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행 전철에서/김기택
한낮에 국수 가는 전철은 한산하다.
노인은 왜소한 몸으로 7인석 좌석을 다 차지하고 앉아
신문을 쌓아놓고 보고 있다.
한쪽 다리를 좌석 위에 턱 얹어놓고
등을 옆으로 기대고 한껏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편할수록 더 결리는 허리.
최선을 다해 자세를 고쳐 앉아보지만
삶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허리와 어꺠는 10초 동안 편안한 척하다가 다시 못 마땅해진다.
하루 종일 타도 공짜지만 다 탈 수 없는 전동차들.
텅텅 비어 남아돌아도 다 앉을 수 없는 좌석들.
아무리 많이 버려져 있어도 다 읽을 수 없는 신문들.
에어컨이 질 좋은 찬바람을 공짜로 퍼주어도
짜증만 나는 쾌적함.
물결치는 숲과 강이 보는 눈도 없이 차창 가득 지나가도
지긋지긋하기만 한 아름다움.
보던 신문을 확 던져버리고 의욕적으로 새 신문을 펼쳐든다.
먼저 본 신문에서 다 본 기사들.
그놈에 그 사건에 그 인생...... 사이에
반라의 모델 사진이 있다!
끊어질 것 같은 수영복 안에서 무언가가 계속 터지고 있다.
그의 허리가 민첩하게 진지해지고 성실해진다.
너무 정성껏 여자를 쓰다듬어 눈알에 지문이 생길 지경이다.
다시 허리가 아파오자 그것도 금방 시들해진다.
거의 드러눕듯이 앉아본다.
여기저기 쏘아보는 눈알들.
한떄는 눈치 보는 것도 스릴이 있었지만
꽉 찬 지하철에서 여자들 틈에 끼어
간이 오그라들도록 엉큼하고 도전적인 짓도 해봤지만
그런 재미조차 싫증난 지 오래다.
처치할 곳이 없어 전철에다 잔뜩 부려놓은 시간.
전동차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느려터지기만 한 시간.
아까 팔당역이었는데 어째서 아직도 팔당역이란 말인가.
전철이 달리면 잠깐 흐르는 듯하다가 멈추면 함께 정지하는 시간.
죽어라 밀쳐도 안 가는 시간.
고집스럽게 한자리에만 앉아 늙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 시간.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 시인선 417 / 20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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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길 산책 / 김기택
빗방울 무늬가 무수히 찍혀 있는 산길을
느릿느릿 올라갔다.
물빗자루가 한나절 깨끗이 쓸어 놓은 길
발자국으로 흐트러질세라
조심조심 디뎌 걸었다.
그래도 발바닥 밑에서는
빗방울 무늬들 부서지는 소리가
나직하게 새어나왔다.
빗물을 양껏 저장한 나무들이
기둥마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 그친 뒤
더 푸르러지고 무성해진 잎사귀들 속에서
젖은 새울음소리가
새로 돋아나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빗방울길
돌아보니
눈길처럼 발자국이 따라오고 있었다
『좋은시 2003 』,삶과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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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 입은 여자/김기택
힘차게 밀고 나온 브래지어 때문에
그녀는 가슴에 알 두 개를 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간혹 팔짱을 끼고 있으면
흰 팔을 가진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처럼 은은한 빛이
그녀의 가슴 주위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알에서 태어나 나라를 일으켰다는 고주몽이나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사는 이 나라에서는
복잡한 거리에서 대낮에 이런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드문 일도 아니다.
길을 가다 멈춘 남자들은 갑자기 동그래진 눈으로
집요하고 탐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만졌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그 눈빛들을 햇빛처럼 쬐었다.
타조알처럼 두껍고 단단한 껍질 속에서
겁 많고 부드러운 알들은 그녀의 숨소리를 엿들으며
마음껏 두근거리고 있었다.
가슴에서 떨어질 것 같은 알의 무게를 지탱하기에는
그녀의 허리가 너무 가늘어 보였지만
곧바로 넓은 엉덩이가 허리를 넉넉하게 떠받쳤다.
산적처럼 우람한 남자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기를 안고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 『좋은시 2003 』,삶과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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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는 일 /김기택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위암이라는 어른다운 병으로,그 아이는 어른같은 죽음을 죽었다
. 막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마침 그 아이는 안경과 넥타이와 회초리만 남은 이름, 선
생님이 되어 있었다. 기억된 아이들이 낡고 큰 옷을 걸치고, 누른 코를 흘리며, 부스
럼이 난 대가리를 긁으며 기억된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가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일까,아는 사람? 많은 배고픈 눈알들이 데룩데룩 거렸으나 단 하
나의 입도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지만 그 중에서도 가
장 힘든 일은 '밥 먹는 일'이란다. 몇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 아이가 조심스
럽게 침묵을 건드리며 웃었다. 그 옆에 있던 아이가 웃어도 되는 것인 줄 알자 같이
웃었다. 그 뒤에서 몰래 장난질하던 두 아이가 웃어야 되는 것인 줄 알고 혼나기 전에
얼른 웃었다. 그 아이의 죽은 기억을 무너뜨리며 모두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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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말들을 /김기택
돌 지난 딸아이가
요즘 열심히 말놀이 중이다.
나는 귀에 달린 많은 손가락으로
그 연한 말을 만져본다.
모음이 풍부한
자음이 조금만 섞여도 기우뚱거리는
말랑말랑한 말들을.
어린 발음으로
딸아이는 자꾸 무어라 묻는다.
발음이 너무 설익어 잘 알아들 수는 없지만
억양의 음악이 어찌나 탄력있고 흥겨운지
듣도 또 들으며
말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비밀스러운 문법을
새로이 익힌다.
딸아이와 나의 대화는 막힘이 없다.
말들은 아무런 뜻이 없어도
저 혼자 즐거워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뛰어논다.
우리는 강아지나 새처럼
하루종일 짖고 지저귀기만 한다.
짖음과 지저귐만으로도
너무 할말이 많아 해 지는 줄 모르면서.
-『사무원』 창비, 1999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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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소』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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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소』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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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원/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大藏經(손익관리대장경)과 資金收支心經(자금수지심경)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장좌부립)’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시집 ‘사무원’-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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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김기택
그는 언제나 그 책상 그 의자에 붙어 있다.
등을 잔뜩 구부리고 얼굴을 책상에 박고 있다.
책상 위엔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두 손은 헤엄치듯 서류 사이를 돌아다닌다.
하루종일 쓰고 정리하고 계산기를 두드린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거북등 같은 옆구리에서
천천히 손 하나가 나와 수화기를 잡는다.
이어 억양과 액센트를 죽인 목소리가 나온다
수화기를 놓은 손이 다시 거북등 속으로 들어간다.
때때로 그의 굽은 등만큼 배가 나온 상사가 온다.
지나가다 멈춰서서 갸웃거리며 무언가 묻는다.
등에서 작은 목 하나가 올라와 고개를 가로젓는다.
갑자기 배 나온 상사의 목소리가 커진다.
목은 얼른 등 속으로 들어가 나올 줄 모르고
굽어진 등만 더 굽어져 자꾸 굽실거린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모래밭에서 한참 거북등을 굴려보다 싫증난 맹수처럼
배 나온 상사는 어슬렁어슬렁 제 정글로 돌아간다.
겨울이 지나고 창 안 가득 햇살이 들이치는 봄날,
한 젊은이가 사무실에 나타난다. 구둣소리 힘차다.
그의 옆으로 와 멈추더니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다.
그는 기척이 없다.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붙어 있다.
젊은이가 더 크게 소리치며 굽은 등을 툭툭 친다.
먼지가 일어나고 등이 조금 부서진다.
젊은이는 세게 그의 몸을 흔들어댄다.
조그만 목이 흔들리다가 먼저 바닥에 굴러 떨어진다.
이어 어깨 한쪽이 온통 부서져내린다. 사람들이 몰려온다.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버린 그의 몸을 들어낸다.
재빠르게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하고 새 의자를 갖다놓는다.
( 시집 ‘사무원’-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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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의자/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잠시 후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번 넘어졌지만
한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오늘은 네 위에 얹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 시집 ‘사무원’-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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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얼굴 /김기택
이윽고 슬픔은 그의 얼굴을 다 차지했다.
수염이 자라는 속도로 차오르던 슬픔이
어느새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었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덮수룩하게 온몸을 덮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뜨거운 눈물에 눈알이 메추리알처럼 익을 시간이
그동안 내뱉은 모든 발음이 울음으로 한꺼번에 뭉개질 시간이
팔자걸음처럼 한적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줌밖에 안되는 웃음을 당장 패대기칠 수도 있었지만
슬픔은 그가 더 크게 웃도록 내버려두었다.
조잘대는 주둥이 깊숙이 주먹 같은 울음을 처박을 수도 있었지만
침들이 길길이 뛰는 말소리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
웃음과 수다에 맞추어 목과 이마의 핏줄이 굵어질 때마다
슬픔이 지나가는 자리가 점점 붉어지는 게 보였다.
한번 웃다가 일그러진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고
고음으로 갈 때마다 웃음소리는 자꾸 울음소리가 되려고 떨고 있었다.
슬픔이 얼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다지 우습지 않은 농담에도 모두가 배를 움켜지고 웃고 있었다.
웃음과 수다가 갑자기 그칠까봐 모두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세계의 문학 2005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