씬 73 하숙집 외경 (노을)
씬 74 하숙방 (동 밤)
붉은 노을 빛이 비껴 드는 고적한 방에서 고개를 무릎에 파
묻고 하염없이 우는 난주.
처음 지프차에서 내리던 할머니, 걸레 갖고 싸우던 할머니,
레슬링 보던 할머니, 처음 눈물을 보이던 할머니, 머리채를
휘어잡고 싸우던 할머니, 자식 이야기를 하며 울던 할머니
등 등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흐느껴 우는 난주.
난주 (N) 그녀는 나를 버렸다.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한 게 아니라 내가 그녀를 필요로 했다는 걸
말해주듯이 마침내 나는 그녀에게서 버림
받고야 말았다는 절절한 외로움에 떨기
시작했다.
씬 75 할머니 방
옷걸이의 연두색 원피스가 사라지고.
구석의 반닫이도 사라지고.
벽에 걸린 방비도 사라지고
보따리 싸는 할머니...의 모습도 먼지처럼 사라지고 아무것
도 없는 빈 방만
남는다.
난주 (N) 서로가 서로를 길들여가던 그 시절,
사춘기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나의 절망과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냈던 그녀는 그렇게
멀어져갔다.
F.O
씬 76 소형 APT외경 (12년후)
F.I
씬 77 소형 아파트 주방
(현재)
분주하게 오가며 청소하는 난주.
난주 (N) 세상은 자기 뜻대로 되어주질 않는다던
그녀. 그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는 동안
나는 적당히 세상에 안주하는 법을 배웠고,
저녁준비하는 난주.
찌개를 끓이고 있다.
난주 (N) 아버지를 향해 외치던 내 꿈들은 스무평
남짓한 아파트 안에 갇혀 버렸다.
디졸브-
씬 78 아파트 주방(밤)
냄비 뚜껑 열리면 시뻘건 생선국이다.
신랑, 숟가락으로 휘저어
보곤 빙그레 웃는다.
신랑 도대체 이게 뭐야?
난주 갈치국.
신랑 별 희한한 국이 다 있네. 누구한테 배운 거야?
난주 (말없이 웃는다)
씬 79 아파트 침실(밤)
곤히 자고 있는 신랑.
난주, 조심스럽게 신랑의 팔을 걷어내고 일어난다.
씬 80 거실(동)
TV에서 난주의 결혼식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다.
불 끈 채 혼자 앉아 보고 있는 난주. 난주, FF 버튼을 누른다.
빠르게 지나가는 화면.
난주, 끈기 있게 지켜본다.
화면.
난주, 어느 순간 곧추앉으며 리와인드 버튼을 누른다.
뒤로 돌아가는 화면.
화면 멈추면, 연두색 옷자락이 오른쪽 화면 구석에 잡혀있
다(신랑을 찍는 중인데, 그 옆을 지나가던 순간)
난주, 앞으로 돌렸다 뒤로 돌렸다 하지만 화면엔 옷자락만
보일 뿐 얼굴이나
몸은 보이지 않는다.
난주, 아쉬운 대로 그 옷자락만 뚫어져라 본다.
난주 (N) 12년만에 나타났다 사라진 그녀의 존재는
화인처럼 내 가슴에 남았다. 나에게보다도 더
함부로 굴었던 사람, 나에게 보다도 더 많이
나를 내보인 사람, 내 자신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 거부하지만 않았다면 영원히
내 곁에 머물렀을 사람.
난주의 눈가에 연민과 그리움의 눈물이 맺힌다.
지워지지않을그연두빛.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