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시감상방

2098. 이기철의 [부석사 / 서정의 유형지에서]

작성자최상호|작성시간08.08.26|조회수62 목록 댓글 0

부석사
 -이기철

오름길로 한층 완강해진 길들이
마음의 극치를 내보이고 있다
길들은 절정에 닿으면 제 몸을 버린다
팽창한 극한의 마음을 풀어내는
지상에서 가장 먼 풍경소리
어제는 제 어제와 헤어지는 일에 열중하고
내일은 오늘의 숙성한 얼굴을 만지며
황혼의 이불을 펴고 있다
화첩을 열면 책장 속으로 사라진 고대가
아직은 소년으로 되살아온다
어떤 남쪽으로도 범람하지 않던 저녁놀이
으깨어진 수박 속처럼 붉다
마을의 아궁이들도 뜨거우리라
저 닳은 문턱을 넘다 보면
내 발이 평지만을 골라 다녔음을 부끄러워한다
어떤 서원이 바위를 뜨게 했을까
발 아래엔 일년 치의 단풍
모든 불가능에 복용하는 비의의 탕약


서정의 유형지에서
-이기철

벼랑에 도라지꽃 피고 서정시가 씌어진다는 것이
아직은 위안이다
아무도 노래하지 않는 땅에서 혼자 노래 부르는 사람이여
목이 아픈가
사람의 어깨에 싸라기 같은 햇살 내리고
공장의 굴뚝에도 달빛은 희다
대리석은 지층의 꿈에 젖고
강물은 나보다 먼저 내일에 닿는다
나는 삶에 대해 불온한 비유를 빌려오고 싶지 않다
비탄을 땅에 심어 희망이 열리기를 바라는 것은
고통보다는 달콤한 경험
햇빛으로 한 벌 옷을 해 입은 나무 곁에서
흙의 가장 신선한 부분을 꽃으로 옮기는 것은
나무의 가장 큰 희망
누가 달빛 잉크로 편지를 쓰느냐
아직도 내가 시에 쓸 말들이
이 땅 어디엔가 묻혀 있다는 생각이 나의 기쁨이다
나는 서정의 유형지에 혼자 서서
복사나무의 분홍 힘을 빌려 시를 쓴다 

- 이기철 시집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서정시학, 2008

***********************************************************************************

시하늘 좋은 시에서 낯익은 이름 '부석사'를 발견하여 얼른 옮깁니다

이기철 시인의 시풍대로 쓰여진 다른 시편 하나를 덧붙여 시를 읽는 즐거움을 공유합니다

교직 초임에 주말마다 아이들과 싸리빗자루 들고

부석사 오르는 길을 쓸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소천 장터에서 부석사로 오르는 길섶에 코스모스 가꾸던 일이며

지금은 중년을 지나고 있을 그때 그 아이들-

먼 기억의 힘으로 아직 시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내가 시에 쓸 말 들이 이 땅 어디엔가 묻혀 있겠지요

서늘한 아침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