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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

무엇을 구하느냐

작성자테루마|작성시간04.11.26|조회수78 목록 댓글 0
    무엇을 구하느냐? Τί ζητείτε 「요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유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고 구하고 있는데 과연 「무엇을 구하는가」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 것인가? 단지 찾고 구하는 상대방이「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무엇이든지」구해도 괜찮은 것인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주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하여「무엇을 구하느냐」 「무엇해 주기를 원하느냐」 하는 관심보다는 「무엇 때문에 자기를 찾아왔느냐」에 큰 관심이 있었다. 당시에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고 구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예수와 인격적인 만남과 영접이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에 예수에게 나아왔느냐」하는 점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어떤 부류는 떡을 먹고 배불러서(요6:26),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요3:23),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여(눅19:11) 예수를 믿고 좇았는데, 결국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의하여 십자가에 매 달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 것인지. 결국, 어떤 인간에게 있어 문제는 「그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엇을 찾고 무엇 때문에 구하느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신앙 기준은 「얼마나 기도 하는가」 즉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께 구하는가」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고 구제하고 헌금하는가」 「얼마나 성경 보는가」하는 것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때문에 기도하고 성경보고……하는「무엇」은 간 곳이 없고 「어떻게」신앙생활 하는가에 관심이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든지 상관없이「열심히」만 구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인 줄 아는 아주 이상한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 그렇게 가르친 사람의 잘못인지 아니면 그렇게 가르쳐 주기를 바란 사람의 잘못인지- - - 각설하고, 그러면 「무엇을」구할 것인가? 욥기를 인용하고자 한다. 욥35:9-13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세력 있는 자의 말에 눌리므로 도움을 부르짖으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거기서 부르짖으나, 응락(應諾)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이 말씀에 대한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할 줄 안다. 이 말씀은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친구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말문이 막히자(욥32:1) 부스 사람 엘리후가 욥을 향하여 논박하는 말씀의 일부분이다. 왜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겼느냐를 여기서 모두 논할 수는 없으나 아무튼 욥의 생각에는 자기가 당한 모든 환난은「자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하나님 때문」이라는 놀랄만한 생각(욥35:2-3, 14)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여기 인용한 엘리후의 말씀은 그 생각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욥은 자기 신앙생활의「어떻게」적인 면에서는 완벽을 주장할 만큼「잘, 열심히」믿었는데 자기에게 주어진 환난의 공의롭지 못함을 세 친구를 빗대어 실상은 하나님을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엘리후의 주장은 아니다 신앙생활은「어떻게」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하는 것이다, 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엘리후의 논증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사람이 부르짖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엘리후의 지적인데,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도움을 부르짖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왜 찾느냐? 하나님 이외의 것들로부터의 도피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부르짖는다는 지적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해서 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에 억눌리는 사람들은 「떡」이 필요해서, 질병에 고통 받는 사람들은「신유의 은사」가 필요해서, 좀 고상한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필요하고, 죽어서 지옥보다는「천국」이 필요해서,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나의 구원」이 필요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지적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넘치도록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주시는 분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후의 지적은 이러한 부르짖음이 헛된 부르짖음이요,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엘리후의 탄식은「하나님이 어디 계신가」를 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곧 나를 지으신 분이시며, 나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나를 교육하시고 지혜주시는 그 하나님이「어디 계신가」를 말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은「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찾고 구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부(富)」가 좋은 것이다. 「같이 계셔주심」이 좋은 것이 아니라,「무엇인가를 도와주심」이 좋아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아부요, 사랑이 아니라, 계산이며(利害打算), 하나님의 主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 되심에 다름 아니다. 마치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주인은 알라딘이요, 마왕은 알라딘의 명령에 복종하는 능력 있는 종이었던 것처럼.... 남편이 매달 돈 벌어오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있어서 남편을 사랑하고 믿는가? 아니면「남편」이기 때문인가?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어도 그 남편이 살아있어 「같이 있어주심」만으로도 만족하고 사랑하며 살겠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은 바로 당신 그 자체를 찾고 구하는 자를 찾고 구하고 계시는데, 안타까운 탄식은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젯밥에나 관심이 있는 제주나, 신랑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의 돈과 지위와 명예에 관심 있는 신부나, 하나님은 차지하고, 하나님의 선물만 기다리는 믿음 좋은 신자나 오십 보 백 보 아니겠는가? 욥기의 주인공 욥도 결국 신앙생활을 아주 모범적으로 잘한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결국 그러한 열심의 근원이 어디인가 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좋아서 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족의 비결이「하나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와주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도와주심」이 단절되면서부터는 자기 신앙생활의 심각한 회의가 오게 되고, 그전에 하나님 안에서 누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자족의 근원이 없어졌음을 발견한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모든 축복은 자기의 충성스럽고 완전한 신앙생활과 전적으로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기 쪽에서는 잘못한 것이 없었는데(대표적으로 욥기31장) 하나님의 도우심은 형편없이 망가졌음으로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 당신께 있다는 지적을 해왔고, 그러는 과정에서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어떻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를 찾는「무엇을」구하느냐에 관한 것임을 깨닫고 욥의 회개와 하나님의 축복으로「happy ending」하고 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런 점들을 지적하고 있으나「베토벤」보다는「베토벤의 교향곡」이 더 좋은 인간들의 몰지각이 인간들로 하여금 결국 하나님보다「하나님의 능력」을 더 좋아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도 성경말씀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말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7:11 말씀을 보면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믿고 내가 생각하는「좋은 것」을 구하면 되겠거니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내 생각에는 좋은 것도 하나님생각에는 형편없는「배설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내 생각과 하나님 생각이 얼마나 간격(gap)없이 하나가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예수를 믿으면「아무거나」「필요한 대로」「무엇이든지」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는 사람들의 필요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변질시켜 놓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말 개역 성경에는「무엇을」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헬라어 성경은 분명히「그를」구하는 자에게 (τοίς αίτουσιν αύτόν)라고「구하는 목적물」「구하는 내용」을 『그(αύτόν:하나님 자신)』에다 한정하고 있는 것이다. 헬라어의「αύτόν」은 직접목적어 즉 내가 구하는「목적물」만을 지칭하는 단어이고, 「그에게」라는 표현을 쓰려면「αύτώ」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무엇을」구할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지적을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자신보다「그 하나님의 능력」이 좋은 인간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구하면서도「나는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들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 먹이고 열두 광주리 가득히 떡을 남긴 사건 다음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6:15)」는 인간들이 참으로 예수 자신을 임금으로 모시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부려먹으려는」 인간의 마음을 간파하신 말씀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위험한 것은 자기들의 생각대로 예수가 따라주지 않자 인간들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죽여 버렸던 것이다. 결국, 신앙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의 조율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내 생각에다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는 것이다. 잘 조율된 악기가 멋진 음악을 연주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좋은 신앙생활인 것이다. 조율 안 된 악기로는 지휘자를 만나는 것이 오히려 비극일지도 모른다. 「그 때에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예배하며 προσχούσα) 무엇을 구하니(기도하니 αίτούσα)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되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마20:20-22) 여기서도 역시 예배와 기도가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무엇을」구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나의 신앙생활은 예수를 만났을 때「무엇을」구할 것인가? 요한복음1:38 의 제자처럼「무엇을 구하느냐」는 질문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천국 보내 주옵소서" 할 것인가? 성경이라는「소리굽쇠」는 A음을 정확히 울리고 있는데 과연 내 소리는 A음을 내고 있는지 혹시 A플랫음을 내지는 않는지, 자문해 볼일이다. 「심포니」를 망치는 것은 감상하는 사람 들이 아니라 연주하는 모두에게 훨씬 높은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악보는 A음을 그리고 있는데 자기가 악보를 잘못 보았든지, 악기가 제대로 조율이 안 되었든지, 하여간 A플랫음을 자신 있게, 진지하게, 열심히, 내면 낼수록 그「심포니」는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겠기 때문이다. 무엇을 구하느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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