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으뜸 누각(樓閣) 봉서루
봄이 한창인 날 경북 영주시 순흥으로 가는 길엔 벚꽃이며 복숭아 꽃, 진달래가 산천(山川)을 가득 메우고 있다. 새롭게 잘 조성된 봉서루(鳳棲樓)의 마당에 들어서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낙락장송(落落長松) 소나무며, 백옥 같은 목련꽃, 그리고 푸른 하늘과 봉서루 추녀 끝에 걸린 흰구름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같다. 뜰앞에 소복히 쌓인 봉황(鳳凰)의 알 같은 둥근 자연석 돌무더기 또한 누각과 조화롭게 자리를 잡았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던 봉서루도 이제 정든 고향에 터전을 잡아 우뚝하게 서서 옛 기억을 더듬는 듯 봄 햇살에 여유로워 보인다.
봉서루(鳳棲樓)는 영남의 3대 루인 안동 영호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보다 앞서 건축된 누각으로 순흥의 진산인 비봉산과 잘 어우러져 있으며 순흥 사람들의 심성이 녹아있는 누각이다. <재향지>의 <고적조>에는 ‘고을 남쪽 3리 쯤에 있었다. 지금에 옛 터가 있는데 주춧돌 잔해가 완연히 남아 있다.”고 적고 있는데 이 내용으로 보아 1800년대 중반에는 이미 봉서루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지금의 봉서루는 그 이후에 옛터에 새롭게 건립되어 그 자리를 지키다가 순흥소학교의 화재로 지금의 면사무소 자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옛 위치에 건립되었다.
정재(鄭載)의 봉서루 시에서
“넘실 넘실 흐르는 남쪽 시냇물, 널찍하게 펼쳐진 뽕나무 밭” 이라 했다.
당시 봉서루에 올라 바라본 순흥의 모양이었다. 참으로 묵가적이고 토속적인 자연의 모습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새롭게 순흥면 지동리 옛 터에 들어 선 봉서루의 평면구성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에 굴도리 중층건물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한단 돌리고 그 위에 2단 주좌의 원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별주(別柱)로 세웠다. 상층은 우물마루 바닥에 사방을 개방시키고 사면에 계자각 헌함을 돌렸다. 주상공포는 창방을 걸고 1출목 이익공으로 꾸몄다. 촛사지 외단은 초제공이 앙서형에 연봉조각, 이익공은 수서형에 연봉조각을 붙였다. 창방과 장혀사이에는 화반(원형, 초각-2종류)을 두었고, 첨차는 모두 초각첨차이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종도리는 첨차를 끼운 체형판대공 위에 놓여 있다. 충량은 2개 걸고 동자주에 주두를 얹어 외기도리 장혀를 받쳤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혁명(革命)의 고을 순흥
순흥은 혁명(革命)의 고을이다. 수양대군의 정권 탈취에 맞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순흥 사람들이 일으킨 정축지변이 그러했고, 모순된 통치권력을 쓸어 버리겠다고 야망을 불태운 정희량(鄭希亮)이 그러했다. 조선시대엔 역향(逆鄕)의 고을이라는 오명을 안고 살아왔지만 실상은 충절과 의리의 고을로 시대를 이끌어 왔던 올곧은 고을이었다.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순흥 사람들의 기개 만큼이나 그에 수반된 희생의 폭은 길고도 넓고 깊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이 채 20년도 안되어 신원복권이 된 것에 비한다면 순흥의 정축지변은 220년이 넘어서야 겨우 폐부의 고통을 씻을 수가 있었다. 순흥은 혁명의 아픔을 아는 혁명의 성지이다.
봉서루(鳳棲樓)는 그런 순흥의 혁명의 역사를 두 눈으로 지켜 보았다. 봉서루는 영주의 대표적인 누각이며 순흥을 상징하는 누각이다,. 봉서루가 들어 선 순흥은 소백산에 둘러 싸여 있고 죽계를 품고 있어 옛부터 사대부(士大夫)들이 살만한 곳이라고 했다. 죽계지(竹溪志)에서 순흥을 “죽계의 냇물이 동쪽을 감돌아 흐르고 소백산이 오른쪽에 솟았으며 산은 높고 물은 맑아 봉황이 날고 용이 서린 형국”이라 했다. 《여지도서》 순흥부 ‘산천조’에는 ‘비봉산은 순흥부의 진산이며 소백산으로부터 파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봉산(飛鳳山)은 소백산에서 떨어진 지맥(支脈)이 기복(起伏)을 반복하며 뻗어내리다가 순흥의 뒤에 다다라, 도사려 솟은 형세가 봉황이 날아 오르는 모양이라 하여 비봉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순흥은 고을 전체가 하나의 역사 박물관이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의 현장인 금성단과 압각수 그리고 순흥향교, 벽화고분, 서낭당, 어숙묘, 죽계구곡, 사현정, 탁정대. 세연지 등 수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곳이 순흥이다.
안축, 봉서루 중영기를 쓰다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7~1328)은 순흥부사 직랑(直郞) 채상(蔡祥)이 고향 순흥의 봉서루를 중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봉서루 중영기’를 써 보냈다. 안축 자신도 이 봉서루에 자주 올라 자연을 벗했던 기억들을 더듬어 이야기하며 봉서루의 중건을 축하했다. 안축은 ‘순흥봉서루 중영기’에서
“…옛날 이 고을을 설치할 때 수령이 정자를 오직 서쪽과 남쪽에 둔 것은 고을의 지형이 이래서였다.
서쪽 정자는 단지 서울로부터 남행하는 사람이 왕왕 길로 지나갈 뿐인데 남쪽 정자같으면 서쪽으로부터 와서 남행하는 자가 여기서 나가게 되고, 남쪽으로부터 와서 서울로 가는 자가 여기로 들어오게 되며, 남쪽 여러 고을의 특명을 받고 일을 감독하는 사람들이 다 여기로 들어오고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기를 통하여 돌아가게 된 까닭에 관원이나 사사로운 나그네를 교외에서 환영하거나 환송하는데 빈 날이 없다.
고을 사람들이 서쪽 정자를 경히 여기고 남쪽 정자를 중히 여긴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였다.…”
라며 순흥의 남정(南亭)과 서정(西亭)중에서 남정(南亭)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또
“…정자는 고을 남쪽 5·6리 쯤에 있는데 북으로 신령한 산을 바라보고, 남으로는 우거진 숲을 대하고, 동으로는 푸른 계곡물에 임하고, 서로는 평평한 들을 내려 누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고을의 누대의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 많다.
모두 산이 가까이 닥치고 깊숙히 떨어진 곳에 있어서 대개의 산은 높고 물은 맑다. 산이 가까이 닥쳐 있고 깊숙히 떨어진 것이란 비록 맑고 상쾌하며 그윽한 정취가 있지만 산을 본즉 한 층, 한 겹을 벗어 나지 않고, 물을 본즉 한 굽이 진 것에 불과하며, 두루 바라본 즉은 한 골 한 구렁을 넘지 않으니 이 것은 한 덩이 산과 한 구비 물일 뿐이다.
만일 앞으로 나아와 이 봉서루에 오르면 높게는 가히 만층 절정을 볼 수 있고, 멀리는 가히 천 겹 높은 봉우리를 바라 볼 수 있으며, 묘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많은 구렁이 둘러 있고, 구름의 변화와 안개가 오르는 것이 여러 모양이니 세상을 피하여 그 곳에 가 숨을 수가 없다.
또한 물을 보면 물의 흐름이 백 갈래 여울과 폭포가 산 아래서 합쳐서 빨리 내리치던 세력이 느려지고 시끄럽던 물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누각 밑에 이르러서는 물이 깊고 맑으며 흐름이 느려져 멀리 10리를 흐르고 여울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모래는 깨끗하고 작아서 사랑스러우니 여기에 산수의 위대함이 갖추어져 있다.
2월에 농사가 시작되면 남쪽 들로 가는 사람들은 누각 밑으로 길을 끼고 서쪽 들로 가는 사람들은 누각 밖으로 늘어서서 도랑을 쳐 물을 얻는데 삽을 메고 구름같이 많이 모이니 이 봉서루는 홀로 산수의 아름다움 뿐만이 아니라 심고 가꾸는 농사의 즐거움도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고을 사람으로 머리를 짜올린 때에 일찍이 이 누각에서 놀은 바가 있다.
처음 벼슬 길에 나선 이래로 늘 남쪽을 바라보며 이 누각을 못잊어 그리워했다.
작년 봄에 사관을 그만 두고 한가함을 얻어 모친을 뵈러 고향에 왔었는데 여러번 이 봉서루에 올랐었는데 보니 기울어 무너졌는데 고치지 않은지가 오래 됐었다…”
라며 봉서루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애틋한 심정을 나타냈다..
“…나는 서울로 이미 돌아왔고 채공은 이 고을에 도임하여 이 누각에 올라 과연 산수를 보고 즐거워 했고, 기울고 무너진 것을 보고서는 탄식했다.
이에 공인에게 명하여 다시 만들고 새롭게 하니 규모가 크고 아름다우며 고운 그림이 선명하여 보통의 영남 누각의 아름다움은 비교가 안되었고, 또 백성의 집 한 채를 복구하여 수비하는 가옥으로 삼아 장구한 계획이 되었으니 어찌 소홀하고 소박 간략한 것과 갑자기 이루어졌다 갑자기 무너지는 것들과 더불어 같은 날 말할 수 있으랴.
누각이 다 완성되어 공은 손이 이른다는 전갈을 들으면 즉시 의관을 갖추고 나아가 누각에서 맞이하였고, 산천의 악한 기운을 품은 안개로 피곤한 손님은 이 봉서루에 올라 산을 바라본 즉 놀이 걷히고 구름이 나는 시원한 생각이 들고, 물에 임한즉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 목욕하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공이 혹 농사 때를 당하여 관아에서 일찍 나와 이 누각에 올라 나날의 농사를 살피고, 이르고 빠른 것을 채근하고, 근면·태만을 꾸짖어서 상주고 벌하면 백성들이 다 스스로 깨달아 늦은 자는 부지런하게 되어 다투어 남보다 앞서려고 할 것이다.
이로부터 후에는 관에는 손님에 대한 예절로 책망받는 일이 없고 들에는 농사를 실수하는 일이 없게 되어 관리는 평안하고 세월은 풍년이 되니 다 공이 준 것이요, 이 누각의 공인 것이다.…”
직랑 채상이 흥주에 도임하여 봉서루에 올라 봉서루가 기울어지고 무너진 것을 보고 새롭게 만들었다. 근재 안축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순흥 출신이다.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아버지는 석(碩)이다. 고향 순흥의 죽계에서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유학자 층의 한 사람으로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 글을 잘 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 사헌규정(司憲糾正), 단양부주부를 지내고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 후 강원도 존무사로 파견되어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또한 전법판서(典法判書), 감찰대부(監察大夫),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 상주목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었다. 이 후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편년강목(編年綱目)’을 개찬하고 충렬, 충선, 충숙왕 3조의 실록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어 문명이 높았다.
순흥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근재집(謹齋集)”이 있다.
이별과 만남의 장소
봉서루는 순흥이라는 이름과 함께 수 백년을 동고동락했다. 수 백년 동안 순흥 사람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해 온 이웃이자 동료였다. 봉서루는 이별의 아쉬움과 만남의 기쁨이 눈물이 되던 곳이었다. 순흥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봉서루를 지나야했다. 영주 출신이었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도 이 곳 봉서루에서 영주 군수였던 하륜(河崙)을 이별하며 그 아쉬움을 2편의 시로 남겼다.
옥경으로 돌아가는 임 보내나니
구름 끝의 저 달을 임께 주노라
구름끝이 멀다고 말하지 마오
술 잔속에 곧장 비추나니
바라노니 임이여 이 잔을 마시오
내 마음이 달과 함께 조촐하다오
구름떼 날아들어 그늘이 지니
맑은 빛이 중도에 먹히고 마네
걸음을 같이하는 사람없으면
묻힌들 뉘라서 아깝다하리
이별에 다다르니 다시 값져라
달을 보며 행여 서로 생각하세
<순흥의 남정에서 하 대사성 윤을 보내다.>
(무오년 1373년 이 후에 영주, 제천 내왕 때 지음)
타향이라 송별을 나누는 곳은
장정이라 해 저물 무렵이로세
뜬 구름과 함께 멀어만지니
나그네는 어디로 향해가는지
말이 고되어 시도 짓기 어렵고
술떨어져 좌석을 자주 옮기네
추워지기 쉬운건 가을날이라
좋이가서 내마음을 위안해 주게
<순흥의 남정에서 하 대사성 윤을
송별하여 서울로 보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도 가끔 순흥을 찾아 이 곳 봉서루에 올라 휴식을 취하곤 했던 모양이다. 퇴계의 ‘봉서루’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필마로 봄 바람에 옛 성을 조상(弔喪)하니
성의 먼 못에 오직 야인(野人) 밭가는 것 보았노라
당일의 번화한 일 알고자해서
안후(근재, 안축)의 이별곡조 소리 들었네.
봉서루, 다시 옛 터에 우뚝 서다
봉서루는 처음에 고을 남쪽 5리(구, 순흥초등학교 터)쯤 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1934년 쯤 봉서루 곁에 있던 소학교(순흥초등 전신)가 불타면서 봉서루는 지금의 순흥면 사무소 마당으로 옮겨 지게 되었다. 그 곳으로 옮겨진 봉서루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벽을 막아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면서 지난 날 웅장한 루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봉서루는 전설에 의하면 순흥의 진산 비봉산에 사는 봉황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퇴해 진다하여 고을 남쪽에 누각을 지어 그것을 방지하고자 세웠다 한다. ‘봉서루’ 라는 현판은 누구의 글씨인지 알지 못하고 ‘흥주도호부아문’이라는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순흥 사람들은 누각의 앞쪽에‘봉서루’라는 현판을 걸어 봉황을 맞이하여 깃들게 하였다. 또한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영봉루(迎鳳樓)의 현판을 걸었다. 봉서루는 여말선초 흥주(興州, 순흥)의 남정(南亭)으로 한양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배웅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던 봉서루가 신축 면사무소가 건립된 후 옛 모습을 찾았으나 누각의 노후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지동리 옛 터)로 옮겨 짓게 되었다. 당초 길이가 2.95m이던 봉서루의 루하주(아랫부분)를 2.35m로 설계하는 바람에 누상주 2.60m보다 짧아 기형의 루가 되는 것을 염려한 순흥지역 주민들의 항의로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현재 공사를 마치고 옛 터전위에 우뚝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봉서루는 비봉산 봉황의 보금자리로 순흥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어 왔었다. 지금 봉서루가 들어선 주변에는 알봉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또한 봉황의 알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봉서루와 알봉
순흥의 진산(鎭山)은 봉황이 날으는 모습을 하고 있는 비봉산(飛鳳山)이다.
봉서루와 알봉(卵峰)에 대한 전설은 고려 중기 이전으로 생각된다.
어느 날 지리와 풍수에 능한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순흥 고을의 산천을 둘러보고 “지형으로 보아서는 매우 번성할 수 있는 고을인데, 비봉산 봉황은 날아가려 하고, 고을의 남쪽이 허술함이 흠이로군.”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순흥 사람들이 그 흠이란 것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을 나그네에게 물었다. 나그네는 “남쪽 5리 쯤에 누각(樓)을 세우고 둘레에 오동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고 그 가까이에 알 모양의 봉우리를 세군데 쯤 만들어 두면, 봉황이 날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고, 지형의 허술함도 메워지리니, 그렇게만 하면 이 고을에 운이 열려 큰 인물이 이어날 것이라.”고 일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은 그 말을 따라 남쪽 5리 지점(지금 지동리)에 누각을 세워 봉서루(鳳棲樓)라 이름하고 둘레에 많은 오동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으며, 누각 가까이에 흙을 둥그렇게 쌓아올려 세군데의 알봉을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봉황의 알인 것이다.
용·거북·기린과 함께 상서로운 새로 상징되는 봉황은 본래 오동이 아니면 깃들이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샘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알려져 오고 있으며 ‘봉황이 깃든다’는 뜻으로 누각의 이름을 봉서루(鳳棲樓)라 했다. 순흥 사람들은 봉황이 깃들도록 오동나무 숲을 가꾸고 봉황의 알까지 만들어 봉황이 다른 곳에 마음두지 않고 이곳 순흥에 안주(安住)하게 하였다.
봉서루는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으로 이 곳 순흥이 낳은 고려 후기의 명현(明賢) 근재(謹齋) 안축(安軸)이 그 중영기(重營記)를 지었으니, 창건년대는 그 보다 훨씬 이전일 것으로 추측된다.
봉서루를 짓고 나니 고려 후기에 들어 순흥에서는 역사에 빛을 남긴 우뚝우뚝한 인물들이 무리로 이어 났다.
봉서루 오동나무 숲이 있던 자리엔 1720년 초 이후로 허허벌판으로 변하여 다만 흙을 쌓아 만들었다는 알봉들만이 밭 사이에 옛 모습대로 남아 있을 뿐 오동나무 숲마저 간 곳 없고 부근 논두렁 군데군데에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옛 사연을 지니고 남아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신정일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 황금나친반, 2006
김태환 《부석사, 그리움은 풍경으로 흔들리고》 프롤로그 출판사, 2004
송지향 《영주영풍 향토지》여강출판사, 1987
순흥면 《순흥향토지》도서출판 서림, 1994
이중환 《택리지》 을유문화사, 2000
봄이 한창인 날 경북 영주시 순흥으로 가는 길엔 벚꽃이며 복숭아 꽃, 진달래가 산천(山川)을 가득 메우고 있다. 새롭게 잘 조성된 봉서루(鳳棲樓)의 마당에 들어서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낙락장송(落落長松) 소나무며, 백옥 같은 목련꽃, 그리고 푸른 하늘과 봉서루 추녀 끝에 걸린 흰구름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같다. 뜰앞에 소복히 쌓인 봉황(鳳凰)의 알 같은 둥근 자연석 돌무더기 또한 누각과 조화롭게 자리를 잡았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던 봉서루도 이제 정든 고향에 터전을 잡아 우뚝하게 서서 옛 기억을 더듬는 듯 봄 햇살에 여유로워 보인다.
봉서루(鳳棲樓)는 영남의 3대 루인 안동 영호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보다 앞서 건축된 누각으로 순흥의 진산인 비봉산과 잘 어우러져 있으며 순흥 사람들의 심성이 녹아있는 누각이다. <재향지>의 <고적조>에는 ‘고을 남쪽 3리 쯤에 있었다. 지금에 옛 터가 있는데 주춧돌 잔해가 완연히 남아 있다.”고 적고 있는데 이 내용으로 보아 1800년대 중반에는 이미 봉서루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지금의 봉서루는 그 이후에 옛터에 새롭게 건립되어 그 자리를 지키다가 순흥소학교의 화재로 지금의 면사무소 자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옛 위치에 건립되었다.
정재(鄭載)의 봉서루 시에서
“넘실 넘실 흐르는 남쪽 시냇물, 널찍하게 펼쳐진 뽕나무 밭” 이라 했다.
당시 봉서루에 올라 바라본 순흥의 모양이었다. 참으로 묵가적이고 토속적인 자연의 모습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새롭게 순흥면 지동리 옛 터에 들어 선 봉서루의 평면구성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에 굴도리 중층건물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한단 돌리고 그 위에 2단 주좌의 원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별주(別柱)로 세웠다. 상층은 우물마루 바닥에 사방을 개방시키고 사면에 계자각 헌함을 돌렸다. 주상공포는 창방을 걸고 1출목 이익공으로 꾸몄다. 촛사지 외단은 초제공이 앙서형에 연봉조각, 이익공은 수서형에 연봉조각을 붙였다. 창방과 장혀사이에는 화반(원형, 초각-2종류)을 두었고, 첨차는 모두 초각첨차이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종도리는 첨차를 끼운 체형판대공 위에 놓여 있다. 충량은 2개 걸고 동자주에 주두를 얹어 외기도리 장혀를 받쳤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혁명(革命)의 고을 순흥
순흥은 혁명(革命)의 고을이다. 수양대군의 정권 탈취에 맞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순흥 사람들이 일으킨 정축지변이 그러했고, 모순된 통치권력을 쓸어 버리겠다고 야망을 불태운 정희량(鄭希亮)이 그러했다. 조선시대엔 역향(逆鄕)의 고을이라는 오명을 안고 살아왔지만 실상은 충절과 의리의 고을로 시대를 이끌어 왔던 올곧은 고을이었다.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순흥 사람들의 기개 만큼이나 그에 수반된 희생의 폭은 길고도 넓고 깊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이 채 20년도 안되어 신원복권이 된 것에 비한다면 순흥의 정축지변은 220년이 넘어서야 겨우 폐부의 고통을 씻을 수가 있었다. 순흥은 혁명의 아픔을 아는 혁명의 성지이다.
봉서루(鳳棲樓)는 그런 순흥의 혁명의 역사를 두 눈으로 지켜 보았다. 봉서루는 영주의 대표적인 누각이며 순흥을 상징하는 누각이다,. 봉서루가 들어 선 순흥은 소백산에 둘러 싸여 있고 죽계를 품고 있어 옛부터 사대부(士大夫)들이 살만한 곳이라고 했다. 죽계지(竹溪志)에서 순흥을 “죽계의 냇물이 동쪽을 감돌아 흐르고 소백산이 오른쪽에 솟았으며 산은 높고 물은 맑아 봉황이 날고 용이 서린 형국”이라 했다. 《여지도서》 순흥부 ‘산천조’에는 ‘비봉산은 순흥부의 진산이며 소백산으로부터 파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봉산(飛鳳山)은 소백산에서 떨어진 지맥(支脈)이 기복(起伏)을 반복하며 뻗어내리다가 순흥의 뒤에 다다라, 도사려 솟은 형세가 봉황이 날아 오르는 모양이라 하여 비봉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순흥은 고을 전체가 하나의 역사 박물관이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의 현장인 금성단과 압각수 그리고 순흥향교, 벽화고분, 서낭당, 어숙묘, 죽계구곡, 사현정, 탁정대. 세연지 등 수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곳이 순흥이다.
안축, 봉서루 중영기를 쓰다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7~1328)은 순흥부사 직랑(直郞) 채상(蔡祥)이 고향 순흥의 봉서루를 중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봉서루 중영기’를 써 보냈다. 안축 자신도 이 봉서루에 자주 올라 자연을 벗했던 기억들을 더듬어 이야기하며 봉서루의 중건을 축하했다. 안축은 ‘순흥봉서루 중영기’에서
“…옛날 이 고을을 설치할 때 수령이 정자를 오직 서쪽과 남쪽에 둔 것은 고을의 지형이 이래서였다.
서쪽 정자는 단지 서울로부터 남행하는 사람이 왕왕 길로 지나갈 뿐인데 남쪽 정자같으면 서쪽으로부터 와서 남행하는 자가 여기서 나가게 되고, 남쪽으로부터 와서 서울로 가는 자가 여기로 들어오게 되며, 남쪽 여러 고을의 특명을 받고 일을 감독하는 사람들이 다 여기로 들어오고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기를 통하여 돌아가게 된 까닭에 관원이나 사사로운 나그네를 교외에서 환영하거나 환송하는데 빈 날이 없다.
고을 사람들이 서쪽 정자를 경히 여기고 남쪽 정자를 중히 여긴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였다.…”
라며 순흥의 남정(南亭)과 서정(西亭)중에서 남정(南亭)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또
“…정자는 고을 남쪽 5·6리 쯤에 있는데 북으로 신령한 산을 바라보고, 남으로는 우거진 숲을 대하고, 동으로는 푸른 계곡물에 임하고, 서로는 평평한 들을 내려 누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고을의 누대의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 많다.
모두 산이 가까이 닥치고 깊숙히 떨어진 곳에 있어서 대개의 산은 높고 물은 맑다. 산이 가까이 닥쳐 있고 깊숙히 떨어진 것이란 비록 맑고 상쾌하며 그윽한 정취가 있지만 산을 본즉 한 층, 한 겹을 벗어 나지 않고, 물을 본즉 한 굽이 진 것에 불과하며, 두루 바라본 즉은 한 골 한 구렁을 넘지 않으니 이 것은 한 덩이 산과 한 구비 물일 뿐이다.
만일 앞으로 나아와 이 봉서루에 오르면 높게는 가히 만층 절정을 볼 수 있고, 멀리는 가히 천 겹 높은 봉우리를 바라 볼 수 있으며, 묘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많은 구렁이 둘러 있고, 구름의 변화와 안개가 오르는 것이 여러 모양이니 세상을 피하여 그 곳에 가 숨을 수가 없다.
또한 물을 보면 물의 흐름이 백 갈래 여울과 폭포가 산 아래서 합쳐서 빨리 내리치던 세력이 느려지고 시끄럽던 물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누각 밑에 이르러서는 물이 깊고 맑으며 흐름이 느려져 멀리 10리를 흐르고 여울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모래는 깨끗하고 작아서 사랑스러우니 여기에 산수의 위대함이 갖추어져 있다.
2월에 농사가 시작되면 남쪽 들로 가는 사람들은 누각 밑으로 길을 끼고 서쪽 들로 가는 사람들은 누각 밖으로 늘어서서 도랑을 쳐 물을 얻는데 삽을 메고 구름같이 많이 모이니 이 봉서루는 홀로 산수의 아름다움 뿐만이 아니라 심고 가꾸는 농사의 즐거움도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고을 사람으로 머리를 짜올린 때에 일찍이 이 누각에서 놀은 바가 있다.
처음 벼슬 길에 나선 이래로 늘 남쪽을 바라보며 이 누각을 못잊어 그리워했다.
작년 봄에 사관을 그만 두고 한가함을 얻어 모친을 뵈러 고향에 왔었는데 여러번 이 봉서루에 올랐었는데 보니 기울어 무너졌는데 고치지 않은지가 오래 됐었다…”
라며 봉서루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애틋한 심정을 나타냈다..
“…나는 서울로 이미 돌아왔고 채공은 이 고을에 도임하여 이 누각에 올라 과연 산수를 보고 즐거워 했고, 기울고 무너진 것을 보고서는 탄식했다.
이에 공인에게 명하여 다시 만들고 새롭게 하니 규모가 크고 아름다우며 고운 그림이 선명하여 보통의 영남 누각의 아름다움은 비교가 안되었고, 또 백성의 집 한 채를 복구하여 수비하는 가옥으로 삼아 장구한 계획이 되었으니 어찌 소홀하고 소박 간략한 것과 갑자기 이루어졌다 갑자기 무너지는 것들과 더불어 같은 날 말할 수 있으랴.
누각이 다 완성되어 공은 손이 이른다는 전갈을 들으면 즉시 의관을 갖추고 나아가 누각에서 맞이하였고, 산천의 악한 기운을 품은 안개로 피곤한 손님은 이 봉서루에 올라 산을 바라본 즉 놀이 걷히고 구름이 나는 시원한 생각이 들고, 물에 임한즉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 목욕하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공이 혹 농사 때를 당하여 관아에서 일찍 나와 이 누각에 올라 나날의 농사를 살피고, 이르고 빠른 것을 채근하고, 근면·태만을 꾸짖어서 상주고 벌하면 백성들이 다 스스로 깨달아 늦은 자는 부지런하게 되어 다투어 남보다 앞서려고 할 것이다.
이로부터 후에는 관에는 손님에 대한 예절로 책망받는 일이 없고 들에는 농사를 실수하는 일이 없게 되어 관리는 평안하고 세월은 풍년이 되니 다 공이 준 것이요, 이 누각의 공인 것이다.…”
직랑 채상이 흥주에 도임하여 봉서루에 올라 봉서루가 기울어지고 무너진 것을 보고 새롭게 만들었다. 근재 안축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순흥 출신이다.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아버지는 석(碩)이다. 고향 순흥의 죽계에서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유학자 층의 한 사람으로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 글을 잘 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 사헌규정(司憲糾正), 단양부주부를 지내고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 후 강원도 존무사로 파견되어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또한 전법판서(典法判書), 감찰대부(監察大夫),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 상주목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었다. 이 후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편년강목(編年綱目)’을 개찬하고 충렬, 충선, 충숙왕 3조의 실록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어 문명이 높았다.
순흥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근재집(謹齋集)”이 있다.
이별과 만남의 장소
봉서루는 순흥이라는 이름과 함께 수 백년을 동고동락했다. 수 백년 동안 순흥 사람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해 온 이웃이자 동료였다. 봉서루는 이별의 아쉬움과 만남의 기쁨이 눈물이 되던 곳이었다. 순흥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봉서루를 지나야했다. 영주 출신이었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도 이 곳 봉서루에서 영주 군수였던 하륜(河崙)을 이별하며 그 아쉬움을 2편의 시로 남겼다.
옥경으로 돌아가는 임 보내나니
구름 끝의 저 달을 임께 주노라
구름끝이 멀다고 말하지 마오
술 잔속에 곧장 비추나니
바라노니 임이여 이 잔을 마시오
내 마음이 달과 함께 조촐하다오
구름떼 날아들어 그늘이 지니
맑은 빛이 중도에 먹히고 마네
걸음을 같이하는 사람없으면
묻힌들 뉘라서 아깝다하리
이별에 다다르니 다시 값져라
달을 보며 행여 서로 생각하세
<순흥의 남정에서 하 대사성 윤을 보내다.>
(무오년 1373년 이 후에 영주, 제천 내왕 때 지음)
타향이라 송별을 나누는 곳은
장정이라 해 저물 무렵이로세
뜬 구름과 함께 멀어만지니
나그네는 어디로 향해가는지
말이 고되어 시도 짓기 어렵고
술떨어져 좌석을 자주 옮기네
추워지기 쉬운건 가을날이라
좋이가서 내마음을 위안해 주게
<순흥의 남정에서 하 대사성 윤을
송별하여 서울로 보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도 가끔 순흥을 찾아 이 곳 봉서루에 올라 휴식을 취하곤 했던 모양이다. 퇴계의 ‘봉서루’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필마로 봄 바람에 옛 성을 조상(弔喪)하니
성의 먼 못에 오직 야인(野人) 밭가는 것 보았노라
당일의 번화한 일 알고자해서
안후(근재, 안축)의 이별곡조 소리 들었네.
봉서루, 다시 옛 터에 우뚝 서다
봉서루는 처음에 고을 남쪽 5리(구, 순흥초등학교 터)쯤 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1934년 쯤 봉서루 곁에 있던 소학교(순흥초등 전신)가 불타면서 봉서루는 지금의 순흥면 사무소 마당으로 옮겨 지게 되었다. 그 곳으로 옮겨진 봉서루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벽을 막아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면서 지난 날 웅장한 루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봉서루는 전설에 의하면 순흥의 진산 비봉산에 사는 봉황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퇴해 진다하여 고을 남쪽에 누각을 지어 그것을 방지하고자 세웠다 한다. ‘봉서루’ 라는 현판은 누구의 글씨인지 알지 못하고 ‘흥주도호부아문’이라는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순흥 사람들은 누각의 앞쪽에‘봉서루’라는 현판을 걸어 봉황을 맞이하여 깃들게 하였다. 또한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영봉루(迎鳳樓)의 현판을 걸었다. 봉서루는 여말선초 흥주(興州, 순흥)의 남정(南亭)으로 한양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배웅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던 봉서루가 신축 면사무소가 건립된 후 옛 모습을 찾았으나 누각의 노후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지동리 옛 터)로 옮겨 짓게 되었다. 당초 길이가 2.95m이던 봉서루의 루하주(아랫부분)를 2.35m로 설계하는 바람에 누상주 2.60m보다 짧아 기형의 루가 되는 것을 염려한 순흥지역 주민들의 항의로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현재 공사를 마치고 옛 터전위에 우뚝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봉서루는 비봉산 봉황의 보금자리로 순흥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어 왔었다. 지금 봉서루가 들어선 주변에는 알봉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또한 봉황의 알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봉서루와 알봉
순흥의 진산(鎭山)은 봉황이 날으는 모습을 하고 있는 비봉산(飛鳳山)이다.
봉서루와 알봉(卵峰)에 대한 전설은 고려 중기 이전으로 생각된다.
어느 날 지리와 풍수에 능한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순흥 고을의 산천을 둘러보고 “지형으로 보아서는 매우 번성할 수 있는 고을인데, 비봉산 봉황은 날아가려 하고, 고을의 남쪽이 허술함이 흠이로군.”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순흥 사람들이 그 흠이란 것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을 나그네에게 물었다. 나그네는 “남쪽 5리 쯤에 누각(樓)을 세우고 둘레에 오동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고 그 가까이에 알 모양의 봉우리를 세군데 쯤 만들어 두면, 봉황이 날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고, 지형의 허술함도 메워지리니, 그렇게만 하면 이 고을에 운이 열려 큰 인물이 이어날 것이라.”고 일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은 그 말을 따라 남쪽 5리 지점(지금 지동리)에 누각을 세워 봉서루(鳳棲樓)라 이름하고 둘레에 많은 오동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으며, 누각 가까이에 흙을 둥그렇게 쌓아올려 세군데의 알봉을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봉황의 알인 것이다.
용·거북·기린과 함께 상서로운 새로 상징되는 봉황은 본래 오동이 아니면 깃들이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샘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알려져 오고 있으며 ‘봉황이 깃든다’는 뜻으로 누각의 이름을 봉서루(鳳棲樓)라 했다. 순흥 사람들은 봉황이 깃들도록 오동나무 숲을 가꾸고 봉황의 알까지 만들어 봉황이 다른 곳에 마음두지 않고 이곳 순흥에 안주(安住)하게 하였다.
봉서루는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으로 이 곳 순흥이 낳은 고려 후기의 명현(明賢) 근재(謹齋) 안축(安軸)이 그 중영기(重營記)를 지었으니, 창건년대는 그 보다 훨씬 이전일 것으로 추측된다.
봉서루를 짓고 나니 고려 후기에 들어 순흥에서는 역사에 빛을 남긴 우뚝우뚝한 인물들이 무리로 이어 났다.
봉서루 오동나무 숲이 있던 자리엔 1720년 초 이후로 허허벌판으로 변하여 다만 흙을 쌓아 만들었다는 알봉들만이 밭 사이에 옛 모습대로 남아 있을 뿐 오동나무 숲마저 간 곳 없고 부근 논두렁 군데군데에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옛 사연을 지니고 남아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신정일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 황금나친반, 2006
김태환 《부석사, 그리움은 풍경으로 흔들리고》 프롤로그 출판사, 2004
송지향 《영주영풍 향토지》여강출판사, 1987
순흥면 《순흥향토지》도서출판 서림, 1994
이중환 《택리지》 을유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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