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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감상방

2698. 노창재의 [백수론]

작성자최상호|작성시간10.02.07|조회수87 목록 댓글 0

 

 

 

  

 백수론(論)

 - 노창재


호랑이가 앞이마에 ‘왕(王)’자를 새기고도

바람에 수염을 맡기며 홀로 외롭듯

감춘 이빨. 감춘 발톱과 같이

무시로 드러내지 않는 법

뒤를 어슬렁거리되 기품을 잃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골짜기를 포효하되 주변을 다치지 않게 하며

먼발치에서 바라보아도 항상 위엄과 기백이 서려

배경을 따뜻하게 하는 풍경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고프고 주린 날이 오래오래 머물더라도

맑고 형형한 눈빛으로 견뎌 낼 줄 알아야 한다

눈발 휘몰아치는 매서운 들판에서도 한 겹 더

옷을 걸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선의의 경쟁을 피하지 않고 다수의 안녕한 질서 속으로

언제나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정의의 함몰, 위선과 병폐 횡횡한 골목을 마주치게 되면

그때는 가차 없이

이빨과 발톱을 세워 분연한 일전을 불사하여야 한다

 

다만, 죽어서도

가죽을 남겨서는 아니 될 것이니.


- 3인 공동시집 <삼색/ 2009, 시와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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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수의 제왕 호랑이에 빗대어 하는 일 없는 백수의 삶을 규정하는 시로 읽혀지는데,

사실 내용은 호연지기와 당당한 백수로서의 자존이 고스란히 담긴 지침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맹탕 날건달은 되지 말라며 ‘정의의 함몰, 위선과 병폐 횡횡한 골목을 마주치게 되면

그때는 가차 없이 이빨과 발톱을 세워 분연한 일전을 불사하여야 한다.’고 일갈한다.

 

 이와는 좀 다른 내용으로 백수라고 해서 다 같은 백수는 아니다.

그 백수에도 카스트처럼 등급이 있고 질서가 있다.

먼저 1등급 백수로 화백(華白)이란 게 있다.

백수이긴 해도 골프, 여행은 물론이고 애인과의 밀회도 즐기는 그야말로 ‘화려한 백수’다.

다음으로 2등급인 반백(半白)이 있는데,

이는 골프, 여행이나  애인과의 밀회 중 어느 한 쪽만 가능한 백수를 일컫는다.

3등급 불백(佛白)은 주로 집에서 칩거 하면서 누가 불러주면 나가서 밥을 같이 먹거나,

어쩌다 별 영양가 없는 모임에나 나가야 술도 마시는 ‘불쌍한 백수’를 말한다.

4등급인 가백(家白)은 주로 집에만 칩거하면서 삼시 세끼 다 찾아먹고 손자들이나 봐 주다가

마누라 외출할 때 집 잘 보라고 당부하면 "잘 다녀와요"라고 말하며 손 흔들어주는

가정에 충실한 백수다.

듣기로 5등급 등외품인 ‘마포불백’이란 것도 있다는데,

마누라도 포기한 정말 불쌍한 백수란다.

 

 이도저도 딱히 해당되진 않지만 조용헌 교수의 ‘방외지사(方外之士)’에 나오는 사람들은

시에서처럼 ‘맑고 형형한 눈빛으로’ 진정한 백수의 삶을 누리는 경우라 하겠다.

시골에서 고택을 지키며 사는 강기욱씨 등이 그러한데 

죽기 전에 마음 내키는 대로 제 '쪼대로' 사는 삶이 요즘은 자주 부러워진다. 

 

 - AC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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