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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중국 섬서성(샨시성) 지도 및 관광, 기본정보

작성자길잡어|작성시간10.03.12|조회수721 목록 댓글 0

 

 

 

 

황허강(黃河) 중류 유역 즉 중국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19 만㎢ 에 달한다.
주변의 웨이허평원(渭河平原)에는 베이징원인(北京原人:북경원인)과 함께 란톈원인(藍田原人)의 유적과 시안반포유적(西安半坡遺蹟) 등
원시고대 이래 당대(唐代)까지의 유적이 많으며, 현재 중국 시베이지구(西北地區)의 현관에 해당한다.

기후는 1 월 평균기온이 3~10℃, 7 월 평균기온 22~28℃ 이고 , 연강수량은 1000mm 이다 .
섬서성은 예로부터 중국 문화,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중국의 가장 오랜 문명 발생지이자 역사의 중심지였던 섬서성은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서역 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성장했다.
현재는 진시황릉, 병마용갱 등 관광자원을 지닌 중국 최대 관광지이다.

2007년 발표자료에 의하면 섬서성의 인구는 3705만명이다.

2006년 섬서성의 GDP는 4383.91조위안,2005년 대비 12.7%의 성장을 보였으며,
그중,제1산업 : 488.48조위안,성장율은 7.4%이며,
제2산업 : 2318.17조위안,성장율 : 14.9%,
제3산업 : 1577.26조위안,성장률 : 11.4%이다.
 
 
섬서성의 역사
시안 부근에는 주(周)/진(秦)/한(漢)으로부터 수(隋)/당(唐)에 걸쳐 역대 국도(國都)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당시 중국의 문화/정치/경제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지형 및 기온
친링산맥(秦嶺山脈)이 성의 남부를 동서로 달리며, 그 남쪽은 양쯔강(揚子江) 수계의 한수이강(漢水)의 유역이고,
그 북쪽은 황허강 유역에 속한다.

친링에서 성 남단의 다바산지(大巴山地) 까지는 친바산지(秦巴山地) 로 불리는데,
두 산지 사이에 한수이강에 연하여 비옥한 한중(漢中)/안캉 (安康)의 양 분지가 있다 .

친링의 단층애(斷層崖) 북쪽은 웨이허 평원으로 관중분지라고도 한다.
북부의 산베이고원(陝北高原) 은 황투고원(黃土高原) 의 일부로 해발고도 1,000m 전후이며 , 황토층이 두껍게 퇴적되어 있다 .
고원면은 평탄하나 수직의 곡벽(谷壁) 을 갖는 우열(雨裂) 과 하곡이 발달해 있다 .


황허강은 본성과 산시성(山西省) 사이를 깊은 협곡을 만들며 남류하고 ,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우딩강(無定河)/옌허강(延河)/뤄허강(洛河)/웨이허강을 합류시키는데,
이들 지류로부터 대량의 진흙이 유입되어 황허강 흙탕물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현재 물과 흙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수토보지공사가 넓은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

한중에서는 841mm, 북단의 위린(楡林)에서는 396mm 로서 친링 이남은 온난습윤하며, 북쪽으로 갈 수록 한랭건조하다.

성도(省都) : 태원
관개용수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농업이 성하여 보리/목화 등의 주산지로 알려져 있다.
농업은 웨이허 평원이 중심이지만 한중분지에서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북쪽에서도 농지 조성이 많이 이루어져 농업이 발전을 보이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밀/옥수수/수수 등이 있고, 상품작물로는 목화/콩이 있다.
산베이에서는 양/염소의 사육이 활발하다.

친링산 기슭에는 과수원이 많으며, 남쪽에는 쌀/차 외에 동유(桐油)/칠(漆)/한방약의 원료 등 임산물이 많다.
광물자원은 석탄/석유/철/사금/소금 등이 풍부한데, 소금은 옌츠(鹽池)에서 채취한다.

석탄은 징허강(涇河)/뤄허강(洛河) 하류 유역에 대상(帶狀)으로 달리는 탄층이 있고 퉁촨강(銅川)이 그 중심이며,
석유는 옌창(延長)에서 산출한다.

서안(西安)
중국 산시성의 성도이며, 행정구역은 8개의 구와 5개의 현으로 나뉜다. 시안시의 총면적은 9,983㎢에 달한다.
관중분지(關中盆地)의 중앙부, 북쪽으로 웨이허강(渭河)이 동류하고 남쪽에 중난산(終南山)이 솟아 있는 곳에 위치한다.

시안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세운 호경(鎬京)에서 비롯되며,
그뒤 한(漢)나라에서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단속적이었으나 국도(國都)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로
그 동안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서안은 섬서성의 성도로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다.

중국 역사를 잘 몰라도 무협소설 한 두 권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쉽게 기억하는 '장안'이란 도시가 바로 서안이다.
명 나라 전까지 장안으로 불린 서안은 주/진/전한/수/당나라 등 수많은 왕조의 수도로서 약 1천 1백 년 간 한족 문화의 중심지였다.

장안은 당 태종 때까지만 해도 재정이 궁핍했고, 당 고종 때부터 조금씩 사정이 나아지다 현종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며
로마와 함께 세계의 중심지로 등장한다.

당시 장안은 동서 10킬로미터, 남북 8킬로미터에 인구는 1백 50만 명이었으며 이 중 외국 사신들의 수는 약 4천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서안은 우리와도 관계가 있다. 660년 백제 멸망 때 의자왕과 유민들은 이 서안으로 끌려와 치욕스러운 삶을 살다가 죽게 된다.

서안은 서방의 대상이 비단을 사기 위해 파미르고원을 넘고 타클라마칸사막을 횡단해 왔으며,
이곳을 통해 중국인이 서방으로 갔기에 실크로드의 사실상 기점이다.

가장 번영했던 당대(唐代)에는 동서 9.5km, 남북 8.5km의 규모에 인구 100만이 넘는 계획적인 대성곽 도시를 이루어
멀리 서방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당나라의 쇠퇴와 그에 따른 병란으로 장안도 파괴되어 쇠퇴하였다.

현재의 시역(市域)은 명(明)나라 때 구축한 주위 1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와 교외로 되어 있으며,
명/청대에 서안부(西安府)를 설치한 바 있으나 중화민국 때에 그것을 폐지하고 산시성에 직속시켰다.

구시가는 당나라의 장안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고도(古都)의 면모를 간직하는 한편 관공서와 상점 등이 밀집해 있다.
연평균기온 13.3℃, 1월 평균기온 -1.3℃, 7월 평균기온 26.7℃, 연평균강수량 604mm이다.

역사적 도시로 사적이 풍부하다.
남쪽 교외에 있는 쯔언사(慈恩寺)의 다옌탑(大雁塔)은 현장(玄)이 창건한 45m의 7층 전탑(塼塔)으로 그 위에서 조망하는
관중분지의 풍경이 뛰어나다.
그밖에 북서쪽에 있는 첸푸사(遷福寺)의 샤오옌탑(小雁塔)/양귀비(楊貴妃)가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화칭못(華淸池)/우러우사(無漏寺) 등이 유명하다.

또 성내에 있는 역사박물관(옛 孔子廟)에는 부근에서 출토된 유물이 진열되어 있고,
북쪽의 비림(碑林)에는 당/송(宋)나라의 고비(古碑)가 많이 보존되어 있다.

서안은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며 고대중국의 200년 도읍지로 진시황, 당현종과 양귀비 등 3000년 역사가 숨쉬는 고도이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는 진시황릉과 진시황의 사후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8000구의 병마용이 있으며,
당현종과 그의 애첩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던 화청지, 비림(碑林) 대안탑(大雁塔) 등 고대중국의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화산
화산은 중국의 5악중의 하나로 과거에는 "서악"이라 칭하였다.
유명하며, 중국의 섬서과 하남지역의 교차지역인 섬서성 화인시에 위치해 있으며, 화산은 또한 "기이한 천하 제일산"이라 칭하기도 한다.

화산은 거대한 화강암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역사는 27억년의 위풍을 자랑한다.
화산의 그 규모에 있어 높이는 5천자, 넓이는 십리의 거대함을 자랑하고 있다.

화산의 최고봉은 남봉으로 그 높이는 해발 2,160m이며 야생 기러기도 쉬어 간다고 하며,
조양봉으로 불리는 동봉, 연꽃봉 이라 불리는 서봉이 대립되어 "천하 삼봉"이라 칭하고 있다.

운대, 이봉이 측면에 있고 36개 봉이 정면에 위치해 있으며
기암괴석의 봉우리와 운해 온천 폭포 등등이 천해의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210여 개의 수려한 경관과
역사가 깃들어진 장관들이 펼쳐져 있다. 화산은 중화 민족문화의 발상지 중의 하나이다.

청대 저명한 학자 장태엽 선생의 고증에 의하면 "중화(中華), 화하(華夏)"에서 화산이란 이름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기(史記)에는 요,순대의 황제들이 유람하였으며, 진시황, 한무제, 무측전, 당현종 등등
여러 고대 황제들이 화산에서 대규모 경전활동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양보, 양천을 비록하여 명,청시대 고명무 등이 적지 않은 학자들이 화산에 거주하며 학제를 열어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화산은 도교의 중심지고 이다.

건릉(乾陵)
당 태종의 아들인 고종과 그의 처 측천무후의 묘로 당나라 묘 중 가장 큰 규모다.
거대한 능은 당 왕조의 전통대로 산 자태를 이용해 만든 것이다.

발굴이 완료되면 진시황릉 못지않게 주목을 끌 것으로 예상된다.
능으로 가는 입구에는 1킬로미터 정도 되는 신도라는 참배로가 있고 양 옆으로는 인간과 동물 석상이 늘어서 있다. 이 석상들은 고종의 장례식 때 조문왔던 각국 사신을 묘사란 것이다.

날개 달린 천마상, 타조상 등이 눈길을 끈다 신도의 끝부분에는 왕빈상이라는 61체의 석상이 있는데,
원래 등 부분에 국적이 적혀 있었으나 1300년의 세월 속에서 지워지고, 모두 목이 잘려져 있다.

참배로 제일 안쪽에는 무명비(無名碑)가 있는데, 측천무후 스스로 자신이 이룬 업적이 많아
좁은 비에는 다 적을 수 없으므로 그냥 비워 두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삼문협(三門峽)
산서의 용문산과 인접해 있는 계곡. 우는 황하를 가로막고 있던 산을 몇조각으로 나누어 지류를 만들었는데 산사이를 흐르는 물이 마치 세 개의 문을 지나는 것 같다고 하여 삼문(三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삼문에는 각기 고유명칭이 있는데 귀문(鬼門), 신문(神門), 인문(人門)이 그것이다.
화산삼문협잡기(華山三門峽雜記))에 보면 이곳의 풍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하 양안의 절벽에 서서 하곡을 내려다보노라면 멀리 상류 쪽에서 힘차게 들려오는 황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물은 동쪽으로 갈수록 수세가 급해지는데 삼문협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중간에 서 있는 두 개의 석도(石島)에 부딪혀 물길은 순식간에 세 가닥의 급류로 변하고 만다.

이들 급류는 다시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양안에 돌출해 있는 바위에 부딪혀
순식간에 한 가닥으로 모이게 되며 넓이가 1백 20미터쯤 되는 계곡을 박차고 나가는데 우뢰같은 소리가
협곡을 진동시킨다.' 이곳에는 우의 치수를 말해주는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옛날 우가 지주(砥柱)를 뚫을 때 말이 삼문(三門)을 뛰어넘으면서 앞발로 이곳에다 발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삼문협의 상류에는 우묘(禹廟)도 있는데 옛날 삼문협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향을 피우고 자신들의 소원을 우에게 빌었다고 한다.

여행 코스
진시황릉
(秦始皇陵)
진시황릉은 실제로 하나의 산이다.
능의 높이는 약 79m, 동서 4백 75m, 남북 약 3맥 84m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 있으며,
석류나무가 자란다.

전한의 역사가인 사마천에 의하면 진시황은 그가 황제가 된지 얼마되지 않아 서부터 이 능을 만들기 시작해서 36년 만에 완성했다고 하는데 그때는 이미 진시황이 죽은 후였다고 한다.

땅 밑과 땅 위로 이토록 거대한 무덤을 만든 진시황의 스케일에 입이 벌어진다.
진시황은 살아 생전 삶을 즐기기 위해 아방궁을 지었고,
죽은 후를 위해서는 이 거대한 능과 지하 궁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종루(鐘樓)
고루(故樓)
시 중심부 대로에 종루가 있고 그 근처에 고루도 있다.
이곳은 실크로드로 향하는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데, 원래 종루에는 종이,
고루에는 북이 있었는데 현재 고루에는 북이 없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북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낮에는 종을, 밤에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종루를 오르면 시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대안탑
(大雁塔)
서안시의 남쪽의 자은사의 경내에 자리잡고있으며,
자은사는 당고종이 647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대안탑의 높이는 64m에 이른다.

이 탑은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이 652년에 세웠는데, 처음에는 5층 탑으로 만들었다가 10층으로 올려졌고 다시 7층 탑으로 변했다. 이 안에 그가 갖고 온 불서가 보관되었다.

현장은 629년 장안을 출발, 투루판을 거쳐 천산남로를 따라 파미르고원을 넘었으며
천신만고 끝에 인도로 들어가 6백 57부의 불경, 1백 50개의 불사리, 8체의 불상을
22마리의 말에 싣고 17년 만에 돌아왔다.

그 후 현장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의 번역 작업을 한 곳이 바로 이 자은사다.
대안탑은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를 수 있으며, 자은사 경내와 시내가 보인다.
소안탑
(小雁塔)
안탑은 13층이지만 높이는 43m로 그 규모로는 대안탑보다 작다.

이 탑은 인도와 동남 아시아를 다녀온 당나라 승려 의정이 귀국시 운반해온
4백 부의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탑은 아직 완전히 복구가 안된 상태로 당나라때의
그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잇는 장점을 가지고있다.
병마용
서안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 진시황릉을 중심으로 약 2km 사방 지하에 건설된 지하궁전의 일부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이 궁전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죄인 70여만 명을 동원, 사후를 위해 만든 것으로, 지하수가 세번나올 정도로 깊게 판 후 동판을 깔고 관을 안장했다.

지하묘에는 궁전, 망루와 문무백관의 자리를 만들었고,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자동발사되는 활을 장치해 살해했다.

지하궁전은 계속 발굴중인데 병마용갱은 너비 60m, 길이 210m이며, 지표면으로 부터 약 4.5m의 땅속에 판 10개의 갱마다 병마가 10열로 서있다.

전차대, 포대 그리고 쇠뇌와 화살을 가진 보병대가 있는데, 현재 전시되고 있는 6천여개가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라니 더욱 놀랍다.
청진사
(淸眞寺)
약 5만 정도의 이슬람교도가 살고 있는 서안의 중심에 있는 사원으로 당나라 때인 742년에 창건되었다.
중국 4대 이슬 교 사원의 하나이며 이 사원의 건축 양식은 중동에서 볼 수 있는 둥그런 돔과 미나렛이라는
첨탑을 갖춘 것이 아니고 중국식 절 형식을 띠고 있다.
사원 안에는 아라비아 문자가 새겨진 것들도 눈에 띄며, 안의 대전(大殿은) 약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흥교사
(興敎寺)
현장법사의 유골을 모신 사원으로 서안에서 남쪽으로 20㎞ 떨어진 두곡(杜曲)에 있다.
당나라 숙종 황제로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절로 현존하는 건물은 당대의 것으로 서원에 남겨져 있는 현장삼장의 사리탑과 그의 제자 원측(圓測)과 규기(窺基) 두 사람의 묘탑 정도이다
법문사
(法門寺)
서안에서 서쪽으로 115㎞ 떨어진 고찰로, 서기 300년인 후한시대에 창건되었다.
1650여 년의 역사를 가지 이 사찰이 유명하게 된 것은 법문사탑으로 인해서이다.

법문사탑은 명나라 때인 157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8각 13층의 높이 47m가 되는 벽돌탑이다.
이 법문사탑은 1987년에 재건 보수되면서 지하궁전이 발견되었는데,
이 지하궁전에는 8중의 보물함에 봉납된 석가의 진짜 뼈로 판명된 손가락 뼈 4개가 발견되어서
화제를 모았다.
향적사
(香積寺)
당나라 때인 706년에 창건된 중국 정토종의 본산인 사찰로,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가 지은 오언율시 과향적사(過香積寺)』로 유명해진 사원이다. 높이 11층 33m 벽돌탑인 선도고탑(善導古塔)은 당나라 때 창건한 것이고, 선도대사(善導大師)의 상이 있는 대웅보전은 청나라 때 중건한 것으로, 1980년에 다시 수리했다.
곤명지
(昆明池)
장안 상림원(上林苑) 안에 있다.
그 안에는 한 대에 돌로 만든 고래인 석경(石鯨)을 만들어 놓았는데 크기는 삼장으로 천둥이 칠 때는 꼬리나 지느러미를 흔들며 으르렁거렸다고 한다.
과부산
화산의 옛 이름. 전설에 의하면 옛날 주 무왕이 천하를 평정할 때 동원하였던 여덟 필의 준마를 유명한 어자(御者)(말몰이꾼)인 조부(造父)가 잡아 주목왕(周穆王)에게 바쳤다고 한다.

산의 북쪽으로는 수백리에 달하는 광대한 수풀이 있고 거의 복숭아 나무로 도림(桃林)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가 바로 고대의 유명한 도림새(桃林塞)라고 한다.
남전
(藍田)
장안 동남의 명승. 경옥(硬玉)의 산지이므로 옥산(玉山)이라고도 부른다.
마외파
(馬嵬坡)
장안의 서북쪽, 위하 북안의 지명.
당나라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피해 양귀비와 함께 이곳에 왔다가 강압에 못 이겨 양귀비가 죽은 곳. 양귀비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무릉
(茂陵)
장안의 서북 40킬로에 있는 전한의 황제 무제의 묘.
근처는 황제들의 묘가 열 한 개나 있으나 그중 가장 크다.

저변의 길이는 240미터, 높이 46.5미터로,
외형은 사각형이고 꼭대기 부분은 평평하다.
무제 즉위 다음해부터 건조하여 53년이나 걸려서 완성시켰다.
보경사
(寶慶寺)
섬서성 서안의 남문 내 보경사에 있는 불전과 전탑 벽면에 있었던 석제의 부조 불상. 이들 부조는 본디 당시대에 같은 장안의 광택방(光宅坊)에 있었던 광택시 안, 특히 측천무후의 조영에 걸린 누각칠보대(寶대) 등의 내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서 원래는 130석여(石餘)가 있었다고 한다.
여산
(驪山)
섬서성 서안부에 있는 산. 여산(廬山), 회창산(會昌山)이라고도하며, 예로부터 온천으로 이름이 높다. 주나라때 여융(驪戎)이 와서 살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온천을 이용하려고 각도(閣道)를 만들었고 당의 태종은 온천궁을 지었고, 현종은 온천궁을 화청궁(華淸宮)으로 고치었다.
여산릉
(驪山陵)
사기에 의하면 시황제는 70만명을 동원하여 38년 걸려서 이 능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는 75미터, 봉상(봉상(封上))의 한변이 560미터의 방형(方型)묘이며 주위에는 3,000미터나 되는 흙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묘내에는 궁전이 있고, 문무백관의 자리가 설치되어 있으며, 궁중에서 엄선된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차 있고, 묘도둑이 접근하면 노시(弩矢)가 저절로 발사되도록 되어 있었다.

묘실의 천장은 천체를 본떠서 야광(夜光)의 옥(玉)을 박은 밤하늘이 보이고, 중국의 지형을 본뜬 바닥에는 수은의 강이 흐르고 있다.
묘속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인어(人魚)의 고(膏)를 쓰는 촉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섬서성의 볼거리
서안 전경 연안 전경 보계
황하호구폭포 진시황병마용 려산
보탑산
연안혁명기념관
보탑산
황제릉 대명관 섬서역사박물관
원각사 대중양만수궁 관중서원(院)
대자은사(寺) 화청지(池) 와룡사(寺)
대당부용완 서안종루 혁명공원
서안비림 취화산 화청지(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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