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단막극대본

[2006][타인의 취향] 소현경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2.01.27|조회수1,098 목록 댓글 1

[타인의 취향] 소현경

 

 

 

 

 

 

 

 

 

 

1. 도심 배경의 한강변 산책로 (새벽)

 

아직 파르스름한 밤 기운이 남아있는 이른 새벽.

민주, 조깅복 차림으로 달려오고 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남1, 후드 푹 쓰고 고개 숙여서 얼굴 잘 안 보인다.

민주, 달리다가 남1 보는데 순간 살짝 고개 들어 민주 보는 남1. 시선 마주치자 굳어지는 민주.

서로 마주보는 남1과 민주의 시선 커트 백 되면서 점점 커지는 민주의 심장 고동소리.

어느 순간 가까워진 남1, 무심히 미소와 함께 눈인사하고 지나쳐간다. 늘 마주치는 단순한 조깅객일 뿐이다.

점점 느려지는 민주의 발걸음. 이윽고 멈춰선 민주, 남1 돌아본다.

허탈한 듯 두 손으로 무릎 짚으며 땅바닥 내려다본다. 불안하게 움직이는 민주의 눈동자.

 

민주 : (N) 아직도 가끔 낯선 사내의 시선이 두려울 때가 있다.

 

 

2. 민주 빌라 외경 (새벽)

 

 

3. 민주집 (새벽)

 

아직 어둑한 실내.

민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곧바로 현관 입구에 있는 전등스위치를 한꺼번에 드르륵 올린다.

일제히 켜지는 원룸 내부의 전등들. 불이 켜지면 온통 흰색으로 치장한 실내가 환하게 드러난다.

사진 한 장 걸려 있지 않은 벽, 거울도 없다.

민주, 잠시 서 있다가 침대와 부엌 쪽의 스위치를 내린다.

 

 

4. 민주집 욕실

 

반신욕 뚜껑 덮힌 욕조에 앉아서 신문 스크랩 보고있는 민주.

‘현역 변호사 김강우씨 아파트에서 추락사’

‘한모씨, 남편 김강우씨에게 지속적인 폭행 당해와’

‘경찰, 김씨 부인 한모씨 상대로 수사중’

‘한모씨 결백 주장’

‘아파트 추락사 남편 살해용의자 한모 여인 무죄 판결’ 등의 신문 스크랩 조각들과 재희 사진 몇 장 놓여있다.

취재 수첩에 메모하는데 밖에서 핸드폰 울린다.

옆에 놓인 목욕 가운 걸치고 욕조 나서는 민주 무릎의 일그러진 흉터.

 

 

5. 대학 건물 앞

 

가방 메고 서둘러 나오는 민주와 뚱해서 따라 나오는 기표.

민주,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옷에 화장기도 거의 없다. 기표 차 쪽으로 가며 얘기하는 둘.

 

민주 : 어디서 꽁꽁 숨어있는 줄 알았는데, 갤러리 오픈 준비 중이래. 그 여자 대단하지 않어?

기표 : 어딨는지 알았으면 낼 가도 되잖아.

민주 : 안 돼. 딴 잡지사 기자들 붙기 전에 먼저 만나야 돼.

기표 : (뮤지컬 표 두장 보이며) 그럼 이건 어떡하냐구.

민주 : (멈춰서는) 진짜... 오빠, 미안해.

기표 : 근데 니네 윤선배는 왜 그러냐? 저버엔 무슨 영화 속 살인 어쩌구 그런걸 시키더니, 이번엔 왜 또 살인용의자 인터뷰야!

민주 : (웃으며) 살인용의자 아냐. 무죄 판결 받았다니까?

 

건물에서 나오다가 둘 보고 ‘민주야’ 하며 다가오는 지연. 지연 돌아보는 둘.

민주, 지연 보자 웃음 사라진다.

 

지연 : 맨날 수업만 끝나면 쌩하고 가더니... 기표씨하고만 노니, 넌?

기표 : 모르는 소리 말아요. 난 버리구, 만나기 싫다는 사람 만나러 간대요.

지연 : 어디 가는데?

민주 : 인터뷰 있어서. 나 늦었어, 지연아. 오빠, 나 갈께.

기표 : 끝나구 전화해.

민주 : (웃으며 손 흔들고 뛰어가고)

지연 : 민주 많이 좋아졌네요?

기표 : (웃으며) 사랑의 힘! 몰라요?

지연 : (의미있게 보고)

 

 

6. 을지로 또는 청계천 정도의 시내 거리

 

성탄 부위기의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물결처럼 흘러간다.

그 익명의 사람 물결 속에 섞여서 걷고 있는 민주.

빠른 걸음으로 몇 걸음 앞에 걷고 있는 유진 스쳐 지나가는 민주.

 

 

7. 갤러리 사무실 (인사동 내지는 삼청동)

 

전시물을 바꾸는 중인 듯, 미술품 나르는 인부들과 지시하는 큐레이터들 보인다.

조심스레 들어오는 민주, 실내 둘러본다.

직원들과 얘기하고 있다가 돌아보는 재희.

 

민주 : (긴장, 목례로 인사하면)

재희 : (다가오며) 무슨 일이시죠?

민주 : (들고 있던 명함 내밀며) 안녕하세요? 월간 여성 강민주라고 합니다. 여러번 전화,

재희 : (확 굳어지는) 정말 기막히네...

 

화난 얼굴로 돌아서 사무실로 들어서는 재희.

민주, 잠시 멈칫했다가 용기 내서 따라 들어간다.

 

 

8. 사무실

 

안락한 소파와 책상 놓여있는 사무실.

재희, 화난 얼굴로 들어와 소파에 앉는다.

 

민주 : (따라 들어오며)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관장님도 자기 변호할 기회가 필요하시잖아요.

재희 : 자기 변호?

민주 : (선 채로) 무죄 판결은 받으셨지만,

재희 : 그만 가 줄래요? 약속 있어서 나가봐야 돼요.

민주 : 피해자가 가해자로 오해 받으면 안되는 거잖아요.

재희 : 누가 누구한테 오핼 받아요?

민주 : 관장님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한테요.

재희 : 오해하라고 해요. 난 상관없으니까.

 

서류 봉투 들고 들어오는 유진, 둘 보고 멈칫한다.

유진, 세련되고 깔끔한 양복 차림이다.

 

재희 : (보고) 어떻게 오셨어요?

민주 : (힐끗 돌아보는데)

유진 :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안녕하십니까. 대교은행 명동지점에서 왔습니다.

민주 : (목소리에 뚝 굳어진다)

유진 : (E) 어! 미안합니다. 사람이 있을 줄 몰랐어요.

민주 : (얼른 고개 돌리고)

재희 : 아... (일어서는데 뻐꾸기 시계 다섯 시 알리며 운다. 벽시계보는) 시간 정확하시네요, 서...

유진 : 서유진입니다.

재희 : 서대리님, 모범생이었겠어요.

유진 : (웃으며) 예, 제가 원래 범생입니다.

 

민주, 순간 뒤통수 퍽! 맞은 듯 고개를 번쩍 든다.

 

 

9. 프래쉬 백 (과거/밤 -여름)

 

캄캄한 동굴. 모닥불 불빛에 드러나는 유진의 얼굴.

 

유진 : 난 평생을 범생이루 살아왔어요.

 

 

10. 사무실

 

민주, 설마? 하는 얼굴인데 이미 낯빛은 하얗게 질렸다.

 

재희 : (소파 가리키며) 저기 앉으세요. (서랍 열고)

유진 : 예. (소파 쪽으로 오는 유진)

 

유진, 민주 스쳐서 소파로 가며 힐끗 민주 본다.

유진이 스치는 순간 자기로 모르게 눈 감는 민주.

 

재희 : (서류, 도장 꺼내들며) 등기 권리증하고 인감도장만 있으면 되나요?

유진 : (앉으며) 네. (서류 봉투에서 대출 관계 서류 꺼내고)

 

눈뜨는 민주, 나가려고 몸 돌리다가 서류 준비하는 유진 팔목의 손목 시계 얼핏 본다.

순간 어지럽게 흔들리는 민주의 시야. 솟아나는 땀방울.

가쁜 숨 몰아쉬며 떨리는 걸음으로 나가는 민주.

권리증과 도장 갖고 오다가 왜 저러나? 민주 쳐다보는 재희.

 

 

11. 갤러리

 

사무실에서 나오는 민주, 겨우 창가로 가서 창틀 짚는다.

순식간에 땀이 차 오르는 민주,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열고 손수건을 찾는다.

불안한 얼굴로 정신없이 가방 뒤지는 민주. 민주 턱에서 툭하고 떨어지는 땀방울.

 

 

12. 동굴 (회상/밤)

 

동굴 천장에서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민주의 벗은 어깨로 떨어진다.

무릎 꿇은 자세로 겨우 앞쪽 가린 등산 점퍼 움켜쥐고 있는 민주.

민주, 눈물과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애걸하고 있다.

 

민주 : 제발... 안돼요...

 

의기양양하고 느긋한 미소로 민주 잠바 확 잡아채는 유진.

 

 

13. 엘리베이터 앞 (회상 후)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민주, 창백한 얼굴로 겨우 버티고 있다.

갤러리에서 핸드백 들고 나오는 재희와 유진.

엘리베이터 열린다. 민주 타고 엘리베이터 문 닫히려면, 뛰어와서 열림 버튼 누르는 유진.

 

 

14. 엘리베이터 안

 

남자 세 명 정도 타 있는 엘리베이터.

남자들 피해 구석으로 붙어있던 민주, 재희와 타는 유진 보고 헉! 기겁한다.

그런 민주 힐끗 보는 재희.

 

재희 : (몸 돌려 작게) 어디 아퍼요?

민주 : (겨우) 아뇨...

 

정신 차리려 애쓰며 엘리베이터 벽에 머리 기대는 민주. 엘리베이터 안이 점점 갑갑해져 오고 숨이 막힌다.

그런 유심히 민주를 보는 재희.

아무것도 모르고 여유 있고 단정한 표정으로 서있는 유진.

고통스럽게 큰 숨 몰아쉬던 민주, 가슴 부여잡고 주저앉으며 정신을 잃는다.

 

 

15. 갤러리 사무실 (저녁)

 

소파에 러그 덮고 누워있는 민주, 힘겹게 눈뜨다가 낯선 광경에 벌떡 일어나 앉는다.

책상에 앉아있던 재희, 민주 본다.

 

재희 : 깼어요?

민주 : (어떻게 된 건가?) ?

재희 : (보온병에서 차 따르며) 폐소공포증 있나봐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쓰러졌어요.

민주 : (낭패스러운) ....

 

와서 민주 앞에 잔 놓아주고 있는 재희, 말끄러미 민주 쳐다본다.

 

재희 : 집은 모르겠구, 병원 갈 정돈 아닌 거 같애서 이리로 왔어요.

민주 : (머리 쓸어 올리는) 네... (더 말할 기력도 없다)

재희 : (뭔가 살피듯 보며) 마셔요.

민주 : 아뇨... (자기 꼴 더 보이고 싶지 않은, 얼른 수습하고 일어서는데)

재희 : 괜찮겠어요?

민주 : (가방들며) 초면에... 정말 죄송합니다. (인사하고 나가는데)

재희 : 언제, 인터뷰 말고, 오고 싶을 때 와요.

민주 : (영문 모르겠는, 돌아보면)

재희 : (의미있는) ... 그럴 거 같애서 그래요. 할 말은 내가 아니라, 강민주씨라 그랬죠? 그쪽이 더 많을 거 같애서.

민주 : (무슨 소린가? 쳐다보는데)

재희 : (연민 담긴 눈으로 보다가) 강민주씨... 당신 당한 적 있죠.

민주 : (뚝 굳어지고)

재희 : 수치나 공포감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거거든요.

 

흠칫 놀라는 민주, 떨리는 눈으로 재희 보다 휙 뒤돌아서 나간다.

두 눈을 감는 재희.

 

 

16. 민주집 (밤/새벽)

 

떨리는 손으로 현관문 도어 첵 까지 하고 들어오는 민주. 침대로 가 그대로 쓰러진다.

잔뜩 몸 오그리고 눕는 민주.

전화벨 계속 울리고 있다. 잠시 후 응답기에서 흘러나오는 기표 목소리.

 

기표 : (E) 민주야! 어떻게 된 거야? 핸드폰도 안 받구, 안 들어온 거야?

 

<시간경과>

어슴프레한 새벽빛이 흘러들어오는 창가 의자에 앉아있는 민주. 해쓱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다.

 

유진 : (E) 대교은행 명동지점에서 왔습니다.

민주 : (결심한 듯 일어선다)

 

 

17. 은행

 

사람들로 북적이는 은행.

야구 모자 푹 눌러쓴 민주, 소파에 앉아서 유진을 보고 있다.

한쪽에 따로 마련된 VIP코너에 ‘대리 서유진’ 명패 달고 50대 여자 상대하고 있는 유진.

시종 서글서글한 미소와 한 번 씩 환한 웃음으로 대하고 있다.

 

민주 : (N) 도저히 저 사람이 ‘그’ 일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1 일어서자 같이 일어나서 깍듯하게 인사하는 유진. 그런 유진에게 다가와 종이컵 놓아주는 혜영.

 

혜영 : (웃으며) 캐모마일이예요.

유진 : (밝게) 땡큐, 혜영씨.

혜영 : (호감 담긴 미소 짓고 자기 자리에 가서 앉고)

 

한 모금 마시고 자세 바로하는 유진, 일하기 편하게 양복 소매 살짝 올리는데 고급 남자용 레저용 시계 보인다.

<인터컷> - 랜턴 불빛에 보이던 똑같은 손목시계.

민주, 뜷어지게 시계 본다. 유진임을 확신하고 유진 얼굴 보는데,

차례 벨 울리고 쳐다보던 유진과 시선 마주친다. 지레 기겁해서 뚝 굳어지는 민주에게 미소 짓는 유진.

 

민주 : (N) 날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18. 민주집 (밤)

 

침대 스탠드 불만 켜놓은 실내. 소파에 앉아서 비디오보고 있는 민주. 텔레비전 옆에 쌓여있는 비디오들.

민주, 멍하니 화면 보고 있다.

<영화 ‘트랩트’ 중에서 여자에게 마비 주사 놓는 장면과 사지 뻣뻣해지며 설명하는 장면 이어지고

남자의 ‘죽음을 느껴보라’는 대사에 이어서>

 

유진 : (E) 살려달라고 빌어 봐.

 

벌떡 일어서는 민주, 감정 오르는 듯 가슴 누르고 서성인다.

 

민주 : (N) 다시 갑갑증이 시작됐다. 너무나 멀쩡하게,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내 가까이 살고 있는 그가, 2년 전의 그라면...

         그 가정만으로도 숨이 답답하다. 내가 다시 작아지고 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베란다 쪽으로 가는 민주, 유리창에 유령같은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민주, 가까이 가서 유리에 이마를 대고 밖을 내다보면 그 밖에 동굴이 보인다.

 

 

19. 동굴 안 (회상)

 

깜깜한 동굴. 밖에서 계속 비 내리고 있다.

비에 흠뻑 젖은 인주, 동굴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서 젖은 양말 짜고 있는데

그런 민주 얼굴에 손전등 비추며 쓱 들어오는 검은 물체.

기겁한 민주, 외마디 비명 지르며 양말 든 채로 얼굴 가린다. 그 얼굴 위로

 

유진 : (소리) 어! 미 미안합니다. 사람이 있을 줄 몰랐어요.

 

<시간 경과>

엉성한 모닥불 피워놓고 이만큼 떨어져 앉아 있는 민주와 유진.

민주, 맨발로 양말 모닥불에 말리고 있다.

세운 무읖 감싸고 있는 유진 팔의 손목시계.

 

유진 : (갑자기 크게 웃는다)

민주 : (놀라) 왜 웃어요?

유진 : 재밌어서요.

민주 : 뭐가 재밌어요?

유진 : 너무 평범해서 사는 게 지루했었는데... 생면부지의 여자하구...

         (시선 민주의 맨발에 멎는다. 불빗에 비친 맨발의 느낌 뭔가 다르고)

민주 : (그 시선 느끼는, 얼른 양말로 발 가리며) 우리 찾고 있겠죠?

유진 : 이 빗 속에? 해 뜰 때까지 우리 둘이 버텨야 돼요. 죽으나 사나.

민주 : (미치겠는, 아우... 하는데)

유진 : (계속 민주의 발을 보며) 발이 참... 이쁘네요. (묘한 느낌으로 민주 보고)

민주 : (기겁해서 보는)

유진 : 왜 그렇게 봐요? 겁나요?

민주 : ... 아뇨, 그게 아니라...

유진 : (점점 잔인성 나타나는) 뭐가 무서운데, 혹시 내가 무서워요?

민주 : (그 표정 보고) ...왜 그래요? (본능적인 두려움 느껴지고)

 

갑자기 번개가 친다.

짧은 빛 속에서 드러난 번득이는 유진의 눈빛. 두려움이 실려 있는 민주의 커지는 눈.

묘한 미소 지으며 민주에게 다가오는 유진. 그 위로 들리는 핸드폰 소리(E).

 

 

20. 민주 집 (밤/회상 후)

 

민주,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면, 놀라서 한 손으로 가슴 가리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 비친다.

계속 울리고 있는 핸드폰 소리.

덜덜 떨며 어쩔 줄 모르는 민주. 민주,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핸드폰 들어보면 ‘기표오빠’ 떠 있다가 부재중으로 바뀐다.

핸드폰 내려놓고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여는 민주, 물병 열어 마시는데 거의 빈병이다.

 

 

21. 편의점 앞 (밤)

 

유리를 통해 카운터에서 큰 생수 두병 들고 와 계산하는 민주 보인다.

비닐 봉지 들고 나온 민주, 찬 밤바람을 깊게 들이마시고 집 쪽으로 걸어간다.

 

민주 : (N) 그 해 여름은 온통 암흑이었다. 햇볕도, 바람도, 나 자신조차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어둠뿐이었다.

 

 

22. 거리 (밤)

 

민주, 불안한 얼굴로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민주 뒤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낯선 남자의 모습.

남2, 갑자기 뛰어서 다가오기 시작한다.

놀란 민주, 갑자기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그 뒤로 버스에 오르는 남자의 모습 보인다.

 

 

23. 민주집 앞 (밤)

 

민주 집 현관이 보이는 4층 계단에 앉아있는 기표 다리만 보인다.

급하게 계단을 올라온 민주, 떨리는 손으로 열쇠 꺼내 문 열려는데

누군가 계단 위쪽에서 내려와 뒤에서 민주 어깨를 잡는다.

자지러지게 놀란 민주, 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뒤돌아 있는 힘껏 두 팔을 휘두르는데 두 팔목을 잡힌다.

 

기표 : (놀란) 민주야! 나야, 나!

 

민주, 그제야 제대로 보면 황당한 표정의 기표다.

 

 

24. 인근 놀이터 (밤)

 

민주와 기표, 굳은 얼굴로 서 있다.

 

기표 : 왜 다시 이러는데, 너! 어?

민주 : (할말 없어 외면하고)

기표 : (안타까운) 이제 그만 좀 털어버려. 2년이나 지났잖아. 어두운 거, 비오는 거 싫어하구...

         지하에 있는 가게, 음식점 들어가기 싫어하구... 거기다 대인기피증에,

민주 : (애써 누르며) 그만해.

기표 :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두 쉬운 일 아냐.

민주 : (자기 감정에 오르는) 오빠한테 봐 달랜 적 없어! (확 돌아서고)

기표 : (같이 오르는, 잡으며) 극복하지 못할 고난은 없어!

민주 : (복받치는) 알지도 못하면서!

기표 : (소리치는) 산에서 조난 당해 혼자 하룻밤 샜다구, 다 너처럼 이렇진 않아!

 

민주, 눈물을 참으며 기표를 쳐다본다. 기표, 아차! 싶다.

민주, 팔 빼고 집으로 가려는데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민주야’ 하며 끌어안는 기표.

민주, 기겁해서 몸 빼내려는데 기표, 놓아주지 않는다.

 

민주 : (거칠게 저항하며 꽥) 놔! 놔! (무서운 기세로 기표 확 밀어버리며) 억지루, 강제루 이러지마. 싫다잖아!

 

그 기세에 밀리며 비틀하는 기표, 기막혀서 민주 본다.

정신없이 옷차림 바로하는 민주.

 

기표 : (화나는) 너... 내가 치한이니?

민주 : (아차 싶지만, 피하고 싶은) ...갈께. (도망치듯 돌아서 가고)

기표 : (뒤에 대고) 군대 가기 전에 우리 키스까지 했어! 대체 너 왜 그래! (기막힌 듯 어우, 하고)

 

 

25. 민주집 (밤)

 

뛰어 들어오는 민주, 가쁜 숨 몰아쉬며 현관문 잠그고 기대 선다.

다시 치솟는 감정들로 자신도 어쩔 줄 모르겠는 민주.

 

 

26. 신경 정신과 외경 (다른 날)

 

 

27. 병원 진료실

 

30대 후반의 남의사와 마주 앉아있는 민주.

 

의사 : 민주씨한테 소중한 게 뭔지, 그걸 먼저 생각해요. 그 사람을 만났다구 여태 애써온 걸 허사로 돌리면 돼요?

민주 : ...이대로 못 있겠어요...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의사 :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민주 : 그 사람이에요.

의사 : (일부러 웃으며) 똑같은 시계는 수없이 많아요. 시계 하나로,

민주 : (절규처럼) 그 목소리!... 밤새 날 희롱하고 짓밟고 비웃던 그 목소리!.. 맞아요, 맞다구요, 선생님.

의사 : (난감해서 보다가) 민주씨.

민주 :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박사님 말씀처럼... 박사님 그러셨었죠?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일거라고, 미친 놈 일거라구...

         근데.. 아니었어요. 아니었다구요. (눈물 나는) 너무 멀쩡해요.. 사람이면 할 수 없는 짓을 해 놓구, 사람으로 살고 있어요.

         마치 기표선배처럼, 우리 아버지처럼, 박사님처럼...

 

미친 듯 얘기하다 자기 망연히 보고 있는 의사 시선에 말 멈추는 민주.

눈물 범벅된 눈으로 의사 보다가 일어서는 민주.

 

 

28. 거리

 

반쯤 정신 나간 채 걷고 있는 민주. 지나가는 행인들이 모두 자기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갑자기 두려워진 듯 걸음 빨라지는 민주. 민주의 귓가에 계속 유진의 목소리가 따라온다.

 

유진 : (E) 여기선 내가 널 어떻게 해도 아무도 몰라.

유진 : (E) (낮은 목소리) 다시 벗어.

유진 : (E) (비웃는) 살려달라고 빌어 봐.

 

민주, 달리다 멈춰 서서 가로수를 붙잡고 토한다. 그러다 흐느끼듯 우는 민주.

 

 

29. 민주 집 욕실

 

푸푸 세수하고 있는 민주, 숨 고르며 거울 본다.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 듯 한참을 바라본다.

 

민주 : (N)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알아야겠다. 어떤 인간인지.

 

 

30. 전철 플랫폼 (다른 날)

 

플랫폼에 가득한 사람들 부감.

 

 

31. 전철 안

 

인파로 붐비는 전철 안.

앉아서 신문보고 있던 유진, 움찔하며 발 밑을 쳐다 본다. 유진 발을 살짝 밟고 있는 여자의 발.

위쪽을 보는 유진. 소설 ‘익명적 사랑’을 읽고 있는 여자. 긴 퍼머 머리에 날씬한 몸매 드러나는 섹시한 의상. 얼굴은 안 보인다.

유진, 슬쩍 발을 빼면 여자가 놀라서 책을 내린다. 퇴폐적의고 섹시한 화장으로 전혀 달라 보이는 얼굴의 민주다.

 

민주 : (놀라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다)

유진 : (얼른 미소로) 아니 뭐, 괜찮습니다.

 

묘한 미소로 유진 향해 웃어 보이는 민주.

 

 

32. 전철 플랫폼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내린 민주, 돌아보지 않고 출구로 걸어간다.

전철 유리창을 통해 뒤돌아 민주를 쳐다보는 유진.

 

 

33. 휘트니스 센터 (다른 날)

 

조깅 트랙 달리고 있는 유진. 맞은 편에서 헤드폰 하고 달려오고 있는 민주.

민주 보던 유진, 어디서 봤더라? 하는데 유진과 시선 마주하는 민주.

어느 한순간 전철 안의 민주 기억해내고 아! 하는데 민주도 알아본 듯 얼핏 웃지만 유진 스쳐 지나간다.

한바퀴 더 도는 유진, 같은 지점까지 돌아오지만 보이지 않는 민주.

뭔가 아쉬운 기분으로 멈춰서는 유진.

 

 

34. 백화점, 등산용품점 (다른 날)

 

등산 의류 둘러보고 있는 유진. 용품들 쪽으로 온다. 모자 버프 집으려하는데 동시에 여자 손이 다가온다.

멈칫하며 쳐다보면 민주다. 서로 놀라는 두 사람.

 

민주 : 먼저 보세요.

유진 : (반갑게) 혹시...

민주 : 그러게요. 서로 활동하는 영역이 비슷한가 보죠?

 

유진이 대꾸할 틈 안주고 유진을 슬쳐 지나가는 민주.

유진, 민주의 뒷모습 보며 망설이다가 쫓아가는데 걸어가던 민주 뒤돌아선다.

 

 

35. 까페

 

찻잔 앞에 놓고 앉아있는 민주와 유진.

 

유진 : 우연이 세 번 겹치면 필연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민주 : (놀리듯) 설마... 우리가 필연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유진 : 네?

민주 : 그런 뻔한 말.. 재미없잖아요?

유진 : 사람 잘 안 믿는군요.

민주 : 그쪽은요?

유진 : 아 저요? 그러고 보니 내 소갤 아직 안했군요. 난...

민주 : (OL) 말하지 마세요.

유진 : (멈칫해서 보면)

민주 : (천천히 커피 마신 뒤) 우리가 특이한 인연인 건 분명한데요... 사실 전 수의사가 싫거든요? 근데 혹시 당신이 수의사라면...

         세 번의 흔치않은 우연이 주는 신비감도 사라지겠죠.

유진 : 재밌는 발상인데요? 그럼 어떡한다...

민주 : 며칠 전에 소설 한 권을 읽었거든요?

유진 : ‘익명적 사랑!’ 전철에서 읽고 있었죠?

민주 : ‘익명’ 이란 말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책이었어요.

유진 : 익명이라... (솔깃해서 생각에 잠기고)

 

민주 가방에서 핸드폰 울린다. 꺼내보는 민주, ‘기표오빠’ 떠있자 소리 줄이고 유진 본다.

 

유진 : 오케이! 해결 됐어요.

민주 : (보면)

유진 : 익명의 만남, 우리도 한번 해봅시다.

 

민주,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보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36. 민주집 빌라 앞 (저녁)

 

변장한 차림의 민주, 지친 걸음으로 걸어오다가 빌라 앞에 서 있는 기표를 본다.

민주, 미처 피할 새도 없이 황당해하는 기표의 시선에 잡힌다.

 

기표 : (황당한) 너?...

민주 : 오빠... (자기 차림새 내려다보는)

기표 : (다가와) 학교도 안 나오고 일주일 동안 전화도 안받고, (훑어보며) 너 이러구 뭐하구 다닌거야? (훑어보는)

민주 : (얼버무리는) 취재 땜에.

기표 : (안믿기는) 취잴 이러구 다녀?

민주 : (시선 피하는)

 

 

37. 한강변 (해질녘)

 

저녁 노을이 붉게 하늘과 강물을 메우고 있다.

앞서 걷고 있던 기표, 사람들이 뜸한 곳에 이르자 뒤돌아서서 민주가 오기를 기다린다.

 

기표 : (일부러 밝게) 안 되겠다! 빨리 너 데리고 유학가야지.

민주 : (놀라서 보는)

기표 : 석사, 미국 가서 다시 해.

민주 : 오빠.

기표 : 다 털어버리고 같이 가자.

민주 : 갑자기 왜 이래?

기표 : 원래는 나 먼저 가서 자리 잡고, 너 석사 마치면 오라고 할려고 그랬어.

         네가 달라지고 있잖아. 예전처럼, 에전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혼자 못가겠어.

민주 : (할말이 없다) 나 미국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기표 : 나 있잖아. 내가 같이 가는데...

민주 : (OL) 오빠 한사람 믿구 어떻게 가!

기표 : (의아) 그게 무슨 소리야?

민주 : (자기도 모르게) 오빠가 누군데! 오빠 한사람 의지하구 갔다가, 오빠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면 어떡해?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떡해? 오빠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떡해?...

 

민주, 정신없이 빠르게 말하다가 창백해진 기표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춘다.

기표, 충격으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기표 : ...나라는 사람, 너한테 그 정도였니?

민주 : 누군가를 나처럼 믿는 거, 자신 없어. (외면하고)

 

굳은 얼굴로 보던 기표, 확 돌아서 간다.

민주, 당혹스럽지만 어쩌지 못하고.

 

 

38. 게이 바

 

어두운 실내. 한쪽 테이블에 유진 앉아 있다.

무대에서는 여장 남장 쇼가 한창 진행 중이다.

시선은 무대를 향한 채 술잔을 입에 대는 유진. 쇼에 열중에 있는 유진. 낮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진 옷차림과 눈빛이다.

문득 기지개 키며 주위를 둘러보던 유진, 쇼 보고 있던 민주와 비슷한 여자 본다.

슬그머니 팔을 내리는 유진, 어디서 봤더라? 하는데 유진 쪽을 보는 민주.

어느 한순간 전철 안의 민주를 기억해내는데 민주도 얼핏 웃는 듯싶더니 일어나 나간다.

뭔가 아쉬운 기분으로 민주 쳐다보는 유진.

 

<프래쉬 백> 민주 : ‘익명’ 이란 말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책이었어요.

 

새로운 기대감에 미소 짓는 유진.

 

 

39. 민주 집 욕실 (밤)

 

거품 가득한 욕조에 앉아서 스펀지로 몸 닦고 있는 민주. 거품 사이로 드러난 무릎 일그러진 상처 본다.

그 상처 자리 없애려는 듯 힘주어 박박 문지르는 민주.

 

 

40. 대학 건물 안 (다른 날)

 

기표, 국문과 과사무실 앞에 서 있다. 잠시 후 과사무실에서 나오는 지연 (뜻밖) 어머!

 

 

41. 캠퍼스 내 까페

 

커피잔 젓던 지연, 놀란 얼굴로.

 

지연 : 그게 무슨 뜻이에요?

기표 : ...산에서... 조난사고, 그 외에 무슨 일이 더 있었냐구요.

지연 : (긴장해서 멈칫)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

기표 : 민주 성격... 밝고 순수하고 명랑하고... 거기다 당찬 구석까지 있었어요.

지연 : (작게 끄덕이고)

기표 : 혼자서 산 속에서 하룻밤을 새웠으면, 그래요, 나래두 무섭구 두려웠을 거에요.

         그 기억 싫고, 끔찍해서 충분히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지연 : ...무슨 일 있었어요?

기표 : 같이 유학 가자 그랬는데,

지연 : (뜻밖인, 자기도 모르게) 민주하고 결혼할 거에요?

기표 : (뭔가 있구나) 왜요, 그게 이상해요?

지연 : (난처하고) ...

기표 : 말해줘요, 지연씨.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죠?

지연 : (망설이다가) 결혼까지 생각한다면... 아는 게 좋을 수도 있겠네요.

기표 : (긴장해서 보고)

지연 : ...혼자 동굴에 피해있던 애 치고는... 상처가 많았어요. 흙투성이에 옷에, 피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어요.

기표 : ?!

지연 : (망설이다) 병원에 실려 갔었는데... 산부인과 치료 받았드라구요.

기표 : (충격) !

지연 : ... 잘 다독여 주세요.

기표 : (하얗게 질린다)

 

 

42. 교정

 

충격받은 얼굴로 벤치에 앉아있는 기표.

 

<프래쉬 백>

씬24. 자기 포옹을 치한처럼 밀어내며 저항하던 민주.

씬23. 두려움에 가득해서 두 팔을 휘젓던 민주.

 

민주 : (E) 오빠가 누군데! 오빠 한사람 의지하고 갔다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면 어떡해?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떡해?

         오빠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떡해?...

민주 : (E) 누군가를 나처럼 믿는 거, 자신 없어.

지연 : (E) 일년 넘게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어요. 이제 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충격과 절망에 고개 푹 떨구는 기표.

 

 

43. 유진의 차 안 (거리/저녁)

 

기대감에 찬 얼굴로 운전하고 있는 유진, 가속 패달 밟는다.

 

 

44. 바

 

한쪽에 포켓볼 당구대 놓여있는 바. 능숙하게 포켓볼 치는 민주 보고 있는 유진.

몸매 선을 힘껏 드러낸 민주의 자세와 포즈들, 한껏 도발적인데 정작 민주는 조금도 어색해 하지 않고 당당하다.

(짧은 치마를 입는다면 상처 가리는 검정 망사 스타킹 정도 신고)

그런 민주의 모습들에 끌리는 유진.

민주 치는 모습 보면서 얘기하는 유진과 민주.

 

유진 : 오늘 오면서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알아요?

민주 : 내가 안 올까 봐요?

유진 : 다음 번 기약이 없으니까.

민주 : (OL) 스릴 있죠?

유진 : (하하 웃는다)

 

<시간 경과>

유진이 치고 구경하고 있는 민주.

 

유진 : 참, 산 좋아해요? 지난번에 등산용품 보던데.

민주 : 산... 예전에 산악부 동아리였어요.

유진 : 그래요? 난 주로 혼자 다니는데.

민주 : (무심히) 그렇겠죠.

유진 : (? 멈칫해서 보면)

민주 : (얼른) 그렇게 밖에 못쳐요?

 

유진에게 다가오는 민주, 뒤에서 부드럽게 밀착하며 유진 팔 잡는다.

순간 움찔하는 유진. 가르쳐주면서 순간 순간 부드럽게 유진을 터치하는 민주. (대사는 현장 애드립으로 처리)

민주의 묘한 손놀림에 달아오르는 유진, 민주의 터치 즐기는데...

어느 순간 유진에게서 떨어지는 민주. 유진, 아쉬움에 민주 돌아보면.

 

민주 : (유진 어깨 툭 치며) 해봐요. (하며 손으로 유진의 귓불과 뒷목을 어루만지듯 쓸어내리고 자기 대 잡는다)

유진 : (그 느낌에 움찔해서 민주 보면)

민주 : (시침 뚝 뗀 표정으로 유진 보고)

유진 : (요거봐라?... 포켓볼에 관심없는, 치면서) ...그만하고 술 한잔 합시다.

민주 : 아뇨, 집에 갈래요.

유진 : (벙해서 보면)

민주 : 답답한데 오래 있는 거 싫거든요.

유진 : (자극해놓고 싹 빠지는 민주 보다가) 답답한 데 싫으면, 산에 한번 갈래요?

민주 : 산....?

유진 : 예전에 다녔었다면서요.

민주 : (서서히 굳어져서 유진 본다)

 

 

45. 택시 안 (밤)

 

민주, 뒷좌석에 앉아서 서울 밤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어둑한 유리창으로 비치는 자신의 낯선 얼굴 보다가 고개 돌리는 민주.

 

 

46. 민주 집 (밤)

 

들어오는 민주, 응답기 튼다.

돌아서서 가발 벗고, 적당히 가려진 곳에서 옷 갈아입는 동안 이어지는 메시지들.

 

윤선배 : (E) 야, 강민주! 너 정말 연락 안할래? 일 안 할거야? 한관장 기사는 또 어쩔건데? 너 계속 이러면 아웃이야, 알았지?

            괜한 협박 아니니까 빨랑 연락해.

의사 : (E) 민주씨, 닥터 쵭니다. 걱정돼서 전화했어요. 병원에 안 올거에요?... 그동안 우리 참 잘 이겨 내 왔잖아요. 힘 내요,

         민주씨. 기다릴게요.

 

더 이상 메시지 없다는 안내 나온다.

실망해서 핸드폰 열어보는 민주, 기표 이름은 없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민주, 전화기 옆에 놓인 액자 본다. 군복 입은 기표와 함께 찍은 민주 사진.

복잡한 마음 못 견디고 벌떡 일어서는 민주.

 

 

47. 재희 갤러리 사무실 (밤)

 

재희, 막 나가려는데 노크 소리 들린다. 문 여는 재희. 민주, 들어온다.

 

민주 : 어떻게... 벗어낫어요? 어떻게 공포심을 없앴나요?

 

-시간 경과-

술잔 든 민주와 재희, 소파에 기대서 나란히 앉아 있다.

탁자 위에 늘어져있는 술병들.

 

재희 : 집도 옮기고, 그 사람과 같이 썼던 것들은 전부 버렸는데도... 그래두 아직 눈에 선해.

         혁대를 끄르는 그 남자의 냉정한 얼굴, 아니 기대감에 찬 표정...

민주 : (술잔을 입에 대려다가 멈칫하고 재희를 져다본다)

재희 : 그가 벨트를 끄르면, 그 순간부터 난 사람이 아니야. 그거 알죠? 나 자신이 너무나 하찮게 느껴져서 죽고 싶은 거.

 

재희, 민주를 쳐다보면 민주, 얼른 술을 마시는데 가늘게 손이 떨린다.

 

민주 : 왜... 이혼하지 않았어요? 왜 도망치지 않았어요?

재희 : 날 죽인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죽일 거니까.

민주 : (놀라서 보고)

재희 : 체면에 목숨 거는 남자였거든. 때리는 쾌감은 버리기 싫고, 망신은 당할 수 없고.

민주 : (망설이다) 그래서... 죽였어요? 꼭 그 방법밖에 없었나요?

재희 : (웃는) 넘겨 짚지 말아요.

 

재희, 술 마시다 말고 민주를 바라본다. 의미 있게 교차하는 두 사람 시선.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말이 없는 재희.

 

재희 : 그 사람... 술에 취해서 온 날은 항상 그러구 담밸 피웠어.. 베란다 난간에 몸을 걸치고 흔들흔들하면서...

 

민주, 재희가 남편을 죽였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양팔을 감싼다.

 

재희 : (물끄러미 민주 보다가) 꼭 그 방법밖에 없었냐고 했죠?

민주 : (긴장하고)

재희 : 민주씨도 알텐데... 절대 한 공간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천적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거.

         난 남편의 죽음으로 해결됐지만, 민주씨는... 당신만이 알고 있겠지, 방법은.

민주 : (얼굴이 창백해진다)

 

 

48. 민주집 욕실 (다른 날)

 

변장 차림새로 가발 들고 거울 앞에 서있는 민주. 들고 있는 가발과 옆에 놓여있는 요란한 색조 화장 케이스 본다.

그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 생경한 듯 보다가 가발 쓰는 민주.

 

의사 : (E) 민주씨한테 소중한 게 뭔지, 그걸 먼저 생각해요.

의사 : (E) 그 사람을 만났다구 여태 애써 온 걸 허사로 돌리면 돼요?

재희 : (E) 민주씨 경우는... 당신만이 알고 있겠지, 방법은.

 

<프래쉬 백>

기표 : ...나라는 사람, 너한테 그 정도였니?

 

그게 아닌데... 민주 망연히 서 있는데 핸드폰 울린다.

가방에서 핸드폰 꺼내 보는 민주, ‘기표오빠’ 떠 있다.

 

민주 : (얼른 받는, 반가운) 여보세요?... 어, 오빠...

기표 : (F) 지금 좀 만날 수 있겠니?

민주 : (뜻밖인) 지금?

 

거울 보는 민주. 유진과 만나기 위해 변장한 모습이다.

 

기표 : (F) 안 바쁘면... 좀 봤으면 좋겠는데.

민주 : (잠시 갈등하다 마음 정하고) 알았어, 나갈께. (가발 벗는다)

 

 

49. 민주집

 

화장 싹 지우고 예전 모습으로 욕실에서 나오는 민주, 들고 나온 가발과 옷 등의 변장도구들 들고 망설인다.

이윽고 결심한 듯 쓰레기통에 넣고 나가는 민주.

 

 

50. 화려한 도심 배경 + 유진 차안 (저녁)

 

스르르 도착하는 차.

기대감에 차서 민주 기다리고 있는 유진, 한껏 멋을 낸 화려한 차림으로

구강청정제 입 속에 뿌리고는 거울 열어 머리 모양 정도 살핀다.

 

 

51. 공원 (저녁)

 

공원 벤치에 앉아서 담배 피우고 있던 기표, 뛰어 오는 민주를 보고 담배를 끄고 일어선다.

민주,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다. 반가운 얼굴이다.

 

민주 : 오래 기다렸어?

기표 : 아냐... 앉자.

민주 : 어... (벤치에 앉아 힐끗 어두운 기표 표정 보는)

기표 : (옆에 거리 두고 앉고) ...

민주 : 안 그래도 오빠한테 할 말 있었는데... 오빠 나,

기표 : (괴로움에 먼저 말하는) 나 다음 주에 미국 간다.

민주 : (깜짝 놀라고)

기표 : (고개 푹 떨구고)

민주 : 오빠... 9월에... 가는 거 아니었어?

기표 : (변명) 미리 가서 어학 연수 받고 그럴려구...

민주 : (입모양으로 ‘나는...’ 하다가 멈추고)

기표 : (그런 민주 보는) ...솔직히 얘기할께.

민주 : (서늘한 느낌에 기표보면)

기표 : 나... 너 자신 없다, 민주야.

민주 : (쿵해서 보고)

기표 : (민주를 차마 못보고 얘기하는) 그동안 생각 많이 했어.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자조적인) 나, 정말 못나고 못난 놈이드라. 니가 갖고 있는 고민, 아픔... 이런 거 다 덮어주고, 다독여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게 있을 거라는 거.. 그 생각들 미처 못했어.

 

괴로움에 이 악물고 얘기하는 기표 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 받는 민주.

 

민주 : 그게 무슨... (하다가 느낌에 멈칫)

기표 : 니 상처가 너무 커. 너무 커서, 내가 감쌀 자신이 없어... (눈물 젖은 눈으로 민주 보며) 널 더 힘들게 할 거 같애서,

         그래서.. 혼자 가기로 결정했어. 미안하다.. (고개 숙이고)

 

충격에 눈물 어리는 민주, 얼른 눈물을 삼키고 하늘을 본다. 작은 별 하나도 떠있지 않다.

 

 

52. 거리 (밤)

 

차에서 나와서 서성이고 있는 유진. 오가는 여자들 유심히 쳐다 보지만 민주는 오지 않는다.

시계 보면 9시 10분. 열 받아서 ‘에이!’ 하며 발로 차 바퀴 확 차는 유진.

 

 

53. 민주집 빌라 앞 (밤)

 

어느새 날리기 시작한 눈발. 걸어오던 민주, 우두커니 선다. 막막한 얼굴이다.

 

기표 : (E)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도 있을 거라는 거...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

기표 : (E) 니 상처가 너무 커서, 내가 감쌀 자신이 없어.

 

뭔가 느껴지는 민주.

 

 

54. 민주집 (밤)

 

외출복 그대로 코트도 벗지 않고 전화하고 있는 민주.

 

지연 : (F) 결혼한 후에 알게 되서 문제 생기는 것보다, 미리 아는 게 낫다 싶었어.

민주 : ...

지연 : (F) 기표씨,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야. 남자들 대개 다 그렇겠지만. 알고도 너하구 결혼하겠다, 그러면

         다행이라구 생각했어.

민주 : (울음 덩어리 꿀꺽 삼키고)

지연 : (F) 미안해, 민주야...

 

전화 끊는 민주. 새삼 밀려드는 충격과 배신감에 떨리는 민주.

 

 

55. 대학 도서관 앞 (다른 날, 낮)

 

서있는 민주. 도서관에서 나와서 민주에게 다가오는 기표.

 

민주 : (배신감) 그거였어? 오빠 능력으로 안 된다는 게... 그거였어?

기표 : ...

민주 : 내 상처를 감당 못하는 게 아니라, 산에서 내가 모르는 남자한테 당했던 거... 그걸 감당 못하겠다는 거지?

기표 : ...미안하다...

민주 : (확인하고 굳어지고)

기표 : 미안해...

민주 : 한때... 오빠가 내 끈인 줄 알았어. 내 입으로 말해서, 다시 그 기억 떠올릴까 봐... 그게 끔찍해서 말 못했던 거지,

         (자괴감) 오빠 이런 반응 걱정해본 적은 없었는데...

기표 : (맘아픈) ...

민주 : 알았어, 됐어요... 가.

기표 : (울컥하는) 민주야.

 

먼저 돌아서 가는 민주, 배신감과 모멸감 누르며 꼿꼿이 가려는데 눈물 솟구친다.

 

 

56. 한강 다리 위 (동작대교 정도, 저녁)

 

민주, 다리 철제 난간에 위태롭게 기대 서 있다.

멀리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도심, 비정한다.

난간에 허리 걸치고 아래 내려다본다. 아득한 강물.

바닥을 향한 민주의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잠시... 눈물 수습하는 민주, 이 앙다물고 돌아선다.

 

 

57. 은행 (다른 날)

 

의자에 앉아서 잡지 책 펼쳐 놓은 채 유진 보고 있는 민주, 증오의 눈빛이다.

여전히 선량해 보이는 유진의 얼굴.

문득 시선 돌리다가 혜영의 얼굴에서 멈춘다.

예전과 달리 초췌하고 불안해 보이는 혜영, 전표 들고 일어나서 뒷자리 과장에게 간다.

가면서 유진 두렵게 힐끔거리고 가는 혜영.

순간 이상한 느낌에 몸 곧추세우고 보는 민주.

혜영과 달리 여유만만하게 혜영을 쳐다보는 유진.

전표 받아들고 오던 혜영, 유진과 시선 마주치자 볼에 덴 듯 고개 돌린다.

민주, 설마?... 보는데 유들유들한 눈으로 혜영 보다가 핸드폰 문자 찍는 유진.

문자 알림음에 확인하는 혜영, 두려움과 증오 가득한 눈으로 유진 본다.

그런 혜영을 비아냥과 자신감이 묻어있는 미소로 보는 유진.

굳어서 보고 있는 민주.

 

민주 : (N) 그녀의 얼굴에서... 내가 보인다.

 

 

58. 은행 건물 일각 구석진 복도, 또는 계단

 

혜영 벽에 밀어붙이고 얘기하고 있는 유진.

 

혜영 : (떨리는) 왜 이래요?

유진 : 너야말로 왜 이렇게 촌스럽게 굴어.

혜영 : (겨우) 당신... 경찰에 신고할거야.

유진 : 신고? 뭐라고 신고할건데? 니가 꼬리 쳐 끌어 들여서, 니 방에서 당했다구?

혜영 : (분노와 두려움에 떨리고)

유진 : (이죽거리는) 그날 왜 바로 신고 안했니? 해봤자 너만 망신당할 거 알아서 못한 거 아냐.

         니가 나 좋아했던 거, 온 은행 사람들이 다 아는데, 니 말을 믿겠니?

혜영 : (부인 못하고 모멸감에 떠는) ...개자식.

유진 : (빠르고 낮지만 위압적으로) 은행에서 촌티내지 말란 말야. 세련되게 하잔말야, 세련되게.

         그렇게 계속 촌스럽게 굴 거면, 회살 관두던가. (냉정한) 그 얘기할라구 불렀어. 알아 들었지?

혜영 : (눈물 그렁한 채 덜덜 떨며 유진 본다)

 

 

59. 건물 일각

 

둘의 대화 듣다가 유진의 잔인한 이중성 확인하고 경악하는 민주. 분노와 증오로 몸이 떨린다.

 

 

60. 민주집 (밤)

 

소파에 두발 올리고 굳은 얼굴로 앉아있는 민주,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인터컷> 벽에 혜영 밀어붙이고 얘기하던 유진.

 

민주, 치밀어 오르는 분노 못 이기고 일어서려고 발 내리다가 한쪽에 쌓아놓은 비디오 몇 개 건드려 우르르 쓰러진다.

비디오 간추리다 ‘트랩트’ 보는 민주, 멈춘다.

뭔가 생각난 듯 책꽂이에서 몇 달 전 ‘월간 여성’ 꺼내는 민주, 급하게 페이지 찾아 펼치면 ‘영화 속의 죽음들’ 이란 기사 나온다.

기사 읽는 민주.

 

 

61. 몽타주

 

-민주집 인근 공터(낮)

기표에게 받은 선물과 사진들 태우고 있는 민주.

-민주집(밤)

인터넷 검색하는 민주. 모니터에 심부름 센터류의 싸이트들 떠 있다.

-산(낮)

동굴이 있는 산 오르는 민주.

 

 

62. 휘트니스 센터 (늦은 오후)

 

근육 기구 운동하는 유진. 앞에 와서 서는 여자 몸 보고 올려다 보면 민주다.

 

유진 : (놀라는) 어?

민주 : 아... 재미 없다. 혹시나 하고 와 봤는데 정말 있으면 어떡해요?

유진 : 예?

민주 : (천연덕) 이렇게 되면, 익명의 신비가 사라지잖아아요.

유진 : (어처구니 없어 허- 웃고)

 

 

63. 바 (저녁)

 

칵테일 잔 정도 놓고 마주앉아 있는 민주와 유진.

 

유진 : 지난번에 왜 안 나왔냐니까?

민주 : 만나기 싫어서요.

유진 : (어?) 그럼 오늘은, 왜 찾아 왔어요?

민주 : 그래야만 했어요.

유진 : 익명이라구 그렇게 멋대루면 곤란한데. 내 쪽에서 사절할 수도 있어요.

민주 : (웃으며) 어떡하면 봐 줄 건데요?

유진 : 약속 못 지킨 벌로, 같이 산에 가요.

민주 : 산?... (의미있는 미소로 보다가) 이왕이면 야간 산행 어때요? 올라가면서 별 보고, 정상에서 해돋이 보구.

         그렇게 좋다면서요?

유진 : (반색하는데)

민주 : 그거 모르죠?

유진 : 뭐가요?

민주 : 늘... 당신 목소리가 들려요.

유진 : (무슨 말인가 벙하는데)

민주 : 당신 목소리... 당신 모습... 나한테서 떠나질 않아요.

유진 : (이 여자가 날 좋아하나?) 그거 사랑 고백인데. 그러니까 지금 작업하시는 겁니까?

민주 : 당신,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요. 어떤 유형의 인간일까...

유진 : 어떤 유형? 때, 장소, 사람, 상황, 뭐 이런 거에 따라 다 다른 게 사람이잖아요.

민주 : 그래도 자기를 규정 짓는다면 어떤 쪽이에요? 이를테면 좋은 쪽 아니면 나쁜 쪽.

유진 : 글쎄요. 그렇게 흑백 딱 두 가지로 인간을 나눌 수 있을까요?

민주 : 그렇다면 이런 건 어때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쪽 아니면 받는 쪽.

유진 :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런 것도 기준이 상대적인 건데?

민주 : (보면)

유진 : 때론 상대에게 주는 피해가, 나한테는 이익이나 쾌감이 줄 수도 있죠.

민주 : 남한테... 고통을 주더라도 말이죠?

유진 : 완벽하게 내 자신한테 충실할 때, 그러니까 이기적 본능에 층실할 때 받는 쾌감이 얼마나 큰 줄 알아요?

         그쪽은 그런 거 느껴본 적 없어요? (남은 술을 훌쩍 마신다)

민주 : 아직까진 그래 본 적이 없는데... 이젠 그래봐야겠어요.

 

민주, 굳은 얼굴로 유진의 빈 잔에 술을 따라준다.

 

 

64. 민주집

 

석고상처럼 해쓱한 민주, 무표정한 얼굴로 짐 싸고 있다. 구석에 박스들 서너 개 쌓여있다.

라디오에서 ‘중부 지방에 밤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 새벽녘엔 눈으로 바뀌어 내린다는... 일기예보 나온다.

(*일기예보팀에 의뢰해 적당히 멘트 작성할 것)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잠시 동작을 멈추는 민주. 이내 다시 짐을 싼다.

 

<시간 경과>

짐 쌓은 박스들만 쌓여있는 썰렁한 집. 비어있다.

책상 위에 ‘**신문사 앞’ ‘엄마’ 라고 써 있는 편지봉투 두통 놓여있다.

 

 

65. 서울 근교 외곽도로

 

달리는 유진 차.

 

 

66. 유진 차 안 (해질녘)

 

운전하는 유진 옆에 앉아 있는 민주.

신나는 음악에 맞춰서 핸드을 두드리는 유진, 기분 좋은 얼굴이다.

 

민주 : (밖 내다보며) 산에서 별 보려면 날이 맑아야 할텐데.

유진 : (찔끔해서 보고)

민주 : 날이 흐려요.

유진 : (둘러대는) 저녁 다 돼서 그래요. 걱정 말아요.

 

유진, 연신 싱글벙글하고 민주,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67. 산 일각 (저녁)

 

어둑한 산길. 등산 배낭 맨 민주와 유진, 해드 랜턴 쓰고 산길 오르고 있다.

유진 뒤를 따라 오르는 민주, 힘겹게 오른다.

유진, 저만치 뒤쳐진 민주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린다.

 

유진 : (다가온 민주에게) 산악부 출신 맞아요? 아직 초입인데, 힘들어요?

민주 : (지나치며) 가요, 날 밝기 전에 못가겠어요?

유진 : 좀 쉬었다 갈래요?

민주 : (시계 보고) 아뇨. (가고)

 

유진, 허 하고 한번 웃고 민주를 따른다.

하늘 한번 쳐다보고 시계 보는 민주.

 

 

68. 산 일각 (밤)

 

오르고 있는 민주와 유진. 앉기 적당한 바위가 있는 곳.

 

민주 : (시계 보며) 여기서 좀 쉬었다 가요. (멈춰 선다)

유진 : (신기한 듯) 여기가 쉬기 딱 좋은 곳인데, 어떻게 알았어요?

민주 : (앉으며) 이 산... 잘 아나 봐요?

유진 : 말했잖아요. 혼자서 몇 번 왔었다구.

 

선 채로 주위 둘러보고 하늘도 쳐다보는 유진.

주섬주섬 배낭에서 작은 보온병 꺼내는 민주, 컵에 따라서 유진에게 건넨다.

 

민주 : 중국차에요. 긴장을 풀어준대요.

유진 : 땡큐. (받아서 마시고)

민주 : (마시는 유진 의미 있게 보고)

유진 : 좀 떫네.

민주 : 긴장을 풀어 준다 길래 좀 진하게 탔어요.

유진 : 안 마셔요?

민주 : 난 생수 마실래요. (작은 생수병 대고 마시는데)

유진 : (소리) 이거 무슨 차에요?

민주 : (흠칫 놀라) 네?

유진 : 진짜 긴장 풀리는 거 같애. (잔 내밀며) 한잔 더 줘요.

 

어? 계산 착오다, 싶은 민주. 어쩔 수 없이 잔 받아 들려다 발이 미끄러져 보온병 떨어뜨린다.

어머! 하며 보온병 찾아 거꾸로 집어 드는 민주.

 

민주 : 다 쏟아졌어요.

유진 : 일부러 쏟았잖아요.

민주 : (덜컥해서 보면)

유진 : (하하 웃으며) 농담이에요.

민주 : (하늘 쳐다보며) 별이 안 보여요.

유진 : (같이 보며, 모른 척) 그러게요...

 

하는데 빗방울 한 두방울 유진 얼굴에 떨어진다. 드디어... 씩 웃는 유진.

 

민주 : (당황한 척) 어머! 비와요!

 

 

69. 동굴 입구 (밤)

 

겨울비 치고는 제법 쏟아지는 빗줄기.

유진의 안내를 받아 민주 동굴로 들어간다.

 

 

70. 동굴 (밤)

 

등산 후드 뒤집어 쓰고 뛰어 들어오는 유진과 민주.

냉기 서린 동굴. 민주, 소름 돋는 듯 몸을 떤다.

민주, 천천히 동굴 둘러 본다. 어느새 창백해지는 안색.

기억을 더듬듯 동굴을 은근한 눈길로 빠르게 훑어보는 유진. 한 바퀴 돌던 시선이 민주와 마주친다.

 

유진 : 봐요, 비 피할만 하죠?

민주 : (두 팔로 자기 몸 감싸 안는다)

유진 : 한겨울에도 여긴 제법 따뜻해요.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죠. (웃으며 민주 보며) 잠깐만 기다려요.

 

해드 랜턴 벗어서 동굴 구석 찾다가 마른 나뭇가지 발견하고 반색한다.

그런 유진 굳은 얼굴로 보고 있는 민주.

 

유진 : (신기한) 야, 땔감까지 있네. (들고 와서 내려놓으며 민주 본다)

 

가슴이 답답한 듯 큰 숨 몰아쉬는 민주.

유진, 크게 움직이는 민주의 가슴팍에 시선이 간다.

 

민주 : ...갑갑한 덴... 싫어요.

유진 : 그럼 배낭이래도 벗어요. (와서 민주 배낭 벗기려고하고)

민주 : (기겁하는) 됐어요.

 

민주, 배낭 벗기려는 유진의 팔 밀친다.

그 바람에 주춤 휘청하던 유진, 얼결에 민주의 어깨 잡는다. 민주, 기겁하며 밀쳐내고.

 

유진 : (황당한 듯) 왜 그래요?

민주 : ...됐다잖아요.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고)

 

유진, 움치리는 민주의 모습에 자극 받은 듯 순간 눈이 번득인다.

서서 시계 한번 보고 동굴 밖 내다보는 민주.

그런 민주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유진,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 느낀다.

 

유진 : (고개 흔들어 정신 깨우고) 당신, 나 좋아서 만났던 거 아냐?

민주 : (돌아선다. 굳은 얼굴)

유진 : 이거 영 딴 사람이네? 익명적 만남 어쩌구 할 땐 제법 당당하더니, 왜요, 내가 무서워요?

민주 : (징그럽게 쳐다본다) 징그러.

유진 : 뭐? (성큼 다가와 민주 팔 잡는)

민주 : (낮게) 놔.

유진 : (재밌다) 촌스럽게 왜 이래? 젊은 남녀가 몇 번 만나서 탐색전 끝냈으면, 이젠 진도 제대로 나가야 되는 거 아냐?...

         (하는데 자꾸 감기는 눈)

민주 : (시계 보며) 그럴 시간 없을 거야, 삼십 분 지났거든.

 

? 하는 유진,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무거워지는 눈. 동시에 흐릿해지는 민주의 얼굴.

순간 비틀하며 쓰러지는 유진.

 

<시간 경과>

이젠 비가 눈이 되어 내린다.

의식 잃은 유진의 얼굴. 어느 순간 꿈틀하며 눈 뜬다.

타닥타닥 타고 있는 모닥불 불빛 아래 자기를 보고 있는 민주.

유진, 퍼뜩 정신 차리고 일어서려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양 팔 뒤로 묶여 있고 발목 역시 묶여 있다.

놀라서 민주 보는 유진.

 

유진 : (놀라) 이거 뭐야! 왜 이래! 날 왜 묶어 논 거야!

민주 : 깼어? 그러게 아무 거나 덥석 받아 마시면 안 돼지.

유진 : (제대로 안 들린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거 풀어! 풀고 말해! 이게 무슨 짓이야! 너 나한테 왜 이래!

민주 : 서,유,진. 나이 30세. 미혼, 취미 등산, 청주가 고향이고 서울에서 자취중인 대교은행 명동지점 대리.

         특유의 친화력과 훤칠한 외모로 초고속 승진 중. 전형적인 범생이었으나, 2년 전 등산 중 조난 당한 여성에게

         야수적 만행을 저지른 후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성행위에 중독, 지금은 인간의 얼굴을 가장해 낮과 밤이 다른

         이중적 생활을 하고 있는 다중 인격자.

유진 : (OL 기겁해서) 너... 누구야!

민주 : 이 산에... 온 적이 있어. 그때도 비가 왔었지, 아주 많이.

유진 : (영문 몰라 보다가 퍼뜩 떠오르는, 설마?...)

민주 : 그날 이 동굴 속에... 두 마리 짐승이 있었어.

유진 : (그 여자구나!) ...다,당신...이었어?

민주 : 난 니가 짐승인 줄 알았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2년을 버텼지.

유진 : (더럭 두려워지는) 이, 이 봐!

민주 : 그런데, 멀쩡하게 사람 얼굴로 사는 널 봤어. (주사기 꺼내드는)

유진 : 뭐야? 그게 뭐야! (온몸 비틀며 저항하고)

민주 : (담담하고 냉정하게) 이 주사를 맞으면... 우선 약 1분 내에 사지를 꼼짝 못하게 될 거야. 보고 듣기는 해도, 움직일 순 없지.

         일종의 동물 안락사용 독극물인데 주로 대학 등의 실험실에서 사용한다고 하더군.

         물론 사람으로는 오늘 네가 그 첫 번째 모르모토가 되는 셈이지.

유진 : (무슨 말인가? 벙해서 보고)

민주 : 그 다음엔... 약효가 점점 심장을 향해 가지. 그 전에 먼저 신경이 마비되면서 호흡이 힘들어 질 거야.

         근육이 당기면서 경련도 일어날 거고. 꽤 고통스러울거야...

유진 :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애써 부정하려는 듯) 지금 농.. 농담 하는 거지? 나, 겁 줄려고..,.

민주 : (싸늘하게) 심장이 멈춰야... 고통도 끝나...

유진 : (두려운) 너 미쳤어? 미쳤어! (악쓰는) 이거 안 풀어!

민주 : 오늘을 위해 이 산을 다섯 번 왔었어. 산 밑에서 아까 쉬던 곳까지 두 시간. 쉬던 곳에서 이곳까지 25분.

         땔깜도 미리 갖다 놨지.

유진 : (계획적이었음 확인하고 놀라는데)

민주 : (주사액 모두 빨아 들인 뒤, 동요 없이 유진 누르고 목에 주사기 찌르면서) 굿바이. 미스터 몬스터!

 

단발마 비명 지르며 버둥대다가 그대로 축 늘어지며 멈추는 유진.

침착하게 유진 팔목 풀어주고 몸 바로 눕히는 민주.

정말 민주의 말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 유진.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민주 본다.

그런 유진 앞에 무릎 세우고 앉는 민주.

 

민주 :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지?

유진 : (그렇다는 듯 눈 깜빡이고)

민주 : (다른 주사기 꺼내 보이며) 해독제가 있어.

유진 : (절박해서 눈 커지는)

민주 : 무섭고 두려울거야. 내가 이 해독제를 안주면 어떡하나, 심장이 떨리고 떨려서 당장 멎어버릴 거 같을 거야.

         (비웃듯) 고통스럽지. 너무 무섭고 겁나서... (차가워지며) 그 고통이, 2년 전에 내가 느낀 고통이야.

         니가 니 변태적 쾌감을 위해 짓밟은 여자들이... 영혼이 짓밟힌 그 순간에 느낀 고통이야.

유진 : (눈에 눈물 고인다)

민주 : 충분히 느껴봐. 내가, 그 여자들이 어땠는지.

유진 : (두려움과 공포의 눈동자)

민주 : (시계보며) 지금쯤 가슴이 뻐근하기 시작했을 거야. 당신 심장이 굳어가고 있는 거지. (일어나서 등 돌리고 선다)

유진 : (눈에 핏발 서고)

민주 : 당신 시체는 오래도록 발견되지 않을 거야. 어쩌면.. 한 일년 후 까지도. 동굴 반대편 절벽 아래 깊은 계곡에 버려질 거거든.

         알지? 당신 시체가 발견돼도, 흔히 있는 실족사 정도로 처리될 거라는 거. 그 약물은 체내에 그리 오래 잔류되지 않는다는

         아주 훌륭한 장점을 갖고 있거든. 게다가 이렇게 고맙게도 눈까지 내려주니 당신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겠지.

유진 : (점점 호흡이 힘들어진다. 극도의 공포 오고)

민주 : (시계 보고) 내가.. 누구냐고 했지. (돌아와 유진 앞에 앉는다) 너한테... 밤새 살려달란 얘길 백 번도 더했던 내가 누구냐구?

         그래, 내가 누군지는 알고 가야지... 강민주.

 

민주 이름을 듣는 순간 절망하는 유진의 눈. 증오가 가득 담긴 민주의 눈.

민주, 해독제 주사약 밖으로 뿜어낸다. 미칠 듯한 절박함으로 보는 유진.

 

민주 : 강, 민, 주!

 

유진, 마지막으로 민주 얼굴 본다. 차가운 눈빛, 2년 전의 바로 자신의 눈빛이다.

점점 눈 커지는 유진, 고통에 일그러진다. 그러다 눈 부릅뜬 채 숨 멎는 유진.

민주 눈에서 툭 떨어지는 눈물. 민주,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71. 정상 (새벽)

 

맑게 개인 산. 정상 바위에 서 있는 민주, 환하게 솟아오르는 해 보고 있다.

유진과 다르지만 또 유진과 마찬가지로 어떤 선을 넘어버린 민주.

눈물 어린 민주의 담담한 표정에서 엔딩. <끝>

 

 

 

 

 

 

 

 

 

 

 

 

 

 

 

 

 

 

 

 

 

 

 

 

 

 

 

첨부파일 625타인의취향.hwp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다반향초 | 작성시간 14.11.14 고맙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