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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2004][완벽한 룸메이트] 황경신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2.01.16|조회수1,304 목록 댓글 1

[완벽한 룸메이트] 황경신

 

 

 

 

 

 

 

 

 

 

#1. 수정의 집, 거실, 오후

 

이제 막 이사를 끝낸 집.

가구들이 대충 자리를 잡았고 여기저기 빈 박스와 신문지, 아직 정리가 안 된 책들과 소품들이 쌓여 있다.

거실에는 책장과 소파, 앤티크 풍 가구들, 한쪽에 TV와 오디오 등, 주방 쪽에는 4인용 식탁.

수정, 거실 바닥에 앉아 책장에 꽂을 책들을 분류하고 있다. 책은 주로 독일 원서(문고판 포함)들이다.

한쪽에 쌓여 있는 7-8권의 책들(독문학 관계서적), 그 위에 다시 한 권을 더 올려놓는 수정,

책들 중에서 <저자/한재석>이라고 쓰여 있는 책을 다시 골라낸다. 모두 3권.

그 중 <독일 문학에 나타난 상징과 은유, 저자/한재석>이라고 써 있는 책을 집어 드는 수정,

책의 겉면을 만져보고 속지를 펼치면 <이수정 씨에게, 2003년 5월 4일, 한재석>이라고 쓰여 있다.

수정, 잠시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들고 버튼을 누른다.

 

수정 : …저예요. 통화, 괜찮아요? (사이) 네. 지금 책 정리 하는 중이에요. 근데 그거 알아요?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작년 5월 4일이라는 거. (사이, 웃음) 나도 지금 알았는데요 뭐. (사이) 그럴래요? 더 늦어도 괜찮아요.

         나도 오늘 안으로 끝내야 할 일이 있어요. (사이)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독일의 젊은 작가들 단편집이라고.

         (사이, 미소) 네,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고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는 수정.

가운데 거실과 주방이 있고 각각 창이 나 있다. 거실 창 밖으로는 마당이 보인다.

거실 양쪽으로 방문이 있고 수정의 방문은 열려 있다.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가구들과 짐들이 보인다.

수정, 맞은편 방 쪽으로 걸어가서 닫혀 있는 방문을 연다. 붙박이장 하나가 있는 완전히 텅 비어 있는 방.

타이틀 롤.

 

 

#2. 수정의 방, 밤

 

(시간의 경과, 저녁 9시 정도)

책상, 노트북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 수정. 한쪽에 원서가 놓여 있고 커다란 사전이 펼쳐져 있다.

원서를 보고, 사전을 찾는 수정. 다시 모니터를 곰곰이 들여다본다.

그러나 일이 잘 안 되는 듯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 자꾸 멈추고 시계를 보다가 일어나서 창 밖을 멍하니 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서 일을 하려고 하는데 딩동딩동, 벨소리.

수정,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간다.

 

 

#3. 수정의 집, 현관, 밤

 

수정,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현관문을 벌컥 열며

 

수정 : 어떻게 찾았어요? 생각보다 빨리…

 

하는데, 문을 열면 서 있는 사람은 지유. 앳된 아이 같은 얼굴과 모습.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다.

깜짝 놀란 수정.

 

수정 : …누구세요?

지유 : 룸메이트를 구한다고 해서… 정희 누나 소개로…

수정 : 에에? 난 당연히 여자라고… 정희가 그런 말은… (하면서 당황한다)

지유 : (같이 당황한다) …전, 얘기가 다 됐다고 해서…

 

지유와 지유의 큰 가방을 보는 수정. 잠시 망설이다가

 

수정 : …일단 들어와 봐요.

 

 

#4. 수정의 집, 주방, 밤

 

지유, 식탁 앞 의자에 앉아 있고 수정,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고 있다.

거실 책장 옆에는 분류만 해놓고 꽂지는 않은 책들이 쌓여 있다.

 

수정 : (사이) 아… 정희 핸드폰 아닌가요? (사이) 어머, 안녕하세요? 저 정희 친구 수정이에요. 결혼식 때 뵀는데…

         (사이) 예? 아르헨티나요? 아, 맞다, 정희 부모님이 거기 계시죠… 혼자 갔어요? (사이) 네에… 언제 와요?

         (사이) 네, 그럴게요. 안녕히 계세요.

 

수정, 전화를 끊고 지유를 한 번 보고 지유의 맞은편에 앉는다. 식탁에 마주 앉은 수정과 지유.

 

수정 : (지유를 찬찬히 보며) …학생이죠?

지유 : 네.

수정 : 그럼… 몇 살?

지유 : 스물세 살입니다.

수정 : 그렇구나… (약간 안심을 하며, 혼잣말처럼) 나랑 아홉 살 차이네…

지유 : …

수정 : 정희랑은 어떻게 알아요?

지유 : 친구 누난데…

수정 : …정말 곤란하네.

지유 : 안 될까요?

수정 : …당장 룸메이트가 필요한 상황이긴 한데…

지유 : 다른 곳을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수정 : 하지만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고…

지유 : 가능하면 눈에 안 띄도록…

수정 : …그런데 지금 방학 아닌가? 집에 안 내려가요?

지유 :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수정 : (생각한다) 혹시, 어디서 만나지 않았나요? 우리?

지유 : 아뇨.

수정 : …이름이…?

지유 : 지유, 라고 합니다. 정지유.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정 : …난 이수정이에요. (사이) 방은 저쪽인데… (하데, 전화가 울린다) 잠깐만.

 

수정,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잠시 후, 전화기를 들고 나오는 수정.

 

수정 : (전화기에 대고) 네, 거기서 우회전하면 돼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 (전화를 끊고 지유에게) 잠깐 나갔다 올게요.

지유 : 저… 목욕탕 좀 써도 되나요?

수정 : 아… 그래요.

 

하고 수정, 서둘러 밖으로 나간다.

 

 

#5. 수정의 집 앞, 밤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정. 수정의 뒤로 열린 대문이 보이고 그 너머에 작은 마당, 그 뒤로 불빛이 비치는 수정의 집.

모퉁이를 돌아 차 한 대가 수정의 집 앞으로 온다. 수정, 차 쪽으로 다가가며 손을 흔든다.

수정의 앞에 멈추는 차. 운전석의 유리창이 내려가고 안에 타고 있는 재석(40대 초반)의 모습이 보인다.

 

재석 : 이 집이야? (하고 내다본다)

수정 : (혹시라도 재석이 지유를 볼까 싶어, 서둘러) 네. (대답하고 재석의 시야를 가리며 가까이 다가간다)

재석 : 차는 어디 대지?

수정 : 오늘은 안 되겠어요. 룸메이트가 들어왔거든요.

재석 : 룸메이트? 아깐 그런 말 안 했잖아.

수정 : 여하튼 왔어요.

재석 : 그럼 어쩌지? 어디 가서 저녁 먹을까?

수정 : 저녁을 안 먹었어요? 이 시간까지?

재석 : 같이 먹을려고 그랬지.

수정 : …그냥 집에 가서 먹어요, 오늘은.

재석 : …알았어.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는 재석.

 

수정 : 전화해요.

재석 : (생각났다는 듯이) 아참, 수정아, 이거. (하고 옆자리에 있던 작은 박스를 수정에게 건넨다) 이사선물.

수정 : (받으며) 뭔데요?

재석 : 가서 풀어 봐. (하고 가려는데)

수정 : (미안해진다) …조심해서 가요.

 

재석의 차가 떠난다. 골목길을 돌 때까지 보고 있는 수정.

재석이 사라지고 박스의 뚜껑을 열면 겉면이 가죽으로 된 독특한 수공예 노트.

 

 

#6. 수정의 집, 거실, 밤

 

수정, 안으로 들어온다. 지유는 없고, 목욕탕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지유의 방, 불이 켜져 있고 문이 반쯤 열려 있다. 그 안에 지유의 큰 가방이 보인다.

수정, 어쩌지, 하고 지유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수정의 전화가 울린다.

 

수정 : (전화를 받고) 아, 미경아. (사이) 응, 잘했어. (사이) 그럼. 이런 집에서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잖아. (웃음)

         정원은 뭐… 손바닥만한데. 꽃이 어딨어. 아참, 아까 낮에 보니까 옆집 정원에 다알리아가 엄청 폈어. (사이, 웃음)

         그럼, 그게 내 정원이지 뭐. (사이, 목욕탕 쪽을 보고) 응… 들어왔어. (사이, 목소리를 낮추고) 아직 잘 모르지 뭐.

         나중에 얘기해. (사이) 응, 전화할게.

 

통화가 끝날 때까지 지유는 나오지 않고 수정, 잠시 서성이다 방으로 들어간다.

 

 

#7. 수정의 방, 밤

 

방으로 들어와 잠시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잠근다. (가능하면 소리 내지 않고)

책상 앞에 앉는 수정. 재석이 주고 간 선물을 다시 꺼내보는 수정.

 

 

#8. 수정의 집, 밖, 낮 (다음 날)

 

수정의 집 외관. 마당과 집이 보인다.

자명종 소리가 울린다.

 

 

#9. 수정의 방, 낮

 

자고 있던 수정, 자명종 스위치를 누른다. 시계는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뜨는 수정.

 

 

#10. 수정의 집, 거실, 점심 즈음

 

수정, 방문을 열고 나온다. 막 일어난 듯한 모습.

나오다가 깜짝 놀란다. 전 날까지 엉망이던 거실이 완벽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거실에 흩어져 있던 책들은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고 소품들도 제자리를 잡았고

벽에는 액자가 걸려 있고 부엌도 완벽하게 정리정돈. 지나치다 싶을 만큼 깔끔하다.

수정, 책장으로 가서 책들이 어떤 방식으로 꽂혀 있는지 살펴보는 듯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본다.

그런데 책이 기묘한 방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수정,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때 갑자기 수정의 등 뒤에서

 

지유 : …맘에 안 드세요?

 

깜짝 놀란 수정, 돌아보면 지유가 서 있다.

 

수정 : 아… 안 나갔어요?

지유 : …말씀 낮추세요.

수정 : …언제, 했어? 이거…

지유 : 오전에요.

수정 : 그래… 고마워. 그런데 무슨 기준으로 분류한 거야?

지유 : 색깔.

 

수정, 다시 책장을 본다. 그러고 보니 장르, 작가, 책의 크기 등은 다 무시하고

세네카의 색깔이 연한 것부터 진한 것 차례로 꽂혀 있다.

(제일 윗칸에서부터 하얀 색 계통, 다음 칸은 베이지, 노랑, 오렌지, 연두, 초록, 파랑, 검정, 이런 순서로)

 

수정 : 처음 봤어. 이렇게 분류하는 사람은…

지유 :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수정 : 아냐, 보기 좋은데 뭐. 재밌어. 그런데 책 찾기가 좀 힘들겠네.

지유 :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하세요, 찾아드릴게요.

수정 : 다 기억해? 이걸?

지유 : 아마.

수정 : (놀랍다는 듯 지유를 본다)…

지유 : 식사하세요, 전 먹었거든요.

 

지유, 주방 쪽으로 가서 냄비가 올려져 있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밥솥에서 밥을 푼다.

 

수정 : 밥을 했어?

지유 : 네. (익숙하게 식탁을 차린다)

수정 :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지유 : 대충 했어요. 드세요.

 

수정, 난감한 채 식탁에 앉는다. 식탁에는 꽃(다알리아) 한 송이, 물 컵에 담겨 있다.

 

수정 : 미안해지네… 여러 가지로.

지유 : 일인분이나 이인분이나, 어차피 만드는 건 똑같아요.

수정 : (식탁의 꽃을 보며) …이거, 어디서 났어?

지유 : 옆집 정원에서.

수정 : 그래?… 후후.

지유 : 전 슈퍼에 갔다 올게요.

수정 : …슈퍼?

지유 : 필요한 것 좀 사려구요. 당장 먹을 것도 없고.

수정 : 그럼 내가… (하고 일어나는데)

지유 : 돈은 나중에 주세요. 생활비는 반씩 부담하는 걸로 하고. 괜찮죠?

수정 : 응… 근데 슈퍼 어딘 줄 알아?

지유 : 알아요.

 

지유, 밖으로 나가다가

 

지유 : 아, 설거지는 그냥 놔둬요. 다녀와서 할게요.

 

지유, 나가고 기분이 좋은 수정, 앞에 차려진 정갈한 식탁을 바라보다 수저를 든다.

 

 

#11. 수정의 집, 몽타주 (시간의 경과)

 

(#1, 수정의 집, 주방)

한쪽에 식료품들이 가득 쌓여 있고 누군가 그것을 정리하고 있다.

생선, 고기 등의 포장을 익숙하게 벗겨낸 다음 비닐지퍼백 안에 2인분 정도씩 나눠 넣고

그렇게 한 것들을 플라스틱 통에 다시 차곡차곡 넣는다.

바나나, 망고 등 과일은 껍질을 벗기고 역시 비닐지퍼백 안에 넣는다.

레몬은 슬라이스해서 통에 차곡차곡 담는다. 야채는 잘 손질해서 플라스틱 통에 담는다.

그렇게 정리한 것들을 종류에 따라 냉동고와 냉장실에 차곡차곡 나눠 넣는다.

(고기, 생선, 과일은 냉동고, 야채와 소스류는 냉장실)

 

(#2, 수정의 집, 마당)

정원을 손질하고 있는 지유.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수정.

수정이 뭔가 도우려고 하면 지유가 말리고. 둘이 서서 이야기를 하고, (즐거운 분위기)

수정, 마당 한쪽을 가리키며 (여기 이런 게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지유, 고개를 끄덕이고.

 

(#3, 수정의 집, 마당)

지유, 나무판을 잘라서 뭔가를 만들고 있다. 한쪽에는 완성된 의자 두 개가 보인다.

 

(#4, 수정의 집, 마당)

수정이 가리키던 곳에 나무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12. 수정의 집 앞 - 집 근처, 밤 (새벽 2시 경)

 

수정의 집 앞, 어둠 속에 재석의 차가 서 있다. 차안에서 키스를 하고 있는 두 사람.

잠시 후, 수정, 더 이상은 싫다는 듯 몸을 빼내면 재석, 수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재석 : …룸메이트는?

수정 : 집에 있을 거예요.

 

재석,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 기어를 넣고 차를 출발시킨다.

 

수정 : 어디 가요?

재석 : 같이 있자.

수정 : 세워요.

 

재석, 그대로 가는데.

 

수정 : (단호하게) 세우라고 했잖아요.

 

재석, 수정의 기세에 눌려 차를 세우고 수정을 본다.

 

수정 : …호텔은 안 가요.

재석 : …왜?

수정 : 싫어요. 창녀가 된 기분이 들거든요.

재석 : 무슨 소리야?

수정 : …내가 샤워하고 나오면, 항상 옷을 입고 있잖아요.

재석 : …그럼 어떡해. 거기서 잘 순 없잖아.

수정 : 그래서 싫다는 거예요. 그걸로 볼일 다 봤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재석 : …아니란 거 알잖아.

수정 : …가요, 들어갈게요.

재석 : …집 앞에 내려줄게. (하고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수정 : 그냥 여기서 내릴게요.

 

수정, 차에서 내려서 빠른 걸음으로 돌아간다.

재석, 잠깐 있다가, 떠난다.

 

 

#13. 수정의 집 앞, 밤

 

집 앞에 온 수정, 가방을 뒤져 열쇠를 찾는데 없다. 난감하다, 시계를 보면 새벽 두 시. 문을 밀어보지만 닫혀 있다.

담을 넘어야 하나, 하고 가늠해보는데 갑자기 문이 덜컹, 하고 열린다. 지유가 서 있다.

깜짝 놀란 수정.

 

 

#14. 수정의 집, 마당, 밤

 

지유, 수정이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비킨다.

 

수정 : …미안해, 열쇠를 놔두고 나갔나 봐.

지유 : 네.

 

지유의 한 손에 호미 같은 것이 들려 있다. 놀란 수정.

 

수정 : …뭐야?

지유 : 잡초가 많아서요.

수정 : 왜… 밤중에?

지유 : 낮엔 너무 더우니까.

수정 : 그래…

 

지유, 그대로 가만히 서 있고 수정, 어색한 채로 지유의 곁을 지나쳐서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수정의 뒤에 대고

 

지유 : 불륜인가요?

 

수정, 흠칫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지 않은 채로

 

수정 : 뭘 본 거야?

지유 : 별로.

수정 : …사생활에는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지유 : 그러죠.

 

집으로 들어가는 수정.

손에 낫을 든 채 수정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 지유.

 

 

#15. 수정의 집, 거실, 밤

 

수정, 거실로 들어와서 가방을 던져놓고 뭔가 마시려고 냉장고로 가다가 식탁 위에 놓인 펼쳐진 노트를 본다.

가까이 가 보면 수입과 지출 내역이 상세히 적혀 있고 전기세 등 세금고지서의 영수증이 붙어 있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몇 장 넘겨보는 수정.

문이 열리고 지유가 들어온다. 조금 미안해진 수정, 지유를 돌아보지 않고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본다.

 

수정 : 시장 갔다 왔어?

지유 : 뭐 찾아요?

수정 : 마실 거…

 

지유, 냉장고 쪽으로 와서 주스를 꺼내려는데 수정, 그 옆에 놓인 맥주를 본다.

 

수정 : 맥주, 샀어?

지유 : 아. 가끔 밤에 사러 나가는 것 같아서.

수정 : 어떻게 알았어?

지유 : 뭘요?

수정 :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지유 : 왜 몰라요. 같이 사는데.

수정 : (웃음, 캔 하나를 꺼내며) 너도 마실래?

지유 : 그러죠.

 

수정, 캔 두 개를 꺼내어 식탁에 놓고 싱크대나 서랍 등을 열어보는데

지유, 다른 곳에서 컵을 꺼내고 식탁에 냅킨을 깔고 그 위에 컵을 놓고 간단한 안주(땅콩, 크래커 같은)를 꺼낸다.

 

 

#16. 수정의 집, 거실, 밤 (시간의 경과)

 

식탁, 수정과 지유가 마주앉아 있고 위에는 맥주 캔들, 간단한 음식이 놓여 있다.

식탁 한쪽, 수정의 옆에 재석이 준 노트가 보인다.

수정, 얼굴이 빨개져서 정신 나간 애처럼 웃고 있다.

지유, 수정을 빤히 보고 있다.

 

지유 : 뭐가 그렇게 웃겨요?

수정 :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응, 웃겨.

지유 : 취하셨어요.

수정 : 그런가 봐. (웃음)

 

웃음을 그친 수정, 좀 우울한 표정.

 

지유 : 음악이라도 틀까요?

수정 : 아참, 엘리엇 스미스 시디, 안 보이던데 혹시 못 봤어?

 

지유, 일어나서 CD장에서 CD를 하나 금방 꺼내어 오디오에 넣는다. 음악이 흐른다.

 

수정 : 난 아무리 찾아도 없던데…

지유 : (웃으며) 어제도 들어놓고… (하고 CD 케이스를 수정에게 건넨다)

수정 :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이 사람은 왜 자살 같은 걸 했을까? 총이었어?

지유 : 칼이었죠. 8인치짜리 부엌칼.

수정 : 아… 끔찍해. (하고 CD 케이스를 밀어놓는다)

 

지유, 자리에 앉으며 친절한 미소를 짓는다.

 

수정 : 근데 이러다 너 없으면 나,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거 아냐? (하고 조금 쓸쓸한 미소를 짓는다)

지유 : …(수정을 빤히 본다)

수정 : (분위기가 어색해지니까) 네 여자친구는 참 좋을 거 같아.

지유 : 여자친구 없어요. (사이) …왜 그렇게 힘든 연애를 해요?

수정 : …왜 그렇게 생각해?

지유 : 그냥, 힘들어보여서요.

수정 : 내가?

지유 : 네.

수정 : …(말을 하고 싶다, 해도 될까?)

지유 : 나 때문에 불편하지 않아요?

수정 : 아니.

지유 : 줄곧 밖에서 만난 거죠?

수정 : 그래.

지유 : 혹시, 일부러 룸메이트를 구한 건가요?

수정 : 맞아.

지유 : 뭐랄까, 이를테면…

수정 :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 정부가 되는 것 같아서 말야.

지유 : 그 사람도 알아요? 그런 생각 하고 있단 걸?

수정 : 글쎄.

지유 : …후회는 안 해요?

수정 : 모르겠어.

지유 : 필요하면 얘기해요, 언제라도. 집을 비워줄 테니까.

수정 :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지유 :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잠시 침묵.

 

수정 :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불륜은 어떻게 끝나는 줄 알아?

지유 : …

수정 : 갈 데까지 간 다음에,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고, 몸과 마음이 다 지쳐서, 이젠 아무렇게나 돼도 상관없어,

         그런 생각이 들 때 끝나는 거야.

지유 : …경험이 있나 보군요.

수정 :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글쎄.

지유 :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죠?

수정 : 어떻게도 안 돼. 아니, 안심이 되지. 난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구나… 헤어질 때마다 그렇게 괴롭지 않아도

         되는구나… 혼자서 외로워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제 드디어 자유로워졌구나. (쓸쓸한 미소가 어린다)

지유 : …외로워요?

수정 : (미소를 지으며) 지유야.

지유 : 네.

수정 : 내가 왜 너한테 이런 소릴 하고 있지?

지유 : 외로운가 보죠.

 

수정,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정 : 같이 치우자.

지유 :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혼자 하는 게 빨라요. 그리고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지 않아요? 출판사와 약속 있다면서요.

수정 : (갑자기 생각난 듯) 아! 잊고 있었어…

지유 : 깨워드릴게요.

수정 : 고마워… 먼저 들어갈게.

지유 : (노트를 건네며) 이거.

수정 : 아…

지유 : 보기 드문 노트네요.

수정 : 응…

지유 : 양가죽이군요.

수정 : 보면 알아?

지유 : 알죠.

 

수정, 미소 짓고, 방으로 들어간다.

지유, 어지러운 식탁을 가만히 보다가 일어나서 맥주 캔을 찌그러뜨린다.

주방 쪽 창문 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7. 수정의 집, 실외, 밤

 

수정의 집 위로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거실 창에 부딪치는 빗줄기.

 

 

#18. 레스토랑, 낮 (다음 날)

 

비가 내리고 있다. 레스토랑 창가 자리, 재석과 수정이 앉아 점심을 먹고 있다.

 

재석 : 입금되려면 아직 멀었다면서, 무리하는 거 아냐?

수정 : 후후. 일은 끝났잖아요. 축하해야지.

재석 : 책은 언제 나와?

수정 : 글쎄요, 2주일쯤 걸리겠죠? 어차피 읽지도 않으면서 뭘.

재석 : 재미있는 건 읽어.

수정 : 번역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고?

재석 : 이수정의 번역이야 최고지. 얼마나 정확한데.

수정 : 문장이 딱딱하다면서요?

재석 : (웃음) 그게 그렇게 마음에 남았어?

수정 : 사실인데요 뭐. …방학인데, 학교에 매일 나가요?

재석 :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수정 : …

재석 : 다음 책은 뭐야? 결정됐어?

수정 : 소설인데, 제목이 재밌어요.

재석 : 뭔데?

수정 : 로빈의 반전 없는 삶.

재석 : 재밌네.

수정 : 그쵸?

재석 : 반전이라… 그런 게 있을까?

수정 : …있길 바래요?

재석 : 바라지.

수정 : 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날 수 없단 걸 알고 있죠?

재석 : 나 그렇게 비관주의자는 아니야. (웃음)

수정 : 알아요. 비관주의자들은 진짜로 세상을 사랑하니까. 희망을 갖지 못하면, 절망도 못해요.

재석 : 내가 그렇단 얘기야?

수정 : 자기 입으로 한 말이에요.

재석 : …

 

잠시 침묵.

 

수정 : 아참, 노트, 잘 쓰고 있어요.

재석 : 아, 응. 맘에 들어?

수정 : 디자인이 특이하던데, 어디서 샀어요?

재석 : 그런 걸 만드는 사람이 있어. 한 권 한 권 손으로 다 만든대.

수정 : 그럼 그렇게 생긴 건 그거 하나밖에 없는 건가요?

재석 : 그거 만들 때, 똑같은 걸 세 권을 만들었대. 한 권은 내가 쓰고 있어.

수정 : 그럼 또 하나는 누가 갖고 있어요?

재석 : (망설이다가) 글쎄…

수정 : 몰라요?

재석 : 응.

수정 : (뭔가 생각하다가) 혹시 그거, 양가죽이에요?

재석 : 맞아.

 

잠시 끊어지는 대화.

 

재석 : …잠은 잘 잤어?

수정 : 네.

재석 : 피곤해 보이는데?

수정 : 아… 사실 집에 들어가서 맥주 좀 마셨어요.

재석 : 맥주? 혼자?

수정 : …룸메이트랑.

재석 : 그 시간에?

수정 : 그렇게 됐어요. …늦게 들어가서 곤란하지 않았어요?

재석 : 어차피 방을 따로 쓰니까… 들어온 시간은 몰라.

수정 : …늘 궁금했는데, 꼬박꼬박 들어가는 이유는 뭐예요?

재석 : 그것만은 지키기로 약속했거든…

수정 : 그러면서 밤중에 고속도로는 왜 타요? 계속 갔으면 아침까지 못 돌아왔을 거예요.

재석 : 왜 돌아가자고 했어?

수정 : 집에 들어가야 할 거 같아서… 한번도 안 들어간 적이 없었으니까…

재석 : …열심히 밟으면 갔다 올 수 있을 줄 알았지.

수정 : 그렇게 갔다 올 걸, 갑자기 바다는 왜 가자고 했어요?

재석 : …예전에 너한테 들은 말이 생각나서.

수정 : 무슨 말?

재석 : 책 한 권 끝내고 나면, 항상 후유증이 나타난다, 그래서 혼자 밤차 타고 바다에 간다…

수정 : 내가 그런 소리도 했어요? (웃음) 언제?

재석 : 내 출판기념회 때. 우리 처음 만난 날. 작년 5월이라고 했지?

수정 : 네… 맞다, 그 날 와인 때문에 횡설수설 한 것 같아…

재석 : 언젠가 데려가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수정 : …

 

침묵이 흐른다.

 

재석 : …수정아.

수정 : 네?

재석 : 집에… 룸메이트 있어?

수정 : …아르바이트 간다고 그랬어요.

재석 : 가도 돼?

수정 : …

 

 

#19. 수정의 집, 오후

 

수정의 방, 커튼이 쳐져 있고 음악이 흐르고 있다.

키스를 하고 있는 수정과 재석. 등등.

 

 

#20. 수정의 집 앞, 오후

 

비가 내리고 있는 골목길. 우비를 입은 지유, 골목길을 돌아 집으로 오고 있다.

문 앞에 세워진 재석의 차를 발견한다. 그것을 유심히 보는 지유.

 

 

#21. 수정의 집, 마당, 오후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지유. 수정의 방에서 지나치게 큰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지유, 얼굴을 찌푸리고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다.

 

 

#22. 수정의 집, 현관, 오후

 

현관에 놓여 있는 재석의 신발.

지유, 거치적거린다는 듯 그것을 툭 차서 한쪽으로 밀고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선다.

잠시 서서 닫혀 있는 수정의 방을 가만히 본다. 표정은 읽을 수 없다.

 

 

#23. 수정의 집, 거실, 오후

 

수정, 반쯤 벗은 차림, 헝클어진 머리카락, 상기된 얼굴, 한 손에는 옷을 들고 방에서 나온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다. 수정, 목욕탕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에 바지와 러닝셔츠 차림의 재석, 거실로 나와 컵을 찾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 컵에 따라 마신다.

컵을 식탁 위에 놓고 고개를 들면 지유, 자신의 방문에 기대어 가만히 서서 재석을 보고 있다.

화들짝 놀란 재석. 몹시 당황한다.

 

지유 : 오랜만이네요. …선생님.

 

 

#24. 수정의 집, 목욕탕, 오후

 

샤워를 끝낸 수정, 옷을 입고 있다.

 

 

#25. 수정의 집, 거실, 오후

 

지유, 혼자 식탁에 앉아 있다. 아주 묘한 표정이다.

식탁 위에는 빈 컵이 놓여 있다.

목욕탕에서 나온 수정, 지유를 보고 깜짝 놀란다.

 

지유 : …왜 그래요?

수정 : …아냐. 언제 왔어?

지유 : 금방.

 

수정, 지유의 시선을 피하며 도망치듯 황급히 방으로 들어간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지유.

 

 

#26. 수정의 방, 오후

 

방 안으로 들어온 수정. 재석은 없다. 당황한 수정, 다시 나가려다가 멈칫, 하고 선다.

핸드폰을 드는 수정.

 

 

#27. 재석의 차 안 - 거리, 오후

 

비가 세차게 내리는 거리. 재석의 차 안, 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다.

재석, 받지 않은 채 뭔가 다른 생각에 빠져 멍한 표정으로 운전을 하고 있다.

재석의 차, 물보라를 튀기며 빠른 속도로 거리를 달린다.

 

 

#28. 수정의 방, 오후 - 저녁

 

수정, 핸드폰을 든 채. 한참 기다리다가 다시 버튼을 누르고.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받지 않는다.

불안한 수정의 얼굴.

비는 계속 내리고, 날이 어두워진다.

 

 

#29. 대학, 교수실들이 줄지어 있는 복도, 오후 (이틀 후)

 

재석, 피로한 얼굴로 걸어온다. 자신의 방 앞에 서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꽂는데, 문이 그냥 돌아간다. (이미 열려 있다)

의아한 재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재석의 자리에 지유가 앉아 있다.

놀란 재석, 지유를 가만히 본다. 서로를 보며 잠시 침묵.

 

지유 : …어서오세요. …선생님.

재석 : 어떻게 들어왔어?

지유 : 배운 게 많죠, 그동안.

재석 :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지유, 슬픈 듯한 표정으로 재석을 가만히 보다가 의자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방 안을 걸어 다닌다.

 

지유 : 별로, 바뀐 건 없군요. 일 년도 훨씬 지났는데. (하고 책꽂이를 유심히 보다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꺼내들고 뒤적인다)

재석 : …너, 왜… (하려는데)

지유 : (어느 한 페이지를 읽는다) 한번, 모든 것은 단 한번 존재할 뿐. 한번 그리고 다시 오지 않는다, 우리도 한번 존재하노니

         결코 다시 시작되는 법이 없다, (책을 덮고 재석을 보며 계속, 외운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존재했다는 것,

         오직 한번 지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하고 기다린다)

재석 : (사이) …되물릴 수 없으리라.

지유 : 수십 번 되풀이해서 읽었죠, 우리 둘이서.

재석 : …

지유 : 왜 이런 걸 아직도 갖고 있죠? 나에 대한 건 전부 지워버리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하고 책을 제자리에 꽂고, 다시 책꽂이를 뒤지다가 <독일 문학에 나타난 상징과 은유>에 시선이 머문다)

재석 : …(지유를 가만히 보고 있다, 불안한 채)

지유 : 작년 출판기념회였죠? 그 여자를 만난 게. 낯이 익더군요.

재석 : …

 

지유,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지유 : 오늘은 인사만 해두죠. 그럼 다음에 또.

 

지유, 문을 여는데

 

재석 : 지유야… (하고 말을 하려는데)

지유 : (말을 끊으며, 뒤를 돌아보며) 한 가지만 말할게요. 지금은, 내가 유리한 입장이란 걸 잊지 말아요. …선생님.

재석 : …

지유 :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재석,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지유, 그대로 나간다.

 

 

#30. 수정의 집, 거실, 저녁

 

어둡다. 거실 한쪽에 놓여 있는 소파 하나.

수정,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앉아 손에 든 핸드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off 버튼을 누른 다음, 다시 통화 버튼,

신호가 한참 가다가, 다시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off 버튼을 누른 다음,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는데

현관문이 열리고 지유가 들어온다. 거실의 불을 켜고 수정을 발견한다.

 

지유 : 불도 안 켜고 뭐해요?

수정 : …

지유 : 무슨 일, 있어요?

수정 : …

지유 : (주방으로 가며) 배고프죠?

수정 : …

지유 : 점심은 먹었어요?

수정 : …

지유 : 조금만 기다려요. 뭐라도 만들 테니까.

 

수정, 대답 없다.

지유, 냉장고에서 이것저것을 꺼내고 수정을 돌아보면 수정,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다.

지유, 싱크대에서 캔 하나를 꺼낸다.

 

지유 : 잠깐 와볼래요?

 

수정, 고개를 들고 지유를 본다.

 

지유 : 와서 이것 좀 따 봐요. 난 양파 썰어야 하니까.

 

하고 지유, 수정의 대답을 듣지 않고 돌아서서 양파를 손질한다. 칼질하는 소리.

수정, 천천히 일어나서 식탁에 앉아 캔을 가만히 보다가 그것을 집어 뚜껑을 따는데

반쯤 따진 뚜껑의 날카로운 면에 손가락을 벤다. 아, 하고 수정이 소리를 낸다.

지유, 돌아보고 수정에게로 가서 휴지로 수정의 손가락을 감싼 다음 수정의 다른 손으로 그것을 꼭 쥐고 있게 하고

자신은 방으로 들어가서 연고와 밴드를 가지고 다시 나온다.

수정의 손가락에 약을 바르고 꼼꼼하게 밴드를 붙여주는 지유.

 

지유 : 어째 그거 하나 못 따요?

수정 : …

지유 :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으니까 그렇죠.

수정 : (가까스로 입을 연다) …지유야.

지유 : 얘기해요.

수정 : 저기…

지유 : …

수정 : 미안한데…

지유 : 뭔데요?

수정 : …전화 …좀 해줄래?

지유 : 어디에?

수정 : …

 

지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핸드폰을 가지고 나와 수정에게 내민다.

수정, 힘겹게 버튼을 하나하나 누른다. 그리고 지유에게 건네준다.

 

지유 : (사이, 제법 시간이 흐른다, 전화를 받은 듯) 이수정 씨 룸메이트입니다. (사이) 네, 그렇게 전해드리죠.

 

지유, 전화를 끊는다. 불안한 얼굴로 지유를 보고 있는 수정.

 

지유 : 전화, 하겠대요. 내일 아침에.

수정 : …(실망한 표정을 애써 감춘다)

 

지유, 수정을 가만히 보다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 컵에 따라 수정 앞에 놓아준다.

 

지유 : 마시고 있어요. 밥 생각은 없을 테니까, 간단하게 안주거릴 만들게요.

 

지유, 다시 주방에서 음식을 하고 수정, 지유가 두고 간 컵을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싸 쥔다.

 

 

#31. 수정의 집, 마당, 오후 (다음 날)

 

지유, 마당 한 구석의 흙을 파고 있다. 수정, 현관에서 나오다가 지유를 발견한다.

 

수정 : 뭐 해?

지유 : …뭘 좀 심으려구요.

수정 : …뭘?

지유 : 이것저것. 먹을 수 있는 걸로. 괜찮죠?

수정 : 응… 나 좀 나갔다 올게.

지유 : 네.

 

수정, 나가려는데

 

지유 : 오늘 저녁은 마당에서 먹을까요?

수정 : …늦을지도 몰라.

지유 : …참, 전화는 왔어요?

수정 : …

 

그대로 나가는 수정.

 

 

#32. 대학, 캠퍼스, 주차장, 오후 - 저녁

 

여름방학 중인 캠퍼스. 드문드문 학생들이 보인다.

교직원용 주차장, 수정, 주차장의 차들 사이를 걷고 있다. 손에는 take-off에서 산 아이스커피가 들려 있다.

수정, 재석의 차를 발견하고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학교 건물이 있는 쪽을 보는 수정. 차 옆에 한동안 서 있다가 재석의 차와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앉는다.

커피의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시고 바닥에 내려놓는다. 무릎을 감싸 안고 가만히 앉아 있다.

시간의 경과. 해가 저물고 있다.

수정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옆에 놓인 컵에 든 커피는 조금도 줄지 않은 채, 그 위에 작은 나뭇잎 같은 게 떠 있다.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고 있는 수정. 앞에, 그림자 하나.

수정, 고개를 들면 재석이 서 있다.

 

재석 : 뭐하는 거야, 여기서?

수정 : 전화가 안 돼서요. …어제부터.

재석 : …타.

 

수정, 대답 없이 타를 타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재석의 차.

 

 

#33. 재석의 차 안, 저녁

 

재석, 운전을 하고 있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

침묵을 깨고 갑자기 울리는 재석의 전화. 재석, 전화를 받지 않는다.

 

수정 : 받아요.

 

재석, 마지못해 전화를 받는다.

 

재석 : 네. (하더니 표정이 변한다, 사이) 그래. (사이) 알았어. 그렇게 하지.

 

전화를 끊는 재석. 의아하게 재석을 바라보는 수정. 외면하고 앞만 보고 있는 재석.

 

수정 : 어디 가는 거예요?

재석 : …어디 가고 싶은데?

수정 : 별로…

재석 : 차나 한잔 마시자.

수정 : …누구 전화예요? 집?

재석 : 아냐.

수정 : 그럼?

재석 : …몰라도 돼.

수정 : 또 있어요? 나 말고 다른 여자가?

재석 :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야?

수정 : …(외면하고, 밖을 본다)

 

재석,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한다.

 

 

#34. 수정의 집 앞, 저녁

 

재석의 차, 골목길에 서 있다. 차 안에 있는 두 사람. 싸운 사람들처럼 굳은 표정이다.

 

재석 : …너 왜 이래?

수정 : 내가 뭘 어쨌는데요.

재석 : 이러지 마, 힘들어.

수정 : 나보다 더 힘들어요?

재석 : …(타이르듯) 수정아.

수정 : …

재석 : 들어가.

수정 : …그냥 가게요?

재석 : 아무 데도 가기 싫다며. 카페도 싫고 레스토랑도 싫고.

수정 : …마음이 변하거나, 평생 이렇게 살거나, 둘 중 하나겠죠?

재석 : 왜 항상 그렇게 극단적으로 얘기해?

수정 : 우리 미래에 반전은 없으니까.

재석 :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잖아.

수정 : 그랬죠. 같이 있는 것만으로 좋았으니까.

재석 : 지금은?…

수정 : 모르겠어요. 같이 있을 때도, 떨어져 있을 때도, 행복하질 않아요.

재석 : …

수정 :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귀찮아질 거예요.

재석 : 그렇지 않아…

수정 : 예전에는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몇 번씩이나 다짐했지.

재석 : …오늘은 그만 하자.

수정 : 그 날, 어떻게 된 거예요?

재석 : …언제?

수정 : 우리 집에 왔던 날.

재석 : 갑자기 일이 생겨서 급하게 가야 했어.

수정 : 근데 전화는 왜 안 받았어요?

재석 : 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어.

수정 : 이틀 동안이나 내내?

재석 : …

수정 : 내가 전화했다는 건 알았을 거잖아요?

재석 : …그렇게 됐어.

수정 : …우리, 일 년쯤 됐나요?

재석 : …

수정 : 식을 때도 됐군요.

재석 : …뭐가?

수정 : 열정이라거나, 그런 거.

 

수정, 싸늘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재석 : (망설이다가) 수정아.

수정 : 왜요?

재석 : …룸메이트, 친구가 소개해줬다고 했지?

수정 : (철렁, 불안하다) …왜요?

재석 : 괜찮아? 같이 사는 거.

수정 : …좋아요, 마음도 맞고.

재석 : 그래?…

수정 : 의지도 되고.

재석 :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군.

수정 : …

 

수정, 차에서 내린다.

 

 

#35. 수정의 집, 거실, 저녁

 

수정,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어둡다.

거실 중앙, 의자 위에 올라가 형광등을 갈고 있는 지유.

의자에서 내려온 지유, 수정을 보고 형광등 스위치를 올린다. 밝아지는 실내.

 

수정 : 형광등이 나갔어?

지유 : 네, 며칠 전부터 깜박거렸잖아요. 밥은 먹었어요?

수정 : …아직.

지유 : 앉아요.

 

수정, 식탁 앞에 앉고 지유, 식탁을 차린다.

 

지유 : 피곤해보이네요.

수정 : 조금.

지유 : 책을 여러 권 내셨대요. 책장에 있길래 읽었는데, 괜찮죠?

수정 : 그랬어? 어떤 걸 봤는데?

지유 : 전부.

수정 : (놀란다) 전부?

지유 : 있는 건 다 봤어요.

수정 : 전문서적들도 있을 텐데.

지유 : 재밌었어요. 말 안 했던가요? 저 독문과잖아요.

수정 : 아, 그랬어?

 

지유, 수정 앞에 냄비를 놓아주고 맞은편에 앉고 수정, 밥을 먹는다.

 

지유 : 잘 읽히던데요. 모호한 표현도 없고.

수정 : 문장이 딱딱하지 않아?

지유 : 전 그런 게 좋아요. 괜히 멋 부리는 것보다.

수정 : 다행이네…

지유 : 그런 소리 많이 듣지 않아요? 원작에 가장 충실한 번역이라고.

수정 : 후후.

지유 : 많이 고치는 편인가요?

수정 : 여러 번 읽고, 여러 번 고치고, 고친 다음에 다시 읽고. 원작자의 의도가 뭔가, 생각하고.

지유 : 힘든 일이네요.

수정 : 그래도 분명한 텍스트가 있으니까, 시간과 인내만 있으면 해결되는 일이잖아.

지유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수정 : 응.

지유 : 밥 먹고 영화 봐요. 지난번에 보고 싶다고 한 거, 구했어요.

수정 : (놀란다) 어떻게 구했어?

지유 : 시간과 인내만 있으면 해결되는 일이죠. (미소)

수정 : …(미소를 짓는다) 내일은 진짜 마당에서 먹자. 테이블 한 번도 못 썼네.

지유 : 그러죠. 낮엔 좀 더우니까, 저녁에.

 

 

#36. 수정의 집, 거실, 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있는 두 사람. 오누이처럼, 연인처럼, 가족처럼 다정한 모습.

(시간의 경과)

수정, 지유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수정의 자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지유.

수정, 꿈을 꾸는지 뒤척이다가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지유,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수정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지유의 얼굴에 연민 같은 것이 살짝 어린다.

지유, 조심스럽게 수정을 안아 방으로 데려간다.

 

 

#37. 수정의 방, 한밤중

 

캄캄하다. 침대에서 자고 있는 수정.

후드득, 하는 빗소리가 들리고 세찬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요란한 천둥과 번개.

그 소리에 잠에서 반쯤 깬 수정, 머리맡의 시계를 보기 위해 스탠드를 켠다. 2시 47분.

수정, 몸을 일으키는데 대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 그리고 갑자기 불꽃이 일면서 스탠드가 꺼진다.

침대 옆 화장대의 서랍을 열고 뒤져서 작은 손전등을 찾아내어 그것을 들고 방을 나가는 수정.

어른거리는 손전등의 그림자.

 

 

#38. 거리, 밤

 

비가 내리고 있다. 인적은 없다.

우비를 입고 걸어가는 지유. 세찬 비바람이 지유에게 불어 닥친다.

 

 

#39. 수정의 집, 거실, 밤

 

캄캄한 거실, 손전등 불빛.

수정, 불빛에 의지해 지유의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린다.

 

수정 : (무섭다) 지유야, 지유야…

 

대답이 없다.

 

수정 : (조금 더 세게 두드리며) 일어나 봐, 정전인가 봐… 지유야.

 

대답이 없다.

수정, 방문을 열어 본다. 지유는 없다.

 

 

#40. 바, 밤

 

심야의 바. 손님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테이블에 둘씩 앉아 있거나, 혼자 바에 앉아 있거나.

바에 들어서는 지유의 모습이 보인다. 망설임 없이 곧장 바로 가는 지유.

재석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의 옆자리에 앉는 지유. 재석,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다. 이미 취한 모습이다.

 

지유 : 별일이네요, 선생님이 날 불러내고.

재석 : …

지유 : 이런 시간에 말이죠.

 

바텐더, 지유 앞에 잔을 놓아준다. 테이블에 있는 위스키를 잔에 따르는 지유. 마신다.

 

지유 : 여기도 오랜만이군요. 자주 왔어요?

재석 : …그때 이후로 처음이야.

지유 : 저도 그래요.

재석 : 너… 왜 수정이네 집에 있는 거지?

지유 : 룸메이트니까요.

재석 : 일부러 들어간 거지?

지유 : 글쎄요. 뭐 그런 셈이죠.

재석 : 어째서?

지유 : 궁금했거든요, 어떤 여잔지.

재석 : …

지유 : 처음엔 상상도 못했어요. 그냥 힘들어서 나랑 헤어진 줄 알았지, 여자 때문일 줄은…

재석 : 수정이 때문은 아니야. 너와 헤어진 건.

지유 : 나도 그렇게 믿고 싶은데, 타이밍이 애매해서요.

재석 : …거기 언제까지 있을 거야.

지유 :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요, 두 사람은 어떤 식으로 끝나는지.

재석 : …

지유 : 그 여자도 릴케를 좋아하나 봐요. 릴케 책은 거의 갖고 있던데.

재석 : …

지유 : 덕분에 한시도 잊어버릴 수가 없죠, 선생님을.

재석 : …

지유 : …그대들의 포옹은 거의 영원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대들이 그 놀라운 시선과 창가에서의 그리움을,

         그리고 최초로 함께 했던 그 산책을 견디어 낸다면, 연인들이여, 그때에도 그대들이 여전할까.

재석 : …

지유 : 릴케는 인간의 본질을 찾아주는 것이 고뇌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인간을 순수한 고뇌로 이끄는 것은…

재석 : …

지유 : 뭐였죠, 선생님?

재석 : 죽음.

지유 : 아직 멀었군요, 우린.

 

위스키를 비우는 지유.

 

지유 : 난 아직도 꿈을 꿔요. 선생님이 혼자 사막을 걸어가는 꿈.

재석 : …

지유 : 왜 사막 같은 곳에 가고 싶어 하냐고 내가 물었더니, 그렇게 대답했죠. 생명이 없는 곳에 가면, 외롭지 않을 거라고.

재석 : …

지유 : 그 후로 그런 꿈을 수십 번 꿨죠. 하지만 그 풍경 속에서 선생님은 늘 혼자였어요. 그리고 계속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죠.

         난 참담한 심정으로 그걸 지켜봐야만 하고. 악몽이에요.

재석 : …

지유 : 아직도 사막에 가고 싶어요?

 

침묵이 흐른다.

 

재석 : …거기서 나와.

지유 : 말해 두겠는데, 지금 내가 나오면 곤란해지는 건 그 여자예요.

재석 : 무슨 소리야.

지유 : 난 완벽한 룸메이트거든요. 그래서 그 여잔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하게 됐어요.

         나도 제법이지 않아요? 선생님한테 배운 거지만.

재석 : 목적이 뭐야?

지유 : 그 여자한테도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진짜 필요할 때 선생님은 옆에 있을 수 없다는 거.

         그리고 믿었던 사람이 어느 날 아무 설명도 없이 자신을 떠날 때의 기분도.

재석 : 설명은… 했어. 너한테.

지유 : 진실은 말하지 않았죠. 그건 죽음보다 잔인한 일이거든요.

재석 : …

지유 : 답답하지 않아요, 여기? 산책이라도 갈까요?

재석 : …

지유 : 사막은 어때요?

 

 

#41. 수정의 집, 이른 아침

 

비가 그친 아침, 거실, 수정은 식탁 위에 엎드려 있다.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몸을 일으키는 수정. 시계를 보면, 여섯 시가 지났다.

 

 

#42. 수정의 집, 마당, 아침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수정. 대문 쪽을 가만히 본다. 조용하다.

고개를 돌려 지유가 파던 구덩이를 보면 몇 그루의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43. 수정의 집, 지유의 방, 아침

 

문이 열리고 수정이 들어온다. 지유의 방 한가운데 잠시 멍하니 서 있는 수정.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책들이 쌓여 있다. 책상 서랍을 열어보려는데 잠겨 있다.

수정, 붙박이장을 열어 본다. 지유의 옷가지들이 걸려 있다.

옷가지들을 헤치다가 문득 깜짝 놀라는 수정. 아래쪽에 노트가 하나 있다. 수정이 재석에게서 받은 것과 똑같은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는 수정. 열어 본다. 노트에는 빽빽하게 일기 같은 것이 기록되어 있다.

후루룩 넘기는데 노트 갈피에 꽂혀 있는 사진 한 장. 재석과 지유의 다정한 모습.

수정, 그것을 한참 보다가 사진 뒤를 보면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에 불과하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고 쓰여 있다.

수정, 다시 앞부분을 펼쳐 노트에 쓰인 글을 읽어간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점점 변한다.

갑자기 여러 페이지를 넘기다가 제일 뒷 페이지, <나의 아름다움, 지유에게, 한재석>이라는 재석의 글씨를 발견한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난다. 깜짝 놀란 수정, 노트를 다시 덮어 넣으려는데 미처 넣기 전에 방문이 열리고 지유가 들어온다.

지유, 수정의 손에 들려 있는 노트를 가만히 본다.

 

지유 : 봤어요?

수정 : …

지유 : 잘됐군요,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수정 : …

지유 : 나가죠,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수정 : …!

 

지유, 밖으로 나간다.

 

 

#44. 수정의 집, 거실, 아침

 

수정, 지유의 방에서 나오면 지유, 거실을 오가며 이것저것 챙기고 있다. 와인과 치즈, 크래커 같은 것들.

그것들을 들고 수정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현관문으로 나가는 지유.

수정, 지유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지유가 나간 후, 황급히 나간다.

 

 

#45. 수정의 집 앞, 아침

 

대문 앞에 재석의 차가 서 있다. 지유, 트렁크에 짐을 싣고 있다. 조수석에는 재석이 타고 있다.

지유, 수정을 위해 뒷문을 열어주는데 수정, 재석을 빤히 보고 있다.

지유, 그대로 운전석에 탄다.

 

재석 : (수정을 돌아보지 않고, 지유에게) 수정인 왜…?

지유 : 한 사람이라도 많은 게 좋잖아요. 모처럼 거기까지 가는 건데.

재석 : …

 

재석, 차문을 열고 내려 수정이 뒷좌석에 탈 때까지 기다린다.

수정, 뒷좌석에 오르고 재석, 수정의 옆자리에 탄다.

지유, 후후, 웃고 차를 출발시킨다.

 

 

#46. 바다가 있는 모래언덕, 오후

 

멀리 바다가 보이고 모래언덕이 펼쳐져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

재석의 차, 그 곳에 와서 선다.

 

 

#47. 모래언덕, 오후

 

모래언덕에 천 하나가 깔려 있다.

지유, 누워 있고 재석과 수정, 바다 쪽을 향해 앉아 있다. 와인과 치즈 같은 것들이 보인다.

 

지유 : 이 세상에 우리 세 사람만 있는 것 같군요.

 

재석과 수정, 불편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킨다.

 

지유 : 왜들 그러고 있어요?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재석,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무릎에 묻는다.

 

지유 : 선생님과 난 바다 같은 데 가본 적 한 번도 없는데. (수정을 보며) 있어요?

수정 : …(고개를 흔든다)

지유 : 별로 발전한 게 없군요. (하고 웃는다)

수정 : 지유야…

지유 : 말해요.

수정 : 난 널 좋아했어.

지유 : 내가 필요했던 거겠죠.

수정 : …네가 없었으면 많이 힘들었을 거야…

지유 : 두 번째 물어보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힘든 사랑을 하죠?

수정 : 어쩔 수 없잖아…

지유 : 자기 자신이라거나, 미래라거나, 그런 건 왜 생각을 안 해요?

수정 : 넌… 그럴 수 있었어?

지유 : (오랜 포즈) …진짜 어리석어요. 우리 둘 다.

수정 : …

 

지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바다 쪽으로 걸어간다.

두 사람과 꽤 떨어진 곳, 바다 가까이에서 멈춰 서 있는 지유.

 

수정 : 무슨 생각해요?…

재석 : …(그대로)

수정 : 나 좀 봐요. 나, 화 안 났어요.

 

재석, 천천히 고개를 들고 수정을 본다.

 

수정 : 왜 그렇게 죄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재석 : …

수정 :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불안해 보였던 게 지유 때문이었어요?

재석 : …

수정 : 내 잘못이에요. 그 담에 내가 전화만 하지 않았어도…

재석 : 니가 안 했으면 내가 했을 거야.

수정 :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재석 : …넌 잘못한 거 없어.

수정 : 그런 게 뭐 중요해요. 난 차라리 지금, 마음이 편해요.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재석 : …

수정 : 사람은 그렇게 불안한 상태를 오래 버틸 수가 없잖아요. 단조롭고 지루한 생활이 그리워지던 참이었어요.

재석 : …

수정 : 꼭 사막에 온 것 같아요… 그렇죠?

재석 : 그래…

수정 : 추억이 될 거예요, 언젠가는.

 

침묵이 흐른다.

지유, 천천히 돌아와 두 사람을 가만히 보다가

 

지유 : 와인이라도 딸까요?

 

재석, 그대로 앉아 있고 수정, 옆에 놓인 와인을 집어 지유에게 건네준다.

 

지유 : (와인을 따며, 수정에게) 최초의 눈빛, 최초의 두근거림, 최초의 입맞춤… 그 후에 남는 건 견디는 것밖에 없죠.

         행복은 이미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바꿀 수 없고,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고 견디는 거.

         (사이, 재석을 보며) 선생님은… 그걸 못 견디는 사람이에요. 그걸 잘 알면서, 왜 우리를 사랑했을까요?

수정 : …외로우니까.

 

조용한 모래언덕, 와인이 퐁, 하고 따지는 소리.

 

 

#48. 모래언덕, 저녁

 

모래언덕에 밤이 와 있다. 바람에 모래들이 날린다.

천 위에는 빈 와인의 병들, 먹다 남은 치즈 같은 것들, 굴러다니는 세 개의 컵, 위로 모래들이 조금 쌓여 있다.

모래 위, 세 사람이 몸을 밀착시키고 엇갈려 누워 있다. 셋 다 취해 있고, 평화로운 분위기.

 

지유 : …지금도 외로워요?

재석 : …(쿡쿡, 웃는다)

수정 : 정말… 세상에 우리 셋만 있는 것 같아…

재석 : 셋이서 살아버릴까?

지유 : 선생님이 예순 살쯤 됐을 때 생각해보죠.

수정 : 왜?

지유 : 지금은 힘들 걸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수정 : 바보 같아.

재석 : 바보야, 난.

 

쿡쿡, 하고 웃는 세 사람.

 

수정 : (혼잣말처럼) 이제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기분이야…

재석 : 언젠가 진짜 사막에 가자. …셋이서.

지유 : 언제…?

재석 : (웃음) 크리스마스 때쯤…?

지유 : (혼잣말처럼) …그런 게 가능할까?

수정 : 이미 간 걸로 해. 상관없잖아…

지유 : 하긴. 진짜로 있었던 일들도 지나고 나면 다 꿈처럼 여겨지니까.

재석 : 누군가 막 우기면 없었던 일도 진짜처럼 여겨질 거야.

 

쿡쿡, 웃는 세 사람.

 

수정 : 엘리엇 스미스는 왜 자기 가슴에 칼을 두 번이나 찌르고 죽었을까?

지유 :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

재석 : 글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다고 하잖아? 그래서 부검할 때 상흔이 몇 개나 있는지,

         망설임의 흔적 같은 게 있는지 없는지, 그런 걸로 타살이냐 자살이냐 판단하기도 하지.

수정 : 그런 거 없었대요, 그 사람은.

재석 : 그럼… 궁금했던 거 아닐까?

지유 : 뭐가요?

재석 : 망설임 없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수정 : (웃음을 터뜨리며) 난 예전에 그런 생각 한 적 있어요. 자살하는 사람들의 반쯤은, 호기심 때문일 거라고.

지유 : 왜요?

수정 :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잖아?

 

웃음을 터뜨리는 세 사람. 웃음이 사라지고 나면, 적막이 흐른다.

 

수정 : 이제 우린 다 뿔뿔이 흩어지는 거겠죠?…

 

두 사람, 대답이 없다. 수정, 몸을 일으킨다.

 

수정 : 술, 남은 거 있나? (하고 찾는다)

지유 : 트렁크에 있어요.

 

(Elliot Smith - Between the Bars)

지유, 일어나서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며 후후, 하고 웃는 수정.

재석, 몸을 일으켜 수정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일어선다.

 

수정 : 어디 가요?

재석 : 수영하러.

수정 : (깔깔 웃으며) 다녀와요.

 

재석, 휘적휘적 취한 걸음으로 바다를 향해 걸어가며 손을 들어 흔든다.

바다에 이르러 옷을 벗어던지고 바다로 들어가 헤엄을 치는 재석.

수정, 웃으며 그것을 보고 있는데 지유, 병을 들고 온다.

 

지유 : (병을 따며) 어디 갔어요?

수정 : 저기.

 

지유, 수정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 재석이 있는 곳, 물보라가 인다.

수정과 지유, 웃으며 와인을 병째로 번갈아 마신다. 잠시 후.

 

지유 : 어디까지 간 거지? 보여요?

수정 :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다가) 잘 모르겠어, 캄캄해서. (하고 씩씩하게 일어선다) 내가 데려올게.

 

지유, 웃고 수정, 일어나서 바다를 향해 뛴다.

뛰어가면서 옷을 벗어던지는 수정, 바다로 들어가서 헤엄을 쳐서, 멀어진다.

지유, 웃으며 그것을 보다가 다시 눕는다.

밤하늘의 별들. 지유, 눈을 감는다.

시간이 흐르고 지유,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보면, 바다는 고요하다. 둘러봐도, 두 사람의 흔적은 없다.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갑자기 바다로 달려가는 지유.

바다 안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간다. 허리 높이까지 잠긴 상태에서 한참 서 있다.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터벅터벅 돌아오는 지유. 털썩, 자리에 앉는다.

고요한 바다, 사막, 하늘.

지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옆에 있는 와인이 든 잔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데 그 잔 옆에 와인 오프너로 사용했던 스위스나이프.

지유, 잔 대신 가만히 그것을 집는다. 칼을 꺼낸다. 찰칵, 하는 소리.

뭔가를 가늠해보는 듯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지유.

바람이 불고, 모래가 날려 달빛 아래 눈처럼 빛난다.

(John Lennon - Happy Xmas)

 

 

#49. 엔딩 크레디트, 몽타주

 

(#1 재석의 어린시절의 집)

작은 마당, 눈이 내린다.

마당에서 들여다보이는 창, 어린 재석이 김 서린 창을 호호 불어 닦고 있다.

기다리는 누군가를 발견한 듯 아주 기쁜 얼굴을 한다.

 

(#2 수정의 어린시절의 집)

시골집, 어린 수정이 작은 케이크의 초를 불고 있다. 초가 꺼지면 둘러앉아 있던 가족들, 웃으며 박수를 친다.

 

(#3 지유의 어린시절의 집)

아파트, 어린 지유, 소파에서 엄마 품에 안겨 잠이 들어 있다.

그 곁에 작은 크리스마스트리, 불빛이 빛난다. 창 밖에는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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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다반향초 | 작성시간 14.11.14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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