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만원 고료 <2016 라디오 드라마 극본 공모> 심사 총평
올해부터 라디오 단막극 공모는 좋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획기적으로 상금을 확대했다.
예년보다 응모작 편수가 훨씬 더 증가했는데, 모두 291편의 응모작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17편이 올라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작품의 전반적인 질적 수준은 증가한 응모 편수에 비례하지 못했다.
신인 공모작인 만큼 기성 작품과는 다른
치열한 문제의식, 새로운 상상력, 참신한 소재 접근 방식, 흥미로운 인물 탐구 등을 기대했는데,
많은 작품들이 진부한 현실인식과 상투적인 스토리텔링의 틀에 갇혀 있었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좋은 소설은
소설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최적의 소재와 주제, 표현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라디오드라마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시각이 아닌 청각에 호소하며, 그 때문에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내밀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라디오드라마 특유의 소재 발굴과 표현방법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라디오드라마 장르의 특성에 맞는 소재와 주제 전개가 필요하고,
또 단막극인 만큼 강한 주제나 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되어야 한다.
신인작가 발굴을 위한 공모제도인 만큼 평소에 많이 접하는 기존 일상 드라마와는 다른
참신한 상상력, 문학적 감성, 철학적 성찰의 깊이가 드러나는 문예드라마, 혹은 사회극 드라마를 기대한다.
본선 작품들 중 여러 편이 최근 인기를 끈 영화나 TV드라마의 경향을 답습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사극, 애정 장면에서 방송드라마의 표현수위를 넘는 작품,
비속어가 지나치게 들어간 작품들이 있었다.
청각매체인 만큼 너무 많은 인물의 등장은 청취자에게 제대로 인물 파악이 되기 힘들다는 점,
또 영화와는 차별되는 방송드라마의 공공성 측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신빨로 사는 여자>는 굿, 미신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통속적이고 진부한 접근에 머물렀다.
<미운 정>은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매우 평범한 소재를 무난하게 그리고 있는데, 인물들의 매력과 강한 주제의식이 미흡했다.
<빗속의 메시지>는 죽은 아내의 휴대폰에 보내는 남편의 사랑 메시지라는 소재로 감상적 접근을 했으나,
서사 전개가 너무 리얼리티나 개연성이 떨어졌다.
<사약 받는 날>은 조선시대 배경의 사극으로, 코믹한 발상과 희극적이고 거침없는 대사 등 재미는 있으나
너무 많은 인물들의 등장 등 라디오매체엔 맞지 않는 표현방식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율도로 가는 길>은 연산과 홍길동의 만남, 길동의 수많은 변장과 신출귀몰을 다루고 있는데
개연성 없는 전개과정과 라디오드라마의 매체적 표현방식의 무리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소담북스>는 서사의 축이 우연의 남발에 의지하고 있으며, 어린 소녀의 성격이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다.
<광부전>은 고을 현감이 독신들을 결혼시키는 내용의 사극인데,
무난한 서사이긴 해도 작가의 새로운 주제의식이나 목소리가 드러나지 않았다.
<인턴>은 딸의 죽음과 엄마의 취업, 감정노동을 그리고 있으나 지나친 비속어와 작위적 결말이 문제였다.
<엄마는 하이힐을 신고>는 딸의 유산, 어린 시절 가출했던 엄마가 임신하여 딸 집에 들어와 사는 등
자극적이고 통속적인 막장드라마였다.
<홑눈>은 나방이와 나비라는 상징을 통해 성장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서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어린 시절 묘사가 신선함이나 시정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사막을 거니는 낙타처럼>은 지나친 애정표현 등 방송드라마의 품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내용도 만화적이다.
<아내를 죽였습니다>는 법정극으로, 짜임새있는 기본틀과 필력을 갖추고는 있으나
인물이 입체적이지 못하고 극적 긴장감이 떨어진다.
<천국의 주파수>는 라디오적 소재와 발상이 재미있고 극적 반전도 재치있다.
그러나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물의 개성이나 매력이 부족한 점이 아쉬웠다.
<디오 101 사용설명서>는 인공지능 로봇을 등장시킨 시의적 상상력이 돋보였으나, 서사는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에 머물렀다.
이런 소재는 기발한 상상력과 더불어, 로봇의 정체성 고민이라든지 문명비판적 시각 같은 철학적 성찰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오리지널 짝퉁>은 오리지널 가수와 모창 가수의 관계를 토대로 한 기본적인 드라마 감각과 희극적 인물 창조가 돋보였다.
그러나 낯익은 소재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작가의 독창적인 시각이 미흡한 점이 아쉬웠다.
<내게 비트를 들려줘>는 죽음을 예감한 독거노인이 방을 헐값으로 세놓고, 세든 래퍼와 의지하며 살게 된다는 내용으로,
발상이 좋고 인물들도 참신하다. 그러나 극적 구성의 힘, 긴장감이 부족한 것이 아쉽다.
<2라운드, Box!>는 여성 권투선수와 승부 조작이란 소재와 가족 서사를 결합한 작품으로,
보편적인 소재를 사회성 주제와 연결하여 풀어내고 있다.
탄탄한 드라마적 구성과 대사구사력을 갖춘 웰메이드 드라마로 손색이 없다.
여기에 강렬한 인물창조와 문학적 깊이가 갖추어진다면 아주 뛰어난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본 심사진은 최우수 당선작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선작의 수준이 앞으로의 공모작들에도 전범이 되리라 생각되기에,
최우수 당선작이란 이름에 값하는 좋은 작품을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우수작 3편으로 <나의 오리지널 짝퉁> <내게 비트를 들려줘> <2라운드, Box!>를 선정했다.
당선 작가들에게 축하를 보내며, 이번에 선정되지 않은 작가들에게도 꾸준한 정진을 부탁드린다.
심사위원 조원석(극작가, 한서대 교수)
김성희(평론가, 한양여대 교수)
정혜진 (KBS 무대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