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翰林學士驪陽陳公梅湖神道碑銘幷序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한문학(漢文學)의 황금기(黃金期)를 이루니 한토(漢土)의 거장(巨匠)들을 능가(凌駕)하여 명문대가(名門大家)들이 속출(續出)하여 여송시대(麗宋時代) 시문(詩文)은 그 우열(優劣)를 분변(分辨)하기 어려웠다. 그 중에도 신종(神宗)대부터 고종(高宗)대에 이르기까지 시문으로 명성을 떨친 한림학사(翰林學士) 매호(梅湖) 진화공(陳澕公)은 역대 시평(詩評)에서 모두 극찬(極讚)했지만 그 가운데 조선(朝鮮) 정조(正祖)시 대제학(大提學) 황경원(黃景源)은 공의 시문(詩文)이 웅준청려(雄俊淸麗)하여 이규보(李奎報)가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고 當代 漢學者 임창순(任昌淳)도 진화공(陳澕公)의 시격(詩格)이 이규보(李奎報)보다 앞선다고 평하였으니 이로써 진공은 여조(麗朝) 제일 시인이라고 극친(極讚)할 만하다. 공의 본관(本貫)은 여양(驪陽) 현 홍성(洪城)으로 고려(高麗) 17대 인종(仁宗)시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과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고 여양군(驪陽君)에 봉(封)되신 시조 휘 총후공(諱 寵厚公)의 증손이시다. 의종(毅宗) 24년 경인 1170년에 정중부(鄭仲夫) 일파의 무신이 난을 일으켜 함부로 문신을 살해할 때에 여양군(驪陽君) 아드님 참지정사(參知政事) 금좌광록대부 판병부사(金紫光祿大夫 判兵部事) 휘 준공(諱 俊公)은 천성이 온후인자(溫厚仁慈)하여 많은 문신(文臣)들이 생명을 보전(保全)해 주니 當世에 공을 칭송하여 음덕(陰德)이 저러하니 후손들이 반드시 창성(昌盛)하리라 한바 과연 탁월한 人才들이 속출하여 삼한갑족(三韓甲族)의 기틀을 닦았으며 밀양 학강사(密陽 鶴岡祠)에 배향되시다. 준공(俊公)의 다섯 아드님 중 매호공(梅湖公)은 그 둘째 아드님 병부상서(兵部尙書) 휘 광수(諱 光脩公)의 아드님이시다. 한림학사(翰林學士) 진공(陳公)의 휘(諱)는 화(澕)요 字는 大景이며 아호(雅號)는 매호(梅湖)인데 생졸년은 미상(未詳)이다. 유시(幼時)부터 시제(詩才)가 뛰어나고 자람에 따라 시가(詩歌)에 탁월(卓越)하여 청려고고지풍(淸麗孤高之風)이라는 평판(評判)을 받으시다.
명종(明宗)이 군신에게 송나라 송적(宋迪)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보이며 시를 짓게 하니 공이 젊은 나이로 장편의 고시(古詩)를 지어 올렸는데 그 시품(詩品)이 호장(豪壯)하여 칠언절구 8편을 지어 올린 이인로(李仁老)와 함께 절창(絶唱)이라 칭송(稱頌)을 받으시다. 신종(庚申)3년 1200년 사마시(司馬試)에 괴방(魁榜)을 하고 계해(癸亥) 1203년 문과(文科)에 탐화랑(探花郎)으로 급제하여 당시 신진(新進)으로는 극선(極選)이라는 칭송을 받으시다. 희종(熙宗)5년 기사(己巳) 1209년에는 국자감의 학정(學正)이 되고 이어 강종(康宗)원년 임신(壬申) 1212년에는 만선만중(萬選萬中)으로 뽑히는 글을 고르는 청전선(靑錢選)에 들어 손득지(孫得之) 이윤보(李允甫) 등과 함께 문명(文名)을 떨치고 그들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짓는 詩文인 관각문자(館閣文字)를 정돈(整頓)하여 한림원직원(翰林院直院)으로 특선(特選)하시다. 이듬해인 강종(康宗) 2년 계유(癸酉) 1213년에 충간(忠諫)으로 인하여 면관(免官)되어 한원(翰苑)으로 돌아와 문필(文筆)로 지내시다 고종(高宗) 2년 乙亥 1215년에는 왕이 한림승지(翰林承旨) 금의(琴儀)로 하여금 관각제공(館閣諸公)의 시(詩) 40여편을 고열(考閱)하게 한 바 문순공(文順公)을 첫째로 공을 버금으로 뽑았으나 늘 시(詩)를 겨룸에 백중(伯仲)을 가릴 수 없었음은 당나라 시인 심전기(沈佺期)와 송지문(宋之問)에 대비(對比)할 만하다. 이로써 당시 작시(作詩)에 있어 진이격(陳李格)을 본받음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조정(朝廷)의 고문대책(高文大冊)은 모두 공의 수중(手中)에서 이루어졌고 서장관(書狀官)으로 金나라에 다녀오자 옥당(玉堂)에 선임(選任)되어 지제고(知制誥)를 겸하고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정언(正言)을 거쳐 보궐(補闕)과 우사간(右司諫)을 역임하고 말년에는 지공주사(知公州事)로 출임(出任)하여 재임 중에 서세(逝世)하시다. 공의 묘소는 용인군 남사면 원암리 원암골 뒷산 자좌(子坐)에 모셨는데 후에 실전(失傳)되었다가 조선 철종원년(哲宗元年) 己酉 1849년에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다시 봉축(封築)하였다가 73년이 지난 신유(辛酉) 1921년에 23세손 평호(平鎬)가 석물(石物)과 묘표(墓表)를 세워 묘소를 단장하고 1978년 종중(宗中)에서 묘비(墓碑)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공의 묘소는 용인시 향토유적(鄕土遺蹟)으로 지정되어 있다. 공의 아드님 휘 영헌(諱 令獻)도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고 손자로는 시중 휘 석(侍中 諱 錫) 휘 경(諱 鏡) 추밀부사 휘 번(樞密副使 諱 蕃) 전의소감 휘 보(典醫少監 諱 普) 등 네 분이다. 공의 문명(文名)은 고려 고종(高宗) 때 한림제휴(翰林諸儒)가 지은 한림별곡(翰林別曲) 수장(首章)에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이라 할 만큼 아무리 경운(硬韻)이라도 선배인 이규보와 촌보(寸步)도 양보없이 운필(運筆)이 질풍(疾風)처럼 달리어 쌍벽(雙璧)을 이루었다. 공의 작품 중 절구(絶句)의 극치인 야보(野步)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에 소매령락유기수(小梅零落柳僛垂) 한답청람보보지(閑踏靑嵐步步遅) 어점패문인어소(漁店閉門人語少) 일강춘우벽사사(一江春雨碧絲絲) ‘매화는 이미 지고 버들가지 늘어져 춤추는데 한가로이 봄기운 밟으며 걸음 더디어라 물가 주막집은 문 닫혀 인기척이 없고 강 가득 내리는 보슬비 푸른 실오리일레라’ 하였으니 이 시는 시 속에 그림이 보인다고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다. 공은 또 백성을 위하고 걱정하며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는 분이셨으니 칠언고시(七言古詩) 도원가(桃原歌)에서 거민산업일영락(居民産業日零落) 현리색미장고문(縣吏索米將敲門) 단무외사래상핍(但無外事來相逼) 산촌처처개도원(山村處處皆桃源) ‘백성들 생활이 날로 피폐해지는데 고을 아전들은 세미 받으러 늘 문을 두드리네. 이리 핍박하는 그 일만 없으면 산촌 가는 곳마다 모두 무릉도원이 되리라’고 하였으며, 金나라 서장관(書狀官)으로 가서 지은 봉사입금(奉使入金) 시에서는 서화이소색(西華已蕭索) 북채상혼몽(北寨尙昏蒙) 좌대문명단(坐待文明旦) 천동일욕홍(天東日欲紅) ‘남송은 이미 쓸쓸해졌고 북쪽 금나라는 아직도 혼몽한데 앉아서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니 하늘 동쪽 해가 붉게 솟아오르려 하네’라고 한 시로 이미 약 팔백 년 전에 부상(浮上)하는 아국(我國)의 미래를 예견(豫見)한 시로 역대 문인(文人)들이 크게 칭송(稱頌)한 명작이다. 일찍이 이규보(李奎報)는 매호공(梅湖公)의 장편(長篇)을 극찬(極讚)하여 사어(辭語)가 분방(奔放)하여 실로 하늘밖에 노닌다 했고 려말(麗末)의 이색(李穡)은 해동부자(海東夫子)라 극찬했으며 조선 숙종(肅宗) 때의 우의정 김석주(金錫冑) 대제학 남용익(南龍翼)은 공의 시를 비유하여 화개서설(花開瑞雪) 채현상운(彩絢祥雲)과 같다고 찬탄(讚嘆)했고 정조(正祖) 때 신위(申緯)는 동인논시(東人論詩)에서 공과 이규보의 명성이 나란함을 읊었다. 역대 문인(文人)과 고관(高官)들이 공을 이처럼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 진공(陳公)의 탁월한 문학적 천질(天質)과 업적(業績)은 우리 문학사(文學史)에 길이 빛날 것이다.
이에 銘하기를
麗朝 五百年 第一詩仙
上將軍驪陽君 參知政事判兵部事
兩代의 偉業을 이어
큰 봉우리 하나 또 이룩하시니
三韓甲族 기틀이 鐵石이 되었네
瀟湘八景 長詩로
群臣諸公 앞지르셨고
靑錢選에 으뜸으로
高文大冊 다 지으시고
李正言에 陳翰林이라
雙韻走筆 雙璧 되셨네
一江春雨碧絲絲라
詩中有畵가 的實하고
天東日欲紅 미리보시니
吾國 興隆 祖國愛라
歲歲年年 頌辭 말씀
代代孫孫 꽃피어
日月과 함께 永遠하라
檀紀 4338年(2005年) 乙酉 12月 日
前 國會副議長 文敎部長官 法學博士 閔寬植 謹撰
咸陽後人 呂元九 謹書
後孫 文學博士 陳泰夏 謹監修
檀紀 4339年(2006年) 丙戌 月 日
驪陽陳氏大宗會 梅湖公神道碑 建立委員會 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