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통 속의 가르침
-잡는 재미 놓아주는 즐거움-
“아닌데요, 메뚜기 안 잡았는데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의 이야기다. 그날은 학교(현재 남산초등학교) 앞 나락밭에
누렇게 익은 벼 이삭 사이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메뚜기들을 잔뜩 잡아들였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메뚜기는 별미 반찬 중 으뜸이었고,
가을 나락 밭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메뚜기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마침, 수업도 일찍 끝났겠다, 한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메뚜기들을 잡으러 뛰어다닌 나는
일단 잡은 놈들을 허리춤에 차고 있던 빈 수통(물통)에 집어넣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통도 꽉 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앞 못 보는 노인이 속도 들여다보이지 않는 수통 속 메뚜기를
감쪽같이 알아내자, 너무도 놀란 나머지 시치미를 뚝 떼어버리고 만 것이다.
“허, 이 녀석, 그럼 그 수통 안에 든 것은 메뚜기가 아니고 무엇인고?”
노인 역시 어림없다는 듯 맞받아치신다.
“너 아까 메뚜기 잡았다고 자랑하지 않았어?”
옆에서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넌지시 도경 할부지 편을 드시는 바람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 몇 마리나 잡았느냐?”
몇 마리? 확실치 않았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분명 열서너 마리까지 세었던 기억은 나는데 그다음부터는 가물가물했다.
“흠, 어디 보자…, 일흔여섯 마리나 들었구먼. 그래, 그 많은 메뚜기를 다 어디에 쓰려고?”
한나절 내내 들판을 누비며 벼메뚜기를 신나게 잡던 날이었다.
노인은 허리춤에 찬 수통 속을 환히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
"할부지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호기심에 찬 나는 노인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수통에서 메뚜기를 한 마리 한 마리 꺼내며 헤아려 보았다.
"하나, 둘, 셋…, 일흔넷, 일흔다섯. 어, 한 마리밖에 차이가 나지 않네요."
"예끼 이 녀석, 뚜껑 속도 봐야지!"
수통 뚜껑을 들여다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안에 작은 메뚜기 한 마리가 콕 처박혀 있었다. 노인의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오후 내내 애써 잡은 메뚜기들이 모두 달아나 버렸다.
"할부지 때문에 메뚜기들이 다 도망가 버렸어요."
입이 뿌루퉁해진 소년에게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얘야, 잡는 재미가 있다면 놓아주는 즐거움도 있는 거란다."
그분은 내게 잡는 재미와 놓아주는 즐거움에 관해 이야기해 주셨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거기엔 나눔의 참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잡는 재미)은 나눔(놓아주는 즐거움)을 통해 더 찬란한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교훈은 내 삶의 중심에 뿌리내려, 직장 생활에서도 이어졌다.
틈나면 각종 성금 모금과 물품 후원으로 소년소녀가장과 불우이웃돕기에 힘썼다.
물론 왼손이 하는 일 오른손이 모르게 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지키면서….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유창명 작성시간 26.06.1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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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선하 작성시간 26.06.11 귀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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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운겸 작성시간 26.06.1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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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연걸 작성시간 26.06.13 귀한 말씀 마음에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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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서형 감사합니다. 작성시간 26.06.14 수통 속에 메뚜기 숫자를 정확히 맞추시는 그분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도 어릴적 메뚜기 잡았던 기억이 많습니다.
애써 잡은 메뚜기를 놓아 주는 기쁨을 저도 깨닫게 되는것 같습니다.
나락(벼) 소리를 참 오랜만에 들으니 새롭습니다.