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磨穿十硏 禿盡千毫 - 추사 김정희

작성자청운|작성시간10.05.23|조회수754 목록 댓글 0

원본글 : http://blog.naver.com/isomis/100046551057

 

나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추사의 말에, ‘칠십년 마천십연 독진천호(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도 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뜩해졌다. “나는 칠십년 동안 벼루 10개를 갈아서 구멍을 내고 천개의 붓을 몽당하게 닳게 했다.” 추사가 그냥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에 들어있는 천재(天才)를 꺼내쓴 것으로 짐작했던 나로서는, 저 쩌렁쩌렁한 고백이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추사는 갖고싶은 세 가지를 꼽으면서 단연(端硏)을, 그 첫째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단연은 중국의 단계지방에서 나는 돌로 만든 벼루이다. 요즘이야 서울 인사동에만 가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좀 비싸긴 하다), 그때는 명필도 ‘나의 소원은 단연’이라고 할 만큼 귀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벼루는 먹이 잘 갈리면서도 벼루 자신은 잘 닳지 않는 석질(石質)을 갖춰야 한다. 단연은 또 다른 벼루에 비해 무게가 덜 나간다. 야외에서 벌어지는 시사(詩社;시 모임)가 많았던 때라, 가벼운 벼루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벼루와 먹을 보면 약한 것의 힘을 느낀다. 먹은 갈 때마다 제 살을 조금씩 내주기로 되어있는 약한 고체이다. 반면 벼루는 자신의 단단함으로 먹의 살을 조금씩 발라내는 강한 돌덩이다. 하루하루를 보자면 벼루는 늘 먹을 이긴다. 그런데 추사의 저 말을 빌려서 생각해보면, 70년동안 추사가 갈았던 먹이 벼루 10개의 밑창을 뚫었다. 약한 먹이 강한 벼루를 열 번이나 이겼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쯤에서 우린 저 말이 지닌 강렬한 함의를 생각해야 한다. 벼루 열 개의 바닥이 뚫리려면 도대체 몇 개의 먹을 갈아야 할까. 벼루와 먹의 강도(剛度)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어쨌든 먹 1만개가 다 닳을 때 벼루 하나가 뚫린다면, 적어도 먹 10만 개는 사라졌으리라. 그게 마천십연이다. 먹 10만개가 만들어낸 글씨의 공력이 추사가 70년 동안 이룬 서체 속에 숨어있다. 단계 벼루를 소원으로 삼은 건, 저 뚫리는 벼루들을 보면서 좀더 실한 것을 원했기 때문이리라. 벼루 10개가 못쓰게 되었지만 글씨를 쓰고 싶은 그의 열정은 아직 식지 않았다.




벼루를 ‘도넛’으로 만드는 동안, 붓인들 오래 갔을 리 없다. 써야할 글씨는 많고 붓은 늘 적었으니, 붓털이 헤져 성기고 짧아져도 쓸 수 있을 때까지 썼다. 쓰다보니 붓이 털없는 대머리가 된다. 그런 독필(禿筆)이 천 자루가 되었다. 얼마나 많이 썼기에, 붓털없는 붓들이 천 자루가 쌓이도록 썼을까. 추사의 삶은 저 구멍난 10개의 벼루와 털없는 1000자루의 붓이 증언하고 있다. 공부란 이런 것이다. 살이의 수단을 위해 잠깐 애쓰는 지식섭렵이 아니라, 문방(文房)의 2우(二友)가 학을 떼는 그때까지도 놓치지 않고 덤벼드는 무한의 열정이다. 도넛벼루와 몽당붓은 수많은 옛 글씨의 전범(典範)들을 부지런히 임모한 흔적이며 마침내 붓끝이 툭 트이면서 자기 만의 서체를 이룩하게된 개가(凱歌)의 일등공신들이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 그런 맹렬한 공부를 한 것은 추사의 선배들도 마찬가지다. 서예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대(漢代)의 종요(鍾繇)(151-230)의 해서글씨를 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추사가 세한도에 부친 글의 서체와 빼닮았기 때문이다. 추사 또한 ‘해서의 전설’인 이 사람의 글씨를 수없이 임모했을 것이다. 종요는 당시의 주류 글씨이던 예서(隸書)의 각진 획들을 둥글게 바꾸면서 약간 기울게 했다. 그는 글씨에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획들은 카랑카랑해졌다. 그런데 묘하게도 추사는 해서를 쓰면서 예서(당시 서예의 패션코드이던)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종요는 예서에서 해서로 왔고, 추사는 해서에서 예서로 나아가, 서로 여기서 딱 만난 셈이다. 그런 종요이다. 이 사람은 잠을 잘 때도 이불에다 글씨를 썼다 한다. 얼마나 많이 그어댔던지 이불이 구멍투성이었다. 추사는 벼루를 구멍냈으나, 종요는 손가락으로 이불을 구멍냈다. 그리고 글씨를 쓰느라고 16년간이나 방에 틀어 박혀 집밖을 나선 적이 없었다고 한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으나 그런 덕분에 그는 저 위대한 해서를 창안해낸 것이다. 종요의 지독함을 증명하는 고사는 또 하나 있다. 그는 어느 날 위탄(韋誕)이라는 사람의 책상에 놓여있는 채옹의 ‘필론(筆論)’을 발견한다. 탐이 난 종요는 한번만 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위탄은 내주지 않는다. 그러자 종요는 사흘 동안 가슴을 치다가 가슴이 퍼렇게 멍이 들고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조조(曹操)가 ‘오령단’이라는 약을 지어주어서 겨우 살아났다. 위탄이 죽었을 때 종요는 사람을 시켜 그의 무덤을 파고는 책을 훔쳐냈다. 그는 그 책에서 ‘글씨는 힘이 있어야 하며 힘이 없는 것이 병통’이라는 위대한 한 마디를 발견하고, 자신의 서체를 창안하기에 이른다. 저 지독함을 보라.


추사의 ‘마천십연’은 친구였던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글의 일부이다. 두 차례의 귀양을 겪으면서 70을 넘긴 추사는 과천 청계산 기슭에 살았다. 이듬해 그는 광주(廣州)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스님이 된 뒤 다시 과천으로 잠깐 돌아와 영면한다.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1852년, 추사 67세 때였다. 그 전 해에 동시에 유배를 떠났던 권돈인은 아직 낭천(狼川)에 귀양 가 있었다. 권돈인은 1859년 연산(連山)으로 유배지를 옮겼는데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77세로 숨을 거둔다. 추사가 70을 운위하는 저 편지는 그러니까, 북청에서 돌아온 추사가 아직 낭천에 있는 이재(彛齋)(권돈인)가 보내온 편지에 대해 답을 해준 것이다. 추사가 쓴 그 대목을 잠깐 구경하자.





“옛사람들의 글씨는 간찰체라는 것이 따로 없었습니다. 순화각첩의 경우는 진나라 사람들의 글씨가 많은데 간찰 만을 위주로 하지 않았으니 간찰은 우리나라의 가장 나쁜 습관입니다.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칠십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갈아 없애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닳게 했으면서도 한번도 간찰의 필법을 익힌 적이 없고 실제로 간찰에 별도의 체식(體式)이 있는 줄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게 글씨를 청하는 사람들이 간찰체를 이야기할 때마다 (쓰지)못한다며 거절합니다. 승려들이 간찰체에 더욱 얽매이는데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 32 - 완당전집)


권돈인이 물었던 것은 아마도 간찰체에 대한 추사의 의견이었을 것이다. 고금을 꿰고 있는 추사가 간찰체의 고사(古史)를 명쾌하게 밝혀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추사는 간찰체를 그야 말로 박살내고 있다. 옛 글씨에도 간찰이 있긴 있었으나 그것 만으로 된 건 없었다고 말하며, 간찰체는 조선의 병폐라고까지 몰아붙인다. 간찰(簡札)이란 편지이며 간찰체는 편지글씨이다. 편지로 오가는 글씨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간찰체를 낳았을 것이다. 그 글씨는 정식으로 공들여 쓰는 글씨보다는 좀 더 편하고 분방한 서체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추사는 옛 근거도 미약하고 글씨의 법식을 임의로 파괴하는 간찰체의 유행이 몹시 마뜩지 않았던가 보다. 70세가 된 추사의 가을서릿발같은 일갈은 내게 많은 생각을 남긴다. 구멍벼루와 몽당붓에 관한 얘기는 그러니까 자신이 그토록 많은 글씨를 썼지만 간찰체는 보지도 쓰지도 않았다는 얘길 하고싶어서 꺼낸 것이다. 간찰체의 부당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칠십년 ‘호고연경(好古硏經, 옛것을 좋아하고 옛책을 연구함)’의 철두철미를 들이댄 것이다.


혹자는 추사가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경륜을 국가 발전에 쓰이게 하는 유가적 지식인의 기본 태도를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광포한 권력 사냥의 소용돌이에 신물이 났기에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자신의 지식과 경륜을 사용하는 일을 포기해버린 것일까. 그런 이유도 없지 않겠지만, 나는 저 ‘히스테리컬’한 법고(法古;옛 것을 철저히 기준으로 삼음)에서 또다른 원인을 찾는다. 봉은사에 들어가 자신의 살을 지지는 자화참선을 하게되는 그의 말년은, 세상이라는 고해(苦海)에서 해탈(解脫)를 꿈꾸는 불교지식인에 가까워진 듯 하다. 현실에서의 개혁과 희망을 포기하면서, 그는 철저한 수구보수의 입장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간찰체는 기준을 해이하게 하는 타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글씨라는 것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예술의 경지로 나아간 글씨의 아름다운 한 봉우리를 폄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글씨의 실용적 측면에 대해 유연하지 않은 추사의 꼬장꼬장한 태도는 씁쓸한 맛을 남기는 게 사실이다. 그 스스로는 옛것을 법으로 삼아 창신(創新)의 일가를 이뤘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창신을 억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칠십년 구멍벼루와 몽당붓은, 그를 글씨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인이 되게 했지만, 다시 그 자유가 하나의 틀이 되어 그를 가둔다.

아니다. 그렇게만 해석하면 추사가 억울해 하리라. 이 글을 쓸 때의 상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도 귀양살이를 하고있는 친구에게, 귀양에서 고생하고 온 뒤 피폐한 심신을 수습하고 있던 추사가 편지를 보내는 마당이다.  때가 때인지라 세상에 대한 격분과 개탄을 간찰체에 관한 견해에 함께 슬쩍 실어 보내지 않았을까. 간찰체는 법식도 모르고 함부로 날뛰는 당시의 많은 날라리들의 행태의 한 상징이고, 추사는 그것을 슬쩍 띄워넣고 구멍벼루와 몽당붓으로 시원하게 어퍼컷을 날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 일흔에 세상 욕하는 방식이 이쯤은 되어야 고상하다는 소릴 듣지 않겠는가. / 빈섬.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인암브리취러스코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