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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리 말

누구나 문법 나치(Grammar Nazi)가 되어야 한다

작성자최상호|작성시간20.09.26|조회수284 목록 댓글 0

안녕하세요.

 

문법 나치(Grammar Nazi)’를 우리말로 바꾸면 문법교정이라 할만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이런 사람이 되어 본, 혹은 이런 사람한테 당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굳이 문법이 아니더라도 맞춤법이 틀린 표기를 보면 빨간색으로 고쳐 주고 싶거든요.

반대로 사소한 맞춤법을 틀려 지적을 받으면 얼굴이 붉어지기도 합니다.

 

말과 글에 관련된 작업을 하다보니

식당에 가서도 본의 아니게 문법 나치 혹은 맞춤법 나치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찌게를 보면 찌개로 고쳐 주고 싶고,

곰탕을 영문으로 쓴답시고 ‘Bear Soup’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보면 주인장을 혼내주고 싶거든요.

그런데 어느 허름한 식당의 비빔밥과 덮밥 표기를 보았을 때

정말로 주인장을 존경의 마음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4년 옌볜 조선족 자치주 옌지시의 한 음식점,

점심때가 되어 현지 사람들의 말대로 때를 쓰러한 조선족 식당에 들어갔는데

벽에 무심한 듯 쓰여 있는 글씨를 한참이나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비빈밥이라니…….

비빔밥이 맞는데 하는 생각으로 쳐다보며 밥을 비벼 먹는데

보면 볼수록, 그리고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오히려 비빈밥이 맞다 싶었습니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들어 오고 배워 오다 보니 놓치고 있었을 뿐

사전에 올라 있는 비빔밥보다 식당 주인이 흘려 써 놓은 비빈밥이 맞다 싶더라구요.

  

비빔밥 비빔밥에 대한 얘기는 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원조에 대한 논쟁으로 끝이 납니다.

비빔밥이 문헌에 골동반(骨董飯)’으로 나타나니

중국의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기원론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음복설’, ‘동학혁명설’, ‘궁중음식설’, ‘묵은 음식설’, ‘농번기 음식설

등까지 이어지죠.

한편 어느 지방의 어떤 식당이 처음 비빔밥을 팔기 시작했는가에 대한 논쟁은

원조를 넘어 진짜 원조’, ‘원조 중의 원조’, ‘이 집만 원조라는 말까지 억지로 지어냅니다.

그 탓에 음식의 기원과 이름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 버렸습니다.

  

이름이 먼저인가, 음식이 먼저인가의 문제는 따져 볼 필요도 없이 답은 명확합니다.

음식이 먼저지요.

우리의 밥상에서 비비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밥상 위에 밥과 찌개, 반찬, 젓갈과 각종 장류가 있습니다.

넓고 오목한 숟가락이 있으니 찌개나 장을 떠서 밥에 얹든 비비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젓가락이 있으니 먹고 싶은 반찬과 젓갈을 집어

역시 밥에 얹어 먹어도 되고 비벼 먹어도 됩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최초로 했는지 따질 필요도 없이

아주 오래 전에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비벼 먹었을 것입니다

  

언제 누가 붙인 이름인지는 몰라도 비빔밥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꼼꼼히 따져 봅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간과하기 쉽지만 비빔밥은 우리말의 어법에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 표기형은 부븸밥’입니.

비비다15세기 문헌에는 비븨다로 나타나고 오늘날 부비다란 말도 쓰이니

부븸밥은 표기의 문제일 뿐이므로 부븸밥에 쓰인 부븨다비비다로 봐도 별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비빔밥의 구성에 있습니다.

비빔밥비빔으로 나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요.

에 문제가 없으니 비빔에 문제가 있겠지요.

비비다이 모여 하나의 말로 만들어지려면

비빈 밥이나 비빌 밥혹은 비비는 밥이 자연스럽고, 우리는 비빔밥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를 두고 비빔이란 말이 먼저 있다가 과 결합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음식 중에 계란찜찐 계란이 엄연히 다르고,

찐 계란찜계란이라고 하는 것이 영 어색한 것을 생각해 봐도 비빔밥은 이상합니다.

식당 주인은 이런 생각 때문에 비빈밥이라고 써 놓은 것이었을까요?

비빈밥을 빨리 발음하면 [비빔밥]이 되니 발음도 별문제가 없습니다.

할아버지 대에 고국 땅을 떠날 때 함께 간 말이 그 사이 많이 변하기도 하고 잊히기도 했을 텐데

이렇게 섬세하게 많은 것들을 따져 보았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2005년 여름에는 전라북도 고창의 한 음식점에서,

국어 선생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표기가 차림표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저육덧밥이 그것입니.

저육옆에 친절하게 한자로 (저육)’이라고까지 써 놓았으니

흔히 제육이라고 쓰는 것의 본래 표기를 아는 유식한 주인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덮밥이 아닌 덧밥이라니…….

  

비빔밥 덮밥은 우리의 전통적인 음식은 아닌 듯합니다.

요리를 소개하는 여러 책을 봐도 덮밥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거든요.

그러나 덮밥이란 말이 없었다는 것이지 덮밥과 비슷한 방식으로 밥을 먹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밥과 반찬으로 구성된 우리의 음식 문화니 밥 위에 반찬을 얹으면 덮밥이 되니까요.

일본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덮밥도 비빔밥처럼 비벼 먹지만 비비기 전에는 덮밥입니다.

그릇이 없거나 설거지가 귀찮으면 밥 한 그릇에 반찬을 대충 얹어서 먹을 터이니

덮밥과 비슷한 형태의 밥이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역시 덮밥이란 말입니다. 당연히 덮다이 합쳐진 말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덮밥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비빈밥도 그래야 합니다.

나아가 끓는 물끓물이어야 하고, ‘먹는 물먹물이어야 합니다.

우리말에서는 덮다’, ‘끓다’, ‘먹다등과 같이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

’, ‘등과 같이 사물을 뜻하는 말과 직접적으로 결합되지 않습니다.

끓는 물’, ‘먹는 물처럼 중간에 연결시켜 주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덮밥에는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주인장에게도 덮밥은 영 마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말의 일반적인 어법에 맞지 않으니까요.

아마 주인은 고민 끝에 받침 하나를 바꾸어 덧밥으로 써 보았을 겁니다.

덧버선’, ‘덧문’, ‘덧씌우다등에 쓰이니

덮다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고 어법에도 잘 맞잖아요.

덧밥’을 빨리 발음하면 [덥빱]이니 덮밥의 발음과 완전히 일치됩니다.

주인장은 만족해하며 자랑스럽게 덧밥이라 써서 메뉴판에 올린 것입니다.

사전에 덧밥먹을 만큼 먹은 뒤에 더 먹는 밥이라 풀이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쓰지 않는 말이니 문제될 것은 없었으리라

  

맞춤법 나치의 관점에서 보면 비빈밥덧밥은 틀린 표기입니다.

반대로 어법 나치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맞는 표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을 규범으로 정해야 한다는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맞춤법이든 어법이든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라 그것을 쓰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니까요.

맞춤법과 어법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필요하고,

그 속에서 좀 더 고민하고 자유롭게 쓰려는 시도도 필요하잖아요.

물론 진짜 나치가 되어 원활한 소통을 방해한다거나

너무도 자유롭고도 창조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긴 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말123^*^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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