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별의 노래
이 재 훈
흰 눈을 만나기 위해
폭염을 견디었는지도 모른다
먼 기억으로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
도시의 거리와 거리,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엉켜 태연히 입 맞추는 소리,
이 땅은 풀벌레 소리도 서러움이다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미술관으로 가서 꽃 가득한 정물화를 보다
지지 않는 꽃, 수없이 그리워하고 약속했던 꽃
나는 그림 속의 화려한 상징에만 골몰했다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시위대를 지나고 학교를 지나고
걸음을 멈추게 했던 대형전광판을 지난다
역사도 없고 분노도 없는 권태로운 시간을
흩날로 벼리는 젊은 어깨의 그림자
그림자들이 서로 만나 어둠을 만들고
어둠을 지키기 위해 네온사인이 하나 둘 켜진다
어제의 일이 까마득하다
하루 밤새 이마 위에 주름이 깊어 눈이 감기고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차가운 결정結晶
그 위에 금빛 새가 발자국을 찍고
푸드득 날아오른다
*** 선자選者의 평을 싣습니다.
이 시에서의 결별이란 시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역사적 자아와의
결별을 뜻한다. 그래서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시위대를 지나
고 학교를 지나고 걸음을 멈추게 했던 대형전광판을 그냥 지나는
것이다. 거대담론들이 죄 무너진 이 시대에 역사적 자아로서의 의미
가 무엇인가에 대해 시인은 지금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80년대까
지만 해도 시인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아주 행복하였다. 공격의 대
상, 야유의 대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대사회적인 발언
을 해본들 그것은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역사적 자아로서
의 역할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런 때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림 속의 화려한 상징"으로 자꾸만 빠지려 하는 시적 자아에 대
한 뼈아픈 반성이다. (현대시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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