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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눈길 ②] 유보라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5.09.08|조회수655 목록 댓글 0

[눈길 ②] 유보라












1. 얼음강 / 새벽 (과거)
 쩌어억- 금이 가는 얼음강.  
 푹- 발이 빠지며 고꾸라지는 영애, 체념한 얼굴로 피할 생각을 않는데,
 그런 영애를 힘겹게 끌어올리는 종분.
 추위로 새파랗게 질려 정신이 혼미한 영애를 종분이 강가로 질질 끌고 간다.
 영애야, 영애야- 정신을 차리라며 영애를 주무르는 종분.
 그때, 확- 군인에게 낚아채지는 종분의 머리칼.

2. 위안소, 종분의 방 / 아침 (과거)
 일본군이 떠밀자 쿵- 쓰러지는 종분.
 종분의 머리에서 이마를 타고 쭈욱- 흐르는 피.
 종분, 일본군이 나가자 아픈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가면,
 아침부터 귀찮다는 표정의 마마상과 일본군에게 끌려오는 영애 보인다.
 배를 누르며 허리를 굽히고, 반송장처럼 보이는 영애가 위안소로 들어가면,
 쪼르르 문가에 귀를 기울이는 종분.
 곧 마마상의 앙칼진 명령과 함께 끼이익- 옆 방문이 열리는 소리.

3. 위안소, 영애의 방 / 아침 (과거)
 바닥에 쓰러진 채 공허한 눈빛의 영애.
 그때, 옆방에서 종분이 부르는 소리 들린다.

종분 (E) 영애야, 괜찮아? … 살아있니?
 
 ‘우루세!!’ (시끄러워!) 고함 소리에 조용해지는 종분.
 창문으로 들이치는 아침햇살이 눈이 부셔 눈을 찌푸리는 영애.
 그때 다시, 똑똑똑- 똑똑똑- 똑똑똑똑- 노크하는 종분.
 햇살이 가라앉으면 선명하게 파란 하늘, 하얗고 탐스러운 뭉게구름.
 영애, 생경한 그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깜빡깜빡-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뜨며 바라보다가, ‘괜찮아’ 말하려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똑똑똑- 노크를 해준다.

4. 위안소, 종분의 방 / 아침 (과거)
 기대치 않았던 영애의 대답에, 그만 기운이 빠져 잉- 울어버리는 종분.
 다행이다, 다행이야- 울면서 똑똑똑똑- 노크를 해준다. 
 
5. 주민센터 / 낮
 윤옥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상대, 종분이다.

윤옥 할머니… 여기는 사람 찾는 데가 아니에요….
종분 그냥 한 번… 애가 어딜 나갔는지, 이 추운데… 집주인도 연락이 안 된대요. 애 혼자 얼마나 고단하겠어. … 알아봐줘요. (가방을 뒤져 은수네 집으로 온 고지서를 내밀며) 여기, 그 집 앞으로 온 거, 이름하고 주소하고, 응?
 
 어쩌지 못하고 고지서를 받아드는 윤옥.

 (시간 경과)
 복지과에서 나오는 윤옥, 기대하는 종분을 대하기가 곤혹스럽다.

윤옥 그 학생, 할머니가 안 계신 건 확실해요?
종분 그렇대두… 죽었대요.
윤옥 이상하네…. 담당자 분이 알아보신다고 하니까 돌아가셔서 기다려 보세요.
종분 (내켜하지 않으면)
윤옥 소식 있으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돌아서는 종분의 뒤로 ‘광복 70주년 독립유공자 포상’ 관련 포스터 보인다.

윤옥 아- 할머니, 저거 신청은 하셨어요?
종분 (무심히 보다가) 이제와 저게 다 무슨 소용이요. … 가족은 죄 뿔뿔이 흩어졌는데…

 뜨개질 거리며 배낭이며 바리바리 들고 돌아서는 종분을 안쓰럽게 보는 윤옥.

6. 은수의 집, 외부 / 낮
 종분, 은수네 집을 둘러보지만 여전히 인기척이 없다.
 창문을 열어 쇠창살이 쳐진 창 안을 보면, 옷가지, 이부자리만 널려있다.
 벽에 걸려있는 교복을 보며 차가운 쇠창살만 속절없이 흔들어 보는 종분.

7. 종분의 집, 내부 / 낮
 종분, 기운 없이 들어오다 보면,
 창틀에 팔을 괴고 서서 하늘바라기를 하고 있는 영애의 뒷모습.

영애 하늘 참 눈 시리게 파랗다.
종분 (대답 없이 짐 정리만 하면)
영애 (돌아보는) 왜?
종분 … 하여간 지 내킬 때만 오지.
영애 안 올까봐 섭섭했니?
종분 (한숨만)
영애 (보다가) 너도 참… 남 일에 신경 쓰는 건 여전해.
종분 (보면) 
영애 (씨익-) 그래서 좋아. … 자기 힘든 것만 알지, 남에 상처 핥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다시 창 쪽으로 고개 돌리는 영애의 곁으로 다가가서는 종분.
 창턱에 걸쳐 놓은 영애의 팔에 멍자국, 핏물이 굳어 껴있는 손톱을 보는 종분의 시선에서,

8. 위안소 일각 / 아침 (과거)
 커다란 양은 냄비에 속옷을 넣어 삶고 있는 종분.
 나무 꼬챙이로 속옷을 이리저리 섞다가 보면,
 옆에 걸터앉아 불을 쬐고 있는 영애의 가느다란 팔다리에 시퍼런 멍과 생채기가 보인다.
 종분, 안되겠는지 쪼그리고 앉아 영애의 다리를 주물주물한다.

종분 내가 천방지축이라, 맨날 멍을 달고 살믄… 울 엄마가 때마다 멍 빠지라고 이래 만져줬다. … 치자가루 물에 개서 발라 놓음 금세 빠지는데….

 영애, 이번엔 종분의 손길을 내치지 않고, 몸을 맡기고 앉아 있을 뿐이다.
 종분이 올려다보면, 고맙다는 얼굴로 가만히 종분을 보는 영애.
 그때, 빨래를 든 아야코가 들어와 냄비에 제 빨래를 섞어버리고는 불을 쬔다.

아야코 추워… 팍 지져야 되는데 여긴 아궁이가 없으니까 방이 냉골이야. 뼈가 시려.

 아야코, 월병 하나를 꺼내 종분과 영애를 보곤 고민-, 신중하게 삼등분을 한다. 조금 큰 것은 제 입에 가져가고 나머질 종분과 영애에게 주는데, 반응 없는 영애.

종분 (저도 모르게 배 만지며) 밑에 들어내고… 입이 다 헐어서 밥도 물에 한참 불려 먹어.

 아야코, 우물우물하다가 제 입으로 잘게 쪼갠 월병 조각을 영애의 입에 넣어준다. 어미새가 먹이를 주는 것 같다.

영애 (아야코를 보면)
아야코 달지?

 영애, 대답 대신 눈물만 툭- 흘린다.

아야코 (눈물 쓱- 닦아주며) 울지 마, 여기는 울어봐야 소용없어. … 응?

 영애, 힘없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 끄덕이는데, 삑삑! 호각소리.
 보면, 군인들의 명령에 맞춰 소녀들 줄지어 위안소로 들어가는 모습.
 다시 어두워지는 영애와 종분의 얼굴.

9. 위안소, 영애의 방 / 밤 (과거)
 영애, 쪼그리고 앉아 세숫대야에 소독약을 풀고 삿쿠를 씻고 있다.
 ‘영애야-’ 하며 조심스레 들어오는 종분.
 영애, 종분이 들어오는 기색에도 돌아보지 않다가 풀썩 주저앉는다.

영애 … 나 못하겠어. 이거 더는 못할 거 같아. 

 종분, 애써 웃어 보이며, 품에서 책을 꺼내 영애에게 준다.
 
종분 영애야, 나 글자 좀 갈켜 줘.

 영애, 이 책이 어디서 났어, 하는 얼굴로 책을 본다.

종분 니 오빠가 준 거야. 내가 맨날 여기 (허리춤 가리키며) 끼고 있었거든. 안 뺏기고 가져왔어. 잘 했지?

 영애, 그리운 듯, 책을 한참 본다.

종분 난 몇 글자 읽도 못해. 뭐라는 거야?
영애 (무심히 책장만 넘겨보면)
종분 니는 선생님 될라고 공부 많이 했잖아. 나한테 연습으로 가르쳐 줘, 응?

 영애, 모포 위에 앉더니 옆자리를 탁탁 두드린다.
 책을 읽어주는 영애, 그런 영애를 빤히 보는 종분.

종분 니랑 니 오빠랑 참 닮았다. 요 콧날이랑 눈 사이가 요래 먼 것이… 나른해 보이니 참 좋다.
영애 (정색하며) 안 돼.
종분 응?
영애 우리 오빤 안 된다고.
종분 …… 닮았다 그런 거지… 내 뭐라 했나…

 영애, ‘봐-’ 하며 다시 책을 읽으면, 열심히 눈으로 따라가는 종분.  

종분 (끼어드는) 이게 뭐야? 뭐라는 거야?
영애 내가 지금 읽는 중이잖아.
종분 그니까 어떻게 읽는 거냐고.
영애 그니까 먼저 들어보라고.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는 폼이 어느새 친근하다.

10. 위안소, 연회장 인근 / 아침 (과거)
 일본군들 오가는 막사 한 쪽,
 갓 세탁한 빨래를 한 무더기 들고 낑낑거리며 옮기는 종분을 쫄래쫄래 따라가는 영애.
 그때, 보초를 서기 위해 올라가던 일본군과 소년병이 보이면 고개를 숙이고 잰 걸음으로 가는 종분과 영애, 빨래 하나가 떨어진 줄도 모른다.
 뒤따라오던 소년병, 아무 생각 없이 빨래를 주워 종분이 든 바구니에 던져 넣다가 일본군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며 면박을 받는다.
 그런 소년병을 보는 영애, 종분은 빨리 가자 재촉하고.

11. 위안소 일각 / 아침 (과거)
 종분, 빨랫줄을 쓱 닦고는 이불 호청을 널려는데 혼자서는 힘에 부친다.
 햇살 바른 곳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던 영애, 일어나 호청을 같이 잡고 착착 펴준다.

영애 왜 맨날 니가 다 빨아?
종분 일본 언니들 거… 갸들은 장교만 상대하잖아. 군표가 아니라 진짜 중국 돈도 받고, 외출증도 받고. 이렇게 빨아주면 한 번에 2원씩 줘. 담에 외출 나갈 때도 같이 나가게 해준댔어.
영애 (보면)
종분 (조용히) 밥 들여오는 중국 사람이 그러는데, 여기서 조선까지 걸어도 한 달이면 갈 수 있대.
영애 도망가다 잡히면… 하긴… 잡혀 죽나, 맞아 죽나… 이렇게 사는 것 보단 낫겠지….
종분 그럼! 그니까 같이 가자, 응? 꼭 같이 가자?

 영애, 종분과 팡팡- 호청을 털어서 빨랫줄에 너는데,
 갑자기 퍽! 소리와 함께 하얀 호청에 붉은 핏물이 튄다.
 영애가 코를 움켜쥐고 주저앉는다.
 영애의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흐르는 코피.
 일본군, ‘쵸센고데 하나스나!’
 일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종분은 이유도 없이 맞은 영애를 보고 어리벙벙하고.
 일본군, 종분도 때리려 곤봉을 들고 다가가는데,

영애 고멘나사이, 하나시마셍! 스미마셍데시다. 
 
 일본군, 똑부러진 영애의 일어에 무섭게 노려보는데, 삐익- 호각소리 들린다.
 ‘이케!’ 소리치는 일본군. 
 영애, 굳어있는 종분의 손을 잡고 호각소리 들리는 곳으로 뛰어간다.

종분 왜? 왜?
영애 왜가 어딨어. 그냥 맞는 거야. (코피 쓱 닦고는) 이제 맞는 거 이력이 나서 괜찮아.

 울상이 되어 영애가 잡은 손에 묻은 피를 보는 종분의 얼굴에서,

12. 유흥가 거리 / 저녁
 네온 싸인 번쩍이고 사람들로 분주한 유흥가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종분.
 두리번거리며 어딘가를 찾는다.

13. 유흥가, 술집 (내부 혹은 외부) / 저녁
 30대의 사내가 은수와 서로 노려보고 있다.

은수 받을 돈 미리 받은 게 뭐가 잘못인데요? 같이 놀면 준다면서요?
사내 야!!
경찰 가만 계세요. 미성년자하고 술 마신 게 자랑입니까?
사내 아 좀, 얠 좀 보세요! 스무살 넘었다는데 믿지 안 믿어요?
주인 (이때다 싶은) 맞아요. 나도 미성년잔 줄 알았음 안 받았지!

 그때, 머뭇거리며 들어오는 종분을 발견한 은수. 

종분 (겸연쩍어 시선 피하는 은수를 보는)
경찰 (은수에게 확인하는데 고개 끄덕이면) 저 학생이 보호자라고 해서 연락드렸는데, 맞아요? … 아니에요?
종분 (다급히) 아니, 맞아요. 예, 예. 어째 얘가 여기 있대요? 예?
사내 (종분을 보자 더 의기양양) 하여간 제대로 가정교육 못 받은 것들이 사회 나와서도 사고를 쳐. 딱 보니 알만하네.
은수 (욱하는, 비아냥거리는) 그러는 아저씨 애들은요? 나 같은 년하고 술이나 마시는 아저씨보고 자라서 참 잘도 크시겠네요.

 사내, 은수의 반격에 당황하다가 발끈한다.
 짝- 사내,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은수의 귀싸대기를 날린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휘청하며 의자 위로 넘어지는 은수.
 종분, 놀라서 은수에게 뛰어가는데,
 ‘이거 봐, 이거 봐, 오늘 장산 다 했네, 나는 피해자야-’ 하며 난리치면서도 은수는 나몰라라 하는 술집 주인. 

사내 얘 말하는 거 들었죠? 야! 무릎 꿇고 사과해도 받아줄까 말깐데!!
은수 내가 왜 사과해! 맞은 건 난데, 내가 왜 해!! 니가 뭔데 날 때려?!
 
 은수, 살쾡이처럼 독기품고 사내에게 달려드는데, 말리는 경찰.
 사내, 그런 은수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가는데 종분이 사내 앞을 막는다.
 
종분 (사정조로) 아를 왜 때리요, 아를 왜 때려. … 지들이 다 큰 줄 알아도, 아직 애들이요. 아무리 다 컸대도 이제 열일곱 된 애들인데… 말로 해도 다 알아들을 거 어디다 손을 대요. 
경찰 (사내에게) 그만하세요! (종분에게) 할머니, 얘도 잘한 거 없어요. 몰려다니면서 문제나 일으키고.
종분 왜 몰려다니겠소? 쟤들이 혼자서 뭘 하겠어, 무섭고 외로워 엇나가는 걸… (사내보고) 잡아주진 못하고 같이 술 마시고 주무르고…
사내 (더 듣기 싫은) 싸고도니까 애새끼가 이렇게 됐지. (노려보는 은수의 이마 툭툭 밀며) 여기 나가면 또 몸 팔고 사기나 칠 애들이라고.

 은수가 달려들기 전에 종분, 별안간 사내의 손을 콱 문다.
 아아아아!
 
종분 (호통) 어디 또 손을 대나! 때리지 말라 했지? 애들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은 잡아 죽여야 된다! 니가 그러고도 어른이고, 애비야, 이놈아?!! (사내의 머리칼 잡고 늘어지면) 
사내 (당황하는) 아아, 왜 이래… (경찰 향해) 안 말려요?!  

 종분을 뒤로 물리려는 경찰들에게도 격노하는 종분.

종분 어째 나를 말리나. 잘못한 사람을 내비두고 어째 나를 말리냔 말이다!

 종분의 서슬 퍼런 기색에 멀뚱한 은수.
 이건 또 뭔 상황이야, 하는 얼굴로 구경하는 술집 주인.
 기어이 사내를 한 대 더 때린다는 게 말리던 경찰을 때리고 마는 종분.

14. 경찰서, 유치장 / 저녁
 유치장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종분과 은수.

은수 이게 뭐야… 나 좀 데려가라고 불렀더니…
종분 …….
은수 아 짜증나….
종분 그러게 짜증날 짓을 왜 해. 니도 잘한 거 없어.
은수 내가 뭘 잘못했는데. 다들 남들 등쳐먹고 속이면서 돈 벌잖아요. 

 말은 독하게 해도 연신 다리를 떨며 불안해하는 은수.
 종분과 은수 한동안 앞만 쳐다보고 말이 없다.

은수 … 미안해요.
종분 미안할 놈은 사과를 안 하는데 니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

 종분, 유치장의 마룻바닥과 거친 모포를 본다.
 쇠창살, 상처 난 은수의 얼굴을 본다.
 종분, 침을 삼키고, 눈을 깜박이지만 어지럽다. 
 갑자기 일어나 철창을 흔들며, 경찰을 부르는 종분.

종분 여기요! 왜 그 놈은 안 잡아들이고 우리만 가둔답니까? 봐요! 애를 이래 잡아 가둬도 되는 거요?! 
은수 (놀란) 할머니, 할머니!

 은수가 그런 종분을 진정시키려는데, 경찰이 쇠창살을 캉캉, 때리며 온다.

경찰 (문 안열어주고 종분 보며) 경찰을 때린 건 공무집행 방햅니다.

 종분, 문을 안 열어주는 경찰에게 한마디 더 하려는데 윤옥의 모습이 보인다.
 
15. 경찰서 밖 / 밤
 윤옥의 뒤로 따라오는 종분과 은수, 쭈뼛거리는 폼이 뭔가 닮았다.

종분 … 고마워요. 내 부를 사람이 없어서… 밤늦게 미안해요.
윤옥 몸은 괜찮으세요?
종분 이 나이 들면 본래 괜찮은 데가 없어… 괜찮아요. 고생했어요.
윤옥 아니에요. (종분에게만) 학생을 찾아서 다행이에요. (웃으며) 들어가 쉬세요.

 윤옥이,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면 멀뚱히 서 있는 종분과 은수.

종분 배고프지?

 종분, 대답 않는 은수를 보다가 먼저 걸어가면, 뒤따라가는 은수.
 
16. 거리 / 밤
 도심의 거리, 쌩쌩 달리는 차, 좁은 인도 위. 
 멀찍이 거리를 두고 걷고 있는 종분과 은수, 서서히 좁혀져 가고.
 동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지대, 난간 앞에 앉아 버리는 종분.
 
종분 (힘든, 숨 고르며) 힘드네… 좀만 쉬었다 가자. (보다가) 그래 입고 안 춥니?
은수 추워요.
종분 (피식-)
은수 …… 나 그 아저씨 말처럼 몸 팔고 그러지 않았어요.
종분 그래.
은수 … 진짜예요.
종분 그래.  

 은수, 잠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종분 옆에 앉는다.
 달달- 다리를 떠는 은수.
 종분, 가만히 은수의 다리 위에 손을 올리면 떠는 걸 멈추는 은수.

종분 애 썼네….
은수 (보면)
종분 (은수의 무릎을 토닥토닥해주며)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겨.

 은수, 무릎위에 올려진 종분의 마르고 거친 손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도는.
 쓱 닦아내고는, 괜히 ‘아, 짜증나-’ 하며 시선 돌린다. 

종분 …… 야, 니 그거 하나 줘 봐라.
은수 네?
종분 담배 하나 줘 봐.

 은수, 종분의 말에 어째야 되나 고민하는 사이,

종분 모른 척은… 경찰서도 같이 갔다 온 마당에, 감출 게 뭐 있어.

 은수, 부스럭부스럭 담뱃갑을 꺼내 한 대 준다.

종분 답답할 땐 이거 하나씩 펴. 소리를 지를 수가 있나, 어디 풀 때가 있나… 우리 때야 다 속으로 삭히니까.
은수 (보다가, 제 것도 한 대 꺼내 무는데 빼앗기는)
종분 그래도 니는 안 돼야. 속에다 나쁜 거 쌓아 놓는 게 젤루다 안 좋은 거야.

 종분이 담배를 입에 물면, 불을 붙여주는 은수.
 불이 켜진 집들 내려다보이는 난간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뒷모습.
 휴우- 종분의 머리 위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들썩이는 은수의 어깨.
 종분, 은수의 등을 가만히 쓸어준다.

은수 짜증나…
종분 울어. 눈물 날 때 울어야지, 참으면 것도 병 돼버려.
은수 … 할머니… 나이 들면 사는 게 좀 쉬워져요?
종분 세상에 쉬운 게 어딨간? … 그래도 살아져. 벌써부터 걱정 말어.

17. 종분의 집, 방 / 아침
 이불을 덮지도 않은 채 쪼그리고 자고 있는 은수에게 새로 한 목화솜 이불을 가만히 덮어주는 종분.
 따뜻한지 본능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기며 품에 꼭 쥐고 자는 은수.

18. 종분의 집, 부엌 / 아침
 된장 푼 물에 무를 어슷하게 썰어 넣는 종분, 보글보글- 소리들.
 방에서 어정쩡한 포즈로 나오는 은수, 무안해 하는 눈친데,

종분 (아무렇지 않게) 인났음 어여 씻고 나와. 밥 먹자.
 
 은수, 시키는 대로 하자니 괜히 어색한, 머뭇거리다가 보면,
 낡은 TV 다이 위에 놓여있는 사진에 눈길이 간다.
 간호사복을 입고 단체로 서 있는 소녀들의 흑백사진.

종분 (어느새 다가와) 이게 나야, 나. 이쁘지?
은수 (뭐래-) 건 모르겠고요. … 완전 어렸네.
종분 어렸지 그럼. 니도 나처럼 할머니 된단 소리야.
은수 (종분 보는) 싫은데?
종분 (으이구- 하다가, 영애 짚어주며) 얘가 영애, 내 친구. … 영애가 참 똑똑했어. 지금 태어났음 뭐라도 됐지. 일본 놈들도 영애를 못 이겼다구. 공부 잘하는 애들만 뽑아서 일본서 공부시킨다고, 거기 1등으루 뽑혔던 애가 영애야. 
은수 그럼 할머니는? 
종분 나야 영애랑 비교가 됐나 어디…. 그냥 칠렐레 팔렐레… 세상 무서운지 모르고… 그러니까 살았나봐. 뭣도 모르니까 살았어.
은수 (피식) 이 할머니는 지금 어딨는데요?
종분 영애는 할머니 아니야. 
은수 ?
종분 영애가 글을 참 잘 썼어. 똑똑했다구. 나라만 좋았으면 선생이 됐을 거야. … 걔는 그렇게 살믄 안 돼는 애였어. … (사진 속 소녀들 보며) 하긴, 그렇게 살아도 되는 사람이 어딨겠나.

19. 위안소, 종분의 방 / 밤 (과거)
 종분, 소공녀 책을 더듬더듬 읽고 있다.
 그때 나무 벽 위로 톡톡- 톡톡톡- 신호처럼 치는 소리 들린다.
 책과 소품들을 챙겨 몰래 방을 빠져나가는 종분.

20. 위안소 내, 영애의 방 / 밤 (과거)
 끼이익- 조심스레 문 열리며 종분 들어오면 쉿- 하며 창가를 가리키는 영애.
 창가 보면, 일렁이는 촛불이 어렴풋이 보인다.
 영애가 촛불 들어 답을 하면, 꺼지는 촛불.
 종분과 영애, 긴장된 얼굴로 창문을 주시하면,

21. 위안소 밖 / 밤 (과거)
 조심스레 뛰어오는 소리, 보초를 서던 일본군이 돌아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잠잠해 지는가 싶더니, 일본군의 뒤로 모습을 보이는 아야코.
 살금살금 걷는가 싶은데, ‘다레다!!’ 소리치며 총을 겨누는 일본군.

22. 위안소 내, 영애의 방 / 밤 (과거)
 이를 어째! 종분과 영애, 걱정스레 창문을 본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일본군의 모습, 아야코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끼이익- 열리는 방문.
 기겁하는 종분과 영애, 촛불을 끄기에도 숨기에도 늦어 둘이 손을 꼭 잡는데,
 모습을 드러낸 사람, 병색이 완연하지만 위풍당당한 아야코다.

아야코 야, 니들 봤어? 나 빠른 거 봤어? 내가 우리 동네서도 뜀박질하난 기가 막혔다 안 하나. 

 아야코, 자랑은 하면서도 켁켁- 마른 기침을 하면,
 잠깐 원망하는 표정이다, 이내 서로 부둥켜안고 좋아하는 세 소녀.
 깔깔- 웃음이 터지다가, 밖에서 들리는 마마상의 기침 소리에 서로 입을 틀어막고 눈만 말똥말똥 뜬다.

(E)  아야코의 노랫소리 ‘봄 아가씨’

 (cut to)  
 세 소녀, 옹기종기 모여 작은 촛불에 의지해 ‘소공녀’ 책을 읽는다.
 종분이 제대로 못 읽을 때마다 영애가 정정해준다.
 아야코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 쪽에 앉아 말린 대추를 조금씩 뜯어 먹고.

영애 넌 머리가 나빠서 써가면서 배워야 돼. 읽기만 하고 쓸 줄 모르고…
종분 (무안해) 첨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딨나. (아야코 보며) 안 그래요, 언니?
아야코 야, 남일 국민학교 3학년까지 댕겼어. 엇다 대? 
종분 (시무룩-, 누우며) 배고파서 그래…. 배고프니까 머리도 나빠지는 거야. … 엄마 밥 먹고 싶다-. 짠무 자박하게 물에 재웠다가 고추도 썰어 넣고, 파도 넣고, 고춧가루 풀어서… 그거 먹음 소원이 없겠다.
영애 (역시 바로 누우며) 나는, 멀건 미소 말고… 엄마가 항아리서 막 퍼온 된장 진하게 풀어서 무만 넣어도… 그게 젤로 맛있는데.
아야코 맞아, 일본 된장 맛대가리도 없구. 난 시원한 물김치. 고춧가루 팍 타서, 미나리향 진해서… (하다가 퍼뜩) 엄마야, 나 가봐야 한다, 마마상이 약 먹이러 올 건데… 싫어라 … 약 먹음 메스꺼운데… 에이, 괜히 말해서 칼칼하게 물김치만 더 먹고 싶네….
종분 (걱정스런) 언니야, 약 먹음 낫긴 하나?
아야코 아직 쓸 만하니까 낫게 할라구 그 독한 약을 먹이겠지. (팔꿈치, 허벅지 가리키며) 고름 나는데서 냄새난다고 기겁을… 지들이 옮겨놓고… (배시시) 사내 못 받는다고 난리쳐도… 이래 아픈 게 낫지 싶어. (철모르게 신난) 일단 팍 쉬는 거잖아. 어머, 나 또 떠든다.

 아야코, 급히- 그러나 조심스레 방을 나가면,

종분 에이 씨… 물김치에 밥 말아 먹고 싶네.
영애 죽을 때까지 못 먹겠지.
종분 왜 못 먹어, 돌아가서 엄마한테 해 달라 그럼 돼지. (모포 끌어 당겨 덮는데) 아우 까끌거려. (몸을 뒤틀면)
영애 … 엄마가 해준 이불 덮고 싶다. 목화솜 가득 넣어서 폭신한 게… 아랫목에 깔아뒀다 폭 들어가면 참 따뜻한데…

 종분, 몸을 웅크리며 힘없이 말하는 영애를 물끄러미 보는데,  
 밖에서 발자국 소리 들리자 급히 후- 촛불을 끄는 영애.
 옆방으로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 들리면 귀를 막는 영애.

 (시간 경과) 새벽
 종분, 영애와 함께 잠이 들었다가 깬다.
 미동도 없는 영애를 보고는 놀라 영애의 가슴에 귀를 대고는 확인한다.
 심장 박동소리.
 ‘다행이다-, 안도하며 제 방으로 가려는데, 눈을 뜨는 영애.

영애 종분아…. (담담히) 우리 아빠 돌아가셨댄다.
종분 (보면)
영애 나 여기로 데려온 군속이 아빠가 주재소 끌려가 죽는 거 직접 봤댄다. … 그니까 돌아가도 소용없다고… 딴 생각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대.

 종분, 뭐라 말해야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다시 눈을 감는 영애.

23. 종분의 집, 내부 / 아침
 종분, 된장국을 맛있게 먹는 은수를 본다.

종분 학교 가봐야 안 해?
은수 오지 말래요.
종분 오지 말랜다고 안 가? 학교는 마쳐야지! … 우리야 시대를 잘못 타고 나 배우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당했지만, 니들은 아니잖아. 배워서 힘을 키워야지. 
은수 (보면)
종분 선생님한테 가서 잘못했다 빌고, 다시 학교 나가겠다고 하고…

 종분, 말하면서 마른 멸치 같은 반찬을 은수에게 내밀며 먹어보라 하고.
 
24. 란 뜨개방 / 낮
 아주머니들 없이 깜씨 혼자 앉아 있고, 종분이 옆에서 뜨개질 중이다.

깜씨 그래서, 애는 어쩐데요?
종분 일단 재우고 먹였지 어째. (뜨개질 끝난 가디건 들어 보이며) 잘 나왔지?
깜씨 (심드렁) 형님이야, 어련히 잘 뜨셨을까.
종분 (보다가) 왜 다들 안 온대? 여즉 안 풀었어?
깜씨 풀게 어딨어요? 지가 와 난리치고 간 걸.
종분 그러게 듣기 좋은 말 좀 해주지. 나이 들수록 옹졸해지는 게 사람이라 안 해?
깜씨 얄밉잖아요.
종분 ?
깜씨 말끝마다 혼자라서 어쩌고, 그래도 서방이 있어야 된다 어쩌고. 어디가선 내세우지도 못할 놈을 서방이랍시고…
종분 그래서? 그이도 서방 잃고 혼자 됐음 좋겠어?
깜씨 (보면)
종분 내가 못 가졌으니 너도 갖지 마라, 그런 못된 심보가 어딨어.
깜씨 (뜨끔한) 형님!
종분 그이도 외로워 그런 걸. 서방이 있다고 안 외롭나…. 서로 등 비비고 살면 될 것을, 꼭 그래 트집을 잡아야 쓰겄어? 먼저 연락해. 사람한테 받은 상처엔 사람 밖에 약이 없어. 내 말 들어. (가방과 김치통 든 보따리 챙겨 일어나면)
깜씨 (아쉬운) 벌써 가시게?

25. 종분의 집, 내부 / 낮
 은수, 배를 움켜잡고 화장실에서 나온다.
 배가 아파 바닥에 등을 동그랗게 말고 웅크리고는 고통을 참아본다. 
 그런 은수의 시선에 걸리는 사진, 다시 보니 사진 여백에 ‘1945년 2월’ 서툴게 적힌 글씨 보인다.
 사진을 배경으로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26. 위안소 마당 / 아침 (과거)
 영문을 모른 채 집합해 서 있는 소녀들에게 마마상이 옷을 벗으라고 시킨다.
 빨리 벗으라는 호통에 그 자리에서 옷을 벗는 소녀들.
 드러난 팔 다리, 벌벌 떤다.
 아야코, 얼굴과 팔다리 곳곳에 매독으로 인한 열꽃이 피어있다.
 마마상, 아야코를 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군인에게 눈짓한다.
 군인, 아야코를 끌고 한 쪽으로 간다.
 종분, 걱정스레 아야코를 보면, 괜찮다고 웃어주는 아야코.
 마마상이 간호복을 던지며 갈아입으라고 소리를 치고,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는 종분과 영애, 그때 한 쪽에서 탕- 총소리.
 보면, 풀썩 쓰러지는 아야코.
 급작스런 상황에 입만 벌릴 뿐 비명도 나오지 않아, 넋 나가 보기만 하는 종분과 영애.  

27. 군 진료소 앞 / 아침 (과거)
 간호복을 입은 소녀들이 군인들에게 떠밀려 와 진료소 앞에 일렬로 선다.
 소녀들 양 옆에 서는 군의관과 군인 몇.
 그 앞으로 사진기 놓여 있다.
 사진기 옆, 마마상이 ‘웃어! 웃어!’ 명령한다.
 거의 울 것 같이 웃는 종분과 사진기를 노려보는 영애의 모습 위로,
 찰칵- 찍히는 사진.

28. 주민센터 일각 / 낮
 종분, 윤옥에게 김치통을 건네면 뭔가 싶어 열어보는 윤옥.

종분  물김치가 맛있게 잘 익었어. 제대로야.
윤옥 (잘 익은 무 골라 맛보는) 맛있어요. 근데 이런 거 안 가져오셔도 되는데… 
종분 고마워서, 어제 고마워서 그래요.
윤옥 (김치통 내려놓고) 장은수 학생이요. … 친모가 친권을 포기하겠다나 봐요.
종분 ……
윤옥 친할머니는 작년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돌아가셨는데, 애가 안 찾아오니까 그쪽에서 제대로 신고를 안 한 거 같아요.
종분 그럼 어찌 되는가?
윤옥 친척이 있으면 그리로 가던가… 아니면 시설인데… 나이가 있어서…

 윤옥, 말하면서 계속 긁적이는데, 종분이 빤히 보자 무안하다.
 윤옥, 목까지 오는 두꺼운 니트를 살짝 내려 보이면, 뒤틀리고 흉측한 피부가 그대로 드러난다.
 
윤옥 (허벅지 밑을 가리키며) 여기까지 쭉 이래요.
종분 (담담히 상처를 드러내는 윤옥을 낯설게 보면)
윤옥 (니트 올리며) 그래도 겨울엔 좀 나요. 다 가리니까. 찬바람에 피부가 찢어지고 갈라지는데 … 사람들이 쳐다보는 거 보다는 나아요.
종분 … 어쩌다 그렇게 됐어? 얼마나 아팠어?
윤옥 중학교 때 수련회 갔다가… 자는 사이에 이렇게 됐대요. 지금은 다들 잊었지만 꽤 큰 사건이었어요. … 친구들도 몇 명 죽었거든요.
종분 (안쓰러워 보면)
윤옥 … 진짜 끔찍했던 건요, 살아있어 준 것만도 고맙다고, 엄마가… 계속 감사하다고 기도하는 거였어요.
종분 ?
윤옥 … 정신을 차리면서부터 저한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거든요. 왜 살려냈냐고 엄마한테 정말 독한 말 많이 했어요. … 고통은요… 익숙해질 수 없어요.
종분 그래도 여태 잘 견뎠네, 잘 견뎠어.
윤옥 별 말을 다 해. 할머니가 편해서 그런가 봐요. (퍼뜩 정신 차리고, 서류 보이며) 다른 방법이 있긴 한데요. 할머니가 은수 후견인으로…

 다시 사무적인 태도로 종분에게 설명을 하는 윤옥.

29. 종분의 집, 내부 / 낮
 종분, 들어와 보면, 방 안에 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은수.

종분 학교 안 갔어? 어? 밥은? 자더라도 밥 먹고 자, 어?

 종분, 은수를 깨우려 이불을 들추는데,
 배를 잡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신음하고 있는 은수.

30. 병원 복도 / 저녁
 종분, 안절부절, 대기석에 앉지도 못하고 좌불안석인데, 간호사 다가온다.

간호 장폐색이에요. 식사 제 때 안 하고, 인스턴트만 먹고… 초기라 수술까진 안 가도 되고, 감압하고 약물치료만 할 거에요. (반응 없는 종분의 태도에) 그래도 며칠 입원 시켜서 경과는 봐야 하니까 내려가셔서 수속 밟으시구요.
종분 (후우- 한숨을 쉬며 대기석에 앉는) 다행이요.
간호 네, 조금만 늦었어도 수술까지 갈 뻔 했어요.
종분 나는요… 쟤가 애라도 밴 줄 알았어. 저 어린 것이, 애까지 배면 어쩌나… 저래 아픈 건 생각도 안 하고.
간호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한 얼굴인데)
종분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을 알면서, 어째 모른 척을 했을까…

 종분, 제 무릎만 툭툭 치고.

31. 병실 / 밤
 6인실 병실의 창가, 코에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있는 은수.
 종분, 까맣게 타들어간 은수의 얼굴을 짠하게 보다가 고개 돌리면,
 병상 끄트머리에 기대 있는 영애.
 
종분 얘가 그 집에 드나들 때마다 아주 요란시럽게 소리가 났잖어. … 그게 꼭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거처럼 들린 걸… 내가 모른 척 했어.

 쌕쌕- 숨을 내쉬는 은수.

영애 아니야. … 봐라, 얘. 살겠다고 애쓰는 것 좀 봐. 괜히 니 집에서 쓰러졌겠니? 너라면 내치지 않겠지, 본능적으로 안 거라니. … 종분아.
종분 (보면)
영애 내가 죽겠다고 강에 뛰어갔던 거 기억나?
종분 그걸 어떻게 잊어. 으이구… 지 살려냈다고 날 얼마나 미워했어. 말도 못 붙여, 옆에 오지도 못하게 지랄을….
영애 쪽팔려서 그랬지. … 죽겠다고 뛰쳐나갔는데…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거 쪽팔리잖아. … 니가 나 잡으러 올 줄 알고… 그러니까 그래 맘 놓고 죽을라 그랬지 싶어. (웃는) 그때부턴 니 덕분에 덤으로 산거야.
종분 … 그런 말 말어. 니 덕에… 내가 여태 살았지….

 씨익- 웃는 영애를 보는 종분의 얼굴에서,

32. 병참소(兵站所) / 저녁 (과거)
 소독약과 삿쿠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영애.
 관리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한쪽에 만들다 만 보고서 보인다.
 간호사복을 입고 단체로 찍은 사진 아래, ‘간호 근로 대원들’ 적혀있다.
 뭐지? 하며 사진을 손에 들고 보는 영애.
 그때, 한 쪽에서 전보를 확인하는 군인들.
 ‘대련, 만주 부대 상해로 이동, 목적지 이오지마… 현지 보급품은 다 버릴 것’
 전보를 읽는 군인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린다.
 어린 일본군, 사색이 돼서 ‘이오지마…’를 되뇌더니 큭큭 거리다 울먹이기 시작한다.

소년병 (日) 아버지가 양복집에서 일을 했는데요. 천을 훔쳐다가 팔았단 말입니다. … 내가 자꾸 배고프다 보채니까 (허리춤에 감추는 흉내를 내며) 이렇게 감춰와서요… 다음날 바로 걸려서… 아버지하고 엄마하고요, 동네 사람들 다 보는데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단 말입니다. 나는 부끄러워서 도망쳤어요. … (퍽!! 약한 소리 마! 라며 때리는 상사의 폭력에도 중얼중얼) 입영 통지서를 받고는, 그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나는 게 기뻐서… 부모님이 기차역까지 쫓아오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단 말입니다. 돌아가면 죄송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고맙다고 한 마디도 못했는데… 치쿠쇼… 내가 왜 죽어야 되는데… 내가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일본군이 소년병을 사정없이 때리면 쓰러져 맞다가 자신을 불쌍하게 보는 영애와 눈이 마주친다. 순간 수치심이 이는 소년병.
 영애를 노려보는 소년병의 눈빛에 부끄러움과 분노가 가득하다.
 영애, 저도 모르게 손에 든 사진을 챙겨서는 재빨리 병참소를 나와 버린다.
 
33. 군 연회장 / 저녁 (과거)
 흥청망청, 술을 마시는 군인들.
 일본 매춘부들이 창가를 부르며 기모노를 입고 춤을 춘다.
 열에 들뜬 분위기, 바보짓을 하며 미친 듯이 노는 군인들.
 종분과 영애를 비롯한 위안부들이 술을 따르고 시중을 든다.
 음식도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종분, 술을 따라주는 사이사이 빈 그릇을 치우면서 남은 음식을 몰래 입에 우겨넣고 허리춤에 챙긴다.

종분 일본이 이겼다니? 이 미친놈들이 웬일이래? … 영애야, 너도 챙겨, 어여. … (하다가 시무룩) 언니가 월병 진짜 좋아했는데… 영애야 언니를 왜… (하는데)
영애 (뒤에서 연회를 지켜보는 장교와 마마상을 보며) 왜 같은 건 없다고.

 장교의 서늘한 눈빛에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영애.
 군인들의 눈에도 광기가 서려있다.
 장교가 나가자, 일본인 매춘부들을 챙기는 마마상을 놓치지 않고 보는 영애.
 
34. 위안소 외부 / 저녁 (과거)
 술에 취한 군인들의 인솔로 위안소로 몰려가는 소녀들.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은 소녀들이 조잘거린다.
 종분의 손을 잡고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뒤로 빠지는 영애.

종분 왜?
영애 이상해.
종분 뭐가?
영애 마마상이 안 따라오잖아. … 내일 이동한다는데, 왜 우리한테 암 말도 없어?
종분 내일? … 쟤들이 언제 우리한테 뭐라 말해주디? 그냥 끌고 다니지.
영애 종분아… 우리 도망가자. 
종분 (놀라 보는)
영애 봐봐, 다들 술도 마시구, 우리가 없어졌는지 낼 아침에나 알 걸? 지금 가자.
종분 지금? 
영애 너 살고 싶다며, 돌아갈 거라며? 가자고.  
종분 책이랑… 군표랑 다 두고 왔는데… 가져 와야… (하는데)
영애 (불안한) 아니야, 이상해. 그냥 가자. 그거 다 쓸모없다.

 그래도… 하며 머뭇거리는 종분을 강하게 잡는 영애.
 종분,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아 앞서가는 소녀들을 바라보는 순간,
 꺄아아- 비명소리, 소녀들이 쓰러지고 엉키고 난리도 아니다. 
 우왕좌왕하는 소녀들을 총검으로 가차 없이 찌르는 군인들.
 속수무책 쓰러지는 위안부들. 
 입만 벌리고 놀라 있는 종분을 영애가 잡고 뛰기 시작한다.
 그 순간, 얼굴에 피칠갑을 한 어린 일본군이 돌아본다.
 영애와 눈이 마주치는 일본군.
 일본군이 영애와 종분을 향해 총을 겨누자 놀라 휘청이는 종분을 데리고 급히 도망을 가는 영애. 
 탕탕!
 영애와 종분이 사라진 어둠 속을 향해 총질을 한 일본군, 쫓아가려는데.
 ‘고노 빠가야로, 총탄 아껴!!’ 하며 퍽- 맞는 어린 일본군.

35. 산길 / 밤 (과거)
 눈 덮인 산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발소리, 헉헉 거리는 숨소리만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멀리서 소녀 종분과 영애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치고 피로한 모습, 다 부르튼 입술.
 손과 발을 낡은 천으로 둘둘 싸맸지만 추위가 만만치 않다.
 인적 없고, 끝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쉬지 않고 걷는 종분과 영애.
 눈길에 휘청이면서 서로 손을 꼭 잡고, 의지하며 걷는다.

종분 더는 못 가겠다. 좀만 쉬었다 가자.
영애 여기 있음 얼어 죽어, 좀 더 가야해.
종분 (울먹) 애들은 다 어떻게 됐을까? 응? 왜 그러지?
영애 쓸모없어졌으니까, 버린 거지.
종분 다?
영애 다. … 가자.

 종분, 기운이 없지만 영애에게 이끌려 다시 발을 옮긴다.
 
 (시간 경과) 새벽
 쌓인 눈을 헤치고 가느라 느려진 발걸음.
 종분, 거의 정신을 놓고 영애에게 손을 잡혀 본능적으로 걷는다.
 영애, 팔을 들려다 통증에 찡그리고 보면, 핏물에 젖어가는 옷.

영애 (통증 참으며, 애써 밝게) 종분아.
종분 응?
영애 돌아가면, 우리 오빠한테 시집가도 좋아.
종분 응?
영애 내가 허락해준다고. 내 안 말릴게.
종분 진짜?
영애 고향에 돌아가면, 내 모직코트도 너 줄게. 너 그거 입고 싶어 했잖아.
종분 참말이야?
영애 참말이지 그럼.
종분 … 아니다, 됐다.
영애 왜?
종분 이렇게 못쓰게 됐는데… 어떻게 그래. 욕심 부리다 탈 나.
영애 속이면 되지. 군수 공장 갔다, 간호부로 갔다… 속이면 되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난 그럴 거야.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야. 엄마한테도 안 해.

 영애, 고개 들어 앞을 보면 끝도 없는 눈길.

영애 방직공장 다녀왔다 그래야지. 하루 종일 목화솜이나 뽑았다 그러지 뭐. 

36. 위안소 / 새벽 (과거)
 위안소 복도, 번호 표 붙은 쪽문들, 끼익끼익- 반쯤 열려 있다.

영애 (Na) 끼익- 끼익- 방직기계 돌아가는 소리 들으면서, 실도 뽑고, 면도 짜고… 밖에 나다니는 일 없어 내 얼굴도 목화솜 마냥 하얘졌다, 그래야지.

 (cut to)
 좁은 방 안, 소독약 통, 삿쿠통, 군표를 모아놓은 철통, 낡은 신발 보이고.

영애 (Na) 목화솜 누빈 이불에서 매일 밤 꿈같이 잠들었다, 그래야지. 엄마 보러 갈 날만 기다렸다 말해야지.

 (cut to)
 눈 내리는 위안소 앞.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쓰러진 위안부들, 그대로 버려져 있고.
 한쪽에는 자료와 군수품 같은 것들이 거의 불타 사그라지고 있다.

영애  (Na) 돌아가면 이-만큼 배불러, 이쁜 아기도 낳아야지.
 
37. 산길 / 아침
 동틀 무렵,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산길에 발자국 두 개가 나란히 나있다.
 한 발자국 위로 핏방울 똑똑 떨어져 있다.

38. 산 너머 어딘가 / 아침 (과거)
 버려지고 무너진 집터, 벽에 기대 앉아 서로 꼭 안고 있는 종분과 영애.
 죽었는가, 싶은데 꿈틀, 영애가 눈을 뜬다.

영애 종분아, 일어나. … 가야해, 일어나. 

 종분, 힘겹게 일어나 눈을 비비고 영애의 팔을 잡다가 놀란다.
 영애의 어깨에서 흐른 피가 딱딱하게 얼어붙어있다.  
 종분, 울상이 되어 영애를 보는데, 아무렇지 않게 입을 떼는 영애.

영애 종분아, 저기 좀 봐.

 영애의 시선 따라가면,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영애 진짜 파랗다, 그지? … 나 죽겠다고 뛰쳐나간 날, 우리 잡혀가 한창 매 맞고 쓰러졌을 때 말이야. 그때도 이렇게 눈 시리게 예뻤어.

 종분, 영애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목에 감았던 천을 꺼내 피를 닦아내려는데,

영애 (허리춤에서 사진을 꺼내 주며) 종분아, 이거 니가 갖고 있어.
종분 (사진 받아들면)
영애 여기 우리 애들, 니가 기억해야 돼. 꼭… 알았지?
종분 (고개 끄덕이는)
영애 쉬지 말고 가야 해, 돌아보지 말고. 절대루 돌아보면 안 돼.
종분 (보면)
영애 난 조금만 쉬었다 갈게. 먼저 가.
종분 … 영애야, 나 혼자 무섭다.
영애 니가 왜 혼자야. 얘들이 다 너랑 있는데. 인제 가.
종분 (도리도리)
영애 가야 돼. … 너 먼저 보낸다구 섭섭해 말어.
종분 (눈물 글썽) 
영애 야아, 눈 봐라 종분아. 우리 고향서 엄마가 목화솜 널던 거 생각난다. 그지?
종분 (울먹이는) 응.
영애 참 따뜻했는데. 이렇게 폭신폭신했는데. 그지?
종분 응.

 영애, 눈을 감는다.
 
영애 빨리 가. (마지막 기운을 내 종분을 밀며) 내 곧 따라 갈게.

 종분, 진짜 가야 되냐는 얼굴로 영애를 보면 고개 끄덕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영애. 
 종분, 망설이다 일어나 혼자 얼마쯤 걸어가다 멈춰 선다.
 돌아보면, 웅크리고 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는 영애.
 종분, 결국 다시 발걸음 돌려 영애에게 뛰어간다.
 
종분 영애야, 안 되겠다. 같이 가자, 응? 같이 가자!
 
 종분, 영애를 흔들어보다가 가슴팍에 귀를 대보고는 풀썩- 주저앉는다.
 휘잉- 바람 불면 영애의 옷이 팔락거린다.
 종분, ‘춥겠다, 우리 영애 춥겠다-’ 중얼거리며 눈을 그러모아 덮어주기 시작하면, 영애의 위로 폭신하게, 소복하게 쌓이는 눈.

39. 시골길 / 낮 (과거)
 다 헤진 옷차림, 절망적인 표정의 종분.
 지친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는데, 거의 쓰러질 것 같다.

종분 … 못 가겠어, 미안해 영애야. 더는 못 하겠어….
 
 그때, 햇빛에 반짝하는 것이 보인다.
 종분, 고개 들어 보면, 장독대 항아리가 언뜻 보인다.

종분 (E) 그걸 보니까… 아이구 이제 됐다. 죽어도 고향에서 죽는구나, 그럼 됐다- 그랬어, 내가.

40. 종분의 집 앞 / 낮
 종분, 햇살이 비치는 장독대의 먼지를 쓸어낸다.
 은수, 지하에서 짐을 챙겨 낑낑거리며 올라온다.

은수 그래서요?
종분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그게 다야.
은수 난 그냥 안 둬. 억울해서 못 살아요. 확 다 엎어버릴 거야. 
종분 억울해도 어째. 일본 놈들한테 당한 거 생각하믄 살 수가 있나. 자꾸 없던 일이라, 남의 일이라… 그렇게 모른 척 하며 사는 거지…. 내가 나를 속인다 이 말이야.

 은수의 짐을 받아 옮기느라 굽어진 허리로 계단을 오르는 종분을 보는 은수.

은수 할머니 안 힘들었어? 왜 힘들다는 말을 안 해? 
종분 (힘없이 웃는) 너무 힘들면, 그런 말도 안 나와.
윤옥 … 엄마는 만났어요?
종분 (고개 젓는) 지금이야 하루면 오갈 거리를… 걸어서, 빌어먹으면서 오느라 1년이 꼬박 걸렸어. 근데 아이구, 아무도 없어. 집이라고 왔는데… 없어, 다 무너지구. 사방천지 혼자야.

 종분, 힘에 부친 지 허리를 펴며 휴우- 긴 숨을 내쉬는데,

41. 시골 종분의 집 / 낮 (과거)
 장독대 위에 깨진 장독 파편만 몇 조각 보이고.
 와당탕탕 소리에 보면, 낡은 문짝이 떨어져나가며 종분이 나온다.  
 사람이 살았던 집인가 싶을 정도로 황폐하다.
 종분의 몰골도 처참하긴 마찬가지다.
 종분, ‘엄마! 엄마-, 종길아!!’ 불러보지만 헛되다.
 마당 한 가운데 선 종분, 마지막 한 방울 짜내듯, ‘엄마!!!!’

 (시간경과) 밤
 문짝이 떨어져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방안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종분.
 바람 소리만 을씨년스럽게 들린다.

42. 시골 동네 / 아침 (과거)
 여기저기 가족에 대해 물으러 다니는 종분의 모습 위로,

종분 (Na) 나 끌려간 날루 내 동생이 나 찾겠다고 나가 소식이 끊기구, 우리 엄마… 집에 와 새끼들 다 사라진 거 보고 홧병에 돌아가시구… 아부진 일본에 붙들려가 돌아가셨지 싶어.

43. 면사무소 안 / 낮 (과거)
 남루한 사람들 사이에 줄을 서 있는 종분, 초췌하기 이루 말할 수 없고.

종분 (Na) 지옥서 살아 돌아왔는데, 또 생지옥이야. … 어쩌나, 이제 어떻게 사나… 그때 외지에 갔다 오면 500원씩을 줬어.

 종분, 서류에 이름을 기재하는데 망설인다.
 
종분 (Na) 나야 생짜로 잡혀갔응게… 기록이 있어 뭐가 있어. 근데 영애는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친구 이름을 팔았어. (배시시) 그렇게 살았어.

 종분, 제 이름 대신 ‘강영애’란 이름을 적는다.
 돈을 받는 종분의 손이 덜덜 떨린다.

종분 (Na) 그땐 그래도 됐어. … 어디 말이 되는 게 있는 세상이었나….

44. 면사무소 밖 / 낮 (과거)
 휑한 거리.
 돈을 꼭 쥐고 비틀거리며 나가는 종분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거리를 빠져나가는 종분의 뒷모습 위로,

종분 (Na) 그때 말이 많았어. 여자들… 이상한데 끌려갔다 왔다구… 소문이 났어. … 부끄러워서… 그 길루 고향을 떠서 한 번 가보질 않았어.

45. 주민센터, 로비 / 낮
 종분, 혼자 걷다가 돌아보면 은수가 머뭇거리고 있다.

종분 안 오고 뭐해? 어여 와.
은수 (불쑥)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종분 ?
은수 할머니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구요. 그 놈들이 나쁜 거지….

 종분, 은수를 고맙게 보다가 손을 잡고 같이 주민 센터로 걸어간다.

46. 주민 센터 일각 / 낮
 복지사, 종분과 은수에게 통장과 서류 등등을 내민다. 

복지사 결정 잘 하셨어요. … (은수에게) 할머니한테 고맙다고 말씀드려.
은수 … 나 신세지는 거 아니에요.
종분 누가 신세래. 지겨워도 1년은 붙어있어야 하는겨. 이제 내가 니 할머니 대신이라 안 해.
은수 … 알바해서 돈 낼 거예요.
종분 어이구, 공부나 마쳐. 구청서 얼마씩 나온다니께. (복지사에게) 끝났지요?

 복지사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던 종분과 은수, 그러다 잠시 멈춰서는 종분.

종분 은수야… 니 먼저 들어가라.
은수 (보면)
종분 내 아무래도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 먼저 가.

 종분, 은수를 들여보내고 민원실로 들어간다.

47. 주민센터, 민원실 / 낮
 윤옥, 당황스런 얼굴로 종분을 보고 있다.

윤옥 그러니까 강영애 할머니가 할머니가 아니란 말씀이세요?
종분 영애는 내 친구… 나는 종분, 최종분이.
윤옥 (생각을 정리하다) … 사진이 있으시다고 했죠?
종분 있어요.
윤옥 그게 소명자료가 될 거에요. …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하시면 생활안전지원금도 나오고…
종분 ……
윤옥 힘드셨을 텐데,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종분 자네 말대로… 모른 척 한다고 잊혀지는 고통이 어딨겠소. 은수가 그래요. 때린 놈이 잘못이지 내가 부끄러운 게 아니랍디다. 애도 아는 걸 여태 내가 몰랐어. … 70년이 지났건 100년이 지났던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 죄진 놈은 발 뻗고 사는데 (윤옥의 상처 만져주며) 아픈 사람이 숨어 살믄… 안 되는 거 아니겠소.

 윤옥, 종분의 맘을 알겠다는 얼굴로 바라봐주고.

48. 주민센터 또는 구청 앞 / 낮
 윤옥, 종분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입구에 서서 펄펄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는 종분.

종분 눈 참 탐스럽게 내린다. 난 눈 보면 옛날 생각 나. 옛날에 … 목화 따다가, 말린다고 방안에 죄 널어놓았다구. 그게 보기만 해두 얼마나 폭신했는지 몰라. 눈 쌓인 거처럼. 얼마나 부들부들했는지 몰라.

 손에 눈송이 받는, 온기에 스르르 녹는 함박눈을 보며 웃는 종분.

종분 내가 어렸을 땐 참 잘 웃었어요. 못나도 잘 웃는다고… 웃는 게 복스러워서 시집은 잘 갈 거라고 … 그땐 딸 있는 집은 텃밭에 다들 목화 나무를 심었거든. 시집 갈 때 이불 해준다고… (하다가) 어째, 나 땜에 또 귀찮게 됐네.
윤옥 (웃는) 아니에요. … 할머니 주민등록 말소된 거 재신청 하시면 돼요. 좀 시간이 걸리기는 하는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종분 고마워요.
윤옥 … 근데 … (머뭇거리다) 먼저 강영애씨에 대한 사망신고를 하셔야 해요. 부득이한 사정이니까… 다른 절차 없이 할머니가 강영애씨의 사망 사실을 증명한다는 서류만 있으면 신고하실 수 있을 거예요.
종분 …… 그래야지. … 인제 보내야지.

 담담히 말하며 내리는 눈을 물끄러미 보는 종분.

49. 란 뜨개방 / 낮
 종분이 들어가면, 예전과 다름없이 수다를 떨고 있는 깜씨와 아주머니들.
 아주머니들 대화, ‘가려워 죽겠어, 한잠도 못 잤어 종점에 새로 생긴 한의원 있잖아, 벌침 놓는다 그래서 맞았는데 아우 가려워, 피나게 긁었다구. // 벌침이 원래 맞음 가려워. 그래도 효과도 짱이래요. // 가려워도 정도가 있어야지. 아침에 바루 다시 갔는데 이 젊은 놈이… 한의사가 젊어. 그 놈이 허릿살을 주물럭거리더니 내 피부가 연하고 하얘서 그렇다나 (깔깔깔), 아 이 썩을 놈이 대책은 없이 넘의 피부만 만지작만지작 (깔깔) //
       깜씨, 종분이 잘했다 고개 끄덕여주면 슬쩍 웃으며 딴소리다.
      
깜씨 형님, 잘 왔어요. (걸린 옷 가리키며) 저거 일주일이면 뜰 수 있을까? 부대찌개 집 언니가 딸내미 시집갈 때 걸치겠다는데?
종분 일주일임 빠듯하지.
깜씨 내 이번엔 단단히 드릴게.
종분 매번 말만… 챙겨 놔.

 깜씨, 실을 챙기면서 아주머니들과 평소처럼 수다를 떨고.

종분 (실을 고르며) 요새 애들은, 이런 색 좋아할라나?

 깜씨, 종분이 고른 소라색 실을 보고.

50. 종분의 집, 내부 / 저녁
 종분, 잠든 은수가 깨지 않게 가만히 이불을 덮어주고 나온다.
 
 (cut to)
 간호사복 입은 단체 사진 놓인 교자상 위에 물김치와 된장국을 올리는 종분.
  사진 옆에 놓인 영애의 사망신고서, 그 옆에 목화 솜꽃 나뭇가지 올리는.
 무릎 꿇고 앉아 사진을 보다가 그대로 엎드리더니 한참을 가만히 있는 종분. 

51. 종분의 집, 외부 / 저녁
 종분, 눈 내리는 장독대 앞에 서서 영애의 사망신고서를 태운다.
 마치 지방을 태우듯이, 눈송이 사이로 날아가는 재.
 종분, 어린 아이처럼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는데,
 
은수 (E) 울어요?
종분 (어느새 나온 은수를 돌아보며) 아니야.
은수 우는데?
종분 아니야, 늙으면 눈물이 헤퍼져서 그랴. … 왜 나왔어, 더 자지. 
은수 으으- 추워. 더럽게 춥네. … (머뭇거리다가) 고마워요.
종분 응?
은수 (무안해 시선을 피하며) 고맙다고. …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은.
종분 (웃는) 야야, 봐라. 눈 참 탐스럽게 내린다.
 
 종분, 눈이 내리는 골목을 가만히 바라본다.

52. 눈길 / 밤 (환상)
 혼자 걷는 종분, 어느새 옆에 보면 영애가 따라 걷고 있다.
 할머니 종분과 소녀 영애, 손을 꼭 잡고 걷는다. 

영애 (E) 참 열심히 살았다, 그지?
종분 (E) 그르지.
영애 (E) 혼자서 고생했네. 
종분 (E) 웬일루 이런대? … 그런 소리 마라. 난 한 번도 혼자인 적 없었다. …… 니가 있어 여태 내가 살았지.
영애 (E) … 나 이제 진짜 가야겠다.
종분 (E) 내 곧 갈게. 기다려.
영애 (E) 그래.
종분 (E) 혹시라도, 가서 내 동생… 우리 종길이 만나면, 어데 가지 말고 누나 꼭 기다리라 그래?
영애 (E) 그래… 꼭 그럴게.

 종분, 걸음 멈추고 보면, 어느새 영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53. 종분의 집, 내부 / 아침
 낡은 TV 다이 위, 사진 보인다.
 간호사복을 입고 단체로 서 있는 소녀들의 사진 옆에 수요 집회 혹은 2011년 법원 앞과 같은 곳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 당당하게 찍은 종분의 사진. 
 그 앞으로 교복을 입고 머리를 빗느라 분주한 사람, 은수다.
 늦어서 뛰어나가다, 아차차- 신발 신은 채로, 깨끔발로 들어와 휙 낚아채는 것, 종분이 짠 소라색 머플러다.

54. 종분의 집, 장독대 앞 / 아침
 장독대를 닦고 있는 종분, 윤옥이 찾아오자 자주 오는 듯, 편하게 맞아준다.
 그때, 신발 신으며 깡충깡충- 나오는 은수. 

종분 밥은?!
은수 (건성) 먹었어.
종분 은수야! 목도리 안 두르고 가냐!! 니 그러다 또 골골 거리면 약도 없어!

 은수, 목도리를 들어보이고는, 윤옥에겐 아는 척도 없이 골목으로 사라지고.

윤옥 여전하네요.
종분 사람이 쉬이 변해 어디?
윤옥 서운하지 않으세요?
종분 서운할 게 뭐 있어. 나중에 자식 낳아 지 속 뒤집혀 봐야 알지… 다 그래 사는 거지. … 오늘은 뭣 땜에 왔어? 밥 먹고 가.
윤옥 …… 할머니… 강영주씨를 찾았어요.
종분 (장독대 닦던 손길 멈추는)

 윤옥, 할아버지 영주가 있는 가족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손자도 있음) 
 사진을 보는 종분의 표정, 회한이 스친다. 

윤옥 (머뭇) 해방되고도, 가족하고 연락이 안 되니까 못 돌아오셨대요. … 고생을 오래 하시다가… 늦게 결혼을 하셨나 봐요. 지금 홋카이도에 살고 계신대요.
종분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래… 그래, 살아있음 되었어.
윤옥 너무 고령이시라 비행기를 타실 수가 없어서요, 다음 주에 강영주 할아버지 아드님 가족이 한국에 오신대요. 강희원 선생님 훈장도 받아야 하고…
종분 그래….

 사진 속 영주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종분의 모습, 쓸쓸하다.

윤옥 대신… 편지를 보내셨어요.

 윤옥이 건네는 편지를 받는 종분, 떨린다.
 편지봉투에 적힌 영주의 글씨, 종분의 이름이 쓰여 있다. 
 자신의 이름을 생경하게 보는 종분.

55. 몽타주 / 낮 (과거)
 영주의 시선으로 보는 어린 종분, 안쓰럽다.

# 졸려 눈을 뜨지 못한 종길을 업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종분, 종길을 달래며 노래 불러주며 걷고.
# 깡충깡충 뛰며, 담벼락 너머로 영주를 찾는 종분, 귀엽다.
# 땔감 한 무더기를 들고 뒤뚱뒤뚱 걷고 있는 종분, 넘어지면 으앙- 하다가도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 땔감을 챙긴다.
# 빨래를 하다가, 손이 시려 울다가, 다시 빨다가 하는 종분.
# 이불 호청을 말리는 종분, 햇빛에 바싹 마른 냄새를 맡고 좋아하는 종분. 
# 책을 받고 수줍어하는 종분.
# 트럭의 시선에서, 멀리 산등성이서 한없이 손을 흔들고 있는 종분.

영주 (Na) 영애와 함께 있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영애를 지켜줘서 고맙고 또 고맙다. 힘들어도 항상 웃던 니 모습이 기억나는구나. 내 누이 같아 늘 안쓰러웠는데, 소식을 들으니 기쁘다. … 괜찮니? 잘 지내면 소식을 다오.

56. 종분의 집 / 아침
 종분, 작은 상 위에 편지지를 놓고 열심히 썼다 지웠다, 신중하다.

 (cut to)
 직접 짠 스웨터를 고운 한지에 싼다.

 (cut to)
 곱게 차려입은 종분, 신발장에서 한 번도 신지 않은 새 신을 꺼낸다.
 가만히, 새색시처럼 조심스레, 신에 발을 넣는 종분.
 새 신을 신고 현관을 나서는 종분의 발. 

57. 교외 식당 / 낮
 마당이 넓은 한정식 가게 앞, 윤옥이 종분을 걱정스레 본다.

윤옥 정말 먼저 가시게요?
종분 아무래도… 내가 해줄 말이 없어. 죄 고생한 얘긴데 뭘….
윤옥 그래도…
종분 자네가 여간 잘 말해줄까…. 여기 볕이 좋아서, 나는 좀 걷고 싶어서 그래.
윤옥 (이해한다는 얼굴로 보면)
종분 … 어여 들어가, 추워.

 윤옥을 식당 안으로 들여보내는 종분.
 그때, 반대로 식당에서 나오는 소년, 눈부신 햇살에 희뿌옇게 실루엣만 보이다가 서서히 윤곽 드러나는데, 사진에서 봤던, 영주와 꼭 닮은 모습이다.
 소년, 무료하다는 얼굴로 나오다가 종분을 보자 멈칫하더니 꾸벅, 인사하면,

종분 왜 나와요?
소년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그냥… 답답해서요.
종분 (물끄러미 보다가, 퍼뜩) 아이구, 맞다 (가방을 뒤져 편지 봉투와 포장한 스웨터를 꺼내 건네는) 이거, 내가 주는 거, 할아버지한테 꼭 좀 전해줘요.

 종분, 뭐지 싶어 포장 봉투를 보는 소년을 아련하게 본다.

종분 잘 컸네, 참 잘컸다. 잘 생겼어. 할아버지를 똑 닮았어.

 못 알아듣는 표정의 소년.
 종분, 소년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가 고개 끄덕이며 놓고는 돌아선다.
 소년, 서툴지만 정성스레 그린 그림이 그려진 편지 봉투를 보다가, 열어본다.
 삐뚤삐뚤하게 쓰인 글자, 몇 줄 되지 않는다.
 소년, 시선을 들어 다시 종분을 보면, 멀어지는 종분의 뒷모습 위로,
 
종분 (Na) 편지 고마워요. 나를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봐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는 드릴 게 이거 밖에 없어요. 품이 어떨지 몰라 넉넉하게 만들었어요. 나는 잘 지내요. … 오빠도 잘 지내시요.

58. 시골길 / 낮
 날은 아직 차지만 햇살은 눈부시다.
 흙길을 걷던 종분,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이며 앉는다. 
 척박한 겨울 흙에서 새 잎이 돋아나고 있다.
 종분의 손이 여린 잎을 조심스레 만진다.
 뒤에서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데, 
 어느새 그때 그 시절, 바구니를 든 소녀 종분의 모습이다.
 종분, 달려온 상대방이 영주인 것을 확인하자 볼이 발그스레 달아오른다.
 다짜고짜 종분의 치마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영주의 모습에 얼어붙는 종분.

영주 몇 번을 불렀는데, 못 들었니?
 
 숨을 고르며, 종분의 낡은 곰신을 벗기고는 허리춤에서 새 신을 꺼내 신겨주는 영주의 모습이 종분의 시점샷으로, 차마 영주의 얼굴은 보지 못해 손, 어깨 같은 부위만 보인다.

영주 딱 맞네. … 이쁘다. 

 씩- 웃어주고는, 올 때처럼 쌩하니 뒤돌아 가버리는 영주.
 고맙다, 말도 못하고 멀어지는 영주를 멍하니 보는 종분.
 그러다 퍼뜩, 영주의 얼굴이 닿았던 치마를 훌쩍 들어 냄새를 맡아본다.
 퀴퀴한 냄새에 울상이 되었다가,
 금세 새 신을 신고 팡팡 제자리에서 뛰어보며 슬그머니 웃는 종분.

엄마 (E) 종분아! 퍼뜩 안 오나!!

 멀리서 엄마가 부르든 말든 요리조리 신발을 살펴보는 종분.
 그러다 이내 새 신을 벗어 후후 먼지를 털고는 바구니에 소중하게 챙긴다.
 참지 못하고 돌아서는 수줍던 종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이미 저만치 멀어진 영주를 향해 환하게 웃는 소녀 종분.

엄마 (E) 야! 종분아!!!!
종분 (흥이 깬) 알았다! 내 좀 그만 불러라, 엄마. 내 어디 안 간다!

 엄마에게 뛰어가는 종분, 곧 엄마와 함께 나란히 걸으며 시야에서 멀어지면, 길 위에 홀로 남은 할머니 종분의 얼굴, 회한이 스친다.
 쓸쓸히 지친 발걸음을 내딛는 종분의 뒷모습 위로, 자막.

자막 2015년 3월 1일 현재,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하신 238분의 할머니 중 183분이 돌아가시고, 이제는 55분만이 생존해 계십니다.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하고 떠나신 수많은 피해자분들과 지금도 전쟁과 폭력으로 고통 받고 있는 분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 2부 끝 -






























첨부파일 눈길_2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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