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11월 13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춘향묘에 새 초상
춘향묘 수장修裝계획 ― 열녀 춘향의 기품을 살리고저 식은殖銀, 호은湖銀 양 두취頭取 궐기
〈전주〉동경의 신협극단이 「춘향」 을 공연한 이래 특히 일본 내지 방면에 정절 춘향의 화제가 자주 오르내리고 있던 바 화제는 차차 한 자리의 한담 만화가 아니고, 조선의 명사들의 손으로 춘향의 초상을 다시 그리어서 만고 정절 춘향의 기품을 살리자는 계획이 있다 한다. 지난 1일 조선식산은행 두취 임번장林繁藏씨가 호남 시찰 차로 전주에 온 길에 미리 생각하였던 남원의 춘향묘廟를 시찰하고 돌아와서 감개무량하다 하며, 전라도를 시찰한 기념으로써 춘향의 초상을 조선의 제일가는 화가의 손으로 다시 그리게 하겠다고 언명하였다 한다.
임두취가 이 일을 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신협극단新協劇團의 「춘향전」 을 관람하고, 춘향의 정절에 감심한 바 있어, 금번 호남 시찰로 먼저 광주를 갔을 때, 우연한 화제에서 남원 춘향묘의 춘향의 초상이 펭키로써 몰취미하게 되었는 데서 개탄한 끝에 절부의 귀감이 되어야 할 춘향의 기품을 살려야 된다 하고 돈은 얼마가 들든지 자기가 이것을 개작 하겠다고 말하자, 동석했던 호남은행 두취 현준호玄俊鎬씨(주 : 후일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친조부)가 공명하여 비용을 같이 부담하자 하고 바로 남원을 찾아서 춘향전의 옛 자취를 일일이 시찰하고 무량한 감개를 받은 것이라는데 불원 춘향묘廟가 조선 최고 화가의 손에 의하여 새 화장을 하게 되리라 한다.
12월 초에 가서 조선신문(일문)은 또한 이렇게 속보했다.
기보=조선고담에 나타난 절부 「춘향전」 이 10월말 신협극단의 내성에 의하여 반도재주의 사람들의 가슴에 새삼스레 충격을 주었을 무렵, 가끔 호남지방에 출장한 바 있는 식은 두취 임번장씨가 오가는 길에 이야기의 발생지, 전북 남원의 광한루에 걸려 있는 한 펭키 그림의 춘향을 보고 개탄한 데서, 동석했던 호남은행 두취 현준호씨도 발 벗고 나서겠다고 하는 반도 재계내선 양거두가 기묘하게도 열부 춘향의 면모를 재현시키기로 한 근래의 가화佳話는 그 후 휘호가 물색중으로 한 동안 잠잠한 듯하더니 6일 예고 없이 내성한 반 몫의 산파 현준호씨를 비전옥備前屋으로 찾아가서 가화의 결말을 타진했다.
그저 사사일로 내성한 현씨였지만 「춘향」 의 집필가에 관하여 임씨와 구체적인 의론도 가지려 했던 만큼 얘기를 꺼내니 여러 내객을 물리치고 나서주었다. 들으니 씨의 흉중에는 벌써부터 반도화단의 일재, 경성 와룡정 이당 김은호씨에게 백우白羽의 시矢를 꽂고 있었던 모양. 공교롭게 임씨가 출장중으로 부재나 대충 이당에게도 그 뜻을 전했고, 임씨의 귀성과 동시에 확정, 명인의 상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려 여필麗筆을 휘두르게 하려는 듯.
그에 대하여 현씨는 말한다.
“공교롭게도 선생이 부재라서요. 경성에 온 기회에 필자를 정하고 가려 했던 것인데, 나는 김이당선생에게 의뢰하기로 작정하고 있소. 아시다 시피 내선을 통틀어 미인도를 그리기로 하면 아마 제1인자 일거요. 실존인물이 아니기에 상상화가 될 수밖에 없으니 만큼 그 내용에 충분히 정통한 사람을 물색해야 할 거고, 김이당선생은 그런 점에서도 가장 적격자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내려가게 되지만 선생에 편지라도 양해를 구하기로 하고, 김선생에게 교섭할 생각이오. 언제 완성될지 몰라도 춘향의 모습을 전함과 동시에 예술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을 그려 받으려면 그리 간단하게 되지 않을지도 몰라, 아무든 좋은 일 하나를 하게 된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소.”
호남은행 두취 현준호는 광주로 돌아가 서신으로 식은 임두취의 동의를 얻고나서 의재로 하여금 서울의 이당에게 즉각 춘향의 화상을 부탁케 했다. 광주에서 서화연구소 「연진회」 를 운영하고 있는 의재가 서울의 이당과 가까운 화우 사이란 것을 두취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현두취는 먼저 의재로 하여금 서울의 이당에게 춘향 화상을 맡아 그려 줄 것인지 의사를 타진해 보도록 한 것이다. 당시 호남의 명사이며 인격자이고, 또한 서화에도 교양이 풍부하던 현두취를 사실은 이당도 전부터 좀 알고 있긴 했었다. 의재가 이당에게 보낸 편지는 “한번 광주로 내려와서 현두취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 는 것이었다.
마침 의재의 연진회전이 열릴 때 였다. 이당은 해마다 이곳에 찬조작품을 보내곤 했었다. 전람회도 구경할 겸, 현두취도 만날 겸 이당은 편지를 받는 즉시 광주로 떠났다.
광주에 닿자, 이당은 현두취와 직접 춘향의 화상 건을 상의했다. 상의라기 보다 그것은 현두취 쪽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는 자기의 자가용 자동차에 있과 光州의 서화가 동강東岡 정운면鄭雲葂을 태우고 일로 남원으로 내달았다. 춘향사당의 현상을 보라는 것이었다. 광한루 뒤켠에 위치하고 있는 렬녀 춘향의 사당에는 수년 전 중수 때 우향雨香이라는 사람이 그렸다는 보기에도 딱한 펭키그림 화상이 걸려 있었다.
(춘향이 저래서야 쓰겠나?)
이당은 현두취에게 정성껏 춘향의 상을 그려 보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일단 상경한 이당은 국일관으로 여러 학자와 인사들을 초청했다. 춘향의 상을 과연 어떻게 그려야 옳은지 조언을 받자는 것이었다. 신중한 역사적 고증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일설에는 춘향이 미인이 아니라 몹시 못생긴 추녀였다고도 하는데….”
이당이 말을 꺼내자 좌중에선
“그렇더라도, 더구나 뚜렷한 근거도 없는 말인데 기왕이면 미인이 좋지 않겠소?
방년 16세 처녀의 청순하고 천하절색인 얼굴과 몸매를 갖게 하는 게 좋을거요.”
― 하는 쪽으로 의론이 기울었다. 당연한 얘기였다. 이당은 다시 좌중에게 말했다.
"저는 화가로서 기술을 제공할 따름입니다. 여러분들이 정해 주는 방향으로 그리겠습니다.”
1939년 정초. 동아일보는 앞서와 같은 구체적인 움직임을 다시 화제의 뉴스로 취급했다.
우리와 정든 춘향이 화상으로 부활된다. ― 화백 김은호씨 집필로
우리 춘향전은 문학상에 있어서 또는 사회, 도덕, 정치상에 있어서, 그 가치와 교훈이 큰바 있고, 또 춘향전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가장 대중화 되어 있고, 현재도 그 전설의 근거지인 남원에는 춘향사당까지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남원에 있는 춘향사당은 지금 연 전에 당시 유지들의 발기로 다시 중수 하였거니와 그 사당에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춘향의 영상 하나가 없던 중, 과반 동경의 신협극단이 경성에서 「춘향전」 을 공연하였을 때에 관람한 식산은행 두취 임번장씨도 느낀바 있어, 비용을 얼마든지 제공할 터이니 춘향영상을 만들어 놓자고 제의하여, 인물화의 권위인 화백 이당 김은호씨에 춘향화상을 그리도록 의탁하였고, 이 이야기를 들은 호남은행 두취 현준호씨도 그 비용의 절반을 부담할 것을 자진하였다.
이후, 김은호씨는 조선 여인의 전형적 모습을 갖추고, 또 당대의 모든 재료를 참작하여 참으로 춘향다운 화상을 그리려고 여러 가지로 연구 고심하여 오는 터이며, 명 10일에는 남원에 가서 춘향사당 등을 실제로 시찰하고 사료와 화제를 얻기로 되었다. 이 출발을 앞둔 김은호씨는 씨의 독단으로 춘향화상을 상상으로 그린다는 것 보다는 역사적 고증과 각 방면의 의견을 소중히 하자는 의미에서, 작 8일 하오 5시부터 국일관에서 송석하宋錫夏, 이여성李如星, 김태준金台俊, 유치진柳致眞씨 외 사계의 권위 관계자 7명을 초치하고 어떠한 춘향화상을 그릴 것인가 하는데 대하여 여러 가지 각도로 신중하게 협의하였다. 하여간 오랫동안 전설로서 또는 사화史話서만 귀에 젖고 눈에 삼삼한 전형적 조선의 여인인 춘향이가 화상으로서 실현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동시에 김은호씨의 집필에 기대되는 바 크다고 한다.
(1월10일자)
같은 날 조선일보는 또한 다음과 같이 보도 했다.
「춘향이를 그리게 된 동기는 호남은행 두취 현준호玄俊鎬씨와 식산은행 두취 임번장林繁藏씨가 작년에 남원에 둘러 왔을 때, 춘향의 사당이란 것이 너무 초라하니 중수도 하고 영정도 새로 그리자고 말이 되어 김은호씨에게 촉탁하케 된 것이다. 씨도 뜻 있는 화필을 들게 된 것을 기뻐하며 두고두고 연구해 오다가 7일에는 그 고전연구가로 김태준金台俊, 송석하宋錫夏, 이여성李如星씨 기타 여러분에게 어떤 춘향이를 그릴 것이냐 하는데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을 들은 바 있었다. 그 결과 씨는,
1, 우선 처녀 춘향이를 그리되 명랑하고도 총명하고 의지가 강하여 절개 있는 모습의 색시를 그릴 것.
1. 옷은 그 시대를 가리어 백7, 8년 내지 백년 전의 풍속을 참고하여 다홍치마에 연두저고리를 입히는데 긴 치마에 짧은 저고리에 회장 달고 해서 아주 얌전한 옛 색시를 그릴 것. 물론 미인일 것이고, 앉은 춘향이 보다 서 있는 춘향이가 더 좋겠다.
씨는 대략한 결론을 얻었다. 김씨는 곧 전설의 본향인 남원을 찾아 다시 연구를 거듭하여 4월까지에는 완성하려는 것이다.
“글쎄요 근년에는 겸하여 소설, 연극, 활동사진 등으로 너무 유명해진 춘향이라 천사람 만사람이 저마다 마음속에 그려 둔 춘향이를 그린다는 게 여간 일이 아닙니다. 여하간 조선 춘향이를 그릴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고 겸손하게 말하였다.”
이당의 「춘향의 화상」은 모든 신문의 특별 뉴우스였다. 매일신보는 이렇게 보도 했다.
「이당 김은호씨는 조선의 애인 춘향이 초상화에 전력을 기울여서 일대 걸작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불일간 남원에 출장하여 춘향이 고향의 물색과 또는 고적을 조사하기로 한 후, 그 전에 고고학자, 조각가, 문사 연출가와 및 언론계에 있는 여러 인사를 초청하여 가지고 춘향이를 그리되 어떤 춘향을 그리어야 할 것인가 하는 미인 투표 아닌 탁상 예선회(卓上豫選會)를 8일 밤 국일관(國一館)에서 열었다. 그리하여 각 전문가가 토론한 결과는 옥중고생살이가 전개되기 전의 처녀 춘향이를 그리되 초록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앉지 않고 일어서 있는 춘향이가 탁상 예선에 일등 춘향이로 당선되었다.」
국일관에서 여러 인사들의 의견을 듣고 난 이당은 다시 현지에서 행여 확실성 있는 어떤 참고자료를 얻을까 해서 남원으로 출발했다. 지난 연말에 이어 두 번 째 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별 소득이 없이 서울로 돌아왔다.
춘향의 역사적 사실과 모습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다. 어차피 춘향은 소설책에서 미화된 여인상이었다. 따라서 남원읍지에서도 춘향에 관한 역사 기록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 주 : 오늘날에 와서야 남원부사 성안의成安義의 아들 청백리 암행어사였던 창녕成씨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이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후손들이 자발적으로 밝혔지만 이당이 성춘향을 그릴 때까지만 해도 경상북도 일대에 살고 있는 성이성의 후손들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고, 후손들도 그때까지는 자랑스런 청백리 조상의 여성 스캔들에 관해서는 쉬쉬하고 외부에 공개를 하지 않았을 때이니, 소설에서 성이성을 이몽룡으로 바꾸고 성이 없던 춘향을 성춘향으로 바꾼 마당에 남원에서 기생의 딸 성춘향의 흔적을 찾는 것은 처음부터 헛수고일 수밖에 없었다.―
헛수고로 상경한 이당은 먼젓번 국일관에서의 관계 인사들의 말과 그들이 정해준 방향에 따라 녹의홍상의 아름답고 청순한 처녀상으로 춘향의 화상을 착수했다. 그 옷감의 옛 형태 특히 그 무늬를 정하기 위하여 그는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으로 가서 옛날 왕실의 옷감 견본실에 들어가 보았다. 여러 어진을 그린 화가였던 관계로 창덕궁 측에서도 이당에게 각별한 편의를 봐 주었다. 선원전에는 약 3백 년 전이라는 저고리감의 배리불수排梨佛手라는 비단과 백 년 전 것이라는 치마 감의 수니(갑사)가 있었다. 갑사는 사철 입는 것이니 춘향의 옷도 그것으로 무난할 듯 했다. 그런 옛 옷감 무늬를 춘향의 녹의홍상에 이용하기로 하니 결국 훌륭한 고증이었다.
다음은 모델이었다. 이당은 마침 조선권번에서 아주 적당한 소녀기少女妓를 발견했다. 김명애金明愛라는 아리따운 이 기녀는 「이묵헌」 에 와서 왼손으로 치마자락을 가슴께로 사뿐 올려잡으며 다소곳이 포즈를 취했다. 드디어 소녀기를 모델로 한 춘향의 화상은 완성되었다. 그 결과를 동아일보는 완성된 춘향상의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했다.
채관彩管에 재생된 춘향
녹의홍상의 처녀, 춘향초상을
김은호화백이 반세 헌심 제작
조선여성의 최고 이상(理想)으로 그 이름만 들어도 이 땅의 백성들이 모두 가슴이 터질듯이 숭고한 감격을 하고 마는 만고불후의 열녀가인 춘향의 신비한 자태를 천분지만분지 일이라도 엿보여 줄 만한 초상화 한 폭이 없음을 일찍 유감으로 여겨 오던 중, 특지가 호은湖銀 현준호玄俊鏑씨의 발의와 식산은행 두취 임번장씨의 후원으로 동양화단의 물화 권위 김은호화백에 의하여 작년 12월 초순부터 그리기로 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 있거니와 그간 이당 김은호씨는 진실로 신비한 춘향은 수난의 춘향을 그리어야 할 것인가? 처녀 때의 춘향을 그릴 것인가? 사회 각 방면에 문의하는 일방, 춘향의 의상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리어야 할 것인가를 고서와 설전說傳 혹은 이왕직 혹은 풍속학자에게 묻고, 또한 동양미술의 정수를 참고하여 화상을 가다듬어 그간 반 년 동안 거의 완숙경에 달한 그의 예술적 심혈을 다하여 그 결과, 요즈음 드디어 이 땅 대대손손의 혈관 속에 흐르고 전하여 오던 열녀 춘향의 자태가 예술화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초상의 춘향은 미술 조선이 그린 최초의 이상적 조선여성이었다는 데 뜻을 둘 뿐 아니라 이 땅의 심장과 이성이 숭배하여 마지않던 춘향을 그대로 그리고도 남는 어느 의미에 있어 조선의 「모나리자」 라고 할 만치 아름답고 신비한 걸작으로 벌써부터 화단은 물론 각 방면에서 격찬과 물가 높고 있다. 길이 척에 너비 3 의 화폭에 화백의 필로 그려진 16세 춘향의 입상은 미와 열과 의와 이성이 결정된 여신같이 아름답고 신비한 녹의홍상외 단정한 입상으로 다문 입에 숨은 굳은 의지와 뒷날의 암야의 수난을 물리친 샛별 같은 두 눈 하며 복스런 몸과 귀와 탐스런 머리, 모두가 동양미의 최고봉이오, 선마다 춘향의 혼이 숨쉬고, 색마다 이 땅의 신비한 꿈이 숨어 흡사 춘향이 호흡하는 듯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한다.
그리고 이 초상은 해마다 수천 명의 남녀가 온다는 춘향의 고향 남원에 22일 보내어 춘향묘에 안치할 터이라는데, 남원에서는 당일 성대한 입혼식이 거행될 터이라 한다. 5월 21일자)
남원 광한루 동편의 춘향사당에서는 석가탄생일인 음력 4월 초파일을 택하여 해마다 춘향추모제를 거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이당의 새로운 춘향의 화상을 가져다 입혼식을 겸하게 되니, 남원 일대에선 일찍이 볼 수 없던 대축제가 벌어질 참이었다.
5월 26일. 광한루 일대의 숲과 호수는 바야흐로 초하의 신녹으로 한폭의 그림이었다. 맑은 날씨에 신록은 눈이 부셨다. 기다리던 초파일 춘향추모제 날이었다. 그뿐인가, 이번엔 새로운 춘향화상이 입혼식을 갖는 경사가 겹치고 있다. 화상은 바로 전날 이당이 서울에서 직접 안고 내려와 있었다. 입혼식은 하오 1시에 수만 명의 구경꾼이 삐잉 둘러싸는 광한루에서 거행되었다. 남원 안 기생들은 물론 멀리 순천, 정읍, 대전, 통영에서도 백여 명의 기생들이 모여 들고 있었다. 그들은 각종 가무와 창으로 전설의 춘향을 추모했다. 의식이 끝난 후, 춘향의 화상은 동쪽 춘향묘에 봉안되었다.
이당은 그의 춘향화상 입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남원읍장과 사진보도 관계로 별것도 아닌 시비가 있은 후, 그는 그길로 상경해 버렸다. 그런데 서울에서 다른 불쾌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동아일보에 게재된 창해滄海라는 익명 인사의 「춘향상」 비판이었다.
--- 춘향은 조선여성의 고전적 정렬을 상징한 이상적 존재이다. 조선사람 치고는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귀와 입에 그의 향기가 배어 있지 않은 이가 없을 만큼 보편적 대상이다. 이러한 대상이 수일전 화백 김은호씨의 우수한 필에 의하여 다시 초상으로서 초면綃面에 완전히 나타나서 로맨스의 발상지인 남원의 춘향묘에 봉안케 되었다 한다. 문화의 기연이 없는 필자는 불행히 아직 그 화상 원본을 보지 못하고 다만 조그마한 영사본을 신문지상에서 보았을 따름이다. 더구나 회화에는 문외한인 나로서 명가의 걸작에 대하여 개구할 아무런 자격도 없다. 그러나 대상이 대상이니만치, 작품이 작품이니만치, 나도 나의 신경을 전적으로 동원할 만큼 감촉이야 없지 않았다.
필자는 이 초상을 대하니 대번 직감적으로 이상히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던 열녀 춘향이 아니란 것이다. 또는 작자의 명의와 신문의 기사와 같이 처녀춘향이냐 하면 아무리 보아도 역시 처녀 춘향이 아니다. 열녀도 아니고 처녀도 아니면 춘향은 과연 무엇일까?
대관절 우리가 춘향을 정렬의 화신으로 이르는 것은 그가 그의 남편 이몽룡과 백년가약을 맺은 후의 춘향이요, 맺기 전의 춘향은 아니다. 만일 전의 춘향이라면 그는 자색을 겸비한 일개처녀는 될지언정 천고의 절조를 발휘한 열녀는 아니다. 기성의 열녀를 두고 전의 처녀를 숭배한다는 것은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
처녀는 어디까지나 처녀요, 열녀 춘향전의 주인공은 아니다. 이러므로 열녀 춘향을 그리는데 처녀로서 표현 시킨다는 것은 그것이 남성 염미의 미적 대상은 될지언정 미와 선을 겸비한 정렬 실천자인 열녀 춘향은 아니다. 이초상이 열녀, 처녀가 아닌 이상에는 일개 미인 처녀에게 머리를 숙이고 경건히 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비녀 머리를 한 성인 춘향이 아니고 뒷머리를 친 처녀춘향이 처녀라면 처녀의 자태를 여실히 나타내어야만 할 것인데 그것이 없으니 처녀 춘향으로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조선 현대 처녀라면 모르거니와 이조 옛날 처녀라면 열 살을 먹든지 스무 살을 먹든지 처녀인 바에는 머리를 땋는 것이 상하귀천을 물론하고 일정한 습속이었다. 그러기에 옛날 유행 중에도 “너와 나와 백년가약 맺을 적에 귀닥거리 마주 풀고 청실홍실 늘치고 마른 가루에 물 붓고...” 라 하지 않았을까?
귀머리를 땋지 않은 이 화상은 눈을 씻고 보아도 신식 뒷머리한 현대여성이다. 설사 귀머리를 풀었다 하더라도 현대식과 같이 중단발이 아니고 수척 길이나 되는 포찰스러운 머리털을 뒤로 땋아 치게 되면 양발제의 발세는 자연히 압중한 고전적 모양이 날 것이요, 이처럼 경첩한 현대양식을 나타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원본을 보지 못하였으니 의상의 색채와 지문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거니와, 하여간 복장체재가 경편낭상한 현대풍에 치우쳤고, 유한관중한 고전미가 너무 없어 보인다. 처녀춘향이라면 더구나 퇴기의 천녀요, 기적에 등록된 신분으로서 당시 경호 양반여자에만 한한 습속인 외(左) 치마를 입었을 것인가? 이도 고려해 볼 문제다. 춘향이가 실재인물이냐, 가상적인물이냐 하는 문제는 이제 간단히 판단키 어려우나 실재하든 가상이든 그것이 소설의 주인공이 된 이상에는 일정한 사실과 시대와 계급과 풍속을 참고치 않고는 그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특히 사화가史畫家의 주의치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이다. 외타의 문제는 지면의 제한으로서 할애하고 붓을 던진다. -----
이상의 평문을 쓴 창해라는 필자는 이당의 춘향화상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알고 있지 못했던 것 같고, 또한 정초의 중간 보도도 읽지 못한 모양이었다. 평자의 말엔 여러 대목에서 중요하고 수긍 가는 점이 있었지만, 그 방면의 여러 전문가의 말을 들은 후에 그린 이당으로선 할 말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맞서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덤덤하게 모른 체하고 말았다.
어느날 무슨 일로 춘곡 고희동과 동아일보사엘 들렀을 때, 편집국의 한 간부가 반론을 쓰라고 자못 진지하게 권했는데도 이당은 누군지 모르게 자기 본명을 감춘 익명의 평자를 상대로 논쟁을 하는 것은 허공에 대고 토론하듯이 부질없는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 무렵 수년래 비등해진 조선 미술계의 여론인 미술학교 설립 문제를 총독부에서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중국에 대하여 침략전을 감행한 일제의 정치적 회유책으로 보였지만 아뭏든 그것이 실현된다면 조선 미술계에는 일단 반가운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