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韓國)의 인장(印章)」
글ㅣ 정종수
옥새(玉璽) 및 어보(御寶)
I.머리말
인장(印章)은 실생활상(實生活上)으로나 예술생활상(藝術生活上)으로나 우리들과 끊어버릴 수 없는 아주 밀접하고도 중요한 관계를 갖는 하나의 필수품으로서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도 인장(印章)을 사용하여 그 의지(意志)나 책임(責任)을 나타내며 확인하는 신표이다.
인장(印章)은 실용면(實用面) 뿐만 아니라 인장(印章) 그 자체가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인면(印面)의 문자(文字) 구성과 인재(印材)의 조각 즉 인뉴(印뉴)의 다양성, 석인재(石印材)의 다채로운 색상, 고동인(古銅印)의 아미(雅美) 등은 인장(印章)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전시된 인장(印章)은 낙랑시대부터 근대 구한말까지 왕실(王室)과 일반 명사(名士)들이 사용하던 인장(印章) 7백50여점으로서 인장(印章)의 역사(歷史)와 기능(機能)및 예술성(藝術性), 종류(種類)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II.고인(古印)
인(印)의 사용은 수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원은 중국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전신(傳信)의 표시로서 사용된 하나의 신표(信標)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인장으로 삼국시대 이전 인장(印章)의 모습은 낙랑(樂浪)의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것에서 그 형식과 내용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전시된 낙랑의 인장인「왕근신인(王根信印)」과 수복(壽福)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영수강령(永壽康寧)」을 각(刻)한 귀뉴(龜뉴)로 된 석인(石印)과 통신용, 비보용의 문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봉니(封泥) 등이 있다.

삼국시대의 인(印)으로는 안압지(雁鴨池)에서 출토(出土)된 목인(木印) 일과(一顆)가 있는데 소박한 직뉴(直뉴)가 붙어 있으며 굵게 음각(陰刻)된 인(印)으로써 변(邊)을 두껍게 남기고 사방에 홈을 팠는데 인문(印文)은 판독이 되지 못하였다. 또한 신라의 것으로 황룡사지 출토품인 청동인(靑銅印)은 뉴(뉴, 꼭지)의 형태가 고리처럼 되어 있다.

銅印(Bronze seal)
고려시대의 인장(印章)은 주로 사인(私印)으로서 현전(現傳)하는 것은 청동인(靑銅印)이고 약간의 청자인(靑磁印)이 존재한다. 인형(印形)은 방형(方形)·원형(圓形)·육각(六刻)·팔각인(八角印)들인데 청동인(靑銅印)은 원형(圓形)이 많고 청자인(靑磁印)은 팔각형(八角形)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고려시대 靑銅印
고려인(高麗印)의 특징은 뉴(뉴, 꼭지)의 발달로서 그 형상은 원숭이·사자·물고기·새·거북·용·봉·개구리·피사수(피邪獸)·운문(雲紋) 등과 환뉴(環뉴)·직뉴(直뉴) 등 다양한 뉴식(뉴式)이 정교하면서도 조형적인 비례미가 뛰어나다. 뉴(뉴)에는 착대공(着帶孔)이 있어 그 당시 인수(印綬)로 인장(印章)을 허리에 꿰어차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銅印(Bronze seal) 방형 사자형 꼭지
또한 인문(印文)은 대체로 방사선식으로 여러번 구부려 문자라 해도 판독이 불가능 한 것이 많다. 간혹 (만(卍)(자(字)를 구첩(九疊)한 것이 보여 사찰 또는 불교와 관계된 것으로 생각된다.
III.궁인(宮印) 및 관인(官印)
조선시대의 인(印)은 공인(公印)과 사인(私印) 모두 발달하였다. 공인(公印)은 크게 옥새 (玉璽·원수인(元帥印)·칙명인(勅命印) 등과 같이 왕권의 표시 인(印)), 어보 (어보御寶·세자인(世子印)·왕호인(王戶印)·비빈인(妃嬪印)) 종실인(宗室印) (빈방(嬪房)·귀인방(貴人房)·공주(公主)·옹주(翁主) 등 부녀자가 사용하던 인장), 관인(官印) 등이 있다.

조선시대 官印
옥새란 임금의 인장으로 옥으로 만든 것을 옥새, 금동(金銅)으로 만든 것을 보(寶)라하여 구별하나 이 모두를 총칭하여 옥새라 한다. 새(璽)란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황제만이 쓸 수 있도록 한데서 연유한다.
한국의 국새는 고려이래 조선조에 이르도록 중국의 승인을 겸한「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나「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으로 새(璽)의 칭을 의미한 것이 아닌 단지 명(明)에서 받아 대명(對明) 관계문서에만 사용하고 세종 때부터「체천물민영창총사(體天物民永昌總嗣)」라는 어보(御寶)를 만들어 중국의 옥새(천자(天子)의 인(印))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후세 자손으로 하여금 옥새를 받아 왕위를 이음으로써 명나라의 망극한 은혜를 잊지않게 하려는데서 옥새가 하나의 왕통 승계에 대한 의미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성종 이후부터 어보는 명관시(命官時)에 사용토록 하고 교서(敎書)·교지(敎旨)에는「시명지보(施命之寶)」를 사용토록 하였다. 영조 때에는 어보의 종류가 많이 생겨 통신국서(通信國書)에「이덕지보(以德之寶)」 관찰사·방어사 부임 시에 내리던 명령서인 유서(諭書)에는「유서지보(諭書之寶)」를 썼다. 현재 전시중인 것으로 서적반포시 쓰는「선사지기(宣賜之記)」가 있다.
고종 때에는 그간의 어보들은 폐지하고 다시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종은 국새의 명칭을「대한국새(大韓國璽)」로 하여 외교문서(外交文書)에 썼고 여기 전시된 고종의「제고지보(制誥之寶)」는 고급관리임명 시에「칙명지보(勅命之寶)」는 통신문서(通信文書)에「대원수보(大元帥寶)」는 국군통사(國軍統師)에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어보는 위와 같은 용도이외에도 왕의 책봉 시나 왕자 또는 왕세자·왕비·왕자빈·왕세자빈 등의 책봉의 경우에도 어보를 주조하였으며, 사후 시호의 추존 시에도 어보를 만들어 종묘에 위패처럼 모셔 두었다.
조선시대의 궁인 및 관인은 상서원에서 주조하였으며 과인의 특징은 인형(印形)이 대부분 방형(方形)이거나 장방형(長方形)이며, 인문(印文)은 명·청의 영향으로 장식적이며 구첩(九疊)으로 하여 위조를 방지하였다. 문자로 선은 가늘고 인변(印邊)은 두터우며 굵다.
인재(印材)는 대부분 동(銅) 또는 철(鐵)을 사용하였다. 국내 어보류는 금(金)·옥(玉)·금동(金銅)을 썼고 뉴(뉴)는 귀형(龜形)과 용형(龍形)이 대부분인데 용형(龍形)은 주로 고종 이후 것들이다. 관인의 뉴(뉴)는 거의가 직뉴(直뉴)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IV.명사인(名士印)
조선시대의 사인(私印)은 전대(前代)보다 널리 일반화되어 그 재료도 석(石)·아(牙)·도(陶)·목(木)·동(銅)등 다양할 뿐 아니라 인(印)의 형식(形式)도 방형(方形)·장방형(長方形)·원형(圓形)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잡형(雜形)이 있다. 명인(名印)·호인(號印)등 은주로 방형(方形)을, 사구인(詞句印)은 종(種)·정(鼎)·향로(香爐)·매화(梅花)등 물형(物形)에 인문(印文)이 합치되도록 하였음이 특징이다.
조선조는 시문서화를 즐기는 사대부풍의 사회로서 청말 인장문화의 영향으로 국서(國書)에 사용되는 전각(篆刻)의 수요도 크게 증가하고 발전하였다. 명사인(名士印)이란「좋은 인(印)」이란 뜻으로 주로 명사(名士)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것을 말한다.

보담재인(寶潭齋印), 김정희 인장
여기에 전시된 명사인(名士印)가운데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인(印)은 각자별(刻者別)로 나누어 보면 자각(自刻)·타인각(他人刻)이 있다. 그의 각법은 크게 청국 연경에 다녀온 뒤 청장년기의 것으로 보는 대륙의 영향을 받은 정제한 중에도 율동적인 각선미(刻線美)를 표현한 것과 만년기에 완숙의 경지에 들어선 추사체로 쓴 기이하고도 독창적인 각법으로 대별할수있다.
다산(茶山), 정약용 인장
추사 이후(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여러 각인(刻人)들이 속출하여 근대적 성격의 인(印)과 현대적(現代的) 맹아(萌芽)가 상존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 시대에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전각가로는 몽인정 학교(夢人丁學校)1832-1914), 해관(海觀) 유한익(劉漢翼) (1844-1923), 청운(靑雲) 강진희(姜璡熙)(1851-1919),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1864-1953),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1875-1919) 등이다.
이들 가운데 전시된 위창과 성재의 인장(印章)들은 자신의 성명·아호·별호·자·이명 기타 별칭을 새긴 것들이다. 위창은 자신이 직접 각을 하여 문인, 정치가,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으며, 8·15광복 1주년 기념일에는 지난날 일제에게 빼앗겼다가 되찾게 된 대한제국 황제 옥새를 민족대표로 인수하기도 하였다.
성재는 위창과 함께 한국 근대 전각가의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중국에서 직접 생활하며 정식으로 중국식 전각을 연구하였다. 그는 인장(印章)을 하나의 방촌(方寸)의 예술(藝術)로 승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방각(方刻) (어느 때 어디서 누구의 무엇을 위하여 누가 새긴다고 하는 문귀를 새기는 것)의 일인자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여기에 전시된 명사인으로는 조선도 영조 때 신회(1706~?)의 인장으로 한인합속에 9과(顆)가 들어있는데 이를 모두 맞추면 인수(印首)가 마치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을 이룬다. 또 대원군의 인장이 있고 근대화가인 배렴과 의재 허백련의 인장도 있다.
V.수결(手決) 및 봉함인
문서의 내용을 증거하고 그 책임자를 밝히는 인장대신으로 사용된 수결(手決)이 있다. 수결(手決)은 일종이 Signation으로 그 형태에 따라 서압(署押), 화압(花押), 어압(御押),수장수촌(手掌手寸), 각압(刻押)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홍상한(洪像漢-1701∼1769) 의 화압
이름의 글자 중에서 「像」자를 택해서 초서(草書)한 것으로
획을 간략히 하였으나 글자를 알아볼 수 있다.
수결은 모두 붓을 사용하였으나 각압(刻押)은 수결(手決)을 석재(石材)또는 목재(木材)에 각(刻)하여 사용한 것으로 갑오경장 이전인 1600~1894년 사이에 매년 실시되어오던 호구단자(戶口單子)(호적부(戶籍簿))서식(書式)에 일일이 붓으로 수결(手決)하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쓰여졌다.
즉, 수결이란 관리가 공문서에 결재하는 부호로서 설명자와는 달리「일심(一心)」(결(決))이라 하여 일심(一心)을 표현할 수 있도록 고안된 형태로 관리가 모든 사건을 결재함에 있어서 일심(一心)으로 판결한다는 뜻이다. 이는 자신의 성명과는 관계치 않고「일(一)」(자(字))를 강조하되 상하에 점이나 원 등을 첨가하여 자기 고유의 수결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수결을 쓰지 못하던 층으로 천민(賤民)이나 노비(奴婢)등은 수촌(手寸)을 사용하였다. 이는 왼손 가운데 손가락의 첫째 마디와 둘째 마디 사이를 문서에 대고 그림으로 그리고 거기에 좌촌(左寸)·우촌(右寸)이라 적어 넣어 수결(手決)로 대신하였다.
수장(手掌)은 부녀자(婦女子)나 천류녀(賤流女)(주로 비(婢)) 들의 수결방식(手決方式)으로 오른쪽 손바닥을 종이에 대고 형상(形狀)을 그리거나 손바닥에 먹을 묻혀 찍었다.
수결은 직함 밑에 「일심(一心)」(결(決))을 두고 있어 후세에 일견하여 그 수결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다만 사서(史書)를 뒤져 그 당시 누가 그 직에 있었는가를 알아보지 않고서는 그 수결(手決)의 본인을 찾기가 어렵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서한(書翰) 즉 편지를 쓰고 끝에 자기 직함과 성명을 쓰고 자기의 수결인(手決印)을 찍었으며 또는「돈수(頓首)」,「재배(再拜)」등의 문귀를 새긴 인장을 찍고, 또 피봉 즉 겉봉에「봉(封)」,「함(緘)」, 「근봉(謹封)」, 「근함(謹緘)」,「호봉(護封)」, 「합봉(合逢)」 등의 문귀를 새긴 인장을 사용하였다. 이런 것을 봉함인(封緘印)이라 한다.
이상으로 인장의 역사성과 종류 및 용도 등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인장(印章)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인집류(印集類)로서 헌종(憲宗)의 당호(堂號)을 따라서 만든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 (1835~1849)과 석인재(石印材) 중 최고품인 중국의 밭에서 나는 노란돌이란 의미를 가진 전황석(田黃石)의 아름다움을 기념키 위해 만들었다는 전황당인보(田黃堂印譜) 등 다수가 전시되어 있다.
필자 : <정종수(鄭鐘秀)> <민속박물관학예연구사>
사진 위부터 '극(極), 정조 인장 (하늘의 중심 별자리인 북극성에서 따온 것으로 임금을 상징)', ' 원헌(元軒), 헌종 인장 (헌종 임금의 호)', '낙선재(樂善齋), 헌종 인장(창덕궁 내 헌종이 여가를 보내며 서화와 인장을 감상했던 곳)'.
출처 [박물관 신문] 422 1987.08 192호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