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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연속][패션 70s] 정성희 - 시놉시스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1.04.20|조회수1,208 목록 댓글 0

[패션 70s] 정성희 - 시놉시스

 

 

 

 

 

▣ The Stage

 불안한 천칭위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저울질하는 처연한 투사들,
 기성의 세계를 파괴하고 깨어 나와 한 시대를 지배했음에도,
 군림할 수 없었던 네 젊은이들...

 한국전쟁 속에 엇갈린 운명을 겪게 되는 어린 생명들이
 삶의 고통을 딛고 무(無)에서 유(宥)를 창조해가는 ‘패션 신화’의 세계와
 1960, 70대 격동의 시기 속에 공존한 상류사회의 극단적이고 화려한 문화와
 서민사회의 애잔한 한(恨)의 문화를 ‘야망과 사랑’이라는 소재를 통해
 새로운 표현 방법으로 구현함으로써 한국 시대극의 새 지평을 열고자 한다.


▣ The Background

 우리들 누구에게나 결핍이 있다. 그 결핍이 먼 과거에서, 유년에서 시작된 것이든..
 현재 진행형이든.. 누구나 저마다의 심연(深淵)에, 저마다의 눈물겨운 결핍이 담겨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자신을 추진해 나간다.   
 
 ‘존재에 대한 결핍’,  ‘관계에 대한 결핍’,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대한 결핍’
 이 드라마는, 인간 내면의 결핍과 그 결핍을 채우려는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의 결핍은 사람을 비굴하고 비참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이 해소되 고 나면 그 과거가 지울 수 없는 치명적 상흔으로 남지는 않는다.
 그러나...
 존재를 묻는 결핍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많은 부와 명예를 축적해도 끊임없 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살리에르가 신과 모짜르트를 증오했던 것처럼,
 우리는 결핍으로 인해 스스로를 증오하고, 타인을 질시하며, 불공평한 신을 원망한다.
 휏숀70s를 통해, 우리의 감춰둔 결핍을 드러내 보고,
 수면위로 드러난 그 축축한 결핍의 응어리들을 따뜻한 햇볕에... 꾸덕하니 말려보고 싶다.
 천재 모짜르트와 수재 살리에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행복한 범인들이 평안히 공존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면, 우리 조금은
 생이 여유롭고 행복하다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1. 누가 패션계의 지존이 될 것인가? 
    - 엘자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와 코코 샤넬(Coco Chanel) 그리고, 패션 신화의 세계!
 
 모짜르트와 살리에르를 기억하는가?
 ‘천재의 유희’를 교감한 ‘수재 평론가의 감상’이
 살리에르라는 예술가를 모짜르트의 그늘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처럼 천재를 알아본 또 다른 수재가,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천재를 위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게 세상이다.
 반면 천재를 인식하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절대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수재가 있다.

 엘자 스키아파렐리.
 그녀는 생의 시작과 끝, 모두가 샤넬과는 대조적인 인물이다.
 이태리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엘자는 살바도르 달리, 쟝 꼭도 등과 함께 생을 논하며,
 1930년대 패션계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의상’이라는 생활필수품에 초현실주의 사조를 최초로  담나낸 현 대 디자인의 개척자이며, 의상을 예술로 승화시키는데 초석을 쌓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늘 속으로 그녀를 밀어 넣은 천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십세기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가브리엘 코코 샤넬.
 천재 디자이너였음에도 불구하고, 결핍으로 얼룩진 그녀의 삶은
 그만큼 치열하고, 화려하고, 매혹적이었다.
 
 프랑스의 소도시 소뮈르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고아원에서 전전하던 샤넬은 결국 수녀원으로  보내지지만, 자신이 직접 모델을 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이용해 에띠엔느 발산이라는 한  부유한 청년을 유혹하고 그의 도움으로 파리 깡봉가(街)에 부띠끄를 연다. 코르셋으로 몸을 꽉  조이는 화려한 옷이 유행하던 시기에 ‘혁명적이며, 편안한 옷’을 만들어낸 샤넬은 일차대전을  거치며 일약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성장한다.
 그런 샤넬을 두고 스키아파렐리는 ‘음울한 쁘띠 부르주아지’라며..
 천재였지만, 괴팍하고 우울한 샤넬의 성격을 공격했고,
 샤넬은 스키아파렐리를 ‘옷을 만드는 이탈리아 여성’이라고 칭함으로써
 그녀의 능력을 평범하고 아둔한 것으로 애써 폄하했다.
 1950년대 샤넬이 다시 재등장할 때까지 두 사람은 철저히 다른 인생을 살았고,
 철저히 다른 인식으로 패션을 창조했으며,
 지치지 않고 싸워나갔다.

 샤넬과 스키아파렐리의 이야기만큼 매혹적인 경쟁담은 흔치 않다.
 그들의 대결을 통한 패션 예술과 패션 산업의 성장 과정을,
 이 드라마... 휏숀70s에 활기차게 담아보고 싶다.
 코코 샤넬과 그녀의 호적수였던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드라마틱한 경쟁담처럼
 ‘레나’와 그녀의 호적수 ‘준희’가 사랑과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을 치열하게 그려 나가고 싶 다.
 ‘혁명적인 소재와 디자인을 통해 입는 이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마법 같은 옷’을 만드는 레나와
 ‘보기만 해도 그 화려함에 숨이 막혀오는 카리스마가 담긴 의상’을 만드는 준희.
 천재 레나에게 옷이란 천직이고 유희였다면, 수재 준희에게 패션은 예술이고 노력이었다.
 
 패션계의 거두가 되는 두 여인의 절체절명의 경쟁을,
 드라마틱한 에피소드와 관계 속에 펼쳐나감으로써
 보는 이가 그들의 호쾌한 승부에 동참하는 듯한 현장감을 느끼게 하겠다. 
 
2. 중근세 유럽 귀족사회를 곁에서 체감한다 - 화려한 드라마
 
 많은 이들이 빛바랜 지난 시대를 배경으로 가져오겠다고 하면, 질겁을 한다.
 ‘그렇게 칙칙한 이야기를 누가 봐?’가 그 질겁의 이유인데.. 과연 그럴까?
 1960-70년대가 과연 그토록 무겁고 칙칙한 시대이기만 했을까?
 그 시대를 짙은 회색으로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은 아닐까?
 휏숀70s의 배경이 되는 그 시대는 그리 무겁고 어두운 시대만은 아니었다.
 당연히, 휏숀70s에서 표현되는 60, 70년대와 상류사회는 중・근세를 배경으로한
 유렵 영화보다 아름답고 화려할 것이다.

 그 시대의 정치는 늘 그 시대인들의 삶을 규제하고,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을 걷어내고 보거나,  그 막후에서 그들을 바라본다면.. 막 출발하려는 증기기관차처럼 에너지가 넘쳐나고 있다.
 그 무엇보다 입지전적인 성공의 기회가 살아있는 가능성의 시대였고,
 그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의 시대였다.
 그 가능성의 시대를 불꽃처럼 살아간 네 젊은 영혼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우리나라 정치・외교와 패션의 흐름, 패션 철학, 역사 철학, 시대의 센세이셔널을 창조하는 주인 공들의 활약을 다이나믹하고 화려하게 그려나갈 것이다.
 60, 70년대 상류층의 세련된 유럽풍 문화와 전문적인 패션의 세계를 통해,
 여성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패션에서 자칫 소외될 수 있는 남성시청자들에게는 ‘킹 메이커’의 모습을 그려,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이 굵은 드라마가 될 것이다.


3. 에어포스 원, 공군1호기를 밥 먹듯이 올라타는...
    그런데도 빨치산(partisan)의 기질이 넘치는 대통령 수석 보좌관 동영,
     그를 친동생처럼 따르는,.... 바다 속을 병적으로 사랑하는 오픈 워터 다이버 장빈,
      대통령 보좌관 동영과 밀수꾼 다이버 장빈...
        그들이 사랑을 다투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비운의 천재 디자이너 레나,
          넘치는 카리스마가 그 천재를 압도하는, 그래서, 그녀의 사랑을 위협하는....,
     고혹적인 패션의 여왕 준희.
               -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버린 가슴 저미는 사랑 이야기
 
 20여 년 동안 세 번을 만나고 헤어지는 운명을 타고난 네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이 지극히 일상 적인 삶의 궤적 속에 그려짐으로써, 알게 모르게 그 충격적인 사랑과 운명의 스토리에 조금씩  조금씩 젖어들게 하겠다. 그래서...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부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퍼져 나오는 작은 떨림에 펑펑 눈물을 쏟지 않 을 수 없는, 다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을 통해 본인의 삶과 사랑을 이해하고 위로받을 수밖에 없는...
 뼈를 에이는 여운과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

 

▣ About The Drama

 ◆ 극본 : 정성희
           <흐르는 것이 세월뿐이랴> (’99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연출상, 대상)
     <국희> (’00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연출상, 대상)
  ’91 작가세계 창장문학상 수상
  ’93 문화일보 춘계 문예 단편소설로 등단

 ◆ 연출 : 이재규
           <다모> (’04 백상예술대상 신인연출상, ’04 방송대상 우수작품상)
  
 ◆ 장르 : 멜로극, Success Story

 ◆ 형식 : HD TV 제작 미니시리즈 70분물
 

 

 ◆ 특징
 
         △ 대형 미니시리즈로 연속극과 미니시리즈의 장점을 취합
         - 미니시리즈가 가지는 화려한 이야기와 화면 구성, 몰입형 인물 관계, 강한 갈등 구  조의 멜로 라인 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연속극이 지니는 대형 서사 구도를 극의   큰 내러티브 골격으로 유지함으로써 연속극과 미니시리즈의 장점을 모두 채택.

         △ 미국식 ‘TV feature’에 근접하는 영화 같은 드라마
           ․Sony HD Camcorder CineAlta HDW F900 촬영
           ․필름과 흡사한 화질과 역동성
           ․16:9 사이즈 방송 송출
           ․부드러운 질감과 화사한 색감을 구현
           ․바디캠, 수퍼슬로우(고속), 개각도(셔터스피드 이용) 효과, 플라잉캠, 스틸어레이 효과   등을 통한 현대적 화면 구성

         - 일본 Sony社의 HD CAM 700시리즈나 750 시리즈류의 60i방식을 사용하는 방송   전용 카메라가 아니라 프레임 녹화 방식을 사용하는 Sony HD CAM HDW F900과   Panavision 단렌즈를 위주로 촬영하여 편집 및 CG 작업을 통해 다양한 2D 및 3D   효과를 사용함은 물론 가능한한 전편에 대한 rendering 과정을 거침으로써 필름과 흡  사한 화질과 24프레임의 역동성을 보이게 될 드라마로 X-File같은 '미국식 TV   feature' 드라마가 지닌 화면상, 내용상의 높은 완성도를 방송 드라마에 구현함으로써   ‘TV 영화’에 대한 제작자 및 시청자의 바람에 근접하는 영상물을 제작

     △ 현대 감각의 시대극
    - 시대극이 가지는 일반적인 구성이라기보다는 현대극에 가까운 인물 관계와 사건,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는 줄거리, 기존에 보여지지 않았던 소재 등 시대극적 그릇에   현대물 감성의 이야기를 담는다.
          - 중근세 유럽 영화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의상과 장식, 귀족 사회의 자유분방한 사교   문화와 반면 ‘백의민족’이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로 의복하면 백색 일색이었던 서민 의  상, 끼니만 제때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었던 서민 생활 등 두 사회 계  층의 생활과 문화, 의식과 관념을 대비시켜 갈등 관계를 이어감으로써 시청자의 오감  을 자극하고,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래에 대한 환상이라는 시청자의 두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구성을 취한다.

     △  다양한 시청층에 소구하는 재미있고 감동있는 그럴싸한 창작극
         - 당시 시대 상황과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소재와 사건을 중심 라인으로 채택하여   ‘개연성의 고리’를 놓지 않으면서도, 극성이 강한 상황과 관계를 창의적으로 설정하여   ‘허구의 미학’에 기여할 수 있는 드라마가 되도록 한다.
         - 상류계층이든 서민계층이든 서로의 시선을 통해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여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사회관을 견지할 수 있도록 한다. 
         - 고전극에 대한 고정 시청층, 사회성과 역사성이 함축된 의미 있는 드라마를 선호하는 시청층,
          
 신감각 영상물에 대한 매니아층, 감각적 멜로를 보고 싶어하는 여성 시청층,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극중 인물들의 성공스토리를 선호하는 시청층 등
          다양한 시청층에 대한 선별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도록 하되, 20, 30대를 주 시청 타겟으 로 한다.
       
 ◆ 주제 : 질풍노도의 시기에 엇갈린 운명을 타고난 네 젊은 영혼의 사랑과 야망

 ◆ 방송 : 20005년 4월 예정, 매주 월․화 밤 9시 55분

 ◆ 대본 : 2005년 3월중 14부 탈고

 ◆ 촬영 : 2003년 2월초 ~ 7월 중순 (140 회차 촬영 예정)

 ◆ 후반 작업 : 2003년 2월 ~ 7월 (후시 녹음, 편집, CG 등)

 

▣ Characters

더미 ・ 레나 이바넬리 (여, 7-25세)

 억척스럽다.
 석 달 열흘 밀림에 던져 놓고 굶겨도, 살아나올 거 같다.
 어찌어찌 흘러들어간 오스트리아에서 혼자 몸으로, 십팔년 째 씩씩한 척 살고 있다.
 기집애가 좀 연한 배 같이 사각사각한 구석도 있고,
 힘든 일 있으면 눈물 찔끔거리며 주저앉기도 하고,
 누구 어깨든 체면불구하고 기대기도 해야 이쁜데...
 강해도 너무 강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도통 울지를 않는다. 오히려 매일 웃는다. 늘 명랑하다.
 그런데.. 왠지 그 명랑함을 가만 보고 있으면 눈물난다.
 그 명랑함이 그녀가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컨셉이다.
 그래서 때로는 거짓말도 곧 잘하고, 얼렁뚱당 임기응변도 강하다.
 
  힘들면 쨈 깡통에 모은 10실링 동전, 찰랑 찰랑... 흔들며 논다.
 더 힘들면, 침대 밑, 바닥에 묻어 놓은 이십실링짜리 화폐 묶음 풀렀다, 묶었다 밤새 그 짓 하 며 기분 푼다.
 
 그러다보면 대략 사는 게 그럴 듯 한 것 같다.
 그래도, 기분이 고약하면...
 뭐.. 존재에 대한 슬픔이라던가, 뿌리 뽑힌 자의 고독 같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 벗어날 길 없 는 슬픔이 몰려오면 노래를 부른다.
 몬트제(Mondsee) 호수에 백포도주 한병 들고 나가, 유일하게 아는 한국노래 ‘서울야곡’을 고래 고래 불러 재낀다.
 한 오십번 부르고 또 부르다 보면, 기분이 좀 가라앉는다. 기분 가라앉으면, 유일하게 할 수 있 는 한국음식 누룽지 끓여 소금 찍어 먹고 양복점 출근해서 열심히 바느질 한다.

 좀..징하다 싶은 생명력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준희’라는 지 이름 잃어버리고, 부모 뺏기고
 오스트리아까지 흘러 들어가 먹고 사는 게 하루하루 전쟁이었을텐데.
 그 정도 안 강했으면 벌써 죽었겠지. 굶어죽지 않았으면, 외로워서 죽었겠지... 
 짤츠부르크, 몬트제.
 그녀가 십칠 년간 외톨이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다.
 그리고...
 그 십칠 년만에 그토록 목말라하던, 그리도 찾고 싶었던 삶의 목적이 그녀에게 찾아온다.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던, 희열의 ...127일....,
 동영과 함께한 시간이다.
 
 꿈처럼 스쳐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남자와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몬트제 호수곁, 작은 양복점의 재단보조로 나름대로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본명 고준희.
 태을방직 고창회와 오영수의 친딸.
 한국의 코코 샤넬이라 불리우는 패션여왕.
 그야말로 신이 사랑한 천재로, 운명이 선택한 여자.
 자신의 이름과 부모를 강희에게 빼앗기지만 끝내, 운명이 그녀를 위해 예비한 길을 걷게 되는  천재 디자이너.
 그러나 처음부터 성공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남다른 야망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정작 원한 것은, 어느 날 그녀의 일상에 바람처럼 들어와 바람처럼 사라진 남자, 동영에  대한 사랑의 복원이었다.
 그저 그 남자와 일생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껴안고, 열심히 바라보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
 그러나 운명은 그녀에게 소박한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때로 운명은 어찌나 냉혹한지..,  
 그녀에게 사랑 대신, 성공을 가져다준다.
 
 철도 들기 전에 바느질부터 배웠던, 엄지. 검지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옹이처럼 박힌 그녀는 결 국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된다.
 준희가 ‘다른 사람들이 입고 싶어하는 옷’을 만든다면,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옷’을 만드는 자기 몰두형이다.
 그래서인지 더미의 의상은 세상과 불화한다.
 시대를 앞선 그녀의 감각과 철학은 센세이셔널을 불러일으키지만, 비난의 표적이 되기 일쑤다.
 밝고 진취적인 성격이지만 천성이 허위나 가식을 극도로 혐오한다.
 그로 인해 상류사회 여인들과 트러블을 일으키고, 고난에 처하게 된다.
 코코샤넬처럼 타고난 약점을 극복하고 결국 패션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과 철학으로 장봉실의  후계자가 되고, 오뜨꾸뛰르의 명성을 갈아 없는 프레타뽀르떼의 신예 투사가 된다.
 하나에 모리가 오뜨꾸뛰르를 개척했다면, 더미 이바넬리는 프레따뽀르떼에 진출한 아시아 최초 의 디자이너이고, 그녀의 이름을 딴 브랜드, ‘Rena von Mondsee'는 프레따뽀르떼의 주요 메종으로  성장한다.

 그 많은 성공과 찬사, 그 많은 부와 명예, 이 시대 최고의 두 남성인
 빈과 동영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렇게 많은 것을 이루고, 얻었지만..
 결코 그녀가 원한 삶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다시 무언가를 향해 날아간다.
 그래서, 아름다운 여자...

고준희 (여, 10-28세)

 화려하다. 이쁘다.
 예쁜 것도 무기이고, 컨셉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이쁜 것을 갈고 다듬을 줄 알고, 이용할  줄 안다.
 거짓 같은 집안, 거짓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태생이 아름다운 여자이고, 귀족 같은 품성과 외모를 지녔다.
 그래서, 열살 나이부터, 지도 뭔가 잘못됐다 생각하기 시작한다.
 
 어디든, 어느 장소든 그녀가 나타나면 시선 집중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카리스마가 있다.
 아름답다 해서, 누구나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관심을 집중 시킬 수 있는 건 아닌데..
 그녀에게는 특별한 오라(aura)가 있다.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의 오라를 온 몸에 망토처럼 두르고 다닌다.
 그래서, 그녀가 발산하는 에너지는 때로 위험하다. 위험해서 고혹적이다.
 겉은 탐스럽고 윤기 나는 가을 사과 같은데, 속은 아무한테도 드러내지 않는 깊은 계곡에 고인  소(沼) 같다.

 예쁜 여자라 취미도, 한 취미 한다.
 열만 받으면, 다이버 마스터도 힘들어하는 구룡포 들포암을 가드도 없이 헤집고 다닌다.
 
 그 동네 혹돔과 매바리, 배지느러미 모양도 다 알고 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물 속에서 질질 짜기 시작한다.
 가질 거 다 가졌는데두, 외로워서 운다..
 ...고달퍼서 운다.....
 물도 안 새는 수경에 짠물이 그득해질 정도로, 혼자 눈물을 흘린다.
 근데, 남들 앞에서는 절대 안 운다. 참 난 년이다!
 
 익스트림 스포츠의 선구자쯤 될라나..
 가만 보면 이 여자 ‘깊이와 속도’를 즐긴다.
 취미로서의 속도부터, 인생의 속도까지
 톱이 아니면 참을 수가 없다. 전력 질주한다. 극한이 아니면 견디지 못하는. 언제나 극한을 꿈 꾸는 여자다.
 사랑도, 꿈도, 일도, 그 최종 결과물인 영광도 정극(正極)이어야, 최고여야 하는데... 누구하고도  나눠갖고 싶지 않은데, 갑자기 그녀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더미 때문이다.
 애초에 천재인 더미와 이것저것 얽히기 시작한 게 불운이다.
 참, 되도 않는 기지배가 벽으로 부딪히다니! 
 더미가 코코 샤넬이라면, 준희는 엘자 스키아파렐리다. 사사건건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본명 강희.
 태을방직의 고창회, 오영수의 딸로, 잃어버린 딸 더미 대신,
 ‘준희’라는 더미의 본명으로 더미의 호적으로 길러진다.
 엘자 스키아파렐리처럼 태생이 귀족적이고, 화려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여자.
 꿈꾸는 만큼 노력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줄 아는 근성을 지녔다.
 천재의 재능을 알아볼 수 있지만, 자신은 그 재능에 미치지 못한다 생각에 괴로워한다.
 더미를 이길 수 없다는 열패감과 이기고야 말겠다는 오기 때문에 자신을 죽일 듯 몰아세운다.
 더미와 다른 길을 걸었으면, 행복할 수도 있었겠다.
 조금만 더 평범하고, 조금만 더 욕망의 크기가 작았더라면.

 그러나 그녀, 평범한 생을 원치 않았다.
 전부(全部)가 아니면 전무(全無)를 택하는 활화산 같은 격정 때문에, 인생이 고달프다.
 욕망을 실현하는데 따르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위험이 설령 자신의 목숨이라 해도 기꺼이 치룰 수 있는 용기가 있다.
 매일 매일을 자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치열하게 살아간다.

 천부적인 사업感을 지녔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야심만만함과 자신감이 있다.
 천성이 클라식한 기품으로 넘치지만, 오만하다.
 오만할 수밖에 없을 만큼의 재능과 열정이 있다.
 
 게다 포식자 같은 동물적인 감을 지나고 있어,
 언제 상대의 급소를 물어뜯어야 할지 타이밍을 알고 싸움을 건다.
 원하는 것에는 자신의 전부를 다 걸 줄 아는 승부사다.
 그러고 보니 하나도 안 갖춘 것 없는, 한 마디로 잘난 여자다.
 
 스킨스쿠버를 하면서 알게 된 동영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사랑을 하던, 디자인을 하던 목숨을 걸고 하기에 늘 위태롭다.
 그녀의 패션은 클라식하고 화려한, 바로크・로코코 양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그런 네오 클라식에 입각한 화려함이나 수공의 정교함으로 의상 그 자체만으로도
 일반 디자이너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녔다.
 더미의 혁명적인 의상과는 대비되는 디자인으로,
 허영 많은 사교계 여성들과 배우, 연예인들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희는 늘 더미에게 불타는 질투를 느낀다.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애증한 것처럼,
 신이 자신에게는 천재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재능과 열정만을 주고,
 더미에게는 새로운 장을 열 재능을 부여했다 생각하며, 더미를 격렬히 애증한다.
 그러나 준희는, 살리에르와는 달리 최고의 인생을 누리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김동영 (남, 31세)

 뜨겁다.
 뜨겁게 울 줄 안다.
 누군가를 만날 때면, 상대가 누구든 손부터 부여잡고 눈을 맞추고 이야기 한다.
 그 뜨거운 눈과 더운 손에 더미가 가슴을 열고, 준희가 사랑에 빠진다.
 하긴, 어느 여자들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빈이 사교계의 스타라면, 동영은 사교계의 왕자다.

 외무부 서기관.
 잘 생긴 대통령 외교보좌관이라는 타이틀도 그를 빛나게 하는 요소고.
 아버지가 국방부 장관인 정치 명문가라는 가문의 힘도 그의 후광이 된다.
 그러나, 정말 그의 매력은 ‘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신념을 위해서도 죽을 수 있고, 사랑을 위해서도 죽을 수 있다.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이기적인 사랑이 만연한 시대에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는 남자가 그리  흔한가.
 인생을 올인 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다 걸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미지근한 삶을 살아본 일이 없다.
 인도 서뱅골 지역에 초오라는 축제가 있다.
 축제의 마지막 날 밤, 축제가 열리는 공터에 벌겋게 불에 단 숯불을 깐다.
 신의 불로 자신을 정화하겠다는 강한 신념으로 마을 남자들이 맨발로 그 숯불 위를 달린다..
 동영을 보면, 그 숯불 위를 달리는 ‘남성성’이 떠오른다.
 매시매시(每時.每時)를 벌겋게 단 숯불 위로, 맨발로 걸어가는 남자.
 옆에만 있어도, 데일 것 같은데...
 데여서 물집이 잡힌다 해도, 두 번 다시 회복되지 않는 화상에 상흔이 남는다 해도.
 이 남자의 품에 안겨 보고 싶어진다. 그와 죽을 것 같은 사랑에 불타오르고 싶어진다.
 결국, 더미도.. 준희도 그 격정의 사랑을 경험했기에 그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 테고..
 때로 고독해지면 저물녘 물가에 서서, 어렸을 때 유엔군에게 배운 트럼펫을 분다.
 그 모습에 또 더미와 준희가 가슴 쓰려하며 눈물짓는다.

 동영에게서는 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 뿜어져 나온다.
 그러고 보니 키도 크다.
 남,녀를 불문하고 노,소를 불문하고,
 그의 세계로 들어가면 완전하게 보호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그래서, 동영은 스스로는 부인하겠지만.. 영웅으로 살고 싶은 남자다.
 영웅이 가져야 할 덕목이 그렇듯이 늘 자신을 희생한다.
 희생도 習이라, 완전히 희생이 몸에 밴 이 남자,
 자신이 뭘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이를 앙다물고 참는다.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스타일.
 뽀다구 안나고 면(面) 안서는 일도, 묵묵히 해나간다. 공을 다투지 않는다.
 국방부 장관인 아버지 김홍석의 후광으로 빠른 나이에 출세했다고 주위로부터 경원당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남들이 여자를 말할 때, 그는 국민을 이야기 했고, 남들이 출세를 꿈 꿀 때, 그는 국가를 이야 기 했다.
 그의 열정과 대의(大義)와 국가애는 어찌나 감동적이고 전염성이 있는지,
 옆에 있으면 그 아무리 차가운 인간이라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관료이지만 관료적이지 않다. 오히려 혁명가 같은 느낌이다.
 슬쩍 비교한다면 체 게바라 같은 신념과 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말이나 되는가? 체 게바라 같은 정치 각료가!
 그러고 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펜 대신 총을 들고, 혁명의 전선으로 나갔어야 할 남자였지 않을까.
 

 강한 신념 탓에 항상 아군보다는 적군에 둘러싸여 있고, 그의 정치색을 의심받지만 
 대통령의 막강한 신임과 사랑을 받는다.

 더미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일이 없다.
 자신의 인생은 신념을 위해 바쳐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뒤늦게 사랑은 왔고
 이제 더미를 위해,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버리라고 사랑은 요구한다.
 
 헌 걸레짝처럼 버린 여자 더미를 다시 사랑하게 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더미를 사랑하고, 준희와의 인연도 소중하고 귀하다.
 그 귀함도 사랑이니, 준희 또한 다른 색깔로 사랑한다 해야 옳겠다.
 전쟁고아로, 오스트리아 국적의 불확실한 신분을 지닌 더미는
 그의 정치인생의 아킬레스건이 된다.
 정적들이 더미를 빌미로 물어뜯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다 알면서도... 한 때는 일탈이라고 지워버렸었던 더미와의 사랑을 위해...
 전차처럼 달려간다.
 가끔 영웅들이 발 걸려 넘어지는 지점이 ....바로 멈출 수 없는 사랑이 아니던가.


장빈 (9-27세)

 꿈이 없는 남자.
 미친 듯이 잘 웃는 유쾌한 남자.
 그러나 상대를 배려하는 진심이나 타인을 위한 희생은 눈꼽 만큼도 모르는 남자.
 욕심이 없기에 생이 늘 농담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에 원하는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어.. 그저 그렇게 농담과 유쾌함으로 생을 빈정거리고,
 자신을 빈정거리며 살고 싶은 남자.
 윌리스 지프, 비틀즈, 보드카와 바다,
 그의 인생에 이 네 가지만 있으면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믿는다.
 아, 하나가 빠졌다. 이쁜 여자들.
 윌리스 지프를 같이 타고 비틀즈를 들으며 황혼의 바닷가에서 보드카를 같이 나누는 그 미끈한  여자들.
 예나 지금이나 돈 많고, 로맨틱한 미남에게 빠지는 건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래서 그는 상류 사교계를 주름잡는 스타가 된다.
  
 타고난 다이버.
 준희와 동영의 스킨스쿠버 선생을 할 만큼 뛰어난 잠수 능력을 지녔다.
 근데... 그걸 이용해, 밀수를 한다.
 그에게 밀수는 일종의 도락이고 취미다. 그 취미가 돈까지 가져다주는데..
 돈을 만드는 데는 가히 천부적인 소질을 지녔다. 모으지 않아서 그렇지.
 그 천부적인 소질을 이용해, 흥청망청 살아간다.
 적어도 더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살았다.
 더미를 만나고서야 알게 된다.
 그가 실은 얼마나 따듯하고, 여리다 싶을 만큼 보드랍고, 애틋한 사람인지.. 

 같이 사는 동영에게 제발 버리라고 그렇게 욕 해대던 ‘배려와 희생’,
 그걸 뒤늦게 배워서 한 여자에게 모두 쏟아 붓는다.
 꿈이 없는 인간이 더미를 만나고서 처음으로 꿈이 생겼는데,
 이미 그녀는 운명을 건 사랑이 있다고 한다.
 하필이면 그 사랑이 자신이 유일하게 믿고, 좋아하는 형(兄), 동영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미를 놓칠 수가 없다.
 더미는 그가 꼭 한 번, 진심으로, 진지하게 자신을 걸어본 꿈이기에.

 더미, 준희의 스승이자 패션계의 대모 장봉실의 사생아.
 세상의 편견이나 조롱 따위는 우습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다. 관심도 없다.
 그러나 어머니 장봉실은 다르다.
 그녀를... 망가트리고 싶다.
 자식을 자식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애정을 주지도 않는
 저 괴팍한 바위 같은 여자를 부숴버리고 싶다.
  
 사실 그래서 빈이 살아 숨쉬고 있다.
 빈이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 엄마를 파괴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 태생의 증오심은 어느 순간 동영을 향하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 간다.
 동영은 물론 동영을 둘러싼 모든 존재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정도로.

 빈은 자신의 생에 유일한 사랑인 더미와
 유일한 우정인 동영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장봉실 (30-50대)

 세상을 단 한 번도 타협하고 살아본 일이 없는 여자.
 우리나라에 현대적 패션을 도입한 패션계의 대모.
 몸을 가리느라, 추위. 더위를 피하느라 입는 옷의 개념에서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디자인을 예술로 끌어 올린 선구자.
 아세아 복장학원의 설립자이자 국내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는
 의상실 ‘앙상블’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천성이 팍팍해서 그녀의 성격만큼의 부를 축척하지는 못했다.
 
 욕 잘하고, 걸핏하면 ‘야, 이 년아’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도 무대 위에서는 고상하기 그지없다. 영부인도 그녀의 품격에 반했단다.
 참, 웃기는 세상이다.
 그래서 인지 세상에 연연할 것이 없고,
 명예에 대한 욕망이 없기에, 거침이 없고, 깔깔하고,
 날카롭고, 제자들에게 혹독하고 냉정하다.
 그녀의 그런 성품은 생의 단 한번뿐인 사랑도 그녀의 곁을 떠나게 했고,
 하나뿐인 아들 빈에게조차 자애를 보이지 않는다.
 해서, 빈에게 조차 자신을 ‘마담 장’으로 부르게 한다.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그 자리에서 제자들의 뺨을 칠 정도의 까탈스러운 성격 때문에
 괴팍하게 느껴진다.
 성격은 그렇지만, 실력만큼은 아세아 전역에 이름을 떨칠 정도.
 자신의 감각이 이제는 은퇴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판단 아래,
 후계자를 양성하고자 준희와 더미를 받는다.
 태을방직의 후계자이자 사교계의 꽃 준희가 기성복 시장 진출을 위해,
 봉실에게 자신의 개인선생이 되어주기를 청하지만, 단칼에 거절한다.

 준희가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한・일 패션 대전’에서 우승하면
   준희 앞에 무릎을 꿇고, 봉실의 아세아복장학원과 의상실 ‘앙상블’의 문을 닫고,
 자신의 인생의 집합체인 세계적 패션 브랜드 ‘Sil'을 양도하기로 한다.
   한마디로 제 정신이 아니다.
 혹은 준희라는 당돌한 계집애에게 반했거나....

 그러나 내심 봉실은 자신을 닮은 듯한 준희의 칼칼함과 그 안에 열정을 높이 산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의 문하에 들어온 더미를 마음으로 자애하게되고,
 처음으로 그녀를 통해 사랑이라는 마음을 느끼게 된다.
 두 제자의 대결을 그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공정하게 지켜본다.

고창회 (40-60대)

 더미의 친아버지.
 태을방직의 회장으로 태을방직을 국내 최고의 기업,
 나아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
 더미를 사랑하고, 그리워했지만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자 마음에서 지워버린다.
 더미 대신 강희를 데려와 더미의 이름인 준희를 주고, 양녀가 아닌 친딸로 입적해서 키운다.
 준희의 영민함과 도도함, 사업에 대한 직관.
 그 모두를 포함해 그녀를 온전히 친자식으로 사랑한다.
 사업적인 면을 위해서도, 동영과의 준희의 결혼을 바라기는 하지만,
 창회가 원하는 것은 준희의 행복과 성공이다.
 후일 더미가 친딸임을 알게되지만,
 이미 이십년 가까이를 친자식으로 키워온 준희의 대한 사랑도 그 못지않아,
 더미와 준희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한다.
 결국 가슴이 갈라지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더미를 외면한다.


오영수 (30-50대)

 더미의 친모.
 태을방직의 안주인이자 사교계의 여왕.
 영부인과 함께 ‘민들레회’라는 사회사업단체를 운영하는 한편,
 태을방직의 숙녀복 브랜드 ‘뷰티’의 사장이다.
 창회를 도와 태을방직을 일군 여장부로 배포가 크고 화통하지만, 매서운 성격이다.
 자신의 실수로 더미를 잃었다는 회환 때문에, 준희를 친딸 이상으로 사랑하고 헌신한다.
 준희가 동영과 결혼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준희에게 숙녀복 브랜드를 시작으로
 태을방직 전체를 물려주고자 한다.
 준희가 출신도 알 수 없는 더미 때문에 힘겨워하자,
 준희의 힘이 되어주고자 더미를 곤경에 빠트린다.
 그러던 중, 준희와 동영의 결혼식 날 자신의 잃어버린 딸이 실은 더미임을 알게 된다.
 더미를찾았으면서도 그 사실을 자신에게 숨긴 남편 창회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도 친딸보다 더 소중한 준희와 이국만리에서 고생하며 살아온 
 가엾은 더미 사이에서 마음 아파하면서도, 
 누구의 쪽에도 서지 못한다.

 


피에르 방 (남, 24세)

 본명 방칠호.
 이름과 달리 꽃미남.
 행복한 바느질쟁이를 꿈꾸는 재단사.
 극의 활력을 불어 넣는 릴리프로 앙드레 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결코 희화화 된 캐릭터가 아니다.
 누구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빛나는 순수성과 순정을 지니고 있다.
 그 순정으로 장봉실의 아들 빈을 사랑하고, 빈을 백프로 이해하며 그의 벗이자, 동생이자,
 단 한명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후배가 된다.
 빈의 고등학교 후배로, 빈을 그 시절부터 사랑했다.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더 나아가 성별도 중요치 않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호모’라 부른다.

 그러고보면 그는 참 많은 것을 사랑한다.
 만레이를 사랑하고, 달리를 동경하며, 샤넬의 혁명적인 옷을 사랑했던 그는,
 더미의 디자인을 사랑하고, 빈이 더미를 사랑하기에 아픈 가슴을 누르고,
 자신 또한 더미를 사랑한다.
 
 한 마디로 식지 않는 호빵 같이 따끈따근한 남자다.
 가만 보고 있으면, 어찌나 순수한지 이마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남자다.
 
 봉실의 파트너이고, 최고의 조력자인 ‘앙상블’의 수석 재단사인 방육성의
 친조카다. 작은아버지 방육성의 강요로 어울리지도 않는 육사에 진학했다가 다음날 자퇴해 아 세아복장 학원으로 들어왔다.
 섬세하고, 손끝이 칼날 같아 최고의 패턴사 자질을 갖췄다.
 디자이너를 꿈꾸지만 결정적으로 색맹인 약점이 있어 눈물을 머금고,
 방육성의 뒤를 이어 재단사가 된다.
 남자들이 경원시 하는 일을 함으로 사람들의 편견에 시달리고,
 같은 복장학원의 동료들에게 조차 게이취급을 당한다.
 더미의 대담한 디자인에 감동해 기꺼이 그녀를 위함 최고의 재단사가 되어준다.

하연경 (30세)
 
 낮에는 마담 장의 의상실 앙상블의 판매원으로 밤에는 아세아복장학원의 견습생이자 사환으로  일한다.
 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이 없으면서도, 성공을 위해 디자이너를 꿈꾼다.
 욕심이 재능을 뛰어넘는, 그러나 결코 미움 받지 않는 귀여운 여자.
 빗자루로 돈을 쓸어 가마니에 주어 담아 보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다.
 
 그런 그녀의 적당히 속물적인 근성이 자꾸만 우리의 순수남 피에르방의 심사를 건드린다.
 피에르 방의 눈으로 보면, 전혀 귀엽지 않고 얄밉다. 
 욕심 많은 연경. 뭐든 세상을 일등, 이등. 순위로 따진다.
 미모는 누가 일등이고, 누가 꼴지냐?
 돈은 누가 제일 일등으로 벌고, 누가 제일 못 받느냐? 
 그런 그녀가 봉실에 의해, 디자이너로서는 파문당한다. 즉, 꼴지를 한거다.

 
 욕심만큼 못 따라주는 재능 때문에 결국 빗자루, 가마니는 포기하고 잡화 디자이너로 더미의  일을 돕게 된다.
 더미, 피에르 방과 더불어 아세아복장학원에서 소외되고 밀려난 왕따.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준희를 주축으로 한 아세아복장학원의 주류들과 경쟁한다.
 잠도 많고, 먹성도 좋고, 뚱뚱하고.... 얼핏 보면 캐서린 제타 존스이지만, 자세히 보면 옆집 누 나다.
 체격과는 다르게 앙증맞은 소품들을 좋아한다.
 기본적인 재봉에는 약해 주머니 하나, 단추 구멍 하나도 제대로 스티치를 못해 마담 장의 노여 움을 사고, 몇 번이나 쫓겨나지만 그때마다 봉실의 다리를 잡고 우는 연기로 다시 들어온다.
 봉실도 손을 든 말도 못하는 떼순이다.
 더미에 의해 잡화 디자인의 재능이 발견되어 아직 생소한 잡화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다.
 
 그때부터 물을 만난 고기처럼 구두, 벨트, 악세사리, 핸드백등에서 히트상품을 내놓게 된다.
 할아버지 때부터 갖바치 집안이고, 자기 핏줄에는 갖바치의 장인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고 떠들 어대며. 자신에게 친절한 빈을 짝사랑하면서, 빈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 피에르 방과  사랑을 다툰다.
 빈을 놓고 치열한 삼각관계에 놓이지만, 결국 피에르 방과 정이 들어 그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 껴 버린다.
 사랑할 수 없다면, 귀여워해달라며 떼를 써서, 만인의 축복을 받으며 피에르 방과 결혼한다.

오상희 (여,26세)

 아세아복장학원의 다크호스.
 국내에서 가장 염색을 잘하는 염색공장 집 딸. 태을방직과도 연관이 있다.
 상희네 염색공장이 태을방직의 하청일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준희를 알게 되고, 사교계에 명함을 내밀 정도로 재력과 가문을 자랑하는 집이 아니 기에 처음에는 준희를 아니꼽게 생각한다.
 그러나 곧 준희에게 승복한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준희는 최고의 여자다.
 그 미모, 그 재능, 그 집념, 그 재산.

 준희와 겨룰 생각없이, 포기하고 납작 엎드리고 나니 편안해진다.
 화통한 준희에게서 얻을 것도 많다.
 그러나..디자이너에서도 밀릴 줄은 몰랐다.
 준희와 더미가 복장학원에 오기 전까지 마담 장의 수제자라고 자부하고 있다가,
 둘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다.
 그러나 더미의 의상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그녀가 보기에 진정한 천재는
 준희다. 결국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접고 준희의 패턴 디자이너가 된다.
 그리고 준희의 신봉자이자,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다.

 깐깐한 척, 고약한 척 굴지만, 속내는 눈물 많은 로맨티스트.
 사교계에서 한 번 본, 동영을 짝사랑한다. 준희는 모르지만, 말도 안되는
 더미 같은 여자가 동영을 차지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방육성 (남44세)

 피에르 방의 작은아버지로 피에르 방과 더불어 코믹 캐릭터.

 코믹 캐릭터이긴 하지만, 장인 정신만은 봉실에게 떨어지지 않는 이 시대 최고의 재단사.
 ‘서울야곡’ 노래를 입에 달고 사는, 자칭 우수와 낭만의 사나이.
 기름독에 빠졌다 나온 것 같이, 온 몸에 기름기가 흐르는 남자로 지독하게 돈을 밝힌다.
 ‘프로는 돈으로 말한다, 몸값이 곧 그 사람이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제 아무리 억만금을 줘도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디자이너의 재단일은 하지 않는다.
 해서, 봉실을 존경하고 자신이 봉실의 재단사인 것이 자랑스럽다.
 어려서 잠시 본 더미를 다시 아세아복장학원에서 만나자, 기쁘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감정과 일을 철저히 구별하는 프로답게,
 
 더미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준희의 디자인에 손을 들어준다.
 봉실은 그가 더미의 재단사가 되어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준희의 재단사가 된다.

 ‘우수와 낭만이 흐르는 사나이’라 자부하는 스스로의 컨셉과는 달리, 사랑에는 좀 모자란다.
 그런 그에게 뒤늦게 찾아온 첫사랑이 준희다. 광장시장에 수입천을 찾으러 나온 준희에게 첫눈 에 필이 꽂혀 준희에게 순정을 바치고 음으로 양으로 그녀를 돕는다.
 피에르 방을 친아들처럼 사랑한다.


▣ The story

1951년 1월 4일
 내 이름은 고준희, 지금은 더미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에서 살았을 때는 레나 이바넬리라 불리었다.
 나의 짧고도 긴 여정은, 그러니까 그때가 시작이었다.
 1951년 1월4일.
 돌아갈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생의 첫 문이 열리던 날.
 당시 나는 일곱 살이었다. 미운 일곱 살.

 우리 아빠 고창회는 유엔연합군 군부대에 군수물자를 납품한다.
 사리원 근교에 유엔군 제이 연대가 있고, 나는 엄마 오영수와 함께 부대 밖 사택에 산다.
 사람들은 아빠를 ‘목숨보다 돈이 귀한 놈’이라고 혀를 내두르지만, 아버지는 ‘미친놈들, 당연히  목숨보다 돈이 귀하지.’라고 한다. 게다 전쟁통에 가장 안전한 곳은 유엔군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행복했다. 유엔군 아저씨들은 정말 친절했고, 내가 웃어주기만 해도 쵸콜렛에, 캔디에, 츄 잉껌에, 쏘세지까지 내 양손에 들려 주었다.
 엄마는 나를 영악하다고, 어린 게 벌써 사는 법부터 배웠다고, 엉덩이를 까내리고 내 여린 엉덩 이에 손짜국을 냈지만,
 나는 정말 행복했다...  1951년 1월 4일이 오기까지는.

삶은 계란 한 알 (더미)
 자고 일어났더니, 부대가 텅 비어버렸다.
 미친놈들이 지들끼리 살겠다고, 아빠한테는 한마디 언질도 없이 밤새,
 서울로 쌔 빠지게 달아났단다.
 아빠와 엄마는 물에 빠진 땅강아지처럼 우왕좌왕, 안절부절하더니 겨우 피난열차 한 구석에 자 리를 구했다. 급히 돈을 넣고 누빈 옷을 겹겹이 끼어 입고 안심했는지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 다.
 나는 배가 고프다.. 너무너무 배가 고프다.
 어제 저녁부터 열두시간이 넘도록, 나한테 밥을 안줬다는 것을 잊어버렸나 보다.
 기차는 사리원 역에서 오랫동안 멈춰있다.
 사람들 말로는 한번 멈추면 언제 떠날 줄 모른다고 한다.
 창 밖으로 보니, 선로 옆에 장사꾼들의 솥단지들이 걸려있다. 계란을 삶는 사람, 주먹밥을 만들 기 위해 밥을 짓는 사람, 밀주를  사발 잔술로 파는 사람, 찐 감자를 파는 사람... 어른들은 먹 을 것을 만들고, 나보다 조금 큰 아이들은 목판을 목에 걸고 발 디딜 틈 없는 열차 간을 누비 며 먹을 것을 판다.
 웃긴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도 밥은 먹는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장사꾼들이 그렇게 돈을 번다.
 어른들은...바로 그게 전쟁이라고 한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배가 고프다. 배가 너무..너무 고프다. 너무 배가 고파서, 화가 난다.
 자는 엄마를 흔든다.
 ‘엄마! 나 배 고파!! 삶은 계란 먹을래!!’
 돈 대신, 퍽! 하고 주먹이 날아온다.
 얻어맞은 머리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난다. 그렇다고 물러날 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미운 일곱 살에 엄마 말에 의하면 영악한 년이니까.
 잠자는 엄마의 누빈 옷, 실밥을 살짝 튿어 돈을 한 장 꺼낸다.
 ‘엄마, 계란 한 알만 먹구 오께.’
 그러나, 나는 계란 한 알과 내 엄마, 아빠를 바꾸게 될 줄은 몰랐다.
 두 번 다시, ‘준희’로 살 수 없게 될 줄 그때는..알지 못했다.
 그 일로, 나는 강희와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 버리게 되었다.

삶은 계란 한 알 (준희)
 내 이름은 강희. 열 살이다.
 재수 없게도 지금 나는 사리원 역에서 내 몸무게보다 무거울 것 같은 목판을
 목에 걸고 찐계란과 주먹밥을 팔고 다닌다.
 남들보다 예쁘게 생겼다나, 애교가 있다나..어른들은 주로 내 목판의 계란을 팔아준다.

 남들은 이런 나를 보고 재수 좋다고 말한다.
 전쟁 통에 부모가 죽고, 굶어죽고 얼어죽는 애 새끼들이 지천인데.. 그래도 지 자식도 귀찮아  버리는 판에, 운 좋게 친척 손에 거두어져 등 따시고, 배부르니 운 좋다고 말하지만, 천만의 말 씀이다.
 재수가 없어도 더럽게 없는 거다. 어딜 봐서 내가 목판 걸고, 주먹밥이나 팔 아이로 보이는가..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우리 엄마, 아빠가 죽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열차를 타고 가면, 열차가 멈추는 그 끝의 역사에 엄마와 아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게 틀림없 다. 내 부모는 왕이다. 귀족이다. 어마어마한 부자다.
 
 중공군이 내려왔다고 한다. 이러고 있다 언제 개죽음을 당할지 모른다.
 나는 오늘 꼭, 이 열차를 타고 여기를 떠날 꺼다. 나를 자기네 집 식모처럼 부려먹는 친척 아줌 마 양자의 발치에  목판을 냅다 집어 던지고 도망갈 꺼다. 조금 있으면 기차는 떠난다.
 그때 나는 몰랐었다.
 내 결심이, 더미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기차는 떠나고... (남겨진 더미)
 아빠, 엄마가 화가 났다.
 선로에 내려서 고래,고래 내 이름을 부른다. 인산인해의 사람들을 헤집으며 나를 찾고 있다. 얼 른 계란을 입에 물고, 트럭 밑에 숨어 납작 엎드린다. 아무래도 야단만 맞고 끝날 것 같지가 않 다.
 무서운데..졸린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잠깐 졸았을까? 시끄러운 기적 소리에 눈을 번쩍 뜬다.
 선로에 그토록 많았던 사람들이 한명도 없고, 장사꾼들이 전을 접기 시작한다.
 두리번거리니 왠 언니가, 기차 승강대에 서서 ‘강희야!! 강희야!!’ 부르며 따라가는 아줌마의 발 에 목판을 던지는 모습이 보인다. 뭐하는 걸까? 다시 보려고 고개를 쭉- 빼는데 트럭주인이 나 를 발견하고 끌어낸다.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던 그 아저씨, 내 손을 잡고 떠나는 기차를 향해 뛰기 시작한다.
 엄마, 아빠가 나를 찾던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그 아저씨는 나를 어떻게 하든 기차에 태워주 려 했지만... 내가 넘어지는 바람에 실패했다.
 무릎이 아프다. 눈물이 난다.
 어떻게 엄마...아빠가..나만 두고 가버렸을까? 계란 사먹은 것 때문에, 내가 미워져 버린걸까?
 기차는 자꾸만 멀어지더니 내 눈 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왕!!’ 하고 울음을 터 트리게 된다.
 
 나중에 강희(준희) 언니를 만나고서야 들었다.
 왠 꼬마가 우리 엄마. 아빠에게 내가 다른칸에 있는 것을 봤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강희 언니가 대구역에서 엄마,아빠를 만났을 때 두 분이 나를 찾으며 울었는지도 말이 다.

 그러나.. 어쩌면 두 분에게 그래도 덜 가슴 아픈 시기가 있었다면 그때가 아니었을까.
 나를 잃은 줄 알고 울던 그 시절......
 후일 내 부모님은 더 큰 아픔을 겪게 된다.
 친 딸인 나 더미(준희)와 친딸보다 더 큰 사랑으로 키운 그분들 마음속의
 딸 강희와의 사이에서. 얼마나 짙은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셔야 했는지..

앙상블, 피난 트럭 (더미와 빈의 만남)
 나는 사리원의 텅 빈 연합군 부대에서 엄마, 아빠를 기다린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기차는 끊어졌다고 한다. 엄마, 아빠는 아무래도 나를 찾으러 오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찾아가야 할 것 같다. 나는 빈 막사에서 자고, 지난날 먹을 것을 숨겨 놓았던 곳 을 뒤져 깡통을 따 먹는다.

 비가 내린다... 불도 없는 텅빈 막사는 춥고, 무섭다.

 어디선가 손전등 불빛이 가까이 다가온다.
 ‘엄마! 아빠!’를 부르며 뛰어갔더니.. 다른 사람이다.
 
 방육성 아저씨와 장봉실, 그리고 빈이라는 오빠가 피난을 가고 있는 중에 기름이 떨어졌단다.
 나는 기름이 있는 곳을 안다. 무섭게 생긴 장봉실 아줌마에게 기름을 주는 대신 나를 엄마, 아 빠 있는 곳에 데려다 달라고 거래를 한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트럭을 탄다.
 트럭에는 이상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 방 아저씨 말로는 재봉틀과 옷본이라고 한다. 얼마나 이 상한 사람들인지, 재봉틀과 옷본들에는 비닐을 씌워놓고 자기들은 겨울비를 맞으며 간다.
 빈 오빠가 자신의 옷을 덮어주며 꼭 껴안아준다.
 따뜻하고 기분 좋다.

 방육성 아저씨는 ‘서울야곡’ 노래를 가르쳐준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 갈 때~ 쇼윈도 글라스에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나는 잠깐 엄마.아빠를 잊는다. 빈 오빠와 둘이 즐겁게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
 트럭은 낮과 밤을 달려 대구역에 닿는다.
 
 너희 부모가 탄 기차의 종착역이라며 장봉실 아줌마는 나를 그곳에 내려 놓는다.
 방육성 아저씨는 딱해하며 나를 보고, 빈 오빠는 나와 떨어질 수 없다고, 소리치며 울지만...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트럭은 그렇게 나를 두고, 떠나버렸다.

 그때는 몰랐다. 有緣千里來相會라는 것을...
 인연이 있다면 천리를 떨어져 있어서 반드시 만난다는 것을.
 몬트제(Mondsee)와 서울이라는 일만 마일의 공간을 떨어져 살았지만..
 결국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 재회가, 우리 일생을 뒤흔들 깊은 아픔이었지만,
 나는 빈과의 재회를 후회하지 않았다.

리틀 킹 (더미와 준희, 동영)
 운명은 때때로 만나지 않아도 좋을 인연과 해후하게 한다.
 더미와 강희(이하 준희)가 그렇다. 사리원 기차역에서 스쳐 지났더라면,
 그녀들의 인생에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예고 된 운명의 바퀴는 아폴론의 전차처럼 해가 지기 전까지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는가  보다.

 빈과 헤어진 더미는 거리 여자들의 손에 이끌려 그들이 숨어사는 쪽방에서 지내게 된다. 연탄 불을 갈고, 죽 끓이고, 양잿물 타 
 고, 달거리 천 빨고... 일곱 살 계집애가 해서는 안 되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씩 배워나간다.  태생이 그런 지, 억척스럽다.
 더미에게 언니들은 기댈 수 있는 안식처였고, 포근한 존재였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울다 울다 잠이 든 더미, 와당탕탕 소리에 나와보니 치안국 사람들이  언니들을 끌고 간다.
 그길로 쫒겨 나와 다시 갈 곳이 없어진 더미는 폭격에 부서져 내릴 것 같은 건물을 거주처로  삼는다.
 그곳에는 이미, 준희가 먼저 터를 잡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미 세상을 알고.. 생존을  알아버린 준희는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었다.
 시궁지 쥐처럼 눈을 빛내며 먹을 것을 찾지만, 혼자 서는 어렵다는 것을 안다.
 더미와 준희는 서로의 필요 때문에 함께 살기 시작하지만, 아이들 특유의 친화력과 외로움으로  빠르게 정이 든다.  

 더미와 준희는 마치 친자매처럼 서로를 보호하며 지낸다.
 어느 날, 칡을 찾아 산을 뒤지던 더미와 준희는 소년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게, 왠 떡인가...?’ 주검에 대한 두려움이라곤 두 아이에게 씻고 찾아봐도 없다.
 전쟁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었나 보다.
 이미 죽은 시체인줄 알았던 더미와 준희는 주머니를 뒤지고, 신발과 옷을 벗기는 둥 영악하게  수선을 피우다,
 깨어난 소년을 보고 자지러질 듯 놀란다.
 자기 이름은 김..동...영이라고, 살려달라고 한자 한자 내밷는 소년...
 
 더미와 준희에게 가장 힘든 것은 먹을 것을 구하는 일. 하루 한 끼도 간신히 넘기던 더미와 준 희는 속된 말로 봉을 잡는다.
 식량 공급책이자 두 자매의 보호자가 되는 동영.

 소년이었지만, 책임감과 자존심으로는 이미 남자였던 동영은 두 아이가 살던 건물에서 3km쯤  떨어진 연합군 주둔지 안에 산다. 당시 소장으로 야전사 사단장이었던 김홍석은, 누구보다 용맹 한 지휘관이었지만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동영을 걱정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연합군 사령부에  맡겨둔다.
 만약, 전쟁에서 진다면 퇴각할 때, 동영을 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자신과 절친한 미군 사령관 에게 부탁해 놓은 것.
 
 동영은 부대 철조망 밖의 세계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 안다.
 때로는 자신만이 이렇게 살고 있는 것에 죄책감과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영은 동영은 자신을 질시하는 부대밖 아이들과 패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냥 맞으면 될 일을 바득 바득 대들다가 죽도록 맞는다.
 그러다가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더미와 준희는 칡을 찾아 산을 뒤지다가, 죽어 가던 동영을 발견한다. 
 후일 자신의 운명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될 두 여인, 더미와 준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시두 때두 없이 먹을 것을 몰래 가져다주는 동영.
 두 아이가 개구멍으로 부대안에 숨어들거나, 그럴 수 없는 날은 자신들만의 포인트를 정한 곳 에 먹을 것을 숨겨 놓는 방법으로 동영은 그들을 돕지만, 더미와 준희는 그 먹을 것이 동영에 게 배급 된 C레이션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떡잎부터 다른 나무 (더미의 천재성)
  부대안의 경비가 강화되면서, 동영이 먹을 것을 주기가 어려워진다.
 게다, 동영과 준희가 첫 사랑 같은 감정을 느끼며 친해져 버리자
 더미 완전히 삐져 버려서, 자기 혼자 먹을 것을 구하겠단다.
 부대 앞의 분위기를 면밀히 살피던 더미.
 군인들이 한복을 입은 사람들을 좋아하고, 종종 사진을 찍고 쵸코렛이나 캔디를 주는 것을 목 격한다.

 더미, 준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옷감을 찾아 천지사방을 헤맨다.
 중국집, 쓰레기통에 버려진 옷을 주워서는 얼렁뚱땅 옷을 만든다.
 엉성하지만, 흉내는 낸 일종의 퓨전 한복을 입고 부대 앞에 나타나는 더미.
 몇몇 군인들이 더미와 사진을 찍고는, 맛있는 것들을 건넨다.
 연합군 병사들이 고국에 편지를 쓰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설명하는 사진으로 보내나 보다. 
 사진 모델의 댓가로 받은 씨레이션 박스의 깡통을 뜯으면, 맛있는 달나라 빵이라고 불리는 카 스테라가 들어있다.
 
 어느날 준희를 철조망 밖에 두고, 더미.. 부대 안까지 엉성한 한복을 입고 진출한다.
 어디서 구했는지 장구 하나를 지고...
 ...결과는, 인기 만발이었다.
 꼬맹이 더미를 유달리 이뻐하던 터키 출신 군의관, 일디 아저씨가 푸대 하나를 던져 주면서 말 한다.
 ‘꼬맹아, 어디 너가 갖고 갈만큼 갖고 가보렴..’
 더미, 욕심 사납게 푸대가 넘치도록 집어넣는데. 너무 무거워서 들고 가기는 커녕,
 낑낑-자루를 끌어도 끌리지가 않는다.
 동영이 도와주는 것을 제지하고, 철조망 정문 밖에는 준희가 손에 땀을 쥐고 보고 있다.
 배고픈 아이들이 주르륵 서서, 더미를 응원한다.
 군인들은 그저 웃기만 하고, 일곱 살 더미의 푸대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
 더미, 허리에 자루 끈을 묶고, 낑낑 거리면서 허부적, 허부적
 
 양 팔을 휘저으며, 마치 야구선수들이 허리에 타이어를 묶고 걷듯, 빵을 끌고 걸어간다.
 오늘의 영웅은 더미다.
 빵을 가져가라 했던 군인 아저씨가, 그런 더미가 너무 귀여워 발그레한 빰에 뽀뽀를 하며 ‘아 이, 러브 유’라고 말해준다.
 준희와 아이들에 그 뜻을 물으니, 빵 달라는 소리라는 놈도 있고, 살려주세요라는 말이라고 하 는 놈도 있다.
 어쨌거나 더미,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말인지 알고, 배가 고플 때면, 연합군 부대 앞에 가 서, 외국군을 붙잡고 눈웃음을 치면서 ‘알러 뷰!!’를 외치는데,
 그 ‘알러뷰!’ 한 마디가 더미의 목숨을 살려낼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었다.

봄비가 뿌리던 날.. (긴 결별)
 부대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그리고, 동영은 아버지의 무전을 받는다. 그곳이 격전지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동영을 오키나와 로 옮기겠다는 전언.
 동영은 더미와 준희를 찾아가, 자신이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준희와 더미를 두고, 결국 동영은 헬기에 오른다.
 
 그로부터 십일 후.
 부대 분위기는 살벌해진다. 암묵적인 승인 아래 간간히 부대에 숨어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하던  전쟁고아들이 부대 수비병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동영과 헤어진 더미와 준희는 꼬박 열흘을 굶었다.

 더미는 동영이 자신들을 위해, 씨레이션을 숨긴 물품창고로 가자고 준희를 설득한다.
 굶어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한...이미 먹을 것에 눈이 뒤집힌 두 아이는 부 대 담을 넘는다.
 
 물품창고 안에 동영이 남겨둔 씨레이션과 쵸콜렛을 들고 부대를 빠져나오려는데,
 귀를 찢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어디선가 섬광이 번쩍인다.
 총탄이다..
 얼어붙은 더미를 뒤에서 꼭 끌어안고 기다시피 도망가는 준희.
 다시 총성이 울리며 불꽃이 튀자,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준희를 뿌리치고, 뛰어가는 더미...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더미를 쫒아가 끌어안는 준희.
 M-1 총탄이 준희의 등을 관통 해, 더미의 어깨에 박힌다.
 그 자리에서 더미는 쓰러지고..
 그런 더미를 끌고 가는 준희.. 손과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숨이 거칠어지다가 끝내 숨이 끊기는 더미... 
 준희는 더미가 죽었다 생각하고, 공포에 질려 도망친다.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중풍환자처럼 벌벌 떨면서... 피투성이가 된 어깨를 부여잡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모포를 겹겹히 덮고 차가운 방구석에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는 준희,
 오한과 공포와 아무리 죽었지만 더미를 그곳에 버렸다는 죄의식으로 떨던 준희는 뜻밖의 방문 을 받는다.
 그곳까지 딸을 찾으러 온 창회와 영수.
 
 준희(강희)는 ‘우리 준희는 어디있냐고.. 준희가 있는 곳을 아냐고..’ 다그치는 창회에게 ‘준희는  죽었어요...’라 읊조리며 그 품에 쓰러지고 만다.

 한편, 겨우 실낱같은 숨만 붙어 있던 더미는 군령에 의해, 부대 밖으로 끌어내진다.
 더미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으로 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게 된 다는 것을..
 ‘살려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더미.
 자신에게 빵을 주던 그 군의관 일디 아저씨를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차마 더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일디라이와 병사들. 
 돌아서는 그들을 향해, 더미가 중얼거린다. ‘알...러...뷰...’
 흠칫 놀라 돌아보는 군의관 일디라이.
 더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갸날픈 숨소리..
 숨이 끊어져 가는 목소리로, 눈에 가득 눈물을 담고, 비굴하게 웃으면서..
 가난한 나라의 불쌍한 백성인 한 아이가 목숨을 구걸한다.
 더미의 절박한...‘알..러..뷰..’만이 정적을 깨트린다.
 그 슬픈 알..러..뷰.. 한마디가 군의관의 마음을 움직이고, 외국 군인들을 눈물짓게 하고,
 
 강경한 상관과 격렬히 다투게 한다.
 결국 더미의 일디 아저씨, 군의관 일디라이 이바넬리는 군령을 어기고 더미의 생명을 구한다.

 대략의 응급조치를 끝낸 더미는 수술을 위해,
 본국으로 이송하는 터키군 부상병들과 함께 터키로 후송된다.
 
 장마비 같은 봄비가 뿌리던 날.
 그렇게 더미는 고국을, 동영을, 준희(강희)를, 엄마...아빠를 떠나고.
 병원에서 회복 된 준희(강희)는 창회, 영수와 함께 부산의 어느 호적계에 서 있다.
 가엾은 준희(강희)를, 게다 더미를 여태까지 거둬준 고마운 준희를 양녀로 맡기로 했던 것.
 그러다 창회는 마음을 바꾼다.
 양녀가 아닌 친딸로 키우자. 죽은 준희 대신 준희로 키우자.
 그렇게 열 살 강희는 일곱 살 준희가 되어, 창회.영수 부부의 딸로 살아가게 된다.
 
 더미와 준희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십팔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뒤였다.

Under the Sea (준희의 사랑, 그로부터 십칠 년 후. 1969년,)
 내 이름은 고준희. 태을방직 고창회와 오영수의 딸이다.
 오래전 나는 강희라고 불렸지만, 나는 그 이름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스물여덟 강희로, 비참하게 세상을 사는 것 보다.
 스물다섯 준희로 화려하게 살아가는 것이 좋다.
 세상 사람들은 다 내가 아버지. 어머니의 친자식 준희인 줄 안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 그 분들의 친딸로... 그래서 행복하다.
 사람들은 내가 강희로 사는 것보다 준희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 말하면,
 태을방직의 후계자라는 자리 때문이라 평가하겠지만. 결코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나는 나 혼자서도, 강희로서도 성공할 자신이 있다. 성공하는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재능과 집 념과 확신의 오라(aura)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문득 좁은 골목을 빠져 나온 느닷없는 바람과 마주칠 때처럼
 준희가..정말 준희가 떠오를 때가 있다.
 내 아버지,내 어머니의 친 딸 준희. 고집스럽고. 귀엽고. 어린..내 동생같았던 준희한테 미안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준희는 죽었고 내가 준희다.
 그 아이가 살아있다 해도...내가 준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내 품에 안겨 죽어가던 그 준희가 떠오를 때면, 나는 미친 듯이 차를 몰고 바다로 간다.
 스킨스쿠버를 하는 동안에는, 그 물 밑의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동안에는,
 그 아이를 잊을 수 있다.
 오늘도 나는 준희를 잊기 위해 바다로 갔고, 그 바다 속에서 한 남자를...
 주웠다.
 내가 주운 남자 김동영, 아무래도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동영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태을방직의 상속녀쯤 되면, 우리나라의 내노라하는 기업인의 자식들과 전도유망한 정계 인사들 을 다 알게 된다. 그들은 언제든 결혼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 게다..그의 아버지 김홍석 국방부  장관과 내 아버지와는 안면이 있는 사이고, 전문 마담뚜에 의해 맞선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었 다.

 우리는 파티에서도 만났고, 내 스킨스쿠버 선생인 껄렁한 장빈을 통해서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때까지 동영은 내 관심 밖의 사람이었다.
 외무무 서기관. 전도유망한 청년인지는 모르겠지만..따분하다.
 게다 그의 들리는 소문은 더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의(大義)나 국가를 위해 산다는 독립군 같은 남자...
 글쎄 억지로 존경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전부(全部)가 아니라면, 그 사람이 누구든 그  옆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동영을 줍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하자.
 그날 나는 제주도 바닷속을 헤매고 있었다. 전날 준희(더미)의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범섬 바다 밑,
 바다 맨드라미..바다 딸기 화려한 형형색색의 연산호의 군락들을 바라보며 내 무의식에 달라붙 어 있는 준희(더미)를 털어내고 있었다.
 두터운 해저바위를 막 지났을 때, 사람의 형체를 한 큰 덩어리가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천천히 다가섰다. 살아 있는 듯했고, 남자였다.
 
 보조호흡기에 부력조절기까지 망가진데다 해초에 발목이 걸려버려, 그야말로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의 동영. 흔히 말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이 남자..아름다웠다.
 
 안간힘을 다해 그를 안고, 해변으로 나왔다. 누워서 헐떡이는 그 남자..
 아직 의식이 분명치 않다..가만히 내려다보니 역시 아름답다.
 내 호흡기를 물렸었기에, 충분히 인공호흡이 필요없다는 것을 알지만, 인공호흡을 해본다. 그러 다 눈을 뜨는 남자... 나를 보며 머쓱하게 웃는다. 그 순간, 가슴이 찡해지면서 이 남자를 사랑 하게 되어 버렸다.
 ‘준희씨, 고마워요..’
 갑자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준희씨, 사랑해요’라는 소리까지 듣고 싶어졌다.

 동영은 모레 오스트리아로 떠난단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는데..
 그래, 시간은 있다. 천천히 시작하는 것은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 남자를 사랑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도 같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오스트리아에서 우산을 하나 사다달라고 부탁한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을 잡는다.
 뜨거운 손이다.
 아...나 아무래도 정말 이 남자가 좋아진 것 같다.


짤츠부르크, 몬트제 (동영과 더미의 만남)
 나, 김동영. 외무부 서기관으로 4급 공무원이다.
 남들은 나를 보고, 국방부 장관인 내 아버지의 후광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지난날 유엔군의 도움으로 오키나와에서 전쟁을 피해, 살아남았던 나는
 국제정세와 힘의 균형, 우리나라 같은 군소국가가 살아남는 길은 외교에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외무부 서기관의 자격이 아닌 중정(중앙정보부) 블랙으로 이곳,
 오스트리아 짤츠부르크까지 왔다.
 북측의 움직이 최근 육개월 강권파의 목소리가 커지고,
 동독의 대북지원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각하는 내게 비공식적으로 동독과의 교섭창구를 마련할 것을 부탁했고,
 나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응락했다.
 면책특권이 없는 나는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 쓰고 죽을 수 있다.
 내 나라에서는 나의 신원이나 임무를 보증해주지 않을 것이다.  
 작전 수행 중에 북측 블랙에 의해서나, 동독측에 의해서나...
 혹은 나의 정적들인 중정 보수파들에 의해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 
 로 나는 이곳에 왔다.
 왜냐하면...그것이 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보수보다는 진보에, 강경보다는 자유에, 힘에 의한 통일보다는 국제정세를 이용한 외교,평화통 일이 내 정치노선이고, 이런 나를 밥맛없어 하는 군인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지쳐있다. 엿 같은 기분이다.
 지금 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내 정적들이 거는 태클에 지쳐간다.
 국가의 이익보다, 국민의 이익보다 계파의 밥그릇에 목을 매는 이전투구에 욕지기가 난다.
 결국 나는 오스트리아 영사관에 나와 있는 내 상관과 크게 다투고 만다.
 동독과의 마지막 비밀협약서 싸인을 앞에 놓고,
 내 머리통에 총을 겨눈 그의 얼굴에 한방 먹이고 뛰쳐나와 버렸다.

 마르그트 다리위에서 여권을 박박 찢어 비에 불어 한결 거칠어진 잘자흐 강에 던져 버린다.
 ‘잘가라, 대한민국. 잘가라, 내 신념의 날들. 그리고..잘 있어요. 나 때문에 시달릴 내 아버지와  내 가족들. 동영은 두 번 다시 내 나라로 돌아가지 않을겁니다.......................’
 분노 때문인지, 격정 때문인지..그도 아님 안타까움 때문인지 눈물이 흐른다.
 후회는 없다...
 이제 나는 이방인으로 이 나라, 어디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살아갈 것이다.

 충동적으로 올라탄 버스는, 목가적인 전원풍경을 스치며 지나간다.
 문득, 저 멀리 호수와 산이 보인다.
 
 Mondsee라는 이정표가 도로가 갈라지는 끝에 붙어 있다.
 몬트제..달의 호수라는 뜻이다. 달의 호수..나는 달리는 버스를 세워, 몬트제의 초입에 내린다.
 그래, 이곳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초입에 가득한 살구나무와 추자나무 길을 따라 마을 어귀로 들어서본다.
 고즈녘한 마을, 달의 호수마을이니까 어딘가에 호수가 있겠지.
 동영은 천천히 마을안쪽으로 방향을 튼다.
 마을안쪽에 꽃과 석물로 장식된 고즈녘한 마을묘지가 보인다.
 소박한 고딕장식의 묘지 앞에 꽃을 바치는 검은 머리의 작은 여자가 보인다.
 동영은 지나치려다 그 여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왠지, 낯익은 느낌.
 그녀는 긴 기도를 끝내고 일어서 돌아선다.
 순간 멈칫, 동영과 그녀가 멈춰선다. 검은 머리, 검은 눈, 아담한 체구...
 여기에 동양인이 살고 있다니, 동영은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는 이제껏 십팔년만에 처음 보는 동양남자를 신기한 듯, 놀란 듯 바라 본다.
 바로..그녀는 더미였다.

 

달의 호수 (그들만의 사랑1)
 더미는 가슴이 뛴다.
 ‘저, 남자는 누구일까?’
 터키에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삼년, 이곳에서 십오년, 그녀가 처음으로 보는 동양인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물어보고 싶지만, 말문이 막힌다.

 나는 그저, 그 남자가 민망해질 정도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눈길을 돌려야 한다고 알지만,
 왠지모를 친화력이, 왠지모를 그리움이 그에게서 내 시선을 비켜갈 수 없게 만든다.
 드디어 그 남자가 입을 연다.
 ‘일본인 인가요?’ 능숙한 독일어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다시 묻는다.
 ‘중국인인가요?
 고개를 젓고, 묘지를 빠져 나온다.
 이곳에는 내게는 아버지라 불러도 좋을 내 후견인이었던 군의관 일디 아저씨가 묻혀있다.
 서둘러 걷는 나를 향해 그 남자가 묻는다.
 
 익숙한 언어다...내 고향의 말. 한국어.
 ‘그럼 한국인가요?’
 그렇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내 입에서는 독일어가 튀어나온다.
 ‘아니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두려웠을까?
 십팔 년 만에 처음 보는 한국인이.
 한블럭 떨어진 가게 옆에 숨어서 그 남자를 지켜본다. 호수 근처로 걸어가고 있다.
 몰래 그의 뒤를 따라가 본다.
 그는 호수 앞에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다.
 샤프베르크 산에는 아직 흰눈이 그대로 덮혀 있는데, 어느새 이른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호수가 많아서인지, 이곳에는 눈도, 비도 많다.
 그가 뭐라 소리를 지른다.
 “아버지!! 저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저, 남자는 돌아가지 않는단다. 한국말을 잘 하지는지 못하지만, 잘 알아들을 수는 있다.
 돌아가지 않겠다? 그렇다면, 이곳에 산다는 이야기인가?
 더미의 가슴이 뛴다.
 이곳에서 묵을 곳은 체르쯔 호텔 밖에 없는데..그곳은 그나마 겨울에는 난방이 되지 않아, 춥다.  저 남자는 어디서 살겠다는 걸까?


달의 호수 (그들만의 사랑2)
 결국 동영은 더미의 작은 집에 세 들어 살게 된다.
 아주 작은 방, 두개에 스토브를 켜면 바느질을 할 수 있는 안락의자 하나와 긴 쇼파 하나만으 로 꽉 차는 거실, 그리고 반평 남짓한 주방이 있는 더미의 방.
 더미는 아침이면 몬트제에 있는 양복점에서 재단보조로 미싱 일과 양복 포켓이나, 칼라 등에  마무리 스티치 손바느질을 한다고 한다.

 어느 날 동영은 비가 내리자 우산을 가지고 나가지 않은 더미를 위해, 양복점에 우산을 가져다  주려고 갔다 함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지나가는 자전거를 피하려다 넘어지는 더미의 입에서  ‘엄마!’ 소리가 나온다.
 놀라는 동영! 한참을 서로 바라만 본다...
 그제서야 더미가 한국인임을 알게 된 동영은 그녀에게 한국어를 제대로 가르치기 시작한다.
 더미는 그렇게 동영에게 언어를 배우면서,
 혼자였던 세상에서 둘로 살아가는 충만감을 느끼게 되고, 점점 동영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던 더미의 생일.
 군의관이었던 더미의 일디라이 아저씨가 일방적으로 정해 준, 더미의 생일날 그녀는
 늘 그랬듯이 호숫가로 가, 혼자 독한 술을 마신다. 그리고는 유일하게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방육성이 가르쳐 준 ‘서울연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한 번..두 번...세 번...스무 번..
 같은 노래를 슬픈 듯 읊조리는 더미를 지켜보던 동영은,
 그녀 마음 저 심연에 고인 뼈저린 고독을 느낀다.
 충동적으로 그녀를 끌어안는 동영.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그 밤...동영과 더미는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를 함께 나누고,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동영은 그날에서야 더미의 과거를 듣게 된다.
 어려서 언니가 있었던 것(준희를 친언니로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엄마의 이름은 모르지만 어 딘가 북쪽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배가 고파, 전쟁 중에 먹을 것을 훔치다 총에 맞아 죽 을 뻔 했다는 것. 그리고, 죽을 뻔한 순간에 자신을 구해주고, 이곳까지 데려온 후견인 일디라 이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
 더미의 과거는 처절했지만, 동영은 더미의 이야기를 듣고도 어린시절 그토록 귀여워했던 그 꼬 마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무 어린시절의 기억이고, 총을 맞았던 그 끔찍한 충격으로 그녀의 기억은 많은 부 분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영은 더미의 어깨에 있는 총에 맞은 흉터를 본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박혀 있었다던 M-1  총알을 만지작거린다.
 더미의 흉터에 입 맞추던 동영은 마음으로 그녀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운명은 또 그를 그렇게 한 여자만의 사랑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반지와 탄환 (동영, 더미를 떠나다)
 이제는 한국어도 제법 능숙해지고,
 동영의 사랑으로 더미는 터질 듯한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더미는 짤츠부르크에 있는 유일한 화교식당에 배추가 들어오는 날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동영에게 김치라는 것을 담궈 주고 싶은 그녀는 동네 아저씨의 트럭에 동승해 짤츠부르크로 떠 난다.
 한편, 동영은 더미를 도와 아르바이트를 한다.
 목장 일을 하기도 하고, 호수 낚시터의 일용직으로 일을 하기도 하고, 하다못해 더미가 부수입 을 올리기 위해 하는 옷 수선을 돕기도 한다.
 동영은 그렇게 모은 돈으로 18금 금반지 하나를 마련했다. 더미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사방 나무 덧문을 활짝 열어 놓고, 더미가 짤츠브르크에서 돌아오기 전에 대청소를 하던 동영.   
 거실 입구를 치워던 동영의 빗자루가 멈칫 한다.
 각하가.. 그 문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식적으로는 서독을 방문해서 뤼프케 대통령, 에르하르트 수상과 만나 광부, 간호사 파견에 대 한 성과를 검토하고 자축하는 자리였지만, 비공식적으로 비엔나를 방문하면서 동독과의 협상을  직접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위험을 무릅쓰고, 동영을 찾아 몬트쩨까지 온 것이다.
 ‘김동영이 그만 가자.’
 동영은 더미를 두고 떠날 수가 없다.
 ‘김동영이 두어 달 여자 끼고 푹 쉬었으면 됐다. 니 지금 서울가서 할 일이 있다.’
 동영은 결국 왔던 그 모습 그대로 떠난다. 떠나기 전 더미에게 썼던 메모조차 찢어 버리고,
 더미의 몸에서 나왔다는 M-1 총탄만을 손에 꼭 쥐고 떠난다.
 역사가..국가가..국민이 나를 필요로 하는데...내가 내 사랑만을 고집할 수가 없지 않은가.
 동영은 더미와의 사랑이 일탈이었다고, 이국땅에서 한 순간의 충동이었다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킨다.
 그러나, 각하의 전용기에 같이 탄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가슴이 갈라지는 아픔을 느낀다.
 나는...또..이 곳에 무엇을 두고 가는 것일까.

 
 한편, 배추를 사서 돌아온 더미는 흔적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동영 때문에 죽을 것만 같다.
 처음에는 사고라 생각하고, 인근을 샅샅히 뒤져보지만 동영은 그 어디에도 흔적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리고 양복점 주인에게 듣는다. 검은 벤츠를 탄, 검은 옷의 사람들 이십명 가까이가  더미의 집을 에워쌌고, 그리고 곧 이어 그 차들이 떠났다고.
 더미는 믿을 수가 없다.
 그토록 사랑했던 동영이 자신을 그런식으로 떠났다는 것을 차마 믿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문을 닫아걸고, 목 놓아 통곡하던 더미는 동영이 자신의 몸에 박혔던 총알을 가져 간 것을 발견한다.
 그래..가자..한국으로 떠나자.
 부더 아저씨의 말처럼, 그곳으로 돌아가 내 언니를.. 내 부모를.. 알고 있는 사람,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자.
 더미는 한국으로 돌아갈 가방을 꾸린다.

한 밤의 부산항 (밀수꾼 빈)
 내 이름은 장 빈.
 세상 사람들은 나를, ‘사랑을 모르는 차가운 놈’이라 한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오직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종뿐이다. 나는 네 가지를 사랑한다.
 
 윌리스 지프, 비틀즈의 음악, 보드카 그리고 바다.
 그러고 보면 바다를 제외하고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발명품인 건 맞다.
 음..나처럼 천재적인 인간들은 사랑의 대상에서 예외로 치자.

 다시 바다로 돌아가자.
 나는 내 어머니이자 마담 장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바다 밑의 세상을 사랑한다.
 그리고 바다는 내 사랑에 응답해 돈을 만들어 주었다.
 밀수.
 배가 항으로 들어오기 전, 밀수품을 완벽방수를 해 포인트가 되는 지점에 던져 넣으면, 나는 다 이빙을 해서 그 물건을 인수한다. 완벽하게 세관의 눈을 피할 수 있을뿐더러, 가라앉은 보물선 을 찾는 것 같은 스릴을 느낀다.
 밀수가 범죄라거나, 비도덕적이라거나, 국가 경제에 해악이라거나, 내가 그 해악의 주범이라거 나 하는 건 집어치우자.
 나는 인간들의 가치판단이나 평가에 관심이 없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잣대는 단 하나다.
 ‘재미있느냐? 재미없느냐?’

 

 오늘 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부산항에서 기회를 짱 보고 있다.
 부산에 온지 오늘로 열흘.
 분위기가 심상찮다.
 어디나 잔챙이 같은 놈들이 물을 흐리고, 이 밀수판도 마찬가지다.
 밀수 그 자체가 희열과 쾌감을 창조하는, 예술 행위임을 느끼지 못하고 돈만 밝히는 놈들 때문 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정부로부터 밀수 단속령이 떨어졌고, 부산세관과 부산 해양경비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아.... 오늘은 거의 전율이 인다. 짜릿해서 좋다.

 내가 오늘 접수할 물건은 두 가지다.
 일주일 전 홍콩에서 뜬 배에 부탁한 오메가 시계 29개. 로렉스 시계 1개.  
 고객 확보는 끝이 났고, 결혼시즌이 봄이 오기 전에 나는 그들에게 물건을 대 주어야 한다.
 오메가 시계 스물아홉 개. 로렉스 시계 한 개. 우습게 보이겠지만 신당동에 서민주택 10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이른 초봄의 바다는 수온이 뚝 떨어져 있다.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일명 알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다.
 얼굴에 와 닿는, 그리고 서서히 드라이 수트 아래로 느껴지는 차가움.
 긴장된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다.
 역시 나의 밀수는 예술이다.

 제기랄!! 아무리 뒤져도 없다!
 오늘 장사는 글렀다. 아니, 오늘 작품은 망쳤다.
 누군가 꼬발랐음이 틀림없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요 며칠 몰아친 폭풍으로, 물건이 포인트에서 밀려나 버렸나보다.
 한 시간을 헤맸다. 자그만치 2키로나 떨어진 모래밭에 파묻혀 있는 거 아닌가.
 산소통 다 쓰고서야 겨우 찾았지만, 결국 해양경비대의 감시망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가 판단이 가장 빨라야 한다.
 반쯤 푼 오메가 뭉치를 다시 바다 밑으로 던져 버린다.
 바닷물에 곧 부식될텐데.. 다시 건져낸다 해도 상품가치는 없다.
 하지만 롤렉스는? 태을방직 고창회 회장의 생일선물로 준희가 부탁한 시계다.
 바다 위로 올라 온 빈은 감시를 따고 물건을 맡길 사람을 찾는다.
 바로 그때 빈의 시선에 더미가 들어온다.
 한 눈에 보기에도 살짝..맛이 간 여자가 아닌가 싶다.
 그 이상한 옷에, 꼬사쥬가 달린 모자에, 긴 장갑에, 들고 있는 가방까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헌데....그 정신 나간 여자가 걸치고 있는 것 전부는 한눈에 봐도 쩨다, 쩨.
 즉, 명품이다.

서울을 향해 (더미와 빈, 동영과 준희)
 빈은 더미에게 시계를 맡겨 버린다. 얼떨결에 빈의 롤렉스를 맡게 된 더미.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비행기로 일본까지.. 다시 대판에서 부산항까지...
 지구의 반을 돌았다.
 참으로 멀고 먼 여정 동안 동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그리움과 섭섭함..
 어떤 때는 분노도 교차했다.
 그렇다고 한국에 가면 동영을 꼭 찾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이미 맹목적인 사랑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맛보았기에...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고하고 떠난 남자를 도저히 예전처럼 사랑하기만 할 자신은  없었다.

 오스트리아 국적으로 입국한 더미는, 불분명한 국적과 출신에 의심 가는 롤렉스 시계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른다.
 세관에서, 경찰서로, 중정 대북분실 부산지구로 끌려 다니던 그녀는
 꼬박 만 하루만에야 풀려난다.  
 그야말로 황당할 따름이다.
 18년 만에, 그래도 가슴 설레며 찾아온 고국에서의 첫날밤을 구치감에서 지내다니...
 더구나 다음날 아침 구치감 앞에서 기다리던 빈은 조사과정에서 롤렉스시계가 압수 된 것에,  버럭 화를 낸다.
 화를 내야할 사람이 누군데...!
 
 고국에 돌아오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한상 가득,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먹는 것.
 그 다음, 어렸을 때 기억처럼 뜨거운 바 닥에 등을 대고 잠을 청하는 것.

 빈은 더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꽤 유명한 식당에 가서 한상 가득 잘 차린 한정식을 사주었다.
 더미는 음식에 술까지 실컷 먹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그 모습이 어이없으면서 한편으론 귀여워서.. 가지도 못하고 바라보는 빈.
 이렇게 하루 내내 잠만 자는 여자는 처음이다.
 그렇게 하루를 같이 지낸 빈은 음식값으로 더미의 옷과 소지품, 하다못해 신던 구두까지도 홀 딱 벗겨 떨이를 쳐 사버렸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국제시장 좌판에서 산 월남치마에 스웨터를 대충 입혔다.
 그래도 왠지, 이 여자 빛이 난다.
 한판 같이 질펀하게 놀아 봐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쥐뿔도 없는 여자의 소지품을 떨이 친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먼 길 혼자 가는 게 심심하기도 해,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고 더미를 윌리스 지프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어디로 갈 거냐고 물으니...
 ‘충무로를 간다... 아니 보신각... 아니, 아니 명동...’
 아무래도 또라이가 틀림없다....
 ‘거기 다 다 서울이야.’
 더미와 빈은 그렇게 서울로 향한다.
 서울로 향하는 지프 안.
 
 빈은 더미에게 이것저것 묻지만, 더미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저 창에 눈을 딱 붙이고, 연신 ‘와! 맞아, 저런 것도 있었지’ 감탄사를 연발하며
 눈알이 빠질 것처럼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심심하고 어색하다... 그래서 빈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네거리에 버린 담배는
     내 맘 같이 그대 맘 같이 꺼지지 않더라

     네온도 꺼져 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레인 콧 깃을 올리며
     오늘밤도 울어야 하나
     배가본드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방육성 아저씨의 십팔번은 부르면 부를수록 흥이 난다.
 나도 모르게 제 흥에 취해 핸들까지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다.
 일절을 다 부르고 이절로 넘어갈려는 찰나...
 이 또라이 같은 오스트리아 여자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가슴이 쿵 떨어진다.
 이 여자 신이 났는지 이제는 노래를 가로채 부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군가?’

Kiss under the sea (준희의 사랑)
 동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미가 사무친다.
 이별의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무참하게 버려버린 더미에 대한 죄책감.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나날이 또렷이 되살아나는 그녀와의 추억, 그녀에 대한 사랑이었다.
 일탈이었노라고, 그건 그냥 이국에서 있었던 잠시의 일탈이었다고 자신의 마음을 속여보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보아도 자꾸만 만월(滿月)의 몬트제 호수에서 노래하던 더미가 떠오른다.

 그런 동영을 보며 준희는 깊게 남은 사랑의 흔적을 느낀다.
 불과 사 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신을 떠나 있었던 그 시간 동안 동영은 변해있었다.
 
 확실히 자신이 주웠던 동영과 지금의 동영은 전혀 다른 사람임이 느껴졌다.
 사랑이란 감정은 하룻밤, 아니 단 한 순간에도 생겨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영과 준희는, 창회의 별장이 있는 청간정으로 다이빙을 떠난다.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고 억누르다.. 미친 듯이 바다 속을 헤매는 동영...
 그러다 준희와 눈이 맞는다.
 무슨 감정인지, 어떤 상황인지 설명하고 싶지 않다. 그냥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한 순간의 충동일 수도 있고, 이제 그만 더미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기 강박일  수도 있었다.

 그 저녁,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준희에게 동영은 대답 대신 탄환을 꺼내든다.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탄환을 만지작거리며, ‘오스트리아에 두고 온 사랑’이라 내밷는 동영.. ‘이 제는 그녀를 잊고 싶다고...’
 여자의 직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는지... 자존심이 이런 상황을 허락하질 않는다.
 물끄러미 동영을 바라보던 준희는...
 ‘그냥 계속 사랑해!’라고, 차가운 한 마디를 던지고 싸늘하게 돌아선다.

 하지만.. 준희는 자신에 마음속에 얼마나 동영이 들어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자존심의 크기보다 사랑의 크기가 더 크다는 것을.
 
더미의 화려한 서울 입성 (아세아 복장학원으로..)
 빈은 냉정하게 더미를 보신각 앞에 내려놓고 돌아선다.
 자신의 앞일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듯, 그저 서울에 왔다는 사실에 흥분하는 더미를 보니 무척 이나 재미있다.
 성큼성큼 서울의 거리를 걷는 더미의 뒤를 몰래 따르며 지켜보기로 했다.
 몇 푼 남지도 않은 돈으로 떡볶이를 사먹고, 사이다를 사먹고.
 신문사에 가 자신을 아는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내려하고,
 일꾼들이 한 데 엉겨 자는 일방에서 하룻밤을 자는 더미.
 그러더니 돈이 다 떨어졌는지 그제야 일자리를 찾기 위해 양복점을 기웃거린다.
 이제야 동정심이 발동했다.
 넓은 서울 땅에서 유일하게 아는 남자와의 재회에 놀라고 반가워하는 더미의 손을 끌고
 아세아 복장학원의 기숙사로 데려갔다.
 연경과 피에르 방에게 더미를 맡겼다. 아니 내 던졌다.
 양복점을 기웃거리는 걸 보니까 바느질을 제법 하나보니 바느질을 시키던가, 아니면 식모로 부 려먹던 알아서 하라고...
 이 정도면 정체 모를 무일푼 여자를 털어먹은 데에 대한 배려는 충분한 것 아닌가.

 빈을 짝사랑하는 두 시람, 연경과 피에르 방은 봉실에게 걸리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더미를  몰래 기숙사에 숨겨준다.
 까탈스런 봉실이 아는 날엔, 자신들도 쫒겨날 판이지만... 혹시아나... 이 일로 빈의 환심을 살지.
 
 게다 오갈 데 없이 이국만리에서 온 더미를 그냥 모른 채 버려둘 수 없다 생각했고.
 결국 더미는 연경의 방에 얹혀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살게 된다.
 바로 그날이 폭풍처럼 거센 바람을 타게 되는 더미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앙상블 (아세아 복장학원으로 들어오는 준희)
 창회의 태을방직은 섬유산업부흥기 속에서 나날이 성장해, 국내 최고의 기업이 된다.
 한편 태을방직의 방계회사로 영수가 맡고 있는 숙녀복브랜드 ‘뷰티’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 다.
 기성복이라기에는 비싸고, 개성이 없어 가격대비에서 시장에 밀리고, 품질대비에서는 의상실 맞 춤옷에 밀리는 것.
 창회와 영수는 그들의 총명한 외동딸이자 태을방직의 유일한 후계자인 준희 에게 사업의 첫  시작으로 ‘뷰티’를 맡기려 한다.

 준희는 숙녀복 브랜드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의상 전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생각한다.
 옷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디자인이 뭔지, 그 공정과정 전부를 알지 못하고는 ‘뷰티’를 일류기 업으로 키울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자신에게 속성으로 의상에 대해 알려줄 최고의 디자이너를  찾는다.   
 우리나라 최고의 디자이너라면 괴팍하기는 하지만, 부띠끄 ‘앙상블’의 대표 장봉실.
 준희는 회사차원에서 봉실을 정중하게 초대한다.
 숙녀가 되고나서는 스스로 외국 패션잡지를 보고 디자인을 변용해 자신이 직접 맞춰 입거나 미 팔군에서 흘러나오는 진을 입었던 준희지만.. 준희 역시 어머니 영수와 함께 앙상블의 고객이기 도 했다.
 
 앙상블은 그야말로 우리나라 사교계 최고의 의상실이었던 것.
 초대되어 온 봉실은, 준희와 창회, 영수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준희의 개인 선생이 되어달라는  말을 단칼에 거절한다.

 봉실의 차갑게 비웃는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준희가 발끈한다.
 그 밤, 준희는 앙상블로 봉실을 찾아간다.
 문하생으로 받아달라고, 아세아 복장학원의 학생이 되겠노라... 청한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후쿠오카 한・일 패션 대전’에 수석 디자이너로 선발되면 앙상블의 모든 이권을 양도하고 문을  닫아달라는 당돌한 조건을 제시한다.
 원한이 깊은 아이다.
 한번 거슬리면 용서가 안되는..그런 아이라면 디자인도 치열하게 할테고, 성공할 자질이 있다.
 준희의 기질을 눈여겨 본 봉실은 기꺼이 준희의 제안을 수락한다.
 그때, 준희는 몰랐었다.
 봉실이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 생각하고,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튿날부터 준희는 아세아복장학원에 벤츠를 타고 수강하는 학생이 된다.
 방육성과 하경, 상희, 피에르 방, 수강생들은 준희를 보며 부잣집 아가씨의 며칠안갈 변덕으로  바라봤지만, 그들은 준희가 얼마나 치열한 성격인지를 몰랐다.
 준희는 매일 새벽, 누구보다 일찍 학원에 나가 앞치마를 입고 찬물에 걸레를 빨아 학원대청소 와 잔신부름을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었고, 곱지 않은 시선을 불식시키기 위한 오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과연.. 준희는 자신의 의지대로 봉실을 제치고 한.일교류전에 수석디자이너로 발탁될 수 있을  것인지..
 

디자이너로 가는 길 (망쳐버린 파티복)
 더미가 연경의 방에서 숨어 지내는 얼마간 벌써 십년지기라도 되는 듯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돼 버렸다.
 비 오는 날엔 김치전도 굽고, 방육성이 사온 돼지고기로 오스트리아식 바비큐 요리도 하고, 청 소도 열심히 하고, 연경의 숙제도 잘 도와주고...
 요새는 빈도 가끔씩 기숙사에 내려와 함께 밥을 준비하고 노닥거리다 가곤 한다.
 생전 안 그러던 인간이...
 단 하나 아쉬운 건 일자리만 찾으면 딱인데, 그놈의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가 않다.

 연경은 가난한 지방아이라 기숙사에 살고, 디자인 공부를 배우는 대신
 ‘앙상블’의 사환으로 일하고 있다.
 고객관리를 하고, 잔심부름도 하고, 청소를 한다.
 연경은 앙상블의 고객이 언젠가 자신이 낼 연경 부띠끄의 고객이 될 거라고,
 자기가 조만간 디자이너계에 큰 일 한번 낼꺼라고 큰소리를 팡팡치는데...
 정말로 큰일을 내고 만다.

 봉실이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주한독일대사 부인의 파티복을 망쳐버린 것이다.
 원래 앙상블 안에서는 밥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의상실 안에 김치냄새며, 된장냄새를 풍기는 건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니...
 헌데, 먹는 걸 좋아하는데다 알뜰하기로 치면 아세아복장학원 최고인 연경.  
 
 더미한테 부탁해 저녁을 앙상블로 몰래 공수해 온다.
 혹시나 장봉실에게 들킬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허겁지겁 더미가  만든 부대찌개를 먹던 연경.
 아뿔사! 그만 찌개를 대사 부인의 파티복에 엎어버린다.
 

 연경, 봉실에게 파문당할 꺼라고, 그러면 자긴 죽어버릴 꺼라고 울고, 불고 난리를 친다.
 파티복을 세탁도 해보고, 다림질도 해보고, 빈에게 부탁해 미팔군에서 나온 오렌지 껍질로 문질 러도 보지만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다.
 안 그래도 미운 연경이 얄미워 죽겠는 피에르 방은 사실대로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게 상책이라 는데, 연경은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겠단다.

 갑자기 면도칼로 파티복을 다 찢는 더미....
 그 모습에 숨이 넘어갈 듯 소스라치는 연경과 피에르 방.
 사실대로 말도 못하고, 죽어버릴 수도 없으니.. 옷을 만들 수밖에 없지 않는가.
 더미는 대사부인의 파티복과 똑같은 옷을 만들자고 한다
 봉실의 디자인이 어떤지, 재단 상태가 어떤지를 알려면 해체해야지 별 수가 있는가.
 아세아 복장학원의 자칭 다크호스 두 사람이 있는데, 못할 일이 어디 있겠냐며 씩 웃는 더미...
 일단 방육성을 속여 천을 빼내온 세 사람은 옷을 만들기 시작한다.
 피에르 방은 재단을, 더미는 디자인과 재봉을, 연경은 자주색 우단으로 꼬사쥬를 만든다.
 졸음이 쏟아지다 못해 바늘에 찔리기

 도 하고, 가위로 허공을 자르기도 하지만.. 밤새 옷을 만든다.

 다음 날, 연경은 대사부인에게 옷을 가져다주러 가야하는데 떨리는 마음에 발이 떨어지지 않는 다. 뭐 그 까짓 거하며, 먼저 나섰지만 더미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는 매한가지다.
 파티에는 봉실과 준희, 빈과 동영도 따로따로 초대되어 있었다.
 최선을 다했다 말하고... 대사부인에게 드레스를 전하는 더미.
 더미의 유창한 독일어와 아름다운 파티복에 감탄을 내밷는 대사부인은 더미의 시중을 받으며  드레스를 갈아입고 파티에 들어선다. 성공이다.
 더미와 연경은 손을 맞잡고, 폴짝폴짝 뛰며 기뻐한다. 그러나...
 대사부인의 드레스를 본 봉실은 한 눈에 자신의 작품이 아닌 모작임을 알아내고,
 사건의 전말을 연경을 다그쳐 알아낸다.
 
 봉실은 더미의 뺨을 세 대나 세차게 후려친다. 자신을 때리라며 울며 매달리는 연경.
 아팠다. 눈물이 나올 만큼...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만들어서, 무사히 처리한 게 왜 잘 못인가.
 봉실은 옷을 망친 연경은 용서할 수 있어도, 남의 옷을 훔친 더미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네가 디자이너라면 알 수 있을 거라는 봉실의 말에, 더미는 왜냐고 물을 수 없었다.
  
 그 밤. 봉실은 더미의 가방을 싸서 쫓아낸다.
 피에르 방과 연경에게 다신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라고 엄포를 놓는다.
 
 밤새, 보신각 종 앞에서 봉실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더미.
 비가 쏟아진다... 계속 그렇게 앉아 있는 더미.....
 날이 밝자 마자 봉실을 찾아간다.
 역시 밤새도록 더미가 만든 대사부인의 옷을 꼼꼼히 살펴본 봉실,.. 망연자실하여 앉아 있다.
 아무리 카피를 했다 해도, 그 정교함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고,
 바느질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만든 옷이 더 낫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빼꼼 봉실의 방문을 열리더니,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더미가 들어온다.
 봉실에게 학원에서 수강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더미.
 꼭 디자이너가 되겠다. 남의 옷을 훔치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며.....
 봉실은 그런 더미를 받아들이고,
 더미와.... 준희는...
 그렇게 아세아복장학원에서 같은 디자이너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두 명의 준희
 그 새벽.
 봉실의 제자가 된 더미는 앞치마를 두르고 학원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를 뚫고 준희의 벤츠가 도착한다.
 
 
 준희, 청소를 하려고 앞치마를 두르다 더미를 본다.
 십 팔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마주치는 두 사람.
 서로를 물끄러미 보다 다시 청소를 한다. 비 소리가 요란하다.
 책상을 닦다, 걸레질을 하다 두 사람, 왠지 서로에게 이끌리는 느낌을 받는다.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는 두 사람.
 준희의 가슴은 고동치고, 더미의 눈에 이유 없이 눈물이 고인다. 삶이 서글퍼서인가...
 맑은 눈에 눈물이 고인 더미가... 입가에 슬픈 미소가 밴 준희가...
 .....서로를 보고 있다.
 그 둘은 왠지 서로에게 불안과 애틋함을 동시에 느낀다.
 ‘나는...고준희야’
 ‘나는...더미에요..’
 더미의 눈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진다.
 준희, 그런 더미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미간을 찌푸린다.
 왜.. 이렇게 불안한걸까.. 머리가 아프다.

Wie geht es dir? (더미와 동영의 재회)
 준희는 동영을 잊을 수가 없다.
 창회와 홍석도 준희와 동영의 결혼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전부를 얻을 수 없다면, 그를 버리겠다... 수도 없이 되뇌었지만...
 버릴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이미 동영은 그녀의 전부였다.
 준희, 동영을 찾아간다. 더미를 잊을 필요는 없지만, 그녀보다 나를 더 사랑해 달라.
 동영은 그러겠노라 대답한다. 그 강인한 여자가 이렇게 아파하는구나...
 동영은 더미를 떠나보내기로 한다. 오스트리아로 가는 후배에게 소포를 부탁한다.
 ‘내 인생에서 너를 완전히 내려놓기로 했어’라는 편지와 함께 더미의 탄환을 보낸다.

 아침부터 창회와 영수가 들떠있다. 준희의 생일이다. 아니, 사실은 더미의 생일이다...
  오늘, 동영과 준희의 사이를 공식적으로 알리기로 했다.
 봉실에게 특별히 주문한 드레스를 기다리는 준희.
 봉실의 심부름으로 준희의 드레스를 배달하는 더미.
 십 팔년 만에 재회하는 엄마와 딸... 그러나,
 더미도, 아빠도, 엄마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한편, 동영은 후배에게 부탁해 보냈던 소포를 되돌려 받는다. 수취인불명...
 그녀가 몬트제,를 떠났단 말인가.
 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젠가 더미에게 돌아갈 날을 꿈꿨던 걸까?
 몬트제에 가면... 그녀가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이제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찾을 수도 없구나..
 이제는...정말 그녀가 내 인생에서 사라졌구나... 
 동영은 준희에게 줄 꽃다발을 들고, 사무실을 나선다.

 화사한 봄볕이 정원에 내리쬔다...
 더미는 드레스를 입은 준희를 마지막으로 다듬고 있다. 오늘 준희는 너무도 아름답다.
 그 때.. 문이 열리고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 남자.. 동영이다. 

 더미는 놀라 몸이 굳어버린다.
 동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렇게 그녀를 보기만 한다.
 더미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른다.
 줄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이... 떨어지지도 않고, 더미의 큰 눈을 그득히 채우고 있다.
 천천히 동영의 곁을 스쳐 더미가 지나간다.
 잊고 있었던 더미의 체취가 동영의 가슴을 파고든다. 가슴이 뛴다.

 준희의 연인이 동영이었다니... 연인이 있으면서 자신을 그렇게 대했다니...
 점점 머리가 아득해지고, 다리에 힘이 빠진다.
 이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뒤따라 나온 동영이 잊혀진 더미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온다.
 더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고 또 뛴다. 신발이 벗겨지고, 발목이 비틀어지는 지도 모른 채,  동영에게서 도망친다.
 
 달려온 동영이 더미의 어깨를 돌려세운다. 
 그 얼마나 그리워했던 사람인가. .............
 ........................... 그렇게 마주 보는 두 사람......
 ,,,,,,,,,,,,,,,,,,,,
 '....Wie geht es dir?' 동영이 묻는다.
 '......Wie geht es Ihnen?' 원망스런 눈으로 되묻는 더미.

 참았던 동영의 가슴이 찢어진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돌이킬 수 없다. 다시 준희를 버릴 수 없다.
 동영은 더미에게 돌아가라고 한다.
 더미의 손바닥에 탄환을 쥐어주며,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라 한다.
 탄환을 내려다보는 더미의 눈에서... 그제서야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진다....

 ‘Ich heisse nichts Rena.' '나는 당신이 알던 레나가 아니다.’
 더미, 탄환을 집어던지고 또각또각 돌아서 간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잃어버린 탄환 (사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 밤, 밤새 통곡하는 더미를 보며 빈은 처음으로 사랑에 대한 감정을 경험한다.
 더미를 울게 한 남자에 대한 질투가 끌어 오른다.
 그렇구나.. 저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구나..를 알게 되는 빈.
 상처 나고 잔뜩 부은 발에 붕대를 감아준다.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것. 그것이 그녀를 도와주는 것임을 알고 있다.
 빈이 건네주는 보드카를 더미는 홀짝 홀짝 물처럼 마신다.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서울야곡을 밤새 불러댄다.
 불러도.. 불러도 가슴이 채워지지 않는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던 더미.., 오스트리아로 떠나겠다 말한다.
 말과 행동이 거의 같은 속도에 이루어지는 다혈질 더미,
 동영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가방을 싼다.
 부산항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더미는 깨닫는다.
 오스트리아에 두고 온 것보다, 이 나라에서 얻은 것이 훨씬 많다는 걸.
 하지만 떠나려면, 지금이 그 때라는 걸 더미는 알고 있다.

 멍하니 앉았다, 시계를 보던 더미... 갑자기 일어서 어디론가 간다.
 
 길거리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찾는 듯,
 바닥을 손으로 쓸고 있는 더미의 모습이 보인다.
 무언가를 찾은 듯 손가락을 치켜들고 쳐다본다.
 눈부신 아침 햇살에 금빛 탄환이 반짝인다.
 촉촉한 눈으로 씩 웃는 더미, 준희집 대문 쪽을 쓱 쳐다보더니 이내 툭툭 털고 일어나 간다.

 한편, 동영은 더미가 짐을 싸서 나갔다는 얘기를 듣는다.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온 후 대통령 보좌관으로 임명된 동영..
 화려하고 큰 사무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지만,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다.
 시간은 자꾸 흘러, 더미가 떠날 시간이 가까워온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비서관 회의가 한 시간 후에 있다고 다그치는 비서를 뒤로하고,
 한 시간 안에 돌아오겠다며 나서는 동영.
 급히 차를 몰아 역으로 가는 동영.
 왜 가는 걸까..? 말리려는 것도 아니고. 다시 그 눈을 쳐다볼 자신도 없는데...
 도대체 왜 가는 걸까...?

 
 허겁지겁 플랫폼으로 들어 온 동영의 눈에 더미의 모습이 보인다.
 더미가 올라타고, 자리에 앉고,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동영은 그녀를 바라만 본다.
 기차가 움직인다.
 동영이 안절부절 못한다.
 기차가 플랫폼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동영이 기차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간다.
 가까스로 출발하는 기차에 올라탄다.
 객차를 뒤지며 더미를 찾던 동영, 객차와 객차를 연결한 통로에서 그녀와 마주친다.
 두 연인... 아무 말이 없는데....
 이 여자 앞에서는 조국도, 임무도 모든 것을 잊는다.
 결국 더미를 가슴에 꼭 껴안고 마는 동영.

 두 사람은 조치원 역에서 내린다.
 몬트제의 호수가같은 민박집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는 동영과 더미.
 더미의 주머니에서 탄환을 발견하는 동영.
 던져 버린 탄환이 다시 더미의 주머니에 들어 있다.
 가슴이 아픈 동영...
 그러나...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서로를 찾은 두 연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시련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 날밤. 세검정에선 무장공비 29명이 사살되고,
 종로경찰서장을 위시한 군경 104명이 교전 중에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에서 내려 보낸 특공대가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한 것이다.
 보좌관인 동영이 자리를 비운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동영은, 급히  서울로 돌아온다.
 초췌한 몰골 그대로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는 동영.
 아버지가 와 있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집무실에 대통령과 아버지가 단 둘이 서 있다.
 동영을 한 번 쳐다보던 대통령은 다짜고짜 내 아버지, 김홍석 국방장관의 뺨을 후려친다.
 뻑! 마치 총성 같은 그 소리가 내 고막을 찢는다. 
 
 저벅저벅 방을 나가버리는 대통령.
 텅 빈 방에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흐른다.
 그렇게 더미와 동영 사이에는 암운이 드리운다.

the designer (더미의 기벽) 
 장봉실은 더미가 영 신경 쓰인다. 골칫거리다.
 어떤 날에는 천재인가 싶다가, 어떤 날에는 엉뚱해도 너무 엉뚱한 옷을 만들어낸다.
 
 오스트리아에서 오래 살았다더니... 그래서인가?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 너무 파격적인 옷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저 아이가 상처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된다.
 이쯤에서 디자인에서 손을 떼게 하고, 차라리 야무진 손끝을 이용해 재단사쪽으로 돌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도 아니면 앙상블의 일이나 돕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개성이라는 것이.. 너무 앞서가면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더미는 아직 모르고 있다.
 다른 예술과 달라서 옷은, 그 자체만으로는 가치가 없지를 않는가.
 음악이나, 미술처럼 후대에 평가 받는 옷이란 있을 수가 없다.
 소비자가 없으면 존립되지 않는 것인데...더미, 저 아이는 너무 앞서간다.
 더미와 준희를 반씩만 섞어 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준희의 디자인은 입는 이들에게 프라이드를 느끼게 해준다.
 도도하고, 화려하고.. 매혹적이다.
 천의 선택에서, 색에서 장식까지.. 최고를 선택해 최고를 뽑아낸다.
 헌데... 왠지 정감이 안간다. 쇼윈도우에 디스플레이해야 할 옷이지 현실의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옷 같지가 않다.
 게다, 유럽 디자인을 변용한 것 같은 냄새가 난다.
 봉실은 그렇게 더미와 준희 사이에서 갈등한다.

 앙상블에서 일을 하는 조건으로,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아세아복장학원 수강생이 된 더미는 약 간의 용돈을 받는다.
 헌데, 문제는 용돈을 받는 당일 다 써버린다.
 용산으로, 동두천으로, 광장시장으로, 헤매고 돌아다니고, 빈을 통해 미팔군에서 수입하는 옷들 을 구경하다 조금만 특이한 디자인의 옷을 보면, 핀이 살짝 간다.
 
 아무리 비싸도 그 옷을 사서, 면도칼로 다 뜯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
 어떻게 바느질을 했고, 애초에 재단 상태가 어땠는지를 확인해서 그대로 만들어 보는 게 더미 의 기벽이다.
 
 그러던 어느날.
 봉실의 심부름으로 뷰티 오영수 여사의 옷을 전달하게 되는 더미.
 사랑을 앗아간 준희는 미워도, 준희 엄마 영수는 밉지가 않다.
 얼굴이나 마음씨나 참 고운 아줌마다.
 옷을 만들 때보다 영수의 허리가 줄었는지.. 뭔가, 아구가 안 맞는다.
 그 자리에서 스커트의 단추를 옮겨준다.
 영수, 단추를 옮기다 바늘에 찔려 피를 흘리는 더미의 손가락을 무의식중에 꼭 싸매준다.
 그리고, 봉실에게 전하라고 옷값에 넉넉한 차비까지 얹어서 더미에게 준다.
 왠지 이 아이는 정이 간다. 곱상하게 생긴 계집애가 마음도 이쁘고, 참 싹싹하다.
 
 그길로 바로 앙상블에 돌아왔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더미, 재동 길을 걸어 나오다 재동 입구 양장점에서 독특한 망토를 발견한다.
 눈이 많고, 바람이 많은 북구나 동구 쪽에서는 흔히 두르는 망토지만,
 우리나라에서 망토는 낯선 장르다.
 의상실에 들어가 이리저리 살펴보던 더미는 그 망토가 밀수된 옷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고 나왔어야 되는데.. 이미 연경과 피에르 방, 방육성 아저씨한테까지 몇 달치 월급을 빚지고  있는데.. 더미는 차마 그 망토를 두고 나오지 못한다.
 
 봉실에게 전해야 하는 옷값으로 망토를 사서 돌아온 더미는 연경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망토를 면도칼로 찢어 버린다.
 망토의 재단을 전부 확인한 더미는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하늘이 노래지는 더미.
 다시 재봉질을 해서 그 의상실에 반납해 보려 하지만... 실패하고.
 봉실이 옷값을 달라고 하자, 사색이 된 더미는 거짓말을 한다.
 자신이 실습시간에 쓰려고 빈에게 부탁해 구한 수입 옷감을 내 놓는다.
 영문 몰라 어리둥절한 봉실에게, 태을방직에서 새로 개발하려는 수입 천인데 옷값 대신 앙상블 에서 써보라고 영수가 줬다고 얼렁뚱땅 둘러댄다.
 원래 남을 별반 의심치 않고, 돈에 대해 별 개념이 없는 봉실은 그런가보다 하고 그 일을 대수 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더미를 못마땅해 하던 수강생 상희에 의해 더미의 거짓말이 들통 나고,
 
 봉실은 어이가 없다. 봉실은 더미를 쫓아내야 할지, 어떨지.. 고민하다.. 위험한 발상을 한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씩이나 자신의 디자인을 퇴짜 놓은 재무장관의 외동딸.
 그녀가 주문한 옷을 맡겨보기로 한다.
 
 봉실은 더미에게 치수를 던져 준다.
 그 아이의 망토를 만들어 봐.
 그런데.. 니가 지금 산 이 망토를 카피해 짝퉁을 만들지 말고, 모레까지 그것과는 다른 독창적 인 스타일을 만들어 봐.
 
 옆에서 더미에게 주어지는 과제를 듣고 있던 준희가 또 발끈한다.
 자신에게도 기회를 달라는 것.
 더미에게 힘든 과제일 수도 있겠지만,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지 않는가.
 자신에게도 똑 같이 재무장관 딸의 겨울옷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달라 한다.
 그렇게 더미와 준희는 각각 연경과 피에르 방, 상희와 방육성의 도움을 얻어 첫 디자인을 하기  시작한다.

 이틀 후.
 더미와 준희는 봉실 앞에 작품을 내 놓는다.
 
 더미는 핏빛의 후드 달린 겨울 점퍼(당시로서는 후드 달린 점퍼는 거의 센세이셔널이었습니다),
 준희는 카라와 소매에 털이 달린 흰색 롱코트.
 
 장관 부인과 딸, 봉실 앞에서 각각 선정한 모델에게 옷을 입혀 가벼운 패션쇼가 벌어진다.
 결국, 장관의 딸은 더미의 옷을 선택한다. 그러나 준희의 디자인도 추가로 구매한다.
 
 그날 빈의 주선으로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딘 더미의 축하 삼겹살 파티가 열린다.
 그 시간 준희는 차디 찬 봄 바다로 뛰어든다.
 실패했다는, 처음으로 또래에게 졌다는 열패감을 찬 바다에 식힌다.
 그리고 밤을 새워, 더미의 디자인을 본 떠 후드 달린 겨울점퍼를 만들어 입어본다.
 
   그리고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린다.
 두 번 다시 더미에게 지지 않겠다..

사랑이 어긋날 때
 동영은 아버지로부터 더미와 헤어질 것을 강하게 요구 받는다.
 아들을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혼신을 다 했고, 이제껏 대통령이 되기 위해 살아온 아들이,
  
 그깟 미천한 계집 하나 때문에 인생을 접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동영은 아버지의 반대와 눈물 앞에 마음이 흔들린다.
 과연, 나 하나 행복하자고 소중한 사람들을 불행하게 해도 좋은가.
 꿈은, 미래는 접을 수 있다지만.. 내 사랑을 쫒아가는 것이 아버지를 괴롭히고,
 준희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동영의 이런 고뇌를 빈은 용서할 수가 없다.
 빈은 이제껏 더미가 우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나라면 그녀의 눈에 눈물 한 방울 흘리게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왜 하필 동영이란 말인가.
 빈은 동영의 차에 자신의 윌리스 지프를 힘껏 박는다.
 피투성이가 된 빈이 동영에게 외친다.
 웃게 할 수 없다면, 그 가엾은 앨 그냥 둬.. 나라면 그앨 최고로 만들어 줄 수 있어.
 나라면 더미를 웃게 해줄 수 있어.
 형은... 준희에게 가. 그게 우리 모두를 위해 좋은 길이야.
 부축을 마다하고, 걸어가는 빈의 뒷모습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동영.
 그저.. 사랑한 것 뿐인데... 우린 왜 사랑 때문에 이렇게 또 힘들어야 하는가.
 그날, 빈은 더미에게 어울리는 힘을 갖겠노라고, 결코 동영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인 더미를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사랑이 치열해지면, 누구도 양보할 수가 없나보다.
 대관절 사랑이 무엇이 길래.. 자신을 파괴시키고, 주위를 파괴시키면서까지
 오직 ‘그 한 사람’만을 열망하게 되는 것일까..
 
 타협도 없고, 한 치 물러섬도 없이 감정의 바닥을 쳐야 끝이 나는 사랑.
 어긋난 사랑만큼, 아프고 고통스러운 또 있을까 싶다.
 만리를 넘어, 이곳까지 동영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달려온 더미.
 더미를 사랑하는 일이, 자신의 미래와 서른 해 살아온 신념을 포기하게 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것을 버리고자 하는 동영.
 이제껏, 더미의 그림자 인생인 준희로 살았으나,
 동영과 함께라면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있다고..
 강희로서도 행복할 수 있기에 자신의 전부를 동영에게 건 준희.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 단 하나, 처음으로 소망하는 일이 생겼다고 더미만이 자신을 살게 하는  힘이라 믿는 빈.

 네 명의 사랑이 이토록 제 각기의 명분과 제각기의 절실함으로 가슴 아픈데,
 그들 중 누구에게 자신의 사랑을 접으라고, 포기하라 할 수 있는가.
 동영, 빈. 더미, 준희,
 네 사람은 서로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미움으로 범벅이 되고,
 조금씩.. 조금씩 더 강한 갈증을 느껴가는데......
       the fashion seventies!

 

 

 

 

 

 

 

 

 

 

 

 

 

 

 

 

 

 

 

첨부파일 패션70s_시놉.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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