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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내 약혼녀 이야기] 정유경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06.09.13|조회수1,580 목록 댓글 1

 

[내 약혼녀 이야기] 정유경

 

 

 

 

 

 

 

 

 

 

#1. 시골 마을 전경 (낮)

 

평화로운 농촌의 오후. 유유자적 흘러가는 강물, 마을 어귀 느티나무 사이로 무리 지어 날아가는 새들...

바람이 불 때마다 보리밭에는 연두빛 물결이 일렁인다. 밭둑 너머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이 보이고,

그 위로 깔리는 홍매의 또박또박한 음성.

 

홍매 : (E) 약혼식 이후에 저는 무척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제는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쓰고 왔어요.

         친구들은 하나 같이 저를 무척 부러워합니다.

 

 

#2. 정호집 정호방 (낮)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 구석에는 옷가지와 책 몇 권이 뒹굴고, 옷장과 책상, 티브이 등이 대충 놓여있는 소박한 방안.

흐뭇한 미소 지으며 편지를 읽는 정호. 책상 위에는 국제 우편 편지 봉투. 그 옆으로 놓인 그들의 약혼 사진.

떡, 과일, 과자 등 음식을 한 상 차려놓고 그 앞에 나란히 앉아있는 홍매와 정호.

 

홍매 : (E) 하지만 저는 요즘 긴장이 돼서 잠두 안옵니다. 결혼해서 한국 국적을 얻고 한국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아주 이상해요... 저는 지금까지, 내 조국이 중국이라고 생각해왔거든요.

 

예쁘장한 얼굴, 분홍색 한복 차림의 홍매와 양복을 입은 정호. 수줍고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두 사람.

'내 약혼녀 이야기'

 

 

#3. 정호집 마당 (낮)

 

방 두칸, 부엌이 마주 보고 있는 작고 오래된 개량 한옥.

안에서 나와 신을 신는 정호. 휘파람 불며 구두를 싹싹 닦는다.

수더분한 외모. 소박한 점퍼 차림의 30대 중반. 잔뜩 들뜬 표정이다.

마당 한쪽에 쭈그려 앉아 쌀을 고르고 있는 정호모(60세 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낡은 스웨터를 겹쳐 입은 촌로다.

 

정호 : (쌀알 집어 먹으며) 어휴, 무슨 떡쌀을 이렇게나 많이 찧었어요?

정호모 : 많기는! 온동네 잔친데 이것도 작다... (본다) 읍에 나가냐?

정호 : 동창 녀석들 만나 한 턱 내기로 했어요. 서울서 민규랑 동욱이 내려왔다 그래서요.

정호모 : 잔칫날 만나 놀텐데 뭐한다구 미리 돈을 써.

정호 : 기분이잖아요... 짜식들, 밥 사라구 하두 난리를 쳐서요.

정호모 : (이해한다는 듯 웃고) 오냐, 그래... 기왕 쓰는 거 인심 좋게 쓰고 오너라. 술 너무 마시지 말고...

정호 : 술 안 마셔요. (자전거에 오르며)

정호모 : (따라가며 배웅) 너무 늦지 말고...

정호 : 예에! (저만치 멀어지며)

 

 

#4. 가로수길 (낮)

 

노을 진 가로수길. 기운 차게 달려가는 정호의 자전거. 휘파람 불며 신이 나있는 정호.

 

 

#5. 읍내 식당 (저녁)

 

넓은 홀. 돼지갈비 같은 것 구워지고 있다.

친구들 네다섯 명과 둘러 앉아있는 정호. 친구들과 건배한다. 친구 민규와 동욱, 깔끔한 양복 차림의 30대들이다.

 

민규 : 축하한다, 임마... 우리가 너 총각귀신 되는 줄 알구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어?

정호 : (기분 좋은데) 고맙다!

민규 : 그나저나 자초지종이나 좀 듣자. 어떻게 된 거야? 듣자니까 중국가서 만났다면서? 연변 아가씨라며?

정호 : (쑥스럽게) 어어... (종진을 돌아보며)

종진 : (킬킬 웃고) 말두 마라. 딱 하루만에 후다닥 맞선보구, 아가씨 집에 가서 그날루 약혼식까지 하구 왔댄다.

         짜식, 아무리 반했어두 그렇지, 번갯불에 콩 튀겨 먹을 놈.

동욱 : 진짜냐? 그렇게나 맘에 들었냐?

정호 : (얼굴 벌개져서) 어휴, 일정이 그렇게 됐어. 이박 삼일 일정인데 어떡하냐...

민규 : 일정이라니?

정호 : 어어... 그게...

종진 : 군청에서 노총각들한테 단체로 맞선 신청을 받았거든. 열두명이 건너갔는데 성사된 거는 정호 얘 포함해서 넷 뿐이랜다.

         재수 좋았지 뭐.

정호 : (머쓱)

민규 : (재밌다는 듯 껄껄 웃고) 그랬구나 ...어떤 아가씨야? 나인 몇 살이야?

정호 : 으응...올해 스물 다섯...사람이 착해 보이드라구...인상두 괜찮구... (들뜬다) 솔직히 말하면...첫눈에 반했다...

         처음 만나서 얘기하는데, 느낌이 딱 와서 꽂히드라...하하,

민규 : 와하하...굉장하구나?

정호 : 어우, 뭐 굉장할 거까지야... (슬며시 지갑 꺼내며) 아참, 사진...볼래?

 

지갑 안에 끼워진 약혼사진. 친구들에게 돌리는 정호. 진작 자랑하고 싶었다.

사진 돌려보고 짐짓 감탄해주는 친구들.

 

동욱 : 우와...무지하게 미인이구나?

정호 : (거들먹) 어어, 미인은 뭐...그냥 보통이지 뭐.

 

 

#6. 단란주점 (밤)

 

몸 흔들며 신나게 노래 부르고 있는 정호. 이윽고 노래 마치고 자리로 오면 뭔가 열띠게 이야기 하고 있는 친구들.

 

민규 : (넥타이 느슨히 풀며 한 잔 들이킨다) 후우...문제야, 문제, 우리 나라.

정호 : (무심히 자리에 앉는데) ...

민규 : 농촌 사는 게 무슨... 죄냐? 왜 이 나라 안에서 제 짝 하나 못 구해?

정호 : (멈칫)

동욱 : 맞아.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농사 짓고 고향 지키며 사는 거,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냐.

         정호야, 우리는 너 존경한다. 그거 아무나 못해! 요즘 우리나라 여자들, 하나같이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어.

         농촌이 뭐가 어때서!

정호 : ...(표정 묘해지는데)

민규 : 근데 말이야... (넌지시) 잘 알아 봐. 물론 그 아가씨야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정호 : 뭘?

민규 : 요새 조선족 처녀들 위장 결혼 때문에 골치 아픈 일 많다드라구.

정호 : (굳는다)

민규 : 아, 물론 얘한테 오는 그 아가씨야 그럴 리가 없지만...

         시집 와서 한 이태 살다가 국적만 취득하면 바로 가출하는 여자들이 그렇게 많댄다.

종진 : 얌마,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정호 : (애써 태연하려하며) 하하, 괜찮아. 그런 얘기 나두 들은 적 있는데...

         임마, 어디 가나 좋은 사람 있구 나쁜 사람 있는 거지... 그리구... 잘해줘 봐라. 가출을 했겠냐.

민규 : 그 정도가 아니야. 그쪽 애들, 요새 전부 여기 들어오지 못해 환장을 하잖냐. 그쪽서 여러 번 결혼하구두, 과거 싹 감추구

         처녀 결혼인 척 하는 것두 부지기수구... 오자마자 돈 들구 튀는 케이스두 무지하게 많대.

         (한숨) 휴, 문제야, 문제... 이놈의 천민 자본주의.

정호 : ...(뜨악하게 본다)

동욱 : 하긴 요새 심각한가 봐. 우리 사촌 형두 당했어. 마흔 넘도록 장가 못가다가 조선족...

정호 : (술잔 땅 내려놓는다. 기분이 상할대로 상했다) 그래서? 그래서 나보구 어쩌라구!

민규, 동욱 : (얼핏 당황하고 마주 보는데) ...

 

분연히 의자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호.

 

종진 : (놀라) 야, 야, 진정해... (막아서며) 어우, 이 자식들, 꼭 분위기 깨는 데는 재주 있어! (버럭) 너무들 하는 거 아니냐? 엉?

정호 : (씩씩거리며 분한데) ...

 

 

#7. 단란주점 앞길 (밤)

 

가게 앞 보도 블럭에 털썩 앉아 있는 정호와 종진.

 

종진 : 짜식들 취해서 그래... 니가 이해해라.

정호 : ...(기분 안 풀린 채 심각하다)

종진 : (다독이며) 나름대로 너 생각해준답시구... (담배 꺼내서 권하며)

정호 : (일어나며) 나 먼저 갈께.

종진 : (붙잡아 앉히며) 야, 야! 담배나 한 대 피구 가!

정호 : (마지못해 주저앉는데) ...

종진 : (담뱃불 붙여주고) ...아참, 선아 내려 왔대드라?

정호 : (멈칫 본다)

종진 : 경철이가 만났는데... 흐흐, 서울물이 좋긴 좋은가 봐... 하나두 안 변했드래... 옛날보다 더 이뻐졌댄다...

정호 : ...(표정 씁쓸해지는데)

 

 

#8. 정호집 마루(밤)

 

미닫이 문 열고 들어오는 정호.

마루에 앉아 이불 호청 끼우고 있는 정호모. 바늘에 실이 안 꿰어져 불빛에 비추고 있다.

 

정호모 : ...남들은 며느리 본다 그러면 사철 금침에 양장이며, 한복이며 줄줄이 받는다 그러는데,

            내 손으로 며느리 이불 꾸미고 앉았으니...

정호 : (바늘 대신 꿰주며)....

정호모 : (한숨) 중국서 온 며느리, 이쪽 풍습 하나도 몰라서 시에미가 고생을 그리 한다드라.

            어른 공경도 모르고, 음식마다 콩기름만 콸콸콸 부어쌓고... (쓰게 웃고) 그리고 너 장가가면 먼저 아들놈부터 하나

            쑥 뽑아야 한다. 여기서 더 늦어지면 못써. 알겄지?

정호 : (착잡하다).....

 

 

#9. 마을 어귀 느티나무 (이튿날 낮)

 

느티나무 아래 소형 승용차가 한 대 서 있다. 자전거 타고 오는 정호. 승용차 앞을 지나가는데...

차 앞에 서 있는, 깔끔하고 세련된 인상의 여자. 정호를 보더니 반갑게 환히 웃어 보인다.

무심히 스쳐가다가 놀라서 자전거를 급히 세우는 정호. 돌아보고 당황한다.

 

선아 : ...오랫만이야.

정호 : 어, 언제 내려왔어?

선아 : (상기 된 채) 아아, 어쩜 하나두 안 변했네? 마을두 그대로구 논밭두 그대로구...

 

다가와 정호 손을 가만히 잡는 선아... 움찔하는 정호.

 

선아 : (손 꼭 쥐고 흔들며) 잘있었니? ... 보고 싶었어.

정호 : (얼굴 확 붉어지는데) ...

 

 

#10. 마을길 (낮)

 

자전거 끌고 나란히 걸어가는 정호와 선아.

 

선아 : (쓸쓸히) 서울 생활 십년 동안 얻은 건 하나두 없구... 건강만 잔뜩 나빠졌어.

         얼마전에 위염으루 한 일주일 입원을 했었는데... 고향 생각이 그렇게 나는 거 있지.

정호 : ...

선아 : 다니던 회사에 사표 쓰구, 무작정 내려온 거야. 오니까 정말 좋으네. 옛날 생각이 고스란히 난다...

         여기서 맨날 니 자전거 뒤에 타고 달렸잖아.

정호 : (시선 내리고 걸으며) 부모님은...?

선아 : 재작년에 두 분 다 돌아 가셨어.

정호 : (안됐다) ...

선아 : 왜 아직...결혼 안했어?

정호 : 어어, 뭐... 누가 이런 시골루 시집을 와야 말이지.

선아 : ...(씁쓸히 웃는다) 옛날에...나 땜에 많이 속상했지?

정호 : (웃고) 뭐...다 옛날 일이지.

선아 : (멈춰 선다) 그땐 내가 어렸어. 정말 어렸나 봐. 사람 볼 줄 몰랐어.

정호 : (긴장하는데) ...

선아 : (사이) 너...아직두 나 좋아하니?

정호 : (굳어있다)

선아 : 미안해. (눈물마저 글썽 하는데) ...나 용서해줄래?

 

당황하며 후다닥 자전거에 오르는 정호.

 

정호 : ...타,탈래?

 

머뭇하다가 뒤에 타는 선아. 선아를 태우고 마을길을 달려가는 정호.

 

 

#11. 가로수길 몽타쥬 (낮)

 

가로수 늘어선 국도변.

선아를 태우고 씽씽 달리는 자전거. 어느새 좋아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정호.

 

 

#12. 강가 (낮)

 

마을 앞 개천. 자전거 한 켠에 세워놓고, 징검다리 건너가는 두사람. 분위기가 잔뜩 설레어 있다.

앞서서 건너가다가 한순간 미끄러지며 휘청하는 선아. 정호, 놀라서 얼른 잡아주려다가 함께 물에 풍덩 빠지고 만다.

붙잡고 허우적대는 두사람.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마주치면 기다렸다는 듯 웃음이 깔깔 터지는데...

행복한 둘의 웃음 소리가 강위로 울려 퍼진다.

 

 

#13. 정호집 외경 (밤- 다른날)

 

 

#14. 정호방 (밤)

 

정호모 앞에 꿇어앉은 정호. 비장하고 결연하다.

 

정호모 : 결혼을 안 하겠다니? 에그머니,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정호 : ...

정호모 : 말을 해 봐, 이놈아!

정호 : 확신이 안 서서 그래요.

정호모 : 갑자기 무슨 소리냐.

정호 : 약혼식...그거 사실 마지못해 했어요. 한나절 보구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정호모 : 그렇게나 맘에 든다면서? 첫눈에 반했다면서?

정호 : 제가 그때 잠깐 돌았었나봐요. 소개소 사람이 맘에 드냐 그러길래 맘에 든다 그랬드니..

         곧바로 그 여자 집으루 가자드라구요. 엉겁결에 약혼식까지 한 거예요.

정호모 : 허,

정호 : 요새 농촌 총각들... 조선족 처녀한테 엄청 당한대요! 어머니 모르셔서 그래요. 잘못하면 패가망신 한다구요.

         위장 결혼, 사기 결혼이 쌔구 쌨대요.

정호모 : (어이없어 보다가) ...그래서? 그 처녀두 그렇다는 거냐?

정호 : ...그렇다는 게 아니구요.

정호모 : (철썩 친다) 결혼식이 낼 모레다, 이놈아. 헛소리 집어치우구, 마중 나가서 고이 데려오기나 해라...

            내일 들어온다면서? 내일 인천에 마중 나간다면서?

정호 : 도로 돌려보내면 돼요. 여비 넉넉히 주구, 사정 잘 설명하구... 한나절 서울 관광이나 시켜서, 돌려보내면 돼요. (떨린다)

정호모 : 허...도대체... (멍하니 보다가) 이놈아, 너...바로 말해 봐라...무슨 일 있지?

정호 : ......사실은...사실은요... (머뭇하다) 저요...선아 만났어요.

정호모 : 뭐?

 

긴장 흐른다.

 

 

#15. 인천 연안 부두 (낮)

 

뱃고동 소리 울린다. 정박해 있는 배들 사이로 갈매기 떼 날아다니는데... 중국서 오는 대형 여객선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16. 여객선 안 (낮)

 

여객선 갑판 위. 한쪽 구석에 가방 잔뜩 메고 서있는 조선족 처녀 홍매. 상기된 표정으로 항구 풍경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다.

 

 

#17. 대합실 (낮)

 

입국장 근처. 들어오는 관광객과 마중 나온 환영객들로 분주하다.

기둥 뒤에 서 있는 정호. 주먹을 쥐락펴락 하며 초조하다.

 

정호 : (혼잣말로 연습) 미안합니다...정말 미안합니다... 공덕 쌓는다 생각하시고 너그럽게 봐주세요. 평생 이 은혜 안 잊을게요...

         (헛기침하고 목을 가다듬는다) 고생해서 오셨는데 이렇게 돌아가라고 해서 죄송합...(이게 아닌데...고개 절레절레)

       

드디어 중국인 관광객 한 무리와 함께 대합실로 들어오는 홍매. 두리번거리며 정호를 찾는다.

붐비는 인파. 두렵고 긴장된 얼굴로 사방을 살핀다. 이리저리 찾아보아도 정호 모습이 안 보인다.

점점 불안해지는 홍매, 여기저기 기웃기웃 살펴보는데... 순간, 기둥 뒤에서 몸을 드러내는 정호.

유심히 보다가 표정이 확 밝아지는 홍매. 동시에 홍매와 눈이 마주치는 정호.

 

정호 : ..호,홍매씨!

 

애써 반가운 척 웃으며, 손을 번쩍 들어보인다.

 

 

#18. 여객선 터미널 앞길 (낮)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짐가방 받아 들고 앞장 서서 나오는 정호.

나머지 가방들을 양 어깨에 잔뜩 메고 따라 나오는 홍매. 긴 여정에 지친 꾀죄죄한 얼굴과 머리 매무새.

빨간 투피스를 곱게 차려입었으나 어딘가 좀 유행에 떨어지는 분위기.

곁눈으로 홍매를 스윽 훑어보는 정호... 아아, 이렇게도 촌스러웠던가...

 

정호 : 오느라 고생 많았죠?

홍매 : 아유, 고생은요...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신기한데)

정호 : ... (어쩔까 곰곰 생각하다가) 홍매씨.

홍매 : (본다) 예?

정호 : 우리... 서울 구경 갈래요?

홍매 : 서울 구경요?

정호 : 서울 구경 시켜줄께요. 구경하구 가요. 어때요?

홍매 : (얼떨떨한데) ...

 

씩 웃는 정호. 수줍게 끄덕끄덕 하는 홍매.

 

 

#19. 전철역사 안 (낮)

 

인천 전철역 구내.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올려다보고 있는 정호.

 

정호 : (거들먹) 서울은 아아주 복잡해요. 지하철 노선만두 여덟 개예요. 팔호선까지 있어요.

홍매 : (곁에 서서 신기한 듯 함께 올려다보고 있다) 예에...

정호 : 지하철...타봤어요?

홍매 : 아니요.

정호 : (으쓱하며 티켓 자판기 앞으로) 땅 위를 달릴 땐 전철, 땅 속을 달릴 땐 지하철... 아시겠어요?

홍매 : 예에... (좋은데)

정호 : 오케이, 표부터 끊죠!

 

의기양양 티켓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다. 그대로 흘러나오는 동전.

 

정호 : 고장인가...?

 

재시도 한다. 도로 나온다. 옆에 있는 자판기로 가서 다시 시도한다. 그러나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동전. 당황하는 정호.

 

정호 : (자판기 탕탕 치며) 다 고장이네. 도대체 일들을 어떻게 하는 거야?

 

궁시렁거리며 매표구쪽으로 가려는데, 옆쪽 자판기에서 티켓을 사고 있는 사람을 유심히 보던 홍매. 정호를 잡아끈다.

구간버튼을 먼저 누르더니 이제 동전을 넣으라는 시늉. 정호, 동전을 넣는데 이번엔 제대로 들어간다. 환히 웃는 홍매.

 

정호 : (벌개져서) 어우, 이게 언제 이렇게 바꼈냐...

 

 

#20. 달리는 전철 인서트 (낮)

 

 

#21. 롯데월드 놀이공원 (낮)

 

롤러코스터로 이어지면서...입 벌어진 채 롤러코스터를 바라보고 서 있는 홍매.

현란한 놀이기구 사이에서 구경하느라 정신 없는 두사람.

 

정호 : (실은 자기도 정신 없으면서) 이런 데 첨 와봐요?

홍매 : 예.

정호 : (둘러보며) 흠...지은지 오래 돼서 그런가...예전만 못하다.

홍매 : (그저 흐뭇하게 본다)

 

저만치 시선에 들어오는 바이킹.

 

정호 : 탈래요? 저거 한번 탈래요?

홍매 : (저으며) 아유, 아닙니다.

정호 : (매표구로 이끌며) 에이, 한번 타요. 타고 싶다구 얼굴에 써 있는데 뭐.

홍매 : (들켰네 웃는다) 아유, 참...

 

 

#22. 바이킹 기구 앞 (낮)

 

저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바이킹.

타고 있는 홍매. 아래 쪽 가드 라인에서 지켜보고 있는 정호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어 보인다.

속도가 빨라지는 바이킹. 홍매,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비명을 꺅꺅 지른다.

바라보며 점점 괴로워지는 정호. 한숨이 절로 나온다.

 

 

#23. 놀이공원 일각 (낮)

 

인파를 헤치고 나란히 걸어가는 정호와 홍매.

화려한 상점들 사이로 가족과 연인들이 솜사탕 같은 것 뜯어 먹으며 다정히 걸어간다.

부러운 듯 바라보는 홍매. 그러나 딴 생각에 빠져 있는 정호.

 

정호 : (골똘히 궁리하다가) 저기요... (이윽고 결심) 저어, 우리 어디 가서 잠깐 얘기 좀...

 

돌아보는데, 곁에 있던 홍매.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놀라는 정호. 주위를 둘러본다.

 

정호 : 홍매씨...?

 

그러나 홍매 모습 안 보인다. 허둥지둥 좌우전후를 살펴보는 정호.

 

정호 : 홍매씨!

 

 

#24. 놀이공원 일각2 (낮)

 

여기저기 헤매는 정호.

 

정호 : 홍매씨! 이홍매씨!

 

사람들을 헤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찾는다. 미치겠다.

 

 

#25. 방송실 앞 (낮)

 

헤매는 정호. 땀으로 흠뻑 젖었다. 미아 찾는다는 방송이 들려온다. 멈칫 서는 정호. 저만치 방송실 팻말이 보인다.

문 앞으로 성큼 다가가 서는데... 순간, 발길이 슬몃 멎는다.

찾지 말고 그냥 가버릴까. 머뭇머뭇 뒷걸음질 치다가 이윽고 휙 돌아선다.

에라, 모르겠다, 후다닥 튀려는데... 모퉁이 돌아서는 순간, 앞을 턱 가로막는 사람. 홍매다.

뒷춤에서 아이스크림을 짠 내밀더니 환하게 웃는다.

 

홍매 : 이거 드십시오.

정호 : (움찔 놀라서 버럭) 어디 갔었어요!

홍매 : (당황)

정호 : (아니다...참자) ...어디 가면 간다구 말을 하구 가야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홍매 : (미안한 얼굴로 아이스크림만 내밀고 서 있는데) ...

 

양손에 하나씩 다 녹아 내린 아이스크림. 한숨을 푹 쉬고 받아드는 정호.

 

 

#26. 냉면집 (낮)

 

마주 앉아 냉면 먹는 정호와 홍매.

 

홍매 : 할아버지 고향은 경기돕니다. 열두 살 때 돈 벌려구 중국으로 건너 오셨대요. 거기서 할머닐 만나시구 일가를 이루셨어요.

정호 : ...(딴 생각)

홍매 : 어릴 적엔 남조선 말씨같다구 놀림을 많이 받았었는데...

         요사이는 전부들 남조선, 아니 남한 말씨 공부하느라구 야단입니다. (하하 웃는다)

정호 : 저어...홍매씨.

홍매 : 예?

정호 : 저기 말이예요...저어...... (차마 말 못하겠다) ...

 

순간, 다가와서 물컵에 물을 따라주는 종업원. 40대 여자.

 

종업원 : (가벼운 함경도 억양) 뭐 더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홍매 : !

정호 : 됐습니다.

홍매 : (반가운듯) 아주머니,

종업원 : 예?

홍매 : 혹시 옌벤서 오셨습니까?

종업원 : (당황) ...

홍매 : 맞지요? 저두 거기서 왔습니다.

종업원 : 아, 아닌데요...

 

돌아서서 급히 가버리는 종업원.

 

홍매 : 그쪽 억양 같아서... (무안한 듯 웃고) 아닌 모양입니다.

정호 : (심드렁히) 불법체류잔가 보죠. 신분 밝혀지면 안되니까...

홍매 : 아아-

정호 : 저런 아주머니들 요새 많아요. 단속반한테 들키면 곧장 강제 출국이거든요.

홍매 : (종업원 돌아보며 안쓰럽게) ...저 아주머니는 얼마나 제가 부러우실까.

         저처럼 당당하게 입국하고 국적도 얻으시면 얼마나 좋으실까요...

정호 : (찔린다) ...

 

냉면 그릇을 양손에 들고서 소리내서 후루룩 들이키는 홍매. 물끄러미 보는 정호.

 

 

#27. 한강 시민공원 꽃길 (낮)

 

흘러가는 강물결. 나란히 걸어오는 정호와 홍매.

 

홍매 : 우리 어머니는 가요무대 김동건 아나운서를 제일 좋아하시고요. 제 여동생은 에이치오티를 제일 좋아합니다.

정호 : (이젠 말을 꺼내야 하는데) ...저기...저어... 홍매씨,

홍매 : 울 어머니 꿈이 서울 가서 가요무대 방청 한 번 해보는 거예요.

         (눈물 어리며) 저 시집 간다고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우셨는데... (눈물 닦고 웃는다)

정호 : (괴로워진다. 괜히 헛기침) 어우, 공기 나뻐... 서울 공기 참 탁하죠?

         (강건너 가리키며) 봐요, 온통 스모그예요. 스모그가 장난이 아니예요, 그죠?

홍매 : (무표정) ...

정호 : 서울이 말이죠...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니까요.

 

뒤로 돌아 뭔가 부스럭거리며 꺼내는 홍매. 작고 낡은 스프링 수첩을 꺼낸다. 슥슥 넘겨본다.

스모그...스모그...그러나 그런 단어는 없다. 다가오는 정호.

 

정호 : 뭡니까?

홍매 : (움찔 놀라) 아, 아닙니다.

 

수첩을 빼앗아 보는 정호. 삐뚤삐뚤한 글씨들이 수첩 속에 빼곡히 써 있다.

<핸드폰, 네티즌, 바캉스, 케잌, 오프너, 샴푸, 린스, 골 때린다, 캡이다, 엿먹어라...>

한글 옆에는 한자로 뜻풀이 주석이 붙어있다.

얼굴 붉어지는 홍매.

 

홍매 : ...거기선 영어를 거의 안 쓰거든요.

정호 : (피식) 엿먹어라...캡이다... 이런 건 누가 적어줬어요?

홍매 : (도로 빼앗으며 수줍게) 한국에 자주 왔다갔다 하는 친척 언니가 있어서요.

         저, 열심히 공부했어요. 이쪽 드라마두 열심히 봤구요. 왠만한 말은 문제 없습니다만...

정호 : (기분 묘해지며 외면하는데) ...스모그는 ...스모그는 무슨 뜻이냐면요...

         (사이) 뭐, 공해... 그런 뜻입니다. 공기 드러운 거요.

홍매 : (끄덕하고 웃는다) 예에...

 

순간, 저만치서 퀵보드 타고 씽씽 달려오는 아이들. 못 보고 서 있는 홍매.

놀라는 정호. 얼른 홍매 팔을 붙잡아 한쪽으로 밀친다. 부딪치려는 순간, 휘청 넘어지며 피하는 홍매.

 

정호 : 짜식들! 조심해야지!

꼬마들 : 죄송합니다!

 

멀어지는 꼬마들.

옷 탁탁 털어주는 정호. 고마워 마음 뭉클해지는 홍매.

 

정호 : 안 다쳤어요?

홍매 : 예.

정호 : 조심해요. 여긴 사방에 사고날 거 투성이예요. 잠깐만 정신 빼놓구 있어두 큰일 나요.

홍매 : (행복하다) 예.

 

그런데, 일어나는 순간, 구두굽이 툭 하고 빠져버린다. 난감한 홍매. 돌아보는 정호.

 

 

#28. 구두점 안 (낮)

 

빨간색 단화 한 켤레를 신고 있는 홍매. 좋아라 입이 벌어져있다.

 

종업원 : 이걸로 하시겠어요?

정호 : 맘에 들어요?

홍매 : 예. 무척 마음에 듭니다.

정호 : 이걸루 주세요. 얼맙니까.

종업원 : 7만 9천원인데요.

홍매 : (놀라서) ...비싸다.

 

한숨이 작게 나온다. 하지만 기왕 쓰는 거... 에잇, 마지막 선물이라 치자. 지갑 열어 지폐를 꺼내는데...

간이 덜컥 내려앉은 홍매. 후다닥 신을 벗는다.

 

홍매 : 됐습니다. 다른 데 가서 사겠습니다.

정호 : (호기롭게) 아닙니다. 그냥 주세요.

홍매 : !

정호 : 뭐... 어디 가두 이 정도가 보통이예요. 잘 어울리는데요?

홍매 : (쩔쩔 매는데) ...

 

순간, 울리는 휴대폰. 얼른 꺼내서 받는 정호.

 

정호 : 여보세요.

선아(E) : 나야, 선아! ...지금 어디야?

정호 : (당황) 어어...서, 서울인데...

선아(E) : 서울?

홍매 : ?

정호 : 자, 잠깐 일이 좀 있어서...

 

얼른 가게 밖으로 나가는 정호.

 

 

#29. 구두점 앞길 (낮)

 

가게 옆 모퉁이에 서서 통화하는 정호.

 

선아(E) : 어머니 무슨 색깔 좋아하셔? 빨간색 좋아하셔?

정호 : 울 어머니? 왜?

선아(E) : 쇼핑 나왔는데... 블라우스가 너무 맘에 들길래 하나 사드릴려구!

정호 : 뭐하러 그런 걸 사...

선아(E) : 인사 드리러 갈 때 가지구 갈 거야. 빨리 말해 봐! 무슨 색?

 

가게 유리문 안쪽으로 빨간 구두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홍매 모습이 보인다. 초조한 정호.

 

정호 : 빠, 빨간색! 좋아하셔!

선아(E) : 알았어! ...근데 일은 언제쯤 끝나?

정호 : (당황) 응? 일?

 

 

#30. 고층 건물 외경 (저녁)

 

 

#31. 여행사 사무실 (저녁)

 

여직원 앞에 서 있는 정호. 눈빛이 불안하다.

 

여직원 : 중국 연길까지 가는 거요?

정호 : 예.

여직원 : 몇 분이십니까.

정호 : 한 사람요.

여직원 : 성함이...

정호 : 이,홍,매... 내일 아침 첫 비행기 가능할까요.

여직원 : (자판 두드리며) 잠시만 기다리세요.

정호 : (초조한데) ...

 

 

#32. 건물 로비 (저녁)

 

빨간 구두 신고 한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홍매. 구두를 내려다보는 눈시울이 글썽글썽 젖어있다...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정호. 태연히 다가온다.

 

정호 : 많이 기다렸죠?

홍매 : 아, 아닙니다.

정호 : (얼렁뚱땅) 치, 친구녀석이 이 건물에 사무실을 내구 있어서요...

홍매 : 예에.

정호 : 서울 오면 꼭 한 번 들르라구... 그래서 잠깐 인사나 할려구...

홍매 : 예에...

정호 : 근데... (유심히 본다) 무슨 일 있었어요? 울었어요?

홍매 : (목례한다) 구두...고마워서요. 앞으로 잘할께요... 어머님께두 잘할께요.

정호 : (미치겠다) ...

 

 

#33. 밤거리 (밤)

 

대형 광고 전광판 아래를 걸어가는 두사람.

신기한 듯 전광판을 올려다보는 홍매. 광고 화면이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초조하게 주위를 살피는 정호. 저 멀리 여관 불빛을 하나 발견 한다. 심호흡한다.

 

정호 : 홍매씨.

홍매 : (돌아본다)

정호 : (여관 가리키며) 하루 여기서 자고 낼 아침 일찍 출발하죠.

홍매 : 예? 어머님 기다리시잖아요.

정호 : 우리집 있는 시골이 여기서 무척 멀거든요. 인제 출발하면 새벽이나 돼야 들어가요.

홍매 : 새벽이면 어떻습니까. 아직 결혼식두 안 했는데 여관은 싫습니다.

정호 : (짜증이 확 솟는다. 버럭) 누가 여관 가서, 자자구 그래요?

홍매 : (움찔)

정호 : (좀 미안해지며) ...차를...막차를 놓쳤어요. 정신없이 다니다보니까 시계 보는 걸 깜빡 했어요.

홍매 : (난처한데) ...

정호 : 걱정마요. 이불 따로따로 깔고 잡시다. 됐죠?

홍매 : ...

정호 : 따라와요. 자고 내일 아침에 내려가요.

 

앞장 선다. 따라가는 홍매.

 

 

#34. 여관방 안 (밤)

 

욕실 쪽에서 세수하는 물소리 들린다. 보따리들이 방구석에 주욱 줄지어 서 있다.

한쪽 벽에 기대고 앉아있는 정호. 뒷주머니에서 슬며시 중국행 비행기표를 꺼내본다.

 

정호 : 미안합니다, 이홍매씨... 좋은 사람 만나 잘 살아요.

 

반으로 접어 도로 넣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욕실 문 틈으로 흥얼흥얼하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중국 가요인 듯 하다.

가책에 괴로워지는 정호. 담배 한 대 꺼내무는데... 늘어서 있는 홍매의 가방 중 하나가 반쯤 열려있다.

가방 밖으로 비죽히 나와있는 옷가지 같은 것. 가만히 집어 들어보는 정호. 다 떨어진 누런 내복과 양말 같은 것.

그리고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꽃빵 몇 개. 마음이 짠해지는 정호.

순간, 욕실에서 나오는 홍매. 에그머니 놀라 달려온다.

 

홍매 : (창피해서 얼른 도로 챙기며) 가면서 먹으라고 어머니께서 싸주셨어요.

          내복은...겨울에 춥다고... 싫다는데두 한사코 넣어주셔서...

정호 : 미안해요. 볼려구 본게 아니구...

홍매 : 아유, 괜찮습니다.

 

다른 가방에서 주섬주섬 로션병 같은 것을 꺼내는 홍매. 덜어서 얼굴에 탁탁 찍어바른다. 가만히 지켜보며 기회를 살피는 정호.

 

홍매 : (슬며시 돌아 앉더니) 저어...

정호 : 왜요.

홍매 : (결심한 듯) 자도 괜찮습니다.

정호 : 예?

홍매 : 여기서 첫날 밤... 치러도 괜찮아요. 어차피 부부 될 사인데... 괜찮습니다.

 

옷섶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얼굴이 빨개져 있다. 한발짝 다가앉으며 고개를 떨구는 홍매.

멍해지는 정호. 잠시 침묵 흐른다.

 

정호 : 저, 저기요, 홍매씨.

홍매 : (본다)

정호 : 나랑 얘기 좀 합시다.

홍매 : 말씀하세요.

정호 : 실은요... (어디부터 시작할까) 실은 우리가...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그날 하루 밖에 더 있었어요.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결혼은 인륜지대사 아닌가요.

         내가 어떤 놈인지, 홍매씨가 어떤 여잔지, 그날 하루 보구 어떻게 알 수가 있어요.

홍매 : 맞습니다. (천진하게 웃는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거,

         살아가며 하나씩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고 좋은 일 아니겠어요.

정호 : (한숨) 내가 강도 살인범이면 어떡할래요. 내가 술만 먹으면 홍매씨 때리면 어떡할래요.

홍매 : (얼핏 굳어지다가) 그래도 제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척해나가야지요.

정호 : 홍매씨 여기 와서 살면 고생만 직사하게 할 거예요. 풍습두 다르구 음식두 다르구, 아는 사람 하나 없잖아요.

         우리 어머닌 얼마나 깐깐하신지 알아요? 홍매씨 후회할 거예요.

홍매 : 각오하고 왔습니다.

정호 : 나는 자신 없어요.

홍매 : (멈칫)

정호 : 나는 자신 없다구요. 그러니까 우리...

홍매 : (OL)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미소 어리며) 하지만 서로 노력하다보면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저는 잘할 자신 있습니다.

정호 : (허탈한데)

홍매 : (머뭇하다가) 저도...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호 : (본다)

홍매 : 저어...

정호 : 뭔데요.

홍매 : 매달 십만원씩 중국으로 부쳐주십시오.

정호 : !

홍매 : (떨린다) 부모님께서 빚을 많이 지셨습니다. 거기선 십만원이면 한달 우리 식구 충분이 먹고 삽니다.

         십만원씩 부치기로 약속하고 왔습니다. 농사일 열심히 할테니 십만원 부쳐주신다고 약속해주세요.

정호 : (굳는다)

 

한동안 긴 침묵과 긴장이 흐른다. 한순간... 눈빛이 휙 달라지는 정호.

 

홍매 : ...약속해주세요.

정호 : (OL) 허! 그거였군요?

홍매 : !

정호 : 속셈이 그거였어요! 십만원에 사랑두 없는 한국 남자한테 시집오는 거예요. 그죠?

홍매 : (멍하니)

정호 : 허, 말로만 듣던 위장결혼이 이거군요! 뻔하지, 뻔해! 어쩐지 하루만에 약혼식을 한다 어쩐다 난리를 피우드라니...!

홍매 : ...

정호 : 이래놓구 만약에 내가 십만원을 안 부쳐주면! 그럼 결혼두 안하겠죠? 만약에 나랑 살다가 십만원을 못 부쳐준다 그러면

         집을 나갈 거구! 기왕 국적두 얻었겠다, 어디 돈 많이 주는 취직자리라두 나오면 가출할 게 뻔하지!

홍매 : ...

정호 : 하유, 하마트면 큰일 날 뻔 했네! 나는요! 홍매씨가 정말 나를 좋아해서! 나한테 반해서 시집오겠다고 매달린 줄 알았어요!

         하루 밖에 없었지만 우리가 뭔가 통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니구 돈이 목적이었다고, 왜 순순히 말 안했어요?

홍매 : (굳어있다) ...

정호 : (더욱 버럭버럭) 인생 길지 않아요. 그렇게 살지 마세요! 장가 못갔다고 사람 우습게 보지 말아요!

홍매 : ...

정호 : 돌아가요! 당장 당신 나라로 돌아가요! 가서 거기서 착실히 일해서 빚 갚아요.

홍매 : ...

정호 : ...할 말 있어요?

홍매 : ... (들릴 듯 말 듯) 없습니다.

정호 : (일어나며) 그럼 잘가요.

 

정호, 방을 뛰쳐나간다.

 

 

#35. 여관 앞길 (밤)

 

후다닥 여관을 나오는 정호.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36. 여관방 안 (밤)

 

홀로 남은 홍매. 무표정하게 한참 앉아있다. 이윽고 눈물을 주룩 흘린다. 허겁지겁 일어나 밖으로 쫓아나간다.

 

 

#37. 여관 앞길 (밤)

 

뛰어나오는 홍매. 주위 두리번거리지만 정호 모습 안 보인다.

골목 끝까지 정신없이 뛰어간다. 정호 모습 이미 사라지고 어디에도 없다. 애타게 주위를 살펴보는 홍매.

 

 

#38. 거리 일각 (밤)

 

늦은 시간의 대로변. 걸어가는 정호. 뒷춤에서 비행기표 꺼내본다. 주지 못하고 말았다. 마음이 복잡해지지만 애써 꾹 누른다.

잘했다, 김정호. 이제 됐다....그러나 자꾸만 뒤가 켕긴다. 뒤돌아보고 또 힐끗 돌아보고...

그러다가 다시 꿋꿋이 앞만 보고 걸어간다.

 

 

#39. 읍내 까페 (다른날 낮)

 

마주 앉아있는 선아와 정호. 컬러 인쇄지 몇 장 (사업 설명서 같은 것) 테이블에 놓여 있다.

 

선아 : (내용 하나하나 짚으며) 이탈리아에서 제일 인기있는 아이스크림 브랜드래.

         사업 설명회장에 발 디딜 틈이 없드라.. 읽어 봐봐.

정호 : 아휴, 내가 뭐... 본다구 아냐.

선아 : 장소두 아주 괜찮아... 새로 리노베이션 하는 건물이라... 실내장식두 큰 돈 안 들거 같구...

         학교 앞이라 목두 그만이구... (들떠서)

정호 : (서류 들여다 본다)

선아 : (슬몃) 본사에서 지원이야 해준다 그러지만... 사실 장사는 처음이라서... 겁이 좀 나.

정호 : (너털 웃고) 누군 첨부터 장사꾼으로 타구 나냐? 걱정마... 나만 믿어! 난 자신 있다!

선아 : (끄덕하고 웃는다)

정호 : 솔직히... 농사 관두구, 뭐... 할 일이 없을까... 몇 번씩 궁리하구 그랬는데....

         (서류 내려 놓으며) 이거야, 이거! 감이 딱 온다!

선아 : (웃다가... 생각난 듯 꾸러미 꺼내며) 아참, 어머니 블라우스 볼래? 맘에 들어하실까 모르겠네?

정호 : (뭉클하며 바라본다) ...고맙다, 선아야.

선아 : 뭘.

정호 : 고맙다...!

 

손 꼭 잡고 웃는다.

 

 

#40. 정호집 외경 (낮)

 

 

#41. 정호방 (낮)

 

대청소하는 정호. 책상 위를 걸레로 닦고, 옷가지도 개켜넣고, 잡지책, 헌 책자 등도 정리한다.

서랍을 닦다가 무심코 뭔가를 떨어뜨린다. 약혼사진이다. 잠깐 괴로워진다. 눈 딱 감고 사진을 엎어버리더니 서랍 깊숙이 넣는다.

들어오는 정호모.

 

정호모 : 그렇게 쫓아다닐 땐 본 척두 않던 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

정호 : (OL) 서울서 고생 많이 했대요. 고생 하면서 여기 생각 많이 났대요 ... 선아 착해요. 어머니 아시잖아요. 착해요.

정호모 : 착한지 뭔지... 허, 내가 갑자기 귀신에 홀린 성 싶다... 온 동네 잔치한다고 소문만 다 내놓고... 에미 체면이 말이 아니다.

정호 : (치운 것 안고 나가며) 읍에 나가 머리 좀 하구 화장두 좀 예쁘게 하세요.

정호모 : (떨떠름하게 보다가) ...그 처녀... 여비는 넉넉히 줬냐.

정호 : ...(그대로 나가며)

정호모 : ...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꼬.

 

 

#42. 서울 거리 (오후)

 

짐 들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홍매. 오가는 사람들과 차들. 갈 곳이 없다.

길 한쪽에 가방을 내려놓고 우두커니 거리를 바라본다. 길가의 포장마차에서 호떡을 구워 팔고 있다. 배고파 침이 꼴깍 넘어간다.

외면하다가 다시 시선이 그리로 간다. 다가간다.

 

홍매 : 얼맙니까.

주인 : 세 개 천원요.

홍매 : 하나만 주세요.

주인 : 세 개씩만 팔아요.

 

주머니에서 뭉쳐진 천원 짜리를 꺼낸다. 한 장 건넨다. 호떡을 받아들고 다시 짐 있는 곳으로 가서 우물우물 먹는다.

길가 레코드점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에이치오티 뮤직 비디오가 레코드점 진열장의 DVD에서 흐르고 있다.

호떡 삼키며 다가가서 바라보는 그녀.

 

 

#43. 냉면집 앞길 (저녁)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정호와 냉면 먹었던 그 식당.

초췌한 몰골로 가만히 다가오는 홍매. 유리창 너머 식사하는 손님들 사이로 부지런히 서빙하고 있는 조선족 아주머니.

홍매, 그 모습을 조심스레 지켜본다. 어느 순간 눈이 마주치면 얼른 시선 떨구는 홍매. 태연한 척 돌아서서 큰길 쪽을 바라본다.

 

 

#44. 농협 현금 인출기 (낮)

 

천만원을 계좌이체 하고 있는 정호. 한 손으로 통화한다.

 

정호 : 지금 넣었으니까 한 삼십 분 있다가 찾으면 될 거다...... (껄껄 웃고) 걱정마라. 내가 농협에서 신용 하나는 일등이다!

         ......중도금은 언제래?

 

 

#45. 읍내 수퍼마켓 (낮)

 

휘파람 쓱 불며 들어오는 정호. 진열장에 물건 정리하고 있는 종진.

 

정호 : (괜히 과자 봉지 하나 들며) 이런 건 원가가 얼마나 하나?

종진 : (돌아본다) ...왔냐?

정호 : (씩 웃고) 장사 잘 되냐?

종진 : 뭐 좋은 일 있냐?

정호 : (말할까 하다가) 나가자! 술 한 잔 하자! 내가 오늘 거하게 한 턱 쏜다!

종진 : (왜저러나 싶어)

정호 : (이끌며) 나가자니까?

종진 : 알았다, 알았어. (손 털고 일어나다가) 아참, 너...혹시 선아 만났냐?

정호 : (멈칫)

종진 : 연락 안 왔어?

정호 : (짐짓 거만한 미소 어리며) 왜.

종진 : 그거 아주 돌은 기집애드라. 조심하라구...

정호 : (설핏 굳는다) 무슨 소리냐.

종진 : 월촌 사는 성덕이 알지? 박성덕! 아, 왜 옛날에 선아 땜에 약 먹구 죽는다구 난리친놈 있잖아!

정호 : (불길한데) ...알아,

종진 : 그 녀석 찾아왔드래. 찾아와서 옛날에 미안했네 어쩌네, 울구 짜구 그러면서... 돈 좀 빌려달라 그러드랜다.

정호 : 그, 그래서...?

종진 : 순진한 놈... 오백이나 만들어 줬대. 근데 이 기집애가 감감 무소식인 거야... 아무래두 이상하다 싶어서 알아봤드니...

         즈이 오빠랑 하던 사업이 쫄딱 망해서 수배중이랜다! 홀라당 떼인 거지 뭐.

정호 : (하얗게 질려있다) ...

종진 : (슬몃 본다) 혹시 너한테두 연락 올지 몰라! 조심해라!

정호 : ...(등줄기 서늘해지며 뒷걸음질 치는데)

 

 

#46. 소도시 신축 건물 앞 (낮)

 

읍에서 얼마쯤 떨어진 중소 도시로 설정. 리노베이션이 한창인 3,4층짜리 건물 앞. 공사하는 인부들 모습 보인다.

현장 소장으로 보이는 남자 앞에 초조하게 서 있는 정호.

 

소장 : 아이스크림 전문점요?

정호 : 예! 여기 일층에 아이스크림 전문점 계약 했다니까요!

소장 : 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 이 건물 전부 여관으루 개수하는 중인데요?

정호 : 여관요? 혹시 잘못 알구 계신 거 아닙니까? 며칠 전에두 여기 와서 보구 갔는데...

소장 : (무시하고 바삐 현장 지휘하며) 어이! 크레인 아직 안 왔어?

정호 : 이거 보세요!

소장 : 나가주세요! 위험하니까 비켜주세요!

정호 : 사장님 어딨어요?! (절박하게 막아서며) 이 건물 사장님 어디 계십니까?

소장 : (어이없어)

 

 

#47. 정호집 정호방 (낮)

 

통화하고 있는 정호.

 

정호 : (고함) 결번이라뇨! 몇시간 전에두 통화를 했는데 어떻게 벌써 결번이 된단 말이예요!

 

들어오는 정호모. 무슨 일인가 눈치 본다.

 

정호 : ...주소를 왜 몰라요! 전화국에서 무슨 일을 그렇게 합니까! 예?

 

전화기 집어던진다.

 

정호모 : 정호야,

정호 : (스르르 무너지며) ...

 

 

#48. 강가 (낮-저녁)

 

자전거 세워져 있다. 고개 숙인 채 강가에 앉아있는 정호. 날이 저물도록 넋나간 듯 꼼짝 않고 있다.

 

 

#49. 서울- 버스 정류장 가판대 (밤)

 

버스정류장 근처의 가판 매점. <중국전화카드 오십분에 9000원>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가만히 다가오는 홍매. 식당 종업원 차림이다. 자세히 들여다본다.

 

 

#50. 거리 공중전화 부스 (밤)

 

중국으로 전화 걸고 있는 홍매.

 

홍매 : (밝다) 어머니, 저예요, 홍매! ...예! 다들 잘 계시지요? ...결혼식 잘 했습니다...예! 걱정 마세요! ...

         오늘 우편으로 소포 부쳤습니다...영매 생일이잖아요...에이치오티 테이프예요...신곡이래요... 영매한테 전해주세요! ....

         신랑이 잘해줍니다...그럼요...잘해줍니다... 여기 참 좋습니다... 여자들 옷차림도 산뜻산뜻하고요.

         뜨거운 물도 수도에서 콸콸 나오고요......

 

돈이 철컥철컥 내려간다. 잠시 말을 못 잇는 홍매. 소매로 눈물을 슥 훔친다.

 

홍매 : ...어머니...보고 싶어요. 저도 많이 보고 싶어요...

 

 

#51. 식당 외경 (밤)

 

 

#52. 식당 안 (밤)

 

설렁탕 가게. 붐비는 손님들 사이에서 서빙하는 홍매.

양복 차림의 중년남자 두 명이 마주 앉아 식사하고 있다. 가끔씩 홍매를 힐끔힐끔 본다.

테이블로 다가와 물병을 내려놓는 홍매.

 

남자1 : (물 따라 마시며) 아가씨, 고향이 어디야.

홍매 : 예?

남자2 : 고향이 어디냐구? 혹시 연변서 왔어?

홍매 : 예? (멈칫하다가) 아, 아닙니다.

남자2 : 에이, 바로 말해 봐. 말씨 들으면 척 알겠는데 뭐.

홍매 : (난감한데)

남자2 : 이 아저씨 고향이 그쪽이라서 그래. 길림성에서 오셨어.

홍매 : (확 밝아지며) 저는 용정서 왔어요.

남자2 : (남자1과 서로 눈짓) 아가씨 신분증 있어?

홍매 : 예?

남자1 : 신분증. 여권이나 주민등록증.

홍매 : (굳는다)

남자1 : (신분증 꺼내며) 신고 받고 나왔어요. 아가씨 불법 체류 중이지?

홍매 : 아, 아닙니다. 초청 받아서 왔습니다.

남자1 : 그럼 초청장 줘 봐요.

 

딱 굳어져서 서 있던 홍매. 그대로 뒤로 돌아서 뛰어나간다. 남자1, 2, 쫓아간다.

 

 

#53. 식당 앞길 (밤)

 

부리나케 도망치는 홍매. 뒤쫓아가는 남자들.

안 잡히려고 기를 쓰고 도망가는 그녀.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54. 대로변 (밤)

 

도망치는 홍매. 엉겁결에 차도로 뛰어든다... 사방에서 경적 울리며 급정거하는 차들.

혼비백산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홍매. 아득해지는 시선.

 

 

#55. 정호 동네 전경 (다른날 낮)

 

 

#56. 정호방 (낮)

 

방 구석에 등 돌리고 앓아 누워있는 정호. 방문 열고 고개 들이미는 정호모.

 

정호모 : (한숨) 죽 쒀놨다. 한 숟갈이라도 먹어라. 굶어 죽을 작정이냐.

정호 : ...

정호모 : ...나오너라... 에미 죽는 꼴 안 볼려거든 그만 일어나 나오너라!

 

오토바이 소리 들린다.

 

집배원(E) : 김정호씨! 소포 왔어요.

 

돌아보는 정호모.

 

 

#57. 정호집 마당 (낮)

 

소포 꾸러미를 받는 정호모. 발신인을 살핀다. 李紅梅라고 써 있다.

 

정호모 : 누구한테 온 건가... (더듬더듬) 이...홍...

 

부스스한 얼굴로 방에서 나오는 정호. 뭔가, 하고 보는데.

 

 

#58. 정호방 (낮)

 

꾸러미 속에서 나온 작은 꿀단지와 누덕누덕해진 종이상자 같은 것.

상자를 열면 재질도 색깔도 조악한 한복감이 곱게 개켜져 들어있다. 그 위에 편지가 한 장 놓였다. 집어드는 정호.

 

홍매(E) : 정호씨 하고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 납니다. 옌지 시내 다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때 저보고 눈이 참 맑다고 칭찬해주셨어요.

 

 

#59. 회상 - 옌지(延吉) 시내 다방

 

중국풍 음악과 실내 장식. 연길 시내 모 찻집으로 설정.

마주 서 있는 정호와 홍매. 맞선을 본다. 서로 예의 차리느라 쭈빗거리고 있다가...

 

정호 : 처음 뵙겠습니다. 김정홉니다.

홍매 : 이홍맵니다.

 

정중히 목례하고 자리에 앉는 두사람.

 

홍매 : 먼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정호 : 아이구, 고생은요. 비행기 타니까 금방이든데요.

 

엽차 홀짝 마시며 어여쁜 홍매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는 정호. 첫눈에 반했다.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데..

가끔씩 정호를 훔쳐보는 홍매. 수줍게 웃는다. 그위로 깔리는 홍매의 편지.

 

홍매(E) : 힘들고 고달픈 인생이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나가다 보면 반드시 보답이 돌아올 거라고, 힘주어 말씀도 하셨지요.

 

홍매에게 시선이 팔려, 물을 엎지르고 마는 정호. 바닥으로 컵이 굴러떨어진다.

당황해서 얼른 탁자 아래로 몸을 굽히는 정호. 주워주려고 같이 몸을 숙이는 홍매.

동시에 찻잔을 집어 들던 두사람. 머리를 쿵 부딪치고 만다. 얼굴 붉히고 마주 보며 하하 웃는다.

 

 

#60. 회상 - 한강 시민 공원길 (낮)

 

짐 들고 앞서 가는 늠름한 정호. 뒤따라 가는 홍매, 정호를 살짝살짝 훔쳐보며 연신 즐겁다.

 

홍매(E) : 그때 당신한테 반했습니다. 당신이 참 좋았습니다. 믿음직스럽고 진실해보였습니다.

 

 

#61. 회상 - 놀이공원 (낮)

 

잃어버린 홍매를 찾아 헤매는 정호.

저만치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던 홍매. 표정에 장난기 어리며 얼른 벽쪽으로 몸을 숨긴다.

 

홍매(E) :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무척 졸였어요. 소개소 사람한테서 맘에 들어하신다는 전갈을 받고,

             기뻐서 눈물까지 흘렸더랬어요. 돈이 필요했지만...돈 때문만은...아니었어요......마음씨 착하고 자상한 분...

 

홍매씨! 홍매씨! 하며 초조하게 헤매는 정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홍매. 행복한 미소가 입가에 흐르고 있다.

 

 

#62. 회상 - 구두점 (낮)

 

구두 신고 좋아하는 홍매.

 

홍매(E) : 당신처럼 좋은 사람한테 돈 얘기를 어떻게 꺼내나...내내 두려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말 꺼내는 걸 미루게 됐어요. 첨부터 말하지 않은 거 후회합니다...

 

 

#63. 식당 앞 대로변 (낮)

 

단속반에게 쫓겨 도망치는 홍매. 차도로 뛰어드는데...

 

홍매(E) : 함께 부치는 것은 혼인 선물로 가져온 것이니까 그냥 받아주십시오. 백두산 석청꿀과 어머님 한복감입니다.

             그간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좋은 분 만나 행복하게 사십시오. 마음 아프게 해드려 미안합니다.

 

 

#64. 정호방 (낮)

 

편지 읽고 있는 정호. 눈물 한방울이 편지지 위로 뚝 떨어진다.

웃목에 놓인 백두산 꿀단지와 어머니 한복감.

 

 

#65. 정호집 마당 (낮)

 

점퍼 걸치고 신 신는 정호. 마당에 앉아 나물 다듬는 정호모.

 

정호모 : 어디 가냐.

정호 : 서울 좀 다녀올려구요.

정호모 : (버럭) 소용 없다! 가지 마라! 돈 못 찾는다!

정호 : ...

정호모 : 내가 너 깝칠 때 알아봤다! 망할 가시내... 어디 사기를 쳐먹을 데가 없어 고향까지 내려와 그 짓을 해!

            (분한 눈물 글썽이고) 천하에 못된 년!

정호 : (저만치 서둘러 나가며) 다녀올께요.

정호모 : 정호야! 정호야!

 

 

#66. 여관 앞길 - 서울 (낮)

 

여관으로 뛰어 들어가는 정호. 유리문 안에서 카운터의 주인과 뭐라 뭐라 얘기한다.

허탈한 얼굴로 도로 나온다. 어디로 갈까...막막하다.

 

 

#67. 인천 연안부두 대합실 (낮)

 

출국장 입구. 중국인 여행객 한 무리, 정호 앞으로 지나간다.

한명 한명 애타게 기웃거려보는 정호. 대합실 안을 다시 한번 이리저리 살핀다.

 

 

#68. 놀이공원 부근 거리 (낮)

 

사람들 사이로 걸어오는 정호. 저 멀리 공원에서 바이킹이 돌아가고 있다.

멈춰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호. 자괴감에 젖어 다시 걷는다. 아닌 줄 알면서도, 또래의 여자들을 안타깝게 하나씩 살펴본다.

그러다가...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급히 뒤돌아 달려간다.

 

 

#69. 냉면집 (낮)

 

손님 없는 한산한 시간. 들어오는 정호. 안을 살핀다.

그때 그 조선족 아주머니, 한쪽에 앉아 수저에 커버를 씌우고 있다. 다가가는 정호.

 

정호 : 저어...실례지만...

아주머니 : (본다)

정호 :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저랑 얼마 전에...여기 와서 냉면 먹었던 아가씨 기억하세요?

아주머니 : 예?

정호 : 아, 아니...그러니까...연변에서 온 아가씬데요...아주머니보구 연변에서 왔냐구 물어봤는데... 그러니까...냉면 먹으면서...

         (자기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순간, 아주머니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뭔가 짚히며 확 반가워지는 정호.

 

정호 : 아시죠? 그 아가씨 아시죠? 혹시 여기 왔습니까?

아주머니 : ...(쌀쌀맞게) 모릅니다.

정호 : 아니예요. 왔어요. 왔다구요. 그렇죠?

아주머니 : (일어나 들어가며) 아닙니다. 모릅니다.

정호 : 아주머니! 아주머니!

 

따라가서 돌려세운다. 꽉 붙잡는 정호.

 

정호 : (애절히) 가르쳐주세요. 어딨는지 가르쳐주세요. 네?

아주머니 : (난감하게 본다)

정호 : 가르쳐주세요...찾아야 돼요.

 

 

#70. 식당 앞 (낮)

 

홍매가 일하던 설렁탕 가게 앞. 간판 살피며 다가오는 정호. 상호 확인하고 반갑다.

 

 

#71. 동 식당 안 (낮)

 

들어오는 정호. 어서오세요, 인사하는 여주인. 자리 잡고 앉는 정호.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홍매 모습 안 보인다.

 

주인 : (물잔 놓으며) 뭐 드릴까요.

정호 : ...설렁탕 주세요.

주인 : 여기 설렁탕 하나요!

 

물 한 모금 마시며 종업원들을 찬찬히 살펴보는 정호.

 

정호 : 저기요...말씀 좀 묻겠습니다.

주인 : (돌아본다)

정호 : 여기 혹시...종업원 중에 연변에서 온 아가씨 없습니까.

주인 : ... 없는데요.

정호 : (실망) 없어요?

주인 : 예.

 

설렁탕을 가져다주는 주인.

낙심하는 정호. 밥을 말아 한 수저 뜨는데 저만치 카운터 옆으로 뭔가 눈에 들어온다. 수저를 멈추고 본다. 구두다.

홍매의 빨간 단화가 선반에 얌전하게 놓여있다.

 

정호 : 저 신발...

주인 : (본다)

정호 : 저거 홍매씨 신발 맞죠?

주인 : (그제서야) 아는 사람이예요?

정호 : ...남편입니다.

주인 : (멈칫한다)

정호 : 지금 어딨습니까? 아직 안 나왔어요?

주인 : (마뜩찮게) 그 아가씨 며칠 전에 도망갔어요.

정호 : 도망요?

주인 : 아유, 말도 마요. 단속반한테 걸려서 그대로 삼십육계 튀었어요.

정호 : (멍하니)

주인 : (지레 짐작하며 넌지시 본다) ...어떻게 된 사연인진 몰라두... 찾기 힘들 거유.

 

카운터 쪽으로 가면서 신발을 정리하는 주인.

 

주인 : 아깝다구 통 못 신드니...쯧쯧...신발두 못 챙겨 신구 갔네.

 

밥을 삼키는데... 목이 턱 메어오는 정호.

 

 

#72. 식당 앞 거리 (낮)

 

식당을 나오는 정호. 어디로 가나...

 

 

#73. 한강 시민 공원 (저녁)

 

기운 없이 걸어오는 정호.. 낙심한 얼굴로 벤치에 앉아 담배 붙여 문다...

놀러 나온 가족들, 공 던지기 하며 평화롭다.

지켜보는 정호. 순간, 저만치 가고 있는 홍매 비슷한 아가씨. 일어나는 정호, 정신없이 쫓아간다..

 

 

#74. 여의도 강변로 (저녁-밤)

 

여자를 쫓아가는 정호. 사람들 헤치고 그녀를 따라간다.

 

정호 : 홍매씨! 홍매씨!!

 

애절하게 외친다. 마침내 달려가서 그녀의 팔을 나꿔챈다. 돌려세우는 순간...아니다.

의아한 얼굴로 정호를 쳐다보는 낯선 여자. 절망하는 정호.

 

정호 : ...죄송합니다.

 

굽신하고 돌아선다. 아득하니 거리를 바라본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들어온다.

 

 

#75. 거리 (밤)

 

번화가의 네온 불빛.

퇴근하는 인파 사이를 걸어오는 한 여자. 꾀죄죄한 몰골과 지친 얼굴, 슬리퍼를 끌고 기운없이 걷고 있다. 홍매다.

전신주에 빼곡히 붙어있는 룸싸롱, 단란주점 여급 구함 광고들... 잠깐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구고 다시 걷는다.

행복해 보이는 연인과 가족들.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오는 그녀.

 

 

#76. 식당 앞길 (밤)

 

늦은 시간. 가게 여주인, 문을 닫고 셔터를 내리는 중이다. 어느 순간,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는 주인. 에그머니 놀란다.

길모퉁이 구석에 웅크려 앉아있는 홍매.

 

주인 : 이게 누구야.

홍매 : (일어나며 목례) ...제 신발... 찾으러 왔습니다.

 

어이없는 주인.

 

 

#77. 시골 가로수길 (새벽)

 

새벽 안개 사이로 동이 터오고 있다. 먼지 풀풀 날리며 가로수 길을 달려가는 시외 버스.

 

 

#78. 시외버스 안 (새벽)

 

정호, 시선을 내리고 멍하니 앉아있다.

 

홍매(E) :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무척 졸였어요. 소개소 사람한테서 맘에 들어하신다는 전갈을 받고,

              기뻐서 눈물까지 흘렸더랬어요.

 

편지를 움켜 쥐는 정호. 눈시울이 붉어져온다. 고개를 젓는다. 포기하자. 끝났다. 어쩔 수 없다.

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붙이려는데.. 한 순간, 차창 너머 도로변에 한 여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멈칫 돌아보는데.. 홍매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정호.

 

정호 : 세워요! 차 세워주세요! 스톱! 스톱!

 

목이 쉬어라 외친다.

 

 

#79. 가로수길 (새벽)

 

급정거하는 버스. 차에서 뛰어내리는 정호.

양 어깨에 짐을 주렁주렁 매달고, 저만치 숨차게 걸어오는 홍매. 주소 적힌 쪽지를 한 손에 들고, 도로의 이정표를 살피고 있다.

달려가는 정호.

 

정호 : 홍매씨...!

 

홍매, 놀란 듯, 두려운 듯 바라보더니 몸을 움츠린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다.

 

홍매 : (주저하다가) ...십만원...안 부쳐주셔도 됩니다...

 

마침내 와락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 어깨를 떨면서 참았던 눈물을 철철 흘리기 시작한다.

목이 메어오는 정호. 떨리는 손으로 홍매의 두 손을 덥썩 잡는데... 시선에 들어오는 그녀의 빨간 구두...

이윽고 함께 울기 시작하는 정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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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수다쟁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8.21 십 만원.. 안 부쳐주셔도 됩니다... ㅜㅜ 단 한줄의 슬픔과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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