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同譜 追加 登錄 翰林修撰公 之下 後孫 碑文 行狀 | |
| 世孫 | 碑文 및 行狀 |
| 6세 | 通議大夫翰林修撰公諱德修遺事(통의대부한림수찬공휘덕수유사) |
| 10세 | 通訓大夫長鬐縣監公諱善墓碣銘(통훈대부장기현감공휘선묘갈명) |
| 13세 | 承仕郎奉事公諱處貞遺事(승사랑봉사공휘처정유사) |
| 14세 | 宣敎朗主簿公諱繼範墓碣文(선교랑주부고우히계범묘갈문) |
| 15세 | 大廳堂怡齋公諱韡墓碣文(대청당이재공휘위묘갈문) |
| 慶州壬亂義士倡義 陳韡(경주임난의사창의 진위) | |
| 15세 | 朝散大夫公諱靭遺事(조산대부공휘인유사) |
| 16세 | 嘉善大夫工曹參判公諱景祿統合墓碑文(가선대부공조참판공휘경록통합묘비문) |
| 16세 | 折衝將軍諱景禧墓碣文(절충장군휘경희묘갈문) |
| 17세 | 軍資監正淸庵陳公諱奉扈墓碣文(군자감정청암진공휘봉호묘갈문) |
| 慶州壬亂義士倡義 陳奉扈(경주임난의사창의 진봉호) | |
통의대부한림수찬휘덕수유사(通議大夫翰林修撰諱德修遺事)
공(公)의 관성(貫姓)은 여양진씨(驪陽陳氏)이며 휘(諱)는 덕수(德修)이다. 시조(始祖)는 휘총후(諱寵厚)이며 고려(高麗) 상장군겸호분위대장군(上將軍兼虎賁衛大將軍)으로 인종(仁宗) 5년에 적신(賊臣) 이자겸(李資謙)을 토벌(討伐)한 공(功)으로 상장군겸신호위대장군(上將軍兼神虎衛大將軍)에 오르시고 여양군(驪陽君)으로 봉(封) 받으시어 본관(本貫)을 여양(驪陽)으로 하였기에 우리 진씨(陳氏)의 관성조(貫姓祖)가 되셨다. 세거지(世居地)는 충남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다.
이세조(二世祖)는 휘(諱)준(俊)으로 명종(明宗) 2년 병마사(兵馬使)에 오르시고 명종(明宗) 4년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승진하시고, 그해 12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승진하셨다. 용력(勇力)이 출중(出衆)하여 경계지난(庚癸之亂)에 문신(文臣)을 부호(扶護)한 공훈(功勳)이 많았다고『고려사』에 실려 있다.
공(公)께서 오자(五子)를 낳으시니 삼세(三世)이다. 명종조(明宗朝)에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 장자(長子) 휘(諱) 광순(光純)은 대장군(大將軍)이요 차자(次子) 휘 광수(光修)는 병부상서(兵部尙書)요 삼자(三子) 휘 광경(光卿)은 상장군(上將軍)이며 사자(四子) 휘 광의(光儀)는 대장군(大將軍)이고 오(五子) 휘 광현(光賢)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이다.
병부상서 휘 광수(光修)께서 삼자(三子)를 낳으시니 사세(四世)이다. 장자(長子) 휘(諱) 식(湜)은 명종 20년에 등문과(等文科)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내셨다. 공은 오문(吾門)의 상계(上系) 어사공파조(御史公派祖) 이다. 차남(次子) 이하(以下)는 불록(不錄)하고 어사(御史)께서 이자(二子)를 낳으시니 오세(五世)이다. 장자(長子)는 휘감(諱鑑)이며 고종조(高宗朝) 에 관직(官職)에 올라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셨다.
차자(次子)는 생략(省略)하고 상서(尙書)께서 삼자(三子)를 낳으시니 장자 휘 익평(翼平)과 삼자(三子) 휘 고처(高處) 이하는 불록(不祿)하고 차자(次子) 휘 익용(翼龍)은 오문(吾門)의 중계(中系) 입향조(入鄕祖)시며 시호(諡號)는 신광군(神光君)의 봉작(封爵)을 받으셨다. 신광군은 서기 1214년 고종 갑술에 출생(出生)하셔서 숭록대부평장사(崇祿大夫平章事)를 거쳐 정일품(正一品)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 門下侍中)으로 국사(國事)에 충성한 훈공(勳功)으로 신광군 봉작(封爵)과 식읍(食邑)으로 신광현 토성리를 하사받고 비학산 아래 진곡(陳谷)에 후손들이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배위(配位)는 귀부인(貴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며 신광군(神光君)의 장자(長子)는 휘 은희(殷希)며 경주부윤(慶州府尹)이다. 부윤(府尹) 후손(後孫)은 불록(不祿)하고 차자(次子)는 휘 덕수(德修)이며 관직(官職)은 통의대부(通議大夫) 한림수찬(翰林修撰)이다. 공(公)이 바로 경주(慶州), 포항(浦項)에 세거(世居)하는 현감공 후손(後孫)들의 직계(直系) 분파조(分派祖) 이시다. 공(公)의 장자(長子)는 휘 을희(乙熙)며 흥해군수(興海郡守)를 지내셨다.
군수공(郡守公)의 장자(長子) 휘 원기(元起)는 예조참판(禮曹參判)이며 참판공의 장자(長子) 휘 선(善)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장기현감((長鬐縣監)을 지내셨다. 재임 시 흉년(凶年) 기아(饑餓)에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자 사재(私財)를 출연(出捐) 백성(百姓)을 구휼(救恤)한 공덕(功德)으로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칭송(稱誦)하였다고 동경지(東京誌)에 실려 있다.
현감(縣監)께서 사자(四子)을 낳으시니 장자(長子)는 휘 의(義)며 초휘(初諱)는 추(樞)다. 관직(官職)은 봉직랑(奉直郎)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자헌대부(資憲大夫)며 대부께서 아들 넷을 낳으시니 장자(長子)는 휘 귀량(貴良)이며 문과감찰(文科監察)을 역임하시고, 차자(次子)는 휘 치중(致中)이고 부호군(副護軍)이다. 삼자(三子)는 휘 귀지(貴知)이고 사자(四子)는 휘 용중(用中)이다. 감찰공(監察公)의 장자는 휘 처정(處貞)이며 자는 여윤(餘閏)이고 승사랑봉사(承仕郎奉事)며 장자는 휘 계범(繼範)이고 자(子)는 휘 위(韡)로 통사랑(通仕郎) 훈도(訓導)로 명종조에 대청당(大廳堂)을 하사(下賜)받으셨다. 공은 유림(儒林)의 추천으로 옥산서원(玉山書院) 창건을 주도하신 후 초대원장(初代院長)을 역임하셨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시 구국(救國)을 위해 창의(倡義)에 기꺼이 참군(參軍)하셨다. 이하는 번성(樊城)하여 적지 아니한다.
오호(嗚呼)라 연대(年代)가 이미 유구(悠久)하고 문헌(文獻)이 또 산락(散落)하고 사적(事蹟)의 상세(詳細)함을 알 수 없으니 자못 유감(遺憾)이다. 그렇지만 선세(先世)의 공훈(功勳)이 역사(歷史)에 빛나며 고려(高麗) 및 조선조(朝鮮朝) 상하 600년간 선조(先祖)의 많은 훈업(勳業)과 문장절행(文章節行)으로 국사와 야승(野乘)에 명공과 석덕(碩德)이 끊임이 없었으니 어찌 동국(東國)의 화벌(華閥)이 아니리요.
공의 산소(山所)는 세월이 유구(悠久)하여 실전(失傳)하였다. 이에 후손(後孫)들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어 백방(百方)으로 심묘(尋墓)를 위해 수소문(搜所聞) 하였으나 찾을 길이 요원(遼遠)하여 조상님께 죄송(罪悚)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이에 진씨(陳氏) 세보(世譜)와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과 동국통감(東國通鑑) 및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 등 고서(古書)를 열람(閱覽) 상세(詳細)하게 살펴서 그 대강(大綱)을 적어 후대(後代)에 公의 행장(行狀)을 영원(永遠)히 보이는 바이다.
2002년 11월 30일
상기 通議大夫(諱德修)公은 중계 神光君 次子로서 어사, 신광군, 下系 縣監公(諱善)派 경주, 포항 후손들의 入鄕祖입니다. 산소는 아쉽게도 失墓하였지만, 이번 대동보에 行狀을 넣어 후손들에게 뿌리 교육 삼아 입향조를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려 하오니 존경하는 위원장님과 위원님들께서 살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長鬐縣監諱善墓碣文
繁我驪陽陳氏之奠于東州殆近千年余自少日習聞玉院往錄家門宿契常力誦不怠日燦規甫與容淏原燦兩君貴其譜冊及家藏舊錄訪余于月城寓舍日將堅表碣于十九代先墓願乞銘焉義不敢辭謹案公諱善姓陳氏高麗朝初虎賁衛大將軍驪陽君諱寵厚爲鼻祖五傳至諱翼龍大匡輔國壁上三重大匡神光君子孫仍貫而神光之屬於慶州久矣故或貫慶州多焉公高祖也曾祖諱德修通議大夫翰林修撰祖諱乙熙正順大夫興海郡守高諱元起正議大夫禮曹參判公生卒年並逸而只書通訓大夫行長鬐縣監直歲飢多活縣民民立石颂德政淸如水望重如山墓旺信里山舍羅冠谷嶝卯坐配淑人 氏墓祔後生三男長曰義初諱樞奉直郞漢城判官資憲大夫三重都摠次曰敬祿事次曰安義男貴良致中副護軍貴知用貴良男處貞致中男士元叅奉貴知男處錫處貞男繼範宣敎郎主簿士元男璋叅奉處錫男繼唐繼範男諱韡通仕郞訓導 明宗朝賜號大廳堂有儒行玉山書院倉建時道薦山長次曰靭朝散大夫奉事宣務郎主簿叅奉璋男德純男承仕郞繼唐男洪範次曰復韡男景錄贈嘉善大夫工曹叅判次曰靭男景祚德純男百年通訓大夫行蔚珍縣監洪範男復男某餘不錄嗚呼公生於勳業積慶之門其聲光寬績多有可觀者而世德悠久文獻蕩泆泯泯然無所考徵源遠則流或微矣其於顯晦隆替之自不禁慨然興感敢困副孫之諸綴拾序次如石最其迹爲之銘曰世德有自上系神光縣君遺澤不斬下述大廳堂孫八字芳詞尙記蓬州治山三尺崇阜猶在舍羅山迷宅刻此貞珉昭示來昆
檀紀 四二九六年 十月 日
驪江 李錫敎 撰
승사랑봉사공휘처정유사(承仕郎奉事公諱處貞遺事)
공(公)의 관성(貫姓)은 여양진씨(驪陽陳氏)이고 휘는 처정(處貞)이며 자(字)는 여윤(餘閏)이다. 공의 시조(始祖)는 휘총후(諱寵厚) 이시며 고려 인종 5년에 적신(賊臣) 이자겸(李資謙)을 토벌(討伐)한 공덕(功德)으로 여양군(驪陽君)을 봉작(封爵) 받아 본관(本貫)을 여양(驪陽)으로 하니 우리 진씨(陳氏)의 득성조(得姓祖)가 되셨다. 세거지는 지금의 충남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다.
이세조(二世祖) 휘준(諱俊) 공은 명종(明宗) 2년에 병마사(兵馬使)에 오르시고 동년 4월에 추밀원사(樞密院使)로 또 그해 12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승진하셨다. 용력(勇力)이 출중하여 정중부난(鄭仲夫亂)에 문신(文臣)을 부호(扶護)한 공훈(功勳)이 많았다고 『고려사』에 실려 있다.
판병부사께서 五子를 낳으시니 3세이다. 명종조에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 長子 휘 광순(光純)은 대장군이요 次子 휘 광수(光修)는 병부상서요 三子 휘 광경(光卿)은 상장군이며 四子 휘 광의(光儀)는 대장군이고 五子 휘 광현(光賢)은 추밀원부사다. 상서께서 三子를 낳으시니 4세이다. 장자 휘 식(湜)은 명종조에 벼슬하여 한림학사 어사대부 서경유수요 또 명종 15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그해 상서성복야(尙書省僕射)에 올라 문명을 떨쳤으며 오문(吾門)의 상계 어사공파조(御史公派祖)이시다.
차자(次子) 휘는 온(溫)이며 강종조(康宗朝)에 등제(登第) 한림학사 예빈경이며, 三子 휘 화(澕)는 고려 신종조에 직한림원우사간(直翰林院右司諫)에 오르셨다. 3형제 모두 벼슬하여 문명이 높았다.
어사(御史)께서 二子를 낳으시니 5세이다. 장자 휘는 감(鑑)이며 고종조에 등제(登第) 호부상서 중원사신을 역임하셨다. 차자는 생략하고 호부상서께서 三子를 낳으셨다. 장자의 휘는 익평(翼平)과 三子 휘 고처(高處)는 적지 아니하고 차자는 휘 익용(翼龍)이시며 오문(吾門)의 중계 입향조(入鄕祖)이시며 시호(詩號)는 신광군(神光君)에 봉(封)해졌다.
신광군은 서기 1214년 고종 갑술에 출생(出生)하셔서 숭록대부평장사를 거쳐 정1품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에 오른 훈공(勳功)으로 신광군의 봉작과 식읍(食邑)으로 경주부 신광현 토성리를 하사(下賜)받고 비학산 아래 진곡에 후손들이 세거(世居)하였다.
배위(配位)는 귀부인(貴夫人) 밀양박씨이며 신광군의 장자는 휘(諱) 은희(殷希)며 관직은 경주부윤이다. 부윤공(府尹公) 이하 후손은 적지 않고 차자는 휘 덕수(德修)로 통의대부 한림수찬(翰林修撰)을 역임하셨다.
공이 바로 오문(吾門)의 실질적 직계 파조(派祖)가 되신다. 공의 장남은 휘 을희(乙熙)며 가선대부 흥해군수다. 군수의 장자 휘 원기(元起)는 정의대부 예조참판이며 참판의 장자 휘 선(善)은 통훈대부 장기현에 현감(縣監)으로 재임 중에 흉년(凶年) 기아(饑餓)에 사재(私財)를 출연(出捐) 백성을 구휼(救恤)한 공덕으로 민의로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고 동경지에 실려 있다.
현감께서 三子를 낳으시니 長子 휘(諱) 의(義)는 봉직랑(奉直郎)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이며 次子는 휘 경(敬)이며 三子는 휘 안(安)이다. 판관(判官)께서 四子를 낳으시니 장자는 휘 귀량(貴良)이며 문과(文科) 감찰(監察)이다. 차자(次子)는 휘 치중(致中)이요 삼자(三子)는 휘 귀지(貴知)며 사자(四子)는 휘 용중(用中)이다. 차자부터 번성(繁盛)하여 다 기록(記錄)하지 않으며 감찰공(監察公)의 장자(長子) 휘 처정(處貞)은 바로 시조공의 13세손이며 字가 여윤(餘閏)이며 승사랑봉사(承仕郎奉事)이다.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영양최씨(永陽崔氏)이며 장인(丈人)은 진사(進士) 휘 구주(九疇)이다. 공(公)의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고 졸(卒)은 을유(乙酉) 10월 15일이다. 묘(墓)는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진전산(陳田山) 미곡(未谷) 중혈(中穴) 간좌(艮坐)에 배위(配位)와 합폄(合窆)하였다. 공의 장자 휘 계범(繼範)은 자(字)가 공서(公敍)이고 관직은 선교랑(宣敎郎)이며 二子을 낳으셨다. 장자는 휘가 위(韡)며 자는 자화(子華)이고 호는 이재(怡齋)다. 명종조에 대청당(大廳堂)의 사호(賜號)를 받으셨다. 공은 통사랑 훈도(通仕郎 訓導)로서, 후학(後學) 교육에 진력(盡力)하셨으며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옥산서원(玉山書院) 초대(初代) 원장(院長)을 역임하시고 임진왜란 시 경주지방 창의(倡義)에 동참하셨다.
공은 선친이 돌아가시자 3년 시묘(侍墓)하신 효자(孝子)로 명성(名聲)이 자자하여 동경지에 실려 있다. 차남의 휘는 인(靷)이며 조산대부(朝散大夫)이다. 이재공이 3남 2녀를 낳으시니 장자는 무후(无后)요 차자의 휘는 경록(景祿)이며 자(字)는 신중(新仲)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이다.
차자의 휘는 경희(景禧)며 절충장군(折衝將軍)이다. 이하는 번성(繁盛)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년대(年代)가 이미 오래되어 문헌(文獻)이 없어지고 사적(事蹟)의 상세함을 알 수 없으니 자못 유감이다.
그나마 남아 전하는 조상(祖上)의 공훈(功勳)이 역사에 길이 남으니 고려 및 조선조 상하 양조(兩朝)의 훈업(勳業)과 특히 선조의 문장절행(文章節行)으로 대(代)를 이어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음덕(蔭德)이 끊임이 없으니 어찌 동국(東國)의 화벌(華閥)이 아니리요
이에 우리 진씨의 가보와 만성대동보 고려사 열전과 동국통감 및 동국명현록 한국지리연혁고 등 역사서를 서로 비교하며 상세하게 살펴서 그 대강을 적어 후대에 영원히 보이는 바이다.
. 2010년 10월 30일
後孫 乃華 삼가 기록함.
宣敎朗主簿諱繼範墓碣文
公諱繼範字公敍驪陽(神光)人其上祖諱寵厚高麗睿宗朝爲上將軍兼神虎衛大將軍討賊臣李資謙以功封驪陽君自後名公巨卿連世磊落二傳諱俊知樞密院事參知政事金紫光祿大夫判兵部事是生諱光修兵部尙書見麗史是生諱湜翰林學士僕射御史大夫西京留守銀靑光祿大夫是生諱鑑文科戶部尙書中原使臣往來時著作詩興文多載輿地勝覽時生諱翼龍門下平章事崇祿大夫門下侍中壁上三重大匡封神光君子孫仍焉是生諱德修通議大夫翰林修撰是生諱乙熙正順大夫行興海郡守禮曹參判是生諱元起正議大夫行禮曹參判是生諱善通訓大夫行長鬐縣監偕歲飢多活縣民民立石碑訟德政淸如水公四世祖也曾祖諱義初諱樞漢城判官祖諱貴良文科監察考諱處貞承仕郞奉事習文編儒籍妣永陽崔氏進士諱九疇之女以檀紀三八三二年燕山君五年己未九月二十二日生公稟氣沈厚處心醇直居家和順處鄕恭遜里閭人以長老待之公聚同貫人進士李禮元之生二男一女長幼學韡專力學文屢中觴詳試生三男二女長士仁餘皆幼次靭宣敎郞典溳司參奉生二男三女皆幼女適幼學李應百生三男二女皆幼檀紀三八八八年明宗十年乙卯閏十一月十五日公以病辭世葬于慶州市江東面旺信里齋宮山卯坐 兌向之原銘 處家誾誾 持心平平 雖無官爵 德則莫愆 有子有孫 勿替永傳
檀紀三八九二年己未明宗十四年二月三十日
通訓大夫前金山郡守 金世良 撰
大廳堂怡齋公諱韡墓碣文
公姓陳氏諱韡字子華號怡齋驪陽(神光)人其上祖諱寵厚高麗睿宗朝爲上將軍兼神虎衛大將軍討賊臣李資謙以功封驪陽君自後名公巨卿連世磊落二傳諱俊樞密院事參知政事是生諱光修兵部尙書見麗史是生諱湜翰林學士僕射御史大夫西京留守是生諱鑑文科戶部尙書中原使臣往來時著作詩興文多載輿地勝覽是生諱翼龍平章事崇祿大夫門下侍中壁上三重大匡封神光君子孫仍焉是生諱德修通議大夫翰林修撰三傳而諱善通訓大夫行長耆縣監偕歲飢多活縣民民立碑訟德公五世祖也高祖諱義初諱樞漢城判官資憲大夫三重都摠曾祖諱貴良文科監察祖諱處貞承仕郞奉事考諱繼範宣敎郞主簿妣令人永川李氏進士禮元女 中宗乙亥生公于吾琴里第自幼天資有異課不須督而造詣夙成性至孝事二親備盡志體是之養及遭故廬墓泣三年如一日制闋每晨起謁墓月朔必省不以風雨而或怠人以爲難公早業公車累中鄕解竟屈於禮圍於是念絶外求卷藏林泉佔畢經吏乎不釋卷暖而逍遙於烟霞水石之間怡然自樂因以怡齋署號遠近諸生聞風琴集隨材施敎亹亹不倦學子或有高談性命之理輒呵止之而論之以孝悌之方見人有不義處必正言規之故人莫敢不服焉明宗朝賜號大廳堂除通仕郞訓導宣祖朝壬申玉山書院創建時薦公爲山長當日望重儒林從可知也丁丑三月二十二日考終于寢葬旺信山齋宮于後麓癸坐原配宜人慶州金氏父忠順衛光美女生辛未卒壬申四月二十日墓公窆生三男二女男長景福無後次景祿嘉善大夫景禧折衝將軍女適李君玉僉知次女李時春官通仕郞習讀景祿男汶折衝將軍行護軍景禧男沃將仕郞宣川訓導奉扈軍資監正餘不殫錄今以門老命齎家壯而請墓銘者其十五世曺孫載潤也銘曰家而者著仁可徽也鄕而望重德可稱也惟石有語永可憑也
月城 崔炳玟 謹撰
月城 孫璋鎬 謹書.
경주임난의사창의 진위(慶州壬亂義士倡義 陳韡)
공의 자는 자화(子華)요 호(號)는 이재(怡齋)이며 본관(本貫)은 여양(驪陽)이니 고려 문하시중 벽상삼한 삼중대광 신광군 익룡(翼龍)의 후손이다. 장기현감(善)의 5대손이며 선교랑 검사장주부(宣敎郎檢事掌主簿) 계범(繼範)의 아들로 중종(中宗 10) 1515년 지금의 경주시 강동면 오금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적부터 학문(學文)을 좋아하고 도덕(道德)과 윤리(倫理)를 중히 여겨 향인(鄕人)들로부터 덕망(德望)이 높았으며 친상(親喪)을 당하여 시묘(侍墓) 3년의 효성(孝誠)을 다하였다.
선조(宣祖 5) 1572년 공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국토(國土)가 유린(蹂躪)되고 민생(民生)이 무참히 짓밟히는데 분기(奮起)하여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가동(家童)과 동네 장정들을 모아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동년(同年) 9월 안강(安康), 홍천(洪川) 전투에 나가서는 손로(孫魯), 이홍의(李弘懿), 남중각(南仲珏), 이문익(李文翼) 등 여러 의사(義士)와 함께 분전(奮戰)하였다. 공(公)은 몰려오는 적군(敵軍)을 맞아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결사항쟁(決死抗爭)으로 대결하니 적은 의병군(義兵軍)의 기개에 눌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렇게 하여 공은 초기 경주 방어에 전공(戰功)을 세웠다.
참고문헌 동경지, 경주읍지, 경주임난항쟁사 경주임난의사창의록20쪽
參考文獻 東京誌, 慶州邑誌, 慶州壬亂抗爭史 慶州壬亂義士倡義錄二十
조산대부공휘인유사(朝散大夫公諱靭遺事)
공(公)의 관성(貫姓)은 여양진씨(驪陽陳氏)며 휘(諱)는 인(韌)이며 시조공(始祖公)은 휘 총후(寵厚) 이시며 고려상장군겸호분위대장군(高麗上將軍兼虎賁衛大將軍)으로 고려(高麗) 인종(仁宗) 5년 적신이자겸(賊臣李資謙)을 토벌(討伐)한 공(功)으로 상장군겸신호위대장군(上將軍兼神虎衛大將軍)에 오르시고 여양군(驪陽君)으로 봉(封) 받으시니 본관(本貫)을 여양(驪陽)으로 하니 여양진씨(驪陽陳氏) 관조(貫祖)가 되셨다. 정착지는 지금의 충남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다.
이세조(二世祖)는 휘준(諱俊)이며 명종(明宗) 2년에 병마사(兵馬使)에 오르시고 명종 4년 추밀원사(樞密院使) 동년(同年) 12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진급하셨다. 용력(勇力)이 출중(出衆)하여 정중부란(鄭仲夫亂)에 문신(文臣)을 부호(扶護)한 공(功)이 많았다고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오자(五子)를 낳으시니 삼세(三世)이다. 명종조(明宗朝)에 모두 등제(登第) 하셨으며 장자(長子) 휘광순(諱光順)은 대장군(大將軍)이요, 차자(次子) 휘광수(諱光修)는 병부상서(兵部尙書)요 삼자(三子) 휘광경(諱光卿)은 상장군(上將軍)이며, 사자(四子) 휘광의(諱光儀)는 대장군(大將軍)이요, 오자(五子) 휘광현(諱光賢)은 관직(官職)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이시다.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이 삼자(三子)를 낳으시니 사세(四世)이다. 장남(長男) 휘식(諱湜)은 고려(高麗) 고종조(高宗朝)에 등과(登科)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역임하셨다. 공이 오문(吾門)의 상계(上系) 어사공(御史公) 파조(派祖)가 되신다.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의 차남(次男) 휘온(諱溫)은 강종조(康宗朝)에 등과(登科)하셔서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빈경(禮賓卿)이며, 삼남(三男) 휘화(諱澕)는 신종조(神宗朝)에 벼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옥당선임지제고(玉堂選任知制誥) 및 정언보궐(正言補闕)과 우사간(右司諫)을 역임하셨다. 삼형제(三兄弟) 다 벼슬하여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어사공(御史公)이 이자(二子)를 낳으시니 오세(五世)이다. 장남(長男) 휘감(諱鑑)은 고종조(高宗朝)에 등과(登科) 관직(官職)이 호부상서(戶部尙書) 중원사신(中原使臣) 이시다.
차남(次男)은 불록(不錄)하고, 호부상서(戶部尙書)께서 아들 셋을 낳으시니, 장남(長男) 휘익평(諱翼平)과 삼남(三男) 휘고처(諱高處) 후손은 불록(不錄)하고, 차남(次男)은 휘익룡(諱翼龍)이며, 오문(吾門)의 중계(中系) 파조(派祖)로 시호(諡號)는 신광군(神光君)이다. 삼자(三子)는 번성(繁盛)하여 적지 아니한다.
신광군(神光君)은 서기 1214년 고종(高宗) 갑술(甲戌)에 태어나셔서 숭록대부(崇祿大夫) 평장사(平章事)와 정일품(正一品)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국사(國事)에 이바지한 훈공(勳功)으로 신광군(神光君)에 봉(封) 받으시어 신광현(神光縣) 비학산하(飛鶴山下) 토성리(土城里) 진곡(陳谷)에 세거(世居)하셨다. 지금의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다. 배위(配位)는 귀부인(貴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이며 신광군(神光君)의 장남(長男) 휘은희(諱殷希) 공은 경주부윤(慶州府尹)이며, 차남(次男)은 휘덕수(諱德修)이며 관직은 통의대부(通議大夫) 한림원(翰林院) 수찬(修撰)을 역임하셨다. 수찬공의 아드님 휘을희(諱乙熙)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흥해군수(興海郡守)요. 군수(郡守)의 아드님 휘원기(諱元起)는 정의대부(正義大夫) 행예조참판(行禮曹參判)이시며, 예조참판(禮曹參判) 아드님 휘선(諱善)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장기현감(長鬐縣監)이시다. 현감공(縣監公)이 삼자(三子)를 낳으시니 장남(長男)은 휘의(諱義)며 벼슬은 봉직랑(奉直郎)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이며, 차자(次子) 이하는 번성(繁盛)해서 다 적지 아니한다.
판관(判官)의 아드님 휘귀량(諱貴良)은 문과감찰(文科監察)이며 감찰공(監察公)의 아드님은 휘처정(諱處貞)이며 승사랑(承仕郞)이다. 공의 아드님 휘계범(諱繼範)은 선교랑(宣敎郎)이며 배위(配位)는 영인(令人) 영천이씨(永川李氏)며 예원진사(禮元進士)의 따님이다. 주부공(主簿公)이 이남일녀(二男一女)를 낳으시니 장남(長男)은 휘위(諱韡)이시며 자(字)는 자화(子華)이고 호(號)는 이재(怡齋)다. 공(公)은 훈도(訓導)이며 옥산서원(玉山書院) 초대원장(初代院長)에 추천(推薦)되어 시향(始享)에 수임(首任)을 맡으셨으며 임난시(壬亂時) 군자감정(軍資監正)인 손자(孫子) 휘봉호(諱奉扈) 공과 함께 창의(倡義)하셨다.
주부공(主簿公)의 차남(次男)이 바로 공이며 대청당의 아우로 휘(諱)가 인(韌)이며 관작(官爵)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선무랑(宣務郎)이다. 배위(配位)는 영천이씨(永川李氏) 휘달원(諱達元)의 따님이시며 묘(墓)는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선영(先塋) 계하(階下)에 합폄(合窆)하였다.
공(公)의 매부(妹夫)는 옥구인(沃溝人) 이응백(李應白)이며 생질(甥姪)은 모두 셋을 두었는데 삼남(三男) 휘희룡(諱希龍)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여 의주(義州)로 몽진(蒙塵)가다, 왕명(王命)으로 영남지방을 순찰(巡察) 중도(中途)에서 왜적(倭賊)을 만나 소수(少數)의 병력(兵力)만으로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왜적(倭賊)과 용감(勇敢)하게 싸우다 전사(戰死)하여 충신(忠臣)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며 증직(贈職)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제수 되었으며 훌륭한 외손(外孫) 이다.
공(公)은 이남삼녀(二男三女) 두셨으며, 장남(長男) 휘경조(諱景祚)는 호(號)가 회은(晦隱)이며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이다. 차남(次男)은 휘(諱) 경지(景祉)다. 부사공의 장남 휘 수억(壽億)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시며 이하(以下)는 불록(不錄)하고, 公의 십오세손(十五世孫) 수도경비사령관(首都警備司令官), 보안사령관(保安司令官), 이군사령관(二軍司令官)을 역임하고 육군대장(陸軍大將)으로 예편(豫編)하여 대종회(大宗會) 회장(會長)을 역임(歷任)한 종채(鍾埰) 장군(將軍)이다.
오호(嗚呼)라! 연대(年代)가 이미 오래되어 문헌(文獻)이 대부분 산락(散落)하여 유사(遺事)의 상세함(詳細함)을 알 수가 없으므로 유감(遺憾)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경주(慶州) 향안(鄕案) 첫머리에 아조(我祖) 휘(諱)가 대대로 등재(登載)되어 있는 관계로 오늘날에 와서도 경주(慶州) 유림(儒林)에서는 우리 조상(祖上)의 명성(名聲)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고려(高麗)에 이어 조선(朝鮮)에 와서까지 약 900년간 우리 진씨(陳氏)의 명성(名聲)이 경주 향당(鄕黨)에 자자(藉藉)하다.
우리 여양진문(驪陽陳門)의 후손(後孫)들은 훌륭하신 조상(祖上)의 혜복(惠福)을 받아 대대(代代)로 잠영(簪纓)이 끊이지 않으리라 기대하면서 후손(後孫)들에게 길이 전(傳)하고자 신광군파보(神光君派譜)와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과 고려사(高麗史) 제19권 동국통감(東國通鑑) 및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를 참고(參考)하여 유사(遺事)를 적어 우리 진가(陳哥)뿐만 아니라 유림사회(儒林社會)에 청람(淸覽)을 바라고자 한다.
2010년 9월 20일
失墓 大宗會 會長 歷任 諱鍾埰 陸軍大將 入鄕祖
驪陽陳氏參判公派諱景祿統合墓碑文
경주(慶州) 북쪽에 형산(兄山)과 나란히 힘차게 솟은 진전산(陳田山)이 있고 그 아래 왕신리(旺信里)에 여양진씨(驪陽陳氏)가 모여 산다. 진씨는 고려(高麗) 시대부터 이곳에 세거(世居)한 향당(鄕黨)의 망족(望族)이다. 시조휘총후(始祖諱寵厚)는 예종(睿宗) 때 상장군(上將軍)에 올랐고 여양군(驪陽君)에 봉함으로서 관성(貫姓)이 되었다. 아들 휘준(諱俊)은 명종(明宗)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이르렀다. 이전(二傳)하여 휘식(諱湜)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봉직하다 고종조(高宗朝)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랐다. 공(公)이 어사공파조(御史公派祖)이다. 삼전(三傳)하여 휘익용(諱翼龍)은 마침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승진 신광군(神光君)에 봉(封) 받음으로써 중계파조(中系派祖)가 되었다. 아들 휘덕수(諱德修)는 통의대부(通議大夫) 한림수찬(翰林修撰)을 지냈고 사전(四傳)하여 휘선(諱善)이 강동(江東) 오금리(吾琴里)에 입향(入鄕)하였다. 장기현(長䰇縣)에 현감(縣監)으로 재직 시 기근(飢饉)으로 신음(呻吟)하는 백성을 구휼(救恤)하여 선정(善政)의 표상(表象)이 되자 주민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이로써 잠영(簪纓)이 찬연(燦然)히 이어져 모두 나타낼 수 없다. 오전(五傳)하여 휘 위(鞾)의 자(字)는 자화(子華)이고 호(號)는 이재(怡齋)다. 품성(稟性)이 온후(溫厚)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훈도(訓導)와 통사랑(通仕郞)을 역임하였다. 특히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친상(親喪)에 삼년간(三年間) 려묘(廬墓)하였고 향도(鄕道) 유림의 천망(薦望)으로 초대(初代) 옥산서원 원장(院長)을 지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시 왜병(倭兵)이 경주부를 침략하자 문천회맹(蚊川會盟)에 가입 창의(倡義)하였다. 명종(明宗)이 그의 행의(行誼)를 듣고 대청당(大廳堂)이란 당호(堂號)를 하사하였다. 아들 휘 경록(景祿)은 중종(中宗) 갑진(甲辰)에 태어났고 증공조참판(贈工曹參判)이 되었다. 아들 휘 문(汶)을 낳으니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사직(行龍驤衛副司直)을 지냈다. 아들 휘 유형(有亨)을 두니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증직(贈職) 되었고 그의 아들 휘 성준(聖準)은 역시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이다. 아들 휘 홍(宖)을 낳으니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部副摠官)에 증직되었다. 그의 아들 휘 익한(翊漢)은 숙종조(肅宗朝) 무진(戊辰)에 태어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부사공의 사위는 이순중(李純中)이고 외손(外孫)은 안계참판(安溪參判)으로 이름이 높은 이헌묵(李憲默)이다. 아들 휘 석범(錫範)을 두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증직(贈職)되었고 그의 아들 휘 정덕(鼎德) 또한 증예조참판(贈禮曹參判)이다. 아들 휘 동진(東軫)을 낳으시니 증참의(贈參議)이고 그의 아들은 휘 희택(羲宅)으로 아들 휘 원락(元洛)을 두었고 그의 아들 휘 병철(秉喆)은 호가 루벽(樓碧)이다. 아들 휘 용주(容柱)를 낳으니 호는 소죽(小竹)이다. 아들 삼형제(三兄弟)를 낳으니 큰아들 휘는 찬규(燦規)이고 호는 만오(晩悟)이다. 차자는 윤찬(允燦)이고 삼자(三子)는 영찬(英燦)이며 사위는 정연무(鄭淵茂)와 권영택(權寧澤)이다. 만오공의 큰아들은 재윤(載潤)이고 둘째 아들은 재길(載吉)이며 사위는 장창섭(蔣昶燮) 임양식(任良植) 손붕익(孫鵬翼) 박상걸(朴相杰) 김명기(金明基)다. 재윤의 아들 현창(鉉昌)은 물리학박사(物理學博士)이고 손자 재홍(材洪)은 어리다. 재윤은 수찬공(修撰公) 이래 23대 주손(冑孫) 이며 근래 대청당(大廳堂)을 건립하고 참판공(參判公) 이후의 통합묘단(統合墓壇)을 조성(造成)하였다. 그리고 대동보(大同譜) 고려사(高麗史) 동경잡기(東京雜記) 등 여러 사료를 열람하여 가장(家狀)을 정리하고 나를 찾아와 단비문(壇碑文)을 청하였다. 그는 나의 외우(畏友)로서 교의(交誼)가 깊고 또한 각종 향회에 활동(活動) 한지가 오래다. 아, 세월(歲月)은 거제(居諸)하고 세사(世事)는 덧없이 변하지만, 어찌 본원(本源)을 잊을 수 있으랴. 지엽(枝葉)이 무성하여도 뿌리가 근본이고 세류(細流)가 나뉘어져도 근원(根源)은 하나다. 뿌리가 없는 가지가 없고 근원이 없는 물 흐름은 없다. 후손들이 이를 보면 숭조(崇祖)와 효제(孝悌)하는 마음이 유연(油然)히 일어날 것이다.
咸安 趙喆濟 삼가 짓다
胄孫 載潤 삼가 쓰다
上記 碑文은 修撰公(諱德修) 24세 縣監公(諱善) 20세 宗孫(載潤)의 宗家系를 이어온 宗子의 世系이니 참고해 주세요.
折衝將軍諱景禧墓碣文
折衝將軍驪陽陳公之歿三百有餘年其十一世孫秉昌與其族人容淏來余而淸顯刻之文曰吾家之零替不振歷世己久兼又累經鬱攸箱簏盡灰先世之事行與文蹟漠然若杞宋無淂而而尋逐其影響子孫之慟恨當何如哉願乞一言闡揚迷潜余作而歎曰噫祖先之有媺不傳爲不仁無媺而誇張之亦非所而爲祖也如余之病廢蕪拙何足以當是寄哉請更圖之再三固請其辭益恳感其極力營辨之誠孝乃按其譜公諱景禧字益新以主簿老陞折衝將軍壁上三重大匡諱翼龍之後生諱善通訓大夫行長鬐縣監生諱義資憲大夫三重都摠於公爲五代祖高祖諱貴良文科監察曾祖諱處貞承仕郞奉事祖諱繼範宣敎郎主簿考諱韡通仕郎訓導號怡齋 明宗朝賜號大廳堂以文學行誼玉山書院創建時士林推薦爲山長妣宜人慶州金氏忠順衛善美女公生於樂有之庭長於大賢之鄕則孝友敦睦之行忠信謹厚之德應有擩染薰襲而以士林代表與淸虛齋孫曄朴勳往祭于龜岩李先生楨則可想其當日鄕者之望而文獻無微者是爲可慨處耳生年未詳以卒于萬歷二十五年丁酉七月十三日墓江東面旺信里齋宮山方於嶝卯座配令人昌寜成氏父益壽習讀女墓祔同嶝右便上卯坐生二男一女男長沃次奉扈女蔣惟寬沃子克亨次敏亨奉扈子遇亨道亨運亨克亨子聖胤敏亨子聖任聖封聖和遇亨子聖采聖猷聖獻聖楷道亨子聖俊運亨子聖疇聖大餘不祿係之以銘曰生諱禮庭長大賢鄕生於是庭長于是鄕耳濡目樂無非孝忠旣孝旣忠餘可稚想代表士林望重鄕省事行泯滅雉逐影響顯晦有時今始闡揚睠彼旺信水麗山明有屹斧堂體魄攸藏刻此貞珉垂示無彊
檀紀四三一四年 辛酉十月 日
驪江李錫晉謹撰
月城孫璋鎬謹書
軍資監正淸庵公諱奉扈墓碣文
驪陽陳俊廈長廈甫曰吾先祖淸庵公墓所本在興海郡牛口旨子坐之原配位合窆舊有碣而歷年已久刻字風磨而洗苔沒不能知見故子孫齎恨去丙寅歲改碣今不卒封塋山麓盡入於浦項製鐵工業團地中故不覆已移葬于耳谷洞西釜甲坐之原以沿革事欲爲文刻碣陰願惠之否余耄辭而請益勸奬基誠孝謹案來狀公諱奉扈字胤甫號淸庵姓陳氏貫驪陽位軍資監正高麗睿宗朝有諱寵厚始祖也位虎賁衛上將軍仁宗五年討賊臣李資謙以功爲神虎衛大將軍封驪陽君二世諱俊明宗二年壬辰正月爲兵馬使四年甲午十一月拜樞密院使十二月進參知政事判兵部事三世諱光修明宗朝兵部尙書見麗史四世諱湜高麗明宗二十年庚戌五月文科翰林學士僕射御史大夫西京留守高宗朝樞密院副使尙書省見麗史六世諱翼龍平章事崇祿大夫門下侍中壁上三韓三重大匡封神光君後爲慶州故後孫通貫神光慶州七世諱德修通議大夫翰林修撰八世諱乙喜正順大夫行興海郡守禮曹參判九世諱元起正議大夫行禮曹參判十世諱善通訓大夫行長鬐縣監祖諱韡號怡齋明宗朝賜號大廳堂通仕郎訓導宣朝壬申玉山書院創建時道薦院長考諱景禧主簿以老陞折衝將軍妣令人昌靈成氏諱益壽之女丙子公生于慶州江東吾琴里第生有異質讀漠史至項羽書足以記姓名以己學萬人敵之言輒掩卷歎曰大丈夫氣愾當如此宣廟壬辰倭寇來釜上陸之慶蔚之間官民積屍丘山公義憤衝天內召集義士十餘名誓衆曰吾等雖海隅蒼生如此大亂豈敢坐視苟活不顧國家君父之急乎血書互約往賊陣直村等地憤鬪射擊連戰連勝一境賴以安業將馳向慶州至兄山助防御使權應銖攻賊破之是年六月從判官朴毅長合勢擊破蚊川賊五月二十五日又赴永川助復城之役義將鄭世雅精兵三百餘人會于永川六月五日從鄭三畏同十名會于蚊川癸巳九月二十五日進天將李訥率精兵百餘人向大丘行至永川與義將曺以咸合勢丁酉八月赴火旺城有同苦錄亂定後讓功於人始居興海庚寅十一月五日從于寐享年七十五配月城李氏軍資直長崇立之女生己卯卒己卯生三男遇亨道亨運亨孫七人聖采聖猷聖獻聖楷聖俊聖疇聖大曾孫十七人世蕃世周世宰世達世普世泰世億世博世澔世稙世球世琳世璜世瓘世璉世瑜世瑭玄孫二十三人翰宗翰國翰溟翰天翰升翰雄翰遠翰章翰彪翰八翰九翰龍翰鳳翰朝翰運翰迪翰彩翰鴻翰駿翰驥翰馹翰成翰維餘多不祿嗚呼國家大亂莫甚於龍蛇當時國祿之臣不守蒙恩忠義之重嚴而畏死以全其身往往鳥鼠竄而公以草野一民無責任所重而愛國之心熱血沸騰突入敵陣中擧鋒一揮兇酋莫敢前炳炳大節宜乎仁明之後裔恭白於匹者歟泰榮三致意兩爲銘銘曰歲在集徐倭寇禍極國家興亡危在一髮公乃誓衆血書以 約連戰連勝一境安業亂定歸無名無慾㤠㤠芳名歷年四百我銘其蹟刻之于石
檀紀四千三百二十五年
西紀一千九百九十二年
壬申年淸明節 皇甫 謹撰
慶州壬亂義士倡義 陳奉扈)`
공의 자는 윤보(胤甫)요 호는 청암(淸庵)이며 본관(本貫)은 신광(神光)이니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신광군(神光君) 익용(翼龍)의 후손(後孫)이다. 장기현감(長鬐縣監) 선(善)의 7대손이며 절충장군(折衝將軍) 경희(景禧)의 아들로 명종 21년(1566) 흥해에서 출생하였다.
선조(宣祖 25) 1592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경주성(慶州城)이 함락(陷落)되자 당시 경주 유림(儒林)의 추종(追從)을 받던 조부(祖父) 위(韡)가 향인(鄕人)에 앞장서서 창의(倡義)를 주창했다. 이에 공은 조부(祖父)의 명(命)을 받들어 의병(義兵)을 모았다.
선조 25년 6월 정인헌(鄭仁獻), 정삼계(鄭三戒), 이대립(李大立), 이대임(李大任) 등과 함께 문천회맹(蚊川會盟)에 參加하여 서사보국(誓死報國)할 것을 다짐하였다. 경주성(慶州城) 수복전(收復戰)에 참전(參戰)하여 많은 공(功)을 세웠다.
선조 29년 3월 대구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가 회맹(會盟)을 맺었으며, 선조 30년 7월에는 창녕(昌寧) 화왕산(火旺山)에 있는 곽재우장군(郭再祐將軍) 진영(陣營)으로 달려가 여러 의병장(義兵將)과 함께 회맹(會盟)에 참가했다.
이러한 공(功)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除授) 되었다.
참고문헌 경주읍지, 임진항쟁사, 용사세강록, 인심재실기 경주임난의사창이록
參考文獻 慶州邑誌, 壬辰抗爭史, 龍蛇世講錄, 忍心齋實紀 慶州壬亂義士倡義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