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일일한자

珥 (귀고리 : 이)

작성자昊山|작성시간17.10.27|조회수688 목록 댓글 0

珥 (귀고리 : 이)



▶이 〈이〉자는 구슬 옥(玉)변에서 6획을 찾으면 눈에 띈다.

이 글자가 지니고 있는 뜻은? 「귀고리」이다.


구슬 옥(玉)자와 귀 이(耳)자로 결합된 글자이다.


즉 「옥(玉)으로 만든 물건을 귀(耳)에 치장하는 것이 〈귀고리〉라는 뜻이다.」

귀고리라 함은 귓불에 붙이는 장식품이다. 재료 또한 다양하다.

주로 금,은,보석 등으로 만들며 여자들이 많이 치장하는 장식품의 일종이다.


귀고리는 귀+고리(ring)의 합성어인 귀엣고리의 준말이다.

목걸이와 짝을 맞추어 귀걸이라는 말도 있지만, 목걸이는 글자 그대로 목에 거는 것이고 귀고리는 귀에 거는 것이 아니라 귀에 다는 고리이다. 즉, 귀고리의 '고리'는 '걸다'에서 파생된 '걸이'가 아니라 명사인 '고리(環)'이다.


귀고리는 이미 상고시대부터 장신구로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예로 신라 눌지왕때 충신인 박제상(朴堤上)이 쓴 〈징심록추기〉에 보면 「耳有烏金具聞天音(이유오금구문천음)」라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글이 「오금(烏金)」이다. 이 〈오금〉은 순금과 구리의 합금으로 비율은 100대 1내지 10의 비율로 섞는다. 이 글귀로 보아 귀고리가 일찍이 사용되었음을 짐작게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귀고리를 하는 이유를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오금을 통해 하늘의 맑은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하지만 지금은 미(美)의 추구, 조화로움, 건강유지, 치장, 자기만의 특징 등 다양한 조건과 여건을 구실삼아 남 · 여 구분 없이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몇몇 문헌을 보면 귀고리를 한 이유는 노예의 징표, 혼인의 징표 등등 그 설 또한 분분하다.


한국에서는 원래 고대부터 남녀 모두 일반적으로 착용했던 장신구였다.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삼국시대 귀고리 중 몇몇은 사이즈가 상당히 크고 아름다워 '귀에 구멍을 얼마나 크게 뚫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특히 신라시대 태환이식은 너무 커서 한때는 끈을 걸고 걸었다고 여겼지만, 분황사 모전탑에 공양된 은제 귀마개나 황룡사지 출토 은제 귀마개를 고려하면 태환이식은 착장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선덕여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분황사 출토 은제 귀마개는 그 아름다움도 놀랍지만, 선덕여왕이 직접 이런 귀마개를 착용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귀고리들은 금관이나 발찌, 팔찌, 허리띠 등에도 드리개 장식으로 쓰이기도 했다. 특히 금관이나 허리띠에 달리는 수식의 경우 귀고리로 쓰일때 부터 수식 장식이 화려하고 더 긴 경향이 있다.


그런고로 조선 초기 이전의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고증을 제대로 맞추려면,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귀고리, 팔찌, 목걸이, 반지 등을, 특히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고위 귀족이나 왕족 같으면 황금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도록 해야 한다.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귀고리는 남녀노소 막론하고 흔히 달고 다니던 엑세사리였다. 이때는 여성 한정으로 귀에 걸치는, 그것도 금도 옥도 아닌 노리개 같은 술을 달아놓은 귀고리가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지 않고 사람의 목을 잘라 전공을 부풀리려던 장수들이 이 수급의 귀에는 귀고리 자국이 있으므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속임수를 들켰다.

(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4일 신유 여섯 번째기사를 참조.)


「정글고」에도 이 이야기를 다룬 바 있다. 또한,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한 역관이 중국에서 겪은 실화 중 하나로 이런 것이 있다.

 '대단히 콧대가 높아 조선인을 상대하지 않는 기생'에게 중국인이라 속이고 접근했는데, 그가 워낙 중국어를 중국인처럼 잘해 처음에는 속았던 그 기생이 그의 귀를 보고는 귀고리 자국이 있으니 당신은 조선인이라고 알아차렸고, 그 역관은 부랴부랴 "내가 외아들이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여장을 시키면서 귀고리를 달았던 자국이다"라고 변명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 중기부터 볼 수 없게 된 이유는 유교적인 문제로 젊은 남자들이 귀고리를 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5년 9월 28일 기사를 참조)


명나라가 망하고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면서 유교와 소박함을 강조했던 조선의 이념이 시너지 효과를 내어, 장신구를 박멸하고 고려까지의 화려함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사실 조선 자체가 중국식 제도를 제대로 들이며 과거를 청산(...)하고 재탄생했다는 느낌으로 이전 왕조들과 다른 점이 많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